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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우트>, 존 패트릭 샌리

Ending Credit | 2009. 3. 12. 02:17 | Posted by 맥거핀.

(개인적으로는 한국판 포스터보다 이 외국판 포스터가 더 낫다.)




(스포일러)

난 생각이 많은 편이다. 생각이 많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의심이 많다는 것이다. 생각이 많은 것과 의심이 많은 것은 다른 문제가 아니냐고? 글쎄, 어쩌면 생각과 의심이란 것은 거의 동의어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의심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의심한다고 해도, '의심을 하고 있는 내 존재'만큼은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데카르트의 사상(생각)의 출발은 '의심하는 나를 의심하는 것'이었다. 데카르트가 그의 생각의 출발을 의심에서 시작한 것처럼, 이 '의심'이라는 것은 실로 오래된 듯 하다. 그 기원을 찾기 어려운 인류의 오래된 저작인 <성경>에도 '믿음'의 반대로서 '의심'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거론된다. 믿음을 보여주는 자, 그 반대편에 의심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하나님이 가까이에서 그의 말씀을 들려주어도, 그의 존재를, 그의 말을 의심한다. 예를 들어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이브가 그렇지 않은가.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니, 나는 종교적 믿음의 문제를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단지 이 의심이라는 것이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어쩌면 인간이 존재하면서 동시에 생겨난 것이 의심이 아닌지...의심하는 중이다.
 
뭐 아무튼 쓸데없이 길어졌는데,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나는 의심이 많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영화를 보면, 내내 머리가 아프다. 내가 말하는 '이런 영화'라는 것은 대체로 이런 것이다.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영화. 이와 반대로, 어떤 영화들은 영화보기가 안락하다. 나의 감정을 대입시킬 수 있는 주인공이 존재하는 영화. 대체로 착한 누군가가 존재하는 영화. 이런 영화들을 보면, 나는 그저 그 주인공에게 내 감정을 그대로 의지하면 된다. 뚜렷한 선과 악 속에서 악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선과 함께, 나도 그 승리에 밥숟가락 하나 올리고 같이 가는 것이다. 물론 가끔 안락함이 지나쳐 꿈의 세계로 인도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위에도 말했듯이 이 영화에는 의지할 수 있는 누군가가 없다.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진실은, 그래서 우리가 그토록 간명하게 원하는 선과 악은 끝내 주어지지 않는다. 플린 신부(필립 세이무어 호프만)는 정말 그 소년에게 '어떤 행위'를 했을까. 그 이전에 플린 신부가 있던 성당에서는 무슨 일이 있던 것일까. 알로이시스 수녀(메릴 스트립)가 생각한 것은 단지 오해에 불과했을까. 그녀는 왜 플린 신부에게 계속 의심을 품고 있는 것일까[각주:1]. 알로이시스 수녀가 말하는 '자신이 저질렀던 부도덕한 일'이라는 것은 어떤 일일까. 그녀는 결혼을 했었던 적이 있는데, 왜 수녀가 되었을까[각주:2]. 과연 그 소년은 정말 동성애적 성향이 있을까....단지 의심만 끊임없이 늘어날 뿐이다. 우리의 이 의심을 끊어줄 '확실한 누군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 아니 천성적으로 의심이 많은 나는, 단지 의심할 뿐이다. 영화 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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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 영화의 목적은 '우리를 의심하게 만드는 것'에 있을지도 모른다. 알로이시스 수녀와 플린 신부가 충돌하는 것은 그들이 '의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충돌하는 지점은 그들의 '확신'에 있다. 알로이시스 수녀는 플린 신부가 어떤 아동들에게 '어떤 행위'를 저질렀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반면, 플린 신부는 그의 행동은 자비와 사랑에서 나온 것이며, 알로이시스 수녀가 자신을 모함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이 두 개의 확신은 영화 내내 충돌하며, 긴장을 만들어 낸다.  

의심의 최종의 단계가 확신이다. 인간이 의심하다가 어떤 근거를 확보하게 되면, 그 의심은 확신으로 돌아선다. 그러나 이 확신이라는 것이 반드시 근거를 동반하는 것인가 라고 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 하다. 알로이시스 수녀도 어떤 결정적 근거 없이 플린 신부를 몰아붙일 뿐이다. 제시되는 증거들은 빈약하고, 어느 한 구석이 무너져 있다[각주:3]. 그래서 그녀의 이 확신은 영화 내내 불어오는 세찬 바람과 맞선다. 대부분의 우리는 그 세찬 바람을 맞으며 흔들리다가, 때로는 부러지기도 하지만, 그녀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의심이 필요하다. 과연 나의 확신은 어떤 타당한 근거가 있는 것인가. 과연 우리들이 그렇게 믿을 만한 무엇인가가 확실히 있는 것인가. 이 '건전한 의심[각주:4]'은 해도해도 모자르다. 우리는 계속 물어야 한다. 의심하는 나 자신에 이르를 때까지.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마지막이 이 영화에는 있다. 바로 알로이시스 수녀가 자신의 의심이 맞는 것인지 자신을 의심한다며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이 마지막 장면. 이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확신에서 의심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바람이 멎었다. 이 마지막은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여기에서 알로이시스 수녀는 처음으로 '인간답게' 보이기 때문이다. 미사 시간에 조는 학생에게 일어나라고 소리치고, 식사 시간에 덜익은 고기를 내뱉는 제임스 수녀를 말없이 쳐다보던, 마치 인간의 감정이 거세된 하나의 기계처럼 보이던 그녀가 처음으로 인간답게 보였다. 이는 명백한 사실 하나를 떠오르게 한다. 의심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보편적인 것이란 점. 의심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다운 것이라는 점.

그랬다. 기계는 YES와 NO의 분기에서 어느 길이 더 빠를지 의심하지 않는다. 내비게이션은 남부순환도로를 탈지, 올림픽대로를 탈지 고민하지 않는다. 그저 계산된 더 빠른 길로 갈 뿐이다. 만약 그 순간에 의심하는 내비게이션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기계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어느 길로 갈지 고민하는 내비게이션을 본다면, 그 순간 우리는 진정으로 무서워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의심하라, 의심하는 나 자신까지 의심하라. 인간이고 싶다면.


- 2009년 3월, CGV 대학로.




  1. 그녀가 플린 신부를 의심하는 것은 제임스 수녀(에이미 아담스)가 사건을 이야기하기 훨씬 전부터다. 플린 신부가 다른 소년의 팔을 잡아당기는 것을 본 이후부터일까. 아마도 그것은 아닌 듯 하다. 그보다 훨씬 전부터 알로이시스 수녀는 플린 신부에게 어떤 의심을 가지고 있었던 듯 하다. 그 기원은 무엇일까. [본문으로]
  2. 그런데, 결혼했던 사람도 수녀가 될 수 있나요? 잘 몰라서... [본문으로]
  3. 그래서 제임스 수녀는 단지 의심에 머물러 있다. 그녀는 알로이시스 수녀처럼 확신하지 못한다. 단지 의심할 뿐이다. [본문으로]
  4. <씨네 21> 694호 '전영객잔'에서 정한석 기자님은 이를 '회의(懷疑)'라고 말했다. 아마도 '회의'라고 말하는 것이 조금 더 적확한 표현인 듯 하다. 가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잘 정리해 놓은 이런 글을 보면 맥이 풀린다(방금 전에 봤다). 그래도 나는 쓰련다. 에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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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마리아인들이 이들뿐일까?

The Book | 2009. 3. 7. 02:32 | Posted by 맥거핀.
나쁜 사마리아인들 - 8점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부키


요즘 예전에 샀던 책들을 조금씩 읽고 있다. 그러다보니 또 최근에 산 책들을 못 읽게 되고, 그러거나 말거나 또 새롭게 재밌는 책들은 눈에 띄고, 어느샌가 나는 그 책들을 장바구니에 담고 있고... 악순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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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마리아인들>. 이 책에서 말하는 내용은 다음의 한 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부자나라들은 보호주의적인 경제정책으로 지금의 부자나라 대열에 들어섰는데, 왜 지금의 개발도상국들에게는 자유주의적 정책을 강요하는가?' 즉, 그들(부자나라들, 특히 미국)은 왜 자신들이 성공한 정책을 개발도상국들에게는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현재의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상황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믿기 때문이다[각주:1]. 즉 이들은 이미 개발도상국보다는 경제규모나 가용할 수 있는 자원이나, 기술력 등 여러 조건들이 훨씬 유리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양측이 서로 동일한 조건에서 자유롭게 경제를 운용하는 것을 원한다는 것이다. 이를 장하준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브라질 국가대표 축구팀과 유소년 축구팀이 동일한 조건으로 축구 시합을 하자고 하는 것과 같다. 즉 '평평한 경기장'이 아니라 '기울어진 경기장'이 필요하다는 것. '기울어진 경기장'이라는 말이 감이 잘 안 온다면, 이를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유소년 팀에게는 '조금 더 커다란 골대'가 필요하다는 것.

국제 경쟁은 수준이 비슷하지 않은 경기자들이 참여하는 게임이다. 우리 개발 경제 학자들이 흔히 하는 말로 하자면, 스위스에서 스와질란드에 이르는 모든 나라들이 맞붙어 싸우게 되어 있다. 따라서 약한 나라에게 유리하도록 '경기장을 기울게 만드는 것'이 공정하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 약한 나라들이 자국의 생산자들에 대한 보호와 보조금 정책을 보다 강력하게 실시하고, 외국인 투자에 대해 보다 엄격하게 규제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앞 부분에서 지금까지의 세계 경제의 흐름에서 부자나라들이 어떻게 부자가 되었는지를 말하고 있다면, 뒷 부분에서는 따라서 지금의 세계 경제에서 모든 나라가 잘 살기 위해서는 어떠한 정책들이 필요한지 말하고 있다. 즉 앞 부분에서는 반 자유주의주의적인 경제 정책으로 경제 발전에 성공한 부자나라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면, 뒷 부분에서는 현재의 개발도상국들에게 필요한 정책들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정책들에 대한 이야기가 각 장으로 나뉘어 펼쳐지고 있다[각주:2].

따라서 이 책에서 말하는 것은 간단하다. 부자나라들이 아닌 나라들은 물론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부자나라들도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을 폐기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정책이 절대악이라서? 그것이 어떤 절대적이고 잘못된 가치를 담고 있기 때문에? 물론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이 책의 어떤 부분을 읽다 보면은 신자유주의 정책이 거의 '악마의 정책'과 동일하다고 서술된다는 느낌이 올 수도 있다. 즉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어떤 주관적인 가치관'이 너무 강하게 개입된 것이 아닌가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그것은 오해에 가깝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책에서 담고 있는 것은 하나의 간단한 논리이기 때문이다. '왜 부자나라들은 자신들이 부자가 된 정책을 개발도상국들은 쓰지 못하게 할까? 그것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이후에 사다리를 차버리는 것과 같은 짓이지 않는가.' 그것을 장하준 교수는 많은 풍부한 통계 자료와 알기 쉬운 비유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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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얼마전 화제에 오른 적이 있다. 국방부에서 선정하는 '불온도서 목록'에 이 책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도대체 얼마나 불온한 내용을 담고 있기에.."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읽고 나서 보니 불온한 내용은 없다. 불온(不穩)하다는 것은 온건하지 않고, 급진적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이 전 재산의 국유화를 주장한 것도 아니고, 돈 많은 사람들의 돈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자고 말한 것도 아니다. 적어도 그쯤은 되어야 불온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생각해 보니 불온한 책이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이 책은 현재의 우리나라 정부의 경제 정책과 정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얘기하는 불온이란, 정부에서 제시하는 사상과 반대되는 사상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자조적으로) 일컬어지니 말이다. 예를 들어 만약 내일 정부에서 '빨간색 금지법'이 발동된다면, 배수아의 소설 <붉은 손 클럽>은 불온도서, 빅뱅의 <붉은 노을>은 금지곡이 될 것이다.

즉, 다른 말로 하자면, 이 책을 불온도서로 선정했다는 것은 MB정부가 '우리의 경제 정책은 신자유주의 정책입니다'라고 인증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뭐 하지만 인증을 안해도 눈 앞에 보여지는 수많은 정책들이 이를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외국인 투자에 대한 확대개방, 공기업의 민영화, FTA와 쇠고기협상, 그리고 영어 중시 교육 정책 등등. 인증을 안해도 이리 눈 앞에 잘 보이는데, 뭐 인증까지 하시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아니, 나는 우리나라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구하는 것이 무조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경제가 발전할 수 있다면, 우리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다면, 그것을 반대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MB정부의 경제 정책이 1년을 넘어가는 지금, 한국경제는 빈사 상태에 이르러 있다. 물론 그것을 전적으로 MB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부당할 것이다. 과도한 자본의 축적이 낳은 지금의 경제위기의 바람은 분명히 외부에서 불어왔다. 그러나 그것에 대응하는 정부의 태도와 그 정부의 태도가 낳은 현재의 한국경제의 상황은 여러모로 우려를 하게 만든다.

그러나 어쩌면 더욱 우려되는 점은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이러한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이 작은 땅덩어리에도 무수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유수의 대기업들은 예전 여러 보호적인 정책들로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작은 중소기업들과 자유로운 경쟁을 할 것을 요구한다. 비단 기업의 예만 있을까? 현재의 영어 중시 교육 정책도 그렇다. 집이 부유해 어렸을 때부터 갖은 사교육과 해외연수로 영어를 배워온 학생과 가난하여 그럴 수 없었던 학생에게 같은 영어시험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 그리고 그러한 것으로 많은 것이 결정되는 것도 그러하지 않은가.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의 돈없고 힘없는 서민들은 이중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외부의 거대한 나쁜 사마리아인과 그 안의 무수히 작은 나쁜 사마리아인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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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어떤 커다란 비전을 제공해주지는 않는다. '이 책을 읽고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았을 때 별로 생각나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이 책은 어떤 국가적인 정책을 대부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은 할 수 있는 것이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들어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경제라는 것은 결국 수많은 사람들의 심리가 결합된 하나의 흐름이기 때문이다. 실제 경제가 호황 국면에 접어들어 있다가도 사람들이 향후의 경제 상황에 불안해한다면 그 흐름은 지속될 수 없다. 무식하고 간단하게 말해서, 주식이라는 것도 결국 많은 사람들이 '떨어질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내다팔면 떨어지는 것이고, '오를 것이다'라고 생각해서 사들이면 올라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하나의 심리 게임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여러 부분에서 많은 통계자료와 객관적인 수치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장점은 그보다는 많은 부분에서 제시되는 이해하기 쉬운 비유에서 찾을 수 있다. 많은 비유와 이야기들은 전체적으로 세계경제의 흐름을 쉽게 이해하게 하며, 그 속에서 우리나라가 처한 위치를 잘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따라오는 책의 전체 논지에 대한 공감은 덤이다.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이 공감은 많은 사람들의 심리와 생각을 바꾼다. 그리고 이 바뀐 심리와 생각은 경제의 흐름에서 상상 외로 크게 작용할 수 있다.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적어도 다음의 투표에는 작용할 수도 있다.

개인적인 작용에 대해 말하자면, 경제학을 어려워하고 심지어는 무서워하기까지 하는데, 재미있게 읽었다. 이에도 물론 쉬운 비유와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여러모로 작용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장하준 교수의 다른 책- 예를 들어 <쾌도난마 한국경제> 같은 -도 궁금하고, 역으로 이 책과 반대지점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이 책에 소개된) 토머스 프리드먼의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도 읽어보고 싶어진다.




  1. 그러나 장하준 교수는 이 역시 부자나라들의 잘못된 판단이라고 말하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부자나라들도 신자유주의 정책을 폐기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유리하다는 것. [본문으로]
  2. 이것이 3장부터 9장까지의 내용인데, 각 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다루고 있다. 3장에서는 자유무역 정책의 위험성에 대해(특히 유치산업 보호의 필요성), 4장에서는 외국인 투자에 대한 규제의 필요성에 대해, 5장에서는 민영화의 위험한 점에 대해, 6장에서는 과도한 특허권이나 저작권법에 대한 완화의 필요성에 대해, 7장에서는 과도한 재정 건전성의 추구가 불러오는 문제점에 대해, 8장에서는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와의 관련성과 부자나라들이 말하는 '개발도상국은 부패했기 때문에 경제발전에 실패했다'라는 주장의 허구성에 대해, 9장에서는 특정의 문화가 경제발전을 촉진한다는 믿음의 문제점에 대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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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볼루셔너리 로드>, 샘 멘데스

Ending Credit | 2009. 3. 3. 17:57 | Posted by 맥거핀.





꽤나 오래전 얘기다. 대학 2학년 때의 어느 술자리. 갑자기 한 친구가 내게 말했다. 너는 말이야. 어딘가모르게 부자연스러워. 매사 연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할까. <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서 프랭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그러는 것처럼, 정곡을 찔린 사람은 화를 내기 마련이다. 나는 아마도,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래, 너나 잘 하시지 같은 뻔한 대사를 내뱉었던 것 같다. 20살의 인간들이란, 돌려서 말하는 법을 잘 모른다. 더구나 술에 취한 상태였으니, 그저 내뱉고 지르고 만다. 그리고 그 날의 술자리는 어그러졌고, 나와 그 친구의 관계는 그날 이후로 조금 서먹해졌다.

그리고 나는 조금 놀랐다. 그 친구가 그렇게 말했다는 것에 대해서. 글쎄, 내가 놀란 부분은 무엇이었을까. 그 친구가 나의 진심을 몰라줬기 때문에? 그 친구가 나를 오해했기 때문에? 그런 것 보다도, 나의 놀라움은 이것에 가까웠던 것 같다. 내 연기가 그렇게나 어설프다니.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저 친구도 이 연기의 어설픔을 알아차렸을 정도였으니, 가까운 데 있는 사람들은 어땠을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랬었던 것 같다. 나는 누구와도 불편한 관계로 지내고 싶지 않았고,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었으나 그 방법을 잘 몰랐다. 단지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아는 좋은 사람들의 행동을 모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에서도 말했지만, 20살의 인간이다. 실체가 없는 모방은 한계가 있고, 그 모방마저도 어설픈 모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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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이 꽤나 오래전 일이 생각난 것은 전적으로 이 영화 때문이다. <레볼루셔너리 로드>. 처음부터 나는 프랭크와 에이프릴(케이트 윈슬렛), 이 두 사람이 뭔가 '연극적인 연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두 남녀가 차를 옆에 두고 다투는 장면에서도 합(合)이 딱딱 맞는다고나 할까. 그 적절한 대사들과 과장된 손동작과 고함들. 그리고 이 연극적인 연기는 그 이후에도 계속 반복된다. 그러나 이 연기들은 그들에게서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프랭크와 에이프릴 부부의 옆집 부부 혹은, 이들에게 집을 소개한 여자도 이 예의 연극적인 연기를 선보인다. 이들의 말투나 행동은 어딘지모르게 부자연스럽다. 이 미묘한 부자연스러움은 무슨 이유때문인가[각주:1].

이의 해답은 곧 밝혀진다. 이들이 사는 세상은 하나의 매트릭스(Matrix)였던 것. 에이프릴이 이 '레볼루셔너리 로드'가 하나의 매트릭스임을 쓰레기를 버리러 나와 갑자기 깨달았을 때, 이들의 부자연스러움은 설명이 된다. 즉 이들의 부자연스러움은 정교하지 않은 소스코드였던 것. 혹은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와 같은 것[각주:2]. 물론 나는 에이프릴이 진짜 매트릭스를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녀가 이 세계를 매트릭스와 비슷한 어떤 것, 즉 실체가 없고, 가짜만 존재하는 세계, 위선과 위악과 공(空)만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깨달았다는 것이다[각주:3]. 그리고 에이프릴은 이 매트릭스에서 탈출하고자 한다.

그러나 에이프릴의 말에 진정으로 동의하는 사람은 없다. 일견 에이프릴의 말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였던 프랭크도 이미 매트릭스에 길들여져 있는 것. 프랭크가 이것이 매트릭스임을 몰랐던 것 같지는 않다. 가벼운 마음에 장난처럼 내뱉었던 기획안이 사장에게 엄청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기이한 세계. 그것을 가까이에서 보고도 이것이 매트릭스임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은 이상하다. 단지 그는 그 매트릭스를 선택한 것 뿐이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와 무리들을 배신한 남자가 스미스 요원을 만나 스테이크를 먹으면서 내뱉는 대사처럼. "나는 이게 가짜임을 잘 알고 있지. 그러나 맛있단 말이야. 너무나도." 에이프릴을 유일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집을 소개한 여자가 데려온 '미친 남자' 뿐이다. 어찌보면 역설적이지만, 어찌보면 당연하지 않은가. 예를 들어 내가 거리로 나가 '이 세상은 매트릭스, 가짜로 만들어진 세계'라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한다면 어떨까. 대부분은 피할 것이고, 친절한 몇몇은 경찰서로 전화를 걸어줄 것이다. "여기 미친 사람 있어요!"

그래서 이 마지막은 숨이 막히게 한다. 에이프릴의 이 선택이. 매트릭스에 길들여지지 못한 그녀의 선택이[각주:4]. 그러나 이 선택만 있었을까. 매트릭스를 사는 우리들에게는 죽거나, 미치거나, 길들여지거나의 답지만 있는 것일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예를 들어 보청기를 끄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듣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만 적당히 골라서 보고 듣는 것. 물론 나이가 들고 보청기를 낀 연후에만 가능한 것이겠지만.

그전까지는? 그저 계속 어설픈 연기를 선보이는 것 밖에. 완벽한 연기보다는 어설픈 연기가 낫다고 생각하면서. 물론 완벽한 연기를 할 능력도 안되지만.


p.s.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의 두 번째 만남. 이 둘이 처음에는 잘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이 둘은 세트로 있는 것이 나아 보인다. 디카프리오의 불안한 에너지를 잡아주는 케이트 윈슬렛의 묵직한 덩치. 뭐 아무튼 이제는 소설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읽어야 할 때.


- 2009년 3월, 씨너스 센트럴






  1. 그러고보면 이 영화의 배우들은 고난도의 연기를 선보이고 있었다. 자연스러우면서도 미묘한 부자연스러움을 보여주는 것. [본문으로]
  2. "나는 로봇이 점점 사람이 가까워질수록 친밀도가 증가하다가 어떤 계곡에 도달하는 것을 관찰했다. 나는 이런 관계를 '섬뜩함의 계곡'이라 부른다." 계곡의 발견자는 일본의 로봇공학자 마사히로 모리(政弘森). 처음에는 로봇의 인간유사성(human likeness)이 친밀도를 증가시킨다. 하지만 어느 정도를 넘어서면 그것이 외려 혐오감을 준다. 그러다가 인간과 거의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아지면, 친밀도가 회복되어 정상에 도달한다. - 진중권, <진중권의 Imagine>에서 [본문으로]
  3. 아마도 그녀는 이를 깨닫는 감각이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발달했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극 중에서 연극배우로 나오는 그녀의 연기가 형편 없음이 이해가 된다. 부조리극이나 일부의 실험극을 논외로 하고 본다면 모든 연극에서 최고의 연기는 만들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 관객에게 그것이 '실제 감정과 거의 같은 것'이라고 믿게끔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꾸만 이것이 하나의 연극임을, 이것이 거짓 세계임을 깨닫고 있는 것. 본인이 이를 거짓 세계라고 생각하는데, 소위 말하는 '진실된 연기'가 나올 턱이 없지 않는가. [본문으로]
  4. 이 선택은 아래의 질문에 조그만 암시를 준다. 프랭크와 에이프릴에게는 두 명의 자녀가 있음에도, 그들은 왜 거의 나오지 않은 것일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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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잇 카우보이>, 존 슐레진저

Ending Credit | 2009. 2. 25. 01:16 | Posted by 맥거핀.




(스포일러)



영화가 끝나고 살짝 눈물이 났다. 글쎄. 왜 눈물이 나는건지 잘 모르겠다. 이 영화는 코미디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꽤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적어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영화 내내, 나는 살짝 웃음띤 얼굴로 영화를 지켜봤다. 그러나 이 마지막은 묘하게 마음을 아프게 한다. 리코(더스틴 호프만)가 죽어서? 뭐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눈물은 단지 그런 것만은 아니다. 나는 적어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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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슐레진저 감독의 1969년 작 <미드나잇 카우보이 Midnight Cowboy>. 1969년은 누구나 기억하듯이,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한 해였고, 베트남 전쟁이 클라이막스로 치닫고 있는 해였다. 그와 반대로 미국 국내에서는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드높은 시대이기도 했고, 전세계적으로 좌파들의 기치가 드높았던 1968년의 이듬해이기도 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3선개헌이 국회를 통과한 원시적인 해이기도 했고, 얼마전에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님이 추기경으로 임명된 해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1969년은 '69'라는 숫자가 상징하듯, 히피(hippie)들의 해, 비틀즈와 도어스의 해이기도 했으며,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3일간 열렸던 해이기도 하다.

시대정신이라고 해야하나...이 영화에서도 1969년의 이면에 있었던 끈적한 분위기는 감지된다. 조 벅(존 보이트)과 리코가 우연히 초대받아 가게되는 파티 현장. 그 파티는 끈적하고 불온한 공기를 담고 있다. 흐느적거리는 음악이 흐르는 이 공간에서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흐느적거리며 춤을 추고, 약을 한다. 여기에는 어떤 뚜렷한 이유가 없다. 몽롱한 눈으로 카메라를 쳐다보며 남자는 답한다. 이곳에 왜 왔는지 모른다고.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모른다고. 이곳은 조 벅과 리코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공간이다. 단지 리코는 먹고 마시는 것에, 그리고 사람들의 주머니를 터는 것에 열중할 뿐이고, 조 벅은 약에 취해 웃을 뿐이다.

그들은 여기에서도 이방인일 뿐이다. 카우보이 복장을 한 우스꽝스러운 남자와 그의 친구. 이들은 그저 다른 이들의 구경거리일 뿐이다. 그랬다. 1969년의 세상에서 이들은 그저 사회에서 밀려난 이방인일 뿐이었다. 아폴로 11호로 상징되는 과학기술이 대변하는 말끔하고 잘 짜여진 귀부인과 신사들의 세계, 그리고 그 반대편에 있는 음악과 춤과 마약의 끈적거리는 히피들의 세계. 그 두 세계의 틈바구니에서 그들은 그저 갈 곳이 마땅치 않은 텍사스에서 온 카우보이 복장을 한 어리숙한 청년과 간단한 사기와 소매치기로 살아가는 2세대 이민자 청년[각주:1]일 뿐이다.

이 어리숙한 카우보이 청년 조 벅은 뉴욕에서는 돈많은 부인들이 같이 자주면 돈을 준다는 말에 뉴욕에 왔다. 자신으로서는 가장 자신있는, 여자랑 자는 일을 하는데, 돈까지 주다니. 이 왠 꿩먹고 알먹고인가. 아마도 그는 이렇게 간단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보듯, 그는 복잡하게 생각할 줄 모르는, 어딘가에 나사가 하나 빠진 청년이다. 글쎄 그의 나사는 왜 도망갔을까. 조 벅은 종종 환상에 빠진다. 이 환상에서 그는 과거의 세계로 달려간다. 이 과거의 세계는 정확히 묘사되지는 않지만, 그에게 어떤 트라우마를 안긴 것 같다. 군복을 입고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하며 집 앞에 앉아있는 장면을 미루어 볼 때 그는 전쟁에서의 귀환병일지 모르며, 베트남 전에서의 어떤 것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과거의 환상에 종종 등장하는 여자친구와의 어떤 관계가 이를 이렇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알 수가 없다. 다만, 하나 확실한 것은 그는 나사가 하나 빠졌기는 하지만, 착한 청년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착함은 '천사같은' 착함이 아니라, 그보다는 훨씬 날 것의 어떤 것이기는 하지만.

이 이야기는 이 착한 청년 조 벅과 그의 친구 리코가 벌이는 생존의 이야기이다. 꽉 짜여진 두 세계의 틈바구니 속에서 그들은 어떻게 살아남을까. 그러나 이 생존기는 결코 무겁고 우울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희극적이다. 묘하게 희극적이다. 예를 들어 조 벅의 환상이 그를 과거로 데려간다면, 리코의 환상은 그를 미래로 데려간다. 그는 지금 조 벅의 매니저가 되어 조 벅이 멋진 부인을 꼬셔오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그는 미래의 자신과 조 벅의 모습을 상상한다. 해변가에서 수많은 수영복을 입은 부인들에게 둘러쌓여 있는 조 벅과 자신. 그러나 이 길지 않은 꿈은 조 벅이 바깥으로 내동댕이쳐지면서 같이 깨진다. 우스운 환상과 그것의 깨어짐. 이를 이렇게 말할수도 있다. 비극적인 주인공들이 벌이는 희극[각주:2], 또는 희극적인 주인공들이 벌이는 비극[각주:3].

조 벅과 리코는 추운 뉴욕을 떠나 넓은 해변과 뜨거운 태양이 있는 따뜻한 남쪽으로 떠난다. 표면적으로 봤을 때에는 아픈 리코가 마이애미로 가는 것이 소원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단순한 조 벅도 깨달았던 것이다. 이렇게 삶이 지속될 수는 없다는 것을. 이대로는 그들 앞에 남은 것이 없다는 것을. 따라서 마이애미로 가는 도중 조 벅이 카우보이 복장을 집어던지고, 평범한 복장으로 갈아입는 것은 인상적이다. 이것은 과거와의 결별, 꿈을 좇고 환상을 좇는 세계와의 결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마지막에서 관객은 다시 숨을 삼킨다. 마이애미가 눈 앞에 있는데, 리코는 트로피카나 셔츠를 입고 버스 차창에 고개를 떨구기 때문이다. 친구의 고개를 받치고 망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조 벅. 그러나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두었어도 이 세상은 여전히 흘러간다. 죽은 리코의 모습과 망연한 표정의 조 벅과 오버랩되는 차창밖 마이애미의 풍경. 이 마지막은 오래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조 벅은 이제 어디로 가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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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부인과 신사들의 세계와 히피들과 마약의 세계에서 어느 곳에도 갈 곳이 없었던 두 청년 조 벅과 리코. 왠지 이 이야기는 현재에도 그대로 진행되는 것 같다. 머나먼 이 곳 한국에서 말이다. 물론 이는 귀부인과 히피의 세계는 아니다. 그것은 그보다는 조금 더 실용적이다. 이른바 억대연봉과 만원짜리 커피의 세계와 용산철거민과 삼천원짜리 싸구려국밥의 세계. 그 세계는 점점 그 간극이 멀어지는 것 같다. 그 세계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끼어있는 '88만원 세대'의 수많은 조 벅과 리코들. 그들은 어디로 가야할까. 아니 어디로 갈 수 있을까.

- 2009년 2월, 서울아트시네마.



  1. 리코의 풀네임은 엔리코 살바토레 리조. 이 이탈리아 냄새 물씬 풍기는 이름으로 볼 때,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지하철에서 구두를 닦다가 돌아가셨다는 그의 말로 미루어 볼 때, 아마도 그는 가난한 이탈리아 이민자 2세대일 것이다. [본문으로]
  2. 독일영화 <나킹 온 헤븐스 도어> 또는 <주유소 습격사건> [본문으로]
  3. 이는 어딘가 나사가 빠진 주인공들이 바보같은 일을 벌이는데, 이것이 그들을 계속 안좋은 상황으로 몰아넣을 때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들이 느끼는 두 가지의 혼합된 감정, 즉 우스꽝스러움 및 안타까움과 맥이 닿아 있다. 이른바 <낮술>의 세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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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시계는 거꾸로 돌아간다. 이 시계는 전쟁에 나가서 죽은 아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시계공의 소망을 담아 만들어졌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시간을 거꾸로 돌려서 죽은 자가 살아돌아올 수 있다면,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리고 그 해에 벤자민 버튼(브래드 피트)은 태어났다. 죽을 날을 앞둔 노인의 몸을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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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이런 기이한 설정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이 제목은 조금 이상해보인다. 과연 '시간은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일까.' 이 영화의 원제는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직역하자면, '벤자민 버튼의 신기한(기이한) 사례' 정도 될 것이다. 아마도 수입하는 측에서는 벤자민 버튼의 '육체'가 점점 젊어지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싶어서였겠지만, 이 제목은 자꾸만 무엇인가를 오해하게 만든다. 그래서 다시 질문을 던져본다. 정말 과연 시간은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일까.

내가 생각하는 거꾸로 간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죽은 아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시계공의 소망처럼 죽은 자가 살아서 돌아오는 것. 오늘의 나는 어제 알았던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내가 되어 어제의 인생을 사는 것. 즉 육체적으로만 젊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포함한 내 주위의 모든 것이 어제로 돌아가는 것. 그러나 벤자민은 그렇지 않다. 그는 다만 육체적으로 '젊어질' 뿐이다. 그의 정신과 삶의 진행은 보통 사람과 동일하다. 아무 것도 모르던 '아이'였던 벤자민은 조금씩 집 바깥에 있는 무엇인가를 알게 되고, 집을 떠나 세계를 알게 되고, 주위의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게 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부모의 죽음을 알게 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많은 보통의 사람들이 사는 삶도 약간은 다르지만, 대부분은 비슷한 삶을 살게 된다. 즉 보통 사람들에게 시간이 직선으로 흐르고 있다면, 벤자민에게도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아니 나는 수입사의 한글 제목에 문제제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말장난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단지, 말하고 싶은 것은 내게는 이 벤자민 버튼은 하나의 거대한 맥거핀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에게 기이하게 보이는 이 벤자민 버튼도 결국은 태어나고, 삶을 살고, 죽는다는 것. 그가 육체적으로 다르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크게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는 시계공의 질문에 대한 신의 답인지도 모른다.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는 없나요?' '죽은 자가 살아돌아올 수는 없나요?' 라는 질문을 시계공이 자신이 만든 시계를 통해서 신에게 던졌을 때, 신은 벤자민을 태어나게 하는 것으로 답했던 것이다. '이 기이하게 보이는 벤자민도 남들과 같단다. 태어나고, 배우고, 사랑하고, 주위 사람을 잃고, 죽는단다.'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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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보았을 때 아마도 이 영화는 크게 두 가지를 말하고자 하는 것 같다. 물론 그 두 가지는 각각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연결될 때에만 가치가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하나는 '결국에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그에게 세상을 가르쳐 준 선장 마이크가 죽으면서 하는 말이지만, 이 말은 그 후에도 여러 번 반복된다. 벌어놓은 많은 돈으로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이 이승을 떠나고 싶지 않은 벤자민의 아버지[각주:1]. 그러나 그도 최후에는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을. 신은 시계공에게 했던 답을 선장에게도, 그리고 벤자민의 친부에게도 들려주고 있다. 이는 한편으로 말하자면, 이 신 앞에서, 신의 세계 앞에서 인간이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를 말해주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를 잘 말해주는 에피소드가 영화 중간에 제시된다. 데이지(케이트 블란쳇)의 교통사고 장면. 감독은 이 교통사고가 얼마나 많은 우연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인가를 자세한 장면으로 제시한다. 벤자민은, 그리고 우리는 가정을 해볼 수는 있다. '...했었더라면' 하고 말이다. 그러나 그 수많은 우연의 결합으로 사고는 일어났다. 우리는 어떠한 일이 우리의 책임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렇게 말한다. 우연이었어. 우연이었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또다른 장면도 있다. 지금 데이지가 누워서 딸에게 벤자민의 일기를 읽어달라고 하는 이 병원. 이 병원에는 거대한 폭풍우가 몰아닥치고 있다. 그러나 그 폭풍우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다른 곳으로 피하거나, 그저 조용히 지나가기를 기다릴 뿐. 죽음이든, 또다른 어떤 것이든 인간이 맞설 수 없는 것이 있다. 그 맞설 수 없는 것에 맞닥뜨릴 때는 방법은 없다. 그저 '받아들일 뿐'. 그런 면에서 이 영화에서 조용히 '받아들이는' 캐릭터인 벤자민의 양모 '퀴니'의 존재는 인상적이다[각주:2]. 그녀는 벤자민 같은 '괴물'이 태어난 것도 모두 신의 뜻이라 생각하고, 그저 그를 잘 키울 뿐이다.

또다른 하나는, 따라서 결국 모든 인간은 단 한 번의 인생을 산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잡혀 와 남들에게 구경거리가 되는 삶을 산 피그미족 청년도, 버튼 공장을 운영하며 부유한 삶을 산 실업가도, 예인선 선장으로 여러 곳을 구경하고, 2차대전에도 참전했던 용감한 선장도, 볼쇼이 발레단과 처음으로 협연한 발레리나였던 호기심많은 여인도, 누구보다도 강단 있는 여성이었으나, 또한 그저 '엄마'였던 어느 여인도, 그리고 벤자민도. 태어난 이상, 언젠가는 죽음을 맞게 되리라는 것. 삶의 중간에는 여러 분기가 있을지언정, 그 분기를 되돌아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다는 것. 하나의 인생을 다시 살 수 없다는 것. 누구나, 결국 벤자민에게도 시간은 거슬러 오를 수 없는 일직선이라는 것. 즉, 시간은 거꾸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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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대다수의) 인간은 처음에는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다가, 네 발로 기다가, 두 발로 서서 세상을 바라보다가, 다시 걸을 수 없게 되며 죽음을 맞이한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벤자민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 역시 침대에 누워 있다가, 양 손에 지팡이를 끼고 네 발로 걷다가, 두 발로 서서 세상을 살펴보다가, 다시 걸을 수 없게 되어 죽음을 맞이했다[각주:3]. 벤자민이 죽음을 맞이하는 이 마지막 장면은 여러가지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


- 2009년 2월. 씨너스 명동.




 
  1. 덕분에 벤자민은 그 이후에는 아버지의 유산으로 편하게 요트도 타고 잘 산다. 반면 그렇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생활하는 노동인 벤자민 버튼이었다면. [본문으로]
  2. 따라서 그녀가 운영(?)하는 공간이 양로원이라는 것은 상징적이다. 양로원은 '받아들여야'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즉 앞으로의 자신의 생은 그저 여생(餘生)에 불과하다는 것을. 언젠가는 찾아올 죽음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 [본문으로]
  3. 개인적으로는 이 마지막 부분으로 가면서 설정이 조금 아쉬웠다. 마지막 벤자민이 치매에 걸리는 것은 상당히 쉬운 선택이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얼굴은 아기인데, 말이나 행동은 노인처럼 하면 이상해서 그랬겠지만) 어쩌면 말할 수 없는 상태에서 다시 말할 수 없는 상태로 돌아간다는 대구(對句)를 만들고 싶어서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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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치바나 다카시에게 얻는 지적 자극

The Book | 2009. 2. 17. 17:30 | Posted by 맥거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되는 100권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되는 100권 - 8점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박성관 옮김/청어람미디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되는 100권>. 꽤 오래 전에 사둔 책인데, 얼마 전에 읽었다. 처음에는 제목만 보고 500권에 대한 호평과 100권에 대한 악평이 실린 책인 줄 알았는데, 너무 축자적으로 생각한 듯 하며,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다. 다치바나 다카시가 쓰는 악평은 어떤 것인가, 궁금했었는데, 그 궁금증의 해결은 조금 미뤄놓아야 할 듯 하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훌륭한 저널리스트로, 새로운 지식을 탐구하는 인물로, 그리고 엄청난 독서가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다치바나 다카시의 독서 일기라고 볼 수 있는데,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다치바나가 자신의 책을 가득 모아놓은 그의 이른바 '고양이 빌딩'을 자유롭게 거닐며,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자유롭게 소개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고, 2부는 그가 <주간 문춘>에 연재하였던 독서 일기 몇 년 치를 모아 놓은 것이다. 그래서 1부에서 다루는 책들이 주로 그가 그의 지식을 형성하는 젊은 날에 읽었던 책들과 그간 여러 저널을 써오면서 읽었던 책들이 주가 된다면, 2부에서는 독서 일기를 썼던 당시에 관심을 가지게 된 책들이 주를 이룬다. 권말의 책 목록을 살펴보니 대략 900-1000권 정도의 책들이 소개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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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치바나 다카시의 관심은 사실 전 분야에 가깝다. 책 뒤편을 보면 그를 형성한 지식의 '재료'와 키워드가 나와 있는데, 그 키워드의 목록은 인간, 지구, 우주, 자연과학과 테크놀로지에서 시작하여 신화와 역사, 종교, 전쟁, 환경과 생태학을 거쳐, 성과 사랑, 현대정치의 역학, 금융공학과 세계경제에 이른다. 즉 인간사의 거의 모든 부분과 거의 알려진 지식들이 그가 관심을 가지는 전부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책 소개가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이다. 그가 관심을 가지는 책들은 특정 분야, 특정의 관심에 국한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원래, 메타(meta)-책 적인 내용을 좋아하는 터라, 이런 책 소개를 위한 책들은 꽤나 관심을 가지고 즐겨 보곤 한다. 그러나 그간 여러 책 소개 책들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그런 책 소개들이 특정의 분야에 국한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책을 소개하는 대부분의 필자들은 자신의 분야에서는 상당히 일가(一家)를 이루고 있지만, 다른 분야의 지식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책 소개도 특정 분야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 소개는 거의 전 범위를 넘나든다. 물론 이 책 소개는 특정 분야를 깊게 파지는 않는다. 그저 그 분야에서 읽어두어야 할 책들과 그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짤막하게 언급하는 식이다. 가끔 길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래서 한편으로 이 책 소개들은 TV 뉴스 같은 데에 나오는 짤막한 스폿(Spot) 형식의 책 소개들을 연상케 한다. 어쩌면 여기에 다치바나의 저널리스트적인 면모가 드러나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 책은 책 소개들을 가득 담고 있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을 대하는, 혹은 글을 대하는 자세, 그리고 사회 현상들을 대하는 자세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다치바나가 좋은 글에 대해 말하는 다음과 같은 부분이 그렇다.

내가 종종 하는 말이지만,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입출력비(입력 대 출력의 비율)가 100대 1 정도는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책 한 권을 쓰려면 100권을 읽어야 하는 셈이다.
전방위를 넘나드는 다치바나의 책 소개는 놀라운 지적 자극의 연속이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의 들어본 적 없는 철학자(예를 들어, 비코 Giambattista Vico)의 저서를 소개하다가, 갑자기 비트겐슈타인으로 돌아서서 한참 말하다가, 지바 데쓰야의 <내일의 조>를 이야기하고는 우주와 지구의 이야기로 넘어가는 식이다. 또 그러다가는 갑자기 이상한 고대 전설에 대해 말하기도 하고, 성(性)의 신비로움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사상의 흐름을 따라가기가 어렵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차피 책 소개다. 꼭 처음부터 읽지 않아도 어느 페이지를 열어서 보아도 상관 없고, 그 어느 페이지에서나 일정량의 지적 자극을 맛볼 수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 수많은 책들의 상당수가 아직까지 우리나라에는 출판되지 않은, 그리고 앞으로도 그다지 출판의 가능성이 높지 않은 책들이라는 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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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다치바나의 사상에 대해 짤막하게 언급하고 넘어 가고자 한다. 이 책을 읽다보면 몇몇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 이 책에 소개되는 상당수의 책들이 일본 군국주의 시대를 다룬 것들이라든가, 우리나라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석연치 않은 일본 고대사나 천황을 다룬 책들이 나온다거나, 국가의 과학기술 진흥책에 대한 강조와 같은 것들이 그렇다. 그가 그동안 여러 다른 책들에서 주장한 내용들이 과학기술의 관심으로 부강한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거나, 젊은이들의 지적인 쇠퇴를 지적한 것들임을 생각해보면 일견 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이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를 쉽게 우익[각주:1], 또는 내셔널리스트라고 부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그 답을 주저하게 된다. 국가라는 체제 혹은 시스템을 부정하지 않는 한,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고, 강한 국가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물론 여기서의 강한 국가란, 다른 나라를 괴롭히고, 다른 나라를 억압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 국민들을 어떻게 그 국가 안에서 평화롭게 살게 해줄 것인가라는 정치 및 사회의 작동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그의 좌익의 운동에 대한 꾸준한 관심, 생태학(ecology)에 대한 관심, 그리고 지구인으로서 그리고 우주의 일원으로서 인간에 대한 관심을 생각해 볼 때 이런 낙인은 조금은 지나친 측면이 있다.

어쩌면 그의 저널리스트로서의 모든 것에 대한 관심, 그리고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지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인간으로서의 태도가 이런 오해를 불러일으키는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정말 오해인지 아닌지는 그의 <천황과 도쿄대>[각주:2]와 같은 저서라든가 앞으로 나올 책을 읽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p.s. 앞으로는 읽은 책은 무조건으로 한 줄이라도 좋으니까 글을 남기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저 읽기만 해서는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http://noracism.tistory.com2009-02-17T08:30:580.3810
  1. 여러 일본 배우들에 대한 우익 논쟁이나, 요즘 제기되는 작가 오쿠다 히데오에 대한 우익 논쟁과 같은 우리나라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우익인가, 아닌가하는 논쟁은 너무 간단하게 우익이다 혹은 아니다라고 규정되는 측면이 큰 것 같다. 확실한 것은 '한국을 좋아한다'라고 한 마디했다고 해서 '친한' 또는 '개념있는' 게 아닌 것처럼, 한 번 영화에 출연했다고 해서, 혹은 책 내용 중 한 줄 이상한 것이 있다고 해서 '우익' 또한 아닌 것이다. [본문으로]
  2. 다치바나의 이 책이나 혹은 가라타니 고진과 같은 다른 일본 사상가의 책들을 읽고 보면 '일본인에게 있어 천황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안 할 수가 없다. 확실히 천황이 일본인의 사상에서 위치하는 지점은 한국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어떤 것인 듯 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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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물보다 큰 Bigger Than Life, 니콜라스 레이

Ending Credit | 2009. 2. 15. 22:18 | Posted by 맥거핀.


(스포일러)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으려니 마음이 설렌다. 허리우드 극장에 들어가는 초록색 엘리베이터. 물론 지금은 허리우드 극장이 아니다. 서울아트시네마 또는 허리우드 클래식. 지금은 고전 영화를 많이 상영하는 극장이지만, 예전부터 허리우드는 상당히 고전스러웠다. 일단 이름부터가 '헐리우드'도 아닌 '허리우드'. 그리고 극장을 둘러싼 거리들의 오래되고 낡은 풍경. 세련되지 못한 빛바랜 거리.

생각해 보면, 종로에 나와 극장을 갈 때면, 서울극장이나 단성사보다는 허리우드나 씨네코아를 가곤 했다. 이제는 허리우드도 씨네코아도 없지만, 종로에 있는 극장을 간 기억을 떠올리면, 그 두 극장 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그 중에 조금 더 좋아했던 극장은 허리우드였던 것 같다. 허리우드는 앞에서도 말했듯, 관 이름도 '레드'니 '그린'이니 하는 약간은 촌스러운 극장이었고, 거기를 가기 위해서는 약간은 역한 돼지 삶는 냄새가 풍기던 더러운 골목을 지나가야 했지만, 무엇보다도 좋았던 건, 극장 앞 툭 트인 옥상이었다. 지금은 끊어서 그럴 수 없지만, 그 옥상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피우는 담배 맛은 꽤나 좋았다. 그저 지금은 하릴 없이 휴대폰을 꺼내 아래의 풍경을 찰칵 찍으며 예전의 기억들을 떠올릴 분이다. 그러고보니 예전에 여기서 교생 때 가르쳤던 학생들을 만난 기억도 있다. 아마 지금은 대부분 대학생이 되었을 그 학생들도 그 때는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를 보러 오며 불안해하던 소심한 학생들이었을 뿐이다.

날씨는 흐려서 사진은 잘 나오지 않았지만, 휴대폰에 찍힌 사진을 들여다본다. 회색빛의 풍경이 남아 있는 기억과 비슷해서 그런지, 어쩐지 예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 하다.

그리고 '2009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김영진 평론가가 추천한 니콜라스 레이의 <실물보다 큰 Bigger Than Life>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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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선택한 건 단지 시간이 맞아서다. 그 외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다. '시네마스코프 영화미학을 최고조에 올려놓았던 감독 니콜라스 레이의 대표작'이라고 되어 있지만, 내가 그런 걸 알 턱이 없다. 시네마스코프가 무슨 말인지 잘 몰라 사전을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나온다. '와이드스크린 방식에 의한 대형영화' 와이드스크린이라..그러고보니 이 제목은 중의적으로 읽힌다. 실물보다 훨씬 사물을 크게 보이게 하는 와이드스크린, 그리고 실제의 삶보다 자신의 삶을 더 크게 지각하고 있는 주인공 에드(제임스 메이슨)의 심리상태. 실제의 삶보다 자신의 삶을 더 크게 지각하고 있다는 것은 한 마디로 제정신이 아니란 거다. 과대망상.

에드를 이렇게 만든 것은 코티존이라는 약이다. 그러나 그는 그 약을 끊을 수 없다. 그 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그가 가진 병으로 인해 1년 안에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점점 약에 의지하기 시작한다. 약의 복용-과대망상 작용의 증가-과대망상 작용으로 약을 더욱 복용-그로 인해 더욱 심화되는 과대망상의 악순환. 그는 이 악순환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것인가. 그러나 이 악순환에서 빠져 나오는 것은 그리 간단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왜? 모든 것이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가 왜 이런 과대망상에 빠지는지, 이 약을 어느정도나 사용해야 하는지, 아니 정말 그가 정신병이 생긴 것은 이 약 때문인지, 그리고 그가 정말 낫고 있는 것인지. 의사는 고작 약의 복용량을 조절해보자고 말할 뿐이다. 어쩌면 그는 다시 이 악순환에 빠져 들는지도 모른다. 단지 그 악순환 고리의 크기가 문제일 뿐.

한편으로는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그가 과대망상에 빠진 후 가지게 되는 교육관에 흥미가 생긴다. 잘 못하는 학생들도 너그럽게 용서해주던 인자한 초등학교 교사였던 그는 정신에 문제가 생긴 후 아이들을 나약하고 악한 존재로 보기 시작한다. 이는 한편으로 중세적 아동관을 닮았다. 기독교적 원죄 의식을 바탕으로 인간이 악하게 태어난다고 본 중세에는 강한 체벌과 훈육을 중요시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이 사탄이나 악마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극도의 혼란에 빠져 성서의 아브라함의 일화를 인용하며 아들을 죽이려 하는 장면은 꽤나 섬뜩하다.

이 영화에는 이 장면 외에도 몇몇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욕실에서 깨진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에드의 여러 갈래로 분열된 거울상. 이는 한편으로는 분열되기 시작하는 그의 머리속과 앞으로의 그의 삶이 갈래갈래 조각날 것이라는 암시를 하는 듯 하다. 또 아들에게 수학 문제를 내며 의자 뒤에서 손을 짚고 바라보는 모습은 어떤가. 앞에 놓여진 전등으로 인해 그의 그림자는 벽 면에 커다랗게 비친다. 이는 왠지 사탄이나 악마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그가 그토록 아들에게서 멀리 떼놓으려고 했던 사탄은 그의 속에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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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 영화는 오래된 영화이지만, 생생한 질문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정신병이란, 혹은 과대망상이란 무엇인가, 과연 어느 정도까지를 정신병, 과대망상으로 보아야하는가와 같은 질문들이 그렇다. 미국정신의학회가 발행하는 DSM(정신장애의 진단과 통계 매뉴얼)이 개정될 때마다 정신장애의 개념은 한 없이 확대되고 있다고 한다. 이는 급기야는 '일상적인 행동의 질병화'라는 수준까지 왔는데, 예를 들어 '숙면을 취할 수 없는 것'은 "우울성 장애"이고,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망상성 인격장애"이며, '근심하는 것'은 "전반성 불안장애"라는 식이다(다치바나 다카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되는 100권>에서). 이 영화에서도 에드가 코티존을 복용하던 초반, 갑자기 활달해하며 아내와 아이들을 아주 비싼 옷가게에 데려가 옷을 사주는 장면이 나온다. 아내는 조금 불안해하지만, 또 행복해하기도 한다. 이것이 그의 과대망상의 시작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어쩌면 이런 약간의 과대망상은 삶을 행복하게 느끼게 해주고, 미래에의 희망을 가지게 하는 효과가 있을는지도 모른다. 

물론 반대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조금 불안해하고, 반대로 그 조금의 불안 속에서 행복을 찾는 것. 이것은 현대인들의 특질이다. 어쩌면 이 사회는 조금의 과대망상이 결합되어 이루어져 있는 곳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더욱 큰 과대망상의 시작인가, 아닌가. 그것은 앞으로를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 2009년 2월. 서울아트시네마.
 

p.s. 할리우드 여배우는 옛날 여배우들이 훨씬 나은 것 같다.
 이 영화에서 에드의 아내로 나오는 바바라 러쉬(Barbara Rush). 출처는 (nnd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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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 그의 아내, 신동일

Ending Credit | 2009. 2. 14. 02:57 | Posted by 맥거핀.




(스포일러 있음)


급하게 뛰어 들어간 극장은 텅 비어 있었다. 상영 10분전, 매표소 직원이 어색하게 웃으며 표를 끊어준다. 주위를 둘러보며 조심스럽게 묻는다. "관객이 저 혼잔가요?" 그녀의 어색한 웃음은 조금 짙어진다. "아직까지는 그렇네요." 그리고 그 '아직까지는'은 '결국'이 되었다. 아무도 없는 극장에서 혼자 영화를 보신 경험이 있나요? 나는 누군가에 묻고 싶어진다. 어쩌면, 이것이 마법의 시간, Magic Hour 일는지도 모른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시작되었다. 영화가 1시간이 지나갈무렵, 슬슬 깝깝해지고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주위를 둘러보고, 앞뒤를 살펴보아도 아무도 없다. 스크린 안의 인물들에게 구원이 필요한 것처럼, 나에게도 구원이 필요하다. 그냥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나타나서 그들을 구원하고, 나도 뒤척임을 그만두었으면 싶다. 어떤 영화들은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그럴 때마다 나의 감정은 복합적이다. 한편으로는 이 불편함이 빨리 끝났으면, 어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불이 켜졌으면 싶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복잡함으로 지적, 감정적 쾌락을 느끼며, 이 쾌감이 지속되기를 갈망한다. 이 불편함은 어디에서 오는걸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는 답을 얻지 못하는 불편함이다. 영화는 계속 나에게 질문을 하도록 만들며, 간단하고도 쾌락적인 답을 들려주지 않는다. 물론, 한편으로 보면 질문으로 만들어진 성은 그 자체가 하나의 쾌락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성문이 닫혀 있는 한 그 쾌락은 불편함을 동반한 쾌락이다[각주:1].

마법의 시간이 끝난 후, 옛 대학 동기들을 만나러 갔다. 친구들이 오지 않아 지하철 역에서 친구를 기다린다. 심심하다. 열심히 전단지를 돌리고 있는 학생들에게 다가가 일부러 전단지 2개를 받아 읽는다. "MB정권 퇴진, 촛불의 함성으로" 밑에는 용산 유가족이 보낸 편지의 한 내용이 적혀 있다. 한참을 읽어 내려가는데, 어느 틈에 나타난 친구가 툭 뺐어 든다. "아우, 배고프다. 뭐 보고 있냐? 으이그, 열심히 보기는. 여전하구나. 빨리 밥 먹으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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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영화의 줄거리를 다시 쓰는 것은 바이트(byte)의 낭비가 될 것이다. 이미 꽤 오래 전부터 상영하는 영화이고, 이에 대해 쓴 여러 좋은 글들도 여기저기에 많다. 다만, 잊지 않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던져둔다[각주:2]. 답을 찾기는 어렵다. 적어도 내 수준에는.

- 이 영화를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다른 여러 리뷰들에도 나와 있지만, 이 영화를 세 사람과 그들 사이에 벌어진 실수와 관계의 문제로만 읽는 것은 너무 피상적인 해석이 될 것이다. 이 세 사람이 발을 디디고 있는, 그리고 그 외부의 관객들이 발을 디디고 있는 이 자본주의의 땅에서 세 사람이 가진 계급의 상징. 그것은 무시하기에는 너무 드러내놓고 읽힌다. 전직 학생운동가이자 자본주의의 최전선에 있는 현직 외환딜러인 예준(장현성)이 실수로 노동자 재문(박희순)의 아들 민혁('민중혁명'의 이름을 딴)을 죽게 만드는 데에 이르러서는 그 정치적 함의가 너무 노골적이라 쓴 웃음이 날 정도다[각주:3]. 변절한 386(장현성)이 깨어 있는 건전한 노동자(박희순)와 민중(홍소희)이 낳은 '민중혁명'을 고사시켰다...그리고 급기야는 민중에게 거짓 선전을 유포해 그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 한다...?

- 그들은 왜 변절하였는가?

글쎄. 변절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는지 잘 모르겠다. 영화 속 예준은 분노에 차서 말한다. "나 원래 이런 놈이라구!" 그들이 원하는 것이 민중혁명이었을까. 글쎄, 이 질문은 너무 깊고, 포괄적인 질문이다. 그러나 이는 필요한 질문이고, 해야만 하는 질문임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MB정권 퇴진을 말한다. 그러나 그 이후는 무엇일까. 그들이 원하는 MB정권 이후는 무엇일까.

- 왜 그들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가?

영화 속 지숙(홍소희)의 표정은 전반기와 후반기가 아주 다르다. 전반기에는 웃다가, 갑자기 짜증을 내는 등 풍부한 표정 변화를 드러내보이던 지숙은 사건이 일어나고 미국에서 돌아온 후 감정변화를 거의 드러내보이지 않는다. 물론 사건 이후에 감정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갑자기 늘어난 그녀의 재산과 더불어, 이 감정의 숨김은 기이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후반부의 격렬한 전화씬을 제외하고는 시종일관 감정변화를 크게 드러내보이지 않던 예준과 차안에서 지숙이 나누는 대화는 매우 섬뜩해보인다.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들의 얼굴은 마치 기계적인 어떤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에 무표정하게 반복적으로 마당을 쓰는 재문과 가위질을 하는 지숙, 그리고 엔딩 크레딧 내내 이어지는 가위질 소리는 매우 섬뜩하다.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 왜 제목이 <나의 친구 그의 아내>인가?

이 영화의 중심점이 재문에게 있음을 고려해본다면, 이 제목은 다분히 이상하다. 이는 예준의 입장에서 본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는 예준에게 집중해서 보라는 감독의 주문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예준은 상당히 미스터리한 인물이기도 하다. 앞으로 태어나게 될 친구의 아들과 딸 이름을 민혁('민중혁명'에서 따서)과 예니('마르크스'의 부인 이름)라고 지으라고 말하는 전직 학생운동가이자 군대에서조차 자신의 후임에게 편안히 말을 놓자고 말하는 이 남자. 그는 어떻게 성공한 외환딜러가 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 성공한 외환딜러는 왜 아직까지 결혼은 커녕, 변변한 애인조차 없는 것일까. 조루증이라서[각주:4]? 여자 사귀는 데 서툴러서? 서투르다...는 말은 어쩌면 이렇게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어쩌면 이것이 예준으로 대표되는 386 세대의 허위의식인지도 모른다.

- 영화의 마지막에 배달된 편지, 누구에게서 온 것일까?

그들이 미용실을 하고 있는 이 곳은 어디일까[각주:5]. 시골의 외딴 구석에 자리잡은 이 곳까지 편지를 보내 올 사람은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그 편지를 쳐다보지도 않고 익숙하게 서랍에 밀어넣는 지숙의 태도로 보아서는 자주 편지를 보내온 사람, 아마도 예준일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음을 각오하며 그들을 놓아주는 듯이 보였던 예준은 왜 아직도 살아남아서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일까. 그 내용은 무엇일까. 이 마지막은 꽤나 단호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편지를 열어볼 마음이 없으니까. 어떤 달콤한 사탕발림이 있더라도 말이다. 그들은 무표정하게 마당을 쓸고, 가위질을 할 뿐이다. 그러나 이 마당쓸기와 가위질은 아무 감정이 없는 행위라는 것이 무섭다. 그녀의 뱃속에는 새로운 아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 아기의 이름이 무엇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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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동기들과의 술자리는 재밌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편했다. 그랬다. 영화보기와 비슷했다. 그들과 내가 나누는 직장 이야기와 학교 이야기는 어떤 동심원을 그리며 뱅뱅 돌고 있었다. 가운데에 있는 어떤 것들을 터뜨리기는 모두들 불안해했다. 다만 그 주위를 맴돌며, 떨어진 부스러기들만 이야기하고 있었다. 가끔 촛불집회나 용산참사나 정부의 정책과 같은 민감한 주제들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누구도 그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아했다. 우리 모두 그 이후에 이야기하게될 어떤 것, 그것에 대해 확신이 없었던 탓이다.

집에 오는 길에 다시 그 지하철 역에 들어섰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몇 개의 전단지들이 아직 눈에 띄었다. 무리지어 있는 학생들은 모두 어디론가 가버린 후였다. 이들 중 몇몇은 한 10여년 쯤 후에 자신이 오늘 나눠주었던 전단지의 내용을 기억하고 있을까. 그들은 10년 후 술자리에서 어떤 세상을 말하고, 어떤 이야기들을 하고 있을까. 그들이 10년 후에 할 이야기는 오늘 우리가 한 이야기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임을 안다. 그래서 나는 조금 슬프지만, 안도한다. 


- 2009년 2월, 필름포럼

  1. 이는 왠지 자위 행위를 연상시킨다. 자위는 쾌락과 함께 일종의 죄책감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영화 중간에 지숙의 자위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고는 아무도 없는 영화관에서 혼자 발그레해졌다. [본문으로]
  2. 이외에도 질문은 너무 많다. 예를 들어 이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미국의 의미는 무엇인가, 재문과 예준의 관계는 어떻게 볼 수 있는가(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라는 포스터 문구), 지숙은 예준을, 혹은 예준은 지숙을 처음부터 욕망하고 있었는가, 그랬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등등 [본문으로]
  3. 감독은 이 계급성 부여에 너무 강박감을 가진 게 아닐까. 이 인물들은 너무 전형적으로 행동하고 사고한다. 그리고 가끔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지숙이 그렇다. 아무 가진 것 없이 미국으로 건너간 지숙은 돌아온 후 어떻게 우아한 '원장님'이 될 수 있었을까. [본문으로]
  4. 그래서 이 질문도 가능하다. 왜 예준은 조루증인가? 혹은 감독은 왜 굳이 예준을 조루증으로 묘사했는가? 혹은 조금 더 재밌는 질문으로는, 왜 권위적인 사람들 중에는 의외로 조루증이 많은가? [본문으로]
  5. 이 마지막 장면은 나에게는 사족으로 읽힌다. 지숙이 하이힐을 벗어던지고 텅빈 거리를 허위허위 걷던 그 전 장면이 마지막이 되는 편이 훨씬 희망적이고 좋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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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명 발키리>, 브라이언 싱어

Ending Credit | 2009. 2. 2. 16:18 | Posted by 맥거핀.



(스포일러 있음)


브라이언 싱어는 솔직한 감독이다. 이번주 <씨네 21>에 실린 인터뷰에서 브라이언 싱어는 말하고 있다. "중요한 건 이 영화가 전기영화가 아니라 서스펜스 스릴러라는 거다." 역사에 기록된 실패한 작전. 이 작전을 영화화하고자 했을 때 브라이언 싱어는 선택을 해야했을 것이다. 역사의 재현인가, 역사의 제거인가. 감독이 선택한 건 후자였고, 그 후자의 극대화였다.

글쎄. 이들을 어떻게 봐야할까. 히틀러를 죽이고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던, 슈타펜버그(독일식으로 '슈타우펜베르크'라고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대령과 그의 동지들. 영화에 묘사된 대로, 그들은 전쟁의 피해를 줄이고, 역사적 범죄자인 히틀러를 죽이고, 정의를 되살리려다 희생당한 영웅들인 걸까. 어쩌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이들이 거사를 실행했던 1944년 7월, 독일은 침몰하고 있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동부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1944년 6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으로 전세는 단숨에 역전되었다. 독일은 구멍이 뚫린 배였고, 침몰이 서서히 가까이 오고 있다고 배에 탄 사람들은 느끼고 있었다. 슈타펜버그와 그의 동지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전쟁이 이대로 끝난다면 전범(戰犯)이 되어 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되거나 그 전에 권총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겨냥해야 할 운명이었다. 어쩌면 그 전에 살아남겠다는 의지가 더욱 강했던 것은 아닐까. 영화에도 나오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히틀러를 죽이고 나치 정부를 전복한 후 연합군과 휴전을 맺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조급해한다. 연합군이 그들을 필요로 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연합군이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전쟁을 끝낸다면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없었으니까. (영화의 엔딩 자막에 그들 이후로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시도는 없었다고 말한다. 그들의 영웅성을 강조하는 말 같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들이 그들 스스로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기회는 그 이후에 거의 없었으니까.) 그들은 어쩌면 한편으로 침몰하는 배에서 빨리 탈출하려고 하는 쥐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브라이언 싱어는 이러한 해석을 단호히 거부한다. 아니 이러한 해석을 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영화의 시작, 슈타펜버그 대령(톰 크루즈)은 비망록을 적고 있다. 반(反) 히틀러의 결연한 의지.  이 의지에는 어떤 인간적인 고뇌나 의심은 묻어나지 않는다. 나치당의 일원으로서 전쟁에 참가하였던 슈타펜버그 대령은 왜 반 나치 전선에 서게 된 것일까. 영화는 이를 묻지 않는다. 대령은 이것이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그보다는 어떤 더 큰 대의를 위한 것임을 비망록에 적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브라이언 싱어는 이를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보여줄 뿐이다.

이는 왠지 슈타펜버그 대령이 비망록을 적으며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다지는 것처럼, 브라이언 싱어도 결연한 의지를 다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는 단순한 역사의 재현이 아니라고. 아마도 그가 이러한 선택을 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선택인 것 같다. 영리한 브라이언 싱어는 이 영화를 성공시키려면 역사를 제거하고, 그 작전을 마치 하나의 허구적 사실처럼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나는 브라이언 싱어가 이 작전을 왜곡시키고, 거짓말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아무런 고뇌없는 인물을 그리는 이 시작이 역사물의 외연을 두른 탈역사물이기에 의아해하고 있는 중이다.) 왜냐하면 이는 실패한 작전이니까. 여기서의 역사의 재현이란 결국은 실패한 작전임을 잘 알고 있는 많은 관객들에게 그의 실패의 체험을 고스란히 바라보게 하는 무기력의 경험이니까. 그보다는 서스펜스의 극대화라는 자신의 장기를 드러내보이는 것이 브라이언 싱어에게는 좋은 선택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리고 브라이언은 예의 그 장기를 드러내보였고, 관객들은 결말을 알면서도 혹시 성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마지막까지 바라보게 된다. (이 시작 부분에서 독일어로 진행되던 영화는 갑자기 영어로 바뀐다. 적국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대화하는 독일 장교들이라. 허구를 쓰겠다는 브라이언 싱어의 선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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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브라이언 싱어가 역사를 제거하기 위하여 쓴 전략은 어딘지 모르게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그의 전략은 슈타펜버그 대령을 신화화(化)하는 것이다. 발키리 작전의 다른 장교들과는 달리 슈타펜버그 대령은 시종일관 확신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확신이 사실을 그대로 그린 것이라면, 이 확신이야말로 이 작전의 결정적인 장애였다고 생각하고 싶다.) 이 확신은 그를 조금씩 인간이 아닌 신화의 영역으로 끌어올린다. 그리고 그의 신화는 마지막에 이르러 장엄하고 영웅적인 죽음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혹 그것으로 모자랄까봐 감독은 엔딩 자막으로 이 신화에 토핑을 올린다. 신화화함으로써 역사를 제거하기. 어쩌면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라면 이를 필연적이라고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두 가지가 의미심장하다.

하나는 브라이언 싱어의 <엑스맨>, <슈퍼맨 리턴즈>와 같은 전작들. 결함을 가지고 있으나 그를 극복하고 승리를 성취해내는 영웅들의 모습. 그것은 슈타펜버그 대령에게도 그대로 투영된다. 전쟁에서 한 쪽 눈과 한 쪽 팔과 세 개의 손가락을 잃은 전쟁영웅. 그러나 그가 이를 극복하고(그가 히틀러를 만날 때마다 가짜눈알을 집어넣는 것은 일종의 고귀한 의식(儀式)으로 보이기도 한다.) 작전을 실행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묘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또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야말로 기이하기도 하다. 굳이 불구인 그에게 이 위험한 작전을 맡기는 것이 말이다. 이 작전과 모종의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되는 객관적인 현실주의자'사막의 여우' 롬멜은 히틀러 암살 공모자들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필 이렇게 심한 상처를 입은 전쟁 부상병을 선택했다"는 것에 질책을 가했다고 한다. - 마우리체 필립 레미 <롬멜>) 더구나 이 슈타펜버그 대령을 연기하는 인물은 톰 크루즈이다. 확신에 찬 미소를 가지고 있는 제복이 잘 어울리는 남자. 신화화된 슈타펜버그 대령을 연기하기에 이보다 더 적당한 배우가 있을까.
 
그런 면에서 이 영화의 제목이자 작전명인 '발키리'는 의미심장하다. 북유럽 신화에서 용감한 전사자의 영혼을 천계로 인도하는 발키리(Valkyrie). 그것은 명백하게도 슈타펜버그 대령의 상징이다. 결국 슈타펜버그는 작전의 실패와 함께 그와 그의 동지들의 영혼을 고스란히 천계로 데려갔으니까. (영화에서 슈타펜버그는 먼저 총살되는 동지에게 "잠시 후에 만나자"고 한다.) 그러나 뭐가 어찌되었던 간에 '발키리'도 결국은 신화 속의 인물이다. 즉 브라이언 싱어는 슈타펜버그 대령을 신화의 하나로 봐주기를 계속적으로 항변하는 중이다. 

그런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신화화 전략은 어딘지 모르게 석연치 않다. 이 신화화야말로 나치즘의 중요한 거점 포인트였기 때문이다. 나치주의자 혹은 파시스트들은 신화가 가진 힘을 알고 있었다. 파시즘(나치즘)이 신화의 세계를 개척했던것은 부분적으로는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신화의 세계를 비합리적인 요소로 가득한 불가해한 영역으로 보아 단념했던 데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신화의 세계를 개척함으로써 나치즘 혹은 파시즘은 대중적 호소력을 지닌 이미지와 상징들을 활용할 수 있었다. (마크 네오클레우스 <파시즘>) 신화화된 세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앞장선 한 남자의 행동을 그리는 데에 신화화의 전략을 사용한다- 나의 석연치 않음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그러고보니 화면가득 줄지어 나부끼던 나치 깃발이 다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당연한 반응 아닌가! 나 역시 그 시절의 광경이 미학적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브라이언 싱어 <씨네 21 689호> 인터뷰) 브라이언 싱어의 다음 영화가 궁금해진다.


- 2009년 2월. 단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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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질링 (Changeling), 클린트 이스트우드

Ending Credit | 2009. 1. 25. 03:48 | Posted by 맥거핀.



(스포일러 아주 가득함)






글쎄. 무엇을 얘기해야 할까?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와 맥주를 한 캔 마시고, 비스듬히 누워 핸드볼 경기를 보았다. 그러나 경기를 보면서도 줄곧 머리 속으로는 영화를 생각하고 있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들은 모호한 상징이나 느슨한 알레고리, 혹은 꼬인 이야기로 머리를 아프게 하지는 않는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명확하며, 주인공들이 부딪히는 지점도 비교적 명확하다. 그러나 그 영화들은 도중에 조금씩 관객을 끌어당겨 결국 일정 지점에 이르러 모호한 어떤 방으로 관객을 내몰고는 살짝 문을 닫아버린다. 그러면 관객은 깜깜한 방 안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멍한 머리로 엔딩 크레딧을 바라본다. 이것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기이하다. 그저 맥주 맛이 살짝 쓰게 느껴질 정도로 기이하다.

영화가 2시간 정도에 이르렀을 때, 영화는 마무리의 수순을 밟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당한 형사는 영구 정직당하고, 경찰청장은 해임되고, 살인마는 사형을 언도받고,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되었던 안젤리나 졸리(극중이름은 크리스틴이나 이하 졸리로 쓰겠음)는 이제 재판정에 앉아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 보통의 할리우드 영화라면, 여기서 끝내야 한다. 안젤리나 졸리가 변호사와 손을 맞잡고 울음을 터뜨리고, 옆에서 플래시가 터지는 아름다운 결말. 그러나 이 영화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가 아닌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기어이 나머지 장면들을 채워넣고, 화장실에 가고 싶어하는 많은 관객들의 희망을 무너뜨린다. 졸리는 살인마를 찾아가고, 그의 사형을 지켜본다. 그리고 아이 한 명은 살아 돌아와 부모 품에 안기고, 졸리는 '희망'을 이야기하며 영화를 끝낸다. 이것은 나를 멍하게 만들고, 질문을 하게 한다. 왜 이 장면들이 필요한 것인가? 모든 관객들은 이미 그 살인마가 사형을 당할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스트우드는 굳이 그 장면을 꼼꼼하게 관객들에게 지켜보도록 한다. 그리고는 월터의 용감함을 이야기하며 졸리의 '희망'을 이끌어내고 영화를 끝낸다. 이제서야 희망이 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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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시작부분에 졸리가 아들 월터에게 하는 말이 있다. "네가 먼저 싸움을 시작하지는 말아라. 그러나 시작된 싸움은 네가 끝내라." 그리고 이 말은 영화 중반에 다시 한 번 반복된다. 글쎄. 왠지 몇 년 전에 이스트우드로부터 이와 비슷한 말을 들은 것 같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늙은 관장 프랭크는 매기에게 여러 번 반복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네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싸움은 피할 것. 그러나 싸움이 시작되었으면 네 자신을 보호할 것. 자신을 보호하지 못한 싸움은 결국 자신이 끝내지 못하는 싸움이다. 매기는 결국 이 원칙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싸움을 끝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졸리는 싸움을 끝냈는가. 이 질문은 아마도 이렇게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졸리는 자신을 보호하였는가.

물론 여기에는 하나의 요소를 고려하여야 한다. 그 싸움은 공정한 싸움인가. 사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매기는 자신을 보호하려 최대한 노력했다. 매기가 자신을 보호하지 못한 순간은 불공정하게 진행된 순간이었다. 공이 울리고 매기의 승리가 확정된 순간에 상대는 펀치를 날렸다. 그리고 매기는 쓰러졌다. 한편 졸리는 어떤가. 졸리 역시 매우 불공정한 위치에 서 있다. 졸리는 하나의 도시라는 거대한 시스템에 맞서야 한다. 그래서 졸리 역시 쓰러진다. 정신병원에 갖히고, 강제로 약을 먹어야 하고, 급기야는 침대 위에서 치료를 가장한 전기 고문을 당해야 하는 위치에까지 온다. 그렇다면 졸리 역시 이 거대한 불공정한 싸움의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인 걸까. 불공정한 싸움에서 개인은 보호될 수 없는 것일까.

이 극적인 순간에서 졸리는 이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승리한다. 그러나 이 승리는 어쩐지 조금은 이상한 방식으로 찾아온다. 졸리를 구해내는 것은 한 장의 신문이다. 그 순간 우연히도 살인마가 잡혔고, 살인마의 공범이 월터를 알아보았고, 결국 졸리의 말이 입증되는 것이다. 즉 이 승리는 졸리 내부에서 온 승리가 아니라, 외부에서 가져다 준 승리다. 우연으로 빚어진 승리. 결국 이 승리로 부당한 형사는 정직되고, 경찰청장은 해임되면서 시스템이 살짝 무너지지만, 이 승리로 졸리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이 승리가 덧없음은 어쩌면 이 장면으로 말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승리한 졸리에게 변호사(목사였나?)가 찾아와 월터가 죽었으니 그만 잊어버리라고 말한다. 졸리는 아직 월터가 살아있을 것이라고 믿는다며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항변하지만, 그는 아마도 하늘나라에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글쎄. 이와 비슷한 장면을 우리는 처음에도 보았다. 졸리는 데려온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형사는 그것은 그녀의 착각이라고 일축했다. 결국 그녀가 승리한 이후에도 월터의 생사는 여전히 모호하며, 그녀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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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아마도 이 두 장면이 필요할 것이다. 졸리는 살인마의 전보를 받고 살인마를 찾아가 그에게 진실을 말하라며 다그친다. 이 죽음 며칠 전의 졸리와의 대면 순간에도 여전히 궤변을 늘어놓던 살인마는 교수대가 눈앞에 보이고서야 죽음의 공포에 떨며 삶을 구걸한다. 그리고 졸리는 강인하고 단호한 태도로 그것을 지켜본다. 옆에 서 있는 부인의 손까지 잡아주며 말이다. 이는 부당한 시스템의 공격 속에서 우연으로 가져온 승리와는 다르다. 졸리는 기꺼이 살인마를 찾아가고 그의 최후를 지켜본다. 그녀는 이제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몇년 후 극적으로 살아난 한 소년은 죽음과 삶의 교차하는 순간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았던 월터의 모습을 증언한다. 그리고 졸리는 그제서야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계속 끝까지 아들을 찾아다녔다는 그녀의 마지막 이야기가 자막으로 올라가며 영화는 끝난다.

이 마지막 두 장면은 영화가 그 이전에 끝났으면 가져오지 못했을 새로운 희망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그 희망은 불공정한 시스템에 맞서서 얻은 승리로 주어진 게 아니다. 즉 졸리가 변호사와 손을 맞잡고 울음을 떠뜨리고, 옆에서 플래시가 터지는 아름다운 결말로서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그것은 승리와 패배가 모호한 이 세계에 맞서는 개인의 자유의지이며, 옆 부인의 손을 잡아주는 졸리의 손이며, 되돌아와 철조망에서 소년의 발을 꺼내준 월터의 뒷모습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공화당 지지자이면서도 이라크 전쟁은 반대하는, '건전한 보수주의자'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는지 모르겠다. 이스트우드는 아직 '매그넘 44'를 내려놓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불필요한 두 뱀다리를 끼워넣겠다.

뱀다리 1.
졸리는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러 같이 가자는 제의를 뿌리치며, 다른 사람들은 후보작 중 <클레오파트라>를 작품상 으로 꼽았지만, 자기만은 <어느 날 밤에 생긴 일>이 작품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라디오로 시상식을 듣는 졸리. 작품상은 <어느 날 밤에 생긴 일>이었다. 아들이 아직도 살아있을 것이라고 믿는 졸리가 옳다는 암시가 아닐까. 그냥 한 번 끼워맞춰 봤다.

뱀다리 2.
왠지 이 영화를 보면서 MB 정부와 미네르바가 생각났다. 얼마 전 뉴스를 보니 검찰 관계자는 누가 미네르바인지는 상관 없다고 말했다. 하기는. 이제 누가 미네르바인지 뭐가 중요한가. (나는 진짜 미네르바가 따로 있다고 말한 적은 없어요. 이거는 유언비어 아니죠? -_-) 누가 진짜 미네르바인지 따지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동안 검찰과 정부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정부의 말이 옳고 미네르바의 모든 말들은 유언비어라는 인식을 국민들에게 심어주었고, 더불어 사이버 모욕죄의 신설에도 탄력을 받았으며, 덕분에 인터넷에서 글 좀 쓴다는 논객들은 몸을 사리게 되었다. 월터가 진짜인지 아닌지가 경찰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엄마가 아니라고 아무리 우기건 말건, 일단은 실적을 올려 시민들에게 경찰이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게 중요하니까. 
그러나 이 이야기는 1920년대의 LA이야기이다. 지금 여기는 2009년의 시대이고 말이다. 시계 바늘을 뒤로 돌리는 능력. 그거 하나 만큼은 누가 이들을 따라 가겠는가.


- 2009년 1월, 단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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