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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Thirst), 박찬욱

Ending Credit | 2009. 5. 16. 20:45 | Posted by 맥거핀.


(미리니름 있음)




말 많은 영화 <박쥐>를 이제서야 보았다. 여러 논쟁적이며, 동시에 노골적이고 자극적인 기사들과 평론가들의 상찬과 혹평에 둘러싸여 있는, 동시에 일반 관객들의 다양한 의견을 촉발시키던 영화, 그리고 네티즌 평점 0점과 10점을 오락가락하는 회오리의 중심에 있는 영화다. 처음에는 다들 왜 이럴까. 이 영화의 어떤 면이 관객들에게, 혹은 평론가들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하는 생각을 불러 일으키는 것일까하고 생각했지만, 영화를 보고 나니, 그들이 이해가 된다. 이 영화는 한편의 원형이자, 아주 흐릿한 형상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 비문(碑紋)과도 같은 영화다. 그 비문을 어떤 각도에서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매우 달라질 수 있을 듯하다. 한마디로 모호하다. 그들의 '모호필름'이라는 이름처럼.

물론 여기서 하나 주의해야 할 것은 있다. 그것은 비문이 새겨진 앞면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그 새겨지지 않은 뒷부분에도, 혹은 그 비문이 새겨진 재질에도 살짝 주의를 기울여봐야 할 것이라는 점. 그러나 뭐 어찌되었던 간에 그것을 어떻게 읽는가는 자신의 몫이며, 자신의 즐거움이다. 광개토대왕릉비에 새겨진 몇 줄의 글에 대한 자신의 해석만을 강요하는 누구들처럼, 그 오독(誤讀)을 누군가에게 강변하지만 않는다면,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래서 여기 하나의 오독을 살짝 올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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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시작하고, 영화의 제목이 화면 중앙에 나타난다. 박쥐, Thirst. '박쥐'라는 잘 알려진 제목보다, 이 영화의 영문명인 'thirst'에 더 흥미가 가며, 내내 그 제목이 머릿 속을 맴돈다. 목마름이라, 무엇에 대한 목마름인가. 물론 여기서의 목마름은 여러 다양한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피에 대한 갈망, 항상 굶주려하는 뱀파이어의 운명과도 같은 목마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고, 태주(김옥빈)의 다른 세상, 다른 삶에 대한 동경의 목마름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고, 혹은 상현(송강호)의 신부로서의 거세되고, 억압된 삶,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것들에 대한 목마름으로 볼 수도 있다. 하여간, 그것을 무엇이라고 보건, 목마름은 결핍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즉 어떤 것이 부족한 상태, 어떤 것이 충족되지 않은, 일종의 마이너스 상태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목마름을 푸는 행위, 즉 갈증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것은 플러스가 되고자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마이너스 상태에서 벗어나 0이 되기를 갈망하는 행위이다.

이 갈증을 푸는 행위는 영화에서 수차례 다양한 형태로 반복된다. 일단 뱀파이어가 된 상현이 누군가의 피를 빠는 행위도 그러하고, 상현과 태주가 격렬한 키스를 나누는 행위도 그러하고, 혹은 서로의 발가락을 빨거나, 젖가슴을 탐하는 행위도 그러하다. 물론 섹스는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이러한 행위들 중에서 영화의 중간, 흥미로우면서도 상징적인 장면이 눈길을 끈다. 죽은 태주를 살리기 위해 그녀에게 상현이 자신의 피를 내어주는 장면. 상현은 태주의 피를 계속 받아 마심으로써 태주를 죽음에 가깝게 인도하는 동시에 그녀에게 자신의 피를 내어줌으로써 그녀를 뱀파이어로 만들어 살리고 있다. 반대로 태주는 자신의 피를 잃어가며, 점점 상현의 피를 받아들이게 되고, 이는 그녀를 더욱 뱀파이어화하여 상현의 피를 계속 갈구하게 만든다. 즉 상현과 태주는 완벽히 돌고돈다. 상현이 플러스가 되는 순간 그녀는 마이너스가 되며, 동시에 0을 향한 그녀의 갈구가 시작된다. 왜 그는(혹 그녀는) 끝없이 결핍되며, 끝없이 목말라하는가.

이를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며, 불완전한 존재로 태어났다. 인간은 세속적인 욕망, 혹은 물질적인 욕망 앞에 한없이 나약하며, 한없이 초라해진다. 이는 늙은 노신부(박인환)의 모습에서도 드러나지 않는가. 평생을 사제로 살아온, 모든 것 앞에서 초연해 보일 수 있을 것 같던 이 사내도, 세상을 보기 위해 뱀파이어의 피를 갈망한다. 즉 불완전한 존재에서 완전한 존재로 나아가기 위한 인간의 욕망은 숙명과도 같은 것이며, 천형과도 같은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완전해지려고 한다. 예를들어 뱀파이어가 된 태주가 집을 완전하게 하얗게 칠하려던 것처럼 말이다. 하얀색, 완벽하고 순수함에의 욕망. 그러나 태주의 입에서 토해져 하얀 바닥위에 번져 나가던 붉은 색의 피처럼, 완전하게 흰 것이란 유지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인간은 불완전함이란 굴레에서 벗어나 완전해 질 수 있을까. 글쎄. 만약 인간이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 완벽한 존재가 될 수 있다면 그를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렇게 불러야하지 않을까. 신, 혹은 사탄, 어쩌면 뱀파이어.

그래서 한편으로는 이 영화에서의 뱀파이어라는 것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가가 흥미롭다. 이 영화의 뱀파이어라는 존재의 느낌은 영화속 태주의 말마따나 꽤나 '귀엽고' 유쾌하게 그려진다. 그간 다른 영화들에서 그려졌던 창백한 얼굴을 한 나약한 모습의(마늘에도 놀라는), 괴상한 검은 망토를 걸치고 다니며, 때로는 우스꽝스럽게도 박쥐로 변하고 했던 그런 모습이 아니라, 강하고 힘센, 마치 슈퍼맨처럼 세상을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는 쿨하고 강한 모습의 뱀파이어로 말이다. 왠지 이 영화 속의 뱀파이어의 모습은 영화 <트와일라잇>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그 영화에서도 쿨하고 멋진 뱀파이어의 모습에 별 고민 없이 여주인공은 뱀파이어가 되기를 자청하지 않던가. 영화 속 태주가 뱀파이어가 되기를 원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태주는 뱀파이어가 되며, 도리어 예전보다 훨씬 생기를 되찾는다. 영화 처음 병든 남편(신하균) 옆에서 남편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로 보이던 다크써클 태주의 모습과 영화 후반부 태주의 모습은 또 얼마나 다른가.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상현과 태주가 쿨해 보이는 이유는 별 고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고민을 아예 안한다기 보다는 가장 결정적인 고민을 안한다. 자신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고민 말이다. (생각대로 송에 맞춰) 피 먹고 싶으면,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거 받아 마시면 되고, 그도 없으면 자살하고 싶은 사람거 먹으면 되고, 그것 마저도 다 떨어지면~, 인터넷으로 모집하면 되고~. 생각대로 꿀꺽 아..얼마나 쿨한가. 그래서 그런가. 왠지 그런 상현의 모습을 보면서 그리스 신화에 나오던 신들의 모습이 연상된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사랑과 질투와 복수와 배신이라는 인간의 오만 감정은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인간들의 죽음 앞에서는 한없이 쿨해진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들을 마음대로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고, 벌레로 변신시키고, 나무로 변신시키도 한다. 그리고 그들은 하늘을 가르며 날기도 하고, 엄청난 괴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마치 상현처럼 말이다. 그래서 한편으로 이 영화는 사랑과 배신과 복수의 감정이 난무하는 그리스 신화의 세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고민하지 않으면서도 엄청난 힘과 능력을 소유한 이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신화가 연상되지만, 위에서도 말했듯이 결국 이들이 인간의 불완전함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이는 왠지 신화의 세계를 생각나게 한다. 신화의 효용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의 중요한 테마는 인간의 불완전함, 신 앞에서의 인간의 나약함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화에서 신과 대결하려 한, 혹은 신을 모방하려 한 인간들은 모두 예외없이 파멸에 이른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끊임없이 완벽해지려 하고, 신 앞에 그 존재를 드러내보이려고, 욕망을 향해 목말라한다. 그러고보니 영화 초반부의 설정이 머리를 스친다. 백인과 아시아인, 특히 그 중에서도 독신 남자만 걸리는 병. 반쪽의 존재로서의 인간. 그들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이브'라는 치료제를 투여하는 방법뿐이다. 이브? 태초에 불완전한 존재였던 아담도, 이브의 존재로 인해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는가. 익히 잘 알듯이, 뱀에게 유혹당한 이브는 선악과를 아담과 나누어 먹었고,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다. 하아..이야말로 <박쥐>의 이야기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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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제야 알겠다. 인간의 거의 모든 이야기들은 그리스 신화이건, 창세기이건 신화적 이야기에서 그 뿌리를 두고 흘러나와 수만가지의 갈래가 되어 우리 옆에서 머무른다. 따라서 이 신화적인 이야기에서 여러 다양한 해석들과, 여러 논란들이 생겨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다만 나에게는 아직도 몇 가지 의문점들이 여전히 머리 속에서 맴돈다.

하나는, 태주는 거의 백치에 가까운 남편(신하균)을 죽이고 싶어하면서도, 그녀에게 계속 모욕과 수치를 안겨주는(그녀의 표현을 빌리면 '강아지처럼 다루는') 라여사(김해숙)는 끝까지 죽이지 않고 살려두는 것일까. 신화라는 것에 너무 꽂혀버려서 그렇겠지만, 왠지 이 영화 속 라여사는 신화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을 연상케한다. 예언자들이 신탁을 받아 그것을 몸짓과 불가해한 언어로써 전달하는 것처럼, 라여사는 마비된 몸 안에서 눈동자를 통해 모든 것을 전달코자 한다. 그리고 이 예언자들은 신화 속에서 대체로 끝까지 살아남아 그가 예언한 세상의 몰락을 그의 두 눈으로 지켜본다. 마치 라여사가 끝까지 살아남아 마지막을 지켜보는 것처럼 말이다.

다른 하나는 이 영화를 둘러싼 종교적 논쟁들이다. 이 영화는 카톨릭영화인가, 반카톨릭영화인가. 글쎄. 나로서는 인간이 불완전하고 나약하다고 말하는 이 영화가 왜 반카톨릭이 되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 그리고 그 불완전하고 나약함으로 죄를 저질렀고, 예수님께서 그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해 돌아가셨다가 부활했다고 말하는 것은 기독교의 핵심과도 같은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에 대한 부분은 확실히 조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영화를 다시 한 번 보면 뭔가 다른 느낌이 오는 것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조금 더 세속적인 질문을 하자면, 이 영화는 걸작인가, 아닌가. 글쎄. 위에서도 말했지만, 참 모호하다. 모호한 상징과 모호한 알레고리로서 관객을 혼미에 빠뜨리는 이 영화가 과연 '영화적으로' 걸작인가. 관객에게 어떤 영화보기의 쾌감, 혹은 영화보기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가. 글쎄. 이 영화가 원형적인 텍스트로서 철학적인 만족감을 제공해줄지는 몰라도, 영화적으로 훌륭한 것인가. 과연 '영화적'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맞물려 이 영화 <박쥐>는 다시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 어쩌면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간단하고 쉽게 말해서 이렇게 물을 수도 있겠다. 당신은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싶나요? 영화사의 걸작들이 그러는 것처럼, 다시 한 번 그 장면들을 보고 싶나요? 그럼 나는 이렇게 답하겠다. 일단 지금은 아닙니다. 한 두어달 후에 생각해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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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영화관을 나오면서 아주 세속적으로 던진 질문은 이거였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기이한 장면들과 괴이한 이야기로 관객을 불편함에 빠뜨리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 못지않게, 박찬욱 감독들의 영화도 그러한데, 왜 누구의 영화는 한국영화 최저관객 신기록을 향해가고, 누구의 영화는 영화관을 가득 메인 관객들을 어리둥절함에 빠뜨리는가. 김기덕과 박찬욱의 차이는 뭘까. 이것은 단순히 배급력과 홍보의 차이인가. 아니면 영화의 문법적으로, 혹은 내러티브, 혹은 만듦새로서, 이 감독들의 영화에는 무엇인가 차이가 있는 것일까. 갑자기 궁금해진 올해의 새로운 주제. 이 영화를 보러 온 수많은 관객들은 왜 이 영화를 보러 왔을까.




- 2009년 5월, 메가박스 코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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