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턴 프라미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Ending Credit | 2008.12.30 02:23 | Posted by 맥거핀.




(1급 경고: 스포일러 만땅)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을 보며 멍해졌다. 영화가 끝나고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어쩌면 배가 고파서 일지도 몰랐다. 시간이 안 맞아 영화관에서 핫도그를 하나 허겁지겁 먹고 들어갔는데, 안 먹느니만 못한 거였다. 영화관에서 파는 음식들은 겉보기에 비해 대체로 터무니없는 맛과 가격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날씨가 추워서인지도 모르겠다. 올해 들어 가장 추운 날씨라는 위세를 부리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어쨌든 간에 아무튼 멍하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었다. 무엇이 이처럼 멍하고 두렵게 만드는 것일까.


1. 기독교와 예수의 탄생
아마도 이렇게 말하는 건 쉬운 선택이 될 것이다. 이미 <필름 2.0>에서 논증한대로, 이 영화는 기독교의 여러 알레고리들을 느슨하게, 때로는 옥죄이며 펼쳐 보인다. 그 중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물론 아기 예수의 탄생 이야기. 뭐 일단 <이스턴 프라미스 Eastern Promises>라는 제목 부터가 박해받는 유대인 백성들을 동방에서 온 메시아가 구원할 것이라는 성경 말씀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니콜라이의 몸에 새겨진 수많은 문신들, 그건 왠지 카타콤의 여러 표지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일견 이러한 연결은 안이하고 도식적이며 조금은 기이해 보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피를 흘리며 들어온 여자가 낳는 아기가 예수의 상징이라고 보았을 때, 이 아이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영화 속에서는 동정녀 마리아와 마찬가지로, 이 여자도 동정녀로서 이 아이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악의 축 '세미온'이다. 이것은 왠지 이 도식이 간단하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가지게 해준다. 다시 한 번 처음으로 돌아가 아버지가 '악의 중심'이라면, 이 아이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2. 몸
크로넨버그의 영화에서는 항상 몸이 먼저였다. 그 몸을 가진 인간이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보다는 몸 자체의 부피와 무게와 질감으로 항상 우리를 압박해왔다. 이제 이 영화에서, 그 몸은 다시 한 번 그가 살아온 모든 것이 되었다. 러시아 감옥에서는 자기가 살아온 인생을 문신으로 온 몸에 남긴다. 그리고 결국 그 문신들에는 또다른 문신들이 새겨진다. 깊게 패인 칼자국들이.

이것이 무게감이 느껴지는 것은 크로넨버그의 전작들에서 유래된 바도 크지만, 한편으로 이것이 앞으로의 우리 인간들을 말해 준다고 생각하면 불온한 상상인걸까. 우리들 역시 많은 문신들을 온 몸에 지니고 있다. 그 문신들은 잉크로 명징하게 새겨져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대신 명징한 로고들로 자신의 몸을 칭칭 감는다. 그리고 그것을 잃을까봐 잠자리에서도 전전긍긍한다. 이건 어쩌면 크로넨버그의 미래에 대한 묵시록인지도 모른다.


3. 세계의 충돌
명확한 두 세계가 충돌한다. 안나의 세계와 세미온의 세계. 두 세계는 분리되어 있지만,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오토바이를 타고 조금만 가면 닿는 가까운 세계. 그리고 안나는 누르지말아야 할 초인종을 누르고 또다른 세계의 문을 연다. 여기에서 세계의 충돌이 일어난다. 물론 세계의 충돌은 여기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하다 못해 아스날과 첼시의 세계에서도 충돌은 끊임없이 일어난다. 사람들은 경기장을 나오며 목이 터져라 각자의 응원가를 부르고 구호를 외친다. 영화에서 보여지는 대로.

그리고 니콜라이의 안에서도 충돌은 일어난다. 그는 이 운명을 감내해야 할 처지에 있다. 왜냐하면 그는 양 쪽 모두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한 쪽 세계에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다른 쪽 세계를 부정해야 한다. 그 부정(否定)은 단순한 부정이 아니다. 그 부정은 자신의 근본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가 조직에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정부의 개라고, 어머니는 창녀라고 말해야 한다. 그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그가 원하는 대로 한 쪽 세계를 차지했을 때, 그는 반대쪽 세계로 나올 수 있을까. 아니 그 상태에서는 반대쪽 세계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는 이미 하나의 세계를 구축했는데.


4. 세계의 혼합
그래서 바로 여기 니콜라이에서부터 세계는 서서히 혼합되기 시작된다. 아니 그 혼합은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부분을 영화는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의 처음, 살인이 일어나는 공간은 누구나가 쉽게 드나드는 이발소이다. 평범하고도 선한 세계의 어디에나 있는 이 공간은 그러니까, 악이 진두지휘되는 공간인 셈이다. 여기에서 머리를 깎아주는 무딘 칼은 목으로 파고드는 날이 선 칼이 된다. 동시에 구슬픈 선율이 울려퍼지고, 가족들이 함께 모여 서로 식사하는 러시아 식당은 모든 악의 시발점이자 종착점이 된다. 즉 굳이 안나가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열어젖히지 않았어도 또다른 안나가 아마도 쉽게 문을 열었으리라는 것이다.

이 세계의 혼합의 중심에 니콜라이가 있다. 그가 악의 세계의 우두머리에 올라섰을 때, 우리는 그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선의 중심이자 악의 중심인 세계. 그게 바로 우리가 사는 세계이다.


5. 영국
영화 내내 보여지는 영국의 거리는 차갑고, 젖어 있고, 음울하다. 고색창연한 건물들과 영국 특유의 날씨는 잘 어우우려져 영화 내내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영화 <프롬 헬>이나 <스위니 토드>에서 보는 그러한 거리들의 연장선상에서 위의 영화들과 비슷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습한 지옥도의 풍경이라고 하면 과장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시체가 내던져지는 그 곳은 지옥의 입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넘실대는 물결은 마치 일렁이는 불꽃같고 말이다. 오 주여.

아기를 낳고 죽어간 그 여자는 러시아를 떠나 이곳으로 왔다. 그녀가 일기에 쓴 대로 모두가 죽어 있던,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던 땅속의 땅, 러시아를 떠나 따뜻하고 새로운 기회의 땅, 새로운 신천지를 꿈꾸며. 아마도 그녀는 지중해의 따뜻한 햇살을 그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끌려온 이곳 영국은 또다른 차갑고 축축한 지옥이다. 안타깝다. 차갑고 어두운 곳을 지나 새롭게 오게 된 곳이 그만큼,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그보다 몇 배는 더 차갑고 어두운 곳이라니.

니콜라이는 안나에게 말한다. 여기에서 아기를 키우는 것이 낫다고. 러시아보다는 이곳에서 당신이 키우는 것이 낫다고.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따스한 햇빛 속에서 아이는 안나에게 안긴다. 그러나 이 마지막에 이어지는 장면은 기이하고 무섭다. 니콜라이는 세미온이 앉아있던 바로 그 자리에 앉아 있고, 여자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린다. 아버지는 이미 죽기 전부터 죽어 있었다고(탄광에서), 그리고 우리 모두는 죽어 있었다고. 그리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간다.

이는 왠지 불길한 요한계시록의 목소리인 것처럼 느껴진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곳 역시 선의 중심이자 동시에 악의 중심인 세계. 가까운 곳에 또다른 이발소와 러시아 식당들이 있는 세계. 이 세계에서 아기는 어디로 가게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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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간에 아무튼 멍하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었다. 올해 본 영화 중 N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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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수오 마사유키

Ending Credit | 2008.12.16 02:10 | Posted by 맥거핀.



난 언젠가부터 법을 싫어했다. 글쎄,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잘못된 판결로 피해를 본 경험도 없고, 주위의 아는 친척이 소송을 당한 후, 판사와 변호사 간의 결탁으로 부당한 판결을 받았고 그 후에 자살에 이르렀다는 식의 드라마틱한 스토리는 더더구나 없다. 아무튼 간에 말이다- 법을 싫어했다.

그래서 그랬을까. 대학시절 '법학개론' 수업의 최종 기말 레포트 주제는 '법의 필요성에 대해 논하시오' 였는데, 나는 온갖 이상한 논리를 가져다 붙인 끝에 법은 곧 사라져야만 마땅하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뻔뻔스럽게도 우쭐해져서는 그걸 제출했다. 글쎄. 아마도 다른 걸 쓰기도 어지간히 귀찮았겠지만, 한편으로는 이로써 법에 대한 소극적 저항을 한다는 이상 심리도 거기에 들어가 있음을 부인하지는 못하겠다. 아무튼 나의 이 삼류 최후 진술을 들은 판사는 기꺼이 C학점의 판결을 내려주었고, 나는 항소는 포기하고, 그 강사는 고시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변태들 같이 생겼다는 둥, 평생 강사나 해먹고 살으라는 둥의 같은 악담을 술자리에서 늘어놓는 것으로 울분을 삼켰었던 것 같다.

아무튼 이로써 나의 법에 대한 언페어한 태도는 더욱 심해졌는데, 급기야는 고시 공부하는 친구들을 불러내서는 술을 사준다는 핑계로 취조를 행하기도 했다. 너 말야. 왜 멀쩡한 전공 놔두고 고시 공부를 하고 있는거야. 니가 법을 좋아해. 뭐. 공정한 판결. 웃기는 소리 하지마. 니가 다른 사람을 단죄할 수 있다고 생각하냐. 니가 고시 공부하는 건 딱 하나 이유밖에 없잖아. 그냥 잘 먹고 잘 살고 싶은거지. 사회에서 대접받으면서. 너 같은 썩어빠진 생각을 가지고 있는 녀석이 무슨 다른 사람을 심판한다는 거야. 웃기지마.

물론 이 말들은 공정하지 못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는 이야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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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제목만으로도 이미 명확하게 그 주제를 내비치고 있는 이 영화는 혹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제를 깨닫지 못할까 저어하는 감독의 친절한 배려로, 시작부터 결론을 내리고 시작한다. 열 사람의 죄인을 놓치더라도, 한 사람의 죄없는 사람을 벌해서는 안된다는. 그리고 시작에서 예고한대로, 한 선량한 청년이 성추행범으로 몰려 부당한 판결을 받게되기까지의 과정을 환부에 메스를 들이대듯, 세밀하게 드러내보인다.
 
그러나 미리 말해두지만, 이 영화는 그 과정을 결코 공정하게 묘사하지는 않는다. 글쎄, 과연 공정함이란 무엇인가라는 형이상학적인 질문은 제쳐두고라도, 그럼 이렇게 묻고 싶을 것이다. 영화가 공정할 필요가 있는가. 영화는 지극히 편파적인 주제를 편파적으로 묘사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물론 나도 그걸 부인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이 영화 역시 지극히 편파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편파적임을 교묘하게 숨기려고 하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정말 불공정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잘못된 판단으로 한 사람의 죄없는 사람을 벌하게 되는 것과, 죄 있는 자에게 속아 넘어가 죄있는 자를 벌하지 않는 것 중의 어떤 것이 더 큰 문제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도 어려운 일이거니와, 그 문제까지 여기에 가져오고 싶지는 않다. 사법제도의 폐해? 영화의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 그런 것을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이 영화는 줄곧 하나의 관점을 지지하고 있는데, 그 관점이 마치 공정한 관점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일견 주인공 텟페이를 관찰하는 시점을 취하고 있다. 주인공 텟페이가 사건에 휘말릴 때, 그리고 경찰에 붙잡힐 때, 그리고 유치장과 법원을 오갈 때, 카메라는 한 걸음 물러서서 이 모든 사건을 조용히 바라보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 카메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카메라다. 카메라는 실제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준다. 바로 텟페이가 실제 사건에 휘말리는 그 순간. 실제라면, 우리는 절대 그 순간을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카메라는 전철에 따라들어가 기어이 그 장면을 잡아낸다. 이는 판사라면 절대 볼 수 없는 장면이다. 우리가 실제의 이 사건의 판사라면 무죄를 내릴 수 있을까.

게다가 주인공 텟페이는 카세 료가 맡고 있다. 유약하고 선량한 청년의 이미지가 다시 이 영화에서 비슷하게 활용된다. 여기에 판사의 교체 전 후의 극명한 대비, 목격자가 나타나는 극적인 시점, 착하고 힘없는 주인공 텟페이의 어머니와 친구들이 더해지며 이 영화는 선량한 청년을 범죄자로 만드는 비극물이 된다. 즉 텟페이라는 착하고 성실하며, 아무 죄없는 청년을 법이라는 국가 시스템이 판사와 국선변호사와 경찰이라는 하수인을 이용하여 무너뜨리는 것이다. 아 이 얼마나 슬프고도 가슴아픈 이야기인가.

그러나 이 슬프고도 가슴아픈 이야기를 이 영화는 마치 다큐멘터리를 찍듯이 보여준다. 어쩌면 여기에 가장 기이한 점이 있다. 극적이고도 화려하게 이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실제의 사건을 다루는 양 이를 보여주는 태도.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해두지만, 이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그러면서도 다큐멘터리인 척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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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면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것이 이런 얘기일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비극적인 일이 실제로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는 것 말이다. 우리 삶에도. 그것이 이 영화를 다큐멘터리처럼 찍은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저 상대방의 말은 절대로 듣지 않으려 드는 악마같은 판사, 그냥 죄를 인정하는 것이 낫다고 심드렁하게 얘기하는 국선변호인, 어떻게든 죄를 인정하게 만들려는 폭력적인 경찰. 이들은 모두 과장된 캐릭터이지만, 이 시스템 속에 이 과장된 캐릭터들은 실제로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감독은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묻는다. 당신이 판사라면 무죄를 내려줄 것인가. 글쎄. 나라면 그러지는 못할 것 같다. 그것이 아마도 이 영화의 가장 무서운 점이다. 그것이 실제로 만들어진 이 사회의 시스템이기에. 

그래서 아마도 나는 옛날의 친구에게 다시 이렇게 말해야만 할 것 같다. 너는 누군가를 심판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아마도 그건 거짓일거야. 너는 그저 수많은 정보를 가지고 판단을 내리는 정보처리기계일 뿐이지. 그것도 불확실한 판단을 내리는.

물론 이것은 또 하나의 불공정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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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물론 나는 감독에게 낚인 것이고, 그냥 파닥거리면 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왠지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입 안에 물린 갈고리에서 쓴 맛의 피가 솟아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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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시르와 왈츠를, 아리 풀만

Ending Credit | 2008.12.09 00:23 | Posted by 맥거핀.


영화가 끝나고, 다른 일 때문에 재빨리 극장을 빠져나오면서부터, 줄곧 무엇인가 아음 한 구석이 불편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를 본 지 며칠이나 지났는데도, 이 영화 <바시르와 왈츠를>을 생각할 때마다 여전히 그 불편한 기억이 남아있다. 이 불편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무엇이 이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찜찜하게 만드는 것일까.

물론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이 영화는 이스라엘 방위대에 의해 저질러진 레바논에서의 팔레스타인 양민들 학살 사건을 다루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아우슈비츠나 광주나, 난징 혹은 코소보 등에서의 그러한 학살 사건들을 간접적으로 보거나, 듣게 될 때에 느끼는 감정들, 그의 연장선상들일 수 있다.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잔인하며, 비극적이고, 설명할 수 없는 그러한 사건들. 그러한 사건들을 보면서 가질 수 있는 인간들의 보편적인 인간성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나 타인에 대한 공포, 혹은 자신에 대한 공포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런 형이상학적인 질문만은 아닌 듯 하다. 무엇이 이렇게 불편하게 만드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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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그 보다는 훨씬 더 단순한 데에서 답이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는 가해자가 나중에 과거의 잘못된 일들을 영상이나 문학으로 펼쳐 보일 때, 그것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복잡한 감정의 한 부분일런지도 모르겠다. 이른바 소위 '용서를 구하는 방식' 그것에서 비롯되는 불편함. 

용서를 구하는 방식에도 물론 여러가지가 있다. 먼저 첫번째는 용서를 구하는 척 하며, 실질적으로는 본인도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잘못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나, 나도 어쩔 수 없이 그랬다고 주장하는 유형. 그리고 그래서 용서의 탈을 쓰고, 사실은 자기합리화라는 얼굴을 들이미는 유형. '통석의 념' 일명 니뽄스타일. 이것은 사실 용서 구하기라고 보기 어려우니 일단 패쑤. 그럼 이건 어떨까.

가해자가 과거의 사건을 직접적으로 거론하며,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당사자들에게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구하는 방식. 그리고 피해자의 용서의 결단, 그리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손 맞잡기. 그리고 물질적인 보상. 이른바 공식적이고도 방송적인 유형. 짝짝짝.

그러나 이를 한편으로 피해자의 시각에서 보면, 억울하기도 한 것이다. 그동안 겪었던 그 무참한 수많은 일들이 물질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일까. 떠올리기 싫은 옛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저 용서 구하기 라는 것은 한편으로 보면 가해자가 자신의 마음 편해지자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이른바 <밀양>의 억울함. 아니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죽은 자는 무엇으로 돌아온다는 것인가.

그래서 여기에서 가까운 데에 도사리고 있는 이 단어가 '용서'와 밀접하게 연결되는 것이다. '복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지극히 심플하고도 공평한 가르침.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수많은 복수담들과 그 복수담의 후일담들과 그 후일담들의 또다른 복수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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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바시르와 왈츠를> 같은 유형은 어떨까. 그러나 이는 왠지 모호한 구석이 있다. 영화는 감독 아리 풀만(실제 자신의 이야기를 쓴 것인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처럼 쓴 것인지는 모르겠으나)이 레바논 전쟁에서 겪었던 일들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음을 떠올리는 데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아리는 옛 전우들, 그리고 전쟁에 참여했던 다른 사람들, 종군 기자 등을 만나며, 그것이 그 때 자신이 가졌던 어떤 임무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가 결국에는 기억을 찾았다는 그런 이야기.

물론 이 이야기는 한 남자의 기억 되찾기가 중심을 이루는 이야기는 아니다. 한 남자의 심리학적 임상 사례를 다루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러나 왠지 그렇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한 남자가 기억을 잊어버렸어. 근데 왜 그랬는지 알아? 그건 심리적인 외상을 입었기 때문이야. 그런 심리적인 외상은 대체로 극단적인 상황에 빠졌던 사람들이 겪곤 하지. 왜 있잖아. 아우슈비츠에 갇혔던 사람들이 거기에서 나온 후 몇몇 부분들에 대한 기억을 영원히 잃어버린다고 하지. 근데 말이야. 그런 심리적인 외상은 피해자만 입는 것도 아니야. 때로는 가해자가 그런 심리적인 외상을 겪기도 하지, 아 그럼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인 건가. 뭐 그런 이야기.

물론 이는 부당한 공격인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에는 몇몇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제목이 의미하는 바시르와 왈츠를 장면이라던가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영화관에서 직접 보시길), 무엇보다도 충격을 주는 마지막 장면들. 그러나 그런 몇몇 인상적인 장면들을 제외하면, 군인들은 해변가에서, 혹은 배 위에서 딩가거리며 놀다가 임무를 받고 적에게 진격하고, 퇴각하고, 폭발하고, 총을 맞고, 총을 쏘고, 떠뜨린다. 아 그게 군인의 임무라고? 명령을 받으면 해야하는 군인의 임무라고? 그래서 그러지 말자고, 이런 영화 만드는 것 아니냐고? 다시는 그러지 말자고 이런 영화 만드는 것 아니냐고...

그러나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아무리 울어도. (물론 당연한 말이지만 복수한다고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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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아가씨, 박정숙

Ending Credit | 2008.11.30 22:22 | Posted by 맥거핀.


다큐멘터리, 게다가 독립 다큐멘터리. 마치 이는, 이 영화의 감독인 박정숙 감독이 다른 인터뷰에서 말한 촬영 대상으로서의 여성 노동자를 연상시킨다. 노동자라는 것의 약한 위치, 게다가 여성.

이런 조건이라면, 사람이 많이 들기를 기대하는 것은 애당초 무리겠지만, 그래도 나름 프라임 시간대라는 토요일 오후 7시의 인디스페이스는 민망할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개봉 2주차임을 감안하더라도, 조금 심했던 것이, 관객은 나와 여자친구 단 둘 뿐. 덕분에, 여자친구는 혹시 상영안하는 것 아니냐며, 불안하게 주위를 둘러보았고, 나는 극장 직원이 사람 수를 확인하러 들어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어색한 표정을 지어보여야만 했다.



나는 대체로 영상보다는 활자를 신뢰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영상보다는 그것을 기록한 것이 훨씬 더 많은 것을 대상자에게 전달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영상은 상상력을 제한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글을 읽을 때에 머리 속으로 만드는 가상의 세계. 그 가상의 세계는 같은 글을 읽더라도 모든 사람들에게 조금씩 다르게 그려진다. 그러나 그것이 영상화가 되어 나타날 때, 그 영상화는 우리의 상상력을 하나의 방향으로 제한한다. 그래서 어쩌면 소설을 영화화한 많은 작품들이 그 소설을 감명깊게 읽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실망감을 주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그러나 다큐멘터리, 더구나 이런 이야기 만큼은 영상이 활자를 압도한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백마디의 말보다 충격적인 한 장의 사진이 사건의 많은 부분을 설명한다. 이행심 할머니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파오지만, 오그라든 손과 발은 다른 모든 말들을 압도한다. 그래서 아마도 다큐멘터리에서 항상 그런 부분들이 이야기될 것이다. 카메라는 대상을 어떻게, 어떤 느낌으로 바라보는가. 영상은 무엇을 담고 있는가.



격리. 이행심 할머니의 증언대로, 일제시대부터 한센병 환자에 대해 정부 및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던 시각은 치료가 아닌 격리였다. 쓰레기를 치우듯, 더러운 어떤 것을 가둬놓는 것. 치료를 해서 낫게 해주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더러운 것이니 결국은 씨를 말려야 할 존재.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서야, 일제 시대부터 그들에게 부과된 힘든 노동들과 차별어린 시선들과 급기야는 아이를 못 낳게 하고 키우지 못하게 하는 일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래서 할머니가 아이를 빼앗기고 주저앉아 '그 때까지 남아 있던' 손가락으로 풀을 쥐어뜯었다고 말하는 대목은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것을 조금은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들 마음 속의 인간성에 대한 격리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했을 때에만 그러한 시선들과 인식들이 가능해지리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한센병 환자들을 인간이 아닌 다른 어떠한 것으로 보는 시선, 따라서 그들은 영혼도 생각도 없는 존재들이며, 독을 퍼뜨리는 존재일 뿐이다라는 인식. 지나친 말처럼 느껴지는가? 그러나 한편으로 이 나라 어딘가에서는 주위에 장애인 아동들이 다니는 학교만 들어서도 시위가 일어나는데, 이를 지나친 말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러한 시선들과 인식들과 이 영화는 정면으로 맞서 싸우고 있다. 맞서 싸우는 방식은 간단하다. 이들도 인간임을 다시 일깨우는 것. 할머니가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고, 남편과 농담을 하고, 농작물을 다듬고, 차에 올라타고 하는 일상의 수많은 장면들. 그리고 스크린 안에서 보여지지 않은 그들의 한숨과 분노와 눈물들. 이 수많은 장면들은 지극히 당연한 진리를 다시 우리들에게 일깨운다. 그들도 인간이라는 것. 그래서 이 영화는 결국에는 묻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게 될 때에,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는가. 그리고 지금은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모든 다큐멘터리들은 현재 진행형이다. 다큐멘터리가 현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한은 그렇다. 물론 영화 내용적으로 보자면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보상 문제는 아직 진행 중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일제시대 강제 격리와 노동에 대한 일본 법정에의 청구, 그리고 아마도 그 뒤로 이어져야 할 한국 정부에 대한 보상 신청.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일본 변호사들에 비해, 우리나라 변호사들은 뭐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조금 더 넓은 의미로 보자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인식의 장벽들이 아직은 높기 때문이다. 아직도 널리 퍼져 있는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적대적이고도 차별적인 시선, 그러한 시선들이 장벽을 이루고 있는 한 이 영화의 싸움은 계속 현재 진행형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모든 다큐멘터리들은 현재 진행형임과 동시에 그것이 관객들의 행동을 변화시킬 때 최종적으로 완성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행동 변화라고 해서 거창한 것만은 아닐 게다. 작지만 커다란 인식의 변화부터가 그러한 것들일 게다.

그래서 결국은 어떤 의미에서 이 이야기는 스크린에서 보여지지 않은 것들이 덧붙여질 때 완성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로 이 영화를 조만간 작은 인디스페이스에서가 아니라 토요일 저녁 7시 브라운관에서 만나게 되기를 희망한다.



행복할 행(幸)자에 마음 심(心)자를 쓰시는 이행심 할머니. 그 이름 그대로 앞으로 행복한 마음으로 사시게 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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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상 그렇지만, 스포일러 있음)


날은 어둡고, 눈은 끊임없이 흩날리고, 새는 낮게 하늘을 선회하고, 어디선가 낯선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북구의 어느 밤. 피가 모두 어디론가로 사라진 채 죽어 있는 남자는 눈이 녹아 흘러내리는 하수구 옆 도랑에 버려져 있다. 목에는 작은 이빨 자국만 남겨진 채.


이러한 이야기는 사실 이제 너무도 많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의 피를 먹어야만 살 수 있는 뱀파이어라는 존재. 그리고 그의 천형과도 같은 운명. 그 잔인하면서도, 스산한, 그러면서도 묘한 에로티시즘을 발산하는 그런 이야기들. 그러나 이런 이야기라면 어떨까? 그 뱀파이어가 어린 소녀이고, 그 옆 집에는 세상 누구와도 쉽게 소통을 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 소년이 살고 있다면. 이런 작은 설정에서 출발한 이 영화는 때로는 예상되는 지점에서, 그리고 더 자주는 아주 뜻밖의 지점에서 보는 이들의 마음을 건드린다.



영화의 제목은 <렛미인 Let The Right One In>. 영화에서도 설명되지만, 뱀파이어는 그 곳의 누군가가 초대해 주어야지만 그곳에 들어갈 수 있다. 바로 이 제목은 그를 설명하고 있는 셈인데, 이 설정은 조금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이 영화는 (당연한 말이겠지만) 다른 여러 뱀파이어를 다룬 문학이나 영화들에게서 많은 부분을 빚지고 있다. 즉 다른 영화의 클리셰들이 이 영화에서도 계속 반복된다는 것인데, 예를 들어 뱀파이어는 햇빛을 보면 안된다거나, 뱀파이어에게 물린 자는 뱀파이어가 된다는 설정 등이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초대해 주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는 설정이 다른 영화나 문학에 있었던가? 아니 그건 그렇다치고, 초대받지 않고 들어간 뱀파이어는 몸의 곳곳에서 피를 토해내게 된다라...

물론 이와 비슷한 것은 다른 이야기들에도 있을 것이다. 뱀파이어는 결국 인간이 아닌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동물일수도, 괴물일수도, 혹은 악마일수도 있다. 그러나 이 피를 토해내게 된다는 설정이 자못 의미심장한 것은, 뱀파이어는 피를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피는 뱀파이어에게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 (뱀파이어 소녀 '이엘리'는 피를 담은 통을 놓고 온 아버지에게 소리친다. 어떻게 그것을 놓고 올 수 있냐고. ) 

어떤 의미에서 뱀파이어의 '피'와 같은 것을 인간의 입장에서 대입해 보면 '마음'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무엇일까?) 물론 피와 달리 인간의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때로 마음이 눈에 보일 때도 있다. 우리가 누군가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내어 놓아야(드러내 보여야) 한다. ('이엘리'의 온 몸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것처럼) 그리고 대부분의 인간들은 누군가의 마음을 갈구한다. 뱀파이어가 피를 갈구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물론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에 이빨 자국을 내어 그것을 빨아들일 수는 없다. 그것이 가장 슬픈 점이다. 또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고 그렇게,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하던 소년 '오스칼'은 뱀파이어 소녀 '이엘리'에게 마음을 건넸고, 뱀파이어 소녀 '이엘리'는 기꺼이 자신의 피를 건넸다.



영화의 마지막, (뭐 아마도 그럴 수 밖에는 없겠지만) 소년과 소녀는 멀리 길을 떠난다. 해피 엔딩이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너무 스산한 풍경이다. 기차 커튼은 열려진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으로 흩날리고, 기차 안에는 그들 외에는 어떤 승객도 찾아볼 수 없다. 이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세상의 끝으로. 누구도 그들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은 갈 수가 없다. 왜냐하면 (다시 또 당연한 말이지만...;;) 뱀파이어는 다른 사람의 피를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멀어지려고 하나, 다른 사람과 멀어져서는 살 수 없는 존재. 그것이 바로 뱀파이어의 가장 슬픈 점이다. 또 어떤 의미에서는.

(아마도 이 부분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존재가 '이엘리'의 아버지일 것이다. 다른 사람과 최대한 거리를 유지하며 살려고 하나, 그럴 수 없는 존재. 영화의 시작부에서 여러 '장비'들을 능숙하게 재빨리 챙기는 그의 손놀림은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많은 우리네 아버지들을 연상시켜 마음을 아프게 한다. 아버지들은 늘상 말하지 않는가. 이 일을 때려치우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건, 마누라와 자식새끼 때문이라고.)

그래서 그들은 검게 시작된 엔딩 크레딧이 서서히 붉은 빛으로 변해갈 때, 마지막 붉은 빛이 화면에서 사라졌을 때 즈음에는 또다른 곳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날은 어둡고, 눈은 끊임없이 흩날리고, 새는 낮게 하늘을 선회하고, 어디선가 낯선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북구의 어느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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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09.03.17 23: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때 이제부턴 오스칼이 이엘리를 위해서 아버지가 해야 할 일을 대신 할 수 밖에 없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러자 그 '아버지'라는 존재가 어쩌면 처음엔 오스칼과 같은 만남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었을까 .. 라는 생각까지 (결국엔)들고 말았죠. 좀 억지스런 생각일지는 모르지만요. ^^;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09.03.18 22: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 리뷰를 쓰고 그 이후에 다른 글들을 보니, 거의 대부분 그렇게 보시는 시각이 많더군요. 원작소설에도 '하칸'이라는 캐릭터로 나온다더군요. (아버지가 아니라)
      뭐 저는 거의 기본배경지식이 없는 상태로 봐서, 그냥 단순하게 아버지라고 봤지만요. (우리네 아버지들을 연상시키도 했구요.)
      네..마지막이 스산하죠. 오스칼이 선택한 삶이라고는 하나, 그 나이에 선택을 하기는 어렵지요.

자우림- 27

2008.11.20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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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콜리 너마저- 끝

2008.11.16 0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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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 그리고 <이리>

Ending Credit | 2008.11.14 01:54 | Posted by 맥거핀.

녀석은 힘들다 했다. 회사는 경제불안과 환율상승과 지도력부재로 이미 어려움에 빠진 상태였고, 더구나 그 녀석은 회사에 다소간의 빚도 들어가 있었다. 회사는 미끄러지는 중이었고, 그 녀석 역시 그 미끄럼틀에 올라탄 채였다. 그걸 알아차린 나는 이야기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이야기는 순식간에 수능날이라는 데서 97년 수능이야기로 옮아갔고, 덕분에 녀석과 나는 필요 이상의 몇 가지 정보를 알게 되었다. 내가 그 녀석보다 수능 점수가 8.2점이 좋았다는 것에서부터, 그날 날씨가 상당히 추웠다는 것까지. 그리고,지금은 어딘가에서 아이를 키우고 있을 시끄러운 여학생에서부터,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결혼해버린 동기의 이야기까지, 몰라도 좋을, 그러나 알았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 없는 그런 이야기들을.
나는 녀석에게 필요 이상의 이야기들을 들은 값으로, 그러나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필요 이상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값으로 술값을 치렀다. 그리고 우리는 껄끄러운 친구를 불렀다. 아니, 다시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껄끄러운 친구를 불렀다. 나는 녀석이 껄끄러워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어느 정도는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즐김의 한계는 딱 그 친구에게 전화를 하는 것까지 였다. 그친구가 진짜로 오겠다고 했을 때, 나는 보리의 쓴 맛을 다시 되새기고 있었다. 나는 심지어 내가 그 녀석보다 수능 점수가 8.2점이 앞섰다는 것까지 잊어버렸다.

......................................


똑같은 이야기는 반복된다. <중경>의 쑤이는 성인용품점에 들어가고, <이리>의 태웅 역시 성인용품점에 들어간다. 몇 십년만에 옛 친구를 만난 할아버지의 옆에서 신기하게 그들을 바라보는 진서, 그 옆으로 할머니들이 '이별의 부산정거장'을 부르며 지나가고, 벤치에서 자신이 따귀를 때렸던 창녀에게 지친 손을 내밀던 쑤이 옆으로는, 마을 주민들이 '인터내셔널 가'를 부르며 지나간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이 외에도 많은 부분에서 동일한 장면들이, 동일한 느낌으로, 동일한 카메라 워킹으로 반복된다. 단지 이 두 이야기는, 즉 <중경>과 <이리>는 같은 주제를 같은 느낌으로 반복해서 찍은 것에 불과하단 말인가. 결국은 같은 이야기의 또다른 변주란 말인가.

물론 다른 부분은 있다. 동일한 듯 하지만, 두 이야기는 하나의 대구를 이루고 있다. 예를 들어서 <중경>의 쑤이는 점점 자신의 몸을 일부러 더럽히는 쪽을, 자신의 몸을 일부러 다른 이에게 내주는 쪽을 택하지만, 그 몸은 계속 다른 이에게 거부 당한다. 예를 들어, 한국인 유학생 김광철은 그녀에게 자신의 몸을 확인하게 하며, 노숙자는 그녀가 겁탈하려고 할 때(이것은 겁탈이라고 말할 밖에는...), 그녀의 뺨을 세차게 때린다. 그리고, 경관 역시 그녀의 몸을 거부하고, 커다란 Doll을 껴안는다. 그리고 그녀는 그 대신, 즉 그의 성기 대신에, 그의 성기를 닯은 물건인 총기를 소유한다. 
반대로 <이리>의 진서는 대신에 자신의 몸을 지키려고 하나, 그 몸은 계속 유린 당한다. 이리역 폭발사고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진서, 그녀에게 단 하나 정상으로 남아 있는 몸은, 바로 그 정상으로 남아 있다는 이유 때문에 약탈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장률 감독의 다른 영화의 변주와 마찬가지로, 공간의 이야기를 커다랗게 확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제목 <이리>('익산'이 아니라), 그리고 <중경>이 상징하는 것처럼, <이리>의 속성, 그리고 <중경>의 속성을 그냥 그 도시에 살고 있는 개인들에게 커다랗게 투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익히 잘 알고 있겠지만, '이리'는 1977년 폭발사건 이후로 폭발 이후의 어떤 것, 폭발 이후의 허무함과 슬픔과 잿더미를 상징하는 어떤 것으로, 말할 수 있으며, '중경'은 폭발 직전의 어떤 도시, 그리고 우연하게도 이 영화가 촬영된 직후, 대지진으로 알려진 도시로 상정할 수도 있다. 그리고 각각의 두 영화의 여자캐릭터, 즉 진서와 쑤이는 폭발 이후의 남겨진 후유증을 상징하는 삶과, 폭발 이전의 끈적하고 불안한 삶을 상징하는 캐릭터로 볼 수도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도 생각나는 것이 있다. 어렸을 때 할머니 댁에는, 시골집들이 대개 그러듯이 여러 신문지들로 벽이 발라져 있었다. 그 중 안방벽을 둘러싼 신문들 중에 그 사건 몇 주 후 그 기차 기관사 미망인을 인터뷰한 기사가 있었다. 기사의 내용은 그런 내용이었다. 사건 며칠 후 남편을 찾아, 역에 찾아갔으나 남편의 흔적을 찾을 수 조차 없었다고. 그러나 유일하게 사건 현장에서 남편의 귀로 추정되는 어떤 '조각'을 발견했다고. 아마도 나는 계속 '귀로만 남은 남편(혹은 비슷한 제목의)'이라는 그 통속적이고도, 실존적인 기사를 꽤나 열심히 읽었던 것 같다.) 
그러나 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그렇다면 결국 이 영화들은 폭발 이전의 삶과 폭발 이후의 삶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는, 캐니한 삶의 또다른 증명에 불과한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몇몇 부분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리>의 태웅과 진서, 그리고 <중경>의 쑤이는 모두 죽으려고 하나, 죽지 못한다. 다시 한 번 반복해 말하지만, 그들을 둘러싸고, '이별의 부산정거장'과 '인터내셔널 가'가 흘러나온다. (도대체 '노래'라는 것의 효용은 무엇인가?) <이리>의 마지막 장면에서, 진서는 드디어 한국에 들어온 쑤이에게 또렷한 목소리로, 그리고 중국어로 '안녕하세요, 나는 진서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경에서 계속 반복되는 그 시구, 창가들을 들어보라. 결국은 세상은 슬프고, 어렵지만 그래도 나는 살아가겠다, 언캐니하게. 그거 아닌가?

.......................................

우리는 결국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고, 다시 필요 이상의 몇 가지 정보를 알게 되었을 뿐이다. 나는 그 친구 역시 회사에 염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역시 결혼하지 못한 또다른 친구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물론 중요하게 달라진 것은 없다. 나는 여전히 펀드들과 수수료와 언페어한 게임 때문에 정부를 증오할 것이고, 녀석은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는 미끄럼틀에 올라타 있을 것이고, 친구는 내일 아침에 공항으로 마중 나오라고 했던 비상식적인 분 때문에 분노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캐니한 삶에 친구가 달려와 준 덕분에 한 때나마 우리는 언캐니한 이야기를 했을 뿐이고, 다시 캐니한 삶에 올라탈 동력을 얻게 된 것 뿐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 번 술값을 치렀다. 경제력으로 따지면 그 친구가 치러야만 하겠지만. (물론 여기에는 <중경>과 <이리>에 바치는 값도 포함해서.-)

p.s. 나는 광폰지같이 경사각 15도 이내의 극장에서 정수리와 인중 사이의 거리가 30cm넘는 Big D(<흑사회>가 아니라 일명 '대두')가 D열 이내에 앉아, 머리를 메트로놈 삼는 것을 극렬 반대합니다. 더구나,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도중 '이 영화 정말 뭔데'라고 옆 사람에게 속삭이는 작자라면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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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브한 생각

끄적거리기 | 2008.07.06 16:01 | Posted by 맥거핀.

어느 것이나 대개가 그렇지만, 논쟁이 오래 지속될수록 처음의 논쟁의 주제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그 논쟁의 부산물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는 경우가 많다. 지금의 촛불집회 정국도 그렇다. 처음에 이것은 광우병 위험이 높은가,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미국과의 협상이 잘 진행된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가 논쟁의 초점이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대체로 다른 쪽으로 논점이 이탈하고 있는 것 같다. 처음의 광우병 논란은 이제는 ‘광우병 위험은 어느 정도 있으며, 미국과의 협상도 잘 된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라는 쪽으로 결론이 내려졌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제는 재협상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 촛불집회의 성격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의 문제, 그리고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신문사들에 대한 광고 중단 운동을 비롯한 보수언론에 대한 대처 문제, 다음 아고라로 대표되는 네티즌들의 의견 표출과 그것의 여론화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의 문제, 촛불집회에서 발생한 경찰들의 과잉진압과 시민들의 대응에 대한 문제 등 여러 다양한 쪽으로 문제들이 발산되어 나가는 것 같다.

이렇게 많은 문제들이 표면 위로 떠오르게 되면서 나 같은 경우는 점점 혼란에 빠지는 것 같다.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가를 살피는 것이 다양한 측면에서 일어나면서 논지를 정리하기가 점점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 점점 이야기하는 것이 조심스러워지는 것을 느낀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말하지만, 다들 어느 정도는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특히 요즈음에는 대부분의 인터넷 커뮤니티(평소에는 그런 정치적인 문제와 전혀 관계가 없는 스포츠, 음악, 컴퓨터, 친목 동호회들 말이다)에서 이 문제들에 대해서는 두 가지 입장 중의 하나인 것 같다. 침묵하거나, 아니면 ‘반 MB와 조중동, 친 촛불집회’라는 암묵적인 기류 말이다.

 

전자의 경우라면 모를까, 후자의 경우라면 요즘에 내가 느끼는 것은 무언가 ‘지나치다’는 것이다. 양상이 복잡해질수록, 아이러니컬하게도 중간의 얘기들은 사라진다. 대부분 극단적인 이야기들이 힘을 얻고, 자극적인 사실일수록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복잡한 진실보다는 단순한 겉 표면만이 금방 부각되고, 널리 퍼져나간다. 예를 들어 요즘에 이슈가 되는 문제 중에 하나인 이른바 조중동 신문에 대한 광고 중단 운동 문제만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심각한 양상도 아니고, 그것에 대해 우려를 가지고 있는 시각도 많다. 그러나 부각되는 것은 그것을 지지하지 않으면, 당신은 조중동 편이라는 지나친 단순화와 흑백논리이다.

나? 글쎄, 나의 경우라면 분명히 이는 지나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조중동에 대한 광고 중단 운동을 반대하는 것과 조중동을 지지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문제다. 확실히 이것은 MBC <뉴스 후>에서 말했듯이 2005년 황우석 박사 사태 때 <PD수첩>에 대한 광고 중단 압력을 넣었던 문제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다. <PD수첩>이 조중동으로 바뀌었을 뿐 사태는 비슷하다. <PD수첩>의 내용이 옳으니 그에 대한 광고 중단은 잘못되었다고 말한다고 해서, 조중동의 내용이 잘못되었으니 그에 대한 광고 중단은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물론 나 역시 조중동은 언론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그에 더 나아가 쓰레기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특히 최근 약 한 달 동안의 조중동의 논조는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분노를 넘어서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에 대한 광고 중단 운동을 지지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조중동이 얼마나 쓰레기인지 그것을 꾸준히 알리고 그 신문을 더 이상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선택의 문제를 내세우기 전에 그에 대한 선택의 기회마저 없애는 것은 아주 특수적인 몇몇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온당하지 못하다.

 

이와 비슷한 문제로 요즘 논쟁이 되고 있는 촛불집회에 대한 경찰의 대응에 대한 문제가 있다. 시민들의 폭력적인 행동이 (조금이라도) 있기 때문에 경찰이 그런 대응을 한 것인가, 아니면 경찰이 과잉진압을 했기 때문에 시민들의 어떤 폭력적인 행동이 있었던 것인가의 문제를 따지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닭이냐, 달걀이냐의 문제를 따지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여기에서 불법집회인가, 아닌가는 또 다른 문제가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누가 먼저 했는가가 아니라, 실제로 양쪽에서 어떻게 했는가가 중요하다.

이에 대해 저번 <100분 토론>에 나왔던 김민웅 교수가 지극히 온당한 얘기를 했다. 시민들에게서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버스를 끌어낸다거나, 경찰들에게 돌을 던진다거나 하는 행동 같은 것들. 그리고 이 모든 행동들은 당연히 배격되어야 할 것이다), 당연히 법의 제재를 받아야 옳다. 그와 마찬가지로 경찰의 비폭력적인 집회에 대한 폭력적인 대응 역시 당연히 법의 제재가 있어야 한다. 아무 폭력적인 행위를 하지 않은 여성에 대해 방패로 내려찍고, 시민들에게 돌과 이상한 물건을 던지고, 소화기를 뿌려대고, 심지어는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행위는 어떤 진압수칙에도 있지 않고, 당연히 배격되어야 하며 그에 마땅한 제재가 있어야 한다. (혹 진압수칙에 있다고 해도 아무 보호 장구도 갖추지 않은 시위대에 적용되어서는 안 되는 것은 자명하다) 시민의 폭력이 있었다고 해서 경찰의 과잉진압이 정당화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찰의 폭력이 있었다고 해서 시민의 폭력 역시 정당화될 수는 없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너무 나이브(naive)한, 당연한 소리가 아닌가라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는 것은 극단적이고, 공격적인 것이 아니다. 나이브하고 당연한 것이 세상을 바꾼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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