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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칠드런, 루이 말

Ending Credit | 2009. 1. 16. 19:02 | Posted by 맥거핀.

(스포일러 있음)

그들의 마지막은 주인공 줄리앙의 입을 통해 몇 마디의 나레이션으로 설명된다. 그리고 관객들의 한숨과 함께, 영화는 끝나고, 슈베르트의 피아노 선율이 울리며 엔딩크레딧이 올라간다. 영화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 음악은 가정도 이루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죽었던 슈베르트의 생애와 겹쳐져 관객을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 마침내 엔딩크레딧도 끝나고 관객들은 무거운 마음을 안고 자리에서 일어나게 된다. 무거움과 한숨. 이는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가.

무기력함의 공유

영화는 두 소년의 우정을 담담한 어조로 시종일관 그리고 있다. 여기에는 어떤 영화적인 수식이나 그럴듯한 사건은 없다. 두 소년은 보통의 소년들이 그러하듯이 한 두 가지의 비밀을 공유하며 친해지다가도, 금새 자존심을 내세우며 말다툼을 벌이기도 하고, 때로는 그 말다툼은 주먹다짐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가 중반을 넘어가며 이 이야기가 1944년의 프랑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과 주인공 중의 한 명인 보네가 유태인 소년이라는 것을 관객들이 알게 되면, 관객은 다가올 파국을 예감하게 된다. 두 소년이 살고 있는 조그마한 세계의 바깥에 도사리고 있는 이 위험은 엔딩이 다가오기 전까지 조금씩 이 두 소년 곁으로 다가오지만, 이 파국은 이 두 소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결말이다. 일이 이렇게 되리라는 것은 주인공 보네도 알고 있다. 보네는 담담하게 짐을 싸며 줄리앙에게 말한다. "언젠가는 잡힐 줄 알았어."

이 마지막을 어쩔 수 없이 바라보아야만 하는 것은 줄리앙과 보네 뿐만이 아니다. 스크린 밖의 관객들도 마찬가지다. 영화가 중반을 넘어가면서 관객은 줄리앙과 함께 보네의 비밀을 공유하게 된다. 이 때부터 관객은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저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바라보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영화의 중반부 관객은 한 차례의 위기의 순간을 경험한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게 된 줄리앙과 줄리앙의 엄마와 형, 그리고 보네. 여기에 일단의 군인들이 나타나 신분증을 검사하기 시작한다. 이곳은 유태인이 출입할 수 없도록 금지되어 있는 곳. 이들은 한 유태인 노신사를 발견하고 그를 다그치기 시작하고 관객은 점점 불안해진다. 다음 차례가 보네가 되지 않을까. 그러나 관객은 무기력하다. 그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조용히 그들이 지나가기를 바랄 뿐. 다행히 한 독일 군인의 객기로 사태는 무사히 종결되지만, 관객은 서서히 그들의 무기력함을 알아차리기 시작한다. 식당 안의 다른 손님들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 무기력함은 영화의 엔딩에 정점에 이른다. 줄지어 선 소년들은 잊을 수 없는 한 순간을 경험하지만, 그 경험은 오롯이 관객들에게도 전이된다. 무기력함과 공포. 그들에게는 친구를 구하고 싶은 심정과 살아남고 싶다는 심정이 교차하지만, 그 순간 실제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저 가는 친구의 손을 한 번 잡아주거나, "잘 가세요. 신부님."을 외치는 정도. 이 경험은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관객은 순간 스크린 속으로 들어가 그 소년들을 데리고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램일 뿐이다. 스크린 밖의 관객의 지독한 무기력감. (개인적으로는 아오야마 신지의 영화 <헬프리스>에서 이런 심한 무기력함을 느낀 적이 있다.)

이 무기력함은 필연적으로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과 죽은 자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연결된다. 그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그래서 그들의 죽음에 대해 우리가 어떤 책임이 있다는 그런 생각. 그래서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쓰는 것이 가능한가?"라고 물었고, 우리 나라의 많은 작가들 역시 "광주 이후에 문학이 가능한가?"라고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때로 이 무기력함과 죄책감은 자기합리화로 이어지기도 한다. 죄책감을 가지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행동에 대해 합리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많은 사람들은 '침묵의 카르텔'을 유지함으로써 유태인들에 대한 대량학살을 방조했다. 그리고 그들 중의 일부는 이 '침묵의 카르텔'과 자신들의 이성을 일치시키기 위하여 유태인들과 자신들을 애써 분리시키고, 유태인들이 탐욕스럽고, 자신들밖에 모르는 존재들이라 사라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믿었다. (이 영화에도 몇몇 이러한 장면들이 있다. 위의 식당 장면에서 줄리앙의 엄마는 친척들 중에 유태인이 있다는 사실을 애써 부인하려 한다. 소년들의 부모들이 함께하는 미사 도중 신부가 부자들의 탐욕과 허위의식을 지적하자, 예배당을 가득 메운 아이들의 부모들- 아마도 그 중 대부분은 부자일 것이다. 전쟁 도중에 그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려면 말이다. -은 웅성거리고, 그 중의 몇몇은 자진해서 퇴장하기도 한다.)

무기력함의 이후는

결국 비밀을 공유하면서 시작된 주인공들과 관객들의 공유 의식은 엔딩 장면에서의 무기력함의 공유로 이어진다. 이 순간을 어쩌면 영화라는 공적체험이 관객 개개인의 사적 체험으로 전이되는 순간이라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고보니 <굿바이 칠드런 An Revoir Les Enfants>라는 제목이 심상치 않다. 이 말은 떠나는 신부가 아이들에게 전해 주고간 마지막 말임과 동시에 스크린 밖의 관객들의 입장에서는 스크린 속의 아이들에게 겨우 던져줄 수 있는 마지막 말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3인칭인 '칠드런 Les Enfants') 그렇다면 지독한 무기력의 체험 이후는, 즉 엔딩크레딧 이후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아마도 두 갈래의 길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이해하는 것. 그러나 홀로코스트에서 겨우 살아남은 프리모 레비는 그 때의 경험을 이야기한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정당화하는 것과 같'다고. 인간의 의도와 행동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원학적으로도) 그것을 수용한다는 것, 즉 그 행동의 주체를 수용하고, 그의 입장이 되어보고, 그와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이다. 이의 반대편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마도 거기에 줄리앙의 꿈이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줄리앙은 오줌싸개이다. 번번이 꿈을 꾸다가 침대보를 더럽히곤 한다. 그가 보네에게 들려준 이유는 간단했다. 꿈 속에서 시원하게 오줌을 누는데, 꿈에서 깨어나보면 현실이 그렇게 되어 있다고. 꿈과 현실의 연결. 꿈에서의 행동으로부터 이어지는 현실에의 결과. 이것을 관객들에게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스크린과 현실의 연결. 스크린에서 벌어나는 일과 비슷한 일들이 관객 각자의 현실에서도 여러 다른 양상으로 일어난다. 그것을 이해하려들지 말고 스스로가 행동하고 싶은 대로 행동으로 옮길 것. 그것이 스크린 속의 소년들과 스크린 밖의 관객들을 무기력함으로부터 구원하는 일이다.

- 2009년 1월. 광화문 씨네큐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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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칼럼] 신나는 미네르바 사육제

생각거리 | 2009. 1. 13. 01:48 | Posted by 맥거핀.
"가면무도회를 하는데 꼭 가면을 벗겨야 하는가"

출처 프레시안: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112153717

법치의 위기

MB호의 한국. 여기서 현실은 초현실이다. 현실에서 불가능할 것 같은 해괴한 일도 버젓이 벌어지는 게 이 나라 현실. 아니나 다를까, 이번 사건에 대한 외신의 반응이 전해졌다. <로이터 통신>은 이 소식을 '이상한 소식'(oddly enough)란에 실었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즈>는 "한 '웹 커뮤니케이터의 체포는 언론자유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보도했다. <뉴 아메리카 미디어>는 '미디어의 비판을 매장시키는 한국 불도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미네르바를 체포한 것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인터넷 인프라를 보유한 나라의 정부가 정보의 유통을 장악하기 위해 내놓은 조치 중 하나"라고 보도했다.

이명박 정권에 들어와 법치주의에 중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법의 적용이 해괴할 정도로 자의적이다 보니, 시민들은 어디까지 불법이고, 어디까지 합법인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됐다. 조중동에 대한 광고중단 운동을 처벌하려다가 여의치 않자 맥락이 다른 미국의 판례를 찾아다 들이대고, 유모차 시위하던 주부들에게는 엉뚱하게 '아동학대법'을 들이대겠다는 개그를 늘어놓는다. 미네르바를 잡아넣으려고 83년 전두환 정권이 만든 법을 부활시켰다. 심지어 군사정권도 쓰지 않아서 25년 동안 미라가 됐던 5공 시절의 악법이 느닷없이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관 뚜껑을 열고 다시 나온 것이다.

법 적용이 이렇게 자의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어떻게 안심하고 살 수가 있을까? 이렇게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 보니, 몇몇 논객들은 자신이 올린 글을 미리 삭제하고 침묵으로 돌아섰다. 이른바 '칠링 이펙트'가 일어난 것이다. 법의 해석과 적용의 기준이 엄격하지 않을 경우 법은 이리저리 늘려 아무나 엮어 넣는 폭력의 도구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사태의 본질을 보수주의자인 이회창 씨가 정확하게 지적했다.

"우리는 법치주의를 바로 봐야 한다. 실정법에 위반하기만 하면 무조건 처벌대상으로 보는 이른바 형식적 법치주의는 합법주의를 무기로 삼아 국민을 억압하던 국가독재시대의 유물이다."

법원에서 구속영장을 발부한 것도 우리에게 충격을 준다. 혐의 자체가 황당한데다가 도주나 증거인멸의 위험이 있는 것도 아니라, 영장이 기각이 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심지어 한나라당의 공성진 최고위원도 "미네르바 구속수사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아 있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의 정두언 의원조차 "구속은 도주 우려가 있는 사람들이 대상인데, 그 사람은 자기가 글 쓴 것을 다 인정했기 때문에 구속까지 한 것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명색이 한나라당의 '국민소통위원장'으로서 입장이 난처했던 모양이다. 아주 불행한 일이지만, 현재 대한민국에서 국민과 소통(?)하는 유일한 기관은 검찰과 법원이다.

허위사실 유포?

허위사실 유포로 남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은 이상, 그것을 이유로 처벌을 한다는 것 자체가 해괴한 것이다. 그런 법이 어느 나라에 있던가? 아마 5공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런 해괴한 법도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리라. 문제가 된 전기통신법은 헌재에서 위헌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백번 양보하여 그것을 실정법으로 인정한다 하자. 만약 미네르바가 공익을 해칠 악의를 가지고 있었다면, 유포한 대부분의 글이 허위여야 한다. 하지만 그의 글의 대부분은 허위가 아니었고, 그 중의 사소한 일부만이 허위로 드러났을 뿐이다.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는 이것이 "법리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검찰에서 혐의를 두었다는 그 두 가지 허위사실을 보자. 하나는 작년 7월에 올린 것으로, "외환ㆍ예산ㆍ환전업무 8월1일부터 전면 중단"이라는 내용. 하지만 당시 검찰에서는 이를 문제 삼지 않았었다. 체포의 이유가 된 것은 역시 두 번째 것으로, "주요 7대 금융기관 및 수출입 관련 기업에 달러 매수를 금지하는 긴급공문을 전송했다"는 내용의 글 그런데 민주당 이석현 의원에 따르면, 정부에서 7대 시중 은행 간부들을 모아놓고 외환매입 자제를 요청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그 요청의 형태가 '공문'이라는 문서였냐, '회의' 혹은 '전화'였냐는 아주 지엽적인 사실뿐이다.

뉴스를 보니 재경부에서도 외환매입의 자제를 요청한 사실은 인정한 모양이다. 다만, 그것은 명령이 아니라 협조였단다. 하지만 그것을 '협조'라 부르느냐, '명령'이라 부르느냐는 한갓 말장난에 불과하다. 결국, 외환매입의 자제를 요청한 형식이 '문서'였느냐 '구두'였느냐가 '긴급체포'되어 '구속영장'을 받는지 여부를 가르는 기준이 되어 버린 셈. 그런데 그게 심지어 국가신인도씩이나 떨어뜨렸다니, 이 얼마나 황당한가? 인터넷에 글 올리는 데에 이제 국가신인도까지 고려해야 할 모양이다. 국가신인도에 영향을 끼친 게 죄가 된다면, 대통령과 강만수 경제팀은 감옥에서 대체 몇 년을 살아야 할까?

차라리 네티즌교육헌장을 제정해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사이버에 태어났다"고 가르치는 게 좋겠다. '중대한 사안'이라 구속했다는 얘기도 우습다. 구속을 피하려면 이제 인터넷 글질하면서 '이 글이 중대한 사안이 될지, 안 될지' 예측해야 한다. 글이 재수 없게 중대한 사안이 되거나, 중대한 사안으로 간주되면, 바로 구속이다. 듣자 하니 검찰에서는 미네르바 가족친지의 계좌를 뒤진단다. 5공 시절의 공안수사를 보는 듯하다. 네티즌들은 "차라리 강만수 씨 경제팀의 가족과 친지들의 계좌를 뒤지는 게" 더 성과가 있을 것 같다고 비아냥댄다.

검찰에서는 정부 측 사람들 만나 구체적인 피해액수까지 산정했단다. 미네르바의 글과 환율 사이의 인과관계를 무슨 수로 확정한단 말인가? 그날 달러 사고판 사람들 만나서, 그 글 읽고 매매를 결심했다는 자술서를 받을 것인가? 외환시장에 영향을 끼치는 요인이 달랑 인터넷 글 하나란 말인가? 12월 평균치보다 거래량이 많았다느니 적었다느니 하는 얘기는 유치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러다가는 한강물이 예년보다 며칠 빨리 언 것도 증거가 되겠다. 소설을 써서 조중동의 신춘문예에 응모하려나? 응모만 하면 조선일보 동인문학상의 유력한 후보다.

미네르바는 왜 떴는가?

아마추어에게 농락당한 게 사무쳤던 모양이다. 조중동에서는 미네르바를 공격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래봤자,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미네르바의 칼럼이 적어도 대통령의 발언이나 강만수 경제팀의 예측보다는 나았다는 점이다. 그의 선풍적 인기의 배경에는 정부 여당의 무지와 무능이 있다. 그 점은 심지어 조선일보에서도 인정을 한다. "사이버 논객 미네르바가 화제다. 이 역시 도참의 일종으로서 사회 불안과 정부의 무능이 겹칠 때 발생하는 전형적 현상이다. 무능한 정부란 민심과 맞서 싸우는 정부를 뜻한다." (조선일보 이덕일 사랑 <도참과 미네르바> 2008.11.26)

그러는 조선일보는 얼마나 유능할까? 무명의 인터넷 논객이었던 미네르바를 일거에 '경제대통령'으로 끌어올린 사건이 있었다. 그 발단이 된 것은 조선일보였다. 산업은행에서 리먼 브러더스 인수를 위한 협상을 하고 있던 시절, 조선일보는 칼럼과 사설을 이용해 이렇게 주장했었다.

"금융업이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 가다 보면 사기꾼에게 속기도 하고 시장이 나빠져 깡통 차는 사례도 생기겠지만 수업료를 치르는 셈 쳐야 한다."(조선일보 송희영 칼럼 <누가 월스트리트를 두려워하랴> 2008.08.08)

"그만큼 메릴린치·리먼과 같은 초대형 빅딜은 장기적인 안목을 가진 투자자의 결단(決斷)을 필요로 한다. 만년 금융 후진국인 우리가 요즘과 같은 가격에 세계 일류를 인수할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리먼의 위험만큼 기회가 커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조선일보 데스크칼럼 <월스트리트 울리고 웃긴 산은(産銀)> 2008.08.27)

"산은의 리먼 브러더스 인수는 철저한 손익계산 위에서 하라. 중요한 건 산은의 마음가짐이다. 철저하게 득실을 따져 인수를 결정하고 그 결정에 끝까지 책임을 지겠다면 해볼 만한 투자다." (조선일보 사설 <산은(産銀)의 리먼브라더스 인수는 철저한 손익(損益)계산 위에서> 2008.09.03)


한 마디로, "위험만큼 기회가 커" 보인다고 "해볼 만한 투자"를 했다가 "깡통 차는 사례"를 만들어 놓고는 "수업료를 치르는 셈"으로 치자는 얘기다. 하지만 자기들의 모자라는 머리에 대한 수업료를 왜 국민이 치러야 하는가? 그러니 그 수업료는 나중에 미네르바에게 개인적으로 지불하는 게 좋겠다. 조선일보가 이러고 있을 때, 미네르바는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을 정확히 예측했다. 이 사건으로 미네르바는 일약 '경제대통령'으로 떠오르게 된다. 미네르바를 영웅으로 만든 일등 공신은 바로 조선일보였다.

미네르바 띄우기

중앙일보는 어떤가? '진보진영의 미네르바 영웅 만들기' 운운하며, 아주 앙증맞게도 기사 속에 슬쩍 내 사진과 이름을 끼워 넣는다. "미네르바 신드롬의 본질인 발언의 자유를 제치고, 그의 예측이 얼마나 맞았는지 채점하는 식의 방송을 한 것은 잘못"이라는 주장이 미네르바 영웅 만들기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예측'이라는 놀이에 별 관심이 없기에, 내게 이 사태의 본질은 예나 지금이나 '표현의 자유'의 문제다. '영웅 만들기'라 부르려면, 적어도 이 정도 얘기는 한 적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미네르바에게선 이처럼 '환율 프로'의 냄새가 짙게 풍긴다. 취재팀은 460여 쪽에 이르는 '미네르바 글모음' 파일과 기고문 등을 조목조목 짚어봤다. 그는 시장을 비교적 잘 보고 '엔캐리 크로스 거래, 투신의 다이내믹 헤지, 수출업체 리딩·래깅 전략' 같은 전문용어를 술술 구사했다. '한·미 통화 스와프'도 비슷한 케이스다." (중앙일보 <'미네르바 예언'의 허와 실> 2008.11.23)

동아일보에서도 비슷한 내용의 기사를 썼다. 재미있는 것은, 미네르바 띄우기의 또 다른 공신이 동아일보였다는 사실. 동아일보의 자매지 <신동아>는 미네르바의 글을 실으며, "10월 이후의 환율 급등과 경기 변동을 정확히 예측해 '인터넷 경제대통령'으로 불리며 폭발적인 주목을 받았던 사이버 논객 '미네르바'가 17일 발행된 월간 신동아 12월호에 장문의 글을 투고했다"며 자랑을 했다. <신동아> 편집장의 말이다.

"일반인들이 보지 못하는 부분을 여러 글에서 예민하게 다뤘다는 측면에서 보도할 가치가 있어 글을 실었다." / "그가 바라보는 한국 경제 메커니즘과 경제구조를 보는 시각이 충분히 보도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한국기자협회보 2008 11.20)

이러던 조중동이 이제 와서 미네르바가 '전문대 출신의 백수'라고 강조한다. 논리학에서 말하는 '대인 논증의 오류'의 학벌주의 버전이다. 그런데 그 좋은 학벌 갖고 조선일보는 뭘 했던가? 파산할 리먼 브러더스를 인수하자고 했다. 그 좋은 학벌 갖고 중앙일보는 뭐 했던가? 그 백수를 "시장을 비교적 잘 보고" "전문용어를 술술 구사"하는 "환율프로"라 추켜세웠다. 그 좋은 학벌 갖고 동아일보는 뭐 했던가? '전문대 출신의 백수'에게 기고를 받았다고 자랑을 했다. 그렇다면, 미네르바의 실력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한나라당의 정책통으로 알려진 이한구 의원으로부터 객관적 평을 들어 보자.

"이번에 체포된 사람이 진짜 미네르바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진짜 미네르바고 독학을 해서 그 정도로 실력을 쌓았다면 대단한 실력파다." (연합뉴스 <이한구 "미네르바 맞다면 대단한 실력파"> 2009.01.09)

"인터넷은 가면무도회"

조중동이 이렇게 헤매고 있을 때, 오직 한 사람, 전여옥 의원만은 그가 아마추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단다. (쿠키뉴스 <전여옥 "미네르바와 신정아는 오버했다"> 2009.01.09) 역시 이 시대의 노스트라다무스다. 근데 그거 아는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이상하게도 늘 사건이 벌어진 다음에야 적중한다는 것. 전 의원의 기동은 <타짜>에 나오는 정마담의 그 유명한 대사를 연상케 한다. 그는 슬쩍 '미네르바=신정아'로 등치시키려 하나, 사실 둘은 경우가 많이 다르다. 신정아는 현실의 학벌을 위조하여 교수의 지위를 얻은 반면, 미네르바는 가상의 정체성을 구축한 대가로 현실에서 직위를 얻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검찰에서 당장 사기죄를 적용했을 게다.

전 의원은 인터넷을 "가면무도회"라고 부른다. 멋진 표현인데, 아마 그는 그것을 부정적으로 의미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상세계에서 또 다른 자아(alter ego)를 구축하는 것은 인터넷의 잠재성에 속한다. 가령 현실의 무대리가 인터넷 게임의 세계에서는 10만의 추종자를 거느린 영주가 될 수 있다. 심지어 자신을 늘 타박하는 과장님도 그 추종자 속에 들어 있을 수 있다. 인터넷이 없었다면, 무대리는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었으나 현실에서는 인정받지 못한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없었을 것이다. 한나라당의 이한구 의원이 "대단한 실력파"라고 평가한 미네르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인터넷 '가면무도회'를 통해 'myself'는 이제 'myselves'가 된다. 미디어 철학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자신을 한 가지 가능성에만 묶어놓는 정체성(identity)에서 해방되어 자아를 복수화(multiply)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인터넷의 능력이다. 가상적 아이디의 정체를 까는 것, 그것을 법률로 강제하는 인터넷 실명제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사이버 공간의 특수성을 법적으로 무시하겠다는 얘기인데, 과연 그것이 디지털의 시대정신에 얼마나 적합하는 것인지 의문이다. 인터넷은 가면무도회다. 그런데 가면무도회를 하는데 꼭 가면을 벗겨야만 하는가?


라비 쿠퍼(Robbie Cooper)라는 사람은 이 문제를 다룬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에서는 현실의 인물과, '세컨드라이프'에서 그의 아바타를 병치시킨다. 첫 번째 작품에서처럼 현실과 가상의 정체성이 일치하는 경우도 있지만, 산소 호흡기에 의존해 살아가는 가녀린 아이가 가상에서는 막강한 로보캅이 될 수도 있고, 30~40대로 보이는 뚱뚱한 아저씨가 가상세계에서는 날씬한 10대 소녀의 행세를 할 수도 있다. 이것이 사이버 공간의 논리다. 그런데 굳이 실명을 까고 정체를 밝혀 놓은 다음 저 아이를 사기꾼이라 부르고, 저 남자를 변태라 부르는 게 과연 온당하겠는가?

두 개의 대통령

미네르바도 사이버 공간에서 저렇게 놀 수 있었고, 본인도 그러기를 원했을 것이다. 문제는, 그의 인기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중앙일보는 그 이유를 "정부에 대한 불신이 미네르바 열기로 이어진 것으로 분석"했다. (중앙일보 <'미네르바 예언'의 허와 실> 2008.11.23) 나아가 이 신문은 "정부의 과민 대응도 미네르바를 키웠다"고 지적하며(중앙일보 <`미네르바` 한마디에 술렁대는 대한민국> 2008.11.23), "미네르바를 한 단계 더 키워준 것은 한동안 그와 전쟁을 벌이다시피 한 기획재정부였다"고 말한다. (중앙일보 <'미네르바' 소동 거품 키운 조연들> 2009 01.12)

비판에 과민한 정권은 '가상의 열광'을 '현실의 위협'으로 간주했다. 사이버 공간의 '인터넷 대통령'과 현실공간의 '이명박 대통령'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존재질서에 속하나, 대통령은 둘일 수 없다는 걸까? 현실의 권력은 가상의 대통령을 자신의 도전자로 여겼다. 은유를 현실로 받아들인 것이다. 청와대 임삼진 시민사회비서관은 "미네르바는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요구했다. 김경한 법무부 장관은 미네르바에 대한 처벌 가능성을 언급했다. 재정부에서 뒤늦게 부인하고 나섰지만, 동아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강만수 장관이 최근 TV 토론에서 "공개적으로 대화할 용의가 있다"고 밝힌 상황에서 미네르바가 뜻밖의 경력 소유자로 드러나자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이다. 재정부의 한 관계자는 "누가 이런 결과를 상상했겠느냐. 처지가 참 난처해졌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경제 스승' '시민 지성' 치켜세웠던 지식인들 "…"> 2009.01.10)

인터넷은 가상현실. 거기에 떠도는 얘기들은 일단 존재론적으로 가상의 지위를 가지며, 또 그렇게 수용되어야 한다. 미네르바의 글도 마찬가지다. 그의 글은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내놓는 보고서가 아니라, 일개 네티즌의 주관적 분석에 불과하다. 미네르바의 불행은 그의 예측이 결정적인 순간에 정부 여당이나 보수언론보다 정확한 것으로 드러난 데서 시작했다. 가상공간의 경제분석이 공신력 있는 정부와 언론의 경제예측을 능가해 버리자, 무능한 정권에서 당혹감을 느껴 액션에 들어가고, 그 결과 세계의 비웃음을 사는 '긴급체포'와 '구속영장'의 해프닝이 발생한 것이다.

(한나라당에서 그나마 사이버 공간의 특수성과 자율성에 대한 인식을 가진 유일한 사람은 공성진 최고위원이다. 그는 "이번 수사는 (…) 현실을 잘 인식하지 못한 대응"이라고 비판하며, "사이버 세계가 현실 세계와 병용ㆍ혼융될 수 있는 것을 인정하고 적절하게 제도도 보완해야지만 지나친 과잉대응은 자제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나아가 그는 "21세기 초엽이긴 하지만 지식정보화 시대가 이뤄지면 현실세계와 사이버 세계 사이에 긴장 관계가 발생하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해럴드경제 <공성진 "미네르바 수사, 지나친 대응"> 2009.01.12))

사이버 윤리

미네르바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을 게다. 실제로 그는 "온라인에서 작성한 글이 오프라인으로 나올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한국일보 <주관적 소신으로 직접 썼다> 2009.01.12) 서울대의 윤석민 교수는 이를 비판한다. "미네르바가 '인터넷에 올린 글이 이렇게 파장이 커질지 몰랐다'고 말했다면 그건 아주 순진한 것이다. 온라인에 글을 쓰는 순간 오프라인의 사회적 파장을 전제하는 것이다." (동아일보 <미네르바구속, 전문가 진단> 2009.01.13) 하지만 "순진한 것"은 죄가 아니고, 온라인 글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킬 확률은 로또 당첨확률과 비슷하다. 로또 하나 샀다고 당첨을 "전제"하고 돈을 쓰는가? (그리고 윤 교수가 아무리 온라인에 글을 올려도 사회적 파장은 아마 못 일으킬 게다.)

사이버 공간의 글을 대하는 적절한 태도는 '판단중지'(epoche)다. 익명으로 올리는 글은 당연히 실명으로 올리는 글보다 책임감이 떨어진다. 하지만 거기서 '그러므로 익명으로 올린 글이 더 위험하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네티즌들은 실명으로 올린 글과 익명으로 올린 글에 동일한 크레딧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익명으로 올린 글은 실명으로 올린 글보다 덜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문제는 로이터가 지적했듯이 "경제상황에 대한 부정적 의견들에 대해 점점 더 민감한 반응"을 보인 한국 정부의 태도. 그것이 그냥 놔뒀으면 찻잔 속의 태풍이었을 현상을 졸지에 "사회적 파장"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물론 가상이 졸지에 현실이 되는 어느 시점에선가 미네르바에게 윤리적 책임을 물을 여지는 있다. 즉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지, 그가 쓴 글은 이미 가상의 공간에서 나와 졸지에 오프라인에서 사회적 파장이 되어버렸다. 그것을 인지했다면, 늦게라도 자신의 현실적 정체성에 대해 정직하게 해명을 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즉 자신이 연출하고 언론에서 추측하는 것은 그저 사이버 공간의 아바타처럼 가상의 정체성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공고와 전문대를 나와, 독학으로 경제를 공부했고 지금은 집에서 쉬면서 취미로 경제를 분석하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그랬다면 일이 훨씬 깔끔할 뻔 했다.

디지털 리터러시

검찰에서는 미네르바의 글에 대해 "인터넷에서 모은 정보를 짜깁기한 것"이라 평가했다. 동아일보는 검찰의 말을 빌려 미네르바가 "인터넷 정보 재가공에 탁월"(동아일보 2009.01.12)하다고 보도했다. 물론 이를 그들은 부정적으로 의미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부정적으로 평가한 그것이 바로 인터넷 글쓰기의 본령이다. 미디어 이론에서는 전자매체 글쓰기의 특성을 '반제품'으로 규정한다. 즉 활자매체의 글쓰기가 독자들에게 완제품으로 제공되어 일방적으로 수용되는 반면, 전자매체의 글쓰기는 언제라도 복제, 인용, 편집, 가공이 가능한 반제품의 상태로 제시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네티즌들은 정보를 완성품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사운드든, 이미지든, 텍스트든, 그들은 정보를 반제품의 상태로 다운로드 받은 후, 인용, 수정, 가공, 편집을 통해 그것을 새로운 정보로 조직하여 다시 업로드한다. 사운드의 짜깁기는 리믹스, 이미지의 짜깁기는 합성, 텍스트의 짜깁기는 몽타주라 부른다. 전자적 글쓰기의 격률은 이것이다. "새로움은 요소가 아니라 배치에 있다." 전자시대에 지식은 머리에 내장되는 게 아니라, 하드와 서버에 외장된다. 여기서 요구되는 것은 필요한 정보를 찾아내는 검색술, 정보의 바다를 서핑하는 항해술이다. 이를 '디지털 리터러시'라 부른다.

동아일보 기사의 제목을 보자. "인터넷 재가공에 탁월" 동아일보도 미네르바의 몽타주 능력은 인정한다. 기사에는 이런 언급도 나온다. "박 씨는 일반인들이 잘 찾지 않는 경제 관련 사이트나 블로그를 수시로 드나들며 인용할 만한 문구를 찾은 뒤..." 한 마디로 검색능력도 남다르다는 얘기. "박 씨는 인터넷에서 정보를 모으고 글을 쓰는 일에 취미 이상의 집착을 보였다고 한다." 활자문화의 도서관은 전자문화의 인터넷으로 바뀐지 오래. 기자의 눈에는 도서관에서 정보를 모으고 글을 쓰는 일에 취미이상의 집착을 보이는 사람도 이상해 보일까? 여기서 우리는 검찰과 기자들에게 디지털 마인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박 씨의 글이 생소한 경제용어를 곳곳에 섞어놓은 탓에 전문적인 식견을 갖췄거나, 남들이 모르는 대단한 정보를 갖고 쓴 글로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인터넷에 떠다니는 공개정보와 전문가들이 내놓은 전망을 재가공했을 뿐이라는 게 검찰의 설명이다.

하지만 인터넷에 떠도는 공개정보나 전문가가 내놓은 전망이 어디 한둘인가? 네트 위에 홍수처럼 차고 넘치는 게 정보와 전망이다. 그 중 어느 것을 인용하고, 그것을 어떻게 가공하여 어떤 맥락에 배치시키느냐, 그것이 바로 디지털 리터러시의 능력이다.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라면, 정부 여당과 조중동은 왜 그것조차 못했을까? 그게 문제의 핵심이다.

기자의 디지털 문맹을 보여주는 대목이 또 있다. "박 씨에게는 인터넷에서 모은 정보와 남의 글을 짜깁기하는 일이 표절이라는 의식이 없었다." 이 대목에서 뒤로 넘어가는 줄 알았다. 기자가 한탄하는 그 기법은 '패스티쉬'라 하여 이미 문학에서 널리 사용되는 것. 잡지에 실린 먼로의 사진을 베꼈다고 앤디 워홀의 표절을 탓하는 격이다. 인용문의 짜깁기로 이루어진 베냐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오늘날 고전이 되었다. 왜? 디지털 시대의 글쓰기를 선취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진중권의 <놀이, 예술, 그리고 상상력>은 의식적으로 그 기법을 사용해 쓴 것이다.

맛보기로 실례를 하나 제시하자면, 위에 이탤릭으로 표기된 부분은 동아일보의 기사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나는 저 구절이 나의 것이라 주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저 구절이 들어간 문단은 분명히 나의 것이다. 사실 이 글 전체가 인터넷에서 모은 정보와 남의 글을 짜깁기해 쓴 것이다. 물론 내게도 "인터넷에서 모은 정보와 남의 글을 짜깁기 하는 일이 표절이라는 의식"은 전혀 없다. 왜? 그래도 이 글은 분명히 내 글이니까. 이 글마저 "표절"이라 부른다면, 그것은 한글자모를 사용했다 해서 모든 글을 표절이라 부르는 것과 다름없을 게다.

미네르바를 비판하려면

미네르바를 제대로 비판하려면, 그가 제대로 인용을 했는지, 그가 올바로 짜깁기 했는지, 그리고 그 글을 사회적 맥락에 적절히 배치했는지를 따져야 한다. 그런데 디지털 문맹의 기자에게 과연 그런 능력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미네르바의 예측이 맞았는지 틀렸는지가 아니다. 미래를 알아맞히는 일은 가끔 점쟁이들도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의 예측을 정당화하기 위해 무슨 자료를 인용해서, 그 예측을 무슨 논리적 추론으로 정당화했느냐 하는 것이다.

다른 과학에서도 그렇듯이 경제학의 영역에서도 예측이라는 것은 그저 확률론적 정확성만을 가질 뿐이다. 주사위를 던져 1이 나올 확률은 1/6, 안 나올 확률은 5/6이지만, 가끔은 1/6의 확률도 실현되는 법. 1/6의 확률에 베팅을 하여 맞히면 '용하다'는 소리를 듣겠지만, 그것은 과학적 태도는 아니다. 과학에서 중요한 것은 예측이 적중했느냐가 아니라, 그 예측의 근거가 얼마나 건전한지(sound) 따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네르바의 예측이 몇 개나 맞았는지 채점하는 식의 보도가 내 눈에 한심해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조중동에서는 전문가/아마추어의 대립구도를 만들어 놓는 모양이다. 전문적 능력은 존중해야 하나, 타이틀을 맹신할 필요는 없다. "경제학이란 어제 한 예측이 오늘 틀렸다는 것을 내일 확인하는 학문"이라는 말이 있다. 조선일보에서 리먼 브라더스를 인수하자고 했을 때, 그 무모한 용기의 배후에도 소위 전문가라는 이들의 견해가 있었을 것이다. 작년 초 정부에서 환율을 올려야 한다고 했을 때, 그 가공할 근시안도 소위 전문가의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학벌도 아니고, 직위도 아니고, 미네르바의 글이 제대로 근거 잡혔는지 냉정하게 살펴보는 것이다.

이 문제는 애초에 그렇게 처리가 되어야 했다. 미네르바의 예측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그가 제시한 근거들을 무너뜨리며, 그 예측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면 그만이다. 이것이 이견을 해결하는 정상적인 방법이며, 민주적인 절차다. 문제는 정부 여당도, 보수언론도 공고와 전문대 출신 백수가 쓴 글을 논리적으로 반박할 주제가 못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동원한 방법이 고작 '긴급체포'와 '구속영장'. 그 많은 전문가들은 다 어디 가시고, 이 얼마나 해괴하고 한심한 일인가?

물론 정부의 입장이 곤혹스럽긴 했을 게다. 일단, 일개 네티즌과 일국의 부처가 논쟁을 한다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다. 괜히 상대해주었다가는 그의 공신력만 높여주는 꼴이 된다. 게다가 미네르바는 결정적인 순간에 두 번 예측을 적중시켰지만, 정부 여당은 번번이 예측에 실패했다. 그 바람에 보수언론으로부터도 "시장의 신뢰를 잃었다"는 평을 듣는 처지. 논리보다 더 강력한 것은 현실이기에, 현실에서 두 번의 적중한 예측을 무기로 가진 상대와 논쟁을 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을 게다.

표현의 자유

미네르바는 영웅도 아니고, 범인도 아니다. 그저 일개 네티즌일 뿐이다. 그는 고학을 통해 한나라당의 이한구 의원으로부터 "대단한 실력파"라 불릴 정도로 경제학 지식을 습득했고, 검찰과 동아일보에서 (본의 아니게) 인정하듯이 뛰어난 수준의 디지털 리터러시를 구사한다. 그는 경제상황을 조선일보나 정부 여당과 다르게 보았고, 현실에서는 그의 예측이 올바른 것으로 나타났다. 그것이 "멈춘 시계도 하루에 두 번 맞는다"는 속담으로 표현해야 할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제대로 된 인용과 추론을 통해 이루어진 과학적 적중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쨌든 적중한 예측은 정부 여당과 보수언론의 무지와 무능과 현격한 대비를 이루면서, 그는 졸지에 인터넷의 영웅으로 떠오른다. (차라리 멈춘 시계라면 하루에 두 번이라도 맞지, 한 번도 맞지 않는 강만수와 조중동의 불량시계는 도대체 어느 나라 제품이란 말인가.) 그에게 열광하는 팬들을 나무랄 필요는 없다. 신드롬은 인터넷의 일상이니까. 인터넷에는 허경영에 열광하는 사람들도 있고, 전두환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전여옥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지만-심지어 이명박에 열광하는 사람들도 있다.

미네르바가 졸지에 인터넷 대통령으로 불리자, 정부 여당에서는 그를 체포했다. 거기에는 두 가지 목표가 있다. 하나는 경제에 대한 불안이 아고라를 통해 결집해 '제2의 촛불'로 번지는 것을 사전에 막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미네르바를 범죄자로 만들어 놓고 이를 빌미로 인터넷을 옥죄는 법률을 통과시키는 계기로 삼는 것이다. 그 체포가 '긴급'하게 이루어진 것은, 지하벙커 상황실 해프닝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정부여당이 지금 심리적 패닉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지난 1년을 허비하고, 제대로 통치할 기간이라고는 1년 밖에 안 남았잖은가.

미네르바가 올린 글이 대부분이 허위였다면, 혹은 그의 예측이 대부분 틀렸다면 차라리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올린 글 중에서 허위 사실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고, 그의 예측은 상당 부분이 맞아 들어갔다. 그가 한국의 경제를 망가뜨릴 악의를 갖고 글을 썼다면, 차라리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의 경제 전망과 정책에 불안감을 느낀 네티즌들은 미네르바에게서 '한국 경제를 살릴 선의'(인터넷 경제 대통령)를 보았다. 바로 그 때문에 그는 선풍적 인기를 끌었고, 바로 그 때문에 체포되고 구속된 것이다. 이 얼마나 황당한 역설인가.

미네르바는 일개 네티즌일 뿐이다.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적 가치는 그에게도 보장되어야 한다. "무한한 자유를 누릴 수는 없다"고? 누가 인터넷에서 무한한 자유를 누리겠다고 하는가. 그저 경제를 부정적으로 전망해도 체포되지 않을 자유, 내가 옳다고 믿는 바를 말해도 구속되지 않을 자유, 내가 쓴 글이 네티즌들의 폭발적 반응을 받았다고 국사범으로 몰리지 않을 자유, 내가 사이버 공간에서 또 다른 정체성을 갖는다고 파렴치범으로 몰리지 않을 자유. 이것은 "무한한 자유"가 아니라, 전 세계 민주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우리만 못 누리는 '최소한의 자유'다.

미네르바를 석방하라. 이렇게 말하면, 중앙일보와 동아일보의 모자라는 기자들-놀랍게도 대학을 나왔다고 한다-은 진중권이 또 다시 미네르바 거품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거품은 자기들 입에 물고 있는 그것이지. 거품을 부풀리건, 가라앉히건, 그건 이해가 걸린 사람들끼리 하시라. 내 유일한 관심은 미네르바라는 한 개인의 권리. 일개 네티즌을 검찰이 체포하고, 법원이 구속하고, 거대언론들 떼를 지어 사정없이 물어뜯는다. 이 잔인한 카니발리즘. 대체 뭣들 하는 짓인가? 근데 조영남까지 나서서 그 짓을 응원한다. 철딱서니하고는….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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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을 대하는 방법

끄적거리기 | 2009. 1. 12. 20:44 | Posted by 맥거핀.

막장의 전성시대다. <아내의 유혹>, <너는 내 운명>과 같은 막장드라마들, 요즘 잘 나가는 MC 김구라, 그리고 MB. 이 셋은 왠지 공통점이 있다. 그 지나온 날들에는 구린내가 나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용인해 주었다는 것. 그래서 그 결과 요즘에 엄청나게 잘 나간다는 것. 그래서 그들을 아마도 묶어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막장의 전성시대.

<씨네 21>에서 이러쿵저러쿵 여러 말을 했지만 사람들이 막장드라마를 보는 이유는 결국 한 가지다. 왜? 재밌으니까. 얼키고설킨 인물들의 관계와 그 관계의 중심부를 헤집는 결정적인 대사,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발연기와 결정적인 순간에 딱 잘라먹는 편집의 솜씨까지. (내일 이 시간에 계속...) 그리고 <씨네 21>에서 밝힌대로 시대극, 액션활극, 정치드라마, 기업드라마, 멜로, 로맨틱코미디를 넘나드는 장르의 컨버전스함이 더해져 놓칠 수 없는 '재미'가 된다. 여기에 도덕 따위는 필요가 없다. 어설픈 계몽은 엿이나 먹으라지. 너무 착하거나 도덕적인 주인공들은 재미가 없단 말이야. 뭐 이런 태도.

왠지 시청자가 이러한 막장드라마를 대하는 태도는 김구라나 MB에 대하는 자세를 연상시킨다. 요즘 잘나가는 MC 김구라가 예전에 누구에게 무슨 욕을 했던 간에, 요즘의 시청자들은 그가 웃기기 때문에, 재미를 주기 때문에 본다. 욕 좀 하면 어때. 그래도 웃기기는 하잖아. 여기에 방송사는 시청자의 마음 한 구석에 남을 일말의 죄책감조차 덜어주기 위해 예전 그가 가장 욕했던 사람 중의 하나인 문희준과 콤비를 만들어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한다. 저것 보라구. 예전에 저렇게 욕을 먹었던 문희준도 용서하고 같이 저렇게 신나게 다니는데, 뭐가 문제가 된다는 거야. 내가 괜히 그런 마음을 가질 필요는 없다구.

이건 MB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아..이런 걸 쓰려고 하니, 마음 한 구석에 더럭 겁이 난다. 아마도 나도 잡혀가면 '30대 무직 백수'라고, '사회에 불만을 가진..' 이런 수식어를 달고 나오겠지?) 지난 대선 때, 온갖 비리와 의혹의 중심에 있었던 MB를 사람들은 기꺼이 대통령으로 만들어주었다. 음..BBK니 친인척들의 비리니, 소망교회니 어쩌니 해도 말이야...뭐 그러면 어때. 경제를 살린다잖아. 저 백수 청년도 국밥집할머니도 지지한다는데, 그깟 돈 얼마 해먹은 게 요새 세상에 무슨 큰 오점이라도 돼나. 경제를 살린다는데. 얼쑤.

그리고 딱 1년가까이 지난 지금.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고 있다. See the Unseen~.

....................................

이번 주 <씨네 21>, 즉 no.687은 막장드라마들을 특집기사로 다루고 있다. 기사에 이런 대목이 있다. '현재 막장드라마를 막장으로 규정하는 대표적인 이유는 소재의 자극성과 억지스러운 이야기이다. 당연히 이 두 가지는 시청률과 결부된다.' 이 말에 전체적으로는 동의하지만, 일부분에는 동의하기가 어렵다. 막장드라마가 막장인 이유를 소재의 자극성과 비현실적인 스토리에서 찾을 수도 있지만, 사실 이것은 일부분에 불과하다. 보다 중요한 것은 특정의 소재를 다뤘다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소재를 어떻게 다루는가'에 있다. 이른바 이 드라마들은 현실을 어떻게 그려내고 있는가의 문제.

불륜, 치정, 살인, 독설, 계약결혼, 밀고, 배신, 복수..이 모두는 한편으로 '자극적인 소재'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이 자극적인 소재들은 이들 드라마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 소재들은 여타의 드라마에, 그리고 많은 영화들의 소재이기도 하다. 막장드라마들이 자극적인 소재를 써서 그렇다고만 한다면, 훨씬 더 강도높은 불륜과 살인과 배신과 복수의 이야기들이 나오는 다른 영화들은 그보다도 더욱 지독한 '막장'인건가.

문제는 이들 드라마들이 이런 소재들을 활용하는 방식, 즉 이 모든 사건들을 어떻게 그려내고 있는가에 있다. 이들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별다른 고민과 사유(思惟) 없이 불륜하고 치정하고 살인하고 밀고하고 배신한다. 이는 마치 몇 개의 분기점을 가진 게임과 닮았다. 불륜을 저지를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분기점에서 시청자들은 당연히 'yes' 버튼을 누르고, 이로써 게임은 필연적으로 다음 스테이지 '발각'과 '분노', '복수'로 넘어가게 되며, 게임의 캐릭터들은 기계적으로 반복된 패턴을 보여주게 된다. 이로써 문제는 '왜' 터뜨리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더 화끈하게' 터뜨리는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최고조로 높아진 갈등의 벽 앞에서 최종의 분기점의 질문이 나오는 것이다. '용서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시청자들은 당연히 'yes'를 클릭하고 게임을 끝낸다. 그래서 바로 전회까지도 사시미칼을 쥐어주면 서로 회라도 뜰듯한 두 주인공이 감동의 눈물을 뚝뚝 흘리는 마지막회를 보게 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요즘의 '리얼'을 표방하는 많은 예능프로그램들에서 이와 비슷한 변주를 보기도 한다. 그 프로그램들에는 '리얼'을 표방하며 등장인물들의 여러 복잡한 관계도가 그려진다. 그곳에서는 10분 단위로 등장인물들의 감정이 급변한다. 10분전만 해도 어색해하던 어떤 인물들은 어떤 사건을 계기로 간이라도 빼줄 듯 친해지기도 하고, 금방 다시 사이가 소원해지도 한다. 남녀 관계도 마찬가지. 이번 주 토요일에 이 두 청춘스타는 서로에게 호감을 보이며 급속하게 친해지는 듯 하지만, 바로 다음 주 토요일에 '파경'을 맞기도 한다. 그것도 아주 패턴화된 호감과 패턴화된 파경을.)

............................................

<씨네 21>의 이번 주 기사는 한 마디로 실망스러웠다. 글쎄.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시청자들이 왜 이런 드라마를 보는가'인듯 싶지만, 그 기사의 내용들은 '재미있기 때문에 본다' 그 한마디를 길게 늘인 것에 불과했다. 드라마 제작환경의 측면에서 이러한 드라마의 출현을 분석하는 기사는 나쁘지 않았지만, 거기에 이어지는 명장면 베스트 7, 클리셰 인물들과 대사들 같은 기사는 뭘 말하고 싶은 것인지 잘 모르겠다. 이런 명장면들과 명확한 캐릭터들이 있으니, 이 드라마들을 꼭 보라는 것인가, 아니면 보지 말라는 것인가, 그도 아니라면 욕하면서 보라는 것인가. 이번 주 기사의 컨셉은 아마도 '빈정대기'인가.

시청자들이 이러한 드라마를 보는 이유를 별로 알고 싶지는 않다. 그보다는 이러한 드라마가 왜 나오고 있는 것인지 드라마 제작환경의 측면에서뿐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가지 측면에서 분석해주는 기사가 더 좋을 뻔 했다. 이러한 드라마를 쓰는 작가들의 인터뷰를 곁들이거나, 사회학자나 비평가 혹은 평론가들의 시각을 덧붙여서 말이다. 그것으로 부족하다면 앞으로 필요로 하는 드라마는 어떤 것인지, <씨네 21>이 생각하는 좋은 드라마들은 무엇인지 이야기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고. 적어도 빈정대는 것보다는 말이다.

막장들은 그들의 막장 행태에 빈정댈수록 신나서 더 막장질을 한다. 욕먹는 것이 인기있는 것인줄 알고 말이다. (그래서 막장이다.) 그런 막장들에게 막장질을 못하게 하려면 시작해야 한다. 그들의 막장질을 용인하지 않는 것. 그것이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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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의 영화들

Interlude | 2009. 1. 1. 16:28 | Posted by 맥거핀.
2009년의 첫글로써 어울리지 않는 글이란 건 안다. 어쨌든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존재이니까. 앞이 보이건 보이지 않건 말이다. 그러나 왠지 이런 정리를 안하고 넘어가자니 섭섭한 부분이 있다. 2008년은 나에게는 전체적으로 보이지 않는 부분들이 더 많은 시간들이었지만, 가끔 좋은 영화들이 나타나서 불빛을 깜박거려 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2008년에 보았던 좋은 영화들에 대한 나름의 정리. 이름하여 BEST 10. 그리고 그 영화들의 기억나는 장면 하나씩.

이 리스트는 2008년에 영화관에서 보았던 영화들만을 대상으로 하였다. 따라서 좋은 영화이긴 하지만 다른 경로로 보았던 영화들은 배제하였고, 개봉년도도 약간 뒤죽박죽인 면이 있다(재개봉하거나 영화제에서 미리 개봉하는 영화들도 있으므로).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영화관에서 보는 영화만이 무엇인가의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략의 시기와 보았던 영화관을 밝혀둔다. 아..그리고 BEST 10이기는 하나 순서는 없다. 이 10개의 영화의 순위를 매기는 것은 너무 어렵다.





밤과 낮, 홍상수.
명동 CQN, 2008년 3월.

사진작가(김영호)는 길을 걷다가 하늘에서 떨어진 어린 새를 발견하게 된다. 그 새는 땅으로 바로 떨어지지 않고 그에게 부딪혀 살아남게 되며, 그는 이 사실을 알고 우쭐해한다. 유머와 기이함과 캐릭터에 대한 조롱이 스며들어가 있는 전형적인 홍상수스러운 장면이지만, 이 장면은 또한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희망적이다. 물론 그것이 한편으로 또 이상해 보이기는 하지만.




렛미인 (Let the Right One In), 토마스 알프레드손.
명동 중앙극장, 2008년 11월.

소년은 물 속에서 죽을 각오를 한 것처럼 눈을 꼭 감고 있다. 곧 숨이 넘어가려는 찰나 저 멀리서 목이 잘린 머리가 뚝 떨어지고 소년의 머리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풀리며, 잘려나간 팔이 물 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리고 어디선가 팔이 하나 나타나 소년을 끌어올린다. 상당한 고어 장면이지만, 잔인하거나 무섭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도리어 아름답다고 말하면 지나친 것일까.




멋진 하루. 이윤기.
종로 단성사, 2008년 9월.

병운(하정우)은 희수(전도연)와 함께 길거리를 걷다 화장품 샘플(맞나?)을 나눠주는 곳을 지나게 된다. 병운은 유들유들하게 그곳으로 다가가 그것을 받아온 후, 느물거리면서 그것을 희수에게 건네준다. 희수는 뭐 이런 걸 받냐며 화내지만, 주머니에 그것을 챙겨 넣는다. 두 캐릭터의 성격이 한 순간에 드러나는 디테일한 명장면.




약속(La Promesse), 다르덴 형제.
명동 중앙극장, 2008년 9월.

영화의 마지막 소년과 여자는 지하철 통로를 걷고 있다.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은 소년과 남편을 잃은 여자. 이들은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이들이 가야할 길은 보이지 않는데, 이들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에도 지하철 소리는 여전히 들린다. 항상 주인공들을 딜레마에 몰아 넣고 그들의 선택을 기다리는 다르덴 형제지만, 이 장면은 너무 먹먹하다. 다르덴 형제의 최고작이 아닐까.





이스턴 프라미스 (Eastern Promises), 데이빗 크로넨버그.
압구정 CGV, 2008년 12월.

오토바이가 고장나 곤란에 빠진 안나(나오미 왓츠). 그녀에게 니콜라이(비고 모르텐슨)가 나타나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제의하고, 망설이던 안나는 그의 차에 올라탄다. 사례를 하겠다는 안나에게 니콜라이는 씩 웃어 보인 후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말한다. 오오..이것이 바로 카리스마!





추격자, 나홍진.
종로 단성사 or 서울극장(정확히 기억이..), 2008년 2월.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범죄심리학자와 지영민(하정우)과의 대결장면이다. "너 성불구지?"하고 다그치는 범죄심리학자와 살짝 빙글거리며 아니라고 답하는 지영민. 그리고 숨막힐 듯한 긴장감 속에서 지영민의 폭발. 짧은 장면이지만 심리적으로 아주 잘 설계된 장면. 추격자의 매력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뛰고 달리고 하는 그런 장면들보다 도리어 이런 장면들에 있지 아니할지. 폐쇄된 공간에서 흐르는 참을 수 없는 긴장감.






새드 배케이션, 아오야마 신지.
중앙 스폰지하우스, 2008년 3월.

아들의 장례식장에서 남편에게 따귀를 맞고도 웃으며, "남자들이란, 하고 싶은 대로 하라지."라며 웃을 수 있는 여자. 어떻게 해서 이 여자는 이렇게 된 걸까. 아니 어머니들이란 원래 그런 것일까.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가까이에 있는 존재. 가까이 있기에 언제나 의지할 수 있지만, 그만큼 무섭고도 커다란 존재, 그래서 언제나 도망치고 싶은 존재. 어머니들이란 그런 것일까.





걸어도 걸어도, 고레에다 히로카즈.
부산 대영시네마, 2008년 10월.

자신의 아들 대신에 목숨을 가지게 된 사람을 보는 어머니의 심정이란 어떨까. 더구나 그 사람이 자신의 아들보다 훨씬 더 변변치 않은 삶을 살고 있다면. 이제 아들의 기일에 그 사람을 오게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또다른 아들의 말에 어머니는 잔혹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한다. 일부러 오게 하는 것이라고. 아..어머니들이란 역시 무섭고도 알 수 없는 존재. 그리고 앞으로도 알 수 없을 존재.





흑사회, 두기봉.
신촌 필름포럼, 2008년 8월.

원숭이 섬에서 낚시를 하는 록(임달화)과 Big D(양가휘). 조직의 1인자 자리를 둘러싸고 이들에게 묘한 긴장감이 흐르지만, 록의 표정에서는 그러한 것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던 록이 갑자기 커다란 바위(록?)를 들어 Big D의 머리를 내리치고 그를 죽이려 한다. 원숭이 섬의 원숭이들은 이 장면을 보고 새끼원숭이들이 보지 못하도록 황급히 손을 끌어 도망간다. 원숭이보다 못한 인간들. 그 인간들의 속성이 극명하게 드러난 장면.






중경, 장률.
광화문 스폰지하우스, 2008년 11월.

쑤이에게 총을 도난당한 후 나체로 거리를 허위허위 걷는 경찰. 꿈인지 환상인지 실제인지 알 수 없는 장면이지만, 이 장면은 이상하게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근육이 있는 우람한 육체가 아니라, 뼈의 모습이 겉으로 드러난 남루한 육체의 전시는 마치 우리 인간들의 피폐한 정신들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듯 하다. 어쩌면 우리 인간들은 몇 가지의 천 조각들로 그렇게 우리의 황폐한 모습들을 숨겨가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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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턴 프라미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Ending Credit | 2008. 12. 30. 02:23 | Posted by 맥거핀.




(1급 경고: 스포일러 만땅)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을 보며 멍해졌다. 영화가 끝나고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어쩌면 배가 고파서 일지도 몰랐다. 시간이 안 맞아 영화관에서 핫도그를 하나 허겁지겁 먹고 들어갔는데, 안 먹느니만 못한 거였다. 영화관에서 파는 음식들은 겉보기에 비해 대체로 터무니없는 맛과 가격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날씨가 추워서인지도 모르겠다. 올해 들어 가장 추운 날씨라는 위세를 부리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어쨌든 간에 아무튼 멍하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었다. 무엇이 이처럼 멍하고 두렵게 만드는 것일까.


1. 기독교와 예수의 탄생
아마도 이렇게 말하는 건 쉬운 선택이 될 것이다. 이미 <필름 2.0>에서 논증한대로, 이 영화는 기독교의 여러 알레고리들을 느슨하게, 때로는 옥죄이며 펼쳐 보인다. 그 중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물론 아기 예수의 탄생 이야기. 뭐 일단 <이스턴 프라미스 Eastern Promises>라는 제목 부터가 박해받는 유대인 백성들을 동방에서 온 메시아가 구원할 것이라는 성경 말씀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니콜라이의 몸에 새겨진 수많은 문신들, 그건 왠지 카타콤의 여러 표지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일견 이러한 연결은 안이하고 도식적이며 조금은 기이해 보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피를 흘리며 들어온 여자가 낳는 아기가 예수의 상징이라고 보았을 때, 이 아이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영화 속에서는 동정녀 마리아와 마찬가지로, 이 여자도 동정녀로서 이 아이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악의 축 '세미온'이다. 이것은 왠지 이 도식이 간단하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가지게 해준다. 다시 한 번 처음으로 돌아가 아버지가 '악의 중심'이라면, 이 아이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2. 몸
크로넨버그의 영화에서는 항상 몸이 먼저였다. 그 몸을 가진 인간이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보다는 몸 자체의 부피와 무게와 질감으로 항상 우리를 압박해왔다. 이제 이 영화에서, 그 몸은 다시 한 번 그가 살아온 모든 것이 되었다. 러시아 감옥에서는 자기가 살아온 인생을 문신으로 온 몸에 남긴다. 그리고 결국 그 문신들에는 또다른 문신들이 새겨진다. 깊게 패인 칼자국들이.

이것이 무게감이 느껴지는 것은 크로넨버그의 전작들에서 유래된 바도 크지만, 한편으로 이것이 앞으로의 우리 인간들을 말해 준다고 생각하면 불온한 상상인걸까. 우리들 역시 많은 문신들을 온 몸에 지니고 있다. 그 문신들은 잉크로 명징하게 새겨져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대신 명징한 로고들로 자신의 몸을 칭칭 감는다. 그리고 그것을 잃을까봐 잠자리에서도 전전긍긍한다. 이건 어쩌면 크로넨버그의 미래에 대한 묵시록인지도 모른다.


3. 세계의 충돌
명확한 두 세계가 충돌한다. 안나의 세계와 세미온의 세계. 두 세계는 분리되어 있지만,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오토바이를 타고 조금만 가면 닿는 가까운 세계. 그리고 안나는 누르지말아야 할 초인종을 누르고 또다른 세계의 문을 연다. 여기에서 세계의 충돌이 일어난다. 물론 세계의 충돌은 여기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하다 못해 아스날과 첼시의 세계에서도 충돌은 끊임없이 일어난다. 사람들은 경기장을 나오며 목이 터져라 각자의 응원가를 부르고 구호를 외친다. 영화에서 보여지는 대로.

그리고 니콜라이의 안에서도 충돌은 일어난다. 그는 이 운명을 감내해야 할 처지에 있다. 왜냐하면 그는 양 쪽 모두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한 쪽 세계에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다른 쪽 세계를 부정해야 한다. 그 부정(否定)은 단순한 부정이 아니다. 그 부정은 자신의 근본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가 조직에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정부의 개라고, 어머니는 창녀라고 말해야 한다. 그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그가 원하는 대로 한 쪽 세계를 차지했을 때, 그는 반대쪽 세계로 나올 수 있을까. 아니 그 상태에서는 반대쪽 세계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는 이미 하나의 세계를 구축했는데.


4. 세계의 혼합
그래서 바로 여기 니콜라이에서부터 세계는 서서히 혼합되기 시작된다. 아니 그 혼합은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부분을 영화는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의 처음, 살인이 일어나는 공간은 누구나가 쉽게 드나드는 이발소이다. 평범하고도 선한 세계의 어디에나 있는 이 공간은 그러니까, 악이 진두지휘되는 공간인 셈이다. 여기에서 머리를 깎아주는 무딘 칼은 목으로 파고드는 날이 선 칼이 된다. 동시에 구슬픈 선율이 울려퍼지고, 가족들이 함께 모여 서로 식사하는 러시아 식당은 모든 악의 시발점이자 종착점이 된다. 즉 굳이 안나가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열어젖히지 않았어도 또다른 안나가 아마도 쉽게 문을 열었으리라는 것이다.

이 세계의 혼합의 중심에 니콜라이가 있다. 그가 악의 세계의 우두머리에 올라섰을 때, 우리는 그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선의 중심이자 악의 중심인 세계. 그게 바로 우리가 사는 세계이다.


5. 영국
영화 내내 보여지는 영국의 거리는 차갑고, 젖어 있고, 음울하다. 고색창연한 건물들과 영국 특유의 날씨는 잘 어우우려져 영화 내내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영화 <프롬 헬>이나 <스위니 토드>에서 보는 그러한 거리들의 연장선상에서 위의 영화들과 비슷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습한 지옥도의 풍경이라고 하면 과장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시체가 내던져지는 그 곳은 지옥의 입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넘실대는 물결은 마치 일렁이는 불꽃같고 말이다. 오 주여.

아기를 낳고 죽어간 그 여자는 러시아를 떠나 이곳으로 왔다. 그녀가 일기에 쓴 대로 모두가 죽어 있던,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던 땅속의 땅, 러시아를 떠나 따뜻하고 새로운 기회의 땅, 새로운 신천지를 꿈꾸며. 아마도 그녀는 지중해의 따뜻한 햇살을 그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끌려온 이곳 영국은 또다른 차갑고 축축한 지옥이다. 안타깝다. 차갑고 어두운 곳을 지나 새롭게 오게 된 곳이 그만큼,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그보다 몇 배는 더 차갑고 어두운 곳이라니.

니콜라이는 안나에게 말한다. 여기에서 아기를 키우는 것이 낫다고. 러시아보다는 이곳에서 당신이 키우는 것이 낫다고.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따스한 햇빛 속에서 아이는 안나에게 안긴다. 그러나 이 마지막에 이어지는 장면은 기이하고 무섭다. 니콜라이는 세미온이 앉아있던 바로 그 자리에 앉아 있고, 여자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린다. 아버지는 이미 죽기 전부터 죽어 있었다고(탄광에서), 그리고 우리 모두는 죽어 있었다고. 그리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간다.

이는 왠지 불길한 요한계시록의 목소리인 것처럼 느껴진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곳 역시 선의 중심이자 동시에 악의 중심인 세계. 가까운 곳에 또다른 이발소와 러시아 식당들이 있는 세계. 이 세계에서 아기는 어디로 가게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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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간에 아무튼 멍하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었다. 올해 본 영화 중 N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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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수오 마사유키

Ending Credit | 2008. 12. 16. 02:10 | Posted by 맥거핀.



난 언젠가부터 법을 싫어했다. 글쎄,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잘못된 판결로 피해를 본 경험도 없고, 주위의 아는 친척이 소송을 당한 후, 판사와 변호사 간의 결탁으로 부당한 판결을 받았고 그 후에 자살에 이르렀다는 식의 드라마틱한 스토리는 더더구나 없다. 아무튼 간에 말이다- 법을 싫어했다.

그래서 그랬을까. 대학시절 '법학개론' 수업의 최종 기말 레포트 주제는 '법의 필요성에 대해 논하시오' 였는데, 나는 온갖 이상한 논리를 가져다 붙인 끝에 법은 곧 사라져야만 마땅하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뻔뻔스럽게도 우쭐해져서는 그걸 제출했다. 글쎄. 아마도 다른 걸 쓰기도 어지간히 귀찮았겠지만, 한편으로는 이로써 법에 대한 소극적 저항을 한다는 이상 심리도 거기에 들어가 있음을 부인하지는 못하겠다. 아무튼 나의 이 삼류 최후 진술을 들은 판사는 기꺼이 C학점의 판결을 내려주었고, 나는 항소는 포기하고, 그 강사는 고시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변태들 같이 생겼다는 둥, 평생 강사나 해먹고 살으라는 둥의 같은 악담을 술자리에서 늘어놓는 것으로 울분을 삼켰었던 것 같다.

아무튼 이로써 나의 법에 대한 언페어한 태도는 더욱 심해졌는데, 급기야는 고시 공부하는 친구들을 불러내서는 술을 사준다는 핑계로 취조를 행하기도 했다. 너 말야. 왜 멀쩡한 전공 놔두고 고시 공부를 하고 있는거야. 니가 법을 좋아해. 뭐. 공정한 판결. 웃기는 소리 하지마. 니가 다른 사람을 단죄할 수 있다고 생각하냐. 니가 고시 공부하는 건 딱 하나 이유밖에 없잖아. 그냥 잘 먹고 잘 살고 싶은거지. 사회에서 대접받으면서. 너 같은 썩어빠진 생각을 가지고 있는 녀석이 무슨 다른 사람을 심판한다는 거야. 웃기지마.

물론 이 말들은 공정하지 못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는 이야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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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제목만으로도 이미 명확하게 그 주제를 내비치고 있는 이 영화는 혹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제를 깨닫지 못할까 저어하는 감독의 친절한 배려로, 시작부터 결론을 내리고 시작한다. 열 사람의 죄인을 놓치더라도, 한 사람의 죄없는 사람을 벌해서는 안된다는. 그리고 시작에서 예고한대로, 한 선량한 청년이 성추행범으로 몰려 부당한 판결을 받게되기까지의 과정을 환부에 메스를 들이대듯, 세밀하게 드러내보인다.
 
그러나 미리 말해두지만, 이 영화는 그 과정을 결코 공정하게 묘사하지는 않는다. 글쎄, 과연 공정함이란 무엇인가라는 형이상학적인 질문은 제쳐두고라도, 그럼 이렇게 묻고 싶을 것이다. 영화가 공정할 필요가 있는가. 영화는 지극히 편파적인 주제를 편파적으로 묘사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물론 나도 그걸 부인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이 영화 역시 지극히 편파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편파적임을 교묘하게 숨기려고 하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정말 불공정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잘못된 판단으로 한 사람의 죄없는 사람을 벌하게 되는 것과, 죄 있는 자에게 속아 넘어가 죄있는 자를 벌하지 않는 것 중의 어떤 것이 더 큰 문제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도 어려운 일이거니와, 그 문제까지 여기에 가져오고 싶지는 않다. 사법제도의 폐해? 영화의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 그런 것을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이 영화는 줄곧 하나의 관점을 지지하고 있는데, 그 관점이 마치 공정한 관점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일견 주인공 텟페이를 관찰하는 시점을 취하고 있다. 주인공 텟페이가 사건에 휘말릴 때, 그리고 경찰에 붙잡힐 때, 그리고 유치장과 법원을 오갈 때, 카메라는 한 걸음 물러서서 이 모든 사건을 조용히 바라보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 카메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카메라다. 카메라는 실제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준다. 바로 텟페이가 실제 사건에 휘말리는 그 순간. 실제라면, 우리는 절대 그 순간을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카메라는 전철에 따라들어가 기어이 그 장면을 잡아낸다. 이는 판사라면 절대 볼 수 없는 장면이다. 우리가 실제의 이 사건의 판사라면 무죄를 내릴 수 있을까.

게다가 주인공 텟페이는 카세 료가 맡고 있다. 유약하고 선량한 청년의 이미지가 다시 이 영화에서 비슷하게 활용된다. 여기에 판사의 교체 전 후의 극명한 대비, 목격자가 나타나는 극적인 시점, 착하고 힘없는 주인공 텟페이의 어머니와 친구들이 더해지며 이 영화는 선량한 청년을 범죄자로 만드는 비극물이 된다. 즉 텟페이라는 착하고 성실하며, 아무 죄없는 청년을 법이라는 국가 시스템이 판사와 국선변호사와 경찰이라는 하수인을 이용하여 무너뜨리는 것이다. 아 이 얼마나 슬프고도 가슴아픈 이야기인가.

그러나 이 슬프고도 가슴아픈 이야기를 이 영화는 마치 다큐멘터리를 찍듯이 보여준다. 어쩌면 여기에 가장 기이한 점이 있다. 극적이고도 화려하게 이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실제의 사건을 다루는 양 이를 보여주는 태도.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해두지만, 이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그러면서도 다큐멘터리인 척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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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면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것이 이런 얘기일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비극적인 일이 실제로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는 것 말이다. 우리 삶에도. 그것이 이 영화를 다큐멘터리처럼 찍은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저 상대방의 말은 절대로 듣지 않으려 드는 악마같은 판사, 그냥 죄를 인정하는 것이 낫다고 심드렁하게 얘기하는 국선변호인, 어떻게든 죄를 인정하게 만들려는 폭력적인 경찰. 이들은 모두 과장된 캐릭터이지만, 이 시스템 속에 이 과장된 캐릭터들은 실제로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감독은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묻는다. 당신이 판사라면 무죄를 내려줄 것인가. 글쎄. 나라면 그러지는 못할 것 같다. 그것이 아마도 이 영화의 가장 무서운 점이다. 그것이 실제로 만들어진 이 사회의 시스템이기에. 

그래서 아마도 나는 옛날의 친구에게 다시 이렇게 말해야만 할 것 같다. 너는 누군가를 심판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아마도 그건 거짓일거야. 너는 그저 수많은 정보를 가지고 판단을 내리는 정보처리기계일 뿐이지. 그것도 불확실한 판단을 내리는.

물론 이것은 또 하나의 불공정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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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물론 나는 감독에게 낚인 것이고, 그냥 파닥거리면 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왠지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입 안에 물린 갈고리에서 쓴 맛의 피가 솟아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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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시르와 왈츠를, 아리 풀만

Ending Credit | 2008. 12. 9. 00:23 | Posted by 맥거핀.


영화가 끝나고, 다른 일 때문에 재빨리 극장을 빠져나오면서부터, 줄곧 무엇인가 아음 한 구석이 불편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를 본 지 며칠이나 지났는데도, 이 영화 <바시르와 왈츠를>을 생각할 때마다 여전히 그 불편한 기억이 남아있다. 이 불편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무엇이 이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찜찜하게 만드는 것일까.

물론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이 영화는 이스라엘 방위대에 의해 저질러진 레바논에서의 팔레스타인 양민들 학살 사건을 다루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아우슈비츠나 광주나, 난징 혹은 코소보 등에서의 그러한 학살 사건들을 간접적으로 보거나, 듣게 될 때에 느끼는 감정들, 그의 연장선상들일 수 있다.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잔인하며, 비극적이고, 설명할 수 없는 그러한 사건들. 그러한 사건들을 보면서 가질 수 있는 인간들의 보편적인 인간성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나 타인에 대한 공포, 혹은 자신에 대한 공포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런 형이상학적인 질문만은 아닌 듯 하다. 무엇이 이렇게 불편하게 만드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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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그 보다는 훨씬 더 단순한 데에서 답이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는 가해자가 나중에 과거의 잘못된 일들을 영상이나 문학으로 펼쳐 보일 때, 그것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복잡한 감정의 한 부분일런지도 모르겠다. 이른바 소위 '용서를 구하는 방식' 그것에서 비롯되는 불편함. 

용서를 구하는 방식에도 물론 여러가지가 있다. 먼저 첫번째는 용서를 구하는 척 하며, 실질적으로는 본인도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잘못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나, 나도 어쩔 수 없이 그랬다고 주장하는 유형. 그리고 그래서 용서의 탈을 쓰고, 사실은 자기합리화라는 얼굴을 들이미는 유형. '통석의 념' 일명 니뽄스타일. 이것은 사실 용서 구하기라고 보기 어려우니 일단 패쑤. 그럼 이건 어떨까.

가해자가 과거의 사건을 직접적으로 거론하며,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당사자들에게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구하는 방식. 그리고 피해자의 용서의 결단, 그리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손 맞잡기. 그리고 물질적인 보상. 이른바 공식적이고도 방송적인 유형. 짝짝짝.

그러나 이를 한편으로 피해자의 시각에서 보면, 억울하기도 한 것이다. 그동안 겪었던 그 무참한 수많은 일들이 물질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일까. 떠올리기 싫은 옛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저 용서 구하기 라는 것은 한편으로 보면 가해자가 자신의 마음 편해지자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이른바 <밀양>의 억울함. 아니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죽은 자는 무엇으로 돌아온다는 것인가.

그래서 여기에서 가까운 데에 도사리고 있는 이 단어가 '용서'와 밀접하게 연결되는 것이다. '복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지극히 심플하고도 공평한 가르침.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수많은 복수담들과 그 복수담의 후일담들과 그 후일담들의 또다른 복수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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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바시르와 왈츠를> 같은 유형은 어떨까. 그러나 이는 왠지 모호한 구석이 있다. 영화는 감독 아리 풀만(실제 자신의 이야기를 쓴 것인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처럼 쓴 것인지는 모르겠으나)이 레바논 전쟁에서 겪었던 일들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음을 떠올리는 데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아리는 옛 전우들, 그리고 전쟁에 참여했던 다른 사람들, 종군 기자 등을 만나며, 그것이 그 때 자신이 가졌던 어떤 임무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가 결국에는 기억을 찾았다는 그런 이야기.

물론 이 이야기는 한 남자의 기억 되찾기가 중심을 이루는 이야기는 아니다. 한 남자의 심리학적 임상 사례를 다루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러나 왠지 그렇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한 남자가 기억을 잊어버렸어. 근데 왜 그랬는지 알아? 그건 심리적인 외상을 입었기 때문이야. 그런 심리적인 외상은 대체로 극단적인 상황에 빠졌던 사람들이 겪곤 하지. 왜 있잖아. 아우슈비츠에 갇혔던 사람들이 거기에서 나온 후 몇몇 부분들에 대한 기억을 영원히 잃어버린다고 하지. 근데 말이야. 그런 심리적인 외상은 피해자만 입는 것도 아니야. 때로는 가해자가 그런 심리적인 외상을 겪기도 하지, 아 그럼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인 건가. 뭐 그런 이야기.

물론 이는 부당한 공격인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에는 몇몇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제목이 의미하는 바시르와 왈츠를 장면이라던가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영화관에서 직접 보시길), 무엇보다도 충격을 주는 마지막 장면들. 그러나 그런 몇몇 인상적인 장면들을 제외하면, 군인들은 해변가에서, 혹은 배 위에서 딩가거리며 놀다가 임무를 받고 적에게 진격하고, 퇴각하고, 폭발하고, 총을 맞고, 총을 쏘고, 떠뜨린다. 아 그게 군인의 임무라고? 명령을 받으면 해야하는 군인의 임무라고? 그래서 그러지 말자고, 이런 영화 만드는 것 아니냐고? 다시는 그러지 말자고 이런 영화 만드는 것 아니냐고...

그러나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아무리 울어도. (물론 당연한 말이지만 복수한다고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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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아가씨, 박정숙

Ending Credit | 2008. 11. 30. 22:22 | Posted by 맥거핀.


다큐멘터리, 게다가 독립 다큐멘터리. 마치 이는, 이 영화의 감독인 박정숙 감독이 다른 인터뷰에서 말한 촬영 대상으로서의 여성 노동자를 연상시킨다. 노동자라는 것의 약한 위치, 게다가 여성.

이런 조건이라면, 사람이 많이 들기를 기대하는 것은 애당초 무리겠지만, 그래도 나름 프라임 시간대라는 토요일 오후 7시의 인디스페이스는 민망할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개봉 2주차임을 감안하더라도, 조금 심했던 것이, 관객은 나와 여자친구 단 둘 뿐. 덕분에, 여자친구는 혹시 상영안하는 것 아니냐며, 불안하게 주위를 둘러보았고, 나는 극장 직원이 사람 수를 확인하러 들어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어색한 표정을 지어보여야만 했다.



나는 대체로 영상보다는 활자를 신뢰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영상보다는 그것을 기록한 것이 훨씬 더 많은 것을 대상자에게 전달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영상은 상상력을 제한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글을 읽을 때에 머리 속으로 만드는 가상의 세계. 그 가상의 세계는 같은 글을 읽더라도 모든 사람들에게 조금씩 다르게 그려진다. 그러나 그것이 영상화가 되어 나타날 때, 그 영상화는 우리의 상상력을 하나의 방향으로 제한한다. 그래서 어쩌면 소설을 영화화한 많은 작품들이 그 소설을 감명깊게 읽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실망감을 주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그러나 다큐멘터리, 더구나 이런 이야기 만큼은 영상이 활자를 압도한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백마디의 말보다 충격적인 한 장의 사진이 사건의 많은 부분을 설명한다. 이행심 할머니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파오지만, 오그라든 손과 발은 다른 모든 말들을 압도한다. 그래서 아마도 다큐멘터리에서 항상 그런 부분들이 이야기될 것이다. 카메라는 대상을 어떻게, 어떤 느낌으로 바라보는가. 영상은 무엇을 담고 있는가.



격리. 이행심 할머니의 증언대로, 일제시대부터 한센병 환자에 대해 정부 및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던 시각은 치료가 아닌 격리였다. 쓰레기를 치우듯, 더러운 어떤 것을 가둬놓는 것. 치료를 해서 낫게 해주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더러운 것이니 결국은 씨를 말려야 할 존재.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서야, 일제 시대부터 그들에게 부과된 힘든 노동들과 차별어린 시선들과 급기야는 아이를 못 낳게 하고 키우지 못하게 하는 일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래서 할머니가 아이를 빼앗기고 주저앉아 '그 때까지 남아 있던' 손가락으로 풀을 쥐어뜯었다고 말하는 대목은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것을 조금은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들 마음 속의 인간성에 대한 격리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했을 때에만 그러한 시선들과 인식들이 가능해지리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한센병 환자들을 인간이 아닌 다른 어떠한 것으로 보는 시선, 따라서 그들은 영혼도 생각도 없는 존재들이며, 독을 퍼뜨리는 존재일 뿐이다라는 인식. 지나친 말처럼 느껴지는가? 그러나 한편으로 이 나라 어딘가에서는 주위에 장애인 아동들이 다니는 학교만 들어서도 시위가 일어나는데, 이를 지나친 말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러한 시선들과 인식들과 이 영화는 정면으로 맞서 싸우고 있다. 맞서 싸우는 방식은 간단하다. 이들도 인간임을 다시 일깨우는 것. 할머니가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고, 남편과 농담을 하고, 농작물을 다듬고, 차에 올라타고 하는 일상의 수많은 장면들. 그리고 스크린 안에서 보여지지 않은 그들의 한숨과 분노와 눈물들. 이 수많은 장면들은 지극히 당연한 진리를 다시 우리들에게 일깨운다. 그들도 인간이라는 것. 그래서 이 영화는 결국에는 묻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게 될 때에,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는가. 그리고 지금은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모든 다큐멘터리들은 현재 진행형이다. 다큐멘터리가 현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한은 그렇다. 물론 영화 내용적으로 보자면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보상 문제는 아직 진행 중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일제시대 강제 격리와 노동에 대한 일본 법정에의 청구, 그리고 아마도 그 뒤로 이어져야 할 한국 정부에 대한 보상 신청.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일본 변호사들에 비해, 우리나라 변호사들은 뭐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조금 더 넓은 의미로 보자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인식의 장벽들이 아직은 높기 때문이다. 아직도 널리 퍼져 있는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적대적이고도 차별적인 시선, 그러한 시선들이 장벽을 이루고 있는 한 이 영화의 싸움은 계속 현재 진행형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모든 다큐멘터리들은 현재 진행형임과 동시에 그것이 관객들의 행동을 변화시킬 때 최종적으로 완성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행동 변화라고 해서 거창한 것만은 아닐 게다. 작지만 커다란 인식의 변화부터가 그러한 것들일 게다.

그래서 결국은 어떤 의미에서 이 이야기는 스크린에서 보여지지 않은 것들이 덧붙여질 때 완성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로 이 영화를 조만간 작은 인디스페이스에서가 아니라 토요일 저녁 7시 브라운관에서 만나게 되기를 희망한다.



행복할 행(幸)자에 마음 심(心)자를 쓰시는 이행심 할머니. 그 이름 그대로 앞으로 행복한 마음으로 사시게 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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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미인 Let The Right One In, 토마스 알프레드손

Ending Credit | 2008. 11. 23. 23:11 | Posted by 맥거핀.



(늘상 그렇지만, 스포일러 있음)


날은 어둡고, 눈은 끊임없이 흩날리고, 새는 낮게 하늘을 선회하고, 어디선가 낯선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북구의 어느 밤. 피가 모두 어디론가로 사라진 채 죽어 있는 남자는 눈이 녹아 흘러내리는 하수구 옆 도랑에 버려져 있다. 목에는 작은 이빨 자국만 남겨진 채.


이러한 이야기는 사실 이제 너무도 많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의 피를 먹어야만 살 수 있는 뱀파이어라는 존재. 그리고 그의 천형과도 같은 운명. 그 잔인하면서도, 스산한, 그러면서도 묘한 에로티시즘을 발산하는 그런 이야기들. 그러나 이런 이야기라면 어떨까? 그 뱀파이어가 어린 소녀이고, 그 옆 집에는 세상 누구와도 쉽게 소통을 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 소년이 살고 있다면. 이런 작은 설정에서 출발한 이 영화는 때로는 예상되는 지점에서, 그리고 더 자주는 아주 뜻밖의 지점에서 보는 이들의 마음을 건드린다.



영화의 제목은 <렛미인 Let The Right One In>. 영화에서도 설명되지만, 뱀파이어는 그 곳의 누군가가 초대해 주어야지만 그곳에 들어갈 수 있다. 바로 이 제목은 그를 설명하고 있는 셈인데, 이 설정은 조금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이 영화는 (당연한 말이겠지만) 다른 여러 뱀파이어를 다룬 문학이나 영화들에게서 많은 부분을 빚지고 있다. 즉 다른 영화의 클리셰들이 이 영화에서도 계속 반복된다는 것인데, 예를 들어 뱀파이어는 햇빛을 보면 안된다거나, 뱀파이어에게 물린 자는 뱀파이어가 된다는 설정 등이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초대해 주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는 설정이 다른 영화나 문학에 있었던가? 아니 그건 그렇다치고, 초대받지 않고 들어간 뱀파이어는 몸의 곳곳에서 피를 토해내게 된다라...

물론 이와 비슷한 것은 다른 이야기들에도 있을 것이다. 뱀파이어는 결국 인간이 아닌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동물일수도, 괴물일수도, 혹은 악마일수도 있다. 그러나 이 피를 토해내게 된다는 설정이 자못 의미심장한 것은, 뱀파이어는 피를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피는 뱀파이어에게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 (뱀파이어 소녀 '이엘리'는 피를 담은 통을 놓고 온 아버지에게 소리친다. 어떻게 그것을 놓고 올 수 있냐고. ) 

어떤 의미에서 뱀파이어의 '피'와 같은 것을 인간의 입장에서 대입해 보면 '마음'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무엇일까?) 물론 피와 달리 인간의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때로 마음이 눈에 보일 때도 있다. 우리가 누군가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내어 놓아야(드러내 보여야) 한다. ('이엘리'의 온 몸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것처럼) 그리고 대부분의 인간들은 누군가의 마음을 갈구한다. 뱀파이어가 피를 갈구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물론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에 이빨 자국을 내어 그것을 빨아들일 수는 없다. 그것이 가장 슬픈 점이다. 또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고 그렇게,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하던 소년 '오스칼'은 뱀파이어 소녀 '이엘리'에게 마음을 건넸고, 뱀파이어 소녀 '이엘리'는 기꺼이 자신의 피를 건넸다.



영화의 마지막, (뭐 아마도 그럴 수 밖에는 없겠지만) 소년과 소녀는 멀리 길을 떠난다. 해피 엔딩이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너무 스산한 풍경이다. 기차 커튼은 열려진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으로 흩날리고, 기차 안에는 그들 외에는 어떤 승객도 찾아볼 수 없다. 이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세상의 끝으로. 누구도 그들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은 갈 수가 없다. 왜냐하면 (다시 또 당연한 말이지만...;;) 뱀파이어는 다른 사람의 피를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멀어지려고 하나, 다른 사람과 멀어져서는 살 수 없는 존재. 그것이 바로 뱀파이어의 가장 슬픈 점이다. 또 어떤 의미에서는.

(아마도 이 부분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존재가 '이엘리'의 아버지일 것이다. 다른 사람과 최대한 거리를 유지하며 살려고 하나, 그럴 수 없는 존재. 영화의 시작부에서 여러 '장비'들을 능숙하게 재빨리 챙기는 그의 손놀림은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많은 우리네 아버지들을 연상시켜 마음을 아프게 한다. 아버지들은 늘상 말하지 않는가. 이 일을 때려치우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건, 마누라와 자식새끼 때문이라고.)

그래서 그들은 검게 시작된 엔딩 크레딧이 서서히 붉은 빛으로 변해갈 때, 마지막 붉은 빛이 화면에서 사라졌을 때 즈음에는 또다른 곳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날은 어둡고, 눈은 끊임없이 흩날리고, 새는 낮게 하늘을 선회하고, 어디선가 낯선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북구의 어느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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