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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프트(loft), 구로사와 기요시

Ending Credit | 2009. 9. 5. 00:54 | Posted by 맥거핀.



(영화 내용에 대한 상당한 미리니름이 있습니다.)



영화가 이대로 끝나는 건가 싶었다. 레이코(나카타니 미키)와 고고학자 요시오카(토요카와 에츠시)가 소녀의 시체가 물 속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기뻐하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할 때, 뭔가 밋밋한, 약간 기이해 보이기는 하지만, 실망스러운 마무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서 갑자기 기계가 둔중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소녀의 참혹한 시체는 물에서 끌어올려지고, 요시오카 교수는 반대로 물에 빠진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장면이라고 생각할 틈도 없이, 강한 시각적 충격이 생각을 정지시킨다. 그랬다. 이건,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였다.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사랑을 확인하며 끝나는 마무리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 반복을 통한 영원한 순환. 이 속에서 빠져나갈 구멍이 없이 마무리 되는 것이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영화다. 관객을 절망을 통한 공포에 빠뜨리는 것이 그의 영화다. 아마, 이 마무리 장면이 없었다면, 뭔가를 쓸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마무리 장면은 그 전의 장면을 생각하게 만든다. 편집장 기지마가 레이코를 습격해, 이상한 형태의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 나무를 통해 양쪽에서 목을 매는 기이한 형태. 반대쪽에서 아래로 내려감으로써 끌어올려지는(즉, 목이 매달리는) 구조. 이것은 이 마지막 장면과 상당히 유사하다(그리고 이 마지막 장면은 한편으로는 요시오카와 레이코가 땅을 파고 갑자기 사랑에 빠지는 그 전의 장면의 반복이기도 하다). 죽은 소녀가 끌어올려짐으로써 요시오카는 물에 빠진다. 한 쪽이 끌어올려지면, 다른 쪽은 반대로 하강한다. 이 끌어올려진다는 것, 끌어올려짐의 형태는 어떻게 보면 영화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된다. 일단, 미이라를 진흙 속에서 끌어올린 요시오카의 발굴 행위부터가 그렇다. 천 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진흙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미이라를 끌어올린 요시오카의 행위. 그리고 사실 이마저도 반복이다. 사실 이 미이라의 발굴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던 것. 1920년대 처음의 발굴이 있었다. 그러나 처음 발굴한 사람들은 어떤 이유에선가 이 미이라를 다시 진흙 속에 가라앉혔다. 그리고 이 미이라를 감시하는 기묘한 기록필름을 남겼다. 즉 이 미이라의 발굴 역시도 일종의 반복인 것, 그러니까 이 영화에는 기록된, 혹은 기록되지 않은 총 4번의 끌어올려짐이 나오는 셈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것이 다가 아닐는지도 모른다. 진흙을 토하는 레이코의 모습. 그런 것마저도 왠지 일종의 '끌어올림'을 연상시킨다. 뱃 속에 가득찬 진흙들이 식도를 타고 끌어올려진다...아니, 이것은 끌어올려짐을 너무 강박적으로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영화의 제목부터가 뭔가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로프트(loft). 사전을 찾아보면, 다락방, 창고 같은 의미이다. 영화 팜플렛에 소개된 대로, 이는 레이코가 요양을 하기 위해 간 시골의 창고와 같은 집을 말한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 '로프트'라는 말은 '리프트(lift)'를 연상시킨다. 끌어올린다는 의미의 리프트. 이 '로프트'라는 말이 '다락' 혹은 '집의 가장 높은 층'을 의미함도 생각해 볼 때, 어원학적으로도 '리프트'와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이 영화의 제목은 로프트 혹은 리프트다. 이 반복되는 끌어올려지는 행위.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가 늘상 그랬듯이 명확하게 제시되는 것은 없다. 단지, 어떤 불확실한 추측만 가능할 뿐이지만, 이는 왠지 어떤 욕구(욕망)와 관계되어 있는 것인 듯 싶다. 일단 욕구라는 것 자체가 가진, 끌어올려지는 어떤 속성. 우리는 흔히 욕구를 발산한다, 혹은 분출한다고 이야기한다. 발산한다, 분출한다는 것은 밑바닥에서 위로 끌어올려진다는 것이다. 내 속의 아주 깊은 진흙과도 같은 늪에 가라앉아 있던 욕망들을 끌어올린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의 거의 모든 인물들의 행위는 어떤 욕구(욕망)와 관련되어 있으며, 그로 인해 인물들은 파멸의 길에 다다른다. 1000년 전에 아름다움을 유지하고자는 하는 욕구로 진흙을 먹었던 어떤 여인은 영원히 죽지 못하는 미이라가 되었다. 그리고 편집장 기지마는 소녀를 범하려는 욕구를 채우려다 소녀를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요시오카는 천년된 미이라를 자신의 학문적(그리고 학문을 통한 입신양명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기어이 늪에서 다시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 역시 소녀에 대해 어떤 욕구를 품고 있다가, 소녀의 죽음에 책임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둘 다 파멸에 이르렀다. 그리고 레이코는...레이코의 파멸은 어떤 의미에서는 예정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소녀의 글을 자신의 이름으로 멋대로 출판했다. 그녀가 그 소설 원고를 봉투에 집어넣는 그 장면은 왠지 그녀의 어떤 파멸을 예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요시오카가 물에 빠지고 사라진 후, 남아있는 그녀의 모습은 멀지 않은 그녀의 파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에서 빠져나갈 공간이란 없다. 그녀는 또 어딘가에 가라앉을 것이고, 그 순간 또 누군가가 끌어올려질 것이다. 그리고 이 순환은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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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것이 끌어올려지고, 그의 반대편에서 또 어느 것이 가라앉는 것, 그 순환성과 영원한 반복, 그것에서 비롯되는 빠져나올 수 없는 공포로 이 영화를 잠깐 생각해 봤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지나치게 도식적인 해석일는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는 사실 상당히 모호한 얼개로 구성되어 있는 영화이다. 물론 이야기의 얼개를 전혀 짜맞출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상당수의 장면들이 현실과 꿈, 혹은 상상의 경계 속에서 희미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 영화의 여러 등장인물들은 상당히 자주 잠에 빠져든다. 그리고 잠시 후에 깨어나서 어떤 것을 바라본다. 이것은 꿈인가, 현실인가, 혹은 빙의된 상태인가. 예를 들어 요시오카가 기계를 돌리며 무언가를 물 속에 가라앉히고 있고, 뒤에서 레이코는 그만두라며 비명을 지르고 있는 몽환적인 장면. 그 후에 바로 레이코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깨어나는 장면이 이어지는 이 장면을, 통상적인 영화 문법에 의해 관객들은 이를 꿈으로써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과연 이 장면은 꿈일까. 레이코는 실제로 이 장면을 본 것이 아니었을까. 혹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레이코는 혹시 누군가가(미이라가, 혹은 소녀가) 빙의되어 있는 상태가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이미 레이코도 죽은 상태가 아닐까. 진흙을 토한다는 장면도 그렇게 보면 심상치 않다. 이미 레이코는 죽어서 몸 속에 진흙이 채워져 있는 상태가 아닐까...아무래도 여기서 상상의 나래를 그만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이렇듯 꿈과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하다. 그리고 그 경계선 속에서 보는 우리는 빠져나갈 수 없는 공포를 느낀다. 악몽의 가장 희망적인 요소는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것, 언젠가 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깨어난 후에도 여전히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상태가 지속된다면, 여전히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면, 그만한 공포도 없을 것이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어떤 인터뷰에서 이 영화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희망과 절망의 경계선을 담아내기를 노린다." 그가 이 영화에서 그런 경계선을 그려내기 위해 활용한 방식은 독특한 카메라의 시점이다. 등장인물을 상당히 이상한 각도에서 바라보는 장면들은, 마치 어떤 유령의 시점을 연상시킨다. 즉 등장인물들이 공포에 떠는 것을 바라보는 다른 각도, 그 곳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 장면 어딘가에 있는 유령, 혹은 환영 밖에는 없다. 그 유령이 등장인물을 바라보는 순간, 그 바라보는 세계는 도리어 상당히 비현실적으로 음침하게 보인다. 마치 도리어 그 곳이 비현실이라는 것처럼. 그 경계선에 카메라는 서 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영화 속에는 있다. 요시오카와 레이코가 건물에 난 창을 가운데에 두고 서로를 지켜보는 장면(포스터에 있는 장면). 레이코가 창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고 바라보는 건물 안은,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비현실적인 공간이지만, 요시오카가 바라보는 관점에서는 밖에서 바라보는 레이코의 모습이 도리어 비현실적으로 이상하게 보인다. 그 경계선에 화면은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도 거기에 같이 위치하여 그 절망을 바라본다. 창 이쪽인가, 바깥인가. 어디로 나가도 당신은 피할 곳이 없다. 경계선 이쪽이나 바깥쪽이나 다를 것은 없다.

공포감은 거기에서 밀려온다. 그리고 거기에 이 영화의 소리를 활용하는 방식 또한 한 몫을 한다. 음악의 사용을 배제하고, 사물들이 발생하는 소리, 주위의 환경에서 들리는 소리들을 증폭시켜서, 공포감을 창출하는 방식은 영화 <불신지옥>과 조금 비슷해 보인다. 그리고 때로 이 소리들은 완전히 사라지고, 고요한 속에 그녀가 서 있다. 나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들을 볼 때마다 악몽을 꾼다. 아마 오늘 밤에도 악몽을 꿀지도 모르겠다. 꾸는 것은 무섭지 않다. 문제는 깨어난 다음이다.




- 2009년 9월, 스폰지하우스 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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