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릿 라이프 오브 워즈, 이사벨 코이셋

Ending Credit | 2009.07.09 22:46 | Posted by 맥거핀.



뭔가 복잡한 심정이 된다. 스페인 감독이 만든, 영어를 쓰는 배우들이 출연하고 대화하는, 그러나 스페인어로 더빙된 영화를 한국어 자막으로 보는 감정. 게다가 주인공들이 말하고 움직이는 이 곳은 어디이며, 그들은 어느나라 사람들인가. 조셉(팀 로빈스)은 한나(사라 폴리)에게 묻는다. "금발이죠? 발음이 좋군요. 어디 사람인가요, 스웨덴? 러시아?" 그러나 한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아무 것도 얘기해서는 안된다는 듯이, 혹은 아무 얘기도 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그리고 감독도 그 이상의 아무 것도 들려주지 않는다. 여기는 어디이며, 이 사람들은 어디 출신의 사람들이며, 어디서부터 왔으며, 왜 여기에 왔는가. 아니, 그래도 몇몇 얘기는 미리 해두어야 할 것 같다.

청력을 잃은 한나는 공장에서 일한다. 같은 일을 반복하고, 점심에는 치킨과 쌀밥과 사과를 먹는 되풀이되는 삶. 공장에서는 사람들이 그녀를 불편해한다며, 그녀에게 사직 대신 휴가를 권한다. 그녀는 한 섬으로 떠나는데, 그 섬에서 멀지않은 석유시추선에 간호를 요하는 환자가 있음을 알게 되고, 그녀는 돌연 거기에 자원한다. 석유시추선에서의 사고로 온 몸에 화상을 입고, 각막손상으로 일시적으로 앞을 볼 수 없게 된 조셉과의 만남. 한나는 그를 성심성의껏 돌보며 그와 점점 가까워진다.

영화를 보기 전, 팜플렛에서 영화의 내용을 잠깐 읽어본 느낌으로는, 흥미롭지만 식상한 설정이라 생각했다. 귀가 들리지 않게 된 여자와 앞을 보지 못하게 된 남자, 그들은 어떻게 소통하고, 어떻게 교감할 것인가. 그러나 왠지 보다보니 이것이 중심축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들의 장애는 어떻게 보면 일시적인 것. 여자는 보청기를 이용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지만, 보청기를 이용하면 실질적으로 듣는 것에 큰 무리는 없다. 남자는 각막 손상으로 앞을 볼 수 없게 되었지만, 이 또한 영구적인 것은 아니며, 치료를 통하여 회복될 수 있다. 남자는 볼 수 없고, 여자는 들을 수 없지만, 그들이 물리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는 어떤 문제가 없다. 문제는 물리적, 그 이상에 있다. 앞에서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이들이 왜 이곳에 와 있는지 서로는 알 수가 없으며, 동시에 관객들도 잘 알 수가 없다. 한나는 왜 청력을 잃었을까, 그녀는 왜 갑자기 조셉을 간호하겠다고 나섰을까, 그녀는 정말 간호사로 일한 경험이 있을까, 조셉은 왜 여기 바다 한가운데 석유시추선에 오게 되었을까, 조셉에게 녹음을 남긴 여자와 조셉 간에는 어떠한 일이 있었을까.

사실 이들은 그렇게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그러나 이 대화들에는 무언가가 담겨져 있다. 그것은 진심, 혹은 진심이고자 하는 마음, 혹은 그와 동시에 자신을 어느 정도는 감추려고 하는 마음. 이들은 어느 순간 자신을 내비치다가도, 마음의 문을 살짝 닫아버리기도 하고, 또 어느 순간에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던 어떤 것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것이 이들이 교감을 하는 방식이며, 많은 사람들이 교감을 하는, 소통을 하는 방식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 영화의 제목 '시크릿 라이프 오브 워즈 secret life of words'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언어로서 전달되는 내용, 그 이상의 어떤 것, 단순히 언어로서만 표현되는 것이 아닌, 언어 그 이상이 담고 있는 진실, 상대방과 무엇인가를 나누고자 하는 마음, 그것들이 가진 힘. 언어가 가진 숨겨진 힘들. 단 한두 마디일지라도 그것이 무언가를 불러일으키는 그 놀라운 파괴성에 대해.
.....................................

아마도, 이러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감, 언어로서 이루어지는 작은 연대들의 힘의 가장 반대편에 한나가 겪은 일들이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짧게 스치고 지나갔지만 발칸이 언급될 때 우리는 한나가 겪은 일들이 어떤 이유로 일어났는지 대략 짐작한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이 영화가 견지하고 있는 어떠한 태도가 이해가 된다. 그 태도라는 것은 요리사 사이먼의 태도 같은 것은 것이다. 세계 여러 곳의 요리를 다양하게 하는 것, 그리고 그 요리를 하면서 그 나라의 음악을 듣는 것과 같은 태도,  혹은 세계 여러 곳에서 온 노동자들끼리 어깨동무를 하고, 같이 노래를 부르는 것과 같은 행동에 어린 어떤 긍정적인 시선 같은 것들 말이다. 아니 굳이 어떤 행동이나 태도를 말하지 않아도, 이 영화의 어떤 무국적성 같은 것들이 그것일 것이다. 당신은 어디 출신의 사람이며, 어디에서 왔으며, 왜 여기에 왔는가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점. 당신은 그 당신 자체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

발칸에서와 같은 거대한 폭력, 혹은 거대한 범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영화 속 정신과 의사의 말대로 그것의 어떤 개인적 체험을 기억하고 기록함으로써 그것에 개개인적인 의무를 덧씌우는 일일 것이다. 어떤 거대한 범죄가 어떤 숫자로만 기억되고, 개개인에게서 떠나 거대한 어떤 것으로만 기록될 때 이는 위험해진다. 개인이 그것을 나와 상관없는 어떤 것으로 여기게 되었을 때 그러한 것은 다시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경험들을 나누고, 그 경험들을 기억할 때, 그것은 돌이키지 말아야 할 일들이 되며, 진정으로 우리가 역사에서 배우는 반성이 된다. 그것이 한편으로는 다시 한 번 이 영화에서 말하는 '시크릿 라이프 오브 워즈'가 아닐까. 그래서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이 누구보다도 자신을 아프게 하지만, 그것을 단호히 이야기하는 한나의 모습을 볼 때, 그리고 그것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조셉의 모습을 볼 때, 바다 한가운데 있는 석유시추선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그리 길지 않은 대화들을 볼 때, 그리고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서 많은 사람들의 또다른 여러 경험들을 이야기하는 기록된 테이프들이 쌓여 있는 것을 볼 때 그것이 어떤 작은 희망들처럼 느껴진다. 





- 2009년 7월, 서울아트시네마 (스페인 영화제)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