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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하고 교과서적인 타격폼

The Book | 2010. 12. 27. 01:18 | Posted by 맥거핀.
왜도덕인가우리사회에던지는가장뜨거운질문
카테고리 인문 > 인문학일반 > 인문교양
지은이 마이클 샌델 (한국경제신문사,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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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모르겠다. 이 '잘 모르겠다'는 것은 책의 내용 그 자체보다는 책을 둘러싼 다른 여러 것과 연관된 물음이다. 마이클 샌델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는 2010년 서점가를 주름 잡았고, 급기야 마이클 샌델은 한국에도 다녀갔다. 나는 사실 그런 열풍이 미스테리했다. <시크릿>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들어있는 것도 이해할 수 있고, <1Q84>가 일종의 신드롬이 된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난데없는 '정의론'이 2010년의 우리나라 서점가를 주름잡고 있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것도 푸른 기와집에 계신 그 분이 새로운 정의론을 내뿜으며 독야청청한 이 시대에. 물론 모든 의문은 그 책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으면 해결될 일이었다. 그러나 트렌디한 열풍에 맞추어 책을 구입하였음에도, 대책없는 게으름으로 끝끝내 책을 펼쳐들지 못했고, 뒤늦게 그 후속작 격인 <왜 도덕인가?>를 억지춘향의 심정으로 읽게 되었다. 그러나, 잘 모르겠다. 왜 이 책이 그렇게 놀라운 화두가 되고 있는지. 그리고 총체적 난국의 우리사회에 어떤 비전을 던져줄 수 있을지. 아니, 거꾸로 말해보자. 우리 사회에서 '정의론'을 읽는 사람들은 그렇게도 많은데, 왜 우리 사회는 어떤 '정의'를 찾아보기 어려운지 잘 모르겠다.

조금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마이클 샌델은 <왜 도덕인가?>에서 현재 미국의 상황에 대해 내내 우려를 표한다. '옳음(정의)'이 '좋음(선)'에 우선했던 지난 시대, 즉 어떤 공동체적인 가치는 쇠퇴하고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아로서의 개인의 권리만이 우선되었던 지난 시대의 빈 가운데를 스며든 것들에 대해 마이클 샌델은 걱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 '스며든 것들'이란 절대적인 거대한 시장의 힘이기도 하고, 거대기업들에 의한 권력의 집중 현상이기도 하다. 또 어떤 의미에서는 근본적인 보수주의 가치관이기도 하고, 공화당 정부이기도 하다. 또 때로는 그 스며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그것은 일정한 조류의 흐름이기도 하다. 민주당과 공화당이라는 미국의 거대한 두 정당은 때로는 '옳음'을 강조하면서 그 대세를 장악하기도 하고, 그 장악된 대세 속에서 '옳음'만이 강조되면서 사라져간 공동체의 종교와 도덕적 가치들을 재빨리 선점하면서 다시 다른 대세를 가져가기도 한다. 그래서 마이클 샌델은 걱정한다. 앞으로 이 오바마 행정부가 그간 민주당 정부가 해온 대로 '옳음'만을 강조하면서 공동체안에 그야말로 공동(空洞)만 남겨놓는다면, 공화당의 무책임한 시장주의와 근본적인 보수주의적 가치들이 그 공동을 채우게 될 것이라는 점을 말이다.

그러나 나의 이 어리둥절함, 혹은 부러움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럼 우리는 뭘까. 우리는 그저 비어있기만 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적어도 하나 깨달은 것이 있다면, 우리 푸른 기와집 사시는 분과 그들의 친구들은 그저 비어계실 뿐이라는 점이다. 즉 문제는 그들이 '나쁜 철학' 혹은 '동의하지 못할 철학'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은 그 '철학'이라는 것이 아예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들은 그 '철학' 대신 다른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4대강을 위한 힘찬 발걸음이기도 하고, 북한에 대한 단호한 의지이기도 하고, '공정 사회'를 향한 멋진 슬로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아무리 잘 봐준다고 해도, 그것을 '철학'이라 부를 수는 없다. 그들이 공정 사회를 이야기할 때, 그들은 '공정 사회'라는 것이 그간 전통적으로 무엇을 의미해왔는지 조금이라도 공부를 하기라도 한 것일까. 그러니 그저 부럽고 어리둥절할 밖에. 부럽다는 것은 그 정도 '철학'이라도 가지고 있는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이 부럽다는 것이고, 어리둥절하다는 것은 왜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 심심한 인기를 끌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위에서도 말했듯이 이 책은 철저하게 미국의 상황과 그간 미국사회에서 논의되었던 맥락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작금의 한국사회는 이 책에서 말하는 미국의 자유주의적 맥락과는 상당히 다른 맥락에서 형성된 사회다. 길게 논의할 필요는 없겠지만, 일본의 식민지배와 한국전쟁, 오랜 독재정치를 거치면서 한국사회의 정치적 그리고 사회적 지형도는 상당히 왜곡되어 버렸다. 즉 우리에게는 현재 '옳음'도, 그렇다고 '좋음'도 없다.

또 철지난 패배주의의 관점에서 '한국적 특수성'을 운운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이 그야말로 들끓는 것처럼 보이는, 그러나 사실은 대부분 텅 비어있는 한국사회에 마이클 샌델의 이 트렌디한 정의론은 조금은 수상해 보인다. 왠지 이 정의론은 익지 않은 라면 위에 올려놓은 양냄새 나는 치즈조각 처럼 보인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이고 고소한 냄새가 풍겨 오지만, 속에는 익지 않은 면발이 꼬들거리는 그런 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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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짧은 잡설이 이 책 <왜 도덕인가?>가 '읽을 만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책은 마이클 샌델의 흥미로운 정의론이다. (책 제목은 <왜 도덕인가?>이지만, 도덕론이라기 보다는 정의론에 가깝다.) PART 1은 일종의 워밍업 단계로서 다양한 도덕적, 종교적, 사회적 이슈들에서 왜 사회에 도덕적 가치가 우선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진한다. 즉 이 부분은 본격적인 논의를 위한 전 단계로서 독자에게 한 가지 사태를 여러가지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하며, 동시에 일종의 논리적 사고를 위한 연습문제들이다. 마이클 샌델의 본격적인 자기목소리는 PART 2의 말미와 PART 3에 집중되고 있는데, PART 2는 지난 여러 철학적인 논의들에서 일관되게, 자신의 정의론을 뒷받침할 수 있는 논거들을 찾아내는 과정이다. 그것은 칸트의 선험적 주체와 무연고적 자아를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고, 권리를 집착하는 자유주의를 버리고, 듀이의 공동체적 자유주의로 돌아가는 것이기도 하며,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와 종교 및 도덕성 간의 대립에서 도덕성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PART 3에서는 그가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다시 한 번 요약하여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그간 정치적 자유주의가 초래한 공동체의 비어버린 중심에 도덕적 가치를, 즉 공공선을 불어넣자는 것이다.

사실, 진정으로 궁금했던 것은 그 마지막에 관계된 것이었다. 마이클 샌델은 책의 내내 공동체의 중심에 공공선이 자리잡도록, 즉 미국 자유주의 공공철학이 자리잡도록 할 것을 주장하고 있는데, 과연 그 공공철학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 핵심은 마지막에 와서야 비로소 소개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4가지이다. 첫째, 자유주의 진영은 시민자치와 공동체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는 것, 둘째,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해하고 거기에 참여할 이유를 발견하지 않는 한 그 어떤 간곡한 권고로도 공동체를 회복시키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 셋째, 정치권은 현대 경제구조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소비 중심의 경제가 아닌 자치 중심의 경제로), 넷째, 도덕적인 혹은 종교적인 담론을 공공생활과 분리시키려는 충동을 극복해야 한다는 점, 즉 정부가 중립을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해야 한다는 점. 혹 마이클 샌델의 다음의 정의론에 관계된 내용이 또 출간된다면, 그것은 이 4가지의 요점을 다채롭게 논의 발전시키는 내용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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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간에, 나는 잘 모르겠다. 처음에는 이러한 일종의 작은 독서 열기가 공정하지 않은 공정사회에 저항하는 어떤 심리들이 반영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글쎄. 적어도 이 책만 놓고 본다면, 이는 절대 푸른 기와집과 친구들에 반하는 내용이 아니다. 그보다는 트렌디한 전범(典範)에 가깝다. 우리에게는 아주 잘짜인 본보기보다 조금 더 거친 목소리들이 필요하다. 원래 잘 치던 타자가 타격폼이 무너지면, 깨끗하고 교과서적인 타격폼을 다시 유심히 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폼을 되찾을 수 있지만, 기초가 아예 없는 타자에게는 혹독한 러닝이 때로 답일 수 있다. 아, 그리고 한 마디 더 덧붙이자면, 깨끗하고 교과서적인 타격폼을 가지고 있다고 꼭 안타를 많이 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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