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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Mother), 봉준호

Ending Credit | 2009. 6. 1. 00:29 | Posted by 맥거핀.



(미리니름이 상당히 있으니 영화를 보실 분은 읽지 마시길 바랍니다.)


옛날 어느 도시에서 한 마술사가 우물에 묘한 약을 넣어 버렸다. 마술사는 말하기를, 만약 그 우물물을 마신다면 누구나 미쳐버릴 것이라 하였다. 그 도시에는 우물이 딱 두 개밖에 없었다. 하나는 평민들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왕의 것이었다. 저녁이 되자 온 도시 사람들이 미쳐갔다. 사람들은 그 우물물을 마시면 미쳐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마시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우물이 그들이 마실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게다가 뜨거운 여름이었다. 그들이 얼마나 참을 수 있었겠는가? 얼마 안 가 사람들은 포기했고, 저녁때가 되자 온 도시가 미쳐갔다.
왕은 무척 행복했다. 왕은 궁전 테라스에 올라가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리고 대신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별개의 우물을 갖고 있지. 신에게 감사한다. 온 도시가 미쳐버렸군 그래." 사람들은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고, 날뛰고 깔깔거리며 웃고, 울며 난리들이었다. 그것은 지옥이요, 악몽과 같았다. 모든 사람들이 전에는 결코 해본 적도 없었던 일들을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은 행복에 잠겨 있었다. 사람들이 왕궁으로 몰려와 외치기 시작했다. 병사들 역시 도시에 있었기 때문에 그 우물물을 마시고 미쳐 있었다. 다만 몇몇의 호위병들과 요리사, 하인들, 대신들 그리고 왕 자신과 여왕만이 미치지 않고 온전해 있었다. 왕은 크게 걱정이 되었다. 왕이 물었다. "어찌하면 좋겠는가?"


봉준호 감독이 그리는 세계는 대체로 상당히 이상한 곳이었다. 그 곳은 열려 있으나 실상은 폐쇄된 공간, 예를 들어 한강을 둘러싼 서울의 일부지역이거나, 지방의 작은 중소도시. 그 한정된 공간 안에서 이상한 일들은 벌어졌다. 이상한 약품을 먹고 자라난 물고기는 괴물이 되어 고수부지를 덮쳤고, 지방의 한 도시에서는 비오는 밤마다 빨간 옷을 입은 여자들이 강간되어 버려졌다. 그리고 괴물은 한강을 따라 폐쇄된 공간을 활주하며 그 위용을 뽐냈고, 살인마는 작은 도시의 이곳저곳을 누비며, 경찰의 눈을 피해 은밀히 사건을 계획하고 실행했다. 그리고 또 여기는 지방의 작은 소읍. 한 여고생이 밤길에 살해되어 옥상에 버려졌고, 한 어리숙한 청년은 살인범으로 지목되어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아들이 죽인 것이 아니라고 항변하며, 진실을 찾고자 한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모두가 미친 세계. 목격자의 불확실한 진술과 작은 골프공 하나를 단서로 범인을 지목한 경찰, 아들이 범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돈만 받아 챙기려는 변호사, 아들과 어머니를 수상쩍은 눈길로 바라보는 이웃들, 도와주기는 하겠으나 돈이 필요하다는 아들의 친구, 그리고 죽은 여고생을 벼랑 끝으로 몰고 있는 은폐된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들. 어머니는 묻는다. "어찌하면 좋겠는가?"

봉준호 감독은 이번에도 그 전작들과 비슷한 것에 관심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봉준호 감독의 전작 <살인의 추억>, <괴물>을 살펴보면, 감독은 표면에 드러난 이야기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즉 <살인의 추억>에서 살인범이 과연 누구인지를 밝히는 것, 혹은 <괴물>에서 괴물이 과연 어디에 숨어 있는지를 찾는 것은, 그저 미끼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이를 '맥거핀'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감독은 이러한 것들을 하나의 맥거핀으로 두고, 그보다는 이 모든 것의 이면에 숨은 것들, 이러한 틀을 만든 폭력의 구조에 더욱 관심을 보인다. 감독이 이러한 폭력의 구조를 드러내는 방식은 그러한 폭력의 구조 속에서 망가져 가는 개인을 드러내보이는 것이다. <살인의 추억>에서 계속 사라져가는 여자들과 더불어, 경찰들에게 끌려와 폭행당하고 군화발로 짓밟히는 무고한 시민들, <괴물>에서 국가로부터 어떠한 보호와 도움도 받지 못하고, 괴물보다는 오히려 국가로부터 계속 공격당하는 현서네 가족들이 그러한 폭력의 구조 속에서 망가져가는 개인들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폭력의 구조가 만들어낸 괴물들(변형된 물고기와 살인마)과 그 괴물을 만들어내고, 만드는 데 일조한 자들(한강에 약품을 뿌린 자들 또는 경찰들, 국가기관)이 은폐되고 처벌받지 않기 위해서, 다른 무엇이 필요했고, 현서네 가족과 경찰서 지하에서 폭행당한 사람들은 그 희생양이 된 것이다.

<마더>도 그러한 면에서 전작들을 연상시킨다. <살인의 추억>이 연상되는 지방의 어느 소읍. 이곳은 상당히 폐쇄된 사회다. 한 다리만 건너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그러한 작은 사회에서, 공동체의 무참한 폭력이 한 소녀에게 가해진다. 이는 폐쇄된 사회, 폐쇄된 공동체에서 가해지는 알려진, 그러나 모두들 쉬쉬하는 그런 폭력. 그러나 이 폭력은 실제로 이러한 폭력을 가한 이들의 문제만은 아니다. 어떤 사건이든 별로 공들여 수사할 마음이 없는 경찰과, 변호사와 검사와 병원장이 젋은 여자를 끼고 술을 마시는 모습이 중첩된 이곳에서 이 구조가 온전히 이들만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봉준호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결코 처벌받지 않는다. 이들이 자신들의 죄를 벗어나는 방법은 간단하다. 다른 희생양을 내세우는 것. 도준(원빈)이나 기도원 종팔이와 같은 어리숙한, 사회적인 약자들. 이들은 결국 자신들이 만들어낸 틈을 가장 약한 곳을 부러뜨려 메우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지금도 일어난다. 그러고 보면, 감독은 영화가 현재의 이야기임을 여러번 상기시킨다. 언뜻 배경이나 상황만으로 볼 때는 <살인의 추억>과 같은 80년대를 다루고 있는 듯 하나, CSI를 언급하거나, 2006년 월드컵을 이야기하며, 이것이 현재에도 일어나는 일임을, 이 폭력의 구조가 여전히 그 그늘을 드리우고 있음을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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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은 꽤나 친절하다.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굳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될 장면까지 세세한 설명과 주석을 덧붙인다. 흥행감독으로써 가끔은 비교 대상이 되지만, 그런 면에서 박찬욱 감독과 상당히 다르다. 예를 들어 박찬욱 감독이 약간 고약한 이미지의 추상화를 그려놓고 "이 추한 것에도 아름다움이 있지 않니..이 이면의 것들을 보렴..."이라고 말하는 식이라면, 봉준호 감독은 피터 그리너웨이의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에서 보이는 잘 짜여진 풍경화를 그려내놓고, "자 여기에서 네가 보지 못한 것이 있을거야...그게 뭐냐면 말이지.."라고 말하는 식이랄까. 작은 복선들과 작은 디테일들이 중첩되어 그 이상의 많은 것들을 봉 감독의 영화는 전달한다. 그러나 굳이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을 예로 든 것은, 이유가 있다. 그 그림들에서 풍기는, 이상한 미스테리와 괴기(怪氣)들. 그것 또한 이 영화에는 존재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몇 가지 미스테리한 질문이 가능하다. 도준은 과연 어디까지 기억하고,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그는 엄마의 생각대로, 혹은 우리 모두의 생각대로, 정말 '바보'인가. 이 엄마(김혜자)는 도준에게 왜 이렇게 집착하는 것일까. 이를 전적으로 과거의 사건에 대한 죄책감(도준을 그렇게 만들었다는)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그 이상의 어떤 것이 있을까. 

그러고보면 이 엄마야말로 수상쩍은 부분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도준의 아버지는 누구이며,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돈이 별로 없는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에서 숨겨진 돈들이 나오고, 군에서 최고 잘나가는 변호사를 찾아갈 줄도 알며, 이상한 침술은 어디에서 배운 것일까... 또 형사 제문(윤제문)이나 아들의 친구 진태(진구)와의 관계도 어딘지모르게 약간 이상한 점이 있어...아니야..그건 단지 김혜자에게서 풍겨나오는 어떤 아우라에 내가 너무 깊숙히 빠져든 탓일꺼야...그래도 그 춤은 좀 이상하잖아...그래...그 춤. 맞아, 그 춤. 이 영화는 시작과 끝이 동일한 구조로 되어 있다. 시작 부분에 엄마의 우스꽝스럽고도 어딘지모르게 슬퍼보이는 그 춤에서, 엄마가 약재를 썰다가 밖을 내다보고 거기에 아들 도준이 서 있는 장면으로 넘어가면서 시작한다면 마지막에서는, 엄마가 산자락에 서 있는(처음의 그 춤 장면은 아마도 시간상으로는 여기에 들어가는 장면일 것이다) 장면에서, 다시 약재를 썰고 그 밖을 내다보면 형사가 서 있는 장면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여기에 마지막으로 엄마가 버스에 올라타 침을 찌르고 버스 안의 아주머니들과 한바탕 춤을 추는 것으로 끝난다. 이 마지막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엄마는 약한 존재였다. 시작 부분에 어두운 방안에서 약재를 썰며 좁은 문으로만 아들을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 그 아들이 차에 치여도, 갑자기 나타난 형사에게 잡혀가도 엄마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이 작은 프레임으로만 아들을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은 나중에 도준과 구치소에서 대면하는 장면과 겹친다. 역시 사각의 틀 안에서 작은 틈으로만 아들과 대화할 수 있는 엄마의 모습. 그러나 이 엄마의 모습은 달리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누구와도 만나고 어디든 나타나면서 말할 수 없이 거대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마지막에서 아들 도준 대신 그곳에 앉아 있는 다른 아이를 보면서 "엄마가 없어?"라고 묻는 그 순간, 엄마는 다시 작은 사각의 틀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틀 안에서 더 작은 틀들로 끊임없이 분열된다. (이를 감독은 상징적인 장면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그 이상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 엄마는 고통스런 기억을 잊게 해준다는 부위를 침으로 찌르고, 아주머니들과 섞여서 춤을 춘다. 이로써 엄마는 일종의 공범이 된 것이다. 국가와 사회가 보호해야만 하는 사회적 약자인 어느 소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자들과 아프게 손을 맞잡은 것이다. 다른 수많은 모성(母性)들 틈에 섞여서. 내 아들 대신 다른 아들을 밀어넣고, 작은 엄마로 돌아가며.

어쩌면 모두가 미쳐 있는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최대한 지키는 방법은 누구보다도 더 미치는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아마도 죽을 때까지 내가 이 엄마를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누구보다도 자신의 세상을 지키려했던 어머니를 기억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대신이 말했다. "꼭 한가지 방법이 있긴 합니다. 폐하께서도 그 우물물을 마시는 겁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서두르시지요." 그래서 그 왕은 그 우물물을 마셨고, 잠시 후에는 그도 미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군중들이 기뻐하며 소리쳐 외쳤다. "아, 신이여 감사합니다. 우리 왕의 마음이 이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왔습니다."

- 오쇼 라즈니쉬, <배꼽> 중에서







- 2009년 5월,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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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니름 있지만, 알고 보셔도 괜찮습니다.)





인디스페이스의 월례비행에 다녀왔다. 이달의 영화는 이강현 감독의 <파산의 기술(記述)>. 일종의 사회성 짙은 다큐멘터리다. 영화는 친절하지 않다. 제목은 <파산의 '기술'>이나 '기술'보다는 '이미지' 또는 '파편들'에 가깝다. 화면에는 여러 이미지들이 떠돈다. 지하철에서 투신하는 사람을 흐릿하게 잡은 CCTV 화면, 대한뉴스, 타이거우즈가 빙그레 웃음짓는 카드회사의 광고, 어느 담벼락에 붙어있는 광고전단들, 어느 시위 현장, 386들의 축제, 세계 경제 포럼....많은 이미지, 이미지, 이미지들. 그리고 그 중간에 비정규직 노동자 몇몇의 인터뷰와 은행의 대출담당 직원의 인터뷰와 파산의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감독의 나레이션과 조세희의 <난쏘공>, <시간여행>의 몇몇 구절이 끼어든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영화는 친절하지 않다라고 말하기 보다는, 계속 우리의 분노와 공포를 가라앉힌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 영화는 관객의 몰입을 방해한다. 영화는 몇몇 강렬한 장면들을 일부러 피했다는 인상을 준다. 예를 들어, 채권추심자가 파산한 사람의 집의 물건들을 압류하러 찾아가는 장면들, 혹은 카드회사에서 돈을 빨리 갚으라고 반협박조로 이야기하는 장면들은 아주 흐릿한 화면으로 제시되거나, 아예 암전된다. 그리고 그나마 음성도 조금 나오다가 말아버린다. 인터뷰 장면들도 마찬가지이다. 인터뷰 중 극적인 장면들, 예를 들어, 한 파산한 아주머니가 카드빚을 갚기위해 한 노래방 도우미 경험을 이야기하는 장면에서도 조금 이야기하는 듯 하더니 금새 다른 장면으로 넘어가 버린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인터뷰도 그렇다. 한 사람의 인터뷰를 차분히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인터뷰를 상당히 혼란스럽게 짜깁기한다. 여기에 중간중간 갑자기 끼어드는 여러 이미지들과 자막들,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갑자기 제시되는 조세희 소설들의 구절들, 그리고 감독이 '손발이 오그라든다'고 표현했던 상당히 문학적인 수식을 가진 나레이션들은 관객을 지속적으로 영화에 몰입할 수 없게 만든다.

왜 이 영화는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는 것일까. 아마도, 몰입은 공감과 분노, 또는 공포를 낳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는 관객이 파산에 대해 어떤 공포심을 갖거나, 혹은 이 사회가 파산한 자들에게 가하는 폭력의 구조를 보고 분노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보다는 이 파산의 구조, 이 구조 자체를 조금 더 주목해서 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 파산의 구조가 어떻게 이루어지며,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두 눈 크게 뜨고 보라고, 그렇게 보아야만 당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파산 그 이후(TV의 사회고발물들이 대체로 다루는 부분인)보다는 '파산 그 자체'에 대해서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영화는 꽤나 친절하지 않다. 파산의 '기술'이라고 해서 그 파산의 구조 자체를 줄줄이 설명하기를 기대했다면 오산이다. 이 파산의 구조는 매우 흐릿하고 상당히 희미하게 보여진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 진실에 더욱 가까울 것이다. 파산의 구조라는 것이 그토록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그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대지는 않을 것이다. 희미하고 드러나지 않지만, 사람들을 조금씩 끌어들이는 거대한 블랙홀, 그것이 파산의 늪이다. 다만 몇 가지는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 중의 한 가지는, 이 파산의 구조라는 것은 드러나 있는 층과 그 이면의 층이 있다는 것이다. 은행의 대출들과 카드회사의 친절한 광고들, 그리고 그 이후에 조금은 필연적으로 이어지는 불친절한, 아니 폭력적인 전화목소리와 압류딱지를 붙이는 손길과 파산자들의 눈물과 의료보험 해지와 목소리들에 대한 노이로제가 드러나 있는 층이라면, 그 이면에 드러나 있지 않으나 사실은 훨씬 더 폭력적인 층이 있다.

이 드러나 있지 않은 층은 이 영화에서 '집행자들'이라는 자막과 함께 스치고 지나갔던 모습이다. IMF 이후 시작된 외국자본의 침공과 무너진 국내경제, 서민들의 손에 친절히 쥐어진 '카드'라는 함정 속에 숨은 카드회사를 살찌우던 정책들, 불안정한 고용 속에서 언제라도 이런 파산의 늪에 들어설 수 있는 비정규직들과 이 비정규직을 탄생시킨 사람들과 법률과 정책들. 이는 아마도 이 영화에 나온 3가지의 상징적인 장면들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세계 경제 포럼(혹은 그 비슷한 것)이 열리는 장면. 이 장면의 사운드는, 그들이 하는 소리는 '개소리'에 불과하다고 연상될 정도로, 웅얼웅얼 소음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래도 그들 손에 들린 와인잔은 확실히 알겠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은행의 대출담당 직원의 인터뷰. '회사들보다는 가계에서 훨씬 상환이 잘 되니까요. 그쪽으로 자금이 몰리는 거죠.'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일이다. 커다란 회사가 무너질 위기에 처하면, 가끔 구제금융이니 뭐니 하는 얘기도 나오지만, 개인이 무너질 때는 아무도 그들을 '구제'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파산해가는 사람들과 교차되어 편집된 386들의 모습들, 그들이 축제에서 민중가요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고, 손을 흔드는 장면들. IMF 이후 소위 '진보정권' 10년의 시대에 양산된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카드회사들과 제2금융권과 파산자들, 그 함수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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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끝나고, 이송희일 감독의 사회로 이강현 감독과 변성찬 영화평론가, 그리고 파산 관련한 시민단체에서 나오신 분(단체명 및 성함이 기억이 안난다...-_-)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자리가 있었다. 영화에 대해 여러 이야기들이 오갔지만, 전체적으로 조금은 조심스러운 분위기였다. 그것은 아마도, 故 노무현 대통령과 관련된 이야기가 필연적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이 영화의 월례비행 상영은 몇 달 전부터 계획되었던 것이지만, 아무튼 지금 이 시기에 이 영화의 얘기를 한다는 것이 감독은 조금 부담스러운 듯 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 영화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파산의 구조 그 이면의 것들, 그리고 그 구조를 만든 것에 어느정도 책임이 있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소위 '진보정권'에 대해 이야기를 조금은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이 영화는 2006년에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故 노무현 대통령과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386세대에 대해 말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감독은 여러번 '잘 모르겠다'는 말을 반복했다. 감독 그 자신도 노무현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었지만, 지금 이 시기에 와서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박노자 선생이 쓴 글과 같이, 인간 노무현과 정치인 혹은 대통령으로서의 노무현을 확실히 분리해서 볼 필요가 있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한편으로는 인간 노무현과 정치인, 그리고 대통령 노무현이 자꾸 섞여들어가고 있음도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 대담 중에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다. 변성찬 영화평론가가 질문한 다음의 부분이다. 영화 중간 파산한 분들의 인터뷰에서 한 아주머니가 돈을 어떻게해서든 꼭 다 갚겠다고 다짐하는 장면이 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고도 말할 수 있지만, 흥미로운 것은 이 아주머니는 돈 몇 푼 때문에 의료보험이 없어 고통에 신음해야했던 아이들 이야기를 하면서도, 의료보험비를 못내도 카드빚은 내야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어떻게 바라보야만 할까. 이에 시민단체에서 계신 분이 날카로운 대답을 해줬다. 이들에게 파산한 것은 하나의 '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 즉, 돈을 못갚고 파산한 사람들이 마치 하나의 커다란 죄인처럼 이 사회에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파산한 사람들에게 하는 협박과 폭력과 폭언은 어느정도 정당화되며, 그들이 마치 신앙간증을 하는 것처럼, TV 앞에 나와 눈물로 돈을 다 갚을 것을 호소하는 사회, 그리고 하루에 2-3시간만 자면서 결국 돈을 다 갚은 것이 미담처럼 다루어지는 사회. 이러한 사회에서 이들이 다른 어떤 것보다 '빚을 갚는 것'을 우선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빚을 갚는 것'이 이들에게는 죄를 짓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시 '프레임'이 다르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는 우리들에게도 역시 이같은 다른 '프레임'이 필요하다.






- 2009년 5월, 인디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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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Thirst), 박찬욱

Ending Credit | 2009. 5. 16. 20:45 | Posted by 맥거핀.


(미리니름 있음)




말 많은 영화 <박쥐>를 이제서야 보았다. 여러 논쟁적이며, 동시에 노골적이고 자극적인 기사들과 평론가들의 상찬과 혹평에 둘러싸여 있는, 동시에 일반 관객들의 다양한 의견을 촉발시키던 영화, 그리고 네티즌 평점 0점과 10점을 오락가락하는 회오리의 중심에 있는 영화다. 처음에는 다들 왜 이럴까. 이 영화의 어떤 면이 관객들에게, 혹은 평론가들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하는 생각을 불러 일으키는 것일까하고 생각했지만, 영화를 보고 나니, 그들이 이해가 된다. 이 영화는 한편의 원형이자, 아주 흐릿한 형상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 비문(碑紋)과도 같은 영화다. 그 비문을 어떤 각도에서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매우 달라질 수 있을 듯하다. 한마디로 모호하다. 그들의 '모호필름'이라는 이름처럼.

물론 여기서 하나 주의해야 할 것은 있다. 그것은 비문이 새겨진 앞면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그 새겨지지 않은 뒷부분에도, 혹은 그 비문이 새겨진 재질에도 살짝 주의를 기울여봐야 할 것이라는 점. 그러나 뭐 어찌되었던 간에 그것을 어떻게 읽는가는 자신의 몫이며, 자신의 즐거움이다. 광개토대왕릉비에 새겨진 몇 줄의 글에 대한 자신의 해석만을 강요하는 누구들처럼, 그 오독(誤讀)을 누군가에게 강변하지만 않는다면,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래서 여기 하나의 오독을 살짝 올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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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시작하고, 영화의 제목이 화면 중앙에 나타난다. 박쥐, Thirst. '박쥐'라는 잘 알려진 제목보다, 이 영화의 영문명인 'thirst'에 더 흥미가 가며, 내내 그 제목이 머릿 속을 맴돈다. 목마름이라, 무엇에 대한 목마름인가. 물론 여기서의 목마름은 여러 다양한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피에 대한 갈망, 항상 굶주려하는 뱀파이어의 운명과도 같은 목마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고, 태주(김옥빈)의 다른 세상, 다른 삶에 대한 동경의 목마름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고, 혹은 상현(송강호)의 신부로서의 거세되고, 억압된 삶,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것들에 대한 목마름으로 볼 수도 있다. 하여간, 그것을 무엇이라고 보건, 목마름은 결핍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즉 어떤 것이 부족한 상태, 어떤 것이 충족되지 않은, 일종의 마이너스 상태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목마름을 푸는 행위, 즉 갈증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것은 플러스가 되고자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마이너스 상태에서 벗어나 0이 되기를 갈망하는 행위이다.

이 갈증을 푸는 행위는 영화에서 수차례 다양한 형태로 반복된다. 일단 뱀파이어가 된 상현이 누군가의 피를 빠는 행위도 그러하고, 상현과 태주가 격렬한 키스를 나누는 행위도 그러하고, 혹은 서로의 발가락을 빨거나, 젖가슴을 탐하는 행위도 그러하다. 물론 섹스는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이러한 행위들 중에서 영화의 중간, 흥미로우면서도 상징적인 장면이 눈길을 끈다. 죽은 태주를 살리기 위해 그녀에게 상현이 자신의 피를 내어주는 장면. 상현은 태주의 피를 계속 받아 마심으로써 태주를 죽음에 가깝게 인도하는 동시에 그녀에게 자신의 피를 내어줌으로써 그녀를 뱀파이어로 만들어 살리고 있다. 반대로 태주는 자신의 피를 잃어가며, 점점 상현의 피를 받아들이게 되고, 이는 그녀를 더욱 뱀파이어화하여 상현의 피를 계속 갈구하게 만든다. 즉 상현과 태주는 완벽히 돌고돈다. 상현이 플러스가 되는 순간 그녀는 마이너스가 되며, 동시에 0을 향한 그녀의 갈구가 시작된다. 왜 그는(혹 그녀는) 끝없이 결핍되며, 끝없이 목말라하는가.

이를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며, 불완전한 존재로 태어났다. 인간은 세속적인 욕망, 혹은 물질적인 욕망 앞에 한없이 나약하며, 한없이 초라해진다. 이는 늙은 노신부(박인환)의 모습에서도 드러나지 않는가. 평생을 사제로 살아온, 모든 것 앞에서 초연해 보일 수 있을 것 같던 이 사내도, 세상을 보기 위해 뱀파이어의 피를 갈망한다. 즉 불완전한 존재에서 완전한 존재로 나아가기 위한 인간의 욕망은 숙명과도 같은 것이며, 천형과도 같은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완전해지려고 한다. 예를들어 뱀파이어가 된 태주가 집을 완전하게 하얗게 칠하려던 것처럼 말이다. 하얀색, 완벽하고 순수함에의 욕망. 그러나 태주의 입에서 토해져 하얀 바닥위에 번져 나가던 붉은 색의 피처럼, 완전하게 흰 것이란 유지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인간은 불완전함이란 굴레에서 벗어나 완전해 질 수 있을까. 글쎄. 만약 인간이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 완벽한 존재가 될 수 있다면 그를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렇게 불러야하지 않을까. 신, 혹은 사탄, 어쩌면 뱀파이어.

그래서 한편으로는 이 영화에서의 뱀파이어라는 것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가가 흥미롭다. 이 영화의 뱀파이어라는 존재의 느낌은 영화속 태주의 말마따나 꽤나 '귀엽고' 유쾌하게 그려진다. 그간 다른 영화들에서 그려졌던 창백한 얼굴을 한 나약한 모습의(마늘에도 놀라는), 괴상한 검은 망토를 걸치고 다니며, 때로는 우스꽝스럽게도 박쥐로 변하고 했던 그런 모습이 아니라, 강하고 힘센, 마치 슈퍼맨처럼 세상을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는 쿨하고 강한 모습의 뱀파이어로 말이다. 왠지 이 영화 속의 뱀파이어의 모습은 영화 <트와일라잇>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그 영화에서도 쿨하고 멋진 뱀파이어의 모습에 별 고민 없이 여주인공은 뱀파이어가 되기를 자청하지 않던가. 영화 속 태주가 뱀파이어가 되기를 원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태주는 뱀파이어가 되며, 도리어 예전보다 훨씬 생기를 되찾는다. 영화 처음 병든 남편(신하균) 옆에서 남편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로 보이던 다크써클 태주의 모습과 영화 후반부 태주의 모습은 또 얼마나 다른가.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상현과 태주가 쿨해 보이는 이유는 별 고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고민을 아예 안한다기 보다는 가장 결정적인 고민을 안한다. 자신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고민 말이다. (생각대로 송에 맞춰) 피 먹고 싶으면,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거 받아 마시면 되고, 그도 없으면 자살하고 싶은 사람거 먹으면 되고, 그것 마저도 다 떨어지면~, 인터넷으로 모집하면 되고~. 생각대로 꿀꺽 아..얼마나 쿨한가. 그래서 그런가. 왠지 그런 상현의 모습을 보면서 그리스 신화에 나오던 신들의 모습이 연상된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사랑과 질투와 복수와 배신이라는 인간의 오만 감정은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인간들의 죽음 앞에서는 한없이 쿨해진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들을 마음대로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고, 벌레로 변신시키고, 나무로 변신시키도 한다. 그리고 그들은 하늘을 가르며 날기도 하고, 엄청난 괴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마치 상현처럼 말이다. 그래서 한편으로 이 영화는 사랑과 배신과 복수의 감정이 난무하는 그리스 신화의 세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고민하지 않으면서도 엄청난 힘과 능력을 소유한 이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신화가 연상되지만, 위에서도 말했듯이 결국 이들이 인간의 불완전함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이는 왠지 신화의 세계를 생각나게 한다. 신화의 효용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의 중요한 테마는 인간의 불완전함, 신 앞에서의 인간의 나약함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화에서 신과 대결하려 한, 혹은 신을 모방하려 한 인간들은 모두 예외없이 파멸에 이른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끊임없이 완벽해지려 하고, 신 앞에 그 존재를 드러내보이려고, 욕망을 향해 목말라한다. 그러고보니 영화 초반부의 설정이 머리를 스친다. 백인과 아시아인, 특히 그 중에서도 독신 남자만 걸리는 병. 반쪽의 존재로서의 인간. 그들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이브'라는 치료제를 투여하는 방법뿐이다. 이브? 태초에 불완전한 존재였던 아담도, 이브의 존재로 인해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는가. 익히 잘 알듯이, 뱀에게 유혹당한 이브는 선악과를 아담과 나누어 먹었고,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다. 하아..이야말로 <박쥐>의 이야기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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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제야 알겠다. 인간의 거의 모든 이야기들은 그리스 신화이건, 창세기이건 신화적 이야기에서 그 뿌리를 두고 흘러나와 수만가지의 갈래가 되어 우리 옆에서 머무른다. 따라서 이 신화적인 이야기에서 여러 다양한 해석들과, 여러 논란들이 생겨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다만 나에게는 아직도 몇 가지 의문점들이 여전히 머리 속에서 맴돈다.

하나는, 태주는 거의 백치에 가까운 남편(신하균)을 죽이고 싶어하면서도, 그녀에게 계속 모욕과 수치를 안겨주는(그녀의 표현을 빌리면 '강아지처럼 다루는') 라여사(김해숙)는 끝까지 죽이지 않고 살려두는 것일까. 신화라는 것에 너무 꽂혀버려서 그렇겠지만, 왠지 이 영화 속 라여사는 신화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을 연상케한다. 예언자들이 신탁을 받아 그것을 몸짓과 불가해한 언어로써 전달하는 것처럼, 라여사는 마비된 몸 안에서 눈동자를 통해 모든 것을 전달코자 한다. 그리고 이 예언자들은 신화 속에서 대체로 끝까지 살아남아 그가 예언한 세상의 몰락을 그의 두 눈으로 지켜본다. 마치 라여사가 끝까지 살아남아 마지막을 지켜보는 것처럼 말이다.

다른 하나는 이 영화를 둘러싼 종교적 논쟁들이다. 이 영화는 카톨릭영화인가, 반카톨릭영화인가. 글쎄. 나로서는 인간이 불완전하고 나약하다고 말하는 이 영화가 왜 반카톨릭이 되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 그리고 그 불완전하고 나약함으로 죄를 저질렀고, 예수님께서 그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해 돌아가셨다가 부활했다고 말하는 것은 기독교의 핵심과도 같은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에 대한 부분은 확실히 조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영화를 다시 한 번 보면 뭔가 다른 느낌이 오는 것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조금 더 세속적인 질문을 하자면, 이 영화는 걸작인가, 아닌가. 글쎄. 위에서도 말했지만, 참 모호하다. 모호한 상징과 모호한 알레고리로서 관객을 혼미에 빠뜨리는 이 영화가 과연 '영화적으로' 걸작인가. 관객에게 어떤 영화보기의 쾌감, 혹은 영화보기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가. 글쎄. 이 영화가 원형적인 텍스트로서 철학적인 만족감을 제공해줄지는 몰라도, 영화적으로 훌륭한 것인가. 과연 '영화적'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맞물려 이 영화 <박쥐>는 다시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 어쩌면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간단하고 쉽게 말해서 이렇게 물을 수도 있겠다. 당신은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싶나요? 영화사의 걸작들이 그러는 것처럼, 다시 한 번 그 장면들을 보고 싶나요? 그럼 나는 이렇게 답하겠다. 일단 지금은 아닙니다. 한 두어달 후에 생각해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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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영화관을 나오면서 아주 세속적으로 던진 질문은 이거였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기이한 장면들과 괴이한 이야기로 관객을 불편함에 빠뜨리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 못지않게, 박찬욱 감독들의 영화도 그러한데, 왜 누구의 영화는 한국영화 최저관객 신기록을 향해가고, 누구의 영화는 영화관을 가득 메인 관객들을 어리둥절함에 빠뜨리는가. 김기덕과 박찬욱의 차이는 뭘까. 이것은 단순히 배급력과 홍보의 차이인가. 아니면 영화의 문법적으로, 혹은 내러티브, 혹은 만듦새로서, 이 감독들의 영화에는 무엇인가 차이가 있는 것일까. 갑자기 궁금해진 올해의 새로운 주제. 이 영화를 보러 온 수많은 관객들은 왜 이 영화를 보러 왔을까.




- 2009년 5월, 메가박스 코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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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들의 땅, 노경태

Ending Credit | 2009. 5. 6. 17:37 | Posted by 맥거핀.



(미리니름 있음)





그 몇 분의 장면을 이야기하기 위해 나머지 장면들이 필요한 것 같은 영화들이 있다. 절뚝거리며(그리고는..) 걸어나가던 케빈 스페이시의 뒷모습을 이야기하기 위해 나머지 장면들이 필요했던 <유주얼 서스펙트> 같은 영화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예를 들어, <쇼생크 탈출> 같은 이야기는 어떠한가. 더러운 시궁창 속을 기어나와 두 팔을 벌리며 쏟아지는 비를 만끽하는 앤디(팀 로빈스)의 감정이 그토록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은 결국 그 나머지 장면들 때문이 아니겠는가.

지금 얘기할 <허수아비들의 땅>에도 그러한 것이 느껴지는 장면이 있다. 절대 만나서는 안될 것 같은 이들은 이 마지막에 마주친다. 한 때 남자였으나 지금은 여자로 살고 있는 장지영, 그리고 그가 남자로 살 무렵 필리핀에서 입양했던 로이탄, 그리고 현재 로이탄과 사랑하는 사이이자, 한 때 장지영이 장지석이었을 때, 필리핀에서 결혼하려고 데려왔던 여자 레인. 이들은 마주한다. 보통의 영화라면, 이 장면은 극적인 파토스로 점철된, 즉 사랑과 복수와 애정과 원망과 동정과 안타까움이 어지러이 얽힌 복잡한 장면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서사를 하려는 영화가 아니다. 이 장면은 관객의 기대를 배신한다. 이 장면에는 쓸쓸함과 허무함이 감돌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들은 속이 빈 허수아비와 같다. 이 비어있는 모든 것들, 그 뒤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암흑의 동공들만 남은 이들. 이들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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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는 이중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풍요와 수확의 상징으로서의 허수아비. 허수아비라는 것이 본디 그런 것이 아닌가. 새나 짐승의 접근을 막기 위해 사람의 형상을 가장하여 수확을 앞둔 들녘에 세워놓는 허수아비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허수아비라는 것은 또 실체가 없는 어떤 것, 속이 비어있는 어떤 것, 껍데기, 죽음의 이미지도 가지고 있다. 수확이 다 끝난 들판에 기울어지고 망가진 채로 내버려진 허수아비들은 또 얼마나 을씨년스러운가. 그래서 그런 것일까. 넓은 들판에서 이상한 표정의 허수아비 옆에서 죽어가던 공포영화의 주인공 친구들 모습은 왠지 낯설지 않다. 또 허수아비들은 없었지만, 수확이 끝나 짚단을 세워놓은 밤의 들녘은 <살인의 추억>에서 또 얼마나 공포스럽게 비쳐졌던가.

이 영화의 중간중간에 서사의 흐름과 상관없이 튀어나오는 빈 들녘의 허수아비들은 완전히 후자의 이미지이다. 그리고 이 후자의 이미지들은 상당히 강조되어있다. 왜냐하면 이 허수아비들은 완전히 오염되고, 망가져있기 때문이다. 기울어진 채 검은 때로 얼룩진 이 허수아비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오염된 것은 허수아비들뿐만이 아니다. 영화의 모든 것들은 오염되어 있다. 머리가 둘 달린 개, 사람의 얼굴을 한 물고기(인면어), 오염된 검은 흙을 잔뜩 머금은 조개, 땅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는 할아버지 등 상징적인 오염으로 인한 변형의 이미지들은 물론이고, 그 나머지 것들 역시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병들고 오염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는 주인공들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주인공들이 가장 오염되고 변형되어 가고 있다. 

여기에서 오염이고 변형이란, 주인공들의 외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장지영의 경우에는 외면적인 변형을 먼저 이야기할 수는 있다. 장지영의 몸은 점점 중성화되어가고 있다. 그는 이것이 어렸을 때 쓰레기 매립장 주변에 살았기 때문에 성호르몬이 영향을 받아 그런 것이라고 알고(믿고) 있다. 그러나 사실 장지영의 진짜 문제는 몸의 문제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가장 문제는 그 자신 스스로가 여성이 되어야 하는지, 남성이 되어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 즉 정신적인 어떠한 부분이다. 장지영은 본인이 정신적으로는 완전히 남자라며, 결혼하기 위해 레인을 필리핀에서 데려오는가 하면, 여성이 되고 싶다고, 임신을 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 혼란스러움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러한 정신적 혼란스러움은 비단 장지영의 문제만은 아니다. 차별대우 속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근근히 살아가는 로이탄이나, 장지영이 여자인 것을 알고 그에게서 나와 거리를 떠도는 레인 역시, 이러한 정신적인 혼란스러움을 겪고 있다고, 그리고 그 속에서 어떤 변형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정신적인 혼란스러움과 변형이 오로지 그들 자신만의 탓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문제는 오염된 주변의 모든 것들에 있다. 이는 물리적인 오염만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병들어 있는 사회, 병들어 있는 사람들로부터 비롯된 오염이라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 오염되고 망가지는 환경은 우리의 정신도 오염시키고 망가뜨린다. 아내를 구하러 필리핀에 간 사람들이 필리핀의 여자들에게 던지는 질문들이 이를 명확하게 상기시킨다. 여자들을 줄지어 세워놓고 "결혼을 해본 적이 있는가.""병이 있는가."를 묻는 질문들. 인간의 정신적인 가치보다 물리적인 가치(몸의 가치)를 우선시하고 계량화하는 이 질문들은 망가진 정신, 병든 마음들이 무엇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오염된 환경, 병든 사회에서 조금씩 물들며 오염되어 가는 이들은 어떻게 살아가야만 할 것인가.

그래서 이 마지막은 걱정스럽고, 불안한 마무리로 느껴진다. 레인이 가져온 돌에는 희망의 싹이 움트지만("이 돌에 꽃이 피면 자신이 희망했던 모든 소원이 이루어진대요."), 이를 희망적인 마무리로 볼 수 있을까. 이 현실의 지옥도에서(지옥문을 지키는 머리 둘 달린 개,케르베로스가 상징하듯) 이들은 살아나갈 수 있을런지. 마지막에 부처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장지영의 옆에 한 소녀가 다가와 뭐라고 속삭인다. 이 소녀는 혹 장지영의 딸일까. 그녀는 임신을 하고 싶다는 소망을 이룬 것일까. 그 소녀는 뭐라고 속삭였을까. 이 마지막은 신비스러우면서도 동시에 왠지 살짝 두려움을 불러 일으킨다. 여기는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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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두 가지는 지적하고 싶다. 하나는 몸이 중성화되어 가는, 또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성적 정체성의 혼란을 가지고 있는 장지영(장지석)이 그렇게 된 이유가 어떤 환경적인 오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해질 때, 이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라는 점이다. 이러한 성적소수자들을 다룰 때, 이들이 어떤 오염으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해지는 것, 신의 섭리를 벗어난 어떤 비정상적인 것, 혹은 더럽고 추악한 것으로 인식될 때에 비롯될 수 있는 위험들이 이 영화에서 충분히 고려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들을 한 번 해보아야하는 것이 아닐까.

다른 하나는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부분인데, 이 영화에 빈번히 등장하는 무속(巫俗)의 이미지들이다. 영화 시작 부분에 제시되는 두 여인의 성황당 나무 앞에서의 무속적인 춤사위도 그렇고, 등장인물들이 어떤 고민에 빠졌을 때 무속인들을 찾아가는 것들이 그렇다. 왜냐하면 무속이라는 것은 과학과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수많은 오염들이 과학의 발달과 함께 시작된 것임을, 그리고 과학이 발달할수록 오염이 더욱 증폭되고 있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이의 반대되는 지점으로서의 무속의 설정이 상당히 흥미롭다. 병든 사회, 병든 환경을 보듬는 하나의 치유계로서 무속이 기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 2009년 5월, 인디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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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파리, 양익준

Ending Credit | 2009. 4. 28. 02:52 | Posted by 맥거핀.



(미리니름 있음)





김영진 평론가는 이 영화를 보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똥파리>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싸가지 없는 캐릭터를 다루는 이 영화가 실은 너무 마음씨 고운 영화라는 것이다. 너무 대책없이 착해서 그 일면성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글쎄. 이 말에 동의할 수 있을까. 동의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럴 수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착하다'라는 말을 어떤 부분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서 생각은 조금 달라질 수도 있겠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영화는 착한 영화는 아닐지 몰라도, 잘 짜인 영리한 영화라는 것이다.

이 영화의 전체적인 이야기는 사실 여러 다른 영화들에서도 비슷하게 변주되곤 하는 것이다. 가정 내의 지난한 폭력이 또다른 폭력적인 사람들을 낳고, 그 폭력은 대를 이어 전해지며, 결국 자신을 망가뜨린다는 이야기. TV에서 하는 <긴급출동 SOS>같은  프로그램에서 1주일에 한 번씩 틀어대곤 하는 그런 이야기들 말이다. 폭력에 물들어가는 가정들과 망가지는 어머니와 자식들이 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그런 이야기들. 그런데 이 영화는 가정 내에서만 머무르지 않는다. 영화 전체에서 말해지는 폭력의 구조는 이중이다. 하나는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폭력적인 구조들이고 다른 하나는 이 사회의 폭력적인 구조들이다. 그러한 폭력의 구조들은 이중의 나선처럼 서로 꼬이고 얽혀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영화 속에는 있다. 가정 내에서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던 남편은 갑자기 들이닥친 상훈(양익준) 일행에게 구타당한다. 상훈 일행은 사채 빚을 받으러 남편을 찾아갔던 것이다. 여기에서 상훈의 대사가 참 인상적이다. "다른 사람 x나게 패는 xx는, 자기는 절대 안 맞을 거라고 생각하지."

이러한 폭력의 계층적인 구조와 점점 더 확대재생산 되는 폭력의 구조, 그리고 가정의 폭력과 사회의 폭력이 맞물려 돌아가는 순환의 구조는 영화 <구타유발자들>을 연상시킨다. 다만 <구타유발자들>이 한정된 공간을 제시하고 캐릭터들을 그 곳에 몰아넣음으로써 폭력의 구조를 인위적으로 만들었다는 인상을 준다면, 이 영화 <똥파리>는 그 보다는 훨씬 넓은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폭력의 구조를 드러나게 만든다. 즉 <구타유발자들>이 하나의 실험연구를 연상시킨다면, <똥파리>는 자연스러운 관찰카메라를 연상시킨다고 할까. 늘상 연구자들이 말하는대로, 실험연구보다는 관찰연구가 훨씬 힘들다. 이 영화가 이런 이중적인 폭력의 구조를 자연스럽게 보여준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 영화가 잘 짜여졌다는 것을, 한 마디로 영리한 영화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게다. 양익준 감독이 한 인터뷰들에서 보면 "그냥 생각나는 대로 찍었다."는 식의 말들이 많은데,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감각이 엄청나게 뛰어나다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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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이 영화가 영리한 부분은 이 영화가 일종의 캐릭터 영화라고 착각할 정도로 캐릭터의 힘으로 이끌어가는 장면이 많다는 것이다. 비참하고도 이중적인 폭력의 구조, 이 영화가 그런 구조들을 차례차례 나열하는 식대로만 보여줬다면 이 영화는 힘을 잃어버렸을 것이고, 폭력이 난무하지만, 지루하고 짜증나는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관객을 쉽게 지치게 했을 거라는 말이다. 이 때 빛을 발하는 것이 캐릭터의 힘이다. 이 캐릭터들은 중간중간 곳곳에서 튀어나와 영화에 에너지를 부여한다. 즉 이 영화가 '에너지가 가득한 영화'라고 말해질 때, 이 '에너지'라는 것은 영화의 구조나 이야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 캐릭터들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캐릭터들이 가지고 있는 힘은 그들의 비전형성에 있다. 이 영화의 대표적인 캐릭터인 상훈부터가 그렇다. 영화의 시작부분, 한 남자가 한 여자를 길거리에서 심하게 구타하고 있다. 이 때 상훈이 나타나 남자를 때린다. 그러나 폭력의 강도는 점점 심해지고, 처음에는 일시적인 쾌감을 느끼던 관객들도 점점 이 장면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캐릭터의 비전형성이 드러나는 것은 이 이후부터이다. 상훈은 남자를 실컷 때린 후, 뒤돌아서서 여자에게 폭력을 가하기 시작한다. "왜 맞고다녀, 이 xxx야." 같은 대사를 날리면서 말이다. 이런 캐릭터를 봤나. 뭐지. 이 똘끼는. <나쁜 남자>의 조재현 이후로 오랜만에 보는 똘끼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 캐릭터가 불안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불안함은 영화에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제공한다. 이러한 비전형성이 주는 에너지는 비단 상훈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상훈과 처음 만났을 때 쉽게 물러서지 않는 연희(김꽃비)나, 상훈의 동업자이자, 사장인 사채업자 만식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보통의 여고생 이미지나 보통의 사채업자 이미지를 뛰어넘어 비전형성을 창조해낸다.   

어떤 이야기들은 전형적인 캐릭터를 필요로 한다. 전형적인 캐릭터가 그들의 캐릭터의 전형성을 어떻게 극대화하여 보여주는가에 그 이야기의 성패가 달려 있는 이야기들도 있다. 예를 들어 막장드라마들이 그렇다. 그런 영화에서 나오는 악역들은 더욱 표독스러워야 하고, 착한 캐릭터들은 너무나도 선해야만 한다. 시청자들은 그걸 즐기기 때문이다. 막장 드라마에서 표독스럽지 않은 악역이나, 결단력 있는 남자 캐릭터는 얼마나 재미가 없는가. 사람들은 "저건 말도 안돼!"하며 분노하다가도, 금방 "왜 말이 안돼? 드라마잖아."라고 말해 줄 것이다. 그러나 <똥파리>와 같은 이야기에서 전형적인 캐릭터가 나오는 순간, 영화의 에너지는 사라져버릴 것이다. 이 영화는 그저 사회고발물이 되거나 눈물을 욕설로 대치한 신파극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으로 이 영화의 연기가 매우 자연스러워 보이는 이유가 이 때문이 아닐까. 세상에는 전형적인 캐릭터보다 이 영화에서처럼 비전형적인 캐릭터들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캐릭터를 전형적으로 연기하는 것만큼 부자연스러운 것이 있을까. 왠지 이 영화의 상훈이나 연희, 만식, 그리고 환규나 영재 같은 다른 캐릭터들도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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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얘기하고 싶은 것은 이 영화가 영리한 것인지, 그를 뛰어넘어 교묘한 것인지 모호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이 영화에는 지나치다 싶게 많이 보여주는 장면이 있는가 하면, 매우 짧게 스치고 지나가는 장면이 있고, 또 아예 보여주지 않는 단절의 부분이 있다. 이는 의도했던, 그렇지 않던 간에 상당히 계산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자살을 하기 전, 상훈의 누나와 조카와 함께 아버지가 플스 게임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그 이후에 아버지가 자살을 하는 장면으로 넘어간다. 즉 중간에 있어야만 마땅한 어떤 사건(상훈이 아버지를 구타하는, 또는 상훈과 아버지 간의 어떤 충격적인 사건)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또 상훈이 아버지를 구타할 때 조카가 그것을 보게 되는 장면도 있다. 그 장면 이후에 마땅히 뒤따라야 할 조카의 충격, 혹은 상훈과의 어떤 관계들은 잘 보여지지 않는다. 이러한 장면들은 꽤나 많다. 갑자기 고기집으로 넘어가는 마지막 장면도 그렇고, 상훈이 연희 어머니의 포장마차를 부수는 사건들도 보여지지 않거나 매우 짤막하게 처리된다. 또 남다은 평론가가 <씨네 21>에서 지적한 다음의 부분들도 있다. 길지만 잠깐 인용한다.

연희(김꽃비)는 상훈(양익준)이 건달이라는 사실은 알지만 그 건달이 엄마의 포장마차를 때려부순 그런 깡패라는 건 모르고, 상훈은 결국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영재가 연희의 동생인 걸 모른다. 상훈의 누나는 상훈이 어떤 일을 하는지 잘 모르고, 만식의 고깃집이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짓밟은 결과물이라는 것을 모른다. 무엇보다 연희와 상훈은 연애 비슷한 걸 하기 시작하면서도 각자의 가족사나 상처를 숨긴다. 
이 지점에서 나는 인물들의 이런 무지함이 영화적 비극을 배가시키기 위한 의도가 아니라, 영화가 인물들을 보호하기 위해 끝내 포기하지 못한 최소한의 장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 영화는 인물들이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 모르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건 아닐까.

영화가 인물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한 가지, 이렇게 인물들을 보호하고 특정의 장면을 생략하는 것이 관객에게 어떻게 다가오는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나 본다. 어쩌면 이런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특정의 장면들과 구조의 일부분을 의도적으로 숨김으로써 관객에게 영화의 구조보다는 캐릭터에게 집중하게 만드는 것, 그래서 자꾸 캐릭터에 동화되도록, 심정적으로 응원하도록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특정의 장면이나 구조를 숨겨 캐릭터에 집중하게 만든다고 해서, 캐릭터를 응원하게 되지는 않는다. 상훈이라는 캐릭터를 응원하게 만드는 것은 그 보다는 다른 이유가 더 클 것이다. 그 이유를 굳이 찾자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상훈은 <그랜 토리노>의 동림 선생님의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살아가면서 절대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딱 1명 꼽자면, 그게 상훈'일 정도로 무서운 캐릭터지만, 자꾸 그를 응원하게 만든다. 여기서의 응원이란 안타까움에 가깝다. 이 영화는 지속적으로 관객이 상훈에게 심정적으로 동의하고 그를 응원하게 만들다가도, 그것을 그 다음 장면을 통해 지속적으로 막는다. 상훈은 조카에게 플스를 사주고, 잘 놀아주는 좋은 삼촌의 모습을 보이다가도, 또 연희와 욕이 실린(?) 농담을 하며 잘 지내다가도 갑자기 돌변하여 아버지를 구타하고, 주위 사람을 이유없이 때린다. 관객 입장에서는 "그래, 그래, 지금처럼 살아"하고 생각하게 만들다가도, "쟤 갑자기 또 왜 저러니."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즉 관객들을 지속적으로 안타깝게 만든다. 그리고 이 안타까움은 마지막에 최고조에 이른다. 상훈이 사채업에 손을 씻고, 가장 착하게 행동했을 때 사건이 터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지막 이 대사는 상당히 안타깝게 들린다. "왜 우물쭈물해?" 여기서 우물쭈물한다는 것은 물론 착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이런 특정의 장면들과 구조를 숨기는 것이 가미될 때 이 착한 캐릭터에 동화하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해 의심이 들기도 한다. 이 동화와 응원은 무엇으로부터 나오는가. 그래서 여기에서 김영진 평론가가 처음에 했던 말에 동의하기가 조금은 의심스러워진다. 이 영화는 너무 대책없이 착한 캐릭터가 나오는 착한 영화인가. 그런가. 그리고 한편으로 보았을 때 이것이 이 영화의 가장 영리하고도 교묘하며, 놀라운 점이다. 착한 영화라고 느끼게 되는 이상한 마법.

하기사, 감독이 이 영화를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했던가.




- 2009년 4월. 프리머스 신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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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독 밀리어네어, 대니 보일

Ending Credit | 2009. 4. 11. 02:23 | Posted by 맥거핀.





(스포일러 그 자체인 글이니 영화를 보실 분들은 읽지 마시길 바랍니다.)


 


영화를 본 후 마음 편하게 몇 개의 리뷰 글들을 읽었다. 리뷰 글들은 다양하나 크게 두 갈래로 갈리는 듯 하다. 하나는 인도의 현실을 묘사한 잘 만든 영화이고, 충분히 아카데미상을 받을 만하다는 의견,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잘 만든 영화이기는 하나 상을 받을 정도는 아니다, 평범한 할리우드산 성공스토리에 불과한 이 영화가 상을 받은 것은 아카데미의 오리엔탈리즘적인 시선이 개입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다. 또 한편으로 각색의 아쉬움을 지적한 글도 있었고, 이야기의 얼개가 잘 짜인 잘 만든 영화에 더 무엇을 논하느냐는 의견도 있다.

글쎄. 읽다보니 이것도 맞는 얘기 같고, 저것도 맞는 얘기 같아서 약간은 어리둥절하기도 하지만, 몇 가지는 저것은 좀 이상한데..라고 느껴지는 것도 있다. 먼저 각색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원작을 전혀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와 같이 책(소설)이 원작이고, 그것을 영화화할 경우, 그 영화들이 받는 부당한 공격들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책과 영화는 그 매체적 특성이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의 상상력으로 활자의 나머지 공간들을 채워 나가야 하는 소설과, 그 상상력이 하나의 화면으로서 제시된 영화가 같아야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인간의 상상력을 모독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것을 지적하는 사람들은 단지 영화가 책의 일부로서 거대한 삽화가 되기를 기대하는 것인가? 글쎄. 나로서는 도리어 소설의 빈공간들을 채워넣지 못하고 평이한 재현(재해석이 아니라)으로만 끝나는 영화들에 대해 찬성하기는 힘들다.

그리고 또 다른 의견, 과연 이 영화가 아카데미상을 받을만 한가, 이것은 할리우드의 오리엔탈리즘적인 시선이 가미된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 일반적으로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은 아마도, 동양의 사상이나 문화가 비정상적이고, 비합리적이며, 열등한 것이라는 시선, 따라서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서구의 지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시선을 의미하는 것일게다. 그리고 그런 시선에서 본다면, 그리고 이 영화가 서구의 영화감독 대니 보일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지적한다면, 그렇게 보이는 몇몇 장면들이 있음 또한 사실이다. 이의 대표적인 장면으로 힌두교도들이 회교도들을 습격하여 주인공 자말의 어머니가 죽는 장면을 들 수 있다. 여기에서는 아무것도 설명되지 않는다. 인도의 역사에서 힌두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얼마나 오랜 대립이 있어왔는지, 이런 습격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어떤 맥락도 설명되지 않는다. 심지어는 그들을 습격하는 자들이 힌두교도라는 것도 설명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은 습격하고, 어머니는 죽고 자말과 그의 형 살림은 내달릴 뿐이다. 이것은 마치 동양에는 이런 비상식적이고, 잔인한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는 그런 인상을 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와 반대되는 장면도 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면인데, 타지마할에 방문한 서양관광객을 자말이 멋지게 속여먹는 장면이다. 또 장엄하게 느껴지는 거대한 빨래터를 묘사한 장면도 있다. 왠지 이 영화는 오리엔탈리즘적인 것과 그의 반대로서 옥시덴탈리즘적인 것이 혼합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어쩌면 감독은 이 두가지를 혼합함으로써 영화의 중심을 잡아보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극과 극의 시선은 버무려지기 힘든 것이다. 물과 기름을 혼합하면, 그 사이의 층만 도드라져 보일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가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데에는 작년 작가협회 파업으로 아카데미상이 차분히 지나갔던 것에 대한 반동적인 의미와 아카데미상을 좀 더 세계적인 영화 축제로 만드려는 할리우드의 시선이 혼합된 결과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그런 것들이 의외의 일본 영화 <굿' 바이>에게, 수상이 유력해 보였던 <바시르와 왈츠를>을 제치고 외국어영화상을 안기고, 이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에게 작품상을 수여하는 모험을 하게 만든 원동력이 아닌가하고 쓰잘데 없는 음모론을 생각해보게 만든다. 사실 <밀크>, <프로스트 VS 닉슨>은 아직 보지 않았으니 논외로 하더라도, 나 같아도 <벤자민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나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보다는 이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에 작품상을 주었을 것 같다. <벤자민..>은 기대보다는 훨씬 평이한 스토리에 너무나도 할리우드 산 느낌이 물씬 난다는 점에서, <더 리더>는 얼마전 이스라엘의 침공이 문제가 되었던 시점에서 또다시 제노사이드의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슬럼독..>을 선택하는 것이 신선하고도, 안전한 선택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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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잘 만들어진 영화임은 부인하기 어렵다. 퀴즈쇼가 하나의 액자로서 기능하고, 그 안에서 자말의 이야기가 들어왔다 나왔다하며 전개되는 이 영화는 자칫 잘못 만들었으면, 복잡하고 어지러운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고, 영화의 줄기를 잡아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자말의 이야기와 퀴즈쇼를 버무려내는 솜씨가 좋다. 아카데미 작품상까지 단언할 수는 없으나, 편집상 정도는 얼마든지 줄 수 있다. 그러나 잘 만들었다고 해서, 이야기가 매끄럽다고 해서 좋은 영화인가라는 물음에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만약 그렇다면 레니 리펜슈탈의 <Triumph Des Willens 의지의 승리>도 좋은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사실 자말을 둘러싼 이야기만 놓고 본다면, 시쳇말로 쌍팔년도 스토리이다. 어렸을 때 고아가 된 두 형제가 한 소녀를 만나고, 그 소녀를 동생은 사랑하게 되고, 형은 조직으로 들어가고, 동생은 그 소녀와 헤어지게 된다. 그런데 하필 소녀가 그 조직 보스의 정부가 되고, 개과천선한 형은 소녀를 꺼내주고 장렬한 죽음을 맞고, 동생은 소녀와 천년만년 잘 산다는 그런 이야기. 뭐 이 스토리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누군가의 말대로 아무리 쌍팔년도 스토리라도 잘 만들어졌다면 아카데미 작품상 그 이상도 얼마든지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뭇 신파조의 스토리를 신파가 아닌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이 이 이야기의 노련한 점이다. 바로 그 이야기를 둘러싼 퀴즈쇼. 이것이 하나의 액자가 되고, 거대한 맥거핀이 되어 이야기를 즐길 수 있도록 해준다. 나도 이 때까지는 영화를 즐기며 재미있게 보았다. 그러나 이 맥거핀은 점점 커져 급기야는 퀴즈쇼와 자말의 이야기는 하나로 결합되며, 급기야는 퀴즈쇼가 자말의 이야기를 삼키려 든다. 여기서부터 조금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상하다는 느낌이 든 것은 사회자가 퀴즈에 개입하려 든 순간부터이다. 그리고 그 때까지 자신의 예전의 경험을 토대로 문제를 맞춰나가던 자말에게 경험이란 사라져 버렸다(즉, 경험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자말은 사회자와 심리게임을 하며 한 문제를 찍어서 맞추고는 마지막 문제도 찍어서 맞춘다. 그리고 관객이 잊고 있었던 처음 문제의 해답에 대한 자막이 마지막에 제시된다. 자말이 이 모든 문제를 맞추고 우승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It is written' 운명이었다. 운명이었다? 운명이었다라니. 결국 그의 운이라는 것인가.

나는 물론 모든 퀴즈 프로그램은 운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 더 많이 맞출 확률이 올라간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 확률의 영향은 생각 이상으로 미미하다고 본다. 아무리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라도 모든 분야의 모든 문제의 해답을 다 알 수는 없다. 아무리 많이 아는 사람이라도 그가 모르는 문제가 출제되면, 그는 틀릴 수 밖에 없다. 그럼 많이 아는 분야가 출제되면 되지 않느냐고? 그래, 하지만 그것 또한 운이다. 퀴즈는 어떤 의미에서는 로또와 비슷하다. 자신이 선택한 번호가 선택될지 않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가끔 로또 번호를 분석한다 어쩐다 하는 사람들을 보는데, 정말 이해하기 힘들다. 그들이 로또 번호를 분석한다는 것은 그 로또의 우연성과 불규칙성을 믿고 있지 않음을, 거기에 어떤 무언가가 개입되고 있는 불공정한 게임이라고 믿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는 반면 로또의 우연성을 100% 믿는다. 그래서 가끔 로또를 산다. 나의 운을 시험해보기 위해. 그리고 가끔 퀴즈 프로그램도 열심히 본다. 나의 운을 가늠해보기 위해. 그러나 이 영화는 영화 내내 자말이 이 해답을 맞추게 되었던 것이 그의 삶 때문이었다고 항변하고는 마지막에 슬그머니 사실은 운이 좋아서..라는 이상한 결론에 도달한다. 

이야기가 조금 딴 길로 샜지만, 내가 이 영화에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은 이 영화가 퀴즈의 해답으로서 제시한 이 마지막 메시지에 있다. 자말이 백만장자가 된 것이 그의 운명, 그의 운이라니. 그렇다면 그의 형 살림이 총을 맞아 죽어간 것도 그의 운 때문이고, 백만장자가 된 자말에 환호하면서도 흙길을 맨발로 달리고 있는 가난한 인도의 아이들이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그들이 단지 운이 없기 때문인가. 이것에는 정말 동의하기 힘들다. 자말은 마지막에 이 문제들을 틀렸어야 했다. 왜? 그는 이 해답을 모르기 때문이다. 뭐 돈 다 잃으면 어떤가. 그의 곁에는 라티카가 있는데. 그렇다면 나는 이 마지막에 기꺼이 박수를 보냈을 것이다.






- 2009년 4월, 씨너스 센트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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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소나타, 구로사와 기요시

Ending Credit | 2009. 4. 10. 00:48 | Posted by 맥거핀.



(스포일러)





<도플갱어>와 <강령>, <주온> 그리고 무엇보다도 <회로>의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신작 <도쿄 소나타>는 공포물이 아니라고 그랬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공포물들은 귀신과 악령들이 출몰할 것 같은 제목들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 영화에서는 그런 귀신이나 악령보다는 다른 어떤 것들이 더욱 큰 공포를 주곤 했다. 그 다른 어떤 것들이 무엇이냐고? 글쎄.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것들, 보이지 않으나 저 어둠 속에 있다고 믿어지는 것들, 그리고 미래에도 계속 내 주위에 머물 것들. 여러가지 이름을 가져다가 붙일 수는 있겠지만, 한마디로 자른다면, 그건 희망 없음의 공포였다. 현재보다는 미래가 더욱 무서운 것, 도저히 여기서 헤어나올 수 없다는 절망감으로 가득찬 것이라고 말하면 될까. 그런 구로사와 기요시가 그려내는 가족 드라마라고 그랬다. 공포물이 아니라고 그랬다. 나는 속기를 기대하며 갔다. 그리고 속았다.

이 영화 <도쿄 소나타>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다른 어떤 영화들보다 무서웠다. 물론 이 영화에는 귀신이 나오지도, 도플갱어가 나오지도, 검은 그림자로 이루어진 어떤 형체없는 무엇도 나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마지막 그들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절망들은 우리 현실과 가까이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영화들보다 공포감을 준다. 영화의 아버지(카가와 데루유키)나 어머니(코이즈미 교코)는 간절히 소망한다. 다시 시작하면 안될까.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러나 그들 앞에 미래는 보이지 않는다. 그들 앞에 있는 것은 차디찬 아스팔트 바닥이거나, 건널 수 없는 암흑의 망망대해이다. 이건 게임이 아니다. reset 버튼을 누를 수 없다. 그들은 구로사와 기요시의 다른 영화의 주인공들이 그랬던 것처럼, 미래에 대한 희망없는 현실 속에서 절망한다. 이 절망은 정말 무섭다[각주:1]

이 절망적인 마지막 장면 뒤에 마치 하나의 에필로그처럼 하나의 이야기가 더 추가된다. 몇년이 흘렀다는 자막이 스치고 지나간 후, 부모는 막내아들 켄지의 음악중학교 입학시험장에 앉아있다. 켄지는 드뷔시의 <달빛>을 아름답게 연주하고, 사람들을 모이게 하며, 부모는 켄지의 손을 잡고 나온다. 이것을 희망으로 볼 수 있을까. 이 마지막 장면은 상당히 모호하다. 실제 이들의 몇년 후로 볼 수도 있지만, 왠지 이는 아버지가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쓰러져서 보는 환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꿈속과 같은 희뿌연 화면 속에서 무표정한 사람들의 모습도 그렇거니와 이 아들이 연주하는 피아노곡의 제목부터가 미심쩍다. 드뷔시의 <달빛>이라. 달빛이 의미하는 환상성과 기이함. 어쩌면 이는 소나타 뒤에 이어지는 환상의 즉흥연주인지도 모른다. 

이 마지막이 그다지 희망으로 느껴지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 바로 전의 장면이, 다시 모인 가족들의 식사장면이기 때문이다. 차에 치여 쓰러졌던 아버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툭툭 털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오고, 납치범과 같이 바다로 떠났던 어머니는 홀연히 돌아와 막내아들 켄지와 식탁에 둘러앉는다. 이 식탁에는 참을 수 없이 고요한 정적만이 흐른다. 단지 식구들의 밥먹는 소리만 미세하게 들릴 뿐이다. 그들의 지금까지의 식탁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반복. 이 식탁 위에는 그간 항상 정적만이 흘렀다. 아버지가 젓가락을 드는 것으로 시작하여, 모두들 조용히 밥을 먹고, "잘 먹었습니다."를 말하고 일어나는 동일한 형식. 이 식탁에는 대화가 필요없었다. 아니 대화를 할 수 없었다.  두 아들은 모두 이를 잘 알고 있다. 두 아들은 모든 것을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결정한다. 부모들에게 이야기해보아야 그들의 생각이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변하는 것이 없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식탁에서의 식사로부터의 시작 - 중간의 여러 사건들 - 그리고 다시 식탁에서의 식사로 이어지는 마지막은 왠지 제시부 - 전개부 - (제시부의 비슷한 반복인) 재현부라는 소나타 형식을 연상시킨다.

그들의 이러한 식탁에서의 대화의 단절은 세대간의 단절을 떠올리게 한다. 미래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믿으며, 한편으로는 미래가 변하지 않기를 은연중에 갈망하는 기성세대와 미래를 자신의 힘으로 바꾸어놓을 수 있다고 믿는 자식세대와의 단절.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그 자식세대의 미래에 대한 자신감이란 또 얼마나 얄팍해지기 쉬운 것인가. 미군이 우리나라를 지켜주기 때문에 미군에 들어가는 것이 가족을 지키는 것이고, 세상의 평화를 지키는 것이라는 큰아들의 논리는 그 미군이 어느 중동 전쟁터에 파병되면서 여지없이 깨진다. 이러한 세대간의 단절을 한편으로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두루두루 큰 무리없이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기성세대와 특정의 어떤 것만 잘하면 된다고 믿는 자식세대간의 단절이라고 말이다. 영화 속에서, 새로운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 면접을 보러간 아버지는 면접관에게 시켜만 주면 어떤 일이든 열심히 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면접관은 어떤 특정의 일을 잘 해낼 수 있는가 중요하지, 무슨 일이든 하겠다는 것은 의미없다고 그를 조롱한다. 그래서 또 한편으로는 이 마지막이 더욱 의심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이 절망한 아버지가 음악영재인(즉 '음악'이라는 특정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아들에게서 희망을 찾는다라. 이것을 희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은 또다른 단절의 시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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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기 며칠전 2006년도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을 우연히 보았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 속 식탁 장면을 보면서 자주 <미스 리틀 선샤인>에서의 가족의 식탁, 이 실패자들의 집합이 벌이는 식탁에서의 대화가 떠올랐다. 음식 취향만큼이나 다른 그들 각자의 생각들이 벌이는 충돌의 하모니와 유쾌하고도 아이러니한 봉합. <도쿄 소나타>와 <미스 리틀 선샤인>의 식탁 장면은 이들 영화가 달려가는 마지막 결말만큼이나 매우 다르다. 그러고보면 세계 어느 곳에서나, 가족간의 많은 이야기들, 그리고 대화를 가장한 충돌은 식탁 위에서 이루어지는 듯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나와 가장 가까운 타인인 가족. 이 가족들은 다른 누구보다도 우리자신과 친밀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또다른 나인 동시에, 나의 숨기고 싶은 모든 치부를 알고 있는,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가장 큰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이 상처들은 종종 날카로운 말이 되어 식탁위를 가로질러와 우리의 심장에 박히지만, 때로는 침묵의 공기로 변해 조용히 식탁 위에 내리깔린다. 날카로운 말은 상처를 주고 지나갈 뿐이지만, 침묵의 공기는 중금속처럼 우리의 심장에 켜켜이 쌓인다. 그리고 우리는 그 내리깔린 공기 속에서 메인 심장 위로 밥을 밀어넣는다.

<미스 리틀 선샤인>에서 보았던 장면이 떠오른다. 기어(gear)가 고장난 차를 타고 달리는 이 가족. 차를 달리게 하기 위해서는 가족 중에 몇몇이 내려 차를 밀어 일정 속도에 이르게 한 후 차에 올라타야 한다. 매번 약간 위태위태하기는 하지만, 이 가족은 그래도 모든 구성원들을 멋지게 태워 출발한다. 특히 멋진 주제곡 'The Winner Is'가 울려퍼지며, 가족들이 뛰어 달려와 차를 타고가는 마지막 장면은 영화 속 가장 즐겁고도 사랑스러운 장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가족이라면, 우리가 가족이라면, 아무리 열없는 실패자들일지라도 모두 남김없이 태우고 출발해야만 하는 거겠지. 그러나 역으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우리가 아무리 떼놓고 가려고 해도, 어딘가에 버리고 가고 싶어도 어느 틈에 달려와 내 옆자리에 앉아있고야 마는 사람들. 그것이 가족이다.




- 2009년 4월, 중앙 스폰지하우스.




  1. 한편으로는 이 영화의 카메라의 움직임에서 비롯되는 공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의 많은 장면에서의 카메라 움직임은 그간 일본의 여러 공포영화들에서 보여줬던 카메라 움직임을 연상케 한다. 카메라를 고정시키고, 인물들을 따라 패닝하지 않는 움직임이라든가, 인물은 한쪽 구석에 몰아넣고, 사물을 중심으로 잡는 모습(마치 그 사물에 큰 의미가 있다는 듯, 혹은 무엇인가가 곧 튀어나올 것이라는 듯)이나 인물들의 등 뒤에서 움직이는 카메라의 모습이 그렇다. 그리고 아주 자주 카메라는 이들을 아주 멀리에서 비춘다. 마치 이들을 몰래 숨어 관찰하는 누군가가 있는듯이 말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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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스티븐 달드리

Ending Credit | 2009. 3. 27. 20:42 | Posted by 맥거핀.


(스포일러)






생각보다 영화의 이야기는 복잡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영화의 이야기가 복잡하다기 보다는 그 영화가 우리들에게 던지는 질문들이 우리를 복잡하게 만든다고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영화는 커다란 질문을 던진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자신의 아우슈비츠 경험을 기술했던 프리모 레비의 유명한 책과 질문이 겹친다. <이것이 인간인가>. 이것이 인간인가, 과연 무엇이 인간인가. 이 질문들에 답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아니 어려운 일이라기 보다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머리 속이 복잡하다 못해 텅 비어 버린 채로 무거운 엉덩이를 의자에서 겨우 떼내는 일 뿐이다.

영화의 시작. 한 15세 소년과 연상의 여인의 위태로운 관계가 시작된다. 흔한 소년 판타지물, 혹은 역 로리타물로서의 상투적인 시작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여인 한나는 꽤나 많이 해본 솜씨인 것 같기도 하다. 일부러 석탄을 가져오게 하고 그것을 빌미로 옷을 벗기는 저 능숙한 솜씨라니. 뭐 아무튼 여기에서부터 질문을 던져볼 수 있기는 하다. 도대체 이런 관계를 용납해도 되는 것인가 하고. 성에 대해서는 꽤나 관대하다고 여겨지는 서양에서도 이러한 관계는 꽤나 중대한 범죄로 여겨진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속으로는 더 꼬여 있지만, 겉으로는 꽤나 엄숙한 체 하는 우리의 '위원회'가 어째 이 수상한 영화를 아무 말 없이 통과시켜 줬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그것만 궁금하냐고? 글쎄, 나로써는 이에 대해서 정말 할 말이 없다. 그런 경험도 없을 뿐더러(!), 겉으로는 책임 있는 리버테리언을 표방하는지라, 본인들이 뭐 책임만 잘 진다면...쿨럭...하고 넘어가는 중이다. 그리고 고맙게도 영화는 더 이상 깊게 생각해보기도 전에 2라운드로 넘어가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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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의 법정에서의 대답을 들으면서 우리는 모두 아연해진다. 이것이 아연한 이유는, 이 대답들에는 모두 무엇인가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나의 대답들은 모두 어떤 의미에서는 맞는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일자리를 준다기에 자원했다, 방이 모자라기 때문에 뒤에 온 사람들을 위해, 있는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야 했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이 질문들은 중요한 원칙들을 제외한다면 그다지 틀린 대답은 아니다. 그러나 그 원칙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위해를 가해서는 안되며, 더 나아가 그들을 죽여서는 안된다'라는 원칙이라면 그녀의 이 대답들은 절대적으로 틀린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피해자들과 이를 바라보는 우리 관객들은 심정적으로는 그녀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그녀를 용서하기는 어려운 것이며, 용서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그녀를 용서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 원칙을 저버린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한나에게는 이 원칙들이 결여된 것일까. 이것이 그녀의 문맹과 어떤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우리는 추측해 볼 수 있다. 아니 그렇지 않고서는 이 아연하다 못해 순수하기까지 보이는 결여를 이해하기는 힘들다. 그녀는 교육 기회를 얻지 못해서건, 혹은 난독증이 있어서건 문맹인 상태로 지금까지 살아왔으며, 이 문맹은 그녀가 아우슈비츠에서 저지른 이 일의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는 한 가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녀는 왜 그렇게 그녀의 문맹을 수치스러워 하는 것일까. 그리고 왜 그렇게 문맹을 벗어나려고 하면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의 법정에서의 위증을 굳이 지적하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말하는 그녀의 그 욕망, 그것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이에서 벗어나기를 욕망하는지 알 수 있다. 어쩌면 너무 욕망하면서도 그것을 벗어나려는 수없는 시도를 그녀는 지금까지 계속 실패해오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만약 그렇다면 앞의 질문들은 바보같은 질문이 될 것이다.

아무튼 여러가지를 고려해보아도 이는 간단한 문제가 될 수 없다. 문맹이라고 해서 그녀의 그런 범죄 행위들이 용납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역으로 말해 그것이 범죄행위임을 충분히 인식했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더 큰 형벌을 내릴 수 있는가. 아니 그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로, 법으로서 이들을 단죄하는 것이 가능한가. 과연 어느 정도까지 이들을 처벌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유태인들을 아우슈비츠까지 수송한 기관차의 기관사는 처벌을 받아야 할까. 이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한다면, 그 철로를 설치한 모든 노동자들도 처벌해야하는 것이 아닐까...법정을 참관하고 돌아온 후 영화 속 교수의 세미나에서 혼란을 느끼던 학생들과 동일한 혼란을 우리 모두 겪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나도 매우 심한 혼란을 겪었다. 그리고 과연 실제의 재판은 어땠는지 궁금해졌다. 자료를 찾아보니 실제 아우슈비츠의 범죄자들을 심판하는 재판은 여러 번 열렸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가 재판받았던 뉘른베르크 재판도 있고, 아이히만 재판도 있지만, 영화 속 경우와 가장 비슷한 사례로는 1963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렸던 아우슈비츠 재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22명의 피고인은 아우슈비츠에서 보초병, 방역소 직원, 게슈타포, 수용소 책임자, 수용소 의사 등으로 일했고, 이들은 1963년 현재 수출업자, 회사원, 남자 간호사, 농업협동조합 조수, 산부인과 의사, 목수 등의 일을 하다가 재판에 회부되었다. 사람들은 놀랐다. 그들은 가정을 가진 보통 사람들로, 성공하려고 노력하고, 세금도 잘 내고, 점잖고, 의무감이 투철한 사람들이었다는, 괴물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들은 증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자신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그리고 판사는 판결을 내렸다. "피고인들이나, 책상에서 인간말살 계획을 수립한 사람들은 다같이 아우슈비츠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판사는 피고인들의 정치적, 도덕적 책임은 묻지 않았다. 다만 오늘날과 똑같이 아우슈비츠 시절에도 유효했던 형법의 자구(字句)를 기준으로 선고를 내렸다. (크리스티안 마이어, <누가 역사의 진실을 말했는가>에서 부분 발췌)

...어쩌면, 그래서 그들의 가장 큰 잘못은 '원칙을 저버린, 혹은 원칙을 배우지 못한 죄'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언제 어느때나 유효하다. 예를 들어 광주에서 민간인들을 잔혹하게 학살한 공수부대원들 중에는 "나는 국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나는 어떤 의미에서는 애국자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지도(혹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의 이 믿음은 틀렸다고 믿고 싶다. 국가는 항상 옳은 것을 지시하는 절대적인 무엇이 아니다. 국가가 내려준 '명령을 따르라'는 원칙 위에는 '민간인을 죽여서는 안된다'라는 대원칙이 있다. 설령 그 원칙을 배우지 못했다고 해도, 그들에게서 어떤 책임을 묻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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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한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영화라고 보았을 때, 그 중심 인물을 서술하는 다른 한 축에는 마이클(랄프 파인즈)이 있다. 생각해보면, 이 마이클도 불행한 인물이다.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된 마이클. 그는 옥중의 한나에게 여러 책을 읽은 녹음들을 보낸다. 그가 이 녹음을 보낸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가지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나에게는 그가 어떤 반성을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이클은 다시 처음으로 한나를 대면하는 자리에서 묻는다. 그 때의 일을 기억하냐고. 여기서의 기억이란 반성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돌아오는 한나의 대답이 의미심장하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죽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아마 여기서 한나는 깨닫고, 마이클은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반성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 어떤 의미에서는 반성할 수 없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반성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녀는 반성할 수 없으며, 반성해서도 안되는 인간이라는 것. 그리고 아우슈비츠는 이해될 수도 이해되어서는 안되는 일이라는 것. 그녀는 그 깨달음을 다른 방식으로 증명해 보였다. 책을 통해 더 가깝게 다가가는 방식으로. 그녀가 책에서 어떤 원칙을 얻었음을 그녀는 정신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증명해 보였다.

그래서 이 마지막은 마음에 든다. 이 마지막에서 마이클은 자신의 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 책의 효용이란 궁극적으로는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후세에게 무엇인가 이야기를 남기는 것 말이다. 후세들이 그 책을 읽음으로써 과거의 이야기에서 무엇인가 교훈을 얻기를, 그리고 절대적인 원칙을 배워나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면에서 요즘 물만난 고기처럼 날뛰는 뉴라이트들에게 이 영화를 추천한다. 친일의 경험, 베트남 전에의 참전, 군사 쿠데타, 민주에의 탄압 등등을 이야기하는 것을 자학 사관이라고 자학하는 뉴라이트들에게 말이다. 과거의 비극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자는 미래의 희극을 쓸 수 없다.





- 2009년 3월.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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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 토리노, 클린트 이스트우드

Ending Credit | 2009. 3. 23. 17:20 | Posted by 맥거핀.


(스포일러)





영화관을 나오는데 두통이 밀려왔다. 억지로 눈물을 참으려 해서 그런걸까.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들은 사람을 슬프게 만들지만, 자꾸만 울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이른바 애이불비(哀以不悲). 마음 속으로는 슬퍼해도 그렇게 슬퍼하고나 있어서는 안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그리고 자꾸만 무엇인가를 적어내려 가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는 영화 그 이상의 무엇을 적는 것을 부질없는 짓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아마도 영화 속 월트(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이 영화에 대해서 고귀한 희생이니, 가슴이 벅찬 감동이니 하고 적은 여러 리뷰들을 보았다면 얼굴을 살짝 찡그리고는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켜고 시니컬하게 되뇌었을 것 같다. "다 쓸데없는 소리지." 그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다.

그러나 또 나는 그 쓸데없음 속에도 어느 정도의 가치는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며, 뭔가를 캐내기 좋아하는 종류의 인간이다. 그저 기억하기 위해 몇 가지를 간단하게 월트 몰래 적어두도록 하자.

1.

월트는 좋은 아버지가 아니다. 어쩌면 월트는 집안에서 소외된 가장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와 자식들은 친밀하지만, 아버지와는 아무도 대화하기를 원하지 않는 그런 집안말이다. 그러나 이제 아내는 죽었다. 그러고보니 이 영화의 시작이 아내의 장례식임은 의미심장하다. 전작 <밀리언달러 베이비>에서도 나이든 트레이너 프랭크는 아내가 없었다. 그리고 딸과의 사이는 좋지 못했다. <체인질링>에서도 크리스틴은 혼자 아들을 키웠다. 그리고 그 아들을 잃어버렸다. <그랜 토리노>에서는 월트는 영화의 시작에서 혼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모든 자식들은 그를 싫어한다. 이 상황에서 <밀리언..>의 프랭크와 <그랜 토리노>의 월트는 모두 같은 길을 걷는다. 프랭크가 매기를 딸을 삼았다면, 월트는 몽족소년 타오를 아들을 삼는다. 또다른 가족의 탄생.

왜 스스로도 의아해하면서 월트는 타오의 아버지가 되는 것일까. 몇 가지를 추측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월트가 타오에게서 그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다. 이발사가 폴란드 놈이라고 놀려대는 것처럼, 어쩌면 월트도 가난한 이민자 출신이었을 것이다. 가난한 집안의 이민자 소년이 할 수 있는 선택은 그다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군인이 되어 전쟁에 나가는 것이 그 중 하나. 그리고 그가 전쟁에서 무리한 작전에도 용감하게 나섰던 것은 어쩌면 빨리 어메리칸이 되고 싶은 욕망, 그것의 다른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항상 미국적인 가치를 강조하고, 유색인종들에게 불편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그의 성향도 어쩌면 이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다른 하나는 월트가 타오에게서 무엇인가를 보았다는 것이다. 차를 훔치려던 것에 대한 반성의 의미라고는 하나, 시키는 모든 일들을 별 군말없이 묵묵히 해내는 소년. 이 소년에게서 뭔가 '괜찮은' 부분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러고보면 월트가 수를 청년들에게서 구해주던 장면에서도 그렇다. 월트는 차를 세워놓고 조용히 그들을 관찰한다. 이들을 도와줄까 말까 망설이는 것처럼. 그리고 수가 청년들을 겁내지 않고 맞서려 하자, 그제서야 차를 몰고 그들에게로 간다. 월트가 보았던 '괜찮은' 부분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건 수의 경우에서처럼 두려움 없이 무엇인가를 대하는 태도였을 것이다. 타오는 갱단이 되기를 거부한다. 그리고 갱단이 되는 청년들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갱단이 된다. 총과 폭력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세상에 맞설 용기가 없는 것이다.

2.

이스트우드 감독이 세상을 보는 방식은 무엇일까. 그가 이 세상이 아름답고 평온하기만 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음은 분명해보인다. 그는 <밀리언...>에서는 '네 자신을 보호하라'고 말했고, <체인질링>에서는 '먼저 싸움을 시작하지는 말되, 시작된 싸움은 스스로 끝낼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게는 아마도 이 세상은 어느 정도의 싸움이 불가피한 곳이며, 아니, 어느 정도의 싸움은 필요한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싸움을 피할 수 없는 이 세상에서, 그가 항상 강조하는 것은 공정한 룰의 필요이다. 싸움은 하되, 공정한 룰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 그러나 영화 속 월트의 대사처럼 세상은 공정하지 않다. <밀리언...>에서는 공정하지 않은 게임이 진행되었고, <체인질링>의 크리스틴은 그녀 혼자의 힘으로 여러 권력기관들과 맞서야 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총과 커다란 폭력 앞에 노인과 아이들이 맞서야 한다. 이렇게 공정하지 않은 세상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수 있는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항상 되묻는다.

이와 관련해 전작에서도 그렇고 '종교'라는 것의 역할이 흥미롭다. 영화에서 월트는 나름 독실한 신자인 듯 하나, 모든 것을 종교에만 의지하지 않는다. 고해하러 찾아간 신부에게도 기대한 이야기는 들려주지 않고 다른 이야기만 하고 나온다. 이 모습은 <밀리언...>에서 교회에서 귀찮은 질문만 해대던 프랭크의 모습과 겹친다. 아마도 이스트우드는 신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즉 어차피 신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는 인간으로서는 그저 자신의 할 일을 다하면 된다는 것. 용서와 참회와 기적은 신의 영역이라는 것. 그저 인간은 그 전에 자신이 할 일을 할 뿐이라는 것 말이다.

그래서 이 마지막에는 살짝 의문이 든다. 이 마지막은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희생을 통한 고귀함이고, 자신이 한국전에서 죽인 소년병에 대한 참회의 마음인가. 도리어 나는 그 반대의 인상을 받았다. 참회나 용서는 나의 몫이 아니라는 것. 신이 나를 용서하지 않을지라도, 나는 그저 내가 해야할 몫을 할 뿐이라는 것 말이다. 왜냐하면 이는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독교에서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버리는 것은 너무나도 큰 죄악이기 때문이다.

3.

영화를 본 후 몇 개의 리뷰를 보았는데, 인종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는 시각도 있었고, 또 그에 더 나아가 미국인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관점에서의 불편함, 혹은 유사한 의미의 '팍스 아메리카나'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이 영화에서는 인종 문제에 포커스가 맞춰지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는 인상이 짙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종 문제를 넘어선 그 이상(以上)의 시각, 인종 문제가 언급되지 않는 그 이상의 세계를 그리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다. 사실 역설적으로 보았을 때 인종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세계에서는 인종이라는 것은 더 이상 전혀 언급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결국에는 수와 타오를 괴롭히는 것이 다름 아닌 자신들과 같은 몽족의 갱단이라는 것이다. 즉 흑인이나 백인의 갱단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마도 이스트우드 감독은 이 영화에서 비롯된 결정적인 대립이 인종으로서 비롯된 문제라기보다는 인종을 벗어난 다른 것의 문제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또 하나는 영화 속 월트와 이발사와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인종에 대해 유쾌하게 농담을 나누며 서로에 대한 막말(?)을 서슴치 않는다. 이들에게서 인종간의 긴장이란 찾을 수 없다. 아니 더욱 정확히 말해서 역설적으로 이들의 관계에서 인종이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것이 그들 사이에서 아무 문제 없는 농담이 될 수 있다면 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실제로 전혀 중요한 것으로 고려되지 않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것이 이스트우드 감독이 인종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일 것이다.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이민자들의 국가, 미국. 이 미국 땅에서 순수 어메리칸을 이야기하는 것, 혹은 인종간의 대립과 차별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제는 정말 우스운 것이 아닌가 라는 시각. 그것은 이제는 더 이상 고려되지 않아야 된다는 것, 하나의 농담이 됨으로써 말이다.

4.

그랜 토리노. 1972년 포드에서 생산된 옛날 자동차. 옛날 자동차를 가지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항상 관리를 해주어야만 자동차가 굴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성능 그 자체로만 따진다면, 옛날 자동차는 절대 최신의 자동차를 따라 잡을 수 없다. 그렇다면 옛날 자동차를 가지고 싶어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건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아도 당연하다. 그것을 소유함으로써 느끼게 되는 명예와 긍지, 그것을 가지고 싶은 것이다. 그 명예와 긍지는 간단한 것이 아니다. 지난 몇 십년 동안의 차에 대한 정성과 애정으로 이루어진다.

이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는 복잡하고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많은 등장인물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복잡하고 다층적인 스토리로 이루어진 영화도 아니다. 어떻게 보면 간단한 스토리로 이루어진 작은 영화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작은 영화는 커다란 울림을 관객들에게 전달하며, 영화 이상의 어떤 순간을 관객들에게 느끼도록 한다. 그 작은 이야기가 그렇게 커다란 느낌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해답은 그가 살아온 몇십 년 간의 영화에 대한 정성과 애정에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몇 십년 동안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쌓아온 가치의 힘에 있다. 그가 살아온 몇십 년 간의 삶에 대한 자세가 이 영화에는 담겨 있다. 그래서 영화는 때로 보이는 것 이상의 많은 것을 말한다.





- 2009년 3월, 씨너스 단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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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레슬러>, 대런 아로노프스키

Ending Credit | 2009. 3. 20. 03:48 | Posted by 맥거핀.



(스포일러)



건즈 앤 로지스(Guns N' Roses), 머틀리 크루(Motley Crue), 본조비(Bon Jovi), 데프 레파드(Def Leppard)를 좋아했던 적이 있는가. 이 물음에 '그래'라고 대답했다면, 당신은 이 영화를 보고 슬플 것이다. 그리고 '그래'라고 대답한 당신은 영화 속 랜디(미키 루크)와 캐시디(마리사 토메이)의 대화에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건즈 앤 로지스의 음악을 들으며) 이런 게 음악이라구. 너바나(Nirvana)가 망쳐버렸지. 우울하기나 하구...그랬다. 그들의 매력은 그랬다. 아무 생각 없이 술이나 마시고 놀자고, 즐겁게 파티나 하고 섹스나 하자고, 내가 왕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나타난 너바나는 반항하는 10대가 되어 출구가 없는 미래에 절망했고, 라디오헤드(Radiohead)는 자기는 바보고, 패배자라고 자학했다. 80년대와 90년대는 그렇게 달랐다. 그리고 또 90년대 전반과 90년대 후반은 그렇게 달랐다. 나는 어중간했다. 파티하는 건즈 앤 로지스를 좋아하며 중학교에 입학했고, 반항하는 너바나를 들으며 고교 시절을 보냈으며, 자학하는 라디오헤드를 흥얼거리며 대학에 입학했고, 대학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그들을 다 어느 정도는 좋아했다.

랜디 램이 말하는 것처럼, 나에게도 프로레슬링의 시대는 건즈 앤 로지스와 머틀리 크루의 시대였다. 우리 어머니는 지금도 어느정도는 그러시지만, 전쟁물과 격투기와 스포츠를 좋아하신다. 아직도 생각이 난다. 토요일 낮에 학교에서 돌아와 어머니와 함께 <머나먼 정글>을 보며 점심을 먹고, 잠시 기다렸다가 오후 3시쯤 AFKN으로 채널을 돌려 프로레슬링을 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어머니가 열심히 보셨고, 나는 아이들과의 대화에 끼기 위해 조금은 억지로 보았다. 그것을 보지 않으면 월요일에 학교에 가서 아이들과의 대화에 낄수가 없었다. 그들은 워리어와 헐크호간 중에 누가 더 멋진 피니쉬 블로를 가지고 있는지 말싸움을 벌였고, 이번 로얄럼블에서는 누가 우승할지 갑론을박을 벌였다. 그러다 말싸움이 격렬해지면 그 중에 누군가는 직접 기술을 시연해보였고, 기술을 당한 누군가는 아픔보다는 쪽팔림에 이를 갈며, 새로운 기술을 연마해올 것을 다짐하곤 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도 지치면, 건즈 앤 로지스의 슬래쉬와 머틀리 크루의 믹 마스 중 누가 더 나은 기타리스트인지를 놓고 이야기를 했고, 본조비 따위는 듣지 않기로 결심하고는 몰래 집에서 혼자 본조비를 들었다. 그런 시기였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의 주인공 랜디 램의 링 등장음악이 건즈 앤 로지스의 'Sweet Child O' Mine'이라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가 좋았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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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즈 앤 로지스와 너바나의 거리만큼이나 프로레슬링과 K-1, 프라이드 등의 격투기의 세계는 멀다. 나는 그 둘의 차이는 그들의 이름에 있다고 생각한다. 프로레슬러의 이름들을 먼저 보자. 워리어, 헐크호간, 달러맨, 홍키통크맨, 빅보스맨, 브렛하트, 그리고 이 영화의 랜디 램과 아야톨라. 그들의 이름은 대체로 만들어진 가명이자, 하나의 캐릭터이다. 워리어는 전사답게 무서운 가면을 쓰고 등장하고, 헐크호간은 헐크처럼 티셔츠를 찢어발기고, 달러맨은 비서를 데리고 달러를 흩뿌리면서 등장한다. 그들의 그 캐릭터는 강렬한 판타지를 구축한다. 그들은 선과 악으로 나뉘어 대결하고, 구축된 캐릭터는 그 안에서 거대한 힘을 발휘하고 사람들을 환호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기꺼이 그 만들어진 판타지를 즐기며 선인이 악인을 벌하기를 원한다. 캐릭터와 환영의 힘이다.

그래서 프로레슬러에게 기술을 보여주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캐릭터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도 랜디 램은 바쁘다. 그는 캐릭터를 유지하기 위해 약으로 근육을 만들어야 하고, 머리를 노랗게 염색해야 하고, 기계에 들어가 태닝을 해야한다. 그래서 트레일러에서 사는 퇴물 레슬러일뿐인 그는 '로빈 람진스키'라는 본명으로 불리우는 것을 한사코 거부한다. 프로레슬러에게 본명은 수치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랜디 램이거나 또는 워리어거나  헐크호간이어야 했다. 링에서 '텍사스에서 온 로빈 람진스키'라는 식으로 소개되는 것은 달러맨이나 언더테이커의 희생양이 되는 신출내기 무명레슬러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각주:1].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전설의 랜디 램이거나 '중동의 짐승' 아야톨라이어야 했다. 그저 나이든 중고차 판매상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K-1이나 프라이드의 스타들은 다르다. 그들은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싸운다. 그들은 효도르이고, 최홍만이고, 레미 본야스키이다. 물론 그들에게도 별명이 붙을 수는 있다. 크로캅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는 만들어진 캐릭터와는 다르다. 크로캅이라고 해서 경찰복을 입고 곤봉을 돌리며 링에 등장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들은 판타지와 캐릭터와는 반대 지점에 있다. 그들의 싸움은 만들어진 판타지이기를 한사코 거부한다[각주:2].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혹 그들의 이 차이가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의 차이를 말해준다면 지나친 말일까.  만들어진 판타지 안에서 그것을 고양(高揚)함으로써 적과 우리를 갈라놓고 그안에 숨어있도록 했던 20세기 말, 그리고 명확한 적은 사라지고, 깨어진 판타지 안에서 그저 실물로써 적의 잔상들과 마주해야 했던 21세기 초의 차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허술하고 초라한 진짜보다 잘 구축된 가짜가 더 좋은 것으로 대접받았던[각주:3] 80년대에서, (90년대의 혼돈을 거쳐) 모든 것이 리얼이어야 했던, 심지어는 TV 쇼마저도 리얼이어야 하는 21세기의 반영으로써의 효도르와 최홍만. 그 차이는 너무나도 먼 것이다. 작은 TV로 하는 옛날 닌텐도 레슬링 오락과 1080i 화면으로 즐기는 '콜오브듀티 4' 만큼이나 먼 것이다[각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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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디 램은 링을 떠나려고 한다. 그에게 링을 내려오는 것은 링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무서운 현실로 들어감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는 휘장을 걷고 경기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주저하지는 않지만, 마트에서 샐러드 파는 일을 하러 들어가며 휘장을 걷을 때에는 약간은 주저한다[각주:5]. 그는 가능하다면 이 곳에 들어서고 싶지 않다. 설혹 링에서 철심이 몸에 박힐지라도 그에게는 그곳이 낫다. 그러나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의 몸 상태는 더 이상 링에 서기를 그에게 허락하지 않는다. 딸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도, 캐시디와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도 그는 마트라는 사각의 링에 들어서야 한다.
 
그러나 그에게 현실의 링은 허용되지 않는다. 덜어내면 더 달라고 하고, 더 담아주면 덜어내라고 말하는 깐깐한 아주머니도 잘 버텨내던 그는 누군가가 그 자신, 랜디 램을 알아보자 더 이상 그곳에서 버텨내질 못한다.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못하는 그가 유일하게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방식은 이제는 허물어진 예전의 판타지 스타로서임을 그가 깨달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이제는 허물어진 예전의 판타지로만 기억된다면, 그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 슬픈 세상에 엿먹이는 유일한 방법은 그 판타지에 복종하는 것. 그래서 언젠가 링에서 심장이 터져나가는 영웅이 되는 것. 예전에 바스라졌다고 생각한 그 판타지가 언젠가는 영원한 신화가 되는 것. 바로 램 잼을 날리는 것이다.

뭐 더 이상 덧붙일 말은 없다. 다만 이 말 한 마디만은 해두고 싶다. 나에게는 미키 루크를 보는 것보다 마리사 토메이를 보는 것이 더 힘들었다. 나는 <나인 하프 위크>의 미키 루크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온리 유>의 마리사 토메이는 기억한다. 그래서 어찌 되었거나, 마지막에 랜디와 캐시디가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잘 되었을까. 나는 희망을 가져보기로 했다. 그 희망이란 캐시디가 랜디의 경기를 차마 다 보지 못하고 경기장을 나가버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캐시디가 랜디의 손님이 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각주:6]. 랜디나 캐시디에게 상대방에 대한 최고의 모욕은 마치 '손님처럼' 구는 것. 그것을 캐시디가 거부했다면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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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건즈 앤 로지스의 <Chinese Democracy> 앨범을 들었다. MP3에 담아두고 거의 듣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손이 갔다. 그러나 왜 이렇게 들리는 것일까. 이렇게 비장한 건즈 앤 로지스라니. 그리고 뭐? chinese democracy? 아..정말 싫다. 그저 술이나 먹고 마약이나 하며 파티나 하자고 해야하는데, 이렇게 정중하고 비감한 건즈 앤 로지스라니.

그래서 영화를 본 후 워리어나 헐크호간, 달러맨과 홍키통크맨이 지금 어디에서 무엇하는지 궁금해졌지만, 찾지 않기로 했다. 보고 싶지 않다. 그게 무엇이든, 영화보다 훨씬 더 슬플 것이기 때문에.



- 2009년 3월, 광화문 씨네큐브.





  1. 예전 AFKN에서 본 많은 게임들은 이미 양 선수의 소개에서부터 누가 이길지를 명확히 알 수 있다. 헐크호간과 본명 레슬러 누구, 그리고 워리어와 본명 레슬러 누구의 게임의 승패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모든 관객들과 시청자들은 이미 그것을 다 알고 있다. 그들은 '누가' 이길지 궁금해서 그것을 보지 않는다. 그 '승리' 자체가 보고 싶은 것이며, 그 승리를 같이 즐기기 위해서 그것을 볼 뿐이다. [본문으로]
  2. 어쩌면 그래서 예전의 프로레슬러들은 그렇게 링 위에서 마이크를 잡고 떠벌이기를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선인, 혹은 악인임을 그들은 계속 관객들에게 증명해야 했으니까. 그러나 K-1 같은 데에서는 이런 것을 거의 본 적이 없다. 마이크를 잡는 효도르의 모습이 있었던가. 그리고 한편으로 이와 관련해 가끔 격투기 게시판에 올라오는 우스꽝스러운 질문들이 흥미롭다. '효도르와 호랑이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와 같은 질문들. 그렇다. 그들에게는 그저 효도르는 리얼일 뿐이다. 반면 그 당시의 우리들에게는 이는 금기시되는, 혹은 바보같은 질문이었다. 헐크호간과 호랑이를 비교하다니. 헐크호간은 호랑이를 찢어발길거야. [본문으로]
  3. 여기서 조금은 동떨어진 얘기지만, 어쩌면 이는 <씨네 21>에서 제기했던 잘 구축된 환영의 농촌이 강조된 <워낭소리>와 배우들이 다큐멘터리처럼 연기를 하는 <24 시티>의 차이. 그리고 그 둘 중 어디에 손을 들어줄 것인가의 문제. [본문으로]
  4. 랜디 램은 동네 꼬마에게 같이 닌텐도 게임을 하자고 한다. 요즘 나오는 그 '닌텐도'가 아니라 작은 화면에서 큰 도트로 움직이는 그 옛날 닌텐도 말이다. 꼬마는 지겨워하며 '콜오브듀티4'가 훨씬 재미있다고 말하지만, 랜디 램은 발음조차 잘 못한다. 랜디 램이 콜오브듀티(Call of Duty) 4를 잘 못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아마도 별 재미를 느끼지도 못할 것이다. 그에게 판타지가 없어진, 진짜와 거의 같은 전쟁은 힘겹고 무서운 것일 테니 말이다. 그러고보면 요즘에 모든 게임들은 진짜가 되기를 원한다. '콜오브듀티'마저도 지겨워지면 그들은 뭐를 하려고 할까. 진짜 전쟁을 하자고 할까. [본문으로]
  5.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의식적으로 이 두 장면을 같은 각도로 찍는다. 그리고 영악하게도 마트로 들어가는 랜디 램과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귀에 링의 환호성이 환청으로 들리도록 한다. [본문으로]
  6. 랜디의 직업은 프로레슬러, 캐시디의 직업은 스트리퍼. 둘다 이른바 '몸으로 말하는 일'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항상 랜디가 손님이었다면 이 마지막 장면에서 처음으로 이 관계는 역전된다는 점도 그렇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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