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볼루셔너리 로드>, 샘 멘데스

Ending Credit | 2009.03.03 17:57 | Posted by 맥거핀.





꽤나 오래전 얘기다. 대학 2학년 때의 어느 술자리. 갑자기 한 친구가 내게 말했다. 너는 말이야. 어딘가모르게 부자연스러워. 매사 연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할까. <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서 프랭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그러는 것처럼, 정곡을 찔린 사람은 화를 내기 마련이다. 나는 아마도,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래, 너나 잘 하시지 같은 뻔한 대사를 내뱉었던 것 같다. 20살의 인간들이란, 돌려서 말하는 법을 잘 모른다. 더구나 술에 취한 상태였으니, 그저 내뱉고 지르고 만다. 그리고 그 날의 술자리는 어그러졌고, 나와 그 친구의 관계는 그날 이후로 조금 서먹해졌다.

그리고 나는 조금 놀랐다. 그 친구가 그렇게 말했다는 것에 대해서. 글쎄, 내가 놀란 부분은 무엇이었을까. 그 친구가 나의 진심을 몰라줬기 때문에? 그 친구가 나를 오해했기 때문에? 그런 것 보다도, 나의 놀라움은 이것에 가까웠던 것 같다. 내 연기가 그렇게나 어설프다니.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저 친구도 이 연기의 어설픔을 알아차렸을 정도였으니, 가까운 데 있는 사람들은 어땠을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랬었던 것 같다. 나는 누구와도 불편한 관계로 지내고 싶지 않았고,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었으나 그 방법을 잘 몰랐다. 단지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아는 좋은 사람들의 행동을 모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에서도 말했지만, 20살의 인간이다. 실체가 없는 모방은 한계가 있고, 그 모방마저도 어설픈 모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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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이 꽤나 오래전 일이 생각난 것은 전적으로 이 영화 때문이다. <레볼루셔너리 로드>. 처음부터 나는 프랭크와 에이프릴(케이트 윈슬렛), 이 두 사람이 뭔가 '연극적인 연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두 남녀가 차를 옆에 두고 다투는 장면에서도 합(合)이 딱딱 맞는다고나 할까. 그 적절한 대사들과 과장된 손동작과 고함들. 그리고 이 연극적인 연기는 그 이후에도 계속 반복된다. 그러나 이 연기들은 그들에게서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프랭크와 에이프릴 부부의 옆집 부부 혹은, 이들에게 집을 소개한 여자도 이 예의 연극적인 연기를 선보인다. 이들의 말투나 행동은 어딘지모르게 부자연스럽다. 이 미묘한 부자연스러움은 무슨 이유때문인가[각주:1].

이의 해답은 곧 밝혀진다. 이들이 사는 세상은 하나의 매트릭스(Matrix)였던 것. 에이프릴이 이 '레볼루셔너리 로드'가 하나의 매트릭스임을 쓰레기를 버리러 나와 갑자기 깨달았을 때, 이들의 부자연스러움은 설명이 된다. 즉 이들의 부자연스러움은 정교하지 않은 소스코드였던 것. 혹은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와 같은 것[각주:2]. 물론 나는 에이프릴이 진짜 매트릭스를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녀가 이 세계를 매트릭스와 비슷한 어떤 것, 즉 실체가 없고, 가짜만 존재하는 세계, 위선과 위악과 공(空)만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깨달았다는 것이다[각주:3]. 그리고 에이프릴은 이 매트릭스에서 탈출하고자 한다.

그러나 에이프릴의 말에 진정으로 동의하는 사람은 없다. 일견 에이프릴의 말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였던 프랭크도 이미 매트릭스에 길들여져 있는 것. 프랭크가 이것이 매트릭스임을 몰랐던 것 같지는 않다. 가벼운 마음에 장난처럼 내뱉었던 기획안이 사장에게 엄청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기이한 세계. 그것을 가까이에서 보고도 이것이 매트릭스임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은 이상하다. 단지 그는 그 매트릭스를 선택한 것 뿐이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와 무리들을 배신한 남자가 스미스 요원을 만나 스테이크를 먹으면서 내뱉는 대사처럼. "나는 이게 가짜임을 잘 알고 있지. 그러나 맛있단 말이야. 너무나도." 에이프릴을 유일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집을 소개한 여자가 데려온 '미친 남자' 뿐이다. 어찌보면 역설적이지만, 어찌보면 당연하지 않은가. 예를 들어 내가 거리로 나가 '이 세상은 매트릭스, 가짜로 만들어진 세계'라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한다면 어떨까. 대부분은 피할 것이고, 친절한 몇몇은 경찰서로 전화를 걸어줄 것이다. "여기 미친 사람 있어요!"

그래서 이 마지막은 숨이 막히게 한다. 에이프릴의 이 선택이. 매트릭스에 길들여지지 못한 그녀의 선택이[각주:4]. 그러나 이 선택만 있었을까. 매트릭스를 사는 우리들에게는 죽거나, 미치거나, 길들여지거나의 답지만 있는 것일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예를 들어 보청기를 끄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듣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만 적당히 골라서 보고 듣는 것. 물론 나이가 들고 보청기를 낀 연후에만 가능한 것이겠지만.

그전까지는? 그저 계속 어설픈 연기를 선보이는 것 밖에. 완벽한 연기보다는 어설픈 연기가 낫다고 생각하면서. 물론 완벽한 연기를 할 능력도 안되지만.


p.s.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의 두 번째 만남. 이 둘이 처음에는 잘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이 둘은 세트로 있는 것이 나아 보인다. 디카프리오의 불안한 에너지를 잡아주는 케이트 윈슬렛의 묵직한 덩치. 뭐 아무튼 이제는 소설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읽어야 할 때.


- 2009년 3월, 씨너스 센트럴






  1. 그러고보면 이 영화의 배우들은 고난도의 연기를 선보이고 있었다. 자연스러우면서도 미묘한 부자연스러움을 보여주는 것. [본문으로]
  2. "나는 로봇이 점점 사람이 가까워질수록 친밀도가 증가하다가 어떤 계곡에 도달하는 것을 관찰했다. 나는 이런 관계를 '섬뜩함의 계곡'이라 부른다." 계곡의 발견자는 일본의 로봇공학자 마사히로 모리(政弘森). 처음에는 로봇의 인간유사성(human likeness)이 친밀도를 증가시킨다. 하지만 어느 정도를 넘어서면 그것이 외려 혐오감을 준다. 그러다가 인간과 거의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아지면, 친밀도가 회복되어 정상에 도달한다. - 진중권, <진중권의 Imagine>에서 [본문으로]
  3. 아마도 그녀는 이를 깨닫는 감각이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발달했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극 중에서 연극배우로 나오는 그녀의 연기가 형편 없음이 이해가 된다. 부조리극이나 일부의 실험극을 논외로 하고 본다면 모든 연극에서 최고의 연기는 만들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 관객에게 그것이 '실제 감정과 거의 같은 것'이라고 믿게끔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꾸만 이것이 하나의 연극임을, 이것이 거짓 세계임을 깨닫고 있는 것. 본인이 이를 거짓 세계라고 생각하는데, 소위 말하는 '진실된 연기'가 나올 턱이 없지 않는가. [본문으로]
  4. 이 선택은 아래의 질문에 조그만 암시를 준다. 프랭크와 에이프릴에게는 두 명의 자녀가 있음에도, 그들은 왜 거의 나오지 않은 것일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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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잇 카우보이>, 존 슐레진저

Ending Credit | 2009.02.25 01:16 | Posted by 맥거핀.




(스포일러)



영화가 끝나고 살짝 눈물이 났다. 글쎄. 왜 눈물이 나는건지 잘 모르겠다. 이 영화는 코미디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꽤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적어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영화 내내, 나는 살짝 웃음띤 얼굴로 영화를 지켜봤다. 그러나 이 마지막은 묘하게 마음을 아프게 한다. 리코(더스틴 호프만)가 죽어서? 뭐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눈물은 단지 그런 것만은 아니다. 나는 적어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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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슐레진저 감독의 1969년 작 <미드나잇 카우보이 Midnight Cowboy>. 1969년은 누구나 기억하듯이,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한 해였고, 베트남 전쟁이 클라이막스로 치닫고 있는 해였다. 그와 반대로 미국 국내에서는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드높은 시대이기도 했고, 전세계적으로 좌파들의 기치가 드높았던 1968년의 이듬해이기도 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3선개헌이 국회를 통과한 원시적인 해이기도 했고, 얼마전에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님이 추기경으로 임명된 해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1969년은 '69'라는 숫자가 상징하듯, 히피(hippie)들의 해, 비틀즈와 도어스의 해이기도 했으며,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3일간 열렸던 해이기도 하다.

시대정신이라고 해야하나...이 영화에서도 1969년의 이면에 있었던 끈적한 분위기는 감지된다. 조 벅(존 보이트)과 리코가 우연히 초대받아 가게되는 파티 현장. 그 파티는 끈적하고 불온한 공기를 담고 있다. 흐느적거리는 음악이 흐르는 이 공간에서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흐느적거리며 춤을 추고, 약을 한다. 여기에는 어떤 뚜렷한 이유가 없다. 몽롱한 눈으로 카메라를 쳐다보며 남자는 답한다. 이곳에 왜 왔는지 모른다고.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모른다고. 이곳은 조 벅과 리코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공간이다. 단지 리코는 먹고 마시는 것에, 그리고 사람들의 주머니를 터는 것에 열중할 뿐이고, 조 벅은 약에 취해 웃을 뿐이다.

그들은 여기에서도 이방인일 뿐이다. 카우보이 복장을 한 우스꽝스러운 남자와 그의 친구. 이들은 그저 다른 이들의 구경거리일 뿐이다. 그랬다. 1969년의 세상에서 이들은 그저 사회에서 밀려난 이방인일 뿐이었다. 아폴로 11호로 상징되는 과학기술이 대변하는 말끔하고 잘 짜여진 귀부인과 신사들의 세계, 그리고 그 반대편에 있는 음악과 춤과 마약의 끈적거리는 히피들의 세계. 그 두 세계의 틈바구니에서 그들은 그저 갈 곳이 마땅치 않은 텍사스에서 온 카우보이 복장을 한 어리숙한 청년과 간단한 사기와 소매치기로 살아가는 2세대 이민자 청년[각주:1]일 뿐이다.

이 어리숙한 카우보이 청년 조 벅은 뉴욕에서는 돈많은 부인들이 같이 자주면 돈을 준다는 말에 뉴욕에 왔다. 자신으로서는 가장 자신있는, 여자랑 자는 일을 하는데, 돈까지 주다니. 이 왠 꿩먹고 알먹고인가. 아마도 그는 이렇게 간단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보듯, 그는 복잡하게 생각할 줄 모르는, 어딘가에 나사가 하나 빠진 청년이다. 글쎄 그의 나사는 왜 도망갔을까. 조 벅은 종종 환상에 빠진다. 이 환상에서 그는 과거의 세계로 달려간다. 이 과거의 세계는 정확히 묘사되지는 않지만, 그에게 어떤 트라우마를 안긴 것 같다. 군복을 입고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하며 집 앞에 앉아있는 장면을 미루어 볼 때 그는 전쟁에서의 귀환병일지 모르며, 베트남 전에서의 어떤 것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과거의 환상에 종종 등장하는 여자친구와의 어떤 관계가 이를 이렇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알 수가 없다. 다만, 하나 확실한 것은 그는 나사가 하나 빠졌기는 하지만, 착한 청년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착함은 '천사같은' 착함이 아니라, 그보다는 훨씬 날 것의 어떤 것이기는 하지만.

이 이야기는 이 착한 청년 조 벅과 그의 친구 리코가 벌이는 생존의 이야기이다. 꽉 짜여진 두 세계의 틈바구니 속에서 그들은 어떻게 살아남을까. 그러나 이 생존기는 결코 무겁고 우울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희극적이다. 묘하게 희극적이다. 예를 들어 조 벅의 환상이 그를 과거로 데려간다면, 리코의 환상은 그를 미래로 데려간다. 그는 지금 조 벅의 매니저가 되어 조 벅이 멋진 부인을 꼬셔오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그는 미래의 자신과 조 벅의 모습을 상상한다. 해변가에서 수많은 수영복을 입은 부인들에게 둘러쌓여 있는 조 벅과 자신. 그러나 이 길지 않은 꿈은 조 벅이 바깥으로 내동댕이쳐지면서 같이 깨진다. 우스운 환상과 그것의 깨어짐. 이를 이렇게 말할수도 있다. 비극적인 주인공들이 벌이는 희극[각주:2], 또는 희극적인 주인공들이 벌이는 비극[각주:3].

조 벅과 리코는 추운 뉴욕을 떠나 넓은 해변과 뜨거운 태양이 있는 따뜻한 남쪽으로 떠난다. 표면적으로 봤을 때에는 아픈 리코가 마이애미로 가는 것이 소원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단순한 조 벅도 깨달았던 것이다. 이렇게 삶이 지속될 수는 없다는 것을. 이대로는 그들 앞에 남은 것이 없다는 것을. 따라서 마이애미로 가는 도중 조 벅이 카우보이 복장을 집어던지고, 평범한 복장으로 갈아입는 것은 인상적이다. 이것은 과거와의 결별, 꿈을 좇고 환상을 좇는 세계와의 결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마지막에서 관객은 다시 숨을 삼킨다. 마이애미가 눈 앞에 있는데, 리코는 트로피카나 셔츠를 입고 버스 차창에 고개를 떨구기 때문이다. 친구의 고개를 받치고 망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조 벅. 그러나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두었어도 이 세상은 여전히 흘러간다. 죽은 리코의 모습과 망연한 표정의 조 벅과 오버랩되는 차창밖 마이애미의 풍경. 이 마지막은 오래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조 벅은 이제 어디로 가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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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부인과 신사들의 세계와 히피들과 마약의 세계에서 어느 곳에도 갈 곳이 없었던 두 청년 조 벅과 리코. 왠지 이 이야기는 현재에도 그대로 진행되는 것 같다. 머나먼 이 곳 한국에서 말이다. 물론 이는 귀부인과 히피의 세계는 아니다. 그것은 그보다는 조금 더 실용적이다. 이른바 억대연봉과 만원짜리 커피의 세계와 용산철거민과 삼천원짜리 싸구려국밥의 세계. 그 세계는 점점 그 간극이 멀어지는 것 같다. 그 세계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끼어있는 '88만원 세대'의 수많은 조 벅과 리코들. 그들은 어디로 가야할까. 아니 어디로 갈 수 있을까.

- 2009년 2월, 서울아트시네마.



  1. 리코의 풀네임은 엔리코 살바토레 리조. 이 이탈리아 냄새 물씬 풍기는 이름으로 볼 때,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지하철에서 구두를 닦다가 돌아가셨다는 그의 말로 미루어 볼 때, 아마도 그는 가난한 이탈리아 이민자 2세대일 것이다. [본문으로]
  2. 독일영화 <나킹 온 헤븐스 도어> 또는 <주유소 습격사건> [본문으로]
  3. 이는 어딘가 나사가 빠진 주인공들이 바보같은 일을 벌이는데, 이것이 그들을 계속 안좋은 상황으로 몰아넣을 때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들이 느끼는 두 가지의 혼합된 감정, 즉 우스꽝스러움 및 안타까움과 맥이 닿아 있다. 이른바 <낮술>의 세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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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시계는 거꾸로 돌아간다. 이 시계는 전쟁에 나가서 죽은 아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시계공의 소망을 담아 만들어졌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시간을 거꾸로 돌려서 죽은 자가 살아돌아올 수 있다면,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리고 그 해에 벤자민 버튼(브래드 피트)은 태어났다. 죽을 날을 앞둔 노인의 몸을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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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이런 기이한 설정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이 제목은 조금 이상해보인다. 과연 '시간은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일까.' 이 영화의 원제는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직역하자면, '벤자민 버튼의 신기한(기이한) 사례' 정도 될 것이다. 아마도 수입하는 측에서는 벤자민 버튼의 '육체'가 점점 젊어지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싶어서였겠지만, 이 제목은 자꾸만 무엇인가를 오해하게 만든다. 그래서 다시 질문을 던져본다. 정말 과연 시간은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일까.

내가 생각하는 거꾸로 간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죽은 아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시계공의 소망처럼 죽은 자가 살아서 돌아오는 것. 오늘의 나는 어제 알았던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내가 되어 어제의 인생을 사는 것. 즉 육체적으로만 젊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포함한 내 주위의 모든 것이 어제로 돌아가는 것. 그러나 벤자민은 그렇지 않다. 그는 다만 육체적으로 '젊어질' 뿐이다. 그의 정신과 삶의 진행은 보통 사람과 동일하다. 아무 것도 모르던 '아이'였던 벤자민은 조금씩 집 바깥에 있는 무엇인가를 알게 되고, 집을 떠나 세계를 알게 되고, 주위의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게 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부모의 죽음을 알게 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많은 보통의 사람들이 사는 삶도 약간은 다르지만, 대부분은 비슷한 삶을 살게 된다. 즉 보통 사람들에게 시간이 직선으로 흐르고 있다면, 벤자민에게도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아니 나는 수입사의 한글 제목에 문제제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말장난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단지, 말하고 싶은 것은 내게는 이 벤자민 버튼은 하나의 거대한 맥거핀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에게 기이하게 보이는 이 벤자민 버튼도 결국은 태어나고, 삶을 살고, 죽는다는 것. 그가 육체적으로 다르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크게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는 시계공의 질문에 대한 신의 답인지도 모른다.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는 없나요?' '죽은 자가 살아돌아올 수는 없나요?' 라는 질문을 시계공이 자신이 만든 시계를 통해서 신에게 던졌을 때, 신은 벤자민을 태어나게 하는 것으로 답했던 것이다. '이 기이하게 보이는 벤자민도 남들과 같단다. 태어나고, 배우고, 사랑하고, 주위 사람을 잃고, 죽는단다.'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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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보았을 때 아마도 이 영화는 크게 두 가지를 말하고자 하는 것 같다. 물론 그 두 가지는 각각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연결될 때에만 가치가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하나는 '결국에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그에게 세상을 가르쳐 준 선장 마이크가 죽으면서 하는 말이지만, 이 말은 그 후에도 여러 번 반복된다. 벌어놓은 많은 돈으로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이 이승을 떠나고 싶지 않은 벤자민의 아버지[각주:1]. 그러나 그도 최후에는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을. 신은 시계공에게 했던 답을 선장에게도, 그리고 벤자민의 친부에게도 들려주고 있다. 이는 한편으로 말하자면, 이 신 앞에서, 신의 세계 앞에서 인간이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를 말해주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를 잘 말해주는 에피소드가 영화 중간에 제시된다. 데이지(케이트 블란쳇)의 교통사고 장면. 감독은 이 교통사고가 얼마나 많은 우연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인가를 자세한 장면으로 제시한다. 벤자민은, 그리고 우리는 가정을 해볼 수는 있다. '...했었더라면' 하고 말이다. 그러나 그 수많은 우연의 결합으로 사고는 일어났다. 우리는 어떠한 일이 우리의 책임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렇게 말한다. 우연이었어. 우연이었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또다른 장면도 있다. 지금 데이지가 누워서 딸에게 벤자민의 일기를 읽어달라고 하는 이 병원. 이 병원에는 거대한 폭풍우가 몰아닥치고 있다. 그러나 그 폭풍우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다른 곳으로 피하거나, 그저 조용히 지나가기를 기다릴 뿐. 죽음이든, 또다른 어떤 것이든 인간이 맞설 수 없는 것이 있다. 그 맞설 수 없는 것에 맞닥뜨릴 때는 방법은 없다. 그저 '받아들일 뿐'. 그런 면에서 이 영화에서 조용히 '받아들이는' 캐릭터인 벤자민의 양모 '퀴니'의 존재는 인상적이다[각주:2]. 그녀는 벤자민 같은 '괴물'이 태어난 것도 모두 신의 뜻이라 생각하고, 그저 그를 잘 키울 뿐이다.

또다른 하나는, 따라서 결국 모든 인간은 단 한 번의 인생을 산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잡혀 와 남들에게 구경거리가 되는 삶을 산 피그미족 청년도, 버튼 공장을 운영하며 부유한 삶을 산 실업가도, 예인선 선장으로 여러 곳을 구경하고, 2차대전에도 참전했던 용감한 선장도, 볼쇼이 발레단과 처음으로 협연한 발레리나였던 호기심많은 여인도, 누구보다도 강단 있는 여성이었으나, 또한 그저 '엄마'였던 어느 여인도, 그리고 벤자민도. 태어난 이상, 언젠가는 죽음을 맞게 되리라는 것. 삶의 중간에는 여러 분기가 있을지언정, 그 분기를 되돌아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다는 것. 하나의 인생을 다시 살 수 없다는 것. 누구나, 결국 벤자민에게도 시간은 거슬러 오를 수 없는 일직선이라는 것. 즉, 시간은 거꾸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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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대다수의) 인간은 처음에는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다가, 네 발로 기다가, 두 발로 서서 세상을 바라보다가, 다시 걸을 수 없게 되며 죽음을 맞이한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벤자민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 역시 침대에 누워 있다가, 양 손에 지팡이를 끼고 네 발로 걷다가, 두 발로 서서 세상을 살펴보다가, 다시 걸을 수 없게 되어 죽음을 맞이했다[각주:3]. 벤자민이 죽음을 맞이하는 이 마지막 장면은 여러가지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


- 2009년 2월. 씨너스 명동.




 
  1. 덕분에 벤자민은 그 이후에는 아버지의 유산으로 편하게 요트도 타고 잘 산다. 반면 그렇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생활하는 노동인 벤자민 버튼이었다면. [본문으로]
  2. 따라서 그녀가 운영(?)하는 공간이 양로원이라는 것은 상징적이다. 양로원은 '받아들여야'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즉 앞으로의 자신의 생은 그저 여생(餘生)에 불과하다는 것을. 언젠가는 찾아올 죽음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 [본문으로]
  3. 개인적으로는 이 마지막 부분으로 가면서 설정이 조금 아쉬웠다. 마지막 벤자민이 치매에 걸리는 것은 상당히 쉬운 선택이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얼굴은 아기인데, 말이나 행동은 노인처럼 하면 이상해서 그랬겠지만) 어쩌면 말할 수 없는 상태에서 다시 말할 수 없는 상태로 돌아간다는 대구(對句)를 만들고 싶어서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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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물보다 큰 Bigger Than Life, 니콜라스 레이

Ending Credit | 2009.02.15 22:18 | Posted by 맥거핀.


(스포일러)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으려니 마음이 설렌다. 허리우드 극장에 들어가는 초록색 엘리베이터. 물론 지금은 허리우드 극장이 아니다. 서울아트시네마 또는 허리우드 클래식. 지금은 고전 영화를 많이 상영하는 극장이지만, 예전부터 허리우드는 상당히 고전스러웠다. 일단 이름부터가 '헐리우드'도 아닌 '허리우드'. 그리고 극장을 둘러싼 거리들의 오래되고 낡은 풍경. 세련되지 못한 빛바랜 거리.

생각해 보면, 종로에 나와 극장을 갈 때면, 서울극장이나 단성사보다는 허리우드나 씨네코아를 가곤 했다. 이제는 허리우드도 씨네코아도 없지만, 종로에 있는 극장을 간 기억을 떠올리면, 그 두 극장 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그 중에 조금 더 좋아했던 극장은 허리우드였던 것 같다. 허리우드는 앞에서도 말했듯, 관 이름도 '레드'니 '그린'이니 하는 약간은 촌스러운 극장이었고, 거기를 가기 위해서는 약간은 역한 돼지 삶는 냄새가 풍기던 더러운 골목을 지나가야 했지만, 무엇보다도 좋았던 건, 극장 앞 툭 트인 옥상이었다. 지금은 끊어서 그럴 수 없지만, 그 옥상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피우는 담배 맛은 꽤나 좋았다. 그저 지금은 하릴 없이 휴대폰을 꺼내 아래의 풍경을 찰칵 찍으며 예전의 기억들을 떠올릴 분이다. 그러고보니 예전에 여기서 교생 때 가르쳤던 학생들을 만난 기억도 있다. 아마 지금은 대부분 대학생이 되었을 그 학생들도 그 때는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를 보러 오며 불안해하던 소심한 학생들이었을 뿐이다.

날씨는 흐려서 사진은 잘 나오지 않았지만, 휴대폰에 찍힌 사진을 들여다본다. 회색빛의 풍경이 남아 있는 기억과 비슷해서 그런지, 어쩐지 예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 하다.

그리고 '2009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김영진 평론가가 추천한 니콜라스 레이의 <실물보다 큰 Bigger Than Life>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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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선택한 건 단지 시간이 맞아서다. 그 외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다. '시네마스코프 영화미학을 최고조에 올려놓았던 감독 니콜라스 레이의 대표작'이라고 되어 있지만, 내가 그런 걸 알 턱이 없다. 시네마스코프가 무슨 말인지 잘 몰라 사전을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나온다. '와이드스크린 방식에 의한 대형영화' 와이드스크린이라..그러고보니 이 제목은 중의적으로 읽힌다. 실물보다 훨씬 사물을 크게 보이게 하는 와이드스크린, 그리고 실제의 삶보다 자신의 삶을 더 크게 지각하고 있는 주인공 에드(제임스 메이슨)의 심리상태. 실제의 삶보다 자신의 삶을 더 크게 지각하고 있다는 것은 한 마디로 제정신이 아니란 거다. 과대망상.

에드를 이렇게 만든 것은 코티존이라는 약이다. 그러나 그는 그 약을 끊을 수 없다. 그 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그가 가진 병으로 인해 1년 안에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점점 약에 의지하기 시작한다. 약의 복용-과대망상 작용의 증가-과대망상 작용으로 약을 더욱 복용-그로 인해 더욱 심화되는 과대망상의 악순환. 그는 이 악순환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것인가. 그러나 이 악순환에서 빠져 나오는 것은 그리 간단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왜? 모든 것이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가 왜 이런 과대망상에 빠지는지, 이 약을 어느정도나 사용해야 하는지, 아니 정말 그가 정신병이 생긴 것은 이 약 때문인지, 그리고 그가 정말 낫고 있는 것인지. 의사는 고작 약의 복용량을 조절해보자고 말할 뿐이다. 어쩌면 그는 다시 이 악순환에 빠져 들는지도 모른다. 단지 그 악순환 고리의 크기가 문제일 뿐.

한편으로는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그가 과대망상에 빠진 후 가지게 되는 교육관에 흥미가 생긴다. 잘 못하는 학생들도 너그럽게 용서해주던 인자한 초등학교 교사였던 그는 정신에 문제가 생긴 후 아이들을 나약하고 악한 존재로 보기 시작한다. 이는 한편으로 중세적 아동관을 닮았다. 기독교적 원죄 의식을 바탕으로 인간이 악하게 태어난다고 본 중세에는 강한 체벌과 훈육을 중요시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이 사탄이나 악마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극도의 혼란에 빠져 성서의 아브라함의 일화를 인용하며 아들을 죽이려 하는 장면은 꽤나 섬뜩하다.

이 영화에는 이 장면 외에도 몇몇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욕실에서 깨진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에드의 여러 갈래로 분열된 거울상. 이는 한편으로는 분열되기 시작하는 그의 머리속과 앞으로의 그의 삶이 갈래갈래 조각날 것이라는 암시를 하는 듯 하다. 또 아들에게 수학 문제를 내며 의자 뒤에서 손을 짚고 바라보는 모습은 어떤가. 앞에 놓여진 전등으로 인해 그의 그림자는 벽 면에 커다랗게 비친다. 이는 왠지 사탄이나 악마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그가 그토록 아들에게서 멀리 떼놓으려고 했던 사탄은 그의 속에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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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 영화는 오래된 영화이지만, 생생한 질문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정신병이란, 혹은 과대망상이란 무엇인가, 과연 어느 정도까지를 정신병, 과대망상으로 보아야하는가와 같은 질문들이 그렇다. 미국정신의학회가 발행하는 DSM(정신장애의 진단과 통계 매뉴얼)이 개정될 때마다 정신장애의 개념은 한 없이 확대되고 있다고 한다. 이는 급기야는 '일상적인 행동의 질병화'라는 수준까지 왔는데, 예를 들어 '숙면을 취할 수 없는 것'은 "우울성 장애"이고,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망상성 인격장애"이며, '근심하는 것'은 "전반성 불안장애"라는 식이다(다치바나 다카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되는 100권>에서). 이 영화에서도 에드가 코티존을 복용하던 초반, 갑자기 활달해하며 아내와 아이들을 아주 비싼 옷가게에 데려가 옷을 사주는 장면이 나온다. 아내는 조금 불안해하지만, 또 행복해하기도 한다. 이것이 그의 과대망상의 시작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어쩌면 이런 약간의 과대망상은 삶을 행복하게 느끼게 해주고, 미래에의 희망을 가지게 하는 효과가 있을는지도 모른다. 

물론 반대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조금 불안해하고, 반대로 그 조금의 불안 속에서 행복을 찾는 것. 이것은 현대인들의 특질이다. 어쩌면 이 사회는 조금의 과대망상이 결합되어 이루어져 있는 곳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더욱 큰 과대망상의 시작인가, 아닌가. 그것은 앞으로를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 2009년 2월. 서울아트시네마.
 

p.s. 할리우드 여배우는 옛날 여배우들이 훨씬 나은 것 같다.
 이 영화에서 에드의 아내로 나오는 바바라 러쉬(Barbara Rush). 출처는 (nnd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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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 그의 아내, 신동일

Ending Credit | 2009.02.14 02:57 | Posted by 맥거핀.




(스포일러 있음)


급하게 뛰어 들어간 극장은 텅 비어 있었다. 상영 10분전, 매표소 직원이 어색하게 웃으며 표를 끊어준다. 주위를 둘러보며 조심스럽게 묻는다. "관객이 저 혼잔가요?" 그녀의 어색한 웃음은 조금 짙어진다. "아직까지는 그렇네요." 그리고 그 '아직까지는'은 '결국'이 되었다. 아무도 없는 극장에서 혼자 영화를 보신 경험이 있나요? 나는 누군가에 묻고 싶어진다. 어쩌면, 이것이 마법의 시간, Magic Hour 일는지도 모른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시작되었다. 영화가 1시간이 지나갈무렵, 슬슬 깝깝해지고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주위를 둘러보고, 앞뒤를 살펴보아도 아무도 없다. 스크린 안의 인물들에게 구원이 필요한 것처럼, 나에게도 구원이 필요하다. 그냥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나타나서 그들을 구원하고, 나도 뒤척임을 그만두었으면 싶다. 어떤 영화들은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그럴 때마다 나의 감정은 복합적이다. 한편으로는 이 불편함이 빨리 끝났으면, 어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불이 켜졌으면 싶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복잡함으로 지적, 감정적 쾌락을 느끼며, 이 쾌감이 지속되기를 갈망한다. 이 불편함은 어디에서 오는걸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는 답을 얻지 못하는 불편함이다. 영화는 계속 나에게 질문을 하도록 만들며, 간단하고도 쾌락적인 답을 들려주지 않는다. 물론, 한편으로 보면 질문으로 만들어진 성은 그 자체가 하나의 쾌락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성문이 닫혀 있는 한 그 쾌락은 불편함을 동반한 쾌락이다[각주:1].

마법의 시간이 끝난 후, 옛 대학 동기들을 만나러 갔다. 친구들이 오지 않아 지하철 역에서 친구를 기다린다. 심심하다. 열심히 전단지를 돌리고 있는 학생들에게 다가가 일부러 전단지 2개를 받아 읽는다. "MB정권 퇴진, 촛불의 함성으로" 밑에는 용산 유가족이 보낸 편지의 한 내용이 적혀 있다. 한참을 읽어 내려가는데, 어느 틈에 나타난 친구가 툭 뺐어 든다. "아우, 배고프다. 뭐 보고 있냐? 으이그, 열심히 보기는. 여전하구나. 빨리 밥 먹으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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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영화의 줄거리를 다시 쓰는 것은 바이트(byte)의 낭비가 될 것이다. 이미 꽤 오래 전부터 상영하는 영화이고, 이에 대해 쓴 여러 좋은 글들도 여기저기에 많다. 다만, 잊지 않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던져둔다[각주:2]. 답을 찾기는 어렵다. 적어도 내 수준에는.

- 이 영화를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다른 여러 리뷰들에도 나와 있지만, 이 영화를 세 사람과 그들 사이에 벌어진 실수와 관계의 문제로만 읽는 것은 너무 피상적인 해석이 될 것이다. 이 세 사람이 발을 디디고 있는, 그리고 그 외부의 관객들이 발을 디디고 있는 이 자본주의의 땅에서 세 사람이 가진 계급의 상징. 그것은 무시하기에는 너무 드러내놓고 읽힌다. 전직 학생운동가이자 자본주의의 최전선에 있는 현직 외환딜러인 예준(장현성)이 실수로 노동자 재문(박희순)의 아들 민혁('민중혁명'의 이름을 딴)을 죽게 만드는 데에 이르러서는 그 정치적 함의가 너무 노골적이라 쓴 웃음이 날 정도다[각주:3]. 변절한 386(장현성)이 깨어 있는 건전한 노동자(박희순)와 민중(홍소희)이 낳은 '민중혁명'을 고사시켰다...그리고 급기야는 민중에게 거짓 선전을 유포해 그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 한다...?

- 그들은 왜 변절하였는가?

글쎄. 변절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는지 잘 모르겠다. 영화 속 예준은 분노에 차서 말한다. "나 원래 이런 놈이라구!" 그들이 원하는 것이 민중혁명이었을까. 글쎄, 이 질문은 너무 깊고, 포괄적인 질문이다. 그러나 이는 필요한 질문이고, 해야만 하는 질문임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MB정권 퇴진을 말한다. 그러나 그 이후는 무엇일까. 그들이 원하는 MB정권 이후는 무엇일까.

- 왜 그들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가?

영화 속 지숙(홍소희)의 표정은 전반기와 후반기가 아주 다르다. 전반기에는 웃다가, 갑자기 짜증을 내는 등 풍부한 표정 변화를 드러내보이던 지숙은 사건이 일어나고 미국에서 돌아온 후 감정변화를 거의 드러내보이지 않는다. 물론 사건 이후에 감정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갑자기 늘어난 그녀의 재산과 더불어, 이 감정의 숨김은 기이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후반부의 격렬한 전화씬을 제외하고는 시종일관 감정변화를 크게 드러내보이지 않던 예준과 차안에서 지숙이 나누는 대화는 매우 섬뜩해보인다.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들의 얼굴은 마치 기계적인 어떤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에 무표정하게 반복적으로 마당을 쓰는 재문과 가위질을 하는 지숙, 그리고 엔딩 크레딧 내내 이어지는 가위질 소리는 매우 섬뜩하다.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 왜 제목이 <나의 친구 그의 아내>인가?

이 영화의 중심점이 재문에게 있음을 고려해본다면, 이 제목은 다분히 이상하다. 이는 예준의 입장에서 본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는 예준에게 집중해서 보라는 감독의 주문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예준은 상당히 미스터리한 인물이기도 하다. 앞으로 태어나게 될 친구의 아들과 딸 이름을 민혁('민중혁명'에서 따서)과 예니('마르크스'의 부인 이름)라고 지으라고 말하는 전직 학생운동가이자 군대에서조차 자신의 후임에게 편안히 말을 놓자고 말하는 이 남자. 그는 어떻게 성공한 외환딜러가 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 성공한 외환딜러는 왜 아직까지 결혼은 커녕, 변변한 애인조차 없는 것일까. 조루증이라서[각주:4]? 여자 사귀는 데 서툴러서? 서투르다...는 말은 어쩌면 이렇게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어쩌면 이것이 예준으로 대표되는 386 세대의 허위의식인지도 모른다.

- 영화의 마지막에 배달된 편지, 누구에게서 온 것일까?

그들이 미용실을 하고 있는 이 곳은 어디일까[각주:5]. 시골의 외딴 구석에 자리잡은 이 곳까지 편지를 보내 올 사람은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그 편지를 쳐다보지도 않고 익숙하게 서랍에 밀어넣는 지숙의 태도로 보아서는 자주 편지를 보내온 사람, 아마도 예준일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음을 각오하며 그들을 놓아주는 듯이 보였던 예준은 왜 아직도 살아남아서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일까. 그 내용은 무엇일까. 이 마지막은 꽤나 단호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편지를 열어볼 마음이 없으니까. 어떤 달콤한 사탕발림이 있더라도 말이다. 그들은 무표정하게 마당을 쓸고, 가위질을 할 뿐이다. 그러나 이 마당쓸기와 가위질은 아무 감정이 없는 행위라는 것이 무섭다. 그녀의 뱃속에는 새로운 아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 아기의 이름이 무엇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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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동기들과의 술자리는 재밌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편했다. 그랬다. 영화보기와 비슷했다. 그들과 내가 나누는 직장 이야기와 학교 이야기는 어떤 동심원을 그리며 뱅뱅 돌고 있었다. 가운데에 있는 어떤 것들을 터뜨리기는 모두들 불안해했다. 다만 그 주위를 맴돌며, 떨어진 부스러기들만 이야기하고 있었다. 가끔 촛불집회나 용산참사나 정부의 정책과 같은 민감한 주제들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누구도 그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아했다. 우리 모두 그 이후에 이야기하게될 어떤 것, 그것에 대해 확신이 없었던 탓이다.

집에 오는 길에 다시 그 지하철 역에 들어섰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몇 개의 전단지들이 아직 눈에 띄었다. 무리지어 있는 학생들은 모두 어디론가 가버린 후였다. 이들 중 몇몇은 한 10여년 쯤 후에 자신이 오늘 나눠주었던 전단지의 내용을 기억하고 있을까. 그들은 10년 후 술자리에서 어떤 세상을 말하고, 어떤 이야기들을 하고 있을까. 그들이 10년 후에 할 이야기는 오늘 우리가 한 이야기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임을 안다. 그래서 나는 조금 슬프지만, 안도한다. 


- 2009년 2월, 필름포럼

  1. 이는 왠지 자위 행위를 연상시킨다. 자위는 쾌락과 함께 일종의 죄책감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영화 중간에 지숙의 자위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고는 아무도 없는 영화관에서 혼자 발그레해졌다. [본문으로]
  2. 이외에도 질문은 너무 많다. 예를 들어 이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미국의 의미는 무엇인가, 재문과 예준의 관계는 어떻게 볼 수 있는가(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라는 포스터 문구), 지숙은 예준을, 혹은 예준은 지숙을 처음부터 욕망하고 있었는가, 그랬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등등 [본문으로]
  3. 감독은 이 계급성 부여에 너무 강박감을 가진 게 아닐까. 이 인물들은 너무 전형적으로 행동하고 사고한다. 그리고 가끔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지숙이 그렇다. 아무 가진 것 없이 미국으로 건너간 지숙은 돌아온 후 어떻게 우아한 '원장님'이 될 수 있었을까. [본문으로]
  4. 그래서 이 질문도 가능하다. 왜 예준은 조루증인가? 혹은 감독은 왜 굳이 예준을 조루증으로 묘사했는가? 혹은 조금 더 재밌는 질문으로는, 왜 권위적인 사람들 중에는 의외로 조루증이 많은가? [본문으로]
  5. 이 마지막 장면은 나에게는 사족으로 읽힌다. 지숙이 하이힐을 벗어던지고 텅빈 거리를 허위허위 걷던 그 전 장면이 마지막이 되는 편이 훨씬 희망적이고 좋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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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09.02.14 03: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각주 달기 연습..그러나 한 번 달고 나면 줄간격은 왜 이 모양이 되는 걸까?

<작전명 발키리>, 브라이언 싱어

Ending Credit | 2009.02.02 16:18 | Posted by 맥거핀.



(스포일러 있음)


브라이언 싱어는 솔직한 감독이다. 이번주 <씨네 21>에 실린 인터뷰에서 브라이언 싱어는 말하고 있다. "중요한 건 이 영화가 전기영화가 아니라 서스펜스 스릴러라는 거다." 역사에 기록된 실패한 작전. 이 작전을 영화화하고자 했을 때 브라이언 싱어는 선택을 해야했을 것이다. 역사의 재현인가, 역사의 제거인가. 감독이 선택한 건 후자였고, 그 후자의 극대화였다.

글쎄. 이들을 어떻게 봐야할까. 히틀러를 죽이고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던, 슈타펜버그(독일식으로 '슈타우펜베르크'라고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대령과 그의 동지들. 영화에 묘사된 대로, 그들은 전쟁의 피해를 줄이고, 역사적 범죄자인 히틀러를 죽이고, 정의를 되살리려다 희생당한 영웅들인 걸까. 어쩌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이들이 거사를 실행했던 1944년 7월, 독일은 침몰하고 있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동부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1944년 6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으로 전세는 단숨에 역전되었다. 독일은 구멍이 뚫린 배였고, 침몰이 서서히 가까이 오고 있다고 배에 탄 사람들은 느끼고 있었다. 슈타펜버그와 그의 동지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전쟁이 이대로 끝난다면 전범(戰犯)이 되어 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되거나 그 전에 권총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겨냥해야 할 운명이었다. 어쩌면 그 전에 살아남겠다는 의지가 더욱 강했던 것은 아닐까. 영화에도 나오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히틀러를 죽이고 나치 정부를 전복한 후 연합군과 휴전을 맺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조급해한다. 연합군이 그들을 필요로 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연합군이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전쟁을 끝낸다면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없었으니까. (영화의 엔딩 자막에 그들 이후로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시도는 없었다고 말한다. 그들의 영웅성을 강조하는 말 같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들이 그들 스스로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기회는 그 이후에 거의 없었으니까.) 그들은 어쩌면 한편으로 침몰하는 배에서 빨리 탈출하려고 하는 쥐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브라이언 싱어는 이러한 해석을 단호히 거부한다. 아니 이러한 해석을 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영화의 시작, 슈타펜버그 대령(톰 크루즈)은 비망록을 적고 있다. 반(反) 히틀러의 결연한 의지.  이 의지에는 어떤 인간적인 고뇌나 의심은 묻어나지 않는다. 나치당의 일원으로서 전쟁에 참가하였던 슈타펜버그 대령은 왜 반 나치 전선에 서게 된 것일까. 영화는 이를 묻지 않는다. 대령은 이것이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그보다는 어떤 더 큰 대의를 위한 것임을 비망록에 적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브라이언 싱어는 이를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보여줄 뿐이다.

이는 왠지 슈타펜버그 대령이 비망록을 적으며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다지는 것처럼, 브라이언 싱어도 결연한 의지를 다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는 단순한 역사의 재현이 아니라고. 아마도 그가 이러한 선택을 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선택인 것 같다. 영리한 브라이언 싱어는 이 영화를 성공시키려면 역사를 제거하고, 그 작전을 마치 하나의 허구적 사실처럼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나는 브라이언 싱어가 이 작전을 왜곡시키고, 거짓말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아무런 고뇌없는 인물을 그리는 이 시작이 역사물의 외연을 두른 탈역사물이기에 의아해하고 있는 중이다.) 왜냐하면 이는 실패한 작전이니까. 여기서의 역사의 재현이란 결국은 실패한 작전임을 잘 알고 있는 많은 관객들에게 그의 실패의 체험을 고스란히 바라보게 하는 무기력의 경험이니까. 그보다는 서스펜스의 극대화라는 자신의 장기를 드러내보이는 것이 브라이언 싱어에게는 좋은 선택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리고 브라이언은 예의 그 장기를 드러내보였고, 관객들은 결말을 알면서도 혹시 성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마지막까지 바라보게 된다. (이 시작 부분에서 독일어로 진행되던 영화는 갑자기 영어로 바뀐다. 적국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대화하는 독일 장교들이라. 허구를 쓰겠다는 브라이언 싱어의 선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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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브라이언 싱어가 역사를 제거하기 위하여 쓴 전략은 어딘지 모르게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그의 전략은 슈타펜버그 대령을 신화화(化)하는 것이다. 발키리 작전의 다른 장교들과는 달리 슈타펜버그 대령은 시종일관 확신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확신이 사실을 그대로 그린 것이라면, 이 확신이야말로 이 작전의 결정적인 장애였다고 생각하고 싶다.) 이 확신은 그를 조금씩 인간이 아닌 신화의 영역으로 끌어올린다. 그리고 그의 신화는 마지막에 이르러 장엄하고 영웅적인 죽음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혹 그것으로 모자랄까봐 감독은 엔딩 자막으로 이 신화에 토핑을 올린다. 신화화함으로써 역사를 제거하기. 어쩌면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라면 이를 필연적이라고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두 가지가 의미심장하다.

하나는 브라이언 싱어의 <엑스맨>, <슈퍼맨 리턴즈>와 같은 전작들. 결함을 가지고 있으나 그를 극복하고 승리를 성취해내는 영웅들의 모습. 그것은 슈타펜버그 대령에게도 그대로 투영된다. 전쟁에서 한 쪽 눈과 한 쪽 팔과 세 개의 손가락을 잃은 전쟁영웅. 그러나 그가 이를 극복하고(그가 히틀러를 만날 때마다 가짜눈알을 집어넣는 것은 일종의 고귀한 의식(儀式)으로 보이기도 한다.) 작전을 실행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묘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또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야말로 기이하기도 하다. 굳이 불구인 그에게 이 위험한 작전을 맡기는 것이 말이다. 이 작전과 모종의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되는 객관적인 현실주의자'사막의 여우' 롬멜은 히틀러 암살 공모자들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필 이렇게 심한 상처를 입은 전쟁 부상병을 선택했다"는 것에 질책을 가했다고 한다. - 마우리체 필립 레미 <롬멜>) 더구나 이 슈타펜버그 대령을 연기하는 인물은 톰 크루즈이다. 확신에 찬 미소를 가지고 있는 제복이 잘 어울리는 남자. 신화화된 슈타펜버그 대령을 연기하기에 이보다 더 적당한 배우가 있을까.
 
그런 면에서 이 영화의 제목이자 작전명인 '발키리'는 의미심장하다. 북유럽 신화에서 용감한 전사자의 영혼을 천계로 인도하는 발키리(Valkyrie). 그것은 명백하게도 슈타펜버그 대령의 상징이다. 결국 슈타펜버그는 작전의 실패와 함께 그와 그의 동지들의 영혼을 고스란히 천계로 데려갔으니까. (영화에서 슈타펜버그는 먼저 총살되는 동지에게 "잠시 후에 만나자"고 한다.) 그러나 뭐가 어찌되었던 간에 '발키리'도 결국은 신화 속의 인물이다. 즉 브라이언 싱어는 슈타펜버그 대령을 신화의 하나로 봐주기를 계속적으로 항변하는 중이다. 

그런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신화화 전략은 어딘지 모르게 석연치 않다. 이 신화화야말로 나치즘의 중요한 거점 포인트였기 때문이다. 나치주의자 혹은 파시스트들은 신화가 가진 힘을 알고 있었다. 파시즘(나치즘)이 신화의 세계를 개척했던것은 부분적으로는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신화의 세계를 비합리적인 요소로 가득한 불가해한 영역으로 보아 단념했던 데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신화의 세계를 개척함으로써 나치즘 혹은 파시즘은 대중적 호소력을 지닌 이미지와 상징들을 활용할 수 있었다. (마크 네오클레우스 <파시즘>) 신화화된 세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앞장선 한 남자의 행동을 그리는 데에 신화화의 전략을 사용한다- 나의 석연치 않음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그러고보니 화면가득 줄지어 나부끼던 나치 깃발이 다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당연한 반응 아닌가! 나 역시 그 시절의 광경이 미학적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브라이언 싱어 <씨네 21 689호> 인터뷰) 브라이언 싱어의 다음 영화가 궁금해진다.


- 2009년 2월. 단성사

TAG 파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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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질링 (Changeling), 클린트 이스트우드

Ending Credit | 2009.01.25 03:48 | Posted by 맥거핀.



(스포일러 아주 가득함)






글쎄. 무엇을 얘기해야 할까?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와 맥주를 한 캔 마시고, 비스듬히 누워 핸드볼 경기를 보았다. 그러나 경기를 보면서도 줄곧 머리 속으로는 영화를 생각하고 있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들은 모호한 상징이나 느슨한 알레고리, 혹은 꼬인 이야기로 머리를 아프게 하지는 않는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명확하며, 주인공들이 부딪히는 지점도 비교적 명확하다. 그러나 그 영화들은 도중에 조금씩 관객을 끌어당겨 결국 일정 지점에 이르러 모호한 어떤 방으로 관객을 내몰고는 살짝 문을 닫아버린다. 그러면 관객은 깜깜한 방 안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멍한 머리로 엔딩 크레딧을 바라본다. 이것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기이하다. 그저 맥주 맛이 살짝 쓰게 느껴질 정도로 기이하다.

영화가 2시간 정도에 이르렀을 때, 영화는 마무리의 수순을 밟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당한 형사는 영구 정직당하고, 경찰청장은 해임되고, 살인마는 사형을 언도받고,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되었던 안젤리나 졸리(극중이름은 크리스틴이나 이하 졸리로 쓰겠음)는 이제 재판정에 앉아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 보통의 할리우드 영화라면, 여기서 끝내야 한다. 안젤리나 졸리가 변호사와 손을 맞잡고 울음을 터뜨리고, 옆에서 플래시가 터지는 아름다운 결말. 그러나 이 영화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가 아닌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기어이 나머지 장면들을 채워넣고, 화장실에 가고 싶어하는 많은 관객들의 희망을 무너뜨린다. 졸리는 살인마를 찾아가고, 그의 사형을 지켜본다. 그리고 아이 한 명은 살아 돌아와 부모 품에 안기고, 졸리는 '희망'을 이야기하며 영화를 끝낸다. 이것은 나를 멍하게 만들고, 질문을 하게 한다. 왜 이 장면들이 필요한 것인가? 모든 관객들은 이미 그 살인마가 사형을 당할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스트우드는 굳이 그 장면을 꼼꼼하게 관객들에게 지켜보도록 한다. 그리고는 월터의 용감함을 이야기하며 졸리의 '희망'을 이끌어내고 영화를 끝낸다. 이제서야 희망이 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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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시작부분에 졸리가 아들 월터에게 하는 말이 있다. "네가 먼저 싸움을 시작하지는 말아라. 그러나 시작된 싸움은 네가 끝내라." 그리고 이 말은 영화 중반에 다시 한 번 반복된다. 글쎄. 왠지 몇 년 전에 이스트우드로부터 이와 비슷한 말을 들은 것 같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늙은 관장 프랭크는 매기에게 여러 번 반복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네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싸움은 피할 것. 그러나 싸움이 시작되었으면 네 자신을 보호할 것. 자신을 보호하지 못한 싸움은 결국 자신이 끝내지 못하는 싸움이다. 매기는 결국 이 원칙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싸움을 끝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졸리는 싸움을 끝냈는가. 이 질문은 아마도 이렇게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졸리는 자신을 보호하였는가.

물론 여기에는 하나의 요소를 고려하여야 한다. 그 싸움은 공정한 싸움인가. 사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매기는 자신을 보호하려 최대한 노력했다. 매기가 자신을 보호하지 못한 순간은 불공정하게 진행된 순간이었다. 공이 울리고 매기의 승리가 확정된 순간에 상대는 펀치를 날렸다. 그리고 매기는 쓰러졌다. 한편 졸리는 어떤가. 졸리 역시 매우 불공정한 위치에 서 있다. 졸리는 하나의 도시라는 거대한 시스템에 맞서야 한다. 그래서 졸리 역시 쓰러진다. 정신병원에 갖히고, 강제로 약을 먹어야 하고, 급기야는 침대 위에서 치료를 가장한 전기 고문을 당해야 하는 위치에까지 온다. 그렇다면 졸리 역시 이 거대한 불공정한 싸움의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인 걸까. 불공정한 싸움에서 개인은 보호될 수 없는 것일까.

이 극적인 순간에서 졸리는 이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승리한다. 그러나 이 승리는 어쩐지 조금은 이상한 방식으로 찾아온다. 졸리를 구해내는 것은 한 장의 신문이다. 그 순간 우연히도 살인마가 잡혔고, 살인마의 공범이 월터를 알아보았고, 결국 졸리의 말이 입증되는 것이다. 즉 이 승리는 졸리 내부에서 온 승리가 아니라, 외부에서 가져다 준 승리다. 우연으로 빚어진 승리. 결국 이 승리로 부당한 형사는 정직되고, 경찰청장은 해임되면서 시스템이 살짝 무너지지만, 이 승리로 졸리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이 승리가 덧없음은 어쩌면 이 장면으로 말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승리한 졸리에게 변호사(목사였나?)가 찾아와 월터가 죽었으니 그만 잊어버리라고 말한다. 졸리는 아직 월터가 살아있을 것이라고 믿는다며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항변하지만, 그는 아마도 하늘나라에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글쎄. 이와 비슷한 장면을 우리는 처음에도 보았다. 졸리는 데려온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형사는 그것은 그녀의 착각이라고 일축했다. 결국 그녀가 승리한 이후에도 월터의 생사는 여전히 모호하며, 그녀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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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아마도 이 두 장면이 필요할 것이다. 졸리는 살인마의 전보를 받고 살인마를 찾아가 그에게 진실을 말하라며 다그친다. 이 죽음 며칠 전의 졸리와의 대면 순간에도 여전히 궤변을 늘어놓던 살인마는 교수대가 눈앞에 보이고서야 죽음의 공포에 떨며 삶을 구걸한다. 그리고 졸리는 강인하고 단호한 태도로 그것을 지켜본다. 옆에 서 있는 부인의 손까지 잡아주며 말이다. 이는 부당한 시스템의 공격 속에서 우연으로 가져온 승리와는 다르다. 졸리는 기꺼이 살인마를 찾아가고 그의 최후를 지켜본다. 그녀는 이제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몇년 후 극적으로 살아난 한 소년은 죽음과 삶의 교차하는 순간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았던 월터의 모습을 증언한다. 그리고 졸리는 그제서야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계속 끝까지 아들을 찾아다녔다는 그녀의 마지막 이야기가 자막으로 올라가며 영화는 끝난다.

이 마지막 두 장면은 영화가 그 이전에 끝났으면 가져오지 못했을 새로운 희망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그 희망은 불공정한 시스템에 맞서서 얻은 승리로 주어진 게 아니다. 즉 졸리가 변호사와 손을 맞잡고 울음을 떠뜨리고, 옆에서 플래시가 터지는 아름다운 결말로서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그것은 승리와 패배가 모호한 이 세계에 맞서는 개인의 자유의지이며, 옆 부인의 손을 잡아주는 졸리의 손이며, 되돌아와 철조망에서 소년의 발을 꺼내준 월터의 뒷모습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공화당 지지자이면서도 이라크 전쟁은 반대하는, '건전한 보수주의자'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는지 모르겠다. 이스트우드는 아직 '매그넘 44'를 내려놓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불필요한 두 뱀다리를 끼워넣겠다.

뱀다리 1.
졸리는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러 같이 가자는 제의를 뿌리치며, 다른 사람들은 후보작 중 <클레오파트라>를 작품상 으로 꼽았지만, 자기만은 <어느 날 밤에 생긴 일>이 작품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라디오로 시상식을 듣는 졸리. 작품상은 <어느 날 밤에 생긴 일>이었다. 아들이 아직도 살아있을 것이라고 믿는 졸리가 옳다는 암시가 아닐까. 그냥 한 번 끼워맞춰 봤다.

뱀다리 2.
왠지 이 영화를 보면서 MB 정부와 미네르바가 생각났다. 얼마 전 뉴스를 보니 검찰 관계자는 누가 미네르바인지는 상관 없다고 말했다. 하기는. 이제 누가 미네르바인지 뭐가 중요한가. (나는 진짜 미네르바가 따로 있다고 말한 적은 없어요. 이거는 유언비어 아니죠? -_-) 누가 진짜 미네르바인지 따지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동안 검찰과 정부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정부의 말이 옳고 미네르바의 모든 말들은 유언비어라는 인식을 국민들에게 심어주었고, 더불어 사이버 모욕죄의 신설에도 탄력을 받았으며, 덕분에 인터넷에서 글 좀 쓴다는 논객들은 몸을 사리게 되었다. 월터가 진짜인지 아닌지가 경찰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엄마가 아니라고 아무리 우기건 말건, 일단은 실적을 올려 시민들에게 경찰이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게 중요하니까. 
그러나 이 이야기는 1920년대의 LA이야기이다. 지금 여기는 2009년의 시대이고 말이다. 시계 바늘을 뒤로 돌리는 능력. 그거 하나 만큼은 누가 이들을 따라 가겠는가.


- 2009년 1월, 단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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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www.realfolkblues.co.kr BlogIcon 아쉬타카 2009.01.27 14: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아직 매그넘을 내려놓은 것 같지 않더군요.
    감상기 잘 보았습니다~

굿바이 칠드런, 루이 말

Ending Credit | 2009.01.16 19:02 | Posted by 맥거핀.

(스포일러 있음)

그들의 마지막은 주인공 줄리앙의 입을 통해 몇 마디의 나레이션으로 설명된다. 그리고 관객들의 한숨과 함께, 영화는 끝나고, 슈베르트의 피아노 선율이 울리며 엔딩크레딧이 올라간다. 영화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 음악은 가정도 이루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죽었던 슈베르트의 생애와 겹쳐져 관객을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 마침내 엔딩크레딧도 끝나고 관객들은 무거운 마음을 안고 자리에서 일어나게 된다. 무거움과 한숨. 이는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가.

무기력함의 공유

영화는 두 소년의 우정을 담담한 어조로 시종일관 그리고 있다. 여기에는 어떤 영화적인 수식이나 그럴듯한 사건은 없다. 두 소년은 보통의 소년들이 그러하듯이 한 두 가지의 비밀을 공유하며 친해지다가도, 금새 자존심을 내세우며 말다툼을 벌이기도 하고, 때로는 그 말다툼은 주먹다짐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가 중반을 넘어가며 이 이야기가 1944년의 프랑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과 주인공 중의 한 명인 보네가 유태인 소년이라는 것을 관객들이 알게 되면, 관객은 다가올 파국을 예감하게 된다. 두 소년이 살고 있는 조그마한 세계의 바깥에 도사리고 있는 이 위험은 엔딩이 다가오기 전까지 조금씩 이 두 소년 곁으로 다가오지만, 이 파국은 이 두 소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결말이다. 일이 이렇게 되리라는 것은 주인공 보네도 알고 있다. 보네는 담담하게 짐을 싸며 줄리앙에게 말한다. "언젠가는 잡힐 줄 알았어."

이 마지막을 어쩔 수 없이 바라보아야만 하는 것은 줄리앙과 보네 뿐만이 아니다. 스크린 밖의 관객들도 마찬가지다. 영화가 중반을 넘어가면서 관객은 줄리앙과 함께 보네의 비밀을 공유하게 된다. 이 때부터 관객은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저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바라보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영화의 중반부 관객은 한 차례의 위기의 순간을 경험한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게 된 줄리앙과 줄리앙의 엄마와 형, 그리고 보네. 여기에 일단의 군인들이 나타나 신분증을 검사하기 시작한다. 이곳은 유태인이 출입할 수 없도록 금지되어 있는 곳. 이들은 한 유태인 노신사를 발견하고 그를 다그치기 시작하고 관객은 점점 불안해진다. 다음 차례가 보네가 되지 않을까. 그러나 관객은 무기력하다. 그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조용히 그들이 지나가기를 바랄 뿐. 다행히 한 독일 군인의 객기로 사태는 무사히 종결되지만, 관객은 서서히 그들의 무기력함을 알아차리기 시작한다. 식당 안의 다른 손님들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 무기력함은 영화의 엔딩에 정점에 이른다. 줄지어 선 소년들은 잊을 수 없는 한 순간을 경험하지만, 그 경험은 오롯이 관객들에게도 전이된다. 무기력함과 공포. 그들에게는 친구를 구하고 싶은 심정과 살아남고 싶다는 심정이 교차하지만, 그 순간 실제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저 가는 친구의 손을 한 번 잡아주거나, "잘 가세요. 신부님."을 외치는 정도. 이 경험은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관객은 순간 스크린 속으로 들어가 그 소년들을 데리고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램일 뿐이다. 스크린 밖의 관객의 지독한 무기력감. (개인적으로는 아오야마 신지의 영화 <헬프리스>에서 이런 심한 무기력함을 느낀 적이 있다.)

이 무기력함은 필연적으로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과 죽은 자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연결된다. 그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그래서 그들의 죽음에 대해 우리가 어떤 책임이 있다는 그런 생각. 그래서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쓰는 것이 가능한가?"라고 물었고, 우리 나라의 많은 작가들 역시 "광주 이후에 문학이 가능한가?"라고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때로 이 무기력함과 죄책감은 자기합리화로 이어지기도 한다. 죄책감을 가지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행동에 대해 합리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많은 사람들은 '침묵의 카르텔'을 유지함으로써 유태인들에 대한 대량학살을 방조했다. 그리고 그들 중의 일부는 이 '침묵의 카르텔'과 자신들의 이성을 일치시키기 위하여 유태인들과 자신들을 애써 분리시키고, 유태인들이 탐욕스럽고, 자신들밖에 모르는 존재들이라 사라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믿었다. (이 영화에도 몇몇 이러한 장면들이 있다. 위의 식당 장면에서 줄리앙의 엄마는 친척들 중에 유태인이 있다는 사실을 애써 부인하려 한다. 소년들의 부모들이 함께하는 미사 도중 신부가 부자들의 탐욕과 허위의식을 지적하자, 예배당을 가득 메운 아이들의 부모들- 아마도 그 중 대부분은 부자일 것이다. 전쟁 도중에 그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려면 말이다. -은 웅성거리고, 그 중의 몇몇은 자진해서 퇴장하기도 한다.)

무기력함의 이후는

결국 비밀을 공유하면서 시작된 주인공들과 관객들의 공유 의식은 엔딩 장면에서의 무기력함의 공유로 이어진다. 이 순간을 어쩌면 영화라는 공적체험이 관객 개개인의 사적 체험으로 전이되는 순간이라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고보니 <굿바이 칠드런 An Revoir Les Enfants>라는 제목이 심상치 않다. 이 말은 떠나는 신부가 아이들에게 전해 주고간 마지막 말임과 동시에 스크린 밖의 관객들의 입장에서는 스크린 속의 아이들에게 겨우 던져줄 수 있는 마지막 말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3인칭인 '칠드런 Les Enfants') 그렇다면 지독한 무기력의 체험 이후는, 즉 엔딩크레딧 이후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아마도 두 갈래의 길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이해하는 것. 그러나 홀로코스트에서 겨우 살아남은 프리모 레비는 그 때의 경험을 이야기한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정당화하는 것과 같'다고. 인간의 의도와 행동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원학적으로도) 그것을 수용한다는 것, 즉 그 행동의 주체를 수용하고, 그의 입장이 되어보고, 그와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이다. 이의 반대편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마도 거기에 줄리앙의 꿈이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줄리앙은 오줌싸개이다. 번번이 꿈을 꾸다가 침대보를 더럽히곤 한다. 그가 보네에게 들려준 이유는 간단했다. 꿈 속에서 시원하게 오줌을 누는데, 꿈에서 깨어나보면 현실이 그렇게 되어 있다고. 꿈과 현실의 연결. 꿈에서의 행동으로부터 이어지는 현실에의 결과. 이것을 관객들에게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스크린과 현실의 연결. 스크린에서 벌어나는 일과 비슷한 일들이 관객 각자의 현실에서도 여러 다른 양상으로 일어난다. 그것을 이해하려들지 말고 스스로가 행동하고 싶은 대로 행동으로 옮길 것. 그것이 스크린 속의 소년들과 스크린 밖의 관객들을 무기력함으로부터 구원하는 일이다.

- 2009년 1월. 광화문 씨네큐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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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09.03.14 22: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꽤 오래전에 본 영화인데 여기서 줄리앙 형의 여자친구로 이렌 쟈콥이 나왔었죠. 학교에서 피아노 선생님으로 나왔던가요? 보네는 피아노연주를 잘 했던 것 같고 줄리앙은 자꾸 실수를 했던 것같구요. 슈베르트의 '악흥의 순간' 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 오늘 우연히 이곳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종종 찾겠습니다. ^^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09.03.15 11: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반갑습니다.
      음..그 아리따운 처녀가 누군가 했더니 이렌 쟈콥이었군요. 맞아요. 보네가 줄리앙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신도 있었던같기도 하구요.
      종종 뵙지요.^^

이스턴 프라미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Ending Credit | 2008.12.30 02:23 | Posted by 맥거핀.




(1급 경고: 스포일러 만땅)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을 보며 멍해졌다. 영화가 끝나고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어쩌면 배가 고파서 일지도 몰랐다. 시간이 안 맞아 영화관에서 핫도그를 하나 허겁지겁 먹고 들어갔는데, 안 먹느니만 못한 거였다. 영화관에서 파는 음식들은 겉보기에 비해 대체로 터무니없는 맛과 가격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날씨가 추워서인지도 모르겠다. 올해 들어 가장 추운 날씨라는 위세를 부리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어쨌든 간에 아무튼 멍하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었다. 무엇이 이처럼 멍하고 두렵게 만드는 것일까.


1. 기독교와 예수의 탄생
아마도 이렇게 말하는 건 쉬운 선택이 될 것이다. 이미 <필름 2.0>에서 논증한대로, 이 영화는 기독교의 여러 알레고리들을 느슨하게, 때로는 옥죄이며 펼쳐 보인다. 그 중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물론 아기 예수의 탄생 이야기. 뭐 일단 <이스턴 프라미스 Eastern Promises>라는 제목 부터가 박해받는 유대인 백성들을 동방에서 온 메시아가 구원할 것이라는 성경 말씀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니콜라이의 몸에 새겨진 수많은 문신들, 그건 왠지 카타콤의 여러 표지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일견 이러한 연결은 안이하고 도식적이며 조금은 기이해 보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피를 흘리며 들어온 여자가 낳는 아기가 예수의 상징이라고 보았을 때, 이 아이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영화 속에서는 동정녀 마리아와 마찬가지로, 이 여자도 동정녀로서 이 아이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악의 축 '세미온'이다. 이것은 왠지 이 도식이 간단하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가지게 해준다. 다시 한 번 처음으로 돌아가 아버지가 '악의 중심'이라면, 이 아이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2. 몸
크로넨버그의 영화에서는 항상 몸이 먼저였다. 그 몸을 가진 인간이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보다는 몸 자체의 부피와 무게와 질감으로 항상 우리를 압박해왔다. 이제 이 영화에서, 그 몸은 다시 한 번 그가 살아온 모든 것이 되었다. 러시아 감옥에서는 자기가 살아온 인생을 문신으로 온 몸에 남긴다. 그리고 결국 그 문신들에는 또다른 문신들이 새겨진다. 깊게 패인 칼자국들이.

이것이 무게감이 느껴지는 것은 크로넨버그의 전작들에서 유래된 바도 크지만, 한편으로 이것이 앞으로의 우리 인간들을 말해 준다고 생각하면 불온한 상상인걸까. 우리들 역시 많은 문신들을 온 몸에 지니고 있다. 그 문신들은 잉크로 명징하게 새겨져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대신 명징한 로고들로 자신의 몸을 칭칭 감는다. 그리고 그것을 잃을까봐 잠자리에서도 전전긍긍한다. 이건 어쩌면 크로넨버그의 미래에 대한 묵시록인지도 모른다.


3. 세계의 충돌
명확한 두 세계가 충돌한다. 안나의 세계와 세미온의 세계. 두 세계는 분리되어 있지만,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오토바이를 타고 조금만 가면 닿는 가까운 세계. 그리고 안나는 누르지말아야 할 초인종을 누르고 또다른 세계의 문을 연다. 여기에서 세계의 충돌이 일어난다. 물론 세계의 충돌은 여기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하다 못해 아스날과 첼시의 세계에서도 충돌은 끊임없이 일어난다. 사람들은 경기장을 나오며 목이 터져라 각자의 응원가를 부르고 구호를 외친다. 영화에서 보여지는 대로.

그리고 니콜라이의 안에서도 충돌은 일어난다. 그는 이 운명을 감내해야 할 처지에 있다. 왜냐하면 그는 양 쪽 모두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한 쪽 세계에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다른 쪽 세계를 부정해야 한다. 그 부정(否定)은 단순한 부정이 아니다. 그 부정은 자신의 근본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가 조직에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정부의 개라고, 어머니는 창녀라고 말해야 한다. 그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그가 원하는 대로 한 쪽 세계를 차지했을 때, 그는 반대쪽 세계로 나올 수 있을까. 아니 그 상태에서는 반대쪽 세계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는 이미 하나의 세계를 구축했는데.


4. 세계의 혼합
그래서 바로 여기 니콜라이에서부터 세계는 서서히 혼합되기 시작된다. 아니 그 혼합은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부분을 영화는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의 처음, 살인이 일어나는 공간은 누구나가 쉽게 드나드는 이발소이다. 평범하고도 선한 세계의 어디에나 있는 이 공간은 그러니까, 악이 진두지휘되는 공간인 셈이다. 여기에서 머리를 깎아주는 무딘 칼은 목으로 파고드는 날이 선 칼이 된다. 동시에 구슬픈 선율이 울려퍼지고, 가족들이 함께 모여 서로 식사하는 러시아 식당은 모든 악의 시발점이자 종착점이 된다. 즉 굳이 안나가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열어젖히지 않았어도 또다른 안나가 아마도 쉽게 문을 열었으리라는 것이다.

이 세계의 혼합의 중심에 니콜라이가 있다. 그가 악의 세계의 우두머리에 올라섰을 때, 우리는 그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선의 중심이자 악의 중심인 세계. 그게 바로 우리가 사는 세계이다.


5. 영국
영화 내내 보여지는 영국의 거리는 차갑고, 젖어 있고, 음울하다. 고색창연한 건물들과 영국 특유의 날씨는 잘 어우우려져 영화 내내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영화 <프롬 헬>이나 <스위니 토드>에서 보는 그러한 거리들의 연장선상에서 위의 영화들과 비슷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습한 지옥도의 풍경이라고 하면 과장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시체가 내던져지는 그 곳은 지옥의 입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넘실대는 물결은 마치 일렁이는 불꽃같고 말이다. 오 주여.

아기를 낳고 죽어간 그 여자는 러시아를 떠나 이곳으로 왔다. 그녀가 일기에 쓴 대로 모두가 죽어 있던,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던 땅속의 땅, 러시아를 떠나 따뜻하고 새로운 기회의 땅, 새로운 신천지를 꿈꾸며. 아마도 그녀는 지중해의 따뜻한 햇살을 그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끌려온 이곳 영국은 또다른 차갑고 축축한 지옥이다. 안타깝다. 차갑고 어두운 곳을 지나 새롭게 오게 된 곳이 그만큼,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그보다 몇 배는 더 차갑고 어두운 곳이라니.

니콜라이는 안나에게 말한다. 여기에서 아기를 키우는 것이 낫다고. 러시아보다는 이곳에서 당신이 키우는 것이 낫다고.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따스한 햇빛 속에서 아이는 안나에게 안긴다. 그러나 이 마지막에 이어지는 장면은 기이하고 무섭다. 니콜라이는 세미온이 앉아있던 바로 그 자리에 앉아 있고, 여자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린다. 아버지는 이미 죽기 전부터 죽어 있었다고(탄광에서), 그리고 우리 모두는 죽어 있었다고. 그리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간다.

이는 왠지 불길한 요한계시록의 목소리인 것처럼 느껴진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곳 역시 선의 중심이자 동시에 악의 중심인 세계. 가까운 곳에 또다른 이발소와 러시아 식당들이 있는 세계. 이 세계에서 아기는 어디로 가게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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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간에 아무튼 멍하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었다. 올해 본 영화 중 N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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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수오 마사유키

Ending Credit | 2008.12.16 02:10 | Posted by 맥거핀.



난 언젠가부터 법을 싫어했다. 글쎄,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잘못된 판결로 피해를 본 경험도 없고, 주위의 아는 친척이 소송을 당한 후, 판사와 변호사 간의 결탁으로 부당한 판결을 받았고 그 후에 자살에 이르렀다는 식의 드라마틱한 스토리는 더더구나 없다. 아무튼 간에 말이다- 법을 싫어했다.

그래서 그랬을까. 대학시절 '법학개론' 수업의 최종 기말 레포트 주제는 '법의 필요성에 대해 논하시오' 였는데, 나는 온갖 이상한 논리를 가져다 붙인 끝에 법은 곧 사라져야만 마땅하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뻔뻔스럽게도 우쭐해져서는 그걸 제출했다. 글쎄. 아마도 다른 걸 쓰기도 어지간히 귀찮았겠지만, 한편으로는 이로써 법에 대한 소극적 저항을 한다는 이상 심리도 거기에 들어가 있음을 부인하지는 못하겠다. 아무튼 나의 이 삼류 최후 진술을 들은 판사는 기꺼이 C학점의 판결을 내려주었고, 나는 항소는 포기하고, 그 강사는 고시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변태들 같이 생겼다는 둥, 평생 강사나 해먹고 살으라는 둥의 같은 악담을 술자리에서 늘어놓는 것으로 울분을 삼켰었던 것 같다.

아무튼 이로써 나의 법에 대한 언페어한 태도는 더욱 심해졌는데, 급기야는 고시 공부하는 친구들을 불러내서는 술을 사준다는 핑계로 취조를 행하기도 했다. 너 말야. 왜 멀쩡한 전공 놔두고 고시 공부를 하고 있는거야. 니가 법을 좋아해. 뭐. 공정한 판결. 웃기는 소리 하지마. 니가 다른 사람을 단죄할 수 있다고 생각하냐. 니가 고시 공부하는 건 딱 하나 이유밖에 없잖아. 그냥 잘 먹고 잘 살고 싶은거지. 사회에서 대접받으면서. 너 같은 썩어빠진 생각을 가지고 있는 녀석이 무슨 다른 사람을 심판한다는 거야. 웃기지마.

물론 이 말들은 공정하지 못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는 이야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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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제목만으로도 이미 명확하게 그 주제를 내비치고 있는 이 영화는 혹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제를 깨닫지 못할까 저어하는 감독의 친절한 배려로, 시작부터 결론을 내리고 시작한다. 열 사람의 죄인을 놓치더라도, 한 사람의 죄없는 사람을 벌해서는 안된다는. 그리고 시작에서 예고한대로, 한 선량한 청년이 성추행범으로 몰려 부당한 판결을 받게되기까지의 과정을 환부에 메스를 들이대듯, 세밀하게 드러내보인다.
 
그러나 미리 말해두지만, 이 영화는 그 과정을 결코 공정하게 묘사하지는 않는다. 글쎄, 과연 공정함이란 무엇인가라는 형이상학적인 질문은 제쳐두고라도, 그럼 이렇게 묻고 싶을 것이다. 영화가 공정할 필요가 있는가. 영화는 지극히 편파적인 주제를 편파적으로 묘사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물론 나도 그걸 부인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이 영화 역시 지극히 편파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편파적임을 교묘하게 숨기려고 하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정말 불공정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잘못된 판단으로 한 사람의 죄없는 사람을 벌하게 되는 것과, 죄 있는 자에게 속아 넘어가 죄있는 자를 벌하지 않는 것 중의 어떤 것이 더 큰 문제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도 어려운 일이거니와, 그 문제까지 여기에 가져오고 싶지는 않다. 사법제도의 폐해? 영화의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 그런 것을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이 영화는 줄곧 하나의 관점을 지지하고 있는데, 그 관점이 마치 공정한 관점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일견 주인공 텟페이를 관찰하는 시점을 취하고 있다. 주인공 텟페이가 사건에 휘말릴 때, 그리고 경찰에 붙잡힐 때, 그리고 유치장과 법원을 오갈 때, 카메라는 한 걸음 물러서서 이 모든 사건을 조용히 바라보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 카메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카메라다. 카메라는 실제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준다. 바로 텟페이가 실제 사건에 휘말리는 그 순간. 실제라면, 우리는 절대 그 순간을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카메라는 전철에 따라들어가 기어이 그 장면을 잡아낸다. 이는 판사라면 절대 볼 수 없는 장면이다. 우리가 실제의 이 사건의 판사라면 무죄를 내릴 수 있을까.

게다가 주인공 텟페이는 카세 료가 맡고 있다. 유약하고 선량한 청년의 이미지가 다시 이 영화에서 비슷하게 활용된다. 여기에 판사의 교체 전 후의 극명한 대비, 목격자가 나타나는 극적인 시점, 착하고 힘없는 주인공 텟페이의 어머니와 친구들이 더해지며 이 영화는 선량한 청년을 범죄자로 만드는 비극물이 된다. 즉 텟페이라는 착하고 성실하며, 아무 죄없는 청년을 법이라는 국가 시스템이 판사와 국선변호사와 경찰이라는 하수인을 이용하여 무너뜨리는 것이다. 아 이 얼마나 슬프고도 가슴아픈 이야기인가.

그러나 이 슬프고도 가슴아픈 이야기를 이 영화는 마치 다큐멘터리를 찍듯이 보여준다. 어쩌면 여기에 가장 기이한 점이 있다. 극적이고도 화려하게 이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실제의 사건을 다루는 양 이를 보여주는 태도.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해두지만, 이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그러면서도 다큐멘터리인 척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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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면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것이 이런 얘기일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비극적인 일이 실제로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는 것 말이다. 우리 삶에도. 그것이 이 영화를 다큐멘터리처럼 찍은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저 상대방의 말은 절대로 듣지 않으려 드는 악마같은 판사, 그냥 죄를 인정하는 것이 낫다고 심드렁하게 얘기하는 국선변호인, 어떻게든 죄를 인정하게 만들려는 폭력적인 경찰. 이들은 모두 과장된 캐릭터이지만, 이 시스템 속에 이 과장된 캐릭터들은 실제로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감독은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묻는다. 당신이 판사라면 무죄를 내려줄 것인가. 글쎄. 나라면 그러지는 못할 것 같다. 그것이 아마도 이 영화의 가장 무서운 점이다. 그것이 실제로 만들어진 이 사회의 시스템이기에. 

그래서 아마도 나는 옛날의 친구에게 다시 이렇게 말해야만 할 것 같다. 너는 누군가를 심판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아마도 그건 거짓일거야. 너는 그저 수많은 정보를 가지고 판단을 내리는 정보처리기계일 뿐이지. 그것도 불확실한 판단을 내리는.

물론 이것은 또 하나의 불공정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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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물론 나는 감독에게 낚인 것이고, 그냥 파닥거리면 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왠지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입 안에 물린 갈고리에서 쓴 맛의 피가 솟아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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