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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턴 프라미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Ending Credit | 2008. 12. 30. 02:23 | Posted by 맥거핀.




(1급 경고: 스포일러 만땅)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을 보며 멍해졌다. 영화가 끝나고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어쩌면 배가 고파서 일지도 몰랐다. 시간이 안 맞아 영화관에서 핫도그를 하나 허겁지겁 먹고 들어갔는데, 안 먹느니만 못한 거였다. 영화관에서 파는 음식들은 겉보기에 비해 대체로 터무니없는 맛과 가격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날씨가 추워서인지도 모르겠다. 올해 들어 가장 추운 날씨라는 위세를 부리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어쨌든 간에 아무튼 멍하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었다. 무엇이 이처럼 멍하고 두렵게 만드는 것일까.


1. 기독교와 예수의 탄생
아마도 이렇게 말하는 건 쉬운 선택이 될 것이다. 이미 <필름 2.0>에서 논증한대로, 이 영화는 기독교의 여러 알레고리들을 느슨하게, 때로는 옥죄이며 펼쳐 보인다. 그 중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물론 아기 예수의 탄생 이야기. 뭐 일단 <이스턴 프라미스 Eastern Promises>라는 제목 부터가 박해받는 유대인 백성들을 동방에서 온 메시아가 구원할 것이라는 성경 말씀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니콜라이의 몸에 새겨진 수많은 문신들, 그건 왠지 카타콤의 여러 표지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일견 이러한 연결은 안이하고 도식적이며 조금은 기이해 보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피를 흘리며 들어온 여자가 낳는 아기가 예수의 상징이라고 보았을 때, 이 아이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영화 속에서는 동정녀 마리아와 마찬가지로, 이 여자도 동정녀로서 이 아이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악의 축 '세미온'이다. 이것은 왠지 이 도식이 간단하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가지게 해준다. 다시 한 번 처음으로 돌아가 아버지가 '악의 중심'이라면, 이 아이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2. 몸
크로넨버그의 영화에서는 항상 몸이 먼저였다. 그 몸을 가진 인간이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보다는 몸 자체의 부피와 무게와 질감으로 항상 우리를 압박해왔다. 이제 이 영화에서, 그 몸은 다시 한 번 그가 살아온 모든 것이 되었다. 러시아 감옥에서는 자기가 살아온 인생을 문신으로 온 몸에 남긴다. 그리고 결국 그 문신들에는 또다른 문신들이 새겨진다. 깊게 패인 칼자국들이.

이것이 무게감이 느껴지는 것은 크로넨버그의 전작들에서 유래된 바도 크지만, 한편으로 이것이 앞으로의 우리 인간들을 말해 준다고 생각하면 불온한 상상인걸까. 우리들 역시 많은 문신들을 온 몸에 지니고 있다. 그 문신들은 잉크로 명징하게 새겨져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대신 명징한 로고들로 자신의 몸을 칭칭 감는다. 그리고 그것을 잃을까봐 잠자리에서도 전전긍긍한다. 이건 어쩌면 크로넨버그의 미래에 대한 묵시록인지도 모른다.


3. 세계의 충돌
명확한 두 세계가 충돌한다. 안나의 세계와 세미온의 세계. 두 세계는 분리되어 있지만,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오토바이를 타고 조금만 가면 닿는 가까운 세계. 그리고 안나는 누르지말아야 할 초인종을 누르고 또다른 세계의 문을 연다. 여기에서 세계의 충돌이 일어난다. 물론 세계의 충돌은 여기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하다 못해 아스날과 첼시의 세계에서도 충돌은 끊임없이 일어난다. 사람들은 경기장을 나오며 목이 터져라 각자의 응원가를 부르고 구호를 외친다. 영화에서 보여지는 대로.

그리고 니콜라이의 안에서도 충돌은 일어난다. 그는 이 운명을 감내해야 할 처지에 있다. 왜냐하면 그는 양 쪽 모두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한 쪽 세계에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다른 쪽 세계를 부정해야 한다. 그 부정(否定)은 단순한 부정이 아니다. 그 부정은 자신의 근본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가 조직에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정부의 개라고, 어머니는 창녀라고 말해야 한다. 그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그가 원하는 대로 한 쪽 세계를 차지했을 때, 그는 반대쪽 세계로 나올 수 있을까. 아니 그 상태에서는 반대쪽 세계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는 이미 하나의 세계를 구축했는데.


4. 세계의 혼합
그래서 바로 여기 니콜라이에서부터 세계는 서서히 혼합되기 시작된다. 아니 그 혼합은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부분을 영화는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의 처음, 살인이 일어나는 공간은 누구나가 쉽게 드나드는 이발소이다. 평범하고도 선한 세계의 어디에나 있는 이 공간은 그러니까, 악이 진두지휘되는 공간인 셈이다. 여기에서 머리를 깎아주는 무딘 칼은 목으로 파고드는 날이 선 칼이 된다. 동시에 구슬픈 선율이 울려퍼지고, 가족들이 함께 모여 서로 식사하는 러시아 식당은 모든 악의 시발점이자 종착점이 된다. 즉 굳이 안나가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열어젖히지 않았어도 또다른 안나가 아마도 쉽게 문을 열었으리라는 것이다.

이 세계의 혼합의 중심에 니콜라이가 있다. 그가 악의 세계의 우두머리에 올라섰을 때, 우리는 그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선의 중심이자 악의 중심인 세계. 그게 바로 우리가 사는 세계이다.


5. 영국
영화 내내 보여지는 영국의 거리는 차갑고, 젖어 있고, 음울하다. 고색창연한 건물들과 영국 특유의 날씨는 잘 어우우려져 영화 내내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영화 <프롬 헬>이나 <스위니 토드>에서 보는 그러한 거리들의 연장선상에서 위의 영화들과 비슷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습한 지옥도의 풍경이라고 하면 과장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시체가 내던져지는 그 곳은 지옥의 입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넘실대는 물결은 마치 일렁이는 불꽃같고 말이다. 오 주여.

아기를 낳고 죽어간 그 여자는 러시아를 떠나 이곳으로 왔다. 그녀가 일기에 쓴 대로 모두가 죽어 있던,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던 땅속의 땅, 러시아를 떠나 따뜻하고 새로운 기회의 땅, 새로운 신천지를 꿈꾸며. 아마도 그녀는 지중해의 따뜻한 햇살을 그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끌려온 이곳 영국은 또다른 차갑고 축축한 지옥이다. 안타깝다. 차갑고 어두운 곳을 지나 새롭게 오게 된 곳이 그만큼,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그보다 몇 배는 더 차갑고 어두운 곳이라니.

니콜라이는 안나에게 말한다. 여기에서 아기를 키우는 것이 낫다고. 러시아보다는 이곳에서 당신이 키우는 것이 낫다고.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따스한 햇빛 속에서 아이는 안나에게 안긴다. 그러나 이 마지막에 이어지는 장면은 기이하고 무섭다. 니콜라이는 세미온이 앉아있던 바로 그 자리에 앉아 있고, 여자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린다. 아버지는 이미 죽기 전부터 죽어 있었다고(탄광에서), 그리고 우리 모두는 죽어 있었다고. 그리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간다.

이는 왠지 불길한 요한계시록의 목소리인 것처럼 느껴진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곳 역시 선의 중심이자 동시에 악의 중심인 세계. 가까운 곳에 또다른 이발소와 러시아 식당들이 있는 세계. 이 세계에서 아기는 어디로 가게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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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간에 아무튼 멍하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었다. 올해 본 영화 중 N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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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수오 마사유키

Ending Credit | 2008. 12. 16. 02:10 | Posted by 맥거핀.



난 언젠가부터 법을 싫어했다. 글쎄,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잘못된 판결로 피해를 본 경험도 없고, 주위의 아는 친척이 소송을 당한 후, 판사와 변호사 간의 결탁으로 부당한 판결을 받았고 그 후에 자살에 이르렀다는 식의 드라마틱한 스토리는 더더구나 없다. 아무튼 간에 말이다- 법을 싫어했다.

그래서 그랬을까. 대학시절 '법학개론' 수업의 최종 기말 레포트 주제는 '법의 필요성에 대해 논하시오' 였는데, 나는 온갖 이상한 논리를 가져다 붙인 끝에 법은 곧 사라져야만 마땅하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뻔뻔스럽게도 우쭐해져서는 그걸 제출했다. 글쎄. 아마도 다른 걸 쓰기도 어지간히 귀찮았겠지만, 한편으로는 이로써 법에 대한 소극적 저항을 한다는 이상 심리도 거기에 들어가 있음을 부인하지는 못하겠다. 아무튼 나의 이 삼류 최후 진술을 들은 판사는 기꺼이 C학점의 판결을 내려주었고, 나는 항소는 포기하고, 그 강사는 고시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변태들 같이 생겼다는 둥, 평생 강사나 해먹고 살으라는 둥의 같은 악담을 술자리에서 늘어놓는 것으로 울분을 삼켰었던 것 같다.

아무튼 이로써 나의 법에 대한 언페어한 태도는 더욱 심해졌는데, 급기야는 고시 공부하는 친구들을 불러내서는 술을 사준다는 핑계로 취조를 행하기도 했다. 너 말야. 왜 멀쩡한 전공 놔두고 고시 공부를 하고 있는거야. 니가 법을 좋아해. 뭐. 공정한 판결. 웃기는 소리 하지마. 니가 다른 사람을 단죄할 수 있다고 생각하냐. 니가 고시 공부하는 건 딱 하나 이유밖에 없잖아. 그냥 잘 먹고 잘 살고 싶은거지. 사회에서 대접받으면서. 너 같은 썩어빠진 생각을 가지고 있는 녀석이 무슨 다른 사람을 심판한다는 거야. 웃기지마.

물론 이 말들은 공정하지 못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는 이야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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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제목만으로도 이미 명확하게 그 주제를 내비치고 있는 이 영화는 혹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제를 깨닫지 못할까 저어하는 감독의 친절한 배려로, 시작부터 결론을 내리고 시작한다. 열 사람의 죄인을 놓치더라도, 한 사람의 죄없는 사람을 벌해서는 안된다는. 그리고 시작에서 예고한대로, 한 선량한 청년이 성추행범으로 몰려 부당한 판결을 받게되기까지의 과정을 환부에 메스를 들이대듯, 세밀하게 드러내보인다.
 
그러나 미리 말해두지만, 이 영화는 그 과정을 결코 공정하게 묘사하지는 않는다. 글쎄, 과연 공정함이란 무엇인가라는 형이상학적인 질문은 제쳐두고라도, 그럼 이렇게 묻고 싶을 것이다. 영화가 공정할 필요가 있는가. 영화는 지극히 편파적인 주제를 편파적으로 묘사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물론 나도 그걸 부인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이 영화 역시 지극히 편파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편파적임을 교묘하게 숨기려고 하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정말 불공정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잘못된 판단으로 한 사람의 죄없는 사람을 벌하게 되는 것과, 죄 있는 자에게 속아 넘어가 죄있는 자를 벌하지 않는 것 중의 어떤 것이 더 큰 문제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도 어려운 일이거니와, 그 문제까지 여기에 가져오고 싶지는 않다. 사법제도의 폐해? 영화의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 그런 것을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이 영화는 줄곧 하나의 관점을 지지하고 있는데, 그 관점이 마치 공정한 관점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일견 주인공 텟페이를 관찰하는 시점을 취하고 있다. 주인공 텟페이가 사건에 휘말릴 때, 그리고 경찰에 붙잡힐 때, 그리고 유치장과 법원을 오갈 때, 카메라는 한 걸음 물러서서 이 모든 사건을 조용히 바라보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 카메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카메라다. 카메라는 실제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준다. 바로 텟페이가 실제 사건에 휘말리는 그 순간. 실제라면, 우리는 절대 그 순간을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카메라는 전철에 따라들어가 기어이 그 장면을 잡아낸다. 이는 판사라면 절대 볼 수 없는 장면이다. 우리가 실제의 이 사건의 판사라면 무죄를 내릴 수 있을까.

게다가 주인공 텟페이는 카세 료가 맡고 있다. 유약하고 선량한 청년의 이미지가 다시 이 영화에서 비슷하게 활용된다. 여기에 판사의 교체 전 후의 극명한 대비, 목격자가 나타나는 극적인 시점, 착하고 힘없는 주인공 텟페이의 어머니와 친구들이 더해지며 이 영화는 선량한 청년을 범죄자로 만드는 비극물이 된다. 즉 텟페이라는 착하고 성실하며, 아무 죄없는 청년을 법이라는 국가 시스템이 판사와 국선변호사와 경찰이라는 하수인을 이용하여 무너뜨리는 것이다. 아 이 얼마나 슬프고도 가슴아픈 이야기인가.

그러나 이 슬프고도 가슴아픈 이야기를 이 영화는 마치 다큐멘터리를 찍듯이 보여준다. 어쩌면 여기에 가장 기이한 점이 있다. 극적이고도 화려하게 이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실제의 사건을 다루는 양 이를 보여주는 태도.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해두지만, 이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그러면서도 다큐멘터리인 척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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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면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것이 이런 얘기일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비극적인 일이 실제로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는 것 말이다. 우리 삶에도. 그것이 이 영화를 다큐멘터리처럼 찍은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저 상대방의 말은 절대로 듣지 않으려 드는 악마같은 판사, 그냥 죄를 인정하는 것이 낫다고 심드렁하게 얘기하는 국선변호인, 어떻게든 죄를 인정하게 만들려는 폭력적인 경찰. 이들은 모두 과장된 캐릭터이지만, 이 시스템 속에 이 과장된 캐릭터들은 실제로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감독은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묻는다. 당신이 판사라면 무죄를 내려줄 것인가. 글쎄. 나라면 그러지는 못할 것 같다. 그것이 아마도 이 영화의 가장 무서운 점이다. 그것이 실제로 만들어진 이 사회의 시스템이기에. 

그래서 아마도 나는 옛날의 친구에게 다시 이렇게 말해야만 할 것 같다. 너는 누군가를 심판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아마도 그건 거짓일거야. 너는 그저 수많은 정보를 가지고 판단을 내리는 정보처리기계일 뿐이지. 그것도 불확실한 판단을 내리는.

물론 이것은 또 하나의 불공정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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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물론 나는 감독에게 낚인 것이고, 그냥 파닥거리면 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왠지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입 안에 물린 갈고리에서 쓴 맛의 피가 솟아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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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시르와 왈츠를, 아리 풀만

Ending Credit | 2008. 12. 9. 00:23 | Posted by 맥거핀.


영화가 끝나고, 다른 일 때문에 재빨리 극장을 빠져나오면서부터, 줄곧 무엇인가 아음 한 구석이 불편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를 본 지 며칠이나 지났는데도, 이 영화 <바시르와 왈츠를>을 생각할 때마다 여전히 그 불편한 기억이 남아있다. 이 불편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무엇이 이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찜찜하게 만드는 것일까.

물론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이 영화는 이스라엘 방위대에 의해 저질러진 레바논에서의 팔레스타인 양민들 학살 사건을 다루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아우슈비츠나 광주나, 난징 혹은 코소보 등에서의 그러한 학살 사건들을 간접적으로 보거나, 듣게 될 때에 느끼는 감정들, 그의 연장선상들일 수 있다.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잔인하며, 비극적이고, 설명할 수 없는 그러한 사건들. 그러한 사건들을 보면서 가질 수 있는 인간들의 보편적인 인간성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나 타인에 대한 공포, 혹은 자신에 대한 공포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런 형이상학적인 질문만은 아닌 듯 하다. 무엇이 이렇게 불편하게 만드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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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그 보다는 훨씬 더 단순한 데에서 답이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는 가해자가 나중에 과거의 잘못된 일들을 영상이나 문학으로 펼쳐 보일 때, 그것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복잡한 감정의 한 부분일런지도 모르겠다. 이른바 소위 '용서를 구하는 방식' 그것에서 비롯되는 불편함. 

용서를 구하는 방식에도 물론 여러가지가 있다. 먼저 첫번째는 용서를 구하는 척 하며, 실질적으로는 본인도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잘못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나, 나도 어쩔 수 없이 그랬다고 주장하는 유형. 그리고 그래서 용서의 탈을 쓰고, 사실은 자기합리화라는 얼굴을 들이미는 유형. '통석의 념' 일명 니뽄스타일. 이것은 사실 용서 구하기라고 보기 어려우니 일단 패쑤. 그럼 이건 어떨까.

가해자가 과거의 사건을 직접적으로 거론하며,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당사자들에게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구하는 방식. 그리고 피해자의 용서의 결단, 그리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손 맞잡기. 그리고 물질적인 보상. 이른바 공식적이고도 방송적인 유형. 짝짝짝.

그러나 이를 한편으로 피해자의 시각에서 보면, 억울하기도 한 것이다. 그동안 겪었던 그 무참한 수많은 일들이 물질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일까. 떠올리기 싫은 옛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저 용서 구하기 라는 것은 한편으로 보면 가해자가 자신의 마음 편해지자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이른바 <밀양>의 억울함. 아니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죽은 자는 무엇으로 돌아온다는 것인가.

그래서 여기에서 가까운 데에 도사리고 있는 이 단어가 '용서'와 밀접하게 연결되는 것이다. '복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지극히 심플하고도 공평한 가르침.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수많은 복수담들과 그 복수담의 후일담들과 그 후일담들의 또다른 복수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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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바시르와 왈츠를> 같은 유형은 어떨까. 그러나 이는 왠지 모호한 구석이 있다. 영화는 감독 아리 풀만(실제 자신의 이야기를 쓴 것인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처럼 쓴 것인지는 모르겠으나)이 레바논 전쟁에서 겪었던 일들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음을 떠올리는 데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아리는 옛 전우들, 그리고 전쟁에 참여했던 다른 사람들, 종군 기자 등을 만나며, 그것이 그 때 자신이 가졌던 어떤 임무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가 결국에는 기억을 찾았다는 그런 이야기.

물론 이 이야기는 한 남자의 기억 되찾기가 중심을 이루는 이야기는 아니다. 한 남자의 심리학적 임상 사례를 다루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러나 왠지 그렇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한 남자가 기억을 잊어버렸어. 근데 왜 그랬는지 알아? 그건 심리적인 외상을 입었기 때문이야. 그런 심리적인 외상은 대체로 극단적인 상황에 빠졌던 사람들이 겪곤 하지. 왜 있잖아. 아우슈비츠에 갇혔던 사람들이 거기에서 나온 후 몇몇 부분들에 대한 기억을 영원히 잃어버린다고 하지. 근데 말이야. 그런 심리적인 외상은 피해자만 입는 것도 아니야. 때로는 가해자가 그런 심리적인 외상을 겪기도 하지, 아 그럼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인 건가. 뭐 그런 이야기.

물론 이는 부당한 공격인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에는 몇몇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제목이 의미하는 바시르와 왈츠를 장면이라던가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영화관에서 직접 보시길), 무엇보다도 충격을 주는 마지막 장면들. 그러나 그런 몇몇 인상적인 장면들을 제외하면, 군인들은 해변가에서, 혹은 배 위에서 딩가거리며 놀다가 임무를 받고 적에게 진격하고, 퇴각하고, 폭발하고, 총을 맞고, 총을 쏘고, 떠뜨린다. 아 그게 군인의 임무라고? 명령을 받으면 해야하는 군인의 임무라고? 그래서 그러지 말자고, 이런 영화 만드는 것 아니냐고? 다시는 그러지 말자고 이런 영화 만드는 것 아니냐고...

그러나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아무리 울어도. (물론 당연한 말이지만 복수한다고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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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아가씨, 박정숙

Ending Credit | 2008. 11. 30. 22:22 | Posted by 맥거핀.


다큐멘터리, 게다가 독립 다큐멘터리. 마치 이는, 이 영화의 감독인 박정숙 감독이 다른 인터뷰에서 말한 촬영 대상으로서의 여성 노동자를 연상시킨다. 노동자라는 것의 약한 위치, 게다가 여성.

이런 조건이라면, 사람이 많이 들기를 기대하는 것은 애당초 무리겠지만, 그래도 나름 프라임 시간대라는 토요일 오후 7시의 인디스페이스는 민망할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개봉 2주차임을 감안하더라도, 조금 심했던 것이, 관객은 나와 여자친구 단 둘 뿐. 덕분에, 여자친구는 혹시 상영안하는 것 아니냐며, 불안하게 주위를 둘러보았고, 나는 극장 직원이 사람 수를 확인하러 들어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어색한 표정을 지어보여야만 했다.



나는 대체로 영상보다는 활자를 신뢰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영상보다는 그것을 기록한 것이 훨씬 더 많은 것을 대상자에게 전달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영상은 상상력을 제한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글을 읽을 때에 머리 속으로 만드는 가상의 세계. 그 가상의 세계는 같은 글을 읽더라도 모든 사람들에게 조금씩 다르게 그려진다. 그러나 그것이 영상화가 되어 나타날 때, 그 영상화는 우리의 상상력을 하나의 방향으로 제한한다. 그래서 어쩌면 소설을 영화화한 많은 작품들이 그 소설을 감명깊게 읽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실망감을 주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그러나 다큐멘터리, 더구나 이런 이야기 만큼은 영상이 활자를 압도한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백마디의 말보다 충격적인 한 장의 사진이 사건의 많은 부분을 설명한다. 이행심 할머니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파오지만, 오그라든 손과 발은 다른 모든 말들을 압도한다. 그래서 아마도 다큐멘터리에서 항상 그런 부분들이 이야기될 것이다. 카메라는 대상을 어떻게, 어떤 느낌으로 바라보는가. 영상은 무엇을 담고 있는가.



격리. 이행심 할머니의 증언대로, 일제시대부터 한센병 환자에 대해 정부 및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던 시각은 치료가 아닌 격리였다. 쓰레기를 치우듯, 더러운 어떤 것을 가둬놓는 것. 치료를 해서 낫게 해주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더러운 것이니 결국은 씨를 말려야 할 존재.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서야, 일제 시대부터 그들에게 부과된 힘든 노동들과 차별어린 시선들과 급기야는 아이를 못 낳게 하고 키우지 못하게 하는 일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래서 할머니가 아이를 빼앗기고 주저앉아 '그 때까지 남아 있던' 손가락으로 풀을 쥐어뜯었다고 말하는 대목은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것을 조금은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들 마음 속의 인간성에 대한 격리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했을 때에만 그러한 시선들과 인식들이 가능해지리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한센병 환자들을 인간이 아닌 다른 어떠한 것으로 보는 시선, 따라서 그들은 영혼도 생각도 없는 존재들이며, 독을 퍼뜨리는 존재일 뿐이다라는 인식. 지나친 말처럼 느껴지는가? 그러나 한편으로 이 나라 어딘가에서는 주위에 장애인 아동들이 다니는 학교만 들어서도 시위가 일어나는데, 이를 지나친 말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러한 시선들과 인식들과 이 영화는 정면으로 맞서 싸우고 있다. 맞서 싸우는 방식은 간단하다. 이들도 인간임을 다시 일깨우는 것. 할머니가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고, 남편과 농담을 하고, 농작물을 다듬고, 차에 올라타고 하는 일상의 수많은 장면들. 그리고 스크린 안에서 보여지지 않은 그들의 한숨과 분노와 눈물들. 이 수많은 장면들은 지극히 당연한 진리를 다시 우리들에게 일깨운다. 그들도 인간이라는 것. 그래서 이 영화는 결국에는 묻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게 될 때에,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는가. 그리고 지금은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모든 다큐멘터리들은 현재 진행형이다. 다큐멘터리가 현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한은 그렇다. 물론 영화 내용적으로 보자면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보상 문제는 아직 진행 중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일제시대 강제 격리와 노동에 대한 일본 법정에의 청구, 그리고 아마도 그 뒤로 이어져야 할 한국 정부에 대한 보상 신청.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일본 변호사들에 비해, 우리나라 변호사들은 뭐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조금 더 넓은 의미로 보자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인식의 장벽들이 아직은 높기 때문이다. 아직도 널리 퍼져 있는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적대적이고도 차별적인 시선, 그러한 시선들이 장벽을 이루고 있는 한 이 영화의 싸움은 계속 현재 진행형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모든 다큐멘터리들은 현재 진행형임과 동시에 그것이 관객들의 행동을 변화시킬 때 최종적으로 완성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행동 변화라고 해서 거창한 것만은 아닐 게다. 작지만 커다란 인식의 변화부터가 그러한 것들일 게다.

그래서 결국은 어떤 의미에서 이 이야기는 스크린에서 보여지지 않은 것들이 덧붙여질 때 완성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로 이 영화를 조만간 작은 인디스페이스에서가 아니라 토요일 저녁 7시 브라운관에서 만나게 되기를 희망한다.



행복할 행(幸)자에 마음 심(心)자를 쓰시는 이행심 할머니. 그 이름 그대로 앞으로 행복한 마음으로 사시게 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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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미인 Let The Right One In, 토마스 알프레드손

Ending Credit | 2008. 11. 23. 23:11 | Posted by 맥거핀.



(늘상 그렇지만, 스포일러 있음)


날은 어둡고, 눈은 끊임없이 흩날리고, 새는 낮게 하늘을 선회하고, 어디선가 낯선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북구의 어느 밤. 피가 모두 어디론가로 사라진 채 죽어 있는 남자는 눈이 녹아 흘러내리는 하수구 옆 도랑에 버려져 있다. 목에는 작은 이빨 자국만 남겨진 채.


이러한 이야기는 사실 이제 너무도 많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의 피를 먹어야만 살 수 있는 뱀파이어라는 존재. 그리고 그의 천형과도 같은 운명. 그 잔인하면서도, 스산한, 그러면서도 묘한 에로티시즘을 발산하는 그런 이야기들. 그러나 이런 이야기라면 어떨까? 그 뱀파이어가 어린 소녀이고, 그 옆 집에는 세상 누구와도 쉽게 소통을 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 소년이 살고 있다면. 이런 작은 설정에서 출발한 이 영화는 때로는 예상되는 지점에서, 그리고 더 자주는 아주 뜻밖의 지점에서 보는 이들의 마음을 건드린다.



영화의 제목은 <렛미인 Let The Right One In>. 영화에서도 설명되지만, 뱀파이어는 그 곳의 누군가가 초대해 주어야지만 그곳에 들어갈 수 있다. 바로 이 제목은 그를 설명하고 있는 셈인데, 이 설정은 조금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이 영화는 (당연한 말이겠지만) 다른 여러 뱀파이어를 다룬 문학이나 영화들에게서 많은 부분을 빚지고 있다. 즉 다른 영화의 클리셰들이 이 영화에서도 계속 반복된다는 것인데, 예를 들어 뱀파이어는 햇빛을 보면 안된다거나, 뱀파이어에게 물린 자는 뱀파이어가 된다는 설정 등이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초대해 주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는 설정이 다른 영화나 문학에 있었던가? 아니 그건 그렇다치고, 초대받지 않고 들어간 뱀파이어는 몸의 곳곳에서 피를 토해내게 된다라...

물론 이와 비슷한 것은 다른 이야기들에도 있을 것이다. 뱀파이어는 결국 인간이 아닌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동물일수도, 괴물일수도, 혹은 악마일수도 있다. 그러나 이 피를 토해내게 된다는 설정이 자못 의미심장한 것은, 뱀파이어는 피를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피는 뱀파이어에게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 (뱀파이어 소녀 '이엘리'는 피를 담은 통을 놓고 온 아버지에게 소리친다. 어떻게 그것을 놓고 올 수 있냐고. ) 

어떤 의미에서 뱀파이어의 '피'와 같은 것을 인간의 입장에서 대입해 보면 '마음'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무엇일까?) 물론 피와 달리 인간의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때로 마음이 눈에 보일 때도 있다. 우리가 누군가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내어 놓아야(드러내 보여야) 한다. ('이엘리'의 온 몸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것처럼) 그리고 대부분의 인간들은 누군가의 마음을 갈구한다. 뱀파이어가 피를 갈구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물론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에 이빨 자국을 내어 그것을 빨아들일 수는 없다. 그것이 가장 슬픈 점이다. 또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고 그렇게,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하던 소년 '오스칼'은 뱀파이어 소녀 '이엘리'에게 마음을 건넸고, 뱀파이어 소녀 '이엘리'는 기꺼이 자신의 피를 건넸다.



영화의 마지막, (뭐 아마도 그럴 수 밖에는 없겠지만) 소년과 소녀는 멀리 길을 떠난다. 해피 엔딩이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너무 스산한 풍경이다. 기차 커튼은 열려진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으로 흩날리고, 기차 안에는 그들 외에는 어떤 승객도 찾아볼 수 없다. 이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세상의 끝으로. 누구도 그들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은 갈 수가 없다. 왜냐하면 (다시 또 당연한 말이지만...;;) 뱀파이어는 다른 사람의 피를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멀어지려고 하나, 다른 사람과 멀어져서는 살 수 없는 존재. 그것이 바로 뱀파이어의 가장 슬픈 점이다. 또 어떤 의미에서는.

(아마도 이 부분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존재가 '이엘리'의 아버지일 것이다. 다른 사람과 최대한 거리를 유지하며 살려고 하나, 그럴 수 없는 존재. 영화의 시작부에서 여러 '장비'들을 능숙하게 재빨리 챙기는 그의 손놀림은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많은 우리네 아버지들을 연상시켜 마음을 아프게 한다. 아버지들은 늘상 말하지 않는가. 이 일을 때려치우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건, 마누라와 자식새끼 때문이라고.)

그래서 그들은 검게 시작된 엔딩 크레딧이 서서히 붉은 빛으로 변해갈 때, 마지막 붉은 빛이 화면에서 사라졌을 때 즈음에는 또다른 곳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날은 어둡고, 눈은 끊임없이 흩날리고, 새는 낮게 하늘을 선회하고, 어디선가 낯선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북구의 어느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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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 그리고 <이리>

Ending Credit | 2008. 11. 14. 01:54 | Posted by 맥거핀.

녀석은 힘들다 했다. 회사는 경제불안과 환율상승과 지도력부재로 이미 어려움에 빠진 상태였고, 더구나 그 녀석은 회사에 다소간의 빚도 들어가 있었다. 회사는 미끄러지는 중이었고, 그 녀석 역시 그 미끄럼틀에 올라탄 채였다. 그걸 알아차린 나는 이야기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이야기는 순식간에 수능날이라는 데서 97년 수능이야기로 옮아갔고, 덕분에 녀석과 나는 필요 이상의 몇 가지 정보를 알게 되었다. 내가 그 녀석보다 수능 점수가 8.2점이 좋았다는 것에서부터, 그날 날씨가 상당히 추웠다는 것까지. 그리고,지금은 어딘가에서 아이를 키우고 있을 시끄러운 여학생에서부터,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결혼해버린 동기의 이야기까지, 몰라도 좋을, 그러나 알았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 없는 그런 이야기들을.
나는 녀석에게 필요 이상의 이야기들을 들은 값으로, 그러나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필요 이상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값으로 술값을 치렀다. 그리고 우리는 껄끄러운 친구를 불렀다. 아니, 다시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껄끄러운 친구를 불렀다. 나는 녀석이 껄끄러워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어느 정도는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즐김의 한계는 딱 그 친구에게 전화를 하는 것까지 였다. 그친구가 진짜로 오겠다고 했을 때, 나는 보리의 쓴 맛을 다시 되새기고 있었다. 나는 심지어 내가 그 녀석보다 수능 점수가 8.2점이 앞섰다는 것까지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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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이야기는 반복된다. <중경>의 쑤이는 성인용품점에 들어가고, <이리>의 태웅 역시 성인용품점에 들어간다. 몇 십년만에 옛 친구를 만난 할아버지의 옆에서 신기하게 그들을 바라보는 진서, 그 옆으로 할머니들이 '이별의 부산정거장'을 부르며 지나가고, 벤치에서 자신이 따귀를 때렸던 창녀에게 지친 손을 내밀던 쑤이 옆으로는, 마을 주민들이 '인터내셔널 가'를 부르며 지나간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이 외에도 많은 부분에서 동일한 장면들이, 동일한 느낌으로, 동일한 카메라 워킹으로 반복된다. 단지 이 두 이야기는, 즉 <중경>과 <이리>는 같은 주제를 같은 느낌으로 반복해서 찍은 것에 불과하단 말인가. 결국은 같은 이야기의 또다른 변주란 말인가.

물론 다른 부분은 있다. 동일한 듯 하지만, 두 이야기는 하나의 대구를 이루고 있다. 예를 들어서 <중경>의 쑤이는 점점 자신의 몸을 일부러 더럽히는 쪽을, 자신의 몸을 일부러 다른 이에게 내주는 쪽을 택하지만, 그 몸은 계속 다른 이에게 거부 당한다. 예를 들어, 한국인 유학생 김광철은 그녀에게 자신의 몸을 확인하게 하며, 노숙자는 그녀가 겁탈하려고 할 때(이것은 겁탈이라고 말할 밖에는...), 그녀의 뺨을 세차게 때린다. 그리고, 경관 역시 그녀의 몸을 거부하고, 커다란 Doll을 껴안는다. 그리고 그녀는 그 대신, 즉 그의 성기 대신에, 그의 성기를 닯은 물건인 총기를 소유한다. 
반대로 <이리>의 진서는 대신에 자신의 몸을 지키려고 하나, 그 몸은 계속 유린 당한다. 이리역 폭발사고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진서, 그녀에게 단 하나 정상으로 남아 있는 몸은, 바로 그 정상으로 남아 있다는 이유 때문에 약탈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장률 감독의 다른 영화의 변주와 마찬가지로, 공간의 이야기를 커다랗게 확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제목 <이리>('익산'이 아니라), 그리고 <중경>이 상징하는 것처럼, <이리>의 속성, 그리고 <중경>의 속성을 그냥 그 도시에 살고 있는 개인들에게 커다랗게 투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익히 잘 알고 있겠지만, '이리'는 1977년 폭발사건 이후로 폭발 이후의 어떤 것, 폭발 이후의 허무함과 슬픔과 잿더미를 상징하는 어떤 것으로, 말할 수 있으며, '중경'은 폭발 직전의 어떤 도시, 그리고 우연하게도 이 영화가 촬영된 직후, 대지진으로 알려진 도시로 상정할 수도 있다. 그리고 각각의 두 영화의 여자캐릭터, 즉 진서와 쑤이는 폭발 이후의 남겨진 후유증을 상징하는 삶과, 폭발 이전의 끈적하고 불안한 삶을 상징하는 캐릭터로 볼 수도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도 생각나는 것이 있다. 어렸을 때 할머니 댁에는, 시골집들이 대개 그러듯이 여러 신문지들로 벽이 발라져 있었다. 그 중 안방벽을 둘러싼 신문들 중에 그 사건 몇 주 후 그 기차 기관사 미망인을 인터뷰한 기사가 있었다. 기사의 내용은 그런 내용이었다. 사건 며칠 후 남편을 찾아, 역에 찾아갔으나 남편의 흔적을 찾을 수 조차 없었다고. 그러나 유일하게 사건 현장에서 남편의 귀로 추정되는 어떤 '조각'을 발견했다고. 아마도 나는 계속 '귀로만 남은 남편(혹은 비슷한 제목의)'이라는 그 통속적이고도, 실존적인 기사를 꽤나 열심히 읽었던 것 같다.) 
그러나 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그렇다면 결국 이 영화들은 폭발 이전의 삶과 폭발 이후의 삶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는, 캐니한 삶의 또다른 증명에 불과한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몇몇 부분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리>의 태웅과 진서, 그리고 <중경>의 쑤이는 모두 죽으려고 하나, 죽지 못한다. 다시 한 번 반복해 말하지만, 그들을 둘러싸고, '이별의 부산정거장'과 '인터내셔널 가'가 흘러나온다. (도대체 '노래'라는 것의 효용은 무엇인가?) <이리>의 마지막 장면에서, 진서는 드디어 한국에 들어온 쑤이에게 또렷한 목소리로, 그리고 중국어로 '안녕하세요, 나는 진서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경에서 계속 반복되는 그 시구, 창가들을 들어보라. 결국은 세상은 슬프고, 어렵지만 그래도 나는 살아가겠다, 언캐니하게. 그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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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결국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고, 다시 필요 이상의 몇 가지 정보를 알게 되었을 뿐이다. 나는 그 친구 역시 회사에 염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역시 결혼하지 못한 또다른 친구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물론 중요하게 달라진 것은 없다. 나는 여전히 펀드들과 수수료와 언페어한 게임 때문에 정부를 증오할 것이고, 녀석은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는 미끄럼틀에 올라타 있을 것이고, 친구는 내일 아침에 공항으로 마중 나오라고 했던 비상식적인 분 때문에 분노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캐니한 삶에 친구가 달려와 준 덕분에 한 때나마 우리는 언캐니한 이야기를 했을 뿐이고, 다시 캐니한 삶에 올라탈 동력을 얻게 된 것 뿐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 번 술값을 치렀다. 경제력으로 따지면 그 친구가 치러야만 하겠지만. (물론 여기에는 <중경>과 <이리>에 바치는 값도 포함해서.-)

p.s. 나는 광폰지같이 경사각 15도 이내의 극장에서 정수리와 인중 사이의 거리가 30cm넘는 Big D(<흑사회>가 아니라 일명 '대두')가 D열 이내에 앉아, 머리를 메트로놈 삼는 것을 극렬 반대합니다. 더구나,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도중 '이 영화 정말 뭔데'라고 옆 사람에게 속삭이는 작자라면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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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헐크의 바지는 왜 결국 찢어지지 않는 것일까?

 

영화를 보고 종로거리를 걸어 나오며, 지금 여기에도 헐크가 나타나면 재밌지 않을까 하는 괜한 상상을 해봤다. 헐크가 나타나 거리 한가운데를 쿵쿵 걸어 다니는 그런 비주얼 말이다. 국회의원이라는 작자는 말 한마디로 길거리에 나선 100만의 국민들을 천민으로 만들고, LG 투수진은 한 게임에서 14개의 볼넷을 선물하고, 날씨는 슬슬 더워지고...하는 뜨겁고 질척질척하고 꽁기꽁기한 야만의 세계, 그런 세계 한 가운데에 헐크가 나타나,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아스트랄한 비명을 질러주면 무언가 낫지 않을까.

왜 슈퍼히어로물이 범람하는가? 라는 질문에, 개인 존재의 유한성과 그의 극복에의 희구에서 찾는 어떤 철학적인 이유를, 또는 세계의 강대국인 미국과 그의 주변국과의 관계에 대한 희미한 반영인 인문사회학적 이유를, 또는 어렸을 적부터 마블코믹스의 팬들이 어른이 된 후 다시 똑같은 소비를 반복하는 경제사회학적인 이유를 댈 수도 있겠지만, 생각보다는 사람들은 꽤나 단순한 것 같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여서, 그냥 단지, 나도 저러한 힘으로 오늘도 사람들과의 소통에 대해 골몰하시는 소통의 달인 ‘오해’ 이MB 선생님이라든가, 연장 일대일 동점에서 멋지게 에러를 범하시는 LG 모 선수를 날려버리고 싶다는 실현불가능하면서도, 실현불가능하기 때문에 열망하는 그런 상상을 가능케 해주는 하나의 감정이입의 도구로서 슈퍼히어로를 볼 뿐이다.

 

그러나 사실 이 친구 헐크, 아니 브루스 배너 양반은 참 그런 단순한 감정이입의 대상으로만 쓰고 날려버리기에는 꽤나 불쌍한 구석이 있다. 그까이꺼 하기 싫으면 때려 치우면 되는 배트맨이나 슈퍼맨, 아이언맨 등 다른 여타의 많은 슈퍼히어로들과는 달리, 이 친구는 하기 싫다고 안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일단은 아무리 안하려고 해도 화가 나면 어쩔 수 없다. 요즘 같은 세상에, 아무리 틱낫한 스님과 같이 화 다스리기 수행을 한다 해도 한나라당 주 모 의원이 100분 토론에 나와서 날리는 썩소 크리를 몇 번 보고나면, 그 치밀어 오르는 분노는 어찌 다스린단 말인가. 그리고 변하고 난 뒤 정상으로 돌아온 후 그 처참한 모습이라니. 도대체가 이것은 새벽 4시까지 술 마시고 지하철 바닥에서 토한 후 집으로 돌아와 쓰러져 잔 다음날의 모습이라든가, 전설의 박신양의 거지 신공(밑의 관련사진 참조)을 능가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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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브루스 배너 박사는 꽤나 소심남이다.  일단은 창백한 피부와 축처진 눈꼬리는 '내가 소심남이오'하는 말을 굳이 하지 않아도 관객 누구나에게 알 수 있게 해주거니와(이는 물론 항상 '소심 이미지'에서 급변하는 캐릭터를 많이 맡아왔던 에드워드 노튼의 캐릭터에 기댄 바도 있다), 영화 곳곳에서도 소심남적 면모는 잘 드러난다. 상대방을 멋지게 제압하고, 혹은 멋지게 제압하지 않더라도 기지와 재치를 발휘하여 적진으로 숨어드는 다른 캐릭터와는 달리, 사람좋은 웃음을 날리며 고작 피자 한 판으로 경비원을 회유하여 건물로 잠입(?)하는 모습이라던가, 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목격하고도, 일라이저에게 따귀맞고 방문 뛰쳐 나가는 캔디같은 폼으로 뛰어나가 쓰레기통 뒤에 숨는 모습이라니. 하기는 뭐 변한 뒤라고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사랑하는 여자를 안고 울부짖던 킹콩과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여자를 안고 괴로워하는 초록 헐크의 그 선량한 눈망울이라니. (글 옮기는 과정에서 이 문단이 누락된 것을 발견하고 뒤늦게 추가.-_-)     
                 
그의 이러한 소심남적 면모는 그가 싸워야 하는 대상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보는 하나의 방법으로 그의 적이 누구인가를 살펴보는 방법은 꽤나 추천할 만하다. 그것은 이MB의 적이 초중고딩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가능성 있는 논거가 된다.

여타의 다른 슈퍼히어로들이 조커에서 마그네토, 그린 고블린으로 이어지는 그럴싸한 적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헐크 역시 마지막에 <에이리언 VS 프레데터>를 연상시키는 혈전을 벌이며 적과 싸운다. 그러나 그 상대방이 헐크의 가장 큰 적수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헐크의 가장 큰 적은 자기자신이다. 변신하기 전 브루스 배너 박사가 그토록 원하는 것은 자기 안의 헐크를 제거하는 것이다. 지킬박사가 하이드를 없애버리기 위해 그토록 애를 쓴 것과 마찬가지로 브루스 배너 박사는 과학의 힘을 빌려 헐크를 제압하고자 한다. (물론 이는 한 가지 아이러니를 생각하게 한다. 과학의 힘으로 탄생한 헐크를 제압하기 위해 또다른 과학의 힘을 쓴다?) 이는 소심남들의 오래된 전통이었다. 소심남들이 원하는 것은 자기 안의 소심기(氣)를 없애는 것이다. 과학의 힘을 빌리든 아니든 말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얼토당토않은 부제의 답을 생각해 본다면, 답은 이미 나왔다. 그가 엄청난 소심남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해와 같이 넓은 마음으로 미국산 소고기와는 달리 미국산 청바지는 질이 좋기 때문에 그의 청바지가 고작 무르팍 좀 뜯어지고 허리만 좀 늘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려고 해도 그의 그 거대한 몸집을 생각해 본다면 이는 말이 안 된다. 여자친구가 사온 엄청난 신축성의 쫄바지도 단지 보라색이라는 이유만으로 거부하는 소심남 브루스 배너 박사. 그의 변신으로 바지가 터지게 되면 그의 소심한 마음까지 같이 터질 것을 염려한 신의 현명한 뜻인 게다. 변신에서 깨어난 후 축 처진 눈꼬리로 자신의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아랫도리를 바라보는 브루스 배너 박사. 생각만 해도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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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얼마만의 시리즈 부활인가. 작은 브라운관이 아닌, 거대한 스크린에서 해리슨 포드의 클로즈업 된 얼굴을 바라보는 느낌은 색다르다. 벌써 시리즈는 이어져, 4탄에 이르렀지만, 나는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다. 그도 당연한 것이, 이 영화의 마지막 3탄이 개봉했던 것은 1989년이고, 그로부터 벌써 2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영화관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어린아이는 어른이 되었고, 해리슨 포드는 꽤나 동작이 굼떠졌다. 아무튼 내 느낌 속에는 <인디아나 존스>는 TV에서 하는 ‘설 특선 영화’와 동급의 의미를 가진다. 보통의 주말에는 하지 않고, 설이나 추석이 되어야만 TV에서 인심 쓰듯 틀어주는 영화들. 그 영화들에는 사람을 기대하게 만들고, 몰입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고, 그 영화들을 놓치고 연휴를 보낸다는 것은, 꽤나 허전하고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런 영화들의 첫 머리에는 이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를 올려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에는 일종의 정형화된 패턴이 있다. 영화의 전체 맥락과 크게 상관없는 초반부의 추격씬이나 소동으로부터 시작하여, 곧 뭔가 알 수 없는 신비한 힘을 가진, 그리고 지금 어딘가에 묻혀 있는 보물이 소개되고, 인디아나 존스와 그의 조력자들은 이 보물을 찾으러 떠나고, 그와 동시에 이 소문을 전해들은 악당들도 이 보물을 쫓기 시작한다. 악당들과 인디아나 존스의 쫓고 쫓기는 추격씬과 복잡한 암호들이 관객을 지치게 할 무렵, 보물은 홀연히 등장하고, 이 보물은 온갖 소동 끝에 다시 묻히게 되고, 그 와중에 보물에 욕심을 부리다 악당들은 죽는다. 그리고 곧 인디아나 존스는 새로운 보물을 찾아, 혹은 다른 어떤 것을 향해 유유히 발길을 돌린다.

따라서 복잡한, 그러나 사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암호를 해독해야만 찾을 수 있는, 그리고 소유하게 되면 엄청난 힘을 가지게 해 준다는 이 보물에 필요 이상의 관심을 가지는 것은, 욕심을 부리다 죽게 되는 악당들과 마찬가지로 관객들에게도 어리석은 일이다. 보물은 어차피 그들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마련이고, 인디아나 존스가, 혹은 악당들이 그 보물을 소유해 그 무시무시한 힘을 휘두르는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는다. 물론 대다수의 관객들은 이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눈에 보이는 맥거핀에 기꺼이 입을 내민다. 그 맥거핀을 물지 않는다는 것은 이 인디아나 존스와 함께 하는 모험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맥거핀을 물고 꿀꺽 삼켰을 때만이 우리는 그 모험을 두 배 이상으로 즐길 수 있다.

그래서 사실 어쩌면 진짜 어리석음은 이 영화를 놓고, 제국주의적 시각이니, 인종차별적인 시각이니 하는 것일는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에서 쫓고 있는 대부분의 보물들은 제3세계의 어딘가에 묻혀 있으며, 그 보물들을 쫓고 있는 것은 제국주의적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일 뿐이며, 그 와중에서 희생되는 것은 유색의 원주민들뿐이다. 고고학 교수라는 이름으로 여러 보물들을 찾아다니고, 그 보물들을 사로잡기 위해 주위를 마음껏 파괴하는 인디아나 존스라고 얼마나 다르겠는가. 그도 어떠한 시각에서는 한낱 도굴꾼일 뿐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즐기러 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디아나 존스의 모험에 동참하고자 이미 알면서도 맥거핀을 꿀꺽 삼킨 사람들이다. 어차피 보물은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고, 그 동안 쫓고 쫓기는 신나는 활극에 시각적 쾌감을 느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 대다수의 것들은 스필버그의 유머 또는 조롱이 아니었던가. (이 영화는 미국과 러시아의 대립이 한창이던, 그리고 미국에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던 1957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반공산주의의 망령에 사로잡힌 정부기관 요원들이 인디아나 존스를 추격할 때 반공산주의 피켓에 부딪히던 것과 같은 그런 유머들. 그런 유머들은 어차피 이전 시리즈에서도 계속 반복되던 것들이다.)

 

따라서 우리 관객들은 그저 스필버그가 짜놓은 이 유쾌한 소동극을 지켜보며, 시각적 쾌감을 느끼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확실한 이 지점에서 개운치 않은 뒷맛이 남는다. 이제 더 이상 옛날의 설 특선 영화를 보면서 느끼던 쾌감이 오지 않는 것이다. 옛날의 시리즈물이 가지던 가장 큰 미덕은 아날로그 액션이었다. 동양에는 아크로바틱한 신기에 가까운 기예를 선보이던 성룡이 있었다면, 서양에는 모자를 안 떨어뜨리고 유려한 채찍술을 보여주던 해리슨 포드가 있었다. 그러나 이 느껴지는 디지털의 미끈한 느낌은 무엇일까.

물론 이것은 막연한 느낌일 수도 있다. 스필버그 역시도 이 <인디아나 존스> 4탄의 상당수의 액션씬을 CG를 배제하고 찍었다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왠지 이 <인디아나 존스>는 이전의 전작들보다는 <미이라> 시리즈를 연상시킨다. 어쩌면 그것은 아날로그적 와이어 액션이냐, 컴퓨터 그래픽에 의한 3차원 액션이냐의 문제가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액션 이외의 어떤 것, 예를 들어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성궤나 성배 등이 가지는 종교적인 분위기, 혹은 오컬트 적인 요소가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된 것, 그리고 많은 액션씬에서 특유의 유머러스함이 사라진 것 등에 그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디지털상영으로 이 영화를 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가끔 화면에 까만 점들도 나오고 그래야 하는데).

 

아무튼 키아누 리브스의 <스피드>를 보러 간 관객이, 비의 <스피드레이서>를 보고 나온 듯한 찜찜한 뒷맛을 남기지만, 인디아나 존스의 모험심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고, 상대방의 총구가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도 옆의 동료에게 농담을 던지는 낙관주의적 품성도 여전하다. 그리고 그 낙관주의적 품성과 한 세트라고 말할 수 있는 ‘유머’ 역시도, 상당히 모자라긴 하나 감은 살아있다. 그리고 전작의 관객들을 위한 몇몇 서비스 컷도 스필버그는 잘 끼워 넣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전의 느낌을 되살리는 건 테마송이다. 모두들 기억하고 있을 그 음악. 설날 저녁, 30개 이상의 광고를 뚫어져라 보고 있을 수 있게 해주는 그 음악이 영화관에 울려 퍼지는 것을 듣고 있는 것은 꽤나 즐겁다. 영화관에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30대 이상의 관객이 있다면, 십중팔구 영화의 감동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음악 때문일 것이다.




John Williams- 'The Raiders' M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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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천사(Fallen Angels), 왕가위

Ending Credit | 2008. 5. 16. 00:45 | Posted by 맥거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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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천사>는 1997년 홍콩반환에 관한 더없는 엘레지일 것입니다. 천사들이 떠나가 버린 도시, 아침이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은 도시, 홍콩. 저는 이 영화가 홍콩영화의 마지막 걸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 홍콩영화는 끝났습니다. 홍콩을 무대로 한 중국영화에 관해서 말하는 것은 아마도 또다른 일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이 코멘터리는 끝난다. 그리고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이어지고, 스피커에서는 정성일 평론가가 홍콩의 유명 라디오 시그널 음악이었다고 소개했던 ‘Only You’가 이어진다. 그리고 나는 지친 상태로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 즈음 플레이어의 정지 버튼을 누른다.

정성일 평론가의 코멘터리를 듣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는 1997년 홍콩반환의 의미부터, 왕가위에게 부끄럽게도 물어보았다는 한국어간판의 의미까지 이야기하지만, 나는 그것만 듣고 있을 틈이 없다. 그와 동시에 나는 눈으로는 화면을 바라보고, 머리 속으로는 옛날 일들을 생각하고, 자막을 읽고, 자리를 고쳐 앉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정성일 평론가는 이 모든 이야기를 적어놓고 읽는 것일까, 머리 속에서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것일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가끔 철자를 잘못 읽는 류의 실수를 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도 이 이야기를 적어놓고 읽는 게 틀림없다는 섣부른 판단을 내린다.

 

도대체 평론가의 코멘터리를 듣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아마도 나에 있어서는 그게 두 가지로 기능을 하는 것 같다. 하나는 일종의 정답을 맞춰보는 기분이다. 영어듣기평가가 끝나고, 뒤에 해설지문을 보며,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인지 아닌지를 살펴보는 것처럼, 나는 그가 한 씬에서 구술한 해설이 나의 애초의 생각과 얼마나 들어맞는지를 가늠한다. 그리고 혹여 운 좋게 비슷하기라도 하면, 잠시 우쭐한 기분에 빠져 다음의 해설을 놓쳐 버린다. 그리고 또 하나는 - 이게 더 큰 이유라고 말할 수 있는데 - 단지 목소리 때문이다. 물론 정성일 평론가에만 해당되는 것이지만, 이 목소리는 묘하게 중독성이 있다. 어딘지 어눌하고, 종종 발음도 틀리지만, 어딘지 사람을 잡아끄는 목소리. 목소리에도 진정성이라는 잣대를 들이댈 수 있다면, 이 목소리는 진정성이라는 게 있다.

물론 이것은 오류이고, 허구다. 목소리만 가지고 진정성을 판단할 수는 없다. 단지 이것은 나의 주관적인 판단이 빚어낸 허구일 뿐이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그의 글을 연상시키고, 그 글에서 느껴지던 한 영화에 대한 절절한 애정을 연상시킨다. 따라서 이미 이 코멘터리는 이동진 평론가 등의 코멘터리와는 이미 다른 지점에 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이것은 우열을 논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예를 들어 이동진 평론가의 코멘터리가 분석적이고, 학술적인 어떤 것이 느껴진다면, 정성일 평론가의 코멘터리는 따스하고, 감정적이고, 설득적인 어떠한 것이 느껴진다. 전자의 코멘터리가 관객들에게 새로운 해석의 틀을 제공하는 것, 따라서 영화가 새롭게 분석되고, 다른 어떤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어떠한 지점을 제공한다면, 후자의 코멘터리는 관객들에게 영화감상의 폭과 깊이를 넓게 하여 관객들에게 영화에 대해 새로운 감동을 제공한다. 두 가지 모두 영화를 한 번 더 보게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 영화 <타락천사>의 코멘터리는 내가 잊고 있었던 새로운 두 가지 사실을 환기시킨다. 하나는 이 영화는 정성일 평론가의 마지막 말대로 1997년 홍콩반환 직전의 홍콩의 분위기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하는 사람들과, 떠나야 함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남는 사람들. 이곳에 살아남아 삶을 이어나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망기타(忘記他)’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을 듣고 있는 것을 바라보는 카메라가 말해준다. ‘그대를 잊겠다’는 가사가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는 것, 그것 자체가 아직 떠나간 사람을 잊지 못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물론 이를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찍지 말라고 화내는 자신을 찍은 화면을 아버지가 몰래 보면서 웃고 있고, 그것을 다시 하지무(금성무)가 몰래 보고 있는 장면. 이 장면에 흐르는 하지무의 독백은 정성일 평론가의 말대로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 독백은 필연적으로 아버지가 이미 세상에 없는 어떤 후일의 시점에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모든 화면이란 결국 최종적으로는 관객이 있어야만 완성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배경이 있고, 배우가 있고, 그 배우들이 아무리 움직이고 있어도 모든 화면이란 그것을 밖에서 바라보는 관객이 있어야만 가능해질 수 있다는 점. 그 모든 것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가 유일하다는 점. “이 장면은 투샷으로 찍기는 했지만, 그러나 두 사람이 같은 방향을 향해서 앉아있기 때문에 그 두 사람은 한 번도 마주보지 않습니다. 혹은, 청부업자는 그에게 얼굴을 돌리지 않습니다. 이 두 사람의 표정을 모두 볼 수 있는 사람은 영화를 보는 우리들 뿐입니다.....그 때 이 영화는 영화 바깥에 있는 우리들을 포함해서 영화를 진행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영화란 결국 ‘관객들에게 말걸기’라는 사실을 다시 환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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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 속으로, 황규덕

Ending Credit | 2008. 5. 15. 01:17 | Posted by 맥거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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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노라마 기억(panoramic memory)’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죽음의 위기에 빠졌을 때, 자신의 지나온 인생을 마치 파노라마를 보듯이 눈앞에서 보게 되는 것, 또는 그러한 현상. 영화 <아메리칸 뷰티>에서 레스터(케빈 스페이시)는 죽어가면서 아주 평화로운 상태에서 짧은 시간동안 자신의 지나온 인생을 하나하나 천천히 떠올리게 된다. 굳이 영화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실수로 사고를 당하게 된 사람들, 높은 곳에서 추락하게 된 사람들이 겪은 이러한 파노라마 기억을 다룬 연구물들은 꽤 많다고 한다. 이러한 연구물들이 가지는 가장 큰 궁금증은 “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가?”인데, 여기에는 의견이 꽤나 분분하다. 그러나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학설은 사람이 죽음의 위기에 빠져 정신적 쇼크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고자, 일종의 환각을 보여주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즉, 극단적인 통증과 스트레스에 몸이 반응하여 일종의 모르핀(엔돌핀)을 뇌가 급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즉 이것은 일종의 우리 몸이 살기 위한 하나의 반응이라는 것.

 

이 영화 <별빛속으로>는 어떻게 보면 위와 비슷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의 위기에 빠진 상태에서 보는 환각들이 신비하게도 현실과 연결된다. 또한 영화는 노골적으로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과 이 이야기를 연결시킨다. 어느 것이 꿈이고, 어느 것이 현실인가, 나비가 나인가, 내가 나비인가, 나는 살아있는가, 나는 죽어있는가. 영화의 스토리는 묘하게 중첩되며, 모호한 분위기는 관객들이 어느 것이 현실이고, 어느 것이 꿈인지 알 수 없게 해준다. 액자 안에 또 액자가 있고, 그 안에 또 액자가 있어, 그 액자 안의 사람이 액자 밖의 관객을 그리고 있는 꼴이다. 스토리를 말하는 것은 힘들 뿐이며, 크게 의미도 없다. 다만 영화는 묻고 있다. “시간이 정말 있을까, 파괴하는 시간이. 쉬고 있는 산 위에서 언제 시간이 성을 부수어 버릴까?”

시간과 기억의 문제는 영화가 즐겨 다루는 소재이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현재의 시간에서 과거의 기억을 다루는데, 때로는 이 기억을 뒤집어서 늘어뜨리기도 하고(<메멘토>), 다른 기억을 이식하기도 하고(<토탈리콜>), 심지어는 현재의 시간에서 미래의 기억을 다루기도 한다(<마이너리티 리포트>). 그러나 이 영화에서 다루는 것은 시간의 장벽을 넘어선 존재의 초월성, 존재의 영속성이다. 무엇이 우리를 이 험난한 세상에서, 혹은 화염병과 돌과 최루탄이 난무했던 시대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게 해주는가.

여기에 몇 개의 힌트가 있다. 영화의 초반부 나이든 독문과 교수 수영(정진영)이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려는 순간, 학생들은 마치 무엇인가에 홀린 듯 수영을 바라보지 않고 앞만 바라보고 있다. 이 수영과 학생들의 단절에서 읽혀지는 묘한 공포감. 이 묘한 공포감이 벗겨지는 순간은 수영과 학생들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하고,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이다. 그리고 영화는 젊은 수영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이 이야기의 시작에서 마찬가지로, 늙은 교수는 차분히 원서를 강독하고 있고, 학생들은 모두 말없이 그 내용을 받아 적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한 여학생의 이해할 수 없는 울음. 이것이 깨어지는 순간은 그 여학생이 수영과 강의실에서 나와 이야기를 시작하는 순간이다. 모두 같은 곳만 바라보는 순간에서 벗어난 서로의 마주보기. 이야기의 시작임과 동시에 누군가와의 연결.

 

다시 ‘파노라마 기억’으로 이야기를 돌려보면 이 연구는 우리에게 “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가?”에 대한 답을 명확하게 주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 명확한 사실을 환기시킨다. 즉 이 모든 연구는 그 사람이 결국 살았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는 것. 그 사람은 죽을 위기에 빠졌지만, 결국에는 극적으로 구조되어 그들의 그러한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 줄 수 있었다는 것. 그렇게 본다면, 결국은 많은 사람들이 죽기 직전 아주 평화로운 상태에서 자신의 지나온 인생을 살펴보는 것은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우리가 살기 위해 아주 힘든 투쟁을 하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우리의 의식이 우리의 지나온 인생을 살펴보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던 시간들을 떠올리며 평화로운 감정을 느끼는 것은 사실 우리의 의식을 잃지 않고 깨어있게 해주는 하나의 작용이라는 것. 우리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한편의 연극이 상영을 멈춘 순간, 우리의 인생도 끝날 것이라는 점. 그리고 그런 투쟁, 누군가의 기억을 가지고 싸우는 평화로운 투쟁에서 승리하고, 꿈에서 깨어 꽃밭에서 나오는 사람만이 삶을 지속할 수 있는 것이며, 다시 다른 기억을 만들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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