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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배신긍정의배신바버라에런라이크의워킹푸어생존기
카테고리 정치/사회 > 사회학
지은이 바버라 에런라이크 (부키,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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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라 에런라이크는 취재하여야 하는 대상들과 적당한 안전 거리를 둔 채, 사실은 아니지만 그럴듯해보이는 사실들과 사실이지만 적당한 왜곡을 뒤섞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타입은 아니다. 그녀는 이른바 일을 죽어라고 하지만 여전히 빈곤의 늪에 빠져 있는 '워킹 푸어' 계층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직접 워킹 푸어가 되어 그 한가운데에 뛰어들기로 한다. 즉 현재까지의 자신의 삶을 버리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낯선 도시로 가서 웨이트리스, 청소부, 판매원 등으로 일하며 최대한 버텨보기로 한 것이다. 결과는 예상했던 것처럼 신통치 않다. 임금은 거의 바닥이었고, 근무환경은 열악했으며, 생활환경은 상당한 불편을 감수해야만 했고, 결국에 길게는 서너달, 짧게는 몇 주를 버티지 못하고 다시 새로운 도시로 떠나야만 했다. 그러나 물론 이 책 <노동의 배신>에서 저자의 성공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아니 어떠한 의미에서는 중요할 수도 있다. 저자는 여러모로 좋은 조건에 속했으니까. 그녀가 버티지 못했다는 사실은 다른 여러가지를 시사한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들은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우리는 이들 '워킹 푸어'의 생활에서 어떠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는가.

이러한 저자의 체험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이러한 일을 열심히 하지만 생활의 영위가 어려운 저임금 노동자의 생활에서 문제거리, 일종의 위협이 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그 위협은 실제적인 위협과 정신적인 위협의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다시 이 실제적인 위협은 다시 두 가지의 문제, 주거의 문제와 예기치 못하는 사태의 문제로 살펴볼 수 있다. 저자가 이런 저임금 노동자의 생활을 하기 위해 새로운 도시에 가게 되면 늘 하게 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주거공간을 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직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문제라고 볼 수 있는데, 구할 수 있는 직업의 수준에 따라 구할 수 있는 주거의 형태가 달라지는 가장 큰 이유 외에도, 주거공간과 직업공간이 얼마나 떨어져있는가, 주거의 공간이 얼마나 불편한가에 따라 고려해야 하는 문제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즉 저임금 노동자에 있어서 주거의 공간을 어떻게 확보하는가는 매우 중요하고 긴급한 문제이며, 늘 위협이 되기도 한다. 다른 나머지 실제적인 위협은 예기치 못하는 사태에 대비하는 안전장치가 없다는 문제이다. 실제로 저임금 노동자의 생활은 소득의 거의 전부분을 주거비와 식비 등으로 소비해야만 이어질 수 있는데, 이것에는 예를 들어 의료의 문제나 이혼, 갑작스런 해고, 사고, 범죄 등으로 일어나는 급작스러운 부수적인 비용이 전혀 고려될 수가 없다. 더구나 이러한 것은 대부분 노동자의 수입보다 훨씬 큰 비용부담을 초래하는 바, 저임금 노동자들은 이러한 돌발사태에 거의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 못지 않게 문제가 되는 것은 정신적인 위협과 관련된 부분일 것이다. 저임금 노동자들이 구직을 하는 순간에서부터, 일을 하는 모든 부분에 걸쳐서 회사나 관리자들에 의해 일어나는 심리적 굴욕감, 모욕감은 일상화의 단계에 이르며, 이것은 단순히 특정 관리인의 특성적인 문제가 아니라, 보다 큰 시스템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저자가 볼 때 구직 시에 이루어지는 심리검사나 약물검사 등은 실제로 일할 만한 사람을 골라낸다는 실제적인 이유에서 이루어진다기 보다는,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스스로 자신의 낮은 위치를 파악하게 하고, 심리적으로 회사에 복종하게 하려는 의도가 보다 큰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런 심리적인 모욕감이나 굴욕감은 직업활동 시에만 사람을 짓누르는 것은 아니다. 사회 전반적으로 걸쳐서 이런 저임금 노동자들을 '일을 하기 싫어하는 게으른 사람들',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들'로 보는 풍조가 만연되어 있고, 여러 다양한 시스템으로 구별해내고 있으며, 심지어는 이들의 복지를 담당하는 기관의 종사자들마저도 비슷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 즉 가난은 거의 순전히 이들의 잘못, 즉 일종의 범죄와 같이 다루어지고 있다.

물론 이 바바라 에런라이크의 이야기들이 가지는 몇 가지의 함정이 있다. 즉 우리가 이것이 바로 저임금 노동자들이 가지는 진정한 실상이라고 완전히 믿어서는 안되는 몇 가지 함정 말이다. 예를 들어 그것은 세 가지 정도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먼저 첫 번째는 저자 자신이 밝혔듯, 저자는 중년의 여성이라는 취약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간 꾸준한 건강관리로 일단 신체가 건강한 편에 속했으며, 가사노동이나 가족에 대한 부양에 따로 에너지를 쏟을 필요도 없고, 다른 여러 귀찮은 상황들을 크게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에 속했다는 점이다. 일례로 주거의 문제에서만 봐도, 저자는 다른 많은 저임금 노동자와 달리 혼자서 지내는 비교적 여유로운 주거공간에 머무를 수 있었다(물론 범죄의 위협이라는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두 번째는 저자가 마지막 후기에서도 밝혔듯, 이 체험은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의 미국, 그러니까 닷컴 버블의 마지막에 들어서 있던 미국의 경제호황기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즉 저자의 경험에서도 비추어 볼 때 당시는 여러 저임금 일터에서 일할 사람을 많이 모집하던 시기였으며, 저임금일망정 노동의 유연성은 분명히 지금보다는 더 있던 시기였다. 세 번째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문제일지도 모르겠는데, 저자의 심리상태는 분명히 실제의 저임금 노동자와는 다르리라는 점이다. 이것은 저자가 이 체험을 대강 했다는 의미도 아니고, 보다 더 최선을 다했어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글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저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다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저자에게는 그 심리적 무력감은 사실 거의 없다. 앞이 보이지 않는 지긋지긋한 쳇바퀴말이다. 즉 저자에게는 이것이 언젠가 끝이라는 믿음, 그 믿음을 가지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한다고 해도, 이미 그것을 의식하는 데에서 만들어지는 믿음이 있다. 그러나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이 믿음의 강도는 아마도 다를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내가 이 심리적 무력감을 완전히 이해한다고 하는 말도 아니다.) 다르게 말해서, 이 책에는 저자의 세 도시에서 세 번의 다른 경험이 나와있는데, 사실 진정한 문제는 책에 집필되지 않은 그 이후일 것이라는 점이다. 즉 이 마지막 한계에 봉착했을 때 저자는 다른 도시로 옮기거나, 혹은 그만두고 자신의 삶으로 돌아오면 되지만, 다른 저임금 노동자들은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이러한 함정들은 이 이야기들에 우리가 무엇인가를 더 덧붙여야만 한다는 사실을 일깨우며, 그 사실은 예를 들어 왜 이런 상당히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노동자들은 뭔가 행동을 보이거나, 연대하지 않는가, 혹은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운가, 라는 질문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이것에는 저자가 여러 분석을 하고 있지만, 사실 한 가지 힌트가 될만한 이야기들이 있다. 앞의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각각의 실험 장소에서 떠날 때 선택한 동료 몇 명에게 자신의 정체를 '커밍아웃' 했을 때 그들의 반응이 깜짝 놀랄만큼 실망스러웠다고 이야기한다. 그 중 제일 재미있었던 반응은 "그렇다면 다음 주 저녁 근무에 나오지 않을 거라는 말이에요?"였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러한 이야기가 뭔가 시사해주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즉 그들의 관심사는 어떤 노동에 대한 문제점의 파악 혹은 그 문제를 바탕으로 한 대안의 모색 같은 것이 아니라 그녀가 나오지 않음으로서 다음 주에 새로운 동료를 만나거나, 본인의 일이 많아질 것이라는 사실인 것이다. 이것은 물론 저임금 노동자들이 시야가 좁거나, 자신만을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 환경에서 '서바이벌'하는 것이며, 현재의 어떤 시스템이 그들에게 그 이상을 생각하지 못하도록 몰아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저자의 '사람들을 빈곤하게 만들고 계속 그렇게 만드는 짓을 중단'해야 한다는 것, '정부에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이나 길에 나앉은 극빈자들을 제도적으로 괴롭히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는 것, '그들이 원한다면 더 나은 임금과 더 나은 노동 환경을 얻기 위해 조직을 결성한 권리를 주자'는 것 등에 동의하면서도, 그것은 미국에서나 우리환경에서나 여전히 멀고도 험한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그것은 분명히 쉬운 싸움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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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 더 덧붙인다면, 이 책 <노동의 배신>은 쉬운 이야기 접근 방식과 그녀의 시니컬한 유머들로 술술 읽히는 책이긴 하지만, 중간중간 책을 덮고, 이 책이라는 것의 작동방식에 대해 생각해보게 했다. 물론 이 책의 타겟은 저임금 노동자들이라기보다는 명백히 중산층 이상의 고등교육을 받은 자들에 가깝다(물론 우려를 담아 말해두건대, 분명 이것에는 상당수 내 편견이 들어가 있으며, 동시에 나는 이 두 그룹을 구분지으려는 의도로 이런 표현을 쓰지는 않았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자신의 책을 많은 이 책에서 묘사되고 있는 것과 같은 워킹 푸어들이 읽어줘서 기쁘다고 말했지만, 저자가 묘사한 생활대로라면 이들의 생활에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상당히 모험으로 느껴진다. (물론 이 말에도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그리고 한편으로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그들에게는 이 책이 흥미로울까. 매일매일 최저임금을 받으며, 관리자들의 감시와 모욕, 전 사회적인 굴욕을 견뎌내며(애써 의식하지 않으며) 하루하루를 이어나가는 것을 묘사한 이 이야기가 흥미로울까. 혹은 분노하게 될까, 잘 모르겠다. 반면 나는 책이 흥미롭고 저자의 문체도 매력적이라고 느낀다. 그러나 저자의 이 시니컬한 유머들 - 그의 상당수는 자신의 중산층 이상 계급의 허위를 자각하는 데에서 나온다 - 을 재미있다고 생각하고 이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고 때로는 분노를 느낀다는 이 사실이 나의 어떤 계급과 연관되는 것인지, 혹은 고등교육 이상이라는 학력과 연관되는 것인지, 역시나 확신하기 어렵다.

(누군가가 노동을 할 수 밖에 없는 이 시간들에) 워킹 푸어의 체험을 담은 이 책을 읽는다, 그리고 재미있다고 말한다, 혹은 읽을 만한 책이라고 블로그에 끄적거린다,는 이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다. (아니, 아마도 이 덧붙인 이 모든 이야기가 나의 허위를 드러내는 것 같다. 그것은 적어도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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