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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타, 김기덕

Ending Credit | 2012. 9. 13. 22:57 | Posted by 맥거핀.




(전체적으로 영화의 줄거리와 결말부가 들어있습니다.)



화제의 중심에 올라있는 김기덕의 <피에타>를 보았다. 사실 그간 김기덕의 영화를 거의 보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모를까, 김기덕의 예전작들을 보아온 관객이라면 무엇인가 약간은 낯설다라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는데, 그것은 어떤 가시적인 부분에서라기보다는 비가시적인 어떤 '느낌'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이야기의 측면으로 봐서는 여러 평자들이 지적했듯 박찬욱이나 봉준호의 그림자를 언뜻언뜻 보게 되는데, 예를 들어 이 <피에타>의 이야기를, <마더>의 어머니가 <친절한 금자씨>의 공간으로 들어와 금자씨가 된다면, 혹은 <복수는 나의 것>의 공간으로 들어와 동진이 된다면 벌어질 일들을 김기덕 식으로 풀어낸 영화라고 할 수도 있다. 즉 김기덕의 이 이상한, 그러나 아주 낯설지만은 않은 이야기에서 우리는 언뜻 봉준호의 냄새나 박찬욱의 향취를 느끼게 되는데, 그것은 김기덕 고유의 분위기와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박찬욱이나 봉준호의 영화에서는 우리는 종종 영화 바깥에 머물러 있다. 즉, 영화를 보는 우리들은 그 고통을 내부에서 견디는 것이 아니라, 때로 바깥으로 빠져나오게 되며, 그 증거 중의 하나로 우리는 그 영화의 위계와 구조를 분석하고 싶은 충동에 빠지게 된다는 점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예전) 김기덕의 영화는 관객을 가장 가까이에 데려다놓고 이야기를 시작했으며(물론 관객이 원할 경우에 한해서), 일단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영화는 때로 '불가해' 그 자체, 끔찍스러운 이물의 어떤 것으로 남았다(우리는 고래의 뱃속을 빠져나가야만 비로서 그곳이 고래의 뱃속임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이번 영화에서는 그런 것이 뒤섞여 있다. 처음 관객을 압도하면서 시작했던 이 영화는 중간 부분에 이르러 그 전체의 구도를 보여주는 듯 하다가, 다시 관객을 몰아붙이며 끝낸다.

영화는 제목에서부터 그 종교성을 드러내는데, 성모가 죽은 아들(예수)을 안고 있는 '피에타'라는 이 제목과 (그리고 포스터는) 어떤 종교적인 심상 몇 가지를 떠올리게 한다. 예를 들어 이 전체 이야기를 단테의 <신곡>에 느슨하게 빗대어 볼 수도 있는데, 처음 강도(이정진)의 악행은 <신곡>의 '지옥편'이다. <신곡>의 9층으로 이루어진 지옥, 그리고 청계천의 나뉘어진 수많은 지옥들. 이 지옥들에는 죄를 지은 자들, 그러니까 이 사회에서 '죄'라고 명명되는 '돈을 빌리고 갚지 못한 자들, 혹은 갚을 마음이 없는 자들'이 각각의 공간에 숨어 있다. 그리고 이 곳을 단테, 아니 강도가 차례로 방문한다. 그러나 물론 강도는 단테가 아니다. 강도의 악행은 그 이름대로 차라리 '강도'짓을 하는 게 더 나아보일 정도인데, 그는 이 지옥의 마지막에서 엄마(조민수)를 만나고 '연옥'으로 들어선다. 속죄자들이 자신의 죄를 돌아보고 정화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던 단테의 <신곡> '연옥편'처럼 강도는 거부하던 엄마를 일단 받아들인 후에는 이상스러울 정도로 급속한 변화를 보여주는데, 갑자기 존대말을 쓰는 것은 기본이고, 급기야는 돈을 받아내는 일을 포기하는 정도에까지 이른다. 그럼 단테에게 베아트리체가 천국을 인도했던 것처럼, 강도에게 엄마가 속죄와 천국의 길을 인도할 것인가. 그러나 이야기는 새로운 측면으로 나아가고, 그는 연옥에서 다시 지옥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처음 지옥과 비슷하지만 다른 공간, 이번에는 누구나 그를 증오하는 지옥. 불에 타 죽어버려라, 제발, 이 인간백정아.

물론 성모마리아와 아들 예수를 표현한 '피에타'가 그렇듯이 <피에타>는 엄마와 아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김기덕의 영화에서 아버지는 없었다. 아니 종종 있기도 했지만, 그건 아버지라기보다는 아버지의 탈을 뒤집어쓴 괴물에 가까웠고, 그 아버지들은 종종 아들에게 잡혀먹혔다. 그래서 늘 어머니와 아들만 남았다. 이번 영화에서도 하나 특이한 점은 이 세계 역시 아버지들은 이미 어디론가로 사라져버린 세계라는 점이다. (아니 유일하게 직접적인 부자 관계가 나오기는 한다. 연필을 손에 든 소년 말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 소년은 불구 아버지를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그 아버지는 괴물을 만들어내고 있었으니까.) 강도와 엄마, 엄마와 그녀의 죽은 아들, 그리고 또다른 늙은 엄마와 불구가 된 아들. 그럼 아버지들은 어디 갔을까. 극 중 한 아버지는 '보험금을 받는 게 복잡해진다'는 만류에도 옥상으로 올라가고(이렇게 표현하는 게 온당할까 싶다. 올라가는 아버지와 내려가는 강도를 잡는 이 씬은 인상적이다), 다른 아버지는 아버지가 되자마자 아들을 위해 두 손을 기꺼이 잘라서 먹이려 한다. 그러므로 옥상으로, 혹은 프레스기계 밑으로 아버지를 밀어넣은 강도는 동정심 따위는 가지지 않는다. 그곳으로 아버지 세대를 밀어넣는 것은 자신이 아니니까. 주의 영광, 할레루야 따위의 구호가 붙어 있는 이 청계천 공간 어디에도 주의 영광 같은 것은 없다. 아니 없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그 어디에도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누군가가 없다. 예를 들어 이곳에서 새건물을 지으려고, 이들에게 건물을 비워주고 나갈 것을 요구하는 누군가, 그 누군가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싸움이 어려워지는 것은, 그 적이 거대해지거나 더 무서워지기 때문이 아니다. 도대체 그 적이 누구인지 점점 알 수가 없게 되어가기 때문이다. 적이 아무데서도 보이지 않는데 도대체 누구와 싸워야한다는 말인가? 일주일만에 10배를 받아내려 하는 사채업자, 200원에 물건을 만들어내라는 전화 속 누군가, 그들이 적인가? 아니면, 그 10배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허가해주는 그 누군가, 아니면 200원에 만들어낸 부속물들을 사가서 그것으로 더 반질반질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누군가, 그들이 적인가? 아니면 그들을 이렇게 만드는 소위 '시스템'이 적인가? 알 수가 없어진 세상.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이 온다. 다시 단테의 <신곡>. <신곡>에서 단테는 베아트리체에 이끌려 마지막 천국을 본다. 그는 그 곳에서 '사랑'이라는 것을 다시 새롭게 배운다. 즉 이 '사랑을 배운다'라는 것. 영화 <피에타>에서 강도는 뒤늦게 나타난 엄마에게 무엇인가, 그러니까 뭐 사랑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무엇인가를 배운다. 영화 속에서 엄마가 강도의 악행에 대해 변명하듯이 반복하는 말들이 있다. 그건 얘의 잘못이 아니예요. 내가 없었기 때문에, 내가 일찍 이 아이를 버렸기 때문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즉, 강도의 악행은 어떤 근원적인 무엇인가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라는 것이 이 엄마의, 그리고 이 영화의 논리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어린아이들이나 좋아할 법한 풍선을 가지고 노는 강도의 천진난만함이나, 보다 더 근원적으로 마치 문명 자체를 배우지 못한 늑대소년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거칠게 거의 생식에 가까운 육식을 하고, 닭을 직접 잡는 그의 모습. 왜 그는 손질된 닭을 사지 않는 것일까. 손질된 닭이라는 것을 판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닐까. 농담이다.) 혹은, 엄마에게 "내가 뭐 잘못한 것 있어?"라고 되묻는 모습일 수도 있다. 아무튼 간에 그래서 이 엄마는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강도가 불쌍하다. 왜냐하면 무엇이 어찌되었건 간에, 이 강도에게는 (무엇인가를 가르쳐 줄) 그 누군가가 없었음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다시 어머니 성모와 아들 예수의 '피에타'. 그렇다면 우리는 강도를 죄를 대속하고 떠난 예수로 볼 수도 있을까. 예수와 강도의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사랑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어떤 것, 오로지 그것만을 알고 있던 존재였다는 점이다. 악마의 기원은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자들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아담과 이브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가르쳐준 자들. 그래서 선과 악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 자들. 그러나 예수는 이의 반대편에서 하나만 아는 사람들이 하는 이해되지 않는 말들, 예를 들어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내밀라는 식의 말을 한다. 그것은 너무 많이 아는 자들에게는 바보 같은 말일 뿐이다. 내 오른뺨을 1대 때리면 네 왼뺨을 10대 때리라고, 그것이 악마의 논리이다. (그러고보면 이 인물의 이름 '강도'도 심상치 않음이 사실이다. 예수 대신 풀렸던 자도 강도이고, 예수와 같이 못박혔던 자들도 강도였다.) 그래서 (물론 기독교식으로 볼 때) 유일하게 아는 사랑으로 전 인류의 죄를 대속하고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와 같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강도가 유일하게 엄마에게 배운 것, 혹 사랑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바로 그것이 강도를 속죄의 길로 이끌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아마도 그 마지막의 끝없이 이어지는 붉은 줄일 것이다. 그것은 강도의 피가 아니니까. (예수의 마지막에 기적이 있었던 것처럼, 이 마지막에도 기적이 있다. 고속도로에 끝없이 이어지는 붉은 피의 선은 기적의 현장이다.) 그것은 아마도 강도에게 빼앗겼던 모든 사람의 피, 아니 보이지 않는 적과 계속 싸워야만 했던 사람들의 피니까. 김기덕이 늘 원했던 것은 그런 것이었다. 그 참혹함을 기억해달라, 그 피를 기억해달라는 것. 그 피는 실제의 피니까. 실제의 청계천이 그렇게 만들어졌으니까.

아직 나는 마지막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것을 속죄로 볼 수 있을까. 솔직히 정말 잘 모르겠다. 김기덕의 영화에서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늘 육체의 고통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늘 정신적인 고통이 더 크게 도사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늘 자해를 하거나, 스스로에게 혹은 타인에게 육체의 고통을 가하곤 했다. 그것이 정신의 고통을 누그러뜨리는 방법이라는 것을 아니까. 이 마지막도 사실 그런 비슷한 것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다. 복수가 완성되려면 이 마지막이 이렇게 되어서는 안되었다. 그는 아무 것도 몰라야 했고, 살아 있는 채로 더 고통스러워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여자의 차 밑으로 들어갔고, 우리는 그녀가 이 어려운 상황을 맞닥뜨리고 나면, 집에 돌아와서는 더 큰 고통에 맞닥뜨리게 될 것임을 안다. (남자가 숨긴 것.) 영화 속에는 불길한 이미지들이 떠돌지만, 영화 속에서 가장 인상깊게 남아있는 것은 그 공간들이다. 강도가 텅빈 눈으로 들여다보는 흐릿한 창 안쪽의 공간들. 강도가 올까봐 공포에 떠는 사람들이 숨어 있는 그 이상한 작은 지옥들, 그리고 그 작은 지옥이 합쳐진 거대한 지옥 청계천이 있다. 강도가 사라졌어도 그 수많은 지옥과 지옥에서 만들어지는 증오들은 여전히 건재하고(그것은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죄많은 인간들의 죄를 모두 다 떠안고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지 2000년 가까이 되었지만, 세상은 여전히 수많은 증오들로 가득하니까.) 김기덕은 기억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억해야 했던 것은 예수의 부활과 샤방샤방한 천국이 아니라, 예수가 한걸음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흘리던 그 피였다. 그 피를 기억하라.


덧.
마지막으로 이 얘기는 덧붙이고 싶다. 김기덕의 영화에서 봉준호나 박찬욱의 그림자를 보게 되는 것은 사실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다. 단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김기덕이 봉준호나 박찬욱 식이 된다면 김기덕은 어디에 있지?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그간 김기덕 영화를 둘러싸고 있던 불가해한 '무언가'가 이 영화에서는 한결 약해진 느낌이고, 그것은 어떤 장점을 드러내는 것처럼도 보이지만, 동시에 그 '불가해함'에 가려져 있던 김기덕 영화의 단점들을 도드라지게 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라면 거친 감정선 같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강도는 너무 빨리 엄마와 가까워지고, 너무 빠르게 변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박찬욱이나 봉준호 식이 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비교의 도마 위에 스스로 오르게 된다는 의미도 된다.) 즉 이를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두 가지의 영화가 있다. 보는 이를 버티게 하는 영화와 버티게 하지 못하게 하는 영화. 김기덕의 예전 영화들과 <피에타>가 다른 점은 텐션을 끌어올리기는 하지만, 이 <피에타>는 결정적인 순간에 숨쉴 공간을 남겨놓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그 숨쉴 수 없는 한계점에 도달하려고 그간 김기덕의 영화를 보았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 결국 김기덕 영화의 매력이었으니까. 인간은 불가해한 것에 대해서는 무서워하거나, 경외하지만, 이해할 수 있게 되면 곧 관심을 잃어버리게 마련이니까. 다음 영화를 기다려본다.



 - 2012년 9월, 롯데시네마 피카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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