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나잇 카우보이>, 존 슐레진저

Ending Credit | 2009.02.25 01:16 | Posted by 맥거핀.




(스포일러)



영화가 끝나고 살짝 눈물이 났다. 글쎄. 왜 눈물이 나는건지 잘 모르겠다. 이 영화는 코미디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꽤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적어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영화 내내, 나는 살짝 웃음띤 얼굴로 영화를 지켜봤다. 그러나 이 마지막은 묘하게 마음을 아프게 한다. 리코(더스틴 호프만)가 죽어서? 뭐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눈물은 단지 그런 것만은 아니다. 나는 적어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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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슐레진저 감독의 1969년 작 <미드나잇 카우보이 Midnight Cowboy>. 1969년은 누구나 기억하듯이,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한 해였고, 베트남 전쟁이 클라이막스로 치닫고 있는 해였다. 그와 반대로 미국 국내에서는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드높은 시대이기도 했고, 전세계적으로 좌파들의 기치가 드높았던 1968년의 이듬해이기도 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3선개헌이 국회를 통과한 원시적인 해이기도 했고, 얼마전에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님이 추기경으로 임명된 해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1969년은 '69'라는 숫자가 상징하듯, 히피(hippie)들의 해, 비틀즈와 도어스의 해이기도 했으며,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3일간 열렸던 해이기도 하다.

시대정신이라고 해야하나...이 영화에서도 1969년의 이면에 있었던 끈적한 분위기는 감지된다. 조 벅(존 보이트)과 리코가 우연히 초대받아 가게되는 파티 현장. 그 파티는 끈적하고 불온한 공기를 담고 있다. 흐느적거리는 음악이 흐르는 이 공간에서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흐느적거리며 춤을 추고, 약을 한다. 여기에는 어떤 뚜렷한 이유가 없다. 몽롱한 눈으로 카메라를 쳐다보며 남자는 답한다. 이곳에 왜 왔는지 모른다고.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모른다고. 이곳은 조 벅과 리코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공간이다. 단지 리코는 먹고 마시는 것에, 그리고 사람들의 주머니를 터는 것에 열중할 뿐이고, 조 벅은 약에 취해 웃을 뿐이다.

그들은 여기에서도 이방인일 뿐이다. 카우보이 복장을 한 우스꽝스러운 남자와 그의 친구. 이들은 그저 다른 이들의 구경거리일 뿐이다. 그랬다. 1969년의 세상에서 이들은 그저 사회에서 밀려난 이방인일 뿐이었다. 아폴로 11호로 상징되는 과학기술이 대변하는 말끔하고 잘 짜여진 귀부인과 신사들의 세계, 그리고 그 반대편에 있는 음악과 춤과 마약의 끈적거리는 히피들의 세계. 그 두 세계의 틈바구니에서 그들은 그저 갈 곳이 마땅치 않은 텍사스에서 온 카우보이 복장을 한 어리숙한 청년과 간단한 사기와 소매치기로 살아가는 2세대 이민자 청년[각주:1]일 뿐이다.

이 어리숙한 카우보이 청년 조 벅은 뉴욕에서는 돈많은 부인들이 같이 자주면 돈을 준다는 말에 뉴욕에 왔다. 자신으로서는 가장 자신있는, 여자랑 자는 일을 하는데, 돈까지 주다니. 이 왠 꿩먹고 알먹고인가. 아마도 그는 이렇게 간단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보듯, 그는 복잡하게 생각할 줄 모르는, 어딘가에 나사가 하나 빠진 청년이다. 글쎄 그의 나사는 왜 도망갔을까. 조 벅은 종종 환상에 빠진다. 이 환상에서 그는 과거의 세계로 달려간다. 이 과거의 세계는 정확히 묘사되지는 않지만, 그에게 어떤 트라우마를 안긴 것 같다. 군복을 입고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하며 집 앞에 앉아있는 장면을 미루어 볼 때 그는 전쟁에서의 귀환병일지 모르며, 베트남 전에서의 어떤 것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과거의 환상에 종종 등장하는 여자친구와의 어떤 관계가 이를 이렇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알 수가 없다. 다만, 하나 확실한 것은 그는 나사가 하나 빠졌기는 하지만, 착한 청년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착함은 '천사같은' 착함이 아니라, 그보다는 훨씬 날 것의 어떤 것이기는 하지만.

이 이야기는 이 착한 청년 조 벅과 그의 친구 리코가 벌이는 생존의 이야기이다. 꽉 짜여진 두 세계의 틈바구니 속에서 그들은 어떻게 살아남을까. 그러나 이 생존기는 결코 무겁고 우울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희극적이다. 묘하게 희극적이다. 예를 들어 조 벅의 환상이 그를 과거로 데려간다면, 리코의 환상은 그를 미래로 데려간다. 그는 지금 조 벅의 매니저가 되어 조 벅이 멋진 부인을 꼬셔오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그는 미래의 자신과 조 벅의 모습을 상상한다. 해변가에서 수많은 수영복을 입은 부인들에게 둘러쌓여 있는 조 벅과 자신. 그러나 이 길지 않은 꿈은 조 벅이 바깥으로 내동댕이쳐지면서 같이 깨진다. 우스운 환상과 그것의 깨어짐. 이를 이렇게 말할수도 있다. 비극적인 주인공들이 벌이는 희극[각주:2], 또는 희극적인 주인공들이 벌이는 비극[각주:3].

조 벅과 리코는 추운 뉴욕을 떠나 넓은 해변과 뜨거운 태양이 있는 따뜻한 남쪽으로 떠난다. 표면적으로 봤을 때에는 아픈 리코가 마이애미로 가는 것이 소원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단순한 조 벅도 깨달았던 것이다. 이렇게 삶이 지속될 수는 없다는 것을. 이대로는 그들 앞에 남은 것이 없다는 것을. 따라서 마이애미로 가는 도중 조 벅이 카우보이 복장을 집어던지고, 평범한 복장으로 갈아입는 것은 인상적이다. 이것은 과거와의 결별, 꿈을 좇고 환상을 좇는 세계와의 결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마지막에서 관객은 다시 숨을 삼킨다. 마이애미가 눈 앞에 있는데, 리코는 트로피카나 셔츠를 입고 버스 차창에 고개를 떨구기 때문이다. 친구의 고개를 받치고 망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조 벅. 그러나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두었어도 이 세상은 여전히 흘러간다. 죽은 리코의 모습과 망연한 표정의 조 벅과 오버랩되는 차창밖 마이애미의 풍경. 이 마지막은 오래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조 벅은 이제 어디로 가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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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부인과 신사들의 세계와 히피들과 마약의 세계에서 어느 곳에도 갈 곳이 없었던 두 청년 조 벅과 리코. 왠지 이 이야기는 현재에도 그대로 진행되는 것 같다. 머나먼 이 곳 한국에서 말이다. 물론 이는 귀부인과 히피의 세계는 아니다. 그것은 그보다는 조금 더 실용적이다. 이른바 억대연봉과 만원짜리 커피의 세계와 용산철거민과 삼천원짜리 싸구려국밥의 세계. 그 세계는 점점 그 간극이 멀어지는 것 같다. 그 세계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끼어있는 '88만원 세대'의 수많은 조 벅과 리코들. 그들은 어디로 가야할까. 아니 어디로 갈 수 있을까.

- 2009년 2월, 서울아트시네마.



  1. 리코의 풀네임은 엔리코 살바토레 리조. 이 이탈리아 냄새 물씬 풍기는 이름으로 볼 때,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지하철에서 구두를 닦다가 돌아가셨다는 그의 말로 미루어 볼 때, 아마도 그는 가난한 이탈리아 이민자 2세대일 것이다. [본문으로]
  2. 독일영화 <나킹 온 헤븐스 도어> 또는 <주유소 습격사건> [본문으로]
  3. 이는 어딘가 나사가 빠진 주인공들이 바보같은 일을 벌이는데, 이것이 그들을 계속 안좋은 상황으로 몰아넣을 때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들이 느끼는 두 가지의 혼합된 감정, 즉 우스꽝스러움 및 안타까움과 맥이 닿아 있다. 이른바 <낮술>의 세계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