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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시르와 왈츠를, 아리 풀만

Ending Credit | 2008. 12. 9. 00:23 | Posted by 맥거핀.


영화가 끝나고, 다른 일 때문에 재빨리 극장을 빠져나오면서부터, 줄곧 무엇인가 아음 한 구석이 불편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를 본 지 며칠이나 지났는데도, 이 영화 <바시르와 왈츠를>을 생각할 때마다 여전히 그 불편한 기억이 남아있다. 이 불편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무엇이 이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찜찜하게 만드는 것일까.

물론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이 영화는 이스라엘 방위대에 의해 저질러진 레바논에서의 팔레스타인 양민들 학살 사건을 다루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아우슈비츠나 광주나, 난징 혹은 코소보 등에서의 그러한 학살 사건들을 간접적으로 보거나, 듣게 될 때에 느끼는 감정들, 그의 연장선상들일 수 있다.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잔인하며, 비극적이고, 설명할 수 없는 그러한 사건들. 그러한 사건들을 보면서 가질 수 있는 인간들의 보편적인 인간성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나 타인에 대한 공포, 혹은 자신에 대한 공포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런 형이상학적인 질문만은 아닌 듯 하다. 무엇이 이렇게 불편하게 만드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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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그 보다는 훨씬 더 단순한 데에서 답이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는 가해자가 나중에 과거의 잘못된 일들을 영상이나 문학으로 펼쳐 보일 때, 그것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복잡한 감정의 한 부분일런지도 모르겠다. 이른바 소위 '용서를 구하는 방식' 그것에서 비롯되는 불편함. 

용서를 구하는 방식에도 물론 여러가지가 있다. 먼저 첫번째는 용서를 구하는 척 하며, 실질적으로는 본인도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잘못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나, 나도 어쩔 수 없이 그랬다고 주장하는 유형. 그리고 그래서 용서의 탈을 쓰고, 사실은 자기합리화라는 얼굴을 들이미는 유형. '통석의 념' 일명 니뽄스타일. 이것은 사실 용서 구하기라고 보기 어려우니 일단 패쑤. 그럼 이건 어떨까.

가해자가 과거의 사건을 직접적으로 거론하며,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당사자들에게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구하는 방식. 그리고 피해자의 용서의 결단, 그리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손 맞잡기. 그리고 물질적인 보상. 이른바 공식적이고도 방송적인 유형. 짝짝짝.

그러나 이를 한편으로 피해자의 시각에서 보면, 억울하기도 한 것이다. 그동안 겪었던 그 무참한 수많은 일들이 물질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일까. 떠올리기 싫은 옛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저 용서 구하기 라는 것은 한편으로 보면 가해자가 자신의 마음 편해지자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이른바 <밀양>의 억울함. 아니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죽은 자는 무엇으로 돌아온다는 것인가.

그래서 여기에서 가까운 데에 도사리고 있는 이 단어가 '용서'와 밀접하게 연결되는 것이다. '복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지극히 심플하고도 공평한 가르침.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수많은 복수담들과 그 복수담의 후일담들과 그 후일담들의 또다른 복수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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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바시르와 왈츠를> 같은 유형은 어떨까. 그러나 이는 왠지 모호한 구석이 있다. 영화는 감독 아리 풀만(실제 자신의 이야기를 쓴 것인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처럼 쓴 것인지는 모르겠으나)이 레바논 전쟁에서 겪었던 일들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음을 떠올리는 데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아리는 옛 전우들, 그리고 전쟁에 참여했던 다른 사람들, 종군 기자 등을 만나며, 그것이 그 때 자신이 가졌던 어떤 임무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가 결국에는 기억을 찾았다는 그런 이야기.

물론 이 이야기는 한 남자의 기억 되찾기가 중심을 이루는 이야기는 아니다. 한 남자의 심리학적 임상 사례를 다루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러나 왠지 그렇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한 남자가 기억을 잊어버렸어. 근데 왜 그랬는지 알아? 그건 심리적인 외상을 입었기 때문이야. 그런 심리적인 외상은 대체로 극단적인 상황에 빠졌던 사람들이 겪곤 하지. 왜 있잖아. 아우슈비츠에 갇혔던 사람들이 거기에서 나온 후 몇몇 부분들에 대한 기억을 영원히 잃어버린다고 하지. 근데 말이야. 그런 심리적인 외상은 피해자만 입는 것도 아니야. 때로는 가해자가 그런 심리적인 외상을 겪기도 하지, 아 그럼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인 건가. 뭐 그런 이야기.

물론 이는 부당한 공격인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에는 몇몇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제목이 의미하는 바시르와 왈츠를 장면이라던가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영화관에서 직접 보시길), 무엇보다도 충격을 주는 마지막 장면들. 그러나 그런 몇몇 인상적인 장면들을 제외하면, 군인들은 해변가에서, 혹은 배 위에서 딩가거리며 놀다가 임무를 받고 적에게 진격하고, 퇴각하고, 폭발하고, 총을 맞고, 총을 쏘고, 떠뜨린다. 아 그게 군인의 임무라고? 명령을 받으면 해야하는 군인의 임무라고? 그래서 그러지 말자고, 이런 영화 만드는 것 아니냐고? 다시는 그러지 말자고 이런 영화 만드는 것 아니냐고...

그러나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아무리 울어도. (물론 당연한 말이지만 복수한다고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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