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에 해당되는 글 335

  1. 2016.05.24 <곡성> 단상들 (6)
  2. 2016.05.10 당신이 '당신'이 되어라
  3. 2016.05.05 5센티미터 두께의 틈
  4. 2016.04.18 부재감과 부채감
  5. 2016.04.11 고쳐쓰는 '나'
  6. 2016.03.30 욕망의 화신
  7. 2016.03.09 긴 꿈 (2)
  8. 2016.02.24 하나님의 마리오네뜨
  9. 2016.01.20 경계에 서 있는 사람
  10. 2016.01.10 혐오에 맞서는 혐오
 

<곡성> 단상들

Ending Credit | 2016.05.24 01:14 | Posted by 맥거핀.

 

(경고합니다. 영화 <곡성>에 대한 각종 스포 있습니다.)

 

 

 

1.

<곡성>을 본 후 그 리뷰들이 궁금해서, 인터넷에 '곡성'이라고 검색어를 넣으니, 친절하게도 '곡성 결말', '곡성 줄거리'를 찾아볼 것을 권한다. 그만큼 <곡성>의 황량한 결말의 의미나, 줄거리의 의문점들을 찾아보려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뜻일게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어쩌면 요즘 시나리오 작가들은 그런 식으로 시나리오 쓰는 방법들을 열심히 배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관객의 머리 속을 최대한 복잡하게 만들어서 관객에게 그 영화의 정보를 열심히 찾아보게 하고, 다시 그것을 확대 재생산 하게 만드는 것이 영화의 홍보에는 결정적인 힘이 될 테니까. 그러나 <곡성>에 대해서 그런 질문을 하게 하고, 정답을 알게 하는 것은, 다른 결에서 참 딱한 일이다. 왜냐하면 <곡성>의 이야기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되면 될수록, 그 결말에 대해서 더욱 생각해보게 되면 될 수록 그 영화를 보고나온 관객은 더 황량해지기 때문이다.

 

2.

사실 <곡성>은 영화를 본 후에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넘쳐나는 영화이다. 그것은 영화 내부적인 면에서도, 혹은 외부적인 면에서도 그렇다. 그래서 그럴까. 영화의 개봉을 전후해서 이른바 '스포'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어떤 결에서 보면, 이 영화는 스포가 그렇게 큰 의미를 가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영화의 거의 모든 이야기들은 사실 어떻게 해석해도 그다지 틀리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야기의 여러 갈래를 세세하게 늘어놓을 생각은 없지만, 예를 들어 인터넷 누군가의 단평대로 이 영화를 그저 경찰관 종구(곽도원)의 한바탕 꿈이라고 해도 안될 것은 없다. 이 영화는 이야기의 흐름으로 보면 상당히 불친절한 영화이고, 불친절함을 넘어서 여러가지 반대되는 해석이 동시에 가능하도록 이야기를 이끌기도 한다. 재미있게도 <곡성>은 영화 시작부의 씬을 통해 이미 관객에게 일종의 경고 혹은 힌트를 준다. 던져지는 미끼, 넘쳐나는 떡밥.

 

3.

그런 장면들이 셀 수도 없이 많지만, 가장 대표적인 장면은 물론 무당 일광(황정민)이 '살을 날리는' 굿을 펼치는 장면일 것이다. 종구의 딸 효진은 '인간이 아닌' 어떤 존재인 외지인(쿠니무라 준)에 의해 거의 손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일광은 그런 외지인을 없애기 위해 굿을 벌인다. 그리고 장면들은 교차된다. 굿이 더 활기를 띠면 띨수록 외지인은 거의 죽음 혹은 소멸에 가까워지는 것처럼 보이며, 아이는 고통스러워 하지만, 그 과정을 견뎌내야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관객은 믿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 뒤집힌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관객은 묻게 된다. 아니, 그러면 그 장면들은 다 무엇이지? 친절한 홍진씨는 다른 인터뷰에서 이 장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그 장면은 외지인에게 살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효진에게 사실 살을 보내는 것이었다고. 이것은 사실 꽤 이상하다. 이런 설명은 '감독의 입을 통해서'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 내부적으로' 설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교차편집 어디에서도 그것은 조금이라도 암시되지 않았다. 관객은 어리석거나 부주의해서가 아니라, 보통의 영화문법을 해석하는대로 일상적인 해석을 했을 뿐이다. 아니 도리어 감독의 말이 맞다면 이것은 잘못된 씬의 설계이다. 그 설명대로라면 이 교차편집에서 외지인이 그런 식으로 들어갈 이유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이 장면의 잉여를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맥락에 따라 포장되었지만, 사실 포장지를 풀면 다른 것이 들어가 있는 것. 그것을 우리는 흔히 낚시, 혹은 떡밥이라고 부른다. 

 

4.

이런 식의 어떤 낚시들, 떡밥들이 이 영화에는 넘쳐난다. 그러니 영화가 끝난 후 어찌 이야기들이 넘쳐나지 않을 수 있을까. 상당수의 것들은 맥락에 따라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열어보면 다른 것이며, 다른 나머지 것들은 그런 맥락조차도 없다. 저렇게 해석해도 이야기가 되고, 이렇게 해석해도 이야기가 안될 것은 없다. 뭐 좋다. 떡밥이 맛있다면, 그리고 그 떡밥을 먹고도 낚시줄에 걸리지 않고 다시 물로 돌아와 즐겁게 헤엄치며 배를 두드릴 수 있다면 그 떡밥을 굳이 거부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영화가 뭔가 꺼림칙해 보이는 것은 그 다음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떡밥을 삼키고, 이제 마지막 떡밥을 삼키려고 할 때, 그러니까 영화로 말하자면 마지막에 무엇인가 메시지를 던지려는 것처럼 보였을 때 생긴다.

 

5.

영화에서 굳이 메시지를 끌어내려고 한다면, 그것은 영화의 포스터에도 들어있는 저 여덟 글자, 그러니까 '절대 현혹되지 마라' 정도가 될 것이다. 표면적으로 그들의 파멸은 그들의 현혹에서 비롯되었으니까. 마지막에 나홍진은 이상해보이는 두 개의 만남을 이번에도 기어이 교차편집한다. 종구는 무명(천우희)을 만나고, 사제 이삼은 그 외지인을 만난다. 그저 종구가 외지인을 만나는 것이 영화적으로는 훨씬 말이 되지만(그 개 앞에도 벌벌 떨던 이삼이 그 밤중에 외지인을 찾아가는 게 많이 이상해 보이지만, 그 정도는 익스큐즈하자. 그런 것도 익스큐즈 안하면 이 영화에는 익스큐즈 할 수 있는 게 없다.), 나홍진은 억지로라도 그런 구도를 만들어서 다시 교차편집을 쓰고 싶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두 가지의 의심을 교차하며 보여줄 필요가 있었으니까. 종구는 무명(천우희)을 믿지 못하고, 무명의 팔을 뿌리치며, 이삼은 외지인이 악마라는 확신을 끝내 가지지 못하고 의심한다. 이 두 개의 의심, 혹은 두 개의 현혹. (물론 이 영화에는 이 현혹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가 초반부터 계속 꾸준히 쌓는 장면들이 있다. 반복되는 현혹과 의심들. 외지인을 의심하는 종구의 생각은 사실 명확한 증거에 기초했다기보다는 어떤 근거없는 의심들에 더 가깝다.)

 

6.

그래서 누군가는 이 영화에서 종교적 도그마에 대한 공격을 읽고(사실 의심 속에서 종교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으니), 누군가는 이 영화에서 '영화 그 자체'를 읽는다. 이 중 조금 더 재미있어 보이는 것은 '영화라는 것'에 대한 이야기인데, 사실 영화란 현혹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영화는 사실 거대한 속임수이다. 우리는 두 시간 동안 어떤 이야기를 보지만, 우리는 그 이야기의 모든 일면을 결코 본 적이 없다. 우리는 오로지 감독이 보여주고 싶어한 것만을 본다. 물론 <곡성>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는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단순히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현혹되지 말 것'을 주장하는 이 영화는 각종 현혹을 차례로 전시하며, 관객에게 무엇인가를 믿게 하거나, 혹은 믿도록 암시한다. 위에 든 일광의 굿 장면이 대표적이며, 그 외에도 이야기의 흐름상 관객에게 무엇인가를 받아들이게 한다. 예를 들어 지금 흔히 나오는 얘기대로 이 영화에 어떤 '반전'이 존재한다고 이야기된다면, 그것은 그 현혹이나 암시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는 얘기도 된다.

 

7.

그것은 사실 이상한 자기모순이다. 현혹되지 말라고 하면서, 일부러 현혹시키는 것 말이다. 그것은 영화라는 매체가 기본적으로 현혹시키는 것임을 전제하더라도 이상하다. 일전에 영화를 마술과 비교해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영화와 마술이 통하는 점 중에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영화를 보는 이들이건, 마술을 보는 이들이건, '이것이 현혹시키는 것이다'라는 사실을 이미 사전에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며, 오히려 그 현혹을 어떻게 잘 구축하는가에 그 공연(영화나 마술)의 성패가 달려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이 게임은 누군가는 속이고, 누군가는 속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데에서 생겨나는 쾌감을 즐기는 게임이 아니고, '자 이제부터 속입니다'라고 말한 후, 정해진 규칙 내에서 그 속임의 정교함을 최대한 즐기는 게임이다. 그런데 나홍진의 <곡성>은 그 규칙들을 거의 지키지 않을 뿐더러, 그 속임의 세공은 (의도적으로) 허술하다. 이야기를 어떻게든 짜맞춰도 이야기가 된다는 것은, 역으로 이야기를 어떻게 짜맞춰도 서사의 빈공간이 생겨난다는 이야기도 된다. 그런데, 게다가 이 영화는 거기에 이 메시지마저 덧붙인다. "절대 현혹되지 마라."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8.

그 결과물이 바로 인터넷에 넘쳐나는 수많은 각종 해석들이다. 수많은 근거가 불확실한 해석들, 흔히 말하는 '스포'들로 넘쳐나는 이 영화에 대한 글들. (물론 내가 쓰는 이 글도 그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것이 재생산되는 방식은 영화의 초반부에 외지인에 대한, 혹은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이상한 소문들이 확대 재생산되는 방식을 닮았다. 무명은 이 모든 것이 종구의 의심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 말했다. 사실 '의심의 문제'에서, 결국 그것이 실제로 진실인가, 아닌가의 문제는 부차적이다. 중요한 것은 '의심'이라는 것이 만들어지는 방식, 그리고 그것이 재생산되고 소비되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수많은 글들은 그 의심들이 재생산되고 소비되는 방식을 닮았다. 영화 속 그들은 자신들이 보지 못한 것을 이야기했고, 그것을 어느 틈에 믿어버렸다. 마찬가지로 영화 밖의 우리들은 결코 우리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것이 어느 틈에 맞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영화 <곡성>은 우리가 그렇게 하도록 판을 짜 놓은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일광의 대사가 필요하지 않을까. "자네, 낚시할 때 뭐 어떤 게 걸려나올지 알고 하는가? 그놈은 낚시를 하는 거여. 뭣이 딸려나올진 지도 몰랐것제." 그런데 나홍진 감독은 뭣이 딸려나올지 몰랐을 것 같지는 않다.

 

9.

마술사들이 마술을 하기 전 종종 덧붙이는 말이 있다. "절대 속지 마시고, 눈을 크게 뜨고 보세요!"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바로 그렇게 말하는 제스처가 그 속임(현혹)의 일부라는 점이다. 우리가 그렇게 말하는 마술사의 입을 쳐다보는 순간, 혹은 그 소리에 눈을 더 크게 뜨려고 눈을 비비는 순간을 이용해서 마술사는 무엇인가를 감추거나, 뒤바꿔놓는다.

 

현혹되지 말라고 하면서, 온갖 현혹을 점철하고 있는 이 영화 <곡성>은 속지 말라고 하는 마술사의 그 외침을 닮았다. 우리가 눈을 더 크게 뜨려고 노력하는 순간, 이 영화는 무엇을 뒤바꾸고 있는 것일까.

 

 

덧.

사실 이 글에서 나도 한가지 낚시(?)를 했다. 위의 1은 예전에 <황해> 리뷰에서 썼던 문장들인데, 그대로 <곡성>으로 제목만 바꿨다. 이것은 나홍진의 영화가 전혀 발전하지 않았다는 반증이 아닐까. (이 대목에서 모두들 <곡성>에서 텅빈 냉장고 문을 열어보이며, 이것이 증거라고 말하는 장면을 연상해주길 바란다.) 이야기에서 결락을 만들고, 이야기를 괜히 비트는 것은 이미 <황해>에서부터 보던 방식이며, 예를 들어 영화의 시작부에 영화의 전체 내용을 암시하는 글을 삽입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바로 그 글.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며 유령이라고 생각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그린 마태복음의 한 대목. 원래 인간은 쉽게 현혹되고, 쉽게 미망에 사로잡히는 존재들이다. 그렇게 수련을 쌓은 제자들도 그런데, 우리 범인(凡人)들이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개인적으로는 현혹되지 말라고 하며 각종 현혹을 남발하는 영화보다는, 어쩔 수 없이 현혹될 수 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 그 인간에 대해 묵묵히 그려나가는 영화를 보고 싶다. 적어도 이 시점에서는.

 

 

   

 

- 2016년 5월, CGV 부천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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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6.06.06 22: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차라리 동네 미친여자로 설정된 무명의 존재를 좀 더 부각시켰더라면 어땠을까싶기도하지만 그렇다고 달라질것도 없었겠죠. 솔직히 일광이 외지인과 한패라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운 설정이구요. 그게 다 미끼다 현혹되지마라 이렇게 말하면 관객은 어쩌라는건지?
    이런식으로 만든 영화를 좋아하질 않는다는걸 알았습니다.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6.06.08 15: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영화라면 지켜야 할 규칙들이 있죠. (특히 더더구나 일종의 장르물이라면..) 그 규칙들을 거의 지키지 않으면서 현혹을 전시하는 것은 일종의 반칙입니다. 근데 재미있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도리어 그 반칙을 좋아하는 것 같군요. 그것이...
      아무튼 저도 좋아할 수 없는 영화였습니다. 오만이 드러나는 영화였습니다.

  2.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6.06.08 23: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혹시 맥거핀 님 예전에 <위대한 개츠비>리뷰 쓰지 않으셨었나요? 검색하니 안나와서요.. 제 착각일진 모르지만 꼭 예전에 여기서 리뷰를 본것 같아서요. (근데 당시는 읽지 못하고 지나친것같고) 다른이유는 없고 개츠비에 대한 맥거핀 님의 리뷰를 읽어싶어서요. 늦은밤 들어와 싱거운 질문만 하고 갑니다. ㅎㅎ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6.06.10 02: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그 디카프리오 나오는 개츠비 말씀하시는 거라면, 리뷰는 아직 쓴 적이 없어요. 영화를 아직 못봤거든요. 근데 말씀하시니 괜히 보고 싶은데..나중에라도 보게 되면 리뷰를 남길께요.^^ (그러고보니 개츠비는 소설로도 읽은 적이 없군요.)

    •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6.06.10 23: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책은 여지껏 못읽었네요. 영화는 작년에 티비로 방영된 1973년판 위대한 개츠비를 봤어요. 로버트 레드포드는 익히 알고있었지만 릭 캐러웨이로 나왔던 배우가 인상에 남아있어요. 2014년판도 봐야할텐데..혹시 나중에라도 영화보시면 리뷰 꼭 올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주말 되시길 바라며..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6.06.13 14: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좋은 주말 보내셨나요? 아..예전에 나온 영화를 보셨군요. 오래된 소설들을 영화로 만든 경우에는 처음나온 영화들이 더 좋은 경우가 많더군요. 뒤에 나온 영화들은 차별점을 강조하느라 그런지는 몰라도 원작과는 전혀 다른 영화가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나중에 2014년 판이라도 챙겨보고 글 남길께요.^^

당신이 '당신'이 되어라

The Book | 2016.05.10 02:21 | Posted by 맥거핀.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 되는 법 - 6점
모신 하미드 지음, 안종설 옮김/문학수첩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모신 하미드의 소설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되는 법>(이하 <떠오르는...>)은 확실히 그의 전작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를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점은 이 소설들에는 어떤 '장치'가 들어있다는 점이다.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는 이야기 내용적인 면에서도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소설 내에 긴장감은 그 외에 다른 것에서 더 강하게 배어나온다. 그것은 이 소설에서 호명되는 '당신'이라는 존재인데, 이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점점 한편으로 궁금해지는 것은 이 소설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지난 삶을 늘어놓는 화자 파키스탄인 '찬게즈'가 아니라, 이 반대편에서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청자 미국인 '당신'이다. 그리고 처음과는 다르게 소설은 점점 마지막으로 갈수록 이 긴장감 쪽에 서서히 무게를 두기 시작한다. 이 듣는 '당신' 미국인은 누구이며, 여기에 왜 왔으며, 왜 '찬게즈'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가. 이 소설은 결국 어떻게 마무리될 것인가. 그리고 마지막에야 책을 읽는 '우리들'은 불현듯 깨닫게 된다. 이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는 '찬게즈'가 아니라, 이 소설에서 결코 드러나지 않는 미국인 '당신'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모신 하미드는 이 긴장감을 주는 방식을 이번 소설에서도 써먹고 싶었던 것 같다. <주저하는 근본주의자>에서는 그것이 가상의 청자를 상정하여 그와 화자 사이에 긴장감을 유지시키는 방식이었다면, 이 소설에서는 이것을 조금 다르게 비틀었다. 그것은 이 소설을 일종의 자기계발서 같은 형식으로 만드는 것인데, 다시 말해서 실제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시아(파키스탄)에서 살고 있는 한 인물의 일생이지만, 그 이야기의 긴장감을 유지시키는 동력을 그 이야기 내부에서 찾기 보다는, 자기계발서라는 외부의 장치에서 찾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이 소설은 대니 보일의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형식적으로는 퀴즈쇼에 나가서 문제를 푸는 자말의 모습을 비춘다. 그러나 사실 영화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자말의 퀴즈쇼가 아니라, 그 퀴즈쇼를 통해 자말이라는 인물의 삶의 역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떠오르는...>도 마찬가지이다. 자기계발서라는 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소설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실제로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되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이 소설의 '당신', 그러니까 한 남자의 삶의 역정이다. 사실 그것을 소설에서는 간단하게 알 수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소설의 '당신'은 결코 부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더럽게'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말이다. 소설의 제목에 원래 쓰인 단어는 filthy인데, 이것을 '더럽게'라고 번역하는 것이 조금은 다른 효과를 내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래도 '더럽다'라는 말에는 부정적인 뉘앙스가 상당히 강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것을 '대박 부자'라고 만약에 번역했다면, 조금은 다른 뉘앙스로, 어떻게 보면 이것이 도리어 풍자적인 표현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 사견으로는 여기에서 '더럽게'라는 것은 '쟤 드럽게(?) 돈 많어." 할 때의 '더럽게'에 조금은 더 가까운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이 소설의 주인공 '당신'은 결코 그 '드럽게 돈 많은'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것은 각 장에 붙은 소제목들에서도 그런 면이 있는데, 소설을 처음 펼쳐들고 가장 먼저 눈길이 가는 것은 이 소제목들이다.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이상주의자를 멀리한다." "스스로를 위해 일한다." "부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등의 정말 싸구려 자기계발서에 붙을 법한 그 소제목들 말이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소제목들은 그렇게 붙어 있지만, 각 소제목들에서 그 주인공 '당신'은 그 소제목들을 결코 충실히 이행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라는 소제목이 붙은 장에서 주인공은 사실 (짝)사랑에 빠지며, "스스로를 위해 일한다"라는 장에 등장하는 것은 그녀와 가족을 위해 일하는 주인공의 이야기이며, "부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라는 장에서는 부채로 인해 거의 끝장이 난다.

 

그러므로 이 소설 역시도 어느 정도는 <슬럼독 밀리어네어>와 비슷한 것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전에 내가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보고 쓴 리뷰에서 그 영화에서 퀴즈쇼라는 장치를 빼면 사실 주인공 자말을 둘러싼 이야기는 (시쳇말로) 쌍팔년도 스토리라고 말했는데, 사실 이 소설에서도 비슷한 것을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 역시 사실 '자기계발서'라는 외피를 벗겨놓고 보면 거의 쌍팔년도 스토리에 가깝다고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사실일지도 모른다. 단지 자본주의적인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의 파키스탄은 과거의 우리, 그러니까 쌍팔년도 혹은 그 이전의 우리가 겪었던 발전의 단계를 거치고 있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단지 자본주의적 발전 단계로 보자면 그럴 수 있다는 말이다. 과연 다른 면에서는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흔히 '쌍팔년도'라고 할 때에는 그런 뉘앙스가 거기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그러니까 이 책을 읽는 한국의 독자에게는 이 책의 이야기가 어딘지모르게 익숙하다. 실제로 그런 세태를 겪어왔던 아니던 간에, 우리는 이런 이야기들에 (경험으로, 혹은 미디어의 영향으로) 익숙해져 있으며, 따라서 이 소설의 주인공의 성공 스토리(사실은 실패 스토리)는 왠지 모르게 어디선가 많이 봤다는 느낌을 준다.

 

여기에서 아마 이것을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당신'이라는 표현 말이다. 왜 작가는 굳이 여기에 '당신'을 끌어들였을까. 다시 말해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의 자리에 왜 소설을 읽는 '당신'을 끌어들였을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의 전작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도 당신을 계속 호명하는 소설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 소설에서의 '당신'은 이 소설의 '당신'과는 다르다. 그 소설의 시작은 '당신'이 미국인임을 알아보았다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다시 말해서 작가는 소설의 시작부에 이 당신이 누구인지 혼동하지 않도록 장치의 특성을 설명해주면서 장치를 도입한다. 그리고 이 장치를 단지 장치로서 끝내지 않고 멋지게 역이용하면서, 지금까지의 이야기에 훨씬 더 큰 무게를 부여한다. 그러나 이 <떠오르는...>은 조금 다르다. 이 '당신'은 자기계발서의 당신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주지하고 있듯이 이 자기계발서의 '당신'은 바로 그 자기계발서를 읽고 있는 독자 '당신'이다. 다시 말해서 <주저하는 근본주의자>에서의 '당신'은 사실 존재하고 있는 그 누군가, 어떤 이미지가 규정되어 있는(어떤 '전체상으로의 미국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당신이고, 따라서 여기에서 '당신'을 호명하는 것은 어떤 테크닉에 더 가까웠다면, 이 <떠오르는...>에서 '당신'을 호명하는 것은 조금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독자는 그 '당신'의 자리에 이미지로 규정된 누군가가 아니라, 소설을 읽는 누군가, 그러니까 바로 자기자신을 끊임없이 밀어넣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사실 하고 싶은 말은 이 말이다. 어쩌면 내가 이 소설에 냉소적이면서도, 결코 냉소적일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가지게 되는 것은 내가 그런 비슷한 발전 단계를 거쳐온, 아니 사실은 그런 발전 단계가 아직 끝나지 않은 헬조선에 살고 있는 한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다른 경우를 상정해보자. 예를 들어 사실 이 소설이 주 타겟으로 삼았을 미국이나 유럽의 독자들에게는 어쩌면 이 소설이 재미있는 풍자 쯤으로 읽혔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풍자는 사실 그 풍자에서 벗어난 사람만이 웃을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 풍자의 현실이 현재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면 그 풍자에 사실 온전하게 웃을 수 있을까. 웃을 수 있다해도 그것은 웃프다. 

 

아니 사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모신 하미드가 이 소설을 단지 서구의 독자들을 웃기기 위해서 썼다고 말할 수만은 없다. 그와 동시에 모신 하미드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그 뿐만은 아닌 것 같다. 작가는 <주저하는 근본주의자>에서는 중간자로서 미국인에게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를 썼다. 그것을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자신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가 내내 말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지만, 여기에는 계속 듣는 '당신'에 대한 의식이 있다. 그러나 이 <떠오르는...>은 조금 다르다. 이 소설에서는 더 이상 그들의 반대편에 서 있는 청자 '당신'은 없다. 대신에 이 소설은 당신을 지우고, 이야기하는 '나'의 위치에 당신이 서볼 것을 권한다. 그러니까 아마도 모신 하미드는 이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어때? 우스꽝스럽지? 그렇지? 그런데 말이야, 당신이 바로 이 위치에 선다면 당신이라고 크게 다를 수 있을까? 이것도 하나의 삶이고, 그냥 우리는 '이렇게, 이런 방식으로' 살고 있는 거야.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그렇다고 나는 부끄럽지 않아, 당신이 비웃거나 무시할 권리는 더 없고 말이야. 뭐 그런 거라고 할까.

 

다만, 그래도 나는 마지막으로 이것 한 가지는 이야기하고 싶다. 모신 하미드에게 이 이야기는, 그러니까 그가 만든 이 이야기는 '그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주저하는 근본주의자>가 그렇게 힘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이야기가 미국에서 태어난 후, 파키스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컨설팅 회사에서 일했던 작가 본인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는 가상의 누군가가 아니라, 계속 이 화자와 작가를 겹쳐놓게 된다. 그런데 이 소설의 '당신', 그러니까 남자는 모신 하미드와는 조금은 더 떨어져 있는 것 같다. 이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되는' 누군가는 모신 하미드가 만들어낸 누군가는 될 수 있지만, 그런 삶을 살아본 적이 없는 모신 하미드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모신 하미드는 이상하게도 이 남자에 자꾸 이 책을 읽는 당신이 '당신'이 되어보라고 권한다. 자신은 그렇게 된 적이 없으면서 누군가에게 그렇게 되어보라고 권하는 이것은 온당한가?

 

아..자기계발서라는 것이 원래 그런 거라고요? 뭐 그렇다면 할 말은 더 없지요. 단지 자기계발서를 덮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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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센티미터 두께의 틈

The Book | 2016.05.05 01:18 | Posted by 맥거핀.
지극히 내성적인 - 8점
최정화 지음/창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최정화의 인물들은 모두 불안한 인물들이다, 라고 첫 문장을 쓰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너무 당연한 이야기인 것 같다. 소설의 인물들이 불안하지 않은 인물들이 있던가. '불안'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아마 '안정' 또는 '균형'과 같은 말일 텐데, 균형적으로 사고하며, 안정적인 말과 행동만 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소설이 무슨 재미가 있을까. 여태껏 대부분의 소설들이 그런 인물들을 그려왔다. 어딘가에 불안정하게 매달려있는, 위태위태하게 어디론가를 걷고 있는 사람들. 아니, 그렇다면 그것은 반대로 최정화가 (소설이라는 세계에서 볼 수 있는) 그런 흔하디흔한 인물을 다시 반복하며 그려내고 있을 뿐이라는 이야기가 되는 건가. 그렇다고 말할 수도, 혹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사실 어떤 인물이 불안하다는 것은, 그들이 사실은 안정을 누구보다도 지향한다는 의미도 된다. 예를 들어 불안의 대표적인 증세인 강박증을 가진 인물들이 타인이 보기에 정말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행동들을 보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보다 더 큰, 어떠한 강박행동으로도 도저히 막을 수 없는 불안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이 소설집에도 그런 인물 중의 하나가 등장하는데, 단편 '오가닉 코튼 베이브'에 등장하는 그녀는 이러한 증세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녀의 강박은 계속적으로 다른 것으로 옮아가는데, 이 강박이 균형에 대한 끊임없는 집착임을 알기란 어렵지 않다. 그녀는 '강박적으로 자기 몸에서 부족한 성분을 찾아내고', 그녀의 강박이 더욱 심해진 것은 목 디스크, 즉 신체의 균형이 깨지는 일로부터 비롯되었다. 아니면 '구두'나 '팜비치'에 등장하는 인물들. 두 소설의 마지막에서 주인공들은 극도의 불안에 빠진다. 그리고 그 불안은 자신이라는 존재를 대체하고 있는, 혹은 대체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 여자가, 자기가 나인 줄로 착각하고 내 구두를 신고 갔다고 말이에요.(p.26 '구두')", "그런데 아내는 파라솔 아래서 웬 남자와 마치 그의 마누라라도 되어 있는 듯이 마주 앉아 있었다.(p.49 '팜비치')". 자신이 위치하고 있던 하나의 세계에서 자신을 대체할 수 있는 어떤 존재. 그것이 내 자리를 빼앗아버린다면, 이 애써 겨우 균형을 잡아 놓은 이 세계에서 나란 존재는 과연 어떻게 되는 것일까. 모종의 불안감이 그들을 엄습한다.

 

그렇게 최정화의 인물들은 어떻게든 균형을 맞추려고 애를 쓴다. (작가의 이름이 正和라서 그럴지도..라는 쓸데없는 드립을.) 위에 든 소설들 외에도 '틀니'의 아내는 다시 남편이 틀니를 끼고, 일상의 균형이 돌아오기를 바라며, '홍로'의 그는 아내가 아닌 아내와 이상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며, '지극히 내성적인 살인'의 여자(미옥)는 작가와의 어떤 균형잡힌 관계(작가가 소설을 보여주고, 그녀가 거기에 평을 하는)를 유지하고 싶어하며, '타투'의 아버지는 지나가 가진 비밀을 몰랐던 때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대머리'의 나 역시도 어떻게 해서든 경제적인 안정을 되찾고 싶어한다. 그랬던 그들이 어떤 불균형을 맞닥뜨리고 불안의 세계로 빠져들어간다, 최정화의 소설들을 한 줄로 요약하라면 그렇게도 말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를 짚어볼 필요는 있다. 그들이 그렇게도 유지하려고 했던, 어떻게든 균형을 맞추려 했던 세계. 그 세계들은 긍정적으로 볼 수 있을까? 강박으로 유지되는 '오가닉 코튼 베이브'의 세계를 빼고라도 그들이 유지하려 애썼던 그 세계들은 사실 이미 어딘가모르게 삐걱거리고 있다. '팜비치'의 아내와 남편은 각자 자신이 보고 싶은 세계의 일면만을 각자 보고 있으며, '틀니'의 세계는 아내의 헌신으로 만들어진 세계였고, '홍로'의 공간은 말할 것도 없이 기이한 결혼생활이다. '타투'에서 아버지와 딸은 흔히 말하는 단절의 단계에 이미 이르렀고, '대머리'와 '파란 책'의 공간 역시 허위로 유지되는 공간들이다. 아니 굳이 여러 예를 들지 않아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어떻게든 균형을 유지하지 않으면 곧 무너질 것 같아서 불안함을 느끼는 세계, 그 세계가 과연 건강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스스로 균형을 해제시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건강하지 못한 세계에서 살아나오기 위해서. 소설에는 그렇게 균형을 맞추려 노력했던 '지극히 내성적인' 그들이 스스로 균형을 무너뜨리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은 서늘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무엇인가 다른 세계가 열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녀는 자기가 왜 그랬는지 몰랐다. 그를 불러 틀니를 끼우는 걸 빼먹었다고 알려줬어야 했다. (p.95 '틀니')" "그녀는 적절한 대답을 찾았다는 점에 대해 스스로 놀란 것 같았다. (p.113 '홍로')" "선생님이 새로 쓴 원고라며 프린트를 내밀었을 때 나는 맛있는 음식이 떠올라서 군침이 도는 것처럼 묘한 장난기가 발동했습니다. (p.143, '지극히 내성적인 살인의 경우')" "나는 그만 사촌에게 '대머리'라고 부르고 말았다. (p.206 '대머리')" 

 

그녀가 보기에 문제는 책의 두께였다. 그녀는 책들이 너무 얇다고 느꼈다. 집에는 엄지손가락 굵기 정도의 책 밖에 없었다. 새 책장 안에는 적어도 5센티미터 정도는 되는 묵직한 책이 놓여야 마땅했다. 그녀는 집 안에 새로운 소품을 들일 때가 온 것이라고 확신했다.

서점에 갔을 때 그녀가 좀 당황했던 것은 사실이다. 책의 제목이나 저자, 출판사의 이름 대신 그녀는 책의 두께를 알고 있었다. 오십대의 깡마른 서점 주인이 안경 너머로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무슨 책을 찾으시죠?"라고 물었을 때 그녀는 계산대 위에 올린 손가락을 두들기며 잠시 머뭇거려야 했다. 

(중략)

"아까 말씀하셨던 책이 이거 맞나요?"

"네, 파란색에 5센티미터. 맞잖아요."

"진작에 하이데거라고 했으면 대번에 찾을 수 있었을 텐데요."

"하, 뭐라고요?"

"하이데거. 이 책을 쓴 철학자요. 포장해드릴까?"

- p.213 '파란 책' 

 

그렇게 그들의 세계에 틈이 열린다. 5센티미터 정도 되는 틈이. 그것은 그들에게 불안을 주지만, 아주 나쁘다고만 말할 수 없다. 동시에 그것은 어떤 가능성이 내재된 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작은 틈새로 열려진 이 불안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쉽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작가가 그려내는 것은 어떤 양상이자 가능성이지, 당위나 윤리가 전제된 세계가 아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최정화의 세계는 수많은 가능성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결말이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우리가 읽었지만, 그 읽은 세계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서 각각의 이야기는 아주 다른 이야기로 규정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것은 그녀의 소설들이 등장인물 어느 한쪽의 입장에 무게 중심이 쏠려 있기도 하거니와 그녀의 소설 전체가 어쩌면 '내성적'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접근법은 우리에게 일방적인 독해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극히 조심스럽다. (예를 들어 이 이야기들에는 부러 이야기하지 않는 어떤 다른 이야기들이 더 들어있는 것처럼 느껴지며, 따라서 마치 장편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구석도 있다. 예를 들어, '대머리'에서 사촌의 손에 들린 주사기는 무엇일까. 혹은 '집이 넒어지고 있어'에서 나는 과연 살인자일까, 살인자라면 어떤 살인인가.) 

 

소설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뭐 새로울 것은 없는 이야기이다. 우리 모두는 그것을 매우 잘 알고 있다. 소설은 월요일의 출근을 믹아주지도, 산더미 같이 쌓인 일을 해주지도, 부모나 남편, 혹은 아내, 상사의 잔소리나 질책을 대신 들어주지도, 카드비나 은행 대출이자를 대신 내주거나, 전세금이 더 오르지 않게 해주지도, 내가 원하지 않는 대통령이 물러나거나, 해결되지 않은 일들이 해결되도록 해주지도 않는다. 소설이 '실제적으로'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가 소설을 읽으면서 할 수 있는 것은 위에 든 그 모든 것들을 피해 오로지 이야기의 앞뒤를 확장시키며 상상하는 것 뿐이다. 즉 작가가 던진 아주 작은 5센티미터의 틈에 손가락을 넣어 그 안을 최대한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다보면 우리에게도 한가지 틈이 생긴다. 아니 한가지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닫게 만든다. 우리 삶에도 틈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 틈은 지금으로서는 5센티미터, 어쩌면 그 이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그 안에 손가락을 넣어보기 전에는, 다시 말해서 파란 책을 열어보기 전에는 거기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는 법이다. 최정화의 소설은 그렇게 소설이 가진 가능성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든다. 어떤 가능성? 이런 것은 어떨까. "그렇게 해서 나는 신기한 사실을 하나 더 알게 되었다. 아이의 집이 넓어지고 있다는 걸. 그 집도 넓어지고 있었다는 걸. 집이 넓어지는 것, 그건 내 집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그러니 이제는 마음 놓고 행복해져도 될 것 같았다. 마음 편히 잠에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p.256 '집이 넓어지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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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감과 부채감

The Book | 2016.04.18 01:32 | Posted by 맥거핀.
천국의 문 - 8점
김경욱 외 지음/문학사상사

 

 

죽음들이 떠돈다. 일단 수록된 거의 모든 작품들이 직접적으로 어떤 죽음들을 이야기하고 있기도 하다. 대상 수상작인 김경욱의 <천국의 문>은 임종을 앞둔 아버지를 돌보는 여자의 이야기이고, 윤이형의 <이웃의 선한 사람>은 미래에 예정된 죽음을 보는 남자가 나오며, 황정은의 <누구도 가본 적 없는>은 사고로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의 여행기(이것을 '여행기'라고 해도 될까?)이다. 그 뿐인가. 정찬의 <등불>은 "그가 여객선 사고 소식을 처음 들은 것은 문경새재에서였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며, 김탁환의 <앵두의 시간>은 "치숙痴叔은 쓰는 인간이었다."라는 문장으로 소설의 첫머리를 연다. 이 "...이었다"라는 과거형. 그러니까 소설은 이제 그런 인간'이었던' 치숙의 부재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셈이다.

 

그러나 나는 단지 이 소설들이 어떤 죽음들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죽음들이 떠돈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만은 아니다. 나는 이상하게도 이야기되고 있는 죽음들이 아니라, 이야기되지 않고 이미 부재하고 있는 것들을 통해 죽음을 들여다보고 싶다. 다시 말해서 이야기되지 않고 있는 것, 내 머리 속이 만들어낸 이상한 상상, 그러니까 그것은 아마도 오독(誤讀)일텐데, 그들을 통해서 말이다. 그 오독의 질문들 몇 가지를 해보자. 김경욱의 <천국의 문>을 가장 단순하게 이해하는 방법은 아마 다음의 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닐까? 그 남자, 즉 여자가 병원에서 만난 사내는 과연 실재하는 인물일까. 아버지를 여자에게서 데려간 사내, 여자에게 위안을 주고, 영혼과 천국의 문을 이야기하는 사내, 그는 어쩌면 여자 스스로가 만들어낸 환상, 다시 말해서 여자가 만들어낸 어떤 유령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곧이어 등장하는 다른 유령, 김이설의 <빈집>에 등장하는 수정. 소설 속에서 수정이 원하는 것은 명백하다. 그것은 완전한 새 아파트에 방해되지 않는 하나의 유령이 되는 것. 소설은 다음의 문장들로 끝난다. "시간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대로 멈춘 것 같았다. 수정은 집 안을 한 바퀴 둘러본 다음, 소파를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새 아파트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빈방으로 들어갔다. (p.133)"

 

유령들의 향연은 계속된다. 황정은의 <누구도 가본 적 없는>은 유령들의 여행기이다. 유럽을 여행하던 부부는 한 식당에서 화성에 당도한 우주선에 대한 기사를 본다. 이 대화는 이렇게 끝난다. "미국이 간 거지. 아무도 없어, 저기엔. 무인無人이었으니까. 저기 갈 수 있는 사람은 지금도 없어. (p.295)" 이 비유는 중의적이다. 다시 말해서 이 소설은 아무도 없는 곳, 누구도 가본 적 없는 곳에 여행을 간 부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누구도 가본 적 없는 곳에 간 이들, 그들이 유령이 아니면 무엇이라고 말하겠는가. 윤이형의 <이웃의 선한 사람>은 보다 복잡하다. 나의 아이를 구해 준, 미래를 보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정해진 미래를 사는 남자는 정말 아직도 건너편 빌라 202호 살짝 열어진 창문이 있는 방에 살고 있을까. 왜 나는 "자꾸만 지금 이 자리에 서서 건너편 빌라가 그대로 그 자리에 있는 걸 보고 나서야 안심하는 버릇을 고치지 못"하며 "길을 건너 계단을 오르고, 초인종을 누른 다음 기다리면 되"는 "그 간단한 일을 할 수가 없"는가. 어쩌면 그가 거기에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정해진 미래를 사는 남자라는 이 흥미로운 이야기는 이 부채감에 못이기는 동화작가 '나'가 만들어낸 환상의 유령 이야기는 아닐까. 아니, 조금 더 오독의 늪으로 빠져 보자면, 이 '동화작가 나'는 존재하고 있는 인물일까. 이 모든 것은 어쩌면 이미 죽은 이(소설의 초반에 등장하는 그의 꿈을 다시 한 번 읽어보라), 즉 유령의 목소리가 아닐까.  

 

그렇게 유령들, 아니 갈 곳을 잃은 영혼들은 떠돈다. 왜 이 소설들에서는 이렇게도 영혼이 떠돌고 있는 것일까. 그것에 답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이상문학상은 "당해년도 1월부터 12월 말 사이에 발표된 작품을 모두 심사와 수상의 대상에 포함"하며, 그러므로 이 작품집에 실린 2015년에 쓰인 소설들은 대체로 가족을 잃은 이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우리는 그 소설들이 쓰여지기 얼마 전에 일어난 사고(아니 사건이라고 하자)를 모두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찬의 <등불>은 위의 첫 문장에서 보여지듯이 세월호 사건을 보다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윤이형의 <이웃의 선한 사람>에서도 이런 언급이 등장한다. "많은 아이들이 죽는다고만 말해두죠. 이런 나라에서 계속 터질 법한, 그렇게 사람들이 말하는, 하지만 정말로 또 터질 거라고 믿고 싶어 하지는 않는 그런 일이, 그래요, 계속 터지는 겁니다. 지금부터 몇십 년 후에도요.(p.250)" 그리고 황정은의 <누구도 가본 적 없는>에서 부부는 아이를 물에 빠지는 사고로 잃는다.) 그러니 그 수많은 영혼들이 계속 이 소설들에는 등장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혹은 가까운 이들을 잃은 사람들은 그 어디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갈 곳이 없는 영혼이 된 채로 여기에 머물러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사건을 같이 지켜본 많은 이들은 그들의 아픔과 고통과 분노와 절규를 바라보며, 그들의 영혼을, 그리고 운이 좋았다면 자신 한구석에 숨어 있는 영혼의 존재도 살짝 들여다보지 않았겠는가.

 

아니, 나는 어떤 애도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다행스러웠던 사실은 이 소설들이 단지 상처의 확인과 애도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김경욱의 <천국의 문>은 여자가 "아빠, 아빠, 이 개자식, 나는 다 끝났어."라는 오래전 시구를 떠올린 다음, 경찰서로 전화를 거는 것으로 소설을 마무리짓는다. 김탁환의 <앵두의 시간>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치숙의 모습을 보여주며, 윤이형의 <이웃의 선한 사람>에서는 기억으로 겨우 유지되는 선한 마음의 부채감, 그 위태로움을 느끼는 바보스러운 기우들을 애써 믿으며, 이야기가 끝난다. 황정은의 <누구도 가본 적 없는>에서도 그 마지막에는 남자의 외침이 있다. 아이 로스트...... 노, 노, 미스드......로스트......즉 잃어버렸다는 사실 그것을 기억하는 한 그에게는 아직도 모종의 희망이 있다. 그리고 정찬의 <등불>의 마지막도 있다.

 

달빛이 한층 밝아지고 있었다. 달 주위에 엷게 끼어 있던 구름이 걷히고 있었다. 트럭에 올랐다. 시계를 보았다. 네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진도에 도착하면 아침이 될 것이다. 그 시각에 꽃을 살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백합 다발을 가득 안고 팽목항으로 가고 싶었다. 시동을 걸었다. 길이 떠올랐다. 처음 가는 길이었다. 그녀를 만난 것은 길이었다. 그녀를 만난 것은 길에서였다. 처음 가는 길에서 누구를 만나게 될지 가슴이 설렜다. 길 너머에서 누군가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손은 빛처럼 희었다. (p.283)

 

빛처럼 흰 손을 가진 이가 이끄는 길. 그 길은 그녀를 만나는 길이면서, 동시에 '처음 가는 길'이기도 하다. 그는 아마도 그녀에게 '죽음을 맡'길 수 있을 것이다. 그녀를 애도하며, 이제부터 가보지 못한 길을 가게 될지도 모른다. (마지막의 이 결말은 전혀 반대되는 지점으로 읽힐 수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읽는가가 아마도 이 소설의 키일 것이다.)

..........................................

 

 

읽은 지는 조금 되었는데, 어제 세월호 사건을 다룬 한 다큐 프로그램을 본 후 다시 읽고 리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프로그램이 끝난 후 TV를 끄고 조금은 멍한 상태에서 다시 읽었다. 그렇게 읽다보니 이상하게도 소설 속의 거의 모든 문장들이 그 사건을 직간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의미심장해졌다. (김이설의 <빈집>을 읽으며, 부모들이 기억하기 위해 남겨둔, 아이들이 없는 그 빈방을 떠올리는 식이다.) 그 다큐에서 무엇보다도 계속 마음을 건드리는 것은 아이들이 남겨준 소중한 영상들이다. 아이들이 남겨준 소중한 메시지가 사건이 감추고 있는 것들에 조금씩 다가가게 해주는 열쇠가 된다는 면에서도 그러하지만, 그것은 우리 마음 속의 부채감, 그러니까 윤이형 식대로 표현하자면 "막 쪄낸 감자처럼 포슬포슬하고 따스한 이 현실이라는 것이 너무 눈물겹고, 우리를 제외한 세상 전체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부채감"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 영상들은 그 부채감을 우리에게 기억하라고 말한다. 그것을 기억하고 무엇인가를 하라고 말이다. 그 무엇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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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쳐쓰는 '나'

The Book | 2016.04.11 23:45 | Posted by 맥거핀.
오에 겐자부로 - 10점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승애 옮김/현대문학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1.

오에 겐자부로는 고쳐쓴다. "나는 평생 젊은 나이에 시작해 버린 소설가로서의 삶에 본질적인 곤란을 느끼며 살아왔습니다. 이제 와 돌아보니 자신이 쓴 것을 고쳐 쓰는 습관으로써 그것을 극복해 왔음을 깨닫습니다. (p.744 '오에 겐자부로 후기') 중기 단편의 연작들을 제외하고라도, 묶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즉 주제를 변주하면서 어떤 세세한 것들을 고쳐서 이루어진 듯한 소설들이 있다. 예를 들어 <기묘한 아르바이트>와 <사자의 잘난 척>, 혹은 <남의 다리>와 <인간 양>, <사육>과 <돌연한 벙어리>, 후기 단편의 <벨락콰의 10년>과 <마고 왕비의 비밀 주머니가 달린 치마>.

 

2.

오에 겐자부로의 초기 단편들은 어떤 은유들이다. 먼저 <기묘한 아르바이트>에서 <사자의 잘난 척>으로 이어지는 세계. 다시 말해서 개를 도살하거나, 혹은 사자(死者)를 처리하는 것. 죽음을 기다리는 미약한 존재들을 차례로 도살하는 것이나, 이미 죽은 이들을 처리하는 것은 죄책감과 수치심을 동반한 행위다. 그러나 죄책감과 수치심을 동반하는 이 일을 그들은 그만둘 수 없다. 아니 그만둘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중요한 문제는 그 일에 그들이 '자원'했다는 사실이 아닐까. 즉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은 수치심과 죄책감을 느끼기 위해, 혹은 그 수치심과 죄책감을 보기 위해 그 곳에 갔다. 개를 도살하는 개백정이 있는 도살장에, 혹은 시체를 처리하는 관리인이 있는 시체처리실에. 

 

물론 1957년에 쓰인 이 소설들은 당시의 일본 사회를 은유하고 있다. 전쟁에 패배했고, (죽지 못하고 패배한 상태로 살아남았다는) 묘한 수치심과 죄책감이 지배하는 사회, 그들은 그 속에 무력하게 갇혀 있다. 남아 있는 무력한 것을 죽이거나, 혹은 이미 죽은 것들을 재확인하면서. '나'가 그곳에 자원하는 것은 어쩌면 한 켠에 물러서지 않고, 그 수치를 정면으로 봐야겠다는 의지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래야 볼 수 있는 것들, 혹은 드러나는 것들이 있으니까. 예를 들어 그것은 개에게 물린 상처이거나, 뱃 속의 아기다. 그러나 그것을 자각하거나 지켜내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다. 소설들은 무의미해보이는 아이러니로 끝나는데, 수치심과 죄책감은 무의미한 아이러니로 남았을 때 더욱 강력해지는 법이니 말이다. 

 

3.

<남의 다리>와 <인간 양>에서는 이것이 그래서 더욱 강력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점액질의 두꺼운 벽, 혹은 교외로 나가는 막차 버스라는 폐쇄된 공간 속에서 그들은 죄책감과 수치심을 공유하고 있다. 그들은 퇴화했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는 상태니까. 다시 말해서 다리가 없거나, 혹은 '인간 양'이 된 상태니까. 여기에 균열을 일으키려고 시도하는 듯이 보이는 이들이 등장하지만, 그 균열은 사실 정확히 말해서 균열이라기 보다는 그 수치심을 재확인하는 것이거나 보다 강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치심이란 결국 비교할 수 있는 외부의 무엇인가(그 균열을 내려고 시도하는 내외부에 보이는 무엇인가)가 존재할 때 더 맹렬하게 내 안에서 고개를 쳐드는 것일테니 말이다.

 

이러한 초기작들에 등장하는 '나'들은 (이런 표현이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예민한 수치심의 소유자들이며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외부가 일으키는 균열을 민감하게 바라보며, 그 외부에 한걸음 내딛는 것을 주저하는 이들이다. <기묘한 아르바이트>와 <사자의 잘난 척>의 '나'들은 역설적으로 말해서 수치심을 느끼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그 일에 자원했으며, <남의 다리>와 <인간 양>의 '나'들은 '수치심'이라는 것을 마주보며, 그것의 작동방식을 지켜보는, 그 메커니즘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그것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자신 안에서 또다른 공고한 벽을 쌓는 이들이다. 그 벽들은 <사육>이나 <돌연한 벙어리>에서와 같이, 변하지 않는 폐쇄된 상태로 지속되는 공간의 의미를 재확인하는 것이거나, 혹은 극단적으로는 <세븐틴>처럼 전혀 반대의 방향으로(그러나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필연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일 수 있다. (<세븐틴>의 소년(나)이 무엇보다 원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자신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을 '극복'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그에게 '우익'이라는 갑옷을 입는 방식으로 해결된다.)

 

4.

하나 재미있는 것은 이것이 '나'들로 이루어진 소설이라는 점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세상과 자신의 사이에 이 수많은 가상의 '나'들을 끼워넣었다. 그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렇게 세상과 자신의 사이에 여러 적당한 가상의 '나'를 끼워넣은 채 거리를 유지하며 그 '나'를 통해서 수치심이 가득한 사회, 혹은 수음(手淫)을 공유하는 사회, 거대한 점액질의 두꺼운 벽으로 둘러쌓인 일본 사회를 은유하며 들여다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두개골 이상을 가진 장남 히카리가 태어났다. 다른 가상의 '나'를 끼워넣을 수 없는 거리, 나(오에 겐자부로)와 장남 히카리(이요) 사이의 너무나도 가까운 거리. 그는 그 가까운 거리 속에서 꽤나 혼란을 느꼈던 것 같다. 그것은 <공중 괴물 아구이>에 잘 나타나 있는데, 여기에서 자신의 장애가 있는 아들을 죽게 만든 음악가 D는 그것의 죄책감을 견뎌내기 위해 자신의 세상을 정지시키고, 거기에 '아구이'라는 죽은 아들의 환영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으로서 겨우 자신의 거리 균형을 유지해낸다. 아마도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이 음악가 D가 '나'로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또다른 소설 속 '나'가 등장해 그가 음악가 D를 지켜본다는 설정이 아닐까. 다시 말해서 오에 겐자부로는 이 소설에서 자신과 '아구이' 사이에 이 음악가 D를 지켜보는 또다른 가상의 '나'를 끼워넣으려 어떻게든 애쓰는 중이다. 그리고 그 '나'는 소설의 말미에서 음악가 D가 만들어낸 가상의 '아구이'를 실제로 경험한 다음, 그 댓가로, 그러니까 어떻게든 가상의 '나'로서 그 자리에 끼어들었던 댓가로 실명한다. 이 실명. 그것은 오에 겐자부로의 초기 소설 세계의 종말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5.

오에 겐자부로는 그렇게 실명시킴으로써, 자신이 지금까지 구축해왔던 은유의 세계를 중지시키고 싶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두 가지의 문제, 즉 '나'라는 가상의 존재를 내세우고, 그 뒤에 숨어서 거대한 은유의 세계를 발전시킨다는 것의 비겁함과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자신으로서는 감당하기 버겁게 여겨지는 장남 히카리라는 실재가 여기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레인트리'를 듣는 여인들> 연작에서 보여지는 것은 첫 번째 문제에 대한 극복 시도이다. 먼저 여기에서부터 감지되는 것은 극도로 가까워진 소설 속 '나'와 실제의 오에 겐자부로라는 소설가의 거리이다. 실제와 허구가 어지럽게 뒤섞인 이 연작에서 내가 흥미롭게 생각한 부분은 이 '레인트리'를 '나'가 보지 않거나, 혹은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여전히 어떤 의미에서는 그 실재를 보기를 두려워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한 가지 질문이 필요해지기는 한다. 그는 이 '레인트리', 그러니까 이 레인트리라는 거대한 메타포를 정말 보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보고도 못 본척 하는 것일까. 

 

그것의 의미를 이 연작들은 페니 샤오링 다카야스의 입을 통해 집요하게 캐묻는다. 금방 말라버리는 다른 나무들과 달리 잔뜩 우거진 손가락만한 잎사귀에 물방울을 저장해 두는 생명의 나무, 그 레인트리를 정말 보지 못했는가, 아니면 보고도 못 본척 하는 것인가. 다시 말해서 이 때 오에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흐려놓는 이러한 방식의 서술도 정당한 방식인지, 그리고 그 생명의 나무를 진정으로 제대로 보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 현실과 허구를 흩뜨리는 서술 방식도 여전히 이 서술들에 내재된 근원적인 의문 -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 '나'는 오에 겐자부로인가 아니면 또다른 '나'인가 - 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또한 동시에 레인트리를 '나'가 만나게 되는 공간은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그 장소, 바로 하와이라는 점에서, 그의 반전과 반핵에 대한 호소는 그 전에 일으킨 전쟁의 책임, 전쟁피해자가 아닌 최초가해자로서의 일본을 먼저 논하지 않는 한 궁극적인 의미는 획득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반성이 치열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한 레인트리는 불탈 것이고, 또한 거꾸로 선 '레인트리', 그러니까 반대의 의미로 지옥으로 내려보내는 '거꾸로 선 세피로트 나무'가 작동하게 되지 않겠는가,라고 오에 겐자부로는 묻고 있는 것은 아닐까... 

 

6.

레인트리는 불탔지만, 그 돌파구는 다른 하나의 문제를 돌아보는 것으로 조금씩 열린다. <새로운 사람이여 눈을 떠라> 연작은 아버지 '나'와 장애를 가진 이요와의 이야기이다. 은유로서 비껴서 있는 것처럼, 아들의 문제에서도 '나'는 비껴서 있다. 이요가 태어났을 때의 일화, 이요가 물에 빠졌을 때의 이야기를 보면 나약한 또는 비겁한  아버지로서 '나'의 모습(그가 그 순간에도 결국 하고 있는 것은 글 속에 숨은 '인용'이다.)이 극명하게 드러나있는데, 이를 두고 '나'의 어머니는 며느리(즉 '나'의 아내)에게 말한다. "저런 인간이니까, 우리는 의지할 수가 없겠구나. 네 힘(으로), 이요를 구하는 수밖에 없다." (p.473)

 

이 나약한 아버지에게 맴도는 것은 죽음의 그림자이다. 어린 시절 강 상류 바위 사이 소(沼)에서의 죽음 충동, 다카야스의 죽음, 친구 H의 죽음...이를 요약하는 키워드는 비탄(grief)이다. 이 비탄은 어디에서 연유하였는가. '나'는 이 비탄이 이요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잘못 생각한 것이었음을, 어쩌면 그 비탄은 자신에게서 비롯되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세상을 이미 몇 번이고 파괴한 자들은 이요의 세대가 아니라 그 전의 세대이고, 반면 이요와 그의 세대들은 새로운 세계를 건설한 힘을 이미 기르고 있는 중이다. 그것은 생명의 힘이고,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건강한 성적 충동이기도 하다. 

 

7.

그러므로 레인트리는 불탔을지 모르지만, 그것에게는 아직 다른 가능성이 남아있다. 어떤 가능성이? 부활의 가능성이 말이다. '나'는 쇠할지 모르지만, '나'라는 존재가 이요에게 연결되는 것처럼, '레인트리'는 생명의 나무로서 부활한다. 이는 단지 생물학적인 연속성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나'가 평화의 세계, 공존의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애쓰는 것은 폭력으로 점철된 한 세대를 파괴하고 새로운 세대를 위한 세상을 여는 노력일 것이기 때문이며, 그러한 노력으로 만들어진 세계에서 비록 그 육체는 존재하지 않아도 과거 세대는 다른 방식으로 부활한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반전 반핵을 위해 노력하는 '나'의 자세는 미래 세대를 위한 노력이며, 동시에 이요와 공존하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 이요를 비롯한 다음 세대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줄 것인가. 오에 겐자부로는 말한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자신과 이요에게 동시에.

 

'생명의 나무'로부터의 목소리가 모든 인류에게 격려로 고하는 말을 이윽고 노년을 맞이하여 죽음의 고난을 겪어야 할 나의 운명에 맡기고. '두려워하지 마라 앨비언, 내가 죽지 아니하면 너는 살지 못한다. / 그러나 내가 죽으면 내가 부활할 때 너와 함께하리라.' (p.566)

 

8.

전망은 그렇게 긍정적이지 않다. 평화와 공존과 공생의 원리는 아직도 멀다. 다음의 세대는 어떠한 세상을 살게 될 것인가? <조용한 생활> 연작에서와 <하마에게 물리다> 연작에서 드러나듯이 세계는 아직 양편의 가능성으로 나뉘어 있다. 광신자와 쾨헬번호 311 피아노 소나타가 교차하고, 이요는 그리스도가 될 수도 있고, 적그리스도가 될 수도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극단적인 폭력과 새로운 시스템을 건설하려는 희망이 병존한다.

 

오에 '나'는 보다 희망쪽에 걸어보고 싶은 것 같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이든 적그리스도이든 동생 마짱을 어떻게든 붙잡고 있는 이요와 오빠가 누구이든 그곳이 어떤 곳이든지 이요와 함께 하겠다고 결의를 다지는 마짱이 있으며, 죽은 언니를 생각하며 어떻게든 아프리카로 가기 위해 애쓰는 젊은 여자(라베오)가 있고(<익사>의 우나이코를 연상시키는 캐릭터다), 하마에게 어깨에서 옆구리까지 물린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왓, 왓!"하고 부르짖으며 그 상황을 벗어난 젊은이가 있다. 또한 '울보' 느릅나무를 오에의 아버지-오에-이요에게 연결되는 생명의 나무 '레인트리'로 탈바꿈시킨 아이들의 노력도 있다. (<'울보' 느릅나무>)

 

이 다음의 세대들을 위해 그렇다면 오에 세대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어쩌면 겨우, 그러나 사실 무엇보다도 결연한 이것 아닐까. 그것은 <익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시대정신에 물든 한 세대를 기꺼이 익사시키고, 다음의 세대에게 응원을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에 자신에게는 안락한 삶이나 기존의 방식에 은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하마에 물려 왓, 왓 하고 내뱉는 절규, 다른 말로 하면 <익사>에서와 같이 글 조각 하나에 의지한 '붕괴의 양상'을 날카롭게 지켜보는 것이다.

 

9.

노년의 '나' 오에는 여전히 스스로에게 캐묻는다. 반전과 반핵, 아들 이요를 이야기하던 '나'에 그는 머물러 있지 않고 그는 앞으로 나아간다. 여기에는 이제 오로지 읽는 '나'만이 남는다. 현실의 타인들이 와 있던 그 빈자리에는 이제 책 속의 인물들이 실제가 되어 나타난다. <벨락콰의 10년>, <마고 왕비의 비밀 주머니가 달린 치마>. 현실에 나타난 벨락콰와 마고 왕비. 책 속에서 현실의 젊은이로 나타난 그들에게는 아직 갈림길이 남아있고, '나'는 늘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그 앞에서 머뭇거린다.

 

물론 오에 '나'는 머뭇거리는 자신에게 잊지 않고 카운터 펀치를 날린다. 초기 단편, 중기 단편, 후기 단편의 마지막들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 초기 단편의 마지막 <공중 괴물 아구이>에서 '나'는 아이들이 던진 주먹만한 돌을 맞고 실명한다. 중기 단편의 마지막 <'하마 용사'와 사랑스러운 라베오>에서는 엉덩방아를 찧고, 자신이 내부의 하마에게 물려 절규하고 살아왔음을 깨닫는다. 또한 후기 단편의 마지막 <불을 두른 새>에서는 전철을 기다리다가 아들의 몸을 껴안은 채 쓰러지며, 피를 흘린다. 머뭇거리는, 그 다음으로 나가기를 주저하는 자신에게 기꺼이 날리는 카운터펀치들.

 

그 카운터펀치를 맞고 어질어질한 속에서도 오에 '나'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아니 '나'는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으로 다른 방식의 희망을 끌어내고자 한다. <불을 두른 새>에서 그것이 잘못된 해석임을 깨닫지만 그 영혼과의 공생의 희망을 버리지 못한다. 휘파람새, 그러니까 불을 두른 새와의.

 

10.

오에는 그렇게 끊임없이 좌충우돌하며 조금씩 나아간다. 소설의 내용면에서도, 소설의 형식면에서도 그는 과거 속에 머무르지 않는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실험하고, 하나의 작가를 읽고 다음의 작가로 나아가며, 과거의 어떤 것을 반추하여, 그것에 얻은 것을 통해 익숙해진 것을 새롭게 바꾸어 나간다. 그의 말대로 그것이 아마 그의 소설 쓰는 습관일 뿐만 아니라, '삶의 습관'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강조하여 말할 수밖에 없다. 오에 겐자부로는 '고쳐쓴다'.

 

 

덧-1.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번호를 붙여서 글을 쓰는 것을 조금 '편법'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생각이 조각조각 나뉘어져 있고 그것을 연결할 능력이 안되다보니 어쩔 수 없이 글도 이렇게 조각조각 나뉘어져 버렸는데...언젠가는 이 리뷰를 '고쳐 써' 보고 싶다. 현재로서는 그럴 여력도 안되고, 너무 늦기도 해서...

 

덧-2.

작품의 발표년도를 제목 옆에 병기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책의 말미에 리스트의 형식으로 덧붙여져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작가의 전 생애를 가로지르는 단편집이라면 어떤 년도라는 것도 의미가 꽤 있는 법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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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화신

The Book | 2016.03.30 15:01 | Posted by 맥거핀.
시스터 캐리 (반양장) - 8점
시어도어 드라이저 지음, 송은주 옮김/문학동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지난 번 서평단 도서로 조이스 캐롤 오츠의 <그들>을 읽고, 이번에 연이어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시스터 캐리>를 읽으니, 시간을 되돌리는 타임머신을 탄 느낌이었다. 오츠의 <그들>이 1937년의 디트로이트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면, 이 소설 <시스터 캐리>는 그보다 시간을 조금 더 앞당겨 1889년의 시카고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연이어 두 개의 소설을 읽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읽다보니 두 개의 소설이 (여러 면에서 또한 다르지만) 적어도 한가지 점에서는 묘하게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이 소설들이 마치 어떤 사회학적 보고서처럼 읽힌다는 점인데, 오츠의 <그들>이 20세기 초반에서 중반에 걸친 미국 사회의 어두운 그늘을 세밀하게 묘파하고 있다면, 이 소설 <시스터 캐리>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에 걸친 미국 사회 초창기의 여러 단면들을 여과없이 드러내보인다. 19세기 중반, 철도교통의 발달은 대도시의 성장을 촉진시켰고(이 소설에서도 철도교통이 중요한 지점을 담당하고 있는데, 캐리를 컬럼비아시티에서 시카고로 이끈 것은 철도였고, 그녀는 그곳에서 그녀의 조력자가 되는 드루에를 만난다. 또한 허스트우드의 몰락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등장하는 것은 전차 운전이었다.), 대도시에는 이른바 '부의 씨앗'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배경이 되는 20세기 중반의 미국이 부의 대물림이 어느 정도 그 고착화의 양상을 드러내는 시기였다면, <시스터 캐리>의 배경이 되는 19세기 말의 미국은 조금 더 불확실한 가능성이 넘쳐나는 시기였다. 순식간에 성공의 길로 접어들 수도, 혹은 몰락의 길도 들어설 수도 있는 가능성 말이다.

 

시어도어 드라이저는 이러한 사회적 배경을 성실히 묘사하면서, 동시에 성공과 몰락을 효과적으로 대비시키며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데, 따라서 그의 이야기를 읽는 것은 마치 날 것의 생생한 사회학적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하면서도, 동시에 풍부한 서사가 읽는 즐거움을 안겨준다. 몇 가지 장면을 예로 들 수 있다. 소설의 초반부에서 묘사되는 것은 가난한 캐리와 부유한 드루에 혹은 허스트우드의 대비이다. 여러 변변치 않은 구직처를 전전하는 모습, 그러면서도 공상과 욕망을 놓지 못하는 캐리와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좋은 집에 살며, 모든 좋은 것들을 소비하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드루에와 허스트우드 일가의 모습은 효과적인 대비를 이룬다. 소설의 후반부에서는 이것이 역전된다. 연극배우로서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하는 캐리와 급격하게 몰락의 길을 걷게 되는 허스트우드의 모습은 소설 초반부의 대비보다 훨씬 극적이며, 독자에게 보다 빠른 속도로 책장을 넘기게 한다. 물론 드라이저는 이 대비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고 있는데, 그것은 다른 두 세계를 가능한한 세밀하게 교차하며 묘사하는 것이다. 초반부에 등장하는, 캐리가 잠깐 들어가 일하게 되는 공장에 대한 묘사와 그것에 비교되는 모든 것이 넘쳐나는, 심지어 허영마저도 넘쳐나는 허스트우드 가족 풍경의 대비, 또는 후반부에서 허스트우드가 전차 파업의 대체운전수로 잠깐 일하게 되며 벌어지는 일들과 캐리가 하루아침에 벼락스타가 되는 모습의 극적인 교차. "이 배우들한테는 원래 대사가 한마디도 없었지만 허스트우드가 전차 차고의 윗방에서 잠을 자던 바로 그날 밤, 그날따라 유난히 흥에 취한 주연 희극배우가 관객들을 좀 웃기고 싶었는지 근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p.555~556)" 이 묘사들은 이 이야기를 보다 극적인 것으로 만들면서, 동시에 당대의 미국 사회에 대한 세밀한 분석보고서로의 기능을 한다. 

 

(일종의 분석보고서로 위에 얘기한 오츠의 소설 <그들>과 이 소설 <시스터 캐리>를 연결지어 보면 재미있다. 예를 들어 허스트우드의 몰락. 어떠한 사회안전망도 없이 허스트우드는 그대로 순식간에 추락하여 빈민, 혹은 그 이하가 된다. 물론 그 반대편에는 갑자기 스타로 부상하는 캐리가 있다. 캐리의 성공 - 그녀의 성공은 재능 이상의 어떤 기묘한 무엇인가가 작동한다 - 은 아이러니하지만, 동시에 그에 못지 않게 허스트우드의 몰락도 아이러니하다. 이 가파른 상승과 하강. 반면 <그들>에서 로레타 가족에게는 가파른 상승은 없지만, 그렇다고 아주 가파른 하강도 없다. 로레타는 복지시설의 사람들에게 불평을 퍼붓지만, 그녀가 그녀의 삶을 조금이라도 유지시킬 수 있는 것은 어쩌면 그 복지정책의 덕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이런 비교도 가능할 것 같다. 전차 파업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드러나는 군중의 기묘한 연대와 분노. 반면 현대 사회의 군중들은 누구에게 분노하는가, 혹은 분노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가. 아무튼 이 전차 파업에 대한 묘사 부분에서 드라이저의 필력은 가장 빛을 발한다.) 

 

(내가 느끼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이 소설은 일종의 중간 지점에 와 있는 것 같다. 근대 산업혁명 시대에서 현대로 이행하는 배경적 측면에서도 그러하고, 엄격한 도덕률이 남아있던 빅토리아 시대의 문학과 앞에서 예로 든 <그들>과 같이 작가가 여러 장치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현대적인 문학과의 중간 지점 말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두 가지 부분에서 말할 수 있는데, 하나는 소설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드라이저 작가 본인의 목소리다.

 

이런 분위기는 금세, 쉽게 느낄 수 있다. 웅장한 저택, 화려한 마차, 번쩍번쩍 빛나는 상점, 레스토랑, 온갖 술집들 사이를 걷고, 꽃과 비단과 와인의 향기를 맡고, 사치스러운 영혼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와 도전적인 창끝의 빛처럼 뿜어져나오는 시선을 느끼고,...(중략) 세상이 이런 것들에 매혹되고 인간의 마음이 이를 꼭 도달해야 하는 바람직한 왕국으로 보는 한, 이것은 위대함의 왕국으로 남을 것이다. (중략) 아! 채워지지 않는 꿈. 정신을 갉아먹고 유혹하는 이 허망한 환상은 우리를 손짓하며 부르고, 손짓하고 또 부르다가 마침내는 죽음과 소멸이 그 힘을 녹여버리고 눈먼 우리를 자연의 품으로 되돌려보낸다. (p.383)

 

그 모든 향락이 결국 '우리를 유혹하는 허망한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각하는 이 목소리는 물론 캐리의 목소리도, 허스트우드의 목소리도 아니다. 그것을 자각하는 것은 이 이야기를 어딘가에서 내려다보는 작가 자신일 수밖에 없다. 이 소설에서는 중간중간 이렇게 서사나 묘사가 불현듯 멈추고, 작가의 날 것의 목소리가 드러나는 때가 있다. 이것은 <그들>과 같은 소설의 어떤 트릭이나 장치와는 다른 것처럼 느껴지는데, <그들>과 같은 소설에서 드러나는 작가 본인의 목소리는 이야기를 보다 더 다의적, 다층적으로 만드는 데 그 목적이 있다면, 이 소설 <시스터 캐리>에서는 일종의 중화제로서의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소설 중간중간 이루어지는 작가의 개입은 당대의 도덕률에 반하는 이 소설을, 당시 독자들이 읽는 마음의 부담을 덜어주는 기능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사람들 문제 있는 것은 나도 알고, 당신도 알잖아요, 그러니 죄책감 가지지 말고 읽으세요, 이런 느낌이랄까. (어떤 의미에서는 이를 작가의 '논란을 피해가기 위한 장치'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여러 논란을 피할 수 없었지만...)   

 

다른 하나는 이 소설에서 과거의 소설들과 다른 보다 현대적인 유형의 인간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른바 욕망의 화신(들).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소설의 등장인물은 '욕망하는 존재'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대체로 무엇인가를 욕망하고, 그 욕망이 서사를 추동해나간다. 그런데 이 소설의 캐리가 다른 과거의 인물들과 다른 점은 (뒤의 작품 해설에서 잠깐 언급되듯이) 그녀는 욕망하되, 무엇을 욕망하는지 모른다는 점에 있다. 그녀가 좇는 꿈은 부인가, 명예인가, 인기인가, 혹은 사랑인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인가. 캐리는 이 소설에서 흔히 우리가 성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도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마지막에서도 흔들의자에 앉아 여전히 무엇인가를 갈망하고 있다. "화려하게 빛나는 위치에서도 캐리는 불행했다.(p.652)" 그녀는 행복을 갈망하지만, 과연 무엇을 채워야 행복에 이르게 되는 것일까. 그녀는 결국 이룰 수 없는 것을 욕망하고 있다. 그것을 어쩌면 '욕망하는 것 그 자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해서 그녀는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 욕망 그 자체로서, 진정한 의미에서 욕망의 화신으로서.

 

이제 앞으로 많은 현대소설에서 아주 빈번하게 등장하게 될, 아니 우리가 현실에서 수없이 보게 되는 그런 인간형의 탄생, 아니 어쩌면 현대사회 인간들의 특질이라고 불러도 될 만한 것의 등장을 여기에서 목도한다.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좇는 사람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정작 무엇을 좇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그것을 '좇는다'는 사실을 멈출 수 없는 사람들. 그래서 어쩌면 이 소설이 그렇게 재미있게 읽혔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 소설이 보다 현대의 독자들에게 더 사랑받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지금 드라마 같은 것으로 만들어져도, (약간의 양념만 더해진다면) 상당히 인기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이 소설은 영화화된 적이 있다. <로마의 휴일>, <벤허> 등을 만들었던 윌리엄 와일러 감독에 의해 1951년 <캐리>라는 제목으로 제작되었다. 주연 캐리 역은 제니퍼 존스가 맡았는데, 살짝 안 어울리는 것 같기도?) 사람들은 은연 중에 이야기에서 자신의 모습들을 찾으려들고, 그것에 자신의 모습이 언뜻 비쳤을 때 그 이야기를 좋아하게 되니 말이다. 그리고 우리들 대부분은 아니 적어도 나는, 무엇을 욕망하는지도 모르는 채, 여전히 무엇인가를 욕망하고 있으니.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흔들의자에 앉아, 창가에 꿈꾸며 홀로 갈망하리라. 창가의 흔들의자에 앉아 결코 느끼지 못할 그런 행복을 꿈꾸리라. (p.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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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꿈

The Book | 2016.03.09 03:04 | Posted by 맥거핀.
그들 - 10점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김승욱 옮김/은행나무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가끔 그런 이야기들이 있다. 이야기의 의미나 교훈을 찾아내는 것을 포기하고, 그저 인물들의 삶을 따라 읽게 되는 이야기. 더 읽어내려가는 것이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그들의 삶을 누군가가 지켜봐주어야 할 것 같은 이야기. 사실과 환상, 실재와 가상, 나의 생각과 주인공의 생각이 얽혀들어가,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점점 분간하기 어려운, 종내에 이르러서는 그것을 굳이 구분하는 것이 별 의미가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이야기. 거짓이길 바라는 이야기가 실제이고, 실제이기를 바라는 이야기가 거짓인 이야기. 고통스러우면서도 읽어내려갈 수밖에 없는 독서. 나에게는 조이스 캐롤 오츠의 <그들>이 그랬던 것 같다. 

 

<그들>에게는 두 가지의 장치가 있다. 하나는 이 소설이 로레타라는 소녀의 어린 시절부터 그녀가 낳은 줄스, 모린, 베티 등이 성인이 되던 시기까지를 종(縱)으로 훑고 있는 소설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이 소설은 결코 한 가지의 사건이 중심이라고 말할 수 없다. 어떤 특정한 하나의 사건을 횡으로 펼쳐내, 그 사건이 중심이 되어서 이야기가 펼쳐지는 구조가 아니라, 이들의 삶을, 이들이 그려내는 삶의 궤적을 계속 지치지 않고 꾸준히 따라가는, 어떻게보면 사회학에서 다루는 종적 연구의 한 형태라고 볼 수도 있다(책 날개의 작가 소개에 이런 대목이 있다. "오츠는 생생한 심리 묘사와 사회 분석을 융합한 일련의 소설들을 통해 미국 사람들과 미국의 제도를 계속 탐구했다."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다큐로도 제작되었던, 사당동의 한 빈민가족을 25년간 추적해 한국 사회 빈곤의 종적 영속성을 살펴보게 했던 사회학자 조은의 연구 <사당동 더하기 25>를 떠올렸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 소설에서 로레타나 줄스, 모린 등등의 인물에 대한 특정적인 묘사 못지 않게 중요해지는 것은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배경과 시기이다. 이 경우 어떤 의미에서는 로레타, 줄스, 모린 등의 인물은 특정의 '누구'라기 보다는 그 시대의 영향을 받은 인물상들의 어떤 특징들이 혼합된 '누구'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 소설 뒤 작가 발문의 한 대목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그들>의 등장인물들이 내 소설에 나오는 대부분의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나와 다른 사람을 합친 '혼합물'이라고 간단히 대답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그렇다." p.716)

 

그렇다면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시기는 어떤 시대인가. 소설은 사랑에 빠졌던 소녀, 로레타가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일에 휘말려 얼떨결에 원치도 않은 상대와 결혼을 하던 1937년 8월의 어느날에서 베트남전과 반전운동, 인종차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폭동이 벌어지던 1967년의 디트로이트까지를 다루고 있다. (디트로이트 흑인 폭동은 1967년 7월 23일에 발생하였으며, 당시 사상 최대 규모의 흑인 폭동이었다. 검색하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이 사건이 <허트 로커>를 만들었던 캐서린 비글로우에 의해 영화화되어 2017년에 개봉될 예정이라니, 이 책을 읽으신 분은 나중에 한 번쯤 챙겨보셔도...) 1937년에는 1929년의 대공황에서 벗어나 성장하던 경제가 다시 침체에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일시적이었고, 이후 제2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미국 경제는 다시 급격하게 성장의 길에 들어서며, 이후 1960년대까지 미국 경제는 급격하게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성장이 낳은 부작용들은 많았다. 빈부격차는 엄청난 속도로 가속화되었으며, 전후 매카시즘, 인종문제 등으로 사회의식 면에서는 성장의 속도가 더뎠다. 도시빈민은 급증하였으며, 도시의 슬럼화된 곳은 점점 늘어났으며, 낮은 의식수준 및 환경과 교육의 영향으로 빈곤의 대물림은 이어졌다.

 

로레타와 그녀의 아들 줄스, 딸 모린이 살던 1950년대의 디트로이트가 그런 곳이었다. 자동차 산업 등으로 도시의 일부는 발달했지만, 빈부격차가 심했고, 로레타 가족이 살던 곳과 같은 슬럼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로레타 가족은 이른바 중간계층이었다. 도시빈민, 백인 하층민 계급. 그들 위에는 안정된 직장과 직업을 가진 백인 상층민들이 있었고, 그들의 아래에는(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아래라고 생각하는') 그들이 상대하기를 꺼리고, 무시하는 흑인들이 있었다. 소설에서 그들 도시빈민 백인들과 흑인들의 관계는 정확히 묘사되지는 않지만(주로 '그들', 그러니까 로레타나 모린이나 줄스는 흑인들을 피한다. 아니 피한다기 보다는 그들에게는 이들 흑인들은 고려할 필요가 없는 대상이나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그 '위'를 쳐다보기도 바빴으니까.), 반면 백인 상층민들과의 관계는 여러 관계를 통해 흥미롭게 보여진다. 예를 들어 줄스가 네이든, 혹은 페이와 버나드(이들은 발전하는, 사실 미쳐 돌아가는 미국 경제를 상징해서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와 같은 인물들을 만나서 벌이는 일들, 혹은 모린과 유부남 짐의 관계를 통해서 보면 꽤 재미있는 점들이 있다.

 

(사실 조이스 캐롤 오츠의 심리묘사는 너무나도 집요하고 다층적이기 때문에 이렇게 한 가지로 뭉뚱그려도 되나 싶지만) 나는 그것을 어떤 '양가(兩價)적 감정'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줄스나 모린이 상층민 백인들에게 의도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접근할 때 보면 그들의 감정은 극도로 양가적이다. 그들은 상층민들을, 상층민들의 삶을 너무나도 동경하고 바라지만, 동시에 그들에게 가까이 가는 것을 너무나도 두려워한다. 그들은 상층민들의 삶을 너무나도 열망하지만, 그것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파멸에 가까워진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한다(반면 이들의 반대편에서 안주의 양상을 보이는 것은 로레타이다). 어쩌면 그것은 그들 사이의 경계가 너무 뚜렷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인데(조이스 캐롤 오츠가 이들을 대비하여 묘사하는 방식은 특징적인데, 줄스나 모린이 특히 이들이 사는 집을 겉에서 바라보는 장면들이 대표적이다.), 예를 들어 유리 상자안의 너무나도 가지고 싶은 보석을 바라보며 그것을 열망하지만, 그것을 억지로 열려고 하면 유리가 깨지고 말 것이라는 점을, 그리고 그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감당할 자신이 없는 자신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고 할까. 흥미로운 것은 이것이 반대편에서도, 그러니까 상층민 백인들에게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네이든이 줄스에게 대하는 태도, 혹은 짐이 모린에게 대하는 태도를 보면 비슷한 것을 찾아볼 수 있는데(특히 짐이 모린에게 접근하는 장면에 대한 묘사가 압권인데, 흥미롭게도 이 장면은 로레타, 줄스, 모린 이외의 인물로 시점이 이동하는 거의 유일한 장면이기도 하다.), 이들은 어떤 허위로 가득한 자신의 삶을 인식하고, 어떤 모험과 매력이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그들의 접근을 열망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접근, 그리고 그들과 삶이 연결되어 추락하는 것을 너무나도 두려워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동시에 로레타, 줄스, 모린 등의 서로서로에게서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것 또한 양가적 양상을 띤다. 그들은 가족으로서 기꺼이 서로를 사랑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기꺼이 서로를 증오한다. 어쩌면 그들은 서로에게서 결코 보고 싶지 않은 자신의 망가진 모습을 보지만, 동시에 그것이 어쩔 수 없이 버릴 수가 없는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기에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그녀(모린)는 앉는다. 그리고 거칠게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바라본다. 자신의 다른 자아가 인도에 서 있는 곳을. 사람들이 지나간다. 사람들, 낯선 사람들이 그녀의 주위에서 갈라져 그녀를 건드리지 않고 지나가는 것 같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지만 그녀 자신은, 그러니까 그 다른 자아는 점점 생생하고 눈부시게 변해서 인도에 서 있다. 그녀가 고개를 고통스러운 각도로 돌려서 버스에 타고 있는 모린을 바라본다. 죄책감과 야성이 뒤섞인 얼굴이다. (p.300)

 

이 죄책감과 야성. 그렇게 그들은 그 사이에 끼어있다. 죄책감과 야성, 혹은 열망과 두려움, 상승의 열망과 추락에 대한 공포, 혹은 백인 상층민들과 흑인들 사이에서. 이와 관련하여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줄스와 모린이 이 추락의 공포를 안은 불안한 상승, 혹은 불안한 상승 비슷한 것을 조금이라도 만들어내는 것은 마지막 디트로이트의 대규모 흑인 폭동(소설에서도 묘사되었지만 그것은 단지 '흑인' 폭동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었다.)과 맞물려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상층부의 백인들과 흑인들 사이에 '끼어'있었지만, 폭동으로 상징되는 흑인들과의 경계선이 더 뚜렷해지면서 상층부의 백인 사회로 진입할 실마리가 가느다랗게 생겨났다. 절도와 폭행, 포주, 심지어 살인까지 행한 줄스는 모트, 그러니까 빈곤 퇴치 행동 연합 회장이자 사회학과 조교수 피어시 박사와의 관계가 어느 틈에 만들어졌고, 모린은 야간대학에서 오츠의 수업(결국 <그들>이라는 이 소설은 모린이 '조이스 캐롤 오츠'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서 구성되었다. 여기에는 트릭이 있지만...)을 듣다가 짐까지 만났다. 로레타가 상층부의 삶을 비슷하게나마 짧게 '체험'하는 것도 이 때였다.   

 

사회학과 조교수 피어시 박사, 혹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작가의 분신 '조이스 캐롤 오츠'.(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소설은 어떤 사회학의 종적 연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줄스와 모린을 상층부로 연결시켜 준 가느다란 끈. 여기에 이 소설의 흥미로운 두 번째 장치가 있다. (처음 장치에 대해 너무 길게 이야기했으니 길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물론 길게 얘기할 능력도 못되니 짧게 마무리짓겠다. 헤르메스님이 이 부분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다루신다고 예고하셨으니 그 글을 읽으시는 게...) 다시 말해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 작가 본인의 직접적인 개입, 혹은 모린의 독백. 조이스 캐롤 오츠는 소설 앞에 붙은 '작가의 말'을 통해 이야기한다. 이 이야기는 소설처럼 구성한 역사 기록이며, 거의 대부분을 실제 '모린'의 기억을 바탕으로 삼았다고. 실제 소설 중간에는 모린이 작가, 그러니까 자신에게 야간대학에서 글쓰기를 가르쳤던 '조이스 캐롤 오츠'에게 보내는 편지도 두 편 삽입되어 있다. 이것을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까.

 

모린은 편지에서 말한다. "저는 선생님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저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시 외곽의 집에서 사는 저. 농장 주택 또는 식민지 양식의 주택인 이 집의 뒤편에는 울타리가 있고, 부엌에서 일하는 여자는 아마 바지를 입고 있을 겁니다. 아기는 아기 방의 요람에 있고, 창문에는 하얗고 얇은 커튼이 걸려 있습니다. 남편과 제가 함께 쓰는 침실, 거실 창문으로는 잔디밭과 길과 길 건너편의 집이 보입니다. 제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이런 삶을 아프도록 갈망합니다! 제 눈이 아프도록 갈망합니다.(p.462)" 모린은 아니라고 애써 부인하지만, 어쩌면 '이런 삶'은 '조이스 캐롤 오츠'의 삶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모린은 동시에 말한다. "하지만 그렇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미워합니다. 오로지 선생님만을. 심지어 그 남자들도, 펄롱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미워하고, 그것만이 제게 유일한 확신입니다. 결혼하고 싶은 남자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선생님에 대한 미움이. 선생님에 대한 미움, 책이 있고 말을 잘하고 결코 일어나지 않았던 일들을 완벽한 형태로 아주 많이 알고 있고, 남편이 차로 학교까지 데려다주고, 심지어 요즘은 가끔 신문에 사진까지 실리는 선생님, 지식을 지닌 선생님. 저는 이미 한평생을 살고 저 자신을 탈탈 뒤집었는데도 아무것도, 그 무엇도 얻지 못했는데 말입니다.(p.469)"

 

이에는 앞에서 말한 양가적 감정이 물론 들어있다. 그것을 다시 확인시켜주는 것이라면 별로 특이할 것은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질문. 왜 이것이 편지의 형태로, 그러니까 모린의 기억을 바꾼 소설의 형태가 아니라, 작가에게 보내는 직접적인 편지의 형태로 여기에 위치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이 편지를 받는 작가의 위치에 이것을 읽는 독자를 바꿔서 위치시키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편안한 방에서, "책이 있고 말을 잘하고 결코 일어나지 않었던 일들을 완벽한 형태로 아주 많이 알고 있"는 이 책 <그들>을 읽고 있는 당신이 이 그들의 삶을 읽는 것. 이것의 의미를 여기에서 묻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혹은 존슨 대통령이나 롬니 주지사(오바마랑 붙었던 그 '롬니'의 아버지다)나, 로버트 케네디나, 마틴 루터 킹이나 모두 다 죽여야 한다고 외치는, 그러나 안전한 곳에 위치한, 그랬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 사회학과 조교수 피어시, 혹은 모트, 아니 당신의 위치를 여기에 겹쳐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또 여기서 다시 질문. 그런데 이것이 작가가 모두 만들어낸 트릭이라면 어떨까. 사실 '모린'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결국 이 모린의 편지도 작가가 쓴 소설의 일부라면 어떨까. 그래서 나는 이 편지에 고개를 끄덕거리면서도 여기에 희미한 의심을 보낸다. 이것 또한 어떠한 의미에서는 작가의 견고한 방어막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 편안한 방에서 이 책을 읽고 있는 자신을 돌이켜 생각해보는 자신을 보고 있는 흐뭇한 이 또다른 자신. 그 '자신'이라는 존재가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있는 견고한 방어막 말이다. 이 편지들은 어쩌면 그 견고한 방어막의 일부로서 다시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어느 책 속 어느 곳에도 사실 진정한 '리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아닐까(물론 영화에 대해서도). 작가가 만들어낸 방어막 뒤에 안전하게 숨어서 <그들>이라는 책을, 이 긴 꿈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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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6.06.06 21: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리뷰의 첫문단을 읽자마자 고개를 끄덕이게 되네요. 작년에 조이스 캐롤 오츠의 몇몇 단편들을 읽었고 올해 처음으로 읽은 책이 <대디러브> 였는데 그랬던것 같아요. " 읽어내려가는것이 고통스럽고" "거짓이길 바라는 이야기가 실제이고" 어떤 위안이나 교훈같은것과는 거리가 먼 다 읽고 난 뒤에도 소설속 인물들에게 희망같은걸 기대하기 어려운.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그들>은 아직 읽지 않았지만 리뷰에서 언급하신 양가감정 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오츠는 인간의 상반되고 갈등하는 감정들의 최대치를 묘사하고 탐구하는 소설가 같아요. 그런점이 끌리는것 같기도합니다.
    리뷰 잘 읽었어요.

    자취는 남기지 않았지만 그동안 몇 번 들어와 글을 읽고 갔는데 답글을 쓰니까 정말 오랫만이구나 싶네요. :)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6.06.08 15: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는 사실 오츠는 이 소설로 처음 만났는데요. 쉽지 않은 독서였습니다. 이야기로서도 그렇지만, 심리묘사가 집요해서요. 인간에 대해서 집요하게 파고드는 작가인 것 같습니다. (따라서 호불호도 조금 갈릴 것 같군요.) 아무래도 신간서평단 같은 것 안했으면 읽다가 포기했을 것 같아요.

      저도 아주 가끔 트위터 들르는데, 그냥 글들 읽고만 갑니다. 그저 여전히 꾸준히 하시는구나,하고 생각하죠. 저는 영화글 같은 거는 점점 잘 안 쓰게 되는 것 같아요. 요새 워낙 여러 글들이 많아서 뭐 다른 말을 더 붙일 게 있을까 싶기도 하고....한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말들이 너무 많아서 지칠 지경...^^; 그래도 꾸준히 쓰면 남는 게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님의 마리오네뜨

The Book | 2016.02.24 20:56 | Posted by 맥거핀.
카인 - 6점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해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카인>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연결시켜 보면 재미있다. "하나님이라고도 알려진 여호와는 아담과 하와가 겉모습은 모든 면에서 완벽하지만 말을 한 마디도 못하고 심지어 아주 원시적인 소리도 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자신에게 짜증이 났을 것이다.(p.9)" "우리가 한 가지 확실히 아는 것은 그들(하나님과 카인)이 계속 논쟁을 했고, 여전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이제 끝이 났고, 더 할 말은 없을 것이다.(p.207)"

 

그러니까 이 이야기대로라면(다시 한 번 강조해두건대 '소설 <카인>의 이야기대로라면'), 하나님은 본인이 행한 이전의 일로 인해 마지막에 카인과 논쟁을 벌여야만 하는 셈이다. '하나님이라고 알려진 여호와'는 아담과 하와가 말을 못한다는 사실에 짜증이 났고, "다른 임시변통을 찾지도 않고, 다짜고짜 자신의 혀를 아담의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고, 그 결과 아담과 하와는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그로 인해 아담의 아들 카인은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었고, 그 결과 마지막에 이르러 하나님에게 따박따박 말대꾸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떤 말을? 하나님의 혀가 할 수 있는 말을, 그러니까 하나님과 같은 말들을. 다시 말해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것은 명백한 본인의 실수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겉모습이 완벽하게 보이도록 창조한 이후에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로 만족했어야 했다. 굳이 그 겉모습에 말까지 부여해 화를 자초할 이유가 있었을까.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죄악의 90% 이상이 입에서 나온다는 자명한 사실을, 모든 것을 다 아는 하나님이 몰랐을 리는 없지 않은가? 그랬다면 카인에게 되지도 않은 대꾸를 따박따박 들어야 했을 이유도, 바벨탑을 쌓은 이들의 말들을 모두 뒤바꾸어야 할 이유도, 죄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을 내려야 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어떤 잘못된 일이라도 한 가지 소득 정도는 얻을 수 있는 법이니, 그로 인해 하나님이 얻게 된 소득은 있다. 그것은 그의 분신과도 같은 자, 그러니까 창조주 아비를 꼭 닮은 자식 카인을 얻게 되었다는 점인데(모든 아버지들의 소망이야말로, 자신과 꼭 닮은 자식을 얻는 게 아니겠는가), 책을 읽다보니 어떤 의미에서는 카인이 곧 하나님이요, 하나님이 곧 카인이 아닌가 하는 되먹지 않은 의심마저 품게 되었다. 몇 가지 증거들이 있다. 첫째, 하나님과 카인이 벌이는 논쟁의 양상을 보면, 이 논쟁은 너무나도 합이 잘 맞는다. 무릇 어떤 논쟁이든, 논쟁이 이어지려면 논쟁을 벌이는 이들 사이에 수준이 맞아야 하는 법, 하나님과 카인 사이의 논쟁은 잘짜인 연극 대본처럼 손발이 딱딱 들어맞는다. 그래서 위에 인용한 바와 같이 "그들이 계속 논쟁을 했고, 여전히 하고 있"는 것일 테다. 어쩌면 하나님은 그 위에서 혼자서 너무나도 심심한 나머지 논쟁을 벌일 말 상대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혀를 밀어넣어, 자신의 말을 할 수 있는 대상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아담은 과묵한 편이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잘못만은 아닐 것이다. 어떤 것이든 처음 만들어진 작품은 어딘지모르게 허술한 법이고, 종자는 개량되는 법이니. 둘째, 소설 속에서 하나 신기한 점은 카인이 하나님이 벌이는 중요한 일들을 모두 빼놓지 않고 관람한다는 점인데, 카인은 모세와 여호수아, 아브라함과 이삭, 욥, 노아 등등의 구약성서의 주요 인물들을 뒤죽박죽으로 만난다. 소설 속에서 카인이 이들을 만나게 되는 이유는 상당히 모호하게, 또는 의도적으로 허술하게 서술되어 있는데(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카인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나귀가 자신을 데리고 과거의 많은 길들 가운데 한 곳을 따라가는지, 아니면 미래의 어떤 좁은 길을 따라가는지, 아니면 그저, 아주 단순하게, 아직 드러나지 않은 어떤 새로운 현재를 통과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p.146)"), 이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물론 가장 간단한 해답은 하나님이 그를 그곳에 데려다놓았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곧 카인 자신으로서 이 모든 일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다고 말하지 않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셋째, 이와 관련해서 책을 읽다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구약성서의 이야기들이 뒤죽박죽 얽혀 있는 이 이야기에서 서사적으로 기능하는 듯이 보이는, 그래서 조금 따로 외따로 떨어져있는 듯한 대목이 있는데, 그것은 카인이 릴리스에게 되돌아오는 부분이다. 창세기의 세계를 신나게 돌아다니던 카인은 나귀에게 이끌려 릴리스에게 돌아오게 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대목에서 카인은 릴리스에게 어떤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된 이야기를 몇 가지 하는데, 그것에는 카인의 흥미로운 고백이 들어있다

 

나는 카인이에요, 기억하죠, 동생을 죽이고 그 죄 때문에 벌을 받은 사람입니다. (중략) 하지만 하나님, 우리가 여호와라고 부르는 하나님이 먼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중략) 아우를 죽이고 이 침대에서 당신과 잔 것은 모두 같은 원인에서 나온 결과들이에요. 어떤 원인.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 운명의 손안에 있다는 것, 하나님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자면 말입니다. (중략) 글쎄요, 내가 다시 나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면, 이렇게 내 의지와 전혀 관계없이 한 과거에서 다른 과거로 뛰어다니는 일이 멈춘다면, 나는 흔히들 정상 생활이라고 부르는 삶을 살 겁니다, (p.155~156)

 

즉 카인은 안다. 자신이 하나님의 운명의 손안에 있다는 것, 혹은 자신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마리오네뜨라는 것. 또한 카인은 여기서 다른 고백도 한다. "아니요, 내가 거기에 가 있었어요. 아무도 미래에 가 있을 수는 없어. 그럼 그걸 미래라고 부르지 않기로 하죠, 다른 현재, 아니면 여러 다른 현재라고 부르죠 뭐. (중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미래는 이미 적혀 있어요, 우리가 그것이 적힌 페이지를 읽는 법을 모를 뿐입니다, (p.153~154)" 미래를 미리 보는 이, 혹은 다른 현재, 여러 다른 현재에 동시에 가 있을 수 있는 이, 그가 하나님이 아니면 도대체 누구겠는가? 물론 가장 흥미롭고도, 기이하고도, 명백한 사실은 하나님이 카인에게 표식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이 대목을 읽고 나면 누구나가 의아해지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은 카인이 아벨을 죽인 것을 알고 있고, 그에게 얼마든지 벌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왜 그에게 표식을 주고, 그를 죽음에서 면하게 해주는 것일까. 카인이 그 자신이 아니라면, 혹은 조금 덜 불경하게 말해서, 그가 그 자신의 분신이 아니라면 그럴 이유가 있을까.

 

다시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해 제 정신으로 조금 돌아오자. 이야기의 주인공은 카인이고, 이야기의 주된 얼개는 카인이 하나님의 이중성, 또는 악행, 모순들을 드러내는 구조이지만, 사실 엄밀하게 말해서 카인이 그렇다고 해서 의롭거나 선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가 아우 아벨을 죽인 것은 사실이며, 아벨이 죽을 죄를 저질렀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그 뿐인가. 그는 이후에 노아의 가족을 몰살시키기도 한다. 그의 영혼은 비었다.("네, 당신은 내 영혼을 삼킨 적이 있지요.(p.207)") 그는 하나님의 이중성과 악행과 모순을 고발하지만, 그 역시 악행으로 점철된 자라고 말할 수도 있다. 소설 속에서, 그들은 묘한 데칼코마니이다. 악행과 모순으로 얼룩진 이들. 카인은 하나님을 죽이기 위해 이 모든 일들을 저질렀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의 논리대로라면, 가장 먼저 죽어야 하는 것은 그 하나님을 꼭 닮은 자, 바로 자신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표식을 받았기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죽임을 당할 수 없다. 심지어는 표식을 내린 하나님 자신에게마저도. 여기에 이 소설의 어떤 아이러니가 있다.

 

<카인>의 이야기대로라면(참 무지하게 강조한다), 결국 모든 인간은 살인자, 아니 연쇄살인마, 혹은 실은 자신을 가장 죽이고 싶어했던, 자신을 죽였어야했던 자, 그러나 죽일 수 없는 자, 카인의 후손이다. 어쩌면 주제 사라마구가 보는 인간이란 그런 존재가 아닐지 모르겠다. 자신과 꼭 닯은 하나님을 죽이고 싶어하면서도, 결코 죽일 수 없는 자들, 심각한 모순 속에 빠진 자들, 그래서 그에게 어쩔 수 없이 영혼을 내어맡긴 나약한 자들.

 

 

덧.

그렇게 유쾌한 독서는 아니었다. 사실 <카인>의 이야기는 어떤 종교적인 것과 분리하여, 이야기 그 자체로 읽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개인적으로는 이야기 자체로만 보아도, 조금 이야기들의 얼개가 많이 헐거운 것이 아닌가, 그 비판이나 풍자도 익히 예상할 수 있는 지점에 머무르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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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 서 있는 사람

The Book | 2016.01.20 15:24 | Posted by 맥거핀.
불안한 낙원 - 8점
헨닝 망켈 지음, 김재성 옮김/뮤진트리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그녀는 오랫동안 침대에 누워 세뇨르 바즈의 눈빛에서 발견한 두려움에 관해 생각했다. 어머니, 아버지에게서는 그런 두려움을 보지 못했었다. 스웨덴에도 물론 상류층이 있었지만 그들과 함께한다는 것은 두려워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는 달랐다. 여기는 모두가 두려워했다. 다만 백인들은 침착과 자기절제, 또는 사전 계획된 분노의 폭발 같은 가면 뒤에 두려움을 감출 뿐이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왜 두렵지가 않지? 두려워할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일까? 완전히 혼자여서?

 - p.160~161

 

"세상에는 세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죽은 사람들, 살아 있는 사람들,

그리고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들이다." (플라톤)

- 책 머리에서

 

헤닝 만켈의 <불안한 낙원>은 여러 결로 읽을 수 있는 이야기같다. 한 여성 자아의 성장, 혹은 진정한 사랑찾기에 대한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고, 제국주의 식민지 시대의 아프리카의 현실을 드러내주는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며, 보다 더 여성적인 관점을 포함한, 다시 말해서 주인공 한나와 그의 어머니 엘린, 그리고 베르타, 백인 남성과 결혼한 흑인 여성 이사벨, 펠리시아를 비롯한 매음굴 여성들, 테레사 등등의 수많은 여성들의 목소리에서 나타나는 '여성'이라는 존재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혹시 더 나아가면 이 '불안한 낙원'이라는 명칭이 말해주는 어떤 비유와 은유에 대해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읽으면서 계속 느낀 것은 이 이야기들이 어떤 실체를 가진 무엇이라기보다는 단지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한 어떤 신화처럼 느껴지기도 했는데, 그것은 소설 속의 이야기들이 비현실적이어서가 아니라 - 해닝 만켈은 책 뒤의 후기에서 이 이야기가 실제의 기록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 어쩌면 내가 전혀 알 수 없는 세계, 즉 20세기 초반의 스웨덴과 아프리카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즉 그만큼 나의 지식과 상상력이 협소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것을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로 읽고 싶은데, 위의 인용문에 나오듯, 한나가 어쩌다 머물게 된 아프리카의 포르투갈령 로우렌소 마르케스(현재의 모잠비크)에서는 흑인과 백인 모두가 서로를 두려워한다. 흑인들은 백인이 가진 공권력과 폭력을 두려워하며, 백인들은 흑인들 내부에 오랜 억압으로 응축되어 있는 분노를 두려워한다. (그것을 한나의 표현대로 '그들의 숫자'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숫자가 많을수록 그 안에 응축된 분노의 수도 많아지는 법이니까) 다만 (위의 인용문에도 있듯이) 백인들은 그것을 가면과 위선 속에 숨기고 있을 따름이다. (예를 들어 백인들이 '흑인들이 모두 거짓말쟁이'라고 치부하는 것이나, 그들 나름의 전통적인 사고방식, 의술, 주술 등을 미개한 것이라고 꺼려하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일 것이다. 우리의 어떤 것에 대한 꺼림 속에는 사실 은밀한 두려움이 늘 내재해 있는 법이니 말이다.) 백인들은 백인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소위 문명화된 공간이 있으며, 흑인들은 또 백인이 더럽고 위험하다며 가까이 오려하지 않는 자신들만의 나름의 공간이 있다. 심지어 같은 공간에 있어도 백인들과 흑인들은 같은 벤치에 앉지 못한다. 백인들이 앉아있을 때는 흑인들은 서 있어야 한다. (한나가 아프리카에서 가장 먼저 이상하게 생각했던 점도 이것이었다.) 그것이 그곳의 법칙이다.

 

그런 법칙이 예외가 되는 공간이 있다. 한나가 머물고 있는, 그리고 어느 틈에 한나의 것이 된 세뇨르 바즈의 매음굴. 그곳에서는 흑인과 백인이 같이 한 공간에 머물며, 같이 잠자리에 든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백인 남성이 흑인 여성에게 돈을 주고 그 댓가로 성적 서비스를 제공받는다. 물론 사실 이것은 '법칙의 예외'라고 보기 힘들며, 일종의 역설이다. 아프리카에서 흑인과 백인이 (물리적으로) 가장 가까이 있을 수 있는 공간이 매음굴이라는 어떤 아이러니. 그래서 어쩌면 한나는 그곳이 매음굴임을 알면서도 그 곳에서 떠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나가 처음 이곳에 투숙하게 된 것은 그곳이 단순한 호텔이라고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한나는 그 사실을 알게 된 이후에도 이 곳을 쉽게 떠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 곳이 흑인 여성들과 가장 가까이에서, 혹은 위선적인 백인사회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한나는 서로가 서로를 두려워하는 외부의 공간을 불편하게 생각하며, 매음굴에 가득한 흑인 여성들 사이에서 묘한 동질감과 안도감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한나는 그곳을 그렇게 명명했는지도 모른다. 불안한 낙원. 여자들이 자카란다 나무 아래 앉아있고, 제가 피아노로 돌아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조율을 계속하며, 침팬지 카를루스가 붉은 소파에 앉아 입술을 요란하게 두드려가며 오렌지를 먹는 곳.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그곳은 낙원은 낙원이되, '불안한' 낙원이라는 점. 그 곳이 '불안한 낙원'이라는 것은 그 뒤에 붙여진 이야기들이 말해준다. 매음굴 가운데에 있는 자카란다 나무 밑이 사실은 수많은 아기들의 공동묘지였다는 사실. 매음굴에서 태어난 불행한 아이들, 그리고 당연하게도 모두 흑백혼혈일 수밖에 없는 그 수많은 아이들이 그곳에 아무도 모르게 묻혔다. 아이들은 추악하지 않지만, 그 아이들을 그렇게 잉태시킨 수많은 백인들은 추악하다. 그들이 만들어낸 수많은 위선과 기만과 폭력의 산물들이 그렇게 감히 '낙원'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 매음굴 아래에 묻혔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이 매음굴로 한정되지 않는다. 제국주의 시절 백인들은 수많은 식민지에 온갖 거짓과 폭력과 위선을 행했으며, 그 결과물로 만들어진, 그들이 잉태한 추악한 부분들을 기꺼이 그 땅 속에 깊숙이 묻었다. 열대야자수가 늘어서 있는, 그들이 처음에 '낙원'이라고 불렀던 그 땅에 말이다.           

 

그러니까 이 매음굴은 일종의 식민지 아프리카라는 공간의 상징이며, 동시에 어떤 경계선이다. 많은 것들이 그 내부에 깊숙이 들어가 있을 때는 보이지 않는다. 어떤 것들은 경계에 섰을 때만이 볼 수 있다. 한나가 처음 아프리카에 도착했을 때 백인 사회로 깊숙이 들어가 버렸다면 그녀는 아마도 다른 것을 보고,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녀는 대신에 불안한 낙원, 흑백 혼혈아기들이 묻힌 이곳에 있는 유일한 백인 여성으로서 다른 어떤 것들을 보았고, 그 결과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것을 단지 우연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아버지와 어머니가 물려주신 이름, 한나 렌스트룀에서 선상요리사 한나 룬드마르크로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매음굴을 운영하는 세뇨라 바즈에서 이제 다시 스스로 선택한 이름, 아나 브랑카로. 이 이름들의 변화는 누군가의 보호 속에서 존재하는 여성에서 이제 스스로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주체로서의 여성이라는 주인공의 변화를 말해주면서, 동시에 이 여성이 계속 서 있던 위치에 대해서, 그리고 그 위치의 공통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한다.

 

타인에 의해서든,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서든, 혹은 어떤 우연의 결과물이든 간에 그녀는 항상 경계에 서 있었다. 강력한 추위가 지배하던 땅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 있던 그녀는 이제 죽은 사람도 아니고, 살아 있는 사람들도 아닌,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들(위의 플라톤의 말)이라는 또다른 의미에서의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 있는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흑과 백의 경계선에 서 있는 매음굴의 여주인에서 다시 더 나아가 흑인 사회와 백인 사회의 경계선에 스스로를 위치시킨다. 그녀는 기만과 위선이 존재하는 백인 사회에서 매음굴의 백인 여주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떨어져 나와있지만, 본인 스스로, 남편을 죽인 흑인여자를 구명하려 함으로써 그 사회와 더욱 확실하게 경계선을 긋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흑인 여성들 사이로 완전히 들어갈 수는 없다. 그녀와 매음굴의 흑인 여성들 사이에는 여전히 (침묵이라는) 경계가 남아있으며, 그녀는 그 경계선 위에 위태롭게, 혹은 불안하게 서 있다. 침팬지 원숭이 카를루스처럼. 어쩌면 그녀가 침팬지 카를루스에게 애착을 느끼는 것은 그것도 어떤 경계선 위에 서 있다고 생각해서 일지도 모른다. 동물과 인간의 경계에 있는 침팬지. 숲에서 태어났지만 인간사회에 너무 깊숙이 동화되어 숲으로 돌아갈 수 없는 침팬지. 그리고 하늘에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땅에 있을 수도 없는, 땅 위의 나무에 있거나 천장에 매달려 있는 침팬지.

 

하지만 땅에 닿는 순간 카를루스는 마치 발을 데기나 한 것처럼 움찔했다. 그리고 코를 킁킁대더니 잽싸게 문밖으로 나갔다.

한나는 놀라 카를루스를 바라보았다. 왜 나무 아래 땅바닥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전혀 짐작되지 않았다. 카를루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 옆에 앉아 차창 밖의 해풍이 얼굴을 어루만질 때마다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 p.216

 

그러므로 이 책의 결말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경계 근처에 온 사람, 혹은 경계에 서 있는 사람만이 경계 너머를 들여다보고  그 경계를 넘어 탈주할 것을 소망할 수 있으니. 사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녀는 추운 겨울 나무벽 사이로 꿈틀거리던 냉기가 느껴졌던 그 때부터 그 경계 너머의 삶을 꿈꾸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그녀가 행복했기를 빈다. 경계 너머의 삶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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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에 맞서는 혐오

The Book | 2016.01.10 17:03 | Posted by 맥거핀.

 

댓글부대 - 4점
장강명 지음/은행나무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장강명 작가의 책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읽은 책들(<한국이 싫어서>,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댓글부대>)에서는 뭔가 통하는 지점이 있다. 그것을 작가가 구사하는 일종의 전략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인데, 그것은 형식적인 면에서는 대화체나 구어체를 적극 활용하는 것, 그리고 그에 더 나아가 소설 전체를 누군가가 말하는 구어체의 진술로 구성하는 것(<한국이 싫어서>는 한국을 떠난 계나라는 인물의 편지형식이며,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에서도 여자의 구어체 진술이 소설의 뼈대를 이루며, <댓글부대>의 한 축은 찻탓캇과 기자의 인터뷰 녹취록을 그대로 수록하는 형식을 취한다.), 혹은 되도록 내용을 짤막히 분절시키면서 동시에 전체 내용을 줄이는 것(<한국이 싫어서> 204쪽,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188쪽, <댓글부대> 247쪽) 등이다. 다시 말해서, 결국 이 전략들은 한 가지 목표에 부합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목표란 (작가 본인도 인터뷰 등에서 밝히고 있듯이) 어떻게든 읽게 만든다,는 것이고 그 전략은 실제로 어느 정도 먹혀들어가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아니, 나는 ('전략'이라는 냉소적인 표현을 쓰기는 했지만) 단지 비판을 하기 위해서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바꿔 말하면 (사실 다른 작가들이 번번이 실패하고 있는) '일종의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한 단지 이런 형식적인 면 때문에 장강명의 소설이 많이 읽히고 있다고 말하는 것 또한 부당한 말이 될 것이다. 

 

<댓글부대>는 (적어도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재미있었다. 그 재미는 소설의 한 축, 그러니까 팀-알렙의 멤버들이 '합포회'라는 어떤 비밀조직의 지시를 받고 벌이는 온라인 교란 작전들(이렇게 뭉뚱그려서 표현하기에는 그보다 더 복잡하지만, 편의상)의 생생함에서 나온다. 그들이 벌이는 교란 작전들은 실제 우리가 온라인에서 보고 있는 여러 행태들과 시종일관 교차하기 때문에 실제로 우리가 보고 있는 것 이면에는 이런 것들이 있으리라는, 그 배후에는 권력과 결탁된(혹은 권력 그 자체인) 어떤 거대한 조직이 꾸미는 음모가 있으리라는 상상을 익히 하게 만든다. 그것이 실제이건 아니건, 소설의 핵심 중에 하나는 우리 상상력의 지표를 확장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온라인 교란 작전이 벌이는 상상력의 교란이 즐겁지 않을 이유는 없다. 다만 나는 그것이 소설의 나머지 한축과 결합되었을 때 그 결과물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그 결합이 작가의 미숙이건, 혹은 고의이건, 나는 그 결과물에 대해서는 어떤 이상함을 느꼈고, 그것을 여기에 짧게 이야기해보려 한다.  

 

앞에서 이야기한 팀-알렙의 멤버인 찻탓캇과 기자가 벌이는 인터뷰 녹취록이 보여주는, 온라인 교란 작전들의 전말이 소설의 한 축이라면, 나머지 한 축은 그런 팀-알렙과 '합포회'라는 비밀 조직과의 오프라인 커넥션이다. 그리고 이 내용의 상당수는 그들이 각종 유흥업소에서 벌이는 향락에 대한 세밀한 묘사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예를 들어 움베르트 에코의 <프라하의 묘지>와 비슷한 전략을 취한다. 에코의 <프라하의 묘지>가 19세기 유럽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위조 문서를 만들며 살아가는 시모니니(어쩌면 이것을 그 당시의 '온라인 교란 작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의 행위를 묘사하는 것과 동시에 그의 탐욕스러운 행동이나 그의 식탐에 대한 묘사를 병행하며 그에 대한 독자의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면, 이 소설 <댓글부대>는 온라인 교란 작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동시에 그 교란 작전을 벌이는 주체들이 벌이는 향락을 묘사하며 그들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식이다. (물론 이 묘사가 적절한가, 즉 그 목적에 적절히 부합하고 있는지는 조금 더 생각해 볼 여지는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소설들은 시모니니나 팀-알렙이 구사하는 바로 그 전략을 역이용한다. 시모니니는 소설의 서두에서 위조문서를 만들 때 가장 좋은 전략 중의 하나는 그 문서를 읽게 되는 사람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혐오감을 적절히 이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에코는 교묘하게 바로 그렇게 말하는 시모니니에 대한 혐오감을 읽는 이들이 가지도록 유도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댓글부대>에서 팀-알렙이 구사하는 주요한 전략 중의 하나는 온라인에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혐오와 분노들을 적절히 활용하는 것이다. (이 책 3장의 제목은 (작가가 괴벨스의 어록이라고 떠돌아 다니는 문서에서 따왔다는)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이다.)  

 

나는 사실 이것이 조금 미심쩍다. 바로 소설에서 비판하고 있는 그 전략을 다시 자신의 소설에서 비슷하게 구사하는 것 말이다. 에코의 소설과 이 소설이 다른 것은, 에코의 소설은 그것이 단지 독자의 혐오감을 북돋우는 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소설 전체를 일종의 위조 문서처럼 보이게 한다는 목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에코는 시모니니가 만들어내는 역사를 기술하며, 동시에 그것을 거짓으로 보이게 하여, 독자들 스스로 그럼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동시에 (에코의 많은 소설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것을 에코가 소설로 구사하는 일종의 게임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강명 작가의 이 소설은 다르다. 그들이 벌이는 향락이라는 나머지 한 축에는 그런 장치가 없으며, 이 축에는 결국 읽는 이의 어떤 혐오,(혹은 그것이 잘못 작동했다면 어떤 동경)만이 남는다. 이런 모순화법은 사실 조금 이상하다. (거칠게 말한다면) 혐오가 잘못된 것이라 말하면서, 은연중에 누군가를 혐오하게 만드는 것 말이다. (비슷한 것으로 누군가의 독설을 비판하면서 독설적으로 말하는 것, 또는 누군가의 거짓을 비판하면서 그에 대한 거짓정보를 흘리는 것 등등이 있을 수 있다.)

 

(영화 <내부자들>을 보지 않으신 분들은 여기에서 건너 뛰시는 것이 좋겠다. 큰 스포가 들어있으니.) 다른 경우를 여기에서 같이 이야기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쩌다보니 영화 <내부자들>을 일반판과 감독판 모두 극장에서 보게 되었는데, 일반판이든 극장판이든 동일하게 구성된 이 영화의 구조가 있다. 그것은 영화에서 안상구(이병헌)의 기자회견 장면을 영화의 시작부분에 배치하고, 다시 플래시백되어 이야기가 시작한다는 점인데, 사실 이것은 조금 이상하다. 왜냐하면 굳이 이 장면이 앞에 나온 후 다시 과거로 돌아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굳이 이렇게 한 이유가 있을까? 여러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간단하게 말해서 나는 그것이 결국 이 장면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하는데, 다시 말해서 그것을 뒤의 우장훈 검사(조승우)의 기자회견과 대비시켜 그 장면의 함의를 생각해 보게 하는 것이다.

 

이 장면의 대비는 결국 말하는 이의 차이에 있다. 기자회견이 벌어지는 풍경도 같고, 말하는 이가 주장하는 내용도 같지만, 여론은 전혀 다르게 형성된다. 다시 말해서 대중은 어떤 것은 믿고, 어떤 것은 믿지 않는다. 그것은 영화 속에서 나온 거대신문사 이강희 주간의 말대로 "누가 깡패새끼 말을 믿겠나"는 것과 일맥상통하며, 동시에 "대중은 개돼지입니다."라고 말하는 그의 대사, 혹은 그가 우장훈 검사 앞에서 벌이는 이상한 논리의 언변과도 통한다. 즉 같은 사건이고, 같은 팩트라도 어떻게 말하는가에 따라서 "어떠어떠하다고 보기 힘들다"라고 말할 수도 있고, "어떠어떠하다고 보여진다" 혹은 "매우 보여진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그의 말은 대중이라는 존재가 매우 휘두르기 쉬운 존재라고, 혹은 개돼지라고 믿고 있는 그의 생각과 통한다. (감독판에서는 이것으로 모자랐는지 뒤에 이강희의 이런 논리를 다시 에필로그 식으로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영화 <내부자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보는 대중, 그러니까 바로 우리들에게 계속 반복하여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들은 바보라고. 그러니 저런 인물들이 거대신문사 논설주간이 되어 여론을 조작하고, 바로 저런 인물이 대통령후보가 되거나 대통령이 되는 거라고 말이다. 안상구의 기자회견을 앞으로 빼서 우장훈 검사의 기자회견과 대비시키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물론 누군가는 여기에서 반박을 할지도 모른다. 우장훈 검사의 기자회견은 별장 성접대 동영상이라는 확실한 물증이 있지 않는가,하고 말이다. 그런데 사실 나는 그것이 조금 이상해보인다. 그렇게 성접대 동영상을 무차별적으로 대중들에게 뿌려 이 상황을 타개하는 것 말이다. 그것은 사실 대중을 바보로 보는 것과 그렇게 멀리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동영상 하나만으로 지금까지의 거짓이 사실처럼 받아들여지는 것, 그것은 거대언론의 어떤 여론몰이와 그렇게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나는 그 내용의 진실여부와 별개로 그 즉각적인 반응과 태세전환이 한편으로는 여전히 의심스럽다. (여기에 더 나간다면 그 영상에서 접대여성들의 얼굴도 모자이크하지 않는 무신경함과 조상무를 처리하는 방식, 그리고 이 영화가 가진 결말의 어떤 미심쩍음 같은 것도 말할 수 있겠지만, 뭐 이 글은 <내부자들> 리뷰가 아니니까.)

 

지금까지의 어떤 의심들을 이런 질문으로 바꿔보자. <내부자들>은 바로 당신들, 그러니까 영화를 보는 대중들이 바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른 방식이 아닌, 바로 그 바보를 다시 역이용하는 방식으로 상황을 타개한다. 과연 이 때 영화를 보는 우리들의 사고는 이렇게, 그러니까 나는 바보니까 앞으로는 여론에 휘둘리지 말아야겠다,는 식으로 작동하게 될까. 그보다는 어쩌면 조금 다른 식으로, 그러니까 똑똑한 나는 그렇지 않지만, 바보 대중들 때문에 이 나라가 이 모양이 되어가고 있다는 어떤 분노에 가닿아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어쩌면 이 영화는 당신들이 바로 그 대중이라고 말하고 싶었을지 모르지만, 영화를 보는 똑똑한 대중들은 그들과 자신을 선을 긋는다. 아니, 나는 아냐, 그런 바보가 아니야. 그리고 어쩌면 영화를 만드는 그들도 사실은 우리들이 선을 긋기를 바랐던 것은 아닐까. (네가 바보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너는 아니지만 바보는 어딘가에 있다고 말하는 편이 당연히 더 쉽게 먹힌다.)

 

나는 장강명 작가의 <댓글부대>에서도 비슷한 것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온라인 상에 존재하는 혐오를 증폭시키는 이들에게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장강명의 이 책은 책 말미의 '제주4.3평화문학상 심사평'대로 "폭력을 드러냄으로써 궁극적으로 평화를 소망하게"할 수 있을까. 아니면 혹시 어쩌면 다른 방식의 다른 혐오들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 않을까.

 

 

덧.

정의를 말하는 영화들, 혹은 정의를 말하는 문학들이 득세하는 것은 그리 반갑지만은 않다. 그것은 현실이 그만큼 정의롭지 않다는 것의 반증일테니 말이다. 예를 들어 작년에 나온 영화만 해도, 정의를 이야기하는 영화들은 수없이 많았다. 영화에 나온 수없이 많은 괴물들. 그 괴물들은 차례로 영화 속에서 최후를 맞이했지만, 여전히 현실의 괴물들은 점점 늘어간다.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괴물이 쓰러지는 것을 통쾌하게 바라보는 우리들은 어쩌면 괴물에 맞서기 위해서 점점 괴물에 가까이 가고 있지는 않을까. 괴물이 되기를 은연 중에 소망하면서.  

 

혐오와 동경은 늘 가까이에 있으며, 그 대상은 종종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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