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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소멸하지 않겠다는 것

The Book | 2015. 4. 25. 15:22 | Posted by 맥거핀.

 

55세부터 헬로라이프 - 8점
무라카미 류 지음, 윤성원 옮김/북로드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이야기의 인물들은 무엇인가를 마신다. 혹은 마시려고 애쓴다. '결혼상담소'의 나카고메 시즈코는 홍차를,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 번'의 인도 시게오는 맛있는 물을, '캠핑카'의 토미히로 타로는 커피를, '펫로스'의 다카마키 요시코는 보이차를, '여행 도우미'의 시모후사 겐이치는 햇차를 마신다. 왜 이들은 이렇게 무엇인가를 마시는 것일까.

 

누구나 힘든 시기가 있다. 정신적으로 불안할 때 먼저 마실 것을 천천히 음미할 수 있다면 어떤 사람이라도 마음이 진정될 것이다. 그것은 의식 같은 것이며 그 누구에게도 의존할 필요가 없다. 텔레비전에서 자살 뉴스를 접할 때마다 얼마나 힘든 일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저 사람은 뭔가 좋아하는 음료를 천천히 마시면 마음이 진정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 '결혼상담소' p.58

 

"왜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 같은 데서 패닉이랄까, 너무 슬프거나 괴로워서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진 사람에게 심호흡을 하라고 하면서 물을 마시게 하잖아요.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는 차를 즐길 여유가 없지요. 저는 그래서 차라든지 음료는 단순히 수분을 공급하는 것을 넘어서서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슬픈 일이나 힘든 일이 있을 때 천천히 차를 마시면 도움이 많이 된다고 생각해요."

- '펫로스' p.247~248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마신다는 것은, 이들에게는 어렵고 힘든 시기를 버티게 해주는 것이다. 왜 어렵고 힘든가. 예를 들어 그것을 일본 경제와 맞물려서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50대 중반의 나이인 소설 속 인물들이 한창 활동하던 예전의 일본은 버블 경제의 시대였다. 호황이 이어졌고, 많은 이들에게 좋은 시절이었다. 그러나 버블은 꺼졌고, 이제 그 시절은 끝났다. '여행 도우미'의 시모후사 겐이치의 말을 빌리자면, "버블 붕괴 이후밖에 모르는 세대는 이처럼 혹독한 노동 환경을 당연하게 여길지도 모르지만, 고도성장과 버블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지옥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일본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제목에도 있는) 55세라는 나이는 그런 시기인지도 모른다. 직장과 사회에서는 이제 물러나야하지만, 자식들은 완전히 성장하지 않았고, 수입은 없지만 여기저기 돈 들어갈 일만 많이 남은 시기. 그것은 경제적인 문제 뿐만이 아니다. 가족 간의 대화는 점점 줄어들고, 배우자의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이 보이며, 자식들과의 대화는 점점 어려워지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이제 두렵기까지 하다. 한마디로 애매한 시기, 무엇인가를 이뤄냈다고 말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이제 무대 뒤편으로 물러날 것을 요청받는 시기. 그러나 무대 뒤 불꺼진 대기실에서의 삶은 아직도 너무나도 길게 남아있다.

 

이러한 경제적인 압박과 세대 일반으로서의 중압감은 이들에게 두 가지 이상(異常) 증세로 나타난다. 먼저 하나는 눈에 보이는 육체적인 혹은 정신적인 이상에 대한 묘사.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 번'의 인도 시게오에서 나타나는 만성적인 허리 통증, '캠핑카'의 토미히로에게서 나타나는 정신적인 불안증과 우울증, 혹은 '펫로스'의 다카마키 요시코의 급격한 현실감 상실. 이 이상 증세들은 현실의 문제들과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본인들도 정확한 이유를 모르며, 해결책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다른 하나의 이상 증세는 일종의 분노이다. 주인공들은 때로 화가 치밀어 오른다. '결혼상담소'의 나카고메 시즈코는 남편의 말투는 물론 숨소리까지 불쾌하게 여기고,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 번'의 인도 시게오는 자신도 모르게 길을 막고 있던 노숙자에게 호통을 치며, '캠핑카'의 토미히로는 인재 파견 회사의 콧수염을 기른 젊은 직원에게 알 수 없는 적의를 느낀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그러한 분노는 사실 그렇게 명확하게 표출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을, 감정을 쉽게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일본인의 특성과 연결지을 수도 있겠지만, 단순히 그것이 이유의 전부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것은 한편으로 그것이 특정 개인에 대한 분노가 아닌 이제 무대에서 퇴장할 것을 요청하는 사회 일반에 대한 분노에 더 가깝기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삶을 꾸려가는 데에만 열중하느라 분노를 포함한 모든 감정을 다루는 법을 인물들이 점점 잊어버리게 된 것에서 이유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분노는 격정적이고 뜨겁게 타오르는 분노가 아니다. 그보다는 일종의 마른 분노에 가깝다. 말라버린 감정의 끝자락에서 스멀스멀 피어나오는 알 수 없는 적의.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무엇인가를 마시는 것이 아닐까. 어떻게든 마르지 않게 하려는 몸부림의 하나로 말이다. 왜냐하면 모든 마른 것은 불타기 쉬우며, 불은 상대방을 태우기도 하지만, 그전에 결국 본인을 태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불안하다는 것은 한편으로 소멸에 대한 불안감이기도 하다. 아무 것도 이루어내지 못하고, 삶을 충분히 즐기지도 못했는데, 이대로 불타 소멸해버리고 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여기에는 배어있지 않을까. 이것을 이렇게 말할 수도 있는데, 결국 무엇인가를 마신다는 것은 모든 존재에게 있어서 어떻게든 삶을 연장시키겠다는 의지이다. 예를 들어 '펫로스'에서 다카마키 요시코가 기르는 늙은 개 보비가 심장 이상 증세로 죽어가면서도 어떻게든 먹이를 먹고, 물에 적신 스폰지에서 물을 빨아들이려고 애쓰는 것은 삶의 의지라는 것의 의미를 명료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다카마키 요시코와 그녀의 남편은 그것으로 예상치 못한 위안을 받는다. 어떻게든 살고자 애쓰는 그 존재로서의 고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말이다. 혹은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 번'의 인도 시게오가 죽어가면서도 인간으로서의 아주 최소한의 품위를 잃지 않으려 분투하는 후쿠다를 보고 결국 얻게되는 정신적인 도움 말이다. 55세는 그대로 소멸하기에는 너무도 이른 나이니 말이다. 그들 앞에는 아직도 긴 삶이 남아있다. 그것이 고통으로 남을지, 혹은 감사함으로 남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것이 어떤 가능성으로 남아 있음을 부인할 수도 없다.

 

오랜만에 무라카미 류의 소설을 읽었다. 내 기억에는 2000년에 처음 출간된 <공생충> 이후로 처음 읽는 것 같다. 다시 그의 책을 잡게 된 것은 오랜만이지만, 1990년대 말 책 좀 읽는다,하는 대학생들이라면 누구나 그랬던 것처럼 나도 류의 소설들은 나름 꽤 읽었다. 글쎄. 무엇이 그의 소설을 읽게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가 유려한 문장을 쓴다거나, 혹은 어떤 삶의 진실이나 통찰을 전달해준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 소설집 <55세부터 헬로라이프>의 이야기들은 그렇게 특별한 이야기라고 보기는 어렵다. 어떤 사람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누구나의 이야기이다. 책의 후기를 보면 아마도 그것이 류의 의도였던 것 같다. 보통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 체력도 약해지고, 경제적으로도 만전을 기하지 못하고, 그리고 이따금씩 노쇠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의 보통 이웃들, 혹은 현재와 미래의 나의 이야기. 다시 말해서 이 이야기들은 통속적이다. 사실 '통속적'이라는 말의 의미가 흔히 조금 다르게 받아들여진다는 느낌이 있는데, 예를 들어 소위 막장드라마들이 통속적이라고 말해질 때의 어떤 이질감말이다. 왜냐하면 그 막장드라마의 세계들은 사실 현실에서 거의 일어나지 않는, 우리가 가까이에서 거의 볼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세계는 통속적이라기보다는 판타지에 가깝다. 그러나 이 류의 이야기들은 현실에 아주 가깝게 발을 붙이고 있다는 의미에서 아주 통속적이다. 이것은 류의 어떤 변화라고 말할 수도 있겠는데, 예전의 그의 이야기들은 특정의 세계, 특정의 문화, 특정의 인물들을 다루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아주 통속적인 이야기로 돌아왔다. 그리고 진정한 통속적인 이야기가 그렇듯, 이 이야기 역시 마음을 예상치 못하게 건드릴 때가 많다. 그러니까, 통속적인 이야기를 볼 때의 민망함을 어떻게든 견뎌내야만 한다. 아이씨,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보면서 울고 있지.

 

아니 통속적인 이야기로 '돌아왔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는 내가 관심을 두지 않은 때에도 사실 무엇인가를 계속 쓰고 있었으니까. 책 날개의 지은이 약력을 보고 새삼스럽게 놀랐다. 무라카미 류. 1952년 일본 나가사키 현에서 태어났다. 그가 이렇게 나이들었었단 말인가. 그리고 책을 다 읽은 지금 다시 그 나이를 보면서 생각한다. 1952년생 작가가 쓴 55살 나이의 이야기를 내 나름대로 생각하고 지껄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나이의 어떤 것을 지금의 내가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니 이 리뷰의 끝은 이렇게 맺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모르겠다. 정말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겠다. (55세가 되었을 때 이 책을 다시 읽고 리뷰를 다시 쓸게요. 물론 당신이 다시 읽지는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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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가능성

The Book | 2015. 4. 21. 16:39 | Posted by 맥거핀.

 

우리 동네 아이들 1 - 6점
나지브 마흐푸즈 지음, 배혜경 옮김/민음사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여러 해설이나 리뷰에서 이야기하는대로 나지브 마흐푸즈의 <우리 동네 아이들>은 알레고리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굳이 애를 써서 보려고 하지 않아도, 약간의 종교에 대한 배경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 즉 자발라위, 아드함과 이드리스, 까드리와 후맘, 자발, 리파아, 까심 등이 누구를 의미하고 있는지 읽어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다시 말해서 자발라위는 하느님을, 아드함과 이드리스는 아담과 사탄을, 까드리와 후맘은 카인과 아벨을, 자발은 모세를, 리파아는 예수를, 까심은 무함마드를 의미하며, 이 소설은 자발과 리파아와 까심의 행적을 묘사함으로써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각 기본바탕에 내재해 있는 것들을 알레고리 기법을 통해 각각의 이야기로서 들려준다. 그러므로 사실 이야기를 읽다보면 각 종교에 내재해 있는 어떤 물음들을 다시 반복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이 <우리 동네 이야기> 속 이야기대로라면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물음들이다. 자발라위는 왜 얼자 아드함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 장자 이드리스를 내쳤는가(하느님은 왜 악을 탄생시켰는가). 자발라위는 왜 형 까드리가 아니라 동생 후맘에게 나타났고, 후맘이 까드리에게 죽도록 내버려두었는가(우리는 왜 살인자 카인의 후예가 되었는가). 자발라위는 왜 리파아를 구원해주지 않았는가(왜 하느님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도록 구해주지 않았는가)...등등의 물음들. 물론 이 중의 가장 근본적인 물음은 책에서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반복되는 질문이자, 종교 그 자체에 내재해 있는 질문인지도 모른다. 왜 자발라위는 대저택에 은거하고만 있는가, 왜 그는 직접 나서서 재산이 모든 사람에게 분배되도록 하지 않는가, 왜 그는 모든 사람이 핍박받고 고통에 빠져 있을 때 그들을 구원하지 않는가,라는 질문. 다시 말해서 신이 있다면, 왜 그는 세상의 모든 고통을 직접 나서서 구원하지 않는 것일까,라는 종교를 가진 사람이든, 아니든 간에 누구든 한번쯤 생각하게 하는 물음.  

 

물론 이 물음은 세상의 누구라도 쉽게 답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그것은 이 알레고리를 그려내는 작가 마흐푸즈도 마찬가지다. 대신 마흐푸즈는 하나의 이야기를 이 알레고리에 덧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라파의 이야기이다. 책의 마지막에 붙은 아라파의 이야기는 이 책에서 유일하게 어떤 종교적인 알레고리를 벗어나는 부분으로 아마도 그것이 작가가 직접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이었을 것이다(그래서 사실 그전 까심의 이야기까지는 지루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이 부분부터는 이야기가 약간 활력을 되찾는 것처럼 보인다). 동네에 나타난 마법사 아라파가 자발라위의 비밀을 밝히려다 자발라위를 죽게 만들고(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아라파가 자발라위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의 하인을 실수로 죽여 그 충격으로 자발라위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퍼지는 설정이다. 즉 자발라위는 처음 아드함과 이드리스의 이야기에서는 직접적으로 묘사되지만, 그 이후에는 어디에서도 '직접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자발이나 리파아가 자발라위를 만나는 장면도 직접적으로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발이나 리파아 입을 통해서 이야기로서 전해질 뿐이다. 다시 말해서 (설정을 그렇게 한다고 해도) 아라파가 자발라위를 결과적으로 죽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이런 물음을 여기에서 덧씌울 수는 있다. 자발라위가 죽은 것인가, 자발라위가 죽었다고 믿는 것인가), 폭력을 휘두르던 수장들을 제거하지만, 그가 결국 폭력과 억압의 중심에 있던 관재인과 한패가 되고, 그런 자신에 환멸을 느끼고 도망치려다 죽게 된다는 이야기 말이다. 이것은 무슨 이야기일까.

 

물론 해설에서 이야기하는 바대로, 마법사 아라파를 '과학(이라는 이름의 이성)'이라는 것에 대입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라파가 마법사라는 상징은 물론이거니와(고도로 발달된 과학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 아서 클라크), 예를 들어 그가 '본의 아니게' 자발라위를 죽게 만든다는 설정도 그러하다. 즉 오랫동안 사람들을 지배했던 것이 자발이나 리파아나 까심의 이야기, 즉 종교라면, 그 이후 새롭게 등장한 것이 마법사 아라파, 즉 과학이며, 과학은 '본의 아니게' 종교가 가졌던 신비를 상당부분 사람들에게서 걷어내었다. 또 그와 동시에 마법사 아라파가 마법의 병을 통해 수장들을 제거한 것처럼, 과학은 폭력과 억압에서 벗어날 어떤 가능성을 또한 제공해 준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물론 흥미로운 것은 마흐푸즈가 이런 마법사 아라파를 결코 긍정적인 인물로 그리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위에 얘기한 대로 마법사 아라파는 모든 이를 억압하는 관재인 까드리의 시녀가 되었으며, 과학은 또한 동시에 거대한 억압과 폭력의 도구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세계를 휩쓴 두 차례의 전쟁이 그렇게 거대해진 것이 결코 과학기술의 발달과 무관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것을 (거칠게 말하자면) 과학이 약하게 만들었던 종교와 연관지어 말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마법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아라파도 결코 부인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이다("우리는 어차피 죽게 되어 있어요. 불로 죽든 물로 죽든 마귀에 의해 죽든 몽둥이에 맞아 죽든 말이죠."- 2권 p.214 "우리 모두 죽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죽은 이들의 자식입니다." -2권 p.332). 그리고 관재인은 자발라위가 죽고 동네가 그의 것이 되었는데도,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다. 즉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관재인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자발라위가 죽고난 후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종교의 근원을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하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종교가 탄생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하며, 이는 종교의 역할을 마흐푸즈가 결코 완전히 부정하지도, 부정할 수도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것은 아라파가 죽음의 과정에 이르는 과정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데, 아라파의 파멸은 결국 그의 오만, 즉 자발라위가 그를 죽게 만든 아라파를 흡족해하면서 죽었다는 착각, 혹은 죽은 자발라위를 다시 살려낼 수도 있다는 맹신에서 시작되었으며, 아라파는 결국 그로 인해 죽음에 이른다.

 

그러므로 내게는 이 결말이 마흐푸즈가 찾은 어떤 적절한 균형점처럼 보인다. 과학과 종교의 어떤 균형점 말이다. 반복되는 리벡 연주에 맞춘 자발과 리파아와 까심의 이야기가 핍박받고 억압받는 동네 사람들을 구원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하지만, 그렇다고 아라파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다(예를 들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자발라위는 죽었다고 믿어졌지만, 사실은 완전히 죽일 수도, 혹은 죽을 수도 없으며(아라파는 그를 죽일 의도가 없었으며, 그를 끝끝내 어떤 형태로든 되살리려 애썼다), 아라파는 산채로 매장당했다(아라파의 죽음은 모호하게 처리되는데, 이 묘사는 그를 결국 죽일 수 없음을 말해주는 것 아닐까). 다시 말해서 종교든 과학이든 나름의 역할이 있지만, 그것은 모든 이를 완전하게 구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구원의 가능성이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책에서 나를 흥미롭게 만들었던 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앞에서 이야기한 자발라위에 대한 묘사이고, 다른 하나는 이 책의 자발이나 리파아, 까심과 같은 종교적 선지지가 아닌 평범한 '우리 동네 사람들'에 대한 묘사이다. 작품 내내 이 '우리 동네 사람들'에 대한 묘사는 긍정적이지 않다. 일부 현명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들은 핍박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이긴 하지만, 탐욕적이고, 서로를 시기하고, 남자들은 싸움을 즐겨하며, 아이들과 여자들은 욕설과 조롱을 퍼붓고, 약한 자를 짓밟으며, 강한 자에게 금새 아첨한다. 그들은 핍박받고 억압받지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어떠한 방법도 모른채, 매일 해시시 담배를 물은 채로 반복되는 리벡 연주를 들으며, 선지자의 이야기, 그러나 현재는 그저 한낱 종교적인 신화가 되버린 그 이야기만을 들을 뿐이며, 미망에 빠져 망각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늘 반복되는 폭력을 불러온다. 그러나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한 가지 다행스러운 구원의 가능성은 이제는 사람들이 더 이상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는 사실이다("하지만 사람들은 이야기꾼의 거짓말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거나 경멸스러운 내색을 보였다" -2권, p.357). 그리고 아라파의 마법의 노트를 가진 하나슈는 해방의 날에 대비해 청년들에게 마법을 전수한다.

 

이 마법을 전수받는다는 것. 그것은 종교를 맹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과학을 맹신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마법을 전수받는다는 것은 마법을 부리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제어할 능력도 배우는 것일 터이니 말이다. 그것은 맹목적으로 숭배하지 않는 것이며, 아라파를 자발이나 리파아, 까심의 위치에 올려놓지 않는 것이다. 마흐푸즈는 가능성과 불안을 동시에 열어놓는다. 우리는 어느 쪽인가, 불안인가, 희망인가. 구원의 가능성은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자발라위의 살해범이라는 것은 가당치 않다고 생각했고, 어떤 사람들은 설사 그가 자발라위를 죽였어도 동네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사람들은 앞다투어 그를 추앙했고 드디어 각 구역마다 그를 자신들의 구역 출신이라고 주장했다. (중략)

동네는 다시 폭력 행위가 난무하고 증오와 공포가 팽배한 험악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인내하고 끈질기게 학대와 억압을 견디면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들은 억울한 일을 당할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밤이 지나면 낮이 되듯 불의는 반드시 사라져. 우리는 우리 동네에서 압제가 멸하고 기적과도 같은 날이 훤히 밝아 오는 것을 분명 보게 될 거야."

- 2권, p.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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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테이션 게임, 모튼 틸덤

Ending Credit | 2015. 4. 16. 16:12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전체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튜링 테스트(Turing test)는 앨런 튜링의 모방 게임(imitation game)이라는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기계와 인간이 채팅을 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그러니까 사실 튜링 테스트와 모방 게임이 정확히 같은 것이라 할 수는 없다). 인간이 어떤 대상과 5분간 채팅을 하여 그 대상이 인간인지 기계인지를 판별하는 것이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은 전체 영화의 구조를 이 튜링 테스트와 비슷하게 만들어 놓고 있다. 영화의 시작부에서 우리는 앨런 튜링(베네딕트 컴버배치)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는 동성애 혐의로 경찰서에 소환되었으며, 형사에게 일종의 튜링 게임을 제안하는 중이다. 내가 하는 이야기를 주의깊게 들을 것, 그리고 다 들을 때까지 어떤 판단도 내리지 말 것. 그리고 그는 영화의 말미에서 형사에게 묻는다. 내가 기계인가, 인간인가. 혹은, 내가 전쟁영웅인가, 범죄자인가.

 

이렇게 앨런 튜링의 삶(전쟁영웅인가, 범죄자인가)과 그의 이론(기계인가, 인간인가)을 등치시키는 것처럼 영화는 전체적으로 앨런 튜링과 그의 이론을 교묘하게 등치시킨다. 예를 들어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의 키를 파악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앨런 튜링(물론 그가 농담에 가장 취약한 것은 농담에서는 표면적인 발화 내용보다 그 안에 담겨진 숨은 뜻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튜링이 군과 관계를 맺게 되는 것도 이와 묘하게 연결된다고 할 수 있는데, 군에서의 대화란 그 반대로 대부분 표면에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처럼, 독일의 암호해독기 이니그마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튜링의 크리스토퍼(영화 속에서는 튜링이 그가 사랑했던 친구의 이름을 따서 만든 것처럼 나오지만, 본래는 다른 이름이었다고 한다)는 이니그마가 암호를 생성해내는 키를 파악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다. 그리고 튜링이 그 돌파구를 친구 크리스토퍼에 대한 사랑에서 찾는 것처럼, 이 이니그마의 해독에 대한 실마리가 열리는 것은 한 독일군의 여자친구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다(영화 속 설정을 따른다면 말이다). 그것은 영화의 중후반부에서 다시 비슷한 등치의 형태로 반복되는데, 이는 일종의 진화 양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즉 독일 이니그마의 암호를 깬 영국 측에서 그 암호를 깼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면, 튜링은 위험에서 조안(키이라 나이틀리)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그 거짓말은 튜링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진화이다. 튜링은 예전에도 친구 크리스토퍼를 모른다고 거짓말을 한 적이 있지만, 그 거짓말은 누가 보더라도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이번의 거짓말에서는 조안의 스매싱을 끌어내는 데에는 성공한다. 다시 말해서 이 등치는 튜링의 진화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튜링이라는 유사기계의 진화를 말해주기도 한다. 거짓말을 하는 기계, 그럼으로써 마치 인간인 것처럼 믿게하는 기계. 그것이 튜링 테스트의 본질이 아니던가.

 

 

그런데 물론 여기에는 두 가지의 문제가 남아 있다. 하나는 그것이 어느 정도까지 가능할 것인가의 문제. 즉 기계의 사고는 거의 인간과 유사한 수준까지 올라설 수 있는가의 문제. 실제로 작년 유진 구스트만(Eugene Goostman)이라는 인공지능이 최초로 튜링 테스트를 통과했다고 떠들썩했지만, 그것이 실제로 통과한 것인지, 더 나아가 튜링 테스트를 인간과 기계의 구분을 시험하는 리트머스로 쓸 수 있는지에 대해서까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튜링 테스트의 대안들도 나오고 있다). 다시 영화로 돌아온다면, 영화에서 이 문제를 정확하게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말미에서 앨런 튜링의 남은 삶을 다루는 것을 통해 어떤 짐작을 할 수는 있다. 영화의 말미는 쓸쓸하다. 그것은 앨런 튜링의 남은 삶을 묘사하는 방식으로도 그렇고, 영화 마지막에 붙은 에필로그로도 그렇다(그들이 남은 모든 자료를 불태우는 것). 아니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그래서 앨런 튜링은 형사와의 튜링 테스트를 통과했는가? 그것은 결국 실패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는데, 형사가 그것을 자신이 판별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불길한 징조이다. 왜냐하면 튜링은 그 앞에서 인간으로서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의 튜링은 삶에서도 결국 인간들 사이에 섞이는 것을 실패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그 혐오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영화 속에서 어린 시절의 튜링은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아니 괴롭힘을 넘어서서 일종의 혐오의 형태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튜링은 그것을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똑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크리스토퍼는 그에게 말해준다. 그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이라고. 즉 인간은 많은 부분에서 '다른 것'을 혐오한다. 동성을 좋아하는 것말을 더듬는 것, 지나치게 탐욕스러운 것, 뛰어나게 똑똑하거나, 눈에 띄게 어리석은 것, 키가 너무 큰 것, 키가 너무 작은 것, 너무 뚱뚱한 것, 너무 마른 것 등등...셀 수도 없는 수많은 '정상분포에서 벗어난 것'들을 혐오한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인간이라는 같은 종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예를 들어 '돼지'에게 너무 뚱뚱하다고 욕할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그것은 그 역을 의미하기도 하지 않을까. 즉 '기계'라는 다른 종의 문제에서는 이것이 흥미롭게도 반대로 작용한다. 다시 말해서 기계가 너무 인간과 비슷해지면 어느 순간 우리는 혐오감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굳이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로봇이 사람과 비슷해지면 질수록 인간의 혐오감이 증가하다가 그것이 어느 순간 변곡점을 넘으면 다시 급격하게 그 혐오감이 줄어든다는 이론)와 같은 이론으로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간 수많은 영화에서 이 언캐니 밸리의 골짜기에 빠져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봐왔기 때문에 그것이 그렇게 낯설지는 않다(다만 이것이 '골짜기'의 형태라고 확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이렇게 인간과 거의 유사한 형태로까지 로봇의 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혐오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것은 다시 적어도 다른 두 가지를 나에게 생각하게 만드는데, 먼저 하나는 영화라는 매체에서 작용하는 언캐니이다.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는 일종의 이미테이션 게임, 혹은 튜링 테스트이다. 즉 영화는 현실을 모방하여 모든 환영을 작동시킨다. 환영은 그들이 실재한다고 계속 거짓말을 하며, 관객은 그 거짓말에 속아넘어간다. 아니 기꺼이 속아넘어감으로써 그 거짓말을 즐긴다. 즉 이 때 흥미로운 것은 관객은 이 거짓말에 동참하기는 하지만, 이것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튜링 테스트로 비유하자면 네가 기계인 것은 알지만, 그 채팅이 즐겁기 때문에 네가 인간이라고 믿어준다랄까. 그런데 지금까지 영화는 그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던 것 또한 사실이다. 무성에서 유성에서, 흑백에서 칼라로, 2D에서 3D로 혹은 더 나아가 4D로. 영화는 어떻게 든 현실이 되려고, 아니 기계는 어떻게든 인간이 되려고 애써왔다. 그렇다면 그것이 자꾸 현실이 되려고 발버둥칠 때 그 혐오감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다시 시간의 방향을 되돌리는 것, 혹은 기술적인 발전을 애써 무시하는 것이 그 해답이 될까.

 

다른 하나는 현실에 존재하는 혐오와 같은 것이다. 영화 속에서 형사는 튜링에게 묻는다. 기계도 생각을 합니까? 여기에 튜링의 대답이 흥미로운데, 그는 그것이 어리석은 질문이라고 형사에게 답한다. 기계는 인간처럼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기계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되묻는다. "그런데 어떤 것이 당신과 다르게 생각한다고 해서, 그것이 생각하지 않는다고 봐야할까요? 그것은 단지 다르게 생각하는 겁니다." 이는 기계와 인간의 경우지만, 그것은 영화에서 암시하듯이 인간들 사이의 혐오를 생각하게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 같은 것들. 어쩌면 우리의 만연한 혐오는 쉽고 달콤한 유혹에 굴복했기 때문이 아닐까. 사이코패스, 일베, 혹은 종북과 같은 것으로 낙인찍고 싶은 유혹들, 그것이 달콤한 이유는 그것은 너무나도 간편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저 제정신이 아닐 뿐이다,라는 낙인은 너무나도 간편하며 동시에 우리의 혐오의 욕구를 만족시켜 준다. 우리는 동일하게 여기에 튜링처럼 되물을 필요가 있다. 그들이 다르게 말하고 다르게 행동한다고 해서, 그들이 생각하지 않는다고 봐야할까. 그들은 단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더욱 시급한 것은 그들에 대한 혐오나 빠른 격리보다도, 그 다른 생각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려는 노력이 아닐까. 왜냐하면 혐오와 격리는 번질 수밖에 없는 속성이 있으며, 우리는 다른 모든 사람을 혐오하거나 다른 모든 사람을 격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늘 만연한 수많은 혐오스러운 말들을 보며, 그 속에 존재하는 나의 혐오와 당신의 혐오, 이중의 장벽을 뚫고 그 안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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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에 본 영화들

Ending Credit | 2015. 3. 30. 12:53 | Posted by 맥거핀.

 

(<위플래쉬>, <꿈보다해몽>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3월이 지나가기 전에 3월에 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남겨놓고 싶다. 3월에 본 영화라고는 하지만, 사실 3월 중순 이전에 본 영화들이라, 기억에 남아있는 것들이 많지 않다. 영화를 본 직후에 무엇인가를 쓰는 것과 영화를 보고나서 일정 시간이 지난 후 무엇인가를 쓰는 것은 나름의 장단점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영화를 보고 나서 한참 있다가 무엇인가 기록에 남기는 것은 희미해지기는 하지만, 그것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은 그만큼 (나에게) 중요하게 받아들여졌다는 의미도 되겠지. 그것은 무엇일까.

 

 

먼저 <위플래쉬>. 이 영화는 음악을 보여주는 영화이지만, 나는 보는 내내 이 영화가 일종의 스포츠 영화를 연상시킨다고 생각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신체를 이용하여 정확한 동작을 해내는 것이 중요한, 그래서 예술과 스포츠의 경계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체조나 피겨스케이팅 같은 스포츠, 혹은 신체언어를 이용한 예술인 무용이나 발레와 같은 것 말이다. 즉 이 영화는 음악을 다루는 영화이기는 하지만, 음악을 영화에서 나타내는 방법이 예술가의 고뇌나 개인적인 일화, 혹은 그 '음악' 자체를 들려주는 것만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해서 음악도 일종의 신체 예술이라는 것. 예를 들어 체조에서 정확한 동작을 정확한 타이밍에 실수 없이 해내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드럼 연주에서도 정확한 위치를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한 강도로 타격하는 것이 중요하다(사실 드럼이 아니라 다른 악기라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양쪽 모두 그것을 지속시킬 체력과 근력, 즉 신체의 지탱이 필요하다.

 

그래서 <위플래쉬>의 촬영은 이런 신체를 이용하는 스포츠나 예술을 다루는 영화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예를 들어 이 영화가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블랙 스완> 같은 영화를 연상시킨다면, 그것은 내용상의 측면(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자)에서도 그러하지만, 한편으로는 촬영 같은 부분에서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다양한 클로즈업의 활용을 통해, 신체 그 자체의 움직임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점점 분열되어가는 니나(나탈리 포트만)에게 주목하게 만들었던 이런 타이트한 촬영은 이 영화 <위플래쉬>에서도 비슷하게 보여진다. <블랙 스완>에서 발끝이 지면과 충돌하면서 토슈즈에 배어나오는 피를 클로즈업하는 것이 관객에게 고통(이자 쾌감)을 전이시켰다면, <위플래쉬>에서는 손에 아무렇게나 칭칭감은 붕대에서 배어나오는 피를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는 것은 그의 고통(이자 쾌감)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즉 이 영화는 음악을 다루는 영화이지만, 이상하게도 음악을 자꾸 신체언어로 바꾸려드는 것 같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말하는 것과 같은 장면이 영화에는 있는데, 앤드류(마일즈 텔러)가 중요한 공연에서 결국 연주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어떤 연습의 부족이나, 정신적인 문제, 심한 긴장과 같은 문제가 아니라 말 그대로 그의 육체가 고장이 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는, 음악은 결국 몸으로 하는 것이라는 문제, 혹은 음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몸이라고 이상한 역설을 시도하는 것처럼 보인다(<씨네21> '김중혁의 바디무비'에서 왜 아직 이 영화를 다루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는데, 왜냐하면 음악을 다루기는 하지만, 그것은 지속적으로 음악에 대한 몰입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약간 비유를 섞어서 말하자면 음악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파동이 자꾸 눈에 보이는 땀, 피 혹은 악보의 음표로 치환되어 지속적인 피로감을 준달까. 다시 말해서 음악을 즐기러 갔는데, 고통을 체험하게 된달까.

 

그것은 이 영화가 한계를 넘으려는 자의 이면을 그리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그것은 다시 스포츠 영화의 화법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그간 많은 스포츠 영화들은 한계를 넘어서려는 자들을 즐겨 묘사하여 왔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일반적인 스포츠 경기를 보며 한계를 이미 넘어선 사람들의 전면에 있는 그 성취만을 주목했다면, 스포츠 영화들은 그 이면에 있는 한계를 넘기까지의 그들의 고통을 즐겨 그려오곤 했다. 앤드류가 한계를 넘어섰는가, 아닌가의 문제는 말많은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놓는다고 해도, 결국 이 영화는 앤드류가 그런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여정의 어느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는데, 물론 그것에서 교육에 대한 어떤 문제들을 생각해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사실 나처럼 교육학을 전공한 사람들의 상당수는 이 영화를 그다지 좋아할 수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영화는 수월성교육의 끝판왕이며, 수월성교육이라는 것을 평소에 찬성했던 교육학자들도 이와 같은 극단적인 수월성교육에는 그리 찬성표를 던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앤드류가 한계를 넘어서 버드, 즉 찰리 파커와 같은 뮤지션이 된다고 해도, 그 와중에 희생양이 되었던 다른 학생들의 인생, 즉 플렛처(J.K.시몬스)가 죽음에 이르게 했던 다른 제자의 삶과 같은 것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이를 '교육'이라는 것과 전혀 무관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플렛처는 실질적으로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영화 속에서 사실 플렛처가 유일하게 강조하는 것은 그저 '마이 템포'이다. 그리고 그는 학생이 그 템포에 맞출 때까지 계속 같은 것을 반복시킬 뿐이다. 학생은 그 템포가 어느 정도인지도 정확하게 모르고, 그것을 맞출 방법이 어떠한 것이 있는지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채, 그저 공포 속에서 같은 행위를 반복할 뿐이다. 소통의 단절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반복, 이를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앤드류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이를 플렛처에게 그대로 되돌려준다. 즉 지금까지 내가 당신의 템포에 맞추었으니, 이제 당신이 나의 템포에 맞추라는 것.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지점에서 둘은 은밀한 공명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서 적어도 그 공명은 음악에 대한 공명이 아닌, 어떤 방법론의 공명처럼 보인다. 일방적인 마이 템포로의 방법론. 다시 말해서 앤드류가 나중에 누군가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입장이 된다면 그는 플렛처 교수와 아주 비슷한 방법론을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아니 어쩌면 그는 플렛처에게 음악보다는 그런 방법론을 사실 배우고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앤드류는 자신이 싫어하는 과자도 타인을 위해 팝콘 속에 담아오는 것 정도는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후에 여자친구를 대하는 방식을 보면 그는 생활마저도 '마이 템포'로 하려든다. 그것이 교육학 석사를 다 마치지 못하고 때려친 나라도, 이 영화를 마음으로 좋아할 수 없었던 이유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서 있는 것과 같은 영화도 있다. 이광국의 <꿈보다 해몽>. 이 영화가 서 있는 것은 플렛처가 그토록 싫어했던 '굿잡'의 위치이며, <위플래쉬>에서 앤드류의 아버지의 방법론이다. 좌절하려고 하는 사람들, 혹은 힘들어하는 사람들에 보내는 따듯한 격려. '꿈'이라는 말에는 양가적인 속성이 있다. 그것은 실현될 수 없는 것, 허망한 것, 결국 닿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희망,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점, 혹은 희망을 가지려는 자세 그 자체를 말하기도 한다. <꿈보다 해몽>에서의 꿈은 전자보다는 후자에 훨씬 가까우며, 그것은 제목 그 자체가 한편으로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꿈의 무게는 현실보다 가벼울 수도, 무거울 수도 있다. 그러나 꿈은 그것이 현실보다 가볍다고 해서 무조건 들고 있을 수도, 혹은 현실보다 무겁다고 해서 무조건 내려놓을 수도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꿈을 받아들이는 자세, 즉 다른 말로는 해몽이다. 즉 누구나 현실과 꿈의 무게를 재지 않고, 그 꿈을 꿀 수 있는 자유, 그리고 그 꿈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유, 동시에 또 내려놓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이광국의 이야기 직조 방식과도 연관된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광국은 전작 <로맨스조>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도 이야기의 얼개를 이리저리 연결하는 방식, 이야기가 이야기를 불러오고, 현실과 꿈이 뒤섞이고, 처음의 실마리가 끝과 만나다가 다시 사라져버리곤 하는 기이한 연결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즉 일반적인 영화에서 관객은 어떤 이야기의 선을 잡고 영화를 보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광국의 영화에서는 그 선은 사라졌다가 종종 다시 나타나며, 그때마다 관객은 꿈에서 현실, 다시 현실에서 꿈으로 빠져든 듯한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된다. 즉 처음에는 꿈과 현실, 혹은 이야기와 현실의 경계가 명확해보였지만, 그 경계는 점점 사라지고 나중에는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경지에 이른다. 이 영화를 독해하는 방식은 그 얼킨 실타래를 어떻게든 찾아내 감독이 어딘가에 남겨둔 꿈과 현실의 경계를 찾아내는 것일까. 나는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보다 좋은 방식은 꿈과 현실을 굳이 나누려 들지 말고, 그 얼킨 실타래를 스스로 잘라붙여 이어보는 것이다. 우리가 이상한 꿈을 꾸고 난 후, 그 끊어진 꿈의 조각들을 스스로 이어붙여보는 것처럼 말이다. 즉 영화를 통해 꿈을 꾸었으니, 그 해몽은 스스로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쩌면 삶이란 이 영화에서처럼 늘 얼개가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며, 그것이 때로는 종종 더 나은 결과를 이끌어내기 때문이다(혹은 좋은 결과를 말해주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말해주는 것과 같은 장면이 이 영화에는 있는데, 꿈을 해몽해주는 형사(유준상)와 그의 누나(서영화)의 이야기 같은 것이 그것이다. 뇌출혈 같은 것으로 쓰러졌다가 회복해가는 누나를 형사는 돌보고 있는데, 누나는 쓰러지기 전에 달력에 동그라미 쳐둔 날짜가 무슨 날을 의미하는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형사는 누나가 여행가려고 정해둔 날이었나 보다는 식으로 눙치지만, 그 날은 사실 누나가 죽으려고 정해둔 어느 날이었다. 그러니 삶의 얼개가 더 잘 들어맞았더라면, 즉 누나가 뇌출혈로 쓰러지는 일 같은 것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더 나쁜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물론 더 좋은 일이 벌어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 얼개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삶을 한바탕 꿈이라고 한다면, 중요한 것은 그 꿈의 전개보다는 그 꿈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의 문제, 즉 해몽이다.

 

이광국의 영화에서는 이처럼 종종 마음을 건드리는 장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위에서 말한 형사가 사실 그날이 누나가 죽으려고 정해둔 날이었음을 몰래 알게 되는 장면, 혹은 전작 <로맨스조>에서 초희(이채은)가 우연히 촬영장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적힌 대본을 보는 장면 같은 것들 말이다. 영화 속의 인물들은 힘든 상황에 처해 있지만, 이야기를 통해 그들에게 따듯한 위로를 건네는 것과 같은 마법같은 장면들. 여러 사람들이 지적하였듯이 이광국의 영화에는 홍상수 영화의 인장들이 여럿 새겨져 있다. 꿈과 현실을 뒤섞는 것, 영화에 떠도는 죽음의 그림자, 인물의 이동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카메라(카메라는 좀처럼 인물을 따라가는 법이 없다. 한걸음 곁에서 묵묵히 지켜볼 뿐이다.), 그리고 빈번하게 등장하는 줌인과 줌아웃. 그러나 홍상수의 영화와 이광국의 영화는 약간 결이 다르다. 예를 들어 홍상수의 줌인이 주변의 인물을 프레임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라면, 이광국의 줌인은 보고자하는 인물을 더 가까이 끌어당기는 것이다. 홍상수는 카메라를 현실에 놓고 명계의 세계를 들여다보지만, 이광국은 카메라를 명계에 놓고, 현실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홍상수의 여인들은 겉으로는 연약해보이지만, 속은 누구보다도 강하고, 이광국의 여인들은 겉은 강해보이지만, 속은 누구보다도 여리다. 즉 이광국 영화의 그 결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훨씬 따듯하게 느껴진다.  

 

<씨네21>의 김지미 평론가는 994호에 실린 비평에서 이 영화가 전작의 동어반복이며, 너무 나이브한, 동화같은 순진한 이야기라고 평했다. 동화같은 순진함. 대체로 우리가 분노보다 위무에 더 박한 평가를 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 평은 조금 가혹해보인다. 김지미는 이 글의 부제를 '<꿈보다 해몽> 속 순진한 어른들이 도달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달았다. 그 현실은 <위플래쉬>와 같은 현실일 것이다. 오로지 최고만이 살아남는 세계. 그 최고가 되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계. 그것은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꿈보다 해몽>보다 <위플래시>가 더 각광 받고 있는현실(적어도 관객수라는 측면에서라면 말이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해보자. 어쩌면 이러한 현실에서 더욱 말할 수 없는 이야기는 최고가 아니라면 꿈은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보다는 아무도 보아주지 않아도 어떻게든 꿈을 가지려 노력하자는 이야기가 아닐까. 현실에 더 잘 맞춰주고 있는 것은 <꿈보다 해몽>보다는 <위플래쉬>인데, 그것을 나이브한 동화라고만 말해야만 할까. <위플래시>의 마무리는 개운치않은데, 그것은 내용보다도 그 싹둑 잘라버리는 영리한 쿨함이 보여주는 씁쓸한 뒷맛이다. 나는 그보다는 구질구질하고 시시콜콜한 그 <꿈보다 해몽>의 마무리에 더 손을 들어주고 싶다. 구질구질하지만, 그것이 나에게는 더 맛보고 싶은 맛이기 때문이다.     

 

 

 

 - 2015년 3월, 롯데시네마 영등포, 인디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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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ook | 2015. 3. 25. 12:19 | Posted by 맥거핀.

 


선셋 리미티드

저자
코맥 매카시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5-01-26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이 시대 진정한 거장 코맥 매카시가 그려내는 삶과 죽음, 희망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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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선셋 리미티드>는 코맥 매카시의 몇몇 전작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예를 들어 <카운슬러> 같은 것. 희곡이라는 이 책의 형식도 그러하지만(물론 <카운슬러>는 '시나리오' 형식이기 때문에 차이는 있지만), 그 내용상에서도 통하는 점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흑이 백에게 하는 일종의 카운슬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카운슬러>의 모든 카운슬링과 마찬가지로 이 카운슬링은 결국 실패한다. 물론 이 이야기에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은 책소개에 있는 설명대로 작품 <로드>이다. 그 설명을 그대로 가져온다면, 이 작품들은 '서사가 아닌 등장인물들의 대화가 이야기의 중심축이 되는' 작품들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운명이라는 원초적인 질문에 대한 심오하고 진지한 이야기를 담아'낸 작품들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물론 이 설명으로는 조금 어렴풋한 감이 있다. 무엇인 '인간의 운명'인가? 조금 더 쉽게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 <선셋 리미티드>에 나온 질문을 <로드>의 이야기로 치환해보자. <로드>의 세계. 모든 것이 이미 끝장나버린 세계의 어느 끝자락,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 곳, 살육과 약탈과 폭력이 있는 곳. 그곳을 남자와 소년이 걷는다.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들은 길, 그러니까 '로드'를 걷지만, 그 '로드'의 끝에 희망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아니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봤을 때 그 길의 끝에는 아무 것도 없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므로 그들은 묻는다. 왜 이 '로드'를 걸어야만 하지. 왜 불을 운반해야만 하지. 그러니까 그 '불'을 왜 걸음으로써 지속시켜야만 하지. 이토록 고통스럽고, 이토록 괴로운데. 모든 것이 끝장나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는데. 그 질문.

 

그 질문은 백의 질문이다. 그는 끝났음을 안다. 아무 것도 남지 않았음을 안다. 이 길의 끝에는 죽음이 있음을 안다. "사람들 마음에서 죽음의 공포를 몰아내주기만 한다면 사람들은 하루도 더 살지 않을 겁니다. 다음 악몽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면 누가 이 악몽을 원하겠어요? 모든 기쁨 위에는 도끼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모든 길은 죽음으로 끝나요. 아니면 더 나쁜 것으로. 모든 우정도 모든 사랑도. 고문, 배반, 상실, 고난, 고통, 노화, 모욕, 무시무시하게 집요한 병. 이 모든 것이 단 하나의 결말에 이릅니다. (p.133)" 그러므로 그가 택한 것, 즉 뉴욕에서 로스엔젤레스까지 달리는 급행열차 '선셋 리미티드'에 몸을 던지려 하는 것은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는 단 하나의 결말을 조금 더 빨리 당기는 것에 불과하며, 필연적이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흑이 있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 그는 백의 죽음을 어떻게든 막으려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그를 죽게 내버려두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백과 대화함으로써 어떻게든 이 죽음을 막으려고, 혹은 가능할 때까지 지연시키려고 애쓴다. 

 

이것은 명확하게 대비되는 것처럼 보인다. 삶과 죽음, 죽으려고 하는 자와 살리려고 하는 자.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위와 같은 삶과 죽음의 문제에 있어서는 대부분의 독자는 심정적으로는 살리고자 하는 쪽에 서려고 할 테지만, 그 처해있는 위치는 흑보다는 백의 위치에 더 가깝다는 사실이다. 즉 일부를 제외하고는 적어도 이 책을 집어드는 독자라면 흑보다는 백에 아마도 조금 더 가까울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것은 '선셋 리미티드'에 몸을 던지려 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삶의 조건이나 삶의 형태라는 측면에서 백의 입장에 더 가까울 것이라는 말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흑과 같은 경험이 없다. 그처럼 누군가를 죽인 후 교도소에 들어가 다시 또 누군가를 죽일 뻔하다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경험은 없다. 그보다는 우리 대다수는 지루하고 반복되는 일상을 반복하며, 가끔 통근열차안의 다른 사람들에게 속으로 욕을 퍼붓는 백의 입장에 더 가까울 것이다. 

 

아니, 우리라고 하지 말자. 적어도 나는 그랬다. 나는 그래서 처음에는 백에 조금 더 무게를 두면서 책을 읽었다. 왜냐하면 책이든 영화든 어떠한 이야기든 적어도 의지할 곳은 필요하니까 말이다. 완전히 균형을 이룬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대체로 어느 한 쪽에 필연적으로 기울어져 있기 마련이니까. 다만, 그것은 글을 읽는 위치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이야기의 내용상으로 보면 처음에는 흑이 우위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어떤 배경적인 측면, 즉 흑이 백의 목숨을 살려주었으며, 이야기를 하는 이곳이 흑의 집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렇고, 흑이 백을 대하는 어떤 어투 같은 부분에서도 그렇다. 흑이 대화하는 방식을 보면 약간 익살을 섞어서, 혹은 약간 장난을 섞어서 말하는 듯한, 즉 심리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측면이 있는데, 그것은 단지 어떤 흑의 개인적인 특성 때문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다. 그것은 한편으로 이 대화에서 흑이 어떤 결정적인 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기도 할 것인데, 그것은 인간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결국에는 살고자 할 것이라는 오랜 믿음에서 연유한 것이다. 즉 그가 아무리 죽는다고 할 지라도, 그것은 결국 일시적인 것이고, 어쩌면 위악의 변형된 형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 혹은 믿음은 마지막에 이르러 산산이 부서진다. 백의 죽고자 하는 의지는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필연적이고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흑은 백이 이렇게 말하는 와중에서도 이를 '농담 따먹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흑은 백이 결국 거리로 다시 뛰쳐나간 후에도 자신의 그러한 믿음을 버리지 못한다("저 사람 말은 진심이 아니었어요. 당신도 그게 진심이 아니란 걸 아시잖아요. 당신도 그게 진심이 아니란 걸 아시잖습니까." -p.138).

 

다시 말해서 코맥 매카시는 등장인물 그 누구에게도 기울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읽는 이를 카운슬링을 받는 위치에 놓고 카운슬링에 조금씩 동조해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적어도 나는 백이 커피를 마시고, 음식을 먹는 것을 그 신호로 봤다), 그 카운슬링이 산산이 실패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읽는 이를 그 어디에도 마음을 주지 못하게 만든다.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쇠사슬을 풀고 다시 죽으러 나간 백의 입장에 설 수도 없지만, 그것이 단지 그의 진심이 아닐 거라며 하느님을 향해 울부짖는 흑의 입장에 설 수도 없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길을 잃고 우두커니 서 있다.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그런데 어쩌면 그것은 나의 착각이 아니었을까. 양쪽 어느 입장 중의 하나에 동조해야 한다고 믿는 것, 그것이 코맥 매카시가 직관적인 구조로 파놓은 덫이 아닐까. 돌이켜보면 비슷한 얘기를 코맥 매카시는 <카운슬러>에서도 했다. 카운슬링들이 계속 실패하는 그 이야기에서 주인공 '카운슬러'가 살려고, 혹은 그의 여자친구를 살리려고 발버둥 칠 때, 코맥 매카시는 잔혹하게도 어떠한 희망을 보여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시도는 혹은 모든 카운슬링은 번번히 수포로 돌아간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마침내 카운슬러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죽음으로 가까이 가고자 할 때, 코맥 매카시는 그를 아주 조심스럽게 삶의 편으로 돌려놓는다. 아니 그것은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라는 이순신 장군스러운 이야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적어도 그 이야기에서는 살아남는다는 사실이 '카운슬러'에게는 더욱 잔혹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야기 그 자체로서도 그렇고, 한 마디 집약된 대사로서도 그렇다. "아니, 죽는 것은 너무 쉽지." 코맥 매카시는 늘 그런 것을 그려왔다. 어쩌면 죽는 것이 더 나은 것처럼 보이는 세계.

 

다시 말해서, 흑은 백과 대척점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흑'과 '백'이라는 이 구분법도 한편으로는 이 대척점을 더욱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다. 즉 그것은 '흑인'과 '백인'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어떤 극단으로서 '흑'과 '백'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척점에 있는 것들이 사실은 그렇듯 공유하는 지점이 있다. 그들은 사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버티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이 죽음의 목소리에 투항하려고 한다면, 흑은 하느님의 목소리, 즉 종교에 투항함으로서 버텨낸다. 그들은 고통없는 삶을 원한다. 흑이 하느님의 목소리를 따르며, 고통을 없애고자 한다면, 백은 고통을 주는 그 자체, 즉 자신의 삶을 끝장냄으로서 고통을 없애고자 한다(백이 하필이면 '선셋 리미티드'를 자살도구로 택한 것도 그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는 '선셋 리미티드'가 통증 없이 눈깜짝할 사이에 삶을 끝내주기 때문에 그것을 택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코맥 매카시가 지금까지 이야기해온 것들은 그 반대편에 있는 것들이었다. 고통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고통 속에서 지속시켜야 하는 삶. 그것은 통증 없는 죽음을 선택해 끝내는 것도 아니고,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행복하다고 믿으면서 사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예를 들어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카운슬러의 삶이며,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일 자체가 용감한 일이라고 믿는 삶이다. 그리고 내가 읽은 이 이야기도 사실은 그렇게 다르지 않다. 행복 속에서 사는 것도 아니고, 쉽게 끝내야만 하는 것도 아닌, 고통 속에서 지속해야 하는 삶. 그것에 가치가 있을까. 답할 수 없는 질문에 답을 하려고 애쓰지 말자. 다만 나는 그것을 이름붙여본다. 그것은 회색의 삶이라고. 그냥 가는, 가야만 하는 회색의 삶.

 

아빠는 정말로 용감해요?
중간 정도.
지금까지 해본 가장 용감한 일이 뭐예요?
남자는 피가 섞인 가래를 뱉어냈다. 오늘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난 거.
정말요?
아니. 귀담아 듣지 마라. 자, 가자. - <로드> p.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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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모노프

저자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출판사
열린책들 | 2015-01-1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멋지고, 번득이며, 냉혹하다! 프랑스 문단의 독보적인 존재 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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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리모노프>에는 본명 에두아르드 베니아미노비치 사벤코, 나중에는 리모노프라고 불리게 된 사내가 그의 필명 '리모노프'를 스스로 짓는 짧는 일화가 나온다. 이 '리모노프'라는 말은 레몬을 뜻하는 '리몬'과 수류탄을 뜻하는 '리몬카'에서 복합적으로 유래한 것인데, 이는 그의 뾰족하고 전투적인 성격을 고려한 작명이라는 부연설명이 나온다. 레몬과 수류탄, 상당히 먼 곳에 위치한 것처럼 보이는 이 두 가지 물체의 기이한 결합(바로 표지에 있는 이것). 재미있게도, 아니 필연적이게도 이 리모노프의 삶, 혹은 그의 사상은 그의 이름과 상당히 비슷한 것 같다. 그의 사상, 그리고 그의 사상을 반영한 그의 삶은 온갖 이질적인 것들의 결합이었고, 전혀 만날 수 없는 것들의 어우러짐이었다. 책에 등장하는 수없이 많은 것을 이에 가져다 붙일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는, 러시아의 노동교화 수용소인 엥겔스 강제 수용소의 주철 배관 위에 광택 스테인리스 세면기를 얹어 단순하면서도 깔끔하게 디자인한 수용소 세면대가 그가 출판사 편집자의 초청을 받아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필립 스탁이 실내 디자인을 맡았다는 뉴욕의 한 호텔에서 봤던 세면대와 똑같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몇 안되는, 아니 거의 유일한 사람이다. 아니면 이런 것. 그는 스탈린과 히틀러를 한꺼번에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다(뭐 라도반 카라지치와 피델 카스트로라고 해도 상관없다). 2차 세계 대전 중 스탈린그라드에서 수많은 독일과 소련의 젊은이들이 이유를 모르고 죽어갈 때, 베를린과 모스크바에서 각각 콧수염을 매만지고 있던 두 사람을 동시에 말이다.

 

그런데 이질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것들에는 분명히 어떤 눈에 띄는 공통점들이 있다. 히틀러와 스탈린의 공통점이 콧수염의 특이성만이 아니었던 것처럼, 이 이질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것들은 분명히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 뭐 어려운 얘기할 것 없이 예를 들어 레몬과 수류탄처럼 말이다. 이것들은 불리는 발음('리몬'과 '리몬카')이 비슷할 뿐더러 길쭉한 타원형의 생김새도 그렇게 심하게 다르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온갖 이질적인 것들이 결합된 것처럼 보이는 리모노프의 사상과 삶에도 적어도 모종의 일관성은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이 작가가 말하는 '어떤 메시지'일 것이다.

 

리모노프는 어떤가. 우크라이나 출신의 깡패로 출발해 소비에트 언더그라운드의 아이돌, 맨해튼의 거지, 억만장자의 집사를 거쳐 파리의 인기 작가로, 발칸 반도를 헤매던 사병으로, 그리고 이제는, 공산주의 붕괴 이후 혼란기에 청년 무법자들의 당을 이끄는 카리스마 넘치는 늙은 보스로 변신해 있다. 스스로는 영웅이라고 자부하지만, 남들 눈에는 인종지말로 비칠 수도 있다. 이 점에 대해 나는 판단을 유보하고 싶다. 다만, 세면대에 얽힌 일화를 별생각 없이 재밌게 듣고 나서 그의 파란만장하고 위험천만한 인생이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모노프, 그 자신과 러시아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우리 모두의 역사에 대해서 말이다.

어떤 메시지가 있긴 있는데, 그게 과연 무엇일까? 그것을 찾고 싶어 나는 이 책을 시작한다. (p. 38)

 

적어도 내가 보는 리모노프에게는 그것 중의 하나는 남들과 다르게 살고 싶다, 혹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인물로서 살고 싶다는 욕망이었을 것이다. '가난하고 무모했던'이라고 간단하게 묘사하는 것이 매우 부족한 묘사처럼 보이는 작가로서 대접받기 이전의 그의 젊은 시절의 삶에서 그를 계속 추동하는 가장 큰 욕망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지금의 이 밑바닥에 떨어져있는 상태가 나의 삶을 기록한 책에서 가장 마지막 장인가, 아니면 그저 가난하고 힘든 시절을 장식하는 적당한 일화의 하나인가. 그는 말 그대로 그것이 자기 삶의 마지막 장이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거렸다. 아니, 적어도 그런 것이 될 수 없다고 굳게 믿었다. 그는 이름을 날리고 싶었다. 그런 목적을 달성해준다면 어떠한 것이라도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앞의 세면대 일화에 등장하는 그 두 가지는 그런 면에서 통한다. 유명한 작가로서 세면대 앞에 서는 것이나, 혹은 유명한 정치범으로서 세면대 앞에 서는 것이나 그에게는 그렇게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물론 이렇게만 이야기하는 것은 그에게 가혹할 뿐더러, 어떤 의미에서는 그를 일종의 기회주의자처럼 비치게 한다는 지적에 동의한다. 어떻게 보면 주어진 기회를 놓치고 싶어하지 않아한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는 기회주의자이며, 그는 단지 주어진 기회를 남들보다 더 재빠르고 확실하게 움켜잡는 것에 능했을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간다면, 과연 그런 욕망에서 자유롭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구나 삶에서 주인공이 되고 싶어한다. 아니, '자신의 삶에서는 모두가 주인공입니다'와 같은 <좋은 생각>에나 실릴 법한 듣기 좋은 소리 빼고 말이다. 누구나 한때는 수많은 조연과 단역이 스쳐지나가는 주인공과 같은 삶을 상상하지만, 그것이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거나, 혹은 알아차리는 척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기회들을 잡으려고 발버둥치고, 혹은 기회가 없다는 현실을 바라보고, 기회들을 놓치고, 기회들을 먼 발치에서 바라보고, 운이 좋아 기회에 올라타지만, 그것이 자신이 믿은 '기회'가 전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와중에 우리에게도 서서히 이질적인 것들이 결합되기 시작한다. 물론 리모노프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다. 예를 들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은 이해할 수 없지만, 국내노동자와 외국인노동자의 차별은 이해한다(이 워딩은 그저 내 짧은 머리로 나온 '워딩'일 뿐이다. 물론 누군가는 이것이 전혀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이 짧은 워딩에는 수많은 것이 담겨있기 때문에 어쩌면 짧은 워딩으로 쓰기에는 적절한 예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책에서 말하는 "남과 비교해 스스로 우월하다거나, 열등하다거나, 심지어 동등하다고 판단하는 인간조차 현실을 모르는 것이다.(p.246)"라는 말과 연관되는 논의도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와 같은 어떤 이질성 말이다. 그 모든 것이 리모노프의 탓이 아니듯, 그것은 우리의 탓만이라고 할 수는 없다.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현대사회에서 명확해 보이는 것은 점점 줄어들고, 어떤 가치관에 무게를 두어야 할지 알면 알수록 모르게 된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리모노프와 우리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 뿐, 비슷한 면이 있으며, 그것을 어떤 현대인들의 특질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며, 리모노프는 그것을 단지 극단에서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책의 마무리이다. 저자 엠마뉘엘 카레르는 책을 마무리짓는 인터뷰를 하기 위해 리모노프를 찾아간다. 몇 시간의 인터뷰를 계획했지만, 질문은 금방 동이 나고, 그는 리모노프에게 더 이상 물을 것이 없다. 자신이 자신의 삶에 대해 이미 모든 것을 너무나 많이 이야기했기 때문에 더 물을 것이 없는 삶. 그것이 불러오는 어떤 아이러니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리모노프와 그가 나눈 마지막 대화는 재미있다. 리모노프는 마지막으로 저자에게 묻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굳이 나에 대한 책을 쓰고 싶은 이유가 뭡니까?" 저자는 진심을 이야기한다. 당신이 흥미진진한 삶을 살았으며, 소설 같은, 아슬아슬한 인생이라고, 역사 속으로 몸을 던지는 위험을 택한 인생이라고. 그러자 리모노프는 피식 메마른 웃음을 흘린다. "개떡 같은 인생이지, 한마디로." 그것을 저자의 아들 가브리엘은 정리한다. '루저'같은 인생이라고. 그러니까 한마디로 자타공인 루저, 리모노프.

 

그것을 저자의 포장대로 이렇게 바꿀 수도 있다. 중앙아시아 어느 이름 복잡한 도시의 사원, 높은 담장 및 그늘에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이가 빠지고, 상당수는 눈도 없는 그을린 얼굴을 가진 노인 걸인들의 삶. 모두 다 내려놓은 사람들, 넝마를 걸친 걸인들, 나이도 재산도 이름도 알 길이 없는 사람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왕들. 이 비유는 적어도 나에게는 이렇게 보인다. 어떤 삶이든, 자타공인 루저라고 판명난 리모노프의 삶이든, 아니면 그것이 아닌 작가이자 정치가이자 혁명가인 풍운아 리모노프의 삶이든, 아니면 그저 평범한 우리의 삶이든, 생겨날 수 밖에 없는 어떤 덧없음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덧없기 때문에 누구나 왕이 될 수 있는 그 동등함에 대해서 말이다. 동등하지 않다고? 다르다고? 글쎄.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을 하나 해보자. 그렇게나 이름을 날리고 싶어서 발버둥쳤던 리모노프의 이름을 당신은 이 책을, 혹은 이 리뷰를 읽기 전에 들어본 적이 있는가? 소아병적으로 말하건대, 적어도 나는 처음 들었다. 아니면 이 책 뒤에 실린 이 광고는 어떨까. "이름도 낯선 이 사내의 삶을 읽는 것이 너무도 즐겁다." - 텔레그래프. 리모노프는 분명히 이 광고를 보고 분통을 터뜨렸을 것이다.

 

 

덧1.

책이 재미는 있지만, 참 진도는 안 나간다. 나는 그것이 읽는 이에게 계속 어떤 피로감을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아마 이 책의 독특한 형식과 관련이 있을 터였다. 즉 저자 엠마뉘엘 카레르가 실존인물 리모노프가 쓴 자신의 삶에 대한 저서와 그와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그의 삶을 기록하면서 그에 덧붙여 저자 자신의 삶과 자신의 짤막한 논평 아닌 논평을 붙여나가면서도 '소설'이라고 이야기하는 이 구조 말이다. 예를 들어 간략한 이러한 질문. 어디까지가 사실인가. 우리는 어디까지 이야기를 믿어야 하는가. 어느 부분이 사실이고, 어느 부분이 창작된 허구이며, 혹은 창작되었다고 해도 그것은 카레르가 창작한 것인가, 아니면 리모노프 자신이 창작한 것인가. 아니면 질문을 이렇게 바꿔서. 어디까지가 리모노프 본인이고, 어디까지가 저자가 보는 '만들어진 리모노프'인가, 혹은 저자가 만들어낸 리모노프에 의해 우리 자신이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 만들어낸 '이차적 리모노프'인가. 물론 누군가(기억이 안난다)의 말대로 '모든 기록은 기록하는 자를 같이 기록하기 마련'이어서 이 기록에서 저자 카레르를 완전히 분리하여 순수한 리모노프를 끌어내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카레르는 이를 끝내 '소설'이라고 주장하는 것일 테지만 말이다. <씨네21>에서 인공위성을 혼자 쏘아 올리려고 하는 송호준('라스'에 나왔던 그 사람이다)을 다룬 다큐 <망원동 인공위성>을 보고 나온 이미랑 영화감독이 말한 '육체적 고됨'도 아마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타인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다큐멘터리의 본질적인 윤리적 질문이 육체적 고됨으로 변형되어 감독과 찍히는 피사체인 송호준을 통해 자신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이 이야기 역시도 읽는 우리를 지치게 만드는 면이 있다. 물론 가장 쉬운 방법은 기록하는 자의 '선의'를 믿는 것이지만, 그의 '선의'를 믿기에는 그의 태도는 상당히 모호한 면이 있다. (여기에는 저자의 어떤 '묘한 열등감'이 작용하는 것 같다. 아무튼 흥미로운 것은 저자가 그 열등감을 굳이 숨기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덧2.

아무튼 그래도 재미는 있다(재미라는 말을 너무 남발하는 것 같다). 특히 리모노프를 통해 보는 러시아적인 것의 어떤 면모들 말이다. 예를 들어 공산주의를 바라보는 러시아인들의 시각 같은 것들이나 과격하고 떠들썩하면서도 시와 문학을 사랑하는 러시아인들의 면모 같은 것을 소개하는 부분. 도스토예프스키의 삶을 통해서 그 안에 담긴 '러시아적인 것'을 찾아내려 했던 E.H.카의 시도와 비슷하달까(재미있게도 이 책에는 리모노프의 글이 도스토예프스키의 글과 비슷하다는 뭇사람들의 평도 나온다). 한편으로 이른바 페레스트로이카나 글라스노스트 등의 말로 대변되는 이른바 '러시아 공산주의의 몰락'을 바라보던 서구 지식인들의 시각이 어땠는지를 보는 것도 흥미로운데, 그 시각은 내 저럴 줄 알았지, 언젠가는 그럴 줄 알았어,와 같은 일종의 고소함이 반영된 시각과 어떤 안타까움들이 공존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고르바초프를 마치 얼뜨기 같이 묘사하는 부분 같은 것들 말이다. 얼뜨기들은 우리를 우습게 만들기도 하고, 동시에 안타깝게 만들기도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웃거나 안타까워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얼뜨기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 아니런가. (어렸을 때 TV에서 고르바초프를 무슨 위대한 인물처럼 소개한 프로그램을 봤던 기억이 난다. 하긴 당시 그는 우리나라에서 위인전에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도 했다.) 리모노프라는 사람에 대해 관심이 없더라도 러시아라는 사회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이라면 흥미로운 독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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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스캐처, 베넷 밀러

Ending Credit | 2015. 3. 4. 13:07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전체 내용과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1.

<폭스캐처>는 '역사상 가장 돈 많은 살인범'의 실제 사건을 영화화했다. 1996년 1월 21일, 세계 최대의 화학기업 듀폰의 직계 상속자인 존 E. 듀폰은 LA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데이브 슐츠를 자신의 38구경 권총으로 살해한다. 300만㎡가 넘는 펜실베이니아의 듀폰 사유지에는 '폭스캐처' 농장을 중심으로 승마장, 사격장을 비롯해 레슬링 전용 체육관과 선수들을 위한 사택이 있었다. 슐츠는 애틀랜타올림픽 준비를 위해 가족과 함께 이곳 사택에 머물고 있다가 변을 당했다. 출동한 경찰은 다양한 총기와 장갑차까지 보유하고 있는 듀폰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이틀 동안이나 대치를 벌여야 했다. 듀폰은 싱겁게도 보일러를 고치려 잠시 건물 밖으로 나왔다가 체포돼 별다른 저항 없이 수갑을 찼다. 듀폰쪽 변호인은 그가 정신질환에 의한 심신미약 상태임을 주장했지만 법원은 3급 살인죄를 적용했고, 듀폰은 2010년 감옥에서 숨졌다.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은 재벌이 살인을 저지른 데 대해 미국 사회는 들끓었고 살해 동기에 대해 갖은 추측이 난무했다. 한국에서도 <9시 뉴스>를 포함해 뭇 언론에서 비중 있게 보도됐다.

 

<씨네21> 991호에 실렸던 송형국 평론가의 글 서두이다. 이 부분은 글의 서두이자, 이 사건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지만, 사실 영화 상에서 이 부분을 보기 위해서는 거의 2시간 가까이 기다려야만 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이 '사건'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이 '왜 일어났는가'를 보여주려고 한다. 그러나 이 '왜'를 설명하는 것이 그다지 간단하지만은 않다.

 

2.

사실 이 영화의 구성은 조금 흥미롭다. 위에 언급되는 것은 사건의 당사자들인 존 듀폰(스티브 카렐)과 데이브 슐츠(마크 러팔로)이지만, 영화가 시작되고 오프닝이 지나간 후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데이브 슐츠의 동생 마크 슐츠(채닝 테이텀)이다. 그도 형과 같은 레슬링 선수이자, 역시 LA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기도 하다. 그를 보여주는 초반의 씬들은 인상적이다. 아무도 없는 레슬링 도장에서 인형을 잡고 혼자 연습하고 있는 그를 한동안 멀리 바라본 후, 장소는 어느 초등학교로 옮겨진다. 마크가 강연을 준비하는 모습이 보인다. 원고를 손에 들고 중얼거리며 앞을 노려보는 그는 긴장하거나 혹은 이 상황이 짜증이 나는 것 같다. 그리고 미국 국기가 걸린 강당에서 마크는 초등학생을 상대로 강연을 한다. 그는 오륜 마크가 그려진 자켓을 입고 목에 건 금메달을 보여주며, 레슬링과 조국 같은 이야기를 하려하지만, 아이들은 시큰둥하다. 그리고 서류에 날짜를 쓰는 어떤 손이 보인다. 1987년 3월 14일. 학교 행정실이다. 강연료가 20달러라고 말해주며 행정직원은 이름을 묻는다. 데이브인가요, 데이빗인가요? 그리고 마크는 답한다. 마크라고, 형 대신 왔다고. 행정직원은 약간 의아한 눈길을 보내지만, 그리 문제 삼는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마크는 덧붙인다. 둘 다 금메달리스트라고. (이 장면들에서 마크의 옆으로 당시 대통령 도널드 레이건의 사진이 언뜻 비친다.)  그리고 그 이후 찌푸린 얼굴로 낡은 패스트푸드점에서 마치 노동자들처럼 보이는 사내들 틈에서 음식을 주문하려 하는 마크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굳은 얼굴로 차 안에서 햄버거를 먹는다.

 

이 장면은 그 자체로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이 장면은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마크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말해주기도 하고, 마크와 데이브의 관계의 어떤 일단(예를 들어 형의 도움으로, 형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마크)을 보여주기도 하며, 그들이 현재 처한 위치를 말해주기도 한다(즉 데이브는 강연을 초청받지만, 마크는 사실은 데이브가 받았어야 할 강연료를 받아, 낡은 차 안에서 싸구려 음식을 먹는다. 같은 올림픽금메달리스트이지만 데이브와 마크의 처지는 왜 다른가). 그런데 이 장면이 더 흥미로운 것은 이 씬들이 영화 마지막의 에필로그 씬들과 일종의 대구를 이루기 때문이다. 영화의 가장 처음에 등장하는 것도 마크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도 마크이다. 그는 형이 죽은 후 UFC같은 격투기대회에 출전하는 것으로 삶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 같다. 대기실에서 혼자 외롭게 고개를 숙이고 의자에 앉아 있는 마크의 모습을 비춰준 후(이 장면이 한편으로 마음을 건드리는 것은 이전의 레슬링 경기장에서는 그렇게 의자에 앉아 있는 마크의 옆에 그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건네고 힘을 북돋우는 형 데이브가 있었기 때문이다), 올림픽금메달리스트 출신이라는 등의 화려한 소개를 들으며 링으로 올라가는 여전히 굳은 얼굴의 마크의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열광하는 관객들은 외친다. USA! USA! USA! 그리고 영화는 끝난다.

 

이 장면이 대구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 두 장면 모두 관객을 상대로 한 어떤 무엇을 시작하려는 마크의 모습을 담고 있기도 하거니와 어떤 공통적인 요소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시작부에 나왔던 강당에 걸려있었던 미국 국기와 행정실에 있던 레이건의 사진 그리고 마크가 강연에서 얘기하려 했던 조국과 같은 것을 기억한다면, 그것에 마치 화답을 보내는 것 같은 마지막의 USA!와 같은 외침들은 조금은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왜 그들은 마크의 이름을 외치지 않고, USA를 외치는 걸까. 마크는 국기가 걸려있던 초등학교에서 조국을 이야기했지만, 시큰둥한 반응을 받았고, 이제 몇 년 후 그 시큰둥한 반응은 열렬한 환호로 이상하게 귀환했다. 그러나 이전이나 지금이나 마크의 얼굴은 굳어 있고, 어쩌면 그 자리에 대신 섰을 수도 있는 데이브는 그 시간들 사이에 누군가의 총을 맞았다. 기의는 달라졌고, 기표는 여전히 비어있다. (그러니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의 끝과 마지막을 이 비어있는 기표가 장식한다는 것이고, 안타까운 것은 그가 형의 죽음에서도 그다지 배운 것은 없어보인다는 사실이다.)

 

3.

이것이 조금 더 다층적이 되는 것은 그 이전의 오프닝(그러니까 마크가 등장하기 전의 오프닝)과 이것이 묘한 연결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오프닝은 사실 많이 이상하다. 영화가 시작되고 실화를 바탕으로 하였다는 문구가 지나간 후, 보이는 것은 낡은 기록사진과 같은 풍경들이다. 오래 전의 폭스캐처 농장을 보여주는 낡은 기록필름. 말과 사냥개들과 사냥을 하러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실제의 기록필름(어린 시절의 존 듀폰과 그의 어머니의 컷이 있는 것도 같지만 확언은 못하겠다. 아마도 영화의 중간에서 존 듀폰이 마크에게 보라고 하는 비디오도 이것과 비슷한 화면일 것이다). 여우를 잡으러 뛰어가는 사냥개를 담은 기록필름의 컷 사이에 제목이 뜬다. '폭스캐처' 그러니까 여우를 사냥하는 무엇. 그리고 이어서 아까 이야기했던 인형을 붙잡고 텅빈 연습장에서 연습을 하는 마크의 모습이 여기에 붙는다.

 

그러니까 사실 여우를 잡는 사냥도구였던 말 혹은 사냥개와 그의 지원을 받아 레슬링 훈련을 하는 마크의 존재의 의미는 존 듀폰에게는 동일하다는 이야기인 것 같다. 실제로 영화 중간에 마크가 따온 메달이 결국 여우와 같지 않느냐는 듀폰의 말도 있다. 듀폰의 어머니에게는 여우사냥과 말이었다면, 듀폰에게는 그것이 레슬링과 마크였을 뿐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앞에서 말한 마크가 나온 오프닝 혹은 엔딩과 이것을 연관지어 본다면 여기에서 감독은 다른 질문을 하는 것처럼도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게는 마치 그것이 존 듀폰만 그런 것인가,라고 묻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존 듀폰이 마크가 따온 메달을 마치 자신이 딴 것처럼 자신의 진열대에 전시할 때, 혹은 더 나아가 듀폰이라는 가문이 (실제는 자신들이 획득한 것이 아닌) 여우와 메달을 자신의 것으로 간주할 때, 국가와 USA를 외치는 국민은 거의 비슷한 심리적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것에는 어쩌면 단지 규모나 사적소유(실제로는 아닐지라도 그렇게 믿는 것)의 차이만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 어쩌면 이런 질문. 당신은 김연아가 딴 금메달을 왜 그렇게 자랑스러워했나.   

 

 

4.

물론 이 영화에서 이런 질문까지 나아갈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사실 굳이 우리까지 들여다보려 하지 않아도 존 듀폰과 데이브 슐츠, 마크 슐츠 이 세 사람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흥미진진하다. 존 듀폰의 비극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어쩌면 그의 비극은 그가 그의 어머니 이상의 것을 바랬다는 것에 있지 않을까. 중간에 그가 레슬링 선수들에게 일종의 도취 상태에서 연설을 하는 장면이 있다. 그는 어머니가 애지중지하는 말들이 단지 먹고  싸는 것밖에 모르는 멍청한 것들에 불과하다고 조롱하며, 동물 위에 앉는 것이 뭐 그리 고상한지 모르겠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는 동물이 아닌 인간 위에 앉고 싶었다. 인간도 물론 먹고 싸지만, 인간은 한 가지를 더해 주니까. 즉 그를 존경해줄 수도 있으니까. 다시 말해서 그는 멘토가 되고 싶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멘토가 받는 존경을 받고 싶었다(예를 들어 그가 자신이 써낸 조류학 책을 보여주며 자신을 조류학자라고 소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그에게는 조류학이든 뭐든 사실 상관이 없었다. 단지 그에게 필요한 것은 조류학자가 받을 수도 있는 존경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멘토가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데에 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멘토가 되는 법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배워서 아는 것도, 흉내를 내서 알게 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것은 듀폰이 어리석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아니 도리어 그 반대에 가까웠다. 듀폰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 그것은 듀폰이 데이브를 쏘기 전에 보이는 행동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어떤 분노를 보이거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단지 그는 그 전에 자신을 본다. 자신이 마크와 데이브를 비롯한 레슬링 선수들의 멘토인 것처럼 만들어진 비디오. 이것이 단지 '만들어진 것'에 불과함은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가장 잘 안다. 그는 그것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 (예를 들어 어머니가 집의 운전기사의 아들에게 돈을 주며 자신의 친구로 '붙여줬을 때'에 그것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는 그 '만들어진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진짜(그러니까 진짜 '멘토')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사실 간단했다. 그것은 진짜의 존경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5.

즉 듀폰에게는 데이브의 존경이 필요했다. 마크의 존경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았고(아마도 마크는 그를 어떤 의미에서는 진짜 존경했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형이나 형의 아내에게 듀폰에 대한 태도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는 장면에서 이것이 잘 드러난다. 그러나 사실 이도 멘토로서의 존경이라기 보다는 그의 금력에 대한 존경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는 데이브와 같은 진짜 멘토의 존경을 받고 싶었다. (멘토로서의) 존경을 받는 것은 다른 멘토의 존경을 받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간단한가.

 

그런데 정말 비극은 데이브는 그런 것을 모르는 사람이었다는 데에 있다. 즉 그는 누군가의 권위에 따르고 존경을 보낸다는 것을 하기 싫어한다기 보다는, 아예 그렇게 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마크 러팔로가 아주 훌륭한 연기로 이를 잘 보여주는데) 데이브에게 "존이 내 멘토입니다."라고 말하라고 비디오 연출가가 시킬 때, 그는 하기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의미를 수긍하고 하려고 하는 듯이 보이지만, 말 그대로 어떻게 하는지 방법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즉 그것은 그의 천성처럼 보이며, 그가 다른 사람들, 특히 듀폰에게 대하는 태도를 보면 이것이 잘 드러난다. 다시 말해서 비극은, 이 전혀 알 수 없는 것을 알려고 하는 혹은 알아야만 하는 사람들이 만났을 때 발생했다. 존 듀폰은 멘토가 되는 법을 모르며, 데이브는 멘토라는 것을 대하는 법을 모른다. 존 듀폰이 어떤 의미에서 아직 어린아이였다면, 데이브 역시도 어떤 의미에서는 어린아이같이 깨끗한 인물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김중혁 작가가 <씨네21> 993호에서 이 영화를 다룬 글에 데이브가 차를 고치다가 듀폰을 만나 총을 맞고 죽어갈 때 그의 팔에 쓰인 낙서 'P.U.KIDS'라는 문구를 보고, 혹 이것이 아이처럼 굴지 말자고, 더이상 아이가 아니라고 자신을 나무라는 의미는 아닐까,라고 쓴 구절이 있는데, 그런 해석이라면 위의 얘기가 통하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영화와 이 글을 본 후 궁금해져서 이 부분을 찾아봤는데, 이 부분은 마크 슐츠가 데이비드 토마스와 사건 후 쓴 <Foxcatcher: The True Story of My Brother's Murder, John du Pont's Madness, and the Quest for Olympic Gold>라는 책의 시작머리에 나오는데, 차를 고친 후 아이들을 픽업(Pick Up)하러 가야한다고 자신에게 일러주는 의미였던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이 문구가 도드라지게 처리한 것은 이 영화에서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6.

<폭스캐처>는 이상하게도 영화가 끝난 후 잔상을 많이 남기는 영화다. 예를 들어 몇몇 기억에 남는 잔상들이 있다. "존이 내 멘토입니다."라고 말하라고 지시 아닌 지시를 받았을 때 마크 러팔로의 하고자 하는데 도저히 되지 않는 듯한 어색한 모습이나, 듀폰의 어머니 역을 맡은 바네사 레드그레이브가 짓는, 스티브 카렐이 어떻게든 어머니 앞에서 멘토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쓸 때, 애쓰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도저히 못보겠다는 표정, 혹은 스티브 카렐이 고개를 약간 치켜 들고 동공이 비어있는 듯한 눈빛으로 자신이 멘토라고 만들어진 비디오를 보는 장면 같은 것 말이다. 내가 일부러 극중인물 대신 배우 이름을 쓰는 것은 이 영화에서는 이들이 모두, 이들 자신이 아니면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 같은 연기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특히 포스터에도 있는 가짜 코를 달고 약간 고개를 위로 치켜 뜬 스티브 카렐의 연기에는 찬사를 보내고 싶다. 그의 눈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영화의 많은 것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영화는 사실 그렇게 흔하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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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 매튜 본

Ending Credit | 2015. 2. 25. 12:54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내용과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이하 <킹스맨>)가 어떻게 재미있는지, 혹은 얼마나 글래머러스한 영화인지를 다시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또한 영화 속 소품들의 럭셔리함이나, 킹스맨 요원 해리 역을 맡은 콜린 퍼스의 수트빨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도 내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다. 다만 나는 영화 속에서 나의 흥미를 끌었던 부분에 대해 그저 간략하게 이야기하고 싶은데, 예를 들어 영화 속에 등장했던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와 같은 대사들이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이 대사는 영화에서 두 번 나온다. 처음 등장하는 것은 이 영화의 터닝 포인트라고 할 수 있는 해리(콜린 퍼스)의 교회 씬이다. 해리가 악당 발렌타인(사무엘 L. 잭슨)의 계략에 빠져 교회 안에서 광란의 살육을 벌인 후 어느 틈에 정신을 차리고 교회 밖으로 나오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발렌타인이 그에게 총을 쏘기 전에 그에게 빈정대면서 이 말을 건넨다. "현실은 영화와 달라." 두 번째는 영화가 끝나기 직전이다. 주인공 에그시(태론 에거튼)가 발렌타인의 경호원 가젤(소피아 부텔라)과의 최후의 일전을 벌이며 그녀를 제거한 후, 악당 발렌타인을 처치하기 직전, 발렌타인은 이게 영화라면 원래 이쯤에서 영화 속 주인공들이 악당에게 하는 대사가 있지 않느냐고 이죽거린다(이 영화에서는 '영화'라는 매체 혹은 다른 영화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오는 편인데, 예를 들어 악당 발렌타인은 그 언급의 빈번함으로 볼 때 스파이 영화 애호가 정도로 설정되어 있는 듯 하며, 해리가 에그시를 요원으로 끌어들이려 할 때 <프리티 우먼>이나 <마이 페어 레이디> 같은 영화들이 언급되기도 한다. 물론 이 영화가 <마이 페어 레이디> 같은 영화와 주제의식을 공유하는 지점이 있기도 하지만, 이 영화에 이렇게 '영화'라는 것이 언급되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 때 에그시는 발렌타인에게 그 대사를 되돌려준다.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 그리고 발렌타인도 그 대사에 수긍한다.

 

위에서 언급한 광란의 살육 축제(적절하지 않은 표현이지만, 사실 이보다 적당한 말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가 벌어지는 교회에서의 씬은 어떤 액션의 구성이나, 카메라 워크, 혹은 씬 전체의 흐름 같은 부분에서, 많이 언급되었듯이 분명히 매우 인상적이며, 매혹적이다. 그러나 사실 내용적으로 보자면 조금 관객을 뜨악하게 만드는 부분도 있다. 흔한 말로 이를 일종의 반전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는데, 왜냐하면 여기에서 광란의 살육을 벌이는 주체가 지금까지 영화의 전반부에서 선(善)의 편에 선 좋은 멘토 해리이기 때문이며, 그에게 죽임을 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비록 약간의 극단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죽을 이유는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즉 여기에는 선한 인물이 무고한 사람을 (그것도 대량으로) 살상한다는 어떤 아이러니가 있다. 물론 영화 속에서 선한 인물이 어떤 계기로 인해(그것이 선한 인물 본인의 의지와 무관한 것이라도) 돌변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경우는 많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는 대부분 이전에 어떤 암시가 주어지거나, 혹은 그 장면의 처리가 상당히 조심스럽게 진행된다. 그런데 이 영화 <킹스맨>에서 가장 유쾌하게 묘사된 씬 중에 하나는 이 씬이다. 이 장면은 화려하고 즐거운 무엇처럼 묘사되었다. 그리고 이 뒤에 발렌타인의 부기가 따른다.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

 

즉 간단히 말해서 이 씬은 일종의 영화적 규약, 혹은 믿음을 무너뜨린다. 선한 이는 선한 이를 해치지 않는다는 그런 믿음 말이다. 물론 선한 이가 돌변하여 선한 이를 해칠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그 때에는 물론 그를 더 이상 '선한 이'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 <킹스맨>에서는 조금 다른 것이 이 장면이 이어진 후에도 해리는 여전히 선한 인물로 남으며, 영화적 서사흐름은 이 씬으로 전혀 깨지지 않는다. 아니 도리어 배가된다. 다시 말해서 이 씬이 건드리는 것은 인물이나 서사가 아니라, 어떤 '영화적 규약' 혹은 '영화'라는 것에 대해 물음이다. 즉 발렌타인이 이 때 현실이 영화와 다르다고 말할 때, 그것의 방점은 '영화'보다 '현실'에 찍혀 있으며, 발렌타인은 '이제 그런 것은 더 이상 영화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해리의 세계, 즉 이 교회 씬 이전까지 이 영화의 기본 바탕에 깔려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스파이 영화의 글래머러스함, 즉 수트, 각종 소품, 매너, 느끼함, 단정함, 매력적인 여자, 신사, 예의, 술,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대의를 위한 희생과 같은 것들이다. 이는 단지 이 영화에 국한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위에 언급하였듯이 발렌타인은 스파이 영화의 광팬이며, 그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스파이 영화란 다니엘 크레이그 이전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로 대변되는 그런 스파이 영화일 것이기 때문이다. 즉 발렌타인이 현실이 영화와 다르다고 할 때, 이는 이런 스파이 영화는 이제 더 이상 '현실적인 영화'가 아니라는 말처럼 들리며(왜냐하면 결국 발렌타인도 영화 속 인물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스파이 영화는 이제 다니엘 크레이그 같은 피로한 노동자 유형의 007이 등장하거나, 제이슨 본과 같은 보다 현실에 발을 디딘 것 같은 인물이 등장하는 영화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것이 물론 실제의 스파이 영화의 흐름에서 생겨난 '현실'이기도 하다. 이러한 새로운 타입007, 혹은 제이슨 본과 같은 새로운 유형의 스파이는 기존 스파이 영화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났으, 이러한 류의 영화들은 항상 이것이 '리얼' 즉 현실임을 강조하며 기존 스파이 영화의 글래머러스함에 질린 관객들을 끌어들였다. 그런데 세상일이 늘 그렇듯이 반동은 반동을 불러오며, 첨단은 복고를 낳는다. 이 영화 <킹스맨>은 이런 반동의 흐름에 다시 반동을 꾀하는 영화다. 발렌타인이 영화의 중간에 '이러한 것은 이제 영화가 아니야. 현실은 달라'라며 기존의 스파이 영화들에 영화적인 죽음을 선고할 때, 다시 그 발렌타인에게 죽음을 선고하며, '아니 그렇게 말하는 너도 영화잖아. 결국 영화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처음 발렌타인이 해리에게 "영화와 현실은 다르다."라고 말할 때 그 방점이 '현실'에 찍혀 있다면, 두 번째 에그시가 발렌타인에게 그 말을 건넬 때에는 그 방점은 '영화'로 옮겨와 있다.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몇몇 구성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영화의 초중반부 에그시와 록시 등이 킹스맨이 되기 위해 받는 훈련들은 리얼인 것처럼 포장되었지만(훈련 중 죽을 수도 있다고 겁을 주며, 마치 실제로 그런 것처럼 보여지지만), 사실은 시뮬레이션이며(결국 영화는 일종의 고도로 조직된 시뮬레이션이다. 예를 들어 기차길에 묶인 상태에서 비밀을 털어놓으라고 강요받는 영화 속 훈련처럼 말이다), 해리가 교회에서 살육을 벌일 때에 그것을 모니터로 바라보는 에그시나 멀린(마크 스트롱)의 뜨악함이 있으며(즉 이 장면에서 이를 멀린이나 에그시, 그리고 악당 발렌타인마저도 마치 영화처럼 모니터로 바라본다는 것이 재미있다. 멀린이나 에그시의 화면을 바라보는 뜨악한 표정이 새로운 유형의 스파이물을 보는 관객의 뜨악함이라는 이 영화의 조롱이 여기에 들어있지 않을까), 결국 에그시는 기존 스파이 영화의 어떤 장면들을 비슷하게 재현한 다음, 악당을 물리치고 사랑을 쟁취한다(예를 들어 기존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서 상당 부분 영화의 마지막이 결국 007이 여자를 후리는 것(그다지 좋은 표현은 아니지만)으로 끝났음을 생각해 본다면 말이다. 에그시가 발렌타인의 소굴을 부수는 마지막도 기존 본드 시리즈들을 꽤나 떠올리게 하는데, 그 영화들에서 항상 마지막 최후의 대결은 적의 소굴 한복판에서 이루어지기도 하거니와 적들의 하얀 위장복 같은 것도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다).

 

물론 감독 매튜 본이 영리한 것은 복고가 단순한 과거의 재현이 되어서는 성공할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일정 부분 새로운 요소가 가미되어야 하는데, 그가 선택한 것은 이른바 병맛 컨셉, B급 감성이다. 예를 들어 발렌타인의 충복 가젤은 기존의 블랙플로테이션 영화 등에서 신체의 일부가 무기로 변형된 여성들의 계보에 넣을 수 있으며, 영화 속의 어떤 유머들(예를 들어 해리의 집 벽을 장식하는 선(SUN)지 같은 것들 말이다)이나 넘쳐나는 고어적 설정 등이 그러하다. 물론 그 고어적 설정들이 넘쳐나지만 잔인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또 한편으로는 그러한 B급 영화들이 기존에 구축해 놓은 구조에 빚진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B급 감성이 이러한 이 영화에 잘 결합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이 B급 감성과 이 영화의 이러한 메시지가 공유하는 지점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편하게 예를 들어 말할 수도 있다. 우리가 어떤 고어나 피칠갑을 즐길 수 있는 것은 결국 그것이 현실과 적절한 줄타기를 행하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현실과 적당하게 비껴서 있다. 현실이 영화에 비척비척 밀고 들어올 때 그 쾌감은 높아질 수 있지만, 그만큼 관객의 자리는 위협받는다. 줄이 높아질수록 줄타기의 쾌감은 올라가지만 떨어질 때의 충격은 더 큰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결국 영화는 '현실'과 다르다는 것이며, 영화는 영화라는 것을 인정하는 한에서, 그 줄의 높이를 어느 정도로 유지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줄을 높일 수 있는 기술은 점점 발달하고 있지만, 그 떨어질 충격파를 계산할 정신은 여전히 빈곤한 것 같다.

 

 

덧.

내게 흥미를 주었던 캐릭터는 에그시나 해리보다는 악당 발렌타인인데, 이 영화의 발렌타인은 최근 몇몇 영화들의 캐릭터를 연상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이 천재 미치광이는 <인터스텔라>의 만박사나 <설국열차>의 윌포드와 같은 인물을 연상시키는데, 특히 윌포드와는 공유하는 지점들이 꽤 많다. 한정된 자원만을 소비하여야 하기 때문에 결국 인구를 줄이는 방법이 해결책이라는 그의 결론도 그러하거니와 그가 이를 위하여 내놓은 방법론, 즉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것도 그러하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자본주의의 끝에 서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설국열차'의 마지막 칸에 있던 윌포드, 그리고 0.1%의 플루토크라트 발렌타인).

 

 

 

 

 

- 2015년 2월, CGV 역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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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찜찜해

The Book | 2015. 2. 16. 00:56 | Posted by 맥거핀.

 


플래너리 오코너

저자
플래너리 오코너 지음
출판사
현대문학 | 2014-12-12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우리는 내면을 향한 시선의 질과 깊이, 성취의 규모로 예술가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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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플래너리 오코너는 1946년, 그러니까 스물한 살에 첫 소설 <제라늄>을 발표했고, 1964년, 그녀의 나이 서른아홉 살에 루푸스 합병증인 신장 질환으로 죽기 직전까지 2편의 장편소설과 32편의 단편소설을 남겼다. 이 책에는 총 31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그러니까 이 단편집을 읽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플래너리 오코너의 전 생애를 읽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이렇게 한 작가의 전 생애에 걸친 작품들을 읽는 것은 흥미롭지만, 그렇게 녹록한 일은 아닌데, 작가의 삶의 흐름에 따라 작품들은 대체로 변화하며, 어떤 필연적인 불균질성을 가지고, 그 불균질성이 읽는 이를 내내 건드리기 때문이다. 연보로 추측해 보건대 이 단편집의 순서는 작품 발표 순서에 따라 배열되어 있는 것 같은데(사실 이 소설의 창작년도, 혹은 발표년도가 없는 것은 이 단편집에서 아쉬운 부분이다), 작품을 읽다보면 어떤 묘한 흐름 같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후기로 접어들수록 이야기는 처음의 실험적인 경향에서 점점 어떤 구체성을 가지며, 묘한 종교성은 점점 강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플래너리 오코너의 경우에는 그런 흐름도 흐름이지만 그보다는 이 작품들을 관통하는 어떤 공통점이 더 두드러지는 편인데, 그것은 번역가의 글대로 미국 남부 지방, 가톨릭 신앙, 루푸스병이라는 몇 개의 키워드로 정리할 수도 있고, 이 이야기들의 어떤 일반적인 흐름을 살펴보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렇지 않은 작품들도 있지만, 대체로 읽는 이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들의 흐름은 어딘지 모르게 비슷하다. 먼저 편견, 혹은 자신만의 확고한 고집에 사로잡혀 있는 듯한 인물들이 나온다. 이들은 교육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오랜 삶의 경험과 인습으로 고착화된 어떤 나름의 세계에 갇혀 있고, 그 나름의 관점으로 주위의 거의 모든 것을 재단한다. 그들의 세계는 작고 편협해보이지만 나름의 체계가 있으며, 그래서 그것은 아직 견문을 넓히기 전의 어린아이의 그것과 비슷하다(그래서 이 작품들에서 주인공들은 대체로 나이가 많으나, 기이하게도 그와 짝을 이루는 것은 어린아이들인 경우가 있다. <인조 검둥이>의 헤드 씨와 그의 손자 넬슨, 혹은 <숲의 전망>의 포천 씨와 그의 외손녀 메리 '피츠' 포천, 아니면 그의 반대로서 <죽은 사람보다 불쌍한 사람은 없다>의 타워터와 노인). 즉 그들의 작은 세계는 작은 만큼 확고하다. 그것은 나름의 체계로 굴러가며, 그렇게 쉽게 부서질 염려는 없어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 별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길한 무엇인가가 등장한다. 그것의 형태는 다양하다. 그것은 친근한 형태로 다가오기도 하고(<좋은 시골 사람들>의 선량해보이는 성경 파는 청년), 꺼림칙한 무엇의 형태이기도 하며(<가정의 안락>의 탕녀 스타), 때로는 인간이 아니기도 하고(<그린리프>의 황소), 때로는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누군가의 변형물(<숲의 전망>의 메리 '피츠' 포천)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대체로 이질적인 타자 그 자체, 예를 들어 <추방자>에서 유럽에서 살길을 찾아 미국 남부의 농장에까지 오게 된 영어를 못하는 추방자 귀작 씨와 같은 존재이다. 이 이질적인 타자는 처음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일련의 사건을 통해 결국 주인공의 확고한 세계에 균열을 일으키고, 그의 존재성을 뿌리부터 뒤흔들게 되고, 인물들은 그들의 균열되고 붕괴된 세계를 불편하게, 때로는 참담하게 마주 보거나, 최악의 경우 마주볼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사실 이것만 놓고 보면 이는 일반적인 소설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도 말할 수 있다. 상당수의 소설에서 주인공의 세계는 마치 부서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며, 세계가 균열된 후 주인공이 새로운 세계를 마주하는 그런 소설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일종의 성장소설이 변형된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플래너리 오코너의 소설에서 '성장'이라는 말을 쓰기는 주저하게 되는데, 이들의 세계는 어떤 균열과 봉합을 넘어서, 거의 완전한 붕괴에 이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즉 이들의 세계는 작품의 말미에 이르러 그 근본이 부정되거나 흔들린다. 다시 말해서 주인공들은 죽는다. 물론 이는 물리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실제로 죽음에 이르는 인물들도 있지만, 그들은 죽지 않더라도 거의 죽은 것과 마찬가지의 상태가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오코너 소설의 종교적인 면모가 드러나게 되는데, 이는 그녀의 전 생애를 받치고 있었던 카톨릭 신앙과 그 신앙에서의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정신적인) 죽음,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다시 태어남(부활)이다. 다시 말해서 엄격하게 말한다면 종교적인 의미에서는 특정의 종교를 가지면서, 동시에 가지지 않은 상태란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어떤 하나의 세계(예를 들어 육체와 욕망의 세계)를 죽이고,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며, 죽고 나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플래너리 단편들의 인물들은 (비록 다시 태어남은 아직 먼 곳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작품의 말미에서 상징적인 죽음에 이른다. 그리고 물론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결국 그 전에 죽어야만 한다.

 

조금 다른 얘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내가 플래너리의 소설들에서 느낀 종교성은 그 내용적인 측면에서만은 아니다. 도리어 그보다는 형식에 관련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 더 컸다. 예를 들어 이 소설의 전지적 관찰자가 가지는 특유의 어떤 묘한 무신경함, 무심함 같은 것들 말이다. 약간 농담을 섞어서 말하자면,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어떤 부분에서는 마치 성경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성경은 독특한 텍스트다. 성경에는 수많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서술하는 어떤 특유의 무신경함이 있다. 그러니까 거기에는 우리가 놀라운 이야기를 볼 때 나오는 인간적인 정서의 어떤 부분이 결여되어 있다. 그것은 당연한데, 왜냐하면 (적어도 성경의 입장에서는) 성경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 아니라 단지 일어난 일들을 그대로 기술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여기에는 일어난 일들이기 때문에 그대로 기술한다는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어떤 특유의 무심함이 있다. (혹은 그러므로 이것은 일종의 은유로 보이게 하는 측면도 있다. 예를 들어 오병이어의 기적을 축자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혹은 어떤 연대와 나눔의 은유로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아무튼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성경의 사실성이 아니고, 다만 플래너리 오코너의 소설도 일종의 은유로 느껴지는 이야기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가 <좋은 사람은 드물다>와 같은 것일 것이다.) 그런데 플래너리 오코너의 소설들에서도 비슷한 무엇이 엿보이는데, 이 소설의 전지적 관찰자는 모든 것을 다 알면서도 사건들에서 한껏 물러나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모든 것을 어떻게 흘러갈지 알면서도 그들이 붕괴되어 가는 것을 무심히 기록하며 그 붕괴를 그저 지켜보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붕괴가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처럼 말이다. 즉 그는 모든 것을 다 아는 예언자로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기록한다.   

 

그러니까 이 기록은 사실 냉혹함 중에서도 더 냉혹할 수밖에 없다. 특히 자신에게 더 말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의미의 예언자라면 자신의 운명도 알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예언자는 자신의 운명의 끝을 알면서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저 냉혹하게 기록할 뿐이다. 예를 들어 이 소설들에서도 작가의 모습이 언뜻 비치는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남편이 없이 농장을 경영하는 여주인들(<추방자>의 매킨타이어 부인, <그린 리프>의 메이 부인 등)에서는 아버지가 없이 어머니와 함께 남부의 농장에서 지냈던 작가와 어머니의 모습이 겹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혹은 글을 쓰려는) 인물들(<좋은 시골 사람들>의 조이/헐가, 혹은 <깊은 오한>의 애스버리, <파트리지 축제>에 나오는 캘룬이나 메리 엘리자베스)에서는 작가 생애의 어떤 부분과 겹치는 점이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플래너리 오코너가 가장 잔혹하게 묘사하는 것은 바로 이들이다. 위에 제시한 편견으로 가득찬 좁은 세계를 가진 이들보다 작품 속에서 더 참혹한 결말을 맞이하는 것이 이 공명정대한 합리주의자들, 철학자들이다(도리어 좁은 세계를 가질 수밖에 없어 편견을 가지게 된 이들에게는 애정이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왜냐하면 이들의 합리성과 정의는 그것이 어떤 절대적인 무엇으로 떠받들어지는 순간 결국 편견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 무엇의 형태밖에 남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이발사>의 레이버). 즉 플래너리 오코너의 소설은 이 소설을 읽는 자들(그러니까 바로 '소설'이라는 것을 읽는 자들) 필시 깃들 수 있는 어떤 내면의 아이러니를 불길하게 잡아냄으로서 계속 우리 곁에 어떤 이물(異物)로서 남는다. 아니 그것을 자처한다. 그리고 동시에 작가 자신에게도 불길하고 냉혹한 예언으로 남는다.

 

그러므로 소설을 다 읽고 덮은 후 운좋게도 어떤 찜찜함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면 우리는 그 찜찜함에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 할지도 모른다. 대체로 우리는 찜찜한 이물감을 느꼈을 때 정상이라고 여겨졌던 자기 자신을 불길하게 다시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운이 좋다면 우리는 그 거울에서 낯선 누군가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당신은 운이 좋지 않기 때문에 낯선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하던 일을 그대로 할 터이고, 일어날 일들이 일어날 것이며, 거울 속에서가 아니라 낯선이의 방문을 실제로 받고, 먼 곳의 전지적 관찰자인 예언자는 무심하게 그것을 기록하겠지만. 그것이 플래너리 오코너의 세계다.

 

그녀는 그를 뉴욕 시에 묻었지만 그러고 났더니 밤에 잠을 잘 수 없었다. 밤마다 뒤척거리며 잠을 못 자니 얼굴에 주름이 깊어졌다. 그래서 결국 그를 파내서 시신을 코린스로 보냈다. 그러자 밤에 잠을 잘 수 있게 되었고 아름다운 용모도 돌아왔다. (p.739) - <심판의 날> (이 단편집의 마지막 소설의 마지막 문장)

 

 

덧.

1호선 지하철에서 이 소설의 중반부를 한참 읽고 있는데 갑자기 나타난, 멀리서부터 멸치향을 풍기던 '멸치의 신'의 등장은 어떤 의미에서는 정확히 플래너리 오코너 소설 세계의 실사판이었다. 그의 등장은 <당신이 지키는 것은 어쩌면 당신의 생명>의 시프틀릿 씨를 연상시켰으며, 퇴장은 그 소설의 어느 인물들보다도 쿨했다. 거기에는 모종의 진실이 있었으며, 이 등장과 퇴장을 보며 나는 이 지하철의 세계도 결국 편견으로 가득했던 1950년대 미국 남부의 농장과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아니 우리는 이제 그보다 더한 편견의 시대를 살아가야 할 것 같다. 이 소설들은 결국 불길한 예언서들로 앞으로도 계속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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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재건

The Book | 2015. 2. 9. 14:36 | Posted by 맥거핀.

 


지평

저자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4-12-0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2014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파트릭 모디아노 최초의 미래지향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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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책을 다 읽은 후, 오래도록 책표지를 들여다본다. 저멀리 우뚝 솟은 에펠탑이 보이는 파리의 거리 풍경. '거리'는 파트릭 모디아노에게 상당히 중요한 키워드인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그의 몇몇 작품들의 제목만 보아도 이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데, 그의 대표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그리고 첫소설 <에투알 광장>, 혹은 <잃어버린 거리>,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 <외곽 순환도로> 같은 작품들, 그리고 이 소설 <지평>. 소설 <지평>에는 수많은 파리 거리 및 지명들의 명칭이 나온다. 콜리제 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로, 오페라 광장, 오퇴유, 센 가, 라지빌 가, 팔레 루아얄, 포부르 생토노레, 라 페루즈 가, 베르시 공원, 개선문...과장을 조금 보태, 이 책의 어느 페이지만 펼쳐도 거리나 지명들이 등장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이 수많은 거리나 지명이 이 소설에 등장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수많은 실재하는 거리들은 이 소설에 있어서 무엇일까.

 

먼저 시간의 측면. 이 소설은 하나의 커다란 회상이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얼마 전부터 보스망스는 젊었을 적의 일화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p.9)"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간 이후에 이루어지는 회상은 늘 단속적이다. 회상은 대체로 하나의 이야기가 되기 전에, 늘 조각나있다. 모디아노의 말을 빌리자면 이렇다. "그리고 그는 그 깊은 암흑 속에서 희미하게 명멸하는 불빛들의 이름을 수첩에 하나하나 적어나갔다. 명멸하는 빛이 너무도 희미한 까닭에 그는 전체를 재구성할 수 있는 소재가 될 만한 작은 실마리들을 찾기 위해 두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해 보았지만 거기엔 별의 파편과 부스러기들뿐, 전체는 없었다.(p.10~11)" 이 작은 실마리들, 별의 파편과 부스러기들, 그것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면 '거리'이다. 보스망스는 먼저 거리와 장소를 떠올리고, 그 다음 그 곳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린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 거리나 장소는 아직도 그곳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며, 보스망스는 길 이름과 건물 번지수를 잊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 예를 들어 보스망스가 기억 속에서 찾아 헤매는 마르가레트 르 코즈, 혹은 그와 연관된 메로베, 페른 부부, 스튜어트, 시몬 코르디에..그런 인물들은 지금 그 곳에 없을지라도, 그 공간은 아직 그 곳에 남아있다. 예를 들어 앙드레 푸트렐과 수상한 남녀들이 있던 블뢰 가 27번지 아파트에 이십 년이 흐른 뒤, 보스망스는 찾아간다. 비록 그 곳에는 앙드레 푸트렐은 이제 없지만, 어떤 기억이 남아있다. 스무 명의 남녀가 잡혀가던 어떤 기억이. 그러니까 거리는 시간에 있어서는 일종의 지표이다.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을 연결하는 작은 지표, 혹은 별의 파편과 부스러기.

 

공간의 측면에서 보면 거리는 이중적이다. 거리는 그들을 만나게 해준다. 장 보스망스와 마르가레트 르 코즈, 그들은 거리에서 만났다. 오페라 광장에서 시위대에 휩쓸려 그는 그녀에게 본의 아니게 상처를 입혔고, 그로 인해 그들의 관계가 처음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거리에서 기다리고, 거리에서 만나고, 거리를 걷고, 다시 거리에서 헤어진다. 그러나 거리는 만남이 시작되는 곳만은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위험한 공간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거리에는 그들이 만나고 싶어하지 않은 무엇인가가 있다. 보스망스에게는 그것은 빨간머리에 매정한 눈빛을 가진 아프간 코트를 입은 여자와 환속한 신부 혹은 가짜 투우사 모양의 남자라는 한쌍, 즉 만나기만 하면 돈을 요구하는 그의 부모이며, 마르가레트에게는 그것은 그녀를 언젠가부터 맹목적으로 뒤쫓는 위험한 남자 부아야발이다. 즉 거리에는 그들이 결코 마주치고 싶지 않은 것, 마주쳐서는 안되는 것이 돌아다니거나 지키고 있다. 거리에 나오지 않으면 그들은 안전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르가레트의 아파트는 "그 누구도 여기 있는 당신을 찾아낼 수 없(p.37)"는 공간이며, 보스망스의 부모는 이제 그의 집주소를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안전에는 무엇인가가 결여되어 있다. 왜냐하면 거리로 나오지 않으면 그들은 서로를 영원히 만날 수가 없으니까. 그러므로 그들은 안전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거리로 나온다. 부모가 출몰하는 센 가를 피해다니거나, 혹은 누군가가 나타날까봐 계속 뒤를 돌아보며 말이다.

 

그런데 사실 그들을 위협하는 이 존재들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전체적으로 꿈 같은 회상이 이어지는 이야기지만, 소설이 이상하게도 더욱 꿈 속의 꿈처럼 느껴질 때는 그들을 위협하는 이러한 존재를 묘사할 때이다. 예를 들어 보스망스가 부모라고 부르는, 그러나 부모라고 느껴지지 않는 오십대 남녀 한 쌍. 그들은 보스망스의 앞에 불현듯 나타나, 그에게 한껏 경멸감을 표출한 후 그저 당당하게 돈을 요구한다. 그리고 돈을 받으면 그들은 떠난다. 혹은 마르가레트를 쫓아다니는 부아야발. 예를 들어 마르가레트가 바게리안의 도움을 받아 부아야발을 피하는 장면은 마치 비현실적인 풍경의 일부처럼 묘사된다. 부아야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앞에 그저 버티고 서 있을 뿐이며, 그녀와 바게리안이 그를 떼어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간 후에도 밤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마른 얼굴과 체격이지만 육중한 느낌을 주는 남자, 손가락 사이로 칼을 꽂는 유희를 즐기는 남자, 갑자기 증발하거나 갑자기 나타나는 남자, 과연 그는 실재하는 무엇일까.

 

아니 나는 이 소설의 이야기가 허술하다거나, 비현실적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들의 존재는 실재하는 무엇이라기 보다는 마치 어떤 것의 은유처럼 느껴졌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예를 들어 우리가 흔히 '기억'이라고 말하는 것. 보스망스의 부모는 그를 "마치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끼게 해주려는 양(p.40)" 노려보고 경멸감을 표출하며 그에게 돈을 요구한다. 그리고 보스망스는 마치 무엇에 홀린 듯 어서 그들을 보내버리겠다는 마음으로 돈을 준다. 또는 위험한 남자 부아야발은 마르가레트에게 묻는다. "나한테 그런 말을 하고 부끄럽지도 않아?(p.128)" 이 경멸, 혹은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의 요구. 때로 기억은 수치심이나 부끄러움을 요구한다. 그것은 보스망스의 부모나 부아야발처럼 갑자기 찾아온다. 우리가 그것에 맞서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애써 피하는 것 뿐이다. 그러나 기억은 끈질기게 우리를 재방문하며, 계속 무엇인가, 우리가 줄 수 없는 무엇인가를 요구한다. 그것은 과거로부터 왔다. 부끄러운 무엇인가로부터 왔다. (너무 나아가는 것일지 모르지만, 이 소설의 배경이 1960년대 중반의 파리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그 과거(예를 들어 그의 부모)는 독일에 점령당했던 파리를 말한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독일에서 태어난 마르가레트에게 독일인이냐고 묻는 그 질문의 무심한 긴장, 혹은 보스망스가 길을 걷다가 순간순간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 무엇이 미안해? 응? 살아 있다는 것이? 같은 것과 연관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부끄러운 과거라는 기억을 언제까지나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결국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것은 어떻게든 당신을 찾아내니까. 그리고 동시에 기억에는 부끄러운 무엇인가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기억에는 부모라고 부르는 남녀 한쌍도 있지만, 마르가레트 르 코즈도 있으니까. 다시 말해서 기억은 일종의 거리와 같다. 위험하지만 그곳에 나가야만 누군가를 만날 수 있었던 거리처럼, 기억에도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지만, 그 기억의 거리에 어떻게든 나가야만 한다. 안전한 기억의 골방에만 갇혀 있으면 우리는 아무도 만날 수 없으니까. 즉 부끄러운 무엇인가를 대면해야만 그것을 넘어서 나아갈 수 있다. 예를 들어 그것은 보스망스가 부아야발을 찾아 그와 대면하는 것과 같다. 인터넷의 바다를 뒤져 만나게 된 부아야발. 그는 이제 더 이상 기억 속에 존재하는 위협적인 남자 부아야발이 아니다. 그저 늙고 잿빛 눈을 가진 부동산업자일 뿐이다. 기억 속의 부아야발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고, 그를 혹은 그의 기억 안에 있는 그녀를 다시 찾아오지 못한다. 그것은 이제 허물어진다.

 

무엇인가를 그렇게 재건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면하여 허물어야만 한다. 보스망스는 작은 별의 파편과 부스러기들만이 반짝거리는 기억의 골방에서 거리로 나와 기억들을 기꺼이 대면했고, 그것을 하나하나 허물 수 있었다. 이제 그는 보이지 않는 벽을 통과해 그녀에게로 간다. 모든 것이 재건된 도시 베를린에 이제 그녀가 있다. 거리는 재건되었고, 이제 기억도 재건된다. 새 지평에.

 

그는 그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바깥으로 나와서 얼마간 그 건물 앞에 머물렀다. 햇빛이 따사로웠다. 거리는 고요했다. 순간, 그런 확신이 들었다. 움직이지 않고 인도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보이지 않는 벽을 서서히 통과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그래도 자리는 여전히 같은 자리다. 거리가 더 고요해지고 볕이 더 잘 들었을 수는 있겠다. 한 번 일어난 일은 무한히 반복된다. 저쪽 길 끝에서 마르가레트가 꼬맹이 페터- 그녀가 즐겨 말하던 대로 그 녀석 -의 을 잡고 32번지와 그를 향해 걸어올지도 모른다.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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