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의 삶

The Book | 2015. 3. 25. 12:19 | Posted by 맥거핀.

 


선셋 리미티드

저자
코맥 매카시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5-01-26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이 시대 진정한 거장 코맥 매카시가 그려내는 삶과 죽음, 희망과...
가격비교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선셋 리미티드>는 코맥 매카시의 몇몇 전작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예를 들어 <카운슬러> 같은 것. 희곡이라는 이 책의 형식도 그러하지만(물론 <카운슬러>는 '시나리오' 형식이기 때문에 차이는 있지만), 그 내용상에서도 통하는 점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흑이 백에게 하는 일종의 카운슬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카운슬러>의 모든 카운슬링과 마찬가지로 이 카운슬링은 결국 실패한다. 물론 이 이야기에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은 책소개에 있는 설명대로 작품 <로드>이다. 그 설명을 그대로 가져온다면, 이 작품들은 '서사가 아닌 등장인물들의 대화가 이야기의 중심축이 되는' 작품들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운명이라는 원초적인 질문에 대한 심오하고 진지한 이야기를 담아'낸 작품들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물론 이 설명으로는 조금 어렴풋한 감이 있다. 무엇인 '인간의 운명'인가? 조금 더 쉽게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 <선셋 리미티드>에 나온 질문을 <로드>의 이야기로 치환해보자. <로드>의 세계. 모든 것이 이미 끝장나버린 세계의 어느 끝자락,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 곳, 살육과 약탈과 폭력이 있는 곳. 그곳을 남자와 소년이 걷는다.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들은 길, 그러니까 '로드'를 걷지만, 그 '로드'의 끝에 희망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아니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봤을 때 그 길의 끝에는 아무 것도 없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므로 그들은 묻는다. 왜 이 '로드'를 걸어야만 하지. 왜 불을 운반해야만 하지. 그러니까 그 '불'을 왜 걸음으로써 지속시켜야만 하지. 이토록 고통스럽고, 이토록 괴로운데. 모든 것이 끝장나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는데. 그 질문.

 

그 질문은 백의 질문이다. 그는 끝났음을 안다. 아무 것도 남지 않았음을 안다. 이 길의 끝에는 죽음이 있음을 안다. "사람들 마음에서 죽음의 공포를 몰아내주기만 한다면 사람들은 하루도 더 살지 않을 겁니다. 다음 악몽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면 누가 이 악몽을 원하겠어요? 모든 기쁨 위에는 도끼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모든 길은 죽음으로 끝나요. 아니면 더 나쁜 것으로. 모든 우정도 모든 사랑도. 고문, 배반, 상실, 고난, 고통, 노화, 모욕, 무시무시하게 집요한 병. 이 모든 것이 단 하나의 결말에 이릅니다. (p.133)" 그러므로 그가 택한 것, 즉 뉴욕에서 로스엔젤레스까지 달리는 급행열차 '선셋 리미티드'에 몸을 던지려 하는 것은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는 단 하나의 결말을 조금 더 빨리 당기는 것에 불과하며, 필연적이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흑이 있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 그는 백의 죽음을 어떻게든 막으려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그를 죽게 내버려두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백과 대화함으로써 어떻게든 이 죽음을 막으려고, 혹은 가능할 때까지 지연시키려고 애쓴다. 

 

이것은 명확하게 대비되는 것처럼 보인다. 삶과 죽음, 죽으려고 하는 자와 살리려고 하는 자.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위와 같은 삶과 죽음의 문제에 있어서는 대부분의 독자는 심정적으로는 살리고자 하는 쪽에 서려고 할 테지만, 그 처해있는 위치는 흑보다는 백의 위치에 더 가깝다는 사실이다. 즉 일부를 제외하고는 적어도 이 책을 집어드는 독자라면 흑보다는 백에 아마도 조금 더 가까울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것은 '선셋 리미티드'에 몸을 던지려 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삶의 조건이나 삶의 형태라는 측면에서 백의 입장에 더 가까울 것이라는 말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흑과 같은 경험이 없다. 그처럼 누군가를 죽인 후 교도소에 들어가 다시 또 누군가를 죽일 뻔하다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경험은 없다. 그보다는 우리 대다수는 지루하고 반복되는 일상을 반복하며, 가끔 통근열차안의 다른 사람들에게 속으로 욕을 퍼붓는 백의 입장에 더 가까울 것이다. 

 

아니, 우리라고 하지 말자. 적어도 나는 그랬다. 나는 그래서 처음에는 백에 조금 더 무게를 두면서 책을 읽었다. 왜냐하면 책이든 영화든 어떠한 이야기든 적어도 의지할 곳은 필요하니까 말이다. 완전히 균형을 이룬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대체로 어느 한 쪽에 필연적으로 기울어져 있기 마련이니까. 다만, 그것은 글을 읽는 위치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이야기의 내용상으로 보면 처음에는 흑이 우위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어떤 배경적인 측면, 즉 흑이 백의 목숨을 살려주었으며, 이야기를 하는 이곳이 흑의 집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렇고, 흑이 백을 대하는 어떤 어투 같은 부분에서도 그렇다. 흑이 대화하는 방식을 보면 약간 익살을 섞어서, 혹은 약간 장난을 섞어서 말하는 듯한, 즉 심리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측면이 있는데, 그것은 단지 어떤 흑의 개인적인 특성 때문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다. 그것은 한편으로 이 대화에서 흑이 어떤 결정적인 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기도 할 것인데, 그것은 인간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결국에는 살고자 할 것이라는 오랜 믿음에서 연유한 것이다. 즉 그가 아무리 죽는다고 할 지라도, 그것은 결국 일시적인 것이고, 어쩌면 위악의 변형된 형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 혹은 믿음은 마지막에 이르러 산산이 부서진다. 백의 죽고자 하는 의지는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필연적이고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흑은 백이 이렇게 말하는 와중에서도 이를 '농담 따먹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흑은 백이 결국 거리로 다시 뛰쳐나간 후에도 자신의 그러한 믿음을 버리지 못한다("저 사람 말은 진심이 아니었어요. 당신도 그게 진심이 아니란 걸 아시잖아요. 당신도 그게 진심이 아니란 걸 아시잖습니까." -p.138).

 

다시 말해서 코맥 매카시는 등장인물 그 누구에게도 기울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읽는 이를 카운슬링을 받는 위치에 놓고 카운슬링에 조금씩 동조해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적어도 나는 백이 커피를 마시고, 음식을 먹는 것을 그 신호로 봤다), 그 카운슬링이 산산이 실패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읽는 이를 그 어디에도 마음을 주지 못하게 만든다.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쇠사슬을 풀고 다시 죽으러 나간 백의 입장에 설 수도 없지만, 그것이 단지 그의 진심이 아닐 거라며 하느님을 향해 울부짖는 흑의 입장에 설 수도 없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길을 잃고 우두커니 서 있다.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그런데 어쩌면 그것은 나의 착각이 아니었을까. 양쪽 어느 입장 중의 하나에 동조해야 한다고 믿는 것, 그것이 코맥 매카시가 직관적인 구조로 파놓은 덫이 아닐까. 돌이켜보면 비슷한 얘기를 코맥 매카시는 <카운슬러>에서도 했다. 카운슬링들이 계속 실패하는 그 이야기에서 주인공 '카운슬러'가 살려고, 혹은 그의 여자친구를 살리려고 발버둥 칠 때, 코맥 매카시는 잔혹하게도 어떠한 희망을 보여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시도는 혹은 모든 카운슬링은 번번히 수포로 돌아간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마침내 카운슬러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죽음으로 가까이 가고자 할 때, 코맥 매카시는 그를 아주 조심스럽게 삶의 편으로 돌려놓는다. 아니 그것은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라는 이순신 장군스러운 이야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적어도 그 이야기에서는 살아남는다는 사실이 '카운슬러'에게는 더욱 잔혹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야기 그 자체로서도 그렇고, 한 마디 집약된 대사로서도 그렇다. "아니, 죽는 것은 너무 쉽지." 코맥 매카시는 늘 그런 것을 그려왔다. 어쩌면 죽는 것이 더 나은 것처럼 보이는 세계.

 

다시 말해서, 흑은 백과 대척점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흑'과 '백'이라는 이 구분법도 한편으로는 이 대척점을 더욱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다. 즉 그것은 '흑인'과 '백인'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어떤 극단으로서 '흑'과 '백'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척점에 있는 것들이 사실은 그렇듯 공유하는 지점이 있다. 그들은 사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버티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이 죽음의 목소리에 투항하려고 한다면, 흑은 하느님의 목소리, 즉 종교에 투항함으로서 버텨낸다. 그들은 고통없는 삶을 원한다. 흑이 하느님의 목소리를 따르며, 고통을 없애고자 한다면, 백은 고통을 주는 그 자체, 즉 자신의 삶을 끝장냄으로서 고통을 없애고자 한다(백이 하필이면 '선셋 리미티드'를 자살도구로 택한 것도 그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는 '선셋 리미티드'가 통증 없이 눈깜짝할 사이에 삶을 끝내주기 때문에 그것을 택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코맥 매카시가 지금까지 이야기해온 것들은 그 반대편에 있는 것들이었다. 고통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고통 속에서 지속시켜야 하는 삶. 그것은 통증 없는 죽음을 선택해 끝내는 것도 아니고,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행복하다고 믿으면서 사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예를 들어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카운슬러의 삶이며,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일 자체가 용감한 일이라고 믿는 삶이다. 그리고 내가 읽은 이 이야기도 사실은 그렇게 다르지 않다. 행복 속에서 사는 것도 아니고, 쉽게 끝내야만 하는 것도 아닌, 고통 속에서 지속해야 하는 삶. 그것에 가치가 있을까. 답할 수 없는 질문에 답을 하려고 애쓰지 말자. 다만 나는 그것을 이름붙여본다. 그것은 회색의 삶이라고. 그냥 가는, 가야만 하는 회색의 삶.

 

아빠는 정말로 용감해요?
중간 정도.
지금까지 해본 가장 용감한 일이 뭐예요?
남자는 피가 섞인 가래를 뱉어냈다. 오늘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난 거.
정말요?
아니. 귀담아 듣지 마라. 자, 가자. - <로드> p.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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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모노프

저자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출판사
열린책들 | 2015-01-1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멋지고, 번득이며, 냉혹하다! 프랑스 문단의 독보적인 존재 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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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리모노프>에는 본명 에두아르드 베니아미노비치 사벤코, 나중에는 리모노프라고 불리게 된 사내가 그의 필명 '리모노프'를 스스로 짓는 짧는 일화가 나온다. 이 '리모노프'라는 말은 레몬을 뜻하는 '리몬'과 수류탄을 뜻하는 '리몬카'에서 복합적으로 유래한 것인데, 이는 그의 뾰족하고 전투적인 성격을 고려한 작명이라는 부연설명이 나온다. 레몬과 수류탄, 상당히 먼 곳에 위치한 것처럼 보이는 이 두 가지 물체의 기이한 결합(바로 표지에 있는 이것). 재미있게도, 아니 필연적이게도 이 리모노프의 삶, 혹은 그의 사상은 그의 이름과 상당히 비슷한 것 같다. 그의 사상, 그리고 그의 사상을 반영한 그의 삶은 온갖 이질적인 것들의 결합이었고, 전혀 만날 수 없는 것들의 어우러짐이었다. 책에 등장하는 수없이 많은 것을 이에 가져다 붙일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는, 러시아의 노동교화 수용소인 엥겔스 강제 수용소의 주철 배관 위에 광택 스테인리스 세면기를 얹어 단순하면서도 깔끔하게 디자인한 수용소 세면대가 그가 출판사 편집자의 초청을 받아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필립 스탁이 실내 디자인을 맡았다는 뉴욕의 한 호텔에서 봤던 세면대와 똑같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몇 안되는, 아니 거의 유일한 사람이다. 아니면 이런 것. 그는 스탈린과 히틀러를 한꺼번에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다(뭐 라도반 카라지치와 피델 카스트로라고 해도 상관없다). 2차 세계 대전 중 스탈린그라드에서 수많은 독일과 소련의 젊은이들이 이유를 모르고 죽어갈 때, 베를린과 모스크바에서 각각 콧수염을 매만지고 있던 두 사람을 동시에 말이다.

 

그런데 이질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것들에는 분명히 어떤 눈에 띄는 공통점들이 있다. 히틀러와 스탈린의 공통점이 콧수염의 특이성만이 아니었던 것처럼, 이 이질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것들은 분명히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 뭐 어려운 얘기할 것 없이 예를 들어 레몬과 수류탄처럼 말이다. 이것들은 불리는 발음('리몬'과 '리몬카')이 비슷할 뿐더러 길쭉한 타원형의 생김새도 그렇게 심하게 다르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온갖 이질적인 것들이 결합된 것처럼 보이는 리모노프의 사상과 삶에도 적어도 모종의 일관성은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이 작가가 말하는 '어떤 메시지'일 것이다.

 

리모노프는 어떤가. 우크라이나 출신의 깡패로 출발해 소비에트 언더그라운드의 아이돌, 맨해튼의 거지, 억만장자의 집사를 거쳐 파리의 인기 작가로, 발칸 반도를 헤매던 사병으로, 그리고 이제는, 공산주의 붕괴 이후 혼란기에 청년 무법자들의 당을 이끄는 카리스마 넘치는 늙은 보스로 변신해 있다. 스스로는 영웅이라고 자부하지만, 남들 눈에는 인종지말로 비칠 수도 있다. 이 점에 대해 나는 판단을 유보하고 싶다. 다만, 세면대에 얽힌 일화를 별생각 없이 재밌게 듣고 나서 그의 파란만장하고 위험천만한 인생이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모노프, 그 자신과 러시아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우리 모두의 역사에 대해서 말이다.

어떤 메시지가 있긴 있는데, 그게 과연 무엇일까? 그것을 찾고 싶어 나는 이 책을 시작한다. (p. 38)

 

적어도 내가 보는 리모노프에게는 그것 중의 하나는 남들과 다르게 살고 싶다, 혹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인물로서 살고 싶다는 욕망이었을 것이다. '가난하고 무모했던'이라고 간단하게 묘사하는 것이 매우 부족한 묘사처럼 보이는 작가로서 대접받기 이전의 그의 젊은 시절의 삶에서 그를 계속 추동하는 가장 큰 욕망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지금의 이 밑바닥에 떨어져있는 상태가 나의 삶을 기록한 책에서 가장 마지막 장인가, 아니면 그저 가난하고 힘든 시절을 장식하는 적당한 일화의 하나인가. 그는 말 그대로 그것이 자기 삶의 마지막 장이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거렸다. 아니, 적어도 그런 것이 될 수 없다고 굳게 믿었다. 그는 이름을 날리고 싶었다. 그런 목적을 달성해준다면 어떠한 것이라도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앞의 세면대 일화에 등장하는 그 두 가지는 그런 면에서 통한다. 유명한 작가로서 세면대 앞에 서는 것이나, 혹은 유명한 정치범으로서 세면대 앞에 서는 것이나 그에게는 그렇게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물론 이렇게만 이야기하는 것은 그에게 가혹할 뿐더러, 어떤 의미에서는 그를 일종의 기회주의자처럼 비치게 한다는 지적에 동의한다. 어떻게 보면 주어진 기회를 놓치고 싶어하지 않아한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는 기회주의자이며, 그는 단지 주어진 기회를 남들보다 더 재빠르고 확실하게 움켜잡는 것에 능했을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간다면, 과연 그런 욕망에서 자유롭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구나 삶에서 주인공이 되고 싶어한다. 아니, '자신의 삶에서는 모두가 주인공입니다'와 같은 <좋은 생각>에나 실릴 법한 듣기 좋은 소리 빼고 말이다. 누구나 한때는 수많은 조연과 단역이 스쳐지나가는 주인공과 같은 삶을 상상하지만, 그것이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거나, 혹은 알아차리는 척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기회들을 잡으려고 발버둥치고, 혹은 기회가 없다는 현실을 바라보고, 기회들을 놓치고, 기회들을 먼 발치에서 바라보고, 운이 좋아 기회에 올라타지만, 그것이 자신이 믿은 '기회'가 전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와중에 우리에게도 서서히 이질적인 것들이 결합되기 시작한다. 물론 리모노프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다. 예를 들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은 이해할 수 없지만, 국내노동자와 외국인노동자의 차별은 이해한다(이 워딩은 그저 내 짧은 머리로 나온 '워딩'일 뿐이다. 물론 누군가는 이것이 전혀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이 짧은 워딩에는 수많은 것이 담겨있기 때문에 어쩌면 짧은 워딩으로 쓰기에는 적절한 예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책에서 말하는 "남과 비교해 스스로 우월하다거나, 열등하다거나, 심지어 동등하다고 판단하는 인간조차 현실을 모르는 것이다.(p.246)"라는 말과 연관되는 논의도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와 같은 어떤 이질성 말이다. 그 모든 것이 리모노프의 탓이 아니듯, 그것은 우리의 탓만이라고 할 수는 없다.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현대사회에서 명확해 보이는 것은 점점 줄어들고, 어떤 가치관에 무게를 두어야 할지 알면 알수록 모르게 된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리모노프와 우리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 뿐, 비슷한 면이 있으며, 그것을 어떤 현대인들의 특질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며, 리모노프는 그것을 단지 극단에서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책의 마무리이다. 저자 엠마뉘엘 카레르는 책을 마무리짓는 인터뷰를 하기 위해 리모노프를 찾아간다. 몇 시간의 인터뷰를 계획했지만, 질문은 금방 동이 나고, 그는 리모노프에게 더 이상 물을 것이 없다. 자신이 자신의 삶에 대해 이미 모든 것을 너무나 많이 이야기했기 때문에 더 물을 것이 없는 삶. 그것이 불러오는 어떤 아이러니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리모노프와 그가 나눈 마지막 대화는 재미있다. 리모노프는 마지막으로 저자에게 묻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굳이 나에 대한 책을 쓰고 싶은 이유가 뭡니까?" 저자는 진심을 이야기한다. 당신이 흥미진진한 삶을 살았으며, 소설 같은, 아슬아슬한 인생이라고, 역사 속으로 몸을 던지는 위험을 택한 인생이라고. 그러자 리모노프는 피식 메마른 웃음을 흘린다. "개떡 같은 인생이지, 한마디로." 그것을 저자의 아들 가브리엘은 정리한다. '루저'같은 인생이라고. 그러니까 한마디로 자타공인 루저, 리모노프.

 

그것을 저자의 포장대로 이렇게 바꿀 수도 있다. 중앙아시아 어느 이름 복잡한 도시의 사원, 높은 담장 및 그늘에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이가 빠지고, 상당수는 눈도 없는 그을린 얼굴을 가진 노인 걸인들의 삶. 모두 다 내려놓은 사람들, 넝마를 걸친 걸인들, 나이도 재산도 이름도 알 길이 없는 사람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왕들. 이 비유는 적어도 나에게는 이렇게 보인다. 어떤 삶이든, 자타공인 루저라고 판명난 리모노프의 삶이든, 아니면 그것이 아닌 작가이자 정치가이자 혁명가인 풍운아 리모노프의 삶이든, 아니면 그저 평범한 우리의 삶이든, 생겨날 수 밖에 없는 어떤 덧없음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덧없기 때문에 누구나 왕이 될 수 있는 그 동등함에 대해서 말이다. 동등하지 않다고? 다르다고? 글쎄.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을 하나 해보자. 그렇게나 이름을 날리고 싶어서 발버둥쳤던 리모노프의 이름을 당신은 이 책을, 혹은 이 리뷰를 읽기 전에 들어본 적이 있는가? 소아병적으로 말하건대, 적어도 나는 처음 들었다. 아니면 이 책 뒤에 실린 이 광고는 어떨까. "이름도 낯선 이 사내의 삶을 읽는 것이 너무도 즐겁다." - 텔레그래프. 리모노프는 분명히 이 광고를 보고 분통을 터뜨렸을 것이다.

 

 

덧1.

책이 재미는 있지만, 참 진도는 안 나간다. 나는 그것이 읽는 이에게 계속 어떤 피로감을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아마 이 책의 독특한 형식과 관련이 있을 터였다. 즉 저자 엠마뉘엘 카레르가 실존인물 리모노프가 쓴 자신의 삶에 대한 저서와 그와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그의 삶을 기록하면서 그에 덧붙여 저자 자신의 삶과 자신의 짤막한 논평 아닌 논평을 붙여나가면서도 '소설'이라고 이야기하는 이 구조 말이다. 예를 들어 간략한 이러한 질문. 어디까지가 사실인가. 우리는 어디까지 이야기를 믿어야 하는가. 어느 부분이 사실이고, 어느 부분이 창작된 허구이며, 혹은 창작되었다고 해도 그것은 카레르가 창작한 것인가, 아니면 리모노프 자신이 창작한 것인가. 아니면 질문을 이렇게 바꿔서. 어디까지가 리모노프 본인이고, 어디까지가 저자가 보는 '만들어진 리모노프'인가, 혹은 저자가 만들어낸 리모노프에 의해 우리 자신이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 만들어낸 '이차적 리모노프'인가. 물론 누군가(기억이 안난다)의 말대로 '모든 기록은 기록하는 자를 같이 기록하기 마련'이어서 이 기록에서 저자 카레르를 완전히 분리하여 순수한 리모노프를 끌어내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카레르는 이를 끝내 '소설'이라고 주장하는 것일 테지만 말이다. <씨네21>에서 인공위성을 혼자 쏘아 올리려고 하는 송호준('라스'에 나왔던 그 사람이다)을 다룬 다큐 <망원동 인공위성>을 보고 나온 이미랑 영화감독이 말한 '육체적 고됨'도 아마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타인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다큐멘터리의 본질적인 윤리적 질문이 육체적 고됨으로 변형되어 감독과 찍히는 피사체인 송호준을 통해 자신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이 이야기 역시도 읽는 우리를 지치게 만드는 면이 있다. 물론 가장 쉬운 방법은 기록하는 자의 '선의'를 믿는 것이지만, 그의 '선의'를 믿기에는 그의 태도는 상당히 모호한 면이 있다. (여기에는 저자의 어떤 '묘한 열등감'이 작용하는 것 같다. 아무튼 흥미로운 것은 저자가 그 열등감을 굳이 숨기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덧2.

아무튼 그래도 재미는 있다(재미라는 말을 너무 남발하는 것 같다). 특히 리모노프를 통해 보는 러시아적인 것의 어떤 면모들 말이다. 예를 들어 공산주의를 바라보는 러시아인들의 시각 같은 것들이나 과격하고 떠들썩하면서도 시와 문학을 사랑하는 러시아인들의 면모 같은 것을 소개하는 부분. 도스토예프스키의 삶을 통해서 그 안에 담긴 '러시아적인 것'을 찾아내려 했던 E.H.카의 시도와 비슷하달까(재미있게도 이 책에는 리모노프의 글이 도스토예프스키의 글과 비슷하다는 뭇사람들의 평도 나온다). 한편으로 이른바 페레스트로이카나 글라스노스트 등의 말로 대변되는 이른바 '러시아 공산주의의 몰락'을 바라보던 서구 지식인들의 시각이 어땠는지를 보는 것도 흥미로운데, 그 시각은 내 저럴 줄 알았지, 언젠가는 그럴 줄 알았어,와 같은 일종의 고소함이 반영된 시각과 어떤 안타까움들이 공존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고르바초프를 마치 얼뜨기 같이 묘사하는 부분 같은 것들 말이다. 얼뜨기들은 우리를 우습게 만들기도 하고, 동시에 안타깝게 만들기도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웃거나 안타까워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얼뜨기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 아니런가. (어렸을 때 TV에서 고르바초프를 무슨 위대한 인물처럼 소개한 프로그램을 봤던 기억이 난다. 하긴 당시 그는 우리나라에서 위인전에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도 했다.) 리모노프라는 사람에 대해 관심이 없더라도 러시아라는 사회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이라면 흥미로운 독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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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스캐처, 베넷 밀러

Ending Credit | 2015. 3. 4. 13:07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전체 내용과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1.

<폭스캐처>는 '역사상 가장 돈 많은 살인범'의 실제 사건을 영화화했다. 1996년 1월 21일, 세계 최대의 화학기업 듀폰의 직계 상속자인 존 E. 듀폰은 LA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데이브 슐츠를 자신의 38구경 권총으로 살해한다. 300만㎡가 넘는 펜실베이니아의 듀폰 사유지에는 '폭스캐처' 농장을 중심으로 승마장, 사격장을 비롯해 레슬링 전용 체육관과 선수들을 위한 사택이 있었다. 슐츠는 애틀랜타올림픽 준비를 위해 가족과 함께 이곳 사택에 머물고 있다가 변을 당했다. 출동한 경찰은 다양한 총기와 장갑차까지 보유하고 있는 듀폰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이틀 동안이나 대치를 벌여야 했다. 듀폰은 싱겁게도 보일러를 고치려 잠시 건물 밖으로 나왔다가 체포돼 별다른 저항 없이 수갑을 찼다. 듀폰쪽 변호인은 그가 정신질환에 의한 심신미약 상태임을 주장했지만 법원은 3급 살인죄를 적용했고, 듀폰은 2010년 감옥에서 숨졌다.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은 재벌이 살인을 저지른 데 대해 미국 사회는 들끓었고 살해 동기에 대해 갖은 추측이 난무했다. 한국에서도 <9시 뉴스>를 포함해 뭇 언론에서 비중 있게 보도됐다.

 

<씨네21> 991호에 실렸던 송형국 평론가의 글 서두이다. 이 부분은 글의 서두이자, 이 사건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지만, 사실 영화 상에서 이 부분을 보기 위해서는 거의 2시간 가까이 기다려야만 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이 '사건'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이 '왜 일어났는가'를 보여주려고 한다. 그러나 이 '왜'를 설명하는 것이 그다지 간단하지만은 않다.

 

2.

사실 이 영화의 구성은 조금 흥미롭다. 위에 언급되는 것은 사건의 당사자들인 존 듀폰(스티브 카렐)과 데이브 슐츠(마크 러팔로)이지만, 영화가 시작되고 오프닝이 지나간 후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데이브 슐츠의 동생 마크 슐츠(채닝 테이텀)이다. 그도 형과 같은 레슬링 선수이자, 역시 LA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기도 하다. 그를 보여주는 초반의 씬들은 인상적이다. 아무도 없는 레슬링 도장에서 인형을 잡고 혼자 연습하고 있는 그를 한동안 멀리 바라본 후, 장소는 어느 초등학교로 옮겨진다. 마크가 강연을 준비하는 모습이 보인다. 원고를 손에 들고 중얼거리며 앞을 노려보는 그는 긴장하거나 혹은 이 상황이 짜증이 나는 것 같다. 그리고 미국 국기가 걸린 강당에서 마크는 초등학생을 상대로 강연을 한다. 그는 오륜 마크가 그려진 자켓을 입고 목에 건 금메달을 보여주며, 레슬링과 조국 같은 이야기를 하려하지만, 아이들은 시큰둥하다. 그리고 서류에 날짜를 쓰는 어떤 손이 보인다. 1987년 3월 14일. 학교 행정실이다. 강연료가 20달러라고 말해주며 행정직원은 이름을 묻는다. 데이브인가요, 데이빗인가요? 그리고 마크는 답한다. 마크라고, 형 대신 왔다고. 행정직원은 약간 의아한 눈길을 보내지만, 그리 문제 삼는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마크는 덧붙인다. 둘 다 금메달리스트라고. (이 장면들에서 마크의 옆으로 당시 대통령 도널드 레이건의 사진이 언뜻 비친다.)  그리고 그 이후 찌푸린 얼굴로 낡은 패스트푸드점에서 마치 노동자들처럼 보이는 사내들 틈에서 음식을 주문하려 하는 마크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굳은 얼굴로 차 안에서 햄버거를 먹는다.

 

이 장면은 그 자체로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이 장면은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마크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말해주기도 하고, 마크와 데이브의 관계의 어떤 일단(예를 들어 형의 도움으로, 형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마크)을 보여주기도 하며, 그들이 현재 처한 위치를 말해주기도 한다(즉 데이브는 강연을 초청받지만, 마크는 사실은 데이브가 받았어야 할 강연료를 받아, 낡은 차 안에서 싸구려 음식을 먹는다. 같은 올림픽금메달리스트이지만 데이브와 마크의 처지는 왜 다른가). 그런데 이 장면이 더 흥미로운 것은 이 씬들이 영화 마지막의 에필로그 씬들과 일종의 대구를 이루기 때문이다. 영화의 가장 처음에 등장하는 것도 마크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도 마크이다. 그는 형이 죽은 후 UFC같은 격투기대회에 출전하는 것으로 삶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 같다. 대기실에서 혼자 외롭게 고개를 숙이고 의자에 앉아 있는 마크의 모습을 비춰준 후(이 장면이 한편으로 마음을 건드리는 것은 이전의 레슬링 경기장에서는 그렇게 의자에 앉아 있는 마크의 옆에 그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건네고 힘을 북돋우는 형 데이브가 있었기 때문이다), 올림픽금메달리스트 출신이라는 등의 화려한 소개를 들으며 링으로 올라가는 여전히 굳은 얼굴의 마크의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열광하는 관객들은 외친다. USA! USA! USA! 그리고 영화는 끝난다.

 

이 장면이 대구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 두 장면 모두 관객을 상대로 한 어떤 무엇을 시작하려는 마크의 모습을 담고 있기도 하거니와 어떤 공통적인 요소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시작부에 나왔던 강당에 걸려있었던 미국 국기와 행정실에 있던 레이건의 사진 그리고 마크가 강연에서 얘기하려 했던 조국과 같은 것을 기억한다면, 그것에 마치 화답을 보내는 것 같은 마지막의 USA!와 같은 외침들은 조금은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왜 그들은 마크의 이름을 외치지 않고, USA를 외치는 걸까. 마크는 국기가 걸려있던 초등학교에서 조국을 이야기했지만, 시큰둥한 반응을 받았고, 이제 몇 년 후 그 시큰둥한 반응은 열렬한 환호로 이상하게 귀환했다. 그러나 이전이나 지금이나 마크의 얼굴은 굳어 있고, 어쩌면 그 자리에 대신 섰을 수도 있는 데이브는 그 시간들 사이에 누군가의 총을 맞았다. 기의는 달라졌고, 기표는 여전히 비어있다. (그러니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의 끝과 마지막을 이 비어있는 기표가 장식한다는 것이고, 안타까운 것은 그가 형의 죽음에서도 그다지 배운 것은 없어보인다는 사실이다.)

 

3.

이것이 조금 더 다층적이 되는 것은 그 이전의 오프닝(그러니까 마크가 등장하기 전의 오프닝)과 이것이 묘한 연결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오프닝은 사실 많이 이상하다. 영화가 시작되고 실화를 바탕으로 하였다는 문구가 지나간 후, 보이는 것은 낡은 기록사진과 같은 풍경들이다. 오래 전의 폭스캐처 농장을 보여주는 낡은 기록필름. 말과 사냥개들과 사냥을 하러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실제의 기록필름(어린 시절의 존 듀폰과 그의 어머니의 컷이 있는 것도 같지만 확언은 못하겠다. 아마도 영화의 중간에서 존 듀폰이 마크에게 보라고 하는 비디오도 이것과 비슷한 화면일 것이다). 여우를 잡으러 뛰어가는 사냥개를 담은 기록필름의 컷 사이에 제목이 뜬다. '폭스캐처' 그러니까 여우를 사냥하는 무엇. 그리고 이어서 아까 이야기했던 인형을 붙잡고 텅빈 연습장에서 연습을 하는 마크의 모습이 여기에 붙는다.

 

그러니까 사실 여우를 잡는 사냥도구였던 말 혹은 사냥개와 그의 지원을 받아 레슬링 훈련을 하는 마크의 존재의 의미는 존 듀폰에게는 동일하다는 이야기인 것 같다. 실제로 영화 중간에 마크가 따온 메달이 결국 여우와 같지 않느냐는 듀폰의 말도 있다. 듀폰의 어머니에게는 여우사냥과 말이었다면, 듀폰에게는 그것이 레슬링과 마크였을 뿐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앞에서 말한 마크가 나온 오프닝 혹은 엔딩과 이것을 연관지어 본다면 여기에서 감독은 다른 질문을 하는 것처럼도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게는 마치 그것이 존 듀폰만 그런 것인가,라고 묻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존 듀폰이 마크가 따온 메달을 마치 자신이 딴 것처럼 자신의 진열대에 전시할 때, 혹은 더 나아가 듀폰이라는 가문이 (실제는 자신들이 획득한 것이 아닌) 여우와 메달을 자신의 것으로 간주할 때, 국가와 USA를 외치는 국민은 거의 비슷한 심리적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것에는 어쩌면 단지 규모나 사적소유(실제로는 아닐지라도 그렇게 믿는 것)의 차이만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 어쩌면 이런 질문. 당신은 김연아가 딴 금메달을 왜 그렇게 자랑스러워했나.   

 

 

4.

물론 이 영화에서 이런 질문까지 나아갈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사실 굳이 우리까지 들여다보려 하지 않아도 존 듀폰과 데이브 슐츠, 마크 슐츠 이 세 사람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흥미진진하다. 존 듀폰의 비극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어쩌면 그의 비극은 그가 그의 어머니 이상의 것을 바랬다는 것에 있지 않을까. 중간에 그가 레슬링 선수들에게 일종의 도취 상태에서 연설을 하는 장면이 있다. 그는 어머니가 애지중지하는 말들이 단지 먹고  싸는 것밖에 모르는 멍청한 것들에 불과하다고 조롱하며, 동물 위에 앉는 것이 뭐 그리 고상한지 모르겠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는 동물이 아닌 인간 위에 앉고 싶었다. 인간도 물론 먹고 싸지만, 인간은 한 가지를 더해 주니까. 즉 그를 존경해줄 수도 있으니까. 다시 말해서 그는 멘토가 되고 싶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멘토가 받는 존경을 받고 싶었다(예를 들어 그가 자신이 써낸 조류학 책을 보여주며 자신을 조류학자라고 소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그에게는 조류학이든 뭐든 사실 상관이 없었다. 단지 그에게 필요한 것은 조류학자가 받을 수도 있는 존경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멘토가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데에 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멘토가 되는 법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배워서 아는 것도, 흉내를 내서 알게 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것은 듀폰이 어리석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아니 도리어 그 반대에 가까웠다. 듀폰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 그것은 듀폰이 데이브를 쏘기 전에 보이는 행동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어떤 분노를 보이거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단지 그는 그 전에 자신을 본다. 자신이 마크와 데이브를 비롯한 레슬링 선수들의 멘토인 것처럼 만들어진 비디오. 이것이 단지 '만들어진 것'에 불과함은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가장 잘 안다. 그는 그것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 (예를 들어 어머니가 집의 운전기사의 아들에게 돈을 주며 자신의 친구로 '붙여줬을 때'에 그것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는 그 '만들어진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진짜(그러니까 진짜 '멘토')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사실 간단했다. 그것은 진짜의 존경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5.

즉 듀폰에게는 데이브의 존경이 필요했다. 마크의 존경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았고(아마도 마크는 그를 어떤 의미에서는 진짜 존경했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형이나 형의 아내에게 듀폰에 대한 태도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는 장면에서 이것이 잘 드러난다. 그러나 사실 이도 멘토로서의 존경이라기 보다는 그의 금력에 대한 존경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는 데이브와 같은 진짜 멘토의 존경을 받고 싶었다. (멘토로서의) 존경을 받는 것은 다른 멘토의 존경을 받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간단한가.

 

그런데 정말 비극은 데이브는 그런 것을 모르는 사람이었다는 데에 있다. 즉 그는 누군가의 권위에 따르고 존경을 보낸다는 것을 하기 싫어한다기 보다는, 아예 그렇게 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마크 러팔로가 아주 훌륭한 연기로 이를 잘 보여주는데) 데이브에게 "존이 내 멘토입니다."라고 말하라고 비디오 연출가가 시킬 때, 그는 하기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의미를 수긍하고 하려고 하는 듯이 보이지만, 말 그대로 어떻게 하는지 방법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즉 그것은 그의 천성처럼 보이며, 그가 다른 사람들, 특히 듀폰에게 대하는 태도를 보면 이것이 잘 드러난다. 다시 말해서 비극은, 이 전혀 알 수 없는 것을 알려고 하는 혹은 알아야만 하는 사람들이 만났을 때 발생했다. 존 듀폰은 멘토가 되는 법을 모르며, 데이브는 멘토라는 것을 대하는 법을 모른다. 존 듀폰이 어떤 의미에서 아직 어린아이였다면, 데이브 역시도 어떤 의미에서는 어린아이같이 깨끗한 인물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김중혁 작가가 <씨네21> 993호에서 이 영화를 다룬 글에 데이브가 차를 고치다가 듀폰을 만나 총을 맞고 죽어갈 때 그의 팔에 쓰인 낙서 'P.U.KIDS'라는 문구를 보고, 혹 이것이 아이처럼 굴지 말자고, 더이상 아이가 아니라고 자신을 나무라는 의미는 아닐까,라고 쓴 구절이 있는데, 그런 해석이라면 위의 얘기가 통하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영화와 이 글을 본 후 궁금해져서 이 부분을 찾아봤는데, 이 부분은 마크 슐츠가 데이비드 토마스와 사건 후 쓴 <Foxcatcher: The True Story of My Brother's Murder, John du Pont's Madness, and the Quest for Olympic Gold>라는 책의 시작머리에 나오는데, 차를 고친 후 아이들을 픽업(Pick Up)하러 가야한다고 자신에게 일러주는 의미였던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이 문구가 도드라지게 처리한 것은 이 영화에서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6.

<폭스캐처>는 이상하게도 영화가 끝난 후 잔상을 많이 남기는 영화다. 예를 들어 몇몇 기억에 남는 잔상들이 있다. "존이 내 멘토입니다."라고 말하라고 지시 아닌 지시를 받았을 때 마크 러팔로의 하고자 하는데 도저히 되지 않는 듯한 어색한 모습이나, 듀폰의 어머니 역을 맡은 바네사 레드그레이브가 짓는, 스티브 카렐이 어떻게든 어머니 앞에서 멘토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쓸 때, 애쓰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도저히 못보겠다는 표정, 혹은 스티브 카렐이 고개를 약간 치켜 들고 동공이 비어있는 듯한 눈빛으로 자신이 멘토라고 만들어진 비디오를 보는 장면 같은 것 말이다. 내가 일부러 극중인물 대신 배우 이름을 쓰는 것은 이 영화에서는 이들이 모두, 이들 자신이 아니면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 같은 연기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특히 포스터에도 있는 가짜 코를 달고 약간 고개를 위로 치켜 뜬 스티브 카렐의 연기에는 찬사를 보내고 싶다. 그의 눈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영화의 많은 것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영화는 사실 그렇게 흔하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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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5.03.06 00: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난 설연휴에 이 영화를 봤어요. 그날 트위터에 <폭스캐처>보는 내내 힘들었다고 몇자 올리기도했었는데요. 전 영화가 진행될수록 배우들 표정을 바라보는 것도 쉽지않았어요. 좀 숨이 턱턱막힌다고할까, 특히 스티브 카렐은 좀 무서웠는데 그 공허한 눈빛이 어디로 어떻게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을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올림픽금매달리스트지만 늘 형때문에 자신의 존재감이 가려진다고 생각하는 마크에게 거대한 재력가이자 레슬링에 미친 존 듀폰이 스폰서를 자청했을때 마치 구원자를 만난 기분이었겠죠. 어쨋든 두 사람의 조합, 그 시작은 서로가 서로에게 나쁘지 않았다고봐요. 잘 되었더라면 말이죠.

    그런데 잘 될 수가 없었잖아요. 애초에 존 듀폰은 멘토로서 선수인 마크를 이해하고 그가 슬럼프에 빠졌을때 조언과 도움을 줄 수 있는그런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를 데려온건 최종적으로 데이브를 캠프에 합류시키기 위한것 같기도해요. 결국 그렇게 되었지만.

    이 불안하고 위태위태한 사람들을 어찌해야할지.. 데이브 슐츠는 존 듀폰과는 너무도 다른사람인데 이유와 목적이 있긴했지만 그가 마크가 있는 폭스캐처로 들어간것은 파국의 시작이었던것 같아요.
    매커핀님이 말씀하신 데이브가 존이 자신의 멘토라고 인터뷰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여겨봐야하는 장면이 아닐까싶어요 . 그 신에 대한 해석도(사실 전 데이브가 도저히 입에서 안떨어지는 그 대사를 그래 그게 소원이다면 함 해줄게 그렇게 받아들였는데) 놀라왔어요. 데이브는 멘토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모르는 사람이었다는것 말이죠. 실제로 일어났던 이 사건을 둘러싼 여러가지 복선과 이유들중에서 가장 설득력이 높아보여요. 진짜로 존경받는 멘토가 되고 싶었던 사람과 그런 멘토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모르는 사람이 만났을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건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 어제 짧막한 답글을 달았는데 뭔가 더 하고픈말이 있어서 주절거리다 보니 자정이 훨씬 지났네요. ^^; 이제 자야죠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5.03.07 00: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지금도 자정이 지났네요..사실은 지금 약간 술을 마신 상태이기는 합니다.^^

      김중혁 작가가 이 영화를 다룬 글에서 이 영화가 약간 무성영화처럼 느껴진다,라고 썼었는데, 그런 이야기에 어느정도 공감이 가요. 인물들, 특히 마크나 데이브 같은 사람들은 말보다는 몸으로 대화를 하고자 하잖아요. 물론 그들이 운동선수이기 때문에 그런 면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뭔가 말이라는 것을 불편해한다는 느낌도 있었어요. 마크 러팔로가 너무나도 훌륭한 연기로 보여줬듯이 말은 그렇게 하지만 몸에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존이 멘토라고 억지로 말을 하기는 하지만요.

      아무튼 데이브도 보통 사람과는 어떤 사고하는 패턴이 다르달까, 혹은 위에도 썼듯이 어린아이 같은 느낌도 있었어요. (위에 김중혁 작가가 이야기한대로 '어린아이처럼 굴지말자'라는 뜻이 거기에는 어느정도 담겨있다면, 사실은 그가 평소에는 어느정도 어린아이처럼 굴었다,라는 의미가 있기도 하겠죠.) 예를 들어 마크가 형수에게 화를 내며 방을 나갔을 때에도 다른 사람들 같으면 훈계하거나, 혹은 너를 이해한다고 했을텐데 제3의 반응, 그러니까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레슬링 얘기를 하잖아요. 그런 게 한편으로는 조금 이상했어요.

      그런데 아무튼 저는 그 마지막 씬들이 조금 마음이 아팠어요. 그 마지막들. 데이브는 그런 방식으로 죽고, 존 듀폰은 넋이 나간듯 하죠. (사실 그는 데이브를 제거하고자 했다면 다른 방법이 얼마든지 많았을거예요. 그런데 영화상에 나온대로 모두다 보는 앞에서 그를 쏘았다면 그때 그는 다른 것을 생각할 수가 없을 정도로 정신이 나가있었다는 의미도 되겠죠.) 그리고 마크는 변한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조금 무서운 마지막입니다. 결국 이 사건에서 희생되는 것이 어떤 인물일까 생각해본다면 말이죠.

      스티브 카렐은 아카데미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어야 하는데...에디 레드메인이 스티븐 호킹을 그렇게 잘 소화해냈을까요..스티브 카렐의 연기는 쉬 잊혀질 것 같지 않습니다.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 매튜 본

Ending Credit | 2015. 2. 25. 12:54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내용과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이하 <킹스맨>)가 어떻게 재미있는지, 혹은 얼마나 글래머러스한 영화인지를 다시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또한 영화 속 소품들의 럭셔리함이나, 킹스맨 요원 해리 역을 맡은 콜린 퍼스의 수트빨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도 내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다. 다만 나는 영화 속에서 나의 흥미를 끌었던 부분에 대해 그저 간략하게 이야기하고 싶은데, 예를 들어 영화 속에 등장했던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와 같은 대사들이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이 대사는 영화에서 두 번 나온다. 처음 등장하는 것은 이 영화의 터닝 포인트라고 할 수 있는 해리(콜린 퍼스)의 교회 씬이다. 해리가 악당 발렌타인(사무엘 L. 잭슨)의 계략에 빠져 교회 안에서 광란의 살육을 벌인 후 어느 틈에 정신을 차리고 교회 밖으로 나오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발렌타인이 그에게 총을 쏘기 전에 그에게 빈정대면서 이 말을 건넨다. "현실은 영화와 달라." 두 번째는 영화가 끝나기 직전이다. 주인공 에그시(태론 에거튼)가 발렌타인의 경호원 가젤(소피아 부텔라)과의 최후의 일전을 벌이며 그녀를 제거한 후, 악당 발렌타인을 처치하기 직전, 발렌타인은 이게 영화라면 원래 이쯤에서 영화 속 주인공들이 악당에게 하는 대사가 있지 않느냐고 이죽거린다(이 영화에서는 '영화'라는 매체 혹은 다른 영화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오는 편인데, 예를 들어 악당 발렌타인은 그 언급의 빈번함으로 볼 때 스파이 영화 애호가 정도로 설정되어 있는 듯 하며, 해리가 에그시를 요원으로 끌어들이려 할 때 <프리티 우먼>이나 <마이 페어 레이디> 같은 영화들이 언급되기도 한다. 물론 이 영화가 <마이 페어 레이디> 같은 영화와 주제의식을 공유하는 지점이 있기도 하지만, 이 영화에 이렇게 '영화'라는 것이 언급되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 때 에그시는 발렌타인에게 그 대사를 되돌려준다.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 그리고 발렌타인도 그 대사에 수긍한다.

 

위에서 언급한 광란의 살육 축제(적절하지 않은 표현이지만, 사실 이보다 적당한 말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가 벌어지는 교회에서의 씬은 어떤 액션의 구성이나, 카메라 워크, 혹은 씬 전체의 흐름 같은 부분에서, 많이 언급되었듯이 분명히 매우 인상적이며, 매혹적이다. 그러나 사실 내용적으로 보자면 조금 관객을 뜨악하게 만드는 부분도 있다. 흔한 말로 이를 일종의 반전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는데, 왜냐하면 여기에서 광란의 살육을 벌이는 주체가 지금까지 영화의 전반부에서 선(善)의 편에 선 좋은 멘토 해리이기 때문이며, 그에게 죽임을 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비록 약간의 극단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죽을 이유는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즉 여기에는 선한 인물이 무고한 사람을 (그것도 대량으로) 살상한다는 어떤 아이러니가 있다. 물론 영화 속에서 선한 인물이 어떤 계기로 인해(그것이 선한 인물 본인의 의지와 무관한 것이라도) 돌변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경우는 많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는 대부분 이전에 어떤 암시가 주어지거나, 혹은 그 장면의 처리가 상당히 조심스럽게 진행된다. 그런데 이 영화 <킹스맨>에서 가장 유쾌하게 묘사된 씬 중에 하나는 이 씬이다. 이 장면은 화려하고 즐거운 무엇처럼 묘사되었다. 그리고 이 뒤에 발렌타인의 부기가 따른다.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

 

즉 간단히 말해서 이 씬은 일종의 영화적 규약, 혹은 믿음을 무너뜨린다. 선한 이는 선한 이를 해치지 않는다는 그런 믿음 말이다. 물론 선한 이가 돌변하여 선한 이를 해칠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그 때에는 물론 그를 더 이상 '선한 이'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 <킹스맨>에서는 조금 다른 것이 이 장면이 이어진 후에도 해리는 여전히 선한 인물로 남으며, 영화적 서사흐름은 이 씬으로 전혀 깨지지 않는다. 아니 도리어 배가된다. 다시 말해서 이 씬이 건드리는 것은 인물이나 서사가 아니라, 어떤 '영화적 규약' 혹은 '영화'라는 것에 대해 물음이다. 즉 발렌타인이 이 때 현실이 영화와 다르다고 말할 때, 그것의 방점은 '영화'보다 '현실'에 찍혀 있으며, 발렌타인은 '이제 그런 것은 더 이상 영화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해리의 세계, 즉 이 교회 씬 이전까지 이 영화의 기본 바탕에 깔려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스파이 영화의 글래머러스함, 즉 수트, 각종 소품, 매너, 느끼함, 단정함, 매력적인 여자, 신사, 예의, 술,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대의를 위한 희생과 같은 것들이다. 이는 단지 이 영화에 국한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위에 언급하였듯이 발렌타인은 스파이 영화의 광팬이며, 그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스파이 영화란 다니엘 크레이그 이전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로 대변되는 그런 스파이 영화일 것이기 때문이다. 즉 발렌타인이 현실이 영화와 다르다고 할 때, 이는 이런 스파이 영화는 이제 더 이상 '현실적인 영화'가 아니라는 말처럼 들리며(왜냐하면 결국 발렌타인도 영화 속 인물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스파이 영화는 이제 다니엘 크레이그 같은 피로한 노동자 유형의 007이 등장하거나, 제이슨 본과 같은 보다 현실에 발을 디딘 것 같은 인물이 등장하는 영화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것이 물론 실제의 스파이 영화의 흐름에서 생겨난 '현실'이기도 하다. 이러한 새로운 타입007, 혹은 제이슨 본과 같은 새로운 유형의 스파이는 기존 스파이 영화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났으, 이러한 류의 영화들은 항상 이것이 '리얼' 즉 현실임을 강조하며 기존 스파이 영화의 글래머러스함에 질린 관객들을 끌어들였다. 그런데 세상일이 늘 그렇듯이 반동은 반동을 불러오며, 첨단은 복고를 낳는다. 이 영화 <킹스맨>은 이런 반동의 흐름에 다시 반동을 꾀하는 영화다. 발렌타인이 영화의 중간에 '이러한 것은 이제 영화가 아니야. 현실은 달라'라며 기존의 스파이 영화들에 영화적인 죽음을 선고할 때, 다시 그 발렌타인에게 죽음을 선고하며, '아니 그렇게 말하는 너도 영화잖아. 결국 영화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처음 발렌타인이 해리에게 "영화와 현실은 다르다."라고 말할 때 그 방점이 '현실'에 찍혀 있다면, 두 번째 에그시가 발렌타인에게 그 말을 건넬 때에는 그 방점은 '영화'로 옮겨와 있다.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몇몇 구성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영화의 초중반부 에그시와 록시 등이 킹스맨이 되기 위해 받는 훈련들은 리얼인 것처럼 포장되었지만(훈련 중 죽을 수도 있다고 겁을 주며, 마치 실제로 그런 것처럼 보여지지만), 사실은 시뮬레이션이며(결국 영화는 일종의 고도로 조직된 시뮬레이션이다. 예를 들어 기차길에 묶인 상태에서 비밀을 털어놓으라고 강요받는 영화 속 훈련처럼 말이다), 해리가 교회에서 살육을 벌일 때에 그것을 모니터로 바라보는 에그시나 멀린(마크 스트롱)의 뜨악함이 있으며(즉 이 장면에서 이를 멀린이나 에그시, 그리고 악당 발렌타인마저도 마치 영화처럼 모니터로 바라본다는 것이 재미있다. 멀린이나 에그시의 화면을 바라보는 뜨악한 표정이 새로운 유형의 스파이물을 보는 관객의 뜨악함이라는 이 영화의 조롱이 여기에 들어있지 않을까), 결국 에그시는 기존 스파이 영화의 어떤 장면들을 비슷하게 재현한 다음, 악당을 물리치고 사랑을 쟁취한다(예를 들어 기존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서 상당 부분 영화의 마지막이 결국 007이 여자를 후리는 것(그다지 좋은 표현은 아니지만)으로 끝났음을 생각해 본다면 말이다. 에그시가 발렌타인의 소굴을 부수는 마지막도 기존 본드 시리즈들을 꽤나 떠올리게 하는데, 그 영화들에서 항상 마지막 최후의 대결은 적의 소굴 한복판에서 이루어지기도 하거니와 적들의 하얀 위장복 같은 것도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다).

 

물론 감독 매튜 본이 영리한 것은 복고가 단순한 과거의 재현이 되어서는 성공할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일정 부분 새로운 요소가 가미되어야 하는데, 그가 선택한 것은 이른바 병맛 컨셉, B급 감성이다. 예를 들어 발렌타인의 충복 가젤은 기존의 블랙플로테이션 영화 등에서 신체의 일부가 무기로 변형된 여성들의 계보에 넣을 수 있으며, 영화 속의 어떤 유머들(예를 들어 해리의 집 벽을 장식하는 선(SUN)지 같은 것들 말이다)이나 넘쳐나는 고어적 설정 등이 그러하다. 물론 그 고어적 설정들이 넘쳐나지만 잔인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또 한편으로는 그러한 B급 영화들이 기존에 구축해 놓은 구조에 빚진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B급 감성이 이러한 이 영화에 잘 결합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이 B급 감성과 이 영화의 이러한 메시지가 공유하는 지점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편하게 예를 들어 말할 수도 있다. 우리가 어떤 고어나 피칠갑을 즐길 수 있는 것은 결국 그것이 현실과 적절한 줄타기를 행하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현실과 적당하게 비껴서 있다. 현실이 영화에 비척비척 밀고 들어올 때 그 쾌감은 높아질 수 있지만, 그만큼 관객의 자리는 위협받는다. 줄이 높아질수록 줄타기의 쾌감은 올라가지만 떨어질 때의 충격은 더 큰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결국 영화는 '현실'과 다르다는 것이며, 영화는 영화라는 것을 인정하는 한에서, 그 줄의 높이를 어느 정도로 유지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줄을 높일 수 있는 기술은 점점 발달하고 있지만, 그 떨어질 충격파를 계산할 정신은 여전히 빈곤한 것 같다.

 

 

덧.

내게 흥미를 주었던 캐릭터는 에그시나 해리보다는 악당 발렌타인인데, 이 영화의 발렌타인은 최근 몇몇 영화들의 캐릭터를 연상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이 천재 미치광이는 <인터스텔라>의 만박사나 <설국열차>의 윌포드와 같은 인물을 연상시키는데, 특히 윌포드와는 공유하는 지점들이 꽤 많다. 한정된 자원만을 소비하여야 하기 때문에 결국 인구를 줄이는 방법이 해결책이라는 그의 결론도 그러하거니와 그가 이를 위하여 내놓은 방법론, 즉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것도 그러하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자본주의의 끝에 서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설국열차'의 마지막 칸에 있던 윌포드, 그리고 0.1%의 플루토크라트 발렌타인).

 

 

 

 

 

- 2015년 2월, CGV 역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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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5.03.01 20: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그 대사들 기억납니다.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 꼭 2번 등장했고 에그시가 발렌타인에게 말했을땐 마치 해리를 대신해서 돌려주는 느낌이 들었어요. 영화보고 나서 정말 잠깐 그 대사가 생각났지만 이내 잊어버렸구요. 볼거리가 워낙 많은 영화다보니 그 대사들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볼 여지도 없었던것 같아요. 그리고 여기서 끄덕끄덕하며 글을 읽었네요. 솔직히 말하면 전 이 영화를 정말로 즐기지는 못했던 것같아요. 콜린퍼스의 수트발이 멋지고 그의 우산이 조금 탐났지만 그리고 물론 재미는 있었는데.. 즐기지는 못했습니다. 어쩌면 영화와 현실은 다른거잖아 라고 누군가가 내게 말할지도 모르겠어요. 후후

  2.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5.03.01 22: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방금 티스토리 앱을 설치하고 한 번 들어와봤어요. 스맛폰으로 첫 답글을 달아봅니다. 벌써 3월이라니! ^^;

  3.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5.03.03 16: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영화 보셨군요. 네 뭐 사실은 이런저런 생각하지말고 그냥 재밌게 보면 될 영화이기는 합니다. 저는 남성 관객들이 아주 좋아할 영화라고 봤지만, 의외로 여성 관객들도 재밌게 볼 수 있는 부분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의외로 꽤 히트를 이어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즐기시지는 못했다고 했는데, 어떤 B급 감성 같은 부분이었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는 약간 유머가 지나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하기는 했습니다. 블로그 글들도 보면 지나치게 잔인하다는 글들도 꽤 있더군요. 물론 잔인성이 다른 방식으로 유화되기도 했습니다만, 저에게도 약간은 필요이상으로 보였어요.

    오..근데 티스토리도 앱이 있군요. 뭐 근데 앱을 깔아도 앱에서 글을 쓸 수는 없을 것 같아서 저는 안 쓰게 될 것 같기는 해요.^^

찜찜해

The Book | 2015. 2. 16. 00:56 | Posted by 맥거핀.

 


플래너리 오코너

저자
플래너리 오코너 지음
출판사
현대문학 | 2014-12-12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우리는 내면을 향한 시선의 질과 깊이, 성취의 규모로 예술가를 ...
가격비교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플래너리 오코너는 1946년, 그러니까 스물한 살에 첫 소설 <제라늄>을 발표했고, 1964년, 그녀의 나이 서른아홉 살에 루푸스 합병증인 신장 질환으로 죽기 직전까지 2편의 장편소설과 32편의 단편소설을 남겼다. 이 책에는 총 31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그러니까 이 단편집을 읽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플래너리 오코너의 전 생애를 읽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이렇게 한 작가의 전 생애에 걸친 작품들을 읽는 것은 흥미롭지만, 그렇게 녹록한 일은 아닌데, 작가의 삶의 흐름에 따라 작품들은 대체로 변화하며, 어떤 필연적인 불균질성을 가지고, 그 불균질성이 읽는 이를 내내 건드리기 때문이다. 연보로 추측해 보건대 이 단편집의 순서는 작품 발표 순서에 따라 배열되어 있는 것 같은데(사실 이 소설의 창작년도, 혹은 발표년도가 없는 것은 이 단편집에서 아쉬운 부분이다), 작품을 읽다보면 어떤 묘한 흐름 같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후기로 접어들수록 이야기는 처음의 실험적인 경향에서 점점 어떤 구체성을 가지며, 묘한 종교성은 점점 강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플래너리 오코너의 경우에는 그런 흐름도 흐름이지만 그보다는 이 작품들을 관통하는 어떤 공통점이 더 두드러지는 편인데, 그것은 번역가의 글대로 미국 남부 지방, 가톨릭 신앙, 루푸스병이라는 몇 개의 키워드로 정리할 수도 있고, 이 이야기들의 어떤 일반적인 흐름을 살펴보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렇지 않은 작품들도 있지만, 대체로 읽는 이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들의 흐름은 어딘지 모르게 비슷하다. 먼저 편견, 혹은 자신만의 확고한 고집에 사로잡혀 있는 듯한 인물들이 나온다. 이들은 교육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오랜 삶의 경험과 인습으로 고착화된 어떤 나름의 세계에 갇혀 있고, 그 나름의 관점으로 주위의 거의 모든 것을 재단한다. 그들의 세계는 작고 편협해보이지만 나름의 체계가 있으며, 그래서 그것은 아직 견문을 넓히기 전의 어린아이의 그것과 비슷하다(그래서 이 작품들에서 주인공들은 대체로 나이가 많으나, 기이하게도 그와 짝을 이루는 것은 어린아이들인 경우가 있다. <인조 검둥이>의 헤드 씨와 그의 손자 넬슨, 혹은 <숲의 전망>의 포천 씨와 그의 외손녀 메리 '피츠' 포천, 아니면 그의 반대로서 <죽은 사람보다 불쌍한 사람은 없다>의 타워터와 노인). 즉 그들의 작은 세계는 작은 만큼 확고하다. 그것은 나름의 체계로 굴러가며, 그렇게 쉽게 부서질 염려는 없어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 별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길한 무엇인가가 등장한다. 그것의 형태는 다양하다. 그것은 친근한 형태로 다가오기도 하고(<좋은 시골 사람들>의 선량해보이는 성경 파는 청년), 꺼림칙한 무엇의 형태이기도 하며(<가정의 안락>의 탕녀 스타), 때로는 인간이 아니기도 하고(<그린리프>의 황소), 때로는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누군가의 변형물(<숲의 전망>의 메리 '피츠' 포천)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대체로 이질적인 타자 그 자체, 예를 들어 <추방자>에서 유럽에서 살길을 찾아 미국 남부의 농장에까지 오게 된 영어를 못하는 추방자 귀작 씨와 같은 존재이다. 이 이질적인 타자는 처음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일련의 사건을 통해 결국 주인공의 확고한 세계에 균열을 일으키고, 그의 존재성을 뿌리부터 뒤흔들게 되고, 인물들은 그들의 균열되고 붕괴된 세계를 불편하게, 때로는 참담하게 마주 보거나, 최악의 경우 마주볼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사실 이것만 놓고 보면 이는 일반적인 소설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도 말할 수 있다. 상당수의 소설에서 주인공의 세계는 마치 부서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며, 세계가 균열된 후 주인공이 새로운 세계를 마주하는 그런 소설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일종의 성장소설이 변형된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플래너리 오코너의 소설에서 '성장'이라는 말을 쓰기는 주저하게 되는데, 이들의 세계는 어떤 균열과 봉합을 넘어서, 거의 완전한 붕괴에 이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즉 이들의 세계는 작품의 말미에 이르러 그 근본이 부정되거나 흔들린다. 다시 말해서 주인공들은 죽는다. 물론 이는 물리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실제로 죽음에 이르는 인물들도 있지만, 그들은 죽지 않더라도 거의 죽은 것과 마찬가지의 상태가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오코너 소설의 종교적인 면모가 드러나게 되는데, 이는 그녀의 전 생애를 받치고 있었던 카톨릭 신앙과 그 신앙에서의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정신적인) 죽음,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다시 태어남(부활)이다. 다시 말해서 엄격하게 말한다면 종교적인 의미에서는 특정의 종교를 가지면서, 동시에 가지지 않은 상태란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어떤 하나의 세계(예를 들어 육체와 욕망의 세계)를 죽이고,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며, 죽고 나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플래너리 단편들의 인물들은 (비록 다시 태어남은 아직 먼 곳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작품의 말미에서 상징적인 죽음에 이른다. 그리고 물론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결국 그 전에 죽어야만 한다.

 

조금 다른 얘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내가 플래너리의 소설들에서 느낀 종교성은 그 내용적인 측면에서만은 아니다. 도리어 그보다는 형식에 관련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 더 컸다. 예를 들어 이 소설의 전지적 관찰자가 가지는 특유의 어떤 묘한 무신경함, 무심함 같은 것들 말이다. 약간 농담을 섞어서 말하자면,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어떤 부분에서는 마치 성경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성경은 독특한 텍스트다. 성경에는 수많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서술하는 어떤 특유의 무신경함이 있다. 그러니까 거기에는 우리가 놀라운 이야기를 볼 때 나오는 인간적인 정서의 어떤 부분이 결여되어 있다. 그것은 당연한데, 왜냐하면 (적어도 성경의 입장에서는) 성경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 아니라 단지 일어난 일들을 그대로 기술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여기에는 일어난 일들이기 때문에 그대로 기술한다는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어떤 특유의 무심함이 있다. (혹은 그러므로 이것은 일종의 은유로 보이게 하는 측면도 있다. 예를 들어 오병이어의 기적을 축자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혹은 어떤 연대와 나눔의 은유로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아무튼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성경의 사실성이 아니고, 다만 플래너리 오코너의 소설도 일종의 은유로 느껴지는 이야기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가 <좋은 사람은 드물다>와 같은 것일 것이다.) 그런데 플래너리 오코너의 소설들에서도 비슷한 무엇이 엿보이는데, 이 소설의 전지적 관찰자는 모든 것을 다 알면서도 사건들에서 한껏 물러나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모든 것을 어떻게 흘러갈지 알면서도 그들이 붕괴되어 가는 것을 무심히 기록하며 그 붕괴를 그저 지켜보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붕괴가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처럼 말이다. 즉 그는 모든 것을 다 아는 예언자로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기록한다.   

 

그러니까 이 기록은 사실 냉혹함 중에서도 더 냉혹할 수밖에 없다. 특히 자신에게 더 말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의미의 예언자라면 자신의 운명도 알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예언자는 자신의 운명의 끝을 알면서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저 냉혹하게 기록할 뿐이다. 예를 들어 이 소설들에서도 작가의 모습이 언뜻 비치는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남편이 없이 농장을 경영하는 여주인들(<추방자>의 매킨타이어 부인, <그린 리프>의 메이 부인 등)에서는 아버지가 없이 어머니와 함께 남부의 농장에서 지냈던 작가와 어머니의 모습이 겹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혹은 글을 쓰려는) 인물들(<좋은 시골 사람들>의 조이/헐가, 혹은 <깊은 오한>의 애스버리, <파트리지 축제>에 나오는 캘룬이나 메리 엘리자베스)에서는 작가 생애의 어떤 부분과 겹치는 점이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플래너리 오코너가 가장 잔혹하게 묘사하는 것은 바로 이들이다. 위에 제시한 편견으로 가득찬 좁은 세계를 가진 이들보다 작품 속에서 더 참혹한 결말을 맞이하는 것이 이 공명정대한 합리주의자들, 철학자들이다(도리어 좁은 세계를 가질 수밖에 없어 편견을 가지게 된 이들에게는 애정이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왜냐하면 이들의 합리성과 정의는 그것이 어떤 절대적인 무엇으로 떠받들어지는 순간 결국 편견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 무엇의 형태밖에 남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이발사>의 레이버). 즉 플래너리 오코너의 소설은 이 소설을 읽는 자들(그러니까 바로 '소설'이라는 것을 읽는 자들) 필시 깃들 수 있는 어떤 내면의 아이러니를 불길하게 잡아냄으로서 계속 우리 곁에 어떤 이물(異物)로서 남는다. 아니 그것을 자처한다. 그리고 동시에 작가 자신에게도 불길하고 냉혹한 예언으로 남는다.

 

그러므로 소설을 다 읽고 덮은 후 운좋게도 어떤 찜찜함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면 우리는 그 찜찜함에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 할지도 모른다. 대체로 우리는 찜찜한 이물감을 느꼈을 때 정상이라고 여겨졌던 자기 자신을 불길하게 다시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운이 좋다면 우리는 그 거울에서 낯선 누군가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당신은 운이 좋지 않기 때문에 낯선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하던 일을 그대로 할 터이고, 일어날 일들이 일어날 것이며, 거울 속에서가 아니라 낯선이의 방문을 실제로 받고, 먼 곳의 전지적 관찰자인 예언자는 무심하게 그것을 기록하겠지만. 그것이 플래너리 오코너의 세계다.

 

그녀는 그를 뉴욕 시에 묻었지만 그러고 났더니 밤에 잠을 잘 수 없었다. 밤마다 뒤척거리며 잠을 못 자니 얼굴에 주름이 깊어졌다. 그래서 결국 그를 파내서 시신을 코린스로 보냈다. 그러자 밤에 잠을 잘 수 있게 되었고 아름다운 용모도 돌아왔다. (p.739) - <심판의 날> (이 단편집의 마지막 소설의 마지막 문장)

 

 

덧.

1호선 지하철에서 이 소설의 중반부를 한참 읽고 있는데 갑자기 나타난, 멀리서부터 멸치향을 풍기던 '멸치의 신'의 등장은 어떤 의미에서는 정확히 플래너리 오코너 소설 세계의 실사판이었다. 그의 등장은 <당신이 지키는 것은 어쩌면 당신의 생명>의 시프틀릿 씨를 연상시켰으며, 퇴장은 그 소설의 어느 인물들보다도 쿨했다. 거기에는 모종의 진실이 있었으며, 이 등장과 퇴장을 보며 나는 이 지하철의 세계도 결국 편견으로 가득했던 1950년대 미국 남부의 농장과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아니 우리는 이제 그보다 더한 편견의 시대를 살아가야 할 것 같다. 이 소설들은 결국 불길한 예언서들로 앞으로도 계속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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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5.03.01 21: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소설을 다 읽고 덮은 후 운좋게도 어떤 찜찜함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면 우리는 그 찜찜함에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 할지도 모른다. 대체로 우리는 찜찜한 이물감을 느꼈을 때 정상이라고 여겨졌던 자기 자신을 불길하게 다시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

    오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플래너리 오커너 단편집을 장바구니에 넣어두고 있었는데 꼭 읽고싶어요. 현대문학에서 나오는 세계문학단편선중 윌리엄 포크너를 읽었는데 <에밀리에게 바치는 한송이 장미>도 남북전쟁이후 몰락해가는 미국남부지방을 배경으로한 고딕소설이죠. 이 총서는 한 권씩 차례로 모으고싶은 생각도 들어요 ^^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5.03.03 16: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신간평가단 같은 거 안했으면 아마도 안봤지 싶은데, 뭐랄까 읽고 나서는 이런 작가를 아직도 모르고 있었네 싶었습니다. 미국에서의 명성에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많이 안 알려진 작가인 것 같아요. 이제 단편집도 나오고 아마 장편도 조만간 출간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영화 <와일드>에도 언급이 나온다고 하죠?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아주 독특해요. 예상치 못했던 지점에서 독자의 머리를 띵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습니다만, 위에도 썼듯이 그것을 또 무심히 관조하는 시선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부분을 빼고 봐도 기본적인 문장력, 묘사력 같은 것도 뛰어나지요.

      저는 사실 지난번 도서정가제 시작되기 전에 이 단편전집 10권짜리 세트를 샀어요. 그런데 그 10권은 아직 하나도 안봤는데, 그 후에 나온 이 소설집부터 보게 되었군요. 아이러니하게도.

기억의 재건

The Book | 2015. 2. 9. 14:36 | Posted by 맥거핀.

 


지평

저자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4-12-0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2014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파트릭 모디아노 최초의 미래지향적...
가격비교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책을 다 읽은 후, 오래도록 책표지를 들여다본다. 저멀리 우뚝 솟은 에펠탑이 보이는 파리의 거리 풍경. '거리'는 파트릭 모디아노에게 상당히 중요한 키워드인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그의 몇몇 작품들의 제목만 보아도 이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데, 그의 대표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그리고 첫소설 <에투알 광장>, 혹은 <잃어버린 거리>,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 <외곽 순환도로> 같은 작품들, 그리고 이 소설 <지평>. 소설 <지평>에는 수많은 파리 거리 및 지명들의 명칭이 나온다. 콜리제 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로, 오페라 광장, 오퇴유, 센 가, 라지빌 가, 팔레 루아얄, 포부르 생토노레, 라 페루즈 가, 베르시 공원, 개선문...과장을 조금 보태, 이 책의 어느 페이지만 펼쳐도 거리나 지명들이 등장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이 수많은 거리나 지명이 이 소설에 등장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수많은 실재하는 거리들은 이 소설에 있어서 무엇일까.

 

먼저 시간의 측면. 이 소설은 하나의 커다란 회상이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얼마 전부터 보스망스는 젊었을 적의 일화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p.9)"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간 이후에 이루어지는 회상은 늘 단속적이다. 회상은 대체로 하나의 이야기가 되기 전에, 늘 조각나있다. 모디아노의 말을 빌리자면 이렇다. "그리고 그는 그 깊은 암흑 속에서 희미하게 명멸하는 불빛들의 이름을 수첩에 하나하나 적어나갔다. 명멸하는 빛이 너무도 희미한 까닭에 그는 전체를 재구성할 수 있는 소재가 될 만한 작은 실마리들을 찾기 위해 두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해 보았지만 거기엔 별의 파편과 부스러기들뿐, 전체는 없었다.(p.10~11)" 이 작은 실마리들, 별의 파편과 부스러기들, 그것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면 '거리'이다. 보스망스는 먼저 거리와 장소를 떠올리고, 그 다음 그 곳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린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 거리나 장소는 아직도 그곳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며, 보스망스는 길 이름과 건물 번지수를 잊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 예를 들어 보스망스가 기억 속에서 찾아 헤매는 마르가레트 르 코즈, 혹은 그와 연관된 메로베, 페른 부부, 스튜어트, 시몬 코르디에..그런 인물들은 지금 그 곳에 없을지라도, 그 공간은 아직 그 곳에 남아있다. 예를 들어 앙드레 푸트렐과 수상한 남녀들이 있던 블뢰 가 27번지 아파트에 이십 년이 흐른 뒤, 보스망스는 찾아간다. 비록 그 곳에는 앙드레 푸트렐은 이제 없지만, 어떤 기억이 남아있다. 스무 명의 남녀가 잡혀가던 어떤 기억이. 그러니까 거리는 시간에 있어서는 일종의 지표이다.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을 연결하는 작은 지표, 혹은 별의 파편과 부스러기.

 

공간의 측면에서 보면 거리는 이중적이다. 거리는 그들을 만나게 해준다. 장 보스망스와 마르가레트 르 코즈, 그들은 거리에서 만났다. 오페라 광장에서 시위대에 휩쓸려 그는 그녀에게 본의 아니게 상처를 입혔고, 그로 인해 그들의 관계가 처음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거리에서 기다리고, 거리에서 만나고, 거리를 걷고, 다시 거리에서 헤어진다. 그러나 거리는 만남이 시작되는 곳만은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위험한 공간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거리에는 그들이 만나고 싶어하지 않은 무엇인가가 있다. 보스망스에게는 그것은 빨간머리에 매정한 눈빛을 가진 아프간 코트를 입은 여자와 환속한 신부 혹은 가짜 투우사 모양의 남자라는 한쌍, 즉 만나기만 하면 돈을 요구하는 그의 부모이며, 마르가레트에게는 그것은 그녀를 언젠가부터 맹목적으로 뒤쫓는 위험한 남자 부아야발이다. 즉 거리에는 그들이 결코 마주치고 싶지 않은 것, 마주쳐서는 안되는 것이 돌아다니거나 지키고 있다. 거리에 나오지 않으면 그들은 안전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르가레트의 아파트는 "그 누구도 여기 있는 당신을 찾아낼 수 없(p.37)"는 공간이며, 보스망스의 부모는 이제 그의 집주소를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안전에는 무엇인가가 결여되어 있다. 왜냐하면 거리로 나오지 않으면 그들은 서로를 영원히 만날 수가 없으니까. 그러므로 그들은 안전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거리로 나온다. 부모가 출몰하는 센 가를 피해다니거나, 혹은 누군가가 나타날까봐 계속 뒤를 돌아보며 말이다.

 

그런데 사실 그들을 위협하는 이 존재들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전체적으로 꿈 같은 회상이 이어지는 이야기지만, 소설이 이상하게도 더욱 꿈 속의 꿈처럼 느껴질 때는 그들을 위협하는 이러한 존재를 묘사할 때이다. 예를 들어 보스망스가 부모라고 부르는, 그러나 부모라고 느껴지지 않는 오십대 남녀 한 쌍. 그들은 보스망스의 앞에 불현듯 나타나, 그에게 한껏 경멸감을 표출한 후 그저 당당하게 돈을 요구한다. 그리고 돈을 받으면 그들은 떠난다. 혹은 마르가레트를 쫓아다니는 부아야발. 예를 들어 마르가레트가 바게리안의 도움을 받아 부아야발을 피하는 장면은 마치 비현실적인 풍경의 일부처럼 묘사된다. 부아야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앞에 그저 버티고 서 있을 뿐이며, 그녀와 바게리안이 그를 떼어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간 후에도 밤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마른 얼굴과 체격이지만 육중한 느낌을 주는 남자, 손가락 사이로 칼을 꽂는 유희를 즐기는 남자, 갑자기 증발하거나 갑자기 나타나는 남자, 과연 그는 실재하는 무엇일까.

 

아니 나는 이 소설의 이야기가 허술하다거나, 비현실적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들의 존재는 실재하는 무엇이라기 보다는 마치 어떤 것의 은유처럼 느껴졌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예를 들어 우리가 흔히 '기억'이라고 말하는 것. 보스망스의 부모는 그를 "마치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끼게 해주려는 양(p.40)" 노려보고 경멸감을 표출하며 그에게 돈을 요구한다. 그리고 보스망스는 마치 무엇에 홀린 듯 어서 그들을 보내버리겠다는 마음으로 돈을 준다. 또는 위험한 남자 부아야발은 마르가레트에게 묻는다. "나한테 그런 말을 하고 부끄럽지도 않아?(p.128)" 이 경멸, 혹은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의 요구. 때로 기억은 수치심이나 부끄러움을 요구한다. 그것은 보스망스의 부모나 부아야발처럼 갑자기 찾아온다. 우리가 그것에 맞서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애써 피하는 것 뿐이다. 그러나 기억은 끈질기게 우리를 재방문하며, 계속 무엇인가, 우리가 줄 수 없는 무엇인가를 요구한다. 그것은 과거로부터 왔다. 부끄러운 무엇인가로부터 왔다. (너무 나아가는 것일지 모르지만, 이 소설의 배경이 1960년대 중반의 파리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그 과거(예를 들어 그의 부모)는 독일에 점령당했던 파리를 말한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독일에서 태어난 마르가레트에게 독일인이냐고 묻는 그 질문의 무심한 긴장, 혹은 보스망스가 길을 걷다가 순간순간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 무엇이 미안해? 응? 살아 있다는 것이? 같은 것과 연관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부끄러운 과거라는 기억을 언제까지나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결국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것은 어떻게든 당신을 찾아내니까. 그리고 동시에 기억에는 부끄러운 무엇인가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기억에는 부모라고 부르는 남녀 한쌍도 있지만, 마르가레트 르 코즈도 있으니까. 다시 말해서 기억은 일종의 거리와 같다. 위험하지만 그곳에 나가야만 누군가를 만날 수 있었던 거리처럼, 기억에도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지만, 그 기억의 거리에 어떻게든 나가야만 한다. 안전한 기억의 골방에만 갇혀 있으면 우리는 아무도 만날 수 없으니까. 즉 부끄러운 무엇인가를 대면해야만 그것을 넘어서 나아갈 수 있다. 예를 들어 그것은 보스망스가 부아야발을 찾아 그와 대면하는 것과 같다. 인터넷의 바다를 뒤져 만나게 된 부아야발. 그는 이제 더 이상 기억 속에 존재하는 위협적인 남자 부아야발이 아니다. 그저 늙고 잿빛 눈을 가진 부동산업자일 뿐이다. 기억 속의 부아야발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고, 그를 혹은 그의 기억 안에 있는 그녀를 다시 찾아오지 못한다. 그것은 이제 허물어진다.

 

무엇인가를 그렇게 재건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면하여 허물어야만 한다. 보스망스는 작은 별의 파편과 부스러기들만이 반짝거리는 기억의 골방에서 거리로 나와 기억들을 기꺼이 대면했고, 그것을 하나하나 허물 수 있었다. 이제 그는 보이지 않는 벽을 통과해 그녀에게로 간다. 모든 것이 재건된 도시 베를린에 이제 그녀가 있다. 거리는 재건되었고, 이제 기억도 재건된다. 새 지평에.

 

그는 그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바깥으로 나와서 얼마간 그 건물 앞에 머물렀다. 햇빛이 따사로웠다. 거리는 고요했다. 순간, 그런 확신이 들었다. 움직이지 않고 인도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보이지 않는 벽을 서서히 통과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그래도 자리는 여전히 같은 자리다. 거리가 더 고요해지고 볕이 더 잘 들었을 수는 있겠다. 한 번 일어난 일은 무한히 반복된다. 저쪽 길 끝에서 마르가레트가 꼬맹이 페터- 그녀가 즐겨 말하던 대로 그 녀석 -의 을 잡고 32번지와 그를 향해 걸어올지도 모른다.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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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뉴스

The Book | 2015. 1. 28. 00:46 | Posted by 맥거핀.

 


눈먼 자들의 국가

저자
김애란, 김행숙, 김연수, 박민규, 진은영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4-10-06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진실에 대해서는 응답을 해야 하고 타인의 슬픔에는 예의를 갖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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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미 그분에게는 망각된 일인지도 모른다. 최근에 있었던 박근혜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는 '경제'였고, 그것은 총 42번 언급되었다. 그 뒤로 많이 나온 단어는 '국민'으로 총 29번 언급되었으며, '경제'와 맥락을 같이 하는 '성장'이라는 단어는 16번, '개혁'이나 '혁신'은 통틀어 24번 사용되며 그 뒤를 따랐다. 반면 작년에 그분이 또르르 눈물을 흘렸던 어떤 담화에서 계속 반복되어 언급되었지만, 이번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은 단어도 있다. '세월호', '희생', '위로'와 같은 낱말들. 박근혜 대통령의 원고 위에서만 무엇인가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제는 적어도 방송과 신문은 세월호를 '효과적으로' 제거한 것 같다. 굳이 시간을 들여 찾아보지 않는 한 언론에서 세월호와 관련된 언급을 보기는 힘들다. 있더라도 특별조사를 하는지 안하는지 모를, 인양을 하는지 안하지는 모를 알 수 없는 뉴스 뿐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정부와 언론은 사람들에게 이에 대한 어떤 피로감을 심는 데 성공한 것 같다. 그것은 제거되었거나 다른 어떤 것으로 효과적으로 대체된 것처럼 보인다. 그 사라져버리거나 대체된 단어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반면 그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목소리들이 있다. 책 <눈먼 자들의 국가>.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 사회학자, 언론학자, 정신분석학자, 정치철학자 등등이 쓴 12개의 글. 정확히 세보지는 않았지만, 이들의 글들에서 수차례 반복되는 단어들이 있다. 세월호, 구조, 고통, 변화, 희망, 진상규명, 진실, 거짓말, 신자유주의, 국가, 정부, 시민, 그리고 우리, 우리, 우리, 그러니까 살아남은 자들. 모두들 동일한 시각에 같은 사건을 보았지만, 목소리는 약간씩 다르다. 누군가는 죽은 자들을 애도하고, 누군가는 분노하며, 누군가는 부조리를 말하고, 누군가는 살아남은 자의 윤리를 묻는다. 혹은 누군가는 과거로 돌아가 우리를 지배하는 공포나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에 대해 말하며, 다른 누군가는 미래를 보며, 사건 이후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상상력과 새로운 행동의 결단을 촉구한다. 아무튼 어쨌든 간에 이들은 어떻게든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이야기하려 애쓴다.

 

여기에는 어떤 간극이 있다. 그것은 정확히 계량하고자 한다면 물론 내가 가늠할 수 없는 간극이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나에게 그것은 단지 물리적인 간극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나는 이 책을 주로 TV뉴스들을 틀어놓고 보았으니까. 그러니까 여기에는 어떤 물리적인 간극이 있었다. 문자와 소리의 간극. 아주 간단하게 말해서 세월호를 이야기하는 책과 세월호를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 TV. 두 개의 다른 나라에서 들려 오는 두 개의 다른 이야기. 처음에는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것들은 점점 연결되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그것은 어쩌면 세월호 이후의 '살아남은 자들의 세계'라고 불러도 될만한 것이었다.

 

2.

문제는 소설이 비현실적이라고 느끼게 만드는 새로운 상식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돌이킬 수 없는 변화는 그런 것이 아닐까. 적어도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변화는 그런 것들이다. "더이상은 공동체가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이제 각자 살아 남는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다." - 배명훈 '누가 답해야 할까?' p.110

 

사실 신자유주의국가는 그 내부에 죽음의 그림자를 내포하고 있는 불길한 체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 의한, 만인의 죽음을 방지하기 위해 폭력을 독점한 국가가 애당초 그러했다. 국가의 배후에는 늘 죽음의 그림자가 어슬렁거린다. (중략) 그런데 신자유/신보수주의시대 국가권력/폭력의 불길함은 세월호에서 전혀 다른 양상으로 확인된다. 권력을 독점한 국가가 그 권력을 공익을 위해 제대로 행사하지 않는 공백상태가 초래하는 치명적 폭력이다. - 전규찬 '영원한 재난상태: 세월호 이후의 시간은 없다' p.160 

 

각자 살아 남는 것. 다른 말로 하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이 투쟁은 세월호 이후에 새로운 방식으로 새롭게 생겨난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그것은 신자유주의라는 국가를 선택한 이후부터 우리에게 예견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세월호와 전혀 관계없어 보이지만, 이런 풍경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1월 21일자 JTBC 뉴스. 포상금을 노리는 전문 파파라치들과 이들을 양성하는 학원의 실태. 만인의 만인에 대한 감시의 한 형태. 실제로 포상금을 받으며 활동하는 것은 파파라치들과 파파라치 학원이지만, 이들의 뒤에는 이들을 실질적으로 양성하고 있는 정부와 지자체가 있다. 각종 포상항목(실제로 1100가지가 넘는 항목이 있다)과 포상액이 지난 몇년간 대폭 늘었기 때문이다. 정부와 지자체가 행해야하는 정당한 감시는 공백상태이며, 이 임무는 개인에게 '효과적으로' 이양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감시와 고발은 파파라치가 아닌 우리에게도 더이상 낯선 것이 아니다. 요즘의 뉴스들은 거의 '괴물판독기'라 불러도 될 만하다. 하루가 멀다하고 괴물들이 걸러져 나온다. 누군가는 땅콩을 집어 던졌고, 누군가는 어린아이에게 폭력을 휘둘렀으며, 누군가는 다른 사람을 무릎 꿇렸으며, 누군가는 자신의 딸을 성추행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수많은 각종 다양한 형태의 괴물들이 하루가 다르게 보도되고, 신상이 공개되고, 여론의 날서린 비판을 받는다. 괴물의 주변에는 그들을 늘 감시할 눈이 있고, 그 감시는 꽤나 효과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다. 매일매일 이렇게 수많은 괴물을 걸러내는데, 왜 괴물들은 도무지 줄지 않는걸까. 아니 도리어 왜 그 숫자를 더 늘려가는 것처럼 보일까. 괴물을 걸러내는 우리의 방법론이 틀린 것일까. 아니면 줄어드는 만큼 새로운 괴물들이 늘 양산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괴물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물론 괴물들은 아무데서도 나오지 않는다. 감시를 행하고 괴물을 걸러내던 누군가가, 어느날 괴물이 될 뿐이다. 표창원의 말대로 우리 사회는 '공범들의 도시'가 되어가고 있다. 자신의 죄를 감형받기 위해 공범의 더 큰 죄를 폭로하는 범인처럼 우리는 타인의 죄를 밝혀내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래야만 살아남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빠르게 학습한다. 자신을 정상처럼 보이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타인을 더 괴물처럼 보이게 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안다. 세월호는 단지 그것을 더 강화시켰거나, 어떤 압축된 이미지로 보여줬을 뿐이다. 타인을 살리려 애쓴 이들은 죽게 하고, 타인보다 어떻게든 빨리 나오려고 애쓴 이들을 살리는 이미지로 말이다. 그리고 침몰하는 배에서 국가는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있으라고 한 후 어떻게든 살아 나오려고 애쓴 이들을 유일하게 구조했다. 

 

 

3.

'세월호'다. 대구 지하철 참사와 용산 참사를 잇는 것은 물론이고, 쌍용자동차와 삼성반도체, 밀양, 강정 등으로 표출된 구조적 재난과도 연속되는 현실이다.  - 전규찬 '영원한 재난상태: 세월호 이후의 시간은 없다' p.162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다른 곳에서 성공했다. 대안 부재가 합쳐진 결과 사유화가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진행된 곳은 바로 사회였다. 오히려 사유화가 가장 성공적이었던 동시에 아직 이 사유화를 돌려놓을 대안이 분명치 않은 영역은 바로 주체성과 사회적 관계다. 신자유주의는 우리의 거의 모든 것을 사유화했다. (중략) 사적으로 극히 유능하도록 요구받지만 공적인 능력은 완전히 결여된 주체성을 생산하고 그에 고유한 사회적 관계를 산출한다는 의미에서 신자유주의란 '정치'가 '경제'에 의해 대체되는 기획일 뿐만 아니라 보다 본질적으로는 '경제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통치의 패러다임"이기도 하다. - 홍철기 '세월호 참사로부터 무엇을 보고 들을 것인가?' p.206~207

 

지난 1월 20일은 용산참사가 일어난지 6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6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 일로 쫓겨난 23명의 철거민 중 10명은 단순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고, 6명은 작은 가게를 다시 열었지만, 수입이 훨씬 줄어들었으며, 7명은 아예 직장조차 없음을 뉴스는 말해준다. 어쩌면 이러한 사실보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철거된 남일당 건물 자리가 여전히 공터로 남아 단지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부분이다. 무엇을 위해서 그들은 그 건물에서 죽음에 이르러야만 했는가. 아무 것도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용산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고, 사람들은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성공했다. 철거민들에게 공포감을 주며 그 건물을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심어 주었고, 사람들의 공적 능력을 제거하였으며, 그들 삶의 많은 것을 경제라는 화두로 대체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우리의 거의 모든 것을 경제가 지배한다. 오늘날의 뉴스에서 사람들을 진정으로 화나게 하는 것은 괴물들의 소식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은 단지 유흥거리에 불과하고, 보다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것은 연말정산, 세금의 확대, 담배값 인상과 같은 것들이다. 세월호라고 하면 보상을 떠올리고, 세월호 유족이라고 하면 보상을 받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사람들을 연상한다. IS에 잡혀있는 일본인 인질의 굳은 얼굴 뒤에 숨겨진 공포를 보기보다는 그를 돌려받기 위해 IS가 제시한 보상금이 얼마인지를 궁금해하며, 설마 우리나라도 저런 일은 없겠지, 있더라도 (내 돈이 들어간) 세금은 못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다른 건 다 필요없고, 경제를 살리는 데에만 힘을 쏟겠다는 경제 대통령을 뽑고, 그 댓가로 기꺼이 대통령은 '경제'라는 낱말을 42번, '성장'이라는 단어를 '16번', '개혁'이나 '혁신'이라는 단어를 24번 말해준다. 우리는 그 말을 듣는 것을 선택했다. '세월호'나 '희생'이나 '위로'라는 낱말을 듣는 대신 말이다. 우리는 분명히 그것을 선택했다.

 

4.

아무도 이것에서 달아날 수 없다. 자책과 죄책의 차원이 거슬린다면 이렇게라도 말할 수 있다. 우리 중에 누구는 아닐까. 우리 중 누가, 문득 일상이 부러진 채로 거리에서 새까만 투사가 되어 살 일을 예측하고 살까. (중략) 아무도 이것에서 달아날 수 없다. - 황정은 '가까스로, 인간' p.95~96

 

안티고네는, 국가의 반역자로 낙인찍혀 장례가 불허된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신 위에 흙과 제주(祭酒)를 뿌리고, 그에 대한 형벌로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녀는 폴리네이케스의 죽음에 대한 애도와 장례가 금지된 상황에서, 이 마땅한 일들을 수행하는 것이 자신의 윤리적 임무라고 생각한다. - 김서영 '정신분석적 행위, 그 윤리적 필연을 살아내야 할 시간' p.181

 

우리는 아니 나는, 분명히 그것을 선택했던 것 같다. 다른 말을 듣기를 말이다. 망각을 말이다. 사건 초기 열심히 뉴스를 보던 나는 어느틈엔가 뉴스를 점점 뜸하게 보게 되었다. 아니 도리어 그로부터 며칠 후 예정된 외국 여행 일정이 다가왔을 때는 조금 안도했었던 것도 같다. 한 십여 일 외국에서 있다 보면 그래도 조금은 조용해지겠지. 모두들 금방 잊으니까. 아니, 나야말로 금방 잊고 싶으니까. 그 때의 나는 무엇 때문에 뉴스를 점점 멀리하게 되었던가. 돌이켜보면 사건 당시에 TV를 지켜보고 있던 나를 지배하고 있던 정서는 '공포'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공포는 사고 그 자체에 대한 공포였다기보다는 믿기지 않는 부조리한 현장을 보고 있는 사람이 가지는 공포였다.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배가 침몰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었다. 바다에 떠 있는 배는 당연히 언젠가 바다에 가라앉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온갖 부조리의 현장이었다. 배에 그대로 남아있던 누구도 구조되지 않았는데, 스스로 탈출한 배의 운전을 담당한 사람들은 구조되었고, 국가는 민간업체에 구조를 맡겼지만, 민간업체는 구조는 국가의 일이라 말하였다. 배의 운항을 맡은 사람들은 전문가가 아니었고, 낡은 배는 무리한 증축과 구조변경으로 망가질대로 망가진 상태였고, 재난신호는 엉뚱한 곳에 접수되었으며, 대통령은 사고 당시 몇 시간 동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밝히지 않은 채, 책임을 물어 해경을 해체하였다. 책 속의 박민규의 말대로, 혹은 박민규의 소설 속 풍경대로 그것은 온갖 부조리의 현장이었다. 아니 모든 것이 부조리했기 때문에 오히려 부조리한 모든 것이 당연해보이는 이상한 현장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게 무서웠다. 그런 나라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무서웠고, 저런 부조리의 한복판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 어쩔 수 없이 앞으로도 살아가야 하며, 어쩌면 저들과 같은 처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끝내 눈을 감지 못할 아이들을 생각하며 눈을 뜨는 것(박민규)이거나, 권력에 기대지 않고 망각과 무지와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신의 힘으로 나아지는 길임을 자각하는 것(김연수)기도 하며, 국가라는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사회를 상상하는 것(황종연)이기도 하고, 윤리적 임무를 가지고 오빠를 애도했던 안티고네가 되는 것(김서영)이거나 재난의 시대에 맞서 글을 쓰는 것(전규찬)이기도 하다. 이것들은 약간씩 다른 맥락을 가지지만, 적어도 한 가지의 공통점은 가진다. 그것은, 이러한 것들이 공포에 매몰되어 얼어붙거나, 주입된 공포를 잊기 위해서 달콤한 망각과 은폐의 유혹에 빠져 '경제'와 '성장'과 '혁신'만이 있는 공범들의 사회로 기꺼이 돌아가려 했던 자신을 돌아보라는 메시지라는 점이며, 동시에 생각만큼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공포의 이면에 있는 것을 직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니까. 

 

물론 누군가는 이것에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조금 더 실제적인 무엇, 실체가 보이는 어떤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는 있다. 이 글들은 긴급한 필요에 의해 쓰여졌다는 것. 문제에 대한 답을 주기 위해 쓰여졌다기 보다는, 어떤 질문을 해야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필요한 질문을 생각해보기 위해서 쓰여졌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질문이 정리되면 이제 그 질문에 따라서 답을 그러모으는 과정이 진행될 것이니 말이다. 시인은 시를 쓸 것이고, 소설가는 이야기를 시작할 것이며, 언론학자는 언론의 책임을 생각할 것이고, 정치철학자는 새로운 정치체계를 구상할 것이며, 또 우리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나름의 답을 찾을 것이다. 그러나 굳이 그 사실을 되새겨보지 않더라도 우리는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은 안다. 모든 구체성은 상상에서 시작된다는 것, 아무것도 상상해보지 않는 자에게 어떤 답을 찾을 가능성도 주어질 수 없다는 점을 말이다. 눈먼 자들은 눈뜬 세계를 상상하지 않고서는 눈을 뜰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깨닫지 못한다. 상상하지 않는 것은 공포에 사로잡히는 것이며, 너무도 쉽게 스스로 공범으로서의 삶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책은 그것을 너무나도 아프게 말해준다.   

 

 

* 세월호의 빠른 인양과 정확한 진상규명을 촉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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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시장> 잡담

Ending Credit | 2015. 1. 20. 18:05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1.

윤제균의 <국제시장>을 보았다. 이미 여러모로 말이 많은 영화이고, 영화 내외부를 둘러싸고 상당히 구체적이고 풍부한 논의들이 많이 되었기 때문에 더 붙일 말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만 영화를 보며 스쳐 지나갔던 몇몇 감상들을 짤막하게 이야기하고 싶다.

 

2.

영화가 천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여기저기에 윤제균 감독의 인터뷰가 많이 실리고 있다. 윤제균 감독은 여러 매체에 거의 비슷한 내용의 소감을 밝히고 있는데, 그 하나는 이 영화를 둘러싼 정치적 이념 논쟁이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다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이 영화를 만들게 된 동기와 관련된 것이다. 그 인터뷰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윤제균 감독이 이야기하는 이 영화를 만든 동기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아버지 세대에 보내는 헌사, 다른 하나는 세대 간의 소통과 화합을 위한 것이다.

 

3.

나는 한 가지에는 약간은 동의하지만, 다른 하나에는 조금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먼저 이 영화가 아버지 세대에 보내는 헌사라는 점. 솔직히 나는 영화를 보면서 왜 이런 이야기가 이제서야 나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간 우리 근현대사의 어떤 지점들을 되돌아보는 이야기는 종종 있었다. 그러나 그 상당수의 영화들이 어떤 정치적 태도를 표면적으로 유지하거나, 특정의 사건을 통해 내부 전체를 깊숙이 들어가 조망하려고 노력하는 모양새였다면, 이 영화처럼 적어도 표면적으로 정치적 태도를 탈각한 것처럼 보이고, 특정의 사건이 아닌 어떤 세대 전체를 아우르는 보편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영화는 많지 않았다.

 

4.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편할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이 영화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입에 달고 사시는, 수십 년 동안 반새누리(반한나라)라는 기조를 지켜오신 우리 아버지를 영화의 거의 시작부터 끝까지 울게 만들었나. 그러니까 적어도 이 영화에는 반새누리이든, 혹은 반새정치이든, 혹은 다른 무엇이든 상관없이 눈물을 짓게 만드는 어떤 지점들이 있다. 그리고 그 지점들은 적어도 영화 안에서는 어떤 정치적인 구호나 이념과 조금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며, 나름의 충실한 재현과 적절한 위로로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독일에서 광부로 고생하는 덕수(황정민)의 모습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제다에서 건설노동자로 일했던 우리 아버지가 자신의 모습을 겹쳐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런 부분을 칭찬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5.

그러나 그것이 흔히 논의된 대로 정치성을 완전히 탈색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그것이 '표면적으로'라는 표현을 쓸 수 밖에 없는 이유이자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일텐데, 이 영화의 중간중간 비어있는 수많은 지점들을 채우고 있는, 혹은 채우려는 욕망을 보이는 다른 무엇인가가 조심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정치적'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무엇인가들이기 때문이다.

 

6.

이 영화는 크게 네 가지의 사건을 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한국전쟁 중의 흥남철수, 광부들의 파독, 베트남 전쟁, 이산가족찾기가 그것이다. 일각에서는 이 사건들의 선택이 부적절했다고 말한다. 그 이면에 있는 독재정권이나, 그에 맞선 반독재투쟁과 같은 것을 그리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물론 반론도 있다. 덕수의 삶에 충실하고자 하였으므로 이 사건들이 중심이 되었다는 반론이 그것이다. 나는 이 반론도 충분히 가능한 답변이라고 생각하며, 또한 이 사건들이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국면이었음을 부정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7.

다만 의아한 것은 이 사건을 그리는 방식인데, 이 사건은 덕수를 축으로 하여 통과하는 듯이 보이지만, 문득문득 그 축을 벗어나는 지점이 있으며, 그 벗어나는 지점들이 어떤 정치적인 함의를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초반의 흥남철수 장면에서 덕수가 도저히 알 수 없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미군 사령관(아마도 맥아더인듯한)에게 피란민들을 배에 실어달라고 호소하는 한국인 통역관의 모습과 결국 미군 사령관이 무기를 버리고 배에 피란민들을 싣기로 결정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이 장면은 덕수의 눈으로 절대 볼 수 없는 장면이지만, 필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후에 어떤 장면을 보여주기 위함이고, 그 장면은 베트남전에서 자신들을 태워달라고 간청하는 베트남 주민들의 요청을 결국 거부하다가 태우고 마는 덕수의 모습과 정확히 대구를 이룬다.

 

그러니까 이 장면은 오로지 어떤 모습을 연상시키기 위해 존재한다(스토리 상으로는 도무지 필요가 없다). 그 모습이란 성장한 한국이라는 국가로 표상된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겨우 살아남고자 애썼던 처지에서 이제는 누군가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위치. 아니 조금 덜 삐딱하게 말하자면 이제는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는 위치. 이러한 것은 기브 미 쪼꼬렛을 외쳤던 어린 덕수의 모습과 이제 베트남 소년에게 초컬릿을 건네주는 덕수의 모습과 같은 장면(그리고 이 장면에서 마치 필요하다는 듯이 소년은 덕수에게 한국인이냐고 묻는다), 혹은 독일 광산에서 관리자 앞에 무릎을 꿇었던 영자(김윤진)와 외국노동자를 조롱하는 어린 학생을 훈계하는 덕수의 모습으로 다시 비슷하게 변주된다.

 

8.

그러니까 이 영화의 비어있는 어떤 장면들에서 그것을 채우기 위해 가끔 고개를 들이미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있다. 그것은 국가라는 이상한 녀석이다. 휴전 소식을 들으며, 국가가 힘이 약하니 자기들 맘대로 하는 것이라는 멘트, 혹은 정주영의 꿈을 비웃는 소년들과 결국 정주영의 꿈이 이루어졌다는 신문기사, 혹은 노년의 덕수와 영자가 대화를 하는 풍경에서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부산의 (예전과 비교되는) 발전된 풍경과 같은 것 말이다(그들은 왜 굳이 옥상에 올라가서 이 대화를 하는 것일까, 혹은 감독은 왜 굳이 나비를 통하여 이 풍광을 돌려서 보여주는 것일까).

 

9.

물론 가장 의미심장하고도, 웃긴 장면은 대통령도 감명 깊게 보았다는 그 장면일 것이다. 덕수에게 베트남전에 가지 말라고 호소하는 영자와 이것이 내 팔자니 어쩔 수 없다는 (약간은 이상한) 항변을 하는 덕수의 언쟁을 봉합하는 국기게양식. 이 장면을 일종의 풍자라고 보는 의견도 있지만, 나에게는 앞에서 이야기한 장면들과 맞물려 이 장면은 조금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일단 이 영화는 장면들이 기능적으로 분할되어 있다. 즉 웃기고자 하는 장면들이 있고, 울리고자 하는 장면들이 있으며, 그것은 철저하게 구분된다. 즉 음악이나 분위기로 이제부터 울리겠습니다, 혹은 이제부터 웃기겠습니다,라고 이 영화는 장면마다 선언하고 시작한다. 그런 구분으로 보면 이 장면은 명백히 웃기고자하는 장면이 아니며, 도리어 구조상으로 볼 때 갈등이 최고조되는 시점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그보다 중요한 점은 이 장면이 이 영화를 통틀어 유일하게 덕수에게 그의 삶에 대해서 묻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 덕수의 머리 속에는 오로지 남은 가족을 지켜내라는 아버지의 말씀 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거기에 자신의 삶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어 보인다(그의 어떤 '욕망'이 드러나는 장면은 고시학원에서 도강을 하다가 쫓겨나는 장면밖에 없다). 그런데 아무도 하지 않고 제기될 틈도 없어 보였던 그 질문을 영자가 한다. 여기에 당신의 삶은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이때 울려퍼지는 애국가라니. 왜 그는 그 질문에 답변하지 못한채, 여전히 비어있는 무엇인가로 남겨져 있는가. 이 영화에서 덕수에게 부여한 위치는 무엇인가. 사건들을 관통하여 보여주기 위한 투시경일뿐인가(예를 들어 이 영화와 비교되는 저메키스의 <포레스트 검프>에서 검프가 지능지수가 낮은, 그러므로 사건들을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였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말이다. 물론 그런 의미에서 비슷하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10.

그러니까 나는 이 영화가 헌사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아버지 세대들이 악조건 속에서 엄청난 고생을 했으며, 적어도 그것이 자식 세대들, 혹은 가족을 위한 것이라고 말해진다면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 자꾸 슬며시 고개를 들이미는 녀석이 있다. 그것은 국가라는 녀석이며, 국가 발전이라는 환상이다. 나는 이것이 아버지 세대가 이뤄낸 무엇을 자꾸 국가가 가로채는 것처럼 느껴진다. 가족이 가족 이상의 가족주의가 될 때, 혹은 그 가족주의가 하나의 국가라고 말해질 때, 실제의 가족들이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든다. 그 고리를 어떻게 단절시킬 수 있을까. (그 가능성의 어떤 단초를 <인터스텔라>나 <설국열차>에서 보았다.)

 

11.

그러니까 마지막의 실제 가족은 이상한 위치에 서 있다. 나는 이 영화를 통틀어 가장 이상한 장면은 이 장면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아버지(의 유령)를 만나고 있는 덕수와 분리된 가족들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윤제균의 컷이다. 자식들은 아무도 덕수에게 아버지가 우리를 위해 고생한 것을 안다, 그러니 고맙고 자랑스럽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에게 그렇게 말해주는 것은 그가 오래전 헤어진 아버지의 환영이다. 그런데 도대체 이 '아버지의 형상으로 나타난 환영'은 누구인가(무엇인가). 질문을 이렇게 바꿔볼 수도 있겠다. 지금 우리 아버지 세대들에게 그런 위로를 건네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그것이 사실은 환영(환상)에 불과한 위로라고 해도 말이다.

 

12.

그 환영이 국가라는 아버지이다,라고 도식적으로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 장면은 여러모로 아쉽고 미심쩍어 보인다. 왜냐하면 앞에서 윤제균 감독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이 영화가 세대 간의 화합과 소통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화합과 소통의 가장 첫걸음은 상대방에 대한 이해이며, 이것을 영화로 말한다면 적어도 상대방을 이해할 여지가 있는 무엇인가로 그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의 덕수는 이해할 여지가 있지만, 자식들에게는 아무런 이해의 여지도 없다. 이 영화에서의 젊은 세대는 내가 보기에는 (흔히 말하는) 그저 기능적인 나쁜 캐릭터이다. 그들은 괜히 외국인노동자에게 시비를 걸고, 늙고 게다가 아픈 부모에게 자식을 맡기고 놀러가고, 부모의 이야기는 전혀 귀담아 듣지 않는다. 이런 캐릭터들에게 어디 이해할 여지가 있다는 말인가.

 

(덧붙이자면, 물론 이는 영화가 어떤 것을 선택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이산가족상봉을 그린 후 현재로 건너뛰는 선택 말이다. 덕수와 자식들이 단절된 것은 이 시기의 어떤 것들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 시기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하지 않고 오로지 소통이 단절된 현재를 보여줄 뿐이다. 이도 물론 하나의 정치적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3이라기보다는 덧.

나는 그래서 윤제균 감독의 인터뷰가 솔직하지 못했다라기 보다는 사실 조금 비겁하다고 생각한다. 영화가 그래야 더 재미있고, 더 관객이 많이 들잖아요,라고 말하면 안될 이유가 있는가. 우리 이제 그런 정도는 '익스큐즈'할 수 있는 쿨한 관객이잖아요. 이미 그렇게 말하는 게 당연한 세상이잖아요. (허지웅의 '정신승리하는 사회'라는 코멘트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말이다. 그의 그런 말은 적어도 영리한 멘트는 아니다. 그가 적어도 논란을 일으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고 항변한다면 말이다.)

 

 

 

- 2015년 1월, CGV 역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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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5.01.24 14: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국제시장>을 아직 못보았지만 드라마나 영화안에서의 시대적 혹은 시간적 건너뜀을(흔히 마지막회나 피날레즈음에 사용되잖아요)대할때마다 종종 게으른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곤합니다. 스토리분배상으로도 형평성이 너무 떨어지고 갈등구조를 급마무리하려는 무리수도 보이구요. (특히 드라마에서)

    어제 퇴근후 영화관엘 갔는데<국제시장>과 <강남1970>을 하더라구요. 시간대가 맞아서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강남에도 그런 시대적 건너뜀이 마지막부분에 나왔어요.
    영화전개상 이해를 못할 부분은 아니었구요. 70년대의 종대(이민호)가 기차역 굴 속에서 죽어가는 장면에서 자본의 상징이된 2천년대 강남으로 넘어가는 건너뜀이었죠.
    그 장면을 보는데 문득 <살인의추억> 마지막부분 기찻길 굴장면이 생각났습니다.
    무려 전 그 장면이 전자가 후자의 오마쥬같이도 느껴졌어요.
    강남1970은 어디선가 본듯한 장면들이 많이 나왔지만 전 괜찮게 봤습니다. 아쉬운점도 많았는데 뜬금없는 배드신들은 왜 그랬을까? 싶었어요. 만일 양념처럼 재밌으라고 삽입한거라면 실패한거죠. 재미없었으니까.
    이민호라는 배우를 다시 보게 되었다는게 이 영화의 장점인것 같아요 ^^

    * 여기 들어오니 뭔가 막 수다떨고싶어지네요. ㅎㅎ 저한텐 맥거핀님의 블로그가 그런 동기를 주는 것 같습니다. 올해도 좋은글들 읽고 또 종종 수다 떨고 갈게요!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5.01.28 00: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영화는 시간을 다루는 예술이니까, 영화에서 어떤 시간을 선택하는가 하는 문제는 거의 영화의 기본적인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 것인가에 흔히 감독의 세계관이 드러난다고 하잖아요. <국제시장>은 어떤 의미에서는 감독이 선택한 시간이 결국 모든 것을 말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번에 나온 유하 감독 영화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은 없지만, 저도 유하 감독의 전작들은 봤기에 나름 그의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조금 힘을 빼고 만드시면 좋을걸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요. 그 힘이라는 게 뭐 자신의 스타일이라고 한다면 뭐라 하겠습니까..^^ 그런데 아무튼 요즘 관객들은 그렇게 좋아할 스타일은 아니겠다는 생각은 들어요. 이민호는 저도 예고편에서 보니 생각외로(?) 꽤 멋있는 친구구나 하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 늘 글 읽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올해도 그렇게 녹록한 한해는 아닐 것 같지만, 그래도 힘내서 잘 지내보자구요.^^

끝나지 않는 실험

The Book | 2015. 1. 14. 17:16 | Posted by 맥거핀.

 


정확한 사랑의 실험

저자
신형철 지음
출판사
마음산책 | 2014-10-01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마음산책에서 펴낸,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세 번째 책 27편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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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의 책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자주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단어가 있다. "그러나 정신적인 고통은 어떻게 정확히 되돌려줄 수 있을까."(p.70)"내가 정확히 동일한 고백을 동일한 사람에게 했다고 해도 나는 더 이상 스무 살 청춘이 아니고 이 카페는 예전과는 그 분위기가 달라져 있다."(p.86)"실로 지금 이 시대가 체념도 낙관도 모두 허용하지 않는 시대라면, 이 열차가 이상한 곳에 도착했기 때문에 우리는 정확한 현실 인식에 도착한 것일지도 모른다."(p.168) 그리고 그의 고백. "문학(글쓰기)의 근원적인 욕망 중 하나는 정확해지고 싶다는 욕망이다."(p.27) 이 '정확하다'는 것이 말하고자 하는 것.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글들에서 '정확'을 이야기하는 것은 조금 어긋난 것처럼도 보인다. 왜냐하면 이 글들은 영화라는 형식을 가진 어떤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고, 모든 이야기는 일단 창작자의 손을 떠나면 어떠한 수용자, 혹은 어떠한 해석자에게도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받아들여진다고 흔히 생각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영화를 자신의 느낌대로, 혹은 자신의 방식대로, 혹은 자신의 세계관대로 받아들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 그 이해가 적어도 공격적인 방식으로 재생산되지 않는다면, 누구도 그 나름의 이해나 해석에 대해서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것은 신형철도 잘 알고 있다("정답과 오답이 있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더 좋은 해석과 덜 좋은 해석은 있다."('책머리에') 이 '더 좋다'와 '덜 좋다'는 것.) 그럼에도 그가 이 '정확하다'라는 말을 책의 제목에까지 가져온 것은 두 가지와 관련된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이 '정확하다'는 말이 수식하는 것에 대해. 단적으로 말해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정확함'이란 정확한 해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포괄한 정확한 사랑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즉 작품에 대한 해석이란 작품에 대한 사랑의 하나의 형태임을 생각해 볼 때, 그가 말하는 것은 작품에 대한 해석 이상의 그에 대한 정확한 사랑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한 영화, 한 이야기를 보며 순간순간 그에 대해 반응한다. 주인공이 누군가에게 호의를 품을 때, 우리도 호의를 가지기도 하고,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을 때, 우리도 상처를 받고, 다른 누군가를 증오할 때, 우리도 누군가를 증오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반드시 일치하는 것만은 아니다. 주인공이 누군가를 증오하지만, 우리는 도리어 그 순간 주인공에게 연민을 느끼기도 하고, 주인공이 누군가에게 호의를 가질 때, 우리는 도리어 그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볼 때도 있다. 즉 이 증오나 호의나 상처는 주인공에게서 우리에게 그대로 투영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한 번은 우리 마음 속 어딘가에서 굴절되어 다르거나 비슷한 '무엇인가' 혹은 그 '무엇인가'들이 합쳐진 '거대한 무엇인가'를 만든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이 거대한 무엇인가'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것은 어디에서와서 어떻게 만들어져,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이 순간, 나를 그 자리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고 멍하게 만드는가. 이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모를 때 때로 고통스럽다. 신형철의 작업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야기를 보고 내 마음 속 어딘가에서 만들어진 이 거대한 무엇인가가 어떤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고, 어떻게 결합되어 있으며, 어떻게 분해될 수 있는지(혹은 분해가 불가능한 것인지)를 밝히는 일. 그것을 위해서 신형철이 가지고 있는 도구는 단 하나다. 그것은 섬세하고자 하는 것, 혹은 섬세해지기 위한 최대한의 노력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복잡하고 알 수 없는 것, 즉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고, 수고로움을 필요로 하는 것이며, 또한 시간과 반복을 필요로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는 말한다. "한 편의 영화를 영화관에서 대여섯 번 보고 나서 열 줄로 이루어진 단락 열네 개를 쓰고 나면 한 달이 갔다."('책머리에')) 많은 감상들이 '감동적이었다'라는 말로 뭉뚱그린 표현밖에 쓰지 못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그 '감동'이라는 녀석을 분해하여 들여다보는 것이 노력을 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적어도 그 노력을 시도해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것은 그가 해석자이고자 하기 때문에, 즉 그가 말한대로 해석이라는 '기술'을 가진 '비평가'이고자 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아마도 '정확하다'는 말을 책의 제목에 가장 처음 넣은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즉 그는 이것이 거의 비평가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비평은 함부로 말하지 않는 연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어쩌면 비평은 함부로 말하지 않기 위해 늘 작품을 앞에 세워두는 글쓰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책머리에') 즉 그에게 있어서 비평은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다르게 말하면 최대한 정확하게 말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며,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바 그대로 최대한 정확하게 언어로 풀어내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를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포인트는 '정확함'에 있지만, 또 한편으로 그것은 동시에 '노력'에도 있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의 말대로 "삶의 진실은 수학적 진리와는 달라서 100퍼센트 정확한 문장은 존재할 수 없을 것"(p.27)이고 문학은 '근사치'로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실험은 무엇을 알고자하는 노력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들은 일종의 실험이 된다. 정확해지고자 하는 실험 말이다.

 

이것이 그런 실험이라면 마지막으로 두 가지 정도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정확함'과 '실험' 사이에 있는 하나, 즉 무엇을 위한 실험인가라는 점. 그것은 물론 제목에 있는대로 '사랑'이다. 신형철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 책에서 견지하고 있는 자세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각 텍스트에 대한 애정이다. 그는 말한다. "조금도 애정을 느낄 수 없는 텍스트였다면, 대체로 그래왔듯이, 아무 것도 쓰지 않는 편을 택했을 것이다."(p.153) 실험이란 기본적으로 잔혹한 속성을 지니고 있지만, 이 실험이 잔혹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가 이 실험의 대상자들에게 계속 애정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며, 그 텍스트가 결국 그의 생각에는 의도한 바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 텍스트였어도, 그것을 섬세하게 바라보고자 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영화를 정확하게 바라보고자 하는 다른 어떤 노력들은 왜 거부감을 불러오는가. 예를 들어 영화를 일종의 커다란 시험지로 보고, 최선을 다해 정답을 찾아보고자 하는 노력같은 것. 시험의 모든 정답을 찾은 학생에게 시험지는 더 이상 아무 의미도 없으며, 그것은 곧 구겨져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운명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이 실험은 결국 끝나지 않는 실험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다시 아까의 문장을 그래도 가져온다면 "삶의 진실은 수학적 진리와는 달라서 100퍼센트 정확한 문장은 존재할 수 없을 것"(p.27)이기 때문이며, 문학은 '근사치'로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완벽한 정확함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의 말대로 어떠한 문학도, 혹은 비평도 완벽한 정확함으로 존재할 수 없다. (완벽한 정확함이 존재하는 순간, 그의 원본은 존재의 가치가 없기 때문에도 그렇다. 삶의 모사물인 문학, 작품의 모사물인 비평이 완전하다면 삶과 작품이 존재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나 정확하게 표현되지 못한 진실은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지만,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p.27) 이 책은 우리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노력한다. 내가 이 이야기를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는 우리들이 받는 고통 말이다. 이 책은 그런 책이다.

 

 

덧.

정확하게 말해서 책을 모두 읽지는 않았다. 중간에 보지 않은 영화에 대한 글은 건너 뛰었으므로 굳이 분량으로 말하자면 3분의 2정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보지 않은 영화에 대한 내용을 미리 아는 것을 피하고자 하는 의도였다기 보다는 그 반대에 가깝다. 영화를 보지 않으면 그의 글을 더 잘 이해할 수 없을까봐서였다. 단지 세심한 그의 글을 조금이라도 더 세심하게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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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5.01.24 15: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형철씨의 이름을 기억하게 된 건 몇년 전 씨네21 스토리텔링에 연재된 '케빈에 대하여'에 대한 서평이었어요. 뭔가 그전에 읽었던 서평글과는 좀 다른결이 느껴졌던것같아요. 그게 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평론 혹은 서평 그리고 산문이라는 글이 어느만큼 정확해질 수 있는지, 지속적인 애정을 가지고 끊임없이 섬세해지려고 노력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이었을까? 그런 생각이 드네요. * 신형철씨는 목소리가 좋아요 :)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5.01.28 00: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신형철 씨가 하는 팟캐스트 들으시나 봐요. 저도 몇 번 들었습니다. 차분하게 진행하셔서 듣기 좋더군요. 다만 가끔 졸린다는 게 단점이기는 합니다만.

      아무튼 신형철 씨 글을 읽으면 명료해요. 그래서 참 그가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글이 명료하지 못한 것은 생각이 적기 때문이겠죠(제 글 말입니다). 명료한 글을 쓰기 위한 그의 노력만큼은 (질투가 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내일을 위한 시간, 다르덴 형제

Ending Credit | 2015. 1. 5. 12:27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할 수 없는, 그렇지만 해야만 하는 선택을 보여주는 영화는 대체로 늘 어렵고 힘들다. 그렇지만 다르덴 형제의 신작 <내일을 위한 시간>은 이 힘든 선택을 직관적으로, 상당히 쉬운 문법으로 보여준다. 그러니까 이야기는 생각이 필요없을 정도로 간단하다. 산드라(마리옹 꼬티아르)는 병에서 회복한 후 복직을 희망하지만, 1000유로의 보너스와 자신의 복직 중에서 선택하여 투표하자는 회사의 결정에서, 자신을 선택하도록 회사 동료들을 설득해야만 한다. 월요일 투표를 앞둔 주말의 이틀 동안 말이다. 이 영화는 그런 산드라의 이틀을 그대로 따라가며 16명의 동료들을 차례로 만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게 다다(영화의 원제를 직역한 영어제목은 <Two Days One Night>이다). 별다른 부수적인 플롯도 없고, 별 그럴듯한 사건도 없다. 카메라는 토요일 오전부터, 투표가 이루어지는 월요일 오전까지 산드라를 집요하게 쫓아다닐 뿐이다.

 

언뜻 보면 이 선택은 당연한 선택처럼 보인다. 1000유로의 보너스와 회사동료의 복직 사이에서의 선택 말이다. 왜냐하면 현재 이러한 선택은 어디에서나,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처럼 프랑스의 작은 회사에서나, 혹은 글로벌한 대기업에서나 하다못해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의 복직 문제 같은 것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논리, 마치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선전되고, 받아들여지는 논리이기 때문이다(이 영화의 회사 동료들의 면면을 보면 유럽의 저소득층 노동자들이 당면한 현실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우리의 노동시장도 만만치 않다). 우리가 나쁜 놈들이거나, 악마라서 너희들을 자르는 것이 아니야. 누군가가 나가야만 나머지 모두에게 돌아가는 이익이 줄어들지 않거나, 회사가 지속될 수 있는데 어떡하겠니. 누군가는 나갈 수밖에 없어, 그러니까 원망하지마, 니가 다른 사람들보다 능력이 떨어지는데 어쩌니, 바로 그 논리. 즉 이 영화에서의 각 개인당 1000유로의 보너스는 앞으로 나갈 산드라의 월급을 미리 나누어 주는 것에 불과하다. 자본가의 이익은 어떠한 선택을 한다해도 그대로 유지된다. 다른 대다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딱한 것은 계속 안정제를 입 안에 털어넣으며, 어쩔 수 없이 동료들을 만나야만 하는 산드라만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선택을 강요당하는 동료들 모두가 그에 못지않게 딱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영화 속에 나온 말대로 이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며, 그들이 산드라에게 미안해할 이유, 혹은 그 반대로 산드라가 그들에게 미안해할 이유가 없다. 이것으로 인해 그 노동자들 누구도 아무도 실질적인 이득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그들의 노동의 양은 산드라가 빠진 만큼 늘어날 것이다. 그 보너스의 양만큼 말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아무도 이득을 보지 않는 이 선택은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계속 되풀이된다. 왜? 그것이 노동시장을 제어하는 데에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일종의 제로섬 게임이며, 제로섬 게임에서 참가자들은 결코 연합(연대)할 수 없다. 그리고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늘 분열하기를 바라며, 그들이 연대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들을 분열시키려고 애쓴다(영화 <카트>에서 마트 노동자들이 해고된 직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노동조합을 만드는 것, 그러니까 합치는 것이었으며, 자본가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그 주동자들을 회유하는 것, 그러니까 분열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이 노동자들의 연대에 대응하는 자본가들의 첫 번째 무기이자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그리고 그 무기는 언제나 힘을 발휘한다.

 

 

그러니까, 사실 이 영화는 일종의 작은 실험실이자, 거대한 사회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실험은 (사실 모든 실험들이 그렇듯) 잔혹하며, 실험 설계자는 여전히 실험실에서 가장 안락한 위치에 있다. 늘 딱한 것은 미로를 열심히 헤매야만 하는 흰색쥐들, 그러니까 실험 참가자일 뿐이다. 그러나 한탄만 하고 있다고 해서 나아질 것은 없다. 이 영화에는 (거의 실질적으로 보이는) 미로를 탈출할 몇 가지의 힌트가 있다. 마치 어떤 전략처럼 보이는 것들 말이다. 그 하나의 전략은 일대일로 얼굴을 마주 대하고 말하라는 것. 인간은 집단의 의견이라는 편한 울타리에 쉽게 숨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쉽게 잊어버리고 마는 존재이다. 예를 들어 몇 백만의 굶어죽는 아이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굶어죽어 가는 단 한 명의 아이의 사진을 보여주는 것이 늘 더 효과적이다. 아니 그보다는 굶어죽어 가는 아이를 눈 앞에 데려다 놓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이것은 인정에 호소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정이 아니라, 단지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돈 대신에 선택하여야 하는 것이 한 인간의 죽고사는 문제라는 것, 좋은 말이지만, 그 인간을 실제로 보기 전까지 우리는 그것을 쉽게 잊는다. 그것은 인간이 악해서가 아니라, 약해서 그렇다. 그러므로 그들은 묻는다. 산드라가 동료들을 만나게 되면 그들이 항상 산드라에게 묻는 질문. (나 외에) 너를 지지하는 사람은 누가 있지. 대체로 인간은 어디에서든 소수자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 누구나가 많은 쪽의 편에 서기를 원한다. 그것 또한 이들(그리고 우리)이 단지 약한 존재임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의 남편의 존재도 어쩌면 그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사실 이 영화에서 남편의 캐릭터는 보기에 따라서 다르게 보일 수 있다. 끊임없이 산드라에게 동료들을 만나도록 독려하는 산드라의 남편이라는 캐릭터는 좋게 볼 수도 있지만, 보는 이들을 짜증나게 만들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산드라가 영화의 내내 동료들을 만나는 것을 너무나 고통스러워하기 때문이다. 왜 남편이라는 작자는 그녀가 그런 고통을 감내하도록 하는 것일까. 나는 다르덴 형제가 분명히 이 문제를 생각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실 이 영화에서 남편이라는 캐릭터가 없어진다해도 영화의 전체 진행에는 큰 문제는 없기 때문이다. 다른 동료들을 남편이 같이 만나주는 것도 아니며, 항상 그녀 혼자 동료들을 찾아간다. 그저 산드라를 이혼한 싱글맘으로 설정해도 된다. 별 문제도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캐릭터가 필요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캐릭터가 없을 때를 실제로 상상해보는 것이다. 그럴 경우에 생기는 문제는 산드라가 훨씬 강인한 캐릭터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영화에서의 산드라를 결코 약한 캐릭터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자발적으로 그 고통을 감내할 만큼 강인해져서는 안된다고 다르덴 형제는 생각한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거의 대부분의 인간이 그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약하기 때문이다. 

 

다르덴 형제는 늘 그런 약한 인간을 이야기해 왔다. 겉으로는 무심한 듯 보이지만, 늘 시계추처럼 흔들리는 인간들을. 아니 인간이 아니라 카메라가 흔들린다고 말해야하나. 처음의 몇 장면들은 이것이 다르덴 형제의 영화임을 선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물의 곁에 바싹 달라붙어서 흔들리는 카메라, 아무런 배경 설명도 없이 갑자기 시작되어 관객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이야기. 다르덴 형제의 영화 속에서 마치 주인공의 실질적인 유일한 친구는 늘 그의 곁에 바싹 달라붙어 떨어질지 모르는 카메라처럼 보였다. 주인공이 흔들리면 카메라도 같이 흔들렸고, 주인공이 숨을 고를 때면 카메라도 같이 숨을 골라주었다. 이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도 카메라는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산드라의 곁에 붙어 있다. 산드라가 동료들을 만날 때, 동료들의 반응숏이 이 영화에서는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반응숏보다는 여전히 카메라는 묵묵히 동료들보다는 산드라를 더 오래 비추었고, 산드라가 실망감과 고통을 애써 감추며 차로 돌아올 때 카메라도 같이 차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런 카메라가 이제 마지막 장면에 이르렀을 때 약간 달라진다. 투표를 마친 후 회사를 걸어나가는 산드라를 카메라는 따라가지 않고 멈춰선 후 묵묵히 계속 걸어가는 산드라의 뒷모습을 지켜본다. 길게 말이다. 그리고 다르덴 형제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음악 없는 엔딩 크레딧이 이어진다.

 

그녀의 발걸음이 어땠을지, 그것은 영화를 본 이들의 몫으로 남겨둔다.   

 

 

 

- 2015년 1월, CGV 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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