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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 단상들

Ending Credit | 2016. 5. 24. 01:14 | Posted by 맥거핀.

 

(경고합니다. 영화 <곡성>에 대한 각종 스포 있습니다.)

 

 

 

1.

<곡성>을 본 후 그 리뷰들이 궁금해서, 인터넷에 '곡성'이라고 검색어를 넣으니, 친절하게도 '곡성 결말', '곡성 줄거리'를 찾아볼 것을 권한다. 그만큼 <곡성>의 황량한 결말의 의미나, 줄거리의 의문점들을 찾아보려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뜻일게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어쩌면 요즘 시나리오 작가들은 그런 식으로 시나리오 쓰는 방법들을 열심히 배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관객의 머리 속을 최대한 복잡하게 만들어서 관객에게 그 영화의 정보를 열심히 찾아보게 하고, 다시 그것을 확대 재생산 하게 만드는 것이 영화의 홍보에는 결정적인 힘이 될 테니까. 그러나 <곡성>에 대해서 그런 질문을 하게 하고, 정답을 알게 하는 것은, 다른 결에서 참 딱한 일이다. 왜냐하면 <곡성>의 이야기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되면 될수록, 그 결말에 대해서 더욱 생각해보게 되면 될 수록 그 영화를 보고나온 관객은 더 황량해지기 때문이다.

 

2.

사실 <곡성>은 영화를 본 후에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넘쳐나는 영화이다. 그것은 영화 내부적인 면에서도, 혹은 외부적인 면에서도 그렇다. 그래서 그럴까. 영화의 개봉을 전후해서 이른바 '스포'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어떤 결에서 보면, 이 영화는 스포가 그렇게 큰 의미를 가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영화의 거의 모든 이야기들은 사실 어떻게 해석해도 그다지 틀리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야기의 여러 갈래를 세세하게 늘어놓을 생각은 없지만, 예를 들어 인터넷 누군가의 단평대로 이 영화를 그저 경찰관 종구(곽도원)의 한바탕 꿈이라고 해도 안될 것은 없다. 이 영화는 이야기의 흐름으로 보면 상당히 불친절한 영화이고, 불친절함을 넘어서 여러가지 반대되는 해석이 동시에 가능하도록 이야기를 이끌기도 한다. 재미있게도 <곡성>은 영화 시작부의 씬을 통해 이미 관객에게 일종의 경고 혹은 힌트를 준다. 던져지는 미끼, 넘쳐나는 떡밥.

 

3.

그런 장면들이 셀 수도 없이 많지만, 가장 대표적인 장면은 물론 무당 일광(황정민)이 '살을 날리는' 굿을 펼치는 장면일 것이다. 종구의 딸 효진은 '인간이 아닌' 어떤 존재인 외지인(쿠니무라 준)에 의해 거의 손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일광은 그런 외지인을 없애기 위해 굿을 벌인다. 그리고 장면들은 교차된다. 굿이 더 활기를 띠면 띨수록 외지인은 거의 죽음 혹은 소멸에 가까워지는 것처럼 보이며, 아이는 고통스러워 하지만, 그 과정을 견뎌내야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관객은 믿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 뒤집힌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관객은 묻게 된다. 아니, 그러면 그 장면들은 다 무엇이지? 친절한 홍진씨는 다른 인터뷰에서 이 장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그 장면은 외지인에게 살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효진에게 사실 살을 보내는 것이었다고. 이것은 사실 꽤 이상하다. 이런 설명은 '감독의 입을 통해서'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 내부적으로' 설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교차편집 어디에서도 그것은 조금이라도 암시되지 않았다. 관객은 어리석거나 부주의해서가 아니라, 보통의 영화문법을 해석하는대로 일상적인 해석을 했을 뿐이다. 아니 도리어 감독의 말이 맞다면 이것은 잘못된 씬의 설계이다. 그 설명대로라면 이 교차편집에서 외지인이 그런 식으로 들어갈 이유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이 장면의 잉여를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맥락에 따라 포장되었지만, 사실 포장지를 풀면 다른 것이 들어가 있는 것. 그것을 우리는 흔히 낚시, 혹은 떡밥이라고 부른다. 

 

4.

이런 식의 어떤 낚시들, 떡밥들이 이 영화에는 넘쳐난다. 그러니 영화가 끝난 후 어찌 이야기들이 넘쳐나지 않을 수 있을까. 상당수의 것들은 맥락에 따라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열어보면 다른 것이며, 다른 나머지 것들은 그런 맥락조차도 없다. 저렇게 해석해도 이야기가 되고, 이렇게 해석해도 이야기가 안될 것은 없다. 뭐 좋다. 떡밥이 맛있다면, 그리고 그 떡밥을 먹고도 낚시줄에 걸리지 않고 다시 물로 돌아와 즐겁게 헤엄치며 배를 두드릴 수 있다면 그 떡밥을 굳이 거부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영화가 뭔가 꺼림칙해 보이는 것은 그 다음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떡밥을 삼키고, 이제 마지막 떡밥을 삼키려고 할 때, 그러니까 영화로 말하자면 마지막에 무엇인가 메시지를 던지려는 것처럼 보였을 때 생긴다.

 

5.

영화에서 굳이 메시지를 끌어내려고 한다면, 그것은 영화의 포스터에도 들어있는 저 여덟 글자, 그러니까 '절대 현혹되지 마라' 정도가 될 것이다. 표면적으로 그들의 파멸은 그들의 현혹에서 비롯되었으니까. 마지막에 나홍진은 이상해보이는 두 개의 만남을 이번에도 기어이 교차편집한다. 종구는 무명(천우희)을 만나고, 사제 이삼은 그 외지인을 만난다. 그저 종구가 외지인을 만나는 것이 영화적으로는 훨씬 말이 되지만(그 개 앞에도 벌벌 떨던 이삼이 그 밤중에 외지인을 찾아가는 게 많이 이상해 보이지만, 그 정도는 익스큐즈하자. 그런 것도 익스큐즈 안하면 이 영화에는 익스큐즈 할 수 있는 게 없다.), 나홍진은 억지로라도 그런 구도를 만들어서 다시 교차편집을 쓰고 싶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두 가지의 의심을 교차하며 보여줄 필요가 있었으니까. 종구는 무명(천우희)을 믿지 못하고, 무명의 팔을 뿌리치며, 이삼은 외지인이 악마라는 확신을 끝내 가지지 못하고 의심한다. 이 두 개의 의심, 혹은 두 개의 현혹. (물론 이 영화에는 이 현혹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가 초반부터 계속 꾸준히 쌓는 장면들이 있다. 반복되는 현혹과 의심들. 외지인을 의심하는 종구의 생각은 사실 명확한 증거에 기초했다기보다는 어떤 근거없는 의심들에 더 가깝다.)

 

6.

그래서 누군가는 이 영화에서 종교적 도그마에 대한 공격을 읽고(사실 의심 속에서 종교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으니), 누군가는 이 영화에서 '영화 그 자체'를 읽는다. 이 중 조금 더 재미있어 보이는 것은 '영화라는 것'에 대한 이야기인데, 사실 영화란 현혹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영화는 사실 거대한 속임수이다. 우리는 두 시간 동안 어떤 이야기를 보지만, 우리는 그 이야기의 모든 일면을 결코 본 적이 없다. 우리는 오로지 감독이 보여주고 싶어한 것만을 본다. 물론 <곡성>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는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단순히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현혹되지 말 것'을 주장하는 이 영화는 각종 현혹을 차례로 전시하며, 관객에게 무엇인가를 믿게 하거나, 혹은 믿도록 암시한다. 위에 든 일광의 굿 장면이 대표적이며, 그 외에도 이야기의 흐름상 관객에게 무엇인가를 받아들이게 한다. 예를 들어 지금 흔히 나오는 얘기대로 이 영화에 어떤 '반전'이 존재한다고 이야기된다면, 그것은 그 현혹이나 암시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는 얘기도 된다.

 

7.

그것은 사실 이상한 자기모순이다. 현혹되지 말라고 하면서, 일부러 현혹시키는 것 말이다. 그것은 영화라는 매체가 기본적으로 현혹시키는 것임을 전제하더라도 이상하다. 일전에 영화를 마술과 비교해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영화와 마술이 통하는 점 중에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영화를 보는 이들이건, 마술을 보는 이들이건, '이것이 현혹시키는 것이다'라는 사실을 이미 사전에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며, 오히려 그 현혹을 어떻게 잘 구축하는가에 그 공연(영화나 마술)의 성패가 달려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이 게임은 누군가는 속이고, 누군가는 속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데에서 생겨나는 쾌감을 즐기는 게임이 아니고, '자 이제부터 속입니다'라고 말한 후, 정해진 규칙 내에서 그 속임의 정교함을 최대한 즐기는 게임이다. 그런데 나홍진의 <곡성>은 그 규칙들을 거의 지키지 않을 뿐더러, 그 속임의 세공은 (의도적으로) 허술하다. 이야기를 어떻게든 짜맞춰도 이야기가 된다는 것은, 역으로 이야기를 어떻게 짜맞춰도 서사의 빈공간이 생겨난다는 이야기도 된다. 그런데, 게다가 이 영화는 거기에 이 메시지마저 덧붙인다. "절대 현혹되지 마라."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8.

그 결과물이 바로 인터넷에 넘쳐나는 수많은 각종 해석들이다. 수많은 근거가 불확실한 해석들, 흔히 말하는 '스포'들로 넘쳐나는 이 영화에 대한 글들. (물론 내가 쓰는 이 글도 그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것이 재생산되는 방식은 영화의 초반부에 외지인에 대한, 혹은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이상한 소문들이 확대 재생산되는 방식을 닮았다. 무명은 이 모든 것이 종구의 의심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 말했다. 사실 '의심의 문제'에서, 결국 그것이 실제로 진실인가, 아닌가의 문제는 부차적이다. 중요한 것은 '의심'이라는 것이 만들어지는 방식, 그리고 그것이 재생산되고 소비되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수많은 글들은 그 의심들이 재생산되고 소비되는 방식을 닮았다. 영화 속 그들은 자신들이 보지 못한 것을 이야기했고, 그것을 어느 틈에 믿어버렸다. 마찬가지로 영화 밖의 우리들은 결코 우리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것이 어느 틈에 맞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영화 <곡성>은 우리가 그렇게 하도록 판을 짜 놓은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일광의 대사가 필요하지 않을까. "자네, 낚시할 때 뭐 어떤 게 걸려나올지 알고 하는가? 그놈은 낚시를 하는 거여. 뭣이 딸려나올진 지도 몰랐것제." 그런데 나홍진 감독은 뭣이 딸려나올지 몰랐을 것 같지는 않다.

 

9.

마술사들이 마술을 하기 전 종종 덧붙이는 말이 있다. "절대 속지 마시고, 눈을 크게 뜨고 보세요!"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바로 그렇게 말하는 제스처가 그 속임(현혹)의 일부라는 점이다. 우리가 그렇게 말하는 마술사의 입을 쳐다보는 순간, 혹은 그 소리에 눈을 더 크게 뜨려고 눈을 비비는 순간을 이용해서 마술사는 무엇인가를 감추거나, 뒤바꿔놓는다.

 

현혹되지 말라고 하면서, 온갖 현혹을 점철하고 있는 이 영화 <곡성>은 속지 말라고 하는 마술사의 그 외침을 닮았다. 우리가 눈을 더 크게 뜨려고 노력하는 순간, 이 영화는 무엇을 뒤바꾸고 있는 것일까.

 

 

덧.

사실 이 글에서 나도 한가지 낚시(?)를 했다. 위의 1은 예전에 <황해> 리뷰에서 썼던 문장들인데, 그대로 <곡성>으로 제목만 바꿨다. 이것은 나홍진의 영화가 전혀 발전하지 않았다는 반증이 아닐까. (이 대목에서 모두들 <곡성>에서 텅빈 냉장고 문을 열어보이며, 이것이 증거라고 말하는 장면을 연상해주길 바란다.) 이야기에서 결락을 만들고, 이야기를 괜히 비트는 것은 이미 <황해>에서부터 보던 방식이며, 예를 들어 영화의 시작부에 영화의 전체 내용을 암시하는 글을 삽입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바로 그 글.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며 유령이라고 생각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그린 마태복음의 한 대목. 원래 인간은 쉽게 현혹되고, 쉽게 미망에 사로잡히는 존재들이다. 그렇게 수련을 쌓은 제자들도 그런데, 우리 범인(凡人)들이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개인적으로는 현혹되지 말라고 하며 각종 현혹을 남발하는 영화보다는, 어쩔 수 없이 현혹될 수 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 그 인간에 대해 묵묵히 그려나가는 영화를 보고 싶다. 적어도 이 시점에서는.

 

 

   

 

- 2016년 5월, CGV 부천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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