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에 해당되는 글 335

  1. 2015.07.29 암살, 최동훈
  2. 2015.07.26 우리 각자의 놀이터
  3. 2015.06.30 기억의 힘 (3)
  4. 2015.06.24 그는 무엇을 보는가 (2)
  5. 2015.05.26 미래를 위한 시도
  6. 2015.05.22 재난의 윤리학 (2)
  7. 2015.04.25 그대로 소멸하지 않겠다는 것
  8. 2015.04.21 구원의 가능성
  9. 2015.04.16 이미테이션 게임, 모튼 틸덤
  10. 2015.03.30 3월에 본 영화들 (4)
 

암살, 최동훈

Ending Credit | 2015.07.29 13:28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내용이 일부 들어 있습니다.)

 

 

최동훈의 <암살>은 무리없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내는 영화다. 다만, 나는 (요즘의 한국 영화들에서 특히 보이는) 이런 공식에 들어맞는 듯한 전개, 혹은 뭔가 툭 걸리는 게 없는 무리없는 흐름이 좋은 것인가,라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지루함을 주는 부분도 없고, 마냥 뒤떨어진다 싶은 장면도 없다. 약간 울컥하게 만드는 장면도 있고, 다시 돌려보고 싶을 정도로 일종의 쾌감을 주는 장면들도 있다. 만약 이것이 다른 감독들의 영화였다면, 나는 상찬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건 최동훈의 영화가 아닌가. 이 정도에 만족해야할까.

 

단적으로 말해서 <암살>은 최동훈의 '놈놈놈'이다. 좋은 놈은 안옥윤(전지현)을 비롯한 독립군들, 나쁜 놈은 일본군의 밀정으로 돌아서는 염석진(이정재)이나, 친일파 강인국(이경영)과 같은 인물, 그리고 이상한 놈은 물론 하와이 피스톨(하정우)과 그의 조력자 영감(오달수)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김지운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과는 그 궤가 조금 다르다. <놈놈놈>은 그 제목이 이미 어느 정도 말해주듯이 그 캐릭터를 극단으로 몰아붙여서 장르적 쾌감을 얻고자 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놈놈놈>은 이미 제목에서부터 말을 건다. 자, 이제부터 내가 아주 좋은 놈과 아주 나쁜 놈과 아주 이상한 놈을 보여줄께. 너는 다른 거(그러니까 예를 들어 이 배경에서 연상되는 역사 같은 것) 생각하지 말고, 그냥 누가 끝까지 살아남아 이길 것인지 즐기기만 하면 돼,라고 말을 건네는 영화였다.

 

그런데 최동훈의 영화는, 아니 적어도 지금까지 최동훈이 만들어왔던 영화는 조금 다르다. 물론 최동훈의 영화는 캐릭터 중심의 영화다.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범죄의 재구성>의 인식이 강해서 그렇지, 최동훈이 이야기를 그다지 잘 만들었던 적은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영화 <타짜>도 이야기 자체가 깔끔하게 짜여져 있지는 않다. 이야기는 캐릭터에 치여 분절되며, 꽤나 산만하다. 최동훈은 이를 중화시키기 위해 두 가지의 장치를 거는데, 하나는 정마담(김혜수)의 회상(진술)이라는 이야기의 형식을 거는 것이고, 그것으로 모자라 챕터를 나눠 분절시켰다. (나는 <암살>도 이런 회상의 형식을 적극 활용하려는 줄 알았다. 영화 초반 염석진에 대해 진술하는 씬이 나왔을 때 말이다. 그런데 영화내내 이 장면은 거의 외따로 떨어진 듯 보이다가 거의 마지막에 가서야 의미가 생긴다.) 즉 이야기가 에피소드별로 분절되는 양상으로 영화는 흘러가지만, 그것이 그렇게 관객에게 이상한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 영화의 표면상의 목적은 이 에피소드들을 그러모아, 결국 고니(조승우)라는 캐릭터가 누구인지 그려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캐릭터를 그려내는 것. 최동훈의 이야기는 그것이었다. 가끔 최동훈은 캐릭터를 철저하게 그려내는 것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캐릭터만 잘 만들어내면 이야기는 저절로 따라온달까. <도둑들>은 그게 과했다. 영화 <도둑들>이 활력을 잃어버리는 것은 캐릭터에 대한 소개가 어느 정도 끝나고, 바로 실제의 도둑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캐릭터들을 구축하려는 노력이 너무 지나쳤던 나머지, 막상 실제의 도둑질은 거의 비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케이퍼 무비(caper movie)를 표방했는데, 이상하게도 영화에는 그 '케이퍼'가 없었다. 뭐 아무튼 간에.

 

 

최동훈은 이번에는 그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언뜻 보면 <도둑들>과 비슷한 구조를 가진다. 캐릭터들을 긁어 모아서, 그 캐릭터들이 어우러지는 하나의 결정적인 사건을 보여준다, <도둑들>에서 그것이 '도둑질'이라면 <암살>에서는 그것이 '암살'일 따름이다. 그런데 최동훈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여기에 무엇인가 다른 것을 넣고 싶어했다. 예를 들어 역사성이나 정서와 같은 그간 최동훈의 영화에서는 그렇게 어울리지 않았던 낱말들. 영화가 그 궤를 달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영화의 중반부 안옥윤을 둘러싼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부터다. 영화는 비장해지고, 웃음기는 없어진다. 그러니까 장르물(일종의 케이퍼 무비)인 척 하던 이야기는 이 때부터 드라마로 방향을 튼다. 뭐 좋다, 드라마든 장르물이든 형식이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다만, 아쉬운 것은 이렇게 방향을 급선회하는 도중에 최동훈의 장기가 잘 보이지 않게 된다는 점이다. 바로 그 펄떡펄떡 뛰노는 캐릭터들.

 

최동훈의 캐릭터는 사실 초반에 규정되는 법은 없다. 그의 첫번째 장편 <범죄의 재구성>에서부터 이러한 특징은 잘 드러나는데, 이야기가 중후반을 넘어설 때까지 사실 이야기를 정확히 종잡기 힘든 것은 그의 인물들을 선과 악의 경계로 잘 나눌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것은 <타짜>에서도 마찬가진데, <타짜>에서 아귀(김윤석)와 같은 인물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인물들의 경계는 흐릿하다. 예를 들어 평경장(백윤식)은 어떤가, 그는 고니를 망가뜨린 인물인가, 아니면 그에게 좋은 영향을 미쳤는가, 정마담은 어떨까, 그녀는 팜므파탈인가, 아니면 고니를 진정으로 사랑했던 순정녀였나. 물론 주인공 고니 역시 마찬가지이며,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영화는 결국 주인공 고니를 입체적으로 그려나가는 영화이기도 했다. 사실 어떻게 보면 <도둑들>이 지루했던 것은 그 도둑질이 비어있는 것에 그 까닭이 있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캐릭터들이 들인 시간에 비해 입체적으로 살아나지를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즉 악한 인물은 결국 끝까지 악했던 것 같으며, 선한 인물은 결국 끝까지 선인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암살> 역시 이 캐릭터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얘기하면 너무 잘 보여서 탈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영화는 거의 최동훈의 '놈놈놈'처럼 보인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좋은 놈은 끝까지 좋은 일을 완수하며, 나쁜 놈은 끝까지 악랄하고, 이상한 놈은 마지막까지 조금 이상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왜 그들이 그렇게 되었는지를 잘 모르겠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조금 이상해보이는 장면들이 있다. 염석진은 왜 밀정이 되었을까. 물론 영화에서 제시하는 해답은 있다. 눈앞에 당장 죽음의 공포가 몰아닥쳤을 때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영화는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이 질문은 질문 자체로는 그다지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이전에 꽤 시간을 들여 염석진의 죽음도 불사하지 않는 자세를 보여주려고 애쓴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런 것을 십여분이 넘게 구축한 다음, 단지 그 장면 하나로 이것이 설명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도리어 염석진이 마지막에 내놓은 답이 정답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즉 일본이 패망할 줄 몰랐다는 그의 대답.) 하와이 피스톨에게도 같은 것이 적용된다. 그는 왜 갑자기 좋은 놈의 편으로 돌아섰을까. 여러 이유들이 있을 수 있다. 그가 보았던 결정적인 장면 때문일 수도 있고, 안옥윤에 대한 연모의 감정 때문일 수도 있으며, 그가 가진 어떤 마음의 부채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그가 초반에 구축해 놓은 캐릭터, 그러니까 300달러만 주면 아무나 죽여주는 이상한 하와이 피스톨의 캐릭터를 넘기에는 어려워 보인다. 그리고 이 질문들은 다른 캐릭터들에게도 비슷하게 적용할 수 있다. 모호해보였던 속사포(조진웅)는 언제 그렇게 죽음도 불사하던 캐릭터가 되었나. 혹은 강인국(이경영)은 왜 그렇게도 악랄함의 끝에 있는 것과 같은 친일파가 되었을까.

 

물론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친일파가(그러니까 염석진이나 강인국이) 친일파 되는데에 이유가 있을까. 그저 나쁜 놈인 거지 뭐. 그런데 그것은 결국 그의 캐릭터를 비워 둔 채로 놓아겠다는 얘기이고, 그것은 그의 반대편에 있는 인물들에게 영화가 취하고자 했던(그러나 사실 실패한) 어떤 스탠스와 배치된다. 악인이 왜 악인이 되었는지를 묻는 것은 의인이 왜 의인이 되었는지를 묻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저 그가 태생이 나쁘기 때문에 악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의인이 태생이 의롭게 태어났기 때문에 의인이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영화의 어떤 태도와 모순되는데, 이 영화는 이 의인들을 기억해달라고 말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어떤 역사성을 부여하려 마지막까지 애쓰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억해달라는 것은 이들을 신화화된 영웅으로서 기억해달라는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신화화된 영웅들에게는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지점이 없기 때문이며, 그것은 결코 이 영화도 바라는 점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마지막이 보여주는 것은 보다 인간적인 형식으로서의 기억이 아닐까. 춤을 추고 싶었고, 사진으로 기록을 남기고 싶었던 평범한 사람들. 그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내고자 했던 것을 기억해달라는 것은 아닐까. 비록 그 기억을 요구하는 방식은 최동훈답지 않게 아주 촌스러웠지만 말이다. 다시 말해서 <명량>의 이상한 인터랙티브가 여기에서도 반복되며, 이것 역시도 어떤 퇴행의 증거처럼 보인다. 한마디 더 덧붙이자면, 이것은 염석진을 둘러싼 에필로그와도 연관이 된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 이런 방식의 영화적 카타르시스는 조금 위험해보인다. 그런 선택이 그들의 영웅성을 강화할 수는 있지만, 실제의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문제들은 외면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의 근원에는 결국 우리 손으로 온전히 이루어낸 해방이 아니라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고 - 실제로 영화 속의 환호와는 달리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고 있던 임시정부 쪽에서는 이 온전하지 못한 독립을 많이 아쉬워했다, 영화 속에 등장한 김원봉의 씁쓸함도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 이 영화에서 물론 그것을 강조하기에는 어려웠겠지만 이 선택이 아쉬워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까 사실 '역사성을 담아냈는가'라는 물음에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결국 이 영화도 최근의 한국영화들이 보여주는 어떤 모습들과 공유하는 지점이 있다. 각각의 장면들은 인상적이고, 웃음을 터뜨리게도 하며, 카메라워킹도 빈틈없이 구축되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리듬이 없다. 리듬은 모두들 알고 있듯이 5-4-3-2-1의 적절한 조화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4-4-4-4-4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5점 만점 중에 4점 짜리 장면들만 있는 영화들.(요즘에 가장 흔히 보는 영화평이 '차린 건 많은데, 먹을 것은 없다'는 평이다. 다들 먹방 좀 찍어봐서 알잖아요. 고기 반찬만 있다고 많이 먹게 되지는 않잖아요.) 툭툭 걸리는 장면이 없는 영화, 불협화음이 없는 영화. 이것이 최동훈의 영화라는 점에서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

 

 

 

 

- 2015년 7월, 메가박스 신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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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각자의 놀이터

The Book | 2015.07.26 23:12 | Posted by 맥거핀.

네메시스 - 10점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문학동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필립 로스의 <네메시스>는 작은 이야기이다,라고 첫문장을 쓰려다 멈칫 한다. 작은 이야기인가? 어떤 '규모'나 '배경'이라는 의미에서의 소품이라면 그렇다고 할 수도 있다. 찌는 듯한 더위의 놀이터, 폴리오(척수성 소아마비), 폴리오에 걸리는 아이들, 자신 때문에 아이들이 폴리오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놀이터 감독...기껏해야 한여름 미국 지방소도시의 어느 동네에서 일어난, 몇몇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작은 사건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사건이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달라지게했다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사실 모든 소설의 사건은 그 주인공에게는 결코 '작은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이 책임과 회피의 문제, 혹은 죄책감과 희생양의 문제, 혹은 신의 무한함과 그에 대비되는 인간의 원초적인 한계(또는 비극)와 관련된 문제라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을 결코 작은 이야기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책 뒤편의 뉴욕 타임스의 평에 '매우 잘 만들어진 오 헨리의 이야기 같다'라는 문장이 있는데, 나도 언뜻 오 헨리의 이야기들과 비슷한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 헨리의 이야기들은 대부분 작은 이야기인들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거의 모든 단편들은 인간 감정의 가장 원초적인 부분들로 세밀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단지 그 이야기로 그치지 않고 대부분 어떤 우화로서의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그리고 물론 우화가 우화로서의 기능을 하려면 그 이야기 자체에 읽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바로 필립 로스의 <네메시스>처럼 말이다.

 

<네메시스>의 공간이 있다. 첵 속의 표현을 빌리자면 '쇠로 만들어져 언제까지나 닳지 않을 듯한 눈에 띄게 또렷한 얼굴, 언제든지 의지할 수 있는 강인한 청년의 얼굴(p.20)'을 가진 버키 캔터가 감독하고 있던 동네의 놀이터. 모든 것이 불타오르는 듯한 폭염 속에서도 하루 온종일, 이닝에 이닝을 거듭하는 게임을 이어가는 소프트볼을 하는 아이들이 모여놀던 그 놀이터. 한쪽 구석에서는 여남은 명의 여자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며 줄넘기를 하고, 동네의 '얼간이' 호러스가 나타나, 놀던 아이들이 귀찮음에 못이겨 악수를 해줄 때까지 그 옆을 떠나지 않고 서 있던 그 놀이터. 그것은 아이들이 모여노는 작은 공간일 뿐이지만, 적어도 버키 캔터에게는 그 자신이 어떻게든 지켜내야 하는 공간이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문제가 관련되어 있다. 하나는 무엇으로부터 그것을 지켜내는가의 문제이다. 필립 로스는 이 '무엇으로부터'의 문제를 초반 흥미롭게 구성한다. 그들이 놀던 놀이터에 어느날 이탈리아 아이들 무리가 찾아온다. 그들의 목적은 단순히 그들에게 시비를 걸려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폴리오를 퍼뜨리는 것이 목적이라고 하면서 위협적인 자세로 침을 뱉는다. 버키 캔터는 놀이터의 감독관으로서 거의 혼자 힘으로 무리를 제어하고, 그들이 뱉은 침을 신속하게 물과 암모니아로 닦아내지만, 이상하게도 그 이후부터 폴리오는 놀이터의 아이들 사이에서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눈에 보이는 것, 즉 이탈리아 아이들이나 그들이 뱉은 침은 닦아내면 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폴리오 병균으로부터의 위협은 어떻게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다른 하나는 그가 '왜' 이 공간에 그렇게 큰 책임을 느끼는가의 문제이다. 캔터는 아이들 사이에 폴리오가 퍼지자, 큰 책임감을 느끼며, 죽은 아이들의 집을 찾아가거나 전화를 하기도 하고, 그들의 장례식장에 가며, 이 문제의 원인이 자신이 맡은 일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닥터 스타인버그나 다른 이들의 말대로 더운 여름날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뛰어논다고 해서, 폴리오가 그것으로부터 촉발된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탈리아 아이들이 다녀간 것도 물론 마찬가지다. (실제 놀이터가 원인이라면 그것을 임시폐쇄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지만, 당국은 물론 그러지 않는다.) 그것은 막연한 상상이나 두려움에 가깝고, 폴리오가 그 아이들에게 어떻게 침투하였는지는 오늘날 흔히 말하는 대로 광범위한 역학조사가 실시되지 않는 한 정확하게 밝혀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캔터의 어떤 책임감은 이러한 실제적인 문제(그러니까 놀이터가 폴리오의 온상이라는)와 조금 비껴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을 캔터 개인과 관련된 부분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것은 그가 어렸을 때 부모님을 잃고 책임감을 가지고 강해질 것을 요구하는 조부모 밑에서 자라난 것에 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고, 혹은 친구들과 함께 유럽과 태평양에서 벌어지고 있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싶어했지만, 건강한 신체를 가졌음에도 낮은 시력 때문에 참전하지 못하고 국내에 남아야 했던 그의 이력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여기에 필립 로스의 작가로서의 노회한 능력이 드러나는데, 다시 말해서 버키 캔터의 전쟁터는 친구들이 참전한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이 아니라, 여기 미국 뉴어크 위퀘이크의 작은 놀이터였고, 그의 적은 철모를 쓴 독일군이 아니라 폴리오였다. 이것을 필립 로스는 노련하게 교차하며 구성하는데(내가 이 소설을 영화화하는 영화감독이라면 당연하게도 교차 편집을 적극 활용할 것이다), 그가 소설의 초반에 맞서게 되는 것도 하필이면 '이탈리아' 이민자의 아이들이며, 그가 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에서 (본의아니게) 물러났다면 이 폴리오와 싸우는 전쟁에서는 자신의 의지로 물러나며, 전쟁에서 친구를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자신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소년(도널드 캐플로)을 잃고, 이 폴리오와 관련된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그러므로 필립 로스의 노회한 세공술에 의해 이 이야기는 단순히 폴리오가 퍼졌던 놀이터 이야기 이상의 것이 된다. 총알이 빗발치는 노르망디 해변과 폴리오가 퍼지는 놀이터, 혹은 그보다 작은 단계로서의 불볕의 더위가 몰아닥치는 폴리오가 퍼지는 놀이터와 상큼한 바람과 시원한 바람이 있는 캠프파이어. 이것은 어떤 단계이자, 혹은 비유(우화)의 공간이며, 소설을 읽는 누구에게나 존재할 수 있는, 다만 그 형태가 다른 공간이다. 우리들 각자에게도 자신만의 형태가 다른, 감독해야만 하는 놀이터와 그 책임을 벗어나고 도피하여 도착하고 싶은 꿈의 캠프파이어가 있다(노르망디 해변과 미국의 어느 소도시의 놀이터라고 단계를 바꿔도 마찬가지다).

 

여기에서 이야기는 다시 '무엇으로부터'의 책임인가,의 문제로 돌아가는데, 어떤 의미에서 폴리오는 독일군보다 더 위험하다. 왜냐하면 독일군 철모의 갈고리십자는 눈에 보이지만, 폴리오 바이러스의 갈고리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적일 때, 그것에 대항하는 가장 쉬운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치환하는 것이다. 폴리오를 퍼뜨리는 이탈리아 아이들, 그들의 침, 아이들이 즐겨먹던 핫도그, 더운 여름날의 놀이터, 병균을 가지고 돌아다니는 더러운 호러스. 혹은 조금 다른 형태도 있다. 예를 들어 하느님이라는 존재이거나 혹은 인디언 정신과 같은 것. 하느님이 폴리오를 만들어내고, 누군가의 기도에 응답하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불행을 내린다고 생각하는 캔터의 원망은 어떤 존재에게 책임을 돌린다는 점에서, 설혹 그 존재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앞의 치환들과 묘하게 닮아 있으며, 캠프파이어에서 이루어지는 기묘한 인디언 의식과도 연관된다(이 인디언 의식이 애국심을 고취하는 것으로 끝난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필립 로스의 어떤 비판이 스며들어 있다고 생각해도 될까. 인디언을 몰살한 미국인들이 그 애국심을 고취하기위해 인디언 의식을 활용한다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캔터의 방식이 있다. 외부가 아닌 내부로 방향을 트는 것.

 

버키 캔터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듯했던 이야기는 말미에 이르러 묘하게 방향을 튼다. 그의 이야기를 비판적으로 보는 또다른 화자가 등장하면서 말이다. 옮긴이의 말대로 이는 작가의 어떤 게임에 대한 제안으로 볼 수도 있다. 캔터의 시각을 지지할 것인가, 아니면 또다른 화자의 시각에 더 무게를 둘 것인가. 나는 필립 로스의 게임에 동참하는 대신, 이 제목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것으로 그 대답을 대신하고자 한다. 네메시스(Nemesis).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의 본분을 벗어난 발언과 행동에 대한 신의 노여움과 벌을 의인화한, 흔히 말하는 복수의 여신. 그러나 네메시스는 본래 복수의 여신이 아니었다. 네메시스는 원래 분배의 신이어서 공동체 사회에서 생산물을 사람들에게 고루 분배하던 선한 신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탐욕을 부려 불평등하게 나누게 되자 네메시스의 직분이 달라져 일한 만큼 분배받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재산을 가진 자들에게 복수를 가하는 신이 되었다는 것이다(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85196.html 글에서 재인용). 즉 네메시스를 복수의 여신으로 만든 것은 인간들이었고,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이는 희생양을 만들어낸 것도 인간들이었다. 지금 여기에도 네메시스를 복수의 여신으로 만드는 자들은 누구인가.

 

 

덧.

소설을 읽는 내내,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예를 들어 폴 토마스 앤더슨의 지극히 미국적인 영화 말이다. 필립 로스의 묘사는 거의 스크린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특히 지옥불이 쏟아지는 것 같은 위퀘이크의 묘사와 그에 대비되는 스트라우즈버그 캠프에 대한 초반 묘사는 인상적이며, 보지 않았음에도 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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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힘

The Book | 2015.06.30 14:24 | Posted by 맥거핀.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 1 - 6점
장미셸 게나시아 지음, 이세욱 옮김/문학동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장미셸 게나시아의 소설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은 성장소설의 외형을 지니고 있다. 많은 성장소설에서 담는 이야기들이 여기에서도 비슷하게, 때로는 약간 변형되어 등장한다. 어떻게 보면 약간은 전형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소년은 많은 성장소설의 주인공들이 그렇듯 여러가지를 조금씩 통과해 나가면서 어른이 된다. 때로는 다정한, 또 때로는 엄격한 부모들과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법을 배우고, 친구들과의 관계를 만드는 법을 알아나가며, 조금씩 잘하는 것과 잘하지 못하는 것을 깨우치고, 짝사랑과 동경의 경계에 서며, 예기치 못한 사랑을 만난다.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의 미셸은 그렇게 어른이 되어간다.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으로 상당히 달랐던 부모가 결국 이혼하게 되는 와중에도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고, 가까운 친구(니콜라)를 잃는 일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되었으며, 잘 하는 것(사진찍기)을 찾아나가고, 못하는 것(수학)을 넘어서는 방법을 알아 나갔다. 짝사랑이었는지, 어떤 우정이었는지 알 수 없었던 사람(세실)을 떠나보내는 법을 배웠으며(형의 여자친구를 만난다는 이 설정은 또 얼마나 전형적인가), 갑자기 찾아온 사랑(카미유)을 대하는 법을 알아나간다.

 

물론 이 소설에서 전형적인 것만 있다고 말하는 것은 조금 부당한 평가가 될지도 모른다. 이 소설에는 우연치 않게 미셸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는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이 있으니까. 게나시아의 이 소설은 크게 두 가지의 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하나는 앞에서 이야기한 미셸의 성장담이며, 다른 하나는 미셸이 관계를 맺어나가는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이라는 체스클럽 회원들의 이야기이다. 이 클럽의 회원들은 모두 일종의 망명자들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망명은 받아들여진 적이 없으므로, 일종의 디아스포라(diaspora)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피해 이곳, 프랑스로 도망쳐 왔다. 그 '무엇인가'는 조금씩 형태가 다르지만, 크게 뭉뚱그려서 말하자면 사회주의의 어떤 폭압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소련과 동유럽, 그리스 등지에서 온 그들은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라는 체제가 가한 육체적이고도 정신적인 말살의 위협에 피해 자유롭다고 믿었던 그곳, 프랑스로 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모두 비슷한 사고를 지니고 있다고 규정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 될 것이다. 책 속의 표현대로, 한편에는 고국을 그리워하지만 사회주의를 맹렬하게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다른 한편에는 그런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회주의자들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떤 의도에 의해서, 혹은 의도치 않게 미셸의 삶에 이런저런 조언들을 해나간다.

 

그러므로 그들을 어떤 의미에서는 이런 성장소설에 꼭 필요한 역할모델들, 혹은 (이 표현을 그다지 마음에 들어하지는 않겠지만) 일종의 멘토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장소설에서 이런 인물들은 필수불가결하다. 소년이 혼자서 성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소년들(그리고 물론 소녀들)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가까운 곳에서 그들의 성장을 지켜보며, 보이게 때로는 보이지 않게 이끌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성장소설들에서는 상당수 그것은 부모가 아닐 경우가 많은데, 많은 성장소설들에서 부모는 그대신 갈등을 일으키는 역할을 맡고 있으며, 외부의 누군가를 등장시키는 것이 이야기의 진행에는 더 간편하기 때문이다.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에서도 비슷한 양상인데, 미셸의 가까운 곳에서 그를 붙잡아 줄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존재들, 예를 들어 부모님들, 형 프랑크, 형의 친구이자 미셸의 친구이기도 한 피에르, 세실과 같은 인물들은 미셸의 성장을 이끈다기보다는 결국에는 그에게 어떤 문제를 안기는 입장에 더 가까우며(물론 그 과정에서 많은 성장하는 이들이 그렇듯 깨지면서 스스로 무엇인가를 배우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그의 곁에서 떠나가버린다. 물론 대신 그의 곁에 남아 있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그것을 미셸이 수없이 읽고 보는 책과 영화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미셸은 책과 영화를 사랑하는 소년이고, 책과 영화는 물론 멘토의 역할을 대신할 만큼 훌륭하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책과 영화가 단지 제목만 빈번하게 등장할 뿐, 그 내용은 그렇게 자세하게 다루어지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그의 곁에는 책과 영화보다 더 거짓말 같고, 더 극적인 이야기를 가진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의 회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는 책이 중반을 향해 가면서부터 점점 이야기를 교차하여 배열하기 시작한다. 미셸의 이야기와 회원들의 이야기. 그들의 이야기는 그들이 겪은 기구한 삶의 경험일 뿐만아니라, 삶의 여러문제에서 좌충우돌하는 미셸에게 들려주는 조언이기도 하며,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는 나같이 성장이 멀어보이는 어른들에게도 기꺼이 들려주는 작가의 조언이기도 할 것이다. 즉 그들이 겪은 삶의 진실들은 그들 자신에게 있어서는 가혹하지만, 그것을 듣는 우리에게는 어떤 교훈으로서 작용하기도 한다. 그 교훈들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의 삶은 모두 다르고, 각자 다른 의미에서 가혹했으며, 보다 더 사회적이나 정치적으로 그들의 이야기들을 말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그것을 뭉뚱그려서 기억의 진실, 혹은 기억의 힘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들의 이야기들은 모두 기억의 산물들이다. 모든 사람은 수많은 기억을 지니지만, 그들을 지탱시키는 것은 그 모든 수많은 기억이 아니고, 단지 몇 개에 불과한 작은 기억들이다. 일반 사람들도 그러할진대, 기억의 힘만으로 버티며 살아가야 하는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을 멀리하고 온, 이제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없다고 믿는 디아스포라들은 더 말할 것이 있을까. 그들은 몇 개의 기억으로 살아간다. 도망쳐 나오기 전에 어머니가 만들어주었던 누룩 없는 빵을 기억하고, 여자가 늘 타고 왔던 프랑스 우체국의 DC-3 쌍발 프로펠러기를 기억하며, 자신에게 찾아왔던 무대에서의 환희를 기억하며, 자신이 배신하고 떠나왔던 사람을 기억하고, 몇 개의 시덥잖은 사회주의 농담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되풀이해 이야기한다. 기억의 힘은 생각보다 강하다. 기억을 잃고 길에 부랑자처럼 버려졌다가 이고르를 만나 기적적으로 기억을 되찾으면서 새로운 기억을 보태고 삶을 되찾은 베르네르의 경우에도, 하다못해 단지 체스를 이기기 위해서도 기억은 필요하다. 수많은 명국의 기보를 외우는 것으로 말이다.

 

물론 그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사샤의 이야기이다. 그의 삶이야기 자체로도 그렇지만, 그가 소련을 떠나오기 전에 임했던 일로부터도 역설적으로 그것을 볼 수 있는데, 그가 했던 일은 당을 위해 사진을 조작하는 것이다. 사진이라는 것은 기억을 붙잡아두려는 시도이자, 우리가 무엇인가를 기억하기 위해 남기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을 조작하려 한다는 것은 기억을 조작하려는 시도이며, 반대로 우리는 누군가를 기억하기 위해 사진을 찍기도 한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사진은 기억의 보조자료일 뿐이지, 결코 기억 그 자체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사진을 조작할 수는 있어도, 사진에 찍힌 자나 사진을 찍은 자, 혹은 사진을 조작한자의 기억은 조작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기억한다. 자신이 지워버린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고, 지워버린 작가의 시를 통째로 기억한다. 미셸도 세실의 사진을 찍는 것으로 그녀를 남기려 하지만, 결국 그녀를 기억하는 것이 그녀를 남기는 방법임을 깨닫는다.

 

이 소설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은 남겨진 것들에 대해 자세히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프랑크가 어떻게 되었는지 끝내 알지 못하며, 미셸과 카미유가 결국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의 아버지가 결국 사업을 성공했는지, 어머니와의 관계는 회복되었는지, 체스클럽의 회원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세세하게 말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것이 이 소설이 취하고자 하는 어떤 태도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남아 있는 어떤 기억들이다. 누군가에 대한 기억이 존재하며 그것을 말하고자 한다는 것은 단순하게는 기억하는 그가 살아있다는 증거이면서, 동시에 다음 세대에게 그 기억과 그 기억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넘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두 개의 장례식은 의미심장하다. 이들의 장례식은 결국 이들을 잊지 않겠다, 기억하겠다는 다짐의 다른 형태일 것이기 때문이다.

 

 

덧.

다만 이 성장소설에 대한 (아마도 부당한) 궁얼거림을 여기에 남겨 놓는다. 사실 어떻게 보면 성장소설은 민감한 문제들을 눙치고 지나가기에 좋은 구조이다. 특히 그런 민감한 문제들이 어떤 사회문제일 때는 더욱 그러한데, 이 소설도 알제리 전쟁이라는 민감한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그 알제리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들은 이 이야기에서 꽤나 중요한 소재가 되기도 한다. 다만 그 소재로 빈번하게 등장하는 데에 비해 이 소설이 알제리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고 있다고 말하기에는 주저하게 되는데, 그것은 물론 이 소설이 성장소설임을 감안하여야 할 것임은 분명하다. 다시 말해서 미셸이 알제리 문제가 당시의 프랑스에 가져다주는 어떤 내적인 허위들을 감지해내기에는 너무 어렸던 것이다.

 

그러나 물론 동시에 하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결국 모든 성장소설은 성장하는 자가 아니라, 이미 성장한 자가 쓰는 것이라는 사실이다(그렇기 때문에 모든 성장소설의 주인공들은 어른 같은 말투와 짐짓 어른 같은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과연 이 소설이 사회주의의 어떤 폭압을 다루는 만큼 국내의 내적인 문제, 그러니까 알제리 전쟁이 가져다주는 문제들을 직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몇몇 꺼림칙한 부분들이 있다. 예를 들어 피에르나 프랑크 같은 청년들의 자원입대나 그들의 치기어린 사상과 그것이 깨어지는 방식에 대한 묘사, 혹은 프랑크의 도피를 이고르가 돕는 것에서 오는 어떤 순진한 시선(물론 이것은 미셸의 시선이므로 그렇기도 하다), 미셸 집안의 부유함에 대한 묘사 같은 것들(예를 들어 이 소설에는 미셸이 알제리에서 온 프랑스인들을 보는 불편함에 대한 묘사 같은 것이 있지만, 그것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단적으로 말해 알제리에 전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프랑스 국내인들도 알제리와 같은 식민지에서 오는 혜택을 같이 누렸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이 단지 미셸이 어머니에게 가지는 반감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너무 순진한 견해일 것이다)이 그렇다. 미셸이 어렸기 때문에 그가 이 문제를 정면으로 파고들 수 없으며, 그것을 세세하게 묘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일리가 있지만, 여전히 그것을 읽는 독자로서의 어떤 껄끄러움은 남아있다.     

 

아무튼 나는 이것으로봐도 낙천주의자가 되기는 틀렸다. 낙천주의적으로 봐야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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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5.07.05 17: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이란 책 제목을 처음 들었을때 혹시 무늬만 긍정인 추리소설인가? 그랬었어요. 그만큼 낙천주의자 라는 단어가 반어법적으로다가와서요.;; 저도 가끔 어려운 상황앞에서 에라 모르겠다 케세라 세라~ 그러기도 하지만 기본 태도는 낙천주의와는 거리가 있는편이라. 낙천주의자 클럽의 회원들이 동구권이나 소련을 떠나온 망명객들이라면 이 소설속에서의 낙천주의란 그들의 삶을 지탱해주는 먼 기억들도 포함이 되지 않을까싶어요. 그 기억들을 놓치지않고 평생 기억해가는것 말이죠. 기억으로 살아있다는건 현재진행형이고 그래서 조금은 낙천주의의 얼굴을 하고있는지고 모르겠어요. 기억의 내용과 상관없이요..

  2.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5.07.05 17: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인적으로 이세욱씨 번역을 좋아합니다. ^^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5.07.07 17: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읽는 재미가 있어요. 조금 익숙한 감은 있지만, 있는 이야기들을 적절하게 버무려 낼 줄 알고, 계속 다음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말씀하신 번역도 좋았어요. 개인적으로는 좋은 번역이란, 번역을 결국 의식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3D 영화는 결국 3D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게 하는 것처럼요.) 그런데, 예를 들어 이번에 본 <용감한 친구들> 같은 경우는 번역가 스스로가 소설가(한유주 씨)라서 그런지 몰라도 자꾸 번역이 전면에 나오려는 느낌이 들었어요. 즉 읽다보면 이게 줄리언 반스의 문장인지, 아니면 한유주의 문장인지 의심하게 된다는 거죠. 그런데 이세욱 씨 번역은 그런게 없어서 편했습니다. 노련한 번역가는 다른 걸까요.

그는 무엇을 보는가

The Book | 2015.06.24 14:04 | Posted by 맥거핀.

용감한 친구들 1 - 8점
줄리언 반스 지음, 한유주 옮김/다산책방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줄리언 반스의 소설 <용감한 친구들>의 원제는 '아서&조지'이다. 아서는 우리가 익히 아는 셜록 홈스의 창조자인 아서 코난 도일이고, 조지는 잘못된 판결로 피해를 본 인물로, 결국에는 이 사건으로 영국 사법 시스템에 상고법원이 생겨나게 만든 사람이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두 인물의 소개에서 대략 짐작할 수 있듯이) 아서가 조지를 도와, 그가 혐의를 벗고 보통 사람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사실 이 한줄로 마무리 짓기에는 충분치 않은 점들이 있다. 아서가 단지 선의에 의해 조지를 도왔다고 보기에는, 그 자신에게도 조지의 사건에 뛰어들어야할 어떤 이유가 있었으며, 조지가 그렇다고 그로 인해 완전히 혐의를 벗었다고 보기는 힘들며, 그 두 사람이 이 사건으로 인해 어떤 중요한 관계를 맺었다고 말하기에도 그다지 충분하지는 않다. 그보다는 소설의 원제, 그 자체에 더욱 충실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아서와 조지. 이 소설은 그 두 사람이라는 인물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이 초점을 두는 것은 조지가 누명을 쓰게 된 이 사건 자체나, 아서와 조지가 잘못된 판결을 뒤집어내는 쾌감이 아니다. 그보다 이 소설이 하고자 하는 것은 아서와 조지라는 이 인물의 모든 것을 천천히 차곡차곡 쌓아내 그려내는 것이다. 단지 분량으로 보았을 때도, 이 중요한 두 인물이 비로소 어떤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은 1권이 끝나고 2권이 시작되는 거의 중반부가 훨씬 넘어간 시점이다. 이 두 사람에게 있어서 그 자신의 삶에서의 큰 사건들은 이미 지나가버렸다. 조지는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사건에 휘말려 교도소에서 복역을 하고 풀려났으며, 아서는 작가로서 성공을 거두고, 아내 투이가 시한부의 삶을 선고받고, 또 훗날 두번째 부인이 된 진을 이미 만나 사랑에 빠진 상태이다. 아마도 그들의 삶에 있어서 이보다 큰 사건들은 앞으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아서와 조지가 만나게 되는 시점에 이미 결말이 시작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아서와 조지가 만나기 시작하는 3장의 제목은 '시작이 있는 결말'이다).

 

이로 인해 가지게 되는 효과는 무엇인가. 적어도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하나의 가정을 제외한다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조지가 범인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하나의 가정'이란 작가가 이를 의도적으로 숨기는 전략을 구사하는 경우이다. 다시 말해서 조지에 대해 가감없이 기술하고 있다고 독자를 믿게 하면서, 동시에 범인이 될 수 있는 단서를 의도적으로 숨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가사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과 비슷한 전략.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이야기는 미스테리를 추적하여, 반전을 만들어내는 것을 꾀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가정은 제외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만...)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미 줄리언 반스의 인도에 따라 그의 인생을 처음부터 봐왔기 때문에 그가 그런 짓을 저지를 인물이 아님을 안다. 이것은 사건 자체의 증거가 가진 허술함이나 그와 관련된 진술들의 빈약함을 보고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단지 그가 그런 짓을 저지를 만한 사람이 아니다, 라는 것을 조지라는 인물에 그 동안 차곡차곡 쌓아 놓은 묘사들과 일화들을 보고 알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아서가 조지를 만났을 때 그가 조지가 무죄라는 것을 '아는 것'과 어떤 의미에서는 비슷하다.

 

"아서 경, 제가...... 간단히 말해서...... 제가 무죄라고 생각하십니까?"

아서는 분명하고 또렷한 시선으로 조지를 내려다본다. "조지, 전 당신과 관련된 기사를 읽었고, 이제 당신을 만났습니다. 제 대답은 이렇습니다. 전 당신이 무죄라고 생각하거나 믿는 게 아닙니다. 전 당신이 무죄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조지로서는 아예 알지도 못하는 수많은 스포츠로 다져진 커다란 운동선수의 손을 내민다.

- 2권 p.30~31

 

물론 이는 독자가 그가 범인이 아님을 아는 것과 유사하지만, 완전히 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에 대한 세심한 기술을 읽은 것이 아니라, 기사를 읽고, 단지 그를 '보았을' 뿐이니까. (책에서도 어떤 힌트가 나오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이는 셜록 홈스의 추리법과 비슷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셜록 홈스의 추리법도 그런 것이었으니까. 홈스는 단지 몇 분의 보는 것, 그러니까 주의깊은 관찰로부터도 어떤 이가 범인이고, 범인이 아님을 밝혀내고는 했다. 다시 말해서 아서에게 있어서 보는 것과 아는 것은 비슷한 것이었다. 보게 되면 알 수 있다고 생각했고, 무엇인가 밝혀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최초의 기억, 그러니까 할머니의 죽음과 그녀의 죽은 몸을 지켜보았던 기억과도 연결이 된다.

 

그러나 사실 이 '보는 것으로 아는 것'은 분명히 어떤 허점이 있다. 예를 들어 그것은 아서가 심령학을 믿고, 그것에 큰 관심을 두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책에 기술된 아서라는 인물로 짐작해 볼 때) 아서가 그것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그것에서 무엇인가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런데 이것에는 허점이 없을까. 대다수의 사람은 설혹 영매가 죽은 사람과 소통하는 광경을 보아도, 바로 이를 믿는다, 혹은 안다,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그 이전에 구축된 어떤 다른 믿음들(이성적인 믿음이거나 혹은 종교적인 믿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서는 강한 자기확신으로 보는 것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고, 이는 그의 단점이자, 동시에 장점이었다. (그러니까 심령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 이전의 이성적인 믿음이나 종교적인 믿음이야 말로 '잘못된 선입견'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이 이야기에는 그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 즉 조지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사실 조지와 아서는 거의 반대편에 서 있는 인물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전형적인 잉글랜드인이자 작가로서 명성과 부를 쌓은 인물, 그리고 인도(파르시) 혼혈인으로서 단지 지방의 평범한 사무변호사라는 외적인 면에서 물론 그렇지만, 동시에 어떤 역설적인 측면에서도 그렇다. 아서는 보는 것을 중시하지만, 그 보는 것에서 생겨날 수밖에 없는 구멍은 그가 겪어온 다양한 삶의 경험과 선의에서 우러난 자기확실성이 메워준다. 반면 조지에게는 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가 보이는 것 이상의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알고 있었지만, 적어도 그 보이는 것에는 수많은 구멍이 있을 수밖에 없음 또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서와 같은 자기확신이 없었고, 보이는 것을 믿으려면 눈에 보이는 그것은 적어도 그 자체로서 논리적인 완결성을 갖추어야만 했다그래서 그는 법의 세계에 빠져든다. 그가 보기에 적어도 법은 일종의 논리적 완결성을 갖춘 체계이기 때문이다(물론 그가 그 법에 의해 삶이 망가지게 된다는 아이러니가 여기에 있기는 하지만). 다시 말해서 그들은 본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측면에서는 다르지만, 보는 것을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그 두 사람의 어떤 좋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보되 선입견을 가지고 보지 않는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아서는 보되, 그것에는 선입견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알고 있었고, 조지는 자신이 보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 보는 과정에는 주의가 따라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소설 속의 다른 인물들은 그렇지 못했다. 조지에게 부당한 혐의를 덮어 씌우는 켐벨 경위나 앤슨 지서장과 같은 인물은 조지의 외양과 가정환경을 토대로 선입견을 가졌으며, 이는 그들에게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어쩌면 이 소설에서는 이런 마무리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조지가, 아서가 죽은 후에 그를 불러내려는 심령추도회에 참석하게 되는 이 마무리 말이다. 즉 아서가 선입견을 가지지 않고 조지의 사건을 받아들였다면, 조지에게도 선입견을 가지지 않고 아서가 믿었던 것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했다.

 

'그는 무엇을 보는가? 그는 무엇을 보았는가? 그는 무엇을 볼 것인가?' 이 소설은 이 질문으로 끝난다. 이것은 조지가 '보는 것'에 대한 질문이면서 동시에 독자를 향해 던지는 줄리언 반스의 질문인지도 모른다. 당신은 이 소설을 통해 무엇을 보는가? 혹은 무엇을 보았는가? 혹은 무엇을 볼 것인가? (그러니까 사실은 이 소설 자체가 어떤 다른 전략을 쓰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당신은 과연 반스가 범인을 숨기는 전략을 쓰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어쩌면 조지가 범인은 아니었을까? 소설은 적어도 '명확하게는' 이를 밝혀놓지는 않는다...하지만 나는 아니라고 믿고 싶다. 그리고 법의 측면에서 보자면 적어도 그가 범인이라는 증거가 없는 한, 그는 무죄라고 추정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나는 반스가 만약 전략을 썼다면 그 전략은 '페어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으며, 그가 그러한 전략은 쓰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의 '페어함'을 믿으니까. 아..이거 선입견인가.) 

 

 

덧.

그리고 이 소설은 현재형의 문장에서 과거형의 문장들로 점점 옮아 온다. 1권에서는 거의 현재형의 문장들인데, 이는 2권에 이르러 점점 과거형의 문장, 그러니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소설에서 읽게되는 익숙한 문장들로 바뀐다. 이는 의도적인 것일까, 아닐까. 만약 의도적이라면 이는 과거형의 문장이 가지는 어떤 무게를 중화시키려는(그러니까 독자가 조지의 결백함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게 하려는, 다시 말해서 과거형은 어떤 것이 '확정적 사실'이라는 인식을 주니까) 의도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글쎄....내가 보기에는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이것이 어떤 명확한 구분이 있지는 않고 과거형과 현재형의 문장이 혼재된 부분도 있으니..(다만 비율로 보자면 2권에 와서 과거형의 문장이 주가 되기는 한다.) 개인적으로는 현재형의 문장들에 익숙하지가 않아서 초반에 진도를 빼는 데 어려움을 겪는 하나의 요소가 되기도 했다. 혹시 단지 번역상의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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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5.07.05 17: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작년여름에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재밌게 읽었는데한 번 책 펼치자 끝까지 달렸던 흔치 않았던 이야기였어요. 올여름엔 처음으로 e-book으로 소설읽기 도전해봐요! 모비딕 읽는 중인데 흥미롭고 재밌어요. (에이해브 선장이며 항해사들 퀴커드호 모두 다 ㅎ ㄷㄷ 합니다. )
    * 이제 7월이네요. 오랫만에 들어와 지난글들 폭풍 읽기를 하며 이런저런 생각들 .. 좋은 시간 보내고 있어요. :)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5.07.07 17: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는 솔직히 그렇게 강한 인상을 받지는 못한 소설이었습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여러모로 좋은 평이 많은 소설이니까요, 이보다는 훨씬 낫지 않을까 싶기는 한데..저도 처음에는 이북에 잘 적응을 못했는데, 읽다보니 적응도 되고, 나름의 장점도 있어요(특히 밤에 불꺼놓고 읽을 때 아주 좋아요).

      이제 서평단 거의 마무리니까요. 이제 다른 책도 좀 읽고, 영화를 보고 쓴 글도 남기고 해야하는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더운 날씨, 좋은 작품들 보면서 좋은 시간 보내세요.

미래를 위한 시도

The Book | 2015.05.26 16:04 | Posted by 맥거핀.

 

익사 (반양장) - 10점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문학동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바다 밑 조류가

소곤대며 그의 뼈를 주워올렸다. 떠오르다간 가라앉으면서

나이와 젊음의 계단들을 오르내리다

곧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갔다.

- T. S. 엘리엇, 후카세 모토히로 번역

 

코기를 산으로 올려보낼 준비도 하지 않고

강물결처럼 돌아오지 않네.

비 내리지 않는 계절의 도쿄에서,

노년기에서 유년기까지

거슬러오르며 돌이켜보네.

- p.28

 

두 편의 시가 있다. 작가 조코 코기토가 이른바 '익사 소설'을 준비하면서 떠올린 T. S. 엘리엇의 시와 조코 코기토와 그의 어머니가 같이 쓴 시. 이 시들은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 <익사>에서 계속 반복하여 등장하는 일종의 화두와 같은 시다. 이 시들은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 일단 표면적으로 엘리엇의 시와 코기토 모자가 쓴 시가 모두 다루는 것은 '익사'이다. '강물결처럼 돌아오지 않네'라는 시구는 조코의 어머니가 쓴 것인데, 이는 조코의 설명에 따르면 마을에서 통용되는 말로, 강에서 익사한 사람이나 살아났다 해도 한번 홍수에 떠내려갔던 사람들을 강물결이라고 지칭해 왔다. 그러나 연결되는 것은 이뿐만은 아니다. 이 두개의 익사는 모두 특이하다. 엘리엇의 익사자는 '떠오르다간 가라앉으면서 나이와 젊음의 계단들을 오르내리'고 있고, 코기토 모자의 익사자는 '강물결처럼 돌아오지 않'는 상태에서 '노년기부터 유년기까지 거슬러오르며 돌이켜보'고 있다. 즉 이들은 익사한 상태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오르내리고 있다. 그리고 결국에는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다.

 

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 이것은 이 소설의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과거에 있는 것은 익사와 '익사 소설'이다. 조코 코기토의 아버지는 익사했다. 홍수로 강이 불어난 날, 그는 어린 조코와 함께 '붉은 가죽 트렁크'를 싣고 강을 건너려고 하다가 조코를 돌려보내고 배가 뒤집혀 익사했다. 여기에는 어떤 미스테리가 있다. 그는 왜 어린 조코를 데리고 '붉은 가죽 트렁크'를 실은 채로 강을 건너려고 한 것일까. '익사 소설'은 그것의 의미를 밝혀내려고 이제 나이든 작가 조코가 쓰려고 하는 소설이며, 이 소설 <익사>는 결국 그 '익사 소설'이 소설이 아닌 다른 기이한 방식으로 완수되는 소설이기도 하다.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의 패전이 거의 확실해보이던 시기, 조코의 아버지는 일단의 군인들과 연루되어 있었고, 그 군인들은 이른바 '궐기', 그러니까 전쟁에 진 천황과 함께 폭사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농담이었고,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아버지는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성립시킨다. 그것이 바로 그의 익사이다. 물론 이 간단한 설명은 빈 군데가 많고, 그 '익사'는 여러가지로 달리 해석될 수 있다. 미망인이 된 조코의 어머니처럼 그것을 겁이나 도망치려다 죽은 것으로 볼 수도 있으며, 혹은 ('하나'님의 좋은 리뷰대로) 원령과 빙의자의 문제로 볼 수도 있으며, 결국 천황과의 폭사를 '다른 방식으로' 실행시킨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다른 방식'이란 무엇인가.  

 

여기에는 두 가지의 문제가 관련이 된다. 하나는 아버지가 읽었던 정치 교재로서의 프레이저가 쓴 <황금가지>와 그 속에 등장하는 '숲의 왕'의 신화. 숲의 오크 나무를 지키는 인간신(人間神)이 늙고 쇠약해져 생명력이 다하면 세계 또한 같이 멸망하기 때문에 그 인간신의 생명력이 쇠약해지는 징후가 보이면 강건한 후계자가 그 전에 그 인간신을 죽여 영혼을 옮겨받아, 세계의 쇠퇴와 파괴를 막는다는 이야기. 이를 어떤 정치적 텍스트로 읽으면, 당시의 군인들과 아버지가 벌이려던 일을 이에 연관지을 수 있다. 즉 전쟁의 패배가 불러오는 국가의 위기, 혹은 세계의 쇠퇴를 회피하기 위해서는 쇠퇴한 인간신, 즉 전쟁이 패배했음에도 죽지 않은 천황을 죽이고 새로운 후계자를 세워야만 한다고 믿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하나인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과 연관이 된다.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에서 '선생님'은 친구를 죽게 만든 죄책감을 가지고 자살하며 그 유서를 화자인 '나'라는 청년에게 남긴다. 그러나 이 죽음은 단순히 개인적인 이유라고 말할 수만은 없다. 거기에는 이것이 덧붙여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창 더운 여름날, 메이지 천황이 서거했습니다. 그때 나는 메이지 정신이 천황에서 시작해서 천황으로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장 강렬하게 메이지의 영향을 받은 우리가 그 후에도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시대에 뒤처지는 것이라는 느낌이 사무치게 나의 가슴을 파고 들었습니다. 나는 아내에게 솔직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아내는 웃으면서 상대하지 않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그럼 순사(殉死)라도 하지 그래요, 하면서 놀렸습니다. (......) 나는 아내를 향해, 만약 내가 순사를 한다면 메이지 정신을 따라 순사할 거라고 대답했습니다. - 나쓰메 소세키 <마음> 중에서, <익사> P.183~184에서 재인용"

 

다시 말해서, 아버지가 죽을 것을 알면서 불어난 강에 배를 띄운 것은 단지 농담에 그친 군인들과는 달리, 일종의 정치적인 시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소멸되려고 하는 일본 제국과 같이 순사하는 것이기도 하며, <마음>의 '선생님'과 통하는 것이기도 했다. 즉 아버지나 '선생님'은 당 시대의 시대정신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스스로 민감하게 느끼고 있었으며, 스스로를 소멸시키는 것으로, 당 시대의 소멸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새 시대를 이끌 강건한 후계자를 세우기 위한 시도였기도 했다. <마음>의 '선생님'은 청년에게 '기억해주세요. 나는 이런 식으로 살아왔습니다.'라고 말하며, 한편 아버지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다이오의 해석에 따르면 아버지가 코기를 배에 태운 순사 시도는, 단지 그의 죽음만이 아니라, 자신이 죽어도 자신의 후계자로 조코를 세우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원령과 빙의자의 문제와도 연관된다. 즉 <마음>의 청년이 원령을 이어받는 빙의자가 되어 후계자가 되는 것이라면, <익사>의 코기토는, 혹은 결국 익사를 시도하는 다이오는 아버지의 원령을 이어받는(혹은 이어받는 데에 결국 실패하는) 빙의자가 된다. 그리고 다시 이것은 더욱 거대한 시대정신과 연관이 되는데, 메이지 시대의 종언과 일본 제국의 소멸이 그것이다.

 

..........................................

 

그런데 여기에는 분명히 어떤 미심쩍음이 남는다. 원령과 빙의자라는 이 기이한 관계는 차치하더라도, 시대를 따라, 혹은 시대정신을 따라 순사한다는 어떤 극우적인 껄끄러움 말이다. 그것은 이런 물음으로 대체할 수 있는데, 이 새로운 빙의자들은, 즉 <마음>의 청년이나, <익사>의 조코 코기토나 다이오는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는가? 사실 다이오나 그의 스승, 즉 조코의 아버지는 모순되고 이중적인 인물이다. 조코의 아버지는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를 정치적 텍스트로 읽도록 권유받았지만, 그것의 문학적인 아름다움에도 어쩔 수 없이 이끌리는 인물이었으며, 천황과 같이 폭사하자는 계획에 동참했지만, 그 폭사를 위해서 마을의 오래된 숲을 훼손하는 것에는 격렬하게 반대하기도 했다. 그것은 '다이오'라는 인물도 마찬가지인데, 그 자신이 전쟁에서 한 팔을 잃은 희생자이지만, 극우적인 청년을 기르는 훈련도장을 이끌기도 하며, 또 동시에 새로운 시도를 하는 조코와 아사 등의 무리와도 관계를 맺고 그를 이해하려고 공부를 하기도 한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조코도 마찬가지인데, 그는 아버지의 익사를 비판적인 눈으로 보며, 그것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지만, 또한 동시에 군국주의적이고 극우적인 찬가에 눈물을 흘리거나 장애를 가진 아들에게 폭력적인 언사를 내뱉기도 하는 인물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시대를 비판하고 새로운 것을 열망하면서도 바로 그 시대가 가지는 폭력적인 요소들을 받아들이고 있는 모순적인 인물들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오에 겐자부로가 보기에) '전후 일본'이라는 세계의 반영이기도 했다. 전후 일본은 바로 그런 시기였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반성한다고 하고, 전쟁 이후의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겠다고 했지만, 실제로 아무 것도 반성된 것은 없고, 약한 자들에 대한 폭력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이는 책의 표현을 따르자면 일종의 붕괴의 지속이다. 엘리엇의 <황무지>의 한 구절 'These fragments I have shored against my ruins'를 조코는 지금까지 '이런 글 조각 하나로 나는 나의 붕괴를 지탱해왔다', 즉 붕괴되지 않도록 글 조각 하나에 의지하여 버텨왔다는 식으로 해석해왔다. 그러나 그 해석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조코는 깨닫는다. 사실 정확한 해석은 지금도 나는 붕괴 위기에 처해있고, 그 '붕괴라는 양상'이 '글 조각 하나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닐까, 라고 조코는 생각한다(아마도 그 붕괴를 막기 위해서 거대한 현기증은 그를 엄습하는 것일 터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이 일본의 '현재'이기도 하다. 다가올 붕괴를 막기 위해서 유지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붕괴되고 있었고, 바로 그 '붕괴 상태'가 유지되고 있는 상황. 즉 붕괴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지속되고 있다. 여자들은 강간당했으며(위안부 문제), 그리고 지금도 강간당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현재이다. 그렇다면 이 현재에는 희망이 없을까.

 

소설 속에는 그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있다. 바로 조코의 여동생 아사라든가, 그의 아내 치카시, 그의 딸 마키, 조코의 이 '익사 소설'을 연극으로 만들려고 하다가 알게 된 우나이코와 릿짱과 같은 여성들이 그들이다. 이들이 희망처럼 보이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라고 말할 수 있는데, 하나는 이들이 만들어내고자 하는 연극이다. 이들이 만들고자 하는 '죽은 개를 던지다' 방식의 연극은 일방통행적인 연극이 아니다. 그것은 관객을 실제로 연극의 주인공으로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는 방식의 일종의 토론극이며, 새로운 형식일 뿐더러 더욱 많은 지지를 얻은 쪽이 승리하는 민주적인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공동체와 어떤 특유의 소통방식이다. 이들은 소설 속에서 끊임없이 연극, 편지, 독백 등의 다양한 방식의 소통을 시도하며 새로운 방식의 공동체를 만들어나간다. 이들의 소통과 공동체 결성은 위의 남자들의 시도와 대비되는데, 예를 들어 원령과 빙의자라는 으스스하고도 폭력적인 시도는 논외로 하더라도, 소설 속에서 이 남성 중심의 관계들은 단절의 양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와 코기토는 익사라는 형식을 통해 단절되어 있으며, 코기토와 그의 장애를 가진 아들 아카리는 직접적인 소통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그리고 이러한 여성 공동체의 시도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영화 <'메이스케 어머니' 출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메이지 유신의 시대, 구체제의 '번'이 아닌, 새로운 국가의 '군'에서 파견된 군대에 대항하여 '메이스케 어머니'와 '환생한 메이스케'가 벌이는 여자와 아이들이 중심이 된 이 봉기(여기에도 다시 이 원령과 빙의자가 등장한다. '메이스케'와 '환생한 메이스케'). 이것은 이 아사, 우나이코, 릿짱, 마키, 치카시 등이 만들어내는 일종의 여성 공동체의 원형이며, 남성 중심의 부계 사회에 맞선 모계 사회로서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과거와 현재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다시 남성들에 의해 파괴되는데, 과거에서는 '메이스케 어머니'가 과거 '번'의 구세력들에 의해 강간당한다면, 현재에서는 우나이코가 큰아버지로 대표되는 구세력들에 의해 강간당한다. 다시 말해서 이는 이렇게 볼 수 있는데, 남성들은 시대정신이니 시대의 종언이니, 후계자를 세우느니 하며 법석을 떨었지만, 사실은 '번'이 '국가'로 바뀌거나, '쇼와'가 '헤이세이'로 바뀌었을 뿐, 실제로는 달라진 것이 없는 것이다. 남자들과 그들이 만든 국가는 여전히 강간하고 있고, 약자들(물론 이 약자들에 남성이지만 장애를 가진 '아카리'와 같은 인물들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은 여전히 피해를 당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을 새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부계사회가 모계사회로 바뀌는 정도는 되어야 새 시대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다시 반복되는 익사를 통해 다이오 혹은 조코의 아버지와 같은 모순적인 중간자적 인물(전쟁에서 패배했고, 반성한다고 말하지만, 그 반성은 행동으로 수행되지 않으며 과거의 향수에 어느 정도 사로잡혀 있는)은 시대에서 퇴장하지만(위에서 말했듯이 작가의 분신인 코기토도 그렇게 크게 다르다고 말할 수는 없으므로, 이것에는 결국 오에 겐자부로 자신과, 더욱 철저한 비판이 기반이 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지 못하고 있는 동시대인 모두를 향한 일종의 자기반성이 들어있을 것이다), 그 내용보다 이 소설 <익사>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새로운 여성 공동체를 구축하려는 시도에 대한 그치지 않는 묘사이며, 그러한 묘사를 표현하는 이 소설의 특유의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서사 중심의 소설이 아닌, 일종의 특이한 논픽션 형태로서의 소설 형식이기도 하고(예를 들어 자신의 예전 소설들을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작가의 이름을 조코 코기토라고 하는 식의 시도 말이다), 편지글이나 대화글을 어떤 설명 없이 연결짓는 낯선 시도이기도 하며, 소설과 연극, 영화 등의 적극적인 크로스를 그대로 글에 풀어놓는 방식이기도 하다. 즉 이 소설은 그 내용을 과거의 형식이 아닌 새로운 형식에 담아냄으로써 보다 미래지향적으로 보인다.

 

그것이 미래지향적이라는 것은 물론 이 소설이 새로운 세대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에도 그렇다. 그것은 우나이코 등이 만들어내는 연극이 중학생과 같이 자라나는 세대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그것에 계속 반대를 하고, 폭력을 가하는 인물들이 교육에 관계된 인물(예를 들어 우나이코의 큰아버지가 교육 행정에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라는 설정)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 소설의 1부의 제목은 '익사 소설'이며, 그 익사 소설은 결국 소설 속에서 쓰여지지 않는다. 그것은 이 '익사 소설'이라는 과거가 결국 다시 쓰여지지 않아야 함을, 그것은 코기토 세대의 종말로 인해 끝나야함을 상징한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 여자들이 우위에 서며 가능성이 모색되고(2부의 제목 '여자들이 우위에 서다'), 그것은 미래 세대를 위한 교육의 문제에 이른다. 그것은 우나이코의 강간이 다시 반복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미래 세대를 위한 교육은 중단될 수 없다. 그들은 과거와는 근본부터 다른 세계를, 붕괴가 지속되지 않는 세계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처음의 시로 돌아간다면 조코의 어머니는 조코에게 물었다. '코기를 산으로 올려보낼 준비'를 하지 않느냐고 말이다. 산으로 올라간다,는 것은 죽음을 대비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코기토가 죽은 이후의 세계에 대한 대비, 즉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들 아카리와 같은 약한 자들도 마음껏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내기 위한 준비를 해야하지 않겠는가,라는 의미도 될 것이다. 그 새로운 세계가 그런 세계일지 아무도 장담할 수는 없지만, 노작가는 적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든 하려고 하는 것 같다.

 

그것이 "그러고는 무성하게 우거진 풀숲에 고여 생긴 빗물 웅덩이에 얼굴을 담가, 선 채로 익사할 따름(p. 427)"이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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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의 윤리학

The Book | 2015.05.22 14:17 | Posted by 맥거핀.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10점
구병모 지음/문학과지성사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책의 표지가 인상적이다. 아무 무늬도 없는 노란 바탕을 세로로 가로지르고 있는 검은 틈. 그리고 그 검은 틈 사이에서 불길하게 삐져 나온 것처럼 다음의 열 글자가 그 틈새 옆에 자리잡고 있다.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오래 들여다보면 빨려들어갈 것 같은 검은 틈. 이 틈새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눈앞의 어둠은 아까보다 부피가 커져 있었다. 틈에서 벌레 떼처럼 기어 나온 어둠은 부분부분이 거의 동일한 명도였는데도 어딘가 주름이 잡힌 느낌을 주면서 원근감을 자아냈다. 어둠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 같았고 가장 깊은 암부에는 소실점이 있을 것만 같았다. 사라지는 지점이라니, 지금의 자신이 가장 원하는 자리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미온은 구멍에 손을 넣었다.

- p.94 <관통貫通> 중에서

 

이 틈새는 관통할 것을 유혹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어쩌면 소설이라는 것이야말로 그런 관통의 욕망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종종 소설을 통해 다른 세계를 엿본다. 소설의 지면에 있는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작은 틈은 점점 벌어져, 그 틈새로 들어오라고 우리를 유혹한다. 지금의 이 현실이 어떻든 그것은 상관이 없다. 아, 나는 좁은 지하철 속에서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얼마나 그 틈새를 은밀하게 들여다보았고 들어갈 것을 욕망했던가. 아마도 <관통>의 미온은 그 유혹을 이겨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처음에는 손을 밀어넣다가, 결국에는 그 틈새로 다리를 밀어넣고, 그 구멍을 통과했을 것이다. 그리고 구멍을 통과한 그녀는 날렵해지고 우아해진 몸매와 3분백 내지는 영희백이라고 불리는 자그마한 보스턴백과 태어나 처음보는 옥색 실크 블라우스와 천장이 높고 빛이 잘 드는 이층집 화실과 전도유망한 신인작가라를 타이틀을 얻었다. 그것은 '단순명료하며 속물적이고 몰개성적'이지만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는가, 그저 좋다. 그런데...구병모는 불안한 후기를 거기에 덧붙인다. 이편의 세계에 아직 놓여져 있는, 사업을 수차례 말아먹고 어딘가로 사라져 잘 연락도 되지 않는 남편과 난장판이 된 원룸, 악을 쓰고 있는 정신질환을 앓는 시누이, 미온이 유명한 화가가 되어 한몫 챙겨다주리라는 가망 없는 꿈을 믿었던 친정이라는 현실을 피해 미온이 끌고 나왔던 재활용쓰레기 장에서 주워온 낡은 유모차와 그 안의 울고 있는 아기, 그리고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이 내린 '무책임한 부모들이 술이나 인터넷 게임에 빠져 아이를 깜빡 잊어버린 부주의 소행 또는 정신 질환자에게서 나타나는 자아 망실 행위의 일환'이라는 진단. 이것들은 다 무엇인가. 이것을 무엇이라고 불러도 좋을까. 혹시 이것을 일종의 '재난'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가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우리를 들여다본다,라는 니체의 유명한 말을 이렇게 비틀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틈새를 들여다보면 틈새도 우리를 들여다본다. 틈이 생기면 어떻게든 들어가보려고 애쓰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이지만, 어찌 그 틈새에 좋은 것만, 그러니까 보스턴백이나 옥색 실크 블라우스와 이층집 화실같은 것만 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그래서 어린아이들은 틈만 나면 좁은 틈새로 기어들어가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그때마다 부모의 우악스러운 손에 잡혀 질질 끌려나오게 되는 것이다). 현실이 갈라진 틈새에서는 때로 이상한 재난이 몰아닥친다. 예를 들어 영화 <미스트>. 기분나쁜 짙은 안개가 순식간에 현실을 감쌌고, 그 안개 사이에서는 무시무시한 '그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기괴한 '그것들'은 다른 차원에서 왔다.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열어서는 안되는 틈을 열었고, 그 틈 사이로 '그것들'은 이쪽으로 건너왔다. 이상한 재난, 초현실적인 재난. 구병모의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의 단편들이 그리는 세계들도 이러한 초현실적인 재난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파르마코스>의 지독한 가뭄과 입에서 벌레를 내뿜는 여인이 불러오는 물, 혹은 <식우蝕雨>에서 모든 것을 부식시키는 강한 산성의 비, <이물異物>에서 다세대 주택 부엌에 나타난 이름모를 거대한 생물, 아니면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에서 보여지는 덩굴손 비슷한 무엇인가로 변하는 사람들. 그것들은 근원을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하고 불길한 거대한 재난의 형태이다. 아니, 어쩌면 이렇게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무엇인가만 재난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터였다. <이창裏窓>에서의 아이의 죽음이나, <어디까지를 묻다>에서의 카드사 콜센터에서의 일들, 혹은 위의 <관통>에서 미온이 겪는 일들도 일종의 재난이라고 부르면 안될 이유가 있을까. 그 일들은 보다 현실에 가깝게 발을 딛고는 있지만, 역시 근원을 알 수 없으며, 불가사의하기는 마찬가지다.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그들은 이유를 전혀 모른채로, 어느 틈에 그 재난의 한가운데에 놓여져 있다. 어찌할 줄을 모른채로.

 

그러나 영화 <미스트>가 단지 재난의 양상과 스펙타클을 그려내는 데에 그치지 않고 어떤 윤리적인 질문을 하려는 것처럼 보였던 것과 마찬가지로(그래서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의 '안개'를 홀로코스트의 '가스'와도 연결짓는 질문들이 있었다), 구병모의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은 그 재난 속에서 어떤 윤리를 묻는 것처럼 보인다. 그 윤리적 질문은 때로 노골적이기도 하고(<파르마코스>), 보다 은밀하기도 하며(<식우>), 때로는 관찰자의 시선에서(<덩굴손증후군의 내력>), 때로는 가해자의 시선(<이창>)이거나, 혹은 피해자의 시선(<어디까지를 묻다>)에서 이 재난 속에서 작동하는, 혹은 작동했었어야만 하는 윤리에 대해 묻는다. 그러나 그 질문은 불명확하며, 때로는 질문이 명확한 것처럼 보일 때에도 그 답을 내리기는 적어도 구병모의 소설들에서는 쉽지가 않다. 그래서 쉬운 길은 이야기 속에서 처음부터 배제되어 있고, 종종 인물들은 여러 중첩된 질문 속에서 갈 길도 없이 내버려진채 이야기는 갑자기 막을 내린다. 그러니 덩그러니 놓여진 우리들은 복잡한 마음들을 보다 쉬운 형태로 바꿔 하릴 없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이물>의 양선은 어떻게 되었을까, 같은 쉬운 형태로 바꾼, 질문만 있되, 답이 돌아오지 않는 질문들을.

 

방난이 데려온 게 아닌 이상 손대면 깨질 유리처럼 거리를 두어 대해야 할 까닭은 없으므로 긴장이 풀린 양선은 무심코 놈의 털을 쓸어 넘기고,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드러난 놈의 눈꺼풀이 꿈틀거리며 열리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그 눈동자는 평화로운 숙면을 방해하는 자를 확인하려는 듯 양선을 정확히 응시하더니

- p.210 <이물>의 마지막 문장

 

돌아오지 않는 답. 그것은 이 소설의 인물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구병모 특유의 만연체는 이 소설들과 묘하게 어울리는 면이 있는데, 이 소설 속의 인물들은 아무도 듣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무엇인가를 말하려 애쓰는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작품 전체가 긴 독백의 형태로 이루어진 <이창>이나 <파르마코스>, <어디까지를 묻다>와 같은 작품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소설 속의 인물들은 대체로 어떻게든 무엇인가를 최대한 말하려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이 이 재난 속에서 얼마나 윤리적인지를, 혹은 자신이 왜 이 재난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지를. 다시 말해서 그것은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이라는 단문으로 요약된다. 다시 영화 <미스트>로 돌아간다면 기도하는 말많은 자들이 결국 원했던 것은 '그것들'이 내가 아닌 다른 누구를 잡아가는 것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즉 이 재난들은 어떤 질문들을 하기 위해 마치 만들어진 공간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 <미스트>의 슈퍼마켓이라는 한정된 공간이 마치 다양한 인물군상을 몰아넣고 만든 인위적인 실험실처럼 보였던 것처럼, 구병모 소설의 재난들은 제한적인 기이한 형태로 몰아닥친다. <이물>의 생물은 거기 그 좁은 부엌에 그냥 웅크리고 있을 뿐이며, <식우>의 강산성비는 그 도시에서만 내리는 것처럼 보이고,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이나 <파르마코스>의 기이한 현상들도 한 도시 혹은 한 마을에서만 일어나는 제한적인 현상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이 좁은 도시 혹은 마을에 가해지는 일종의 징벌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모두가 자신의 입장만을 이야기하는 일방통행의 좁은 세상, 단지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원하는 세상에 내리는 (결국 반복될 수 밖에 없는) 징벌.

 

그러나 무엇인가 자신의 입장을 열심히 얘기하려 하는 이들을 비난만 할 수 있을까. 재난이 가장 먼저 집어삼키는 것은 늘 그랬듯이 가장 약한 자들이고(예를 들어 <식우>의 강한 산성 비가 먼저 부식시키는 것은 결국 약하고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약하고 궁지에 몰린 자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열심히 어필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그 반대로 강한 자들은 결코 무엇인가를 먼저 말하는 법이 없다. 늘 그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자들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말을 많이 한단 말인가). 소설이라는 것의 가능성도 어쩌면 그런 것은 아닐까. 소설은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자 애쓰는 이들의 것이고, 아무 이야기도 내뱉지 않는 것보다 적어도 무엇인가를 이야기해야만 어딘가에 가닿을 가능성이라도 생긴다. 그것은 예를 들어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의 U가 무심결에 덩굴손 줄기들에 손을 뻗어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자 애쓰는 것이며, <어디까지를 묻다>의 카드사 상담원이 예전 성우였던 택시기사를 알아보고 그에게 예전의 애니메이션에 나왔던 대사를 들려달라 청하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물>의 양선이 무심코 놈의 털을 쓸어 넘기고 그의 눈동자를 마주하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 이물은 결국 양선 자신이거나 혹은 방난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는 이 재난 속에서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을 말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는 약한 자들. 그것은 U와 덩굴손들, 그리고 카드사 상담원과 택시기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약한 자들은 약한 자들을 알아보는 수밖에 없으며, 닿지 않는다 생각해도 어떻게든 얘기를 하려고 애써 보는 수밖에 없다. 가득한 재난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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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5.07.05 17: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단편소설 한 편 한 편이 다 흥미롭고 궁금하네요. 읽고싶어요. 구병모는 어떤 디테일에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작가라는 느낌이 들어요. 말씀하신 만년체도 그 일부일것 같구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5.07.07 17: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읽는 재미도 있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지점들도 있어요. 작가가 여러모로 준비를 많이 하고 쓴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밀도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대로 소멸하지 않겠다는 것

The Book | 2015.04.25 15:22 | Posted by 맥거핀.

 

55세부터 헬로라이프 - 8점
무라카미 류 지음, 윤성원 옮김/북로드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이야기의 인물들은 무엇인가를 마신다. 혹은 마시려고 애쓴다. '결혼상담소'의 나카고메 시즈코는 홍차를,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 번'의 인도 시게오는 맛있는 물을, '캠핑카'의 토미히로 타로는 커피를, '펫로스'의 다카마키 요시코는 보이차를, '여행 도우미'의 시모후사 겐이치는 햇차를 마신다. 왜 이들은 이렇게 무엇인가를 마시는 것일까.

 

누구나 힘든 시기가 있다. 정신적으로 불안할 때 먼저 마실 것을 천천히 음미할 수 있다면 어떤 사람이라도 마음이 진정될 것이다. 그것은 의식 같은 것이며 그 누구에게도 의존할 필요가 없다. 텔레비전에서 자살 뉴스를 접할 때마다 얼마나 힘든 일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저 사람은 뭔가 좋아하는 음료를 천천히 마시면 마음이 진정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 '결혼상담소' p.58

 

"왜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 같은 데서 패닉이랄까, 너무 슬프거나 괴로워서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진 사람에게 심호흡을 하라고 하면서 물을 마시게 하잖아요.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는 차를 즐길 여유가 없지요. 저는 그래서 차라든지 음료는 단순히 수분을 공급하는 것을 넘어서서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슬픈 일이나 힘든 일이 있을 때 천천히 차를 마시면 도움이 많이 된다고 생각해요."

- '펫로스' p.247~248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마신다는 것은, 이들에게는 어렵고 힘든 시기를 버티게 해주는 것이다. 왜 어렵고 힘든가. 예를 들어 그것을 일본 경제와 맞물려서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50대 중반의 나이인 소설 속 인물들이 한창 활동하던 예전의 일본은 버블 경제의 시대였다. 호황이 이어졌고, 많은 이들에게 좋은 시절이었다. 그러나 버블은 꺼졌고, 이제 그 시절은 끝났다. '여행 도우미'의 시모후사 겐이치의 말을 빌리자면, "버블 붕괴 이후밖에 모르는 세대는 이처럼 혹독한 노동 환경을 당연하게 여길지도 모르지만, 고도성장과 버블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지옥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일본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제목에도 있는) 55세라는 나이는 그런 시기인지도 모른다. 직장과 사회에서는 이제 물러나야하지만, 자식들은 완전히 성장하지 않았고, 수입은 없지만 여기저기 돈 들어갈 일만 많이 남은 시기. 그것은 경제적인 문제 뿐만이 아니다. 가족 간의 대화는 점점 줄어들고, 배우자의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이 보이며, 자식들과의 대화는 점점 어려워지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이제 두렵기까지 하다. 한마디로 애매한 시기, 무엇인가를 이뤄냈다고 말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이제 무대 뒤편으로 물러날 것을 요청받는 시기. 그러나 무대 뒤 불꺼진 대기실에서의 삶은 아직도 너무나도 길게 남아있다.

 

이러한 경제적인 압박과 세대 일반으로서의 중압감은 이들에게 두 가지 이상(異常) 증세로 나타난다. 먼저 하나는 눈에 보이는 육체적인 혹은 정신적인 이상에 대한 묘사.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 번'의 인도 시게오에서 나타나는 만성적인 허리 통증, '캠핑카'의 토미히로에게서 나타나는 정신적인 불안증과 우울증, 혹은 '펫로스'의 다카마키 요시코의 급격한 현실감 상실. 이 이상 증세들은 현실의 문제들과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본인들도 정확한 이유를 모르며, 해결책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다른 하나의 이상 증세는 일종의 분노이다. 주인공들은 때로 화가 치밀어 오른다. '결혼상담소'의 나카고메 시즈코는 남편의 말투는 물론 숨소리까지 불쾌하게 여기고,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 번'의 인도 시게오는 자신도 모르게 길을 막고 있던 노숙자에게 호통을 치며, '캠핑카'의 토미히로는 인재 파견 회사의 콧수염을 기른 젊은 직원에게 알 수 없는 적의를 느낀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그러한 분노는 사실 그렇게 명확하게 표출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을, 감정을 쉽게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일본인의 특성과 연결지을 수도 있겠지만, 단순히 그것이 이유의 전부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것은 한편으로 그것이 특정 개인에 대한 분노가 아닌 이제 무대에서 퇴장할 것을 요청하는 사회 일반에 대한 분노에 더 가깝기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삶을 꾸려가는 데에만 열중하느라 분노를 포함한 모든 감정을 다루는 법을 인물들이 점점 잊어버리게 된 것에서 이유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분노는 격정적이고 뜨겁게 타오르는 분노가 아니다. 그보다는 일종의 마른 분노에 가깝다. 말라버린 감정의 끝자락에서 스멀스멀 피어나오는 알 수 없는 적의.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무엇인가를 마시는 것이 아닐까. 어떻게든 마르지 않게 하려는 몸부림의 하나로 말이다. 왜냐하면 모든 마른 것은 불타기 쉬우며, 불은 상대방을 태우기도 하지만, 그전에 결국 본인을 태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불안하다는 것은 한편으로 소멸에 대한 불안감이기도 하다. 아무 것도 이루어내지 못하고, 삶을 충분히 즐기지도 못했는데, 이대로 불타 소멸해버리고 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여기에는 배어있지 않을까. 이것을 이렇게 말할 수도 있는데, 결국 무엇인가를 마신다는 것은 모든 존재에게 있어서 어떻게든 삶을 연장시키겠다는 의지이다. 예를 들어 '펫로스'에서 다카마키 요시코가 기르는 늙은 개 보비가 심장 이상 증세로 죽어가면서도 어떻게든 먹이를 먹고, 물에 적신 스폰지에서 물을 빨아들이려고 애쓰는 것은 삶의 의지라는 것의 의미를 명료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다카마키 요시코와 그녀의 남편은 그것으로 예상치 못한 위안을 받는다. 어떻게든 살고자 애쓰는 그 존재로서의 고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말이다. 혹은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 번'의 인도 시게오가 죽어가면서도 인간으로서의 아주 최소한의 품위를 잃지 않으려 분투하는 후쿠다를 보고 결국 얻게되는 정신적인 도움 말이다. 55세는 그대로 소멸하기에는 너무도 이른 나이니 말이다. 그들 앞에는 아직도 긴 삶이 남아있다. 그것이 고통으로 남을지, 혹은 감사함으로 남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것이 어떤 가능성으로 남아 있음을 부인할 수도 없다.

 

오랜만에 무라카미 류의 소설을 읽었다. 내 기억에는 2000년에 처음 출간된 <공생충> 이후로 처음 읽는 것 같다. 다시 그의 책을 잡게 된 것은 오랜만이지만, 1990년대 말 책 좀 읽는다,하는 대학생들이라면 누구나 그랬던 것처럼 나도 류의 소설들은 나름 꽤 읽었다. 글쎄. 무엇이 그의 소설을 읽게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가 유려한 문장을 쓴다거나, 혹은 어떤 삶의 진실이나 통찰을 전달해준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 소설집 <55세부터 헬로라이프>의 이야기들은 그렇게 특별한 이야기라고 보기는 어렵다. 어떤 사람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누구나의 이야기이다. 책의 후기를 보면 아마도 그것이 류의 의도였던 것 같다. 보통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 체력도 약해지고, 경제적으로도 만전을 기하지 못하고, 그리고 이따금씩 노쇠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의 보통 이웃들, 혹은 현재와 미래의 나의 이야기. 다시 말해서 이 이야기들은 통속적이다. 사실 '통속적'이라는 말의 의미가 흔히 조금 다르게 받아들여진다는 느낌이 있는데, 예를 들어 소위 막장드라마들이 통속적이라고 말해질 때의 어떤 이질감말이다. 왜냐하면 그 막장드라마의 세계들은 사실 현실에서 거의 일어나지 않는, 우리가 가까이에서 거의 볼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세계는 통속적이라기보다는 판타지에 가깝다. 그러나 이 류의 이야기들은 현실에 아주 가깝게 발을 붙이고 있다는 의미에서 아주 통속적이다. 이것은 류의 어떤 변화라고 말할 수도 있겠는데, 예전의 그의 이야기들은 특정의 세계, 특정의 문화, 특정의 인물들을 다루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아주 통속적인 이야기로 돌아왔다. 그리고 진정한 통속적인 이야기가 그렇듯, 이 이야기 역시 마음을 예상치 못하게 건드릴 때가 많다. 그러니까, 통속적인 이야기를 볼 때의 민망함을 어떻게든 견뎌내야만 한다. 아이씨,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보면서 울고 있지.

 

아니 통속적인 이야기로 '돌아왔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는 내가 관심을 두지 않은 때에도 사실 무엇인가를 계속 쓰고 있었으니까. 책 날개의 지은이 약력을 보고 새삼스럽게 놀랐다. 무라카미 류. 1952년 일본 나가사키 현에서 태어났다. 그가 이렇게 나이들었었단 말인가. 그리고 책을 다 읽은 지금 다시 그 나이를 보면서 생각한다. 1952년생 작가가 쓴 55살 나이의 이야기를 내 나름대로 생각하고 지껄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나이의 어떤 것을 지금의 내가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니 이 리뷰의 끝은 이렇게 맺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모르겠다. 정말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겠다. (55세가 되었을 때 이 책을 다시 읽고 리뷰를 다시 쓸게요. 물론 당신이 다시 읽지는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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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가능성

The Book | 2015.04.21 16:39 | Posted by 맥거핀.

 

우리 동네 아이들 1 - 6점
나지브 마흐푸즈 지음, 배혜경 옮김/민음사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여러 해설이나 리뷰에서 이야기하는대로 나지브 마흐푸즈의 <우리 동네 아이들>은 알레고리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굳이 애를 써서 보려고 하지 않아도, 약간의 종교에 대한 배경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 즉 자발라위, 아드함과 이드리스, 까드리와 후맘, 자발, 리파아, 까심 등이 누구를 의미하고 있는지 읽어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다시 말해서 자발라위는 하느님을, 아드함과 이드리스는 아담과 사탄을, 까드리와 후맘은 카인과 아벨을, 자발은 모세를, 리파아는 예수를, 까심은 무함마드를 의미하며, 이 소설은 자발과 리파아와 까심의 행적을 묘사함으로써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각 기본바탕에 내재해 있는 것들을 알레고리 기법을 통해 각각의 이야기로서 들려준다. 그러므로 사실 이야기를 읽다보면 각 종교에 내재해 있는 어떤 물음들을 다시 반복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이 <우리 동네 이야기> 속 이야기대로라면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물음들이다. 자발라위는 왜 얼자 아드함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 장자 이드리스를 내쳤는가(하느님은 왜 악을 탄생시켰는가). 자발라위는 왜 형 까드리가 아니라 동생 후맘에게 나타났고, 후맘이 까드리에게 죽도록 내버려두었는가(우리는 왜 살인자 카인의 후예가 되었는가). 자발라위는 왜 리파아를 구원해주지 않았는가(왜 하느님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도록 구해주지 않았는가)...등등의 물음들. 물론 이 중의 가장 근본적인 물음은 책에서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반복되는 질문이자, 종교 그 자체에 내재해 있는 질문인지도 모른다. 왜 자발라위는 대저택에 은거하고만 있는가, 왜 그는 직접 나서서 재산이 모든 사람에게 분배되도록 하지 않는가, 왜 그는 모든 사람이 핍박받고 고통에 빠져 있을 때 그들을 구원하지 않는가,라는 질문. 다시 말해서 신이 있다면, 왜 그는 세상의 모든 고통을 직접 나서서 구원하지 않는 것일까,라는 종교를 가진 사람이든, 아니든 간에 누구든 한번쯤 생각하게 하는 물음.  

 

물론 이 물음은 세상의 누구라도 쉽게 답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그것은 이 알레고리를 그려내는 작가 마흐푸즈도 마찬가지다. 대신 마흐푸즈는 하나의 이야기를 이 알레고리에 덧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라파의 이야기이다. 책의 마지막에 붙은 아라파의 이야기는 이 책에서 유일하게 어떤 종교적인 알레고리를 벗어나는 부분으로 아마도 그것이 작가가 직접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이었을 것이다(그래서 사실 그전 까심의 이야기까지는 지루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이 부분부터는 이야기가 약간 활력을 되찾는 것처럼 보인다). 동네에 나타난 마법사 아라파가 자발라위의 비밀을 밝히려다 자발라위를 죽게 만들고(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아라파가 자발라위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의 하인을 실수로 죽여 그 충격으로 자발라위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퍼지는 설정이다. 즉 자발라위는 처음 아드함과 이드리스의 이야기에서는 직접적으로 묘사되지만, 그 이후에는 어디에서도 '직접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자발이나 리파아가 자발라위를 만나는 장면도 직접적으로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발이나 리파아 입을 통해서 이야기로서 전해질 뿐이다. 다시 말해서 (설정을 그렇게 한다고 해도) 아라파가 자발라위를 결과적으로 죽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이런 물음을 여기에서 덧씌울 수는 있다. 자발라위가 죽은 것인가, 자발라위가 죽었다고 믿는 것인가), 폭력을 휘두르던 수장들을 제거하지만, 그가 결국 폭력과 억압의 중심에 있던 관재인과 한패가 되고, 그런 자신에 환멸을 느끼고 도망치려다 죽게 된다는 이야기 말이다. 이것은 무슨 이야기일까.

 

물론 해설에서 이야기하는 바대로, 마법사 아라파를 '과학(이라는 이름의 이성)'이라는 것에 대입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라파가 마법사라는 상징은 물론이거니와(고도로 발달된 과학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 아서 클라크), 예를 들어 그가 '본의 아니게' 자발라위를 죽게 만든다는 설정도 그러하다. 즉 오랫동안 사람들을 지배했던 것이 자발이나 리파아나 까심의 이야기, 즉 종교라면, 그 이후 새롭게 등장한 것이 마법사 아라파, 즉 과학이며, 과학은 '본의 아니게' 종교가 가졌던 신비를 상당부분 사람들에게서 걷어내었다. 또 그와 동시에 마법사 아라파가 마법의 병을 통해 수장들을 제거한 것처럼, 과학은 폭력과 억압에서 벗어날 어떤 가능성을 또한 제공해 준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물론 흥미로운 것은 마흐푸즈가 이런 마법사 아라파를 결코 긍정적인 인물로 그리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위에 얘기한 대로 마법사 아라파는 모든 이를 억압하는 관재인 까드리의 시녀가 되었으며, 과학은 또한 동시에 거대한 억압과 폭력의 도구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세계를 휩쓴 두 차례의 전쟁이 그렇게 거대해진 것이 결코 과학기술의 발달과 무관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것을 (거칠게 말하자면) 과학이 약하게 만들었던 종교와 연관지어 말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마법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아라파도 결코 부인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이다("우리는 어차피 죽게 되어 있어요. 불로 죽든 물로 죽든 마귀에 의해 죽든 몽둥이에 맞아 죽든 말이죠."- 2권 p.214 "우리 모두 죽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죽은 이들의 자식입니다." -2권 p.332). 그리고 관재인은 자발라위가 죽고 동네가 그의 것이 되었는데도,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다. 즉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관재인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자발라위가 죽고난 후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종교의 근원을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하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종교가 탄생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하며, 이는 종교의 역할을 마흐푸즈가 결코 완전히 부정하지도, 부정할 수도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것은 아라파가 죽음의 과정에 이르는 과정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데, 아라파의 파멸은 결국 그의 오만, 즉 자발라위가 그를 죽게 만든 아라파를 흡족해하면서 죽었다는 착각, 혹은 죽은 자발라위를 다시 살려낼 수도 있다는 맹신에서 시작되었으며, 아라파는 결국 그로 인해 죽음에 이른다.

 

그러므로 내게는 이 결말이 마흐푸즈가 찾은 어떤 적절한 균형점처럼 보인다. 과학과 종교의 어떤 균형점 말이다. 반복되는 리벡 연주에 맞춘 자발과 리파아와 까심의 이야기가 핍박받고 억압받는 동네 사람들을 구원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하지만, 그렇다고 아라파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다(예를 들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자발라위는 죽었다고 믿어졌지만, 사실은 완전히 죽일 수도, 혹은 죽을 수도 없으며(아라파는 그를 죽일 의도가 없었으며, 그를 끝끝내 어떤 형태로든 되살리려 애썼다), 아라파는 산채로 매장당했다(아라파의 죽음은 모호하게 처리되는데, 이 묘사는 그를 결국 죽일 수 없음을 말해주는 것 아닐까). 다시 말해서 종교든 과학이든 나름의 역할이 있지만, 그것은 모든 이를 완전하게 구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구원의 가능성이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책에서 나를 흥미롭게 만들었던 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앞에서 이야기한 자발라위에 대한 묘사이고, 다른 하나는 이 책의 자발이나 리파아, 까심과 같은 종교적 선지지가 아닌 평범한 '우리 동네 사람들'에 대한 묘사이다. 작품 내내 이 '우리 동네 사람들'에 대한 묘사는 긍정적이지 않다. 일부 현명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들은 핍박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이긴 하지만, 탐욕적이고, 서로를 시기하고, 남자들은 싸움을 즐겨하며, 아이들과 여자들은 욕설과 조롱을 퍼붓고, 약한 자를 짓밟으며, 강한 자에게 금새 아첨한다. 그들은 핍박받고 억압받지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어떠한 방법도 모른채, 매일 해시시 담배를 물은 채로 반복되는 리벡 연주를 들으며, 선지자의 이야기, 그러나 현재는 그저 한낱 종교적인 신화가 되버린 그 이야기만을 들을 뿐이며, 미망에 빠져 망각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늘 반복되는 폭력을 불러온다. 그러나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한 가지 다행스러운 구원의 가능성은 이제는 사람들이 더 이상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는 사실이다("하지만 사람들은 이야기꾼의 거짓말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거나 경멸스러운 내색을 보였다" -2권, p.357). 그리고 아라파의 마법의 노트를 가진 하나슈는 해방의 날에 대비해 청년들에게 마법을 전수한다.

 

이 마법을 전수받는다는 것. 그것은 종교를 맹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과학을 맹신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마법을 전수받는다는 것은 마법을 부리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제어할 능력도 배우는 것일 터이니 말이다. 그것은 맹목적으로 숭배하지 않는 것이며, 아라파를 자발이나 리파아, 까심의 위치에 올려놓지 않는 것이다. 마흐푸즈는 가능성과 불안을 동시에 열어놓는다. 우리는 어느 쪽인가, 불안인가, 희망인가. 구원의 가능성은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자발라위의 살해범이라는 것은 가당치 않다고 생각했고, 어떤 사람들은 설사 그가 자발라위를 죽였어도 동네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사람들은 앞다투어 그를 추앙했고 드디어 각 구역마다 그를 자신들의 구역 출신이라고 주장했다. (중략)

동네는 다시 폭력 행위가 난무하고 증오와 공포가 팽배한 험악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인내하고 끈질기게 학대와 억압을 견디면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들은 억울한 일을 당할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밤이 지나면 낮이 되듯 불의는 반드시 사라져. 우리는 우리 동네에서 압제가 멸하고 기적과도 같은 날이 훤히 밝아 오는 것을 분명 보게 될 거야."

- 2권, p.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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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테이션 게임, 모튼 틸덤

Ending Credit | 2015.04.16 16:12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전체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튜링 테스트(Turing test)는 앨런 튜링의 모방 게임(imitation game)이라는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기계와 인간이 채팅을 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그러니까 사실 튜링 테스트와 모방 게임이 정확히 같은 것이라 할 수는 없다). 인간이 어떤 대상과 5분간 채팅을 하여 그 대상이 인간인지 기계인지를 판별하는 것이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은 전체 영화의 구조를 이 튜링 테스트와 비슷하게 만들어 놓고 있다. 영화의 시작부에서 우리는 앨런 튜링(베네딕트 컴버배치)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는 동성애 혐의로 경찰서에 소환되었으며, 형사에게 일종의 튜링 게임을 제안하는 중이다. 내가 하는 이야기를 주의깊게 들을 것, 그리고 다 들을 때까지 어떤 판단도 내리지 말 것. 그리고 그는 영화의 말미에서 형사에게 묻는다. 내가 기계인가, 인간인가. 혹은, 내가 전쟁영웅인가, 범죄자인가.

 

이렇게 앨런 튜링의 삶(전쟁영웅인가, 범죄자인가)과 그의 이론(기계인가, 인간인가)을 등치시키는 것처럼 영화는 전체적으로 앨런 튜링과 그의 이론을 교묘하게 등치시킨다. 예를 들어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의 키를 파악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앨런 튜링(물론 그가 농담에 가장 취약한 것은 농담에서는 표면적인 발화 내용보다 그 안에 담겨진 숨은 뜻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튜링이 군과 관계를 맺게 되는 것도 이와 묘하게 연결된다고 할 수 있는데, 군에서의 대화란 그 반대로 대부분 표면에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처럼, 독일의 암호해독기 이니그마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튜링의 크리스토퍼(영화 속에서는 튜링이 그가 사랑했던 친구의 이름을 따서 만든 것처럼 나오지만, 본래는 다른 이름이었다고 한다)는 이니그마가 암호를 생성해내는 키를 파악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다. 그리고 튜링이 그 돌파구를 친구 크리스토퍼에 대한 사랑에서 찾는 것처럼, 이 이니그마의 해독에 대한 실마리가 열리는 것은 한 독일군의 여자친구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다(영화 속 설정을 따른다면 말이다). 그것은 영화의 중후반부에서 다시 비슷한 등치의 형태로 반복되는데, 이는 일종의 진화 양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즉 독일 이니그마의 암호를 깬 영국 측에서 그 암호를 깼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면, 튜링은 위험에서 조안(키이라 나이틀리)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그 거짓말은 튜링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진화이다. 튜링은 예전에도 친구 크리스토퍼를 모른다고 거짓말을 한 적이 있지만, 그 거짓말은 누가 보더라도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이번의 거짓말에서는 조안의 스매싱을 끌어내는 데에는 성공한다. 다시 말해서 이 등치는 튜링의 진화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튜링이라는 유사기계의 진화를 말해주기도 한다. 거짓말을 하는 기계, 그럼으로써 마치 인간인 것처럼 믿게하는 기계. 그것이 튜링 테스트의 본질이 아니던가.

 

 

그런데 물론 여기에는 두 가지의 문제가 남아 있다. 하나는 그것이 어느 정도까지 가능할 것인가의 문제. 즉 기계의 사고는 거의 인간과 유사한 수준까지 올라설 수 있는가의 문제. 실제로 작년 유진 구스트만(Eugene Goostman)이라는 인공지능이 최초로 튜링 테스트를 통과했다고 떠들썩했지만, 그것이 실제로 통과한 것인지, 더 나아가 튜링 테스트를 인간과 기계의 구분을 시험하는 리트머스로 쓸 수 있는지에 대해서까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튜링 테스트의 대안들도 나오고 있다). 다시 영화로 돌아온다면, 영화에서 이 문제를 정확하게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말미에서 앨런 튜링의 남은 삶을 다루는 것을 통해 어떤 짐작을 할 수는 있다. 영화의 말미는 쓸쓸하다. 그것은 앨런 튜링의 남은 삶을 묘사하는 방식으로도 그렇고, 영화 마지막에 붙은 에필로그로도 그렇다(그들이 남은 모든 자료를 불태우는 것). 아니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그래서 앨런 튜링은 형사와의 튜링 테스트를 통과했는가? 그것은 결국 실패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는데, 형사가 그것을 자신이 판별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불길한 징조이다. 왜냐하면 튜링은 그 앞에서 인간으로서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의 튜링은 삶에서도 결국 인간들 사이에 섞이는 것을 실패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그 혐오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영화 속에서 어린 시절의 튜링은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아니 괴롭힘을 넘어서서 일종의 혐오의 형태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튜링은 그것을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똑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크리스토퍼는 그에게 말해준다. 그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이라고. 즉 인간은 많은 부분에서 '다른 것'을 혐오한다. 동성을 좋아하는 것말을 더듬는 것, 지나치게 탐욕스러운 것, 뛰어나게 똑똑하거나, 눈에 띄게 어리석은 것, 키가 너무 큰 것, 키가 너무 작은 것, 너무 뚱뚱한 것, 너무 마른 것 등등...셀 수도 없는 수많은 '정상분포에서 벗어난 것'들을 혐오한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인간이라는 같은 종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예를 들어 '돼지'에게 너무 뚱뚱하다고 욕할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그것은 그 역을 의미하기도 하지 않을까. 즉 '기계'라는 다른 종의 문제에서는 이것이 흥미롭게도 반대로 작용한다. 다시 말해서 기계가 너무 인간과 비슷해지면 어느 순간 우리는 혐오감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굳이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로봇이 사람과 비슷해지면 질수록 인간의 혐오감이 증가하다가 그것이 어느 순간 변곡점을 넘으면 다시 급격하게 그 혐오감이 줄어든다는 이론)와 같은 이론으로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간 수많은 영화에서 이 언캐니 밸리의 골짜기에 빠져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봐왔기 때문에 그것이 그렇게 낯설지는 않다(다만 이것이 '골짜기'의 형태라고 확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이렇게 인간과 거의 유사한 형태로까지 로봇의 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혐오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것은 다시 적어도 다른 두 가지를 나에게 생각하게 만드는데, 먼저 하나는 영화라는 매체에서 작용하는 언캐니이다.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는 일종의 이미테이션 게임, 혹은 튜링 테스트이다. 즉 영화는 현실을 모방하여 모든 환영을 작동시킨다. 환영은 그들이 실재한다고 계속 거짓말을 하며, 관객은 그 거짓말에 속아넘어간다. 아니 기꺼이 속아넘어감으로써 그 거짓말을 즐긴다. 즉 이 때 흥미로운 것은 관객은 이 거짓말에 동참하기는 하지만, 이것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튜링 테스트로 비유하자면 네가 기계인 것은 알지만, 그 채팅이 즐겁기 때문에 네가 인간이라고 믿어준다랄까. 그런데 지금까지 영화는 그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던 것 또한 사실이다. 무성에서 유성에서, 흑백에서 칼라로, 2D에서 3D로 혹은 더 나아가 4D로. 영화는 어떻게 든 현실이 되려고, 아니 기계는 어떻게든 인간이 되려고 애써왔다. 그렇다면 그것이 자꾸 현실이 되려고 발버둥칠 때 그 혐오감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다시 시간의 방향을 되돌리는 것, 혹은 기술적인 발전을 애써 무시하는 것이 그 해답이 될까.

 

다른 하나는 현실에 존재하는 혐오와 같은 것이다. 영화 속에서 형사는 튜링에게 묻는다. 기계도 생각을 합니까? 여기에 튜링의 대답이 흥미로운데, 그는 그것이 어리석은 질문이라고 형사에게 답한다. 기계는 인간처럼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기계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되묻는다. "그런데 어떤 것이 당신과 다르게 생각한다고 해서, 그것이 생각하지 않는다고 봐야할까요? 그것은 단지 다르게 생각하는 겁니다." 이는 기계와 인간의 경우지만, 그것은 영화에서 암시하듯이 인간들 사이의 혐오를 생각하게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 같은 것들. 어쩌면 우리의 만연한 혐오는 쉽고 달콤한 유혹에 굴복했기 때문이 아닐까. 사이코패스, 일베, 혹은 종북과 같은 것으로 낙인찍고 싶은 유혹들, 그것이 달콤한 이유는 그것은 너무나도 간편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저 제정신이 아닐 뿐이다,라는 낙인은 너무나도 간편하며 동시에 우리의 혐오의 욕구를 만족시켜 준다. 우리는 동일하게 여기에 튜링처럼 되물을 필요가 있다. 그들이 다르게 말하고 다르게 행동한다고 해서, 그들이 생각하지 않는다고 봐야할까. 그들은 단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더욱 시급한 것은 그들에 대한 혐오나 빠른 격리보다도, 그 다른 생각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려는 노력이 아닐까. 왜냐하면 혐오와 격리는 번질 수밖에 없는 속성이 있으며, 우리는 다른 모든 사람을 혐오하거나 다른 모든 사람을 격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늘 만연한 수많은 혐오스러운 말들을 보며, 그 속에 존재하는 나의 혐오와 당신의 혐오, 이중의 장벽을 뚫고 그 안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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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에 본 영화들

Ending Credit | 2015.03.30 12:53 | Posted by 맥거핀.

 

(<위플래쉬>, <꿈보다해몽>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3월이 지나가기 전에 3월에 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남겨놓고 싶다. 3월에 본 영화라고는 하지만, 사실 3월 중순 이전에 본 영화들이라, 기억에 남아있는 것들이 많지 않다. 영화를 본 직후에 무엇인가를 쓰는 것과 영화를 보고나서 일정 시간이 지난 후 무엇인가를 쓰는 것은 나름의 장단점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영화를 보고 나서 한참 있다가 무엇인가 기록에 남기는 것은 희미해지기는 하지만, 그것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은 그만큼 (나에게) 중요하게 받아들여졌다는 의미도 되겠지. 그것은 무엇일까.

 

 

먼저 <위플래쉬>. 이 영화는 음악을 보여주는 영화이지만, 나는 보는 내내 이 영화가 일종의 스포츠 영화를 연상시킨다고 생각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신체를 이용하여 정확한 동작을 해내는 것이 중요한, 그래서 예술과 스포츠의 경계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체조나 피겨스케이팅 같은 스포츠, 혹은 신체언어를 이용한 예술인 무용이나 발레와 같은 것 말이다. 즉 이 영화는 음악을 다루는 영화이기는 하지만, 음악을 영화에서 나타내는 방법이 예술가의 고뇌나 개인적인 일화, 혹은 그 '음악' 자체를 들려주는 것만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해서 음악도 일종의 신체 예술이라는 것. 예를 들어 체조에서 정확한 동작을 정확한 타이밍에 실수 없이 해내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드럼 연주에서도 정확한 위치를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한 강도로 타격하는 것이 중요하다(사실 드럼이 아니라 다른 악기라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양쪽 모두 그것을 지속시킬 체력과 근력, 즉 신체의 지탱이 필요하다.

 

그래서 <위플래쉬>의 촬영은 이런 신체를 이용하는 스포츠나 예술을 다루는 영화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예를 들어 이 영화가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블랙 스완> 같은 영화를 연상시킨다면, 그것은 내용상의 측면(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자)에서도 그러하지만, 한편으로는 촬영 같은 부분에서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다양한 클로즈업의 활용을 통해, 신체 그 자체의 움직임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점점 분열되어가는 니나(나탈리 포트만)에게 주목하게 만들었던 이런 타이트한 촬영은 이 영화 <위플래쉬>에서도 비슷하게 보여진다. <블랙 스완>에서 발끝이 지면과 충돌하면서 토슈즈에 배어나오는 피를 클로즈업하는 것이 관객에게 고통(이자 쾌감)을 전이시켰다면, <위플래쉬>에서는 손에 아무렇게나 칭칭감은 붕대에서 배어나오는 피를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는 것은 그의 고통(이자 쾌감)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즉 이 영화는 음악을 다루는 영화이지만, 이상하게도 음악을 자꾸 신체언어로 바꾸려드는 것 같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말하는 것과 같은 장면이 영화에는 있는데, 앤드류(마일즈 텔러)가 중요한 공연에서 결국 연주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어떤 연습의 부족이나, 정신적인 문제, 심한 긴장과 같은 문제가 아니라 말 그대로 그의 육체가 고장이 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는, 음악은 결국 몸으로 하는 것이라는 문제, 혹은 음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몸이라고 이상한 역설을 시도하는 것처럼 보인다(<씨네21> '김중혁의 바디무비'에서 왜 아직 이 영화를 다루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는데, 왜냐하면 음악을 다루기는 하지만, 그것은 지속적으로 음악에 대한 몰입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약간 비유를 섞어서 말하자면 음악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파동이 자꾸 눈에 보이는 땀, 피 혹은 악보의 음표로 치환되어 지속적인 피로감을 준달까. 다시 말해서 음악을 즐기러 갔는데, 고통을 체험하게 된달까.

 

그것은 이 영화가 한계를 넘으려는 자의 이면을 그리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그것은 다시 스포츠 영화의 화법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그간 많은 스포츠 영화들은 한계를 넘어서려는 자들을 즐겨 묘사하여 왔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일반적인 스포츠 경기를 보며 한계를 이미 넘어선 사람들의 전면에 있는 그 성취만을 주목했다면, 스포츠 영화들은 그 이면에 있는 한계를 넘기까지의 그들의 고통을 즐겨 그려오곤 했다. 앤드류가 한계를 넘어섰는가, 아닌가의 문제는 말많은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놓는다고 해도, 결국 이 영화는 앤드류가 그런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여정의 어느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는데, 물론 그것에서 교육에 대한 어떤 문제들을 생각해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사실 나처럼 교육학을 전공한 사람들의 상당수는 이 영화를 그다지 좋아할 수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영화는 수월성교육의 끝판왕이며, 수월성교육이라는 것을 평소에 찬성했던 교육학자들도 이와 같은 극단적인 수월성교육에는 그리 찬성표를 던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앤드류가 한계를 넘어서 버드, 즉 찰리 파커와 같은 뮤지션이 된다고 해도, 그 와중에 희생양이 되었던 다른 학생들의 인생, 즉 플렛처(J.K.시몬스)가 죽음에 이르게 했던 다른 제자의 삶과 같은 것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이를 '교육'이라는 것과 전혀 무관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플렛처는 실질적으로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영화 속에서 사실 플렛처가 유일하게 강조하는 것은 그저 '마이 템포'이다. 그리고 그는 학생이 그 템포에 맞출 때까지 계속 같은 것을 반복시킬 뿐이다. 학생은 그 템포가 어느 정도인지도 정확하게 모르고, 그것을 맞출 방법이 어떠한 것이 있는지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채, 그저 공포 속에서 같은 행위를 반복할 뿐이다. 소통의 단절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반복, 이를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앤드류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이를 플렛처에게 그대로 되돌려준다. 즉 지금까지 내가 당신의 템포에 맞추었으니, 이제 당신이 나의 템포에 맞추라는 것.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지점에서 둘은 은밀한 공명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서 적어도 그 공명은 음악에 대한 공명이 아닌, 어떤 방법론의 공명처럼 보인다. 일방적인 마이 템포로의 방법론. 다시 말해서 앤드류가 나중에 누군가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입장이 된다면 그는 플렛처 교수와 아주 비슷한 방법론을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아니 어쩌면 그는 플렛처에게 음악보다는 그런 방법론을 사실 배우고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앤드류는 자신이 싫어하는 과자도 타인을 위해 팝콘 속에 담아오는 것 정도는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후에 여자친구를 대하는 방식을 보면 그는 생활마저도 '마이 템포'로 하려든다. 그것이 교육학 석사를 다 마치지 못하고 때려친 나라도, 이 영화를 마음으로 좋아할 수 없었던 이유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서 있는 것과 같은 영화도 있다. 이광국의 <꿈보다 해몽>. 이 영화가 서 있는 것은 플렛처가 그토록 싫어했던 '굿잡'의 위치이며, <위플래쉬>에서 앤드류의 아버지의 방법론이다. 좌절하려고 하는 사람들, 혹은 힘들어하는 사람들에 보내는 따듯한 격려. '꿈'이라는 말에는 양가적인 속성이 있다. 그것은 실현될 수 없는 것, 허망한 것, 결국 닿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희망,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점, 혹은 희망을 가지려는 자세 그 자체를 말하기도 한다. <꿈보다 해몽>에서의 꿈은 전자보다는 후자에 훨씬 가까우며, 그것은 제목 그 자체가 한편으로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꿈의 무게는 현실보다 가벼울 수도, 무거울 수도 있다. 그러나 꿈은 그것이 현실보다 가볍다고 해서 무조건 들고 있을 수도, 혹은 현실보다 무겁다고 해서 무조건 내려놓을 수도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꿈을 받아들이는 자세, 즉 다른 말로는 해몽이다. 즉 누구나 현실과 꿈의 무게를 재지 않고, 그 꿈을 꿀 수 있는 자유, 그리고 그 꿈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유, 동시에 또 내려놓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이광국의 이야기 직조 방식과도 연관된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광국은 전작 <로맨스조>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도 이야기의 얼개를 이리저리 연결하는 방식, 이야기가 이야기를 불러오고, 현실과 꿈이 뒤섞이고, 처음의 실마리가 끝과 만나다가 다시 사라져버리곤 하는 기이한 연결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즉 일반적인 영화에서 관객은 어떤 이야기의 선을 잡고 영화를 보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광국의 영화에서는 그 선은 사라졌다가 종종 다시 나타나며, 그때마다 관객은 꿈에서 현실, 다시 현실에서 꿈으로 빠져든 듯한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된다. 즉 처음에는 꿈과 현실, 혹은 이야기와 현실의 경계가 명확해보였지만, 그 경계는 점점 사라지고 나중에는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경지에 이른다. 이 영화를 독해하는 방식은 그 얼킨 실타래를 어떻게든 찾아내 감독이 어딘가에 남겨둔 꿈과 현실의 경계를 찾아내는 것일까. 나는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보다 좋은 방식은 꿈과 현실을 굳이 나누려 들지 말고, 그 얼킨 실타래를 스스로 잘라붙여 이어보는 것이다. 우리가 이상한 꿈을 꾸고 난 후, 그 끊어진 꿈의 조각들을 스스로 이어붙여보는 것처럼 말이다. 즉 영화를 통해 꿈을 꾸었으니, 그 해몽은 스스로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쩌면 삶이란 이 영화에서처럼 늘 얼개가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며, 그것이 때로는 종종 더 나은 결과를 이끌어내기 때문이다(혹은 좋은 결과를 말해주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말해주는 것과 같은 장면이 이 영화에는 있는데, 꿈을 해몽해주는 형사(유준상)와 그의 누나(서영화)의 이야기 같은 것이 그것이다. 뇌출혈 같은 것으로 쓰러졌다가 회복해가는 누나를 형사는 돌보고 있는데, 누나는 쓰러지기 전에 달력에 동그라미 쳐둔 날짜가 무슨 날을 의미하는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형사는 누나가 여행가려고 정해둔 날이었나 보다는 식으로 눙치지만, 그 날은 사실 누나가 죽으려고 정해둔 어느 날이었다. 그러니 삶의 얼개가 더 잘 들어맞았더라면, 즉 누나가 뇌출혈로 쓰러지는 일 같은 것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더 나쁜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물론 더 좋은 일이 벌어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 얼개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삶을 한바탕 꿈이라고 한다면, 중요한 것은 그 꿈의 전개보다는 그 꿈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의 문제, 즉 해몽이다.

 

이광국의 영화에서는 이처럼 종종 마음을 건드리는 장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위에서 말한 형사가 사실 그날이 누나가 죽으려고 정해둔 날이었음을 몰래 알게 되는 장면, 혹은 전작 <로맨스조>에서 초희(이채은)가 우연히 촬영장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적힌 대본을 보는 장면 같은 것들 말이다. 영화 속의 인물들은 힘든 상황에 처해 있지만, 이야기를 통해 그들에게 따듯한 위로를 건네는 것과 같은 마법같은 장면들. 여러 사람들이 지적하였듯이 이광국의 영화에는 홍상수 영화의 인장들이 여럿 새겨져 있다. 꿈과 현실을 뒤섞는 것, 영화에 떠도는 죽음의 그림자, 인물의 이동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카메라(카메라는 좀처럼 인물을 따라가는 법이 없다. 한걸음 곁에서 묵묵히 지켜볼 뿐이다.), 그리고 빈번하게 등장하는 줌인과 줌아웃. 그러나 홍상수의 영화와 이광국의 영화는 약간 결이 다르다. 예를 들어 홍상수의 줌인이 주변의 인물을 프레임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라면, 이광국의 줌인은 보고자하는 인물을 더 가까이 끌어당기는 것이다. 홍상수는 카메라를 현실에 놓고 명계의 세계를 들여다보지만, 이광국은 카메라를 명계에 놓고, 현실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홍상수의 여인들은 겉으로는 연약해보이지만, 속은 누구보다도 강하고, 이광국의 여인들은 겉은 강해보이지만, 속은 누구보다도 여리다. 즉 이광국 영화의 그 결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훨씬 따듯하게 느껴진다.  

 

<씨네21>의 김지미 평론가는 994호에 실린 비평에서 이 영화가 전작의 동어반복이며, 너무 나이브한, 동화같은 순진한 이야기라고 평했다. 동화같은 순진함. 대체로 우리가 분노보다 위무에 더 박한 평가를 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 평은 조금 가혹해보인다. 김지미는 이 글의 부제를 '<꿈보다 해몽> 속 순진한 어른들이 도달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달았다. 그 현실은 <위플래쉬>와 같은 현실일 것이다. 오로지 최고만이 살아남는 세계. 그 최고가 되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계. 그것은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꿈보다 해몽>보다 <위플래시>가 더 각광 받고 있는현실(적어도 관객수라는 측면에서라면 말이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해보자. 어쩌면 이러한 현실에서 더욱 말할 수 없는 이야기는 최고가 아니라면 꿈은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보다는 아무도 보아주지 않아도 어떻게든 꿈을 가지려 노력하자는 이야기가 아닐까. 현실에 더 잘 맞춰주고 있는 것은 <꿈보다 해몽>보다는 <위플래쉬>인데, 그것을 나이브한 동화라고만 말해야만 할까. <위플래시>의 마무리는 개운치않은데, 그것은 내용보다도 그 싹둑 잘라버리는 영리한 쿨함이 보여주는 씁쓸한 뒷맛이다. 나는 그보다는 구질구질하고 시시콜콜한 그 <꿈보다 해몽>의 마무리에 더 손을 들어주고 싶다. 구질구질하지만, 그것이 나에게는 더 맛보고 싶은 맛이기 때문이다.     

 

 

 

 - 2015년 3월, 롯데시네마 영등포, 인디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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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5.04.19 17: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맥거핀님 리뷰를 읽으니 위플레쉬가 어떤 영화였는지.. 조금은 짐작이 가는게 반복과 연습만이 살길이라는 그런 비슷한 말이 떠올랐어요.영화속의 대사였는지 아니면 실제로 예전에 학교선생님에게 들었던것일지도 몰라요. 반복과 연습에서 연상되는건 상호 이해와 추리력을 배제하는 갑갑함, 단순하고 막막한 시간을 견디며 늘 충분치않으니 더 연습해야하는 고통의 시간이라는걸거예요. 그 한계를 넘어야 어떤 경지에 도달하고 성취할 수 있으니까. 악기를 다루려면 일단 내 몸이 연습기계가되야하니까. 비인간적이고 가혹한 연습과정은 하나의 방법론,혹은 체제가 되는것 같아요. 체제에 순종하느냐 안(못)하느냐의 문제인것 같기고하고요. 이 영화가 "수월성교육의 끝판왕"이라는 말씀도 그런의미에서 다가왔습니다.

    * 이 영화와 리뷰와 관련해서 생각나는 소설이 한 편 있어요. 니콜라이 그로츠니의 <분더킨트>. 1980년대 냉전시대, 불가리아 소피아 음악학교에 모인 음악영재들이 그 시대체제가 강요하는 수월성교육에 숨막혀하며 지내야했던.. 그런 이야기입니다.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5.04.20 16: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위의 리뷰에도 썼지만, 저는 그래서 이 영화가 그렇게 썩 마음에 와 닿지 않았어요. 영화의 테크닉이나 구성은 흥미롭습니다만, 그렇다고 이런 관점에 동의하기는 힘들어요. 영화가 마지막에 싹둑 끝내버리는 그 쿨함도 그런 의미에서, 조금 비겁한 끝맺음처럼 느껴지구요. 마치 어떤 모호한 중간자적 위치에 머무르는 것 같습니다만, 사실 영화 전체적으로 영화는 한가지의 관점을 지지하고 있기는 하죠. 그것을 교묘하게 봉합하는 것은 조금 비겁한 마무리라고 봤습니다.

      아..말씀하신 소설은 처음 들어요. 그런 소설이 있군요. 그러고보면 예전에 공산권 쪽에서 그런 식의 영재 교육들이 많았다고 하죠. (사실 공산주의라는 관점에서는 언뜻 그 반대일 것 같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인물들이 체제 선전에 활용되기도 했고..체제 선전에 활용된 그들은 개인적으로 행복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2.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5.04.19 18: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3월과 4월(지금까지)에 걸쳐 딱 2편의 영화를 봤어요. 실은 <위플레쉬>도 보고싶었는데 영화보러가던 날 좀 피곤해서 <엘리제궁의 요리사>를 골랐어요. 푸근하고 먹음직스런 프랑스가정식 비주얼때문에 ^^;
    그리고 또 한 편은 얼마전 중간중간 졸면서(그날도;;) 본 <리틀 포레스트 여름.가을>편. 영화가 재미없어서거나 지루해서는 정말 아니구요. 너무 평온하고 습기많은 일본농촌의 여름풍경들을 보니 저절로 숙면유도제효과가.. <리틀포레스트 겨을.봄>편도 보고싶어요. : )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5.04.20 16: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어떤 영화를 점찍고 보러가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다른 영화를 보게 된 경험이 참 허다하게 많습니다. 그래서 역으로 아주 좋은 영화를 건진 기억도 있구요. 말씀하신 일본 영화는 <씨네21>에서 말한 킨포크 계열(그런 용어를 쓰더군요)의 영화인 모양이군요. 느릿느릿, 슬로라이프, 힐링 뭐 그런 것. 저도 가끔 그런 영화가 보고 싶을 때가 있는데, 진짜 저도 보다가 졸까봐 못보겠어요.

      알라딘에서도 뵙고, 여기에서도 뵙네요. 저도 3-4월의 무비라이프가 그다지 신통치는 않습니다.(블로그에 리뷰 쓴 영화가 거진 다예요.) 5월에는 우리 모두 좋은 무비라이프 하자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