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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에 해당되는 글 339

  1. 2015.09.17 결여된 무엇인가가
  2. 2015.08.25 소수의견, 김성제
  3. 2015.08.13 베테랑, 류승완 4
  4. 2015.08.06 행복해지든 말든
  5. 2015.07.29 암살, 최동훈
  6. 2015.07.26 우리 각자의 놀이터
  7. 2015.06.30 기억의 힘 3
  8. 2015.06.24 그는 무엇을 보는가 2
  9. 2015.05.26 미래를 위한 시도
  10. 2015.05.22 재난의 윤리학 2
 

결여된 무엇인가가

The Book | 2015. 9. 17. 14:52 | Posted by 맥거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소설들이 있다. 남자가 투고한 <우주 알 이야기>. "원래부터 시간순으로 서술된 작품이 아님은 분명"한 "뒤로 갈수록 한 챕터의 길이가 길어지고, 소제목과 글 사이에는 어떤 패턴이 있는 것 같았는데, 그건 그냥 여자의 착각인지도" 모를 그런 소설. 아니면 남자가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쓴 소설 <그믐>. "학교 폭력 이야기"를 다룬, "화자가 하는 말이 그렇게 다 거짓말이었던 게 반전"인 소설. 이것은 거의 정확하게 장강명의 이 소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하 <그믐>)의 내용을 뭉뚱그려 말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이 소설의 어떤 전략을 말해주고 있기도 하다. 그 전략이란, 시간을 흩뜨린다, 어떤 패턴을 중첩한다, 트렌디한 소재(그러니까 학교 폭력)를 다룬다, 반전을 담는다,를 포괄한 것이면서 동시에 그것이 단순한 전략 이상의 것이 될 수 있도록 어떤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전략들이란 사실 너무 흔한 것이니까 말이다. 시간을 뒤섞는 것, 혹은 패턴을 중첩하는 것(그 패턴을 어떤 '복선'이라 불러도 좋으리라), 반전을 담는 것, 그런 것들은 이미 낡을대로 낡은 수법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소설 속 소설의 내용이라고 이렇게 서술한 것에는 다른 의미가 있을 터였다. 그 다른 의미에 담겨진 무엇이 있을까. 아니면 희미한 의심. 이것마저도 어쩌면 또 하나의 전략이 아닐까.

 

책의 말미를 보니, 이 다른 의미에 주목하는 평들이 있다. 평론가 강지영의 평. "이 소설은 SF의 외연을 끌어오고 있지만 이미 그 안에서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자문자답하고 있는 훌륭한 메타소설이기도 했다." 아니면 평론가 권희철의 평. "형식의 관점에서 볼 때 소설이 기억을 통해 시간의 문제를 다루는 물건이라는 점에서,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 여느 평범한 소설가 소설보다 훨씬 더 깊이 있게 소설이라는 물건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느꼈다." 이 두 개의 평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이 소설 <그믐>이 소설을 통해 '소설이라는 형식'을 살펴보는 일종의 메타소설이라는 점이다. 위에서 얘기한 대로, 소설 속의 소설이 등장하고, 그것이 겉 소설의 내용을 암시한다는 점에서의 비슷한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동시에 다른 설정에서도 이 소설 읽기(혹은 쓰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투고된 원고를 실수로 떨어뜨려 원고가 섞이는 것, 혹은 남자가 자신에게 들어온 '우주 알'에 대해 서술하는 부분 같은 것들 말이다. 남자는 과거를 볼 수 있게 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해주는 자신에게 들어온 '우주 알'에 대해 그것을 책을 읽는 것에 비유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원하는 속도로 읽으면 되는 거니까. 중간에 멈출 수도 있고, 어떤 페이지를 읽다가 다른 페이지로 건너뛸 수도 있고, 앞으로 돌아갈 수도 있어. 시간이란 게 책처럼 통째로 펼쳐져 있으니까." 혹은 "그렇게 책을 읽을 때마다 매번 페이지를 뒤섞고 다시 제본을 해서 읽는 거야."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여자가 종종 놀림 섞은 의문을 가지듯이 그가 모든 것에 대해 알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남자가 볼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을 미술관에 걸린 그림을 감상하는 것에 비유하여 설명하는데, 그는 입구부터 차례대로 그림을 감상할 수도 있고, 중간중간에 그림을 건너뛸 수도 있으며, 다시 되돌아가 특정의 그림을 감상할 수도 있으며, 출구부터 입구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미술관에 걸리지 않은 그림을 볼 수는 없다. 그것을 다시 책에 대한 비유로 돌아와서 생각해본다면, 그는, 그리고 동시에 모든 소설의 독자인 우리들은, 설혹 "책을 읽을 때마다 매번 페이지를 뒤섞고 다시 제본을 해서 읽"을 수는 있지만, 소설이 결국 서술하지 않은 장면을 읽을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소설에서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우리가 여러 책을 읽는다는 행위도 어떻게 보면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는 여러 책을 통해 과거와 미래의 사건, 혹은 동시대의 우리가 경험해보지 않은 사건을 간접적으로 체험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직 쓰여진 적이 없는 무엇인가에 대해 읽을 수는 없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 읽고 싶다면, 우리가 직접 상상하여 쓰는 수밖에 없다. 서술되지 않은 것, 혹은 섞여버린 원고 사이를 이으려면 우리가 우리의 상상을 거기에 첨부하여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결여된 무엇인가가 있다. 예를 들어 소설의 말미에 등장한 질문. 세 가지의 순서를 바꾼 단어들로 이루어진 질문. "도대체 너는 누구였어? 너는 도대체 누구였어? 너는 누구였어, 도대체?" 그것은 그의 작동 방식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남자는 자신의 안에 들어있는 우주 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여러 비유를 들어 설명했지만, 그 질문은 그것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존재가 과연 무엇인지, 그것의 기원과 존재의 이유에 대해 묻는 것이다. 그것을 다시 소설 읽기로 돌아온다면 이렇게 바꿀 수 있을 것이다. (페이지를 섞고 다시 제본을 하여 읽든, 쓰여지지 않은 것을 상상으로 첨부하여 읽든) 소설이란 무엇인가, 왜 소설을 읽으려고 하는가. 그것을 거창하게 말하기 보다는, 나는 이렇게 바꿔서 말하고 싶다. 도대체 너는 누구였어, 너는 도대체 누구였어, 너는 누구였어, 도대체,라는 중첩된 질문이 지시하는 바는 (미세한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결국 같다. 그것은 소설 속에서 시간을 흩뜨려 놓는 것과 비슷하다. 즉 소설 속에서 시간이 뒤섞인다고 해도, 거의 모든 독자들은 그것을 자신의 머리 속에서 재배열하여 자신의 소설 속 시간을 만든다. 그리고 끊어진 시간들을 자신의 상상이라는 풀로 이어붙여서 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다시 말해서, 단어를 뒤섞는 것이나 시간을 뒤섞는 것이나, 결국 하나의 테크닉이고, 그렇다고 해서(즉, 그 테크닉으로 가려놓았다고 해서) 근원적인 질문이 바뀌지는 않으며, 그 질문을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질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예를 들어 이 소설에서라면 이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남자는 여자에게, 그리고 동시에 독자를 향해 서술한다. "지금까지 내가 해온 모든 거짓말들은 다 잊더라도, 이 말만은 기억해줬으면 해. 널 만나서 정말 기뻤어. 너와의 시간은 내 인생 최고의 순간들이었어. 난 그걸 절대로 후회하지 않아. 고마워. 진심으로." 소설 속에서 '이 말만은 기억해줬으면 해', 혹은 '진심'이라는 낱말이 등장할 때에 동반하게 되는 어떤 머뭇거림이 아니더라도, 나는 이 말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 남자의 진심이란 무엇이었을까. 아니, 이 남자에게 이 여자는 어떤 의미였을까. 나는 사실 잘 모르겠다. 그것을 여자의 입을 빌려 묻고 싶다. 도대체 너는 누구였어? 그것은 남자 안에 작동하는 우주 알의 작동 방식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다. 그 우주 알이란 무엇인지, 혹은 그 우주 알이 들어간 남자라는 존재는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묻는 것이다. 그가 원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왜 우주 알은 그에게 들어갔는지, 소설의 말을 빌리자면 그의 '패턴'이 과연 무엇인지. 그에게 남은 패턴, 그리고 그 전에 그가 지워나간 패턴은 무엇이었는지.

 

"인간이란 건 결국 패턴이야." 소설은 말한다. 그렇다면 소설도 일종의 패턴일까. <그믐>에는 어떤 패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소설에 붙은 중간제목들의 패턴. '순서/보람/개성' '작두/홍콩/교지' '노선/모범/소금' ..... 언뜻 연관이 없어 보이는, 그러나 두 음절로 이루어진 어떤 패턴을 이루는 듯한 단어들. 이 소설 <그믐>도 그런 것과 비슷하다. 작은 패턴들은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 패턴들이 잘 붙지가 않는다. 각각의 디테일한 이야기들이 있다. 예를 들어 '홍콩', 홍콩에 살고 있는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동창의 이야기. 혹은 '모범', 모범택시를 모는 아버지와 그의 바람을 의심하는 어머니의 이야기. 이 각각의 이야기들은 디테일이 살아 있으며, 그 자체로 충분히 읽기의 즐거움을 주는 이야기거리가 된다. 그것을 작가의 능숙한 테크닉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들이 붙어서 만들어내는 무엇인가, 예를 들어 남자는 어떤 사람이고, 여자는 어떤 사람이며, 남자를 집요하게 쫓는 아주머니는 어떤 사람인가는 여전히 흐릿하다. 그것은 각각의 패턴들은 있지만, 그 패턴들을 엮는 고리, 그 고리의 만듦새가 헐겁기 때문이다. 디테일(혹은 패턴들)의 총합이 소설이 되지는 않는다. 각각의 장면들을 최대한 디테일하게 만든다고 해서 좋은 영화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디테일함들을 엮어내는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소설이라는 형식에는 필요하며, 그것은 이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이상의 무엇인가는 무엇인가, 무엇이 결여되었는가에 대해 답하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결국 소설을 왜 읽는가, 소설은 읽는 이에게 무엇을 전달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될 것이다. 다만 나는 도대체 너는 누구였어,라고 질문하며 애처롭게 남겨진 이 인물이 작가의 테크닉 실험의 희생양이 아닐까,하는 희미한 의심, 혹은 그것마저도 어떤 전략의 일부가 아닐까,라는 더 희미한 의심을 가져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한국이 싫어서>에서 계나의 "난 이제부터 진짜 행복해질거야"라는 진술에 섞인 어떤 의구심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한다. 이 <그믐>의 "진심으로"와 <한국이 싫어서>의 "진짜'가 말하고자 하는 무엇에 대하여. 

 

 

덧.

두 가지의 목적에서 이 리뷰를 썼다. 하나는 장강명 리뷰대회에 붙은 상금을 보고. 그런데, 결국 이런 내용이고 보면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리뷰인 것 같다. 아니 내가 출판사 직원이라도 이런 리뷰는 안 뽑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원고지 10매 이내라는 분량 제한도 무시하고 있으니....)

다른 하나는 지난 번 <한국이 싫어서>를 읽고 남긴 별 하나가 마음에 걸려서다. 소설 하나만 읽고 이 작가에 대해 너무 단정적으로 생각하고 말한 것은 아닐까. 어쩌면 다른 소설들은 이와는 전혀 다르지 않을까,싶어서 한 권쯤 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렇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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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견, 김성제

Ending Credit | 2015. 8. 25. 15:02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내용 및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영화 <소수의견>의 마지막 장면들은 상당히 흥미롭게 구성되어 있다. 재판부는 배심원단의 의견을 뒤집고 피고 박재호(이경영)에게 정당방위를 인정하지 않고, 특수공무집행방해치사죄를 적용한다. 그리고 퇴정하는 재판부와 결과에 분노하는 방청객의 모습을 교차하여 보여준 다음, 박재호의 얼굴을 비추고, 곧바로 이 사건의 키, 그러니까 지금까지 보여주지 않으려 애썼던 사건 당시의 바로 그 장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시 법정을 나서는 박재호로 돌아와 그가 (이유가 어찌되었건 결과적으로)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여준 다음, 교도소 안에서 복잡한 감정에 잠긴 박재호의 모습을 보여주고, 여기에 자식을 잃고 회한과 슬픔에 잠긴 (박재호에게 살해당한) 전경 김희택의 아버지(장광)의 모습을 비춰준다. 이 마지막 장면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 마지막 장면에서 두 아버지의 위치는 거의 비슷하다. 자식을 잃은 두 아버지, 서로가 가해자로 얽혀 있는 이상한 상황. 그러나 두 아버지는 (원망한다고 말하면서도) 서로를 원망하지 않는다. 김희택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박재호에게 말한다. 그것은 피치 못할 어떤 상황에서의 실수일 것이라고. 눈 앞에서 아들을 잃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이 마지막 장면들에서 이 두 아버지는 서로에 의해 아들을 잃었지만, 서로를 깊이 원망하는 대신에 묘한 연대(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의 지점에 와 있다. 그렇다면 그 연대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의 힌트는 아마도 그 장면들 사이에 이상하게 끼어든 것처럼 보이는 그 결정적 장면, 즉 사건 당시의 화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사건 당시의 장면이 서 있는 위치는 조금 이상하다. 이 장면 전후로 붙은 것은 박재호에 대한 클로즈업이다. 즉 보통의 영화문법에서라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 장면들이 박재호의 시점에서 본 회상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조금 이상해 보이는 것은 이 장면들이 박재호의 증언을 강화하거나 그의 입장을 강조해주려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미 사건의 상당 부분은 어떤 증언들이나 정황적인 증거, 혹은 검사 홍재덕(김의성)의 위증 강요가 밝혀짐으로서 드러난 상태이고, 배심원단에 의해 박재호의 정당방위가 인정된 상태이다. 물론 그 후에 재판부가 그 결정을 바로 뒤집기는 하지만, 그 장면 바로 후에 재판부의 굳은 얼굴로의 퇴장과 항의하고 분노하는 방청객들의 모습을 교차하여 보여주는 것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위치가 어디인지 대략 짐작하게 해준다. 그런데 이어져서 위치한 이 '사건 당시의 진실' 혹은 '박재호의 시점에서 본 사건의 진실'은 조금은 다른 인상을 심는 것처럼도 보인다. 사건의 어떤 팩트들, 그러니까 전경 김희택이 박재호의 아들 박신우를 죽이고, 다시 박재호가 전경 김희택을 죽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이것이 영화적으로 눈앞에서 재구성되었을 때 그것은 조금 달라 보인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어쩌면 이런 질문도 가능할지 모르겠다. 만약 이 장면을 재판부, 혹은 배심원단이 보고 판결을 내린다면, 그 때는 그에게 정당방위를 인정할 수 있을까. 어쩌면 뒤통수를 가격하는 장면을 느린 화면으로 보여주는 것은 그것이 정당방위라고 인정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실제라면 이것은 절대 볼 수 없는 장면이지만, 이 볼 수 없는 장면이 영화적으로 관객에게 심는 효과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는 있다. 이 장면만을 놓고 박재호의 무죄 여부를 판단한다면, 그에게 영화를 본 우리는 무죄를 선고할 수 있을까. 아마도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도리어 (팩트는 그대로이지만, 거기에 어떤 영화적인 효과를 심은) 이 장면은 박재호에 대한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다른 질문을 하기 위해 거기에 위치한 것처럼도 보인다. 예를 들어 이런 질문. 그들은 거기에서 왜 맞닥뜨리고 있는가. 이제 막 철거되려는 어둡고 침침한 성당 건물에서 그들은 왜 서로를 죽이기 위해 달려들었나. 그들을 거기에 몰아넣은 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을 거기에 몰아넣고, 이들 모두를 피해자로 만든 자, 다시 말해서 위에서 말한 묘한 연대의 반대편에 있는 자들, 즉 '국가'는 누구인가. 이들은 결국 피해자들만 남은 것처럼 보이는 이 재판에서 (보이지 않은) 승리한 자들이다. 영화 <소수의견>은 사실 두 가지의 재판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하나는 박재호가 정당방위인가 아닌가를 밝혀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에게 배상 책임을 묻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개의 재판에서 박재호와 김희택(의 부)은 모두 지면서 피해자의 위치에 머무르게 되었고, 오로지 국가만이 승리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하나의 다른 실제 사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흔히 용사 참사라고 불리는 그 사건. 경찰 1명과 철거민 5명이 죽음에 이르렀던 그 사건. 영화 <소수의견>은 "이 영화의 사건은 실화가 아니며 인물은 실존하지 않습니다"라는 단호한 자막으로 시작하지만(정치적인 논쟁에 휘말리는 것을 방지하고, 영화가 하나의 방향으로만 해석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필요한 조치였을 것이다. 그런데 웃긴 것은 그럼에도 이 영화는 만들어진 후 한참이 지나고서야 지각개봉했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는 분명 어떤 하나의 사건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그것은 철거민을 둘러싼 이야기를 다루었기 때문도 아니고, 영화를 둘러싼 어떤 이야기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청와대에서 이 사건 대신에 연쇄살인마를 다룬 사건을 더 강조하여 보도하라는 요청을 내려주는 장면 같은 것(실제 용산참사에서도 연쇄살인마 강호순 사건을 더 강조하여 보도해달라는 청와대의 요청이 있었다)들이 있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두 가지 면에서 그런 것처럼 보이는데, 먼저 하나는 실제 사건과 영화 속의 사건, 이 두 가지 사건 모두 위에서 말한 것처럼 결국 국가가 승리한 사건이라는 점이다. 김영진 평론가는 <씨네21> 지면을 통해 <소수의견>을 다루며, 이 영화가 박재호와 김희택의 아버지를 희생자의 자리에 위치시키면서, 그들이 희생자의 자리에서 자존을 회복하지 못하게 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러나 그랬을지 몰라도, 이 장면들은 분명히 어떤 분노를 보는 이에게 불러 오는데, 실제의 사건에서도 모두가 피해자였을 뿐, 승리자는 국가였고, 그들의 하수인이었다. 살기 위해서 용산 남일당 건물 옥상에 올라간 철거민들은 물론, 거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두 개의 문이 있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영화<두 개의 문>), 무리한 진압 작전에 투입된 전경 및 경찰들도 피해자다. 이들을 그 옥상에서 맞닥뜨리게 한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푸른집에서 나와 그분이 자서전을 쓰시는 동안, 또 당시 서울지방경찰청장으로 진압 작전을 지휘한 김석기 씨가 총선에 출마하고 한국공항공사 사장으로 가는 동안, 철거민들은 희생자의 위치에서 자존감이 억눌린 채 살아야만 했다. 영화를 보는 이들의 카타르시스는 이들이 희생자의 위치에서 벗어나 자존을 회복하는 것으로 충족될 지 몰라도, 실제의 어떤 것을 상기시키는 데 이는 때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도 한다.   

 

다른 하나는 이 영화가 장면을 소구하는 방식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영화는 사건의 진실을 둘러싼 결정적인 장면의 공개를 최대한 늦춘다. 마치 최대한 보여주지 않으려 애쓰는 것처럼도 보인다. 물론 사건의 진실이 영화의 키가 되는 법정영화에서 흔하지 않은 방식은 아니다. 그러나 사실 이 영화 <소수의견>은 어떤 사실관계를 법정에서 추리하면서 밝혀내, 그로인해 어떤 영화적 쾌감을 얻고자 하는 종류의 영화는 아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어떤 정황적 증거는 법정을 통해 거의 밝혀졌으므로 이 장면의 공개로 사실이 뒤집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보기에 이 장면은 어떤 희생자의 정서를 두 사람에게 덧붙이는 것 외에도 (본의 아니게) 어떤 다른 것을 연상시키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그것은 이 장면의 공개가 이렇게 최대한 지연된 후 드러남으로써 실제의 사건, 즉 용산참사에서의 그 공백을 다시 생각케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영화 <두 개의 문>에서도 잘 드러났듯이) 이 사건의 중요한 부분은 여전히 공백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3천 쪽에 달하는 초동수사 기록과 경찰이 촬영되지 않았다고 주장한, 존재하지 않는 'No Signal'의 채증 영상. 그 곳에서는 사람이 불타 죽었지만, 그들이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 아무런 증거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니 공개되지 않았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 공백을 앞에 두고, 오로지 철거민들에게만 책임을 물었다.

 

다시 영화로 돌아온다면 우리는 마찬가지를 영화에 물을 수 있다. 영화의 막바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영화 속 재판부나 혹은 윤진원 변호사(윤계상)의 위치에 비슷하게 서 있다. 우리는 정황적인 증거를 보고 있지만, 사실 중요한 지점은 여전히 공백에 놓여져 있다. 우리는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가. 박재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물을 수 있다면 그에게만 책임을 물을 것인가. 그러나 실제의 재판부는 영화 속 재판부와 같이 그에게만 책임을 물었고, 그들만 피해자이자 희생자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 결정적 장면을 결국 영화 속에서 공개하지 않고 끝내는 것도 가능한, 어쩌면 더 훌륭한 선택이 되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의 설정대로라면 이 장면은 결국 우리가 볼 수 없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볼 수 없는 것을 영화가 보여줄 때 생기는 쾌감, 혹은 정서와 그와 동시에 발생하는 어떤 미심쩍음. 그것은 늘 비슷한 무게이지만, 그 미심쩍음이 종종 더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것은 이 영화에서도 그렇다.)

 

이 바깥에, 그러니까 박재호나 김희택의 부 외곽에 존재하는 인물들이 있다. 아마 우리들 대다수도 그에 해당할 것이다. 영화는 두 가지의 인물상을 보여준다. 하나는 경직되어 마치 어떤 부품처럼 존재하는 사람들. 국가의 대리인으로 나온 자들, 그들은 마치 어떤 기계의 일부처럼 보인다. 그들이 보여주는 차갑고 기계적인 행동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의 미소(특히 여검사가 보여주는)도 마치 로봇이 보여주는 그것같아 섬뜩하다. 그것을 홍재덕 검사는 영화 끄트머리에서 요약하여 말해주는데, 그것은 자신이 국가라는 거대한 기계의 부품임을 재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즉 그 '넌 뭘했냐'는 그 물음은 네가 부품으로서 뭘했냐,는 질문인 것이다. 그 반대편에 있는 인물상들이 있다. 윤진원 변호사, 장대석 변호사(유해진), 공수경 기자(김옥빈) 같은 인물. 이들은 언뜻 '대의'라는 큰 틀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 모두는 동시에 각자의 입장과 각자의 지향점이 있다. 즉 어떤 대의도 물론 중요하지만, 동시에 윤변호사는 지방대를 나와 국선변호사나 하고 있는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려는 목적도 있을 것이고, 공기자는 특종을 터뜨리고자 하는 목적도 있을 것이다. 즉 그들은 어떤 대의라는 큰 기계의 부속품은 아닌 것이다. 각자 나름의 욕망으로 최선을 다해서 그 대의를 수행하고자 하는 어떤 각축도 여기에는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에는 대의가 단지 선의의 총합만으로는 이루어질 수도 없고, 완수될 수도 없음을 아는 어떤 현실 인식이 들어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을 윤진원 변호사는 하나의 일화로 잘 요약하여 들려주는데, 그가 떨어지는 실력에 지방 국립대에나마 갈 수 있도록 공부를 가르쳐 준 사람은 (학생운동으로 인한) 수배자로 방에 숨어있던 형의 친구였다. 영화 속 장대석의 한숨섞인 한탄대로, 이 386 따라지에 대한 (한숨섞인) 부채 의식. 이는 영화 속에서 이들이 처한 위치를 말해주면서, 동시에 그 부채만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을 같이 말해준다. 그것은 기계가 지시하는대로만 움직이는 부품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신의 욕망과 염치를 가지고 그것에 대응하며 움직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이에 대비되는 자신의 반대편에 있던 그 로펌으로 들어간 홍검사, 아니 홍변호사의 몰염치). 몰염치의 시대의 최소한도의 염치, 그것이 무엇인지를 이 영화의 인물들, 윤변호사와 장변호사, 공기자, 그리고 더 나아가 박재호와 김희택의 아버지 등은 보여주고 있다(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것, 혹은 원망하지만 그것이 피치 못할 사정임을 아는 것). 그 반대편에 서 있는 국가라는 기계가 벌이는 몰염치의 공습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저번에 양심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베테랑>의 쪽팔림을 묻는 그 질문도 여기에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대한 몰염치의 시대, 우리는 우리의 염치를 어떻게 보호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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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 류승완

Ending Credit | 2015. 8. 13. 14:41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결말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류승완의 신작 <베테랑>은 전작들, 특히 그 중에서도 <부당거래>의 대척점에 서 있는 듯한 영화다. 물론 어떠한 것들이 대척점에 서 있으려면 그것들은 공유하는 부분이 있어야만 한다. <부당거래>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 역시 경찰 내부가 주 무대가 되며, 그들의 활동이 이야기의 주요 소재가 된다. 류승완은 이를 약점으로 생각하지 않고 의식적으로 활용하려는 듯이 보이는데, 예를 들어 배우들의 거리낌없는 활용이 그것이다. 황정민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주인공 형사 역할을 다시 맡고 있으며, 천호진, 안길강, 김민재 등의 배우들이 비슷하게 재변주된다. 물론 <베테랑>은 <부당거래>와 다른 점이 훨씬 많은 영화다. 그것을 여러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캐릭터에 보다 확실한 색깔을 입히려 했다는 부분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부당거래>나 그 이후 나왔던 <베를린>이나 인물들의 캐릭터는 복합적이고, 구도는 복잡하다. 인물들은 선과 악의 경계에서 모호하게 자리잡고 있고, 이야기는 점점 중층적으로 변해간다. 그러나 <베테랑>은 다르다. 인물들의 선악의 경계는 확실하고, 영화는 그들의 거의 처음 등장 장면에서부터 관객들이 인물의 성향을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끔 방점을 찍는다.

 

그러니까 이번 영화에서 류승완은 드라마에서 다시 액션으로 방향을 튼 것처럼 보인다. 예전 <베를린>에 대한 평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쓴 적이 있지만, 좋은 액션물에서 이야기는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으며, 캐릭터를 어느 정도 명확하게 규정짓는 것은 필수적이다. 어떤 액션물이든 관객은 심정적으로 기댈 곳이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액션물이든 설혹 주인공이 지나친 폭력을 휘두르는 듯이 보여도, 관객은 그 캐릭터를 응원하며 영화를 본다. 그 캐릭터가 어느 쪽의 편에 서 있는지 이미 알고 있는 까닭에 그렇다. 그리고 더 나아가 액션물에서 캐릭터의 성향을 규정짓는 것은 그들의 액션의 형태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유명한 액션 영화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특유의 액션들이 있다. 성룡의 영화에서 성룡이 보여주는 액션이 있고, 본 시리즈에서 주인공 본이 보여주는 액션이 있으며,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에서 주인공 에단 헌트가 보여주는 액션이 있다. 그것은 각각의 형태가 다른, 특유의 액션이며, 캐릭터의 성향과 결합된 액션이다. 이 영화 <베테랑>에서도 주인공 형사 서도철(황정민)이 보여주는 액션과 악역 조태오(유아인)가 보여주는 액션은 다르다. 서도철이 보여주는 것은 그의 느물느물한 성격을 보여주는 듯한 성룡 식의 슬랩스틱 액션이다. 어딘가 허술해보이고, 맞기도 많이 맞지만, 사실은 기술적으로 꽤 다듬어져 있다. 그러나 공격적이기보다는 방어적이며, 치명적인 공격은 피한다(성룡의 공격으로 사람이 죽는 법은 없었다). 반면 조태오의 액션은 비열하고 치졸한 액션이다. 즉 예전 동네 비열한 양아치들이 일대일 주먹 싸움에서 불리해지면 접이칼을 꺼내들던 식이다. 그는 불리해지면 앞뒤 가리지 않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며, 어떤 잔인한 방식도 서슴치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액션 방식은 아마도 이 영화의 주제와도 연결이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를 관통하는 것처럼 보이는 말이 있다. 쪽팔리게 하지 말자. 이 말은 주인공 서도철이 계속 반복적으로 하는 말이자, 그가 어떤 삶의 태도로서 지향하는 말처럼 보인다. 서도철은 조태오의 돈의 회유에 넘어간 사람들이 그에게 어떤 압력을 가할 때, 늘 되풀이하여 말한다. 쪽팔리지 않아요? 부끄럽지 않아요? 그는 자신의 아들에게도 부끄럽게 맞기보다는, 차라리 정정당당하게 맞서는 쪽을 택하라고 말하며, 그것은 다시 그의 아내(진경)에게도 비슷하게 반복된다.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이상하게 보이는, 그러니까 무리하게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도리어 감독이 가장 하고 싶어하는 말처럼 보이는 장면은 아내가 경찰서에 와서 하는 그 대사이다. 나, 쪽팔리게 하지 말라는 것.) 즉 류승완은 대놓고, 노골적으로 이 영화에서 묻고 있다. 그거 쪽팔린 거잖아,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즉 이 핀트는 조태오에게 어느 정도 향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조태오의 악행을 돕는 다른 사람들에게 더 맞춰진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적어도 영화 상에서의 조태오는 그것이 쪽팔린 건지, 아닌지 이미 분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인물이니까. 그 메시지는 조태오의 하수인들, 그러니까 최상무(유해진)를 비롯한 조태오의 곁에서 악행을 실행하는 인물들(하다못해 조태오를 수행하는 경호원들에게까지)이나 그의 돈의 유혹에 굴복하여 서도철에게 압력을 가하는 경찰 내외부의 인물들에게 향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감독 류승완이 이 사회에 던지는 나름의 진심어린 호소일 것이다. 부끄러운 일은 하지 말자, 제발.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미안한 말이지만) 그것은 사실 순진한 메시지일 수 있다. 쪽팔리지 말자, 부끄럽지 말자고 호소하는 것은 결국 개인의 어떤 양심에 호소하는 것이니까. 이것은 어떻게 생각해보면 아주 쉽게 배반당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그것을 잘 알면서도 류승완은 그것에 건다. 어쩌면, 류승완은 이제 걸 수 있는 것은 그런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양심이라는 것은 이제 류승완의 영화에서 묘하게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류승완의 초창기 영화는 보다 순진했다. 사실 알고보면 순진한 남자들이 순수한 것을 지켜내려고 싸우다가, 혹은 그것에 배반당해 죽었고, 그것을 류승완은 촌스럽게 찍었다. (물론 이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이제 더이상 그렇게 촌스럽게 찍지는 않기 때문이다.) <피도 눈물도 없이>, <주먹이 운다>, <짝패>의 인물들. 그 이후에 류승완은 시스템의 문제를 엿봤다. 그것은 아마도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들은 양심으로만은 안된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반대편에는 거대한 시스템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혹은 그 시스템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베를린>, <부당거래>에서의 시스템의 탐색은 여전히 그것이 견고하다는 재확인이었다. (<부당거래>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한다면, <부당거래>는 결국 그 시스템이 작동하는 그 방식으로 정확하게 끝을 맺으며 거기에는 어떤 절망이 들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에 <베테랑>의 어떤 호소가 있다. 쪽팔린 줄 알아. 즉 류승완의 처음 영화들이 거대한 조직에 맞서는 개인들의 실패를 응시했다면, 두 번째에서는 그 조직이 바뀔 수 있는지 가능성을 탐색하며 다시 그것에 절망감을 맛본 다음, 이제 <베테랑>에서는 약간은 우회적이지만, 보다 강력한 접근방식을 택한다. 그것은 그 조직, 시스템 구성원들의 개개인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이다. 너희들이 거기에 그러고 있는 것이 부끄럽지는 않니. 이것은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순진한 호소이기는 하지만, 어떠한 의미에서는 가장 근원적으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설사 어떤 악이 거대할지라도 그 악은 소수의 절대적인 악과 다수의 중간자적 모호함이 결합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중간의 모호함들을 선의 편으로 돌려놓을 수 있으면 악은 뿌리뽑힐 수 있다고 류승완은 호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류승완의 게임이다. 상대의 알 수 없는 진심을 믿고 벌이는 순진한 게임. 이제 걸어보는 마지막 승부수. (다시 말해서 류승완이 보는 한국사회는 혼탁해지고 도리가 땅에 떨어진 무협영화의 강호이다. 갑은 굳건하고, 을이 을과, 또는 을이 병과 싸우게 만드는 이상한 법칙이 난무하는 세계 - 조태오의 사무실에서 벌어지는 격투는 바로 그 풍경이다. 너무 노골적이기는 하지만 - 그러니 시스템과 맞서는 개인, 그러니까 액션 영웅이 필요해진다. 그러나 이 액션 영웅은 단지 절대악을 처단하는 것이 그 임무가 아니다. 배트맨의 임무도 결국 절대악, 예를 들어 조커를 처단하는 것이 아니라, 더이상 선량한 이들이 악에 물들지 않도록 막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협영화의 영웅도 절대악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땅에 떨어진 강호의 도리를 다시 세우는 것이 목적이다. <베테랑>의 서도철도 이 지점에 비슷하게 위치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 승부수가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이 영화는 사실 정확한 마무리를 보여주지 않는다. 서도철의 승리로 게임이 끝났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 게임의 결말은 아직 알 수 없다. 우리는 현실에서 승리처럼 보였지만 승리가 사실 아니었던 것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로 인하여 새삼 화제가 되었던 여러 지난 사건들. 그 지난 사건들에서 가해자들은 어떻게 처벌되었고, 결국 현재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가를 생각해본다면, 이 영화의 결말이 승리가 아닐 수도 있음을 안다. 그 끝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어쩌면 류승완은 이 때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을 풀어준 시스템을 만들어낸 것에 이 영화를 보고 있는 당신도 어쩌면 일조한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부끄러운 줄 알아, 하고 말이다. 아니, 어쩌면 이것은 류승완의 순진한 호소가 너무 딱해서 내가 말하는 억지일지도 모르겠다. (보여주지 않은 것에서 무엇인가를 봤다고 말하는 것은 대부분 억지이니까.) 다만 말할 수 있는 것만을 말하자. <베테랑>은 거대한 조직과 단지 가지고 있는 조그만 힘으로 대결하려는 개인을 보여주는 류승완의 처음으로 돌아간 듯한 영화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 개인은 조금 더 느물느물해졌고, 단지 고독한 액션 영웅이 아닌 주위를 돌아보고 활용하는 방법을 조금은 배운 것 같다.

 

그것이 단지 두 시간 동안의 영화적 쾌감으로 끝나는가, 혹은 그 이후의 다른 것으로 조금이나마 연결되는가는 결국 관객의 몫이다. 다시 말해서 상대의 알 수 없는 진심을 믿고 벌이는 순진한 게임. 그 순진한 게임이 순진한 패배로 끝날지 아닐지는 이제 게임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달렸다.

 

 

 

   

- 2015년 8월, CGV 역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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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해지든 말든

The Book | 2015. 8. 6. 13:27 | Posted by 맥거핀.
한국이 싫어서 - 2점
장강명 지음/민음사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책 뒤편에 있는 문학평론가 허희 씨의 해설을 읽고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의 끝은 주인공 계나가 난 이제부터 진짜 행복해질 거야, 라고 결심의 말을 덧붙이는 것으로 끝난다. 그런데 허희 평론가는 단호하게 말한다. "나는 그녀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고 확신한다.(p.200)" 그러니까, 이 해설은 소설의 결론을 뒤집는 것이며, 어떠한 의미에서는 결국 이 소설이 어떤 부분에서는 무엇인가를 의도적으로 숨기고 있거나, 혹은 그려내는 데에 실패했다(혹은 치밀하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어떤 부분에서 그런가.

 

난 이제부터 진짜 행복해질 거야, 라는 결심. 내가 보기에는 그것은 두 가지로 나누어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한 가지는, '난 행복해질 거야'라는 진술.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나는' 행복해진다,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국가나, 가족이나, 다른 거대한 무엇이 끼어들 틈은 없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제목 <한국이 싫어서>는 일종의 낚시, 혹은 자극적인 마케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계나가 한국을 떠나 호주로 이주하는 것은 '한국이 싫어서'가 아니다. 한국이 싫어서, 가 아니라, 한국에서 행복해질 수 없다고 혹은 한국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실 여기에는 국가라는 이데올로기가 가지는 무엇이 끼어들 틈은 없다. '한국'이라는 것은 단지 어떤 울타리의 다른 이름일 뿐이고, 허희 씨의 말을 빌리자면, 그저 여러 개 축사 중에 어느 한 귀퉁이에 붙여진 이름일 뿐이다. 그게 '한국'이면 어떻고, '서울'이면 어떠하며, '호주'든 혹은 '우간다'인들 뭐가 달라지는 게 있으리.

 

다시 말해서, '한국이 싫어서'라는 제목은 '한국'이라는 특정의 공간에 대한 비판을 담고자 한다는 오해를 불러오지만, 사실 이 소설에서 말하는 것은 그런 거창한 것은 아니다. 이 소설에서 말하는 한국에 대한 비판은, 우리가 익히 알고, 우리가 익히 상상하는 그 지점에서 머무르며, 단지 계나가 한국을 탈출하고자 하는 것은 '한국'이라는 공간이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공간에서 자신이 살아남을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즉 계나(그리고 철저하게 계나의 1인칭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에서 계나의 세계관과 소설의 세계관은 동일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이 소설)에게는 사실 그 나머지는 관심 밖, 아이 돈 케어이며, 어떠한 의미에서는 계나의 스탠스는 사실 그녀가 비판하고자 하는(그러나 사실 정확하게 얘기하면 비판하는 척 하는) 스탠스와 거의 일치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즉 이 소설에서 담고 있는 '한국'이라는 공간에 대한 비판은 그 공간을 지배하는 지배법칙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그 지배법칙의 (최소한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에 대한 비판에 가깝다. 지배법칙이 그 모양으로 생겨먹은 것에 대해서는 소설은 사실 관심조차 별로 없다. 오해는 마시라. 나는 이것이 마냥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소설에서 자꾸 '한국'이라는 것을 불러오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 뿐이다. 그저 계나가, 혹은 소설이 말하는 지점은 '내가'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것이 어디가 되었든 말이다. 그 이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사실 이 소설의 '관심 밖'이다. (그러니 '한국이 싫어서'라는 이 제목은 마케팅의 산물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한국이 별로 싫지는 않은데, 내가 거기서는 힘이 없고 앞으로도 힘이 생기지 않을 것 같아서'에 가까울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난 진짜 행복해질 거야, 라는 결심에서 '진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러니까 소설의 가장 마지막 문장에 붙은 이 '진짜'는 사실 그녀가 이 소설의 내내, 그러니까 호주에 와서도 결코 '진짜' 행복해진 적은 없었음을 간명하게 말해준다. 허희 평론가의 말대로 "2000년대 한국 소설에 등장한 이주노동자의 살림과 유사한 모습이다. 부푼 희망을 안고 호주에 온 그녀를 비롯한 한국인들은 고국에서보다 도리어 궁핍하게 산다. 영어가 능숙하지 않아 빌딩 청소 등 고된 육체노동을 하면서 영주권과 시민권을 취득하기 위해 아등바등한다. (p.200)" 그 뿐인가. 계나는 두 번이나 부당한 이유로 재판에 연루되고, 벌금을 내고 호주에서 추방될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그녀의 고백대로 사실 그녀가 호주에서 '진짜' 행복해하는 것처럼 보였던 때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호주 시민권을 취득했을 때는 행복해할 법도 하지만, 그녀는 말한다. "증서 수여식이 끝나고 다른 사람들이 다과회에서 친지들과 기념사진을 찍을 때 슬그머니 행사장을 빠져나왔어. 6년 동안 고생한 게 하나하나 생각나서 뭔가 뭉클한 기분인데, 그렇다고 나 이제 호주 사람이다! 이러고 만세를 부르기도 뻘쭘하고. (p.172)"

 

결국 그 순간에도 그녀가 떠올리는 것은 6년 동안 고생한 기억이다. 그것은 이런 것과 다를까. 예를 들어 그녀가 한국에서 6년 동안 고생하여 좋은 일자리의 취업을 거의 100% 보장해주는 어떤 자격증을 땄다면, 그녀는 그 순간 행복해할까, 아니면 6년 동안 고생한 기억을 떠올릴까. 나는 사실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런 것을 묻고 싶다. 만약 계나가 6년 동안 한국을 떠나지 않고 호주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한 만큼 한국에서 무엇인가를 했다면, 한국에서 살아남을 정도가 될까, 혹은 한국에서 행복해졌을까. 아니 또 오해는 마시라. 나는 당신이 이 모양으로 사는 것은, 단지 당신이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라는 엿같은 소리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무슨 차이가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하는 말이다. 한국에서 돈없는 노동자로 사는 것과 호주에서 이주노동자로 사는 것의 차이.

 

아주 간략하게 말해서 그것이 큰 차이가 있어요, 라는 것이 이 소설의 태도이고, 그것은 사실 큰 차이가 없다, 중요한 무엇인가는 바뀌지 않았다, 라고 말하는 것이 허희 평론가의 말이고, 내가 어느정도 수긍하는 말이다. 적어도 이 소설에서의 계나의 진술을 그대로 믿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는 계나가 행복해질 수 없다고 확신하지는 못하겠다. 어쩌면 행복해질 수도 있겠지.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렇게 얻는 행복이 소설을 읽는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지? 물론 당연하게도 소설 주인공의 행복과 우리의 실제 행복은 크게 상관이 없다. 나는 그것을 새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나는 소설의 행복이 우리의 행복과 일치할 수도 있다는 환상을 깨지 않기 위해 소설은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그 환상이 깨지는 것을 막기 위해 소설은 어떻게든 모든 가능한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 소설이 1인칭으로 말을 건네는 형식을 취하는 것도 그러한 강구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인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계나가 말을 건네는 이들은 누구일까. 호주에 이미 도착한 이들은 아닐테고, 아직 한국에 남아있는 은혜나 미연이나, 혹은 동생 예나와 같은 이들일 것이다. 그런데 이들에게 이 말은 전해지고 있을까. 이렇게 말하면서? "시드니에서 매일 크고 작은 모험을 겪고 있어서 그런가, 옛날 친구들이 좀 얄팍해 보이더라. 내가 걔들보다 더 나은 선택을 했다거나, 내 미래가 더 밝을 거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호주에 올 일 있으면 연락해, 나 무지 전망 좋고 겁나 큰 아파트에서 살아."라며 휴대폰 번호와 새로 만든 이메일 주소를 알려 주고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어. 머리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p.121)" 이 말들은, 그러니까 이 소설은 누구에게 전달될 수 있을까. 혹시 계나와 미연이와 은혜가 벌이는 작은 파티에서 주문한 배달음식을 30분 안에 배달해주는, 신용카드를 양손으로 받고 90도로 인사하는 배달원에게?)

 

허희 평론가는 (그래도 평론가의 예의를 담아) 계나가 (지금과 같은 태도라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고 진지하게 충고해주었지만 나는 조금 더 냉소적으로 말한다. 그녀가 행복하든지, 말든지 나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어졌다. 관심 밖, 아이 돈 케어. 그리고 (주인공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라는) 환상을 깨는 이 소설은 (적어도 나에게는) 실패한 소설이다.

 

 

덧.

어쩌면 이 소설의 의미는 다른 것에 있는 것 아닐까. 예를 들어 '한국이 싫어서'라는 마케팅적인 제목이나, 중편 소설 정도에 적당한 분량을 적당히 편집으로 늘려 '장편소설'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하드커버를 씌워 13,000원에 팔아먹는 자세 말이다. (빨리 술술 읽힌다,라는 평들이 많은데, 내가 생각하기에 여러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결국 '짧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결국 말을 건네고자 하는 젊은 청춘들에게,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어쩌면 이 소설의 내밀한 '태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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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 최동훈

Ending Credit | 2015. 7. 29. 13:28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내용이 일부 들어 있습니다.)

 

 

최동훈의 <암살>은 무리없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내는 영화다. 다만, 나는 (요즘의 한국 영화들에서 특히 보이는) 이런 공식에 들어맞는 듯한 전개, 혹은 뭔가 툭 걸리는 게 없는 무리없는 흐름이 좋은 것인가,라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지루함을 주는 부분도 없고, 마냥 뒤떨어진다 싶은 장면도 없다. 약간 울컥하게 만드는 장면도 있고, 다시 돌려보고 싶을 정도로 일종의 쾌감을 주는 장면들도 있다. 만약 이것이 다른 감독들의 영화였다면, 나는 상찬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건 최동훈의 영화가 아닌가. 이 정도에 만족해야할까.

 

단적으로 말해서 <암살>은 최동훈의 '놈놈놈'이다. 좋은 놈은 안옥윤(전지현)을 비롯한 독립군들, 나쁜 놈은 일본군의 밀정으로 돌아서는 염석진(이정재)이나, 친일파 강인국(이경영)과 같은 인물, 그리고 이상한 놈은 물론 하와이 피스톨(하정우)과 그의 조력자 영감(오달수)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김지운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과는 그 궤가 조금 다르다. <놈놈놈>은 그 제목이 이미 어느 정도 말해주듯이 그 캐릭터를 극단으로 몰아붙여서 장르적 쾌감을 얻고자 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놈놈놈>은 이미 제목에서부터 말을 건다. 자, 이제부터 내가 아주 좋은 놈과 아주 나쁜 놈과 아주 이상한 놈을 보여줄께. 너는 다른 거(그러니까 예를 들어 이 배경에서 연상되는 역사 같은 것) 생각하지 말고, 그냥 누가 끝까지 살아남아 이길 것인지 즐기기만 하면 돼,라고 말을 건네는 영화였다.

 

그런데 최동훈의 영화는, 아니 적어도 지금까지 최동훈이 만들어왔던 영화는 조금 다르다. 물론 최동훈의 영화는 캐릭터 중심의 영화다.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범죄의 재구성>의 인식이 강해서 그렇지, 최동훈이 이야기를 그다지 잘 만들었던 적은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영화 <타짜>도 이야기 자체가 깔끔하게 짜여져 있지는 않다. 이야기는 캐릭터에 치여 분절되며, 꽤나 산만하다. 최동훈은 이를 중화시키기 위해 두 가지의 장치를 거는데, 하나는 정마담(김혜수)의 회상(진술)이라는 이야기의 형식을 거는 것이고, 그것으로 모자라 챕터를 나눠 분절시켰다. (나는 <암살>도 이런 회상의 형식을 적극 활용하려는 줄 알았다. 영화 초반 염석진에 대해 진술하는 씬이 나왔을 때 말이다. 그런데 영화내내 이 장면은 거의 외따로 떨어진 듯 보이다가 거의 마지막에 가서야 의미가 생긴다.) 즉 이야기가 에피소드별로 분절되는 양상으로 영화는 흘러가지만, 그것이 그렇게 관객에게 이상한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 영화의 표면상의 목적은 이 에피소드들을 그러모아, 결국 고니(조승우)라는 캐릭터가 누구인지 그려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캐릭터를 그려내는 것. 최동훈의 이야기는 그것이었다. 가끔 최동훈은 캐릭터를 철저하게 그려내는 것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캐릭터만 잘 만들어내면 이야기는 저절로 따라온달까. <도둑들>은 그게 과했다. 영화 <도둑들>이 활력을 잃어버리는 것은 캐릭터에 대한 소개가 어느 정도 끝나고, 바로 실제의 도둑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캐릭터들을 구축하려는 노력이 너무 지나쳤던 나머지, 막상 실제의 도둑질은 거의 비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케이퍼 무비(caper movie)를 표방했는데, 이상하게도 영화에는 그 '케이퍼'가 없었다. 뭐 아무튼 간에.

 

 

최동훈은 이번에는 그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언뜻 보면 <도둑들>과 비슷한 구조를 가진다. 캐릭터들을 긁어 모아서, 그 캐릭터들이 어우러지는 하나의 결정적인 사건을 보여준다, <도둑들>에서 그것이 '도둑질'이라면 <암살>에서는 그것이 '암살'일 따름이다. 그런데 최동훈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여기에 무엇인가 다른 것을 넣고 싶어했다. 예를 들어 역사성이나 정서와 같은 그간 최동훈의 영화에서는 그렇게 어울리지 않았던 낱말들. 영화가 그 궤를 달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영화의 중반부 안옥윤을 둘러싼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부터다. 영화는 비장해지고, 웃음기는 없어진다. 그러니까 장르물(일종의 케이퍼 무비)인 척 하던 이야기는 이 때부터 드라마로 방향을 튼다. 뭐 좋다, 드라마든 장르물이든 형식이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다만, 아쉬운 것은 이렇게 방향을 급선회하는 도중에 최동훈의 장기가 잘 보이지 않게 된다는 점이다. 바로 그 펄떡펄떡 뛰노는 캐릭터들.

 

최동훈의 캐릭터는 사실 초반에 규정되는 법은 없다. 그의 첫번째 장편 <범죄의 재구성>에서부터 이러한 특징은 잘 드러나는데, 이야기가 중후반을 넘어설 때까지 사실 이야기를 정확히 종잡기 힘든 것은 그의 인물들을 선과 악의 경계로 잘 나눌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것은 <타짜>에서도 마찬가진데, <타짜>에서 아귀(김윤석)와 같은 인물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인물들의 경계는 흐릿하다. 예를 들어 평경장(백윤식)은 어떤가, 그는 고니를 망가뜨린 인물인가, 아니면 그에게 좋은 영향을 미쳤는가, 정마담은 어떨까, 그녀는 팜므파탈인가, 아니면 고니를 진정으로 사랑했던 순정녀였나. 물론 주인공 고니 역시 마찬가지이며,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영화는 결국 주인공 고니를 입체적으로 그려나가는 영화이기도 했다. 사실 어떻게 보면 <도둑들>이 지루했던 것은 그 도둑질이 비어있는 것에 그 까닭이 있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캐릭터들이 들인 시간에 비해 입체적으로 살아나지를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즉 악한 인물은 결국 끝까지 악했던 것 같으며, 선한 인물은 결국 끝까지 선인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암살> 역시 이 캐릭터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얘기하면 너무 잘 보여서 탈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영화는 거의 최동훈의 '놈놈놈'처럼 보인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좋은 놈은 끝까지 좋은 일을 완수하며, 나쁜 놈은 끝까지 악랄하고, 이상한 놈은 마지막까지 조금 이상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왜 그들이 그렇게 되었는지를 잘 모르겠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조금 이상해보이는 장면들이 있다. 염석진은 왜 밀정이 되었을까. 물론 영화에서 제시하는 해답은 있다. 눈앞에 당장 죽음의 공포가 몰아닥쳤을 때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영화는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이 질문은 질문 자체로는 그다지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이전에 꽤 시간을 들여 염석진의 죽음도 불사하지 않는 자세를 보여주려고 애쓴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런 것을 십여분이 넘게 구축한 다음, 단지 그 장면 하나로 이것이 설명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도리어 염석진이 마지막에 내놓은 답이 정답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즉 일본이 패망할 줄 몰랐다는 그의 대답.) 하와이 피스톨에게도 같은 것이 적용된다. 그는 왜 갑자기 좋은 놈의 편으로 돌아섰을까. 여러 이유들이 있을 수 있다. 그가 보았던 결정적인 장면 때문일 수도 있고, 안옥윤에 대한 연모의 감정 때문일 수도 있으며, 그가 가진 어떤 마음의 부채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그가 초반에 구축해 놓은 캐릭터, 그러니까 300달러만 주면 아무나 죽여주는 이상한 하와이 피스톨의 캐릭터를 넘기에는 어려워 보인다. 그리고 이 질문들은 다른 캐릭터들에게도 비슷하게 적용할 수 있다. 모호해보였던 속사포(조진웅)는 언제 그렇게 죽음도 불사하던 캐릭터가 되었나. 혹은 강인국(이경영)은 왜 그렇게도 악랄함의 끝에 있는 것과 같은 친일파가 되었을까.

 

물론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친일파가(그러니까 염석진이나 강인국이) 친일파 되는데에 이유가 있을까. 그저 나쁜 놈인 거지 뭐. 그런데 그것은 결국 그의 캐릭터를 비워 둔 채로 놓아겠다는 얘기이고, 그것은 그의 반대편에 있는 인물들에게 영화가 취하고자 했던(그러나 사실 실패한) 어떤 스탠스와 배치된다. 악인이 왜 악인이 되었는지를 묻는 것은 의인이 왜 의인이 되었는지를 묻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저 그가 태생이 나쁘기 때문에 악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의인이 태생이 의롭게 태어났기 때문에 의인이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영화의 어떤 태도와 모순되는데, 이 영화는 이 의인들을 기억해달라고 말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어떤 역사성을 부여하려 마지막까지 애쓰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억해달라는 것은 이들을 신화화된 영웅으로서 기억해달라는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신화화된 영웅들에게는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지점이 없기 때문이며, 그것은 결코 이 영화도 바라는 점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마지막이 보여주는 것은 보다 인간적인 형식으로서의 기억이 아닐까. 춤을 추고 싶었고, 사진으로 기록을 남기고 싶었던 평범한 사람들. 그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내고자 했던 것을 기억해달라는 것은 아닐까. 비록 그 기억을 요구하는 방식은 최동훈답지 않게 아주 촌스러웠지만 말이다. 다시 말해서 <명량>의 이상한 인터랙티브가 여기에서도 반복되며, 이것 역시도 어떤 퇴행의 증거처럼 보인다. 한마디 더 덧붙이자면, 이것은 염석진을 둘러싼 에필로그와도 연관이 된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 이런 방식의 영화적 카타르시스는 조금 위험해보인다. 그런 선택이 그들의 영웅성을 강화할 수는 있지만, 실제의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문제들은 외면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의 근원에는 결국 우리 손으로 온전히 이루어낸 해방이 아니라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고 - 실제로 영화 속의 환호와는 달리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고 있던 임시정부 쪽에서는 이 온전하지 못한 독립을 많이 아쉬워했다, 영화 속에 등장한 김원봉의 씁쓸함도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 이 영화에서 물론 그것을 강조하기에는 어려웠겠지만 이 선택이 아쉬워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까 사실 '역사성을 담아냈는가'라는 물음에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결국 이 영화도 최근의 한국영화들이 보여주는 어떤 모습들과 공유하는 지점이 있다. 각각의 장면들은 인상적이고, 웃음을 터뜨리게도 하며, 카메라워킹도 빈틈없이 구축되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리듬이 없다. 리듬은 모두들 알고 있듯이 5-4-3-2-1의 적절한 조화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4-4-4-4-4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5점 만점 중에 4점 짜리 장면들만 있는 영화들.(요즘에 가장 흔히 보는 영화평이 '차린 건 많은데, 먹을 것은 없다'는 평이다. 다들 먹방 좀 찍어봐서 알잖아요. 고기 반찬만 있다고 많이 먹게 되지는 않잖아요.) 툭툭 걸리는 장면이 없는 영화, 불협화음이 없는 영화. 이것이 최동훈의 영화라는 점에서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

 

 

 

 

- 2015년 7월, 메가박스 신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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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각자의 놀이터

The Book | 2015. 7. 26. 23:12 | Posted by 맥거핀.

네메시스 - 10점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문학동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필립 로스의 <네메시스>는 작은 이야기이다,라고 첫문장을 쓰려다 멈칫 한다. 작은 이야기인가? 어떤 '규모'나 '배경'이라는 의미에서의 소품이라면 그렇다고 할 수도 있다. 찌는 듯한 더위의 놀이터, 폴리오(척수성 소아마비), 폴리오에 걸리는 아이들, 자신 때문에 아이들이 폴리오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놀이터 감독...기껏해야 한여름 미국 지방소도시의 어느 동네에서 일어난, 몇몇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작은 사건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사건이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달라지게했다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사실 모든 소설의 사건은 그 주인공에게는 결코 '작은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이 책임과 회피의 문제, 혹은 죄책감과 희생양의 문제, 혹은 신의 무한함과 그에 대비되는 인간의 원초적인 한계(또는 비극)와 관련된 문제라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을 결코 작은 이야기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책 뒤편의 뉴욕 타임스의 평에 '매우 잘 만들어진 오 헨리의 이야기 같다'라는 문장이 있는데, 나도 언뜻 오 헨리의 이야기들과 비슷한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 헨리의 이야기들은 대부분 작은 이야기인들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거의 모든 단편들은 인간 감정의 가장 원초적인 부분들로 세밀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단지 그 이야기로 그치지 않고 대부분 어떤 우화로서의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그리고 물론 우화가 우화로서의 기능을 하려면 그 이야기 자체에 읽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바로 필립 로스의 <네메시스>처럼 말이다.

 

<네메시스>의 공간이 있다. 첵 속의 표현을 빌리자면 '쇠로 만들어져 언제까지나 닳지 않을 듯한 눈에 띄게 또렷한 얼굴, 언제든지 의지할 수 있는 강인한 청년의 얼굴(p.20)'을 가진 버키 캔터가 감독하고 있던 동네의 놀이터. 모든 것이 불타오르는 듯한 폭염 속에서도 하루 온종일, 이닝에 이닝을 거듭하는 게임을 이어가는 소프트볼을 하는 아이들이 모여놀던 그 놀이터. 한쪽 구석에서는 여남은 명의 여자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며 줄넘기를 하고, 동네의 '얼간이' 호러스가 나타나, 놀던 아이들이 귀찮음에 못이겨 악수를 해줄 때까지 그 옆을 떠나지 않고 서 있던 그 놀이터. 그것은 아이들이 모여노는 작은 공간일 뿐이지만, 적어도 버키 캔터에게는 그 자신이 어떻게든 지켜내야 하는 공간이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문제가 관련되어 있다. 하나는 무엇으로부터 그것을 지켜내는가의 문제이다. 필립 로스는 이 '무엇으로부터'의 문제를 초반 흥미롭게 구성한다. 그들이 놀던 놀이터에 어느날 이탈리아 아이들 무리가 찾아온다. 그들의 목적은 단순히 그들에게 시비를 걸려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폴리오를 퍼뜨리는 것이 목적이라고 하면서 위협적인 자세로 침을 뱉는다. 버키 캔터는 놀이터의 감독관으로서 거의 혼자 힘으로 무리를 제어하고, 그들이 뱉은 침을 신속하게 물과 암모니아로 닦아내지만, 이상하게도 그 이후부터 폴리오는 놀이터의 아이들 사이에서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눈에 보이는 것, 즉 이탈리아 아이들이나 그들이 뱉은 침은 닦아내면 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폴리오 병균으로부터의 위협은 어떻게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다른 하나는 그가 '왜' 이 공간에 그렇게 큰 책임을 느끼는가의 문제이다. 캔터는 아이들 사이에 폴리오가 퍼지자, 큰 책임감을 느끼며, 죽은 아이들의 집을 찾아가거나 전화를 하기도 하고, 그들의 장례식장에 가며, 이 문제의 원인이 자신이 맡은 일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닥터 스타인버그나 다른 이들의 말대로 더운 여름날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뛰어논다고 해서, 폴리오가 그것으로부터 촉발된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탈리아 아이들이 다녀간 것도 물론 마찬가지다. (실제 놀이터가 원인이라면 그것을 임시폐쇄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지만, 당국은 물론 그러지 않는다.) 그것은 막연한 상상이나 두려움에 가깝고, 폴리오가 그 아이들에게 어떻게 침투하였는지는 오늘날 흔히 말하는 대로 광범위한 역학조사가 실시되지 않는 한 정확하게 밝혀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캔터의 어떤 책임감은 이러한 실제적인 문제(그러니까 놀이터가 폴리오의 온상이라는)와 조금 비껴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을 캔터 개인과 관련된 부분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것은 그가 어렸을 때 부모님을 잃고 책임감을 가지고 강해질 것을 요구하는 조부모 밑에서 자라난 것에 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고, 혹은 친구들과 함께 유럽과 태평양에서 벌어지고 있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싶어했지만, 건강한 신체를 가졌음에도 낮은 시력 때문에 참전하지 못하고 국내에 남아야 했던 그의 이력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여기에 필립 로스의 작가로서의 노회한 능력이 드러나는데, 다시 말해서 버키 캔터의 전쟁터는 친구들이 참전한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이 아니라, 여기 미국 뉴어크 위퀘이크의 작은 놀이터였고, 그의 적은 철모를 쓴 독일군이 아니라 폴리오였다. 이것을 필립 로스는 노련하게 교차하며 구성하는데(내가 이 소설을 영화화하는 영화감독이라면 당연하게도 교차 편집을 적극 활용할 것이다), 그가 소설의 초반에 맞서게 되는 것도 하필이면 '이탈리아' 이민자의 아이들이며, 그가 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에서 (본의아니게) 물러났다면 이 폴리오와 싸우는 전쟁에서는 자신의 의지로 물러나며, 전쟁에서 친구를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자신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소년(도널드 캐플로)을 잃고, 이 폴리오와 관련된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그러므로 필립 로스의 노회한 세공술에 의해 이 이야기는 단순히 폴리오가 퍼졌던 놀이터 이야기 이상의 것이 된다. 총알이 빗발치는 노르망디 해변과 폴리오가 퍼지는 놀이터, 혹은 그보다 작은 단계로서의 불볕의 더위가 몰아닥치는 폴리오가 퍼지는 놀이터와 상큼한 바람과 시원한 바람이 있는 캠프파이어. 이것은 어떤 단계이자, 혹은 비유(우화)의 공간이며, 소설을 읽는 누구에게나 존재할 수 있는, 다만 그 형태가 다른 공간이다. 우리들 각자에게도 자신만의 형태가 다른, 감독해야만 하는 놀이터와 그 책임을 벗어나고 도피하여 도착하고 싶은 꿈의 캠프파이어가 있다(노르망디 해변과 미국의 어느 소도시의 놀이터라고 단계를 바꿔도 마찬가지다).

 

여기에서 이야기는 다시 '무엇으로부터'의 책임인가,의 문제로 돌아가는데, 어떤 의미에서 폴리오는 독일군보다 더 위험하다. 왜냐하면 독일군 철모의 갈고리십자는 눈에 보이지만, 폴리오 바이러스의 갈고리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적일 때, 그것에 대항하는 가장 쉬운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치환하는 것이다. 폴리오를 퍼뜨리는 이탈리아 아이들, 그들의 침, 아이들이 즐겨먹던 핫도그, 더운 여름날의 놀이터, 병균을 가지고 돌아다니는 더러운 호러스. 혹은 조금 다른 형태도 있다. 예를 들어 하느님이라는 존재이거나 혹은 인디언 정신과 같은 것. 하느님이 폴리오를 만들어내고, 누군가의 기도에 응답하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불행을 내린다고 생각하는 캔터의 원망은 어떤 존재에게 책임을 돌린다는 점에서, 설혹 그 존재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앞의 치환들과 묘하게 닮아 있으며, 캠프파이어에서 이루어지는 기묘한 인디언 의식과도 연관된다(이 인디언 의식이 애국심을 고취하는 것으로 끝난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필립 로스의 어떤 비판이 스며들어 있다고 생각해도 될까. 인디언을 몰살한 미국인들이 그 애국심을 고취하기위해 인디언 의식을 활용한다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캔터의 방식이 있다. 외부가 아닌 내부로 방향을 트는 것.

 

버키 캔터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듯했던 이야기는 말미에 이르러 묘하게 방향을 튼다. 그의 이야기를 비판적으로 보는 또다른 화자가 등장하면서 말이다. 옮긴이의 말대로 이는 작가의 어떤 게임에 대한 제안으로 볼 수도 있다. 캔터의 시각을 지지할 것인가, 아니면 또다른 화자의 시각에 더 무게를 둘 것인가. 나는 필립 로스의 게임에 동참하는 대신, 이 제목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것으로 그 대답을 대신하고자 한다. 네메시스(Nemesis).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의 본분을 벗어난 발언과 행동에 대한 신의 노여움과 벌을 의인화한, 흔히 말하는 복수의 여신. 그러나 네메시스는 본래 복수의 여신이 아니었다. 네메시스는 원래 분배의 신이어서 공동체 사회에서 생산물을 사람들에게 고루 분배하던 선한 신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탐욕을 부려 불평등하게 나누게 되자 네메시스의 직분이 달라져 일한 만큼 분배받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재산을 가진 자들에게 복수를 가하는 신이 되었다는 것이다(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85196.html 글에서 재인용). 즉 네메시스를 복수의 여신으로 만든 것은 인간들이었고,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이는 희생양을 만들어낸 것도 인간들이었다. 지금 여기에도 네메시스를 복수의 여신으로 만드는 자들은 누구인가.

 

 

덧.

소설을 읽는 내내,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예를 들어 폴 토마스 앤더슨의 지극히 미국적인 영화 말이다. 필립 로스의 묘사는 거의 스크린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특히 지옥불이 쏟아지는 것 같은 위퀘이크의 묘사와 그에 대비되는 스트라우즈버그 캠프에 대한 초반 묘사는 인상적이며, 보지 않았음에도 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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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힘

The Book | 2015. 6. 30. 14:24 | Posted by 맥거핀.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 1 - 6점
장미셸 게나시아 지음, 이세욱 옮김/문학동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장미셸 게나시아의 소설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은 성장소설의 외형을 지니고 있다. 많은 성장소설에서 담는 이야기들이 여기에서도 비슷하게, 때로는 약간 변형되어 등장한다. 어떻게 보면 약간은 전형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소년은 많은 성장소설의 주인공들이 그렇듯 여러가지를 조금씩 통과해 나가면서 어른이 된다. 때로는 다정한, 또 때로는 엄격한 부모들과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법을 배우고, 친구들과의 관계를 만드는 법을 알아나가며, 조금씩 잘하는 것과 잘하지 못하는 것을 깨우치고, 짝사랑과 동경의 경계에 서며, 예기치 못한 사랑을 만난다.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의 미셸은 그렇게 어른이 되어간다.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으로 상당히 달랐던 부모가 결국 이혼하게 되는 와중에도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고, 가까운 친구(니콜라)를 잃는 일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되었으며, 잘 하는 것(사진찍기)을 찾아나가고, 못하는 것(수학)을 넘어서는 방법을 알아 나갔다. 짝사랑이었는지, 어떤 우정이었는지 알 수 없었던 사람(세실)을 떠나보내는 법을 배웠으며(형의 여자친구를 만난다는 이 설정은 또 얼마나 전형적인가), 갑자기 찾아온 사랑(카미유)을 대하는 법을 알아나간다.

 

물론 이 소설에서 전형적인 것만 있다고 말하는 것은 조금 부당한 평가가 될지도 모른다. 이 소설에는 우연치 않게 미셸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는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이 있으니까. 게나시아의 이 소설은 크게 두 가지의 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하나는 앞에서 이야기한 미셸의 성장담이며, 다른 하나는 미셸이 관계를 맺어나가는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이라는 체스클럽 회원들의 이야기이다. 이 클럽의 회원들은 모두 일종의 망명자들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망명은 받아들여진 적이 없으므로, 일종의 디아스포라(diaspora)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피해 이곳, 프랑스로 도망쳐 왔다. 그 '무엇인가'는 조금씩 형태가 다르지만, 크게 뭉뚱그려서 말하자면 사회주의의 어떤 폭압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소련과 동유럽, 그리스 등지에서 온 그들은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라는 체제가 가한 육체적이고도 정신적인 말살의 위협에 피해 자유롭다고 믿었던 그곳, 프랑스로 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모두 비슷한 사고를 지니고 있다고 규정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 될 것이다. 책 속의 표현대로, 한편에는 고국을 그리워하지만 사회주의를 맹렬하게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다른 한편에는 그런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회주의자들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떤 의도에 의해서, 혹은 의도치 않게 미셸의 삶에 이런저런 조언들을 해나간다.

 

그러므로 그들을 어떤 의미에서는 이런 성장소설에 꼭 필요한 역할모델들, 혹은 (이 표현을 그다지 마음에 들어하지는 않겠지만) 일종의 멘토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장소설에서 이런 인물들은 필수불가결하다. 소년이 혼자서 성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소년들(그리고 물론 소녀들)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가까운 곳에서 그들의 성장을 지켜보며, 보이게 때로는 보이지 않게 이끌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성장소설들에서는 상당수 그것은 부모가 아닐 경우가 많은데, 많은 성장소설들에서 부모는 그대신 갈등을 일으키는 역할을 맡고 있으며, 외부의 누군가를 등장시키는 것이 이야기의 진행에는 더 간편하기 때문이다.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에서도 비슷한 양상인데, 미셸의 가까운 곳에서 그를 붙잡아 줄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존재들, 예를 들어 부모님들, 형 프랑크, 형의 친구이자 미셸의 친구이기도 한 피에르, 세실과 같은 인물들은 미셸의 성장을 이끈다기보다는 결국에는 그에게 어떤 문제를 안기는 입장에 더 가까우며(물론 그 과정에서 많은 성장하는 이들이 그렇듯 깨지면서 스스로 무엇인가를 배우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그의 곁에서 떠나가버린다. 물론 대신 그의 곁에 남아 있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그것을 미셸이 수없이 읽고 보는 책과 영화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미셸은 책과 영화를 사랑하는 소년이고, 책과 영화는 물론 멘토의 역할을 대신할 만큼 훌륭하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책과 영화가 단지 제목만 빈번하게 등장할 뿐, 그 내용은 그렇게 자세하게 다루어지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그의 곁에는 책과 영화보다 더 거짓말 같고, 더 극적인 이야기를 가진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의 회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는 책이 중반을 향해 가면서부터 점점 이야기를 교차하여 배열하기 시작한다. 미셸의 이야기와 회원들의 이야기. 그들의 이야기는 그들이 겪은 기구한 삶의 경험일 뿐만아니라, 삶의 여러문제에서 좌충우돌하는 미셸에게 들려주는 조언이기도 하며,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는 나같이 성장이 멀어보이는 어른들에게도 기꺼이 들려주는 작가의 조언이기도 할 것이다. 즉 그들이 겪은 삶의 진실들은 그들 자신에게 있어서는 가혹하지만, 그것을 듣는 우리에게는 어떤 교훈으로서 작용하기도 한다. 그 교훈들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의 삶은 모두 다르고, 각자 다른 의미에서 가혹했으며, 보다 더 사회적이나 정치적으로 그들의 이야기들을 말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그것을 뭉뚱그려서 기억의 진실, 혹은 기억의 힘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들의 이야기들은 모두 기억의 산물들이다. 모든 사람은 수많은 기억을 지니지만, 그들을 지탱시키는 것은 그 모든 수많은 기억이 아니고, 단지 몇 개에 불과한 작은 기억들이다. 일반 사람들도 그러할진대, 기억의 힘만으로 버티며 살아가야 하는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을 멀리하고 온, 이제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없다고 믿는 디아스포라들은 더 말할 것이 있을까. 그들은 몇 개의 기억으로 살아간다. 도망쳐 나오기 전에 어머니가 만들어주었던 누룩 없는 빵을 기억하고, 여자가 늘 타고 왔던 프랑스 우체국의 DC-3 쌍발 프로펠러기를 기억하며, 자신에게 찾아왔던 무대에서의 환희를 기억하며, 자신이 배신하고 떠나왔던 사람을 기억하고, 몇 개의 시덥잖은 사회주의 농담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되풀이해 이야기한다. 기억의 힘은 생각보다 강하다. 기억을 잃고 길에 부랑자처럼 버려졌다가 이고르를 만나 기적적으로 기억을 되찾으면서 새로운 기억을 보태고 삶을 되찾은 베르네르의 경우에도, 하다못해 단지 체스를 이기기 위해서도 기억은 필요하다. 수많은 명국의 기보를 외우는 것으로 말이다.

 

물론 그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사샤의 이야기이다. 그의 삶이야기 자체로도 그렇지만, 그가 소련을 떠나오기 전에 임했던 일로부터도 역설적으로 그것을 볼 수 있는데, 그가 했던 일은 당을 위해 사진을 조작하는 것이다. 사진이라는 것은 기억을 붙잡아두려는 시도이자, 우리가 무엇인가를 기억하기 위해 남기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을 조작하려 한다는 것은 기억을 조작하려는 시도이며, 반대로 우리는 누군가를 기억하기 위해 사진을 찍기도 한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사진은 기억의 보조자료일 뿐이지, 결코 기억 그 자체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사진을 조작할 수는 있어도, 사진에 찍힌 자나 사진을 찍은 자, 혹은 사진을 조작한자의 기억은 조작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기억한다. 자신이 지워버린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고, 지워버린 작가의 시를 통째로 기억한다. 미셸도 세실의 사진을 찍는 것으로 그녀를 남기려 하지만, 결국 그녀를 기억하는 것이 그녀를 남기는 방법임을 깨닫는다.

 

이 소설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은 남겨진 것들에 대해 자세히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프랑크가 어떻게 되었는지 끝내 알지 못하며, 미셸과 카미유가 결국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의 아버지가 결국 사업을 성공했는지, 어머니와의 관계는 회복되었는지, 체스클럽의 회원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세세하게 말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것이 이 소설이 취하고자 하는 어떤 태도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남아 있는 어떤 기억들이다. 누군가에 대한 기억이 존재하며 그것을 말하고자 한다는 것은 단순하게는 기억하는 그가 살아있다는 증거이면서, 동시에 다음 세대에게 그 기억과 그 기억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넘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두 개의 장례식은 의미심장하다. 이들의 장례식은 결국 이들을 잊지 않겠다, 기억하겠다는 다짐의 다른 형태일 것이기 때문이다.

 

 

덧.

다만 이 성장소설에 대한 (아마도 부당한) 궁얼거림을 여기에 남겨 놓는다. 사실 어떻게 보면 성장소설은 민감한 문제들을 눙치고 지나가기에 좋은 구조이다. 특히 그런 민감한 문제들이 어떤 사회문제일 때는 더욱 그러한데, 이 소설도 알제리 전쟁이라는 민감한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그 알제리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들은 이 이야기에서 꽤나 중요한 소재가 되기도 한다. 다만 그 소재로 빈번하게 등장하는 데에 비해 이 소설이 알제리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고 있다고 말하기에는 주저하게 되는데, 그것은 물론 이 소설이 성장소설임을 감안하여야 할 것임은 분명하다. 다시 말해서 미셸이 알제리 문제가 당시의 프랑스에 가져다주는 어떤 내적인 허위들을 감지해내기에는 너무 어렸던 것이다.

 

그러나 물론 동시에 하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결국 모든 성장소설은 성장하는 자가 아니라, 이미 성장한 자가 쓰는 것이라는 사실이다(그렇기 때문에 모든 성장소설의 주인공들은 어른 같은 말투와 짐짓 어른 같은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과연 이 소설이 사회주의의 어떤 폭압을 다루는 만큼 국내의 내적인 문제, 그러니까 알제리 전쟁이 가져다주는 문제들을 직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몇몇 꺼림칙한 부분들이 있다. 예를 들어 피에르나 프랑크 같은 청년들의 자원입대나 그들의 치기어린 사상과 그것이 깨어지는 방식에 대한 묘사, 혹은 프랑크의 도피를 이고르가 돕는 것에서 오는 어떤 순진한 시선(물론 이것은 미셸의 시선이므로 그렇기도 하다), 미셸 집안의 부유함에 대한 묘사 같은 것들(예를 들어 이 소설에는 미셸이 알제리에서 온 프랑스인들을 보는 불편함에 대한 묘사 같은 것이 있지만, 그것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단적으로 말해 알제리에 전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프랑스 국내인들도 알제리와 같은 식민지에서 오는 혜택을 같이 누렸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이 단지 미셸이 어머니에게 가지는 반감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너무 순진한 견해일 것이다)이 그렇다. 미셸이 어렸기 때문에 그가 이 문제를 정면으로 파고들 수 없으며, 그것을 세세하게 묘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일리가 있지만, 여전히 그것을 읽는 독자로서의 어떤 껄끄러움은 남아있다.     

 

아무튼 나는 이것으로봐도 낙천주의자가 되기는 틀렸다. 낙천주의적으로 봐야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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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무엇을 보는가

The Book | 2015. 6. 24. 14:04 | Posted by 맥거핀.

용감한 친구들 1 - 8점
줄리언 반스 지음, 한유주 옮김/다산책방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줄리언 반스의 소설 <용감한 친구들>의 원제는 '아서&조지'이다. 아서는 우리가 익히 아는 셜록 홈스의 창조자인 아서 코난 도일이고, 조지는 잘못된 판결로 피해를 본 인물로, 결국에는 이 사건으로 영국 사법 시스템에 상고법원이 생겨나게 만든 사람이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두 인물의 소개에서 대략 짐작할 수 있듯이) 아서가 조지를 도와, 그가 혐의를 벗고 보통 사람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사실 이 한줄로 마무리 짓기에는 충분치 않은 점들이 있다. 아서가 단지 선의에 의해 조지를 도왔다고 보기에는, 그 자신에게도 조지의 사건에 뛰어들어야할 어떤 이유가 있었으며, 조지가 그렇다고 그로 인해 완전히 혐의를 벗었다고 보기는 힘들며, 그 두 사람이 이 사건으로 인해 어떤 중요한 관계를 맺었다고 말하기에도 그다지 충분하지는 않다. 그보다는 소설의 원제, 그 자체에 더욱 충실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아서와 조지. 이 소설은 그 두 사람이라는 인물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이 초점을 두는 것은 조지가 누명을 쓰게 된 이 사건 자체나, 아서와 조지가 잘못된 판결을 뒤집어내는 쾌감이 아니다. 그보다 이 소설이 하고자 하는 것은 아서와 조지라는 이 인물의 모든 것을 천천히 차곡차곡 쌓아내 그려내는 것이다. 단지 분량으로 보았을 때도, 이 중요한 두 인물이 비로소 어떤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은 1권이 끝나고 2권이 시작되는 거의 중반부가 훨씬 넘어간 시점이다. 이 두 사람에게 있어서 그 자신의 삶에서의 큰 사건들은 이미 지나가버렸다. 조지는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사건에 휘말려 교도소에서 복역을 하고 풀려났으며, 아서는 작가로서 성공을 거두고, 아내 투이가 시한부의 삶을 선고받고, 또 훗날 두번째 부인이 된 진을 이미 만나 사랑에 빠진 상태이다. 아마도 그들의 삶에 있어서 이보다 큰 사건들은 앞으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아서와 조지가 만나게 되는 시점에 이미 결말이 시작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아서와 조지가 만나기 시작하는 3장의 제목은 '시작이 있는 결말'이다).

 

이로 인해 가지게 되는 효과는 무엇인가. 적어도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하나의 가정을 제외한다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조지가 범인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하나의 가정'이란 작가가 이를 의도적으로 숨기는 전략을 구사하는 경우이다. 다시 말해서 조지에 대해 가감없이 기술하고 있다고 독자를 믿게 하면서, 동시에 범인이 될 수 있는 단서를 의도적으로 숨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가사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과 비슷한 전략.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이야기는 미스테리를 추적하여, 반전을 만들어내는 것을 꾀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가정은 제외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만...)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미 줄리언 반스의 인도에 따라 그의 인생을 처음부터 봐왔기 때문에 그가 그런 짓을 저지를 인물이 아님을 안다. 이것은 사건 자체의 증거가 가진 허술함이나 그와 관련된 진술들의 빈약함을 보고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단지 그가 그런 짓을 저지를 만한 사람이 아니다, 라는 것을 조지라는 인물에 그 동안 차곡차곡 쌓아 놓은 묘사들과 일화들을 보고 알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아서가 조지를 만났을 때 그가 조지가 무죄라는 것을 '아는 것'과 어떤 의미에서는 비슷하다.

 

"아서 경, 제가...... 간단히 말해서...... 제가 무죄라고 생각하십니까?"

아서는 분명하고 또렷한 시선으로 조지를 내려다본다. "조지, 전 당신과 관련된 기사를 읽었고, 이제 당신을 만났습니다. 제 대답은 이렇습니다. 전 당신이 무죄라고 생각하거나 믿는 게 아닙니다. 전 당신이 무죄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조지로서는 아예 알지도 못하는 수많은 스포츠로 다져진 커다란 운동선수의 손을 내민다.

- 2권 p.30~31

 

물론 이는 독자가 그가 범인이 아님을 아는 것과 유사하지만, 완전히 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에 대한 세심한 기술을 읽은 것이 아니라, 기사를 읽고, 단지 그를 '보았을' 뿐이니까. (책에서도 어떤 힌트가 나오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이는 셜록 홈스의 추리법과 비슷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셜록 홈스의 추리법도 그런 것이었으니까. 홈스는 단지 몇 분의 보는 것, 그러니까 주의깊은 관찰로부터도 어떤 이가 범인이고, 범인이 아님을 밝혀내고는 했다. 다시 말해서 아서에게 있어서 보는 것과 아는 것은 비슷한 것이었다. 보게 되면 알 수 있다고 생각했고, 무엇인가 밝혀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최초의 기억, 그러니까 할머니의 죽음과 그녀의 죽은 몸을 지켜보았던 기억과도 연결이 된다.

 

그러나 사실 이 '보는 것으로 아는 것'은 분명히 어떤 허점이 있다. 예를 들어 그것은 아서가 심령학을 믿고, 그것에 큰 관심을 두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책에 기술된 아서라는 인물로 짐작해 볼 때) 아서가 그것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그것에서 무엇인가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런데 이것에는 허점이 없을까. 대다수의 사람은 설혹 영매가 죽은 사람과 소통하는 광경을 보아도, 바로 이를 믿는다, 혹은 안다,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그 이전에 구축된 어떤 다른 믿음들(이성적인 믿음이거나 혹은 종교적인 믿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서는 강한 자기확신으로 보는 것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고, 이는 그의 단점이자, 동시에 장점이었다. (그러니까 심령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 이전의 이성적인 믿음이나 종교적인 믿음이야 말로 '잘못된 선입견'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이 이야기에는 그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 즉 조지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사실 조지와 아서는 거의 반대편에 서 있는 인물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전형적인 잉글랜드인이자 작가로서 명성과 부를 쌓은 인물, 그리고 인도(파르시) 혼혈인으로서 단지 지방의 평범한 사무변호사라는 외적인 면에서 물론 그렇지만, 동시에 어떤 역설적인 측면에서도 그렇다. 아서는 보는 것을 중시하지만, 그 보는 것에서 생겨날 수밖에 없는 구멍은 그가 겪어온 다양한 삶의 경험과 선의에서 우러난 자기확실성이 메워준다. 반면 조지에게는 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가 보이는 것 이상의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알고 있었지만, 적어도 그 보이는 것에는 수많은 구멍이 있을 수밖에 없음 또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서와 같은 자기확신이 없었고, 보이는 것을 믿으려면 눈에 보이는 그것은 적어도 그 자체로서 논리적인 완결성을 갖추어야만 했다그래서 그는 법의 세계에 빠져든다. 그가 보기에 적어도 법은 일종의 논리적 완결성을 갖춘 체계이기 때문이다(물론 그가 그 법에 의해 삶이 망가지게 된다는 아이러니가 여기에 있기는 하지만). 다시 말해서 그들은 본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측면에서는 다르지만, 보는 것을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그 두 사람의 어떤 좋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보되 선입견을 가지고 보지 않는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아서는 보되, 그것에는 선입견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알고 있었고, 조지는 자신이 보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 보는 과정에는 주의가 따라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소설 속의 다른 인물들은 그렇지 못했다. 조지에게 부당한 혐의를 덮어 씌우는 켐벨 경위나 앤슨 지서장과 같은 인물은 조지의 외양과 가정환경을 토대로 선입견을 가졌으며, 이는 그들에게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어쩌면 이 소설에서는 이런 마무리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조지가, 아서가 죽은 후에 그를 불러내려는 심령추도회에 참석하게 되는 이 마무리 말이다. 즉 아서가 선입견을 가지지 않고 조지의 사건을 받아들였다면, 조지에게도 선입견을 가지지 않고 아서가 믿었던 것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했다.

 

'그는 무엇을 보는가? 그는 무엇을 보았는가? 그는 무엇을 볼 것인가?' 이 소설은 이 질문으로 끝난다. 이것은 조지가 '보는 것'에 대한 질문이면서 동시에 독자를 향해 던지는 줄리언 반스의 질문인지도 모른다. 당신은 이 소설을 통해 무엇을 보는가? 혹은 무엇을 보았는가? 혹은 무엇을 볼 것인가? (그러니까 사실은 이 소설 자체가 어떤 다른 전략을 쓰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당신은 과연 반스가 범인을 숨기는 전략을 쓰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어쩌면 조지가 범인은 아니었을까? 소설은 적어도 '명확하게는' 이를 밝혀놓지는 않는다...하지만 나는 아니라고 믿고 싶다. 그리고 법의 측면에서 보자면 적어도 그가 범인이라는 증거가 없는 한, 그는 무죄라고 추정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나는 반스가 만약 전략을 썼다면 그 전략은 '페어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으며, 그가 그러한 전략은 쓰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의 '페어함'을 믿으니까. 아..이거 선입견인가.) 

 

 

덧.

그리고 이 소설은 현재형의 문장에서 과거형의 문장들로 점점 옮아 온다. 1권에서는 거의 현재형의 문장들인데, 이는 2권에 이르러 점점 과거형의 문장, 그러니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소설에서 읽게되는 익숙한 문장들로 바뀐다. 이는 의도적인 것일까, 아닐까. 만약 의도적이라면 이는 과거형의 문장이 가지는 어떤 무게를 중화시키려는(그러니까 독자가 조지의 결백함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게 하려는, 다시 말해서 과거형은 어떤 것이 '확정적 사실'이라는 인식을 주니까) 의도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글쎄....내가 보기에는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이것이 어떤 명확한 구분이 있지는 않고 과거형과 현재형의 문장이 혼재된 부분도 있으니..(다만 비율로 보자면 2권에 와서 과거형의 문장이 주가 되기는 한다.) 개인적으로는 현재형의 문장들에 익숙하지가 않아서 초반에 진도를 빼는 데 어려움을 겪는 하나의 요소가 되기도 했다. 혹시 단지 번역상의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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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위한 시도

The Book | 2015. 5. 26. 16:04 | Posted by 맥거핀.

 

익사 (반양장) - 10점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문학동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바다 밑 조류가

소곤대며 그의 뼈를 주워올렸다. 떠오르다간 가라앉으면서

나이와 젊음의 계단들을 오르내리다

곧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갔다.

- T. S. 엘리엇, 후카세 모토히로 번역

 

코기를 산으로 올려보낼 준비도 하지 않고

강물결처럼 돌아오지 않네.

비 내리지 않는 계절의 도쿄에서,

노년기에서 유년기까지

거슬러오르며 돌이켜보네.

- p.28

 

두 편의 시가 있다. 작가 조코 코기토가 이른바 '익사 소설'을 준비하면서 떠올린 T. S. 엘리엇의 시와 조코 코기토와 그의 어머니가 같이 쓴 시. 이 시들은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 <익사>에서 계속 반복하여 등장하는 일종의 화두와 같은 시다. 이 시들은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 일단 표면적으로 엘리엇의 시와 코기토 모자가 쓴 시가 모두 다루는 것은 '익사'이다. '강물결처럼 돌아오지 않네'라는 시구는 조코의 어머니가 쓴 것인데, 이는 조코의 설명에 따르면 마을에서 통용되는 말로, 강에서 익사한 사람이나 살아났다 해도 한번 홍수에 떠내려갔던 사람들을 강물결이라고 지칭해 왔다. 그러나 연결되는 것은 이뿐만은 아니다. 이 두개의 익사는 모두 특이하다. 엘리엇의 익사자는 '떠오르다간 가라앉으면서 나이와 젊음의 계단들을 오르내리'고 있고, 코기토 모자의 익사자는 '강물결처럼 돌아오지 않'는 상태에서 '노년기부터 유년기까지 거슬러오르며 돌이켜보'고 있다. 즉 이들은 익사한 상태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오르내리고 있다. 그리고 결국에는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다.

 

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 이것은 이 소설의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과거에 있는 것은 익사와 '익사 소설'이다. 조코 코기토의 아버지는 익사했다. 홍수로 강이 불어난 날, 그는 어린 조코와 함께 '붉은 가죽 트렁크'를 싣고 강을 건너려고 하다가 조코를 돌려보내고 배가 뒤집혀 익사했다. 여기에는 어떤 미스테리가 있다. 그는 왜 어린 조코를 데리고 '붉은 가죽 트렁크'를 실은 채로 강을 건너려고 한 것일까. '익사 소설'은 그것의 의미를 밝혀내려고 이제 나이든 작가 조코가 쓰려고 하는 소설이며, 이 소설 <익사>는 결국 그 '익사 소설'이 소설이 아닌 다른 기이한 방식으로 완수되는 소설이기도 하다.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의 패전이 거의 확실해보이던 시기, 조코의 아버지는 일단의 군인들과 연루되어 있었고, 그 군인들은 이른바 '궐기', 그러니까 전쟁에 진 천황과 함께 폭사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농담이었고,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아버지는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성립시킨다. 그것이 바로 그의 익사이다. 물론 이 간단한 설명은 빈 군데가 많고, 그 '익사'는 여러가지로 달리 해석될 수 있다. 미망인이 된 조코의 어머니처럼 그것을 겁이나 도망치려다 죽은 것으로 볼 수도 있으며, 혹은 ('하나'님의 좋은 리뷰대로) 원령과 빙의자의 문제로 볼 수도 있으며, 결국 천황과의 폭사를 '다른 방식으로' 실행시킨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다른 방식'이란 무엇인가.  

 

여기에는 두 가지의 문제가 관련이 된다. 하나는 아버지가 읽었던 정치 교재로서의 프레이저가 쓴 <황금가지>와 그 속에 등장하는 '숲의 왕'의 신화. 숲의 오크 나무를 지키는 인간신(人間神)이 늙고 쇠약해져 생명력이 다하면 세계 또한 같이 멸망하기 때문에 그 인간신의 생명력이 쇠약해지는 징후가 보이면 강건한 후계자가 그 전에 그 인간신을 죽여 영혼을 옮겨받아, 세계의 쇠퇴와 파괴를 막는다는 이야기. 이를 어떤 정치적 텍스트로 읽으면, 당시의 군인들과 아버지가 벌이려던 일을 이에 연관지을 수 있다. 즉 전쟁의 패배가 불러오는 국가의 위기, 혹은 세계의 쇠퇴를 회피하기 위해서는 쇠퇴한 인간신, 즉 전쟁이 패배했음에도 죽지 않은 천황을 죽이고 새로운 후계자를 세워야만 한다고 믿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하나인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과 연관이 된다.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에서 '선생님'은 친구를 죽게 만든 죄책감을 가지고 자살하며 그 유서를 화자인 '나'라는 청년에게 남긴다. 그러나 이 죽음은 단순히 개인적인 이유라고 말할 수만은 없다. 거기에는 이것이 덧붙여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창 더운 여름날, 메이지 천황이 서거했습니다. 그때 나는 메이지 정신이 천황에서 시작해서 천황으로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장 강렬하게 메이지의 영향을 받은 우리가 그 후에도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시대에 뒤처지는 것이라는 느낌이 사무치게 나의 가슴을 파고 들었습니다. 나는 아내에게 솔직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아내는 웃으면서 상대하지 않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그럼 순사(殉死)라도 하지 그래요, 하면서 놀렸습니다. (......) 나는 아내를 향해, 만약 내가 순사를 한다면 메이지 정신을 따라 순사할 거라고 대답했습니다. - 나쓰메 소세키 <마음> 중에서, <익사> P.183~184에서 재인용"

 

다시 말해서, 아버지가 죽을 것을 알면서 불어난 강에 배를 띄운 것은 단지 농담에 그친 군인들과는 달리, 일종의 정치적인 시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소멸되려고 하는 일본 제국과 같이 순사하는 것이기도 하며, <마음>의 '선생님'과 통하는 것이기도 했다. 즉 아버지나 '선생님'은 당 시대의 시대정신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스스로 민감하게 느끼고 있었으며, 스스로를 소멸시키는 것으로, 당 시대의 소멸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새 시대를 이끌 강건한 후계자를 세우기 위한 시도였기도 했다. <마음>의 '선생님'은 청년에게 '기억해주세요. 나는 이런 식으로 살아왔습니다.'라고 말하며, 한편 아버지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다이오의 해석에 따르면 아버지가 코기를 배에 태운 순사 시도는, 단지 그의 죽음만이 아니라, 자신이 죽어도 자신의 후계자로 조코를 세우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원령과 빙의자의 문제와도 연관된다. 즉 <마음>의 청년이 원령을 이어받는 빙의자가 되어 후계자가 되는 것이라면, <익사>의 코기토는, 혹은 결국 익사를 시도하는 다이오는 아버지의 원령을 이어받는(혹은 이어받는 데에 결국 실패하는) 빙의자가 된다. 그리고 다시 이것은 더욱 거대한 시대정신과 연관이 되는데, 메이지 시대의 종언과 일본 제국의 소멸이 그것이다.

 

..........................................

 

그런데 여기에는 분명히 어떤 미심쩍음이 남는다. 원령과 빙의자라는 이 기이한 관계는 차치하더라도, 시대를 따라, 혹은 시대정신을 따라 순사한다는 어떤 극우적인 껄끄러움 말이다. 그것은 이런 물음으로 대체할 수 있는데, 이 새로운 빙의자들은, 즉 <마음>의 청년이나, <익사>의 조코 코기토나 다이오는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는가? 사실 다이오나 그의 스승, 즉 조코의 아버지는 모순되고 이중적인 인물이다. 조코의 아버지는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를 정치적 텍스트로 읽도록 권유받았지만, 그것의 문학적인 아름다움에도 어쩔 수 없이 이끌리는 인물이었으며, 천황과 같이 폭사하자는 계획에 동참했지만, 그 폭사를 위해서 마을의 오래된 숲을 훼손하는 것에는 격렬하게 반대하기도 했다. 그것은 '다이오'라는 인물도 마찬가지인데, 그 자신이 전쟁에서 한 팔을 잃은 희생자이지만, 극우적인 청년을 기르는 훈련도장을 이끌기도 하며, 또 동시에 새로운 시도를 하는 조코와 아사 등의 무리와도 관계를 맺고 그를 이해하려고 공부를 하기도 한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조코도 마찬가지인데, 그는 아버지의 익사를 비판적인 눈으로 보며, 그것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지만, 또한 동시에 군국주의적이고 극우적인 찬가에 눈물을 흘리거나 장애를 가진 아들에게 폭력적인 언사를 내뱉기도 하는 인물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시대를 비판하고 새로운 것을 열망하면서도 바로 그 시대가 가지는 폭력적인 요소들을 받아들이고 있는 모순적인 인물들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오에 겐자부로가 보기에) '전후 일본'이라는 세계의 반영이기도 했다. 전후 일본은 바로 그런 시기였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반성한다고 하고, 전쟁 이후의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겠다고 했지만, 실제로 아무 것도 반성된 것은 없고, 약한 자들에 대한 폭력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이는 책의 표현을 따르자면 일종의 붕괴의 지속이다. 엘리엇의 <황무지>의 한 구절 'These fragments I have shored against my ruins'를 조코는 지금까지 '이런 글 조각 하나로 나는 나의 붕괴를 지탱해왔다', 즉 붕괴되지 않도록 글 조각 하나에 의지하여 버텨왔다는 식으로 해석해왔다. 그러나 그 해석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조코는 깨닫는다. 사실 정확한 해석은 지금도 나는 붕괴 위기에 처해있고, 그 '붕괴라는 양상'이 '글 조각 하나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닐까, 라고 조코는 생각한다(아마도 그 붕괴를 막기 위해서 거대한 현기증은 그를 엄습하는 것일 터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이 일본의 '현재'이기도 하다. 다가올 붕괴를 막기 위해서 유지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붕괴되고 있었고, 바로 그 '붕괴 상태'가 유지되고 있는 상황. 즉 붕괴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지속되고 있다. 여자들은 강간당했으며(위안부 문제), 그리고 지금도 강간당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현재이다. 그렇다면 이 현재에는 희망이 없을까.

 

소설 속에는 그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있다. 바로 조코의 여동생 아사라든가, 그의 아내 치카시, 그의 딸 마키, 조코의 이 '익사 소설'을 연극으로 만들려고 하다가 알게 된 우나이코와 릿짱과 같은 여성들이 그들이다. 이들이 희망처럼 보이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라고 말할 수 있는데, 하나는 이들이 만들어내고자 하는 연극이다. 이들이 만들고자 하는 '죽은 개를 던지다' 방식의 연극은 일방통행적인 연극이 아니다. 그것은 관객을 실제로 연극의 주인공으로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는 방식의 일종의 토론극이며, 새로운 형식일 뿐더러 더욱 많은 지지를 얻은 쪽이 승리하는 민주적인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공동체와 어떤 특유의 소통방식이다. 이들은 소설 속에서 끊임없이 연극, 편지, 독백 등의 다양한 방식의 소통을 시도하며 새로운 방식의 공동체를 만들어나간다. 이들의 소통과 공동체 결성은 위의 남자들의 시도와 대비되는데, 예를 들어 원령과 빙의자라는 으스스하고도 폭력적인 시도는 논외로 하더라도, 소설 속에서 이 남성 중심의 관계들은 단절의 양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와 코기토는 익사라는 형식을 통해 단절되어 있으며, 코기토와 그의 장애를 가진 아들 아카리는 직접적인 소통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그리고 이러한 여성 공동체의 시도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영화 <'메이스케 어머니' 출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메이지 유신의 시대, 구체제의 '번'이 아닌, 새로운 국가의 '군'에서 파견된 군대에 대항하여 '메이스케 어머니'와 '환생한 메이스케'가 벌이는 여자와 아이들이 중심이 된 이 봉기(여기에도 다시 이 원령과 빙의자가 등장한다. '메이스케'와 '환생한 메이스케'). 이것은 이 아사, 우나이코, 릿짱, 마키, 치카시 등이 만들어내는 일종의 여성 공동체의 원형이며, 남성 중심의 부계 사회에 맞선 모계 사회로서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과거와 현재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다시 남성들에 의해 파괴되는데, 과거에서는 '메이스케 어머니'가 과거 '번'의 구세력들에 의해 강간당한다면, 현재에서는 우나이코가 큰아버지로 대표되는 구세력들에 의해 강간당한다. 다시 말해서 이는 이렇게 볼 수 있는데, 남성들은 시대정신이니 시대의 종언이니, 후계자를 세우느니 하며 법석을 떨었지만, 사실은 '번'이 '국가'로 바뀌거나, '쇼와'가 '헤이세이'로 바뀌었을 뿐, 실제로는 달라진 것이 없는 것이다. 남자들과 그들이 만든 국가는 여전히 강간하고 있고, 약자들(물론 이 약자들에 남성이지만 장애를 가진 '아카리'와 같은 인물들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은 여전히 피해를 당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을 새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부계사회가 모계사회로 바뀌는 정도는 되어야 새 시대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다시 반복되는 익사를 통해 다이오 혹은 조코의 아버지와 같은 모순적인 중간자적 인물(전쟁에서 패배했고, 반성한다고 말하지만, 그 반성은 행동으로 수행되지 않으며 과거의 향수에 어느 정도 사로잡혀 있는)은 시대에서 퇴장하지만(위에서 말했듯이 작가의 분신인 코기토도 그렇게 크게 다르다고 말할 수는 없으므로, 이것에는 결국 오에 겐자부로 자신과, 더욱 철저한 비판이 기반이 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지 못하고 있는 동시대인 모두를 향한 일종의 자기반성이 들어있을 것이다), 그 내용보다 이 소설 <익사>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새로운 여성 공동체를 구축하려는 시도에 대한 그치지 않는 묘사이며, 그러한 묘사를 표현하는 이 소설의 특유의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서사 중심의 소설이 아닌, 일종의 특이한 논픽션 형태로서의 소설 형식이기도 하고(예를 들어 자신의 예전 소설들을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작가의 이름을 조코 코기토라고 하는 식의 시도 말이다), 편지글이나 대화글을 어떤 설명 없이 연결짓는 낯선 시도이기도 하며, 소설과 연극, 영화 등의 적극적인 크로스를 그대로 글에 풀어놓는 방식이기도 하다. 즉 이 소설은 그 내용을 과거의 형식이 아닌 새로운 형식에 담아냄으로써 보다 미래지향적으로 보인다.

 

그것이 미래지향적이라는 것은 물론 이 소설이 새로운 세대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에도 그렇다. 그것은 우나이코 등이 만들어내는 연극이 중학생과 같이 자라나는 세대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그것에 계속 반대를 하고, 폭력을 가하는 인물들이 교육에 관계된 인물(예를 들어 우나이코의 큰아버지가 교육 행정에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라는 설정)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 소설의 1부의 제목은 '익사 소설'이며, 그 익사 소설은 결국 소설 속에서 쓰여지지 않는다. 그것은 이 '익사 소설'이라는 과거가 결국 다시 쓰여지지 않아야 함을, 그것은 코기토 세대의 종말로 인해 끝나야함을 상징한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 여자들이 우위에 서며 가능성이 모색되고(2부의 제목 '여자들이 우위에 서다'), 그것은 미래 세대를 위한 교육의 문제에 이른다. 그것은 우나이코의 강간이 다시 반복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미래 세대를 위한 교육은 중단될 수 없다. 그들은 과거와는 근본부터 다른 세계를, 붕괴가 지속되지 않는 세계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처음의 시로 돌아간다면 조코의 어머니는 조코에게 물었다. '코기를 산으로 올려보낼 준비'를 하지 않느냐고 말이다. 산으로 올라간다,는 것은 죽음을 대비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코기토가 죽은 이후의 세계에 대한 대비, 즉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들 아카리와 같은 약한 자들도 마음껏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내기 위한 준비를 해야하지 않겠는가,라는 의미도 될 것이다. 그 새로운 세계가 그런 세계일지 아무도 장담할 수는 없지만, 노작가는 적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든 하려고 하는 것 같다.

 

그것이 "그러고는 무성하게 우거진 풀숲에 고여 생긴 빗물 웅덩이에 얼굴을 담가, 선 채로 익사할 따름(p. 427)"이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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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의 윤리학

The Book | 2015. 5. 22. 14:17 | Posted by 맥거핀.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10점
구병모 지음/문학과지성사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책의 표지가 인상적이다. 아무 무늬도 없는 노란 바탕을 세로로 가로지르고 있는 검은 틈. 그리고 그 검은 틈 사이에서 불길하게 삐져 나온 것처럼 다음의 열 글자가 그 틈새 옆에 자리잡고 있다.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오래 들여다보면 빨려들어갈 것 같은 검은 틈. 이 틈새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눈앞의 어둠은 아까보다 부피가 커져 있었다. 틈에서 벌레 떼처럼 기어 나온 어둠은 부분부분이 거의 동일한 명도였는데도 어딘가 주름이 잡힌 느낌을 주면서 원근감을 자아냈다. 어둠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 같았고 가장 깊은 암부에는 소실점이 있을 것만 같았다. 사라지는 지점이라니, 지금의 자신이 가장 원하는 자리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미온은 구멍에 손을 넣었다.

- p.94 <관통貫通> 중에서

 

이 틈새는 관통할 것을 유혹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어쩌면 소설이라는 것이야말로 그런 관통의 욕망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종종 소설을 통해 다른 세계를 엿본다. 소설의 지면에 있는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작은 틈은 점점 벌어져, 그 틈새로 들어오라고 우리를 유혹한다. 지금의 이 현실이 어떻든 그것은 상관이 없다. 아, 나는 좁은 지하철 속에서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얼마나 그 틈새를 은밀하게 들여다보았고 들어갈 것을 욕망했던가. 아마도 <관통>의 미온은 그 유혹을 이겨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처음에는 손을 밀어넣다가, 결국에는 그 틈새로 다리를 밀어넣고, 그 구멍을 통과했을 것이다. 그리고 구멍을 통과한 그녀는 날렵해지고 우아해진 몸매와 3분백 내지는 영희백이라고 불리는 자그마한 보스턴백과 태어나 처음보는 옥색 실크 블라우스와 천장이 높고 빛이 잘 드는 이층집 화실과 전도유망한 신인작가라를 타이틀을 얻었다. 그것은 '단순명료하며 속물적이고 몰개성적'이지만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는가, 그저 좋다. 그런데...구병모는 불안한 후기를 거기에 덧붙인다. 이편의 세계에 아직 놓여져 있는, 사업을 수차례 말아먹고 어딘가로 사라져 잘 연락도 되지 않는 남편과 난장판이 된 원룸, 악을 쓰고 있는 정신질환을 앓는 시누이, 미온이 유명한 화가가 되어 한몫 챙겨다주리라는 가망 없는 꿈을 믿었던 친정이라는 현실을 피해 미온이 끌고 나왔던 재활용쓰레기 장에서 주워온 낡은 유모차와 그 안의 울고 있는 아기, 그리고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이 내린 '무책임한 부모들이 술이나 인터넷 게임에 빠져 아이를 깜빡 잊어버린 부주의 소행 또는 정신 질환자에게서 나타나는 자아 망실 행위의 일환'이라는 진단. 이것들은 다 무엇인가. 이것을 무엇이라고 불러도 좋을까. 혹시 이것을 일종의 '재난'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가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우리를 들여다본다,라는 니체의 유명한 말을 이렇게 비틀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틈새를 들여다보면 틈새도 우리를 들여다본다. 틈이 생기면 어떻게든 들어가보려고 애쓰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이지만, 어찌 그 틈새에 좋은 것만, 그러니까 보스턴백이나 옥색 실크 블라우스와 이층집 화실같은 것만 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그래서 어린아이들은 틈만 나면 좁은 틈새로 기어들어가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그때마다 부모의 우악스러운 손에 잡혀 질질 끌려나오게 되는 것이다). 현실이 갈라진 틈새에서는 때로 이상한 재난이 몰아닥친다. 예를 들어 영화 <미스트>. 기분나쁜 짙은 안개가 순식간에 현실을 감쌌고, 그 안개 사이에서는 무시무시한 '그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기괴한 '그것들'은 다른 차원에서 왔다.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열어서는 안되는 틈을 열었고, 그 틈 사이로 '그것들'은 이쪽으로 건너왔다. 이상한 재난, 초현실적인 재난. 구병모의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의 단편들이 그리는 세계들도 이러한 초현실적인 재난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파르마코스>의 지독한 가뭄과 입에서 벌레를 내뿜는 여인이 불러오는 물, 혹은 <식우蝕雨>에서 모든 것을 부식시키는 강한 산성의 비, <이물異物>에서 다세대 주택 부엌에 나타난 이름모를 거대한 생물, 아니면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에서 보여지는 덩굴손 비슷한 무엇인가로 변하는 사람들. 그것들은 근원을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하고 불길한 거대한 재난의 형태이다. 아니, 어쩌면 이렇게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무엇인가만 재난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터였다. <이창裏窓>에서의 아이의 죽음이나, <어디까지를 묻다>에서의 카드사 콜센터에서의 일들, 혹은 위의 <관통>에서 미온이 겪는 일들도 일종의 재난이라고 부르면 안될 이유가 있을까. 그 일들은 보다 현실에 가깝게 발을 딛고는 있지만, 역시 근원을 알 수 없으며, 불가사의하기는 마찬가지다.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그들은 이유를 전혀 모른채로, 어느 틈에 그 재난의 한가운데에 놓여져 있다. 어찌할 줄을 모른채로.

 

그러나 영화 <미스트>가 단지 재난의 양상과 스펙타클을 그려내는 데에 그치지 않고 어떤 윤리적인 질문을 하려는 것처럼 보였던 것과 마찬가지로(그래서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의 '안개'를 홀로코스트의 '가스'와도 연결짓는 질문들이 있었다), 구병모의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은 그 재난 속에서 어떤 윤리를 묻는 것처럼 보인다. 그 윤리적 질문은 때로 노골적이기도 하고(<파르마코스>), 보다 은밀하기도 하며(<식우>), 때로는 관찰자의 시선에서(<덩굴손증후군의 내력>), 때로는 가해자의 시선(<이창>)이거나, 혹은 피해자의 시선(<어디까지를 묻다>)에서 이 재난 속에서 작동하는, 혹은 작동했었어야만 하는 윤리에 대해 묻는다. 그러나 그 질문은 불명확하며, 때로는 질문이 명확한 것처럼 보일 때에도 그 답을 내리기는 적어도 구병모의 소설들에서는 쉽지가 않다. 그래서 쉬운 길은 이야기 속에서 처음부터 배제되어 있고, 종종 인물들은 여러 중첩된 질문 속에서 갈 길도 없이 내버려진채 이야기는 갑자기 막을 내린다. 그러니 덩그러니 놓여진 우리들은 복잡한 마음들을 보다 쉬운 형태로 바꿔 하릴 없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이물>의 양선은 어떻게 되었을까, 같은 쉬운 형태로 바꾼, 질문만 있되, 답이 돌아오지 않는 질문들을.

 

방난이 데려온 게 아닌 이상 손대면 깨질 유리처럼 거리를 두어 대해야 할 까닭은 없으므로 긴장이 풀린 양선은 무심코 놈의 털을 쓸어 넘기고,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드러난 놈의 눈꺼풀이 꿈틀거리며 열리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그 눈동자는 평화로운 숙면을 방해하는 자를 확인하려는 듯 양선을 정확히 응시하더니

- p.210 <이물>의 마지막 문장

 

돌아오지 않는 답. 그것은 이 소설의 인물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구병모 특유의 만연체는 이 소설들과 묘하게 어울리는 면이 있는데, 이 소설 속의 인물들은 아무도 듣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무엇인가를 말하려 애쓰는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작품 전체가 긴 독백의 형태로 이루어진 <이창>이나 <파르마코스>, <어디까지를 묻다>와 같은 작품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소설 속의 인물들은 대체로 어떻게든 무엇인가를 최대한 말하려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이 이 재난 속에서 얼마나 윤리적인지를, 혹은 자신이 왜 이 재난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지를. 다시 말해서 그것은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이라는 단문으로 요약된다. 다시 영화 <미스트>로 돌아간다면 기도하는 말많은 자들이 결국 원했던 것은 '그것들'이 내가 아닌 다른 누구를 잡아가는 것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즉 이 재난들은 어떤 질문들을 하기 위해 마치 만들어진 공간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 <미스트>의 슈퍼마켓이라는 한정된 공간이 마치 다양한 인물군상을 몰아넣고 만든 인위적인 실험실처럼 보였던 것처럼, 구병모 소설의 재난들은 제한적인 기이한 형태로 몰아닥친다. <이물>의 생물은 거기 그 좁은 부엌에 그냥 웅크리고 있을 뿐이며, <식우>의 강산성비는 그 도시에서만 내리는 것처럼 보이고,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이나 <파르마코스>의 기이한 현상들도 한 도시 혹은 한 마을에서만 일어나는 제한적인 현상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이 좁은 도시 혹은 마을에 가해지는 일종의 징벌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모두가 자신의 입장만을 이야기하는 일방통행의 좁은 세상, 단지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원하는 세상에 내리는 (결국 반복될 수 밖에 없는) 징벌.

 

그러나 무엇인가 자신의 입장을 열심히 얘기하려 하는 이들을 비난만 할 수 있을까. 재난이 가장 먼저 집어삼키는 것은 늘 그랬듯이 가장 약한 자들이고(예를 들어 <식우>의 강한 산성 비가 먼저 부식시키는 것은 결국 약하고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약하고 궁지에 몰린 자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열심히 어필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그 반대로 강한 자들은 결코 무엇인가를 먼저 말하는 법이 없다. 늘 그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자들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말을 많이 한단 말인가). 소설이라는 것의 가능성도 어쩌면 그런 것은 아닐까. 소설은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자 애쓰는 이들의 것이고, 아무 이야기도 내뱉지 않는 것보다 적어도 무엇인가를 이야기해야만 어딘가에 가닿을 가능성이라도 생긴다. 그것은 예를 들어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의 U가 무심결에 덩굴손 줄기들에 손을 뻗어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자 애쓰는 것이며, <어디까지를 묻다>의 카드사 상담원이 예전 성우였던 택시기사를 알아보고 그에게 예전의 애니메이션에 나왔던 대사를 들려달라 청하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물>의 양선이 무심코 놈의 털을 쓸어 넘기고 그의 눈동자를 마주하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 이물은 결국 양선 자신이거나 혹은 방난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는 이 재난 속에서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을 말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는 약한 자들. 그것은 U와 덩굴손들, 그리고 카드사 상담원과 택시기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약한 자들은 약한 자들을 알아보는 수밖에 없으며, 닿지 않는다 생각해도 어떻게든 얘기를 하려고 애써 보는 수밖에 없다. 가득한 재난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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