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번뇌를 안고 죽어갈 것인가

Ending Credit | 2015.12.29 23:16 | Posted by 맥거핀.

 

 

가끔 이야기가 만나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다. 김영하의 <읽다>에 인용된 신형철의 이 글(<정확한 사랑의 실험>에 나온 글이다.)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를 이야기하는 글이지만, 그것은 최근에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약속된 장소에서>를 떠올리게 했다.

 

<롤리타>라는 소설을 읽지 않아도 된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롤리타 콤플렉스'라는 말이 있지만, 그 말은 한 인간을 이해하는 말이 아니라 오해하는 말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사내를 이해하는 길은 오로지 그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방법밖에 없다. 제대로 읽기만 한다면 우리는 '롤리타 콤플렉스'라는 말을 집어던질 수 있게 될 것이고, 무죄추정의 원칙을 새삼 되새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깨닫게 될 것이다.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읽다> p.153~154)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를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전에 먼저 전채요리 격으로 하루키의 이 책 <약속된 장소에서>를 읽었다. 세기말의 일본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는 옴진리교의 지하철 사린 사건을 하루키가 접하고, 그들이 어떤 집단인지를 탐구하기 위해 옴진리교 신자(옛 신자)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묶은 하루키의 이 책은 (이렇게 표현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예상보다 재미있었다. 하루키가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지하철 사린 사건의 피해자들을 인터뷰한 <언더그라운드>와 대칭을 이루는 책이지만, 그 구성은 약간 다르다. 피해자들의 진술을 묵묵히 그대로 들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던 <언더그라운드>와 달리 <약속된 장소에서>의 하루키는 조금 더 적극적이다. 그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에 있어서는 적극적으로 질문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반박도 서슴치 않는다. 그리고 책의 말미에서 심리학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들의 세계를 읽을 수 있는 하나의 독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이들의 이야기를 거름망 없이 그대로 읽었을 때의 어떤 '위험'을 하루키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느낀 어떤 '재미'라는 것도 그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나중에 또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들에게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 흔히 종교집단에 빠지는 사람들을 비논리적이거나, 감정적, 혹은 단순하다고 보는 경향이 있는데, 이들은 적어도 어떤 면에서는 매우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다. 이들은 사회의 일반적인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것이 논리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의 빈틈을 옴진리교가 파고 들었다. 즉 이들은 현세가 가지는 어떤 가치들 혹은 현세 그 자체에 대해 '의문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 의문들이 주는 '번뇌'를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그 '번뇌'를 해소시켜 더 높은 차원의 인간(혹은 다른 무엇)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옴진리교에 빠져들었다. 옴진리교는 그들의 의문에 대해 해답을 주었고, 존사(아사하라 쇼코)는 그 의문을 알기 쉽게 그들에게 풀어주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우리 누구나가 느끼는) 사회가 가지는 수많은 모순들과 의문들, 그 의문들에 답을 얻고 그것으로 번뇌를 벗어날 수 있다면 적어도 그것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심리학자는 그것을 반대로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말이죠, 번뇌와 소모가 없다면 종교가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번뇌를 버리면 그 사람은 이미 부처니까요. (번뇌를 버리는 건 수행이 아니로군요.) 네. 그건 이미 부처지 인간의 수양이 아니에요. 그러나 우리는 신이나 부처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제 번뇌가 사라졌나 싶으면 여전히 남아 있는 거죠......(중략) 그래서 그런 수준의 (옴진리교) 사람들은 번뇌와 더불어 살아갈 힘이 조금 부족합니다. 안타깝긴 하지만요. 하긴 다른 방향에서 보면, 우리 범인(凡人)보다는 순수하거나 매사를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식으로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래도 그건 역시 엄청나게 위험한 일입니다. 그 사람들이 모두 부처의 나라로 간다면 상관없겠지만, 이 세상에 머물러 있는 한은 상당히 큰일이죠. 그래서 저는 인간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번뇌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역시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약속된 장소에서> p.289~299)

 

번뇌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불가능한 인간들, 혹은 번뇌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즐겨 다루는 인물들도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아들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맞닥뜨린 부모들, <환상의 빛>의 남편이 왜 죽었는지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여자, <걸어도 걸어도>의 죽은 아들(또는 형)의 빈자리를 안고 살아가는 가족, 혹은 <아무도 모른다>의 자신들을 버리고 떠난 엄마의 부재를 안고 살아가는 아이들. (그리고 <디스턴스>에서는 옴진리교 사건을 둘러싼 피해자들과 가해자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그것을 '남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어떤 과거의 사건들이 남긴 잔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즐겨 그리기 좋아했던 인물들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무엇인가 답을 알고 싶어했지만, 이미 떠난 사람들은 아무런 답도 그들에게 주지 않거나, 혹은 이미 줄 수 없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신작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인물들은 어떨까. 이야기는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시작한다. 다시 말해서 이야기는 남아있는 사람들 속에서 시작한다. 15년 전 집을 떠난 아버지의 부고. 그 부고를 듣고 두 여동생과 같이 살고 있는 큰딸 사치(아야세 하루카)는 자신은 가지 않겠다며, 동생들을 대신 보내지만, 마음을 돌려 뒤늦게 장례식장에 나타나고 거기에서 아버지의 두번째 부인이 낳은 딸, 그러니까 이복동생 스즈(히로세 스즈)를 만난다. 그리고 사치는 이제 갈 곳이 없어진 스즈에게 같이 살 것을 권한다. 다시 말해서 사치는 고레에다 인물들의 자장 속에 있다. 아무 답을 주지 않는 인물이 떠나며 남긴 잔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 번뇌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다시 그리려고 하는 것일까.

 

그런데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고레에다 감독이 그려냈던 것이 단지 번뇌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 자체만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가 즐겨 그렸던 것은 바로 그들의 '시간'이었다.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 속에서 그들은 항상 긴 시간을 지나왔다.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에서 그 흔한 플래시백은 찾아보기 힘들다. 과거로 돌아가 그들에게(정확히 말하면 영화를 보는 우리들에게) 어떤 해답을 주는 것을 그는 반칙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대신에 그 긴 시간들을 묵묵히 견뎌내는 쪽을 늘 택했고, 그래서 감독의 영화에서 자주 나타났던 것은 플래시백이 아니라, 긴 시간의 서술이었고, 그에 따른 시간의 점핑이었다. (이 영화에서도 수많은 예를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영화의 초반부 출발하려 하는 기차에서 사치가 스즈에게 같이 살자고 제안한 후, 그것에 뒤이어 바로 스즈가 세 자매를 찾아오는 씬이 붙는 것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간의 점핑은 어떤 급작스럽다는 느낌을 관객에게 주지 않는다. 그보다는 도리어 그들의 긴 시간을 관객이 같이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같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 그것을 이렇게 바꿔서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번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보다보면 문득 이상한 씬의 연결이라고 느껴질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영화의 초반부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나고 아버지가 살던 마을을 돌아보던 세 자매에게 스즈가 아버지가 남긴 유품이라며 오래된 사진을 들고 오고, 세 자매가 추억에 빠져 사진을 들여보던 장면이 있다. 통상적인 영화 문법이라면 여기에서 세자매의 시점 숏, 그러니까 사진을 보여주는 컷을  끼워넣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감독은 끝끝내 사진은 보여주지 않고, 그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매들의 옆모습만 비춘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 세 자매는 스즈에게 마을에서 네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어디냐고 묻고 스즈는 산에서 마을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조망이 좋은 곳으로 그녀들을 데려간다. 그리고 자매들은 스즈에게 마을의 풍경이 지금 우리가 사는 곳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그러면 이때쯤이라면 한번쯤 마을의 조망컷을 끼워넣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지만, 감독은 여전히 그것을 관객들에게 제공해 줄 맘이 없다. 뒤늦게서야 그 조망을 바라보는 (스즈를 포함한) 네 자매의 뒷모습을 비추며 조망컷을 멀리에서 살짝 제공할 뿐이다. (비슷한 예는 후반부에서 찾을 수도 있다. 배 안에서 불꽃놀이를 보는 아이들, 그것을 보여주며 화려한 불꽃놀이를 보여줄 법도 하지만, 고레에다 감독은 검은 밤바다에 비친 흐릿한 색으로만 그것을 보여주거나 불꽃놀이에 넋이 빠져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만 비춘다. 그리고 뒤늦게 회사 옥상에서 동료들과 불꽃놀이를 보는 둘째 요시노(나가사와 마사미)의 컷을 여기에 연결시키며 그들의 뒷모습과 함께 이 불꽃놀이를 살짝 보여준다. 마치 "이렇게라도 살짝 봤으니까, 됐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러니까 여기에서 고레에다 감독은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진이나 조망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그것을 추억에 빠져서, 혹은 자신들의 마을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보고 있는 자매들의 리액션을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 때 이런 질문이 혹시 가능하지 않을까. 자매들의 (다른 무엇인가를 보는) 옆얼굴, 혹은 뒷모습을 보는 이 시선은 누구의 시선일까. 아니, 나는 그것이 죽은 아버지의 시선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대신에 단지 감독은 우리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이들을 같이 지켜봐 주기를 바라는 게 아닐까,라고 묻고 싶다. 그들의 긴 시간을 같이 지켜보자, 감독은 우리 관객들에게 이렇게 권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어쩔 수 없이 혼자 찍혀야하는 컷을 제외하고는 카메라는 좀처럼 인물을 혼자 잡는 법이 없다. 자매들은 늘 둘이나 셋이 함께 카메라에 잡혀 있고, 카메라는 집안의 어딘가, 혹은 바깥의 어딘가에서 묵묵히 이들을 지켜보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유령의 시선이지만, 그러나 절대 으스스하지 않다. 그것은 어쩌면 이들의 죽은 아버지나, 혹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떠나가고 이들을 대신 키워준 외할머니의 시선일 수 있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묵묵히 물러나 이들의 대화를 무심히 지켜보거나 이들의 무엇인가에 열중한 뒷모습을 잡는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카메라에 대고 우리가 사이가 좋거나, 혹은 좋아졌어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에 영화는 그저 둘이나 셋, 혹은 네 명 전체가 같이 있는 모습을 카메라를 통해 긴 시간 묵묵히 보게 만든다. 이 이상의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그러니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말을 놓아도 될까,라며 쭈뼛거리던 자매들이 왜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 쓰잘데 없는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는지. 매실주를 한잔만 마시고도 기절해버리던 소녀가 어떻게 독하게 담궈진 매실과 그렇지 않은 매실을 구별해 언니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있는지 말이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혹시 있었을지 모를 번뇌가 어떻게 되었는지 말이다.

 

아니 나는 그들에게 있어서 번뇌가 사라졌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약속된 장소에서>의 심리학자의 말대로 사람이 번뇌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할 테니 말이다. 그러나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를 통해 한가지를 아주 어렴풋하게 생각해 볼 수는 있을지도 모르겠다.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할지 몰라도, 그 번뇌와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은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번뇌에 이길 수는 없지만, 지지않을 수는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그것은 긴 시간 동안 견뎌내며 그것들을 오래동안 지켜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물론 쉬운 것이 아니다. 긴 시간을 견뎌내는 것은 힘들고, 어딘가에서 옴진리교와 같은 쉬운 답이 호시탐탐 빈틈을 노리며 기다리고 있으니까 말이다. 어떻게 번뇌를 품고 살아갈 것인가. 이것을 이렇게 바꿔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떻게 번뇌를 안고 죽어갈 것인가. 고레에다 감독의 이 영화는 장례식으로 시작해서 장례식으로 끝나는 영화다. 그런 영화다.

 

 

 

- 2015년 12월, 메가박스 코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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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6.01.03 14: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번뇌가 안고있는 범위는 무한해서 번뇌의 자락이 스치지 않는 인생살이가 없을것 같고 꿈속에서조차 번뇌는 나타나는것 같아요.

    제가 본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들(그래봤자 4편이지만)은 모두 한 번만 보고 다시는 볼 엄두가 안났었어요. 이천년대 초반에 본 <원더풀라이프>는 다시 볼 수 있을것 같긴합니다. 스토리자체가 거의 희미해져서요.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연말에 보려했는데 연초로 미뤄지고 말았어요. <대호>는 보셨어요? 전 <스타워즈 에피소드7> 재밌게 봤습니다. 세대는 바뀌어도 은하계와 서사는 반복되고 그래도 보게되는 스타워즈네요.

    크리스마스, 연말 새해로 이어지는 일주일이 이렇게 속절없이 지나갔네요.
    뭔가 붕 뜬 느낌의 시간들이었는데 풍선이 터지듯 아니면 풍선의 공기가 빠져나가듯 그렇게 연휴가 끝나갈 것 같아요.

    작년엔 영화보다는 책 특히 소설에 대한 리뷰 많이 올려주신 해로 기억될것 같습니다. 이곳에 들어와 리뷰를 읽고 이런저런 생각을하고 뭔가를 떠올리고 답글을 달았던 시간들은 제게 참 소중했구나 싶었어요. 올해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어제는 도서관에 갔다가 <디아스포라 기행>이 있어서 빌려왔습니다. 이 책 제기억이 맞다면 몇년전 추천해주신 책인것 같아요.(그때가 언젠데 이제서야 -_-;;)지금 읽고있는데 디아스포라 라는 범위가 얼마나 폭넓고 층위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지 알아가는 중입니다. 알게 해 주셔서 고마워요.

    새해에도 좋은 책들 영화들 즐거이 보시고 리뷰도 올려주세요.
    무엇보다 건강하셨으면 좋겠고 늘
    건필하시길 바라구요. 새해 복 많으세요! ^_^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6.01.04 22: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는 개인적으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 중에서 반복해서 보는 게 있고, 이상하게 볼 엄두가 잘 안나는 영화가 있습니다. 반복해서 많이 보는 것은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같은 거고, <아무도 모른다>는 이상하게도 다시 볼 엄두가 나질 않아요. 특히 막판에 아이가 죽는 장면 같은 거는 다시 못 볼 것 같습니다.

      <대호>는 볼 생각이 있었는데, 아직 못봤구요. <스타워즈 에피소드7>은 보러갈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요..사실 스타워즈 시리즈를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어요. 이야기를 대강은 알고 있는데, 그래서 그런가 볼 생각이 크게 나지는 않네요.)

      재미없고 부족한 글인데, 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글이라는 게 누군가가 읽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아무도 읽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는 글의 퀄리티가 심하게 달라지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누군가가 읽고 있다고 생각하면 문장 한 줄 쓸 때에도 여러가지로 생각을 많이 하게 되니까요. 결국 그게 글을 쓰는 본인에게도 도움이 많이 됩니다. (올해도 아마 비슷할 것 같아요. 알라딘 서평단을 계속 하고 있으니 소설에 대한 리뷰들도 어느 정도는 쓸 것 같고...아무튼 그런데 제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영화에 대한 좋은 글을 쓰는 것이니 올해는 영화에 대한 글을 더 많이 쓰도록 노력하려고 합니다. 물론 그 전에 좋은 영화들도 많이 봐야겠지만요.)

      별로 한 것도 없이 어느덧 정신차려보니 연말시즌이 지나가고 해가 바뀌었네요. 저도 트위터에 종종 들러 글보고 가겠습니다.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뻔한 말이지만) 하시고자 하는 모든 일에 좋은 성취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드니 빌뇌브

Ending Credit | 2015.12.15 22:09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가끔 과녁을 벗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화살이 있다. 아니면 이런 표현도 가능하겠다. 가끔 궤도를 벗어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열차가 있다. 빗나간 화살, 혹은 탈주하는 기관차, 그것들은 현실에서라면 무엇인가 어긋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영화에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때로 어떤 화살은 과녁을 벗어나 다른 더 좋은 목표물에 명중하며, 어떤 열차는 궤도를 벗어나 낯설지만 강렬한 곳에 관객을 데려다 놓는다.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이하 <시카리오>)의 과녁은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대한 마약조직(카르텔)이 저지른 극악무도한 범죄가 영화의 시작부에 드러나고, 이들을 잡기 위해 특별한 팀이 결성된다. 목표물은 명확하고, 영화는 정해진 목표물을 잡기 위해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접근하고 있는 것 같다. 이들을 잡기 위해 특별수사팀은 조직의 본거지인 멕시코 후아레즈로 향하고, 계획은 거칠어 보이지만 나름 치밀하게 수행된다. 작전은 성과를 올리고, 이 특별수사팀은 점점 적의 심장부에 가까이 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 어떤 미심쩍은 컷들이 끼어든다. 예를 들어 후아레즈를 둘러싼 주위의 황량한 사막과 같은 풍경을 드론으로 훑어내려가면서 찍는 익스트림 롱샷은 왜 필요한 것일까. 중심이야기의 흐름을 단절시키면서 등장하는 민머리 남자와 그에게 축구를 하러 가자면서 보채는 아들의 이야기는 왜 여기에 끼어들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야기는 점점 방향을 살짝 틀어나가기 시작한다. 마약조직을 소탕한다는 이 명확한 목표, 혹은 이 작전에는 어딘지 모르게 찜찜함이 있다. 그것은 관객이 이 작전에 거의 아무 것도 모른채로, 혹은 마약조직을 소탕한다는 목표만을 가지고 참여하는 케이트(에밀리 블런트)와 거의 동일한 위치에 놓여 있기 때문에도 그렇다. 케이트는 마약조직이 벌인 끔찍한 참상을 보고 이 작전에 자원하여 참여하지만, 이 작전에는 (관객과 마찬가지로) 그녀가 모르는 어떤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일단 이 작전을 이끌어가는 CIA의 책임자 맷(조쉬 브롤린)이나 소속을 정확히 알 수 없는 남자 알레한드로(베니치오 델 토로)의 존재부터가 그렇다. 그들은 도대체 무슨 권한을 가졌기에 도로 한복판에서 총격전도 거리낌없이 실행하는 것일까. 그래서 작전 도중에 케이트는 여러 차례 맷과 설전을 벌인다.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는 것인지 정확하게 알려달라. 당신들이 도대체 여기에서 벌이고 있는 (불법을 넘어서 무법에 가까운) 이 일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이다. 그러나 맷은 여기에 답한다. 당신이 지금은 우리를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우리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장면들을 잡는 영화의 어떤 태도다. 예를 들어 1차로 마약조직 보스의 형을 체포하여 데려오는 작전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된 후, 맷과 케이트는 건물 밖에서 설전을 벌인다. 이 때 재미있는 것은 카메라의 위치다. 통상 이런 장면에서라면 둘의 설전을 보다 타이트하게 숏과 반응숏으로(때로는 클로즈업을 섞어가며) 잡거나, 혹은 오버 더 숄더샷으로 처리할 것이다. 그런데 이 때 카메라는 한껏 물러나 그들을 원경으로 잡는다. 그들의 대화는 들리지만(그래서 자막으로 처리되지만), 어쩌면 이런 거리라면 실제로는 대화가 들리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마치 이것은 영화가 그들 중 누구의 편도 들지 않겠다는 태도인 것처럼 보인다. 즉 이 때까지 대부분의 관객은 케이트의 위치에 서기 때문에(설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들을 보다 가까이에서 잡는 것은 케이트의 어떤 답답함, 울분에 관객이 너무 쉽게 동화되는 효과를 불러올지도 모른다. 관객들을 보다 물러나게 함으로써 관객은 보다 깊숙하게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이들의 설전을 본다. 이것은 누구의 편도 들지 않겠다는 태도이거나, 혹은 이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인 것처럼도 보인다. 이보게 케이트, 그거 중요한 거 아니라구, 사실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네, 친구. 

 

 

그렇다면 무엇이 의미가 있는가. 영화의 마지막에 도착하는 것은 이상한 출구이다. 케이트와 함께 터널을 빠져나온 관객이 도착하게 되는 곳은 사실상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변한 것은 있다. 보스는 죽었고, 조직은 그 힘을 어느정도 잃었다. 그러나 그 힘의 공백을 무엇이 채우는가. 다른 거대한 힘, 아마도 그보다 훨씬 강력할지 모를 어떤 힘이 채운다. 그러니까 영화는 이상한 출구를 관객들에게 제시한다. (케이트와 동일시 된) 관객이 기대하고 본 것은 힘의 공백이었지만, 실제로 영화가 제시한 출구는 힘의 균형, 그리고 그 힘의 균형이 실제로 의미하는 '거의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음'이다. 다시 말해서 관객은 마약조직의 소탕을 보게 될 것을 기대했지만, 그 기대는 무참히 배반당한다. 그것은 감독이 굳이 마지막에 끼워넣은 영화의 컷이 상징한다. 특별히 놀랄 것도 없는 일들, 그들에게 있어서 당연한 삶이 그렇게 지속된다. 그것은 영화의 초반부 특별수사팀이 후아레즈에 들어갈 때 무심히 그들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시선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을 수 있겠다. 거의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면 이 영화가 이렇게 끝냄으로써 남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김영하는 <읽다>에서 플로베르의 소설 <마담 보바리>를 다루며, 그것을 오르한 파묵이 이야기한 '감춰진 중심부', 그러니까 "소설과 다른 문학 서사의 차이는 감춰진 중심부가 있다는 것이다"라는 이론과 연결짓는다. 즉 소설에는 '감춰진 중심부'가 있으며, 독자는 이 감춰진 중심부를 찾길 희망하며 소설을 읽기 때문에, 소설이라는 것이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중심부를 찾는가, 못찾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 중심부에 다다르는 과정이다.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는 '감춰진 중심부'에 도달하고자 애쓰는 독자들이 그곳에 쉽게 도달하지 못하도록 독자들과 게임을 벌인다. 플로베르는 '거의 아무런 주제도 없는 아니 적어도 주제가 거의 눈에 뜨이지 않는' 책을 쓰고자 했다. 플로베르의 태도는, 중심부가 아니라 독자가 중심부에 다다르는 과정, 다다르려고 애쓰며 어떻게든 독자 자신의 고유한 내면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것과 같은 선상에 있다. 다시 말해서 플로베르는 주제와 교훈, 그러니까 중심부를 강조하는 소설을 낡은 것으로 보이게 했으며, 따라서 플로베르에게서 현대소설이 시작되었다면 그것은 이 때문이라고 김영하는 말하고 있다.

 

드니 빌뇌브의 <시카리오>에서도 마찬가지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이 영화에서도 어떤 '감춰진 중심부'를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그것을 '마약 조직의 소탕(케이트)'이라고 불러도 좋고, '힘의 균형을 찾음으로서 통제권을 확보하는 것(맷)'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보게 되는 것은 어떤 중심부가 아니라 산재해 있는 것들, 중심을 알 수 없는 어떤 무심하고 황량한 풍경이다. 영화의 초중반에 걸쳐서 점점이 걸쳐져 있는 어떤 낯선 컷들이 있다. 마약조직(카르텔)이 장악하고 있는 도시 후아레즈를 원경에서 잡는 컷들,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한 가족. 이들의 삶은 이 영화의 일련의 과정이 불러온 연쇄를 통해 파괴에 이르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파괴된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 파괴가 너무나도 무심히 당연하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며, 그것이 점점이 후아레즈라는 거대한 죽음의 도시를 이룬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영화의 주인공은 케이트나 맷, 혹은 알레한드로나 마약 조직의 보스가 아니다. 어쩌면 이 영화의 주인공은 후아레즈라는 거대한 사막의 도시가 아닐까. 그 사막의 도시에서는 여전히 어딘가에서 총격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은 언제나 당연하게 들리는 총격 소리에 무심하며, 수많은 마약은 그곳에서 생산되어 여전히 미국과 전세계의 도시로 흘러들어간다. 사막이 확장되는 것처럼 마약이 불러오는 파괴는 그렇게 확장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호쾌한 액션이나 스릴을 보게 되리라 기대했지만, 우리가 결국 만나게 되는 것은 어떤 출구없는 미로의 풍경이다. 예를 들어 그것을 케이트가 알레한드로를 향해 겨눈 총의 방아쇠에 놓인 손가락이라 말할 수도 있다. 그를 향해 총구를 겨누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이지만, 이 때 우리는 케이트와 마찬가지로 질문을 하게 된다. 그 손가락에 힘을 줄 것인가, 말 것인가. 그를 쏜다고 해도, 그가 쓰러진다고 해도 무엇이 달라지는가. 좋은 영화는 질문에 대해 답을 주는 영화가 아니라, 답을 알고 있었다고 믿었던 것을 뒤집어 질문을 하게 만드는 영화다. 

 

 

덧.

그래도 마지막으로 이 이야기는 덧붙이고 싶다. 드니 빌뇌브의 이 영화 <시카리오>는 예상했던 궤도를 벗어나 그보다 더 강렬한 곳으로 관객을 데려다놓는 영화지만, 한편으로 흥미로운 것은 그러면서도 그 원래 궤도에서 줄 수 있는 재미를 거의 놓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야간 투시경 화면이나 CCTV 화면의 활용 같은 것은 익숙한 설정이지만 적절한 편집으로 실제감을 가중시키며, 기존 스릴러 영화나 액션 영화에서 보기 어려운 컷의 활용은 색다른 재미를 안겨준다(예를 들어 줄지어 달려가는 자동차를 위에서 잡는 컷과 그에 어울리는 강렬한 음악의 조화 같은 것). <그을린 사랑>이 상대적으로 소재의 강력함에 기댄 것 같은 인상을 줬다면 이 영화에서는 감독의 역량이 그보다 잘 드러난 것 같다.

 

소위 상업영화를 주로 즐기는 관객이나 예술영화를 주로 즐기는 관객이나 모두 만족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영화가 아닐까. 다만 '암살자의 도시'라는 부제는 붙이지 않는 것이 더 나았을 것 같지만.

 

 

 

 

- 2015년 12월, CGV 신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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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이면에는 늘 공포가 자리한다

The Book | 2015.11.17 19:55 | Posted by 맥거핀.

 

리틀 스트레인저 - 6점
세라 워터스 지음, 엄일녀 옮김/문학동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소설의 시작은 인상적이다. 소설의 화자 그러니까 '나', 닥터 패러데이가 에어즈 가문이 살고 있는 헌드레즈홀을 처음 보았을 때의 회상. 엠파이어 데이 기념일에 헌드레즈홀에 가서 에어즈 부인과 그녀의 남편인 대령에게 기념 메달을 받고, 예전 유모로 일하던 어머니가 몰래 챙겨준 케이크의 설탕과자 장식과 젤리를 에어즈가 전용 식기장에서 꺼낸 은스푼으로 먹던 기억, 그리고 벽에 붙은 회반죽으로 만든 도토리 모양 장식을 주머니칼로 몰래 떼내가지고 온 일들. 그리고 이야기는 현재로 점프한다. 의사가 된 패러데이는 에어즈가에 단 한명 남은 하녀 베티가 아파서 왕진을 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다시 헌드레즈홀에 방문하게 된다. 화자, 혹은 작가의 관심은 이 사건 자체보다는 다른 것에 있는 것 같다. 균열되고 푹 꺼진 저택의 테라스, 관리하지 못해 엉망이 되어버린 정원, 막힌 배수관에서 나는 악취, 제멋대로 자란 꽃에 뒤덮인 난간, 덧창이 내려진 창문들, 휑뎅그렁하고 낡아버린 집안 곳곳의 풍경. 작가는 닥터 패러데이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박제된 화려한 헌드레즈홀과 이제는 낡아서 거의 형체만 유지하는 것조차도 힘겨워 보이는 쇠락해가는 헌드레즈홀을 집요하고 치밀한 묘사로 효과적으로 대조시킨다. 집에 대한 묘사는 이것이 끝이 아니다. 이제 작가는 솜씨 좋게 무대를 부드럽게 다른 장소로 이동시킨다. 닥터 패러데이의 병원을 겸한 살림집, 일층에 상담실과 진료실, 대기실이 있고, 침실은 다락에 있는, 예전 그의 스승에게 물려받은 낡은 집. 누리끼리한 벽과 '빗살무늬' 페인트칠이 전부인 우중충한 인테리어가 전부인 혼자 사는 의사의 집. 열기가 빠져나가지도 못하는 좁은 다락방에 누워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닥터 패러데이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다락방의 열기는 숨이 막힐 정도였다. 나는 전등을 끄고 담뱃불을 붙인 다음 침대 위에 흩어진 사진과 잡동사니 틈바구니에 털썩 누웠다. 창문은 커튼이 걷힌 채 열려 있었다. 달 없는 밤에 여름의 껄끄러운 어둠이 내려앉았고, 미묘한 움직임과 소리가 웅성거렸다. 나는 어둠 속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날의 기이한 잔상이었는지 헌드레즈홀이 보였다. 그 서늘하고 향기로운 공간이, 잔에 든 와인 같던 빛이 보였다. 나는 그 공간에 있을 사람들을 그려보았다. 베티는 자기 방에 있을 테고, 에어즈 부인과 캐럴라인은 그들 방에, 로더릭은 그의 방에......

나는 그렇게 눈을 멀거니 뜨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한참 동안 누워 있었고, 담배는 서서히 타들어가며 손가락 사이에서 재가 되었다.

- p.65~66, 1장의 마지막 문단.   

 

이 공간에 대한 집요한 묘사는 물론 일차적으로는 공간 그 자체의 차이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각 인물들이 처한 위치를 상징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것은 2차대전 직후의 영국이다. 전쟁이 가져온 여러 영향들로 모든 물자들은 모자랐고, 지주와 귀족들은 몰락해가고 있었으며, 전쟁 직후에 집권한 애틀리가 이끄는 노동당 정부로 그 몰락은 가속화되고 있었다. 헌드레즈홀이 몰락한 것처럼 이제 에어즈 가문도 거의 몰락했다. 패러데이가 처음 방문하던 날, 에어즈가 사람들의 모습은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안의 장남 로더릭은 쇠락해가는 집안을 어떻게든 건사하려 애쓰지만, 전쟁 중에 입은 부상으로 그마저도 쉽지 않아 보이고, 그의 누나 캐럴라인은 동생과 어머니를 돌보는 동시에 하녀처럼 집안일을 하며, 에어즈 부인은 애써 그런 모습을 감추려 하지만, 이제 그녀의 모습은 '마님'과는 거리가 멀다. 반면 패러데이는 노동자 계급의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자수성가하여 이제 어엿한 의사가 되어 에어즈가에 거의 주치의처럼 드나드는 위치에까지 오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닥터 패러데이가 에어즈 가문의 사람들과 동등한 위치에까지 오른 것은 아니다. 에어즈 가문 사람들과 패러데이의 첫만남, 그리고 그가 에어즈가에서 주최한 파티에 다른 초대받은 사람들과 함께 참석했을 때의 묘사를 보면 그가 처한 위치가 잘 드러난다. 그는 에어즈 가문과 동등한 위치는 커녕, 젠트리(귀족은 아니지만 가문 휘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자유민)와도 그 위치가 다르다. 파티에 참석한 베이커하이드 부부나, 데즈먼드 부부, 로시터 부부 등의 인둘들은 그를 대놓고 무시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동등한 위치에서 그를 대하지도 않는다. 그는 어디까지나 노동자 계급에서 자라난 단지 '의사 선생'이었고, 파티가 끝나면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좁은 집에서 그보다 좁은 다락방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해야만 할 형편이었다. 다시 말해서 이 화려한 저택과 이제 쇠락해가는 저택, 그리고 닥터 패러데이의 초라한 병원 겸용 살림집에 대한 대비적인 묘사는 그들이 처한 위치를 상징적으로 대비하며 말해준다. 헌드레즈홀이 예전에 비해 엄청나게 쇠락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초라한 패러데이의 집과 같아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이 비록 이제는 같은 티테이블에 마주 앉아서 한담을 나눌 수 있는 위치라고는 해도, 그것은 겉보기의 모습일 뿐 그 차이는 여전히 크게 남아있다.

 

그래서 어쩌면 패러데이는 그 집을 욕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책의 서두에서 인상적인 것은 묘사의 대비이기도 하지만, 패러데이의 헌드레즈홀을 향한 욕망이다. 그의 헌드레즈홀에 대한 욕망은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되어 왔다. 그 집에서 회반죽으로 된 도토리장식을 처음 떼어내 오던 날부터. 그리고 그의 욕망은 헌드레즈홀이 완전히 쇠락했음을 확인한 지금에도 멈추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욕망하는 것은 헌드레즈홀의 화려함이 아니라, 헌드레즈홀 그 자체, 그 자체가 가지는 어떤 계급성이니까 말이다. 그런 계급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욕망, '의사 선생'이 아니라, 그 이상이 되고 싶은 욕망 말이다. 그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을까. 여러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어쩌면 공포가 아닐까. 늘 욕망의 반대편에 있는 녀석, 그러니까 우리를 사로잡는 그 익숙한 공포 말이다. (공포 영화의 주인공들은 늘 다른 것을 욕망하다가 죽는다.)

 

서두 외에 두 가지의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하나는 몰락하여 생활고에 시달리는 에어즈가가 돈을 마련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판 헌드레즈홀 주변의 땅에 들어서는 대규모의 주택 단지를 바라보는 패러데이의 시선이다. 그의 시선에는 쇠락한 헌드레즈홀을 돌아볼 때의 연민과 달리 어떤 경멸들이 숨김없이 드러나 있다. 그리고 그는 마침 여기에서 그의 외가 쪽으로 먼 친척이자 학창시절의 동무, 그러나 이제는 공사장 인부와 '의사 선생'으로 차이가 벌어진 이를 만난다. 그는 어색하게 '의사 선생님'이라고 칭하며 목례를 하는 그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다른 하나는 그 마지막 밤에 사건들이 벌어지기 전, 그에게 닥친 또하나의 다른 사건이다. 그가 찾아간 맹장이 터진 '무단거주자' 가난한 남자의 이야기. "순간 나는 들어갈까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거절하고 작별 인사를 했다. 문이 닫히기 전에 힐끔 안을 들여다봤는데, 바닥이 매트리스와 잠자는 몸뚱이로 난장판이었다. 어른, 아이, 개, 그리고 아직 눈도 안 뜬 강아지까지 꼼지락댔다.(p.669)" 그는 여기에서 무엇을 봤을까, 아니 왜 이 이야기는 하필이면 여기 이 시점, 그러니까 그가 저택 근처로 가기 직전에 들어가 있을까. 그는 여기에서 어떤 공포를 봤을까. 그 자신이 '무단거주자'가 되어 그 한복판에서 몸을 뉘이고 있는 환상을 보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환상이 가져다 준 공포가 그에게 무엇을 하게 만들었을까.

 

아니, '무엇을 하게 만들었'다기 보다는 어쩌면 그는 쇠락해져가는 헌드레즈홀 그 자체가 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세라 워터스의 이 소설 <리틀 스트레인저>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패러데이의 헌드레즈홀에 대한 반복적인 묘사가 보여주는 이상한 방식의 동일시이다. 화자인 패러데이는 소설의 여러 부분에서 마치 우리가 실제로 헌드레즈홀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을 정도로 집안 곳곳에 대해 정밀하게 묘사하는데, 재미있는 점은 이 묘사가 그의 심리 상태에 따라 묘하게 달라진다는 점이다. 그는 특별한 사건이 없거나, 기분이 좋을 때에는 이 헌드레즈홀 그 자체가 마치 그를 반기는 듯했다,는 식으로 묘사를 하고, 반대로 어떤 사건이 일어난 후에는 같은 공간이라도 그 공간을 의혹과 공포가 가득한 곳으로 느껴지도록 묘사한다. "아무리 조그만 소리나 움직임이라도 있었으면 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뭔가가 정원 안에 우리와 함께 있는 듯한, 뭔가가 뽀득뽀득 새하얀 눈을 밟고 서서히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보다 더 고약한 것은 그것이, 그게 무엇이든 어쩐지 낯익은 듯한 기괴한 느낌을 받았다는 점이다.(p.560)" 그는 단지 그의 감정을 헌드레즈홀이라는 저택에 투사한 것에 불과했을까. 어쩌면 그는 그 집 자체가 되고 싶은 것, 혹은 이미 그 집 자체는 아니었을까. 그 집은 물론 귀신들린 집이니까.

 

(이 부분부터는 소설을 읽지 않은 분들은 읽지 마시길.)

 

귀신들린 집의 이야기. 사실 귀신들린 집의 이야기는 수많은 소설, 영화, 드라마 등에서 닳고 닳은 소재이다. 당장 기억나는 영화들만 해도 <샤이닝>, <컨저링>, <디 아더스>, <헌티드 힐>, <아미티빌 호러>, <폴터가이스트>, <파라노말 액티비티> 등등 한 두 편이 아니다. 그리고 이 '귀신들린 집'을 다루는 이야기들은 대체로 어떤 반전을 담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이 '믿기지 않는 현상'들은 처음에는 충격을 주지만, 그것이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나른한 익숙함을 안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 이야기에는 그 익숙함을 뒤집는 한 방이 필요한 경우가 많은데, 때로는 그 한 방이 얼마나 묵직한가에 따라서 이 이야기는 걸작이 되거나, 범작이 되기도 한다.(예를 들어 <디 아더스>가 줬던 그 묵직한 충격을 기억해보라.)

 

그런데 이 소설 <리틀 스트레인저>를 그런 방면에서 보자면 반복되는 '귀신들린 집'의 이야기와 그것에 가미된 한방은 사실 꽤 밋밋하다. 한방은 커녕 시드시들한 잽도 못된다. (옮긴이는 이 소설을 아가사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에 비유했던데, 사실 이 소설은 애크로이드 씨의 이야기와는 꽤 다른 것 같다. 적어도 크리스티의 '닥터 세퍼드'가 그 안에서 거짓말을 한 적은 없었다. 그 사이에 밑줄을 그어보라며 충고한 적은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패러데이의 말들이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이 반전(아닌 반전)은 의미가 없어지며, 그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이 소설 속의 모든 것 중에 사실 믿을 만한 것은 없어진다. - 그래서 그의 이름이 패러독스, 아니 패러데이인가? 사실 빈곤한 상상력으로는 '패러데이의 법칙'에 나오는 패러데이를 연상할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 그런데 말이다. 혹시 모든 것이 거짓일 뿐이라고 단정짓는다면 도대체 소설이라는 것을 읽는 의미가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나는 그 시들시들한 잽으로 실망하는 대신에 다른 것에 조금 더 주목하고 싶었다. 패러데이, 그가 가질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공포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의 공포는 어쩔 수 없이 계속 지속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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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6.01.03 14: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미 아실지도 모르지만 귀신들린 집 이야기에 셜리 잭슨의 <힐 하우스의 유령>도 추가요! ㅎ ㅎ 저 아직 리틀 스트레인저 읽기전인데 리뷰 읽으니 확 땡기네요.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6.01.04 22: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그건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힐 하우스의 유령? 영화 <헌티드 힐>과 관련이 있으려나요..? 근데 아직 소설을 읽기 전인데 제가 쓴 경고문(?)을 무시하고 반전까지 읽으신 겝니까..^^;

최근에 본 것, 보고 있는 것

Ending Credit | 2015.11.12 21:17 | Posted by 맥거핀.

  

(<사도>의 내용, <종이 달>의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사도, 이준익, 2015

 

영화 <사도>에는 몇 가지의 죽음이 떠돌아다니고 있는 것 같다. 영화의 시작부에서 우리는 광기의 눈빛을 하고 사납게 야수처럼 으르렁거리는 사도세자(유아인)를 만난다. 그는 이제 칼을 빼들고 아버지 영조(송강호)를 죽이러 가려는 참이다.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이 죽음은 시도되었을 뿐 실행되지 않았지만, 다른 죽음도 있다. 영화 상에서 좋지 않았던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가 급격히 파탄의 국면으로 들어서는 것은 대왕대비 인원왕후(김해숙)의 죽음을 둘러싼 언쟁에서 촉발되었다. 물론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죽음이 있다. 표면상으로 볼 때 이 영화 <사도>는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죽어가는 8일을 다룬다. 중간중간에 거대한 플래시백들이 자리잡고 있기는 하지만, 이 영화는 칼을 빼들고 영조를 찾아간 사도세자와 그런 그를 뒤주에 가두는 영조로부터 시작하여, 결국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니까 <사도>에서는 하나의 느린 죽음이 진행되는 셈이다.

 

느린 죽음? 느리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뒤주 속에서 서서히 말라가며 죽어가는 사도세자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적어도 영화상으로 볼 때('영화상으로'라는 표현을 자꾸 쓰는 것은, 나는 이 영화의 해석이 실제 사료와 얼마나 일치하고 있는가, 혹은 이 영화의 해석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타당한가의 문제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사도세자는 이미 그 전부터 죽어가고 있거나, 거의 죽어 있었던 것처럼 보이니까. 영화 속에는 수많은 이미지들이 있지만, 영화를 보면서 가장 흥미를 끌었던 것은, 혹은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기억에 남아 떠도는 것은 '나무아미타불'이 반복되는 옥추경이 울려퍼지는 무덤 속에서 관에 들어가 누워있는 사도세자가 벌이는 기행이었다. 그는 왜 하필이면 상복을 입고 무덤 속 관에 누워있는 것일까. 이것을 단지 죽은 할머니에게 바치는 독경이라고 보기에는 그 형상이 너무도 기괴하다. 혹시 어쩌면 그는 스스로를 이미 죽은 존재이거나, 혹은 죽어가는 존재로 생각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뒤주 속에서 사도세자는 말라 죽어가고 있었지만, 영화의 플래시백들 속에서 영조는 사도세자를 (대리청정과 반복되는 선위 파동으로) 그 이전부터 거의 말라 죽도록 괴롭히는 것처럼도 보였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사도세자는 영조를 죽이려 했던 것일까? 영화 <사도>는 올해 몇 차례 등장했던 살부 서사의 계보에 위치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가깝기로는 <암살>의 살부. <암살>의 자식, 그러니까 안옥윤(전지현)은 아버지를 죽이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죽지 않는다. (그가 친일파 아버지를 죽이는 데 실패했더라면, 그는 그의 쌍둥이 자매와 마찬가지로 가차없이 아버지에 의해 제거되었을 것이다. 하와이 피스톨(하정우)은 친일파 아버지를 죽이지 못했지만 그 대신에 그것으로부터의 도피(와 그로인한 죽음)를 택한다.) 반면 (아주 거칠게 말한다면), <사도>의 사도세자는 아버지를 죽이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그로부터 죽음을 맞는다. 아니면 조금 다른 살부 서사들도 있다. 영화 <협녀, 칼의 기억>의 홍이(김고은)나 <차이나타운>의 일영(김고은)이나 그들의 아버지를 향해(<차이나타운>에서 일영이 맞서게 되는 것은 엄마(김혜수)이지만, 사실 여기서 김혜수의 외양에서 감지할 수 있듯, 그녀는 엄마라기보다는 아빠에 가까운 것 같다.) 거의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걸고 죽음을 겨눈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아버지를 죽이지 못한다면 그들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는 데 실패할 것이다. 이 기이한 살부 스토리들은 왜 올해 극장가를 떠돌고 있는 것일까? 혹시 현실에서 어떻게든 아버지를 숭앙하려 애쓰는 이들에 대한 반감이 여기에 스며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역사를 고쳐쓰면서까지 그들 정신적 아버지들이 벌인 추악한 일들을 가리려 애쓰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작은 가운데 손가락은 물론 아니겠지.  

 

아무튼 보지 않은 영화나 잘모르는 정치에 대한 얘기는 이쯤 하고 다시 <사도>로 돌아오면, 아버지를 죽이러 가며 기세등등하게 시작했던 영화는 마지막에 이르러 묘한 방식으로 봉합된다. 처음 영조와 사도세자라는 부자관계에서 출발했던 영화는 점차 다른 부자관계로 중심점이 이동하는데, 그것은 사도세자와 정조라는 부자관계이다. 영화의 중반부까지 뒤주에 들어가서도 어떻게든 죽지않으려 날뛰는 사도세자는 어느 순간부터 점차 죽음을 납득한 것처럼 보이는데, 그 순간은 뒤주를 깨고 나온 사도세자가 다시 뒤주에 갇히며, 그의 장인 홍봉한이 밀어넣어준 부채를 보는 시점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 부채는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태어나던 날 사도세자가 기쁨에 겨워 그린 그림이 들어있는 부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도세자는 이 시점부터 그가 왕인 아버지를 죽이려 했던 세자가 아니라(즉 역모를 일으킨 세자가 아니라), 그저 미쳐 날뛰다가 죽은 세자가 되어야 자신의 아들이 살 수 있다는 논리(그의 장인이 이 부채를 밀어넣어 주는 것도 아마도 그것을 납득하라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에 따르기로 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것을 영화는 막바지에 이르러 뒤주 속에서 죽은 세자에게 전하는 영조의 대사로 재확인한다.

 

이것은 사실 조금 이상하다. 영화는 초반부에는 영조를 이상한 성격을 가진 인물로 묘사하며 사도세자에게 중심을 맞춰 놓는다. 즉 <사도>의 초반부는 자식을 괴롭히는(혹은 친일을 하는) 이상한 아버지와 그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자식들의 전형적인 스토리이다. 그런데 중반부에 이르러 그 고통받는 자식은 이제 아버지가 되어 자신의 자식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려 하고, 그 논리를 그 괴롭히던 아버지를 통해 재확인한다. 다시 말해서 영화의 중심점은 영화 초반부에는 아들 사도세자에게 놓여져있었지만, 두 개의 부자관계가 교차되면서 아버지들에게 중심점이 옮아간다. 자식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아버지(사도세자)에 다른 아버지(영조)를 겹쳐내면서, 마치 영조도 자식을 위해 무엇인가를 희생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것은 명백한 착시일까, 아닐까. 만약 착시라면, 이 착시는 의도치 않게 빚어낸 착시일까, 아니면 고도의 계산이 가미된 착시일까. 단지 무의도라고 보기에는 이 논리가 지금의 현실의 논리들과 비슷하게 닮아있어 어떤 찜찜함이 계속 남는다.

 

 

 

종이 달, 요시다 다이하치, 2015

      

첫 영화를 애초 생각보다 너무 길게 썼으니, 두 번째부터는 짧게짧게 써야겠다. 마지막에 이르러 뭔가 묘하게 방향을 트는 것처럼 보이던 영화는 이준익의 <사도>만이 아니다. 요시다 다이하치의 <종이 달>의 여주인공 리카(미야자와 리에)에게는 거의 정해진 결말만이 남은 것처럼 보인다. 점점 부풀어만 가던 횡령은 전모가 드러났고, 남자와의 관계는 끝났으며, 이제 그녀에게는 정해진 대가를 치르는 것만이 남았다. 동료 여직원 스미의 말대로 이제 그녀가 할 일은 '가야할 곳에 가는 것 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야기상으로도 형식적으로도 다른 어떠한 것이 여기에 끼어든다. 일단 형식적으로는 플래시백의 등장이다. 이 영화 <종이 달>은 리카의 과거, 그러니까 리카가 수녀들이 운영하는 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을 비추면서 시작하지만, 이 과거는 아주 짧게 등장한 후 곧 이야기가 1994년, 즉 리카가 계약직 은행원이 되어 횡령을 처음 시작하던 때로 점핑한다. 그리고 이야기는 계속 선형적으로 진행된다. 영화는 정해진 시간의 선을 따라 굴러가고, 그 굴러감에 따라 리카의 횡령 규모도 점차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그런데 리카의 횡령이 밝혀지는 이 때 다시 영화는 리카가 교복을 입고 있던 과거의 시점으로 회귀한다. 그리고 마치 이 과거가 현재의 어떤 의문들에 대해 답을 주려는 듯한 방식으로 등장한다. 이 과거씬은 왜 지금 이 시점에서야 여기에 등장하는 것일까. 단지 현재의 어떤 의문들, 즉 리카가 왜 횡령을 저질렀는가에 해답을 주기 위해 여기에 등장했을까. 기부를 하기 위해 아버지의 돈을 훔치던 소녀의 도벽이 더 큰 것으로 발전되었을 뿐이라는 식의 해답을 주기 위해 여기에 그 플래시백이 등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이 영화의 핵심, 즉 '종이 달'이 상징하는 어떤 가짜의 세계에 대한 어렴풋한 실체라도 설명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플래시백은 그녀의 가짜 세계에 대한 인식, 손가락으로 달을 지워낼 수 있는 그런 세계가 어떻게 안에서 만들어졌는지 설명해주지 못한다.

   

(어떤 것의 연원을 밝히고자 하는 것은 그것을 멈추기 위한 시도의 하나가 아닐까. 이 플래시백이 현재의 가짜 세계를 멈추게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그 플래시백은 해답과는 거리가 멀다. 리카의 '종이 달', 즉 가짜세계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이 플래시백이 등장한 후, 영화는 기어이 가장 가짜같은 장면을 등장시킨다. 창문을 깨고 도망가는 리카. 이것이 가능한가, 아닌가는 차치하더라도, 이것은 이 가짜 세계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녀의 도피는 언제까지라도 가능할까.)

 

다만 그 플래시백들은 다른 것을 말한다. 아버지의 돈을 훔쳐서 기부하는 것, 그것이 나쁜가요. 리카는 되묻는다. 어쩌면 리카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그 돈 몇 푼 없어졌다고, 재해를 맞은 외국의 소년보다 더 나쁜 상황에 이르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아버지는 결과적으로 기부를 하게 된 셈이니 좋은 것이고, 외국의 소년은 도움을 받아 살아갈 수 있으니 좋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영화는 그런 생각에 화답하듯이 이상한 장면들을 붙인다. (횡령의 피해자이지만) 카메라를 들고 관심을 보이는 노인, 여자친구와 즐겁게 걷고 있는 남자(리카의 불륜상대), 여전히 활달하게 잘 지내는 남편, 꿈꾸는 듯한 눈빛의 스미, 그리고 영화 속 어느 때보다 힘차게 달리고 있는 리카. 모두들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홍상수, 2015

 

언뜻 보면, 홍상수가 그려왔던 세계의 반복인 것처럼 보인다. 상황을 비슷하게 반복시키고, 같은 대사를 다시 하거나, 같은 공간에 비슷한 인물을 넣어놓음으로서 반복이 만들어내는 어떤 화음을 보고자 하는 것 말이다. 그런데 과거의 영화들과 이 영화는 몇몇 차이가 있는데,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이것이 어떤 영화적인 내부장치로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엇인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보였던 홍상수의 과거 영화들을 짚어보자. <극장전>은 영화 속에서 영화가 상영되는 형식이었다. <하하하>는 두 인물이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을 취했다. <옥희의 영화>는 한 영화를 여러 개의 장으로 분절했다. <북촌방향>은 시간을 흩뜨려 버렸다. <다른 나라에서>는 하나의 시나리오를 축으로 해서 이야기를 고쳐쓰는 작업이었다. 즉 여기에는 어떤 장치들이 숨어 있다. 영화 속 영화, 대화, 이야기, 시간의 뒤섞음, 시나리오의 퇴고 등등. 그 외에도 홍상수는 꿈과 같은 영화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장치를 쓰며 이야기를 반복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이 영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이런 외부적인 장치가 없다. 그저 한 영화가 거의 동일하게 다시 상영될 뿐이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는 두 개의 별개의 영화가 나란히 상영되는 것 뿐이다.(<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라는 한 영화가 끝난 후 다시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라는 제목이 등장하면서 다시 영화가 시작된다.) 즉 관객이 보는 것은 그저 두 편의 나란한 영화이다. 제목은 같고, 등장인물도 같고, 내용도 거의 같으나 미세한 몇몇 가지가 달라졌을 뿐인 영화. 이것은 어떤 영화적 내부 장치, 혹은 형식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저 한 영화를 두 번 트는 것 뿐이다.   

 

그렇다면 그 전의 영화들과 달리 이것이 가지는 효과는 무엇인가. 여러 가지 다른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것은 조금 더 '차이' 그 자체에 주목하게 만드는 것 같다. 즉 홍상수의 예전 영화들에서는 어떠한 것이 반복된다는 징후가 없기 때문에 관객들은 갑자기 반복이 일어날 때 반복 그 자체의 양상에 주목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여기에서 관객이 대체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반복되고 있다'는 그 사실, 그 자체이다. 그러나 한 영화가 다시 반복되는 것은 다르다. 한 영화를 두 번째 볼 때, 이야기 그 자체에 주목하는가? 대부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미 다 알고 어떠한 인물이 어떻게 행동할지 이미 다 알기 때문에 그보다는 주목하지 않았던 배경이나 미세한 뉘앙스, 어떤 숨겨진 의미에 그만큼 더 주목하게 된다. 홍상수의 이 영화도 비슷한 것을 노린 것은 아닐까. 즉 두 번째 반복되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를 볼 때 우리는 함춘수(정재영)가 이미 어떠한 행동을 하고 누구를 만나게 될 것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즉 큰 줄거리의 사건은 반복되기 때문에) 반복의 양상보다는 그 반복이 야기하는 차이에 훨씬 더 주목하게 된다.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반복 그 자체에 현혹되지 않고 반복이 야기하는 차이에 주목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것은 어쩌면 영화 속 인물이 말하는, 표면에 숨겨진 것들을 들여다보는, 그럼으로써 두려움을 이겨내는 길은 아닐까. 어떠한 것이든 표면은 대체로 너무도 심상하기 때문에, 우리는 표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을 늘 놓친다. 표면은 늘 같으니까, 같은 일들이 반복되니까. 홍상수는 억지로 같은 표면을 두 번 보게 만든다. 그래서 그 표면이 만들어내는 미세한 차이를 어떻게든 찾아내게 만든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그럴까? 어쩌면 지금은틀리고그때는맞을지도 모른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송곳, 김석윤, 2015

 

<어셈블리> 이후로 드라마를 보지 않았는데, 1회를 물끄러미 보다가 나도 모르게 빠져버린 드라마가 있다. 많은 분들이 반농담삼아 이야기한대로 이 드라마에는 송곳 같은 대사가 많이 나오지만, 나에게 이 드라마에서 가장 송곳같이 파고들었던 대사는 노동상담소 소장 구고신(안내상)이 했던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 말은 한편으로 구고신이 늘 사람들에게 반복해서 하는 이 대사와도 통한다. "당신들은 다를 것 같아?" 드라마 속 뒷부분을 봐야 더 확실해지겠지만, 구고신이 그 '시시함'을 깨닫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어쩌면 그것을 몸으로 체득했던 것이 아닐까. 드라마 속에서 잠깐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는 과거 고문을 받았고, 아마도 누군가의 이름을 실토한 다음 겨우 풀려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살기 위해 누군가의 이름을 털어 놓는 시시한 인간. 이 '시시함'을 깨닫기 위해 그가 바쳐야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 시시함은 결코 가벼운 것이라 할 수 없다. 아니, 꼭 고문이 아니더라도, 그가 수많은 노동운동을 이끌면서 얼마나 시시한 꼴을 많이 봤을 것인가, 살기 위해 배신하는, 혹은 겁내면서 주저하는 시시한 인간들을 얼마나 많이 만났으며, 시시한 일들을 얼마나 많이 벌였을 것인가.

 

그리고 그가 말한대로 거대한 악처럼 보이는 그들도, 사실 거의 대부분 시시한 인간들의 집합이다. 거의 1회에는 절대악처럼 등장했던 정부장(김희원)도 2, 3회에 이르면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중간관리자에 불과할 뿐임을 드라마는 보여준다. 그는 또 얼마나 조인트가 까였으며, 누군가에게 굽실댔을까. 그렇다면 그 위에 군림하는 것처럼 보이는 인사상무(정원중)가 절대악일까, 아니면 그도 시시한 강자일까. 적어도 구고신의 눈에는 그들 모두는 시시한 강자이다. 살기 위해 패악질하는 시시한 녀석들. 그래서 어쩌면 구고신은 노동현장에서 사람들을 밀어내는 용역들에게도 노동상담소 명함을 던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용역질하다가 돈 못받고 떼이면 찾아오라고 말이다.

 

<송곳>은 한편으로 그러한 것을 다양한 인간군상들을 세밀하게 그려냄으로써 끄덕거리게 만든다. 예를 들어 과거 이수인(지현우)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 부장. 그녀는 이수인이 곤경을 받고 있을 때 과거 서사와 함께 뜬금없이 등장해서 그를 도와줄지 모른다는 기대를 시청자에게 갖게 하지만, 그녀는 아무 도움도 없이 다만 실없는 응원을 던지고 가버릴 뿐이다. 그들 대다수는 그런 인간들이니까. 그저 악한것이 아니라 다만 시시할 뿐이니까.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들도 노동하는 대상이고, 또 서는 위치가 바뀌면 시시한 강자들과 싸워야 하는 시시한 약자가 되는 것이니까.

 

그렇다. 그것은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시시한 약자들과 시시한 강자들의 문제이다. 악은 선이 될 수 없지만, 시시한 강자는 시시한 약자가 될 수 있다. 그들 모두는 시시하니까. 그것은 절망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동시에 아주 희망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악을 선하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어려운 일이지만, 적어도 시시한 이들이 시시하지 않게 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으니까. 물론 그 전에 선행되어야할 것은 자신이 시시한 인간임을 깨닫는 것이다. 늘 그것이 가장 어렵다. 그래서 구고신의 일침이 늘 필요하다. "당신들은 다를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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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6.01.03 14: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도>는 보고나서도 찜찜했던게 아버지가 아들을 죽여놓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노라고 변명늘어놓는것 같았어요. 실제 역사속에서 그 두사람의 관계나 사료를 떠나서(잘 알지도 못하지만) 영화속에선 그랬던것 같아요. 사도는 유독 부모와 자녀가 같이본 영화라고 하던데 관람후 사도가 공부하라는 영조 말 안들어서 저렇게 됐다고 하는 사람들도있다는 기사보고 맨붕했던 기억이 납니다 >_<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6.01.04 21: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본문에도 썼지만 <사도>는 결말 부분에 다다를수록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요. 거칠게 말하자면 영화의 초반부에는 비판적으로 보는 논리를 후반부에 이르러 이상하게 인정해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글쎄요. 저는 조금 모호했어요. 영화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정확하게 느낌이 오지도 않았고요. 개인적으로 이준익 감독이 영화를 잘만든다고 생각해본 적이 별로...

미래 세대에게 남겨줄 것

The Book | 2015.11.09 17:31 | Posted by 맥거핀.

파묻힌 거인 - 8점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시공사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거인은 거기 파묻혀 있었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는 언덕 위, 쐐기풀과 잡목림을 헤치고 올라야 하는 곳. 멀리 떨어진 높은 지대에 난데없이 나타난 어른 키보다 높게 쌓아올린 돌 무덤.

 

그렇기 때문에 거인의 무덤은 죄 없는 어린 사람들이 전쟁에서 살육당했던 오래전 어떤 비극의 장소를 표시하기 위해 세워두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 무덤이 왜 여기 서 있는지 이유가 쉽게 생각나지 않는다. 낮은 지대에 있었다면 우리의 조상이 전쟁의 승리나 왕을 기념하고 싶어 했을 거라고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멀리 떨어진 높은 지대에 무거운 돌을 어른 키보다 높게 쌓아놓은 것은 왜일까? (p.397)

 

그곳은 용이 즐겨 먹이를 먹고 쉬는 곳이다. 그 용은 무엇이며, 왜 하필 그 자리에 있는가? 소설 <파묻힌 거인>의 주인공(이자 실질적으로 작가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화자라고 볼 수 있는) 늙은 액슬과 그의 아내 비어트리스는 과거의 기억을 잃어가는 중이다. 아니, 그것은 단지 그들이 늙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기억을 잃고 있는 것은 그들만이 아니니까. 그들이 살고 있는 거대한 습지 주변, 삐죽삐죽한 언덕 그림자가 드리워진 산비탈 굴에 있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책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들은 금새 지나간 일들을 잊어버린다. 그것이 며칠 지나지 않은 일일지라도 말이다.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더 기억을 잃기 전에 먼 마을에 살고 있는 아들을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선다. 그런데 길을 떠나 다른 마을에 들러 여러 사람들을 만나는 도중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그들이 기억을 잃고 있는 이유가 높은 산에 있는 암용 케리그 때문임을 알게 된다. 마법에 걸린 용 케리그가 내뿜는 입김으로 인해 사람들은 점점 기억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늙은 기사 가웨인의 도움을 받아, 기억을 잃어 자신들을 버린 부모가 돌아오기를 소망하는 아이들이 키운, 독초를 먹은 염소를 힘겹게 끌고 거인의 돌무덤이 있는 언덕에 오른다. 그곳에서 쉬고 있는 용이, 독을 품은 염소를 먹고 쓰러지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두 가지의 질문. 먼저 하나는 다시 처음 질문의 반복이다. 그 용은 무엇이며, 왜 하필 그 자리에 있는가? 망각의 입김을 내뿜도록 용에게 마법을 건 이는 위대한 아서 왕의 대마법사 멀린이었다. 전쟁을 끝낸 아서 왕이 우려한 것은 전쟁 기간 중에 일어난 학살과 살육, 무자비한 폭력이 불러오는 연쇄적인 복수의 칼날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이 망각하기를 원했다. 그 모든 것을 말이다. 아무 죄없는 어린 아이들과 여자들에게까지 이루어진 살육과 약탈, 강간에 대한 기억과 그것이 필시 불러올 피의 복수 말이다. 다시 말해서 암용 케리그는 망각을 수호하는 괴물이자, 망각 그 자체였고, 그 용이 편히 쉬고 있는 바닥에는 거대한 거인이 파묻혀 있었다. 거대한 거인,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거대한 기억 말이다.

 

이것은 두 번째 질문과도 연관된다고 말할 수 있는데, 두 번째 질문은 늙은 노부부, 액슬과 비어트리스에 대한 것이다. 왜 그들은 처음 마을을 떠날 때의 생각과는 달리 먼 곳에 사는 아들을 바로 만나러 가지 않고, 위험해 보이는 용을 처치하는 일에 끼어드는가? 가는 도중 이러저러한 일에 연루되기는 하지만, 그들이 용을 없애기로 마음 먹는 것은 누군가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자발적인 의지에 따른 선택, 혹은 단호한 결단처럼 보인다. 그것은 결국 작품에 가로질러 놓여 있는 이 질문과도 연관된다고 말할 수 있는데, 기억을 찾는 것이 그들에게 어떠한 의미인가, 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망각의 늪에 빠져 살면서도 그들이 망각하고 있다는 사실마저도 망각하는 마을의 다른 사람들과 달리 어떻게든 기억의 줄을 놓지 않으려 애쓴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두 가지의 문제와 연관된 것처럼 보이는데, 먼저 하나는 망각이 불러오는 어떤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이 무엇인지는 작품 안에 비유처럼 제시된 이야기가 극명하게 보여준다. 여행 도중 우연히 만나게 된 뱃사공에게서 노부부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는다. 그 뱃사공은 바다를 건너 섬으로 가려는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데, 이때 (그들이 부부나 연인일지라도) 함께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으며, 그들이 함께 섬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뱃사공의 확인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 확인이란, 그들의 소중한 기억이 무엇인지 각자 따로따로 확인하는 것이다. 그 기억에서 그들의 참된 관계가 드러나야만 그들은 함께 섬으로 건너갈 수 있으며, 그 곳에서 함께 지낼 수 있다. 물론 이 신비로운 이야기를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그것은 여러 상징물들(<신곡>에서 죽음의 강 스틱스를 건너는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그리고 카론이라는 늙은 뱃사공)이 의미하는 대로 죽음에 대한 비유처럼 보이는데,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과거의 기억 때문이 아닐까. 사람들은 죽음 뒤에 있을 무(無)를 두려워한다. 어떤 이들은 여러 종교에서 제시하는 내세를 믿으며, 또 어떤 이들은 죽은 뒤에 생에서 사랑했던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그들에게 기억이 사라진다면, 그들은 사랑하는 이들을 어떻게 알아보고 다시 만날 것이며, 죽음의 두려움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속으로 생각했지요. 하지만 그 여자는 이 땅에 망각의 안개가 덮여 저주가 내렸다는 이야기를 계속했고, 그건 우리 두 사람도 종종 말하던 거잖아요. 그때 그 여자가 내게 물었어요. '함께 나눈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당신과 당신 남편은 서로를 향한 사랑을 어떻게 증명해 보일 거예요?' 그 후로 나는 줄곧 그 생각을 했어요. 그 생각을 할 때면 너무 겁이 날 때가 있어요." (p.71)

 

다른 하나는 이 죽음 이후에도 이곳에 남겨질 이후의 세대와 관련된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이 소설 <파묻힌 거인>에는 다양한 세대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주인공 액슬과 비어트리스, 또는 기사 가웨인과 같이 나이 들어 이제 죽음을 앞두고 있는 세대, 혹은 전사 위스턴, 수도원의 수도사들과 같은 중간 세대, 아니면 노부부와 윈스턴이 구해내는 에드윈과 같은 어린 세대 말이다. 에드윈을 제외하고, 이들 나이든 세대와 중간 세대는 크게 보아 두 가지의 편으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망각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망각을 걷어내고 기억을 되찾으려는 사람들. 이 두 갈래의 길은 다르다. 망각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기억을 잃고 죽음이라는 거대한 무 속에 빨려 들어갈지도 모를 두려움을 내포하지만, 동시에 살육과 폭력, 학살과 그것이 불러오는 복수를 잊게 만든다. 기억은 사랑하는 사람, 따스함을 안겨준 소녀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게 만들지만, 동시에 다른 종족의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기억, 그들에게 어머니를 빼앗긴 기억을 떠올게 해 강력한 복수심에 불타게 만든다. 기사 가웨인과 전사 위스턴은 그 양 극단을 상징한다. 그 어느 쪽을 지지할 것인가. 아니, 그 질문을 이렇게 바꿔도 좋을 것이다. 이후의 세대, 그러니까 에드윈이나 혹은 (소설 속에 실체로서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액슬과 비어트리스가 그토록 애타게 만나고 싶어하는 아들에게, 혹은 아들과 같은 세대의 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전해줄 것인가.

 

물론 소설이 제시하는 길은 액슬과 비어트리스의 결단대로 용 케리그를 죽이고 파묻힌 거인을 깨우는 것이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이 그렇다고 해서 그 이후 불러올지도 모를 복수의 거대한 피바람을 긍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소년에게 전사로서의 증오심을 불어넣으려 애쓰는 위스턴과 달리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처음 그들이 그랬던 대로) 마지막까지 그에게 사랑을 전해주려 애쓴다. "에드윈! 우리 둘 다 네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앞으로 살아가면서 우리를 기억해줘. 네가 아직 소년이었을 때 느꼈던 이 우정과 우리를 기억해줘." (p.450) 

 

그렇게 그들은 이제 그들이 가야할 곳으로 간다. 소설의 마지막은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 그것이 아름다운 것은 단지 마지막을 앞두고 있는 어떤 아름다운 기억이나, 그들의 사랑을 다시 보여주고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이 아름다운 것은 어쩌면 그것에 미래 세대를 위한 결단이 들어있기 때문은 아닐까. 결국 가즈오 이시구로는 이 마지막에서 이것을 묻고 있는 것 같다. 과거의 세대가 퇴장하면서 미래 세대를 위해 무엇을 남겨줄 것인가. 과거에 대한 달콤함으로 포장된 망각이라는 흐리멍텅함인가, 복수나 증오의 대물림인가, 아니면 미래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나갈 때 필요한 또다른 무엇을 담은 것인. 겹쳐서 보지 않으려 해도 현재 우리를 둘러싼 여러 상황들과 이 소설의 묵직한 질문이 자꾸 어쩔 수 없이 겹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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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먹고 싶은 요리

The Book | 2015.09.23 15:45 | Posted by 맥거핀.
별도 없는 한밤에 - 8점
스티븐 킹 지음, 장성주 옮김/황금가지

 

 

*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은 후 쓰는 리뷰입니다.

 

 

'스티븐 킹의 창작론'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그의 책 <유혹하는 글쓰기>는 창작론 따위는 재미없고 지루할 것이라는 편견을 깨뜨리는 책이다. 그 책은 스티븐 킹의 문학적 자서전에서부터 창작의 기본적인 원리들과 작가로서 갖춰야 할 자세들(그러니까 일종의 총론), 창작의 기술들(각론), 글을 쓸 때 실제적으로 써먹을 팁들 모두를 담고 있으며, 동시에 풍부한 입담을 통해 그의 소설처럼 술술 읽혀내려가는 책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개인적으로 특히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은 책의 말미에서 그가 실제로 원고를 수정하며 보여주는 자잘한 팁들인데, 그것은 한편으로는 그의 소설을 읽는 재미의 핵심이 무엇에서 나오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바로 소설의 '속도감'인데, 그는 원고를 수정하는 기본은 결국 '삭제'이며, 그것은 불필요한 단어를 생략하는 등의 문장쓰기에서부터 하다못해 쓸데없이 거창한 주인공의 이름을 줄이는 것에까지 해당한다고 말한다. 즉 그의 원칙이란 명료하게 서술하여 속도를 유지시키며, 독자를 끝까지 읽게 만드는 것이다. "묘사와 대화와 등장 인물을 창조하는 모든 기술도 궁극적으로는 명료하게 보거나 들은 내용을 역시 명료하게 옮겨적는 (그리고 그 불필요하고 지긋지긋한 부사들을 안 쓰는) 일로 귀결된다. (p.240)"

 

킹의 이 책 <별도 없는 한밤에>는 그의 이런 원칙 실천의 장이다. 그것은 주인공의 이름같은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 헨리, 테스, 다아시, 밥 등의 짧고 평범한 이름들, '1922'의 주인공 윌프리드의 이름은 살짝 긴 것도 같지만, 어차피 그는 이 글에서 계속 '나'로 서술되고 있으니 이름따위야 알게 뭐람 - 다른 조금 더 큰 부분까지 해당되는데, 몇 가지를 예로 들어 보자. 중편 및 단편 4편을 묶은 이 책에 가장 처음 등장하는 소설 '1922'는 다음의 문장으로 시작한다. "나 윌프리드 릴런드 제임스는 지금부터 나의 죄를 고백하고자 한다. 1922년 6월, 나는 내 아내 알렛 크리스티나 윈터스 제임스를 살해하고 시체를 오래된 우물에 유기했다. 내 아들 헨리 프리먼 제임스도 이 범죄를 거들었지만, 헨리는 그때 열네 살이었으니 법적 책임은 물을 수 없다. 헨리는 내 꼬드김에 넘어가 살해에 가담했다. (p.11)" 이 문장을 읽은 다음 소설의 나머지 부분들을 미뤄둔 채 천천히 을 수 있을까? 불확실하거나 모호한 것은 없다. 윌프리드, 그러니까 나는 아내를 죽였으며, 아들도 그 사건에 가담시켰다. 이 사건은 도대체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이 아내를 죽이는 지난한 과정이 200페이지가 넘는 이 소설의 끝까지 이어지는 것일까. 그러나 킹은 질질 끌 생각 따위는 없다. 불쌍한 알렛은 50페이지가 채 넘기도 전에 이미 누비이불에 둘둘 말려진 채로 썩은 냄새가 나는 우물 밑바닥에 던져진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다. 즉 킹은 재료를 차분히 준비하는 것에 요리의 모든 시간을 보낼 마음 따위는 없다. 재료는 이미 후라이팬 안에 던져졌고, 더 이것저것 고민할 이유도 여유도 없다. '빅 드라이버'의 테스는 역시 200페이지에 가까운 이 소설에서 채 30페이지가 지나기 전에 '빅 드라이버'를 만나며, '행복한 결혼 생활'의 '다아시'가 남편의 비밀을 알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킹이 일단 재료부터 냄비 속에 던져놓고 보는 초보 요리사는 당연히 아니다. 킹은 요리의 맛을 내기 위해 두 가지를 첨부하는데, 하나는 재료에 대한 밑간이다. 깔리는 암시들, 다음과 같은 문장들. "나는 아내를 죽인 것보다 아들에게 그런 짓을 한 것이 훨씬 후회스럽다. 왜 그런지는 이 글을 읽다 보면 알 것이다. (p.12)"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지금, 나는 비로소 깨닫게 됐다. '쪼까오다'와 '쫓기다'가 얼마나 비슷하게 들리는지를. (p.47)" "테스의 운명은 그렇게 간단히 결정됐다. 원래부터 지름길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이었으니까.(p.236)" "다아시는 길을 걸을 때 중력이 자신을 땅에 붙들어 줄 거라 믿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행복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그날 밤 차고에 들어갈 때까지는. (p.473)" 순간의 결정으로 갈리는 운명, 이미 결정나버린 운명. 그것은 어떻게 그들에게 절망을 선사했을까.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끝일까. 그릇에 가득 담긴 음식을 한입씩 베어물 때마다 뿌려놓은 밑간이, 아니 뿌려놓은 문장들이 맛을 곱씹게 만든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맛있는 요리가 그렇듯이, 그것은 한 번의 행위로 만들어지는 결과물은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재료는 갈아야하고, 어떤 재료는 볶아야하고, 또 어떤 재료는 삶아야한다. 그리고 그것이 모두 합쳐졌을 때 맛있는 요리가 나온다. 마찬가지로 킹의 이 소설들은 1막으로 이루어진 연극이 아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1922'에서 월프리드가 고백한 아내에 대한 살인, '빅 드라이버'에서 테스와 빅 드라이버의 만남, '행복한 결혼생활'에서 남편 밥의 비밀 모두, 이야기의 초반에 이미 밝혀진다. 그렇다면 나머지 페이지들을 도대체 무슨 수로 채울 것인가. 이 이야기들은 모두 끝났다고 생각한 시점에서 다시 시작한다. 가장 무서웠던 이야기들은 끝나는 것 같았지만, 그것은 단지 1막의 끝일 뿐이며, 이야기는 더 무섭고 잔혹한 2막과 3막을 준비하고 있다. '빅 드라이버'에서 테스는 '빅 드라이버'를 만나고 소설의 시작에서 60페이지 정도가 지난 후 집으로 돌아온다. 벌써? 그렇다면 소설의 나머지 100페이지는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실망하지 마시라. 2막과 3막이 준비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에 킹은 잊지 않고 적절한 양념들을 추가한다. 테스의 아주 잘못된 것처럼 보이는 선택들, 물씬물씬 솟아나오는 조바심들. 그렇게, 그렇게 하지 말란 말이야, 제발. 촉발된 독자의 조바심은 식욕을, 아니 독욕을 돋군다.

 

그러나 킹의 요리들은 아마도 집나간 입맛들을 돌아오게 만드는 것에만 머물러있지는 않은 것 같다. 좋은 요리사들이 만드는 좋은 요리가 그렇듯이 그것은 맛있기도 하지만, 몸을 건강하게 해준다. 그리고 좋은 소설들은 물론 몸이 아니라 정신을 건강하게 해준다. 이 소설들을 이렇게 바꿔서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지극히 미국적인 공간에서 그려내는 미국이라는 가족 사회의 망가진 초상. 이 소설들이 공유하는 지점이 있다. 하나는 공간이 서사를 끌고가는 힘이다. '1922'에서 세밀히 묘사된 외따로 떨어져 있는 작은 농장들(나, 윌프리드가 아내를 죽이기로 결심한 것도 결국 땅 때문이었다), '빅 드라이버'의 "정을 주세요 정을 드릴게요"라는 간판이 걸려있는 버려진 가게, 아니면 '행복한 결혼 생활'에서 완벽히 정리되어 있는 것 보이지만, 아주 더러운 것을 몰래 숨겨놓고 있는 밥의 차고. 할리우드의 (공포) 영화들에서 자주 등장하는 그 자체로 불길하고 무섭고 막막한 공간들. 다른 하나는 결국 이것이 가족이라는 것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미국 사회의 알 수 없는 단면들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지극히 사적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그래서 그 안에서 어떤 공포 서사가 진행되고 있어도 알 수 없는 가족들의 내밀한 서사가 있다. '1922'나 '행복한 결혼 생활'은 말할 것도 없고, '빅 드라이버'의 어머니와 아들, 그리고 '공정한 거래'도 결국 가족의 이야기이다. 이 부서져가고 있는 가족의 초상들, 그것이 토대가 되어 떠받치고 있는 미국 사회라는 불안한 무엇에 대해. (예를 들어 요즘 도널드 트럼프에 대한 지지율을 보면 저쪽도 참 답이 없구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결국 이 소설집 <별도 없는 한밤에>는 그가 그려내는 세계의 연장 선장에 있다. 그의 세계란 미치광이 아버지들이 중심이 되어 벌이는 가족 공포의 세계이다. 외따로 떨어져 있는 폐쇄된 공간에서,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그 공간에서 벌이는 아버지들(남자들)의 피의 서사. 그는 그것을 지금껏 여러 작품에서 그려왔고, 그것은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1922'의 아버지와 아들이, <샤이닝>의 아버지와 아들과 겹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하다. 이 대물림되는 미치광이들. 그들은 미쳐가는 것일까, 아니면 그 오래전 죽은 아버지들의 영향으로 이미 미쳐있었던 것일까. 그러나 그들은 성실하게 납세하고 주말에 교회를 가고,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책을 읽는 농부이자, 훌륭한 회계사이자 17년 간이나 무료로 봉사하는 보이 스카우트 지도자들이기도 하며, 동시에 "우리 군인들을 응원합니다! 아프간디스탄(철자는 킹이 일부러 틀리게 쓴 것이다)에서 승전 기원!!"이라는 문구가 붙은 곳에서 성실히 트럭을 몰며 일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물론 이것은 킹의 농담이지만, 여기에서 한 남자가 생각나기도 했다. <11/22/63>에 등장하는 케네디를 살리기 위해 애쓰는, 킹의 세계에서 보기 드문 선한 남자 제이크 에핑 말이다). 성실하고 좋은 가장인 그들에게는 다른 세계가 있다. '1922'에 등장하는 '음흉한 남자'의 세계, 혹은 '행복한 결혼 생활'에 등장하는 다아시의 거울 속 다른 세계. 그리고 물론 스티븐 킹이 그려내는 미국도 우리 눈에 보이는 미국이 아닌, 우리가 보지 못하는 그러나 엄연히 존재하는 다른 세계의 미국이다. 

 

아무튼 그런 것을 다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스티븐 킹의 600페이지가 넘는 이 소설은 200페이지의 체감속도로 넘어가는 그런 소설이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이 리뷰에서 가장 언급을 적게 한 '공정한 거래'라는 짤막한 단편이 가장 마음에 들었는데, 그것은 이 소설이 가장 잘 쓰여진 것처럼 느껴져서라기보다는 이 소설이 어린 시절의 추억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부분이 있어서였다. 소설을 읽다보니 어린 시절 <환상특급>을 두근거리면서 보던 기억이 떠올랐다. 보고난 후 잠을 잘 이룰 수 없게끔 만드는 공포, 혹은 서스펜스가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끝까지 보게 만들었던 재미, 그리고 거기에 담긴 적당한, 그러나 서늘한 교훈까지 말이다. 그래, 내 어릴 적 <환상특급>의 이야기들도 항상 이런 식으로 끝나곤 했지.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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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5.10.26 00: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혹하는 글쓰기>는 아마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글쓰기교본일거예요. 그 책을 만나고난 후에야 킹의 소설을 읽기 시작했거든요. 물론 그 전에도 킹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들이야 많이 보곤했지만.. 영상이 아니라 킹의 이야기로 읽고싶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던 책이었으니까요. 킹은 적어도 유혹하는 글쓰기로 한 독자를 유혹하는데 성공한거죠. ㅎㅎ

    <별도없는 한 밤에>의 1922 한 편을 읽고나니 책표지까지 달라보이더라구요. 캄캄한 우물속에서 쥐들의 여왕이 된 알렛의 시체가 살아나올것 같은 그런 느낌이요. 사건의 발단은 땅때문이었는데.. 알렛이 물려받은 땅(부동산)에 대한 탐욕과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아내를 견딜수가 없었던거잖아요. 말씀하신것처럼 미치광이 아버지들의 행태는 그의 아들로 이어지고 그것은 이미 그의 아버지에게서 유래된것처럼 보이기도해요. <샤이닝>에서야 더 말할 것도 없겠죠. 1922 를 읽었을뿐인데 빅드라이버나 공정한 거래는 어떤 방식으로 요리를 맛보게 해줄지!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5.10.26 19: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 책은 재미도 있을 뿐더러, 실제로 무엇인가를 쓸 때도 상당히 현실적인, 실제적인 조언들을 많이 담고 있어서 도움이 많이 되죠. 아무튼 킹은 창작론 마저도 거의 소설처럼 읽게 만드는 작가니까요. 가끔 어떤 작가들은 창작론 같은 것만 보아도 소설이 읽고 싶지 않게 될 때가 많으니까요.

      스티븐 킹이 참 심리묘사에 뛰어나요. 놔두지 않고 집요하죠. 읽다보면 마치 자신이 살인자가 된 듯한 그런 기분이 들기도 하구요. 예를 들어 중간에 보안관이 찾아왔을 때 들키고 싶지 않은 감정과 차라리 들켜서 마음이 편해지고 싶은 그런 양가적인 감정 같은 것을 묘사할 때 말이죠.

      여기 소설집에 실린 4편의 소설도 결국은 가족 서사이고, 스티븐 킹의 이야기들은 은근히 가족을 다룬 것들이 많죠.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져다주는 공포가 일반적으로 더 크기도 하구요. 아마 다른 소설들도 실망시키지는 않을 겁니다. 빨리 맛보세요!

결여된 무엇인가가

The Book | 2015.09.17 14:52 | Posted by 맥거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소설들이 있다. 남자가 투고한 <우주 알 이야기>. "원래부터 시간순으로 서술된 작품이 아님은 분명"한 "뒤로 갈수록 한 챕터의 길이가 길어지고, 소제목과 글 사이에는 어떤 패턴이 있는 것 같았는데, 그건 그냥 여자의 착각인지도" 모를 그런 소설. 아니면 남자가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쓴 소설 <그믐>. "학교 폭력 이야기"를 다룬, "화자가 하는 말이 그렇게 다 거짓말이었던 게 반전"인 소설. 이것은 거의 정확하게 장강명의 이 소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하 <그믐>)의 내용을 뭉뚱그려 말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이 소설의 어떤 전략을 말해주고 있기도 하다. 그 전략이란, 시간을 흩뜨린다, 어떤 패턴을 중첩한다, 트렌디한 소재(그러니까 학교 폭력)를 다룬다, 반전을 담는다,를 포괄한 것이면서 동시에 그것이 단순한 전략 이상의 것이 될 수 있도록 어떤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전략들이란 사실 너무 흔한 것이니까 말이다. 시간을 뒤섞는 것, 혹은 패턴을 중첩하는 것(그 패턴을 어떤 '복선'이라 불러도 좋으리라), 반전을 담는 것, 그런 것들은 이미 낡을대로 낡은 수법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소설 속 소설의 내용이라고 이렇게 서술한 것에는 다른 의미가 있을 터였다. 그 다른 의미에 담겨진 무엇이 있을까. 아니면 희미한 의심. 이것마저도 어쩌면 또 하나의 전략이 아닐까.

 

책의 말미를 보니, 이 다른 의미에 주목하는 평들이 있다. 평론가 강지영의 평. "이 소설은 SF의 외연을 끌어오고 있지만 이미 그 안에서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자문자답하고 있는 훌륭한 메타소설이기도 했다." 아니면 평론가 권희철의 평. "형식의 관점에서 볼 때 소설이 기억을 통해 시간의 문제를 다루는 물건이라는 점에서,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 여느 평범한 소설가 소설보다 훨씬 더 깊이 있게 소설이라는 물건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느꼈다." 이 두 개의 평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이 소설 <그믐>이 소설을 통해 '소설이라는 형식'을 살펴보는 일종의 메타소설이라는 점이다. 위에서 얘기한 대로, 소설 속의 소설이 등장하고, 그것이 겉 소설의 내용을 암시한다는 점에서의 비슷한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동시에 다른 설정에서도 이 소설 읽기(혹은 쓰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투고된 원고를 실수로 떨어뜨려 원고가 섞이는 것, 혹은 남자가 자신에게 들어온 '우주 알'에 대해 서술하는 부분 같은 것들 말이다. 남자는 과거를 볼 수 있게 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해주는 자신에게 들어온 '우주 알'에 대해 그것을 책을 읽는 것에 비유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원하는 속도로 읽으면 되는 거니까. 중간에 멈출 수도 있고, 어떤 페이지를 읽다가 다른 페이지로 건너뛸 수도 있고, 앞으로 돌아갈 수도 있어. 시간이란 게 책처럼 통째로 펼쳐져 있으니까." 혹은 "그렇게 책을 읽을 때마다 매번 페이지를 뒤섞고 다시 제본을 해서 읽는 거야."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여자가 종종 놀림 섞은 의문을 가지듯이 그가 모든 것에 대해 알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남자가 볼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을 미술관에 걸린 그림을 감상하는 것에 비유하여 설명하는데, 그는 입구부터 차례대로 그림을 감상할 수도 있고, 중간중간에 그림을 건너뛸 수도 있으며, 다시 되돌아가 특정의 그림을 감상할 수도 있으며, 출구부터 입구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미술관에 걸리지 않은 그림을 볼 수는 없다. 그것을 다시 책에 대한 비유로 돌아와서 생각해본다면, 그는, 그리고 동시에 모든 소설의 독자인 우리들은, 설혹 "책을 읽을 때마다 매번 페이지를 뒤섞고 다시 제본을 해서 읽"을 수는 있지만, 소설이 결국 서술하지 않은 장면을 읽을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소설에서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우리가 여러 책을 읽는다는 행위도 어떻게 보면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는 여러 책을 통해 과거와 미래의 사건, 혹은 동시대의 우리가 경험해보지 않은 사건을 간접적으로 체험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직 쓰여진 적이 없는 무엇인가에 대해 읽을 수는 없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 읽고 싶다면, 우리가 직접 상상하여 쓰는 수밖에 없다. 서술되지 않은 것, 혹은 섞여버린 원고 사이를 이으려면 우리가 우리의 상상을 거기에 첨부하여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결여된 무엇인가가 있다. 예를 들어 소설의 말미에 등장한 질문. 세 가지의 순서를 바꾼 단어들로 이루어진 질문. "도대체 너는 누구였어? 너는 도대체 누구였어? 너는 누구였어, 도대체?" 그것은 그의 작동 방식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남자는 자신의 안에 들어있는 우주 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여러 비유를 들어 설명했지만, 그 질문은 그것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존재가 과연 무엇인지, 그것의 기원과 존재의 이유에 대해 묻는 것이다. 그것을 다시 소설 읽기로 돌아온다면 이렇게 바꿀 수 있을 것이다. (페이지를 섞고 다시 제본을 하여 읽든, 쓰여지지 않은 것을 상상으로 첨부하여 읽든) 소설이란 무엇인가, 왜 소설을 읽으려고 하는가. 그것을 거창하게 말하기 보다는, 나는 이렇게 바꿔서 말하고 싶다. 도대체 너는 누구였어, 너는 도대체 누구였어, 너는 누구였어, 도대체,라는 중첩된 질문이 지시하는 바는 (미세한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결국 같다. 그것은 소설 속에서 시간을 흩뜨려 놓는 것과 비슷하다. 즉 소설 속에서 시간이 뒤섞인다고 해도, 거의 모든 독자들은 그것을 자신의 머리 속에서 재배열하여 자신의 소설 속 시간을 만든다. 그리고 끊어진 시간들을 자신의 상상이라는 풀로 이어붙여서 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다시 말해서, 단어를 뒤섞는 것이나 시간을 뒤섞는 것이나, 결국 하나의 테크닉이고, 그렇다고 해서(즉, 그 테크닉으로 가려놓았다고 해서) 근원적인 질문이 바뀌지는 않으며, 그 질문을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질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예를 들어 이 소설에서라면 이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남자는 여자에게, 그리고 동시에 독자를 향해 서술한다. "지금까지 내가 해온 모든 거짓말들은 다 잊더라도, 이 말만은 기억해줬으면 해. 널 만나서 정말 기뻤어. 너와의 시간은 내 인생 최고의 순간들이었어. 난 그걸 절대로 후회하지 않아. 고마워. 진심으로." 소설 속에서 '이 말만은 기억해줬으면 해', 혹은 '진심'이라는 낱말이 등장할 때에 동반하게 되는 어떤 머뭇거림이 아니더라도, 나는 이 말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 남자의 진심이란 무엇이었을까. 아니, 이 남자에게 이 여자는 어떤 의미였을까. 나는 사실 잘 모르겠다. 그것을 여자의 입을 빌려 묻고 싶다. 도대체 너는 누구였어? 그것은 남자 안에 작동하는 우주 알의 작동 방식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다. 그 우주 알이란 무엇인지, 혹은 그 우주 알이 들어간 남자라는 존재는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묻는 것이다. 그가 원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왜 우주 알은 그에게 들어갔는지, 소설의 말을 빌리자면 그의 '패턴'이 과연 무엇인지. 그에게 남은 패턴, 그리고 그 전에 그가 지워나간 패턴은 무엇이었는지.

 

"인간이란 건 결국 패턴이야." 소설은 말한다. 그렇다면 소설도 일종의 패턴일까. <그믐>에는 어떤 패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소설에 붙은 중간제목들의 패턴. '순서/보람/개성' '작두/홍콩/교지' '노선/모범/소금' ..... 언뜻 연관이 없어 보이는, 그러나 두 음절로 이루어진 어떤 패턴을 이루는 듯한 단어들. 이 소설 <그믐>도 그런 것과 비슷하다. 작은 패턴들은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 패턴들이 잘 붙지가 않는다. 각각의 디테일한 이야기들이 있다. 예를 들어 '홍콩', 홍콩에 살고 있는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동창의 이야기. 혹은 '모범', 모범택시를 모는 아버지와 그의 바람을 의심하는 어머니의 이야기. 이 각각의 이야기들은 디테일이 살아 있으며, 그 자체로 충분히 읽기의 즐거움을 주는 이야기거리가 된다. 그것을 작가의 능숙한 테크닉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들이 붙어서 만들어내는 무엇인가, 예를 들어 남자는 어떤 사람이고, 여자는 어떤 사람이며, 남자를 집요하게 쫓는 아주머니는 어떤 사람인가는 여전히 흐릿하다. 그것은 각각의 패턴들은 있지만, 그 패턴들을 엮는 고리, 그 고리의 만듦새가 헐겁기 때문이다. 디테일(혹은 패턴들)의 총합이 소설이 되지는 않는다. 각각의 장면들을 최대한 디테일하게 만든다고 해서 좋은 영화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디테일함들을 엮어내는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소설이라는 형식에는 필요하며, 그것은 이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이상의 무엇인가는 무엇인가, 무엇이 결여되었는가에 대해 답하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결국 소설을 왜 읽는가, 소설은 읽는 이에게 무엇을 전달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될 것이다. 다만 나는 도대체 너는 누구였어,라고 질문하며 애처롭게 남겨진 이 인물이 작가의 테크닉 실험의 희생양이 아닐까,하는 희미한 의심, 혹은 그것마저도 어떤 전략의 일부가 아닐까,라는 더 희미한 의심을 가져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한국이 싫어서>에서 계나의 "난 이제부터 진짜 행복해질거야"라는 진술에 섞인 어떤 의구심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한다. 이 <그믐>의 "진심으로"와 <한국이 싫어서>의 "진짜'가 말하고자 하는 무엇에 대하여. 

 

 

덧.

두 가지의 목적에서 이 리뷰를 썼다. 하나는 장강명 리뷰대회에 붙은 상금을 보고. 그런데, 결국 이런 내용이고 보면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리뷰인 것 같다. 아니 내가 출판사 직원이라도 이런 리뷰는 안 뽑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원고지 10매 이내라는 분량 제한도 무시하고 있으니....)

다른 하나는 지난 번 <한국이 싫어서>를 읽고 남긴 별 하나가 마음에 걸려서다. 소설 하나만 읽고 이 작가에 대해 너무 단정적으로 생각하고 말한 것은 아닐까. 어쩌면 다른 소설들은 이와는 전혀 다르지 않을까,싶어서 한 권쯤 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렇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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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견, 김성제

Ending Credit | 2015.08.25 15:02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내용 및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영화 <소수의견>의 마지막 장면들은 상당히 흥미롭게 구성되어 있다. 재판부는 배심원단의 의견을 뒤집고 피고 박재호(이경영)에게 정당방위를 인정하지 않고, 특수공무집행방해치사죄를 적용한다. 그리고 퇴정하는 재판부와 결과에 분노하는 방청객의 모습을 교차하여 보여준 다음, 박재호의 얼굴을 비추고, 곧바로 이 사건의 키, 그러니까 지금까지 보여주지 않으려 애썼던 사건 당시의 바로 그 장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시 법정을 나서는 박재호로 돌아와 그가 (이유가 어찌되었건 결과적으로)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여준 다음, 교도소 안에서 복잡한 감정에 잠긴 박재호의 모습을 보여주고, 여기에 자식을 잃고 회한과 슬픔에 잠긴 (박재호에게 살해당한) 전경 김희택의 아버지(장광)의 모습을 비춰준다. 이 마지막 장면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 마지막 장면에서 두 아버지의 위치는 거의 비슷하다. 자식을 잃은 두 아버지, 서로가 가해자로 얽혀 있는 이상한 상황. 그러나 두 아버지는 (원망한다고 말하면서도) 서로를 원망하지 않는다. 김희택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박재호에게 말한다. 그것은 피치 못할 어떤 상황에서의 실수일 것이라고. 눈 앞에서 아들을 잃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이 마지막 장면들에서 이 두 아버지는 서로에 의해 아들을 잃었지만, 서로를 깊이 원망하는 대신에 묘한 연대(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의 지점에 와 있다. 그렇다면 그 연대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의 힌트는 아마도 그 장면들 사이에 이상하게 끼어든 것처럼 보이는 그 결정적 장면, 즉 사건 당시의 화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사건 당시의 장면이 서 있는 위치는 조금 이상하다. 이 장면 전후로 붙은 것은 박재호에 대한 클로즈업이다. 즉 보통의 영화문법에서라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 장면들이 박재호의 시점에서 본 회상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조금 이상해 보이는 것은 이 장면들이 박재호의 증언을 강화하거나 그의 입장을 강조해주려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미 사건의 상당 부분은 어떤 증언들이나 정황적인 증거, 혹은 검사 홍재덕(김의성)의 위증 강요가 밝혀짐으로서 드러난 상태이고, 배심원단에 의해 박재호의 정당방위가 인정된 상태이다. 물론 그 후에 재판부가 그 결정을 바로 뒤집기는 하지만, 그 장면 바로 후에 재판부의 굳은 얼굴로의 퇴장과 항의하고 분노하는 방청객들의 모습을 교차하여 보여주는 것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위치가 어디인지 대략 짐작하게 해준다. 그런데 이어져서 위치한 이 '사건 당시의 진실' 혹은 '박재호의 시점에서 본 사건의 진실'은 조금은 다른 인상을 심는 것처럼도 보인다. 사건의 어떤 팩트들, 그러니까 전경 김희택이 박재호의 아들 박신우를 죽이고, 다시 박재호가 전경 김희택을 죽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이것이 영화적으로 눈앞에서 재구성되었을 때 그것은 조금 달라 보인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어쩌면 이런 질문도 가능할지 모르겠다. 만약 이 장면을 재판부, 혹은 배심원단이 보고 판결을 내린다면, 그 때는 그에게 정당방위를 인정할 수 있을까. 어쩌면 뒤통수를 가격하는 장면을 느린 화면으로 보여주는 것은 그것이 정당방위라고 인정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실제라면 이것은 절대 볼 수 없는 장면이지만, 이 볼 수 없는 장면이 영화적으로 관객에게 심는 효과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는 있다. 이 장면만을 놓고 박재호의 무죄 여부를 판단한다면, 그에게 영화를 본 우리는 무죄를 선고할 수 있을까. 아마도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도리어 (팩트는 그대로이지만, 거기에 어떤 영화적인 효과를 심은) 이 장면은 박재호에 대한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다른 질문을 하기 위해 거기에 위치한 것처럼도 보인다. 예를 들어 이런 질문. 그들은 거기에서 왜 맞닥뜨리고 있는가. 이제 막 철거되려는 어둡고 침침한 성당 건물에서 그들은 왜 서로를 죽이기 위해 달려들었나. 그들을 거기에 몰아넣은 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을 거기에 몰아넣고, 이들 모두를 피해자로 만든 자, 다시 말해서 위에서 말한 묘한 연대의 반대편에 있는 자들, 즉 '국가'는 누구인가. 이들은 결국 피해자들만 남은 것처럼 보이는 이 재판에서 (보이지 않은) 승리한 자들이다. 영화 <소수의견>은 사실 두 가지의 재판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하나는 박재호가 정당방위인가 아닌가를 밝혀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에게 배상 책임을 묻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개의 재판에서 박재호와 김희택(의 부)은 모두 지면서 피해자의 위치에 머무르게 되었고, 오로지 국가만이 승리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하나의 다른 실제 사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흔히 용사 참사라고 불리는 그 사건. 경찰 1명과 철거민 5명이 죽음에 이르렀던 그 사건. 영화 <소수의견>은 "이 영화의 사건은 실화가 아니며 인물은 실존하지 않습니다"라는 단호한 자막으로 시작하지만(정치적인 논쟁에 휘말리는 것을 방지하고, 영화가 하나의 방향으로만 해석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필요한 조치였을 것이다. 그런데 웃긴 것은 그럼에도 이 영화는 만들어진 후 한참이 지나고서야 지각개봉했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는 분명 어떤 하나의 사건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그것은 철거민을 둘러싼 이야기를 다루었기 때문도 아니고, 영화를 둘러싼 어떤 이야기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청와대에서 이 사건 대신에 연쇄살인마를 다룬 사건을 더 강조하여 보도하라는 요청을 내려주는 장면 같은 것(실제 용산참사에서도 연쇄살인마 강호순 사건을 더 강조하여 보도해달라는 청와대의 요청이 있었다)들이 있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두 가지 면에서 그런 것처럼 보이는데, 먼저 하나는 실제 사건과 영화 속의 사건, 이 두 가지 사건 모두 위에서 말한 것처럼 결국 국가가 승리한 사건이라는 점이다. 김영진 평론가는 <씨네21> 지면을 통해 <소수의견>을 다루며, 이 영화가 박재호와 김희택의 아버지를 희생자의 자리에 위치시키면서, 그들이 희생자의 자리에서 자존을 회복하지 못하게 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러나 그랬을지 몰라도, 이 장면들은 분명히 어떤 분노를 보는 이에게 불러 오는데, 실제의 사건에서도 모두가 피해자였을 뿐, 승리자는 국가였고, 그들의 하수인이었다. 살기 위해서 용산 남일당 건물 옥상에 올라간 철거민들은 물론, 거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두 개의 문이 있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영화<두 개의 문>), 무리한 진압 작전에 투입된 전경 및 경찰들도 피해자다. 이들을 그 옥상에서 맞닥뜨리게 한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푸른집에서 나와 그분이 자서전을 쓰시는 동안, 또 당시 서울지방경찰청장으로 진압 작전을 지휘한 김석기 씨가 총선에 출마하고 한국공항공사 사장으로 가는 동안, 철거민들은 희생자의 위치에서 자존감이 억눌린 채 살아야만 했다. 영화를 보는 이들의 카타르시스는 이들이 희생자의 위치에서 벗어나 자존을 회복하는 것으로 충족될 지 몰라도, 실제의 어떤 것을 상기시키는 데 이는 때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도 한다.   

 

다른 하나는 이 영화가 장면을 소구하는 방식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영화는 사건의 진실을 둘러싼 결정적인 장면의 공개를 최대한 늦춘다. 마치 최대한 보여주지 않으려 애쓰는 것처럼도 보인다. 물론 사건의 진실이 영화의 키가 되는 법정영화에서 흔하지 않은 방식은 아니다. 그러나 사실 이 영화 <소수의견>은 어떤 사실관계를 법정에서 추리하면서 밝혀내, 그로인해 어떤 영화적 쾌감을 얻고자 하는 종류의 영화는 아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어떤 정황적 증거는 법정을 통해 거의 밝혀졌으므로 이 장면의 공개로 사실이 뒤집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보기에 이 장면은 어떤 희생자의 정서를 두 사람에게 덧붙이는 것 외에도 (본의 아니게) 어떤 다른 것을 연상시키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그것은 이 장면의 공개가 이렇게 최대한 지연된 후 드러남으로써 실제의 사건, 즉 용산참사에서의 그 공백을 다시 생각케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영화 <두 개의 문>에서도 잘 드러났듯이) 이 사건의 중요한 부분은 여전히 공백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3천 쪽에 달하는 초동수사 기록과 경찰이 촬영되지 않았다고 주장한, 존재하지 않는 'No Signal'의 채증 영상. 그 곳에서는 사람이 불타 죽었지만, 그들이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 아무런 증거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니 공개되지 않았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 공백을 앞에 두고, 오로지 철거민들에게만 책임을 물었다.

 

다시 영화로 돌아온다면 우리는 마찬가지를 영화에 물을 수 있다. 영화의 막바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영화 속 재판부나 혹은 윤진원 변호사(윤계상)의 위치에 비슷하게 서 있다. 우리는 정황적인 증거를 보고 있지만, 사실 중요한 지점은 여전히 공백에 놓여져 있다. 우리는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가. 박재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물을 수 있다면 그에게만 책임을 물을 것인가. 그러나 실제의 재판부는 영화 속 재판부와 같이 그에게만 책임을 물었고, 그들만 피해자이자 희생자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 결정적 장면을 결국 영화 속에서 공개하지 않고 끝내는 것도 가능한, 어쩌면 더 훌륭한 선택이 되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의 설정대로라면 이 장면은 결국 우리가 볼 수 없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볼 수 없는 것을 영화가 보여줄 때 생기는 쾌감, 혹은 정서와 그와 동시에 발생하는 어떤 미심쩍음. 그것은 늘 비슷한 무게이지만, 그 미심쩍음이 종종 더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것은 이 영화에서도 그렇다.)

 

이 바깥에, 그러니까 박재호나 김희택의 부 외곽에 존재하는 인물들이 있다. 아마 우리들 대다수도 그에 해당할 것이다. 영화는 두 가지의 인물상을 보여준다. 하나는 경직되어 마치 어떤 부품처럼 존재하는 사람들. 국가의 대리인으로 나온 자들, 그들은 마치 어떤 기계의 일부처럼 보인다. 그들이 보여주는 차갑고 기계적인 행동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의 미소(특히 여검사가 보여주는)도 마치 로봇이 보여주는 그것같아 섬뜩하다. 그것을 홍재덕 검사는 영화 끄트머리에서 요약하여 말해주는데, 그것은 자신이 국가라는 거대한 기계의 부품임을 재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즉 그 '넌 뭘했냐'는 그 물음은 네가 부품으로서 뭘했냐,는 질문인 것이다. 그 반대편에 있는 인물상들이 있다. 윤진원 변호사, 장대석 변호사(유해진), 공수경 기자(김옥빈) 같은 인물. 이들은 언뜻 '대의'라는 큰 틀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 모두는 동시에 각자의 입장과 각자의 지향점이 있다. 즉 어떤 대의도 물론 중요하지만, 동시에 윤변호사는 지방대를 나와 국선변호사나 하고 있는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려는 목적도 있을 것이고, 공기자는 특종을 터뜨리고자 하는 목적도 있을 것이다. 즉 그들은 어떤 대의라는 큰 기계의 부속품은 아닌 것이다. 각자 나름의 욕망으로 최선을 다해서 그 대의를 수행하고자 하는 어떤 각축도 여기에는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에는 대의가 단지 선의의 총합만으로는 이루어질 수도 없고, 완수될 수도 없음을 아는 어떤 현실 인식이 들어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을 윤진원 변호사는 하나의 일화로 잘 요약하여 들려주는데, 그가 떨어지는 실력에 지방 국립대에나마 갈 수 있도록 공부를 가르쳐 준 사람은 (학생운동으로 인한) 수배자로 방에 숨어있던 형의 친구였다. 영화 속 장대석의 한숨섞인 한탄대로, 이 386 따라지에 대한 (한숨섞인) 부채 의식. 이는 영화 속에서 이들이 처한 위치를 말해주면서, 동시에 그 부채만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을 같이 말해준다. 그것은 기계가 지시하는대로만 움직이는 부품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신의 욕망과 염치를 가지고 그것에 대응하며 움직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이에 대비되는 자신의 반대편에 있던 그 로펌으로 들어간 홍검사, 아니 홍변호사의 몰염치). 몰염치의 시대의 최소한도의 염치, 그것이 무엇인지를 이 영화의 인물들, 윤변호사와 장변호사, 공기자, 그리고 더 나아가 박재호와 김희택의 아버지 등은 보여주고 있다(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것, 혹은 원망하지만 그것이 피치 못할 사정임을 아는 것). 그 반대편에 서 있는 국가라는 기계가 벌이는 몰염치의 공습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저번에 양심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베테랑>의 쪽팔림을 묻는 그 질문도 여기에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대한 몰염치의 시대, 우리는 우리의 염치를 어떻게 보호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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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 류승완

Ending Credit | 2015.08.13 14:41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결말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류승완의 신작 <베테랑>은 전작들, 특히 그 중에서도 <부당거래>의 대척점에 서 있는 듯한 영화다. 물론 어떠한 것들이 대척점에 서 있으려면 그것들은 공유하는 부분이 있어야만 한다. <부당거래>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 역시 경찰 내부가 주 무대가 되며, 그들의 활동이 이야기의 주요 소재가 된다. 류승완은 이를 약점으로 생각하지 않고 의식적으로 활용하려는 듯이 보이는데, 예를 들어 배우들의 거리낌없는 활용이 그것이다. 황정민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주인공 형사 역할을 다시 맡고 있으며, 천호진, 안길강, 김민재 등의 배우들이 비슷하게 재변주된다. 물론 <베테랑>은 <부당거래>와 다른 점이 훨씬 많은 영화다. 그것을 여러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캐릭터에 보다 확실한 색깔을 입히려 했다는 부분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부당거래>나 그 이후 나왔던 <베를린>이나 인물들의 캐릭터는 복합적이고, 구도는 복잡하다. 인물들은 선과 악의 경계에서 모호하게 자리잡고 있고, 이야기는 점점 중층적으로 변해간다. 그러나 <베테랑>은 다르다. 인물들의 선악의 경계는 확실하고, 영화는 그들의 거의 처음 등장 장면에서부터 관객들이 인물의 성향을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끔 방점을 찍는다.

 

그러니까 이번 영화에서 류승완은 드라마에서 다시 액션으로 방향을 튼 것처럼 보인다. 예전 <베를린>에 대한 평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쓴 적이 있지만, 좋은 액션물에서 이야기는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으며, 캐릭터를 어느 정도 명확하게 규정짓는 것은 필수적이다. 어떤 액션물이든 관객은 심정적으로 기댈 곳이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액션물이든 설혹 주인공이 지나친 폭력을 휘두르는 듯이 보여도, 관객은 그 캐릭터를 응원하며 영화를 본다. 그 캐릭터가 어느 쪽의 편에 서 있는지 이미 알고 있는 까닭에 그렇다. 그리고 더 나아가 액션물에서 캐릭터의 성향을 규정짓는 것은 그들의 액션의 형태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유명한 액션 영화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특유의 액션들이 있다. 성룡의 영화에서 성룡이 보여주는 액션이 있고, 본 시리즈에서 주인공 본이 보여주는 액션이 있으며,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에서 주인공 에단 헌트가 보여주는 액션이 있다. 그것은 각각의 형태가 다른, 특유의 액션이며, 캐릭터의 성향과 결합된 액션이다. 이 영화 <베테랑>에서도 주인공 형사 서도철(황정민)이 보여주는 액션과 악역 조태오(유아인)가 보여주는 액션은 다르다. 서도철이 보여주는 것은 그의 느물느물한 성격을 보여주는 듯한 성룡 식의 슬랩스틱 액션이다. 어딘가 허술해보이고, 맞기도 많이 맞지만, 사실은 기술적으로 꽤 다듬어져 있다. 그러나 공격적이기보다는 방어적이며, 치명적인 공격은 피한다(성룡의 공격으로 사람이 죽는 법은 없었다). 반면 조태오의 액션은 비열하고 치졸한 액션이다. 즉 예전 동네 비열한 양아치들이 일대일 주먹 싸움에서 불리해지면 접이칼을 꺼내들던 식이다. 그는 불리해지면 앞뒤 가리지 않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며, 어떤 잔인한 방식도 서슴치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액션 방식은 아마도 이 영화의 주제와도 연결이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를 관통하는 것처럼 보이는 말이 있다. 쪽팔리게 하지 말자. 이 말은 주인공 서도철이 계속 반복적으로 하는 말이자, 그가 어떤 삶의 태도로서 지향하는 말처럼 보인다. 서도철은 조태오의 돈의 회유에 넘어간 사람들이 그에게 어떤 압력을 가할 때, 늘 되풀이하여 말한다. 쪽팔리지 않아요? 부끄럽지 않아요? 그는 자신의 아들에게도 부끄럽게 맞기보다는, 차라리 정정당당하게 맞서는 쪽을 택하라고 말하며, 그것은 다시 그의 아내(진경)에게도 비슷하게 반복된다.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이상하게 보이는, 그러니까 무리하게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도리어 감독이 가장 하고 싶어하는 말처럼 보이는 장면은 아내가 경찰서에 와서 하는 그 대사이다. 나, 쪽팔리게 하지 말라는 것.) 즉 류승완은 대놓고, 노골적으로 이 영화에서 묻고 있다. 그거 쪽팔린 거잖아,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즉 이 핀트는 조태오에게 어느 정도 향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조태오의 악행을 돕는 다른 사람들에게 더 맞춰진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적어도 영화 상에서의 조태오는 그것이 쪽팔린 건지, 아닌지 이미 분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인물이니까. 그 메시지는 조태오의 하수인들, 그러니까 최상무(유해진)를 비롯한 조태오의 곁에서 악행을 실행하는 인물들(하다못해 조태오를 수행하는 경호원들에게까지)이나 그의 돈의 유혹에 굴복하여 서도철에게 압력을 가하는 경찰 내외부의 인물들에게 향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감독 류승완이 이 사회에 던지는 나름의 진심어린 호소일 것이다. 부끄러운 일은 하지 말자, 제발.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미안한 말이지만) 그것은 사실 순진한 메시지일 수 있다. 쪽팔리지 말자, 부끄럽지 말자고 호소하는 것은 결국 개인의 어떤 양심에 호소하는 것이니까. 이것은 어떻게 생각해보면 아주 쉽게 배반당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그것을 잘 알면서도 류승완은 그것에 건다. 어쩌면, 류승완은 이제 걸 수 있는 것은 그런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양심이라는 것은 이제 류승완의 영화에서 묘하게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류승완의 초창기 영화는 보다 순진했다. 사실 알고보면 순진한 남자들이 순수한 것을 지켜내려고 싸우다가, 혹은 그것에 배반당해 죽었고, 그것을 류승완은 촌스럽게 찍었다. (물론 이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이제 더이상 그렇게 촌스럽게 찍지는 않기 때문이다.) <피도 눈물도 없이>, <주먹이 운다>, <짝패>의 인물들. 그 이후에 류승완은 시스템의 문제를 엿봤다. 그것은 아마도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들은 양심으로만은 안된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반대편에는 거대한 시스템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혹은 그 시스템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베를린>, <부당거래>에서의 시스템의 탐색은 여전히 그것이 견고하다는 재확인이었다. (<부당거래>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한다면, <부당거래>는 결국 그 시스템이 작동하는 그 방식으로 정확하게 끝을 맺으며 거기에는 어떤 절망이 들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에 <베테랑>의 어떤 호소가 있다. 쪽팔린 줄 알아. 즉 류승완의 처음 영화들이 거대한 조직에 맞서는 개인들의 실패를 응시했다면, 두 번째에서는 그 조직이 바뀔 수 있는지 가능성을 탐색하며 다시 그것에 절망감을 맛본 다음, 이제 <베테랑>에서는 약간은 우회적이지만, 보다 강력한 접근방식을 택한다. 그것은 그 조직, 시스템 구성원들의 개개인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이다. 너희들이 거기에 그러고 있는 것이 부끄럽지는 않니. 이것은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순진한 호소이기는 하지만, 어떠한 의미에서는 가장 근원적으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설사 어떤 악이 거대할지라도 그 악은 소수의 절대적인 악과 다수의 중간자적 모호함이 결합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중간의 모호함들을 선의 편으로 돌려놓을 수 있으면 악은 뿌리뽑힐 수 있다고 류승완은 호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류승완의 게임이다. 상대의 알 수 없는 진심을 믿고 벌이는 순진한 게임. 이제 걸어보는 마지막 승부수. (다시 말해서 류승완이 보는 한국사회는 혼탁해지고 도리가 땅에 떨어진 무협영화의 강호이다. 갑은 굳건하고, 을이 을과, 또는 을이 병과 싸우게 만드는 이상한 법칙이 난무하는 세계 - 조태오의 사무실에서 벌어지는 격투는 바로 그 풍경이다. 너무 노골적이기는 하지만 - 그러니 시스템과 맞서는 개인, 그러니까 액션 영웅이 필요해진다. 그러나 이 액션 영웅은 단지 절대악을 처단하는 것이 그 임무가 아니다. 배트맨의 임무도 결국 절대악, 예를 들어 조커를 처단하는 것이 아니라, 더이상 선량한 이들이 악에 물들지 않도록 막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협영화의 영웅도 절대악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땅에 떨어진 강호의 도리를 다시 세우는 것이 목적이다. <베테랑>의 서도철도 이 지점에 비슷하게 위치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 승부수가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이 영화는 사실 정확한 마무리를 보여주지 않는다. 서도철의 승리로 게임이 끝났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 게임의 결말은 아직 알 수 없다. 우리는 현실에서 승리처럼 보였지만 승리가 사실 아니었던 것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로 인하여 새삼 화제가 되었던 여러 지난 사건들. 그 지난 사건들에서 가해자들은 어떻게 처벌되었고, 결국 현재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가를 생각해본다면, 이 영화의 결말이 승리가 아닐 수도 있음을 안다. 그 끝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어쩌면 류승완은 이 때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을 풀어준 시스템을 만들어낸 것에 이 영화를 보고 있는 당신도 어쩌면 일조한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부끄러운 줄 알아, 하고 말이다. 아니, 어쩌면 이것은 류승완의 순진한 호소가 너무 딱해서 내가 말하는 억지일지도 모르겠다. (보여주지 않은 것에서 무엇인가를 봤다고 말하는 것은 대부분 억지이니까.) 다만 말할 수 있는 것만을 말하자. <베테랑>은 거대한 조직과 단지 가지고 있는 조그만 힘으로 대결하려는 개인을 보여주는 류승완의 처음으로 돌아간 듯한 영화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 개인은 조금 더 느물느물해졌고, 단지 고독한 액션 영웅이 아닌 주위를 돌아보고 활용하는 방법을 조금은 배운 것 같다.

 

그것이 단지 두 시간 동안의 영화적 쾌감으로 끝나는가, 혹은 그 이후의 다른 것으로 조금이나마 연결되는가는 결국 관객의 몫이다. 다시 말해서 상대의 알 수 없는 진심을 믿고 벌이는 순진한 게임. 그 순진한 게임이 순진한 패배로 끝날지 아닐지는 이제 게임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달렸다.

 

 

 

   

- 2015년 8월, CGV 역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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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5.09.13 19: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 어제서야 <베테랑>을 관람했어요. 말씀하신대로 서도철과 조태오의 액션은 참 달랐는데 캐릭터의 성격을 액션에 투사해서 찍은것 같았습니다. 그 두사람이 만나는 첫 장면에서 조태오는 그 비정상적이고 폭력적인 행동으로 서대철의 마약복용 이라는 레이더망에 걸려들잖아요. 정말 그의 폭력성은 완전히 맛이간 뇌와 심장을 가진 자만이
    저지를 수 있을것 같아요. 류승완감독은 그런식으로 악의 정점을 보여준게 아닌가싶습니다.
    아마도 그런 절대악은 사라지지 않겠죠. 늘 존재했던 것이니까요.
    하지만 맥거핀님이 리뷰에서 쓰셨듯이 소수의 절대악을 제외한 "중간자적 모호함" 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지켜갈 수 있는 방법은 그런 악의 시스템과 맞대면하고 싸울 수 밖에 없는 거잖아요. 쪽팔림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기본적인 윤리감각을 잃어버린 사회에서 서도철은 쪽팔리게 살고싶지 않다 라는 개인의 윤리를 끝까지 놓치지않은 캐릭터로 기억할 것 같습니다.
    베테랑 2 가 만들어진다면 절반정도의 그림은 그릴 수도 있을것 같아요. 물론 나머지 절반은 감독몫이겠지만요.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5.09.16 01: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글이 늦었습니다.
      어떻게보면 사실 조금 안이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사실 냉정하게 말한다면 이게 가능한가,라고 물었을 때 영화니까 가능하지..라고 답할 수밖에 없을 부분도 있을 겁니다.

      제가 위에 배트맨 이야기도 조금 했지만, 사실 다크나이트 같은 영화에서 배트맨이 조커를 처단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엄청난 재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죠. 서도철 같은 말단 형사가 그런 재벌을 거의 혼자 힘으로 잡을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사실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라고 현재의 한국사회에서 말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뭐 근데 그건 류승완 감독도 잘 알죠. 그럼에도 그렇게 그린 것은, 결국 그런 가능하지 못한 것이 가능해지려면 개개인의 양심(혹은 염치, 수치심)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순진함이 반영된 결과물이라고 봅니다. (결국 시스템을 이기는 것은 지극히 순진한 자들 아닙니까.) 그게 류승완의 장점이죠. 그런 스트레이트한 순진함. 잔꾀쓰지 않고 정면승부하는 것.

      다만 지금의 망가진 시스템으로는 그런 정면승부가 너무 체급차가 나는 대결 같아 보이기는 합니다. 시스템을 어떤 식으로 공격할 것인가,는 앞으로 많은 한국영화에서 답해야 할 문제일 겁니다.

  2.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5.09.13 19: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소수의견><암살> 모두 이번 여름에 본 영화들이네요.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올해 EIDF 영화제 출품된 영화들 보셨어요? 전 보고싶은 영화들이 여러편 있었는데
    놓치거나 시간이 안돼서 어쩌다 <몽테뉴와 함께 춤을> 한 편 봤어요.
    작년여름엔 맥거핀 님 덕분에 상영관에 꽤 여러편의 영화를 관람했었는데.. 요즘 시리아 난민에 대한 기사를 접하니 작년에 본 <홈스는 불타고있는가>가 생각났었습니다.

    그리고.. 많이 늦었지만 생일도 축하드려요.
    저랑 생일날이 하루 차이라 생각이 났었죠. ^^;
    무엇보다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좋은 가을 맞이하시길~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5.09.16 01: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EIDF 영화..음악다큐 한 편 봤습니다. 그것도 꼭 보겠다고 마음 먹어서 시간 맞춰서 겨우 봤네요. 제목이 '50번의 콘서트'인가 그럴 겁니다. 뭐 보고 싶으면 D-Box가서 결제해서 보면 되니까 천천히 보고 싶은 거 골라 두었다가 챙겨보지요.^^ 제목만 죽 보기는 했는데, 라인업이 정말 다양하더군요. 제목만 보고 있어도 뭐랄까..세상에 참 별별 일들이 다 일어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저도 생일 축하드립니다. 그런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죠. 건강과 함께 즐거운 날들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좋은 영화도 함께 하시고요. 저는 이번에 개봉하는 영화 중에서는 <사도>, <마션> 정도를 보게 될 듯 합니다. 앞으로 한달에 한번이라도 독립영화나 작은 영화를 챙겨보고 싶은데 가능할지 모르겠군요. 아무튼 좋은 문화생활도 함께 하세요.^^

행복해지든 말든

The Book | 2015.08.06 13:27 | Posted by 맥거핀.
한국이 싫어서 - 2점
장강명 지음/민음사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책 뒤편에 있는 문학평론가 허희 씨의 해설을 읽고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의 끝은 주인공 계나가 난 이제부터 진짜 행복해질 거야, 라고 결심의 말을 덧붙이는 것으로 끝난다. 그런데 허희 평론가는 단호하게 말한다. "나는 그녀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고 확신한다.(p.200)" 그러니까, 이 해설은 소설의 결론을 뒤집는 것이며, 어떠한 의미에서는 결국 이 소설이 어떤 부분에서는 무엇인가를 의도적으로 숨기고 있거나, 혹은 그려내는 데에 실패했다(혹은 치밀하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어떤 부분에서 그런가.

 

난 이제부터 진짜 행복해질 거야, 라는 결심. 내가 보기에는 그것은 두 가지로 나누어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한 가지는, '난 행복해질 거야'라는 진술.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나는' 행복해진다,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국가나, 가족이나, 다른 거대한 무엇이 끼어들 틈은 없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제목 <한국이 싫어서>는 일종의 낚시, 혹은 자극적인 마케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계나가 한국을 떠나 호주로 이주하는 것은 '한국이 싫어서'가 아니다. 한국이 싫어서, 가 아니라, 한국에서 행복해질 수 없다고 혹은 한국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실 여기에는 국가라는 이데올로기가 가지는 무엇이 끼어들 틈은 없다. '한국'이라는 것은 단지 어떤 울타리의 다른 이름일 뿐이고, 허희 씨의 말을 빌리자면, 그저 여러 개 축사 중에 어느 한 귀퉁이에 붙여진 이름일 뿐이다. 그게 '한국'이면 어떻고, '서울'이면 어떠하며, '호주'든 혹은 '우간다'인들 뭐가 달라지는 게 있으리.

 

다시 말해서, '한국이 싫어서'라는 제목은 '한국'이라는 특정의 공간에 대한 비판을 담고자 한다는 오해를 불러오지만, 사실 이 소설에서 말하는 것은 그런 거창한 것은 아니다. 이 소설에서 말하는 한국에 대한 비판은, 우리가 익히 알고, 우리가 익히 상상하는 그 지점에서 머무르며, 단지 계나가 한국을 탈출하고자 하는 것은 '한국'이라는 공간이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공간에서 자신이 살아남을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즉 계나(그리고 철저하게 계나의 1인칭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에서 계나의 세계관과 소설의 세계관은 동일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이 소설)에게는 사실 그 나머지는 관심 밖, 아이 돈 케어이며, 어떠한 의미에서는 계나의 스탠스는 사실 그녀가 비판하고자 하는(그러나 사실 정확하게 얘기하면 비판하는 척 하는) 스탠스와 거의 일치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즉 이 소설에서 담고 있는 '한국'이라는 공간에 대한 비판은 그 공간을 지배하는 지배법칙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그 지배법칙의 (최소한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에 대한 비판에 가깝다. 지배법칙이 그 모양으로 생겨먹은 것에 대해서는 소설은 사실 관심조차 별로 없다. 오해는 마시라. 나는 이것이 마냥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소설에서 자꾸 '한국'이라는 것을 불러오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 뿐이다. 그저 계나가, 혹은 소설이 말하는 지점은 '내가'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것이 어디가 되었든 말이다. 그 이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사실 이 소설의 '관심 밖'이다. (그러니 '한국이 싫어서'라는 이 제목은 마케팅의 산물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한국이 별로 싫지는 않은데, 내가 거기서는 힘이 없고 앞으로도 힘이 생기지 않을 것 같아서'에 가까울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난 진짜 행복해질 거야, 라는 결심에서 '진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러니까 소설의 가장 마지막 문장에 붙은 이 '진짜'는 사실 그녀가 이 소설의 내내, 그러니까 호주에 와서도 결코 '진짜' 행복해진 적은 없었음을 간명하게 말해준다. 허희 평론가의 말대로 "2000년대 한국 소설에 등장한 이주노동자의 살림과 유사한 모습이다. 부푼 희망을 안고 호주에 온 그녀를 비롯한 한국인들은 고국에서보다 도리어 궁핍하게 산다. 영어가 능숙하지 않아 빌딩 청소 등 고된 육체노동을 하면서 영주권과 시민권을 취득하기 위해 아등바등한다. (p.200)" 그 뿐인가. 계나는 두 번이나 부당한 이유로 재판에 연루되고, 벌금을 내고 호주에서 추방될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그녀의 고백대로 사실 그녀가 호주에서 '진짜' 행복해하는 것처럼 보였던 때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호주 시민권을 취득했을 때는 행복해할 법도 하지만, 그녀는 말한다. "증서 수여식이 끝나고 다른 사람들이 다과회에서 친지들과 기념사진을 찍을 때 슬그머니 행사장을 빠져나왔어. 6년 동안 고생한 게 하나하나 생각나서 뭔가 뭉클한 기분인데, 그렇다고 나 이제 호주 사람이다! 이러고 만세를 부르기도 뻘쭘하고. (p.172)"

 

결국 그 순간에도 그녀가 떠올리는 것은 6년 동안 고생한 기억이다. 그것은 이런 것과 다를까. 예를 들어 그녀가 한국에서 6년 동안 고생하여 좋은 일자리의 취업을 거의 100% 보장해주는 어떤 자격증을 땄다면, 그녀는 그 순간 행복해할까, 아니면 6년 동안 고생한 기억을 떠올릴까. 나는 사실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런 것을 묻고 싶다. 만약 계나가 6년 동안 한국을 떠나지 않고 호주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한 만큼 한국에서 무엇인가를 했다면, 한국에서 살아남을 정도가 될까, 혹은 한국에서 행복해졌을까. 아니 또 오해는 마시라. 나는 당신이 이 모양으로 사는 것은, 단지 당신이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라는 엿같은 소리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무슨 차이가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하는 말이다. 한국에서 돈없는 노동자로 사는 것과 호주에서 이주노동자로 사는 것의 차이.

 

아주 간략하게 말해서 그것이 큰 차이가 있어요, 라는 것이 이 소설의 태도이고, 그것은 사실 큰 차이가 없다, 중요한 무엇인가는 바뀌지 않았다, 라고 말하는 것이 허희 평론가의 말이고, 내가 어느정도 수긍하는 말이다. 적어도 이 소설에서의 계나의 진술을 그대로 믿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는 계나가 행복해질 수 없다고 확신하지는 못하겠다. 어쩌면 행복해질 수도 있겠지.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렇게 얻는 행복이 소설을 읽는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지? 물론 당연하게도 소설 주인공의 행복과 우리의 실제 행복은 크게 상관이 없다. 나는 그것을 새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나는 소설의 행복이 우리의 행복과 일치할 수도 있다는 환상을 깨지 않기 위해 소설은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그 환상이 깨지는 것을 막기 위해 소설은 어떻게든 모든 가능한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 소설이 1인칭으로 말을 건네는 형식을 취하는 것도 그러한 강구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인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계나가 말을 건네는 이들은 누구일까. 호주에 이미 도착한 이들은 아닐테고, 아직 한국에 남아있는 은혜나 미연이나, 혹은 동생 예나와 같은 이들일 것이다. 그런데 이들에게 이 말은 전해지고 있을까. 이렇게 말하면서? "시드니에서 매일 크고 작은 모험을 겪고 있어서 그런가, 옛날 친구들이 좀 얄팍해 보이더라. 내가 걔들보다 더 나은 선택을 했다거나, 내 미래가 더 밝을 거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호주에 올 일 있으면 연락해, 나 무지 전망 좋고 겁나 큰 아파트에서 살아."라며 휴대폰 번호와 새로 만든 이메일 주소를 알려 주고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어. 머리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p.121)" 이 말들은, 그러니까 이 소설은 누구에게 전달될 수 있을까. 혹시 계나와 미연이와 은혜가 벌이는 작은 파티에서 주문한 배달음식을 30분 안에 배달해주는, 신용카드를 양손으로 받고 90도로 인사하는 배달원에게?)

 

허희 평론가는 (그래도 평론가의 예의를 담아) 계나가 (지금과 같은 태도라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고 진지하게 충고해주었지만 나는 조금 더 냉소적으로 말한다. 그녀가 행복하든지, 말든지 나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어졌다. 관심 밖, 아이 돈 케어. 그리고 (주인공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라는) 환상을 깨는 이 소설은 (적어도 나에게는) 실패한 소설이다.

 

 

덧.

어쩌면 이 소설의 의미는 다른 것에 있는 것 아닐까. 예를 들어 '한국이 싫어서'라는 마케팅적인 제목이나, 중편 소설 정도에 적당한 분량을 적당히 편집으로 늘려 '장편소설'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하드커버를 씌워 13,000원에 팔아먹는 자세 말이다. (빨리 술술 읽힌다,라는 평들이 많은데, 내가 생각하기에 여러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결국 '짧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결국 말을 건네고자 하는 젊은 청춘들에게,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어쩌면 이 소설의 내밀한 '태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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