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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봉준호

Ending Credit | 2019. 6. 9. 15:27 | Posted by 맥거핀.

 

(영화 <기생충>, <설국열차>에 대한 스포 있습니다.)

 

 

 

영화 <기생충>에 대한 반응 중에 흥미로웠던 것은 찜찜하다, 씁쓸하다, 뭔가 개운치 않다는 말이 상당히 많다는 사실이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일종의 성취 지점이 아닌가 싶은데, 뭔가 눅진하고 불길한 무엇인가를 영화 속에 남겨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영화가 끝난 후에도 관객에게 길게 달라붙어 있다는 점은 결국 봉준호가 원했던 부분이 아닐까. 영화 속 등장했던 수석처럼 말이다. 영화 속 기우(최우식)는 수석을 껴안고 누워있으면서 중얼거렸었다. 떼어내고 싶은데 떼어내지지 않는다고.

 

사실 그런데 봉준호의 영화가 언제 상쾌한 무엇인가를 준 적이 있던가. <살인의 추억>에서 빗속에서 DNA 분석 결과를 뜯어 보았을 때, <마더>에서 진범이라고 잡혀 들어온 이의 얼굴을 보았을 때, 뭔가 맥이 풀리는 그 순간. 그것이야말로 봉준호의 말대로 그가 즐겨 의도한 거대한 '삑사리'의 하나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괴물>에서 괴물이 쓰러지는 순간이나, <설국열차>에서 열차가 터져나가는 거대한 스펙터클의 순간에서도 모종의 쾌감보다는 어떤 씁쓸함이나 맥풀림이 더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 <기생충>은 그의 전작들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영화다. 여러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단적으로는 이러한 것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돌고돌아 처음 위치에 와 있는 것들.  <살인의 추억>의 영화가 시작할 때 등장하는 논바닥 옆 어두운 배수로와 다시 돌고돌아 영화 마무리에서 만나게 되는 어두운 배수로, 아니면 <괴물>에서 한강 둔치에 서 있던 컨테이너 건물과 다시 어두운 한강 옆에서 홀로 서 있는 컨테이너 건물, <마더>에서 영화의 시작과 함께 만나게 되는 마더의 춤과 영화의 끝 고속버스 안에서의 망각의 춤. 이것은 <기생충>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영화의 시작, 반지하 방의 창에서 시작하여 걸려 있는 양말들을 비추며 카메라는 천천히 아래로 이동한다. 그리고 다시 이것은 영화의 마지막에 그대로 반복된다. 카메라가 천천히 아래로 이동한 반지하 방에는 여전히 기우(최우식)가 있다.

 

그러나 물론 이것은 완전히 같지는 않다. <살인의 추억>에서는 어두운 배수로 안에는 여자가 죽어 있었고, 마지막에는 그 위에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괴물>의 마지막에서는 컨테이너에 원래 있었던 아이는 죽었지만, 대신 다른 아이가 살아남아 밥을 먹었다. 그리고 <기생충>에서는 마지막 지하방 그 이전에 환상이 이어졌다. 혹시 사실인가 싶은, 믿기지 않는 환상이.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 지하방에 있고, 이제 '근본적인 계획'을 세우는 참이다. 돌고돌아서 얻은 근본적인 계획. 그러나 영화를 보는 우리는 안다. 그가 그렇게 그곳에 앉아서 환상을 보고 있는 한, (아니 사실은 환상을 보지 않더라도) 그 계획은 결코 성공할 수가 없다는 것을. 그러나 아무튼 봉준호의 영화에서 그들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올지라도 돌고돌아야만 한다. <설국열차>에서 결국 같은 곳으로 되돌아올지라도 열차가 같은 궤도를 돌아야 하는 것처럼.

 

<설국열차>. 영화가 봉준호 전작들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이 중에서 굳이 가장 가까운 영화를 꼽으라면 그것은 이 영화 <설국열차>이다. 예를 들어 <기생충> 그 마지막의 그로테스크한 활극은 설국열차의 그 장면을 연상시킨다. 혁명을 꾀하던 커티스(크리스 에반스)가 열차의 머리칸으로 들어가고, 뒤에 남은 남궁민수(송강호)가 일군의 약에 취한 무리들과 대결을 펼치던 장면. 크로놀에 취한, 아니 사실은 크로놀로 상징되는 다른 무엇에 취한 그들은 기꺼이 남궁민수와 커티스를 처단할 참이다. 그들은 열차를 멈추게 하려는 위험한 자들이니까.(예전에 <설국열차> 리뷰에서도 쓴 적이 있지만, 사실 어쩌면 커티스는 처음부터 열차를 멈추게 할 마음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그가 열차를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논리 바깥에 존재하는 다른 무엇인가를 보았기 때문이다.) 열차는 어떻게든 돌아야 하니까. 그래야 우리는 살 수 있으니까. 위대한 영도자 윌포드의 뜻대로.      

 

커티스의 반란이 혁명이 아니라 반혁명인 것은 결국 그의 시도가 열차를 계속 돌아가게끔 하는 데 일조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시스템의 설계자 윌포드는 기꺼이 그를 머리칸으로 오도록 안내한다. 위험한 것은 커티스가 아니라 열차를 멈춰버릴 생각을 가지고 있던 남궁민수였고, 그래서 그는 광기에 가진 이들과의 대결을 피할 수 없었다. 크로놀에 취한 그들은 윌포드를 위해서,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들을 위해서 남궁민수를 기꺼이 처치할 것이고, 그것은 <기생충>에서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버전으로 변주된다.

 

지하실에 있던 남자가 기택(송강호)과 기우 가족에게 달려드는 것은 언뜻 보면 아내에 대해 복수하고, 자기를 죽이려 했던 것에 대한 분노 때문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관점에서라면 사실은 그렇게 보이지만은 않는다. 그가 했던 몇 개의 말들을 여기에 덧붙인다면 말이다. 존경합니다, 박사장님! 리스펙!! 아니, 나는 이것이 이상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매우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이미 인터넷에는 이를 방증하는 수많은 글들이 있다. 박사장(이선균) 내외도 피해자이며, 그들은 결코 악인이 아니라고 기꺼이 변호를 해주는 수많은 글들. 아니 조금 더 범위를 넓혀보면 그 존경의 목소리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비슷하게 변주되고 있다. 이미 잡스와 빌 게이츠는 위인의 반열에 올라섰다. 이재용이라고 여기에 올라서지 말란 법이 있을까. (아니 이미 올라섰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에게서는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는다. 냄새나는 것들은 바로 지금 지하철 내 옆자리에 땀을 흘리며 자고 있는 낯선 남자다. 아무나 밀치고 들어오는 할아버지들, 어떻게든 자리를 잡으러 비집고 들어오는 아줌마들, 크게 음악을 들으며, 백팩으로 쿡쿡 찔러대는 젊은 남성들에게 나는 냄새를 혐오하며,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재벌들의 기사를 애써 읽으며 감탄한다. 리스펙까지는 아닐지라도 우와를 연발하며.  

 

아니, 멀리 갈 것도 없다. 나도 이미 <설국열차>의 윌포드에 혹한 바가 있다. 열차는 돌아야 하고, 그렇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좁은 구석 그 안에서 열차를 돌리기 위한 부품의 역할을 해야만 한다. 누군가는 희생해야 열차는 돌아가지 않나요? 그것을 <설국열차>의 메이슨(틸다 스윈튼)은 간단하게 말한 바 있다. 자기 자리를 지키라고. 머리칸은 머리칸, 꼬리칸은 꼬리칸. 자, 그렇게 그들은 자기의 자리를 지키러, 아니 사실은 별도리가 없어서 '내려간다'. 빗줄기는 쏟아지고, 그들은 자신들의 반지하방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그들은 도대체 어디까지 내려가는 것일까. 어디까지 내려가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계단을 내려간 후, 그들은 겨우 자신들의 반지하방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곳은 이미 침몰하는 중이다. 모든 곳은 가슴까지 물에 잠겼고, 변기는 계속 오물을 토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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