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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

The Book | 2010. 8. 11. 02:27 | Posted by 맥거핀.
세속적영화세속적비평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 영화 > 영화이야기
지은이 허문영 (강,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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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지난 763호 '정성일, 허문영의 씨네산책'에서는 평론가들끼리의 대화를 담고 있다. 한국의 영화 비평의 최일선에 서 있고, 또 가장 대중적인 평론가라고 말할 수 있는 김영진, 김혜리, 이동진 평론가들과의 대화. 거기에 정성일 평론가의 말 중에 인상적인 대목이 있다. "지금도 저에게 영화비평이란 결국 영화를 본다, 는 문제입니다. 해석이 아니라 말 그대로 본다는 문제. 내가 본 것을 쓸 것. 내가 만들어낸 착란상태에 빠지지 말 것."


한국 영화비평에 있어서 일종의 상징적인 존재가 그런 말을 할 때에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 내가 본 것을 쓸 것, 내가 만들어낸 착란상태에 빠지지 말 것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몇 가지의 갈래로 나누어 생각해야 함을 느낀다. 먼저 비평이라는 것. 즉 단순한 리뷰나 외부를 돌면서 말하는 것과 비평과의 어떤 차이. 비평에 대한 정의를 여러 각도에서 할 수 있겠지만, 눈에 가까이 띄는 것부터 가져와 보자. 진중권은 <서양미술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근대적 의미의 '비평'이 되려면, 그것은 문학적 텍스트의 형태를 취해야 한다. 예술에 대한 언급을 텍스트로 옮겨놓았다고 저절로 비평이 되는 것도 아니다. 비평문 안에는 반드시, 첫째, 작품의 특성에 대한 기술, 둘째, 작품에 관련된 역사와 이론의 제시, 셋째, 작품의 예술적 수준에 대한 판단이 들어가야 한다. 이 세 가지가 빠진 글은 비평이라고 할 수 없다. (p.273)"

이를 영화라는 것으로 그대로 가져와 생각해 본다면, 영화비평의 필수적인 요소 중의 하나는 이 영화의 예술적 수준이 어떤지, 즉 예술적으로 보았을 때 왜 다른 작품들보다 뛰어난지, 혹은 뒤떨어지는 지를 밝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아마도 다른 보통의 리뷰나 영화 외곽을 둘러싼 글들과 갈라지는 부분일 것이다. 보통의 영화 리뷰에서는 이 영화가 왜 다른 영화들보다 뛰어난지를 밝힐 필요는 없다. 즉 영화 리뷰는 우열의 문제라기 보다는 취향의 문제에 가깝다. 예를 들어 그것에는 그저 나는 <인셉션>이 이러이러한 면에서 좋다라고 밝히는 것이 중요하지, <인셉션>이 왜 다른 영화들보다 뛰어난지 악다구니를 쓸 이유는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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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셉션>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개인적으로 <인셉션>은 흥미를 주는 요소들이 있으나, 그렇게 매혹적이지는 못한 영화였다. 영화평론가 듀나 씨가 그런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인셉션은 여러 많은 규칙들을 가지고 있고, 그 규칙들을 영화 속에서 철저하게 지켜나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던 영화다. 즉 일부의 영화들은 어떤 규칙을 애써 세워놓고는, 그 규칙들을 나중에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으로 관객들의 기대를 저버린다. 즉 과잉이 되거나, 혹은 함량 미달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영화의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은 몇 가지의 규칙들을 구축하고는, 그 규칙들을 스스로 철저하게 지키는 것으로 관객의 기대에 부응했다. 다만, 그것을 말할 수는 있다. 놀란 감독은 그 규칙들 모두를 친절한 방식으로 관객들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몇 개의 규칙들은 영화 속에서 급박하게 지나가며, 또 몇 개의 규칙들은 쉽게 제시되지 않고, 복잡한 내러티브 속에서 슬그머니 제시되며, 또한 일부만 보여지기도 한다. 마치 이는 감독의 전작 <메멘토>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 영화도 역시 어떤 정확한 규칙이 지배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규칙은 예상보다 간단한 것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그 규칙은 너무나도 쉽게 관객들이 파악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놀란 감독은 여기에 어떤 트릭을 건다. 즉 이야기를 거꾸로 뒤집어 버리는 트릭. 그 트릭은 성공했고, <메멘토>는 일종의 전설이 되었다. 그리고 이 영화 <인셉션>에도 그런 몇 개의 트릭들이 존재하며, 그 트릭들은 관객을 지속적으로 현혹시킨다.

그것이 아마도 영화 외부에서 영화의 스토리에 대한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이유일 것이다. 영화의 세계가 정확하게 구성되어 있지 않다면, 그렇게 영화의 이야기, 혹은 규칙들을 논리적으로 연결하려는 시도들이 행해질 이유는 없을 것이다. 영화를 둘러싼 많은 '완벽 분석'의 시도들이 그 영화가 얼마나 논리적으로 구축된 세계인지를 증명해준다. 그러나 그 세계는 아마도 영원히 '완벽 분석'될 수는 없을 것이다. 놀란 감독은 트릭으로 그것을 방어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아니, 나는 관객들이 트릭에 속아넘어가서 멍청하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트릭의 승자는 언제까지나 설계자인 놀란 감독일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저 (나 자신의 개인적인 취향으로) 그런 세계에는 그다지 크게 관심이 없다. 정확히 만들어진 세계를, 몇 가지 불충분한 정보만을 가지고, 그 세계를 탐험해 나가야 하는 것 말이다. 그보다는 다른 세계가 더욱 관심이 많다. 예를 들어 박찬욱의 세계. 잘 짜여졌다고 보기는 어렵고, 여러 갈래로 뻗어나갈 수 있는 어떤 뭉툭한 원형질의 세계. 그러나 그 속에 많은 아름다움과 비참함과 안타까움과 괴기스러움과 기묘한 열락을 가지고 있는 세계. 그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불충분하고 혼란스러운 정보들 사이에서 영화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 급급해야 하는 영화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가 마친 후 남는 것은 그저 어떤 이야기 그 자체 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감독이 만들어낸 잘 짜인 그 이야기 속에 내가 스며들 틈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보다는 그저 영화 중에는 아무 생각없이 멍하니 바라볼 수 있는 마술적인 장면들이 이어지지만, 영화가 끝난 후에는 생각과 감정을 천갈래, 만갈래로 흩어놓는 영화들이 좋다. 물론 이것은 그저 개인적인 취향.

개인적으로는 사실 그 스토리 자체보다는 그 이야기의 외곽에 존재하고 있는 몇몇 의문들이 더욱 관심이 간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질문들. '인셉션'은 가능한가. 영화 속 아서(조셉 고든 래빗)는 '인셉션'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비유를 든다. 코끼리를 연상하지 말라고 하면, 무엇이 연상되지요? 그러나 이 질문은 영화 속에서 충분히 대답되지 않았다. 그저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불충분한 반박으로만 이어질 뿐이다. 글쎄. 나도 아서와 같은 의문이 든다. 타인의 꿈 속으로 들어가 어떤 생각을 심는 것이 가능한가. 그것은 도리어 어떤 반대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가능하다고 해도, 그것이 실제적인 어떤 다음의 행동으로 연결되는가. 예를 들어 꿈 속에서 냉면을 먹는 꿈을 꾸었다고 해서, 그것이 다음날 그에게 냉면을 먹게 할까. 즉 꿈은 그의 의지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그래서 사실 영화 <인셉션>의 가장 허술해(이상해) 보이는 부분은 그 인셉션의 내용이다. 즉 너무나도 직접적인 인셉션. 다른 말로 하자면, 그에게 냉면을 먹게 하기 위해서는 그의 꿈 속에는 냉면 그릇을 앞에 두고 못 먹게 만드는 것이 더욱 효과를 가질 것이다라는 일종의 역설이 반영되지 않은 그 인셉션. 이것은 아마도 최면이나 암시의 메커니즘과도 연관되는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솔직히 최면이나 암시를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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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무튼 간에 이 이야기는 (내게는) 매혹적이지는 않지만, 흥미로운 요소를 많이 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 이야기는 심리학, 철학, 문학, 인류학, 신화, 뇌과학 그리고 물리학과 수학까지도 연결지어서 생각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이 영화를 다양한 각도로 해석해보려고 할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뭔가를 이해하려고 들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중의 몇몇은 정성일 평론가의 말대로 조금씩 착란상태에 빠져들어갈지도 모른다. 영화는 보이지 않고, 해석만 보이는, 그래서 자신의 해석에 조금씩 도취되는 일종의 정신착란. 그리고 정신착란의 제1의 요소는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주위의 모든 것이 왜곡되어 보이고, 주위의 모든 것이 자신을 공격하는 듯이 느껴지는, 오로지 자신만이 그 안에서 존재하는 일그러진 세계. 그리고 영화 리뷰에 있어서도 일종의 비슷한 현상들이 일어난다. 오로지 자신의 의견만을 옳다고 주장하는 것. 그리고 여전히 별점과 몇몇 담론이라는 무기를 들고 싸우는 지독한 찬반의 세계.

물론 정성일 평론가가 이야기하는 착란상태는 이것과는 약간 거리가 있다. 왜냐하면 평론가는 계속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영화들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과감히 찬반의 입장에 서야 한다. 그는 아마도 그보다는 보는 것에 집중하지 않고, 자꾸 그것을 해석하려고만 드는 일종의 경향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 그것은 일종의 경향이다. 영화 외부를 둘러싼 담론들을 자꾸 영화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 그것을 해석하려는 태도. 많은 담론들이 영화를 풍성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영화를 찔러 죽이는 일종의 칼이 되는 그런 경향들. 어떤 영화들이건 간에 어떤 담론에 완전히 들어맞는 영화란 없다. 아니,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는 아마도 물어야할 것이다. 그것을 어떤 '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지 없는지. 어떤 영화들이건 담론에 넓고 느슨하게 걸쳐져 있고, 조금씩 그 담론들과 거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어떤 담론을 너무 광범위하고 무리하게 어떤 영화에 적용하려 할 때에 그 영화는 조금씩 평론가의 머리 속에서 정신착란의 길로 나아간다. 

즉 담론은 영화를 잡아먹지 말아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영화는 영화 내부적인 것들로 이야기될 필요가 있다. 글쎄.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그것의 하나의 힌트가 허문영 평론가의 책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에 있다. 허문영 평론가의 글들은 몇몇 장점이 있다. 일단 가장 눈에 띄는 장점은 쉬운 글쓰기다. 그는 한 영화를 놓고 차분하게 앞뒤 주변을 세밀하게 관찰한다. 세세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상당히 조심스러운 태도로.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한 지점으로 푹 찌르고 들어간다. 정성일 평론가가 이 책의 발문에서 말한 것처럼 '이상한 일이다'라는 문장을 통해서. 그리고는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혹은 발견하였더라도 지나쳤던 부분들을 다시 펼쳐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현학적인 문장들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주 조심스럽게 쉬운 말들로 조금씩 조금씩 이루어지기 때문에 관객들은 어떤 이물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틈에 관객들은 조금은 색다른 지점에 도착해 있다. 그 색다른 지점에 그대로 머무를지, 아니면 다른 지점으로 넘어갈 것인지는 오로지 관객의 선택의 몫이다.

그것들이 어렵지 않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또 있다. 그는 거의 대부분 영화의 내부에 머물러 있도록 노력한다. 즉 어떤 외부의 담론이나 방대한 지식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는 영화에서 제기된 질문을 영화 내부의 다른 부분들에서 답을 구하려고 노력한다. 즉 이것은 일종의 영화의 정합성을 찾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몇몇 그 정합성이 떨어지는 영화들은 그의 어떤 의문들을 통해 뒷자리로 밀려나게 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어떤 담론에 비추어 보았을 때만이 보이는 그 영화에 대한 문제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영화의 흐름에 비추어 보았을 때 내부의 어떤 것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존재하지 않거나, 너무 지나치게 많이 존재하고 있을 때 그는 그 영화에 어떤 의문을 제기한다. 즉 그와 함께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그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어떤 다른 담론들을 같이 공부할 필요가 없다. 오로지 그와 함께 같이 스크린을 들여다보면 된다. 단, 아주 주의깊게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오직 한 가지이다. 그것은 그 영화를 보는 것이다. 영화를 이야기하는 좋은 글들은 영화와 분리되어서도 그 나름의 어떤 문학적인, 또는 예술적인 가치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 적당한 착란도를 유지하는 경우에 한해서 말이다. 그러나 영화평론가의 글은 아마도 그와는 약간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평론가의 좋은 글들은 영화 그 자체와 분리될 수 없다. 그것은 오로지 다시 그 영화를 보는 행위로 환원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평론가의 입장에서 어떤 목적 중의 하나는 '그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좋은 영화를 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보게 만들고, 보았다면, 다시 보게 만든다. 평론가가 의도하였건,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말이다. 그것을 이 책에 실린 수십개의 한국영화, 그리고 외국영화 평론들이 증명한다. 이 책에 실린 여러 영화들이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다시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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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읽은 허문영 평론가의 책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의 리뷰를 쓰려고 글을 시작했는데, 쓰다보니 뭔가 책에 대한 얘기보다는 다른 얘기들을 해버리고 말았다. 이것도 리뷰라 할 수 있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 자세히 생각해 볼 틈이 없다. 난데없이 정성일 평론가의 두 권의 비평집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알라딘에서 난데없이 받은 적립금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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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트푸드는 간편하지만, 금방 배가 꺼져요

The Book | 2010. 5. 20. 02:02 | Posted by 맥거핀.

로마제국 쇠망사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에드워드 기번 (북프렌즈,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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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서평단 리뷰의 하나로 썼습니다.


에드워드 기번은 그의 책 <로마제국 쇠망사>를 서기 96년 네르바 황제의 즉위, 즉 5현제 시대의 개막에서부터 다루고 있다.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요약한 이 책 <한 권으로 읽는 로마제국 쇠망사>의 편역자 가나모리 시게나리는 기번이 그 이전의 시대, 즉 포에니 전쟁, 카이사르, 클레오파트라 등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기번이 살았던 18세기 유럽 지식인들 사이에서 그 이전의 '역사'는 이른바 상식이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아마도 기번은 궁금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 거대한 로마를 돌아보면서 말이다. 이 거대한 제국, 도저히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로마가 무너진 이유는 무엇일까. 로마는 어떤 이유로 쇠약해지고, 멸망에 이르게 된 것일까. 기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로마의 쇠퇴는 뛰어나게 위대한 문명의 종착지로서 지극히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결과였다. (중략) 따라서 인공적인 이 대건축물을 떠받치고 있던 각 부분이 시대나 상황으로 말미암아 흔들리기 시작하자마자, 훌륭한 건축물은 자신의 무게 때문에 붕괴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로마의 멸망은 단순한 요인에 의한 것이고 불가피한 것이었다. (p.288)- '옮긴이의 말' 일부분


그래서 아마도 기번은 <로마제국쇠망사>라는 자신의 글을 로마 제국이 가장 융성하던 시기인 5현제 시대부터 다루기 시작했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보면, 무릇 어떤 것이건 간에 최정점에 오른 시기가 쇠퇴가 시작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기번의 설명식으로 보자면, 로마를 떠받치는 거대한 기둥이 생겨나는 그 순간 이후부터 필연적으로 이 기둥에는 조금씩 균열이 생겨나기 마련이었을 것이고, 그 균열은 결국 로마라는 거대한 건물을 무너뜨렸던 것이다. 로마가 멸망하게 된 이유를 여러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아마도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기번이 말한 그런 것일 것이다. 즉 로마라는 이 대들보가 너무 거대해졌다는 것, 상대적으로 그것을 떠받드는 기둥들보다도 말이다. 따라서 이민족의 침입과 같은 것들은 근본적인 이유라기 보다는, 그 기둥에 가해지는 도끼질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이미 허약해진 기둥들은 몇 번의 도끼질로도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

책의 내용으로 미루어, 로마가 쇠퇴하고 멸망한 이유를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겠다. 먼저 무상으로 제공되는 밀과 끊임없는 전차시합과 검투시합과 같은 볼거리의 제공이 야기한, 로마 제국민들의 정신적인 나약함, 또 하나는 로마 제국 내에서 일어난 끊임없는 권력 암투, (그리고 그것에 기름을 부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제국의 4분할통치책), 부르군트족, 고트족과 같은 이민족들의 거듭된 침입과 로마제국 후기에 이르러 이민족들의 동화와 융합 정책에 실패한 점, 이슬람 세력의 급격한 성장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점 등등. 이 중 과연 어느 것이 로마 멸망의 가장 큰 이유인가라는 물음에는, 아마도 기번의 말에서 힌트를 찾아야 할 것이다. 즉 이 중 어느 한 가지가 근본적인 이유였다기 보다는, 로마가 이 모든 것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에는 이미 너무 몸집이 거대해져 버린 거대한 공룡과 같았다는 점 말이다. 다만, 기번이 그 이유 중의 하나를 기독교에서 찾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기번은 말한다. 내세 지향적인 성격을 가진 기독교가 로마에 널리 퍼지고, 국교가 되면서, 제국민들은 현세의 황제에 충성할 필요를 느끼게 되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 그것이 로마 제국 멸망의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고. 흥미로운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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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한권으로 읽는 로마제국 쇠망사>는 제목에서 말하듯이, 기번의 6권으로 된 <로마제국 쇠망사>를 한 권에 요약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 모자라, 5현제 시대 이전의 로마의 역사가 궁금한 독자들을 위해, 앞 부분의 역사까지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다. 물론 그러다보니 잃는 부분도 있다. 예를 들어, 6권의 이야기를 한 권으로 축약하다 보니, 인물들의 등장과 사건의 전개 중심으로 급박하게 설명이 이루어져, 어떤 부분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나, 의미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지는 못하다. 즉 가끔 TV에서 시간 때우기 용으로 하는, 몇 부작의 이야기를 짧게 축약한 드라마 스페셜 편을 보는 것처럼 전체적인 줄거리는 이해하게 되지만, 그 안의 세부적인 잔재미(?)들을 놓치게 된달까. 그리고 사실 보다 근본적인 문제점은 그렇게 앞부분의 이야기들을 무리하게 집어넣다 보니, <로마제국 쇠망사>라는 이 원저의 본질적인 의미, 즉 '로마 제국이 왜 쇠망하게 되었는가'를 근본적으로 이해하기는 무리가 따른다는 점이다. 즉 각각의 사건들을 흐름을 알게 되기는 하나, 이 모두를 아우르는 근본적인 시각을 얻기는 아무래도 모자르다. 나 역시도 기번의 이 원저를 읽지 못했기 때문에 앞에 옮긴이의 말 일부분과 몇 가지 주워들은 이야기들을 가지고, 이 무리한 리뷰를 쓸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물론 문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독특하게 각 장이 질문을 던지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고, 사건들에 대한 서술을 통해 질문에 대한 답도 나름 잘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용어의 설명들도 충실하게 잘 되어 있는 편이며, 사진이나 연표도 잘 제공되고 있다. (일본애들이 참 이런 거 잘한다.) 다만 나는 그저 아쉬울 뿐이다. 그 아름답다는 기번의 문장들을 읽지 못해서 말이다. ('훌륭한 건축물은 자신의 무게 때문에 붕괴하고 말았다'라니..아 표현좋고!) 그러니 아마도 언젠가는 그것들을 읽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때는 조금은 덜 무리한 리뷰를 써야만 할 것 같다.

아무래도 패스트푸드가 가끔 맛있고 편하기는 한데, 배는 금방 꺼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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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인의 행복한 책읽기: 독서의 즐거움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정제원 (베이직북스,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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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서평단 리뷰의 하나로 썼습니다.



'독서의 즐거움'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 <교양인의 행복한 책읽기>는 인문학 책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아마도 자기계발서 쪽에 조금은 더 가까울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책은 명백한 목적을 가지고 기획된 책이기 때문이다. 그 목적이란 간단히 말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책을 읽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것도, '교양을 쌓게 해주는 책'들을 말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요즘 들어 다양한 교양 매체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독서는 교양을 갖추는 가장 쉽고도 편리한 방법이다. (중략) 책이 전달하는 지식이나 정보가 잊혀도 남는 무엇, 바로 그 무엇이야말로 생각의 소득이며 교양의 원천이다. 그 무엇이 우리가 존재하는 지점을 확인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비로소 물을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p.17)


그러면서 저자는 30권의 책을 통한 30가지의 독서법을 제시하고 있다. 즉 한 권의 책에 대한 간단한 서평을 통해 그 책을 읽으면서 갖추어야 할 독서법을 제시하는 것. 그러면서, 저자는 조금은 특이한 방식으로 각 책들을 연결지으며, 논의를 이끌어간다. 예를 들어 첫번째 독서전략으로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는 책을 읽는다'를 제시하며, 강준만의 <지성인을 위한 교양브런치>를 읽을 것을 제안하면서, 다음 책으로는 '같은 작가의 다른 책을 읽는다'라는 테마를 제시하며, 강준만의 <행복코드>를 읽도록 하는 것, 그리고 또 그 다음 책으로는 '같은 테마의 책을 읽는다'를 화두로 내세우며, 버트란드 러셀의 <행복의 정복>을 제시하는 식이다. 즉 저자의 목적은 어떻게 보면 꽤나 명백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목적이란 30권의 책을 독자가 읽어나가면서 '교양인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 책의 조금은 더 적합한 제목은 '교양인의 행복한 책읽기'라기 보다는 '교양인이 되기 위한 조금은 덜 행복한 책읽기'가 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싶다. ('조금은 덜'이 붙은 이유는 어떤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단지 그것의 수단이 될 경우에는 '완전히' 행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농담이다 -.)

내가 굳이 이런 딴지 아닌 딴지를 거는 이유는. 이 책의 제목을 혹여 오독하여, 이미 일정 정도의 독서 이력을 갖춘 사람이 이 책을 읽게 되면 살짝 실망하지 않을까 해서 해본 얘기다. 즉 이 책은 독서력에 있어서 어느 정도 일정 수준에 이른 사람들에게 더욱 풍성한 책읽기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그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별로 책을 많이 읽지 않는 사람들, 특히 인문학 부문의 책들을 거의 읽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런 책들을 읽도록 하는 데에 목적을 두고 기획되어 있기 때문이다. 책들의 선정에서도 보면, 작가가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읽은 책들을 소개하는 식이 아니라, 이 책을 쓰기 위하여 거의 새롭게 책들을 읽고, 새롭게 구성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소개된 책들의 면면을 보면 간간이 인문학의 고전들도 끼어 있지만, 최근에 발간된 책들이 상당수이다. 즉 이 책의 주 목적은 소개된 책들을 읽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소개된 예시의 책들을 통해서 책을 읽어나가는 재미를 깨우치도록 하는 것이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꼭 '그 책'일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작가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서문에서도 언급했지만, 독서법에 관한 책이면서 이렇듯 책을 구체적으로 선정해 일독을 권하는 것은, 독서법만 알고 실제로 그 독서법에 맞춰 독서는 할 줄 모르는 병폐를 없애기 위해서다. 훌륭한 독서법은 독서 행위 밖에서 관념으로 존재하기보다는 독서 행위 내부에서 우리에게 현시될 뿐이다. (p. 17-18)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이 책은 서평 모음집으로 보기에는 약간 함량미달이다. 소개된 책들의 내용이나, 그 책들이 어떠한 측면에서 좋은 책들인지, 그 책들이 어떤 측면에서 훌륭하고, 또 어떤 부분에서 문제가 있는지를 소개하기 보다는 거의 그 책과 그 작가에 대한 맹목에 가까운 찬사로 일관하며, 상당수의 내용이 소개된 책의 일부분을 발췌하여 보여주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론 당연하게도 이를 가지고 이 책의 글쓴이를 비난하는 것은 옳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책의 목적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 책에 어떤 평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을 읽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책을 읽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는, 그 책의 가장 인상적인 구절을 제시하여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책들을 단지 몇 구절에 반하여 구입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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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독자들에게 인문학 책을 읽도록 한다'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상당히 효과적인 구성을 가지고 있으며, 책들의 연결된 구조 또한 인상적이다. 아마도, 저자가 말한 대로 제시된 책들을 하나하나 읽어나가다 보면 인문한 책을 평소에 잘 읽지 않던 사람들도 인문학의 재미를 조금씩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책을 따라 30권의 책을 덮은 순간에는 어느 틈에 교양인이 되어 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그 다음에는 저자가 제시한 마지막 독서법 대로 '자신의 기준으로 자신이 선택한 책을 읽'으면 될 것이다. 아니, 아마도 그 때쯤이면 어떤 기준 따위는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읽으면 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마음 가는 대로 읽는 것' 그것이야 말로, 독서가가 갖추어야 할 마지막 단계일 것이다. 어떤 필요가 있어서가 아니라, 어떤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이 책이 읽고 싶어서, 재미있어 보여서 선택한 책들이 나를 더 살찌우고, 삶을 풍족하게 이끈다면 그보다 좋은 독서법이란 없을 것이니 말이다. 어쩌면 가장 최고의 독서법이란 '어떤 필요가 있어서 읽는 책(바로 이 책?)을 집어치우고, 마음 가는 책을 읽을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아..참고로, 이 방법은 고수 이상의 독자들만 시연해 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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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
카테고리 정치/사회
지은이 김원영 (푸른숲,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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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알라딘 서평단 리뷰의 하나로 썼습니다.


짦은 문구이긴 하지만, 책 표지의 소개는 꽤나 강렬하다.


나는 서울대학교 로스쿨에 다닌다. 사람들은 나를 '장애를 극복한 장애인'이라고 추켜세운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장애를 극복한 적이 없다.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될 생각은 없다.


그는 그래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끊임없이 질문할 수밖에 없다. 나의 몸, 우리의 몸, 가난과 질병과 추함에 빠져들까 불안해하는 몸을 우리는 극복할 수 있는가? 나는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오랜 기간 노력했음에도 여전히 이 질문에 확실한 답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내가 분명히 알게 된 것 한 가지는 장애인은 장애를 결코 극복할 수 없으며, 그것을 극복하는 순간 이미 장애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누군가 나에게 '장애를 극복한 장애인'이라고 말한다면 그 순간 나는 모순된 존재가 될 것이다. 장애를 극복했다면서 왜 나는 여전히 장애인인가. 장애를 극복하지 않고 장애인인 상태로 존재하면서도 내가 세상의 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서는 왜 안되는가. (p.7)


여기까지만 보아도 이 책은 보통의 에세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골형성부전증에 걸려, 휠체어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던 저자. 그가 갇혀 있던 조그만 세상에서 벗어나 서울대학교에 들어가고, 서울대학교 로스쿨에 다니고 있는 지금의 모습. 이 몇 가지 사실 속에서 우리는 이미 책에 대한 어떤 선입견을 갖는다. 아마도 이 책은 누군가의 가슴아픈, 그러나 그 속에서 희망을 찾는 인생승리의 이야기로구나. 장애인도 저렇게 노력해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데,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만 되겠어. 우리도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야지..하는 그런 이야기일 것이라는 긍정적이지만, 조금은 지루한 추측.

그러나 저자는 선언한다.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될 생각은 없다'고. 그리고 저자의 그 도발적인 선언답게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 이야기들이 아니다. 물론 몇 가지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저자가 시작하게 된 것은 분명, 자신의 개인사에서 비롯된 것이고, 현재 자신이 처해 있는 위치가 어떤 큰 뒷받침이 되었을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저자는 책의 지면의 상당 부분을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데에 할애한다. 그것은 저자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어떤 '희망의 증거'가 되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저자가 기본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자신의 개인사에 대한 토로도 아니고, 어떤 성취에 대한 자신감도 아니며, 그 성취가 '희망의 증거'로 보이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저자는 도리어 현재의 시점에서는,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이 책은 어떤 완성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 그것도 아주 불투명한 현재 진행형에 가깝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보통의 장애인들의 인간승리 에세이나 혹은 젊은 친구들이 수능 만점을 받고, 혹은 미국의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난 다음에 쓰는 에세이와는 거의 반대의 지점에 와 있다. 즉 자신이 무엇을 이루어내었다는 관점에서 쓰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이루어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말이다.

그는 책의 제목에서 말하는 것처럼, '뜨거운 욕망'을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단순하게는 '야한 장애인'이 되는 것, 혹은 다른 말로 하자면, 사회적인 연대를 꿈꾸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시작은 장애인을 일단 사회 속으로 끌고 들어오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연대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장애인들이 사회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 일차적 조건이다. 그러나 저자가 이야기하는 대로, 장애인들은 사회에 의해, 애써 사회와 분리되어 있다. 장애인들은 우리의 이웃으로서, 혹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어떤 시설을 통해서 분리되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보호'라고 부르지만, 보호는 결국 다른 말로 하자면, 그들을 사회와 분리시켜 가두는 것이다. 즉 장애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장애인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이 책에서 줄곧 주장하는 것은 장애의 사회적 관점, 그리고 그것에 기반한 '자립 생활 운동(Independence Living Movement)'이다. 즉 더 이상 장애인들은 시설에 갇혀 있어서는 안되고, 사회의 일원으로서 대접받아야 한다는 것, 그래서 장애인들은 지역사회의 일원으로서 우리의 이웃으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회나 학교가 장애인을 위한 시설을 갖추고, 장애인을 위한 보조인력을 두는 것은 장애인에 대한 어떤 시혜가 아니라, 사회가 마땅히 하여야 할 의무이며,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현실적인 문제는 남는다. 단순한 예를 들어 장애인이 지하철에 타려고 할 때, 아무리 보조 인력이 있다해도, 여전히 주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어떤 장애인에 대한 시혜없이, 이는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여기에서 저자가 말하는 것은 '연대'이다.

물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연대라니, 여기서 연대라는 용어는 뭔가 어폐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장애인의 입장에서 '연대'라는 말을 쓰는 것이 옳은 것이냐는 물음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우리가 장애인이라서 연대하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누군가와 연대할 수 없다. 우리가 장애인과 연대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을 우리보다 낮은 존재로 보고 있기 때문인데, 결국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우리보다 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마찬가지로 연대할 수 없다. (만약 다른 낮은 사람들과는 연대할 수 있는데, 장애인들하고만 못 하겠다면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나 결국 우리는 우리보다 높은 사람과도 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와 동일한 이유로, 그들은 우리와 연대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연대에는 여전히 어떤 벽들이 존재한다. 그것은 어쩌면,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장애인으로서 결코, 궁극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몸의 문제일 수도 있고, 저자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에 있는 다른 장애인들(저자는 지적장애가 없는 것, 그리고 '혼자 휠체어도 밀고 다닐 수 있는' 정도의 '비교적 나은' 몸, 여러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 행운 등등이 현재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이야기하며, 동시에 자신의 현재 위치에서 이런 문제들을 이야기하는 것의 의미가 다른 장애인들과 다르다는 점을 자각하고 있다)과 비장애인들과의 사회적 거리의 문제일 수도 있고, 어쩌면 사회적 관점에서 장애인들을 바라보았을 때 생겨나는 부수적인 문제들(장애인들이 사회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것은 사회의 물질적 계급과의 어떤 충돌을 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당신은 당신보다 훨씬 잘 사는 장애인을 용납할 수 있는가?)일 수도 있다. 아니, 굳이 이렇게 말하지 않아도, 그저 그 벽은 어쩌면,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어떤 불편한 감정들, 그리고 그 불편함을 자각하며 느꼈던 부끄러움일 수도 있다.

위에서도 잠깐 썼지만, 이 책은 이것으로 완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 중의 한 가지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저자의 생각이 아직은 완전히 여물지 않았다는 점, 즉 그는 여전히 길 앞에서 고민하는 젊은이일 뿐이라는 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이것이다. 결국 이 책은 해답보다는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장애인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라는 질문.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사회는, 우리는, 그리고 나는 여전히 대답을 해야 한다. 아마도 그 대답이 어떻게 행동으로 연결되는가에 따라서 이 책은 완결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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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한 '폭력사회'에 대한 고찰인가

The Book | 2010. 4. 15. 23:36 | Posted by 맥거핀.
폭력사회
카테고리 정치/사회
지은이 볼프강 조프스키 (푸른숲,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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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알라딘 서평단 리뷰의 하나로 쓰여졌습니다.



세상 곳곳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폭력은 일어나고, 거의 비슷한 형태로 반복된다. 세상 곳곳의 소식들을 전하는 뉴스들은 거의 '폭력의 메신저'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수많은, 아주 다양한 형태의 폭력들을 전하고 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그것을 '폭력의 세기'라 불렀다. 한나 아렌트는 그녀의 책 <폭력의 세기>에서 유대인의 대량학살과 같은 악의 모습을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 부르며, 인간들의 폭력성은 개개인의 어떤 도덕적인 타락이나, 인간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근원적인 악으로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사회구조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결국 이 폭력은 정치권력과 결합하여 무자비한 정당성을 획득하게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이 책 <폭력사회>의 저자 볼프강 조프스키(Volfgang Sofsky)는 조금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책의 첫머리에서 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다시 한 번 반복하며, 이야기를 이끌어내고 있다. 인간은 왜 폭력을 행하게 되는가? 조프스키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질서에 대한 어떤 반작용이다.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가 사람들을 어떤 질서로서 억압할 때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던 폭력이 되살아나는 것. 이 폭력은 물론 단순하게 반질서, 혹은 혁명이라는 의미를 가진 것만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질서 그 자체 역시 폭력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그 질서가 더욱 공고화되면 공고화될수록 응축된 폭력의 강도는 조금씩 세진다. 

폭력은 인류의 역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속속들이 지배했다. 폭력은 혼돈을 만들고, (혼돈을 어렵사리 극복하고 만들어낸) 질서는 폭력을 만든다. 이런 딜레마는 풀어낼 길이 없다. 질서는 폭력에 대한 불안에 기초하여 스스로 새로운 불안과 폭력을 만든다. (p.13)


그러므로, 폭력의 근원은 단순히 '질서에 대한 반작용'이라기보다는 보다 근원적인 것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의 하나의 해답으로 제시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다시 한 번 홉스로 돌아가 보자면, 인간이 사회를 구축한 것은 안전에 대한 갈망이었다. 즉 누가 자신을 죽일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일종의 규율을 가진 사회를 구축함으로써 신체상의 안전을 희구하는 것, 이것이 인간이 사회를 만든 목적이다..라는 것이 홉스의 주장이고, 조프스키도 여기에 동의한다. 신체의 고통에 대한 불안, 그것에서 비롯된 것이 안전에 대한 희구이고, 그 안전에 대한 희구가 극대화된 것이 질서를 제일의 우선으로 삼는 사회이다. 그러므로 결국 이 질서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상당히 불안한 연결고리로서 이루어진, 그 안에 폭력적인 요소를 담고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자신의 신체가 고통을 받지 않는 가장 완벽한 방법은, 자신의 신체에 위해를 가할 그 어떤 것, 즉 타인에게 먼저 폭력을 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질서는 이처럼 내부를 향해 있을 뿐만 아니라 외부를 향해서도 자라난다. 질서는 그 자체 말고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신화에서 보듯 유한한 생명을 가진 신도 자기 이외에는 그 어떤 신도 인정하지 않는다. 질서는 타당성을 가진다. 따라서 모든 것에, 즉 적이건 친구이건 간에 모든 세상에 적용되어야 한다. 질서는 모든 타자를 배제하려는 사명을 자기 안에 품고 있다. 제국주의는 단일 원칙의 보편주의에서 두드러진다. 다르다는 것, 타자는 공격을 유발한다. 타자야말로 상대화, 불확실성, 위험의 지속적인 원천이기 때문에 가능한 한 빨리 초토화되어야 할 대상이다. (p.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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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그렇게 시작된 폭력의 여러 양상들, 그리고 그 메커니즘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있다. 그것은 이 책의 목차들만 나열하여 보아도 분명할 것이다. 질서와 폭력, 무기, 폭력과 격정, 폭력 불안 그리고 고통, 고문, 구경꾼, 사형 집행, 전투, 사냥과 도주, 학살, 사물들의 파괴, 문화와 폭력.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그리고 동시에 행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폭력의 양상과 그 작동방식을 이 책은 철저하게 해부하고 있다. 특히 1장 이후부터는 각각의 폭력적인 테마들을 하나하나 밀도 있게 다루고 있는데, 그 묘사의 치밀함으로 인해, 때로는 욕지기가 밀려올라올 정도이다. 폭력사회의 여러 양태들, 그리고 그 작동방식에 대한 역겨우면서도, 흥미로운 고찰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책을 읽어나가면서 몇몇 의문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먼저 그 하나는,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폭력이란, 목차에서 드러나듯이, 육체적인 것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 이는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저자가 정신적인 폭력을 간과했다고 말하기 보다는, 저자는 정신적인 폭력은 결국 육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보다 근원적인 의문으로서, 그래서 결국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다. 즉 이 사회에서 폭력의 요소는 이곳저곳에 너무 많이 응축되어 있다는 것, 그런 폭력의 요소들이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는 것, 그래, 그것은 알겠는데,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하는가라는 물음이다. 이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폭력의 수레바퀴를 멈추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

물론 모든 책이 어떤 해답을 던져줄 필요는 없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인문학은 어떠한 것이라도 말할 수 있고, 굳이 그것에 대한 어떤 전망을 던져주지 않아도 된다. 폭력의 메커니즘을 분석했다고 해서, 그 폭력이 어떻게 하면 멈출 수 있는 것인가라는 답을 내려주어야 할 의무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내가 굳이 이런 질문을 던진 이유는 왠지 저자는 그 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명확하게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답은 우리가 알았던 어떠한 것들과 꽤나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폭력이 문화적인 연속성을 획득하게 되는 이유는 자연적인 충동의 힘 때문이 아니라 인간 특유의 잠재력 때문이다. 타인에 대한 가혹 행위는 인간의 행동 능력에 근거를 두고 있다. (중략) 문화적 형식들이 자유를 제약하기 때문에 인간은 항상 그것을 박살 내려고 한다. 종종 파괴와 살인을 중단하는 것은 갑자기 인간애나 도덕적 절제가 솟아나서가 아니라 스스로 계속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해서이다. (p.325-326)


 인간의 폭력이란 그 인간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것, 인간이 종종 파괴와 살인을 중단하는 것은 인간애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 폭력을 감당할 수 없어서일 뿐, 문화라는 것 역시 그런 폭력에 일조하는 것일 뿐. 그렇다면, 저자가 지향하는 사회란 무엇인가. 인간의 폭력성을 말끔히 제거해 줄 사회란 무엇으로 가능할 것인가. 문화마저 그것의 구원자가 될 수 없다면-.

여기 역자 후기에 몇몇의 힌트가 있다. 조프스키의 전 저서 <안전의 원칙>의 큰 주제는 '자유냐 안전이냐'였다고 한다. 그는 그 책에서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 혁명의 3대 구호 중 하나인 자유를 안전으로 대체할 것을 제안했다. 안전에 위협이 된다면,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면 자유에 관한 일정한 유보나 제약에 동의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글쎄. 이 책 <폭력사회>에서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 역시 그리 멀지는 않아 보인다. 아니 역자의 말마따나 논의의 폭이나 깊이는 <안전의 원칙>을 훨씬 능가한다. 자유에 관한 일정한 유보나 제약에 동의해야 한다...그리고 반문화, 다중(multitudo)에 의해 이루어지는 혁명에 대한 알러지, 폭력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더 잘 조직된 폭력 뿐이라는 것...우리는 그런 것들을 얘기했던 몇몇의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세계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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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심한 준비와 인내와 쾌락과 (사치의) 부엌일기

The Book | 2009. 12. 20. 22:29 | Posted by 맥거핀.
이기적 식탁
카테고리 요리
지은이 이주희 (디자인하우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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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도서는 Daum책과 TISTORY가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글쓴이가 말하는 파스타계의 디저트, 카르보나라 레시피


01. 끓는 물에 (늘 말하듯) 짠맛이 꽤 강하게 느껴질 만큼 소금을 넣고 팔팔 끓인 다음 면을 삶기 시작한다. 탈리아텔레의 경우 대강 6분 정도라고 패키지에 써 있으니 물을 끓이고 면을 넣고서부터 소스를 준비하면 대강 시간이 맞는다. (중략)
03. 생크림과 달걀노른자 하나(달걀노른자와 무염 버터를 넣기도 한다. 하지만 난 도저히 그건 못하겠다), 파르미자노 간 것, 그리고 통 후추를 듬뿍 갈아 넣는다. 잘 섞는다.
04. 판체타나 아주 스모키한 베이컨을 준비한다. 뭐 힘들면 그냥 마켓에서 파는 베이컨도 어쩔 수는 없지만 얇게 슬라이스한 스모키한 베이컨이 좋다. (나는 이태원의 '세프마일리스'의 판체타를 쓴다.) 올리브 오일을 아주 조금 두른 팬에 베이컨을 2-3줄 익힌다. 갈색으로 노릇노릇 바삭하게 익을 때쯤 면이 완성될 거다. (후략) (205-207 p)



추측하건대, 요리라는 것은 세심한 준비와 인내와 정성과 (맛에 대한) 기대와 그리고...(어느 정도의) 사치(돈)의 산물이다. 나같이 귀차니즘에 빠져 있는 인간들이, 위의 레시피를 보고 그대로 요리를 만들고자 시도한다면, 아주 실패할 확률이 높다. 먼저 어찌어찌해서 탈리아텔레라는 넙적한 모양의 파스타를 구해서 겨우 1번 단계를 시작한다고 할지라도, 3번 단계에 이르면 역시 주춤해지지 않을 수 밖에 없다. 무염 버터가 상당히 걸리기는 하지만, 저자도 안 넣는다고 했으니, 뭐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근데 통 후추를 듬뿍 갈아 넣는다...라니. 통 후추를 어떻게 갈아 넣지요? (지식인 검색 후) 아..갈아 넣는 도구가 있다구요? 페퍼밀이라나, 페퍼그라인더라나..뭐라나. 인터넷에 찾아보니, X마켓에서 팔기는 파는구나. 근데, 이걸 오늘 사면 어차피 오늘 배송이 안되니 오늘은 못 해먹잖아. 마트에 나가면 팔까. 큰 마트로 나가자면 꽤 시간이 걸릴텐데..아냐, 그래도 배송이 걸리더라도 X마켓으로 사면 카드 할인도 받을 수 있으니 이게 나을 거 같기도 하고...아니, 그래도 어차피 통 후추를 사야하잖아. 그럼 마트로 나가는 수밖에 없겠군...

이렇게 이것저것 생각하다보면 결국 생각이 이르는 지점은 한 곳이다. 내가 왜 이러고 있을까라는 자괴감. 그냥 가까운 스파게티점에 들러서 까르보나라 한 그릇 주문해서 먹으면 될 것을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것일까. 게다가 이 책에 가끔 보면 나오는 구절들과 우리집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다. '냉장고에 남은 소고기를 이용하여..' '야채칸을 열어서 남아 있는 아무 야채나 넣어도 맛있다' 우리집 냉장고 야채칸을 열면 남아 굴러다니는 야채라고는 매우 오래되어 끝이 누렇게 변색된 양파 반 쪼가리밖에 없는데, 설마 이걸 넣어도 맛있다는 것은 아니겠지요. 물론 이런 집에 '냉장고에 남은 소고기' 같은 것이 있을 턱도 없고 말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요리라는 것은 결국 세심한 준비와 인내와 정성과 (맛에 대한) 기대와 그리고...충분한 돈의 산물이다. 그리고 사실 조금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다고 해도, 요리가 맛있을 것이다라는 보장은 없다. 당신은 분명히 레시피를 따라하는 도중 몇몇 사소한 부분들에서 실수를 저지를 것이고, 그 사소한 부분들은 당신에게 엄청난 댓가를 치르게 할지도 모른다. 다 만든 요리를 개수대에 부어버려야 하는 그런 댓가 말이다. 

징징 대는 것은 그만하고, 몇 가지 긍정적인 시선들을 던져보기로 하자. 아마도 3번에 이르러, 내가 귀찮음을 무릎쓰고, 대형마트에 나가 통 후추와 페퍼밀을 사왔다면(그리고 기꺼이 이태원에 들러 '세프마일리스'의 판체타를 사왔다면) 아마도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이다. 나는 그래도 레시피에서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는 편이므로, 이번 요리에 성공해서 까르보나라 파스타를 먹어 치웠을 것이고, 우리집 부엌에는 페퍼밀이 갖추어졌을 것이고, 남는 판체타는 냉장고에 넣어뒀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다음 번의' 요리에서도 페퍼밀을 적당히 사용할 수 있을 것이고, 우리집 냉장고 안에는 드디어 '남는 판체타'가 생겨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혹시 다른 요리 프로그램에서 '냉장고의 남는 판체타..' 운운하는 부분이 나온다면 승자의 미소를 날리며, 유유히 냉장고로 달려가 '남는 판체타'를 꺼내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 책에는 까르보나라 스파게티나, 피시 파피요트나 누텔라 너츠 토스트나 이태리식 오믈렛 프리타타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길거리 떡볶이나 오뎅국이 나오기도 하고, 달걀비빔라면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니 '도대체 요리책들이란, 당최 해먹을 수 없는, 엄청나게 손이 많이가는 요리들만 소개하고 있군'이라는 불평은 때때로 접어두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복잡한 재료들이 가끔 나와서 그렇지, 레시피는 꽤나 세심한 편이라, 재료들과 기구들만 잘 구비해 놓는다면, 살짝 복잡해보이는 요리라고 해먹는 데에는 크게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아침 10시, 오후 3시, 오후 8시, 새벽 1시로 나누어, 그 시간에 해먹으면 좋을 요리들을 소개하는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때로 유용하기도 할 것이다. (단 개인적으로는 이런 류의 '말랑말랑한' 레시피는 사양하고 싶다. 즉 '짠맛이 꽤 강하게 느껴질 만큼 소금을 넣는다'라고 이야기하면 나같은 류의 인간들은 도대체 어느정도 소금을 넣으란 말이야라고 불평부터 늘어놓으니 말이다. 그저 '물 몇 ml에 소금을 2티스푼을 넣으세요'라고 하는게 속편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더하자면, 몇 가지 보통 사람들이 잘 모를만한 재료들에 대해서는 그 내용과 구하는 방법에 대해 좀 더 설명을 해주어도 좋지 않을까 싶다. 즉 '판체타'가 '이탈리아식 베이컨'이라는 것 정도는 말해주어도 좋지않을까 해서 해본 얘기다. 아...그건 내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서 그렇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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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책의 매력있는 부분은 따로 있다. 그것은 저자가 각 요리의 레시피를 소개하기 전에 각 요리에 얽힌 여러 이야기들을 풀어놓는 일종의 에세이 부분이다. 작가는 여러 소재들을 통해 소개하고자 하는 요리에 얽힌 이야기들을 맛깔스런 어조로 전달해주고 있다. 글쎄..솔직히 말하자면, 남자친구를 가진, 요리에 취미가 있는, 고양이를 기르는, 그리고 가끔 낮술도 즐기는 이 저자의 이야기들은 어딘지 모르게 전형적인 부분도 있고, 내가 아는 몇몇 여인네들의 삶과는 조금은 괴리되는 부분들도 있지만, 맛깔스러우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던지는 그녀의 몇몇 이야기들은 살짝 미소를 짓게 할 정도는 충분하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이자면, 주로 지하철에서 출퇴근하면서 잠 자고 있는 인간들에게 상대적 승리감을 느끼기 위해 책을 읽어대는 나같은 인간들은 이 그녀의 에세이 부분들만 중점적으로 읽을 것. 그 뒤의 소개된 요리들의 레시피는 부디 그냥 넘겨버릴 것. 당연한 말이지만, 엄청나게 배가 고파질 것이기 때문이다. 레시피 옆에 첨부된 사진들에 순간적으로 눈이 돌아간다면 더욱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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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회에서 '사과'란 가능한가

The Book | 2009. 12. 6. 00:56 | Posted by 맥거핀.
사과는 잘해요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이기호 (현대문학,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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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도서는 Daum책과 TISTORY가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당신은 오늘 하루 무슨 죄를 저질렀습니까?" 아마도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답할 것이다. "죄? 난 아무 죄도 저지르지 않았는데요..." 그러면 시봉과 나(진만)는 나타나 차례차례 돌아가면서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지하철에서 옆의 사람을 살짝 밀고 빨리 올라탄 것도 죄가 될 수 있고요." "점심 시간에 동료와 밥을 먹으며, 남아있던 마지막 계란말이를 집어 먹은 것도 죄가 될 수 있지요." "엘리베이터에서 앞의 남자에게 살짝 한숨을 내쉰 것도 죄가 될 수 있고요." "회사 상사가 가끔 안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도 죄가 될 수 있지요." "당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이 죄가 될 수 있어요." 그렇게 따지면, 당신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내가 아까 바퀴벌레를 잡아 죽인 것도 죄가 되겠군..흥." 그러면, 아마도 시봉과 진만은 그것은 죄가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죄는 사과를 할 수 없기(사과를 해야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바퀴벌레에게 사과할수야 없는 노릇 아닌가. 즉, 시봉과 진만에게 핵심적인 문제는 그것이 사과할 수 있는 문제인가, 아닌가에 있다.

왜 사과를 해야 하는가. 그렇게 해야만 그들은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시봉과 나(진만)는 어느 '시설'에 있었다. 그 시설의 남자보육사들은 그들에게 그들이 지은 죄를 고백하라고 늘 강요하곤 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고백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죄를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날, 그들은 죄를 고백하고 사과를 하면, 덜 맞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그 이후로 늘 죄를 짓고, 사과를 했고, 맞았다. 그들은 죄를 짓지 않은 날에도 그렇게 했는데, 그런 날에는 꺼림칙해서, 맞은 이후에 꼭 해당하는 죄를 짓고는 했다. 그리고 급기야는 그들은 원생들의 반장이 되어 그들의 모든 죄를 대신 고백하고, 대신 사과하고, 대신 맞아주었다. 시설이 문을 닫게 되고, 그곳에서 나온 그들은 살아가기 위해 그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행한다. 그것은 '사과'를 하는 것, 즉 남들이 지은 죄를 대신 사과해주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 것이다. 즉, 그들은 급기야는 이른바 '사과 전문가'가 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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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이 소설의 중반까지의 이야기이다. 중반까지의 이야기를 적어 놓고, 읽어보니, 왠지 이 이야기는 말이 되는 것도 같고, 되지 않는 것도 같다. 그렇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이 소설의 시점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되는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은 계속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는데, 사건들을 서술해주는 나, 진만은 어린아이, 혹은 거의 안이 텅빈 기계와 같은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는 존재이다. 그것은 그의 절친, 시봉도 마찬가지인데, 이들이 이러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이유는, 사실 모호하다. 일반적으로는 이들의 이러한 지체에는 다른 어떤 이유가 제시되기 마련이지만, 이 이야기에서는 오히려 이 '시설'이 이들을 이렇게 만든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설이 이들을 통제하는 방식은 크게 두가지이다. 하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이 '몸에 좋은 것'으로 알고 있고, 급기야는 그것에 의지하게 만드는 알약.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남자 보육사들에 의해 행해지는 죄의 추궁과 사과, 그리고 그에 이어지는 린치. 아무튼, 이런 이유로 거의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는 주인공이 전하는 이야기는, 아무 감정이 실리지 않은 겉의 의미와는 달리, 계속 그 이면에는 다른 의미들을 담고 있다. 여기에서 이 소설의 모호하고도 독특한 분위기와 짧은 문장들로 이어지는(어린아이, 혹은 기계는 긴 문장으로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리듬이 생겨난다.


원장 선생님은 우리에게 종종 연극을 하자고 말했다. 그것이 우리의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말도 했다. 우리는 항상 엄마 역할이었고, 원장선생님은 매 맞는 아들 역할이었다. 대사 또한 매번 같았는데, 우리는 지휘봉으로 원장선생님의 엉덩이를 때리면서, "그렇게밖에 못 하겠어! 그렇게밖에 못하겠냐고"라고 소리쳐야 했다. 그러면 원장 선생님은 "엄마, 엄마, 더요, 더 때려주세요!"라고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엉덩이를 우리 얼굴을 향해 높이 들어 올린 채, 엉엉 소리 내어 울기도 했다. 그리고 연극이 모두 다 끝나고 난 후엔, 우리에게 초코 우유나 요구르트를 건네 주었다. (p.51)


어떻게 보면, 이 이야기는 일종의 우화(寓話)로 볼 수 있다. 본시 우화에서 즐겨 써먹는 수법 중의 하나는 겉으로는, 어리석은 주인공이 등장하여 벌이는 이야기를 코믹하게 전달하는 듯 하지만, 사실 그 속에는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교훈을 담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몇몇 설정들은 상징성을 띠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서 두 명의 남자 복지사의 외양을 묘사하며, 키가 작은 쪽은 늘 의사들이 입는 흰 가운을 걸치고 다녔고, 키가 큰 쪽은 청바지에 군화를 신고 다녔다고 묘사하는 장면들 같은 부분 말이다(게다가 키가 큰 쪽은 머리숱마저 적다). 이는 한편으로 보았을 때, 흰 가운이 근대적인 문명, 지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군화가 군대, 질서, 체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즉, 이러한 근대적인 문명과 체제적 질서는 결국 어린아이와 같은 이들에게 무지막지한 폭력을 휘두르며, 없는 죄를 고백하라고 강요하는 존재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남자복지사들보다도 더욱 위험한 존재는 원장이다. 진만이 구치소에 있는 원장 선생님을 찾아간 이 장면을 잠깐 보자.


나는 재빨리 물어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가 계속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요?"
"죄는 모른 척해야 잊혀지는 법이거든."
원장선생님은 말을 하곤 씨익, 짧게 웃었다. 그러곤 반대쪽 문을 열고 나갔다. 나는 그의 등에 대고 꾸벅,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인사했다. (p.215)



죄는 모른 척해야 잊혀지는 법이다...요즘에 이 말처럼 맞는 말도 없지 않을까. 자신의 죄를 모른 척하고,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그 죄는 더 이상 아무 문제도 되지 않으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간다. 누구의 경우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와 달리 자신의 죄임을 고백하고 나선 사람은, 그 죄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받거나, 사회에서 추방되기도 한다. 히틀러가 말했던가. '대중은 큰 거짓말일수록 쉽게 속기 마련'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원장 선생님은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이, 그에게 짧은 미소를 날리기까지 한다. 그러나 대중은 여전히 어리석거나, 혹은 변하지 않는다. 진만은 '시설'에서 늘상 했던 대로, 등에다 대고, 꾸벅 인사를 할 뿐이다. 그(원장 선생님)의 앞의 모습이 어떤지 전혀 모른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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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세상 속에서, 나(진만)와 시봉은 끊임없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사과하고, 맞는 것으로 그 죄를 사하려 한다. 자신들의 죄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죄까지 말이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이들은 현대판 예수와 같다. 다른 모든 이들의 죄를 떠안아, 기꺼이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내맡겼던 예수와 같이 말이다. 그러나 예수의 찬란한 부활로 마무리되는 성경과 달리, 이 이야기는 석연치 않은 비극성을 남긴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런데, 하나는 이들의 이런 사과는 결국 어떤 파국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파국은 오래 전부터 예정되어 있는 파국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표면적으로 그것은 복지사들로부터 시작된 폭력의 방식이 다른 더 거대한 폭력으로 확대되어 마무리되는 양상이지만(어쩌면 여기에 작가의 진실이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 진실이란 '죄'라는 것은 결국 근원적으로는 '사과'할 수 없다는 것) 실상은 그 폭력의 시작은 그들에게 복지사들이 폭력을 가하던 것보다 더 오래전, 아버지가 진만을 시설에 버려두었을 때부터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 소설의 마무리.


나는 잠깐 뒤돌아, 병원의 파란색 십자가 네온사인을  바라보았다. 멀리 왔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병원의 십자가는 높은 곳에서, 가까운 곳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p.220)



밝게 전달되는 가벼운 이야기인 듯 했던 여기에 이 소설의 비극이 숨어있다. 여전히 병원의 십자가는 가까운 곳에 있다. 즉, 우리가 아무리 사과를 한다 해도, 시봉과 진만이 나 대신 아무리 사과를 한다 해도, 죄를 끊임없이 묻는 사회는 여전히 우리 곁에 존재한다. 그리고 시봉과 진만이 말한대로, 죄는 셀 수 없이 많다. '당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이 죄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급기야는 죄를 만들어내기까지 한다. 이러한 사회에서 당신은, 아니 나는, 어떻게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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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발칙한 한국학'이 아닌 'The 발칙한 한국학'

The Book | 2009. 11. 29. 20:18 | Posted by 맥거핀.


 

더 발칙한 한국학
카테고리 정치/사회
지은이 J 스콧 버거슨과 친구들 (은행나무,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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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도서는 Daum책과 TISTORY가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J.스콧 버거슨과 친구들'이 지었다고 되어 있는 이 책은, 조금은 특이한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 1장은 스콧 버거슨을 제외한 여러 친구들이 한국에서 겪은 다양한 사건들을 위트를 섞어 짤막하게 나열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고, 2장은 스콧 버거슨과 다른 친구들의 인터뷰 형식이고, 3장은 다양한 맥락에서 각 친구들이 한국에서 생활한 이야기를 길게 다루고 있고, 4장에 가서야 비로소 스콧 버거슨 그 자신의 목소리가 등장한다. 앞의 장들도 여러 흥미로운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이 중에 조금은 생각해 볼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은 4장이다. 사실 앞의 장들은 어떻게 보면, 다른 외국인들의 책들에서도 많이 다루어졌던 내용들이다. 한국의 어떤 폐쇄적인 부분들, 혹은 외국인의 눈으로 보는 비합리적인 부분들이나, 한국에서 외국인들이 겪었던 일들을 다루는 글들은 이제는 조금은 식상해진 감마저 있다. 그래서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지난 광우병 파동의 촛불집회 정국에서 자신이 느꼈던 생각들을 스콧 버거슨, 한국명 '왕백수'가 풀어놓고 있는 4장이다.

글쎄. MB의 충실한 지지자나, 조중동 등의 보수신문을 열심히 탐독하고, 그 논지의 정갈함에 감탄해 마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이 4장 부분을 읽는 반응은 대체로 2가지로 나누어질 것 같다. 하나는 뭐 외국인이니까,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거지 뭐. 저런 식으로 생각하다니 흥미로운걸...하면서 살짝 웃으면서 지나가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분노하거나 혹은 적극적 또는 소극적인 반박을 시도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내 생각에는, 스콧 버거슨은 전자의 반응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 그는 본인과 한국에 거주하는 다른 외국인들을 '엑스팻(expat)'이라고 부른다. 이 '엑스팻'은 약간은 자조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는 '엑스팻'을 이렇게 정의한다.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expatriate)을 부르는 말로, 한국에 도착한 이래 이 땅의 이상하고 독특한 매력에 사로잡혀 떠나지 못하고, 혹은 떠났다가도 다시 되돌아오지만 결코 이곳에서 완전하게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래서 그가 본인과 다른 친구들을 '엑스팻'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떠한 의미에서는 자신들을 그저 '엑스팻'으로 보지 말아달라는 어떤 반항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어쩌면 이 책이 '내가 외국인으로 보입니까?'라는 Seoul Don(서울 돈)의 글로 시작하여, '한국말로 이야기해요'라는 스콧 버거슨의 글로 마무리되고 있는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즉 스콧 버거슨과 친구들은 어떠한 의미에서는 이 책에서 내내 본인들을 단지 외국인으로만 치부하지 말아달라는 주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간에, 그래서 내가 이 짤막한 리뷰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전자보다는 후자쪽에 가깝다. 그가 말하는 것이 어떤 외국인의 글이 아니고, 한국인의 글이라고 생각해 보았을 때에, 그의 글은 흥미로운 관점을 담고 있지만, 어떠한 부분은 경직되어 있고, 또한 어떠한 부분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 그렇게 한국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고 싶은 스콧 버거슨은, 적어도 그의 글로만 놓고 판단하자면, 아직은 엑스팻일 수밖에 없다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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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스콧 버거슨이 4장에서 얘기하고 싶었던 핵심은 4장 맨 처음의 '종로의 이방인'이라는 꽤나 긴 글 보다는, 그 뒤의 '한국에는 사랑의 여름이 없다'는 짤막한 글에 담겨 있는 것 같다. 그는 그 글에서 1968년을 포함한 1960년대 서양(유럽)에서 일었던, 반(反) 권위주의적인 반(反) 문화적인 혁명의 기운을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진정한 사랑의 여름 이후 40여 년이 지난 지금, 다른 여름이 여기 한국에 왔다 갔다. 2008년 여름의 짧은 순간 동안, 종로 거리는 신명나는 음악과 기묘하고 새로운 공동체적 기쁨으로 생생하게 살아났으며, 나는 애매하고 단순했던 소비자 권리 운동이 어떤 식으로든 전면적인 혁명으로, 마술처럼 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시원찮게, 다소 슬프게 끝나버렸다. 이유가 분명치 않은가? 다시 한 번, 사랑의 정치는 언제나 똑같았던 증오의 정치에 맞설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다. (p.429)

 

한 마디로 말해서, 2008년 광우병 정국 속에 벌어졌던 종로에서의 시민의 쿠데타(그의 표현이다)는 권위주의인 신화에 맞서는 또 하나의 권위주의적인 신화에 불과했다는 것, 어떤 의미에서는 권위주의적인 신화화를 깨부수었던 1960년대 서양에 비하자면 여전히 촌스러운 어떤 것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가 보는 2008년 종로는 그렇다. 그것은 보수진영에 대항하는 진보진영의 어떤 헤게모니 싸움이었으며, 정권을 탈취하려는 전(全) 진보진영이 결탁한 일종의 쿠데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폭력에 대항하는 또 하나의 비겁한 폭력이었으며, 그 시민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폭력은 진보진영의 언론에 의해서 교묘하게 감추어졌다는 것이다. 그는 그 과정에서 어떤 신화화적인 기제가 작동하였음을 지적한다. 광우병 쇠고기의 위험성과는 별개로, 그것을 과장하여 전달하는 신화화적인 기제가 시민들의 이성적인 판단을 마비시켰다는 것이다.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를 가로지르는 잠재적 반미감정의 암류는 유명한 '촛불 든 소녀' 로고를 살펴 봄으로써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로고는 잠깐 사이에 광우병 촛불시위 운동의 상징으로 거듭났다. 지난 2002년 한국에서 일어난 대규모 촛불시위는 신효순, 심미선 학생의 죽음이 그 불씨가 되었다. (중략) 내가 보기에 2008년의 '촛불 든 소녀' 로고는 도상학적 측면에서 너무나도 비슷해 2002년 촛불시위를 노골적으로, 적어도 잠재적으로 환기시켰다. 이로써 또 한 번 미국 헤게모니의 사악한 음모와 약탈에 맞서 지켜내야만할 한국의 '무구함'과 '순수함'을 표현한 친숙하면서도 마음을 울리는 심리학적 원형이 활용되었던 것이다. (p.404-405)


스콧 버거슨의 주장은 몇몇 부분에서 들어볼 만한 가치는 있다. MB 정권이 왜 광우병 문제로 발목이 잡히게 되었나를 말하는 부분이나, 386 세력의 어떤 한계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기에 어떤 신화화가 개입되어 있다고 논증하는 부분에서는 어떤 날카로움이 느껴진다. 확실히 지난 2008년의 촛불시위 정국에서 어떤 광우병의 위험이 약간은 부풀려진 것은 사실이며, 시민들의 시위에서도 폭력적인 부분이 있었고, 시민들의 투쟁에도 어떤 신화화적인 요소가 개입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스콧 버거슨의 말대로, 시위대 중 일부가 예비군복을 입고 나온 것, 그것 역시 어떠한 의미에서는 신화화를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그 옷을 입고 나올 필요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의 주장을 귀담아들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딱 그 정도이다. 그는 시민들(혹은 진보진영)의 신화화를 깨부수는 것에만 집착한 나머지, 자꾸만 그 반대의 진영으로 경도된다. 그리고 급기야는 왜곡된 사실, 혹은 확인되지 않은 사실도 어떤 진실인 것처럼 호도해 버린다. 어떤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반박하기 위해서 다른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나, 왜곡된 사실을 그 논증으로 삼는 것만큼 위험한 것이 있겠는가. 즉, 그는 신화화를 깨부수고 반 신화화의 기치를 높이 들기 위해서 또 하나의 신화화를 그의 글의 주요전략으로 구사하는 셈이다. (또한 한편으로, 촛불시위의 모든 부분을 신화적인 내러티브로 해석하는 것 역시 위험한 부분이다. 그가 말한대로, 부시가 이라크 전쟁에 어떤 신화적인 내러티브를 부여하여, 이라크 전쟁을 어떤 현대 문명,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수호로 비쳐지게 했지만, 그것에 어떤 문명전쟁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도 부당할 것이다. 즉, 2008년 촛불시위에 어떤 신화적인 요소가 있었다고 해서 모든 것을 신화적인 내러티브로 해석하는 것 역시 부당할 것이다.)

 

나는 2008년 여름 내내 벌어진 주요 광우별 촛불시위에 빠짐없이 참가했는데, 한 번도 경찰이 시위대를 먼저 자극하거나 공격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실제 상황은 항상 그 반대였다. 핵심은 늘 전경으로 하여금 어떤 반응을 보이게 자극함으로써 한국의 자유진보세력 미디어(및 그들과 한통속인 수많은 아마추어 '시민기자')가 '보도 자료로 남기는' 것이었다. (p.392-393)

   

또한 광우병 촛불시위를 조직하고 이끄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한국진보연대'가 이미 2008년 1월부터 이명박 정권에 반대하는 모의를 해왔다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다. (중략) '이명박 정부의 저돌적 추진 과정에서 대중의 공분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고리를 포착, 대중적 저항전선을 형성해 투쟁을 전개하자.' 이에 이어진 회의에서 '우리의 목표는 이명박 정부를 주저앉히는 것'이라며 공표했을 때, 그들의 의도는 더할 나위 없이 명확한 것이었다. (p.372)

  

가장 유명한 예로 촛불시위 초기 다수의 여중생과 고등학생들이 참여한 것을 들 수 있겠고, (중략) 진보적인 손위세대가 가부장적으로 제공한 더 큰 내러티브에 포섭당했을 뿐이었다 (실제로, 386 세대가 대부분인 전교조 소속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촛불시위에 참가하라고 '독려'한 사실이 보도된 적도 있다). (p.398)

   

물론 내가 주장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완벽한 거짓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 내용 중의 상당수가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거나, 보수진영의 신문들이나 언론들에 의해 과장되고, 부풀려진 내용들이라는 것이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일례로, 시위대의 폭력이 있었고, 그것 또한 일부 감추어졌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항상 시위대가 경찰을 먼저 자극하였다고 말하는 것 역시 부당하지 않은가. 그러나 사실 궁극적인 문제는 그보다는 더욱 근본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스콧 버거슨이 '엑스팻'을 넘어서 자신을 한국인으로 보아주기를 원하지만, 그의 시각에는 여전히 엑스팻적인 것이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즉, 스콧 버거슨에게는 결국 한국인만이 가질 수 있는, 한국인적인 시각, 또는 한국인만이 가지는 특수한 역사성이 배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가 '1980년대의 원형(原形)을 악의적으로 이용'했다고 주장하는, 6월 항쟁의 경험이 2008년 여름 광우병 촛불시위 기간 중에 자주 언급되는 것을 이야기할 때, 그런 생각이 든다. 그는 아마도, 그것이 한국인에게 왜 자꾸 언급되는지, 한국인의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 말이다.

결국, 어떤 의미에서는 처음 얘기한 대로, 그가 한국 사회의 역사적인 맥락을 제거한 상태에서, 2008년의 촛불 시위가 1960년대 유럽의 진보적인 기치에 비추어볼 때 권위주의적이고 촌스럽다고 이야기할 때, 그것은 이미 엑스팻의 시각을 어느 정도 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오로지 이야기하는 것은 그 현상이지, 왜 그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역사적인 맥락에서(오랜기간 외세의 침입을 받았다는 점, 일제의 잔재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권위주의적인 정부 수립과 남북분단이 이루어졌다는 점 등), 왜 한국의 시위 문화가 여전히 신화적인 내러티브 중심이고, 권위주의적인 성격을 담고 있는지 보다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고, 그것이 가능할 때에만 그가 원하는 진정한 한국인에 그는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 두 가지를 여기에 더 첨부할 수 있다. 하나는 1960년대의 유럽의 물결이 그가 생각한 대로 마냥 반 문화적인, 반 권위주의적인, 반 신화적인 내러티브였는가. 그것 역시 어느정도 신화화적 요소가 담겨있지 않았는가.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한국의 진보 진영에서도 이 문제는 꾸준히 제기되고 있었다는 것. 이른바 '민주주의를 얻기 위한 투쟁의 양상, 혹은 그 투쟁 조직이 왜 어찌 하여 반 민주적인가.') 그것이 가능해야만, 그의,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미국이 책임이 없다는 주장이나, 2008년의 반 한나라당 기치가 단순히 헤게모니 찬탈 움직임에 불과하였다는 주장('한나라당'의 역사성에 대해 그가 한번이라도 공부해본 적이 있다면 이렇게 이야기할까)이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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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4장에 있는 스콧 버거슨의 글에만 집중한 나머지 책의 다른 부분에 대한 얘기를 거의 하지 못했다. 3장 부분의 엑스팻들이 한국의 살사(salsa) 문화의 성장에 악전고투한 이야기나, 홍대 인디씬에 대한 글은 아주 재미있었고, 흥미로웠으며, 1장의 몇몇 에피소드들도 충분히 공감해 줄 수 있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러나 사실 책의 다른 부분들도 살짝 고개가 갸웃해지는 부분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책의 중간에 자주 나오는 북한에 대한 이야기들. 이 책의 대부분의 북한 이야기들은 거의 대부분 조롱들로 채워져 있다. 물론 북한 JI 정권이 조롱할 부분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혹시 이 리뷰를 읽고 혹시 나를 빨갱이로 단정할 사람이 있을까봐 하는 얘기인데, 북한 JI 정권은, 나 역시 그 이상한 체제를 이해하거나 (절대) 긍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끊임없는 조롱이 마냥 유쾌한가하면 그것은 아니다. 결국 조롱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언젠가 북한과 우리가 한 나라로 살아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이 조롱뿐인가. 그(와 친구들)가 자신을 진정 한국인으로 생각했다면 과연 이러한 조롱이 유쾌할까.

  그러니 이의 연결 선상에서 이 책이 조금은 의심스러울 수밖에. 그는 끊임없이 그를 단지 '엑스팻'으로 보아주지 않기를 주장하고, 진정한 한국인으로 대해주기를 원하나, 그의 책에서 계속 나타나는 '엑스팻'적인 시선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와 친구들)가 한국인의 어떤 편협함, 한국 사회의 어떤 폐쇄성, 또는 문화적인 이상함, 특이함에 대해 말할 때, 한국인으로서 말하는 아픈 비판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엑스팻으로 '한국 살람 참 이상해욜..'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왜냐하면 그것에는 한국에 대한 깊숙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이 책 <더 발칙한 한국학>은 엑스팻적인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보인다. 그러나 솔직하고 거침없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미수다'보다는 낫다. 그리고 사실 어쩌면 '엑스팻적인 한계를 드러내보이는 것', 그것이 궁극적으로 그가 의도한 바가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그럴 가능성은 낮지만 말이다.

  

ps. 리뷰의 제목에 대해 말하자면, 'The 발칙한 한국학'이란 결국 잘못된 말, 혹은 외국인의 시선으로 쓰는 잘못된 한국어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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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의 세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The Book | 2009. 11. 14. 22:42 | Posted by 맥거핀.

문명전쟁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로렌스 라이트 (다른,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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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도서는 Daum책과 TISTORY가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9․11이 있은 지, 8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9․11은 현재진행형이다. 미국은 9․11이후 테러를 지원한 세력을 공격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이라크, 아프간 등에 전면적인 공격을 가했고, 한편으로 미국 내에서는 이러한 보복 공격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또 9․11 사건의 희생자의 가족 및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 역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며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아마도 2000년 이후, 전세계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을 꼽자면 9․11이 거의 그 첫손에 꼽힐 것이다. 따라서 이 9․11을 이해하는 것은 어쩌면 2000년 이후의 세계를 이해하게 해주는 하나의 커다란 단초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여전히 9․11은 안개에 싸여 있기도 하다. 사건의 자세한 배후 및 내막은 물론이거니와, 9․11이 미국의 자작극에 불과하다는 음모론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고, 한 때 사망설이 제기되었던, 배후의 중심축인 오사마 빈 라덴의 행방도 여전히 묘연하다. 여기에 이 책 <문명전쟁>은 밝고도, 구석구석까지 스며드는 세심한 불빛을 제공한다. 이 책은 5년 동안에 걸친, 11개국 6백 여명의 인터뷰를 통해 알카에다의 발족 이전부터 9․11에 이르는 성실하고도 자세한 길을 추적한다. 그 길에서 저자 로렌스 라이트는 길의 전체 여정을 요약해서 보여주기도 하고, 중간중간 옆으로 살짝 눈을 돌리기도 하고, 때로는 길의 중간에 머물러 발 밑에 차이는 돌부리를 자세히 관찰하기도 하면서 길의 끝까지 독자를 성실하게 안내한다. 그러나 그 길은 명확한 단선주로가 아니다. 그 길은 복잡하고 군데군데 깊이 파인 러프가 있는 으슥하고 여러 갈래가 나뉘어진 오래된 길이다.

그 하나의 길은 테러를 일으킨 오사마 빈 라덴의 알 카에다와 그와 함께 여러 가지 것들을 계획하고 실행한 아이만 알 자와히리의 알 지하드를 세심하게 추적하는 길이다. 저자 로렌스 라이트는 사우디에서 성장한 빈 라덴과 이집트에서 세력을 키운 자와히리를 그 출생부터 조금씩 추적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조금 더 거슬러 오르면 이들에게 어떤 영감을 준 사이드 쿠투브가 있다. 저자는 이들의 출생에서부터 그들이 살아온 경로, 그리고 그들이 저지른 여러 일들까지 여러 사람들의 증언과 다양한 자료를 통해 밀도 있게 조명해 보인다. 이집트 의과대학에서 공부하고, 의사로서 여러 사람의 생명을 살린 자와히리가 왜 알 지하드를 조직하고 거대한 지하드(성전)에 나서게 되었는가, 그리고 사우디의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나, 사우디 왕가와도 깊숙한 관계를 맺고, 크게 사업을 일으킨 명망있는 사업가 빈 라덴은 왜 알 카에다를 만들고 동굴 속에 숨어 지내게 되었는가.

그 해답으로 제시하는 것이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문명전쟁'이다. 즉 이들은 미국으로 대표되는 물질주의적이고 세속적이며, 어떠한 의미에서는 탐욕적인 향락적인 문화에서 금욕적이고 신실한 이슬람 문화를 지켜내는 것을 어떤 하나의 사명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것의 뿌리는 위에서 말했던, 사이드 쿠투브의 사상과도 일치한다. 어렸을 때부터 사이드 쿠투브의 저작들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던 이들이 사실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코란의 말씀을 그대로 체화하는 거대한 이슬람 제국의 건설이었고, 그것의 반대편에 있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미국을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이었다. 어떤 정신적인 부분만이 아니더라도, 미국은 또한 이슬람 세력에게 눈의 가시인 이스라엘을 지속적으로 후원하는 국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또한 한편으로 보면, 이들의 적은 꼭 미국만은 아니었다. 이들의 눈으로 보면 혁명적이고 이단적인 의미를 가지는 공산주의 세력 역시 이들의 적이었고, 그외 이슬람 신자이지만, 이단이거나 이슬람의 하나의 분파인 시아파 세력 역시 이들의 적이었다.

신병은 끝없는 육체적 훈련을 견뎌내야 했을 뿐 아니라 알 카에다의 세계관도 주입 받았다. 그들의 강의 노트에는 다음과 같은 조직의 유토피아적 목표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1. 전 세계에 신의 지배를 확립한다.
2. 신을 위해 순교한다.
3. 모든 타락으로부터 이슬람을 정화한다.

이 세 가지 목표에서 알 카에다의 매력과 한계를 엿볼 수 있다. 알 카에다는 정치의 유일한 목적이 종교를 정화하는 것이고, 사람들에게 신의 지배가 어떠한 모습일지 의문을 가져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 이상주의자들을 끌어들였다. 개인의 목표인 순교는 여전히 많은 신병들에게 매력으로 다가왔다. (p. 446-447)



그러나 저자가 이들을 어떤 악마로서만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또한 한편으로 자와히리와 빈 라덴의 수많은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며 이들을 다각도로 조명하려 노력한다. 이들은 또한 한편으로 가족들에게 따뜻한 아버지이기도 했으며,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선뜻 내어주고,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잘 도와주는 그런 사람들이기도 했다. 그것은 단지 자와히리나 빈 라덴에게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그들 주위에서 같이 테러를 계획하고 실행한 많은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깊은 신앙을 가지고, 생활을 해나가는 인간적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순수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빈 라덴의 아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빈 라덴을 신앙심이 깊고 비타협적인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언젠가 파티마가 카세트테이프를 빌리려고 할 때였다.
"네 아빠가 못 들으시게 해야 한다."
자이나브는 빌려주는 조건으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아빤 그런 거 던져 버릴 사람은 아니야. 실제로 그렇게 엄격하지 않으시거든. 남자들 앞에서만 그런 척하실 뿐이야."
"노래도 들으신단 말이야?"
자이나브가 놀라서 물었다.
"그럼, 전혀 신경쓰지 않으셔."
말을 좋아한 빈 라덴은 움 칼레드의 집에 말에 관한 책들로 서재를 만들고, 말 사진이 있는 책이나 달력도 걸어두었다. 자이나브는 빈 라덴이 아주 마음이 넓다고 결론지었다. (p. 372-373) 

    
이 책을 읽는 또 하나의 길은 빈 라덴과 자와히리의 반대편에 있는, 즉 미국에서 이들을 잡기 위해 여러 정보를 수집하고, 테러를 막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던 FBI나 CIA, NSA(미국국가안전보장국)의 여러 인물들, 특히 그 중에서도 그의 중심에 있었던 FBI의 존 오닐을 중심으로 읽는 것이다. 미국은 사실 초창기에는 빈 라덴과 자와히리의 이슬람 세력을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리고 몇몇 테러들이 일어난 이후에도 이들에 대한 탐색은 꾸준히 이어지기는 했으나 그다지 높은 강도로 행해지지는 않은 듯 하다. 실제로 9.11 직전에도 이들의 이러한 테러를 암시하는 몇몇 징후들이 감지되었고, 9.11의 실행에 직접적으로 간여된 몇몇 인물들이 미국에 입국한 정보도 수집되었지만, 이러한 정보들은 때로는 묵살되고, 때로는 별로 중요치 않은 것으로 취급되었다. 이것에는 한편으로 CIA와 FBI의 오랜 반목도 큰 역할을 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관이 가진 정보를 상대방에게 넘겨주지 않기 위해 때로는 정보를 교묘히 감추어 버렸고, 그 때마다 테러 세력들은 새로운 일을 하거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이들은 물론 큰 사건에는 공조하기는 했으나, 때로는 거의 공조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의 중심에는 FBI에서 이들을 꾸준히 추적한 수사관 존 오닐이 있다. 그는 단순히 정보를 수집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여러 조직들을 이끌어 나가며, 이들을 꾸준히 추적하였고, 예멘에서 미 군함 콜호가 테러 공격을 받아 거의 침몰할 뻔한 상황에서는 직접 현지로 날아가 관련자들을 심문했고, 사건의 배후를 밝혀내기 위해 노력했다. 하나 흥미로운 것은 이 존 오닐이라는 인물은 또한 한편으로는 세속적이고 향락적인 미국을 대변하는 듯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는 여러 여자들과 동시에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이러저러한 이유로 많은 빚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래서는 그는 한편으로 불안한 상태였고, 일에 몰두하는 것으로 여러 불안함을 잊으려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그러나 그는, 거의 빈 라덴에 비견할 정도로 머리가 좋고, 추진력이 뛰어났으며, 여러 지략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거의 빈 라덴을 잡거나, 혹은 그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잡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빈 라덴이 어떤 거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고, 거의 9.11을 암시하는 발언들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주 사소한 선택 몇 가지가 빈 라덴이 9.11을 성공시킬 수 있도록 했다. 

존 오닐은 그러나 공교롭게도 9.11이 일어난 날 세계무역센터 안에서 죽었다. 그는 이런저런 문제가 겹쳐 그 이전에 FBI에서 사직했고, 그가 새로 시작한 일의 사무실은 세계무역센터 안에 있었다. 9.11이 일어나기 며칠 전부터 그의 행적을 추적하는 대목은 흥미로우면서 동시에 상당한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그는 건물이 비행기와 충돌한 당시에 건물을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으나, 자세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위험을 무릎쓰고 다시 건물로 돌아갔고, 그의 시신은 10여 일이 지난 후에야 잔해더미 속에서 발견되었다. 그는 공격을 예견했고, 그 공격을 막아내려고 온 힘을 다해 애썼지만, 바로 그 공격으로 인하여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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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문명전쟁>은 그 외에도 많은 흥미진진하고도 숨겨진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책의 중심축은 자와히리와 빈 라덴, 그리고 존 오닐이라는 세 인물이지만, 그 세 명을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알려진,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뒷 배경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그 이야기들은 때로 표면에서 하나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전달되기도 하고, 때로는 멈춰서서 그 사건의 의미에 대해, 그리고 그 이면의 의미에 대해 독자에게 묻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몇 개의 생각거리들을 제공한다. 자살을 금하는 이슬람의 계율을 반하는 자살 폭탄 테러들은 어떤 방식으로 정당화되었는가, 왜 테러 세력들은 미국을 주 타깃으로 삼게 되었는가, 그리고 하필이면 왜 미국의 세계무역센터를 그 공격목표로 삼았는가, 그리고 빈 라덴이 만약 없었다면, 이 테러들은 일어나지 않지 않았을까...등등. 그리고 이 책은 그 나름의 답들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마지막 질문의 제시하는 답은 이렇다.

그러나 빈 라덴이 없었다면 이집트인은 단지 알 지하드에 그쳤을 것이다. 그들의 목표는 하나의 정적이었을 것이다. 많은 이슬람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을 때 그들의 목표는 민족적인 목표에 집중되어 있었고, 국제적인 지하드 연합을 창출한 것은 빈 라덴의 비전이었다. 몰락하여 사그라져 버릴 수 있었을 조직을 다시 결합한 것은 그의 지도력이었다. 수많은 살인에 뒤따르는 도덕적 논쟁에 귀를 막고 반복된 실패에 무덤덤할 수 있었던 것도 빈 라덴의 불굴의 의지였다. 이는 종교 지도자나 광인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엄한 효과를 얻을 뿐 아니라 목숨을 내거는 상상력을 부추길 수 있었던 데에는 예술적 수완도 한몫했을 것이다. (p. 486)


이 책은 9.11 이후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책이 끝나는 시점은 9.11이 발생하고 그에 대한 추적이 막 시작되며, 빈 라덴과 자와히리가 어디론가로 종적을 감춰버리는 시점이다. 빈 라덴은 결국 9.11을 일으킴으로써 그가 바라던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것은 단지 미국의 심장부를 파괴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 목표는 여러 해외에서의 테러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미국의 심장부를 공격함으로써, 미국의 거대한 보복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미국이 이슬람 세력들을 공격하게 하여, 전 이슬람적인 대항을 불러일으키는 것, 전(全) 이슬람 세력을 미국에 대항시켜 미국을 무너뜨리고 이슬람 제국을 건설하는 것, 그것이 빈 라덴과 알 카에다의 목표였다. 그러므로 한편으로 보았을 때 빈 라덴의 계획을 완성시켜준 것은 미국이었다. 여러 이슬람 세력에 거대한 보복을 행함으로써 전 이슬람 세력의 반발을 지속적으로 불러일으켰으니 말이다. 그리고 여전히 이 거대한 보복은 진행중이다. 그리고 우리도 그 한 축에 끌려들어가 있다. 아프간 재파병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이 때에 우리는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하는가. 해답은 자명하지만, 그의 실행은 쉽지가 않다. 우리도 이 거대한 문명전쟁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우리의 선택은 또 앞으로 무엇을 불러일으키게 될까.

이 책 <문명전쟁>은 9.11에서 끝나지만, 9.11 이후의 세계를 읽을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시점을 제공한다. 그리고 또한 이 책은 수십명에 달하는 주요 등장인물들을 책 뒤에 색인으로 제공하고 있고, 성실한 색인을 덧붙임으로써 이슬람 지하드 세력들을 이해하는 하나의 백과사전으로써의 기능도 겸하고 있다. 관심 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분명히 기대만큼의 역할은 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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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을 강탈해 가는 것은 그 자신이다

The Book | 2009. 10. 20. 09:16 | Posted by 맥거핀.
심장강탈자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딘 R. 쿤츠 (제우미디어,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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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도서는 Daum책과 TISTORY가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딘 쿤츠의 이 소설 <심장강탈자>는 스릴러 혹은 추리물적인 성격을 표방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읽어보면 이러한 성격 규정이 딱 맞아떨어지지 않음을 알게 된다. 사실 일종의 스릴러나 추리물을 원하는 독자에게는 이 소설 <심장강탈자>는 원하는 만큼의 만족감을 주지 않을 것 같다. 이해되지 않는 사건들이 벌어지기는 하지만, 그 강도는 낮으며, 어떤 명확한 적이나, 혹은 보이지 않는 적들이 주인공을 뒤쫓는 것도 아니다. 소설이 중반을 넘어갈 때까지 주인공 라이언 페리는 몇 번의 이상스런 심장발작을 겪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부다. 어떤 그를 도사린 음모나, 보이지 않는 적들이 존재한다고 보기에는 그 근거가 여러모로 미약하다. 대신 소설은 주인공 라이언 페리의 심리묘사에 상당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 조밀한 심리묘사가 나중에는 어느 정도 그 힘을 발휘한다.

사실 결국 소설을 다 읽고 책장을 덮고 나면, 약간은 맥이 빠지는 부분이 있다. 그 결말은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맥빠짐은 적어도 우리가 그 결말에만 주목할 때만 그렇다. 아마도 이 소설에서 그가 나중에 겪게 되는 일들은 부수적인 문제일 것이다. 그가 후에 겪게 될 여러 일들이 단지 그가 모르는 어떤 일들(혹은 그가 어쩌면 예상했음에도 애써 모르는 척 했던 어떠한 일들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 가능성은 제외하기로 하자)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조금 모자란 부분이 있다. 그러한 결말은 상당히 이해되지도 않거니와 상당한 부분에서 우스꽝스럽게 보이기조차도 하다.

아마도 그에 대한 해답은 소설 중에서 상당히 중요하게 제시되는 이 말 “폭력의 가장 근원적인 원뿌리(‘근원적인 원뿌리’? 이상한 번역이다)는 진실에 대한 증오다.” 속에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가 나중에 당해야 했던 일들, 그리고 그가 행한 죄악들이 이 말 안에 있을 것이다. 그는 자수성가한 사업가다.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이 부를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이 부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어느 정도는 자신이 주위 사람들에 합리적으로(또는 ‘어떤 의미에서는’ 공정하게) 대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무튼 그는 적어도 돈의 힘은 안다. 그리고 그것의 힘을 또 적절히 이용할 줄 안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는 주위 사람들을 잘 믿지 못한다. 여자친구인 사만다를 매우 사랑하면서도, 자신에게 계속 심장발작이 일어나고, 점점 자신이 약해진다고 생각하자, 그녀를 의심하고, 그녀의 어머니나 주위 사람을 의심한다. 그리고 집안일을 해주는 싱 부부도 철저히 뒷조사를 하고 채용했음에도, 의심하기 시작한다.

아마도 그래서 초반에서 중반에 이르는 그 많은 이야기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이야기가 우스꽝스러워지지 않으려면, 주인공 라이언 페리가 어떠한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독자들에게 어느 정도 받아들여졌을 때에만 이 마지막은 어느 정도 의미가 있어 보인다. 그는 최후의 순간에 도달해서야, 즉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리고서야 진실을 이해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가를 이해하게 된다. 그가 이 마지막 순간에 이르지 않았다면, 그가 진실을 받아들였을까. 아마도 그는 또다른 변명으로 또다른 허구적인 세계를 만들어내려고 했을 것이다. 그 진실의 일부란, 이런 것이다. 그가 쌓아온 부가, 그가 사는 삶의 방식을 설명하지는 않는다는 점, 그리고 그가 살아나가는 세상에 그 자신만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점, 그가 결국 보아야 하는 진실은 그가 구축한 세상의 바깥에 존재하고 있다는 점, 어쩌면 그가 진실을 깨닫고 살아나가는 그 후의 삶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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딘 쿤츠의 이 소설 <심장강탈자>는 사실 이야기의 중간에 약간 모호한 부분들도 존재한다. 간호사 이스메이 클렘을 둘러싼 이야기들이라든가, 사람들의 자살(혹은 안락사)을 도우며, 그 사체를 수집하는 스티브 바게스트를 둘러싼 이야기들이 그렇다. 그 부분을 둘러싼 어떤 상징성들은 강하지만, 그것이 왜 필요한 이야기인가를 생각해보면, 약간은 모호한 부분이 있다. 그것에 대한 어떤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는 부분에서도, 작가의 철학적인 사유가 잘 드러나지는 않는다. 어쩌면 작가가 이야기를 끌어나가기 위한 하나의 자극적인 도구로만 이러한 이야기들을 억지로 끌어들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이에 대한 판단은 딘 쿤츠의 다른 소설들을 읽어본 후에 행해야 할 듯하다. 책 소개에 보면, 오컬트적인 요소를 잘 사용하는 작가이나, 이 소설에서는 그러한 요소가 상당 부분 배제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런 부분이 잘 드러난 소설들이 어떤 이야기들인지 궁금해진다. 구미권에서는 스티븐 킹과 비슷한 명성을 지닌 작가라고 하는데, 이것이 출판사의 어떤 선전문구에 불과한지, 아니면 스티븐 킹이 지닌, 어떤 불가해한 일들을 다루면서도 그 속에서 어떤 철학적인 상징성을 끌어내는 능력을, 이 작가도 갖추고 있는지는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읽어보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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