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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의 피의 역사

The Book | 2012. 10. 5. 23:06 | Posted by 맥거핀.
코뮤니스트마르크스에서카스트로까지공산주의승리와실패의세계사
카테고리 정치/사회 > 사회학
지은이 로버트 서비스 (교양인,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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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먼저 두 가지 정도를 이야기하면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하나는 이 책에 나온 시기 구분과 그에 따른 명칭들이다. 이 책 <코뮤니스트>는 1917년 11월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이것이 10월 혁명으로 불리는 이유는 당시 러시아가 쓰던 율리우스력으로는 10월이기 때문이다)을 기점으로 그 이전을 '기원'으로 그리고 그 이후에 만들어진 체제를 '실험'으로 명명한다. 이 코뮤니스트들이 '도약'을 시작하는 것은 스탈린이 트로츠키와 부하린을 밀어내고 집권을 확고히하는 1929년부터이다. 이 '도약기'는 소비에트 정권과 소비에트 블록 건설의 시기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1947년 소련을 중심으로 한 코민포름의 결성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마셜플랜의 대응으로 만들어진 냉전체제인 '확산'의 시기로 넘어가게 된다. 소련 자체만 놓고 보아서는 미소냉전의 축에서 소련이 소비에트 블록 안에 어떻게 보면 갇혀있던 시점이라 확산으로 보기가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중국과 북한, 동유럽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았다는 사실은 이것이 공산주의의 '확산'의 시점으로 볼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1957년 흐루쇼프가 정권을 잡으면서 '변형'되기 시작한다. 데탕트가 일어났고, 쿠바, 중남미 등에서 혁명이 일어났으며, 마르쿠제, 알튀세르, 사르트르 등이 맑시즘의 방향을 새롭게 잡으려고 하였다. 이 공산주의가 결정적으로 타격을 받고 '종언'으로 들어가는 것은 1980년 레이건이 미국에서 정권을 잡으면서부터이다. 브레즈네프나 안드로포프 등의 당시의 소련 서기장들은 레이건 이후의 미 행정부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1985년 등장한 고르바초프는 그 가느다란 생명줄을 거의 끊어버렸다.

다른 하나는 이 책에서 제기하고 있는 질문들이다. 질문과 답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책은 아니지만, 이 책은 책 속에서 몇 가지 질문들을 하고 있고, 나름의 답을 내리고 있다(그 답은 마지막 40장에 정리되어 있다). 1부 '기원'에서는 소련 체제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였나, 당 독재였나, (공산주의자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된 나라가 아닌, 왜 가장 가난한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생하였는가 등의 질문을 한다. 2부 '도약'에서 묻는 것은 왜 소련은 공산주의 확산의 길이 아니라, 일국공산주의의 길을 갔는가, 주변국, 미국 등에서의 국제적인 봉기는 왜 일어나지 않았는가 등의 물음이다. 3부 '도약'에서는 권력 투쟁 중에서 어떻게 스탈린이 정권을 잡았는지, 소비에트는 나치즘과의 대결에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지, 왜 그토록 커다란 억압의 체제가 필요했는지 등에 대해 묻는다. 4부 '확산'에서 보고자 하는 것은 냉전 체제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었는지, 냉전 체제가 왜 스탈린에게 필요했는지, 그리고 작은 조직에 불과했던 마오쩌둥이 어떻게 거대한 장제스 군대를 이길 수 있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5부 '변형'에서는 왜 모든 공산주의가 변형되며, 동일한 실패의 길을 걷는지, 그리고 공산주의가 모색한 탈출구는 왜 결국 실패로 가는 출구였는지에 대해 살펴본다. 마지막 6부 '종언'에서는 중국과 소련의 개혁이 어떻게 달랐으며, 왜 중국은 성공하고, 소련을 실패하였는지, 그리고 공산주의는 왜 그토록 허망하고 급속하게 붕괴되었는지 돌아본다.

로버트 서비스의 이 책 <코뮤니스트>는 이 많은 질문들에 대해 나름 성실히 답변하려고 노력한다. 단편적인 사실이나, 의견의 제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흐름과 풍부한 사료의 제시를 통해 나름의 근거를 제시하고, 되도록 여러 정황들을 제시하여 독자의 판단을 이끈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이 질문 자체가 그렇게 신선하지만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뒤에 옮긴이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우파 역사가들에 의해 이 질문들의 상당수는 거의 결론이 내려진 이후이고, 로버트 서비스가 다른 점은 보다 성실한 자료조사를 통해 나름의 근거를 더 많이 확보했다는 것 뿐이며, 그 답 자체는 예전의 역사가들과 동일하게 상당히 편향적이다. 사실 이 질문들에 대한 각각의 답을 뭉뚱그려 보자면, 결국 로버트 서비스가 보는 최종의 답은 공산주의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이념이었다는 것이다. 즉 공산주의 체제는 태어날 때부터 문제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권력욕이나 생존욕과 결합하여 언젠가 무너질 수밖에 없는 괴물의 체제였다는 것이 로버트 서비스가 내놓은 최종의 답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급속히 무너질 것이라고 계속 오판하고 있었으며, 그들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기묘한 개념을 발명해 낸 순간부터 당의 독재는 시작되었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공산주의 체제에서 스탈린이나 마오쩌둥, 차우세스쿠나 폴 포트 등의 잔악한 폭군들이 등장한 것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 사회는 감시와 억압으로 기능하는 체제이고(그것은 거의 모든 공산주의 체제가 비슷한 형태를 가진 소비에트 모델을 모방함으로써 생존이 가능했다는 점이 그 증거가 된다. 즉 소비에트 모델은 결국 실패했지만, 그나마 그 모델이 일시적인 유지라도 가능케했다), 그런 체제라면 감시와 억압과 폭력을 가장 잘 수행해낼 자, 그러니까 가장 잔악하고 폭력적이며, 교활한 자가 높은 지위에 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즉 스탈린이 정권을 잡은 것은 그가 말 그대로 '강철'이었기 때문이다.

로버트 서비스가 이러한 기조를 유지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한 가지 방법은 코뮤니즘의 역사에서 코뮤니즘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저자는 이를 사상의 흐름이 아니라 사건의 흐름으로 치환하고, 모든 '주의'의 개념들을 독자의 머리 속에서 효과적으로 제거한다. 이 책에는 일견 비슷비슷해 보이는 수많은 '주의'들의 명칭이 나온다. 공산주의, 맑시즘, 사회주의, 스탈린주의, 마오주의, 아나키즘, 나로드주의, 아나르코생디칼리즘, 사파티즘, 카스트로주의 등등 거의 셀 수가 없을 정도다. 그러나 저자는 이들에 대한 효과적인 설명을 대체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저자가 모르거나 귀찮아서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왜냐하면 소비에트 권위주의나 스탈린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각각 한 챕터를 할애하여 열심히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코뮤니스트들을 탈코뮤니즘화하는 것은 이들 코뮤니스트들을 자신들의 이익이나 정권을 잡기 위한 정복욕의 화신, 혹은 쓸데없는 투쟁에 골몰하는 골치아픈 종자들, 혹은 죽은 마르크스나 엥겔스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꼭두각시처럼 보이게 한다. (예를 들어 1920년대 독일의 경우만 보더라도 카우츠키의 맑시즘과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의 맑시즘은 얼마나 다른가.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위한 맑시즘이고, 무엇을 위한 수정인지 전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이들은 단지 권력에 목마른 멍청한 꼭두각시들로 보인다.) 이는 책의 내용 전체를 지루하게 만들 뿐 아니라, 그저 이들이 결국은 사라질 권력을 잡기 위해 각종 잔악한 일을 저질렀던 그야말로 오류로 가득찬 인물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와 관련하여 같이 읽을 책으로 한형식의 <맑스주의 역사강의>를 추천.)

물론 부인할 수 없는 사실들이 있다. 공산주의의 역사에서 수많은 폭력과 학살, 기근, 감시와 억압이 실제로 있었고, 공산주의는 현재 거의 종적을 감춰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이 책 역시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하며, 그 질문에 담긴 함의는 결코 작지 않다. "마르크스주의의 희망은 왜 절망이 되었나?" 즉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출발은 다르다. 자본주의는 이미 그 태동에서부터 그 잔악성을 수많은 사람들이 감지했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마르크스주의가 출현하였다. 즉 마르크스주의는 많은 사람들의 희망을 안고 탄생하였고,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고, 그것이 잔인한 뒷모습을 보여주었을 때 많은 이들은 그래서 더욱 절망했다. 그러나 이 질문을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그 희망이 절망이 된 것일까. 로버트 서비스의 이에 대한 답은 예스다. 즉 공산주의의 희망이라고 믿어졌던 요소들, 그것들은 이미 잘못 만들어진 뿌리에서 길러졌으며, 따라서 공산주의 체제는 자연스럽게 절망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이 책에 보면 농업의 국유화는 생산성 저하와 마치 직결되는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즉 땅이 내 소유가 아니면 모두 생산을 할 생각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문제의 요소는 이미 공산주의 그 자체에 들어있었으며, 미국이 조바심을 내지 않았어도 이 소비에트 체제는 언젠가 무너졌을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이 질문에 내린 답이다. 즉 희망처럼 보였던 그것은 사실은 절망이었다는 것. (이의 반대편, 그러니까 수정주의적, 좌파적인 시각에 물론 다른 해석이 있다.)
 
(이를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정치형식과 그렇게 밀접한 관계가 없는 것처럼도 보인다. 자본주의는 자유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있고, 동시에 독재나 전제정치와도 양립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공산주의의 경우 민주주의라는 정치형식과 도리어 밀접한 관련을 가져야만 하는 것처럼 보인다. 민중들이 분배하여 나눠같자는 공산주의의 이상은 민주주의의 이상과 비슷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수많은 공산주의 정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교묘한 용어를 내세워 어느 틈엔가 그것을 당 독재로 교묘하게 치환하였으며, 그런 측면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절망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용어를 교묘하게 변질시킨 레닌 등의 인물들에 의해 촉발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해 그리 고정된 견해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또 한가지 부인할 수 없는 사실들도 있다. 그것은 그 희망에 수많은 사람들이 지지하고 열광적인 찬성을 보내고 때로는 목숨을 걸었다는 것. 그렇다면 그들은 모두 그 오류를, 오류의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한 바보들이었는가, 단지 멍청한 꼭두각시들에 불과했을까. 아마도 그건 아닐 것이다. 그들은 그것에 희망을 보았고, 절망적인 현실에서 어떻게든 가능성을 발전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 현재에도 마찬가지이다. 공산주의의 폭력적인 현실들이 드러나고 그것이 거의 종말에 다다른 지금에도 여전히 자본주의의 폭력성에 대항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내용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내재된 가능성들이다. 저자 로버트 서비스도 책의 뒤편에서 쥐꼬리만큼 밝히기는 했지만, 자본주의가 저지른 폭력들도 결코 공산주의에 뒤지지 않기 때문이며, 어떠한 의미에서는 더 거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전히 공산주의의 완전한 종언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책을 보며 저자의 시각과 다르게 사실 역으로 놀랐던 것은 온 세계에 공산주의자들이 이렇게도 많았다는 사실이다. (공산당을 콩사탕으로 말해야만 했던 우리의 시각에서는 신선하기까지 하다.) 그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의 등장과 스러짐을 보며, 도리어 한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공산주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적어도 자본주의의 폭력성이 살아있는 한.


덧.
그러므로 사실 내가 보기에는 이 책은 공산주의에 우호적인 사람이나 비우호적인 사람이나 어딘가모르게 아쉬운 부분이 있을 것이다. 공산주의에 우호적인 사람이면 공산주의의 피의 역사만을 줄기차게 서술한 부분이 마음에 걸릴 것이고, 비우호적인 사람이면 도대체 이 책을 읽어야할 이유를 찾기 못할 테니. (시작부터 망가져서 어차피 언젠가 당연하게도 끝날 운명이었던 이들의 이야기를 왜 이렇게 길게 읽어야 하지?)
:

기담이 아니라 현실의 시대

The Book | 2012. 9. 25. 17:28 | Posted by 맥거핀.
가족기담고전이감춰둔은밀하고오싹한가족의진실
카테고리 인문 > 인문학일반
지은이 유광수 (웅진지식하우스,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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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소설)의 묘미, 혹은 쾌락은 대체로 전복에서 나온다. 현실을 뒤집는 것,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는 것 말이다. 예를 들어 이 책 <가족 기담>에서도 '기담' 중의 하나로 소개된 <홍길동전>의 이야기가 읽는 이에게 일종의 즐거움을 주며 널리 읽혔던 것은 그것이 결국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서자인 홍길동이 적서차별의 굴레를 넘어 한 나라의 왕이 되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상당수 이야기의 원천이었던, 그리고 앞으로도 원천일 것이 분명한 복수극이 만연하는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이 책에 소개된 <장화홍련전> 같은 것. 그것은 현실에서는 그러한 복수가 결코 쉽지 않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복수가 그렇게나 쉽고, 현실에서 자주 일어나는 것이라면 누가 복수극 따위를 읽겠는가. <장화홍련전>에서 귀신이라는 비현실적인 요소를 전부 배제하고 생각한다고 해도, 조선시대와 같은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죽은 전처의 딸들이 가부장의 위세를 등에 업은 계모에게 복수를 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을 것이고,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듣는 자와 말하는 자 모두에게 쾌감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이러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향유하는 사람들은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 혹은 밀려난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고, 이야기(소설)는 패배자의 기록이라는 단적인 말을 굳이 가지고 오지 않더라도,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이야기 속에서나마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이야기를 읽는다. (그래서 어쨌거나 저쨌거나 새드 엔딩은 해피 엔딩보다 사랑받지 못할 운명에 있다.) 하물며 조선시대와 같이 엄격한 신분질서가 짜여진 폐쇄적인 사회, 가부장적 질서가 사회의 기초에서부터 뿌리내리고 있는 사회에서는 더 말할 것이 있으랴. 평생 종의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던 사람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집안에서만 갇혀 지내야 했던 수많은 여인들, 벼슬길이 애초에 막혀있던 (서자와 얼자를 포함한) 수많은 양반들이 그나마 합법적으로 기를 펼 수 있었던 것은 이야기 뿐이었다. (물론 그 이야기마저도 완전히 합법적인 것은 아니었다. 모여서 무엇인가를 쑥덕쑥덕 이야기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권장되는 행위는 아니었다. 책에 보면 실상 비참한 이야기를 모여서 웃으면서 즐기는 부분을 부정적으로 보는 부분이 있는데, 사실 그것은 자조적인 웃음에 가까웠을 것이다. 물론 자조적인 웃음이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조선 시대와 같이 신분차별이 공고한 사회에서 이야기는 대체로 두 가지 것을 담는다. 하나는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 꿈이다. 그러니까 "그리하여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와 같은 결말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결말에는 수상쩍은 무엇인가가 남는다. 그것은 그 결말이란 너무도 간단하고 덧없기 때문이다. 이 간단한 결말에는 "그들이 그래서 정말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을까?"와 같은 질문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야기들은 대체로 두 번째 것, 그러니까 결국에는 한계가 있는 승리, 결국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무엇인가를 담는다. 위에서 예로 든 <홍길동전>을 다시 가져와 본다면 홍길동은 결국 가상의 나라, 율도국의 왕이 된다. 조선이라는 거대한 신분제적 봉건 체제는 여전히 건재하며, 홍길동 역시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체제를 건설해 그 우두머리가 될 뿐이다. <구운몽>이나 <옥루몽> 같은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제목에서부터 이미 말해주듯 한낱의 꿈일 뿐, 그것은 실현될 수 없는 것이다. 아마도 여기에는 두 가지 정도가 개입될 것 같다. 그 하나는 조선과 같이 공고한 봉건 신분제의 사회에서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몸조심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기록으로 남기는 방각본이나 필사 형식의 이야기는 물론이거니와 단지 구술로서 이루어지는 이야기일지라도 이야기에는 적절한 안전장치가 필요했다. 다른 하나는 결국 이 이야기들은 창작자의 내면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벗어나고 싶어하나 당대의 현실을 결코 벗어날 수 없었고, 그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이야기의 결말은 결국 어느정도 현실을 반영할 수밖에 없었다. 또 그것은 묘한 시기와 질시를 안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소설의 창작자들, 그리고 독자들은 소설 속 인물들이 무엇인가를 이루어내기를 바라면서도, 그 완전한 성공의 모습을 보는 것을 불편해하며, 그가 결국 어떤 한계를 가지게 되었을 때만이 가까스로 안도한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그것을 보는 현재 자신의 처지를 은연중에 의식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책 <가족기담>에서 드러내보이고 있는 것은 결국 이 두 번째이다. 그들이 이루어낸 무엇인가가 아니라, 결국 이루어내지 못한 무엇인가를 볼 것. 그것은 그러므로 이야기의 판타지를 모두 걷어내고, 그 이야기 내면에 담긴 당대의 현실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무엇이 이야기 속 그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지어내고 듣는 모든 이들을 어떤 한계에 가로막히게 하는가? 저자 유광수는 옷고름을 들춰내고 이야기의 속살을 드러내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저자는 꽤 집요하다. 저자는 단지 뽀얀 속살, 보이고 싶지 않은 치부를 드러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저자는 집요하게 살과 핏줄을 발라내고 그 뼈 속까지 들여다본다. 그러므로 이는 결국 기담이 된다. 단지 뼈가 드러나서 기담이 아니라, 우리는 그 뼈 속에 사무친 무엇인가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과 예를 중시하는 조선의 유교 이데올로기와 모순되어 보이지만, 실상 그 이데올로기가 뒷받침해주고 있는 가부장적 사회의 기담들이다. 부모에게 희생당하는 아이, 반대로 아이에게 희생당하는 부모, 정절과 포르노그래피를 동시에 꿈꾸는 남자들, 무능한 가장들이 벌이는 타자화, 근친상간, 집안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죽기를 바라는 열녀 만들기 등등.

뭐 그러므로 사실 그렇게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모든 텍스트는 그 이면을 가지고 있고, (그 이야기에서 겉으로 드러난 교훈과 하등 상관이 없이) 텍스트들은 자발적, 그리고 비자발적으로 당시의 세계관을 담기 때문에 그 이야기에는 무의식적으로 함축되어 있는 것들이 있다. 또한 그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시도는 (특히 유교 이데올로기에 대한 것은) 여러 번 행해지기도 했고, 우리에게 어느 정도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이야기를 다시 새롭게 읽어내는 작업이 쉬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이와 부모의 상호희생 강요, 정절과 포르노그래피의 이상공존, 타자화 같은 것은 우리에게도 낯선 키워드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낯설다기 보다는 우리는 이제 그것을 이야기에서가 아니라 현실의 뉴스에서 본다. (그리고 동시에 현재에 만들어지는 수많은 텍스트들도 이 키워드들의 상당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 아마도 먼 훗날 후세인이 우리시대의 텍스트들을 본다면 그 기괴함에 분명 혀를 내두를 것이다.) 그러므로 이 텍스트들을 곱씹는 것은 단지 유교 이데올로기를 욕보이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것은 현실의 무엇인가를 바로잡기 위함이다. 즉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의 새로운 버전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책 <가족 기담>은 그만 이 부분에서 주춤하고 만다. 책 전반에 주로 흐르고 있는 약간은 과감한 성 담론들을 보고 내가 필요 이상으로 기대했나 보다. (물론 예전 고려가요나 향가의 후렴구들을 성행위의 열락의 언어들로 보는 해석들에 탐닉했던 내 전력으로 비추어 볼 때 저자 탓만은 아니라고 본다.) 책 전체 내내 각종 다양한 가족에 대한 기담들을 보여주던 이 책은 결말부에 이르러 다시 가족주의로 돌아온다. 이는 예를 들어 극 내내 잔인한 복수극의 전말을 보여주던 영화가 결말부에 이르러 "사실 복수는 나쁜거야. 그러니까 복수 같은 것은 생각도 하지말고 용서를 하렴."이라고 말하는 격이랄까. 상처에서 고름을 짜내고, 그 빈공간을 보게 해주었으면, 이제 약을 발라아먄 한다. 그 공간에 그 고름을 소독해 다시 집어넣으면 다시 곧 곪을 뿐이다. 예를 들어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베트남 공항에서의 경험을 예로 들며 새롭게 만들어지는 가족들을 이야기하며 가족에 대한 사랑이 그들에게서 피어나기를 기대한다.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새롭게 가족을 이루기 위해서는 물론 그들 자신의 사랑으로 만들어지는 가족주의적인 각성의 힘이 어느 정도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동시에 필요한 것은 그들을 가족으로 만들어(붙들어) 줄 시스템이다. 즉 유교 이데올로기를 걷어냈으면 무엇인가 다른 시스템이 필요한 것 아닌가. (그러나 저자는 여기에서 입을 다문다. 그러므로 이 책은 "그 후로도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며 얼버무리는 책 속 이야기들과 비슷해진다.) 뭐 꼭 저자에게 묻는 질문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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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정치/사회 > 사회학
지은이 바버라 에런라이크 (부키,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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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라 에런라이크는 취재하여야 하는 대상들과 적당한 안전 거리를 둔 채, 사실은 아니지만 그럴듯해보이는 사실들과 사실이지만 적당한 왜곡을 뒤섞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타입은 아니다. 그녀는 이른바 일을 죽어라고 하지만 여전히 빈곤의 늪에 빠져 있는 '워킹 푸어' 계층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직접 워킹 푸어가 되어 그 한가운데에 뛰어들기로 한다. 즉 현재까지의 자신의 삶을 버리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낯선 도시로 가서 웨이트리스, 청소부, 판매원 등으로 일하며 최대한 버텨보기로 한 것이다. 결과는 예상했던 것처럼 신통치 않다. 임금은 거의 바닥이었고, 근무환경은 열악했으며, 생활환경은 상당한 불편을 감수해야만 했고, 결국에 길게는 서너달, 짧게는 몇 주를 버티지 못하고 다시 새로운 도시로 떠나야만 했다. 그러나 물론 이 책 <노동의 배신>에서 저자의 성공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아니 어떠한 의미에서는 중요할 수도 있다. 저자는 여러모로 좋은 조건에 속했으니까. 그녀가 버티지 못했다는 사실은 다른 여러가지를 시사한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들은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우리는 이들 '워킹 푸어'의 생활에서 어떠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는가.

이러한 저자의 체험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이러한 일을 열심히 하지만 생활의 영위가 어려운 저임금 노동자의 생활에서 문제거리, 일종의 위협이 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그 위협은 실제적인 위협과 정신적인 위협의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다시 이 실제적인 위협은 다시 두 가지의 문제, 주거의 문제와 예기치 못하는 사태의 문제로 살펴볼 수 있다. 저자가 이런 저임금 노동자의 생활을 하기 위해 새로운 도시에 가게 되면 늘 하게 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주거공간을 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직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문제라고 볼 수 있는데, 구할 수 있는 직업의 수준에 따라 구할 수 있는 주거의 형태가 달라지는 가장 큰 이유 외에도, 주거공간과 직업공간이 얼마나 떨어져있는가, 주거의 공간이 얼마나 불편한가에 따라 고려해야 하는 문제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즉 저임금 노동자에 있어서 주거의 공간을 어떻게 확보하는가는 매우 중요하고 긴급한 문제이며, 늘 위협이 되기도 한다. 다른 나머지 실제적인 위협은 예기치 못하는 사태에 대비하는 안전장치가 없다는 문제이다. 실제로 저임금 노동자의 생활은 소득의 거의 전부분을 주거비와 식비 등으로 소비해야만 이어질 수 있는데, 이것에는 예를 들어 의료의 문제나 이혼, 갑작스런 해고, 사고, 범죄 등으로 일어나는 급작스러운 부수적인 비용이 전혀 고려될 수가 없다. 더구나 이러한 것은 대부분 노동자의 수입보다 훨씬 큰 비용부담을 초래하는 바, 저임금 노동자들은 이러한 돌발사태에 거의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 못지 않게 문제가 되는 것은 정신적인 위협과 관련된 부분일 것이다. 저임금 노동자들이 구직을 하는 순간에서부터, 일을 하는 모든 부분에 걸쳐서 회사나 관리자들에 의해 일어나는 심리적 굴욕감, 모욕감은 일상화의 단계에 이르며, 이것은 단순히 특정 관리인의 특성적인 문제가 아니라, 보다 큰 시스템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저자가 볼 때 구직 시에 이루어지는 심리검사나 약물검사 등은 실제로 일할 만한 사람을 골라낸다는 실제적인 이유에서 이루어진다기 보다는,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스스로 자신의 낮은 위치를 파악하게 하고, 심리적으로 회사에 복종하게 하려는 의도가 보다 큰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런 심리적인 모욕감이나 굴욕감은 직업활동 시에만 사람을 짓누르는 것은 아니다. 사회 전반적으로 걸쳐서 이런 저임금 노동자들을 '일을 하기 싫어하는 게으른 사람들',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들'로 보는 풍조가 만연되어 있고, 여러 다양한 시스템으로 구별해내고 있으며, 심지어는 이들의 복지를 담당하는 기관의 종사자들마저도 비슷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 즉 가난은 거의 순전히 이들의 잘못, 즉 일종의 범죄와 같이 다루어지고 있다.

물론 이 바바라 에런라이크의 이야기들이 가지는 몇 가지의 함정이 있다. 즉 우리가 이것이 바로 저임금 노동자들이 가지는 진정한 실상이라고 완전히 믿어서는 안되는 몇 가지 함정 말이다. 예를 들어 그것은 세 가지 정도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먼저 첫 번째는 저자 자신이 밝혔듯, 저자는 중년의 여성이라는 취약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간 꾸준한 건강관리로 일단 신체가 건강한 편에 속했으며, 가사노동이나 가족에 대한 부양에 따로 에너지를 쏟을 필요도 없고, 다른 여러 귀찮은 상황들을 크게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에 속했다는 점이다. 일례로 주거의 문제에서만 봐도, 저자는 다른 많은 저임금 노동자와 달리 혼자서 지내는 비교적 여유로운 주거공간에 머무를 수 있었다(물론 범죄의 위협이라는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두 번째는 저자가 마지막 후기에서도 밝혔듯, 이 체험은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의 미국, 그러니까 닷컴 버블의 마지막에 들어서 있던 미국의 경제호황기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즉 저자의 경험에서도 비추어 볼 때 당시는 여러 저임금 일터에서 일할 사람을 많이 모집하던 시기였으며, 저임금일망정 노동의 유연성은 분명히 지금보다는 더 있던 시기였다. 세 번째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문제일지도 모르겠는데, 저자의 심리상태는 분명히 실제의 저임금 노동자와는 다르리라는 점이다. 이것은 저자가 이 체험을 대강 했다는 의미도 아니고, 보다 더 최선을 다했어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글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저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다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저자에게는 그 심리적 무력감은 사실 거의 없다. 앞이 보이지 않는 지긋지긋한 쳇바퀴말이다. 즉 저자에게는 이것이 언젠가 끝이라는 믿음, 그 믿음을 가지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한다고 해도, 이미 그것을 의식하는 데에서 만들어지는 믿음이 있다. 그러나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이 믿음의 강도는 아마도 다를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내가 이 심리적 무력감을 완전히 이해한다고 하는 말도 아니다.) 다르게 말해서, 이 책에는 저자의 세 도시에서 세 번의 다른 경험이 나와있는데, 사실 진정한 문제는 책에 집필되지 않은 그 이후일 것이라는 점이다. 즉 이 마지막 한계에 봉착했을 때 저자는 다른 도시로 옮기거나, 혹은 그만두고 자신의 삶으로 돌아오면 되지만, 다른 저임금 노동자들은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이러한 함정들은 이 이야기들에 우리가 무엇인가를 더 덧붙여야만 한다는 사실을 일깨우며, 그 사실은 예를 들어 왜 이런 상당히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노동자들은 뭔가 행동을 보이거나, 연대하지 않는가, 혹은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운가, 라는 질문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이것에는 저자가 여러 분석을 하고 있지만, 사실 한 가지 힌트가 될만한 이야기들이 있다. 앞의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각각의 실험 장소에서 떠날 때 선택한 동료 몇 명에게 자신의 정체를 '커밍아웃' 했을 때 그들의 반응이 깜짝 놀랄만큼 실망스러웠다고 이야기한다. 그 중 제일 재미있었던 반응은 "그렇다면 다음 주 저녁 근무에 나오지 않을 거라는 말이에요?"였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러한 이야기가 뭔가 시사해주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즉 그들의 관심사는 어떤 노동에 대한 문제점의 파악 혹은 그 문제를 바탕으로 한 대안의 모색 같은 것이 아니라 그녀가 나오지 않음으로서 다음 주에 새로운 동료를 만나거나, 본인의 일이 많아질 것이라는 사실인 것이다. 이것은 물론 저임금 노동자들이 시야가 좁거나, 자신만을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 환경에서 '서바이벌'하는 것이며, 현재의 어떤 시스템이 그들에게 그 이상을 생각하지 못하도록 몰아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저자의 '사람들을 빈곤하게 만들고 계속 그렇게 만드는 짓을 중단'해야 한다는 것, '정부에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이나 길에 나앉은 극빈자들을 제도적으로 괴롭히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는 것, '그들이 원한다면 더 나은 임금과 더 나은 노동 환경을 얻기 위해 조직을 결성한 권리를 주자'는 것 등에 동의하면서도, 그것은 미국에서나 우리환경에서나 여전히 멀고도 험한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그것은 분명히 쉬운 싸움은 아닐 것이다.

........................

한 마디 더 덧붙인다면, 이 책 <노동의 배신>은 쉬운 이야기 접근 방식과 그녀의 시니컬한 유머들로 술술 읽히는 책이긴 하지만, 중간중간 책을 덮고, 이 책이라는 것의 작동방식에 대해 생각해보게 했다. 물론 이 책의 타겟은 저임금 노동자들이라기보다는 명백히 중산층 이상의 고등교육을 받은 자들에 가깝다(물론 우려를 담아 말해두건대, 분명 이것에는 상당수 내 편견이 들어가 있으며, 동시에 나는 이 두 그룹을 구분지으려는 의도로 이런 표현을 쓰지는 않았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자신의 책을 많은 이 책에서 묘사되고 있는 것과 같은 워킹 푸어들이 읽어줘서 기쁘다고 말했지만, 저자가 묘사한 생활대로라면 이들의 생활에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상당히 모험으로 느껴진다. (물론 이 말에도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그리고 한편으로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그들에게는 이 책이 흥미로울까. 매일매일 최저임금을 받으며, 관리자들의 감시와 모욕, 전 사회적인 굴욕을 견뎌내며(애써 의식하지 않으며) 하루하루를 이어나가는 것을 묘사한 이 이야기가 흥미로울까. 혹은 분노하게 될까, 잘 모르겠다. 반면 나는 책이 흥미롭고 저자의 문체도 매력적이라고 느낀다. 그러나 저자의 이 시니컬한 유머들 - 그의 상당수는 자신의 중산층 이상 계급의 허위를 자각하는 데에서 나온다 - 을 재미있다고 생각하고 이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고 때로는 분노를 느낀다는 이 사실이 나의 어떤 계급과 연관되는 것인지, 혹은 고등교육 이상이라는 학력과 연관되는 것인지, 역시나 확신하기 어렵다.

(누군가가 노동을 할 수 밖에 없는 이 시간들에) 워킹 푸어의 체험을 담은 이 책을 읽는다, 그리고 재미있다고 말한다, 혹은 읽을 만한 책이라고 블로그에 끄적거린다,는 이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다. (아니, 아마도 이 덧붙인 이 모든 이야기가 나의 허위를 드러내는 것 같다. 그것은 적어도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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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들은 진화중

The Book | 2012. 8. 26. 17:26 | Posted by 맥거핀.
뱀파이어끝나지않은이야기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 예술일반
지은이 요아힘 나겔 (예경,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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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몇 가지가 궁금하기는 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질문들. 뱀파이어라는 것은 왜 탄생되었는가(왜 발명되었는가), 왜 특히 최근에 들어 뱀파이어들은 각광받고 있는가, 뱀파이어가 마늘, 햇빛 등에 치명적인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뱀파이어는 왜 하필이면 박쥐로 변신하는가, 뱀파이어는 왜 늙지 않는가(도리어 젊어지는가), 뱀파이어는 피를 그렇게나 마셔대는데, 왜 그렇게 늘상 창백한가. 즉 내 질문은 '뱀파이어의 양상'에 관계된 것이라기 보다는 그 '기원'이나 '이유'와 관계된 것인데, 요하임 나겔의 이 책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는 그리 마땅한 해답을 주고 있지는 못하다. 이 책은 뱀파이어의 기원이나 존재가치에 대해 고찰하는 책은 아니고, 그것을 다른 여러가지 것들과 연계하여 설명하는 책도 아니다. 즉 이 책은 문학, 미술, 음악, 오페라, 뮤지컬, 영화 등에서 나타난 뱀파이어의 여러 다양한 존재양상들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일종의 '뱀파이어 백과사전'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은 아니며, 수많은 예술작품들 중에서 뱀파이어의 '정수'만을 다루고 있는 것들을 일별하여 잘 정리하고 있기 때문에 (특히 뱀파이어 쪽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소장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위에서도 이야기하였듯이 내 관심은 그런 존재의 양상이라기보다는, 존재의 이유나 기원에 관계된 것이므로 이 책에 나온 내용을 바탕으로 몇 가지 이유에 대해서 추측해보기로 한다. 책에 나온 이야기들에 따르면 뱀파이어의 기원은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여러 여자 악령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낙원에서 추방당한 신생아를 잡아먹는 여자악령인 릴리트나 소년들의 피를 갈망하는 라미아, 복수의 여신들 에리니에스, 밤중에 나타나 몰래 동침하는 수쿠부스 등이 그러한 것들인데, 이는 죽은 자들이 되살아난다는 중세의 미신들과 결부하여 점점 뱀파이어라는 존재로 발전하게 된다. 물론 흥미로운 것은 이 기원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드라큘라 백작과 같은 남성 흡혈귀가 아니라, 여성형 악령들이라는 것인데 이는 아무래도 반 기독교적인 것으로서 남성 중심의 사회에 대한 위협, 남성 중심의 세계관에 대한 이면으로서 설계된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이러한 기독교적 믿음이 제시하는 남성 중심적 세계의 안정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여성들이 남성보다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뱀에게 유혹당한 이브)을 끊임없이 인식시킬 필요가 있었고, 그들에게 구원이란 남성들에게보다 엄청나게 멀리 있는 것, 남성들에게 복종하여야만 구원에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을 확고히 할 필요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 새로운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이러한 여성형 악령들의 출현이 에로스나 타나토스와 결합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고대로부터 이러한 악령들은 괴상하고 혐오스럽게 그려지기도 했지만, 동시에 때로는 매우 아름답고 매혹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고, 이는 또한 한편으로 남성들의 이중적인 심리와도 연관되기도 한다. 즉 위험하다고 여겨질수록 그 매혹의 강도가 더해진다는 묘한 역설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늘 성립하게 마련이고(모든 팜므파탈의 그 위험성의 강도와 매력의 강도는 정비례한다), 따라서 거의 모든 (여성형) 악령들은 극도로 위험해서 매혹당하지 않아야 하지만, 동시에 기꺼이 매혹당하고 싶은 존재로서 그려진다. 즉 이것에는 성적인 것에 대한 매력(에로스)과 죽음에 대한 유혹(타나토스)이 비슷한 비율로 결합되어 있는데, 이는 물론 남성의 경우에만 성립되는 역설은 아니다. 이는 현대에 들어와 새로운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가지는 위험은 최대한 제거되고, 그것의 매력만이 최대한 강조되는 형태로 볼 수 있다. 즉 (죽음이 그다지 큰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던 예전보다) 종교가 가지는 구원의 힘이 상당히 약화되고, 현세의 삶이 중시되는 현재에 이르면 죽음의 근처에 머물러있는 뱀파이어로서의 위치가 아니라, 도리어 영원한 젊음의 상징으로서 뱀파이어의 능력들이 중심에 위치하게 되고, 뱀파이어들은 거의 슈퍼히어로와 비슷한 위치를 점한다. 즉 중세에는 혐오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던 것들, 예를 들어 늙지 않음, 변신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 날 수도 있음 등에서 그 죽음의 그림자가 떨어져 나가면서 현재에 들어서는 도리어 이것이 부러운 슈퍼히어로적인 능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피부마저도 창백하고 으스스한 피부가 아니라, 하얗고 깨끗한 피부로 받아들여진다.) 그것이 한편으로는 최근에 들어 뱀파이어에 대한 어떤 각광들의 이유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마늘과 박쥐에 대해서는 책에서도 그다지 자세하게 다루고 있지는 않다. 십자가나 성수, 햇빛에 대한 위험은 반 기독교적인 것으로서 어느 정도 이해되는 반면, 마늘이나 박쥐는 조금 이해되지 않는 면도 있다. 단편적인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마늘은 그 생경한 맛과 향 때문에, 박쥐는 동굴에서 산다는 특징과 검은 색, 날카로운 이빨 등의 형상이 뱀파이어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했을 것이다.)

뱀파이어에 대한 부분보다도 도리어 이 책을 읽고 새삼 생각하게 된 것은 모든 음악과 미술, 영화, 문학 등의 예술작품들은 당대의 습속과 지식, 사상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별로 새로울 것 없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그 유명한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는 잉글랜드와 트란실바니아를 오가는 육로와 수로에 대한 상세한 묘사들이 덧붙여져 있는데, 이는 1897년이라는 당대의 지리학적 관심과 문명에 대한 자신감이 배어 있고, 또 이 소설은 흡혈귀라는 비과학적인 사실이 이야기의 원천이면서도 이야기의 내용에는 당대의 정신병리학과 범죄학의 최신사실들이 큰 비중으로 등장하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현재와 가까운 시기에 들어서도 마찬가지인데, 예를 들어 책에 나온 1994년 닐 조던 감독의 영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를 보면 이야기 자체는 200년을 아우르는 이야기이지만, 여기에는 1980년 말에서 1990년대 초에 이르는 미국의 경제호황의 쾌락주의적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다(아마도 이의 상징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뱀파이어 레스타(톰 크루즈)가 모는 빨간색 무스탕 컨버터블일 것이다). 그런만큼 이 책 <뱀파이어, 아직 끝나지 않는 이야기>는 뱀파이어를 다룬 예술들이 당대의 현실을 어떻게 반영하며 변화해 왔는가에 대한 흥미로운 고찰의 기회를 선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덧 1.
그래서 나도 당대의 현실을 어느 정도 반영한 간단한 뱀파이어 이야기의 줄거리를 써본다. 장르는 <안녕 프란체스카>의 뒤를 이은 풍자시트콤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짧은 리뷰라 뭐 지면이 많이 남기도 하고. (...)

뱀파이어들이 공공연하게 출몰하는 근미래의 우리나라. 뱀파이어들의 자잘한 범죄들(이 시기의 뱀파이어들이 저지르는 것은 절도 등의 범죄들이 대부분이다. 왜냐하면 뱀파이어들은 더 이상 인간의 피를 빨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피는 혈색을 좋게 만드는 피 성형, 각종 환경호르몬의 영향이 있는 음식들을 주식으로 먹은 탓으로 변해버려, 뱀파이어들이 마시게 되면 죽게 되기 때문이다. 뱀파이어들은 특수처리된 정제된 피를 주기적으로 먹어야만 하는데 그것은 매우 비싸다)이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자 정부는 '뱀파이어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뱀파이어 진압 작전에 나선다. 그러나 무자격 신부들을 용역으로 투입하고, 초강력 마늘탄 등의 사용으로 진압 과정에서 뱀파이어들이 죽음에 이르는 등의 문제가 거듭되자 여론은 급속히 나빠지고, 마침 이 때 한 진압현장을 다루는 뉴스에서 우연히 아름다운 어린 소녀 뱀파이어의 모습이 찍히는데, 인터넷에서는 이 소녀는 스타가 되고, 급기야 소녀의 가족들은 TV 토크쇼에 출연하게 된다.  

소녀의 가족은 TV에 출연하여 그간 어렵게 살아왔던 여러 이야기를 밝히는데, 쉬운 농장일이라고 찾아갔더니 알고보니 마늘농장이었던 사연, 나무막대기 두 개만 붙이면 되는 단순노동이라고 해서 일하러 갔더니 십자가 제조 공장이었던 사연, 너희들은 원래 밤에만 일하는 종족이니 야간알바비를 주간알바비로 책정하여 지급하겠다는 악덕 편의점주의 이야기 등이 시청자의 심금을 울린다. 또 한편으로 이들 가족이 시킨 피자에 몰래 마늘 소스를 뿌리고, "뱀파이어가 마늘을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궁금했다"며 변명한 피자가게 알바녀가 '뱀파이어 마늘녀'로 불리며 거센 비난을 받기도 한다. 여론이 뱀파이어에 우호적인 방향으로 흐르자 정부는 곧 태도를 바꿔서 이것도 다문화 정책의 일환이라며 뱀파이어들에 대한 진압을 멈추고 뱀파이어를 법의 테두리 안에 살게 하겠다고 공표한다.

그러나 관심도 한 때 뿐이고, 이들 뱀파이어 가족을 비롯한 뱀파이어들은 곧 법의 사각지대에 내몰리게 되는데, 정부는 '뱀파이어 자격 시험'을 치러 합격을 한 뱀파이어들에게만 정제된 피를 지급하겠다는 제안을 하고, 뱀파이어들은 멸종 위기에 몰린 자신들을 '뱀파이어 특별 보호법'으로 희귀종으로 지정하여 보호해 달라고 하지만, 너희들이 이 사회에 기여한 게 뭐냐며 묵살당한다. 뱀파이어들은 다시 길거리에 나와 각종 알바를 하지만 돈은 모이지 않고, 급기야는 정제된 피가 가득있다는 트럭을 습격하지만, 그 트럭에는 인기가수 싸이코가 '뱀파이어 스타일'이라는 곡을 가지고 '피 흠뻑쇼'라는 공연을 할 때 쓸 가짜 피만 가득 담겨 있었던 일 등의 각종 사건을 겪는다. 결국 뱀파이어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인간과의 결전을 준비하고, 대통령 및 모든 정부 각료들, 국회의원들을 모두 물어 그들을 모두 뱀파이어로 만들 계획을 세운다. 즉 뱀파이어 공화국을 만들겠다는 최후의 계획.

치밀한 계획 끝에 청와대와 국회에 잠입한 뱀파이어들은 천신만고 끝에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을 모두 그들의 손아귀에 넣고 그들은 승리의 환호성을 울린다. 시트콤의 마지막 장면은 드디어 대통령의 목에 이빨을 넣고 그들의 피를 빨아내려는(물론 삼키지 않아야 한다) 뱀파이어 대장과 흥분과 기대감에 차서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뱀파이어들. 그러나 이게 무슨 일인가? 아무리 빨아도 피가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닌가. 놀란 뱀파이어 대장은 급한 마음에 다른 정부각료들이나 국회의원들을 닥치는 대로 물어뜯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에도 피가 나오지 않는다. "아...나랏님들이 피도 눈물도 없다는 옛말이 거짓이 아니었구나..."를 내뱉으며 긴 탄식을 내뱉는 뱀파이어 대장과 망연자실한 주위의 뱀파이어들을 비추며 시즌 1 마무리.


덧 2.
개인적으로는 이 음악을 들으면서 이 리뷰를 읽어주셨으면 좋겠다. 책에는 소개되지 않았지만, 괜찮은 블랙 메탈, 데쓰 메탈 그룹인 'Cradle of Filth'의 곡 중에서 하나. 책에 어울리도록 그들의 1996년도 앨범 <Vempire Or Dark Faerytales in Phallustein>에서 뽑아봤다.

Cradle of Filth - Queen of Winter, Throned (with lyr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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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이력서

The Book | 2012. 7. 24. 23:05 | Posted by 맥거핀.
어쩌다사회학자가되어피터버거의지적모험담
카테고리 정치/사회 > 사회학
지은이 피터 버거 (책세상,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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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물론 뭔가를 공부하고 싶어한다고 말하는 대부분의 고등학생이 그렇듯 사회학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당연하게도 지금도 잘 모른다.) 처음에 가고 싶었던 과는 신문방송학과였는데, 그건 왠지 더 자유분방한 학생들이 가는 과라고 생각했고, 가장 무엇보다도 점수가 모잘랐다. 그래서 사회학이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문학 쪽은 원래 잘하는 편이 못되었고, 사학과 같은 쪽은 재미있어 보이나 취직이 잘 안된다 그러고, 심리학 쪽은 취향이 아니고, 경제학이나 경영학 쪽은 평소에 전혀 재미를 느끼지 못했고, 뭐 사회학이 괜찮겠네,라고 생각했다. 뭐 잘 모르지만, 사회에 대해서 일단 전반적으로 어느정도 알게되지 않겠어, 나중에 신문방송학 쪽과도 연계해서 공부할 여지도 있을테고. 그래서 점수가 커트라인에 대롱대롱 걸렸지만, 호기있게 원서접수 첫째날 '사회학과'라고 쓰여진 원서를 들고 갔다. 그러나 이미 첫째날 사회학과는 경쟁률 1이 넘어 있었고, 나는 그만 자신감을 잃고는 체육관 바닥에 주저앉아 '사회학과'를 벅벅 지우고는 다른 과를 적어넣었다. 아직 1이 넘지 않은 조금은 더 만만해 보이는 과를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판이었다. 마지막날 최종 확인한 경쟁률은 사회학과는 그 숫자에서 크게 변동이 없었고, 내가 지원한 과는 6대1이 넘어 있었다. 모두들 나처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이후 내 인생에서 사회학이 거론될 기회는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노 사회학자의 유머스러운 지적 모험의 여정이라니. 사회학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될 뿐만이 아니라, 뭐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유머러스한 글쓰기에 대해서 배우게 되겠지.

그러나 이것도 오판이었다. 일단 이 책에 나온 것만 보자면 사회학이 어떤 학문인지 알 수가 없다. 책의 저자 피터 버거가 책 중간중간에 늘어놓는 사회학에 대한 단편적인 부분들이 있다. "사회학자는 어떤 종교적인 현상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판단할 수 없지만, 그 현상의 실증적인 양상은 탐구할 수 있다.(p.91)""사회학의 분석적인 부분은 당연히 '가치 중립'적이어야 하지만, 그 실제 적용은 좀 더 인간적인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해야 도덕적으로 정당하다." 이런 부분만 놓고 보면 사회학의 임무는 어떤 사회현상이 좋다 나쁘다의 가치판단을 가지지 않고, 그 현상만을 탐구하되, 다만 그에 대한 적용, 즉 그 사회현상을 이야기하는데는 인간주의적 관점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그러나 사실 이 '인간주의'라는 말이 가지는 허구성을 우리는 어느정도 눈치채고 있다. '인간적인 사회'라는 것은 대체로 어느 특정의 관점을 정당화시키는 수사적인 의미로 주로 사용된다는 것을 우리는 어느 정도 알고 있지 않은가. (예를 들어 모든 대선 후보들이 내미는 '인간 중심'이라는 슬로건 말이다.) 책에 나오는 예를 하나 들어보면 그는 그의 책 <현실의 사회적 구성>에 나오는 부분들과 구성주의의 영향에 대해 밝히며 자신은 구성주의자가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그 때의 시대정신이나 분위기, 실제로 일어난 경향을 볼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처음 집필의도를 봐줄 것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그런 사회적 사실들은 우리의 바람과 무관하게 발견될 수 있는 확고한 현실성을 가진다.(p.126)" 즉, 사회학적으로 봤을 때는 중요한 것은 그의 본래의도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영향을 주고받은 것처럼 보이는 그 사실 자체일 것이다.

물론 그가 사회학자로서 그런 의도(입장)와 사실의 문제를 구별하지 못했을 리는 없다. 그도 당연히 어떤 것에 대해 입장을 가지고(그것이 설혹 '인간적'이라는 모호한 입장이라도), 모든 사실에 대해 발언할 수 있다. 그는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중 시민권'이라는 개념이 유용하다. 사회과학자는 두 개의 모자를 쓴다. 그는 특정 분석 규준을 충실히 지켜야 하는 학문 공동체의 구성원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도덕적인 고려를 해야만 하는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이기도 하다. 그 두 모자는 상당히 다르다. 특정 진술을 할 때는 어떤 모자를 쓰고 했는지 분명하게 밝혀서 정직하게 알려줘야 한다. (p.281)"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맞는 말은 본인은 잘 지키지 않는 것 같다. 그는 어떤 모자를 쓰고 했는지 잘 알려주지도 않을 뿐더러, 때로는 일부러 모자를 바꿔서 쓰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그는 '성장의 신화(자본주의)'와 '혁명의 신화(사회주의)'를 모두 거부한다고 주장하였다가, 동아시아를 보고 나서는 그 생각을 바꿔 '성장의 신화'는 지지하되 '혁명의 신화'는 거부하게 되었다고 밝힌다. "달리 말해 성장의 신화는 대체로 경험적으로 타당한 약속을 제시한다. 반대로 사회주의 혁명은 약속을 이행하는 법이 없다.(p.176)" 반박할 수도 있는 주장이나 묻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니다. (예를 들어 두 가지 질문 정도는 가능할 것 같다. 이것이 동아시아 사회를 정말 면밀히 관찰한 후에 나온 지적인지, 또 하나 성장의 신화가 경험적으로 타당한 약속을 제시한다고 했는데, 이 '경험적으로'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만 그의 이런 주장이 과연 사회학자로서 얘기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지지하는 개인적 신념에 따른 정치적인 주장인 것일까,라는 것이 궁금할 뿐이다. 그는 이것을 사회학적인 연구로 인해 도달한 결론인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그가 가진 그간의 개인적 신념을 보면 그 개인적 신념과 상당히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즉 그는 과연 어떤 현상에 대한 탐구로서 이런 결론에 도달한 것일까? 설혹 그렇다고 해도, 책에 나온 논거들로는 이는 너무 재빠른 단정이 아닌가. (그가 책에서 사회학 입문 과정에서 암기한다고 말한 유명한 '토머스의 금언'이 떠오른다. '만일 우리가 어떤 상황이 실재한다고 규정하면, 그 때문에 그 상황은 실재하게 된다.')

잘 모르겠다.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이는 어떤 오해인지도 모르겠다. 그 오해를 풀기 위해 그의 생각을 자세히 들어보고 싶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을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는다. 책의 대부분은 그가 지은 저술을 짧게 요약하고, 그 연구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과 그들과 자신의 관계와 그들의 간단한 약력을 늘어놓는 것으로 채워지고, 뭔가 생각이 좀 나온다 싶으면, 그가 재미있다고 주장하는 유머들 혹은 일화들로 모호하게 마무리된다. (그러나 이 유머들은 참 재미가 없다. 그는 심지어 유머에 관련한 책도 저술했으니 그 이유를 잘 알 것이다. 그에 따른다면, 우리가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의 나이든 사회학자가 내뱉는 유머를 재미있어한다면 그야말로 이상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이 책은 피터 버거의 책으로 쓰는 긴 이력서 같다. 책을 통해서 그가 저술한 책의 목록들과 그가 여행한 나라들, 그의 동료 연구자들, 그리고 그의 대학 재직이력은 자세히 알게 되지만, 그것 뿐이다. 이력서는 말 그대로 저자의 이력을 말해줄 뿐, 그의 생각까지 말해 주지는 못한다. 즉 이 책을 통해서 그의 이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게 되지만, 사회학에 대해서는 알게 되는 것이 거의 없다. 물론 어떤 한 사람의 이력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은 흥미로울 수 있다. 이 책의 제목대로 그것이 어떤 '지적 모험'이라면 더구나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지적 모험'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는 모험을 할 마음 같은 것은 별로 없어 보인다. 모험이란 무릇, 여기저기 깨질 각오를 하고 이곳저곳에 부딪히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처음부터 그렇게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는 어디에 심하게 부딪힌 적도 없고, 그러므로 깨진 적도 없다. 물론 깨지지 않았다고 해서, 그 입장이 욕먹을 것은 아니며 중도 보수라는 그의 입장이 비판을 받을 이유는 없다. (보수 반동이라면 이야기가 조금은 다르겠지만.) 다만 자신의 반대입장에서 쏟아지는 비판에 대해 계속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며, 이것이 사회학에서의 올바른 태도라고, 사회학적 당의를 씌울 때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는 이 두 가지 관점, 그러니까 정치적인 관점과 사회학적인 관점을 시종일관 흩트려 놓기 때문이다. 그는 뉴욕과 보스턴과 미국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회학자로서 유럽과 중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과 그곳의 사태를 보고 있는 것이지, 그가 말한대로 객관적인 입장에 서 있는 때가 별로 많지 않아 보인다. (정말 아이러니한 점 중에 하나는 그가 사회학자이면서도 사회운동에 알레르기를 보인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금연 운동이나 페미니즘 혹은 대중집회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그가 애정을 보내는 자본주의라는 것도 어찌 보면 거대한 사회운동 중의 하나가 아닐까. 즉 그는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회운동과 아닌 사회운동을 구분하여 그것에 애정어린 분석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필요이상으로 비판이 길어진 듯 하다. (날씨와 LG야구 때문이다.) 피터 버거는 자신의 책에 달린 서평을 꼼꼼이 들여다보는 편인 것 같기는 하지만, 그가 어느 촌구석 인터넷서점에 달린 이 글까지 읽어볼 확률, 그리고 그것을 읽고 어떤 나이든 사회학자가 자신의 입장을 수정할 확률은 한없이 0에 수렴하므로 조금 더 생산적인 얘기로 글을 끝내도록 하자. 사회학을 지망하고자 했으나 잘 지워지지 않는 지우개로 체육관 바닥에서 지망하는 과를 바꿔야 했던 사람, 그래서 사회학에 대해 뭔가 알고자 했던 사람, 혹은 최소한 뭔가 유머러스한 글쓰기에 대해 배우고자 했던 사람에게는 비추. 대신 이런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미국에서 대학교수, 학자라는 지식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자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곳에 들어가고 싶은 사람들 혹은 들어가지 못하더라도 학자인 척하고 싶은 사람들. 이 책은 적어도 그런 사람들을 위한 일종의 사회학적 분석보고서는 된다. 다만, 하나 주의할 점은 이 책은 진짜 학자가 되는 법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진짜 학자가 될 수 있도록 생각하는 법 대신에 자신의 저술과 자신의 학문적 업적과 자신의 뛰어난 동료들과 자신의 훌륭한 박사과정 학생들을 독자들에게 최대한 거부감을 덜 느끼게 하며 나열하는 법 정도는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그 정도면 학자라고 하기에 충분하다(고 믿어지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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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키 아타루의 <아라비안 나이트>

The Book | 2012. 7. 22. 22:28 | Posted by 맥거핀.

잘라라기도하는그손을책과혁명에관한닷새밤의기록
카테고리 인문 > 인문학일반
지은이 사사키 아타루 (자음과모음,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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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키 아타루(와 그가 논거로 삼는 학자들)에 따르면, 역사 이래로 서구에는 여섯 번의 혁명이 있었다. 중세 해석자 혁명(교황 혁명), 대혁명(루터의 종교개혁), 영국혁명, 프랑스혁명, 미국혁명, 러시아혁명. (모 당의 대선후보가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사건은 애석하게도 언급되지 않는다.) 이 중에 사사키 아타루가 주목하여 보는 것은 초반의 두 혁명, 즉 중세 해석자 혁명과 대혁명인데, 이 두 혁명은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다른 혁명들과 달리 이 두 가지의 혁명은 읽기와 쓰기로서 이루어진 혁명이라는 점이다. 대혁명, 즉 흔히 말하는 루터의 종교개혁은 읽고 쓰고 번역하고 편찬하는 작업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그 일례로 이 책에서는 루터가 등장하기 전인 16세기 초까지 독일어 서적 간행 총수는 단 40종이었으나, 루터가 등장하자마자 1523년에는 498종에 이르렀고, 그 중 418종은 루터와 그의 적대자에 의해 간행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즉 루터의 종교개혁은 설교도 설교지만 또 한편으로는 읽기와 쓰기의 방법으로 행해진 것이었다. 중세 해석자 혁명은 어떤가. 이 혁명은 역사상으로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그리스도교 개혁 작업으로 일컬어지는 것으로, 이는 새로운 법문을 번역하고, 편찬하고, 제본하고, 주석을 달고, 수정하고, 색인을 만드는 방식으로 거의 100년 가까이 이어진 정보 혁명이자 읽기와 쓰기의 혁명이었다. 그래서 르장드르는 이를 "문법학자의 혁명"라고 말한다. 또 다른 하나의 공통점은 이 두 가지의 혁명 모두 새로운 법을 만드는 혁명이었다는 점이다. 대혁명은 종래의 교회법을 부정하고, 모든 법을 '십계명'에 명시적으로 준거하게 하고, '양심'을 강조하는 등의 새로운 법을 만드는 것이었으며, 중세 해석자 혁명은 그 자체가 교회법을 고쳐쓰는 혁명으로, 이 혁명으로 인해 근대국가의 원형이 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성립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물론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을 할 필요는 있다. 그러한 읽기와 쓰기의 혁명, 새로운 법을 만드는 것이 혁명이라고 불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새로운 법은 무엇 때문에 필요했던 것인가. 사사키 아타루에 따르면 이 새로운 법은 단지 교회 안의 내규만이 아니며, 형벌을 내리기 위한 법이 아니다. 이는 살기 위한 법이며, 조금 더 직접적으로는 번식을 위한 법이다. 국가의 본질은 그 국민들에게 '번식을 보증하는 것'이다. 이 말이 조금 불편하다면 이렇게 바꿔도 좋다. 국가의 본질은 그 국민들에게 편안하고 자유롭게 아이를 낳아서 기를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두 가지의 혁명 이전의 법들은 그것을 보증하지 못했다. 그 교회법들은 국가라는 이름으로, 교회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얽어매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즉 이것은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 즉 번식을 한다는 것은 인류사에 있어서는 인류라는 존재를 지속시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 책에서 내내 이야기하는 반(反)종말론의 개념이 출현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인류라는 존재가 절멸을 피하게 해준 것, 종말에서 벗어나도록 한 것은 번식을 가능하게 해 준, 두 사건 즉, 중세 해석자 혁명과 대혁명이었다. 그러니 그 두 사건을 혁명이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가 있을 것인가. 

종말론이라는 것은 언젠가 종말이 올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다. 사사키 아타루도 아마도 언젠가 있을 끝, 절멸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고생물학자들이 말하는대로 한 생물 종의 평균수명은 400만 년이고, 인류가 출현한지는 고작 20만 년정도이므로 380만년 정도 이후에 인류가 어떤 사건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종말론은 그 종말 자체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종말이 곧, 그러니까 내가 있을 때 일어날 것이라는 불안이고, 믿음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사키 아타루의 말대로 엄청나게 유치한 것이다. 그러나 이 유치한 사고는 지난 인류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같이 죽자는 식의 나치나 옴진리교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인류는 역사가 기록된 지난 이천 년 동안만 해도, 곧 종말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그야말로 밥먹듯이 해왔고, 그 예상은 매번 어김없이 빗나갔다. 그러므로 사사키 아타루는 이제 그만두자는 것이고, 종말이 오도록 기도하는 그 손을 잘라버리자는 것이다. 왜? 유치하니까. 20만 년 대 400만 년. 그것은 다르게 보면, 4살 짜리 아이가, 80살 먹은 노인에게 이제 곧 같이 죽을 때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에 불과하니까.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사사키 아타루의 이 책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사사키 아타루 식의 <아라비안 나이트>이다. 자신의 죽음을 지연하기 위해 매일 밤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세헤라자드처럼 사사키 아타루는 나쁜 종말론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즉 모두의 죽음을 지연시키기 위해, 세계의 종말을 지연시키기 위해 매일 밤 우리 독자들에게 말을 건다. 그 다섯 밤 동안, 첫째 날 밤에는 문학이라는 것의 가치에 대해, 둘째 날 밤에는 루터의 대혁명에 대해, 셋째 날 밤에는 그 역시 읽기와 쓰기의 혁명이었던, 무함마드와 하디자의 혁명(이슬람 혁명)에 대해, 넷째 날 밤에는 중세 해석자 혁명에 대해, 다섯 째 날 밤에는 고작 20만 년 살고도 종말이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인간의 우스움에 대해서 말이다. 그럼 이 다섯 째 밤이 지났으므로 우리에게 종말이 올 것인가. 물론 그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아라비안 나이트>의 결말을 알고 있으니까. 그 결말은 그 이후로도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이니까. 사사키 아타루 식으로 조금 더 진지하게 말해보면 그것은 '380만 년의 영원'이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읽고 쓰는 것 뿐이다. 매번 반복되는 문학의 종말이니, 문학의 위기니 하는 소리를 할 게 아니라(아닌게 아니라 어떤 문예지들은 매 1년마다 같은 특집을 반복하는 것 같다. "매번 반복되는 것이지만, 문학이 위기에 빠져.."로 시작되는 그 특집들 말이다), '미래의 문헌학'을 하는 것. 인간의 삶을 지속시켜 줄 힘을 내재하고 있는 문학에, 그것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0.1%도 안되어도 '읽는다'라는 기회를 부여하는 것 말이다. (물론 그것은 아무 것이나 '무조건 읽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베케트나 첼란이나 헨리 밀러나 조이스나 버지니아 울프, 혹은 니체나 푸코나 르장드르나 들뢰즈를 읽는 것이다.)

400만 명밖에 자신의 사인을 할 수 없었다는 무리한 상황에서 <죄와 벌> 같은 작품들을 차례로 쓴 것입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단적으로 90퍼센트 이상의 사람들이 읽을 수 없었습니다. 러시아어로 문학 같은 걸 해봤자 소용없었던 것이지요. 이런 파멸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쓸 수 있었을까요?
확실히 말하겠습니다. 바야흐로 문학은 위기를 맞고 있고, 근대문학은 죽었으며, 애초에 문학 같은 건 끝이라는 치사한 말을 한 번이라도 공언한 적이 있는 사람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라는 성스러운 이름을 두 번 다시 입에 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불쾌합니다. (p. 250)


상당히 딱딱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나름 재미있고, 흥미롭게 읽었다. 그것은 한편으로 저자의 독특한 문체나 이야기 방식에 어느정도 영향이 있을 것이다. 저자의 말투는 단호하고, 논리적이라기 보다는 선언적이다. 그러니까 한편으로 보자면 뭔가 어려운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쉽게 말하는 듯한 인상을 주지만, (저자 본인이 이야기하듯이) 가끔 논리의 비약이 일어나며 그 논리의 중간과정은 믿음과 반복과 구호와 아포리즘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알 수가 없다. 즉 이것은 나름 잘 쌓아올린 성이긴 한데, 그 중간이 구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성이기 때문에 때로는 신기루처럼 보인다. 중간의 어떤 부분에 이르러서는 우리는 논증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에 들어서야 한다. 이 성의 받침대와 그 꼭대기의 첨탑이 이어져있다는 믿음에 말이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대단한 것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대단함은 우리가 알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아니 아마도 끊임없이 '왜'를 묻는 어린아이처럼 다시 돌아 처음으로 갈 것이다. 예를 들어 모든 문학은 '종말론에 반한다'는 주장에, 어떤 문학은 종말을 이야기하지 않는가,라고 묻는다면 그에 대한 대답은 '그것은 문학이 아니다' 혹은 '그것은 사실 알고보면 종말을 반하기 위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도 이 책은 한 가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두기는 했다. 사사키 아타루에 따르면, 어차피 다른 사람이 쓴 것이란 읽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는 이유가 있다. 우리가 그것을 완벽히 이해하게 된다면 완전히 발광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쓴 것을 읽는 것은 미쳐버리는 것, 서서히 미쳐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발광하지 않으려 발광하며, 동시에 혁명은 그만큼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읽을 수밖에, 그리고 되지도 않는 리뷰를 쓸 수밖에. 이 책은 매일 밤 거의 같은 이야기로 시작한다. 여름 날씨, 가끔 쏟아지는 비와 어디선가 들려오는 매미소리 같은 것. 이 똑같은 이야기의 반복은 이유가 있다. 아마도 이 다섯 째 밤이 지난 후에도 여름날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므로. 최소한 380만 년의 여름이 말이다. 영겁의 여름은 지속되고, 우리는 읽고, 쓰고, 혁명한다.



덧.
읽다보니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이나 <세계공화국으로> 같은 책이 생각나는데, 기억이 가물거린다. 다시 읽어봐야겠다. 초반에 정보를 끌어모으는 사람들, 전문가나 비평가를 비판하는 대목은 특히 흥미로운데, 그럼 전문가도 비평가도 될 수 없다면 무엇이 되야하지,라고 말한다면 아마도 또 그렇게 말할테지. "당신은 뭔가를 하고 그것이 의미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행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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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마이클 샌델 (와이즈베리,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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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책들에서도 그랬지만, 마이클 샌델은 여러 가지 풍성한 사례들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펼쳐나간다. 그가 말하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여러가지다. 1장에서는 이른바 '새치기 할 수 있는 권리'다. 우선 탑승권, 진료 예약권, 무료로 배부되는 방청권들을 돈으로 구매하려는 행위 등에 대한 비판이 주로 이루어진다. 2장에서는 '인센티브'와 관련된 항목들이다. 불임시술을 장려하기 위한 현금보상, 상금으로서 어떤 좋은 행위를 하도록 유도하는 것, 벌금이 그 행위를 하도록 허가하는 일종의 요금으로 변질되는 것들이 이야기된다. 3장에서는 시장이 점차 도덕을 밀어내는 현상에 대해 말한다. 대리 사과 서비스와 결혼식 축사의 판매, 현금으로 선물을 하는 것, 핵폐기장 후보지 선정에 돈의 문제가 개입되는 것 등이다. 4장에서는 삶과 죽음과 관련된 문제가 전면에 나선다. 타인의 생명보험 증서를 거래하는 '말기환금'의 문제, 유명인사의 죽음을 놓고 벌이는 내기인 '데스풀', 시장에서 테러를 예측하고자하는 테러리즘 선물시장 등이 도마에 오른다. 마지막 5장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명명권'이다. 예를 들어 스포츠경기장에 차별적인 자리들이 생겨나는 것, 모든 것으로 가능한, 심지어는 신체 일부를 사용하여 이루어지는 광고들, 특정의 지명이나 명명을 시장에서 거래하는 것 등이 이야기된다.


좋은 얘기다. 이 이야기들을 놓고 어떤 비판을 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옳음이나 좋음의 문제, 아리스토텔레스나 롤스, 칸트 등이 이야기했던 공동체와 개인의 정의의 문제, 공화주의인가 공동체주의인가의 문제를 굳이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사실 이와 같은 것들은 오랫동안 '돈으로 거래될 수 없는 것들'의 범주에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새치기의 권리, 생명보험, 명명권 등은 시장과 시장주의의 공세가 어느정도 위세를 떨치게 된 이후에 시장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물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시장 이전의 세계, 그러니까 현재에는 가장 거래해서는 안된다고 여겨지는 인간의 목숨에 대한 권리가 공공연하게 거래되는 세계(예를 들어 노예제)가 존재하였다. 그러나 이는 여기서 말하는 시장지상주의와 관련된 문제보다는 인간의 기본권리와 연관된 문제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인권신장과 관련된 인류의 역사를 되짚을 필요는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물론 현재에도 노예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즉 이것들은 시장지상주의에서 새롭게 생겨난 거래항목들이다. 예전에 돈(재화)으로 거래되어서는 안된다고 여겨졌던 것들이 새롭게 거래의 대상으로 여겨졌을 때, 그것은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도덕적) 가치들과 충돌을 일으킨다. 따라서 마이클 샌델의 이 세심한 논의들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다만, 내 질문의 몇 가지는 이와는 약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다.

마이클 샌델이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지금 현재이다. 바로 지금 미국 혹은 세계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돈으로 거래되어서는 안되는) 가치들의 거래. 즉 그는 과거나 미래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즉 그는 시장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어 있는 시장지상주의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이 시장이 왜 중심에 서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이러한 타락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물론 그것은 이 책의 주제를 넘어설 수도 있고, 그것은 샌델 외의 다른 논의자들의 몫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만, 그런 전후 맥락이 없이 이루어지는 이 이야기들은 (본의 아니게) 특정의 한계들을 이 논의를 읽는 사람들에게 덧씌우고 있다. 즉 이 시장은 우리들에게 이미 주어진 상수이고, 그것의 근본적인 한계는 이 책의 관심영역이 아니다. 즉 시장에서 '거래해서는 안되는 어떤 것을 거래하려는 행위'가 문제일 뿐, 그 시장에는 혐의를 씌우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문제가 그 시장 자체라면? 시장의 근본적인 한계가 바로 그러한 거래행위를 권장하고, 부추기고 있으며 그러한 거래행위 자체를 막는 것이, 그 시장의 근본적인 구조를 뜯어고치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면 어떨까.

이를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아마도 샌델은 인간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이 책에서 대놓고 자주 나오는 단어들은 시장, 재화, 가치와 같은 단어들이지만, 은근히 출현하고 있는 단어들은 회복, 훼손, 변질과 같은 단어들이다. 시장의 회복, 공공선의 훼손, 가치의 변질. 즉 좋은 시장이 있고, 좋은 공공선이 있고, 좋은 가치가 있다. 그것을 훼손하고 변질시키는 것은 일부 정신나간 경제학자들이고, 정치인이며, 시장지상주의에 물든 사람들이다. 그것은 이러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거래하는 행위에 관련되어 비판을 할 때 주로 제시되는 두 가지의 중심축과도 연관된다. 그 하나는 공정성이고, 다른 하나는 부패이다. 즉 어떤 특정의 가치가 거래되어서는 안되는 이유는 모든 이에게 그것을 구매할(혹은 판매할) 공정한 기회를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것은 동시에 그 가치를 다른 것으로 변질시키기, 부패시키기 때문에 그렇다. 즉 우리가 이러한 특정가치들의 거래를 막았을 때, 우리는 공정한 우리로, 부패되지 않은 가치를 지닌 본래의 우리로 '돌아간다'. (아마도 이것이 샌델이 그래도 여전히 시장에 어느정도의 믿음을 보이는 이유의 하나일 것이다. 시장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그 시장을 훼손하고 변질시키는 누군가가 문제지. 우리는 도덕적이고 선한 인간으로 돌아가 공공선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에게는 도덕적인 인간은 없다. 오로지 경제적인 인간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긍정적인 사람은 못된다. 이렇게 시장지상주의의 늪에 깊게 빠져있는 미국과 FTA를 하며 신자유주의의 넘실대는 파고에 흥겹게 올라타고 있는 우리사회에 샌델의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 그리고 경제지 '한국경제신문'에서 '왜 도덕인가'라는 샌델의 책이 출판되고, 보수적인 신문들에서마저 샌델의 이야기들이 화두가 되며, MB가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공정사회'를 제창했다는 해프닝을 보며 가졌던 어떤 의심이 이렇게 꼬리를 드는 것을 보니 말이다. 그들에게는 마이클 샌델은 그래도 건드려서는 안되는 것은 잘 지켜주는 합리적인 사람이니까. 설혹 샌델의 주장이 실현된 세계가 되어도 그것은 그리 나쁘게 보이지는 않으니까. 시장은 여전히 굳건하고, 시장은 여전히 이 사회에 지배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건드려서는 안되는 성역을 다시한번 일깨울 것이므로 그다지 손해볼 가능성은 없다.) 실패해도, 하버드 교수의 주장을 수용했다는 이미지는 남는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그런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샌델은 2장에서 도덕적 가치들에 적용되는 인센티브의 폐해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막장인 나는, 그 폐해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오..이런 것에도 인센티브를 주네..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당연히 주어야할 다른 과업과 관련한 인센티브마저도 떼먹는 우리의 회사들을 너무 많이 본 탓이다. 그런 인센티브도 없는데 무슨 도덕적 가치에 따른 인센티브. 우리가 도덕적 가치에 대한 인센티브를 논하는 사이에, (과업에 따른) 정당한 인센티브를 주지 않는 것에 대한 비판은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버린다. 그리고 (그럴리야 당연히 없겠지만) 이때다 싶은 이 회사의 CEO들이 이 책을 읽고 "우리가 그래서 인센티브를 안주는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물론 이는 농담이다. 그러나 아무튼 우리는 주어야하는 인센티브마저도 당연한 듯이 없는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 무슨 도덕적인 행위에 주어지는 인센티브랴. 핵폐기장도 '유치'되고 당연히 주어야 하는 보상금도 떼먹는 사회에서, 무슨 '핵폐기장이라는 폭탄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도덕적인 선택에 반하는 평균 월수입을 훌쩍 넘는 보상금의 부도덕성'인가.

어쩌면 이 책의 비밀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What Money Can't Buy'라는 이 책의 제목에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정한다는 것은 역으로 다른 모든 것은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이야기도 되니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정하는 사회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을 정하는 사회, 어느 쪽이 더 나아보입니까. 막장인 나는 그런 것보다도, 그저 이번에 내한한 마이클 샌델의 강의의 방청권은 얼마에 거래되었을까, 그게 더 궁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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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그대여, 시를 써라

The Book | 2012. 6. 16. 02:23 | Posted by 맥거핀.



김수영을위하여우리인문학의자긍심
카테고리 인문 > 한국문학론
지은이 강신주 (천년의상상,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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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의 키워드가 맴돌고 있는 책이다. 시, 시인, 시대(정신), 인문(정신), 자유, 자기 힘으로 도는 팽이, 단독성, 행동, 불온함, 그리고 김수영. 처음 나열한 키워드들과 마지막 '김수영'이라는 키워드는 이 책에서 무게가 같지 않다. 아니 무게가 같지 않다기 보다는 모든 키워드는 결국 '김수영'으로 수렴된다. 그러니까 김수영은 이 시대에 시를 쓰는 사람이며, 그래서 시인이고, 엄혹한 찬바람을 맞으면서도 자기 힘으로 도는 팽이가 되고자 했으며, 일반성/특수성의 공식에 매몰되지 않고 단독성을 지키려고 했으며(그럼으로서 보편성이 되었고), 생각에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나아가려 했고, 그렇기 때문에 자유롭고 불온했으며, 그래서 자유와 불온함으로 표상되는 인문정신의 구현자가 되었다. 즉 강신주의 책 <김수영을 위하여>에 따르면, 이 모든 키워드들은 김수영이 마지막까지 지키려고 했던 가치들이자, 김수영의 다른 이름들이며, 인문정신 그 자체이기도 하다. 


처음에 이 책을 보고서는 뭔가 강렬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것은 표지의 바탕과 글씨, 그리고 내부의 속지, 그리고 책날개에 실려 있는 '김일성만세'라는 시가 모두 붉은색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굳이 붉은색일 이유가 있을까 생각했지만, 책을 보니 그럴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가독성'이라는 문제를 고려하지 않았다면 모든 글씨를 붉은색으로 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마지막 장의 제목이 '불온함은 긍지다'로 귀결되는 것처럼, 결국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김수영을 이야기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키워드, 그것은 '불온함'이기 때문이다. 불온함은 자유와 행동으로 완성된다. 자유 하나만 놓고서는 결국 불온함에 이르지못한다. 머리 속으로만 행하는 자유, 생각에 그치는 자유는 결코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그 자유로움은 권력과 우상에 반하는 자유로운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즉 누군가가 줄로 감아서, 혹은 채찍질로 도는 팽이가 아니라 각자 스스로의 힘으로 자유로운 궤적을 그리며 도는 팽이. 그것이 불온함이며 그것이 이 책에서 말하는 인문정신이다. 김수영의 경우에는 그것이 시를 쓰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김일성만세'와 같은 시를 쓰는 것. '김일성만세'/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인정하는 데 있는데/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중략)/나는 잠이 깰 수 밖에.

물론 불온함이 꼭 붉은색일 이유는 없다. 불온함과 붉은색. 발음이 언뜻 비슷하기는 하지만, 이것에는 어떤 태생적인 연관성은 물론 없다. 우리가 불온함에 언뜻 붉은색을 연상하는 것(그리고 그런 이유로 이 책의 표지가 붉은색이 된 것)은 우리가 한국인이기 때문이며, 같은 역사를 거쳐왔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이런 역사와 관련된 김수영의 두 번의 전환점이 나온다. 첫 번째는 한국전쟁과 그에 이어진 거제포로수용소의 경험이다. 김수영은 북한 의용군에 징집되어 끌려갔으나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곧 그는 다시 잡혔고, 묻어두었던 인민복과 총을 다시 찾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는 다시 남한 경찰에 체포되어 인민군 첩자로 낙인찍혀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보내졌고, 포로수용소에서 친공포로임도 반공포로임도 내세우지 않는, 회색인의 삶을 살아야만 했다. 두 번째는 1960년 4월 학생혁명이다. 그는 초기에 학생혁명을 지지하며 집회와 시위에 참가하고 여러 시들을 발표하였으나 곧 그 혁명이 어떤 식으로 마무리가 되는지를 목도하여야만 했다. 그것은 위에 이야기한 '김일성만세'라는 시에 여실히 나와있는데, 4월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장면 정부 역시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던 이승만 정부와 전혀 다를바가 없다는 점. 즉 방을 없애자고 혁명을 하였지만, 그저 단순히 방이 바뀐 것에 불과하다는 점, 자신(과 그리고 다른 모든 이들)은 친공이냐, 반공이냐의 이분법적 도식만이 있던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힌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불온함을 붉은색으로만 내세우는 이 책의 표지가 사실은 도리어 어떤 씁쓸함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도 우리는 불온함에 붉은색을 연상하여야만 하나.)

김수영이라는 인간에게 있었던 이 두 번의 전환점은 물론 그의 시 세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그의 시에도 두 번의 전환점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첫 번째 전환은 그가 휴전협정이 되던 1953년에 발표한, 그의 첫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했던 '달나라의 장난'이라는 시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팽이가 돈다/팽이가 돈다. 너도 나도, 그러니까 각자 스스로 도는 팽이, 공통된 무엇을 위하여가 아니라 스스로 도는 팽이. 북한이니 남한이니, 친공이니 반공이니, 정치나 이념이니 하는 것에 휘둘리지 않고 모두 각자 스스로가 혼자 힘으로 도는 팽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는 그래서 4월혁명이 스스로의 힘으로 돌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알게 된다. 시 '육법전서와 혁명'. 혁명을-/불쌍한 것은 이래저래 그대들뿐이다/그놈들이 배불리 먹고 있을 때도/고생한 것은 그대들이고/그놈들이 망하고 난 후에도 진짜 곯고 있는 것은/그대들인데/불쌍한 그대들은 천국이 온다고 바라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시를 통해 비참한 현실을 목도하는 비탄함을 이야기하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힘, 그러니까 불온한 자유의 목소리를 놓지 않았다. 불온한 자유를 허락하지 않으려는 외부의 정치적 억압과 내부의 노예적 습성에 대해서 말하며 행동할 것을 이야기하는 것. 이것이 그의 두 번째 전환이다. 시 '푸른 하늘을'. 어째서 자유에는/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혁명은/왜 고독한 것인가를/혁명은/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시 '하......그림자가 없다'. 우리들의 전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그것이 우리들의 싸움을 이다지도 어려운 것으로 만든다/우리들의 전선은 됭케르크도 노르망디도 연희고지도 아니다/우리들의 전선은 지도책 속에는 없다/그것은 우리들의 집안 안인 경우도 있고/우리들의 직장인 경우도 있고/우리들의 동리인 경우도 있지만....../보이지는 않는다/(중략)/하늘에 그림자가 없듯이 민주주의의 싸움에도 그림자가 없다/하......그림자가 없다.

..................

뭔가 좀 묘하게 불편하게 만드는 책이라 생각했다. 일단 이 책은 정확한 형체를 알 수가 없다. 김수영의 전기나 평전도 아니고, 시작(詩作)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철학에 대해 세밀하게 파고 들어가는 책도 아니다. 김수영의 시를 읽은 개인적인 느낌에 대한 글이라고 보기에도 약간은 이상한 점이 있고, 그렇다고 김수영 시에 대한 비평문도 아니다. 더구나 전체적으로 글의 온도는 시종일관 높다. 책의 앞과 뒤에 붉게 열을 가하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저자의 김수영에 대한 사랑 혹은 찬양의 온도는 시종일관 높아 종종 딴죽을 걸고도 싶어진다. (특히 가장 압권은 에필로그로 실은 저자 자신과 김수영에 대해 이야기할때다.) 이 책을 읽은 다른 많은 분들도 약간은 느꼈겠지만, 그렇다면 김수영만이 시인인가, 다른 시인들은 모두 가짜시만 써낸 허위의 시인들에 불과한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에 따르면 순수시도 참여시도 아닌 김수영의 정신을 가지고 써낸 시, 즉 자신의 시마저도 끊임없이 새롭게 넘어서려는 시(그것도 단지 형태만이 새로운 시여서는 안된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만의 제스처로 써낸 시만이 올바른 시니까. 순수시도 아닌, 참여시도 아닌 각자 자신만의 제스처로 각자 도는 각각의 시.

어쩌면, 바로 그것이 묘한 불편함의 원인이 아닐까. 즉 이 책에서 결국 원하는 것은 각자 자신의 중심을 가지고 도는 팽이가 가득한 사회다. 즉 각자의 중심을 가지고 도는 팽이가 각각 토해낸 시가 자유롭게 어우러져 있는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는 시인이라는 특이한 존재가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다. 아니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전혀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두가 시인이므로. 모두가 자신만의 자유로운 시를 써내는 사회이므로. 그러므로 이 책은 김수영에 대해서만, 혹은 그의 시에 대해서만, 혹은 시쓰기나 철학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저자가 원하는 것은 김수영에 대해서 자세히 알거나, 그의 시쓰기를 모방하게 되거나, 특정의 철학사조를 전적으로 추종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 모든 것에 대해 자신만의 제스처, 자유와 행동이 결합된 불온을 우리 각자 스스로가 얻는 것이므로 말이다. 그러니 어찌 불편하지 않겠는가. 불편할 때만이 우리는 움직이므로. 편할 때의 우리는 결코 불온해질 수 없으므로.

시끄러운 여름밤이다. 공교롭게도 오늘은 김수영의 기일이다. 불온한 그대여. 시를 써라. 지상의 소음이 번성하도록.

지상의 소음이 번성하는 날은
하늘의 천둥이 번쩍인다
여름밤은 깊을수록
이래서 좋아진다

- 시 '여름 밤'(1967.7.27)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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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용 곤충 스카우팅 리포트

The Book | 2011. 4. 18. 22:45 | Posted by 맥거핀.

당신은혼자가아니에요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 영미에세이
지은이 조슈아 아바바넬 (함께읽는책,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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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키에르케고르가 알면 썩 좋아하지 않을 제목을 가지고 있는 이 책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는 그 제목이 의미하는 바대로, 지금도 당신의 아주 가까이에서, 혹은 당신의 살 속에서 멋진 성찬을 즐기고 있을 가정용 곤충들을 설명하고 있다. 빈대, 이, 진드기, 파리, 개미, 바퀴벌레, 흡혈진드기 등등의 이 가정용 곤충들은 인간의 거의 모든 부분을 공격하고, 나무를 뜯어먹고, 애완동물의 피를 빨아 마시고, 수많은 2세들을 낳고, 서로서로를 잡아먹기도 하고, 이곳저곳 쉴새없이 뛰어다니면서 소동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우리네 인간들은 사실 그것을 거의 감지하지 못한다. 우리들은 눈에 보일 때마다 그들을 때려잡고, 가끔은 보이지도 않지만 후려치기도 하고, 이상한 가려움증을 느끼면서 손톱 끝으로 긁어내기도 하고, 더이상 못견디면 때로는 '벌레와의 전쟁'을 선포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극히 일부분에 대항하는 것일 뿐이다. 예를 들어 이 책에도 그런 내용이 나오지만, 우리가 어떤 벌레 한 마리를 우연치 않게 발견한다면, 우리가 보지 못하는 그 근처에는 그 개체가 분명히 한국시리즈 7차전을 관람하는 인파만큼 북적거리고 있으리라고 장담해도 좋다.

사실 이 책의 제목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보다 그 부제 '가정용 곤충에 관한 은밀한 에세이'는 이 책의 보다 많은 것을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벌레들은 가정용 곤충(Household Bugs)들이다. 그리고 그 '가정용'이라는 말이 함의하는 것처럼 이 책은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 인간의 관점에서 쓰여진 책이다. 사실 이 가정용이라는 말이 어떻게 보면 참 웃긴 것이, 어떠한 '가정용 동물(가축)'도 우리에게 그렇게 불러줄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들은 그저 우리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그들에게 '가정용'이라는 명찰을 붙이고, 우리 곁에 놓아두고, 우리 멋대로 인간과 가장 친한(!) 동물의 지위를 그들에게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재미있는 점은 이 '가정용'이라는 말이 '곤충'이라는 말 앞에 붙을 때에, 그 관계는 역전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동물의 경우와는 달리, 우리들은 이번에는 그들이 최대한 우리들에게서 멀어지기를 바란다. 바퀴벌레 구이나 불개미 만두를 좋아하는 몇몇 사람을 빼놓고는, 우리 모두는 그들이 우리 눈에 최대한 띄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곤충들이 철저하게 그들의 필요에 의해서 우리 인간들의 곁에 달라붙어 있다. 그러므로 '가정용 곤충'이라는 말은 사실 어쩌면 다음과 같이, 즉 우리 인간들이 사실은 이 곤충들의 '가정용 숙주'라는 것으로 바뀌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책은 다음과 같은 익살스러운 경고문구를 표지에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생물학 서가에 놓일 책이 아닙니다. 당신과 한집을 쓰는 '작은 가족'에 대한 은밀한 에세이입니다.' 위 경고문구가 말하는 바대로, 이 책은 생물학적 도감이라기 보다는, 위트를 담은 에세이에 가깝다. 예를 들어 각 곤충의 소개 말미에는 이 곤충들을 퇴치하기 위한 방법이 소개되고 있는데, 그 소개방법을 그대로 따라하다가는 당신은 아마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사실 그러나 이 책의 방법들을 탓할 것도 못되는 것이, 기생생물을 퇴치하는 가장 완벽한 방법은 그 숙주(바로 당신!)를 없애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이 책의 내용들을 과학적인 관점에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일종의 호러 영화(ex. 에일리언)를 보는 마음가짐으로 그저 나와는 먼 일이라고 상상하고 읽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에일리언이 당장 내일 지구를 습격할 것이 명백하다면 우리가 그 영화를 즐길 수 있겠는가. 그 영화를 즐길 수 있는 이유가 그것이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믿기 때문에 가능한 것처럼, 우리가 이러한 일이 지금 우리 곁에서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 이 책을 훨씬 즐겁게 즐기는 방법이다. 

개인적으로는 책을 읽는 내내 TV에서 하는 <스펀지>를 보는 느낌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 프로그램을 썩 좋아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도대체 그 정보들이 우리에게 유용한 것인지 전혀 공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병 속에 있는 달걀을 뒤집는 방법을 알 수 있다고 해서, 우리 삶의 뭔가가 달라질까. 잘 모르겠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가정용 곤충들의 아주 세부적인 생김새와 그들이 어떤 먹이를 좋아하는지 안다고 해서 우리가 이 곤충들과의 동거를 더 잘해낼 수 있을까. 역시나 잘 모르겠다. 어차피 그들과 같이 살아가야만 한다면, 어쩌면 모르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덧.

이건 조금 다른 얘긴데, 요새 프로야구 스카우팅 책자를 열심히 보고 있다. 게임을 자주 볼 수 없으니, 그 대안으로 그렇다면 책이라도 사서 보자,는 생각이 들어서 보고 있는데, 꽤나 재미있다. 그래서 그런 건지 몰라도 이 책을 읽으면서 왠지 이 책은 가정용 곤충들의 스카우팅 리포트같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특성, 습관, 그리고 상세한 사진, 그리고 (프로야구 스카우팅 리포트와 같이) 특정의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고 일종의 백과사전적이라는 점에서. 그래서 그저 재미로 적어보는 이 책에 나온 가정용 곤충들의 스카우팅 리포트. 인간이라는 투수를 상대로 한 타자 편이다. 컨택(어떤 범위에 나타나는가), 장타력(얼마나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는가), 타석에서의 끈질김(얼마나 퇴치하기 어려운가)라는 관점에서.

빈대: 전천후로 타구를 보낼 수 있는 스프레이 히터이다. 장타가 좋은 편은 아니나, 경기 후반 치명적인 뜬금포를 종종 터뜨린다. 타석에서 아주 끈질기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볼을 골라내어 1루로 출루할 수 있다. 발도 빠르니, 전형적인 1번타자 유형.

이: 투수가 비듬을 발라 던지는 스핏볼을 아주 좋아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타격이 좋은 편이라 보기 힘들고 장타력도 그다지 뛰어난 편은 아니다. 타석에서도 볼을 길게 보지 못하고 쉽게 휘두르는 스타일. 맞춰잡는 투구가 필요하다.

집먼지진드기: 이와 마찬가지로 비듬스핏볼을 아주 좋아한다. 장타력은 별로 없으나 타석에서 선구안이 아주 좋아, 낮은 타율에서도 높은 출루율을 자랑한다.

모낭진드기와 옴진드기:  무시무시한 생김새로 타석에서 투수에게 위압감을 주며, 넓은 컨택 범위와 한 시즌 20개 이상의 홈런을 칠 수 있는 장타력을 소유하고 있다. 전형적인 중거리 타자 유형.

서양좀벌레와 집게벌레: 언더핸드와 같은 특정 유형의 투수(책)에만 강점을 가지고 있다. 타석에서도 상당히 인내심을 가지고 있는 편이니 경기 후반 대타로 사용하면 좋다.

파리: 투수의 구질이 더러우면 더러울수록 좋은 타격을 자랑하는 특이한 유형의 타자이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플라이볼을 많이 양산하는 타자이며, 결승타를 유독 많이 쳐낸다. 실투는 아주 치명적일 수 있다.

개미: 투수의 공보다는 투구시의 습관이나 버릇 등을 관찰하고, 그것을 타격으로 연결해낸다. 컨택이 좋지는 않으나, 맞았다 하면 장타이다. 타석에서도 아주 끈질긴 편이며, 연습벌레, 일명 '기계'로 알려져 있다. 집안 대대로 야구를 해온 야구 가문.

바퀴벌레: 명예의 전당에 오를 수 있는 가정용 곤충계의 이대호(심지어 이대호와 체형도 비슷하다). 투수에게 아주 공포스러운 타자로 각인이 되어 있으며, 뛰어난 선구안을 자랑하며, 어떤 투수의 어떤 볼도 가리지 않는다. 컨택, 장타 모두 뛰어난 타자로 지난 수만년간 좋은 시즌을 이어오고 있으며, 이번 시즌도 당연히 기대된다.

흰개미: 서양좀벌레와 같이 특정 유형의 투수(나무)에만 강하다. 역시 특정 유형의 투수가 등판했을 때 기용할 수 있는 타자.

벼룩과 흡혈진드기: 넓은 컨택 범위를 가지고 있으며, 거의 모든 구질에 강점을 가지고 있다. 힘이 아주 좋아 단타보다는 주로 장타를 생산하는 유형. 벼룩의 경우 넓은 외야수비를 자랑하는데, 특기는 펜스 위로 점프하여 홈런 타구를 걷어내는 것. 일명 '홈런 도둑'.

의류해충과 부엌해충: 타격보다는 대주자, 대수비 요원으로서 강점을 가지고 있다. 단, 작전 수행 능력이 그다지 뛰어나다고 볼 수는 없는데, 감독의 지시를 거의 안듣고 스스로의 판단으로 게임에 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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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대칭, 완벽하지 않은 대칭

The Book | 2011. 3. 29. 22:42 | Posted by 맥거핀.

대칭자연의패턴속으로떠나는여행
카테고리 과학 > 교양과학 > 교양수학/수학이야기
지은이 마커스 드 사토이 (승산,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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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바흐 이전의 침묵>에는 바흐의 음악을 연주하는 (말그대로 사람없이 혼자 연주하는) 자동피아노가 나온다. 그 자동피아노는 긴 두루마리에 일련의 천공(穿孔)을 가진 악보로 연주되는데, 바흐의 음악도 음악이지만, 그 악보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였다. 흰종이에 구멍이 뚫려 있을 뿐인데, 그 구멍들의 놀라운 대칭적인 배열이란. 이 책 <대칭>을 보면서 그것이 우연이 아님을 알았다. 바흐의 음악에서 수학적인 대칭은 어떻게 활용되는가. 이 책 <대칭>은 그 대칭의 세계를 수학적인 이야기를 중심으로 차분히 들려준다.

우리가 수학을 어려워하는 이유는 수학의 세계는 일종의 단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집합과 명제로부터 시작하는 고등학교 수학 과정은 그렇게 짜여진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 수학에서는 전 단계를 모르고서는 다음의 단계로 넘어갈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인수분해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 다음의 이차방정식으로 나아갈 수 없다. 점핑은 거의 허용되지 않는다(아주 일부의 천재에게는 허용된다). 갑자기 책의 중간을 펴서 그것을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므로 수학의 세계에서는 당연히 낙오자들이 생긴다. 많은 학생들이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것을 알지만) 어느 순간 수학의 끈을 놓아버린다. 수학은 일종의 마라톤 랠리와 같다. 가장 기본적이고 정석적인 인내심을 요구한다. 수학은 지름길을 보여주지도 않고, 중간에 자동차를 타고 다음의 코스로 이동하는 것을 허락하지도 않는다. 마지막 완주의 환호를 느끼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뛰는 수밖에 없다.

이 책의 논의를 보면서도 그런 인상을 받았다. 처음 가장 기본적인 회전 대칭과 반사 대칭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알람브라 궁전의 17개의 서로 다른 대칭을 거쳐, 고차방정식의 해들과 그 속에 담겨진 대칭들, 거의 관계가 없어 보이는 대수들과 기하와의 환상적인 연결을 지나, 마침내 가장 근본적인 대칭의 언어인 군(group)으로 대칭을 말하고, 그 대칭의 지도에 셀 수도 없는 큰 대칭을 가진 몬스터 대칭을 그려넣기까지의 여정은 일종의 작은 마라톤 게임을 닮았다. 그러나 오해는 마시라. 이 마라톤은 별로 학생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수학 선생님의 인솔 하에 몇 명이 낙오되어도 상관없이, 그저 앞만 보고 나아가는 그런 서바이벌 마라톤 게임은 아니다. 저자 마커스 드 사토이는 때로 잠깐 앉아서 휴식을 할 것을 권하기도 하고, 뛰는 것에 집중하기 보다는, 주위의 풍경에 집중하게 하면서 독자들을 마지막 도착점까지 끝까지 데리고 간다. 아니, 아예 뛰고 싶지 않은 독자는 뛰지 않아도 된다. 중간중간 뛰어야만 하는 부분들을 건너 뛰고도, 즉 천천히 걸으면서 주위 풍경만 둘러보아도 볼 것은 아주 많다. 그 속에는 그간 힘든 여정에 기꺼이 뛰어들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친 수학자들의 드라마가 있고, 수학적 논의보다 기차시간표에 열광하고, 술의 도수에서도 소수를 찾는 유머가 있고, 바흐의 음악이 있고, 에셔의 그림이 있다. 밑의 인용문이 암시하는 것처럼, 이 책에서 몇 가지 부분을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다른 부분이 뒤얽혀 있기 때문에, 이 책 전체의 재미를 무너뜨리지 못한다.

현재로서는 설사 그 논문에 어떤 오류나 결함이 남아 있더라도 그리 치명적이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 일반적이다. 스미스는 '증명의 신뢰성은, 증명의 많은 부분들이 극도로 병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나온다. 추리 소설 같은 것에서 논리적 결함이 나오면 작품의 전체 구조가 완전히 망가지는 일과는 다른 문제다.'라고 믿는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서, 이 증명은 수많은 실들로 뒤얽혀 있기 때문에 그중 하나를 뽑아낸다 해서 전체를 무너뜨리지 못한다. (p. 433)


인용한 문장에서 말하는 그 논문이란, '아틀라스'라고 불리는 대칭군들을 기록한 거대한 지도가 이제 완결된 것임을 말하는 논문을 말한다. 수학자들은 오랜 세월 동안 이 지도에 새로운 대칭군들을 추가하기 위하여 애썼다. 그리고 새로운 대칭군이 발견되면, 거기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고, 지도에 기록하였다. 그렇다. 이것은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다. 이는 마치 새로운 별을 발견하는 것과 닮았다. 사람들은 새로운 별을 발견하고는 거기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고, 거대한 별의 지도에 그것을 추가하였다. 별은 거기에 이미 있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대칭군도 거기에 이미 있었다. 수학자들이 새로운 아이디어와 지루한 계산들로 그것을 끄집어내기 전까지 그저 묻혀 있었을 따름이다. 그리고 수학자들은 그 지도에 이제 새롭게 더 추가할 대칭군이 없음을 밝히려 한다. 그러나 이 책 <대칭>의 마지막 한 장까지 이 논의는 완결되지 않는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언제 어디서 새로운 군이 추가될 가능성은 남아 있다. 더 추가될 수 없음을 증명한 논문에 오류가 들어있는지도 모른다. 가능성은 남아 있다. 어느 순간 우주의 반대편에서 외계인이 날아올 가능성이 남아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 이 책에 가장 인상을 받은 순간은, 대칭을 둘러싼 전체적인 논의보다도, 수학을 대하는 저자의 태도이다. 대칭군을 분류하는 것이 이제 거의 끝났음을, 그 분류의 지도(아틀라스)에 더 이상 기록할 것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서도, 일말의 가능성을 남겨놓는 앞의 태도도 그러하지만, 저자 마커스 드 사토이의 자신의 연구를 대하는 태도도 그렇다. 대칭의 한 부분을 파고드는 저자의 연구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난점이 있다. 저자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가지 노력을 하지만, 그는 그 난점을 인정하고, 그대로 그 연구를 발표하려 한다. 저자가 말했듯이 모든 수학자들은 자신이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놓는 사람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 영광은 아주 극소수의 수학자들에게만 주어진다. 이 책에서 보여지는 갈루아와 아벨 등의 많은 수학자들의 드라마에서 말해지듯이, 한 사람의 연구자는 자신의 연구가 일종의 완결을 이루기를 꿈꾸지만, 그것은 완결로 가는 하나의 여정일 뿐이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의 새로운 시작에 가깝다. 완벽함이란 불가능하다. 어떤 증명은, 그 증명 자체로는 완벽할 수 있어도, 수학이라는 거대한 지도의 아주 일부분일 뿐이다. 그 완벽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어떤 흥미로운 점이 있다. 이 책 <대칭>은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것들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곳에는 완벽하지 않은, 아니 결코 완벽해질 수 없는 것들이 숨어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를 조금 인용하자면, 페르시아의 직공은 완벽한 대칭 문양을 가진 직물을 만들면서도 한 부분을 무너뜨려 그것이 완벽해지지 않도록 했다. 일본의 건축가들은 대칭된 건물을 축조하면서도, 한 곳은 미완성의 상태로 남겨두었다. 완벽함으로 신의 노여움을 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완전한 대칭은 도리어 공포의 대상이 된다. 바이러스는 완전한 대칭의 모양을 가진다. 그것이 에너지를 최소화시켜 바이러스를 안정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부분을 읽으며, 영화 <올드보이>를 생각했다.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오대수가 갇혀 있던 방의 벽지에는 대칭적인 문양들이 수놓아져 있었고, 비밀이 밝혀지는 마법의 상자에도 대칭적인 문양이 있었다. 그것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 인간은 완벽한 대칭을 꿈꾸지만, 완벽한 대칭은 도리어 사람을 불안하고, 무섭게 만든다. 대칭의 요소를 담으면서도, 일종의 창의적 변형을 남겨두었던 바흐의 음악은 아름답지만, 완벽한 대칭을 가진 쇤베르크의 무조음악은 듣기에 거북한 면이 있다. 그래서 영화 <블랙스완>에서 완벽한 공연을 만들기 위해 니나(나탈리 포트만)는 변형과 결여를 실행한다.

그래서 아마도, 완벽한 대칭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책 <대칭>은 완벽함을 끝내 이야기하지 않고, 일종의 미스테리를 남겨둔 채로 이야기를 끝맺음한 것은 아닐까. 이 책은 1장에서 12장이라는 12면체의 구조로 목차가 이루어져 있지만, 1월에서 12월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8월에서 시작하여, 다음해 7월에 끝난다. 그러므로 그것은 (한해로서) 완결되지 않고, 다음의 8월 이후의 이야기를 남겨놓고 있다. 물론 농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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