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자들을 어떻게 감시할 것인가

The Book | 2013.09.23 20:03 | Posted by 맥거핀.
폭력의자유해직기자김종철의젊은이를위한한국현대언론사
카테고리 정치/사회 > 언론/신문/방송
지은이 김종철 (시사IN북,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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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책 <폭력의 자유>는 '해직기자 김종철의 젊은이를 위한 한국 현대언론사'라는 부제에 걸맞게 일제시대부터 이명박 정권 시기에 이르기까지 한국 언론의 모습을 시기별로 나누어 추적하고 있다. 저자 김종철 씨는 그 자신의 삶이 곧 한국현대사의 일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는 1967년도에 처음 동아일보사의 기자로 들어가서 1975년 강제해직 당했으며, 그 이후 몇 차례의 옥고와 더불어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대변인과 사무처장을 지내다가 한겨레신문 창간에 동참하여 1998년까지 논설간사 및 편집부위원장으로 일했다. 그리고 현재에는 동아일보사 해직언론인 모임인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의 위원장을 맡고 있다. 즉 그의 경력 자체가 권력의 개입과 굴종, 또한 그에 맞선 언론인의 양심적인 투쟁으로 점철된 우리의 파란만장한 언론 현대사의 모습을 드러내보인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런만큼 그는 때로 이 책에서 시대별로 일어난 사건들을 그대로 나열하는 것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1960년 4월 혁명에서는 고등학생 신분으로 겪었던 혁명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1975년에 있었던 동아일보사 기자 및 직원들의 강제해직 사건, 80년대 전두환 정권에 맞선 해직언론인들의 투쟁, 1988년 국민 모금에 의한 한겨레신문의 창간 등에서는 자신의 목소리로 생생한 경험을 들려주기도 한다. 

책의 구성 및 내용에 있어서 두 가지 점이 눈에 띄는데, 먼저 하나는 책의 이야기가 ('네오'님도 지적하셨듯이) 1910년도 일본의 강제 조선 병합과 제국주의 일본의 소위 '문화정책'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은 강제병합 후 강력한 경찰력을 바탕으로 무단통치를 자행하다가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정책의 방향을 바꾸었는데, 그것은 이른바 '문화통치'로 사실상 그 이름의 의미와는 다르게 훨씬 더 교묘한 방식으로 조선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그 한 부분이 '합법적 언론'의 허용이었는데, 그것을 계기로 탄생한 것이 김성수의 '동아일보', 예종석(후일 방응모)의 '조선일보', 민원식의 '시사신문' 등이었다. 즉 근대 언론의 시작에서 흔히 언급되는 서재필, 윤치호 등의 '독립신문'을 건너뛰고, 일제의 사실상의 간섭과 통제 하에서 창간된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흥미로운데, 이는 아마도 특히 권력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언론의 역사를 보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저자의 관점으로 본다면, 현재까지 위세를 떨치고 있는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를 포함한 한국의 근대 언론의 시작은 자유로운 의지의 탄생이 아닌, 사실상 관과 합작하여 탄생된 반쪽짜리 언론이었다.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는 현재까지도 자신들이 일제의 탄압을 받은 민족지였음을 자랑스레 내세우지만, 그것은 '일장기 말소사건' 등 일부의 경우 뿐이고(책에 따르면 이 역시도 젊은 기자들이 주도한 거사일 뿐, 사주와 고위간부들은 전전긍긍할 뿐이었다), 탄생부터 일제 말기까지 친일의 모습을 보인 '反 민족지'에 가까웠다. 저자는 책의 첫머리에서 밝히듯 한국언론의 역사를 '민중의 벗인가 공공의 적인가'라는 관점으로 살펴보려 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러한 구분에 따르면 한국언론의 역사가 결국 어디에 더 가까웠는지를 밝히는 것은 뒤를 굳이 읽지 않아도 자명한 일이다. 썩은 씨앗에서 올곧은 줄기가 나오기는 힘든 법이다.

다른 하나는 일제시대부터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각 정권 별로 챕터가 나뉘어 구성되어 있으며, 각 챕터가 다른 비중 및 분량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책에서 가장 큰 비중 및 분량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박정희 정권과 이명박 정권의 시기인데, 책의 성격 및 내용으로 비추어 볼 때 이것은 이 시기가 언론이 가장 큰 통제 및 고난을 겪었던 때였으며, 또 그에 따른 언론의 투쟁 역시도 가장 격심했던 때로 볼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박정희 정권 시기에는 기관원이 신문사 편집부에 상주하여 신문의 편집과 발간에 일일이 간섭을 하고, 동아일보사 및 여러 언론사에서의 대량 해직 및 그에 맞서는 기자들의 노조 창립과 복직 투쟁이 잇따르던 때였다. 또한 이명박 정권 시기에는 전례 없었던 방송사들에 대한 낙하산 사장들의 투입 및 마음에 안드는 언론인 솎아내기, 그리고 그에 대한 언론사 총파업 및 대 정권 투쟁이 불같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른 정권 시기에 정부가 언론에 개입하거나 언론이 정부에 맞서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른 정권 시기에도 여전히 언론과 정부는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것은 폭압적 독재정권 시기에는 정부의 회유 및 간섭, 그에 따른 굴종이나 투쟁의 양상으로 또한 소위 진보정권 시기에는 보수언론과 정부의 대결이라는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즉 한국현대사에서 언론은 사주 및 구성원들의 성향에 따라 다른 얼굴을 보여줬으며, 또한 동시에 각 시기별로도 재빨리 가면을 바꿔쓰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단지 대형 보수매체들의 문제만이 아니었으며, 소위 진보언론도 때로는 여론을 호도하기도 했다. 저자의 관점대로라면 지금까지 한국현대사에서 언론은 민중의 벗이라기 보다는 공공의 적에 가까웠으며, '압제를 극복하는 자유언론'도 아직은 멀다.

물론 그것은 언론인이나 이 책이 타겟으로 하고 있는 '언론인이 되려는 젊은이'들이 조금 더 고민해야 할 문제고 다시 책으로 돌아오자면 몇몇 아쉬운 점이 눈에 띈다. 먼저 한 가지는 책이 너무 정치와 권력과의 상호작용적인 관점에서만 언론을 보고 있다는 점이다. 언론이 정부와의 관계에 대한 부분만 있는 것도 아니고, 언론이 다루는 모든 내용이 정치에 대한 것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한국현대 언론사'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거의 모든 내용이 언론에 대한 정부의 통제, 그에 따른 투쟁, 또는 각 정치 사안에 대한 여러 언론사의 반응들로만 채워지다 보니 너무 한 쪽으로 치우친 느낌이다. 전체적인 사회의 감시자로서 여러 다양한 시각에서 각 언론들의 모습을 다루는 것이 보다 더 '한국 현대언론사'를 조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각 시기별 주요 사건들이 너무 수박겉핥기 식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현대언론사의 격랑 한 가운데에서 여러 사건을 넘나든 저자의 이력으로 비추어 볼 때 아쉬운 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저자가 너무 전체 사건을 편년체 형식으로 기술하려다 보니 특정 사건들에 대한 자세한 분석이 결여되는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한겨레신문의 창간 과정에 있어서도, 당시 시작부터 깊숙이 개입했던 저자로서, 당시 내부의 이야기나 어려운 점들, 혹은 창간 과정의 문제점 같은 것을 자세히 들려줄 수도 있을 텐데, 저자는 너무 알려진 사실들로만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다.

그것은 여러 사건들에 대한 각 언론의 보도 양상을 다루는 부분들 같은 데에도 마찬가지인데, 정작 중요한 것은 어떤 사건에서 어떤 언론사가 어떤 보도를 하였는가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고, 보다 중요한 것은 그렇다면 '왜' 그런 보도를 하였는가의 문제일 것이고, 그것에는 언론사 내부의 경제,권력구조 및 여러 역학관계, 정부와의 관계, 사주의 성향, 기자들의 취재방식, 언론사 간의 관계 문제 등등 우리가 실상 잘 모르는 여러 문제들이 개입되어 있을 것이다. 언론사 내부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저자라면 이 '우리가 실상 잘 모르는 여러 문제'에 대한 이야기들을 (내부자의 목소리로) 자세히 들려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각 현안들에 대한 여러 언론의 상반된 리포트는 이미 수없이 알려진 내용이다. 이를 반복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읽다보면 이것이 한국현대'언론사'인지, 아니면 강준만의 '한국현대사 산책'인지 잘 모르겠다.) 즉 이 책은 사실 조금 어중간하다. 한국현대언론사라고 부르기에는 언론의 모든 내용을 세밀하게 다루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책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내용, 즉 한국현대사에서의 권력과 언론의 관계를 그리 깊숙이 추적하고 있지도 못하다. (부록에서 보여주는 미국의 머독과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 총리와 같은 권력과 결탁한 언론을 다루는 부분은 본문 내용의 반복에 가깝고, 위키리크스를 다루는 부분은 '압제를 극복하는 자유언론'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는 알겠지만 좀 쌩뚱맞다.)

결국 중요한 것은 <왓치맨>에서 나온 것처럼 '감시자들을 어떻게 감시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언론이 사회의 감시자라고 했을 때 그 감시자들을 감시하지 않는다면, 감시자들은 곧 또다른 권력자가 되어버린다는 점을 지난 역사는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소위 진보언론들은 물론이거니와 책에서 하나의 예처럼 제시된 위키리크스도 마찬가지이다(어쩌면 그들의 힘이 꽤나 강력하다는 점에서 보다 위험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감시자들을 어떻게 감시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결국 각각의 개인들이 감시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보수언론들의 잘못된 보도 행태를 꾸준히 지켜보고 스스로 걸러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지난 이명박 정권이나 현 박근혜 정부 하에서 정부에 대한 언론인들의 투쟁에 지지를 보내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지를 보낸다는 것은 그들을 격려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지켜본다는 것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언제까지나 민중의 벗인 언론은 없다. 그것은 그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들의 생리이다. 꾸준히 그들을 감시하지 않으면 언제 감시자들이 우리를 억압할지 모를 일이다.


덧.
책 제목은 참 아리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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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된다

The Book | 2013.08.17 16:33 | Posted by 맥거핀.


색채가없는다자키쓰쿠루와그가순례를떠난해
카테고리 소설 > 일본소설
지은이 무라카미 하루키 (민음사,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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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잘 외우기 힘든 소설, 들어도 금방 잊어버리고 마는 제목을 가진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었다. 제목이 외우기 힘든 것은 단순히 길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이 제목이 뭔가 일반적이지 않은 것을 담고 있기 때문에도 그렇다. 다자키 쓰쿠루는 그냥 다자키 쓰쿠루가 아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란 무슨 의미일까? 이 말이 굳이 제목에 들어간다는 것은 '색채가 없다'는 것이 다자키 쓰쿠루라는 사람을 나타내기에 상당히 중요한 키워드라고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우리는 꽤 드물기는 하지만, 색채가 없다, 혹은 색깔이 없다는 말을 사람에게 쓰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을 '개성이 없다'와 비슷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전부일까. 아마도 그것만으로 이 이상한 말이 제목에 붙어야 할 모든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라니? 일반적으로 보면 이것은 조금 이상한 문장이다. 이 문장과 동일한 의미의 무엇인가를 전달하고자 할 때는 '다자키 쓰쿠루가 순례를 떠난 해'라고 쓰면 된다. 즉 여기서의 '그'가 다자키 쓰쿠루라면 이 문장은 이상하게 중첩되고 낭비된 문장이다. 다자키 쓰쿠루와 다자키 쓰쿠루가 순례를 떠난 해라니.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의 가능성이 남아 있기는 하다. 과연 여기에서 '그'는 다자키 쓰쿠루일까. 이 제목만 봐서는 '그'가 그 앞에 있는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라고 확실하게 주장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그'는 다자키 쓰쿠루가 아닌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그리고 그래야만 이 문장이 도리어 말이 조금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아무튼 간에 하드 커버를 넘겨 소설을 들여다봐야만 할 것만 같다.

하루키의 많은 소설들이 그러했듯, 이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한 가지 미스테리한 것, 혹은 무엇인가 기묘한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은 다자키 쓰쿠루가 대학교 2학년 때 겪은 일인데, 고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들 그룹으로부터 아무 이유도 없이(다자키 쓰쿠루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추방당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그룹의 나머지 친구들은 모두 이름에 색채를 표현하는 한자가 포함되어 있고, 다자키 쓰쿠루만 이름에 색채를 표현하는 한자가 없었던 것이다. 아오(靑)와 아카(赤)라는 두 사람의 남자아이, 그리고 구로(黑)와 시로(白)라는 두 명의 여자아이, 그리고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 그런데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렇게 느낄 테지만) 이 네 사람의 이름의 조합은 그 자체가 너무나도 기묘하게 여겨진다. 푸른색과 붉은색의 남자아이들과 하얀색과 검은색의 여자아이라니, 이 완벽한 대비의 구조라니, 이게 과연 가능한 조합일까. 과연 이들은 존재하는 무엇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일까. 아, 물론 나는 모든 소설이 허구라는 지극히 자명한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비유의 구조가 너무 도식적이라 도리어 조금은 의아해하고 있는 중이다. 이들이 완벽한 구조인 것은 단지 색상표의 색채대비의 측면에서 뿐만이 아니다. 하루키의 묘사를 빌리자면 아카는 성적은 탁월하지만, 그것을 내세우지 않고 배려한다. 아오는 체격이 좋고 성격이 활달하며 운동을 좋아한다. 시로는 외모가 뛰어나고 피아노를 잘 치지만, 말수가 적고 차분하다. 구로는 외모는 그렇게 뛰어나지는 않지만, 애교가 있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잘한다. 그러니까 이 조합은 두뇌와 건강과 외모와 재치의 조합이다. 그러니 이것이야말로 완벽한 조합이라고 감히 이야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해서 색상대비표에서 각각의 색들이 어떤 완벽의 극단에서 무엇인가를 표상하는 것처럼, 이들 역시 각각 무엇인가를 표상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간에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가 있다. 다자키 쓰쿠루는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딱히 뛰어난 재능도 없고, 공부를 아주 잘하거나 특별한 면도 없고, 외모마저도 돌아서면 잊기 쉬운 외모이다.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는 다자키 쓰쿠루가 이 친구 그룹을 그야말로 완벽한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이 그룹에서 추방당하자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게 되는 것도 어떤 측면에서 보면 그렇게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당시 쓰쿠루의 관점에서 보면, 이들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들이었고, 이 완전한 존재들과 일체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쓰쿠루에게는 일종의 자신의 존재가치를 느끼는 것이었다. 즉 쓰쿠루는 이들에게서 자신이 가지지 못한 어떤 완전함을 보았고, 그것들의 조화를 보는 것만으로 즐거움을 느꼈다. 그것은 쓰쿠루가 철도와 역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놓고 생각해 볼 수도 있는데, 철도와 역은 쓰쿠루에게 완전함이 어우러지는 조화의 공간이다. 정확한 시간에 도착하고 다시 정확한 시간에 떠나는 기차역의 열차들, 각자 도착하여야 하는 목표지점을 가지고 조화롭게 움직이는 역의 사람들, 이들이 어우러지는 철도와 역은 조화로운 물결, 이미 정해져있는 어떤 흐름이 반복되는 조응의 공간이다. 그리고 쓰쿠루는 머리가 어지럽고, 생각이 많아질때면 역에 가서 그 사람들과 열차들의 흐름을 바라본다. 그 정시 등장과 정시 퇴장의 정확한 흐름들을 말이다. 

그러나 조화로운 공간에서 조화롭게 존재하는 것이란 그 자체만으로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모든 이야기는 도식적인 구조가 깨지는 데에서 긴장이 생겨나고,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색채가 없는 쓰쿠루가 완전한 자들을 위한 이 그룹에서 추방되는 것은 이야기의 내용에서 뿐만아니라 구조로 볼 때 어쩌면 필연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터이다. 그리고 죽음만을 생각했던 쓰쿠루를 죽지 않게 하려면 두 가지의 길이 있다(물론 "대학교 2학년 7월부터 다음 해 1월에 걸쳐 다자키 쓰쿠루는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았다."라고 작가가 첫 문장을 쓰는 것은 그를 죽일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하나는 그에게 색채를 부여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색채가 없는 자신을 긍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다자키 쓰쿠루는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답게 후자의 길을 간다. 색채가 없는 자신을 긍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주위의 색채를 빼야한다. 다시 말해서 다자키 쓰쿠루만이 색채가 없는 것이 아님을, 주위의 모든 것들이 사실 색채가 없었음을, 혹은 모든 것이 나름의 색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라고 했을 때, 이 말 앞에는 '완전한' 혹은 '눈에 띄는'이라는 말이 빠진 것이다. 누구나 색채는 있다. 노르스름하다던가, 희뿌옇다던가 하는 정확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색채말이다. 완전한 파랑이나 완전한 빨강이나, 완전한 검정이나 완벽한 흰색은 아니어도 말이다(그것은 실제보다는 이렇게 소설 속에 등장한다). 다만 대다수 사람들은 그것이 명확하지 않아서 눈에 잘 띄지 않는 상태 즉, 청과 적과 흑과 백이 나름의 비율로 섞여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하루키도 처음의 그룹을 보여준 후 이제 색채를 섞기 시작한다. 하이다(회색)와 미도리카와(녹색)의 등장이 그것이다(그것도 하필이면 흑과 백 사이에 있는 회색과 청과 적 사이에 있는 녹색이라니, 하루키 씨 정말 귀엽지 않은가). 그리고 그들을 만나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름에 아무 색채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라를 만나고, 그리고 다시 네 명의 옛친구들을 만나며 쓰쿠루는 자신을 긍정하게 된다. 그것은 후반부의 네 친구를 보면 잘 드러난다. 이제 그 친구들은 예전의 강렬한 그 색채가 아니다. 붉그스레한 무엇인가, 혹은 파르스름한 무엇인가라고 부를 수는 있겠지만, 고등학교 시절의 강렬한 색채를 가졌던 그들은 더 이상 원색의 그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그들이 그렇다고 자신의 색채가 없는 것이 아니니까. 색상대비표의 가장 가장자리의 색들은 오히려 위험하니까. 예를 들어 흰색은 어쨌든 검어지는 길밖에는 남아있는 것이 없으니까. 흰색이 검어지지 않으려 발버둥친다면 오히려 그 반대편 낭떠러지에 있는 악령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 친구들의 말대로 오히려 쓰쿠루에게 그들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 그리고 그 그룹을 유지시키기 위해 쓰쿠루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쓰쿠루는 만들다(作)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즉 쓰쿠루는 이 소설에서 역을 만드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을 만들어가는 존재이고, 그리고 동시에 색을 섞어 새로운 색을 만들어가는 존재이다(그러므로 쓰쿠루가 빠지면 그룹은 유지될 수 없다). 쓰쿠루는 그렇게 색채가 없는 존재가 아니라, 색채가 없는 자신을 긍정하는, 그럼으로써 도리어 동시에 자신만의 독특한 색을 만들어가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제목에서 '그'는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가 아니다. 왜냐하면 순례를 떠난 다자키 쓰쿠루는 예전의 색채가 없는(스스로 '완전한(원색의)' 색채가 없는 것이라 생각했던) 다자키 쓰쿠루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이 제목이 이해가 되며 외울 수 있게 되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그는 이제 예전의 다자키 쓰쿠루가 아니다.


덧.
그래서 어쩌면 이 소설이 그렇게 많은 이들에게 읽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들 대다수는 다자키 쓰쿠루처럼 색채가 없다고, 혹은 자신이 뭔가 불완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기독교 식으로 말하면 완전한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하면서 예정된 인간의 운명이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이야기 역시도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한 인간이 자신만의 에덴동산을 찾으려 발버둥치는 이야기이다). 물론 소설은 불완전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아무런 답도 주지 않지만, 너무 실망할 필요만은 없다. 그것은 현실에서는 주인공이 아닌(혹은 아니라고 믿고 있는) 당신이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주니까. 불완전한 시대의 불완전한 인간들은 그렇게 현대 소설에서, 특히 하루키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여 왔다. 물론 하루키의 이런 인물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아직까지는 이 소설의 다자키 쓰쿠루가 아닌, <노르웨이의 숲>의 와타나베이다. 

사실 구조상으로 보면 이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노르웨이의 숲>과 상당히 동일한 부분들이 있으며, 따라서 그 소설의 다른 버전, 혹은 2000년대 버전으로 보인다(나는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읽었다). <색채가 없는...>은 현재의 쓰쿠루, 즉 30대 중반에 접어든 쓰쿠루가 과거로 돌아가 과거의 사건에 맞닥뜨리는 이야기이며, <노르웨이의 숲> 역시 서른일곱 살의 '나'가 비행기 안에서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비틀즈의 음악을 들으면서 과거를 회상하는 데에서 이야기가 출발한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다자키 쓰쿠루에서 출발하는 이야기가 결국은 사라에게 전화를 하는 것에서 끝나는 <색채가 없는...>과 마찬가지로, <노르웨이의 숲>의 시작은 '죽음과 마주했던 열일곱살의 봄날'(2장의 제목)이며, 마지막은 미도리에게 전화를 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리고 마지막 전화에 담겨진 의미는 두 소설 모두 비슷한 것처럼 보인다. 즉 인물로 보면 <노르웨이의 숲>의 나오코에게 이 소설의 시로를 매칭하고, 미도리에게 사라를 매칭할 수 있다. 즉 열일곱살 혹은 스무살(<색채가 없는...>의 대학교 2학년)의 나는 죽음에서 시작하지만 각자 나름의 순례를 마친 후에 미도리와 사라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그것은 하루키가 그들에게, 아니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무엇인가를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자신을 긍정하는 것, 혹은 '그래도 된다'와 같은 것들이다.

하루키는 오랫동안 소설들에서 여러가지를 이야기해왔지만, 어쩌면 그것은 비슷한 것들이 아니었을까. 그래도 된다는 것. 그렇게 해도 괜찮다는 것. 지금 그러고 있어도 괜찮다는 것. 하루키가 대학교  때의 나에게 말해준 것도 그런 것이었다. 대학 어느날의 나는 도서관에서 네 마리 째의 '태엽감는 새'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푸른 검색 화면은 그것이 그 안에 있다고 말해줬지만, 그것은 어딘가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아마도 누군가가 자신만이 아는 장소에 그것을 숨겨놓았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도서관을 헤매고 다녔다. 도서관은 빠져나올 수 없는 미로와 같았고, 안쪽 깊숙한 곳에는 양사나이나 일각수가 있을 것 같은 어두침침한 방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도서관 앞 광장에서는 연일 목적을 알 수 없거나, 애써 목적을 모른채 했던 집회가 이어졌고, 나는 소리가 점점 들리지 않는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하루키의 소설들을 읽었다. 들리지 않으면, 한 때 같은 목소리를 냈던 그들의 목소리들을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러나 아무리 깊숙한 곳에 가서도 웅웅, 웅웅 이상한 진동이 느껴졌고, 나는 그럴 때마다 창이 없는 것을 잘 알면서도 빈 벽을 살금살금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게 진짜 울리는 것일까, 아니면 내 머리 속의 무엇인가가, 혹은 하루키의 소설이 만들어낸 무엇인가가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하루키는 그런 이들에게 오랫동안 '그래도 된다'고 말해왔다. 아카가 했던 이야기에서처럼 하고 싶어서 하는 선택들이 아니라, 어떤 것을 피하기 위해 할 수 없이 하는 선택들이 하루키는 정작 중요한 것이라고 말해왔다. 그런 것 중의 하나는 악령을 피하는 것이다. 완벽해지려는 악령, 일체감을 느끼려는 악령, 정확해지려는 악령, 누구보다도 뛰어나려는 악령들을 우리는 피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시작은 일단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색채가 없어도 괜찮다고, 남들보다 뛰어나지 않아도, 무엇인가가 완전하게 조화되지 않아도 괜찮아고 생각하는 것. 불완전한 당신은 불완전한 선택을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는 것. 마음은 어딘가로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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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3.08.19 13: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이 책의 제목을 자꾸 잊어버려서 하루키의 신간제목이 뭐였더라? 그러면 색채와 순례를 떠난 해와 스크루가 제각기 떠오르곤했어요. 그러면 또 이걸 가지고 조합을하는데 단 한 번도 정확한 문장이 만들어지지가 않는거예요.. (-_-) 아무래도 책을 읽어봐야 머릿속에 자리를 잡으려나 봅니다

    맥거핀님은 오래전에 하루키를 만나셨군요. 전 하루키를 잘 몰라요. 귀동냥과 풍문으로 들어서 직접 읽지는 않았는데도 왠지 친근하고 그의 작품 몇몇은 줄줄이 입에서 나오는 그런정도. 몇 년전에 딱 한 작품 읽었군요 <밤의거미원숭이> 라는 단편집 ^^;

  2.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3.08.19 13: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루키의 소설들을 연대기순이 아닌 거꾸로 읽거나 이것저것 마음이 가는대로 읽어도 되는거겠죠, 꼭 20대 청춘시절이 아닌 나이가 많이 들어서 읽어도 되는거겠죠..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3.08.20 20: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하루키의 모든 작품을 읽은 것은 아니고요. 사실 워낙 하루키의 소설집들이 많기도 하죠. 예전에 나온 단편, 에세이들도 계속 새롭게 묶어서 내기도 하구요.(알라딘에서 하루키로 검색을 해보았더니 500권 이상이 나오더군요.)

      하루키의 소설보다 에세이가 더 좋다하는 얘기들도 많은데, 저는 소설, 특히 초기에 낸 단편들이 좋더라구요. 하루키 씨에게는 옴진리교의 사린테러 사건이 상당히 크게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이 소설에도 짧은 언급이 나오죠.) 그 이후로 소설들이 좀 변했어요. 소설로 따지자면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 이후부터 변하기는 한 것 같습니다.

      뭐 그래도 유명한 것부터 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 싶기는 합니다. <노르웨이의 숲>이나 <1Q84> 같은 것 부터..<색채가 없는...>부터 보시는 건 약간 비추천.

깨진 손톱 위에 붙인 인조 손톱

The Book | 2013.08.06 17:16 | Posted by 맥거핀.
파과구병모장편소설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구병모 (자음과모음,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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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전체 줄거리와 결말이 들어있습니다.)



'파과'라는 제목이 가장 먼저 연상시키는 것은 破果, 그러니까 으깨지거나 뭉그러진 과일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소설을 처음 펼쳤을 때 만나게 되는 서효인의 <저글링>에 나오는 짧은 글귀 "떨어뜨림에 익숙해지면 으깨진 과일에 더 이상 미련은 없다."고 할 때의 그런 미련을 더 이상 두지 않는 과일 말이다. 그래서 소설의 주인공인 노년의 여성 킬러는 냉장고 안에 언젠가 넣어두었던 '거기 뭉크러져 죽이 되기 직전의 갈색의, 원래는 복숭아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물건'을 버리기 위해 조각을 모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신음을 내뱉는다. 으깨진 과일 같은 것은, 떨어뜨리는 데 익숙해지는 사람은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 않으므로. 자신은 떨어뜨리는 데 익숙해지는 사람이며, 동시에 다른 의미에서는 으깨진 과일일 것이며, 자신도 언젠가는 그런 뭉크러진, 한 때 복숭아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무언가처럼 쓰레기 봉지 안으로 들어가야 할지도 모르므로.

그리고 그런 그녀의 이름은 조각이다. 아니, 이름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별명같은 것이라고 해두자. 조각, 복숭아 조각, 냉장고 안에 핀 성에꽃에 달라붙어 잘 떼어내지 않는 복숭아 조각. 그러나 그녀의 이름은 사실 다른 의미였다. 손톱 조(爪)에 뿔 각(角)인 조각, 다시 말해서 각이 진 손톱, 혹은 날카로운 손톱. 그녀는 여자이기 이전에 유능한 킬러였으며, 맡은 바 임무를 무리 없고, 깔끔하게 처리해내는 솜씨좋은 재주를 가진 방역업자였다. 그녀에게 손톱은 치장을 위해 존재하는 무엇인가의 이전에, 누군가를 공격하거나, 혹은 상대방의 공격 속에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기능이 우선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손톱 조'라는 한자의 생김새는 조금 재미있는 데가 있다. 손톱 조(爪)자 밑에 삐침을 하나 붙이면, 오이 과(瓜)자가 된다. 그러니까 다르게 생각해 보면 '손톱 조(爪)'란 '오이 과(瓜)'가 깨어진, 혹은 파괴된 것이다. 즉 작가의 대출혈 자폭 서비스를 통해서 연상해보면 이것이야말로 '파과(破瓜)'다. 이 파과(破瓜)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연관된 여러가지 의미가 나오는데, 일단 파과라는 말은 말 그대로 '오이 과'자를 파자(破字)한다는 것으로 오이 과(瓜)를 파자하면 '여덟 팔(八)'자 2개가 되어 그 두 개를 합한 여자나이 16세를 의미하는 말이 된다. 동시에 파과라는 말은 여자의 처녀막의 상실, 즉 여자가 처음으로 남자와 성관계를 가지게 됨, 혹은 월경을 처음 시작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 모든 것이 16세, 혹은 사춘기, 청년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 같다. 다시 말해서 파과란 무엇인가가 처음으로 깨지며 다른 무엇으로 변모하는 시기다. 그 파괴되는 무엇인가를 단순히 처녀막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혹은 순수함이나 그간 자신의 주위에서 애써 유지되던 세계, 헤르만 헤세의 알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조각 역시 그런 나이에  그녀 주위의 세계가 부서져 나갔다. 당숙의 집에서 나름의 세계를 더 유지할 수도 있었지만, 작은 균열점들은 알을 조각냈고, 그녀는 모든 것이 깨지려는 순간에 알 수 없는 본능을 발휘하여 방역업자로서 거듭났다. 즉 그녀는 이중의 파과(破瓜)를 맞았다. 의미로서도 새로운 세계로 들어선 파과를 맞이하였고, 글자로서도 오이 과(瓜)가 깨어진 손톱 조(爪), 조각(爪角)이 되었으며, 그녀의 삶은 이상한 방식으로 조각이 났다. 조각난 삶을 겨우 지탱하도록 유지시키는 것은 류의 존재였다. 류는 세상과 그녀를 연결하는 접착제, 끈과 같은 것이었다. 세상에 갈 곳 없이 내버려진 그녀를 지탱시키는 심리적인 끈이라는 점에서도 그러하였고, 그녀가 류의 지시를 받아 방역업을 해나간다는 업무적인 면에서도 그러하였다. 그리고 운이 좋았다면 어쩌면 류와 뭔가 불안한 무엇일지라도, 행복비슷한 무엇인가를 이어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 깨진 세계는 또다시 쉽게 깨질 수 있는 법. 그녀에게 이제 남은 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 되새겨지는 류의 말들과, '무용'이라는 늙은 개 뿐이다.

결국 이 이야기는 깨진 조각이 다시 무엇인가를 붙여나가는 이야기이다. 무엇으로 무엇을 붙여나가는 것인가. 뭐 강박사라고 해도 좋고, 해니라고 해도 좋고, 투우라고 해도 좋고, 손톱이라고 해도 좋다. 혹은 종장에 등장한 어느 네일샵의 이름모를 어린 막내 여직원이라고 해도 좋다. 그래 어쩌면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마지막에 이 노년의 여성 방역업자는 자신의 손톱 위에 무엇인가를 덧씌운다. 어두운 감색이 밤하늘처럼 칠해져있고, 그것을 배경으로 저마다의 다른 색과 무정형 도안이 불꽃놀이처럼, 혹은 과일 열매처럼 퍼져 나가는 인조 손톱. 그리고 네일샵의 원장은 생각 없고 가벼워 보이는 막내 여직원의 유일한 장점이 타인의 불행에 대해 공감하는 능력이라면 데리고 있으면서 쓸 만하게 키워보아도 되겠다고 애써 미소지으면서 말한다. "잘했다." 그렇게 조각은 무엇인가를 붙여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인조 손톱이라고 해도 좋고, 막내 여직원과의 이상해보이는 공감이라고 말해도 좋다. 그녀가 무엇인가를 붙여나갔다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전에 그녀가 네일샵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돌아서 나왔거나, '서장'에서 벌어진 현실적이고도 비현실적인 풍경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하철에서의 어떤 소동들, 그러니까 나이든 남자와 젋은 여인이 자리를 두고 시비를 붙고, 50대 여인은 중재에 실패하며, 젊은 임부의 낭패한 얼굴과 눈물을 덤덤히 견뎌낸 조각이 방역업에 결국 성공하는 풍경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무 것도 붙지 않을 것만 조각이 점점 무엇인가를 붙여나간다. 그녀는 여성이면서도 여성과의 관계가 껄끄러운 인물이었다. 당숙 집에 얹혀 살던 소녀에게 결국 문제가 된 것은 친척언니를 대체하려는 욕망이었으며, 류에게 다가가고 싶으면서도 끝내 그와 거리를 유지하게 만든 것 역시 류의 아내 조를 대체하려는 욕망이었다. 그러던 그녀에게 사람들이 붙는다. 강박사가 붙고, 강박사의 부모와 해니가 붙고, 길에서 폐지를 줍던 노인이 붙고, 결국에는 투우도 붙는다(이를 가족을 잃은 자들의 이상스런 연대라고 볼 수도 있을 터이다. 가족(류)을 잃은 조각과 아내 혹은 엄마를 잃은 강박사와 해니, 그리고 아버지를 잃은 투우). 그러니 그녀가 네일샵의 막내 여직원과 이상한 연대의 감정을 가지게 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녀는 더 이상 (관계에 있어서) 무용하지 않으니까. 그녀는 방역업에 있어서는 '유용'하지만 관계에 있어서는 '무용'하다. 그녀가 키우던 늙은 개의 이름처럼 말이다. '무용'이라는 개는 그녀의 어떤 단면이다. 예를 들어 개 '무용'은 '현관에 정좌하여 돌아온 주인을 향해 꼬리를 예의 바르게 흔들기는 하지만 뛰어올라 몸에 달라붙으려고 하거나 코를 비벼대지 않'으며, '무념무상의 도를 실천하며 달관의 몸짓으로 주인에게서 돌아선다.' 그러므로 어쩌면 마지막 임무를 떠나기 전 '무용'이 조용히 숨을 거둔 것은 도리어 긍정적인 신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용(無用)'이 죽었다는 것은 더 이상 그녀가 '쓸모없음'이 아니라는 의미가 되므로.
 
그러므로 이 소설의 제목은 중의적이다. 그녀는 파과(破瓜)함으로써 조각(爪角)이 되었고, 그 조각들은 결국 파과(破果)가 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스스로 조금씩 무엇인가를 붙여나감으로써 다시 그녀는 새로운 세계, 어쩌면 새로운 파과(破瓜), 또는 합과(合瓜)를 맞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두 번째 파과는 그녀를 다시 조각으로 만들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이제 손톱 위에 인조 손톱을 붙였으니까. 그것은 한편으로 '진짜가 아니며 짧은 시간 빛나다 사라질 것'을 알기에 그렇다. 그러므로 그녀의 말대로 아마도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일 것이다.


덧.
그러므로 이 소설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종장'이다. 아마도 이 종장이 없었더라면 이 리뷰를 쓸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마지막은 이상하게도 영화 <고령화가족>의 마지막을 연상시키는데, 어떻게 수습이나 될 수 있을까 싶던 이야기(사실 '개연성'이라는 잣대를 들이댄다면 이 마지막들이 말이 된다고 할 수 있을까. 영화 <고령화가족>이나 소설 <파과>나.)에 붙는 너무 희망적이라 도리어 믿고 싶어지는 에필로그라는 점에서 그렇다. 

나는 그 <고령화가족>의 마지막이 너무 말들이 안된다고 머리에서 말해주는데, 마음에서는 이상하게도 뭐라고 할 수가 없더라고. 참 요즘에는 이상하게도 이런 게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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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우리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The Book | 2013.07.22 16:49 | Posted by 맥거핀.
적군파내부폭력의사회심리학
카테고리 정치/사회 > 사회학
지은이 퍼트리샤 스테인호프 (교양인,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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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2월 28일, 각종 테러와 범죄, 파괴활동방지법 위반으로 경찰의 추적을 받던 연합적군의 최후의 생존자 5명 전원은 일본 나가노 현의 아사마 산장에서 10일 동안 산장의 여주인을 인질로 잡고 농성을 벌이다가 경찰에게 결국 체포되었다. 사건은 끝난 것처럼 보였고, 모든 진상은 드러난 듯이 보였으며, 이들에게는 긴 수형생활만이 남은 듯했다. 그런데 이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사건의 숨겨진 나머지 부분이 드러났고, 그것은 경찰은 물론 전 일본인을 깜짝 놀라게 했다. 아사마 산장에서 사건이 벌어지기 전,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평균나이 23.3세의 일단의 젊은이들은 산속의 비밀 기지로 들어갔고, 그 숨겨진 공간에서 두 달 동안 총 31명의 연합적군 멤버 중 12명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도대체 산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연쇄살인마라도 돌아다녔던 것일까, 아니면 어떤 죽음의 바이러스라도 퍼졌던 것일까? 마쓰모토 세이초의 팩션이나, 김전일 소년의 사건기록부에나 등장할 법한 이 사건은 언론 및 전 사회의 관심을 끌었고(아사마 산장에서의 진압 과정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었고, 이는 최고 89.7퍼센트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들을 둘러싼 이야기는 사건의 양상이 밝혀진 직후에는 물론 아직까지도 일본 사회에서 널리 회자되고 있다. 그리고 퍼트리샤 스태인호프의 책 <적군파>는 이 사건을 당시 관련자들의 인터뷰 및 증언, 그들이 남긴 기록, 그리고 그간 쏟아져나온 각종 문서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세밀하게 재구성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사건의 미스테리 및 어떤 기이한 부분으로 인해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내가 보기에 이 책이 가진 미덕은 크게 세 가지다. 먼저 하나는 이것이 단지 그 사건을 세밀하게 추적하는 데에만 머물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책의 저자는 저널리스트나 르포 작가가 아니고, 사회학과 교수이다. 그러므로 저자의 관심은 이 사건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떤 양상으로 펼쳐졌으며, 이것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에 있지 않다. 즉 저자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의 배경이 되는 요소, 그 사건의 어떤 구조적인 형태, 그 사건과 사회와의 관련성, 그리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사회에 미친 영향들이다. 사건 그 자체 못지 않게 그러한 부분들에도 관심을 두는 것은 중요한데, 이 사건은 단순한 일회성의 범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연합적군이 벌인 이 아사마 산장에서의 농성과 내부 '숙청'은 좁게는 당대의 일본의 진보적 학생운동 및 폭력적 사회변혁 운동, 그리고 해외에서 벌인 요도호 그룹의 비행기 납치 사건이나 일본적군의 이스라엘 텔아비브 공항 습격 사건 등의 거대한 테러들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넓게는 일본의 현대사 전체와 일본인들의 어떤 정신적 세계와도 연관되어 있다. (참고로 말해두자면 요도호 그룹 및 일본적군, 그리고 연합적군, 적군파는 모두 일본공산주의자동맹(분트)의 분파들이며- 이를 통칭하여 '적군파'라고도 한다 -, 그들은 각각 엄밀히 구분되는 조직이다. 예를 들어 아사마 산장 사건을 벌인 연합적군은 적군파와 혁명좌파가 통합된 조직이며, 한편으로 저자는 이 통합의 과정이 상당부분 이 '숙청'에 영향을 미쳤음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을 본격적인 사건의 계기가 된 연합적군의 탄생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도리어 책의 시작은 이 아사마 산장 사건이 벌어진 3개월 후에 일어난 오카모토 고조를 위시한 일본적군의 텔아비브 공항 총기 난사 사건과 오카모토 고조의 인터뷰이며, 다시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 연합적군의 근원에 있는 적군파의 최초 탄생에서부터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다. 그래서 책의 초반에는 사건 중심이 아니라, 이들의 어떤 이데올로기, 내부의 논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약간은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저자의 입장에서는 이는 꼭 필요한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내부논리를 어느 정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이 연합적군의 '숙청'이라는 사건에 다다르면, 우리는 그 사건을 피상적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미덕은 책의 저자 퍼트리샤 스태인호프가 외부인이라는 점이다. 사건은 1972년에 세상에 드러났고, 그로부터 약 40여년 간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일본의 각계에서 이 사건을 다루는 수많은 글들이 쏟아져나왔으며, 이 사건에 영향을 받은 수많은 소설 및 영화, 만화 등이 나왔다(와카마쓰 고지의 영화 <실록 연합적군>이나 야마모토 나오키의 만화 <레드> 같은 것이 그 예이다). 또한 사건의 주범격인 사카구치 히로시 등 수많은 관련자들이 아직도 옥중에서 혹은 외부에서 살아 있으며, 이들은 사건 후 '자기 비판'을 포함한 여러 이야기들을 꾸준히 쏟아내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에 공통점이 있다면 이는 모두 일본 내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들인 바, 이는 그 사건이 전후 일본사회에 끼친 영향력을 생각해 볼 때, 어쩌면 넓게 보면 모두 당사자들의 이야기들일 수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 스태인호프 교수는 다르다. 그는 미국인이며 이 사건들과 전혀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 그것은 단순히 국가적인 구분을 넘어서, 그녀가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이 책에서 공공연하게 드러내보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녀는 책의 곳곳에서 미국인으로서 특별히 다르게 느껴지는 점이나, 미국인으로서 사건을 바라보는 방식이나, 사건을 처리하는 방식에서 느껴지는 점들을 솔직히 밝히고 있으며, 또한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끝내 이해할 수 없는 점이나, 혹은 다르게 이해할 수 있는 점들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진압과정에서 미국의 경찰과 일본의 경찰의 차이에 대해 밝히고 있는데, 그것이 한편으로 이 사건의 진행에 미친 영향도 있음을 생각케 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 사건의 진행에서 일본 특유의 어떤 부분들이 미친 영향이나 혹은 우리가 쉽게 오해할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해 생각하도록 한다. 어찌되었건 이 책을 읽는 (거의) 모든 독자는 한국인이며, 이 사건에 있어서는 외부인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미덕은 사건을 벌인 그들을 '위험한 타자'로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건이 일어난 후 이 '숙청'을 둘러싸고 여러 각도에서 다양한 분석들이 나왔다. 그것은 예를 들어 조직 내의 권력다툼으로 희생자들이 나왔다, 혹은 배신자(스파이, 프락치)를 처단한 것이다 등등의 분석이 그것이다. 혹은 그들의 어떤 개인적인 특성에서 사건의 해답을 찾는 이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조직의 여성지도자였던 나가타 히로코의 어떤 히스테리컬한 면, 개인적인 마음의 상처에서 해답을 찾는 이들도 있었으며, 그것은 사건을 맡았던 판사가 그녀를 '마귀 할멈'이나, '마녀'라고 부르면서 재판을 통해 그녀를 공격한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그런 단순한 분석에서 벗어나 이들의 어떤 심리적인 기제를 추적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사회학자인 저자의 이력으로 볼 때 이채롭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저자는 오랜 시간 각종 기록 및 관련자들을 만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이들이 벌인 사건이 어떤 특수한 개인적 성향이나 권력다툼이나 배신자의 문제와 같은 특수한 사례가 아닌 어떤 조직 내에서든 일어날 수 있었던 일임을 밝힌다. 다만, 이것이 다른 사건들과는 달리 12명이나 숨지는 이렇게 거대한 사건으로 발전한 이유는 그 사건에 내재한 언뜻 사소해보이는 분기점들, 혹은 어떤 조건들 때문인데, 예를 들어 중간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사람이나 내부조직이 없었다는 점, 이들이 명분으로 내세운 '공산주의화 총괄'에 어떤 내부적인 기준이 없었다는 점, 그리고 이들이 막다른 출구에 내몰려 있었다는 점 등에서 그 이유의 일부분을 찾을 수 있다.

즉 저자는 책의 중간중간에서 계속 독자에게 말을 건다. 그것은 사건의 진행양상과 그것에 내재한 어떤 조건들을 보여주고, 그들이 그 과정에서 선택한 부분들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것인데, 그것은 독자들에게 이렇게 묻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이라면 여기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 것인가? 폭력에 의한 세계혁명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평균나이 23.3세의 젊은이들은 괴물이 아니었고, 거의 대부분이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의 선택은 누구나 갈 수 있는 길 중의 하나였다. 그들은 흔히 이야기하는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사소해보였던 순간의 선택들은 결국 그들을 구렁텅이로 내몰았고, 동료들을 죽인 살인자로 만들었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가 중요해지는 것은 우리들 중의 대다수 역시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이코패스 혹은 정신에 문제가 있는 자라고 규정하면 해답은 간단해진다. 그들을 우리와 '분리'하면 된다. 그것이 오늘날 그러한 해답들이 선호되는 이유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볼 수 있듯이 사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대부분의 경우에 사태는 엉뚱한 곳에서 촉발되며, 한 번 조건이 만들어지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진전되어 전혀 원치 않은 결말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것은 대부분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우리는 크든 작든 모든 조직들에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도 그렇다. 작게 보면 가족과 교우관계에서 넓게 보면 국가까지 우리는 어떻게보면 폐쇄적인 조직에 들어가 있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이야기한 어떤 '희생양'을 찾는 것은 아주 작은 조직에서부터 크게 보아 전 국가적인 사건에까지 이어진다. 이 '희생양'이 돌고도는 것, 이것은 크기를 막론하고 어떤 조직에서든 반복되며, 이것에는 연합적군에게 내부논리가 있었던 것처럼 나름의 내부의 논리가 있다. (이 부분을 놓고 이들의 사건을 일종의 '이지메'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까봐 하는 얘긴데, 사실 '이지메'와 크게 연관은 없다.)

물론 저자는(그리고 나는) 이들이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살아남은 이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으며, 그 책임은 무엇으로도 면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과거의 사건에서 어떻게든 교훈을 얻어야만 한다. 쉬운 결론으로 끝내는 것은 쉬운 반복을 초래할 뿐이다. 이들의 논리의 뿌리, 그리고 사건 당시의 이들의 심리적인 상황을 헤집는 것을 통해 앞으로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저자는 한편으로 그래서 이들의 사건 이후의 '자기 비판' 혹은 '전향'을 주의깊게 볼 것을 조언한다. 우리는 그것을 일종의 '반성'으로 받아들이지만, 그 '자기비판' 역시 이들의 내부논리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문제이며 외부에서 보는 '반성'과 다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먼저 인간에 대한 애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저자의 논의가 힘을 얻는 것은 무엇보다도 저자의 어떤 태도에 있다.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이들이 마지막 투쟁을 벌였던 길을 뒤늦게 돌아보며 안타까움과 동정과 경이로움과 희생자에 대한 슬픔과 같은 어떤 복잡한 심상에 젖는다. 이들의 시작은 더 좋은 세상으로의 변화를 향한 순수한 갈망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변화를 꿈꾸며 하루하루를 산다. 우리도 아마 그다지 다르지 않다.

이론 때문에 죽인 건지, 죽이고 나서 이론으로 정당화한 건지 그들도 구분이 안 가는 것 같다. (···) 이제 신좌파는 좌절할 수밖에 없다. 운동은 결국 그들이 이끌어 가고자 했던 방향과 반대쪽으로 나아갈 것이다.
- 마쓰모토 세이초

객관적 사실은 동지를 죽였다는 것이며. 동지의 눈에 비쳤을 '괴물'의 모습이야 말로 우리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혁명적이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그 모습이 진정한 자신의 모습임을 인정하고, 그 모습을 부정하고, 부정을 끝까지 완수했을 때 비로소 총괄의 첫걸음이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 반도 구니오(연합적군의 지도부), 감옥에서 나가타 히로코에게 쓴 편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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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3.07.23 21: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글을 읽다가 오래전 우연히 티비에서 본 어떤 장면과 나래이션이 떠올랐는데요 제가 본 건 산장여주인을 인질로 삼고 테러리스트들과 경찰이 대치한 상황들이었어요.지금도 분명히 기억하는건 일본에서 실제로 일어났고 당시 일본인 대다수가 티비를 통해 그방송을 시청했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는 말이었어요. 방송을 제대로 본 게 아니어서 그들이 연합적군파라는것도 몰랐고 그뒤론 관심을 두지도 않아서 까맣게 잊고 있었거든요. 오늘에서야 그 사건의 정확한 진상을 알게된거죠.

    맥거핀님의 리뷰를 읽고 적군파에 대해 좀 찾아서 읽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런일이 있었던거군요..

    적군파 여성리더중에 시게노부 후사코라는 사람이 있었나본데 그사람이 쓴 책중에 '사과나무아래서 너를 낳으려했다' 라는 책이 있더군요.

    인터넷서점들어가 발췌된 부분들을 읽어봤는데 왜 그들이 폭력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는지(폭력을 싫어하고 누군가를 죽인다는 걸 끔찍해하면서도) 그런 이유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더라구요.

    그 내부논리라는게 뭘까 싶어요.. 누구든지 한 끝 잘못 들어가면 괴물과 만나게되는 바로 그런 심연일까 싶기도합니다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3.07.25 00: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책에도 어느정도 그런 내용이 나오지만, 당시의 일본인들은 누구나 알고 있고,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지존파' 사건처럼요.) 동 시대의 일본인들에게 어떤 정신적인 트라우마를 주었달까요. 아마도 이 사건을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현대의 일본사를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라 봅니다.

      아무튼 폭력을 사용한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당시의 학생들에게 일종의 매력적인 조건으로 여겨지기도 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기도 합니다. 세계혁명을 앞장서서 이끄는 군사가 된다는 것이 일종의 매력적인 이미지로서 받아들여졌다는 거죠. 단지 일본 내에서의 투쟁에 머물지 않고, 전세계적인 혁명을 선도한다..뭔가 매력적으로 느껴졌을 것 같기도 합니다.

      아무튼 안타까운 일임은 분명합니다. 위에도 썼지만, 고작 평균나이 23.3세의 젊은이들이었으니까요. 아사마 산장에서 최후에 투쟁을 벌인 멤버에는 16세 소년이 포함되어 있기도 했구요. 나는 그 나이 때 무엇을 했을까, 혹은 현재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을 생각해보면 그들이 가졌던 어떤 확신들이 놀랍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 나이니까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요.

      시게노부 후사코의 책이 우리나라에 나와있을 줄은 몰랐군요. 아마 거의 죽을 때까지 감옥에 있어야 하는 걸로 아는데..(이 책에 보면 감옥에 있다가 '교환'되어 외국으로 탈출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외국 어디인가에 살아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나오는데, 그것을 보면서 마음이 복잡해지더군요.

거짓으로 밝혀내는 거짓의 메커니즘

The Book | 2013.03.18 17:01 | Posted by 맥거핀.
프라하의묘지.1움베르토에코장편소설
카테고리 소설 > 기타나라소설
지은이 움베르토 에코 (열린책들,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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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트 에코의 소설들은 늘 여러 겹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실, 사실적인 허구, 허구적인 사실, 완전한 허구, 사실들의 주석, 사실들의 허구적인 주석, 허구들의 사실적인 주석, 각종 기호들, 특정의 양식, 원본과 위본, 출처를 알 수 없는 이야기들, 생몰연대가 불확실한 인물들, 사물들의 연대기, 떠도는 풍문들 등등. 우리는 그의 소설들에서 늘 이것들을 구별해낼 수 없었고, 사실들과 허구들과 기호들과 이야기들과 풍문들과 진짜와 가짜, 그 사이 어디엔가에서 늘 길을 잃다가 에코가 선심쓰듯 마련해준 출구로 겨우 기어나오곤 했다. 사실 그곳이 제대로된 출구인지 전혀 확신하지 못한 채로 말이다. (아마도 대부분은 분명 잘못된 출구이거나 혹은 사실은 입구였을 것이다.) 즉 에코의 소설에는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이야기를 둘러싼 다른 어떤 것들이 존재했고, 그 존재를 파악하기가 힘든 것은 한편으로는 그 이야기를 하는 방식의 문제에서 연유한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소설을 '기호학적 실천'이라고 생각하는 그의 태도에서 상당수 비롯된다. 기호학은 상징이나 도상, 지표와 같은 것들의 의미 체계를 연구하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그것이 지시하는 어떤 것보다, 그 기호 자체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기호학은 그것이 의미하는 어떤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 그 기호체계 자체의 규약을 찾아내려고 하지만, 때로는 그 기호가 의미하는 어떤 것보다 기호 자체의 작동이 더 큰 다른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에코의 소설에서 그 이야기 자체는 짐짓 어디에선가 발견된 원본의 일부라던가, 혹은 필사본이라던가, 숨겨진 내부의 문건들이라는 식의 형태를 띠었고, 그것은 이 소설 <프라하의 묘지>도 마찬가지이다.  

<프라하의 묘지>는 크게 세 가지의 문건이 뒤섞여 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거짓과 위조를 일삼으며 거짓된 문서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살아가는 공증인 시모니니가 기억을 잃은 채로 자신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적어내려가는 일기가 그 하나이고, 그의 가까이에서 살면서 그 시모니니의 일기를 읽으며 거기에 자신의 생각을 첨부하는 역시 기억을 잃어버린 달라 피콜라 신부의 기록이 그 하나이며, 다른 하나는 이 두 개의 문건을 후대에 입수한 어느 이름모를 화자(물론 에코 자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가 재구성한 기록이 그 하나이다. 그런데 에코는 이 세 개의 문건을 분리된 플롯으로 구성하지 않고, 이 세 명의 화자가 번갈아 등장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뒤섞는 형태로 플롯을 구성하고 있는데, 이는 또 각각의 분절적인 사건이 계속 이어지는 형태를 취함으로써, 19세기 신문 연재소설의 형태를 연상시킨다. 또한 여기에 에코는 자신의 장기를 발휘하여 19세기 대중소설의 문체를 모방함으로써 독자에게 읽는 재미를 더해 주도록 노력하고 있기도 하다. 플롯이 아닌 스토리로 보면 이 <프라하의 묘지>는 공증인 시모니니의 거짓와 사기, 조작으로 점철된 일대기이며, 동시에 반(反)유대주의 문서인 '프로토콜'의 탄생 과정인데, 여기에서 에코는 이 스토리와 이 고유의 형식을 결합시킴으로써 이 소설을 단지 형식의 과시 이상의 것으로 이끌고 있다.

즉 에코는 이 소설에서 '프로토콜'이라는 실제로 존재하는 문서, 이 반유대주의로 점철된 문서가 단지 조작과 거짓과 사기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혀내기 위해, 그 기원을 추적하는 것처럼 만들어진 이 소설 <프라하의 묘지> 자체를 일종의 거짓 문서, 위작처럼 보이도록 만들고 있다. 이를 일종의 내용과 형식의 결합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이는 하나의 문서가 얼마나 말도 안되는 허구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지를 밝히기 위해, 그 문서를 둘러싼 모든 것, 그러니까 그 문서를 만들어낸 시모니니라는 저자의 모든 것을 허구로 받아들이도록 독자를 이끄는 것이다. 즉 에코는 이 내용이 거짓임을 보여주기 위해 '이것이 거짓이다'라고 독자에게 간단하게 이야기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형식을 거짓되게 만들어냄으로써 독자가 읽는 과정에서 스스로 '이것이 거짓임'을 깨닫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조금 다른 얘기일지도 모르지만 예를 들어 이러한 것을 말할 수 있다. 알렉산더 페인의 영화 <디센던트>에서 초반부에 '하와이를 단지 휴양지로만 여기지 말라, 여기에도 다 나름의 삶이 있다'는 주인공의 말이 나온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가장 의아한 것은 그럼에도 이 영화는 하와이를 휴양지처럼 '보이게' 찍었다는 것이다. 그 내용과 그 보여주는 것이 다를 때, 우리는 그 영화에서 최종적으로 무엇을 받아들이게 되는가. 이것이 소설의 경우라면 어떨까.)

물론 여기에서 주의할 점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이 자체가 거짓으로 보이기는 하되, 이것은 완전한 허구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 문서 '프로토콜'은 허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아우슈비츠로 되돌아왔기 때문이다. 즉 이 책 26장의 제목이기도 한 히틀러의 '마지막 해결책'이라는 실제로 되돌아왔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I, 11)에서 이렇게 썼다. "그 민족의 삶이 끊임없는 거짓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저 유명한 <시온 장로들의 프로토콜>에 분명하게 나와 있다. <프랑크푸르터 차이퉁>은 매주 징징거리며 주장하기를, 그 문서가 허위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그 문서가 진짜라는 가장 훌륭한 증거이다. (......) 그 책이 온 국민의 공동 자산이 될 때에는 유대 민족의 위험이 제거된 것으로 여겨도 되리라." - p.766) 그리고 어떤 것이 완전한 허구라고 여겨지는 순간, 그 실제로 일어났던 어떤 것(예를 들어 제노사이드)마저도 마치 허구인 것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코는 시모니니를 제외한 거의 모든 인물을 실제의 인물들로 배치하고, 실제 일어났던 사건들, 즉 예로 들어 가리발디의 원정이라던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파리 코뮌, 드레퓌스 사건 등에 이 시모니니를 깊숙하게 개입시킨다. 즉 실제의 사건 속에 단 하나의 거짓 인물을 투입함으로써 그의 거짓이 더욱 도드라지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적절하게 효과를 거두며, 그것은 물론 이런 사실적인 허구, 혹은 허구적인 사실이 에코의 장기이기 때문이다.

그 허구처럼 보이는 사실, 혹은 사실처럼 보이는 허구, 즉 사실과 허구를 뒤섞는 것은 에코의 장기일 뿐더러 동시에 이 주인공 시모니니의 장기이다. 시모니니는 위조된 문서를 만들어 내는 몇 가지의 원칙을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그것은 예를 들어 어떤 자에게 무엇인가를 믿게 하려면,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라 그가 이미 믿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한다는 것, 적당한 적을 설정하여, 읽는 이의 분노를 그것에 집중시켜야 한다는 것, 혹은 한번에 한가지에 대해서만 혐오감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 그러나 그러면서도 동시에 어떤 읽는 이의 흥미 혹은 재미를 돋우어야 한다는 것 등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런 것이야말로 이 소설 <프라하의 묘지>가 가지는 전략이다. 이것은 소설의 초반부부터 전개되는데, 주인공 시모니니는 프랑스인, 유대인, 독일인, 러시아인, 공화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 사제들, 여자들 등 자신 외의 거의 모든 집단들에게 혐오감을 내비치며, 그들 모두를 번갈아 적당한 적으로 등장시키면서 어떤 분노가 단계적으로 옮아가도록 한다. 동시에 그가 적으로 설정하는 음모나 꺼림칙한 것들로 가득한 집단은 그가 만들어낸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사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미 믿고 있는 프리메이슨회나 예수회, 유대인들 등에 대한 어떤 것에서 기초한다. 즉 에코는 이 소설 <프라하의 묘지>에서 시모니니가 구사하는 위조의 전략을 이미 충분히 이용하고 있다.

이것을 이렇게 말할 수 있는데, 다시 말해서 에코가 원하는 것은 이 소설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왜냐하면 이 자체가 한 권의 위조된 문서이며, 거짓된 기록이기 때문이다. 보통의 소설은 읽는이가 주인공에 동화되어 그의 행동을 이해하고, 그와 함께 사건의 전모를 상세하게 이해하는 데 그 목적이 있지만, 이 소설은 반대로 주인공을 혐오하게 하거나, 그가 벌인 거짓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는 것, 즉 이치에 닿을 수 없도록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그것을 위해서 에코는 몇 가지의 전략을 쓰고 있는데, 앞에서 말한 플롯을 복잡하게 구성하거나, 사건을 분절시키거나 하는 것들도 그러하거니와 죽었던 인물, 혹은 죽었다고 믿어졌던 인물을 다시 등장시키거나, 매번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키는 것 등도 그러하다. 즉 이 소설의 줄거리가 아무리 읽어도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작가 에코가 (의도한 바대로) 그것을 읽는 이에게 이해시킬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주인공 시모니니의 미식의, 아니 식탐의 기록을 나열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가 먹는 음식의 아주 상세한 레시피를 정밀하게 기록하는 것은 독자의 식욕을 돋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식욕을 멈추게 하여 안 그래도 정나미 떨어지는 모두까기인형 시모니니에 대한 독자의 혐오감을 북돋우는 데에 그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는 타락한 영혼의 소유자인 시모니니의 탐욕한 모습을 극대화시키고, 동시에 이러한 음식문화에 담긴 어떤 근대적인 탐욕을 밝히는데에도 그 목적이 있다.)

<프라하의 묘지> 마지막 장을 덮고 우리는 묻는다. 지금까지 내가 읽은 것은 무엇이지? 이 이야기를 어디까지 믿어야 하지?  왜냐하면 알 수 없는 기원을 파헤친다고 들려준 이 이야기 자체가 도리어 알 수 없는 기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이 수많은 이야기들이 어떤 다른 것에서 기원된 것임을 알게 되지만, 그 기원에 근처한 이야기들 거의 대부분 역시 다른 소설들, 그러니까 다른 이야기들에서 기원한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이렇게 물을 수 밖에. 그렇다면 그 기원에 근처한 이야기들은 또 무엇에서 기원한 것인가? 그리고 이 질문은 아마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늘 그 반대에 위치한 질문들,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어디까지 믿어야 하지,가 아니라, 어디까지 이 이야기를 믿지 말아야 하는가,라는 회의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거짓의 메커니즘이 실제와 같이 굴러간다고 해도, 다시 말해서 그 메커니즘이 진실이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만들어져 있다고 해도, 그 메커니즘의 재료가 거짓인 한 그 끝에는 결국 거짓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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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3.03.18 21: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꽤 오래전에 <장미의 이름>을 읽었었는데요, 그땐 소설속의 허구적 이야기들이 12-13세기에 정말로 일어남직했던 사건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아드소나 윌리엄 같은 수도사는 실제로 존재했었고 구체적으로 묘사된 당시의 수도원의 실상들도 사실처럼 여겼졌었죠. 허구와 실제의 경계가 구분이 안될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글을 읽다보니 <프라하의 묘지> 는 작가가 오히려 독자로 하여금 믿음보다는 의심하고 회의하도록 의도한 소설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하지만 꽤 흥미진진할 것 같아요 ^^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3.03.19 23: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예전에 <장미의 이름>을 읽으며, 그 이야기에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읽으면서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이기에 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물론 그 이후에 에코의 명성은 널리 알려졌지만요.

      <프라하의 묘지>도 마치 우리가 그 당시에 그 장면을 보고 있는 듯한 사실에 기초한 정밀한 허구들이 사로잡는 부분이 있어요. 그런데 제 느낌에는 에코가 일부러 곳곳에 과잉을 보여주는 듯한 느낌이 있더군요. 이래도 안 질려? 이런 느낌으로요.

빛보다 빠른 텔레파시가 가능할 날

The Book | 2012.12.03 16:19 | Posted by 맥거핀.
얽힘의시대대화로재구성한20세기양자물리학의역사
카테고리 과학 > 물리학
지은이 루이자 길더 (부키,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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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자 길더의 이 책 <얽힘의 시대>는 양자물리학의 근본 개념 중의 하나인 '양자 얽힘' 현상과 그의 역사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이지만, 이 책을 다 읽은 나에게 그렇다면, 양자물리학, 양자얽힘 현상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했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할 것 같다. 이 책을 읽음으로서 조금이라도 알게 되는 단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양자물리학의 세계는 매우 복잡하고, 어지러우며, 그것을 이해하기는 매우 힘들다,라는 점이 아닐까. 그러나 문제는 아직 남아있다. 그것은 그 '이해못함' 마저도 이해했는지가 불확실하다는 점, 즉 '양자물리학이 복잡하고, 어지럽다'는 사실 자체를 이해했는지의 여부마저도 상당히 불확실하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일찌감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좌절할 필요는 없다. 위대한 물리학자 보어마저도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으니까. "만약 양자론에 대해 어지럽게 느끼지 않는다면 당신은 양자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이치에 누구보다도 가깝게 다가간 아인슈타인마저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아인슈타인은 그가 1935년 포돌스키, 로젠과 함께 발표한 논문(EPR)에서 양자역학은 불완전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즉 그마저도 양자역학의 모든 비밀을 밝혀내지도, 그러므로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했으며 그가 이런 견해를 밝히게 해준 '양자 얽힘' 현상은 그로부터 몇십 년 후 존 벨과 일단의 물리학자들에 의해 그 면모가 조금씩 드러나게 된다. 

양자물리학이 그렇게 이해가 어려운 까닭은 무엇인가? 이 책을 읽고 난 후 어렴풋하게 생각하게 된 몇 가지를 이야기해 보면 그것의 이유 중의 하나는 양자물리학의 세계에는 그간 우리 세계를 작동시킨다고 믿어졌던 일반적인 원칙, 고전물리학의 법칙, 또는 만물의 근본적인 작동 원칙에 반하는 몇몇 현상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고전물리학의 법칙에 일차적으로 균열을 일으킨 것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다. 그러나 이 양자물리학은 이 상대성이론의 몇몇 원칙들과도 잘 들어맞지 않는다. 양자물리학은 양자의 세계, 그러니까 극소의 세계, 에너지와 물질이 더 작은 조각으로 나누어질 수 없는 궁극적인 조각인 양자의 성질에 대해 다룬다. 그런데 이 양자의 세계에서는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와 무엇인가 다른 일들, 우리가 그간의 상식으로 '그러하다'고 여기는 일들과는 다른 일들이 벌어진다. 그 큰 부분이 바로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양자의 '얽힘' 현상이다. '얽힘'은 아주 간단하게 말해서 '둘 이상의 물질이나 빛이 떨어져 있어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는 물리학의 토대가 되었던 '국소적 인과성'을 가지지 않을 뿐더러, '관찰과 무관한 실재'도 아니다. 

즉 양자역학 이전의 물리학은 국소적인 인과성이나 관찰과 분리된 실재라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인과성이란 말 그대로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는 것이며, 이는 물리학의 세계에서는 국소적 영향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그간의 믿음이다. 즉 한 물체는 오직 국소적인 연쇄 작용에 의해서, 다시 말해서 한정된 시공간에서의 연쇄 작용에 의해서 다른 물체에 영향을 미치며, 따라서 그 영향은 빛의 속력보다 빠를 수 없다(빛보다 빠른 물질은 없으므로). 예를 들어 우리가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본다면 그의 음파가 그의 성대에서 출발해 우리의 고막에 도착했기 때문이며, 그 속도는 당연히 빛의 속도보다 느리다. 그러나 양자 얽힘 현상에서는 두 광자가 아무리 먼 거리를 떨어져 있어도(비국소성), 어떤 동시적인 운동방식을 보인다. 물론 이 동시성을 어떤 무선통신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즉 한 광자가 자신이 운동하기 전 '재빨리' 다른 광자에게 어떤 것(그러니까 데이비드 봄이 이야기한 '양자 포텐셜'과 같은 것)을 보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 있으려면 그 '재빨리'는 빛보다 훨씬 빠른 '재빠름'이어야만 한다. 겨우 빛의 속도로 전파되는 물리적 신호로는 그런 현상(얽힘 현상의 동시성)을 설명해낼 수 없었다. 다시 말해서 완전히 다른 계에 있는 두 광자라도 한 번 얽히게 되면, 그 얽힘이 아무리 먼거리에서도 계속 유지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말이 안되는 것인지 생각해 보라. 예를 들어 오늘 아침 당신이 출근길에서 만난 한 사람과 우연히 옷깃이 한번 스쳤을 뿐인데, 그 이후로 두 사람이 얼마나 떨어져 있든 동일한 운동패턴, 혹은 동일한 상태를 보인다는 것, 그것이 무엇으로 가능하단 말인가? 빛보다 빠른 텔레파시? 

더군다나 이는 관찰과 분리된 실재도 아니라는 것이 문제다. 물리학은 아니 우리의 세계는 분리가 가능하다는 믿음, 그러니까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으며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아인슈타인의 말)를 가정하고 이루어진다. 즉 예를 들어 우리가 무엇인가를 관찰할 때(물리학 때문이든 다른 어떤 것 때문이든), 그것은 관찰자의 외부에 분리된 실재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양자얽힘에서는 이것이 보장되지 않는다. 양자의 세계에서는 한 양자의 운동량과 위치를 동시에 알 수가 없으며(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 그것은 어떤 확률에 의해서만 기술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면, 그것의 실재에 대해서 의심할 수밖에 없다. 어떤 것이 확률로서만 존재한다면 그것은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또한 그 확률이란 측정의 확률, 관찰자의 확률이기 때문에 관찰자와 관찰대상은 비분리된다. 슈뢰딩거의 실험에서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살았을 수도 있고, 죽었을 수도 있으며, 그것은 오직 관찰자가 보았을 때에만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관찰자가 보지 않았을 때에는 이 고양이는 살았는가, 죽었는가? "전체 시스템에 대한 파동함수는 이 상황을 설명하면서 살아 있는 고양이와 죽은 고양이가 섞여 있거나 스며들어 (이런 표현을 써서 죄송하지만) 있다고 할 것이다.(p.294)" 즉 고양이의 생사는 관찰행위의 영향을 받는다. 다시 말해서 이런 관점에서는 양자적 실체들은 관찰되기 전까지는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또 얼마나 웃긴 소리인가? 관찰자가 관찰대상에 영향을 미치다니? 그것이 무엇으로 가능하다는 말인가? 역시 텔레파시? "이에 대해 아인슈타인은 터무니 없는 발상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보지 않으면 달이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p.30)"

그러나 아무튼 문제는 양자물리학의 세계에 있어서 이 터무니없는 현상들이 실제로 '측정'된다는 데에 있다. 아인슈타인이나 보어, 드 브로이, 슈뢰딩거 등의 이론물리학자들의 세계에서는 사고실험(생각으로만 이루어지는 실험)에서 나타나던 것들이 존 벨이나 클라우저, 혼 등의 실험물리학자들의 세계로 넘어오며, 그러한 얽힘 현상은 실제로 실험실에서 나타났으며, 그것의 작동원리의 여러 부분은 많은 물리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의문 속에 남겨져 있다(예를 들어 그 의문 중의 하나는 양자세계에서 일어나는 얽힘 현상이 왜 그보다 큰 물질, 그러니까 양자들이 합쳐진 보다 큰 물질에서는 일어나지 않는가 등등이다. 차일링거 등은 이를 실험으로 증명하려 한다). 그래서 아직도 어떤 물리학자들은 말한다. 양자역학은 (아인슈타인의 견해와 같이) 아직도 불완전하다고. 고전물리학은 물론이고, 상대성이론마저도 아주아주아주 쉽게 설명한다면 중고생들에게도 그것의 본질을 이해시킬 수 있지만, 양자물리학에 대해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양자역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폴 디랙의 견해로는, 그러므로 현재는 양자물리학의 풀리지 않는 여러 문제가 이해되기에는 아직 이른 시기이기이며(1급 난이도 문제- 현재로선 해결될 만한 여건이 성숙하지 않은 문제), 얽힘 현상의 구성에 큰 기여를 한 존 벨마저도 이러한 것을 1964년 마이클 나우엔버그와 공동으로 쓴 논문 <양자역학의 도덕적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양자역학적 설명은 대체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 이론은 인간이 만든 모든 이론들과 마찬가지다. 특이하게도 그 이론의 최후 운명은 그 내부 구조에 명백히 잠재해 있다. 그 자체에 파괴의 씨앗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p.540)" 

그렇다면 양자역학은 단지 어렵고 불완전할 뿐인, 언젠가 다른 것(예를 들어 초끈이론)으로 대체될 한정적인 이론일 뿐인가? 분명히 그렇지는 않다. 모든 물리학은 과거의 이론에서 얻어진 어떤 것들을 가지고 새로운 것들로 발전해나가며, 그것이 과거의 이론을 모두 뒤집는 어떤 것이라도, 그것은 과거의 그 이론 없이는 탄생되지 않았다. 양자물리학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며 그것은 고전물리학과 상대성이론의 어떤 것들을 바탕으로 해서 그 토대가 만들어졌다. 이를 이렇게 이야기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루이자 길더의 이 책 <얽힘의 시대>는 양자물리학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그 이야기하는 방식은 조금 특이하다. 책의 각 장은 특정의 한 시기에 이루어졌던 실제의 대화, 실제의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있으며, 그 수많은 대화들의 장면이 중첩되어 이 양자물리학의 역사가 만들어진다. 즉 이것은 거시적인 양자물리학의 역사가 아니라, 미시적인 양자물리학의 장면들의 집합이다. 다시 말해서 이 미시적인 장면들은 모두 이 거시계 속에서 '얽혀 있다'. 그것은 개별적인 물리학자들의 입장에서 보아도 그렇다. 양자물리학의 역사를 만들어낸 이 물리학자들은 책 속에서 모두 각자 나름의 역사를 부여받고 있으며(이 책은 모든 학자들에 대해 '그들이 왜 양자물리학에 빠져들게 되었는가'의 관점으로 그들의 약사(略史)를 기술한다), 이들은 양자물리학에 한 번 얽히게 된 이후에는 평생 그 양자물리학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들은 그렇게 얽혀 있었다. 즉 양자물리학이라는 것에 한 번 얽힌 이후에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 미스테리에 대해 동시에 골똘히 생각했다. 그들은 비국소적인 개체로서 얽혀 있었다. 이를 보다 더 큰 관점으로 보면 양자물리학은 고전물리학과 상대성이론과도 얽혀 있다. 즉 하나가 사라졌을 때 다른 하나가 존재할 것이라 가정할 수 없다.   

(책에서 한편으로 실제적인 양자물리학의 가치로서 이야기하는 예들은 양자컴퓨터, 양자를 이용한 암호와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파인먼에게 있어서는 그 양자컴퓨터의 가치 또한 그것의 어떤 실생활에서의 목적보다는(양자컴퓨터는 일반 컴퓨터에서 상상할 수 없는 속도의 연산이 가능하다) 한편으로는 양자역학의 비밀을 밝혀내기 위한 것으로서의 가치였다. "파인먼에게 있어서 양자 컴퓨터가 지닌 위대한 의미는 그것을 만들고 작동시킴으로써 벨이 제시한 서로 관련된 입자들에게 대한 수수께끼를 풀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p.533)" 즉 이것은 양자컴퓨터가 어떻게 작동하는가, 그것이 무엇을 보여주는가가 양자론의 작동방식을 보여줄 수도 있다는 의미는 아닐까. 즉 물리학자들이 가지는 양자역학에 대한 난점을 '실제로 그것이 획기적으로 작동하는 어떤 방식'을 봄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는 (고전물리학적인) 귀납적인 믿음으로의 회귀라고나 할까.) 

마지막으로 이 얘기는 하고 끝내고 싶다. 양자컴퓨터나 양자를 이용한 암호 등의 예에서 보듯이, 양자론, 양자물리학의 가치는 무한하다. 양자컴퓨터나 양자 암호 등의 발전 정도가 아직 무궁무진하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19세기의 이론물리학자인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도 "전기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p.536)), 다른 많은 부분에서도 양자물리학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작가 루이자 길더는 마지막에 이를 일종의 유머로서 살짝 암시한다. 책의 마지막에서 양자론의 비실재성과 인간중심성(관찰자가 존재하여야 한다는)에 의문을 제기하는 물리학자 테리 루돌프는 물리학자가 된 후에 어머니에게 숨겨진 비밀 하나를 듣게 된다. 

외할머니는 아주 순진한 아일랜드 카톨릭교도였는데 스물여섯 살 때 나이가 훨씬 많은 남자와 관계를 가진 후 임신을 했다고 한다. 처녀의 몸으로 딸을 낳은 후 아이 아버지가 달라고 하자 아이를 그에게 주었다. 하지만 딸과 떨어져 지낸 지 2년이 지난 후 더블린의 한 공원에서 유모가 이끄는 유모차에 실려 있는 자기 딸과 우연히 마주쳤다. 외할머니는 유모차에 있는 딸을 낚아챈 다음 그 길로 딸과 함께 멀리 남아프리카로 떠났다.
그런데 1년 전에 처음으로 얽힘 현상에 대해서 알게 되어 그 결과 물리학 연구에 헌신하게 된 스물한 살의 루돌프는 이 이야기를 통해 비로소 자기 외할아버지가 슈뢰딩거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p.550)


전혀 다른 환경에서 아무 교류도 없이 오랜 기간 자라난 청년과 그의 외할아버지가 모두 물리학에 그것도 양자물리학에 헌신한다는 것, 이 미스테리에 담긴 것이야말로 얽힘 현상의 (보다 큰 물질에 있어서의) 재현이 아닌가. 얽힘 현상은, 그리고 양자물리학은 언젠가 세상의 모든 비밀을 밝혀낼지도 모른다. 그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빛보다 빠른 텔레파시가 가능할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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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는 것보다 미친 것이 낫다

The Book | 2012.11.25 22:37 | Posted by 맥거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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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인문 > 심리학
지은이 대리언 리더 (까치,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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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시작은 '미친 것(being psychotic)'과 '미치는 것(going psychotic)'을 구분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할 것 같다. 간단히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최대한 간단히 말해보면 '미친 것'은 이 책에서 말하는 '조용한 광기(quiet madness)'의 상태이다. 즉 정신병을 가지고 있으나 그 정신병이 눈에 보이는 현상, 증상으로 나타나지 않거나, 이상행동으로 촉발되지 않은 상태이다. 반면 한편에 있는 '미치는 것'은 우리가 흔히 아는 정신병의 상태이다. 어떤 망상을 가지고 있거나, 특이하고 반복된 행동을 보여주거나, 이상한 말을 하거나, 심지어는 살인을 저지르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이를 이렇게 나눌 수도 있다. 미친 것은 일상 생활과 완전히 양립이 가능하며,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일반인보다 더한 일반성을 보여주지만, 미치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 광기가 촉발되므로 그럴 수가 없다. 이런 예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우리 인간을 하나의 시계라고 생각해보면 '미친 것'은 예를 들어 정확하게 항상 5분이 늦는 시계이다. 항상 5분이 늦는 시계를 보며 우리는 정확한 시간을 알아내는 것도 물론 가능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은 분명 정상적인 시계라고 볼 수는 없다. 즉 그것은 매순간 정확하게 작동하고 있지만, 분명히 커다란 무엇인가가 어긋나 있다. 반면 '미치는 것'은 가끔 10분이 늦어지다가, 갑자기 5분이 빨라지다가, 혹은 바늘이 하루에 20바퀴를 돌기도 하는 그런 시계다. 즉 우리는 그 시계를 보고는 도저히 정확한 시간을 알 수가 없다. 물론 이 시계 역시 앞의 시계와 마찬가지로 무엇인가가 어긋나 있다. 즉 분명한 것은 두 시계 모두 무엇인가가 고장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까지의 이야기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사실이며, 그것을 정확히 밝혀내는 것이 상당히 어렵다는 사실이다. 즉 '미친 것'과 '미치는 것'을 그렇게 쉽고 간단하게 나눌 수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예스라고 대답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며, 그와 연관하여 이 사람이 미쳤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판단하기도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망상을 하나의 예로 들어 본다면, 우리가 흔히 망상을 가지고 있거나, 헛소리를 하는 사람을 보면, 정신에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망상은 그가 정상생활을 하는 데에 큰 버팀목이 되기도 하고, 도리어 그것은 정상으로 돌아온 증거가 될 수도 있다. 또한 '미친 것'을 일상생활과 양립이 가능하며, 그들 대부분의 경우 정상인에 거의 완전하게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고 했을 때, 그들이 '미친 것'이라고 어떻게 규정할 수 있겠는가? 예를 들어 책에 나온 에른스트 바그너의 사례를 보면 그는 1913년 9월 4일 밤에 자식 4명과 아내의 경동맥을 끊고, 뮐하우젠 마을로 가 9명을 사살하고, 12명에게 상해를 입히기 전까지 모범시민이자 가정을 소중히 하는 남자로 전혀 광기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는 말 그대로 미쳐 있었다. 즉 그가 광기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미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는 그 이전부터 미쳐 있었다. 그러니까 다시 시계로 돌아가본다면 '그'라는 시계는 매시 매순간 정확히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의 시계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는 말이다. 누군가 정확한 시간을 알아내기 전까지 말이다.

그래서 아마도 이 책의 저자 대리언 리더가 비판하는 정신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새로운 흐름이 나타난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저자 대리언 리더는 환자 한명 한명의 세세한 사례에 주목하고, 그들에게 세밀한 정신분석을 실시하고, 그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정신병적인 구조가 생겨나게 된 이유와 그것이 촉발하게 된 과정에 대해 분석하는 1950년대 이전 과거의 방식을 긍정하며, 현재와 같은 정신병의 진단과 치료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정신병의 눈에 보이는 증상에 주목하고, 그것을 하나의 질병으로 간주해 약이나 수술 같은 것으로 치료하려는 현재의 흐름을 저자는 비판한다. 그렇게 눈에 보이는 증상은 환자에 따라 모두 다르므로, 정신병이라는 진단의 가짓 수는 점점 늘어나게 되고, 그렇게 눈에 보이는 증상만을 약물로서 치료하려 하다보니 도리어 약에 반응할 것으로 예상되는 증상만이 연구되기 시작했다. 즉 이 책에서 말하는 '조용한 광기'는 어떠한 눈에 보이는 증상도 나타나지 않으므로 점점 정신의학계의 관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저자의 관점대로 보면, 이는 매우 위험한 것이다. 앞에서 말한 에른스트 바그너와 같은 극단적인 사례를 굳이 예로 들지 않더라도, '미친 것'의 상태를 정확히 알아내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증상에만 대증적인 처방을 하는 것은 정신병을 더 심화시킬 뿐만 아니라, 환자와 주위 사람들을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자가 시도하는 방식은 일단 정신병과 신경증을 구분하고(즉 '미친 것'이 어떠한 상태인지를 규명하고), 정신병을 큰 세 가지 줄기, 즉 정신분열과 편집증과 우울증으로 나누는 것이다. 신경증과 정신병을 나누는 것은 여러가지로 가능하겠지만, 이 책에서 나누는 방식 중에 하나는 프로이트가 말한 외상을 다루는 방식이다. 신경증자에게 외상은 억압된다. 대표적인 억압의 방식은 기억상실이나 대체이다. 즉 신경증자들은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히스테리나 강박으로 대체한다. 그러나 정신병자는 이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폐제(forclusion)한다. 즉 그런 생각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행동한다. 다른 말로 하면 억압한다는 것은, 그것이 생각 속에 어떻게든 남아 있다는 것이다. 즉 생각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망각되거나 대체하려는 노력이 일어난다. 그러나 정신병자의 폐제는 그것이 아예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외상은 폐제로 인해 완전히 없었던 것 같지만, 어떠한 계기로 인해 촉발되면 나중에 실물로서 실재계로서 정신병자에게 돌아온다. 이를 위해서는 라캉의 상상계와 상징계, 실재계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데, (여기서 자세히 논할 수도 없고, 논할 능력도 없지만) 간단하게 상징계는 언어와 법의 세계, 상상계는 몸의 이미지의 세계, 실재계는 몸의 리비도, 즉 흥분이나 자극으로 볼 수 있고, 상징계가 기능을 하지 못하거나 상징계에 무엇인가(예를 들어 외상)를 통합할 수 없을 때, 정신병이 생겨난다. (상징적 질서의 큰 부분은 '말(언어)'이 차지하고 있으므로 또한 이 책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은 정신병자의 말과 논리에 대한 부분이다.)

이를 라캉이 새롭게 해석한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fus complex)와 연관지어 살펴볼 수도 있다. 아버지의 남근에 대한 거세 위협으로 남자아이가 엄마를 오이디푸스처럼 사랑하지 못하게 되고, 반명 여자아이는 남근 덕분에 아버지를 사랑하게 된다는 이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라캉에 의해 조금 변형되었다. 즉 라캉은 이를, 아이가 상상계의 수준에서 엄마를 위한 팔루스(phallus, 남근상)가 되는 것을 포기해야 하지만, 상징계의 수준에서 팔루스를 가지거나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다시 말해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상상계의 수준에 남아있지 않고, 상징계의 수준으로 통합됨으로써 아이의 정신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이 상징계에 위치함으로 인하여 의미를 새로 세우고, 몸의 리비도가 활동할 영역을 제한하며, 타자(the Other)와의 거리를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이 상징계의 통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정신병이 나타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상징계가 아니라 상상계나 실재계에서 일어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물론 그것은 근친상간으로 금기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바로 정신병적인 형태로 말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정신병은 정신분열증과 편집증, 우울증의 크게 3가지로 나타날 수 있으며, 이는 각각 조금씩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실제로 이 3가지를 나누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며 상당히 복잡하다. 정신분열증자에게 의미는 불안정하며 분명하지 않다. 박해자(정신병자가 자신을 박해한다고 여기는 무엇)는 몸의 내부에 있거나 외부에 있을 수 있으며, 때로 신체감각의 통일성을 잃으며, 리비도는 몸에 집중된다. 반면 편집증자에게는 의미는 좀더 명확하며, 리비도는 박해자에게 집중된다. 즉 박해자는 편집증자에게 있어서는 항상 외부에 있다. 예를 들어 위에 논한 에른스트 바그너의 경우에 편집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주위 사람들과 자신이 죽인 뮐하우젠 마을 사람들이 자신을 박해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들 안에 있는 (자신을) 박해하는 잘못된 무엇인가를 제거하고 싶어했다. 반면 우울증자는 편집증자의 거울상이다. 우울증자의 경우 리비도는 자신의 이미지 안에 있다. 우울증자는 자신을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비하한다. 즉 편집증자에게는 잘못은 타자에게 있지만, 우울증자에게는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때로는 자신을 없어져야 할 존재로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이는 가장 간단하고 획일적으로 말한 것이며, 실제로는 사태는 훨씬 복잡하다. 우울증과 정신분열과 편집증의 차이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 오랜시간 살펴보아야 하며, 이를 진단하는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아무튼 이렇게 정신병의 원인과 증상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은 각각의 경우에 맞게 올바르게 대응하기 위함이며, 정신병자와 주위 사람들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함이다. 즉 문제는 그들을 치료한다, 정상인으로 만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정신병 문제를 처음으로 다루었을 때 모든 스승들이 "정신병을 완전히 낫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릴 것"을 충고했다고 한다. 즉 저자가 긍정하는 예전의 정신의학 전통으로 돌아가보면 타임머신을 타고 그가 태어난 바로 그 순간으로 돌아가지 않는 한 정신병이 없는 상태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정신분석들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즉 그를 '미치는 것'이 아니라, '미친 것'의 상태, 그러니까 정신병이 있기는 하지만 정상생활이 가능한, 거의 보통인과 구별할 수 없는 상태로 되돌리는 것은 가능하다. 그것의 방식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예를 들어 정신병자 스스로가 정신병을 다스리는 방법에서 힌트를 찾을 수도 있다. 정신병자는 자신의 정신병을 다스리기 위해서 몇 가지 기제를 쓰는데 대표적인 두 가지가 안정화와 창작이다. 안정화(동일시)는 예를 들어 자신을 어떤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신에게 이상적 이미지를 덧붙이는 것이다. 일례로 자신을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위대한 소설가라던가, 외로운 등반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창작은 어떤 상징적 질서나 새로운 체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신조어를 만들어내는 것이 대표적인 예인데, 정신병자는 어떤 특정 신조어를 창작해냄으로써 어떤 예외의 공간, 자신만이 도피할 수 있는 빈공간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흔히 정신병자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릴 때, 그를 '완전히 미쳤구나'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반대로 정신병자가 자신을 어떻게든 다스리려 하는 것, 정상생활이 가능한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생각하게 되는 것은 정신병의 문제는 실로 복잡하고, 수많은 사례와 수많은 분석을 통해서 접근해야 하며 그렇게 하더라도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아마도 그것이 대리언 리더가 원하는 것일 터이다. 이 책을 쓸 때 저자의 목적 중에 큰 하나는 정신병이 약이나 수술로서 처방이 가능하다는 현재 정신병을 다루는 주류적인 시각에 경종을 울리기 위함일 것이며, 환자 각각의 사례와 그의 정신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충고일 것이다. (물론 한편으로 중요한 것은 정신병을 이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정신병이 매우 복잡하고 다루기 어려운 것이라는 전대의 경험, 그러니까 대리언 리더가 칭송하는 이 예전의 경험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며, 이 정신분석들 역시도 어떤 위험을 여전히 내포한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책에서 두 번째 사례연구로 든 판케예프의 경우가 좋은 예일 것인데, 그가 정신분석가들의 어떤 분석이나 치료로서 좋아진 것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가 정신분석가의 동료로서의 위치를 점해서 좋아졌다는 이 사실 자체가 아이러니하게도 정신분석의 위험성을 또한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즉 정신병자에게 행해지는 정신분석의 경우, 그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에게 행해지는 정신분석'이라는 것 자체가 또 새로운 변수로 작용한다는 사실.) 다만 나와 같은 일반독자의 입장으로 보면 너무 논의가 깊숙하게 들어가는 부분이 있어 흥미진진하긴 하지만, 또 너무 어려워지는 경향도 있다. 일반서와 전문서의 경계에 서 있는 책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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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해지지 않기 위해서 고독해져야만 한다

The Book | 2012.10.26 19:08 | Posted by 맥거핀.
고독을잃어버린시간유동하는근대세계에띄우는편지
카테고리 인문 > 철학
지은이 지그문트 바우만 (동녘,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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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바우만의 책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는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편지들을 열어보기 위해서 먼저 이 '유동하는 근대 세계'라는 것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이 '유동하는(liquid)' 근대 세계라는 것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끊임없이 액체가 흐르는 것처럼 유동하면서 변화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즉 이 세계의 모든 것은 매일매일 달라지고 있다. 미디어, 유행, 자본, 사조, 국가, 주권, 관계, 회사, 문화 등등 모든 것은 계속 변화하고, 동시에 그런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세계에 살고 있는 개인도 당연히 역시 같이 유동하게 된다. 즉 개인들은 변화하고, 변화할 수 밖에 없으며, 전혀 원치 않더라도 변화를 강요당한다. 예를 들어 요즘에 가장 각광받고 있는 말 중에 하나가 유연성(flexible)인데, 이는 유동하는 세계에 맞춰 자신을 유동시킬 수 있는 능력이며, 그것이 갖춰지지 않았을 경우 개인은 그 유동하는 세계 속에서 흐름에 떠밀려 가라앉는다(고 위협당한다). 이것은 정신적으로도 그렇고(생각의 유연성), 실제로 물리적으로도 그렇다(자본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이주시키는가). 막연한 얘기 같으니 직관적인 예를 들어보자. 최근 급격히 녹아들어가는 극 지방의 빙하들을 생각해보라. 예전에는 하나의 커다란 대륙이었던 극 지방의 빙하는 이제 여러 떠다니는 얼음 조각들의 집합체로 변모하고 있다. 즉 거대한 바다 위에서 수많은 얼음조각들은 말 그대로 유동한다. 그러므로 그곳에 살고 있던 북극곰들은 그 빙하들을 넘나드는 능력이라는 예전에 그리 필요하지 않았고, 유용하지도 않았던 능력들을 새롭게 갖추어야만 한다.

물론 이는 바우만이 지적하듯이 최근에 새롭게 재편된 세계이다. 예전의 세계에는 개인이 흘러다니지 않도록 하는 몇 가지의 보호막들(동시에 굴레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가부장이 지배하는 가정, 혹은 끈끈한 마을공동체, 혹은 안정적인 고용구조를 갖추는 있는 회사, 거대한 지배력을 갖추고 있는 국가, 신의 가호를 받는 종교공동체 등등. 그러나 최근에는 모든 것이 거의 해체되었고, 모든 권위와 그러므로 동시에 그 권위로 지속되던 모든 보호막은 거의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는 바우만의 표현대로 국가의 지배권력적으로 말하면 공위시대(한 국왕이 사망하고, 다음의 국왕이 즉위하기 전까지의 공백사태)이고, 종교적으로 말하면 '정치를 닮아가는 종교(동시에 종교를 닮아가는 정치)'이다. 즉 최근에는 종교인은 점점 정치적으로 변해가고, 정치인은 종종 이렇게 말하곤 한다. "일단 저를 믿으세요." 그것이 반복된다는 것은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의 불길한 초상이다. 그러므로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일단 믿으라는 이 시대에, 그리고 동시에 그러한 언술들이 잘 먹혀들어가는 이 시대에는 개인들은 무엇인가 붙잡으려 한다. 그러니까 북극곰이 떠다니는 해빙들에 어떻게든 매달려 있기 위해 꽉 붙들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떠밀려가지 않기 위해서 무엇인가에 필사적으로 매달린다는 것이다. 그것은 뭐 트위터일수도 있고, 페이스북일 수도 있고, 쇼핑일 수도 있고, 인스턴트 섹스일 수도 있으며. 유행에 대한 집착일 수도 있고, 물론 알라딘 서재일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것들에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그것은 점점 사람들을 각각의 벽 속의 한정된 구획 안으로 몰아넣고, 그 자신이 만든 틀 속에 갇혀있도록 만들며, 동시에 어떤 '사람들과의 관계'라는 것을 무너뜨린다는 점이다. 극명한 하나의 예(아마도 바우만이 우리나라에 와서 이 풍경을 본다면 이 책에 하나의 사례로 쓸 것이라 생각하는데)를 들어보자. 어떤 젊은 남녀가 커피숍에 마주보고 있다. 그러나 오랜시간 그들은 그저 서로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으며, 그들 사이의 대화는 트위터에 누가 이런 글을 올렸다느니, 카카오톡으로 누가 말을 걸었다느니 이런 것이 전부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서로 무엇인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은 것일까. 이것을 이런 방식으로 얘기할 수도 있다. 하나의 커다란 빙하가 아닌 현재와 같이 나뉘어진 유빙(流氷)들의 세계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은 어떠한 것이 있을까. 구획된 질서라는 커다란 빙하 속에 존재하고 있을 때에는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하는 것이 존재증명의 한 방식이었지만, 현재 세계에서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자신의 역할을 아무리 잘 하더라도 그 매달려있는 세계가 떠밀려가버리면 끝이다. 그러므로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서 존재증명의 가장 유용한 방식은 나를 수없이 다른 나로 쪼개는 것이다. 나를 나뉘어진 모든 유빙들에 최대한 많이 쪼개서 보내는 것. 예를 들어 트위터 속의 나, 페이스북 속의 나, 혹은 파워블로거로서의 나, 쇼핑몰 VIP 고객으로서의 나 같은 것으로 말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그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벤치마킹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유동하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가장 유명하다는 사실이 알려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즉 다시 말해서 가장 자신을 많이 쪼갤 수 있는 사람이 그 세계에서는 가장 성공한 사람이기 때문이다(우리는 최근에 가장 잘나가는 연예인을 어떻게 선정하는가. 물론 그것은 TV에, 혹은 다른 어딘가에 가장 많이 얼굴을 비추는 사람이다. 가끔 TV에 틀면 나오는 연예인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사람들은 이 수없이 갈라진 자신을 어떻게 견뎌내지). 그러므로 우리들은 자신을 이들처럼 최대한 많이 쪼개고 싶어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 디스토피아에 44개의 편지를 띄운다. 그것은 달리 말해서 44개의 부표라든가, 구명보트라든가, 구명조끼, 혹은 우리들에게 보내는 동정을 가득담은 연서(戀書)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근대 세계의 근대인, 즉 우리들이 특별히 무엇인가를 엄청나게 잘못하였기 때문에 이 세계가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북극의 빙하들이 점차 부스러져 떠내려가게 된 것이 북극곰의 잘못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국가가, 자본이, 종교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살아왔으며, 우리는 그저 보통의 인간들로 보통의 삶을 영위해 왔을 뿐이다. 예를 들어 인간의 어떤 특정한 특성을 기준으로 분포도를 그려보면 그것은 대체로 가운데가 불룩한 '종'의 형태를 가진 가우스 곡선(정규분포곡선)이 되며, 우리들 대다수는 그 불룩한 가운데에 들어간다. 그런데 여기에서 바우만은 묻는다. 어쩌면 그 가운데가 불룩한 정규분포라는 것, 그 정상성의 범주에 우리들 대부분이 들어간다는 것이 혹시 문제는 아닐까. 책에도 나오지만, 이라크 포로수용소나 히틀러의 수용소에서 잔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거의 모든 사람들은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특별히 폭력적이거나 잔인한 사람들이 아니었으며, 가우스 곡선에서 가운데 불룩한 부분의 가장 높은 위치에 오를만한 아주 '정상'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웃에게 친절하고, 가족을 잘 돌보며, 주어진 일을 성심성의껏 해내는, 이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서 요구하는 최선의 인물(그러므로 아마도 상당히 유연한 그런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그문트 바우만이 요구하는 것은 도리어 그 이상성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성격을 가다듬는 것(여기서의 성격이란 '성격 좋다'고 할 때의 그 성격이라기 보다는 개성이나 결단성, 저항성 등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이며, 또는 반항한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유동하는 근대에서 요구하는 것들, 유연해질 것, 자신을 쪼갤 것, 무엇인가를 구매하고 소비할 것, 사이버 세계로 빠져들 것 등등의 수많은 유형의 무형의 규칙들에 대한 반항 말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유동하는 근대 세계는 그 세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싫어도 따라야 한다며 몇 가지 규칙을 내밀었고, 그 규칙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둘 빙하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에게 지그문트 바우만은 44개의 부표를 던져주며 말하고 있다. 지금은 새로운 규칙, 새로운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 생활방식)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그것은 어떤 방법으로 가능할까.

그것을 실천하는 하나의 방법은 어쩌면 '역설적으로 생각하기'일지도 모른다. 이 책에는 수많은 역설적인 통찰들이 있다. 몇 개의 편지들은 제목에서부터 이미 역설적인 것들을 요구하고 있고(예측할 수 없는 것을 예측하기, 계산할 수 없는 것을 계산하기. 예측할 수 없는 것을 예측하는 유일한 방법은 미래의 사건들을 우리가 바라는 것에 일치하게끔 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수많은 역설적인 통찰들이 이 책에는 가득하다. 역설적 사고가 필요한 이유는 이곳이 유동하는 근대이기 때문이다. 유동하는 근대에서 지금까지와 같은 모두스 비벤디는 점점 의미가 없어지며, 유동하는 근대에서 만들어지는 메시지들에 그대로 따르는 것은 우리의 유동을 도리어 더 강화시킬 뿐이다. 예를 들어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쇼핑하라!'는 메시지는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내부의 신호가 아니라, 새로운 수요를 그 메시지를 내보내는 자들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즉 그 메시지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우리는 결코 뒤떨어진 적이 없었고, 그것이 필요한 적이 없었다. 무엇인가를 따라잡기 위해서 새로운 것들을 배우라는 메시지는 어떨까. 이 유동하는 세계에서 그에 따른 가장 큰 문제점은 그 새로운 것들을 따라잡는 사이에 그보다 더 훨씬 새로운 것들이 몇 배는 더 만들어진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영원히 우리는 무엇인가를 배워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외에도 쏟아지는 수많은 메시지들을 뒤집어서 볼 필요가 있다.

물론 뒤집어서 볼 필요가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아마도 이 책의 제목일 것이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은 그러므로 단지 '고독을 되찾으라'는 것만은 아니다. 고독을 되찾는 것은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며, 필요한 경계를 긋는 것이다(경계는 동시에 접속 지점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바우만의 지적에 따르면 벽은 동시에 이곳이 통행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통행할 수 있는 지점이기 때문에 벽을 세우는 것이다). 이는 유동하는 근대 세계의 질서를 회복하고 타인과의 진정한 관계를 되살리는 첫 시작이다. 다른 말로 하면 수없이 쪼개진 자신을 다시 조용히 하나로 합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정상이라고 규정되는 범주를 벗어나는 일이며, 이 유동하는 근대는 우리가 정상 궤도에서 벗어나면, 그러니까 떠다니는 유빙들을 꽉 붙잡지 않으면 우리가 차가운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말 것이라고 끊임없이 경고한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도 있다. 우리가 그 유빙들을 아무리 꽉 붙잡아도 그 유빙들은 언젠가 녹아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사실이다(그리고 당연하게도 더 꽉 붙잡으면 붙잡을수록 녹는 속도는 더 빨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작은 유빙에서 더 큰 유빙으로 옮겨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유빙들을 결합시키는 것, 더 이상 각자가 외로운 섬으로 남아있지 않는 것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역시 역설적으로 사고해야만 한다. 우리가 유빙들을 결합시키기 위해서는 결국 그것을 어느 정도는 녹여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역설이 필요하다. 우리는 정상이 되기 위해 정상에서 벗어나야만 하며, 삶의 태도를 모방하기 위해서 특정의 양식을 모방하는 것을 거부해야만 하며, 안전해지기 위해서 안전한 울타리를 없애고, 고독해지지 않기 위해서 고독해져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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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뭐라도 먹어야지

The Book | 2012.10.22 15:30 | Posted by 맥거핀.
음식그두려움의역사음식에대한불안감으로이익을보는자는누구인가
카테고리 정치/사회 > 사회학
지은이 하비 리벤스테인 (지식트리,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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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식품과 관련된 몇 가지 상식들이 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것들. 요구르트는 장에 좋은, 심지어는 수명을 늘리는 데에도 도움이 되는 식품이다, 가공식품에 들어간 첨가물들은 유해하며, 그러므로 적절한 규제가 필요하다(규제에 언급되지 않은 첨가물은 안전하다),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고 유기농으로 재배된 채소는 그렇지 않은 채소보다 좋다, 비타민은 우리 몸에 꼭 필요하며, 비타민이 많이 함유된 식품을 섭취해야 한다, 지방이나 콜레스테롤, 포화지방, 트랜스지방 등은 우리 몸에 유해하며, 따라서 섭취를 극도로 제한하여야 한다 등등. 이 책 <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는 이러한 식품에 대한 상식들이 어떻게 형성이 되어 왔는지를 역사적인 관점에서 추적하고자 하며, 그 중의 상당수는 '어느 정도' 만들어진 상식일 수도 있음을 밝히는 책이다. '어느 정도'를 강조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주장은 곧 만만치 않은 벽들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구르트가 장에 별 도움이 안 된다는 말인가(어제 밤에 요구르트를 먹고 폭풍적으로 변비를 해결한 난 뭐지?), 비타민을 먹을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비타민을 까드시고 갑자기 왕성한 식욕을 보이며 늘 점심에 밥 두공기를 해치우는 우리 회사 김과장님은 뭐지?), 유기농으로 재배된 채소와 일반 채소는 별로 다를 것이 없다는 건가(유기농 마니아로 유기농 채소가 암을 낫게 해주었다는 옆 503호 아줌마는 그럼 뭐지?) 등등.


물론 오해는 마시라.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위의 상식들은 모두 과장된 것이며, 그것은 모두 거짓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 하비 리벤스테인은 역사학자로서 이러한 주장들이 처음 어떤 식으로 생겨났고, 무엇으로 인해 강화되거나 버려졌으며, 현재는 어떤 위치에 와 있는지 여러 사례와 일화들을 통해 추적해 나가고 있다. 즉 이 주장들의 상당수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며, 앞으로 어떤 식으로든 새로운 연구결과들이 발표될 여지가 있다. 예를 들어 지방과 콜레스테롤의 경우만 하더라도, 처음 주목을 받았던 것은 포화지방과 콜레스테롤이었지만, 콜레스테롤의 경우 고밀도 지단백(HDL) 콜레스테롤과 저밀도 지단백(LDL) 콜레스테롤을 구분하여 봐야한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고, 또 포화지방보다는 최근 트랜스지방의 존재가 새롭게 알려지면서 건강을 해치는 주범의 지위를 트랜스지방이 새롭게 물려받게 되었다. 즉 이 책에서 실질적으로 보고자 하는 것은 어떠한 주장이 거짓인가, 사실인가, 어떠한 식품이 몸에 좋고 나쁜가가 아니라, 식품에 관련한 어떠한 주장이 받아들여지고, 그것이 일종의 상식으로 굳어지기까지 개입되는 것들이 무엇인지, 그것에 거대자본들과 학자들과 여러 이해관계자들은 어떤식으로 결합하게 되는지, 그래서 결국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소비자의 주머니를 열게 하는지에 대한 경과들이다.

그 경과들에는 우리가 보다 예상하기 쉬운 것과 보다 복잡한 메커니즘으로 이루어진 것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메치니코프의 장에 대한 혁신적인 주장과 불가리아 목동들이 주로 마시던 요구르트에서 그 해법을 찾는 과정이 대형 식품회사들에게 어떠한 환호성을 올리게 해주었는지를 보는 것이 보다 쉬운 예라면, 식품에 대한 특정의 첨가물을 규제하는 것이 식품 회사들과 어떤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인지 그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보다 복잡한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식품에 대한 특정(화학)첨가물을 규제하는 것은 식품회사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을 것 같지만, 실제로 식품회사들은 이러한 첨가물에 대한 규제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을 꾀했고, 실제로 이런 첨가물에 대한 규제는 특정회사의 제품이 유리해질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였다. 예를 들어 케첩 생산에 있어서 벤조산나트륨에 대한 규제는 벤조산나트륨 없이도 케첩의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하인즈와 같은 업체에게는 득이 되었지만, 아직 그러한 기술력을 갖추지 못한 경쟁업체들에게는 독으로 작용했고, 동시에 첨가물이 들어간 경우라고 해도, 기준치를 적용함으로서 기준치 이내에서 첨가물을 사용한 제품은 마치 정부의 공인을 얻은 것과 같은 효과를 가지도록 해주었다. 또한 식품회사와 같은 거대자본만이 이러한 이해 메커니즘에서 이득을 보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AHA(미국 심장 협회)의 경우 자신들의 영향력을 높이고, 조직의 세를 키우기 위한 방편의 일환으로 심장병에 대해 위협이 되는 식이지방의 위험성에 대해 관심을 높이는 방법을 택했고, 이는 식이 지방, 식이 콜레스테롤에 대한 과도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도록 했다. (이것이 콜레스테롤의 비중이 낮다고 광고하는 수많은 식품들의 판매에 득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사실 이러한 것들의 대부분은 현재진행형이다. 과연 포화지방이 몸에 좋지 않은 것인가, 혹은 트랜스지방이 그야말로 모든 성인병의 적인가, 비타민의 효과가 실제로 미미한 것인가 등등의 식품의 안전성, 유해성에 대한 논쟁의 측면에서도 그러하지만, 보다 넓게는 이러한 공포를 이용한 마케팅, 혹은 이와 관련하여 파생되는 여러 사회적인 문제에서도 그렇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도 예외가 아닌데, 예를 들어 요즘 방송에서 새로운 금맥으로 각광받고 있는 소비자고발 류의 프로그램들에서도 그렇다. 특히 종편 등에서 요즘 킬러 콘텐츠로 급부상하고 있는 것이 이러한 음식점 고발, 소비자 고발 류의 프로그램들인데,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소비자에게 보다 정확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목적하에 음식점들, 혹은 특정 식품들의 점검에 나선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특정의 제품들, 특정의 음식들을 잘못된 먹거리로 소개하기도 하고, 이에 더 나아가 특정 식당, 특정 제품들을 거의 반홍보하기도 한다(예를 들어 '착한 식당'이라고 이름을 달아주며 말이다. 이 식당들은 이 프로그램이야말로 '착해서' 미칠 지경일 것이다). 물론 이는 저자가 논했듯이 최근의 현상만은 아니다. 계속 새로운 이슈들은 출현하고 있으며, 우리는 새로운 이슈가 출현할 때마다 특정 식품을 먹지 않거나, 혹은 광적으로 먹는다. 그 누구도 자신의 건강이 망가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음식의 경우에 있어서 이러한 공포 마케팅이 잘 먹혀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누구나 자신의 건강을 도외시할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 외에도, 아마 두 가지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는 저자의 논의대로 음식의 생산과 유통 과정이 점차 거대화되고 산업화되면서 그 음식을 섭취하게 되는 사람들과 이 과정들이 분리되는 것에 이유가 있을 것이다. 즉 먹을 거리를 자신의 주위에서 찾아야만 했던 과거, 혹은 자신이 재배한 작물들만 섭취해야 했던 과거에 비해, 현재는 수많은 음식들이 만들어진 완제품의 형태로 소비자에게 배달되고, 거의 모든 소비자들은 그 제품이 어떤 식으로 재배되고, 유통되고, 무엇이 첨가되고, 무엇이 제거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간에 가지고 있지 않던 식품에 대한 공포가 새롭게 고개를 들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음식의 맛이나, 혹은 단지 배를 채우기 위한 목적으로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을 유지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식사를 한다는 개념이 점차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즉 요즘 사람들은 그저 배를 채울 것이 있음을 감사했던 과거와 달리 먹을 것이 건강에 심각하게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며, 건강을 유지시키기 위한 여러가지 조건으로 음식을 대한다. 즉 맛있고 싼 음식보다는 몸에 좋은 음식, 일일 권장량, 칼로리 따위가 더 큰 문제가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건강에 대한 판단 권한은 아직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즉 건강에 대한 담론, 몸에 좋은 음식을 판정하는 기준은 아직도 소위 '전문가'들의 손에 놓여져 있고 앞으로도 그들 손에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의학적 발견이니 성분의 분석이니 하는 것은 일반인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고, 그러한 담론의 개발과 유통은 항상 ('내'가 아닌) 전문가의 손에 놓여져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사, 영양학 전문가들의 한마디가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여담으로 한 마디 더 하자면, 이것은 다른 상당수의 분야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교육학 같은 분야를 보면, 여러 교육 분야에서 새로운 개념들을 어떤 식으로 팔아먹는가를 보면 이 책과 거의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특히 아동교육 분야에서 이러한 산업은 번창하고 있는데, 감성지능(EQ), 다중지능, 몰입, 피아제, 몬테소리의 뭐니 하는 것은 그 효용과 별개로 여전히 잘 팔리는 상품이다.)

그러므로 사실 맥이 빠지는 것은 이 마지막이다. 우리는 이런 이유들을 사실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콜레스테롤의 어떠한 부분이 정말 유해한지를 밝혀내고, 비타민이 실제로 우리 몸에 큰 효과를 미치는지 스스로 밝혀낼 수 있으면야 좋겠지만, 그건 우리 몫이 아니다. 집앞에 커다란 밭을 만들어 거기에서 나오는 음식들만 섭취하는 것은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더구나, 그 밭을 어떤 식으로 경작할 것인가의 문제 역시 여러 '전문가'들의 조언을 참고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거기서 어떤 영양소가 파괴될지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마지막에 내놓고 있는 조언, 즉 식품에 대한 새로운 사실이 발표될 때 '누가 이익을 얻을지' 곰곰이 생각해 보라,라든가, 혹은 다양한 음식을 먹되 과식하지는 말고, 과일과 채소를 많이 섭취하라, 모든 음식은 '적당히' 먹어라 등의 이야기를 보면 '이러한 당연한 얘기 할려고 지금까지 이 긴 얘기하셨쎄요?'라고 묻고 싶지만, 뭐 어쩔 수 없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찌 되었건 우리는 무엇인가를, 그것도 뒤에 식품첨가물의 목록이 잔뜩 나와있는 가공식품 같은 것을 조금이라도 먹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만, 두 배 더 비싼 유기농 식품 코너를 기웃거리거나, 비타민 정제 같은 것은 안 살 것 같기도 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생각해보면 비타민 정제를 먹으며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오줌줄기의 색깔 외에는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재미있게 읽었다. 어떤 신화의 기원에서부터 그것의 발전 과정을 역사적으로 추적해 나가는 방식은 흥미로웠고, 그것의 쇠퇴를 보는 과정도 꽤나 재미있었다. 또한 그것은 현재의 어떤 음식이나 건강 문제를 둘러싼 신화들이 어떻게 만들어져 가고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생명 연장의 꿈을 꾸었고, 140세까지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71세에 사망함으로써 그 자신이 몸소 반증을 보여준 메치니코프 박사에게는 명복을 빌어 드릴 뿐이다. (광고 속 사진은 거의 100세 넘은 산신령처럼 보였는데...)     


덧.
아..하나 덧붙이자면, 저자의 문제인지, 번역의 문제인지, 편집의 문제인지 모르겠으나, 이 책에서 'O157균'을 '0157균'이라고 표기하고 있어서 자꾸 걸렸다. 여기서의 O(알파벳 오)는 균체항원(O항원)을 말한다(고 백과사전에서 말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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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의 피의 역사

The Book | 2012.10.05 23:06 | Posted by 맥거핀.
코뮤니스트마르크스에서카스트로까지공산주의승리와실패의세계사
카테고리 정치/사회 > 사회학
지은이 로버트 서비스 (교양인,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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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먼저 두 가지 정도를 이야기하면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하나는 이 책에 나온 시기 구분과 그에 따른 명칭들이다. 이 책 <코뮤니스트>는 1917년 11월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이것이 10월 혁명으로 불리는 이유는 당시 러시아가 쓰던 율리우스력으로는 10월이기 때문이다)을 기점으로 그 이전을 '기원'으로 그리고 그 이후에 만들어진 체제를 '실험'으로 명명한다. 이 코뮤니스트들이 '도약'을 시작하는 것은 스탈린이 트로츠키와 부하린을 밀어내고 집권을 확고히하는 1929년부터이다. 이 '도약기'는 소비에트 정권과 소비에트 블록 건설의 시기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1947년 소련을 중심으로 한 코민포름의 결성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마셜플랜의 대응으로 만들어진 냉전체제인 '확산'의 시기로 넘어가게 된다. 소련 자체만 놓고 보아서는 미소냉전의 축에서 소련이 소비에트 블록 안에 어떻게 보면 갇혀있던 시점이라 확산으로 보기가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중국과 북한, 동유럽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았다는 사실은 이것이 공산주의의 '확산'의 시점으로 볼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1957년 흐루쇼프가 정권을 잡으면서 '변형'되기 시작한다. 데탕트가 일어났고, 쿠바, 중남미 등에서 혁명이 일어났으며, 마르쿠제, 알튀세르, 사르트르 등이 맑시즘의 방향을 새롭게 잡으려고 하였다. 이 공산주의가 결정적으로 타격을 받고 '종언'으로 들어가는 것은 1980년 레이건이 미국에서 정권을 잡으면서부터이다. 브레즈네프나 안드로포프 등의 당시의 소련 서기장들은 레이건 이후의 미 행정부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1985년 등장한 고르바초프는 그 가느다란 생명줄을 거의 끊어버렸다.

다른 하나는 이 책에서 제기하고 있는 질문들이다. 질문과 답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책은 아니지만, 이 책은 책 속에서 몇 가지 질문들을 하고 있고, 나름의 답을 내리고 있다(그 답은 마지막 40장에 정리되어 있다). 1부 '기원'에서는 소련 체제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였나, 당 독재였나, (공산주의자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된 나라가 아닌, 왜 가장 가난한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생하였는가 등의 질문을 한다. 2부 '도약'에서 묻는 것은 왜 소련은 공산주의 확산의 길이 아니라, 일국공산주의의 길을 갔는가, 주변국, 미국 등에서의 국제적인 봉기는 왜 일어나지 않았는가 등의 물음이다. 3부 '도약'에서는 권력 투쟁 중에서 어떻게 스탈린이 정권을 잡았는지, 소비에트는 나치즘과의 대결에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지, 왜 그토록 커다란 억압의 체제가 필요했는지 등에 대해 묻는다. 4부 '확산'에서 보고자 하는 것은 냉전 체제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었는지, 냉전 체제가 왜 스탈린에게 필요했는지, 그리고 작은 조직에 불과했던 마오쩌둥이 어떻게 거대한 장제스 군대를 이길 수 있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5부 '변형'에서는 왜 모든 공산주의가 변형되며, 동일한 실패의 길을 걷는지, 그리고 공산주의가 모색한 탈출구는 왜 결국 실패로 가는 출구였는지에 대해 살펴본다. 마지막 6부 '종언'에서는 중국과 소련의 개혁이 어떻게 달랐으며, 왜 중국은 성공하고, 소련을 실패하였는지, 그리고 공산주의는 왜 그토록 허망하고 급속하게 붕괴되었는지 돌아본다.

로버트 서비스의 이 책 <코뮤니스트>는 이 많은 질문들에 대해 나름 성실히 답변하려고 노력한다. 단편적인 사실이나, 의견의 제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흐름과 풍부한 사료의 제시를 통해 나름의 근거를 제시하고, 되도록 여러 정황들을 제시하여 독자의 판단을 이끈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이 질문 자체가 그렇게 신선하지만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뒤에 옮긴이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우파 역사가들에 의해 이 질문들의 상당수는 거의 결론이 내려진 이후이고, 로버트 서비스가 다른 점은 보다 성실한 자료조사를 통해 나름의 근거를 더 많이 확보했다는 것 뿐이며, 그 답 자체는 예전의 역사가들과 동일하게 상당히 편향적이다. 사실 이 질문들에 대한 각각의 답을 뭉뚱그려 보자면, 결국 로버트 서비스가 보는 최종의 답은 공산주의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이념이었다는 것이다. 즉 공산주의 체제는 태어날 때부터 문제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권력욕이나 생존욕과 결합하여 언젠가 무너질 수밖에 없는 괴물의 체제였다는 것이 로버트 서비스가 내놓은 최종의 답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급속히 무너질 것이라고 계속 오판하고 있었으며, 그들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기묘한 개념을 발명해 낸 순간부터 당의 독재는 시작되었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공산주의 체제에서 스탈린이나 마오쩌둥, 차우세스쿠나 폴 포트 등의 잔악한 폭군들이 등장한 것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 사회는 감시와 억압으로 기능하는 체제이고(그것은 거의 모든 공산주의 체제가 비슷한 형태를 가진 소비에트 모델을 모방함으로써 생존이 가능했다는 점이 그 증거가 된다. 즉 소비에트 모델은 결국 실패했지만, 그나마 그 모델이 일시적인 유지라도 가능케했다), 그런 체제라면 감시와 억압과 폭력을 가장 잘 수행해낼 자, 그러니까 가장 잔악하고 폭력적이며, 교활한 자가 높은 지위에 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즉 스탈린이 정권을 잡은 것은 그가 말 그대로 '강철'이었기 때문이다.

로버트 서비스가 이러한 기조를 유지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한 가지 방법은 코뮤니즘의 역사에서 코뮤니즘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저자는 이를 사상의 흐름이 아니라 사건의 흐름으로 치환하고, 모든 '주의'의 개념들을 독자의 머리 속에서 효과적으로 제거한다. 이 책에는 일견 비슷비슷해 보이는 수많은 '주의'들의 명칭이 나온다. 공산주의, 맑시즘, 사회주의, 스탈린주의, 마오주의, 아나키즘, 나로드주의, 아나르코생디칼리즘, 사파티즘, 카스트로주의 등등 거의 셀 수가 없을 정도다. 그러나 저자는 이들에 대한 효과적인 설명을 대체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저자가 모르거나 귀찮아서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왜냐하면 소비에트 권위주의나 스탈린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각각 한 챕터를 할애하여 열심히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코뮤니스트들을 탈코뮤니즘화하는 것은 이들 코뮤니스트들을 자신들의 이익이나 정권을 잡기 위한 정복욕의 화신, 혹은 쓸데없는 투쟁에 골몰하는 골치아픈 종자들, 혹은 죽은 마르크스나 엥겔스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꼭두각시처럼 보이게 한다. (예를 들어 1920년대 독일의 경우만 보더라도 카우츠키의 맑시즘과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의 맑시즘은 얼마나 다른가.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위한 맑시즘이고, 무엇을 위한 수정인지 전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이들은 단지 권력에 목마른 멍청한 꼭두각시들로 보인다.) 이는 책의 내용 전체를 지루하게 만들 뿐 아니라, 그저 이들이 결국은 사라질 권력을 잡기 위해 각종 잔악한 일을 저질렀던 그야말로 오류로 가득찬 인물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와 관련하여 같이 읽을 책으로 한형식의 <맑스주의 역사강의>를 추천.)

물론 부인할 수 없는 사실들이 있다. 공산주의의 역사에서 수많은 폭력과 학살, 기근, 감시와 억압이 실제로 있었고, 공산주의는 현재 거의 종적을 감춰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이 책 역시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하며, 그 질문에 담긴 함의는 결코 작지 않다. "마르크스주의의 희망은 왜 절망이 되었나?" 즉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출발은 다르다. 자본주의는 이미 그 태동에서부터 그 잔악성을 수많은 사람들이 감지했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마르크스주의가 출현하였다. 즉 마르크스주의는 많은 사람들의 희망을 안고 탄생하였고,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고, 그것이 잔인한 뒷모습을 보여주었을 때 많은 이들은 그래서 더욱 절망했다. 그러나 이 질문을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그 희망이 절망이 된 것일까. 로버트 서비스의 이에 대한 답은 예스다. 즉 공산주의의 희망이라고 믿어졌던 요소들, 그것들은 이미 잘못 만들어진 뿌리에서 길러졌으며, 따라서 공산주의 체제는 자연스럽게 절망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이 책에 보면 농업의 국유화는 생산성 저하와 마치 직결되는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즉 땅이 내 소유가 아니면 모두 생산을 할 생각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문제의 요소는 이미 공산주의 그 자체에 들어있었으며, 미국이 조바심을 내지 않았어도 이 소비에트 체제는 언젠가 무너졌을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이 질문에 내린 답이다. 즉 희망처럼 보였던 그것은 사실은 절망이었다는 것. (이의 반대편, 그러니까 수정주의적, 좌파적인 시각에 물론 다른 해석이 있다.)
 
(이를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정치형식과 그렇게 밀접한 관계가 없는 것처럼도 보인다. 자본주의는 자유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있고, 동시에 독재나 전제정치와도 양립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공산주의의 경우 민주주의라는 정치형식과 도리어 밀접한 관련을 가져야만 하는 것처럼 보인다. 민중들이 분배하여 나눠같자는 공산주의의 이상은 민주주의의 이상과 비슷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수많은 공산주의 정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교묘한 용어를 내세워 어느 틈엔가 그것을 당 독재로 교묘하게 치환하였으며, 그런 측면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절망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용어를 교묘하게 변질시킨 레닌 등의 인물들에 의해 촉발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해 그리 고정된 견해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또 한가지 부인할 수 없는 사실들도 있다. 그것은 그 희망에 수많은 사람들이 지지하고 열광적인 찬성을 보내고 때로는 목숨을 걸었다는 것. 그렇다면 그들은 모두 그 오류를, 오류의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한 바보들이었는가, 단지 멍청한 꼭두각시들에 불과했을까. 아마도 그건 아닐 것이다. 그들은 그것에 희망을 보았고, 절망적인 현실에서 어떻게든 가능성을 발전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 현재에도 마찬가지이다. 공산주의의 폭력적인 현실들이 드러나고 그것이 거의 종말에 다다른 지금에도 여전히 자본주의의 폭력성에 대항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내용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내재된 가능성들이다. 저자 로버트 서비스도 책의 뒤편에서 쥐꼬리만큼 밝히기는 했지만, 자본주의가 저지른 폭력들도 결코 공산주의에 뒤지지 않기 때문이며, 어떠한 의미에서는 더 거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전히 공산주의의 완전한 종언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책을 보며 저자의 시각과 다르게 사실 역으로 놀랐던 것은 온 세계에 공산주의자들이 이렇게도 많았다는 사실이다. (공산당을 콩사탕으로 말해야만 했던 우리의 시각에서는 신선하기까지 하다.) 그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의 등장과 스러짐을 보며, 도리어 한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공산주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적어도 자본주의의 폭력성이 살아있는 한.


덧.
그러므로 사실 내가 보기에는 이 책은 공산주의에 우호적인 사람이나 비우호적인 사람이나 어딘가모르게 아쉬운 부분이 있을 것이다. 공산주의에 우호적인 사람이면 공산주의의 피의 역사만을 줄기차게 서술한 부분이 마음에 걸릴 것이고, 비우호적인 사람이면 도대체 이 책을 읽어야할 이유를 찾기 못할 테니. (시작부터 망가져서 어차피 언젠가 당연하게도 끝날 운명이었던 이들의 이야기를 왜 이렇게 길게 읽어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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