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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ook | 2015. 2. 16. 00:56 | Posted by 맥거핀.

 


플래너리 오코너

저자
플래너리 오코너 지음
출판사
현대문학 | 2014-12-12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우리는 내면을 향한 시선의 질과 깊이, 성취의 규모로 예술가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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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플래너리 오코너는 1946년, 그러니까 스물한 살에 첫 소설 <제라늄>을 발표했고, 1964년, 그녀의 나이 서른아홉 살에 루푸스 합병증인 신장 질환으로 죽기 직전까지 2편의 장편소설과 32편의 단편소설을 남겼다. 이 책에는 총 31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그러니까 이 단편집을 읽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플래너리 오코너의 전 생애를 읽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이렇게 한 작가의 전 생애에 걸친 작품들을 읽는 것은 흥미롭지만, 그렇게 녹록한 일은 아닌데, 작가의 삶의 흐름에 따라 작품들은 대체로 변화하며, 어떤 필연적인 불균질성을 가지고, 그 불균질성이 읽는 이를 내내 건드리기 때문이다. 연보로 추측해 보건대 이 단편집의 순서는 작품 발표 순서에 따라 배열되어 있는 것 같은데(사실 이 소설의 창작년도, 혹은 발표년도가 없는 것은 이 단편집에서 아쉬운 부분이다), 작품을 읽다보면 어떤 묘한 흐름 같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후기로 접어들수록 이야기는 처음의 실험적인 경향에서 점점 어떤 구체성을 가지며, 묘한 종교성은 점점 강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플래너리 오코너의 경우에는 그런 흐름도 흐름이지만 그보다는 이 작품들을 관통하는 어떤 공통점이 더 두드러지는 편인데, 그것은 번역가의 글대로 미국 남부 지방, 가톨릭 신앙, 루푸스병이라는 몇 개의 키워드로 정리할 수도 있고, 이 이야기들의 어떤 일반적인 흐름을 살펴보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렇지 않은 작품들도 있지만, 대체로 읽는 이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들의 흐름은 어딘지 모르게 비슷하다. 먼저 편견, 혹은 자신만의 확고한 고집에 사로잡혀 있는 듯한 인물들이 나온다. 이들은 교육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오랜 삶의 경험과 인습으로 고착화된 어떤 나름의 세계에 갇혀 있고, 그 나름의 관점으로 주위의 거의 모든 것을 재단한다. 그들의 세계는 작고 편협해보이지만 나름의 체계가 있으며, 그래서 그것은 아직 견문을 넓히기 전의 어린아이의 그것과 비슷하다(그래서 이 작품들에서 주인공들은 대체로 나이가 많으나, 기이하게도 그와 짝을 이루는 것은 어린아이들인 경우가 있다. <인조 검둥이>의 헤드 씨와 그의 손자 넬슨, 혹은 <숲의 전망>의 포천 씨와 그의 외손녀 메리 '피츠' 포천, 아니면 그의 반대로서 <죽은 사람보다 불쌍한 사람은 없다>의 타워터와 노인). 즉 그들의 작은 세계는 작은 만큼 확고하다. 그것은 나름의 체계로 굴러가며, 그렇게 쉽게 부서질 염려는 없어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 별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길한 무엇인가가 등장한다. 그것의 형태는 다양하다. 그것은 친근한 형태로 다가오기도 하고(<좋은 시골 사람들>의 선량해보이는 성경 파는 청년), 꺼림칙한 무엇의 형태이기도 하며(<가정의 안락>의 탕녀 스타), 때로는 인간이 아니기도 하고(<그린리프>의 황소), 때로는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누군가의 변형물(<숲의 전망>의 메리 '피츠' 포천)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대체로 이질적인 타자 그 자체, 예를 들어 <추방자>에서 유럽에서 살길을 찾아 미국 남부의 농장에까지 오게 된 영어를 못하는 추방자 귀작 씨와 같은 존재이다. 이 이질적인 타자는 처음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일련의 사건을 통해 결국 주인공의 확고한 세계에 균열을 일으키고, 그의 존재성을 뿌리부터 뒤흔들게 되고, 인물들은 그들의 균열되고 붕괴된 세계를 불편하게, 때로는 참담하게 마주 보거나, 최악의 경우 마주볼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사실 이것만 놓고 보면 이는 일반적인 소설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도 말할 수 있다. 상당수의 소설에서 주인공의 세계는 마치 부서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며, 세계가 균열된 후 주인공이 새로운 세계를 마주하는 그런 소설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일종의 성장소설이 변형된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플래너리 오코너의 소설에서 '성장'이라는 말을 쓰기는 주저하게 되는데, 이들의 세계는 어떤 균열과 봉합을 넘어서, 거의 완전한 붕괴에 이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즉 이들의 세계는 작품의 말미에 이르러 그 근본이 부정되거나 흔들린다. 다시 말해서 주인공들은 죽는다. 물론 이는 물리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실제로 죽음에 이르는 인물들도 있지만, 그들은 죽지 않더라도 거의 죽은 것과 마찬가지의 상태가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오코너 소설의 종교적인 면모가 드러나게 되는데, 이는 그녀의 전 생애를 받치고 있었던 카톨릭 신앙과 그 신앙에서의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정신적인) 죽음,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다시 태어남(부활)이다. 다시 말해서 엄격하게 말한다면 종교적인 의미에서는 특정의 종교를 가지면서, 동시에 가지지 않은 상태란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어떤 하나의 세계(예를 들어 육체와 욕망의 세계)를 죽이고,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며, 죽고 나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플래너리 단편들의 인물들은 (비록 다시 태어남은 아직 먼 곳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작품의 말미에서 상징적인 죽음에 이른다. 그리고 물론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결국 그 전에 죽어야만 한다.

 

조금 다른 얘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내가 플래너리의 소설들에서 느낀 종교성은 그 내용적인 측면에서만은 아니다. 도리어 그보다는 형식에 관련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 더 컸다. 예를 들어 이 소설의 전지적 관찰자가 가지는 특유의 어떤 묘한 무신경함, 무심함 같은 것들 말이다. 약간 농담을 섞어서 말하자면,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어떤 부분에서는 마치 성경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성경은 독특한 텍스트다. 성경에는 수많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서술하는 어떤 특유의 무신경함이 있다. 그러니까 거기에는 우리가 놀라운 이야기를 볼 때 나오는 인간적인 정서의 어떤 부분이 결여되어 있다. 그것은 당연한데, 왜냐하면 (적어도 성경의 입장에서는) 성경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 아니라 단지 일어난 일들을 그대로 기술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여기에는 일어난 일들이기 때문에 그대로 기술한다는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어떤 특유의 무심함이 있다. (혹은 그러므로 이것은 일종의 은유로 보이게 하는 측면도 있다. 예를 들어 오병이어의 기적을 축자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혹은 어떤 연대와 나눔의 은유로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아무튼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성경의 사실성이 아니고, 다만 플래너리 오코너의 소설도 일종의 은유로 느껴지는 이야기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가 <좋은 사람은 드물다>와 같은 것일 것이다.) 그런데 플래너리 오코너의 소설들에서도 비슷한 무엇이 엿보이는데, 이 소설의 전지적 관찰자는 모든 것을 다 알면서도 사건들에서 한껏 물러나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모든 것을 어떻게 흘러갈지 알면서도 그들이 붕괴되어 가는 것을 무심히 기록하며 그 붕괴를 그저 지켜보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붕괴가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처럼 말이다. 즉 그는 모든 것을 다 아는 예언자로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기록한다.   

 

그러니까 이 기록은 사실 냉혹함 중에서도 더 냉혹할 수밖에 없다. 특히 자신에게 더 말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의미의 예언자라면 자신의 운명도 알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예언자는 자신의 운명의 끝을 알면서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저 냉혹하게 기록할 뿐이다. 예를 들어 이 소설들에서도 작가의 모습이 언뜻 비치는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남편이 없이 농장을 경영하는 여주인들(<추방자>의 매킨타이어 부인, <그린 리프>의 메이 부인 등)에서는 아버지가 없이 어머니와 함께 남부의 농장에서 지냈던 작가와 어머니의 모습이 겹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혹은 글을 쓰려는) 인물들(<좋은 시골 사람들>의 조이/헐가, 혹은 <깊은 오한>의 애스버리, <파트리지 축제>에 나오는 캘룬이나 메리 엘리자베스)에서는 작가 생애의 어떤 부분과 겹치는 점이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플래너리 오코너가 가장 잔혹하게 묘사하는 것은 바로 이들이다. 위에 제시한 편견으로 가득찬 좁은 세계를 가진 이들보다 작품 속에서 더 참혹한 결말을 맞이하는 것이 이 공명정대한 합리주의자들, 철학자들이다(도리어 좁은 세계를 가질 수밖에 없어 편견을 가지게 된 이들에게는 애정이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왜냐하면 이들의 합리성과 정의는 그것이 어떤 절대적인 무엇으로 떠받들어지는 순간 결국 편견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 무엇의 형태밖에 남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이발사>의 레이버). 즉 플래너리 오코너의 소설은 이 소설을 읽는 자들(그러니까 바로 '소설'이라는 것을 읽는 자들) 필시 깃들 수 있는 어떤 내면의 아이러니를 불길하게 잡아냄으로서 계속 우리 곁에 어떤 이물(異物)로서 남는다. 아니 그것을 자처한다. 그리고 동시에 작가 자신에게도 불길하고 냉혹한 예언으로 남는다.

 

그러므로 소설을 다 읽고 덮은 후 운좋게도 어떤 찜찜함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면 우리는 그 찜찜함에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 할지도 모른다. 대체로 우리는 찜찜한 이물감을 느꼈을 때 정상이라고 여겨졌던 자기 자신을 불길하게 다시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운이 좋다면 우리는 그 거울에서 낯선 누군가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당신은 운이 좋지 않기 때문에 낯선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하던 일을 그대로 할 터이고, 일어날 일들이 일어날 것이며, 거울 속에서가 아니라 낯선이의 방문을 실제로 받고, 먼 곳의 전지적 관찰자인 예언자는 무심하게 그것을 기록하겠지만. 그것이 플래너리 오코너의 세계다.

 

그녀는 그를 뉴욕 시에 묻었지만 그러고 났더니 밤에 잠을 잘 수 없었다. 밤마다 뒤척거리며 잠을 못 자니 얼굴에 주름이 깊어졌다. 그래서 결국 그를 파내서 시신을 코린스로 보냈다. 그러자 밤에 잠을 잘 수 있게 되었고 아름다운 용모도 돌아왔다. (p.739) - <심판의 날> (이 단편집의 마지막 소설의 마지막 문장)

 

 

덧.

1호선 지하철에서 이 소설의 중반부를 한참 읽고 있는데 갑자기 나타난, 멀리서부터 멸치향을 풍기던 '멸치의 신'의 등장은 어떤 의미에서는 정확히 플래너리 오코너 소설 세계의 실사판이었다. 그의 등장은 <당신이 지키는 것은 어쩌면 당신의 생명>의 시프틀릿 씨를 연상시켰으며, 퇴장은 그 소설의 어느 인물들보다도 쿨했다. 거기에는 모종의 진실이 있었으며, 이 등장과 퇴장을 보며 나는 이 지하철의 세계도 결국 편견으로 가득했던 1950년대 미국 남부의 농장과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아니 우리는 이제 그보다 더한 편견의 시대를 살아가야 할 것 같다. 이 소설들은 결국 불길한 예언서들로 앞으로도 계속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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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재건

The Book | 2015. 2. 9. 14:36 | Posted by 맥거핀.

 


지평

저자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4-12-0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2014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파트릭 모디아노 최초의 미래지향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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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책을 다 읽은 후, 오래도록 책표지를 들여다본다. 저멀리 우뚝 솟은 에펠탑이 보이는 파리의 거리 풍경. '거리'는 파트릭 모디아노에게 상당히 중요한 키워드인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그의 몇몇 작품들의 제목만 보아도 이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데, 그의 대표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그리고 첫소설 <에투알 광장>, 혹은 <잃어버린 거리>,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 <외곽 순환도로> 같은 작품들, 그리고 이 소설 <지평>. 소설 <지평>에는 수많은 파리 거리 및 지명들의 명칭이 나온다. 콜리제 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로, 오페라 광장, 오퇴유, 센 가, 라지빌 가, 팔레 루아얄, 포부르 생토노레, 라 페루즈 가, 베르시 공원, 개선문...과장을 조금 보태, 이 책의 어느 페이지만 펼쳐도 거리나 지명들이 등장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이 수많은 거리나 지명이 이 소설에 등장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수많은 실재하는 거리들은 이 소설에 있어서 무엇일까.

 

먼저 시간의 측면. 이 소설은 하나의 커다란 회상이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얼마 전부터 보스망스는 젊었을 적의 일화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p.9)"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간 이후에 이루어지는 회상은 늘 단속적이다. 회상은 대체로 하나의 이야기가 되기 전에, 늘 조각나있다. 모디아노의 말을 빌리자면 이렇다. "그리고 그는 그 깊은 암흑 속에서 희미하게 명멸하는 불빛들의 이름을 수첩에 하나하나 적어나갔다. 명멸하는 빛이 너무도 희미한 까닭에 그는 전체를 재구성할 수 있는 소재가 될 만한 작은 실마리들을 찾기 위해 두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해 보았지만 거기엔 별의 파편과 부스러기들뿐, 전체는 없었다.(p.10~11)" 이 작은 실마리들, 별의 파편과 부스러기들, 그것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면 '거리'이다. 보스망스는 먼저 거리와 장소를 떠올리고, 그 다음 그 곳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린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 거리나 장소는 아직도 그곳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며, 보스망스는 길 이름과 건물 번지수를 잊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 예를 들어 보스망스가 기억 속에서 찾아 헤매는 마르가레트 르 코즈, 혹은 그와 연관된 메로베, 페른 부부, 스튜어트, 시몬 코르디에..그런 인물들은 지금 그 곳에 없을지라도, 그 공간은 아직 그 곳에 남아있다. 예를 들어 앙드레 푸트렐과 수상한 남녀들이 있던 블뢰 가 27번지 아파트에 이십 년이 흐른 뒤, 보스망스는 찾아간다. 비록 그 곳에는 앙드레 푸트렐은 이제 없지만, 어떤 기억이 남아있다. 스무 명의 남녀가 잡혀가던 어떤 기억이. 그러니까 거리는 시간에 있어서는 일종의 지표이다.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을 연결하는 작은 지표, 혹은 별의 파편과 부스러기.

 

공간의 측면에서 보면 거리는 이중적이다. 거리는 그들을 만나게 해준다. 장 보스망스와 마르가레트 르 코즈, 그들은 거리에서 만났다. 오페라 광장에서 시위대에 휩쓸려 그는 그녀에게 본의 아니게 상처를 입혔고, 그로 인해 그들의 관계가 처음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거리에서 기다리고, 거리에서 만나고, 거리를 걷고, 다시 거리에서 헤어진다. 그러나 거리는 만남이 시작되는 곳만은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위험한 공간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거리에는 그들이 만나고 싶어하지 않은 무엇인가가 있다. 보스망스에게는 그것은 빨간머리에 매정한 눈빛을 가진 아프간 코트를 입은 여자와 환속한 신부 혹은 가짜 투우사 모양의 남자라는 한쌍, 즉 만나기만 하면 돈을 요구하는 그의 부모이며, 마르가레트에게는 그것은 그녀를 언젠가부터 맹목적으로 뒤쫓는 위험한 남자 부아야발이다. 즉 거리에는 그들이 결코 마주치고 싶지 않은 것, 마주쳐서는 안되는 것이 돌아다니거나 지키고 있다. 거리에 나오지 않으면 그들은 안전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르가레트의 아파트는 "그 누구도 여기 있는 당신을 찾아낼 수 없(p.37)"는 공간이며, 보스망스의 부모는 이제 그의 집주소를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안전에는 무엇인가가 결여되어 있다. 왜냐하면 거리로 나오지 않으면 그들은 서로를 영원히 만날 수가 없으니까. 그러므로 그들은 안전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거리로 나온다. 부모가 출몰하는 센 가를 피해다니거나, 혹은 누군가가 나타날까봐 계속 뒤를 돌아보며 말이다.

 

그런데 사실 그들을 위협하는 이 존재들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전체적으로 꿈 같은 회상이 이어지는 이야기지만, 소설이 이상하게도 더욱 꿈 속의 꿈처럼 느껴질 때는 그들을 위협하는 이러한 존재를 묘사할 때이다. 예를 들어 보스망스가 부모라고 부르는, 그러나 부모라고 느껴지지 않는 오십대 남녀 한 쌍. 그들은 보스망스의 앞에 불현듯 나타나, 그에게 한껏 경멸감을 표출한 후 그저 당당하게 돈을 요구한다. 그리고 돈을 받으면 그들은 떠난다. 혹은 마르가레트를 쫓아다니는 부아야발. 예를 들어 마르가레트가 바게리안의 도움을 받아 부아야발을 피하는 장면은 마치 비현실적인 풍경의 일부처럼 묘사된다. 부아야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앞에 그저 버티고 서 있을 뿐이며, 그녀와 바게리안이 그를 떼어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간 후에도 밤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마른 얼굴과 체격이지만 육중한 느낌을 주는 남자, 손가락 사이로 칼을 꽂는 유희를 즐기는 남자, 갑자기 증발하거나 갑자기 나타나는 남자, 과연 그는 실재하는 무엇일까.

 

아니 나는 이 소설의 이야기가 허술하다거나, 비현실적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들의 존재는 실재하는 무엇이라기 보다는 마치 어떤 것의 은유처럼 느껴졌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예를 들어 우리가 흔히 '기억'이라고 말하는 것. 보스망스의 부모는 그를 "마치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끼게 해주려는 양(p.40)" 노려보고 경멸감을 표출하며 그에게 돈을 요구한다. 그리고 보스망스는 마치 무엇에 홀린 듯 어서 그들을 보내버리겠다는 마음으로 돈을 준다. 또는 위험한 남자 부아야발은 마르가레트에게 묻는다. "나한테 그런 말을 하고 부끄럽지도 않아?(p.128)" 이 경멸, 혹은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의 요구. 때로 기억은 수치심이나 부끄러움을 요구한다. 그것은 보스망스의 부모나 부아야발처럼 갑자기 찾아온다. 우리가 그것에 맞서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애써 피하는 것 뿐이다. 그러나 기억은 끈질기게 우리를 재방문하며, 계속 무엇인가, 우리가 줄 수 없는 무엇인가를 요구한다. 그것은 과거로부터 왔다. 부끄러운 무엇인가로부터 왔다. (너무 나아가는 것일지 모르지만, 이 소설의 배경이 1960년대 중반의 파리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그 과거(예를 들어 그의 부모)는 독일에 점령당했던 파리를 말한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독일에서 태어난 마르가레트에게 독일인이냐고 묻는 그 질문의 무심한 긴장, 혹은 보스망스가 길을 걷다가 순간순간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 무엇이 미안해? 응? 살아 있다는 것이? 같은 것과 연관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부끄러운 과거라는 기억을 언제까지나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결국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것은 어떻게든 당신을 찾아내니까. 그리고 동시에 기억에는 부끄러운 무엇인가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기억에는 부모라고 부르는 남녀 한쌍도 있지만, 마르가레트 르 코즈도 있으니까. 다시 말해서 기억은 일종의 거리와 같다. 위험하지만 그곳에 나가야만 누군가를 만날 수 있었던 거리처럼, 기억에도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지만, 그 기억의 거리에 어떻게든 나가야만 한다. 안전한 기억의 골방에만 갇혀 있으면 우리는 아무도 만날 수 없으니까. 즉 부끄러운 무엇인가를 대면해야만 그것을 넘어서 나아갈 수 있다. 예를 들어 그것은 보스망스가 부아야발을 찾아 그와 대면하는 것과 같다. 인터넷의 바다를 뒤져 만나게 된 부아야발. 그는 이제 더 이상 기억 속에 존재하는 위협적인 남자 부아야발이 아니다. 그저 늙고 잿빛 눈을 가진 부동산업자일 뿐이다. 기억 속의 부아야발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고, 그를 혹은 그의 기억 안에 있는 그녀를 다시 찾아오지 못한다. 그것은 이제 허물어진다.

 

무엇인가를 그렇게 재건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면하여 허물어야만 한다. 보스망스는 작은 별의 파편과 부스러기들만이 반짝거리는 기억의 골방에서 거리로 나와 기억들을 기꺼이 대면했고, 그것을 하나하나 허물 수 있었다. 이제 그는 보이지 않는 벽을 통과해 그녀에게로 간다. 모든 것이 재건된 도시 베를린에 이제 그녀가 있다. 거리는 재건되었고, 이제 기억도 재건된다. 새 지평에.

 

그는 그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바깥으로 나와서 얼마간 그 건물 앞에 머물렀다. 햇빛이 따사로웠다. 거리는 고요했다. 순간, 그런 확신이 들었다. 움직이지 않고 인도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보이지 않는 벽을 서서히 통과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그래도 자리는 여전히 같은 자리다. 거리가 더 고요해지고 볕이 더 잘 들었을 수는 있겠다. 한 번 일어난 일은 무한히 반복된다. 저쪽 길 끝에서 마르가레트가 꼬맹이 페터- 그녀가 즐겨 말하던 대로 그 녀석 -의 을 잡고 32번지와 그를 향해 걸어올지도 모른다.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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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뉴스

The Book | 2015. 1. 28. 00:46 | Posted by 맥거핀.

 


눈먼 자들의 국가

저자
김애란, 김행숙, 김연수, 박민규, 진은영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4-10-06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진실에 대해서는 응답을 해야 하고 타인의 슬픔에는 예의를 갖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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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미 그분에게는 망각된 일인지도 모른다. 최근에 있었던 박근혜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는 '경제'였고, 그것은 총 42번 언급되었다. 그 뒤로 많이 나온 단어는 '국민'으로 총 29번 언급되었으며, '경제'와 맥락을 같이 하는 '성장'이라는 단어는 16번, '개혁'이나 '혁신'은 통틀어 24번 사용되며 그 뒤를 따랐다. 반면 작년에 그분이 또르르 눈물을 흘렸던 어떤 담화에서 계속 반복되어 언급되었지만, 이번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은 단어도 있다. '세월호', '희생', '위로'와 같은 낱말들. 박근혜 대통령의 원고 위에서만 무엇인가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제는 적어도 방송과 신문은 세월호를 '효과적으로' 제거한 것 같다. 굳이 시간을 들여 찾아보지 않는 한 언론에서 세월호와 관련된 언급을 보기는 힘들다. 있더라도 특별조사를 하는지 안하는지 모를, 인양을 하는지 안하지는 모를 알 수 없는 뉴스 뿐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정부와 언론은 사람들에게 이에 대한 어떤 피로감을 심는 데 성공한 것 같다. 그것은 제거되었거나 다른 어떤 것으로 효과적으로 대체된 것처럼 보인다. 그 사라져버리거나 대체된 단어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반면 그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목소리들이 있다. 책 <눈먼 자들의 국가>.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 사회학자, 언론학자, 정신분석학자, 정치철학자 등등이 쓴 12개의 글. 정확히 세보지는 않았지만, 이들의 글들에서 수차례 반복되는 단어들이 있다. 세월호, 구조, 고통, 변화, 희망, 진상규명, 진실, 거짓말, 신자유주의, 국가, 정부, 시민, 그리고 우리, 우리, 우리, 그러니까 살아남은 자들. 모두들 동일한 시각에 같은 사건을 보았지만, 목소리는 약간씩 다르다. 누군가는 죽은 자들을 애도하고, 누군가는 분노하며, 누군가는 부조리를 말하고, 누군가는 살아남은 자의 윤리를 묻는다. 혹은 누군가는 과거로 돌아가 우리를 지배하는 공포나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에 대해 말하며, 다른 누군가는 미래를 보며, 사건 이후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상상력과 새로운 행동의 결단을 촉구한다. 아무튼 어쨌든 간에 이들은 어떻게든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이야기하려 애쓴다.

 

여기에는 어떤 간극이 있다. 그것은 정확히 계량하고자 한다면 물론 내가 가늠할 수 없는 간극이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나에게 그것은 단지 물리적인 간극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나는 이 책을 주로 TV뉴스들을 틀어놓고 보았으니까. 그러니까 여기에는 어떤 물리적인 간극이 있었다. 문자와 소리의 간극. 아주 간단하게 말해서 세월호를 이야기하는 책과 세월호를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 TV. 두 개의 다른 나라에서 들려 오는 두 개의 다른 이야기. 처음에는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것들은 점점 연결되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그것은 어쩌면 세월호 이후의 '살아남은 자들의 세계'라고 불러도 될만한 것이었다.

 

2.

문제는 소설이 비현실적이라고 느끼게 만드는 새로운 상식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돌이킬 수 없는 변화는 그런 것이 아닐까. 적어도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변화는 그런 것들이다. "더이상은 공동체가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이제 각자 살아 남는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다." - 배명훈 '누가 답해야 할까?' p.110

 

사실 신자유주의국가는 그 내부에 죽음의 그림자를 내포하고 있는 불길한 체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 의한, 만인의 죽음을 방지하기 위해 폭력을 독점한 국가가 애당초 그러했다. 국가의 배후에는 늘 죽음의 그림자가 어슬렁거린다. (중략) 그런데 신자유/신보수주의시대 국가권력/폭력의 불길함은 세월호에서 전혀 다른 양상으로 확인된다. 권력을 독점한 국가가 그 권력을 공익을 위해 제대로 행사하지 않는 공백상태가 초래하는 치명적 폭력이다. - 전규찬 '영원한 재난상태: 세월호 이후의 시간은 없다' p.160 

 

각자 살아 남는 것. 다른 말로 하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이 투쟁은 세월호 이후에 새로운 방식으로 새롭게 생겨난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그것은 신자유주의라는 국가를 선택한 이후부터 우리에게 예견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세월호와 전혀 관계없어 보이지만, 이런 풍경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1월 21일자 JTBC 뉴스. 포상금을 노리는 전문 파파라치들과 이들을 양성하는 학원의 실태. 만인의 만인에 대한 감시의 한 형태. 실제로 포상금을 받으며 활동하는 것은 파파라치들과 파파라치 학원이지만, 이들의 뒤에는 이들을 실질적으로 양성하고 있는 정부와 지자체가 있다. 각종 포상항목(실제로 1100가지가 넘는 항목이 있다)과 포상액이 지난 몇년간 대폭 늘었기 때문이다. 정부와 지자체가 행해야하는 정당한 감시는 공백상태이며, 이 임무는 개인에게 '효과적으로' 이양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감시와 고발은 파파라치가 아닌 우리에게도 더이상 낯선 것이 아니다. 요즘의 뉴스들은 거의 '괴물판독기'라 불러도 될 만하다. 하루가 멀다하고 괴물들이 걸러져 나온다. 누군가는 땅콩을 집어 던졌고, 누군가는 어린아이에게 폭력을 휘둘렀으며, 누군가는 다른 사람을 무릎 꿇렸으며, 누군가는 자신의 딸을 성추행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수많은 각종 다양한 형태의 괴물들이 하루가 다르게 보도되고, 신상이 공개되고, 여론의 날서린 비판을 받는다. 괴물의 주변에는 그들을 늘 감시할 눈이 있고, 그 감시는 꽤나 효과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다. 매일매일 이렇게 수많은 괴물을 걸러내는데, 왜 괴물들은 도무지 줄지 않는걸까. 아니 도리어 왜 그 숫자를 더 늘려가는 것처럼 보일까. 괴물을 걸러내는 우리의 방법론이 틀린 것일까. 아니면 줄어드는 만큼 새로운 괴물들이 늘 양산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괴물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물론 괴물들은 아무데서도 나오지 않는다. 감시를 행하고 괴물을 걸러내던 누군가가, 어느날 괴물이 될 뿐이다. 표창원의 말대로 우리 사회는 '공범들의 도시'가 되어가고 있다. 자신의 죄를 감형받기 위해 공범의 더 큰 죄를 폭로하는 범인처럼 우리는 타인의 죄를 밝혀내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래야만 살아남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빠르게 학습한다. 자신을 정상처럼 보이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타인을 더 괴물처럼 보이게 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안다. 세월호는 단지 그것을 더 강화시켰거나, 어떤 압축된 이미지로 보여줬을 뿐이다. 타인을 살리려 애쓴 이들은 죽게 하고, 타인보다 어떻게든 빨리 나오려고 애쓴 이들을 살리는 이미지로 말이다. 그리고 침몰하는 배에서 국가는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있으라고 한 후 어떻게든 살아 나오려고 애쓴 이들을 유일하게 구조했다. 

 

 

3.

'세월호'다. 대구 지하철 참사와 용산 참사를 잇는 것은 물론이고, 쌍용자동차와 삼성반도체, 밀양, 강정 등으로 표출된 구조적 재난과도 연속되는 현실이다.  - 전규찬 '영원한 재난상태: 세월호 이후의 시간은 없다' p.162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다른 곳에서 성공했다. 대안 부재가 합쳐진 결과 사유화가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진행된 곳은 바로 사회였다. 오히려 사유화가 가장 성공적이었던 동시에 아직 이 사유화를 돌려놓을 대안이 분명치 않은 영역은 바로 주체성과 사회적 관계다. 신자유주의는 우리의 거의 모든 것을 사유화했다. (중략) 사적으로 극히 유능하도록 요구받지만 공적인 능력은 완전히 결여된 주체성을 생산하고 그에 고유한 사회적 관계를 산출한다는 의미에서 신자유주의란 '정치'가 '경제'에 의해 대체되는 기획일 뿐만 아니라 보다 본질적으로는 '경제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통치의 패러다임"이기도 하다. - 홍철기 '세월호 참사로부터 무엇을 보고 들을 것인가?' p.206~207

 

지난 1월 20일은 용산참사가 일어난지 6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6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 일로 쫓겨난 23명의 철거민 중 10명은 단순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고, 6명은 작은 가게를 다시 열었지만, 수입이 훨씬 줄어들었으며, 7명은 아예 직장조차 없음을 뉴스는 말해준다. 어쩌면 이러한 사실보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철거된 남일당 건물 자리가 여전히 공터로 남아 단지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부분이다. 무엇을 위해서 그들은 그 건물에서 죽음에 이르러야만 했는가. 아무 것도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용산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고, 사람들은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성공했다. 철거민들에게 공포감을 주며 그 건물을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심어 주었고, 사람들의 공적 능력을 제거하였으며, 그들 삶의 많은 것을 경제라는 화두로 대체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우리의 거의 모든 것을 경제가 지배한다. 오늘날의 뉴스에서 사람들을 진정으로 화나게 하는 것은 괴물들의 소식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은 단지 유흥거리에 불과하고, 보다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것은 연말정산, 세금의 확대, 담배값 인상과 같은 것들이다. 세월호라고 하면 보상을 떠올리고, 세월호 유족이라고 하면 보상을 받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사람들을 연상한다. IS에 잡혀있는 일본인 인질의 굳은 얼굴 뒤에 숨겨진 공포를 보기보다는 그를 돌려받기 위해 IS가 제시한 보상금이 얼마인지를 궁금해하며, 설마 우리나라도 저런 일은 없겠지, 있더라도 (내 돈이 들어간) 세금은 못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다른 건 다 필요없고, 경제를 살리는 데에만 힘을 쏟겠다는 경제 대통령을 뽑고, 그 댓가로 기꺼이 대통령은 '경제'라는 낱말을 42번, '성장'이라는 단어를 '16번', '개혁'이나 '혁신'이라는 단어를 24번 말해준다. 우리는 그 말을 듣는 것을 선택했다. '세월호'나 '희생'이나 '위로'라는 낱말을 듣는 대신 말이다. 우리는 분명히 그것을 선택했다.

 

4.

아무도 이것에서 달아날 수 없다. 자책과 죄책의 차원이 거슬린다면 이렇게라도 말할 수 있다. 우리 중에 누구는 아닐까. 우리 중 누가, 문득 일상이 부러진 채로 거리에서 새까만 투사가 되어 살 일을 예측하고 살까. (중략) 아무도 이것에서 달아날 수 없다. - 황정은 '가까스로, 인간' p.95~96

 

안티고네는, 국가의 반역자로 낙인찍혀 장례가 불허된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신 위에 흙과 제주(祭酒)를 뿌리고, 그에 대한 형벌로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녀는 폴리네이케스의 죽음에 대한 애도와 장례가 금지된 상황에서, 이 마땅한 일들을 수행하는 것이 자신의 윤리적 임무라고 생각한다. - 김서영 '정신분석적 행위, 그 윤리적 필연을 살아내야 할 시간' p.181

 

우리는 아니 나는, 분명히 그것을 선택했던 것 같다. 다른 말을 듣기를 말이다. 망각을 말이다. 사건 초기 열심히 뉴스를 보던 나는 어느틈엔가 뉴스를 점점 뜸하게 보게 되었다. 아니 도리어 그로부터 며칠 후 예정된 외국 여행 일정이 다가왔을 때는 조금 안도했었던 것도 같다. 한 십여 일 외국에서 있다 보면 그래도 조금은 조용해지겠지. 모두들 금방 잊으니까. 아니, 나야말로 금방 잊고 싶으니까. 그 때의 나는 무엇 때문에 뉴스를 점점 멀리하게 되었던가. 돌이켜보면 사건 당시에 TV를 지켜보고 있던 나를 지배하고 있던 정서는 '공포'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공포는 사고 그 자체에 대한 공포였다기보다는 믿기지 않는 부조리한 현장을 보고 있는 사람이 가지는 공포였다.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배가 침몰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었다. 바다에 떠 있는 배는 당연히 언젠가 바다에 가라앉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온갖 부조리의 현장이었다. 배에 그대로 남아있던 누구도 구조되지 않았는데, 스스로 탈출한 배의 운전을 담당한 사람들은 구조되었고, 국가는 민간업체에 구조를 맡겼지만, 민간업체는 구조는 국가의 일이라 말하였다. 배의 운항을 맡은 사람들은 전문가가 아니었고, 낡은 배는 무리한 증축과 구조변경으로 망가질대로 망가진 상태였고, 재난신호는 엉뚱한 곳에 접수되었으며, 대통령은 사고 당시 몇 시간 동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밝히지 않은 채, 책임을 물어 해경을 해체하였다. 책 속의 박민규의 말대로, 혹은 박민규의 소설 속 풍경대로 그것은 온갖 부조리의 현장이었다. 아니 모든 것이 부조리했기 때문에 오히려 부조리한 모든 것이 당연해보이는 이상한 현장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게 무서웠다. 그런 나라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무서웠고, 저런 부조리의 한복판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 어쩔 수 없이 앞으로도 살아가야 하며, 어쩌면 저들과 같은 처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끝내 눈을 감지 못할 아이들을 생각하며 눈을 뜨는 것(박민규)이거나, 권력에 기대지 않고 망각과 무지와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신의 힘으로 나아지는 길임을 자각하는 것(김연수)기도 하며, 국가라는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사회를 상상하는 것(황종연)이기도 하고, 윤리적 임무를 가지고 오빠를 애도했던 안티고네가 되는 것(김서영)이거나 재난의 시대에 맞서 글을 쓰는 것(전규찬)이기도 하다. 이것들은 약간씩 다른 맥락을 가지지만, 적어도 한 가지의 공통점은 가진다. 그것은, 이러한 것들이 공포에 매몰되어 얼어붙거나, 주입된 공포를 잊기 위해서 달콤한 망각과 은폐의 유혹에 빠져 '경제'와 '성장'과 '혁신'만이 있는 공범들의 사회로 기꺼이 돌아가려 했던 자신을 돌아보라는 메시지라는 점이며, 동시에 생각만큼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공포의 이면에 있는 것을 직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니까. 

 

물론 누군가는 이것에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조금 더 실제적인 무엇, 실체가 보이는 어떤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는 있다. 이 글들은 긴급한 필요에 의해 쓰여졌다는 것. 문제에 대한 답을 주기 위해 쓰여졌다기 보다는, 어떤 질문을 해야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필요한 질문을 생각해보기 위해서 쓰여졌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질문이 정리되면 이제 그 질문에 따라서 답을 그러모으는 과정이 진행될 것이니 말이다. 시인은 시를 쓸 것이고, 소설가는 이야기를 시작할 것이며, 언론학자는 언론의 책임을 생각할 것이고, 정치철학자는 새로운 정치체계를 구상할 것이며, 또 우리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나름의 답을 찾을 것이다. 그러나 굳이 그 사실을 되새겨보지 않더라도 우리는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은 안다. 모든 구체성은 상상에서 시작된다는 것, 아무것도 상상해보지 않는 자에게 어떤 답을 찾을 가능성도 주어질 수 없다는 점을 말이다. 눈먼 자들은 눈뜬 세계를 상상하지 않고서는 눈을 뜰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깨닫지 못한다. 상상하지 않는 것은 공포에 사로잡히는 것이며, 너무도 쉽게 스스로 공범으로서의 삶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책은 그것을 너무나도 아프게 말해준다.   

 

 

* 세월호의 빠른 인양과 정확한 진상규명을 촉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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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는 실험

The Book | 2015. 1. 14. 17:16 | Posted by 맥거핀.

 


정확한 사랑의 실험

저자
신형철 지음
출판사
마음산책 | 2014-10-01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마음산책에서 펴낸,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세 번째 책 27편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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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의 책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자주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단어가 있다. "그러나 정신적인 고통은 어떻게 정확히 되돌려줄 수 있을까."(p.70)"내가 정확히 동일한 고백을 동일한 사람에게 했다고 해도 나는 더 이상 스무 살 청춘이 아니고 이 카페는 예전과는 그 분위기가 달라져 있다."(p.86)"실로 지금 이 시대가 체념도 낙관도 모두 허용하지 않는 시대라면, 이 열차가 이상한 곳에 도착했기 때문에 우리는 정확한 현실 인식에 도착한 것일지도 모른다."(p.168) 그리고 그의 고백. "문학(글쓰기)의 근원적인 욕망 중 하나는 정확해지고 싶다는 욕망이다."(p.27) 이 '정확하다'는 것이 말하고자 하는 것.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글들에서 '정확'을 이야기하는 것은 조금 어긋난 것처럼도 보인다. 왜냐하면 이 글들은 영화라는 형식을 가진 어떤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고, 모든 이야기는 일단 창작자의 손을 떠나면 어떠한 수용자, 혹은 어떠한 해석자에게도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받아들여진다고 흔히 생각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영화를 자신의 느낌대로, 혹은 자신의 방식대로, 혹은 자신의 세계관대로 받아들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 그 이해가 적어도 공격적인 방식으로 재생산되지 않는다면, 누구도 그 나름의 이해나 해석에 대해서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것은 신형철도 잘 알고 있다("정답과 오답이 있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더 좋은 해석과 덜 좋은 해석은 있다."('책머리에') 이 '더 좋다'와 '덜 좋다'는 것.) 그럼에도 그가 이 '정확하다'라는 말을 책의 제목에까지 가져온 것은 두 가지와 관련된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이 '정확하다'는 말이 수식하는 것에 대해. 단적으로 말해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정확함'이란 정확한 해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포괄한 정확한 사랑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즉 작품에 대한 해석이란 작품에 대한 사랑의 하나의 형태임을 생각해 볼 때, 그가 말하는 것은 작품에 대한 해석 이상의 그에 대한 정확한 사랑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한 영화, 한 이야기를 보며 순간순간 그에 대해 반응한다. 주인공이 누군가에게 호의를 품을 때, 우리도 호의를 가지기도 하고,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을 때, 우리도 상처를 받고, 다른 누군가를 증오할 때, 우리도 누군가를 증오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반드시 일치하는 것만은 아니다. 주인공이 누군가를 증오하지만, 우리는 도리어 그 순간 주인공에게 연민을 느끼기도 하고, 주인공이 누군가에게 호의를 가질 때, 우리는 도리어 그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볼 때도 있다. 즉 이 증오나 호의나 상처는 주인공에게서 우리에게 그대로 투영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한 번은 우리 마음 속 어딘가에서 굴절되어 다르거나 비슷한 '무엇인가' 혹은 그 '무엇인가'들이 합쳐진 '거대한 무엇인가'를 만든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이 거대한 무엇인가'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것은 어디에서와서 어떻게 만들어져,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이 순간, 나를 그 자리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고 멍하게 만드는가. 이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모를 때 때로 고통스럽다. 신형철의 작업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야기를 보고 내 마음 속 어딘가에서 만들어진 이 거대한 무엇인가가 어떤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고, 어떻게 결합되어 있으며, 어떻게 분해될 수 있는지(혹은 분해가 불가능한 것인지)를 밝히는 일. 그것을 위해서 신형철이 가지고 있는 도구는 단 하나다. 그것은 섬세하고자 하는 것, 혹은 섬세해지기 위한 최대한의 노력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복잡하고 알 수 없는 것, 즉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고, 수고로움을 필요로 하는 것이며, 또한 시간과 반복을 필요로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는 말한다. "한 편의 영화를 영화관에서 대여섯 번 보고 나서 열 줄로 이루어진 단락 열네 개를 쓰고 나면 한 달이 갔다."('책머리에')) 많은 감상들이 '감동적이었다'라는 말로 뭉뚱그린 표현밖에 쓰지 못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그 '감동'이라는 녀석을 분해하여 들여다보는 것이 노력을 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적어도 그 노력을 시도해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것은 그가 해석자이고자 하기 때문에, 즉 그가 말한대로 해석이라는 '기술'을 가진 '비평가'이고자 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아마도 '정확하다'는 말을 책의 제목에 가장 처음 넣은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즉 그는 이것이 거의 비평가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비평은 함부로 말하지 않는 연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어쩌면 비평은 함부로 말하지 않기 위해 늘 작품을 앞에 세워두는 글쓰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책머리에') 즉 그에게 있어서 비평은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다르게 말하면 최대한 정확하게 말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며,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바 그대로 최대한 정확하게 언어로 풀어내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를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포인트는 '정확함'에 있지만, 또 한편으로 그것은 동시에 '노력'에도 있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의 말대로 "삶의 진실은 수학적 진리와는 달라서 100퍼센트 정확한 문장은 존재할 수 없을 것"(p.27)이고 문학은 '근사치'로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실험은 무엇을 알고자하는 노력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들은 일종의 실험이 된다. 정확해지고자 하는 실험 말이다.

 

이것이 그런 실험이라면 마지막으로 두 가지 정도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정확함'과 '실험' 사이에 있는 하나, 즉 무엇을 위한 실험인가라는 점. 그것은 물론 제목에 있는대로 '사랑'이다. 신형철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 책에서 견지하고 있는 자세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각 텍스트에 대한 애정이다. 그는 말한다. "조금도 애정을 느낄 수 없는 텍스트였다면, 대체로 그래왔듯이, 아무 것도 쓰지 않는 편을 택했을 것이다."(p.153) 실험이란 기본적으로 잔혹한 속성을 지니고 있지만, 이 실험이 잔혹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가 이 실험의 대상자들에게 계속 애정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며, 그 텍스트가 결국 그의 생각에는 의도한 바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 텍스트였어도, 그것을 섬세하게 바라보고자 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영화를 정확하게 바라보고자 하는 다른 어떤 노력들은 왜 거부감을 불러오는가. 예를 들어 영화를 일종의 커다란 시험지로 보고, 최선을 다해 정답을 찾아보고자 하는 노력같은 것. 시험의 모든 정답을 찾은 학생에게 시험지는 더 이상 아무 의미도 없으며, 그것은 곧 구겨져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운명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이 실험은 결국 끝나지 않는 실험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다시 아까의 문장을 그래도 가져온다면 "삶의 진실은 수학적 진리와는 달라서 100퍼센트 정확한 문장은 존재할 수 없을 것"(p.27)이기 때문이며, 문학은 '근사치'로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완벽한 정확함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의 말대로 어떠한 문학도, 혹은 비평도 완벽한 정확함으로 존재할 수 없다. (완벽한 정확함이 존재하는 순간, 그의 원본은 존재의 가치가 없기 때문에도 그렇다. 삶의 모사물인 문학, 작품의 모사물인 비평이 완전하다면 삶과 작품이 존재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나 정확하게 표현되지 못한 진실은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지만,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p.27) 이 책은 우리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노력한다. 내가 이 이야기를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는 우리들이 받는 고통 말이다. 이 책은 그런 책이다.

 

 

덧.

정확하게 말해서 책을 모두 읽지는 않았다. 중간에 보지 않은 영화에 대한 글은 건너 뛰었으므로 굳이 분량으로 말하자면 3분의 2정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보지 않은 영화에 대한 내용을 미리 아는 것을 피하고자 하는 의도였다기 보다는 그 반대에 가깝다. 영화를 보지 않으면 그의 글을 더 잘 이해할 수 없을까봐서였다. 단지 세심한 그의 글을 조금이라도 더 세심하게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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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원래 눈물이 없었다

The Book | 2014. 12. 2. 19:00 | Posted by 맥거핀.

112263.1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지은이 스티븐 킹 (황금가지,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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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소설의 프롤로그는 인상적이다. 그것은 "나는 원래 눈물이 없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여, "그 뒤로 이어진 모든 일들이, 끔찍했던 그 모든 일들이 그 눈물에서 시작됐으니 말이다."로 끝난다. 일단 이 프롤로그는 예고편의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무릇 모든 예고편의 목적이란, 본편을 보게 만드는 것. 우리는 그 눈물이 없는 인간이, 눈물로 시작하여 보게 되는 끔찍했던 모든 일들이 무엇인지, 꽤나 궁금해지게 된다. 그리고 동시에 이 프롤로그는 한 일화를 통해 주인공이 어떤 인간인지 독자에게 각인시킨다. 부모님 장례 때도 울지 않은 고등학교에서 성인 영어반을 가르치는 교사 제이크 에핑. 그가 어느날 수강생들에게 낸 작문 리포트 주제는 '내 인생이 바뀐 날'이었다. 어쩌면 아마도 그런 주제는 내는 사람에게도, 그리고 쓰는 사람에게도 그렇게 좋은 주제는 아닐지도 모른다. 인생이 동전처럼 뒤집히려는 기로에 서 있을 때, 인간이 아무리 어떤 애를 써도, 지금이 그런 순간이라고 알 수 있을까. 그것을 돌아보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누구는 임신한 십 대 조카를 거두어 먹인 이모 이야기를 썼고, 또 누구는 용기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었던 전우에 얽힌 감동적인 이야기를 썼다. 그리고 그 중의 한 리포트는 그런 리포트를 읽는 일이 가슴뭉클한 일이기는 하지만, 끔찍하고 사람 진을 빼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이 제이크 에핑을 울게 만들고 글 위로 눈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눈가를 훔쳐가며 한 군데도 수정하는 일이 없이 결국 A+를 주게 만들었다. 그 리포트는 그가 '정규 교육이 가능한 정신지체인'보다 손톱만큼 낫다고 생각했던, 아이들에게 두꺼비 해리라고 불리는, 그러면서도 아이들을 혼내는 일 한 번 없는 고등학교 수위 해리 더닝이 쓴 것이었다. 그 리포트는 이렇게 시작했다. "어떤 날이 아니라 어떤 밤이었다. 내 인생이 바뀐 것은 아버지가 우리 어머니와 두 형제를 주기고 나를 심하게 다치게 만든 밤이었다. 여동생도 심하게 다쳐서 혼수상태가 됐다. 여동생은 깨어나지 못하고 3년 만에 주겄다. 이름은 엘렌이었고, 내가 정말로 사랑했는데. 꼿을 따서 꼿병에 담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는데." 

스티븐 킹의 소설 <11/22/63> 얘기다.

2. 
그러니까 이 소설은 인생이 뒤집히려는 기로에 서 있는 사람의 이야기이고, 동시에 이미 뒤집힌 사람의 기록 - 다시 말해서 해리 더닝의 기록과 같은 의미를 담은, 제이크 에핑의 기록("그 뒤로 이어진 모든 일들이...")이기도 하며, 또 한편으로는 착한 사람이 옳다고 믿는 일을 하기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상당수의 독자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이런 이야기에 약하다. 착한 사람이 옳은 일을 하기 위해 분투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 분투가 어떤 결과를 가져온 후에 뒤늦게 그 일들을 돌아보는 것 말이다. 그것은 적어도 형식적인 면에서는 몇 가지 장치를 가능하게 해준다. 즉 이는 모든 일들이 지나간 후의 기록이므로, 각각의 작은 사건에서 주인공의 후일의 감정을 붙이는 것이 가능하며, 그것은 동시에 어떤 복선으로서의 기능을 한다. 그리고 물론 그런 복선들은 읽는 이의 감정을 증폭시키기도 하면서 동시에 어떻게든 책을 끝까지 읽게 만드는 데에 효과적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스티븐 킹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음을 알려주면서도 이야기를 조금씩 지연시켜 독자의 궁금증을 끌어낼 줄 안다(크리스토퍼 놀란의 <인터스텔라>에서 이와 비슷한 것을 느꼈다. 적절한 지연말이다. 물론 이야기로 지연하는 것과 숏으로 지연하는 것은 다르지만). 그리고 그것은 전반적으로 이야기를 지배할 줄 아는 작가만이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때로 어떤 작가들은 자신의 이야기에 휘둘리기도 하지만, 스티븐 킹은 자신의 이야기들이 위치해야 할 곳을 알고 있다.

물론 이것은 어떤 기법적인 측면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결국 독자를 해리 더닝의 리포트를 읽는 제이크 에핑의 자리에 가져다 놓기 때문이다. 해리 더닝의 인생이 바뀐 날을 읽는 제이크 에핑, 그리고 제이크 에핑의 인생이 바뀐 날(로부터 시작된 이야기)을 읽는 우리들. 당신은 눈물이 많은 편인가, 아니면 눈물이 없는 편인가. 아니, 그것은 별로 상관이 없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부모님 장례 때도 울지 않은 사람도 눈물을 흘리게 만든 일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당신은 부모님 장례 때는 울었겠지.

3.
많이 알려졌듯이, 그리고 제목이 말해주듯이 이 이야기는 존 F. 케네디를 살리기 위해,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이야기이다. 그것의 성공 여부를 밝히는 것은 이 리뷰의 몫이 아니고, 다만 내가 흥미롭게 보았던 것은 스티븐 킹이 보는 미국의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까지의 모습이다. 당시는 전후의 혼란에서 벗어나 번영이 시작되는 시기였고, 지금보다 모든 것이 덜 발달된 시기였을지 몰라도, 한편으로는 더 풍요로운 시기였다. 그것은 예를 들어 주인공이 처음 1950년대로 건너와 마시는 루트비어 맥주와도 같은 것이다. 즉 그의 표현을 빌자면, "이 50년 전 세상은 내 예상을 훌쩍 뛰어넘을 만큼 냄새가 지독했지만, 맛은 훨씬 더 훌륭했다.(p.63)" 사람들은 순박했고, 지금처럼 계산적이거나, 이기적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스티븐 킹이 그 시기를 찬양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인가 무서운 것이 그 시기에는 도사리고 있었다. 예를 들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인종차별. 퍼거슨 시의 사건에서 보듯 인종 문제는 여전히 미국 사회의 뇌관이기는 하지만, 당시에는 차별이 뉴스거리도 안되는 그야말로 당연시되는 시기였고, 그것은 작가가 소설에 묘사한 실개울 위에 가로로 걸쳐진 널빤지, 즉 '흑인용 화장실'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작가는 잊지 않고 경고를 한다. "만약 당신이 내 글을 읽고 1958년이 마냥 평화로운 세상인 듯한 느낌을 받았다면 그 비탈길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덩굴 옻나무가 즐비했던 그 길을. 그리고 실개울 위에 얹혀 있던 널빤지도.(p.415)"

그러니까 그것은 한편으로 작가가 소설에 건 한 가지의 장치, '과거는 고집이 세다'와 같은 것이다. 즉 이는 과거가 바뀌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도 되지만, 동시에 과거에서 미래로의 흐름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느리고 때로는 돌아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시간은 조심스럽게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며, 우리를 조금씩 앞으로 밀어낸다. 그것은 한편으로 그가 만들어낸 다른 장치, '과거는 화음을 만들어 낸다'와도 통한다. 과거와 현재 혹은 미래는 시간 속에서 화음을 만들어낸다. 소설에서의 맥락은 약간 다르지만, 그것은 어떤 비유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것은 때로 과거의 어떤 일은 현재에서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완전한 반복이라기 보다는 화음에 가깝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동일한 것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무엇인가가 살짝 바뀌어 반복된다는 것. 즉 과거라는 음악은 이미 연주되었고, 우리가 (그 음악을 조금이라도 바꾸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그 연주를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어울리는 적절한 화음을 넣는 것 뿐이라는 점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에 이루어지는 춤처럼 말이다.
 
4.
이 소설은 크게 두 가지의 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하나는 과거로 돌아가 존 F. 케네디를 살리기 위해 제이크 에핑이 벌이는 일들이며, 다른 하나는 그가 돌아가 만나게 되는 해리 더닝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과의 이야기이다. 그것은 물론 독자가 너무 큰 이야기나, 혹은 반대로 너무 작은 이야기만 읽다가 흥미를 잃지 않게 하려는 작가의 장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른 당연한 진리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는 각자의 작은 사건들 속에서 살아가기도 하지만, 동시에 시대의 큰 사건들을 같이 겪고 있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예를 들어 존 F. 케네디의 동생이자 민주당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이기도 했던 로버트 F. 케네디의 암살을 다룬 영화 <바비> 같은 것을 연상시키는데, 이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는 로버트 F. 케네디, 즉 '바비'의 죽음이 있었던 하루를 다루기는 하지만, 그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와 언뜻 연관이 없어 보이는 여러 사람들의 그 하루를 모자이크 식으로 엮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가 잡아내고자 하는 것은 그의 죽음이 끼친 직접적인 영향이 아니라, 그가 상징하는 시대성이며, 어떤 시간의 공기이다. 즉 이들 각자의 삶은 개별의 삶으로 분리된 것이기는 하지만,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그것을 묶는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보여준다.

다시 소설로 돌아온다면, 결국 스티븐 킹이 말하고자 하는 것도 비슷한 것이다. 하나의 삶은 과거의 어떤 것을 바꾼다 할지라도 완전히 바뀌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의 삶은 분리된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으로 과거의 어떤 큰 사건(예를 들어 존 F. 케네디의 죽음)을 바꾼다 할지라도 개개인의 삶은 또 그렇게 쉽게 바뀌지는 않는다. 우리는 아무리 발버둥친다 해도 그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완전히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 당연한 진리를, 그러나 우리 종종 잊고마는 사실을 좋은 소설은 다시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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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할 수 있는 것, 혹은 해야만 하는 것

The Book | 2014. 11. 20. 15:09 | Posted by 맥거핀.

공중전과문학
카테고리 인문 > 세계문학론
지은이 W. G. 제발트 (문학동네,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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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200킬로미터 길이로 늘어선 거주지는 남김없이 파괴되었다. 도처에 끔찍하게 뒤틀린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여전히 푸르스름한 인광이 깜빡이는 시체도 있었고 거무스름하게 타버려 원래 크기의 3분의 1로 쪼그라든 시체들도 있었다. 일부는 이미 식어 굳은 자기 몸의 지방 웅덩이에 엉겨붙어 있었다. 폭격이 끝난 며칠 뒤 바로 봉쇄 구역으로 선포된 죽음의 지대 안쪽에서는, 페허지의 열기가 어느 정도 가신 8월에 접어들어 징역대와 수감자들이 식은 잔해들을 치우는 소개작업을 시작했을 때, 일산화탄소에 중독되어 여전히 책상이나 벽에 기대앉아 있는 사람들이 발견되었고, 다른 쪽에서는 난방용 보일러 폭발로 터져나온 끓는 물에 삶아져 덩이진 살과 뼈, 혹은 산처럼 쌓인 시체들이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또다른 이들은 섭씨 1,000도 이상 올라간 열기 속에서 숯이 되고 재가 되어버려서, 생존자들이 가족의 유해를 빨래바구니 하나에 다 담아갈 수 있을 정도였다. (p.44~46)


1943년 7월 말, 영국 공군은 미국 제8공군의 지원을 받아 함부르크와 그 일대를 연속적으로 폭격했다. '고모라 작전'이라 불린 이 프로젝트는 특정의 시설물 타격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 도시를 가능한한 완전히 파괴하고 잿더미로 만드는 것이었다. 폭격은 며칠 간 계속되었고, 이 폭격으로 하루 밤 사이에, 4000파운드 이상의 폭탄이 투하되었고, 하루에만 4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외에도 이차대전 막바지에 영국 공군은 독자적인 40만 번의 출격으로 100만 톤의 폭탄을 적국 영토에 투하했으며, 한 차례 또는 수 차례 이상 공격받았던 총 131개의 독일 도시 가운데 몇몇 도시가 거의 철두철미하게 붕괴되었고, 독일 민간인 60만 명 이상이 이 공중전으로 희생되었다. 100만 톤의 폭탄, 40만 번의 출격, 60만 명의 희생자. 때로 숫자는 무서울 정도로 잔혹하다. 그러나 그 무서울 정도로 잔혹한 숫자는 여전히 많은 것들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 숫자들은 그 이후에 대해서 아무 것도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거대한 폭격 이후 모든 것이 파괴되어 버린 공간에서 이제 인간들은 무엇을 해야할지 이 숫자는 말해주지 않는다. 대신에 이제 다른 것들이 나선다. 잔해를 치우고, 죽은 자들을 묻고, 살아남은 사람들을 치료하고 보호하고 새로운 도시를 재건해야 할, 수많은 사람들, 예를 들어 의사나 간호사, 경찰관과 소방관과 군인, 정치가와 행정가, 심리학자와 상담가, 건축가와 기술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언뜻 그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도 할 일이 있다. 철학자들은 이 파괴의 의미를 물을 것이고, 사회학자들은 이 재난이 사회에 미칠 영향을 생각할 것이며, 교육학자들은 이 재난 속에서 다음의 세대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지를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혹은 문학은? 이 거대한 공습, 폭격, 재난 혹은 범죄나 인간성 말살 속에서 문학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제발트의 <공중전과 문학>은 이것을 묻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문학이 할 수 있는 것, 혹은 문학이 해야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가장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두 단어 공중전(luftkrieg)과 문학(literatur) 사이에 놓인 이 'und'의 간극을 무엇으로 연결할 것인가? 물론 이 질문은 하나의 즉각적인 다른 문제 혹은 비판을 불러올 수 있다. 그것은 혹시 이 질문이 그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연합군의 독일 공습을 무조건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닌가, 전쟁의 가해자인 독일 입장에서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라는 물음이다. 책을 읽으면 이 질문은 오해에 가까운 것처럼 느껴지는데, 제발트의 문제 제기는 전쟁의 전략적인 부분이나, 어떤 역사적인 맥락 혹은 특정 국가를 비난하려는 의도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즉 제발트는 영국을 포함한 연합국이 전쟁을 빨리 끝내려는 전략적인 목적으로, 혹은 독일이 자행한 폭격에 대한 보복전의 성격으로 이 폭격을 실행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들이 일어났다'는 관점으로 이 사태를 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폭격은 어떤 특정의 목표로 실행된 것이 아니라, 단지 폭탄이 그렇게 대량으로 생산될 때부터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만들어진 폭탄은 어딘가에 쏟아부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며, 이것은 독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제발트는 글의 말미에서 이를 더욱 강조하여 말하고 있기도 한데, 독일도 게르니카, 바르샤바, 베오그라드, 로테르담, 스탈린그라드 등에서 수많은 거대한 폭격을 실행했으며, 나치스의 공군 원수 괴링도 기술적 수단만 가능했으면, 런던을 초토화시켰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제발트가 이러한 오해를 불러올 가능성을 무릅쓰고 50년도 더 지난 1990년대 말에 이 질문들을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전쟁이 불러오는 비인간성, 참화, 그 무상함에 다시 경고를 하는 목적 외에도 이것에는 크게 두 가지가 관련되어 있다. 하나는 전후 독일 사회에서 시작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집단적 망각이다. 제발트가 여러 기록과 사례를 들어 논증하고 있는 바대로, 전후 독일 사회는 이 폭격이 불러온 거대한 파괴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꺼렸으며,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으려 했다. 그것은 다시 두 가지 문제와 연괸되는데, 하나는 앞서도 이야기한 바대로 가해자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피해를 이야기하는 것이 불러올 불필요한 문제를 회피하고자 함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보다 큰 문제로 이를 일종의 부끄러운 과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나치스와 관련된 부분은 수많은 독일 국민들의 기억 속에서 잊고 싶은, 터부시되는 기억이며, 따라서 그와 관련된 이들 폭격의 참상마저도 피하고 싶고, 잊고 싶은 기억의 일부분이 되었다. 따라서 전후 독일인들은 이 죽음을 애도하고 기억하기보다는 그 시체를 '빨리 몰래 묻어버리고' 그 위에 새로운 국가와 도시를 건설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다른 하나의 문제는 보다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부분으로 그 상황에서 독일문학이 보인 전반적인 태도이다. 즉 일반 국민이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빨리 잊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할지라도 '문학'마저도 그래야 하는가, 라는 물음이다. 제발트는 전후에서 현재에 이르는 독일문학이 이 부분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으로 답했으며, 일부 이 폭격이나 공습을 다루었다고 하더라도 부적절한 방식으로 다루었다고 말한다. 즉 이 연합국에 의해 이루어진 폭격을 다룬 문학의 수 자체가 많지 않으며, 일부 이 소재를 다룬 헤르만 카자크, 한스 에리히 노사크, 아르노 슈미트, 페터 드 멘델스존 등의 작품이 부적절하게 이것을 묘사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있어서 부적절한 방식과 적절한 방식이란 무엇인가. 제발트가 말하는 부적절한 방식이란 허구화, 문학적인 수사, 통속적인 묘사, 비유의 남용 등이다. 그리고 이의 반대편에 사실에 입각한, 냉정하고 철저한 묘사와 같은 적절한 방식이 있다(예를 들어 가장 위에 인용한 묘사 같은 것이 그에 해당할 것이다). 적어도 이러한 것을 다룰 때에는 그런 방식이 필요하다고 제발트는 본 것이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면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와 역사가가 다른 것은 무엇인가. 그런 것은 역사가들의 영역이 아닌가. 제발트는 (적어도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작가와 역사가의 구별이 무의미하다고 보는 것 같다. 그가 글에서 말하는 전체적인 맥락이나 어조도 그렇고, 그가 글에 인용한 벤야민의 문구를 미뤄보아도 그렇다. 발터 벤야민이 말하는 역사의 천사. "파편에 파편을 쉼없이 쌓아올리며 그 파편을 자기 발 앞에 내던지는 단 하나의 파국을 (본다). 천사는 머물러 있고 싶어하고, 죽은 자들을 깨우고 산산이 부서진 것을 한데 모아 맞추고 싶어한다. 그러나 천국으로부터 폭풍이 닥치더니 그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로 강하게 불어대서, 천사는 날개를 접을 수도 없다. 이 폭풍은 그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그를 떠밀고 있으며, 그러는 사이 그의 앞에는 잔해더미가 하늘까지 치솟는다.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러한 폭풍이다.(p.95)"

아무리 역사가나 작가가 애써 뒤돌아서 이들을 묘사하려 온 힘을 다한다 해도 그들(과 우리)은 끊임없이 미래로 떠밀려 나간다. 진보라는 폭풍에 의해서 말이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고 해도 누군가는 뒤돌아 서서 무엇인가를 사실 그대로 기록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모두가 앞을 보며 나아가는 사이에 잔해는 점점 하늘까지 치솟으며, 그 잔해를 그대로 둔다면 언젠가는 그 앞 길도 잔해로 뒤덮이는 날이 올 것이기 때문이며, 예를 들어 역사가들이 그런 것을 한다고 해도 수많은 역사가들이 숫자만을 기록하느라 또 많은 것을 놓친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그 짐을 나눠져야 하며, 그것이 가장 처음의 질문, 즉 공중전 속에서 문학이 할 수 있는 것, 혹은 문학이 해야만 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제발트의 답이다. 그리고 이는 한편으로 제발트의 문학에 대한, 혹은 작가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담겨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공중전의 이후에, 아니 그보다 더한 것의 이후에도 문학과 작가는 여전히 필요하다는 자부심 말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작가는 망각에 대항하는 자이며 그의 글은 망각에 대항하는 무기이다.


덧1.
이 책 <공중전과 문학>에는 이 글 '공중전과 문학' 외에도 독일문학의 원로로 추앙받는 작가 알프레트 안더쉬를 비판한 '알프레트 안더쉬'도 실려 있다. 여기에도 문학에 대한 제발트의 어떤 태도가 드러나는데, 그것은 문학은 어떤 작가의 생애를 교정하거나 미화하는 도구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위에서 말한 어떤 문학에 대한 자부심과도 연관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덧2.
전체적으로 번역된 문장들이 어딘가모르게 삐걱거린다. 상대적으로 뒤에 '옮긴이의 말'은 드물게 볼 정도로 훌륭하게 잘 쓰여져 있는데, 문장이 이런 걸로 봐서는 글을 못 쓰는 분이라기보다는 번역 능력이 떨어지는 분이 아닌가 싶다.

덧3.
맥락은 많이 다르지만, 2014년의 한국에서 이 책을 읽는 것은 자꾸 어떤 사건을 떠올리게 만든다. 예를 들어 '집단적 망각' 혹은 더 나아가 '망각의 강요'가 불러오는 어떤 심상 말이다. 어쩌면 예전 제주나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들만 보아도 이런 기억과 애도가 없는 '집단적 망각'과 망각의 강요, 더 나아가 왜곡과 희화화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닌, 계속 반복되어 온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망각에 대항하는 우리의 작가들은 누구이며, 그들의 글은 어떠해야 하는가.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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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하지만 부러워하지 않는다

The Book | 2014. 11. 3. 15:32 | Posted by 맥거핀.
나의문화유산답사기일본편.4:교토의명소그들에겐내력이있고,우리
카테고리 역사/문화 > 역사기행
지은이 유홍준 (창비,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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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제본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마지막권 '교토의 명소'편을 읽었다. 처음에는 앞서 다른 편들보다도 ('교토의 명소'라는 제목에 걸맞게) 많이 알려지고 내가 가보기도 했던 곳들 - 예를 들어 금각사(긴카쿠지), 천룡사(덴류지), 용안사(료안지) 같은 곳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조금 더 읽기가 수월하겠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왜냐하면 이번 편에서는 이전의 답사기 일본편들과는 약간 핀트가 달라진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기도 했지만, 이번 편의 포인트는 일본미(美)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정원이다. 일본인들의 정원에 대한 개념은 우리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데, 일본의 정원은 빈 마당을 꾸미는 조경(造景)이 아니라, 정원을 만드는 작정(作庭)이며, 이 정원에는 당대의 어떤 역사적 배경, 지배세력 간의 관계, 정신적인 세계, 미의식 등이 총망라되어 들어간다. 즉 일본의 정원은 시대 배경을 따라 침전조 양식, 마른 산수 정원, 서원조 정원, 지천회유식 정원 등 그 형태를 달리하여 왔으며, 이 각각의 다른 양식은 당대의 여러 요소들의 집약체라고 볼 수 있으며, 동시에 그 하나하나 자체가 당대를 말해주는 역사적 상징물이다. 따라서 교토의 명원을 순례하는 이번 답사기는 그 자체가 일본 역사를 되짚는 것이며, 더 나아가 그 모두를 아우르는 '일본미의 해답'을 찾는 과정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번 편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어떤 '배경지식'들이 꽤 필요하다. 왜냐하면 각각의 정원들이 특정의 양식과 형태로 만들어진 것에는 반드시 어떤 역사적인 배경이 있기 때문이며, 역사적인 배경을 전혀 모르고 정원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단지 경치의 일부분으로만 받아들이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이번 편은 이전의 편들에 비해 조금 딱딱한 감이 있다. 이전 편에 대한 리뷰에서 유홍준 글쓰기의 장점은 과거와 현재를 적절하게 조화시키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번 편에서는 그 조화는 사실 조금 부족한 감도 없잖아 있다. 저자 본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실제 답사를 가서 "이제 공부 끝, 답사 시작!"하면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했는데, 그 '공부 끝'이 꽤 기다려지는 느낌이랄까. 물론 유홍준 교수 특유의 핵심을 짚는 설명으로 그 공부가 그렇게 지루하지만은 않지만 말이다. 물론 그 자신도 그것을 잘 알고 있으며, 글의 중간중간에 이렇게 설명이 길어지는 것에 대한 어떤 미안함을 살짝 내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 정원이 어떻게 아름다운가라는 문제보다도 왜 아름다운가, 이 아름다움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가를 보는 것이 결국 '답사'라는 것의 핵심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이 배경인 일본의 역사에 대해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답사기 자체로 돌아와 이야기한다면, 그 일본의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은 이 정원과 건물들의 내력을 살피는 것이다. 책의 부제인 '그들에겐 내력이 있고, 우리에겐 사연이 있다'라는 말처럼, 유홍준은 사찰과 정원에 들어서기 전에 그것이 왜 그 자리에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졌는지 독자에게 '썰'을 푼다. 예를 들어 에도시대에 건립된 왕가의 별궁이자, 유명한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가 극찬을 한 '가쓰라 이궁'이 왜 그렇게 공을 들여 건립되었는지 그 배경의 일단을 보기 위해서는 에도 막부와 공가(천황가)와의 관계를 알아야만 한다. 막부는 천황과 공가를 견제하고자 공가가 지켜야 할 법도를 정해 공표했고, 그것의 제1조는 "공가 사람들은 밤낮으로 학문에 전념할 것"이었다. 이는 천황과 공가는 정치에 관여하지 말고 학문과 예능에만 몰두하라는 견제를 담은 뜻이었으며, 그것이 또한 한편으로 천황과 공가가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즉 공가의 별궁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은 그렇게 해서 학문과 예능에서 높은 경지에 오른 천황의 정신세계가 담겨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왕가의 재력이나 불세출의 건축가 고보리 엔슈를 모셔올 수 있는 능력에도 그 이유는 있을 것이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것 밖에 뜻을 둘 수 밖에 없었던 공가의 어떤 심정도 그것에 들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우리는 이 가쓰라 이궁이나 수학원 이궁을 따라 살피면서 자연스럽게 일본 역사의 큰 단면 중의 하나인 쇼군과 천황의 관계를 어림하여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내력을 통해 자연스럽게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답사의 기본이기도 하다. 

또한 더 나아가 이 책은 답사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데, 이는 각각의 사찰, 정원, 건물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양식을 아울러 살피는 것이며, 전체적인 흐름을 살피는 것이다. 책은 전체적으로 가마쿠라 시대의 명찰, 무로마치 시대의 명찰, 전국시대 다도의 본가, 에도 시대의 별궁 등을 차례로 살피는 구조로 되어 있으며, 이는 역사의 흐름을 그대로 따른 것이면서 동시에 정원 발달의 흐름과 그에 내재한 어떤 역사적인 흐름을 살피는 것이기도 하다. 책의 말미에 유홍준은 이를 친절하게 정리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정원으로 보면 가마쿠라 시대에는 용안사의 석정(石庭)과 같은 마른 산수가, 그리고 무로마치 시대에는 금각사와 같은 서원조 양식이, 그리고 그 사이에는 모모야마 시대의 다도(茶道) 문화가 그리고 에도 시대에는 가쓰라 이궁과 같은 지천회유식 양식이 발전하였다. 그런데 이 양식들이 등장한 것에는 이유가 있는데, 예를 들어 가마쿠라 시대에 선종이 새로운 사상으로 등장하면서 선을 추구하는 마른 산수가 발달하고 안정된 무가사회에서는 서원조가 탄생하였으며, 모모야마 시대와 같은 혼란기에는 조촐함을 추구하는 다도 정신을 구현한 초암 다실과 노지와 같은 양식이 발전하였고, 또 다시 에도시대라는 안정기에는 왕가의 별궁과 다이묘 정원의 비교적 화려한 지천회유식 양식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이 각각의 정원 양식에는 당대의 정치 분위기와 사회상이 반영되어 있으며, 그것은 단지 한 정원의 내력만을 살펴서는 알 수 없는 것이기도 하며, 전체적인 역사의 흐름을 차례로 살펴본 이후에만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일본의 역사는 사실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낯설다. 그것은 역사적인 배경으로 인해 약간은 의도적으로 일본사의 상당부분을 소홀히 배운 측면에도 있기도 하지만, 이 일본의 역사에는 우리 역사와는 상당히 다른 이질적인 요소들, 예를 들어 우리의 왕과 상당히 개념 차이가 있는 천황, 혹은 무사라는 집단과 그들이 이야기하는 무사도(사무라이 정신), 쇼군과 다이묘, 공가(公家)와 무가(武家), 그리고 불가(佛家) 같은 것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한편으로 중요한 것은 단지 역사적인 사실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까지 어떤 일본인의 정신세계나 정치적인 부분(예를 들어 군국주의 같은 것)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입장에서는 일본인의 사고란 한국인의 사고방식으로 절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예를 들어 이 책에서 말하는 다도의 핵심이라고 하는 '와비사비 - 꽉 짜인 완벽함이 아니라 부족한 듯 여백이 있고, 아름다움을 아직 다하지 않은 감추어진 그 무엇이 있는 것'와 같은 것)이 있다랄까.

그런데 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을 이 답사기는 최대한 설명하려 애쓴다. 그리고 그것은 건물의 내력을 살피기위한 불가피한 것이지만 동시에 다른 효과를 가지기도 한다. 그것은 이 답사기 일본편들의 시작과 연관되는 것으로, 우리를 일본이라는 세계 곁으로 조금 더 가깝게 이끄는 것이다. 답사기 일본편의 첫권에서 유홍준은 우리나라와 일본의 불편한 관계를 이야기하며 어떤 균형을 잡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것은 우리의 역사, 일본의 역사를 따로 분리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한일관계사로서 양국의 역사를 보는 것이며, 그것은 싫어도 옆나라인 일본과의 향후 관계 개선과 유지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답사기 일본편 1권과 2권에서의 상당부분은 우리역사와 일본역사의 관계, 예를 들어 도래인의 흔적, 일본에 끌려간 우리도공들의 발자취 같은 것에 상당부분 지면을 할애한다. 그러던 것이 3권과 특히 이번 4권에 이르러서는 우리보다는 그들에게 조금씩 무게중심이 옮아간다. 즉 그들이 가진 특수한 어떤 것, 그들이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발전시킨 독특한 문화가 무엇인지를 보는 것이다. 그러나 무게중심이 달라졌다고 해서 말하고자 하는 본연의 것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상대방에게 전해준 것이나 우리와 비슷한 상대방의 문화를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가 가진 나름의 독특한 것이 무엇인가 보고자 하는 노력도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상대방이 가진 독특한 무엇인가를 바라볼 때에 필요한 자세를 이 책은 잃지 않고 있다. 그것은 상대방이 가진 것을 인정하고 존중하되, 우리가 가진 것에 대한 자신감과 애정도 잃지 않는 것이다. 유홍준 교수는 우리 것, 특히 백제 문화의 미덕을 이야기하며 다음과 같은 (유명해진) 표현을 썼다. 儉而不陋 華而不侈(검이불루 화이불치) -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조금 변형하여 이 책의 미덕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謙而不羨 讚而不卑 (겸이불선 찬이불비)- 겸손하지만 부러워하지 않고, 칭찬하지만 우리 것을 비하하지 않는다. 그것이 상대의 것을 대하는 기본적인 자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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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한 적 없는 여자를 생각하는 남자들

The Book | 2014. 9. 23. 18:08 | Posted by 맥거핀.
여자없는남자들무라카미하루키소설
카테고리 소설 > 일본소설
지은이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동네,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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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은 조금 특이한 소설집이다. 특이하다는 것은 (국내 출간본에서 나중에 추가한 '사랑하는 잠자'라는 소설을 제외하면) 각각의 소설들이 모두 같은 소재(그리고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인데, 그것은 일단 간단하게 말하면 소설의 주인공들이 모두 말 그대로 '여자 없는 남자'라는 점이다. 즉 소설의 인물들에게는 모두 현재 관계를 가지는 여자가 없다. 이 '관계'라는 것은 육체 관계라고도 혹은 정신적 관계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예스터데이'에 나오는 기타루에게는 어떤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는 여자친구 구리야 에리카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육체 관계가 없고, 반면 '셰에라자드'에 나오는 하바라와 셰에라자드는 육체적인 관계를 나누지만, 그들에게는 어떤 정신적인 연관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즉 그들에게는 모두 현재 관계를 가지는 여자가 없다. 한편으로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관계'라는 말이기도 하지만, '현재'라는 말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과거의 어느 순간에는 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스터데이'에서 기타루와 구리야 에리카의 관계는 이 소설의 시점에서는 이미 과거의 일이며, '셰에라자드'에서 셰에라자드와 하바라의 관계는 현재이지만, 그것이 이제 끝에 이르렀음을 소설은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다른 소설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는 '현재' 여자가 없으나, 그들에게는 과거 어느 순간 여자가 있었고, 그들은 그 여자와 육체적이고도 정신적인 관계를 나누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또 이 소설들의 기묘한 공통점이 드러나는데, 그러한 생각은 어쩌면 그들의 '착각'이거나 '혼자만의 생각'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소설들의 주인공 상대역들인 여자들은 과거 그 주인공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남자들과 육체적인 혹은 정신적인 관계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다시 정리해서 말하자면 이 소설의 인물들은 과거에는 여자가 있었으나 현재에는 여자가 없는 남자들이며, 그 여자들은 과거에 자신을 만나면서 동시에 다른 남자들도 만났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이것은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는데, '여자 없는 남자들'에서 '없다'라는 말은 '현재'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시점(時點)의 의미를 담은 그 물리성을 의미하는 말로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정신적인 없음, 혹은 아예 존재한적이 없음을 동시에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과거의 어느 순간 그들 곁에 여자가 있던 순간에도 사실상 여자는 그들의 곁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여자들은 주인공과 육체 관계를 나누는 순간에도 (육체라는 물리적인 실체는 비록 그곳에 있었을지 몰라도) 정신의 어느 부분은 자신과 관계를 나누는 남자들에게 분산되어 있었거나 어쩌면 그곳에 아예 존재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을 예를 들어 소설 '세예라자드'는 극명하게 보여주는데, 하바라와 육체적인 관계를 나누는 순간에도 세예라자드의 어떤 부분들은 과거 자신이 짝사랑하던 남자에게 가있고, 급기야는 하바라의 육체를 과거의 남자로 대체하여 관계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이 때 여자와 남자, 하바라와 세예라자드는 한 공간에 있지만,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바라가 과거의 남자로 대체되어 있거나 세예라자드의 육체는 껍데기만 남고 그녀의 어딘가는 다른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질문들이 다른 소설들에서 비슷하게 반복된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가후쿠에게나 '기노'에서 기노에게나 '독립기관'에서 도카이 의사에게. 왜 그녀는 나와 자면서 다른 남자들과 잤을까. 혹은 그녀는 그 때 그곳에 정말 존재하고 있던 것일까.


2.
다시 말해서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은 어떤 소재를 공유했다,라고 하기보다는 같은 테마를 반복하는 여섯 개의 변주곡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하루키는 능숙한 솜씨를 내보이며 같은 테마를 지루하지 않게 반복한다. 때로는 건조하게, 때로는 단조풍으로, 때로는 미스테리하고 음산한 기운을 담아서 말이다. 나는 이것이 하루키의 일종의 자신감이라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하루키는 이것을 하나의 소설집으로 묶어서 냈기 때문이다. 즉 하나의 책에서 같은 테마를 반복한다는 것은 작가에게는 일종의 자기복제가 될 위험성이 있기도 하지만, 독자에게도 그것이 자칫 지루한 반복처럼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루키는 분위기와 시점(視點)에 미묘한 변화를 주며 책을 끝까지 읽도록 만든다. 이것은 어쩌면 그가 말 그대로 소설가로서 구사하는 테크닉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올랐으며, 그에 스스로 자신감을 가졌기 때문은 아닐까. 아니, 나는 그의 소설가로서의 테크닉을 의심하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평가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 소설집은 그가 지금까지 자신의 소설들에서 보여줬던 여러 부분들이 고르게 들어있으며, 그것을 적재적소에서 능숙하게 구사한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간의 하루키 소설에 대한 오마주로서) 이것을 섹스로 비유하자면, 그의 단편소설은 어떤 체위를 실험해보는 듯한 느낌이 있었고, 그의 장편은 그 중 그가 특히 잘하는 체위로 집중 공략해서 쾌감을 증폭시킨다는 느낌이 있었다면, 이 단편들은 짧은 단편들에서도 다양한 체위를 다양한 테크닉으로 능수능란하게 구사한달까. 그저 당신은 오르가즘에 도달할 수 있도록 감각을 모으면 되는 것이다.

즉 이 하루키의 소설들에는 그간 그가 다른 소설들에서 보여줬던 요소들이 다양하게 들어 있다. 예를 들어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기묘한 분위기를 띄는 소설의 분위기('기노'나 '독립기관'에서 나타나는 어떤 기묘한 사건들, 혹은 하바라와 셰에라자드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기묘한 배경), 어떤 현실적인 문제에서 벗어나 있는 주인공들(예를 들어 하루키의 소설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는 주인공을 본 기억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등등의 내용적인 부분에서도 그렇지만, 소설의 어떤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그렇다. 단적으로 말해서 소설의 시점(視點)이나 화자 같은 부분도 그러한데, 하루키의 초창기 소설들에서 화자는 항상 '나'였으며 거의 1인칭 시점에서 소설이 전개되었다. 그랬던 것이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라는 소설집에서부터 본격적으로 3인칭 시점이 등장하여, 그의 대표작인 '1Q84'같은 소설도 3인칭 시점으로 전개가 되는데, 이 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들>은 이런 시점이 혼재되어 있다. 예를 들어 '드라이브 마이 카' '세예라자드' '기노' 등은 3인칭 시점으로 그리고 '예스터데이'나 '독립기관'은 '나'가 등장하는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리고 각각의 시점 내부에서도 미묘한 차이가 있는데, '드라이브 마이 카'나 '세예라자드'가 가후쿠나 하바라에 기반한 관찰자적인 시점이라면 '기노'는 보다 전지적인 시점이며, 같은 1인칭 시점이라도 '예스터데이'는 '나'가 이야기에 보다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반면에 '독립기관'에서는 이야기의 중심에서 보다 물러나 있다(그러니 예를 들어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이 소설들에서 '나'의 존재는 왜 필요한 것일까(특히 '독립기관'과 같은 내용이라면), 흥미롭게도 이 두 명의 '나'는 글을 쓰는 일을 하는 사람인데, 이 둘은 같은 나인가, 다른 나인가, 혹은 무라카미 하루키 그 자신인가).

이것을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 여섯 개의 이야기들, 혹은 여섯 개의 변주들은 묘하게 연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주제가 비슷하다는 측면에서가 아니라 소설의 형식이 낳는 어떤 기묘함들인데, 예를 들어 (위에서도 썼지만) '예스터데이'의 나와 '독립기관'의 나는 둘 다 글을 쓰는 남자이면서 동시에 '다니무라'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마지막 '여자 없는 남자들'의 '나'에는 이 소설의 어떤 인물을 끼워넣어도 그렇게 크게 무리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3인칭으로 전개되는 소설들이라 할지라도 이 소설의 어떤 인물을 다른 소설의 어떤 배경에 던져넣는다 할지라도, 예를 들어서 '드라이브 마이 카'의 가후쿠가 '기노'라는 술집에 등장한다고 할지라도, 혹은 '세예라자드'가 사실은 '독립기관'에서 도카이 의사가 사랑한 여자였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즉 다시 말해서 이 단편들은 각각의 온전한 단편이면서도 연결되어 하나의 장편처럼 보이며, 혹은 (하루키의 여러 단편들이 그랬듯) 각각의 개별적인 장편의 하나의 단초들인 것처럼 보인다. (많은 분들이 그렇게 느꼈을테지만 '셰에라자드'나 '기노' 등은 이것으로 부족한, 더 많은 이야기의 일부인 것처럼 보인다.)


3.
즉 <여자 없는 남자들>에 실린 여러 소설들은 과거 하루키 소설의 어떤 부분들을 더 풍성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분명히 비슷한 무엇인가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예스터데이'나 '독립기관'에 등장하는 나, 그러니까 소설가 다니무라. 그 소설의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그 화자. 그는 그렇게 특출나게 잘생겼다고도, 혹은 능력이 뛰어나다고도, 혹은 매력이 있다고도, 혹은 성격적으로 특별히 좋은 면이 있다고도 말할 수 없지만, 살아가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지도 않고, 특정의 취미가 있고 어느 정도 삶을 즐길 줄 알며, 자신의 일의 분야에서는 어느 정도의 루틴에 들어간 것처럼 보이며, 합리적인 사고를 하고, 합리적으로 행동한다. 그러나 그들 주위에는 기타루나 도카이 의사처럼 어딘지 모르게 특이한 남자들이 있었으며, 그 인물들은 그(나)의 기억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그 남자들은 죽거나, 사라진다(즉 지금은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가 없다). 즉 이 나의 주변에는 죽음이 어른거린다(그러나 이들 '나'는 죽음 근처에 있지만, 이들은 대체로 죽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그가 소설 속 화자인 '나'이기 때문에도 그렇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여자들이 있다. 그 여자들은 대체로 외모가 뛰어나거나 아름다운 편이며, 하루키가 늘 주목하는 대로 대체로 가슴크기도 적당하다. '예스터데이'의 구리야 에리카, '사진에서 본 대로 멋진 여자였지만 실물을 마주하니 얼굴보다도 온 몸에 넘치는 순수한 생명력 같은 것이 주의를 끄는' 여자. 혹은 '독립기관'의 도카이의 그녀, 그러니까 '종합적인 존재, 강력한 자석처럼 나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여자. 그러나 문제는 그들의 내부는 여전히 미궁에 놓여져 있다. '예스터데이'에서 기타루는 구리야 에리카를 안는 것을 거의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며, '독립기관'에서 도카이는 그녀의 무엇이 사실 그를 그렇게 끌어당기는 것인지 모른다. 여자들의 내부는 거의 항상 알 수 없는 무엇인가로 가득차 있으며, 남자들은 늘 그것을 독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가후쿠의 죽은 부인이나, 하바라의 셰에라자드나 기노의 전부인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더 거슬러 오르면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의 '시로'나 <1Q84>의 '후카에리'도 마찬가지다. 여자들은 겉으로 완벽해지면 완벽해질수록 내부는 알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된다. 그리고 그녀들은 그렇게 되면 될수록 더 죽음 가까이로 간다.

그리고 다시 그의 반대편에 위에서 말한 평범한 '나'들을 포함한 남자들이 있다. 다시 반복하지만, 이들은 죽음의 가까이에 있지만 죽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는한, 적어도 생활고 때문에 죽음 근처에 가까이 갈 이유는 없다. 그들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고, 그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만, 그 고민은 이상하게도 그들을 극단으로 몰아가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죽기에는 너무 쿨할 뿐이다. 그런데 여기까지가 이 <여자 없는 남자들>의 전작의 남자들이라면 이 <여자 없는 남자들>에는 새로운 유형의 남자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독립기관'의 도카이 의사나 '기노'의 기노같은 남자들. 기노에게 보내는 메시지들은 거의 그간 하루키 소설 속의 남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처럼 보인다. 그것이 하루키의 새 소설을 통해서 느끼는 미묘한 변화다.

나는 상처받아야 할 때 충분히 상처받지 않았다,고 기노는 인정했다. 진짜 아픔을 느껴야 할 때 나는 결정적인 감각을 억눌러버렸다. 통절함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진실과 정면으로 맞서기를 회피하고, 그 결과 이렇게 알맹이 없이 텅 빈 마음을 떠안게 되었다. 뱀들은 그 장소를 손에 넣고 차갑게 박동하는 그들의 심장을 거기에 감춰두려 하고 있다. (p.266)


4.
마지막으로 두 가지 이야기만 덧붙이고 싶다. 하나는 '사랑하는 잠자'는 넣지 않은 편이 훨씬 좋았으리라는 점이다. 테마의 미묘한 변주를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전혀 이질적인 음악이 들어가 있으면 되겠는가. 편집 과정에서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정 넣고 싶다면 차라리 맨 뒤로 돌리는 편이 나았다. (아니면 원서에는 없지만 나중에 추가한 것이라고 최소한도의 설명을 붙이기라도 하든가 말이다. 다만 '사랑하는 잠자'가 그 뒤의 이야기가 많이 궁금하긴 했다.)

그리고 더 한 가지. 예전에 하루키의 소설들에서 늘 어떤 강조점, 방점들이 거슬린다고 했는데, 방점이라는 그 자체가 거슬리는 것인지, 그 '형식'이 거슬리는 것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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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에서 과거를 보는 것

The Book | 2014. 7. 10. 11:57 | Posted by 맥거핀.
나의문화유산답사기일본편.1:규슈빛은한반도로부터
카테고리 역사/문화 > 역사기행
지은이 유홍준 (창비,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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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역사 관련 동아리 활동을 해서 수 차례 답사를 따라다녔다. 답사를 가보신 분들은 잘 알겠지만, 답사, 특히 유적, 유물과 관련한 답사는 사전에 얼마나 많은 것을 공부하고 가는가에 따라서 그야말로 충실한 체험학습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숙취와 희미한 잔상과 줄어든 통장 잔고만 남는 거의 무의미한 여행이 될 수도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은 여느 때도 그렇지만, 이 경우에 특히 진리이고, 충실한 공부를 한 후에 답사를 가게 되면, 그간 공부한 게 억울해서라도 한 가지라도 더 보기 위해 노력하게 되고, 그만큼 더 보게 된다. 그런만큼 여행 관련한 서적을 보게 되면 일반적인 여행기나 여행 가이드북 보다는 답사기에 더 손이 가는 편인데, 그런 답사기의 거의 대표격 책이라 할 수 있는 유홍준의 답사기를 오랜만에 펴들었다.  

이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를 읽다보면 그가 가진 글쓰기의 장점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며, 왜 그의 답사기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독자의 사랑을 받아왔는지 알게 된다. 그의 글쓰기는 이른바 쉬운 글쓰기의 전형이다. 읽는 이의 눈높이에 맞춘 설명, 이해하기 쉬운 사례의 제시, 적절한 균형 감각, 새로운 것에 대한 풍부하고도 깊이 있는 지식, 적당한 유머 등이 그의 글쓰기에는 들어 있다. 사실 짧은 잡문이라도 써보신 분들은 잘 알겠지만, 쉬운 글쓰기야말로 아무나 하기 어려운 것이고, 술술 읽히는 글이면서도 그 안에 깊이 있는 내용을 담기란 여간 어렵지 않은 것이다. 그런 것이야말로 아마도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사람들의 글쓰기이고, 아마도 혜안과 통찰이 필요한 것이리라. 즉 읽는 이들에게 아 그렇구나!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는 본인부터 아 그렇구나!를 해야한다는 사실. 그러니까 어쩌면 이 답사기들의 매력은 내용들보다도 그의 어떤 글쓰기 스타일, 혹은 형식적인 면에 있다고 해야할 것인데, 유홍준은 약간의 공백기를 지난 후 새롭게 돌아온 답사기 '일본편'에서도 그의 장기를 여실히 구사하고 있다.

그의 장기란 '답사기'라는 본연과 연관되는 것으로, 독자를 마치 그가 가이드하는 한 답사의 대원처럼 느끼게 해준다는 사실이다. 즉 그는 적절하게 균형을 잡는 것에 능하다. 역사와 관련한 답사를 다녀보며 생각하게 되는 것은, 답사는 역사적 세계와 현실의 세계에 적절히 균형을 잡는 것, 혹은 그 둘 사이를 연결짓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역사적 유물, 혹은 유적이 어떤 과거의 세계를 거쳐 만들어졌는가, 그것에는 어떤 역사적 사실이 개입되어 있는가를 알게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그것이 지금 내 앞에 있다는 사실, 혹은 그의 어떤 부피나 질감이라는 물질성도 답사에서는 중요하다. 즉 과거라는 역사적 세계 외에 그것이 바로 '지금' 여기에 있고 오랜 시간 후의 '나'라는 존재가 그것을 보고 만지러 왔다는 그 현실을 연결시키는 것이 한편으로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 균형을 잡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그 균형을 잃어버리면 그 답사는 단지 역사책을 보거나, 단지 자연물을 보는 것처럼 되어 버린다). 그런데 유홍준은 이 균형잡기, 혹은 연결에 능하다. 그는 역사적 사실이나 사건의 배경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려주다가 어느 틈에 현실의 에피소드로 슬그머니 들어와 그것을 보고 있는 현실의 나와 우리를 느끼게 해준다. 즉 그는 현실에 서서 과거를 본다는 이 답사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며, 충분히 보았으면 너무 그것만 보지 말고 다음의 무엇을 보러 가자고 슬그머니 소매를 잡아 이끈다.  

예를 들어 이 책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1 규슈>에서 그가 말하는 '다음의 무엇' 중의 하나는 과거에만 얽매이지 않은 조금은 전진하는 시각이다. 그것은 과거의 모든 것을 잊고 무턱대로 앞으로 나아가자고 하는 시각이나 과거의 철저한 반성과 극복만을 주장하는 시각과는 조금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정확히 바로잡아야 할 것은 바로잡아야 한다는 어떤 실리적인 시각에 가깝다. 유홍준은 단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일본인들은 고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역사를 왜곡하고, 한국인은 근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일본문화를 무시한다." 즉 그의 시각에서 보면 삼한과 고조선, 혹은 백제의 도래인들이 일본 고대국가 건국에 (거의 중심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만큼)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일본인들은 부정하며 역사를 왜곡하고, 한국인은 수 차례에 걸친 일본의 침략과 거의 나라를 완전히 빼앗길 뻔한 아픔 때문에 일본에 대해서 무조건 배척하거나, 그들(이 자체적인 힘으로 발전시킨 문화)을 무시하려 든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시각은 (그가 책에서 말하기도 하지만) 박노자의 <거꾸로 보는 고대사> 등에서 나타난 미래지향적인 시각과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예를 들어 역사책의 삼국시대는 가야와 왜가 포함된 오국시대라고 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 등이 그러한데 백제와 고구려는 서로의 왕을 죽일 정도로 불구대천의 원수에 가까웠지만, 왜는 백제가 멸명한 후 백제부흥군에 2만 7천명의 원군을 보냈다는 사실 등을 그 예로 든다), 이는 역사를 단지 일본의 입장에서, 혹은 우리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한일교류사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며, 일본과 우리 사이에 지금의 현실에서 보다 높은 신뢰가 필요하다는 실리적인 입장과도 연결된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듯이 이는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조금은 위험할 수 있으며, 그의 표현대로라면 '쌍방에서 날아오는 독화살'을 맞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 책에서 그의 장기인 적절한 균형감각을 잡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는데, 그것은 예를 들어 일본 속에 남아 있는 도래인들의 흔적을 주로 세밀히 살피면서도 그들이 발전시킨 것은 일본문화이지 한국문화가 아니라고 밝히거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들의 발자취를 더듬으면서도 단지 그들의 한이나 우수성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들이 꽃피운 이마리야키, 아리타야키, 사쓰마야키 등의 일본자기문화의 독자적 발전상이나 그들의 발전을 가능케해준 시스템에 대해 살피는 것이다. 또 그것은 이제 폐허가 된 히젠 나고야 성을 살피며, 조선이 결국 임진왜란의 승전국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자부심을 가질 것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7년 전쟁이 가져온 피해와 인재양성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메이지 유신과 그들의 발빠른 개화를 눈여겨 보면서도 그들의 반복되는 '자살 충동'이나 군국주의에 대해 경계하는 것이며, 또 되풀이되는 역사 속에서 우리가 반성하고 갖추어야 할 점을 살펴보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균형감각 혹은 균형을 위한 노력은 결국 다른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단지 많은 지식을 갖추었다고 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가 결국 '답사'의 본질을 꿰뚫어 보면서 이러한 것들을 돌아보는 것에도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가 어쩔 수 없이 왜장들에게 끌려간 조선 도공들의 역사를 살펴보면서도 단지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나 한에만 머무르지 않는 것은 그가 지금 현재에 서서 과거의 가마들을 살펴보기 때문이다. 그 가마들에는 단지 당시의 고초와 한을 넘어서는 오랜 세월의 흔적이 스며들어 있으며, 조선 도공들의 오랜 시간의 땀과 노력이 담겨 있다. 그들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나 과거의 향수에만 매여 있지 않고 단지 강요에 의해서만이 아닌 더 나은 도자기를 만들어내려는 열정을 그 곳에 쏟아부었기도 했던 것이다. 그가 메이지 시대의 유물들을 보며 조선 개국과정에서의 아쉬움과 일본에 대한 분노에만 머무르지 않는 것은 그 이후의 역사를 알고 있기 때문이며, 또다시 군국주의의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는 현재의 일본을 보는 한 사람으로서 그 자리에서 그것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즉 답사는 결국 과거의 시각으로 과거를 보지 않기 위함이다. 지금 바로 현재의 시각에서 과거의 것을 보며 그것은 한편으로 현재 혹은 더 나아가 미래를 보기 위함이기도 하다. 그것이 답사, 혹은 답사기의 매력이자 즐거움이다.


덧.
어쩌면 가장 큰 즐거움은 내 앞에는 아직도 두 권의 답사기가 남아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아마도 나라나 교토에 대해서는 그 곳에 다녀온 경험도 있으니 더 즐거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겠지. 물론 꼭 다녀오지 않아도 반가운 경우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이 책에 나온 가고시마의 경우가 그러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의 배경이 되는 곳이 가고시마와 사쿠라지마인데 아는 곳을 돌아보는 것 같아 반가웠다. 물론 나는 그 화산재에 대해 쥐뿔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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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할 순 있어도, 막을 수는 없다

The Book | 2014. 3. 3. 17:28 | Posted by 맥거핀.
시인을체포하라14인사건을통해보는18세기파리의의사소통망
카테고리 역사/문화 > 서양사
지은이 로버트 단턴 (문학과지성사,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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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40년 전인, 1749년 봄의 파리. 의학을 공부하던 프랑수아 보니라는 학생이 경찰이 고용한 첩자의 밀고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의 혐의는 왕(루이 15세)을 비난하는 시를 써서 여러 사람에게 읽어주었다는 것이었으며, 그는 시를 읽어준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자신이 지은 것이 아니며, 그도 누군가에게 전달받았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 사건은 꼬리를 물고 이어져, 보니를 비롯한 총 14명이 왕을 비난하는 여러 편의 시를 짓고, 유포시킨 혐의로 연쇄적으로 체포되었고, 그들은 대부분 자신이 시를 가지고 있었고, 누군가에게 들려준 것은 사실이나 자신들이 시의 원저자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모두 법학생, 의학생, 철학과정 학생, 성직자, 법률서기 등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보기는 어려웠고, 프티 브르주아이지만 단지 약간의 학식을 가진 보통의 대중에 가까웠고, 경찰이 벌인 일련의 조사에서도 이들이 이 시의 원저자라고 밝혀낼 만한 핵심적인 근거를 찾아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대중들에게 본보기로서 일벌백계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 사건은 이후 이들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사건은 <시인을 체포하라>의 저자 로버트 단턴이 '14인 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단턴은 당시의 경찰 기록 및 여러 문헌을 토대로 이 사건의 의미를 세심하게 추적하며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파리 경찰 당국 및 베르사유의 내부자들은 왜 (어떻게 보면 하찮은) 시를 추적하는 일에 그토록 열을 올렸을까? 왜 이 14인은 대중 속에서 끌려나와 일벌백계의 대상이 되었을까? 이 시들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유통되었을까? 이 시들은 대중 속에 어느 정도로 퍼져나갔으며, 그것은 어떠한 기능을 했을까? 당대의 대중들은 이 시들을 노래하며 어떤 생각을 가졌고, 그것은 그들의 향후의 행동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아마도 이 질문들은 다음의 질문으로 좁힐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사건은 '여론'이라는 것의 탄생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 사건으로 당대의 '여론'이라는 것의 실체를 살펴볼 수 있을까?

'여론'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저자의 논의를 따른다면, 여론에 관한 역사연구에는 두 가지 구분되는 입장이 있다. 하나는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입장으로 여론을 인식론과 권력의 문제로 이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의 입장으로 여론을 이성이 작동하는 공공성을 통한 합리적 결정 도출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이를 저자의 나중의 논의에 비추어 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는데, 하나는 철학적 형태의 여론으로 진실의 확산에 관심을 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형태의 여론으로 의사소통 회로를 통해 유통되는 메시지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p.149). 단턴의 논의는 이 두 가지 모두와 약간은 거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데, 이는 이론적인 논의보다는 경험적인 연구이며, 하나의 실제사건을 놓고 실제의 메시지의 형태와 그 유통방식, 그리고 그것에 대중들에 보이는 반응에 더 관심을 두는 것이며, 그것에서 도출되는 대중의 면모를 조심스레 살피는 것이다. 즉 이 사건에서 단턴이 보는 대중의 면모는 어떤 진실의 담지자이거나 합리적 이성이 작동하는 공공성이 작동하는 무엇도 아니다. 그보다는 더욱 복잡한 무엇, 새롭게 등장하게 된 실체를 가진 수많은 목소리를 가진 힘에 가깝다.

어떤 "여론"인가? 그것은 이성의 목소리도 아니고, 모를레와 콩도르세가 채택한 철학의 개념과 멀게라도 닮은 어떤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회적 혼종물인 메르시에의 "대중이라는 분"의 독단적인 명령으로 이제 새로운 리바이어던(Leviathan)과 같다. (중략) 그러나 철학적 이상과 사회적 현실은 결코 일치한 적이 없다. 대중이라는 분은 철학자들이 여론에 관해 논문을 쓰기 훨씬 전부터 존재했으며,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 대중을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여론조사자들의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말이다. 대중이 언제나 변함없이 동일했다는 뜻은 아니다. 18세기 파리에서 구체제 특유의 대중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이런저런 일들에 대해 의견을 내며 끼어들기 시작했다. 대중은 계몽사상가들이 상상해낸 추상이 아니었다. 대중을 담론적으로 구축하려는 계몽사상가들의 시도에는 터럭만큼의 관심도 없이, 계몽사상가들을 포함해 앞에 놓인 모든 것을 쓸어버린 대중은 거리에서 길어 올린 어떤 힘이었으며, 이미 14인 사건의 시기에도 분명하게 보였고 40년 후에는 멈출 수 없게 된 힘이었다. (p. 155~156)

즉 단턴의 논의는 보다 조심스럽다. 역사학자로서 그가 결국 말하는 것은 여론이라는 것의 어떤 거대한 맹아라기보다는 이 사건에서 드러난 초기적 정보사회에서의 대중들의 의사소통체계이며, 불확실한 가설보다는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무엇인가이다. 예를 들어 그는 재빨리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으로 달려가지 않는다. 즉 그는 이 '14인 사건'에서 드러난 대중들의 의사소통체계와 프랑스 대혁명을 단선적으로 연결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가 결론을 내리는 것은 (혁명이라는 것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해도) 18세기 중반의 파리는 시와 노래라는 하나의 효율적인 의사소통체계를 갖추고 있었고, 그것을 통해 대중들에게 어떤 사건과 그에 대해 나돌던 세간의 논평을 전했다는 것이다(즉 이 시와 노래들은 현재의 호외와 비슷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또한, 이는 정보를 전파하고 받아들이는 행위를 통해 대중들에게 일종의 공적 사건에의 개입이라는 공통된 의식을 갖추게 함으로써 '대중'을 형성하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심스러움은 한편으로 이 연구의 방법론이 가지는 한계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 책 <시인을 체포하라>는 부록과 주석을 빼면 162페이지라는 그다지 길지 않은 분량이고, 그의 논의 방식과 서술 형태를 볼 때 대중서라기보다는 연구논문에 가깝다. 이 연구논문에서 단턴의 방법론은 방대하고도 다양한 사료에 대한 철저한 문헌연구라고 볼 수 있는데, 사실 이러한 주제에서 문헌연구의 한계는 명확하기 때문이다. 즉 예를 들어 문헌을 통해 당대에 실제로 유통되었던 시나, 그것으로 인해 벌어진 사건의 경과들을 추적하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할지 몰라도, 그것이 실제로 대중들에게 어느정도 퍼져있었는지(페이스북 '좋아요' 개수나 트위터 팔로워 수가 있는 것이 아니다), 혹은 대중들이 어느 정도 그것에 열광하였는지, 혹은 그들이 그것을 듣고 노래하며 어떠한 생각을 가졌는지 정확히 밝혀내기란 어렵다(그에 대한 기록이 있다고 해도 그 기록은 대체로 일반대중이 남긴 것이 아니었다). 하다못해 시와 노래라고 해도, 그것이 정확히 어떻게 불렸는지 알기란 어려운 것이다(악보로 곡조와 가사가 남아있다고 해도, 사실 그것을 어디에서 어떻게 - 음울하게, 혹은 활기차게, 혹은 비꼬듯이 - 불렀는지는 정확히 추론하기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역으로 이 책의 가치는 그 내용적인 부분보다도 그 방법론적인 시도라고 볼 수도 있는데, 단턴은 철저하게 문헌연구에 의존하면서도 그 문헌연구에 다양한 시도들을 가미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경찰기록, 일기, 샹송집, 재판기록, 벽보 등 다양한 문헌을 수집하는 소재적인 면에서, 또는 통계를 내거나, 노래의 변천과정을 추적하거나, 정치적이거나 문학적인 배경을 추론하거나 하는 등의 방법적인 면에서도 그러하지만, 당대의 노래를 실제로 녹음하여 그것을 독자들이 들어볼 수 있도록 배려한 것 등이 그러하다(그 외에도 옮긴이는 이 책 자체가 시집이나 노래책의 구조를 모방하고 있다고 하는데...글쎄?). 물론 이는 단턴의 논의대로, 아마도 당대에 실제로 불렸던 것과는 상당히 다를 수도 있겠지만, 이를 통해 단지 문자로서 시와 노래를 접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구어적 의사소통체계의 일부분을 맛볼 수 있게 해주며, 우리도 그로 인해 이 구어적 의사소통체계의 힘을 다른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게 한다.      

그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는 일부분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단턴의 논의를 따라 이 14인 사건에서 나타난 구어적 의사소통망과 40년 후의 프랑스 대혁명을 무리하게 연결짓지 않는다고 해도,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경찰과 베르사유의 내부자들이 이 '14인 사건' 등을 통해 관련자들에게 일벌백계를 가하는 등 이 시와 노래의 유통과 확산을 막기 위해 애썼지만, 결코 대중들의 입에서 이러한 노래가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의 원저자의 추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원본이나 사본을 없앤다고 해도, 그것의 여러 다양한 변형본들은 계속 대중들에게서 대중들에게로 전파되었다. 문자체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암기와 가창이라는 구어적 형태로서 말이다. 즉 아무리 애를 써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간 이야기와 노래들, 혹은 그 대중들의 비판적이고도 풍자적인 의식 자체를 막을 수는 없었다. 즉 당시 18세기의 파리는 시와 노래가 지배하는 정보사회였으며, 이는 21세기의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이다(비록 인터넷과 트위터와 페이스북이라는 다른 것이 지배한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3세기나 지났지만, 위정자들이 벌이는 행태는 비슷하다. 지난 정상회의 포스터를 둘러싼 사건, 혹은 국정원의 여론조작 사건에서 보듯, 위정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대중의 의사소통체계에 틈입하여, 그것을 조작하거나 부수려 한다. 그러나 대중의 머리와 의식이 남아있는 한, 그 입을 완전히 막아내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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