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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2일, CINDI

Interlude | 2011. 8. 23. 17:06 | Posted by 맥거핀.

 

영화를 한 편, 한 편 계속 보면서, 결국 영화만의 그 어떤 결정적인 특성에 주목하게 된다. '영화만의 그 결정적인 특성' 중의 하나는 카메라다. 영화는 필름이든, 디지털이든 결국 카메라로 '촬영'되어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반드시 그 카메라를 든 자의 주관적인 시선 혹은 입장, 권력이 개입되며, 같은 이야기라도 그것이 어떻게 촬영되는가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매우 다르게 전달된다. 하나의 경우로, 남녀가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담는다고 했을 때, 같은 대화라도 그것이 어떻게 촬영되는가에 따라 분위기는 매우 달라진다. 예를 들어 남녀를 각각 오른쪽 왼쪽에 배치하고 하나의 프레임안에 담으면 어떤 친밀한 분위기를 느끼게 할 수 있다. 반면, 남녀 각각을 따로 잡아 번갈아 배치하며 잡으면 이전 보다는 친밀성이 떨어지며 각각의 입장이 도드라질 것이다. 아니면 이런 경우는 어떨까. 남 녀를 동시에 잡되, 그들을 카메라를 등지게 한다면... 그 때는 어떤 비밀스러운 분위기가 연출될 것이다. 더욱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싶다면, 카메라를 바닥으로 끌어당겨 그들의 발만을 잡을 수도 있다. 경우의 수는 무궁무진하다. 남녀를 동시에 잡되, 사운드를 없애버릴 수도 있다. 대사야 자막으로 처리하면 된다. 아니면, 그 반대의 경우 사운드를 매우 증폭시킬 수도 있다. 배경소리가 증폭되고, 남녀의 대화가 거의 들리지 않게 될 때의 묘한 분위기는 어떨까. 아니면, 남녀 중에 한 명만 흐릿하게 처리한다면....선택의 수는 무한대로 증폭되고, 그 때마다 영화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어제 본 두 편의 영화 모두 카메라의 활용이 흥미롭다.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각각의 독특한 촬영 방법들은 영화를 종종 다른 이야기로 만들어 버린다. 즉 카메라는 이야기보다 우위에 있다. 이 이야기가 다른 각도로 전달되었으면, 우리는 이 이야기들을 분명히 다르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환호성 (Hurrahh!) - 정재훈 감독


앞에서도 이야기한 것의 연장선이지만, 이 영화는 카메라의 활용이 독특하다. 사실, 이야기로만 봤을 때는 이 영화는 거의 아무 것도 담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혼자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한 남자가 있다. 이야기는 그저 이 남자의 일상을 따라간다. 그는 집에서 누워있다가, 마을을 어슬렁거리다가, 당구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세차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다시 집에 돌아와서 잠을 잔다. 이야기는 이것이 거의 전부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다양한 카메라, 사운드의 활용이 들어가 있다. 예를 들어 먼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운드다. 이 영화의 사운드는 전반적으로 묘하게 증폭되어 있다. 당구장이나 세차장에서 일할 때는 주위의 소음들이 불쾌감을 느낄 정도로 크게 증폭되어 있다. 또한 영화 중간중간에 산의 풀숲들을 찍은 화면들이 지속적으로 삽입되는데, 이 때는 웅하는 바람소리 비슷한 것들이 스며들어가 있고, 이상한 소리들이 끼어든다. 이 풀숲 장면들만 놓고 보았을 때 영화는 거의 어떤 공포물처럼 보인다. 이외에도 마치 촬영을 잘못한 것처럼 보일 정도로 이 영화에는 이상한 소리들이 스며들어 있다. 카메라 역시 마찬가지다. 화면은 때로 핀트를 잘못 잡은 듯이 나가버리고, 때로는 일부분이 거의 깨져버리기도 한다. 어떤 장면에서는 인물을 찍었는데, 마치 이 인물이 유체이탈을 하는 듯이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 가까이에서 일부의 조명으로만 인물을 잡아, 인물은 매우 기괴하게 보인다. 이러한 효과들은 무엇 때문인가.

그러므로 이 영화는 이런 질문을 하게 만들수도 있다. 이것은 별 의미없는 실험같은 것의 총체가 아닐까, 아니면 만든 이의 여러 실수가 너무 지속적으로 보여지는 것이 아닐까, 그도 아니면, 이것은 그저 카메라를 가지고 노는 장난같은 것일까, 또는 어느 영화과 학생의 쓸데없이 과잉된 자의식의 치기같은 것이 아닐까. 그러나 감독의 전작 <호수길>을 본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조금은 다르게 생각할 것이다. 어떤 효과적인 측면에서는 이 영화는 <호수길>의 연장선에 와 있다. (이야기적인 측면에서도 연결지어서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호수길>에서도 마치 실험과도 같아 보이는 장면들이 있었고, 그것은 사실 영화 전체에 의도적으로 주의깊게 삽입된 것이었다. 여러 효과들로 인하여, 그저 평범한 산길과 마을의 모습을 담은 것처럼 보였던 이 영화는 사라져 가는 것들을 기억하는, 동시에 거대한 폭력을 고발하는 영화가 되었다. 그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마지막에 마을 한 가운데에서 마을을 때려 부수던 포크레인이 '드디어' 우리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를 경험했을 것이다. 지속적으로 쌓은 그 효과들로 인하여.

그러므로 이 이야기도 조금은 다르게 읽힌다. 몇몇 효과들은 그 장면을 거의 다르게 우리에게 인식시킨다. 예를 들어, 사운드의 증폭. 누구나 알고 있듯이 혼자 있는 사람에게는 주위의 배경음은 늘 크게 들린다. 당구장이나 세차장에서 소리가 크게 들리는 것도 마찬가지. 그 상황에서는 어쩌면 그 소리들은 그렇게 크고 무시무시하게 들릴 것이다. 남자의 배가 비춰지며, 이상한 꼬르륵 소리가 들리는 것은 어떨까. 배고픈 자에게 자신의 꼬르륵 소리는 유난히 크게 들린다. 아무 것도 없는 방에서 유일하게 들리는 것은 자신의 꼬르륵 소리 뿐이다. 그 소리는 무언가를 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내면의 필사적인 외침이기도 하다. 반면, 밤의 외부 화면을 찍은 화면이 일종의 공포물이 되어 있는 것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외부는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처럼, 화면 속의 그에게도 공포이다. 그가 외부로 나간다는 것은 결국 돈을 벌지 못하고, 이 집에서 쫓겨나는 것이니까. 이 겨울에 바깥은 공포이다(겨울산의 배경). 그러므로 그 바깥에서 그는 때로 유체이탈이 되고, 화면의 깨진 픽셀은 유령처럼 서 있다. 그 유령은 깨진 화면 속에서 '으스스하게' 존재하고 있다. 돈 없고, 배고픈 자여 이리로 오려므나. 

한 젊은 남자가 있다. 그는 낮에 집에 누워 자신의 꼬르륵 소리를 듣고, 밤에는 유령처럼 일어나 때로 티비를 본다. 때로는 밖을 어슬렁거리고 뒷산에 올라가 산길을 하염없이 느리게 바라본다 (뚝뚝 끊어지던 느린 풀숲 트래킹). 그는 살아 있지만, 때로 죽어있다. 그를 가끔 반겨주는 소리는 오로지 '밥이 다 되었습니다'라는 밥통의 소리 뿐이다. 그러다, 돈이 떨어지고, 쌀이 떨어지면, 그는 아르바이트를 나선다. 그러나 남자의 지루한 사투도 거기까지. 어느날 밤, 남자는 밤의 산 속에서 무엇인가를 '저질렀다' 혹은 '시도했다'. 그리고 원경으로 잡은 산 속의 불빛 속에서 명멸하던 생명은 결국 꺼져버렸다. 남자는 어디론가로 사라졌고, 남은 집은 거의 페허가 되었다. 집은 철거되었고, 그 곳에는 오래된 음식들만이 남아 있다는 그런 이야기. 다시 <호수길>의 리와인드. 그러므로 여기에서 다시 제목에 생각이 미친다. 지금 환호성을 지를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아마도 영화의 시작부분에 관객의 귀를 찢었던 그 환호성은 사실은 거의 비명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공포에 질린 자의 마지막 단말마의 비명. 물론 이것은 어쩌면 하나의 오독.

시종일관 절망도 희망도, 기쁨도 슬픔도 아무 것도 보여지지 않는 남자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지금의 시대는 정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시대일까. 젊은이들이 절망할 수도, 그렇다고 그 절망의 끝에서 분노하는 것마저 쉽게 허락되지 않은 지금의 풍경들. 그 속에서 남아 있는 것은 으스스한 공포뿐이다. 또는 남아 있는 것은 영화의 마지막 느껴지던 이상한 구멍일 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그 구멍 속에 빠져 있다. 기어나오려고 발버둥을 치면서. 영화가 끝난 후, 영화가 정신을 멍하게 만들어, 기분 전환이나 할까 하고, 스마트폰을 열어 몇 개의 뉴스를 들여다보니, 한 여당 고위 공직자의 친인척이 783명의 구조조정 속에서 단 한개의 정규직을 쟁취한 놀라운 인간승리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지금 환호성을 지를 수 있는 자는, 어쩌면 이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 한 개의 '환호성' 속에 783개의 사라져 버린 다른 <환호성>의 이야기들. 늘 하는 이야기지만, 때로 현실은 영화보다 잔혹하다.

플라잉 피쉬 (Flying Fish) - 산지와 푸시파쿠마라 감독


이 영화의 카메라는 줄곧 등장인물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 있다. 때로는 카메라는 몇 걸음 더 물러서서 이들을 몰래 찍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던 카메라가 때로는 깊이 들어가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가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이미지들이다. 썩어가는 생선들과 가득 붙은 날벌레들, 동물의 사체에 달라붙은 벌레들, 거의 나무 등걸처럼 되어버린 다리와 거기를 기어올라가는 벌레들, 누군가가 뱉어버린 오물을 그대로 뒤집어 쓰는 카메라. 썩어가고 있는 것들, 역겹고, 더러운 것들을 때로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가까이에서 잡는다. 어쩌면 신체의 일부를 가까이에서 잡는 것도 비슷한 것일까. 왜냐하면 등장인물들은 썩어가고 있으니까. 그들은 안에서부터 조금씩 변해가고 있으니까. 그들은 그래서 결국 마지막에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을 저지른다. 파국은 예정되어 있고, 영화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 그 파국을 조용히 바라본다.

카메라가 몇 걸음 뒤로 물러서 있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몇 걸음 뒤로 물러섬으로써 관객이 등장인물들의 감정에 너무 깊이 빠져드는 것을 가로막는다. 어쩌면, 그것은 관객의 충격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는 감독의 의도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도 우리는 마지막 충격의 삼연타를 맞았을 때 버텨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시종일관 물러서 있었음에도 우리는 어질어질하니까. 또 한 가지는, 그럼으로써 감독은, 우리가 사건 그 자체보다는 사건의 외면을 둘러싼 것들을 보기를 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이런 질문들이다. 등장인물들이 왜 결국 이러한 일들까지 저지르는가. 혹은, 이렇게 되도록 이들을 몰고간 것들, 이러한 극한까지 이들을 몰아붙인 것들은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었나.

사실, 이 영화는 영화의 배경을 모르고서는 조금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부분이 있다. 영화에서 어렴풋이 드러나지만, 이 영화는 스리랑카 내전과 타밀 반군들을 둘러싼 정황 속에서 일어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모든 전쟁은 사실 그 나름의 이유를 안고 시작되지만, 그 속에서 죽어나가고, 망가지는 것은 그 이유에 대해 거의 관심도 없던 다른 사람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영화를 보고서도 우리는 마찬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영화 속 군인(타밀 반군)들은, 타밀 족은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으며, 우리는 우리 자신만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국가를 건설한다는 명분 속에 죽어나가고, 망가지는 것은 그 국가가 결국 보호해야 할 타밀인들이 상당수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장면이 인상에 강하게 남는다. 그 세 사람을 태운 버스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운전하는 사람도 없이 이 버스는 어디로 굴러가고 있는가.  아무 보호도 없이 내버려진 이들은 이제 어디로 흘러갈 수 있을까. 이들을 보호해야 할 자들에 의해 망가지고, 버림받은 이들에게 두려움 속에서 남아 있는 것은 위태로운 운전뿐이다.

이 영화의 구성은 한편으로 독특하다. 조금은 느리게 진행되는 것처럼도 보였던 이 영화는 마지막 충격적인 장면들을 연달아 붙여서 내보낸 후, 관객에게 어떤 수습할 틈도 주지 않은채 막을 닫아 버린다. 글쎄. 나로서는 이렇게 마지막에 강한 씬들을 잇따라 붙이(고 끝내버리)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인가,라는 생각이 조금은 든다. 이것은 어떤 너무 거짓된, 선택이 없는 속에서 영화적인 끝맺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감독이 등장인물을 너무 놓아 버리고, 그저 이 비극을 관객들에게 던져버리는 느낌도 들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그을린 사랑>과 비슷한). 검게 변해버린 스크린 위에 감독이 관객에게 놓아버린 진통만이 남아 있고, 그 속에서 나름의 욕망과 희망으로 애써 살아내려 했던 인물들의 이야기는 사라져버리고, 얼얼한 충격만이 남아 있다.

(모든 사진은 CINDI 홈페이지에서 가져왔습니다.)


- 2011년 8월, CGV 압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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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8일, CINDI

Interlude | 2011. 8. 19. 16:30 | Posted by 맥거핀.





불이 꺼지고, 아핏차퐁 감독의 영화제 트레일러가 시작된다. 이 트레일러는 묘하다. 기묘한 분위기의 피아노 곡이 흘러나오면서, 몇 겹의 커튼이 열렸다가 닫히고, 그 안에 숨겨진 스크린이 드러날 듯 하다가 다시 가려진다. 멜로와 공포와 미스터리와 스릴러와 슬픔, 그 어느 것도 전부는 아니지만, 묘하게 그런 이미지들을 조금씩 불러 일으킨다. 그리고 앞으로 시작될 영화도 어느 것인지 모른다. 이 영화는 멜로일 수도, 공포일 수도, 혹은 스릴러일 수도 있다. 그렇게 묘한 기대감을 가지고 드디어 열린 스크린을 들여다본다.

테러리스트들 (The Terrorists) - 툰스카 판시티보라쿤 감독

"작은 고깃배 위에서 두 소년이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카메라는 이윽고 바다를 관통하는 빛을 응시하고, 바닷물 아래 헤엄치는 작은 생명체들을 관찰한다. 그 수면에는 누군가에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의 형상이 비치고 있다. 고무 농장의 어둠 속에, 꺼질 듯 희미한 불빛만이 길을 밝히고 있다. 현재의 진실은 피에 굶주린 과거와 겹쳐진다. 과거는 태국 역사의 페이지에서 지워지고, 남은 것은 그들이 테러리스트라는 비난뿐이다."

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소개하는 글은 위와 같다. 그러나 사실 위의 글은 영화를 조금은 오해하게 만든다. 어렴풋이 외곽을 빙빙 돌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다. 도대체 이 영화를 어떻게 제대로 설명할 것인가. 영화가 시작하면 몇 명의 남자들이 배 위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다. 수면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의 형상? 글쎄, 잘 모르겠다. 그런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갑자기 화면이 전환되고, 흔들리는 불빛 아래에서 한 남자가 성(性)고문을 당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화면이 전환되고 고무나무에서 고무를 채취하는 남자의 빠르고, 지속적인 손길이 이어진다. 그 다음, 고무 농장에서 일하는 일꾼들의 어지러운 대화. 그리고 그 다음 한 남자가 계곡에서 목욕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위로 아버지와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자막이 이어진다. 이 자막은 계곡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이 남자의 이야기인가, 아니면 또다른 누군가의 이야기인가. 그리고 그 다음....그 다음을 이야기하기도 전에, 내 옆에 남자는 모자를 뒤집어 쓰고, 어느덧 자신만의 환상의 세계로 달려가버렸다.
 
몇 가지 말할 수 있는 것, 혹은 몇 가지의 불친절한 독해. 이 영화에서는 자막의 독특한 활용이 도드라진다. 이 자막은 일견 화면의 내용과 거의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위의 계곡에서 목욕하는 남자의 경우 다음에는 한 남자의 세밀하게 촬영된 자위 화면 위로(이 영화는 남성 성기의 노출이 참으로 빈번하다), 1976년 태국의 대학에서 일어났던 군인들에 의한 학생들의 학살 사건에 대한 리포트가 이어진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영화의 시작과 함께 자막으로 이런 말이 나온다. "테러리스트는 누군가에게는 아주 위험한 범죄자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자유의 투사일 수 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런 맥락.) 그것을 화면으로도 비슷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예를 들어 자위행위는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쾌락일 수 있지만, 동시에 강제로 당하는 행위(성고문을 당하던 남자)는 엄청난 고통일 수 있다..는 것? 아니, 나는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면, 다른 독해. 어쩌면 이는 검열을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지금까지의 자막들만 지워버리면, 이 영화는 전혀 다른 영화가 된다. 움베르트 에코의 포르노의 정의에 따르면 이 영화는 조금은 정적인 게이 포르노에 가까워진다. 검열관은 그저그런 포르노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생각하기도 전에 잠들어버릴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불편해진다. 그리고 아직까지 눈을 뜨고 있는 몇몇 사람들도 불편해졌을 것이다.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성기노출이 빈번한 이 화면인가, 아니면, 이런 화면과 함께 1976년에 일어났던 이 학살사건의 세밀한 리포트를 듣는 것인가.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화면과 자막은 조금씩 일치하기 시작한다. 아니 일치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흘러나오는 옛날 사진들과 자막으로 나오는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주위 사람들을 잃어버린 어머니의 이야기. 그리고 태국의 기차역과 기차역에 있는 외국인과 태국인들을 보여주는 화면 위로 지나가는 다음의 이야기들. "1978년 어렸을 때, 어머니는 내가 말을 잘들으면 전차를 태워주신다고 하였다. 태국에서 전차는 1976년 모두 철거되었다. 그러나 나는 확실히 전차를 탄 기억이 난다. 과연 어떤 것이 더 무서운 일일까. 일어나지 않은 일을 기억하는 것과, 일어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1976년 그렇게 수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기억하지 않는다. 기차역에서 조금은 지쳐 보이는 태국인들의 모습과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외국인들의 모습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마치 시가전을 방불케하는 현재의 태국의 모습과 가족과 주위 사람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오로지 그것밖에 할 수 없어서 거리로 나와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비춰진다.

그러므로 마지막에는 묘한 울림이 생기며, 처음의 질문을 돌아보게 만든다. 완전히 힘의 균형이 무너진 상황에서, 예를 들어 군인들이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상황에서, 오로지 의지할 것이 테러밖에 없을 때 행하는 테러를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그들을 단지 테러리스트라고 규정지을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예를 들어 우리가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는, 오로지 우리가 한국인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것에는 다른 이유가 들어 있는 것일까. 힘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래도 나는 테러를 반대한다, 라고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영화의 마지막, 지금까지 깨어있는 사람은 꼭 보아 달라는 듯이 아주 충격적인 화면이 이어진다. 누군가가 몰래 촬영한 듯이 보이는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하고, 총격을 가하는 군인들의 모습. 충격적이지만 낯설지는 않다. 우리는 이 비슷한 화면을 몇 번이고 보았으니까. 예를 들어 1980년 광주에서의 일들. 그러므로 영화의 질문을 되돌아 우리에게 물을 수도 있다. 어느 것이 더 무서운 일일까. 일어나지 않은 일을 기억하는 것과, 일어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우리는 요즘 일어나지 않은 일을 잘도 기억하는 대신에, 몇 가지를 잊고 있다. 얼마전 어느 전직 대통령은 자신이 벌인 일에 대해 아무 것도 책임이 없다는 투로, 회고록을 써냈다. 그리고 비슷한 일은 지금도 여전히 일어난다. 평택에서, 용산에서, 명동에서, 울산에서, 그리고 우리가 잘 모르는 어느 곳에서. 그것이 어쩌면 단지 기이한 포르노였던 것처럼 보였던 이 영화가 모골을 송연하게 만든 이유다.

감옥과 천국 (Prison and Paradise) - 다니엘 루디 하리얀토 감독


약간은 내 책임도 있지만, 비슷한 내용을 다룬 영화를 하루에 연이어 보는 것은 힘든 일이다. 2002년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자살 폭탄 테러가 일어났고, 202명의 사망자가 생겼다. 거의 대부분은 민간인들이었고, 외국인들이 많았지만, 현지인들의 사망도 적지 않았다. 이 영화는 당시 사건의 주범들에 대한 인터뷰와 그 가족들에 대한 인터뷰, 그리고 피해자 가족들 일부의 인터뷰를 담고 있다. 이 인터뷰들의 연결고리는 그 사건의 범인과 학창시절 룸메이트로 지냈던 워싱턴포스트 기자 이스마일이다. 그는 또한 테러를 조사하는 전문가로서 이 사건과 함께, 테러라는 것의 전반적인 의미를 이해하려 애쓴다.

영화의 막바지, 이스마일은 자신이 처한 위치의 딜레마적인 어려움을 토로한다. 그는 자신이 지하드(성전)를 지지하는 세력에게는 미국의 앞잡이, 경찰의 끄나풀이라고 오해받고 있다고 하고, 동시에 경찰에게는 이들 세력을 비호하고 있다고 비판받고 있다고 토로한다. 그것은 이 영화가 끝나고, 하리얀토 감독이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토로했던 것과 비슷하다. 그는 양쪽의 비판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과격한 이슬람 지하드를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이 영화의 관점은 잘못되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고, 동시에 인도네시아 정부는 이 영화가 인도네시아인들을 과격한 테러 분자처럼 묘사하고 있으며,  테러리스트들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대변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영화를 보고 나니, 감독의 말이 이해가 간다. 이 영화는 한편으로 자살 폭탄 테러 사건을 일으켰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장시간 동안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으며, 그들의 논리를 가감없이 그대로 드러내보인다. 이들은 한마디로 확신범들이다. 그들은 공고한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으며, 비이슬람인의 관점에서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어보인다. 이들은 자신들이 아주 옳은 일을 했다고 믿고 있으며, 확신을 가지고 테러를 저질렀으며, 자신들의 죽음(사형) 역시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자신들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도 당연히 알고 있으며, 그것의 논리도 한편으로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비판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을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죽음에는 한편으로 동정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정확하게 말한다면, 동정의 여지가 없다기 보다는, 동정이라는 것은 어쩐지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말처럼 보인다.

이렇게 이슬람 자살 폭탄 테러범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흥미롭지만, 영화가 한편으로 흥미로워지는 것은 영화가 단순이 이들의 논리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한발 비틀어 가족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이들 폭탄 테러범의 가족들의 모습과 그들의 인터뷰를 보여주며, 묻는다. 이들은 자신의 가족에게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혹은 자신의 가족이 죽었어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이 어린 아이들은(이 테러리스트들에게는 어린 자식들이 있었다) 도대체 무슨 죄란 말인가. 남겨진 어머니들은 몇 년이 지나 아버지들이 사형당한 후에도(영화는 사건이 일어난 후 8년 후의 이야기까지 담고 있다) 아버지가 사실은 테러리스트라고 밝히지 못한다. 아마도 어쩌면 거의 영원히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피해자 가족들이 받은 충격 못지 않게 이들이 받은, 혹은 받게될 충격도 못지 않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보고 나서는 일종의 영화의 균형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는 감독 자신이 밝혔듯이 위태로운 균형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테러리스트들의 논리를 관객들에게 그대로 펼쳐보이는 동시에 이스마일의 입을 통해서, 이들에게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 비판은 이들의 지하드가 잘못된 지하드라는 것이다. 테러는 민간인들에게 가해졌을 때 정당화 될 수 없다. 테러, 혹은 공격이 정당화되는 것은 군대 대 군대, 무장한 자와 무장한 자 사이의 경우이다. 그러므로 상당수의 민간인 관광객들과 일부 현지 민간인 무슬림에게 행한 발리의 자살 폭탄 테러는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이 이스마일의 논리이다. 그러면서도 이스마일은 이슬람을 지키기 위한 지하드는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단 다른 방식의 지하드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도 이런 이스마일의 관점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두 가지 부분에서 그러한데, 한 가지는 이스마일이 이 영화의 전체를 이끌어가는 화자이기도 하려니와(그러고보니 이름도 이스마일), 영화의 마지막이 이스마일의 발언 컷으로 끝난다는 점, 다른 한 가지는 음악의 활용에 대해서다. 이 영화는 피해자나 가해자 가족의 인터뷰를 보여줄 때에는 으레 서정적인 음악이 삽입된다. 그러나 이 테러리스트들의 인터뷰에는 어떠한 서정도 허용하지 않는다. 관객과 이들은 두가지 의미에서 '차단'되어 있다. 하나는 인터뷰를 행하는 이들 앞을 가리는 감옥의 창살,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서정의 차단. 따라서 이들의 논리는 나름 논리적이되,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이해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그려진다. (아마도, 과격 이슬람 옹호자들의 이 영화에 대한 비판에는 이러한 관점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영화가 논쟁을 피하는,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하나의 방법은 영화를 살짝 비트는 것이다. 즉 그것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가족들 이야기를 영화의 겉에 씌우는 것이다. 감독도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이 영화의 주된 이야기는 남아있는 가족들의 이야기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여전히 영화는 논쟁의 불씨를 그대로 안고 있다. 그것은 지하드와 이슬람 정치 운동, 테러리즘, 인권 등에 관한 불씨들이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생각하기에는 거기에는 한 가지의 논점이 포함된다. 그것은 과연 가해자의 가족들을 영화라는 이유로 여과없이 보여주는 것이 윤리적으로 옳은가라는 질문이다.
 

 - 2011년 8월, CGV 압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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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메모들

Interlude | 2011. 6. 14. 01:23 | Posted by 맥거핀.


(<적과의 동침>, <무산일기>에 대한 약간의 내용 있습니다.) 



얼마전부터 스마트폰을 쓰고 있다. 스마트폰과 관련된 광고에서 늘 등장하는 것이 스마트폰을 사용하게 되면 지금까지와 다른 생활을 할 수 있다, 새로운 것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인데, 늘상 그렇듯이, 그로 인해 잃게 되는 것들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글쎄. 그 잃게 되는 것들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조금 더 곰곰이 생각해 봐야할 듯도 하지만, 아무튼 간에 이 작은 기계의 가장 무서운 점은 어찌되었던 간에 다른 것을 하지 못하고, 그것을 들여다보게 만든다는 점이다. 내 경우라면 그 안의 여러 복잡한 미로들 중에서 가장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역시 읽는 것과 쓰는 것에 관련된 것인데, 팟캐스트와 다양한 메모 기능이 그것이다. 먼저 팟캐스트를 생각해보면 새삼 놀랍기도 하다. 처음에 열심히 무료 어플들을 찾아 다니다가 부실한 업데이트 기능들에 실망하고, 결국 정착하게 된 것은 유료 어플인 Beyond Podcast인데, 이 작은 어플은 수많은 사람들의 소중한 동시대의 생각들을 매일 충실하게 배달해준다. 더구나 1992년 정은임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잘 때 들을 수 있게도 해준다. 잃게 되는 것들에 대한 어떤 달콤한 보상책들.

또 하나는 메모 기능이다. 지금 이 짤막한 글을 쓰려고 시도하는 것도 어지럽게 쌓여 있는 메모들을 본 이후이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집에 돌아가는 길에 끄적끄적 남겨놓았던 메모들. 몇 주 전에 남겨놓았던, 이제는 왜 남겨놓았는지 이유가 알 수 없어져 버린 메모들. 아마도 그 때 그 메모들에 조금 더 쓸만한 옷들을 입혔더라면 조금은 더 읽을만한 리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는 무엇인가를 쓸 만한 시간도 없었고, 시간이 있더라도 무엇인가를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곧 버려질 이 메모들에 대해서는 조금은 뭔가의 기록을 남겨 놓고 싶다. 물론 이것은 앙상한 기록들, 지연된 생각들에 불과하지만. 나뭇잎이 모두 떨어져버린 앙상한 나무와 같은 것들이지만.

적과의 동침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2011년 4월)

이 영화가 기대 이하의 관심을 받고, 쉽게 사라져 버린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여러 가지 약점들을 가지고 있지만, 상당히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웰컴 투 동막골>과 사뭇 비슷해보이는 이 영화는 궁극적으로 그 영화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질문을 던지고 있다. <웰컴 투 동막골>이 결국 어떤 판타지의 세계(예를 들어 수류탄이 폭발하여 팝콘이 만들어지는 장면이 말해주듯이)로 달려갔다면, 이 영화는 그 보다는 훨씬 현실에 발을 디디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결국 결말의 처리라고 할 수 있는데, <웰컴 투 동막골>은 여전히 판타지의 세계에 머물러, 남한군과 북한군과 유엔군 몇 명이 힘을 합쳐, 어떤 제3의 거대한 적에 대항한다는 식의 결말을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의 결말은 그보다는 훨씬 비극적이며, 더욱 심각한 질문을 담고 있다. 그 질문은 결국 이들이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게 되는 것이 과연 무엇 때문인가라는 점이다. 그들을 죽게 만드는 그 '명령'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그 명령들(이들의 죽음에는 실체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상부'의 명령'들'이 있다)의 기원에는 국가가 있으며, 우리는 결국 '국가'라는 이름의 살인기계, 혹은 살인마를 마주하게 된다. 그 국가라는 이름의 살인마는 당시 우리나라 곳곳을 활보하며, 때로는 유엔군의 탈을 쓰고, 혹은 인민군의 탈을 쓰고, 혹은 국군의 탈을 쓰고, 비슷한 유형의 범죄들을 자행해왔다. (이 영화 <적과의 동침>보다 조금 더 현실에 발을 디딘 버전으로는 <작은 연못>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부의 우리나라 영화 제작자들의 '종합선물세트를 관객들에게 선물하고자 하는 욕구'는 언제쯤 사라질 수 있을 것인지. 그들은, 역사는 반복된다는, 즉 한 번은 희극으로, 또 한 번은 비극으로 반복된다는 지젝의 신봉자들도 아닐진대, 같은 이야기를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 보여주기 위해 애쓴다. 중간의 코믹적인 에피소드들의 상당 부분은 거의 배우의 개인기에 의존하고 있으며, 아무리 그 개인기가 출중하더라도 사족인 듯이 느껴진다. 어떤 상황적인 페이소스를 살리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지루하게 반복되는 유머들은 생각해 볼만한 질문들을 거의 잡아먹는다. 메시지도 들어 있고, 유머도 들어 있고,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도 들어 있는 이 종합 과자선물세트는 관객을 먹다가 지치게 만든다. 그래서 아쉬운 영화.

인사이드 잡 (CGV 대학로, 2011년 5월)

재앙은 레이건의 금융규제 완화부터였다. 이 <인사이드 잡>이라는 영화는 그 제목이 말해주듯이 '그 내부'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끄집어내 관객들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그 내부'란 지난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로부터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의 내부이다. 이 영화는 그 내부의 처음에서부터 끝까지를 지극히 건조한 어조로 미세하게 헤집어 보여주려고 한다. 그러나 어조가 건조하다고 해서, 내용마저 건조한 것은 아니다.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때로 분노하기도 하고, 어리둥절해지기도 한다. 어떻게 저런 식의 발상이 가능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저렇게 도덕적인 책임감을 스스로 없애버릴 수 있을까. 그래서 이 영화는 아주 정치적인 메시지를 마지막에 제시하고 있다. 이 같은 비극을 한 번 더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그들'이 도대체 무슨 일을 '내부'에서 벌이고 있는지 똑똑히 알아야한다는 것이다. 이 영화와 비슷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또다른 영화가 담배회사의 내부고발자를 다루었듯이, 이 영화는 그 스스로가 '내부고발자'가 되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여러 다양한 자료를 친절하게, 흥미롭게, 순차적으로 제시하면서 관객들에게 금융위기의 본질을 이해시킨다. 아마 경제에 거의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혹은 아무리 신문기사를 읽어도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도, 이 영화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내부에 들어있던 것들에 대해 그 맥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 결국 집어내는 것은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아니라, 레이건의 금융규제 완화이다. 그것에서부터 모든 비극은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이 친절한 영화를 보고 나니, 다시 다른 것들에 생각이 미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금융규제 완화의 시작에 와 있기 때문이다. MB 정부의 금산분리 완화나 은행들의 통합 정책을 볼 때에 어떤 우려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소로스가 영화에서 명쾌하게 말하였듯이 유조선에서는 기름을 여러 칸에 나눠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파도에 배가 휩쓸려도 넘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칸의 벽들을 없애버리려 하고 있다. 오로지 더 많은 기름을 실으려는 욕심 때문에. 더 많은 이득을 보고자 하는 그 욕심 때문에.

영화를 보며 개인적으로 든 생각인데, 이렇게 인터뷰 중심의, 그리고 영화 자체의 영문 자막이 많은 영화의 경우 더빙을 하는 것이 훨씬 낫지 않을까. 아무리 맷 데이먼의 나레이션이라도 말이다. 영화 초반에는 너무 많은 자막으로 인해 조금은 멍해지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신차리고 볼 것. 곧 흥
미진진해진다.

무산일기  (인디플러스, 2011년 5월)

탈북자의 이야기가 이 영화의 중심이지만, 이 이야기들은 현재 우리의 자화상이다. 2등민, 계급사회. 125로 시작되는 북한에서 온 사람들의 주민등록번호는 우리사회의 2등민이라는 낙인이다. 물론 2등민에는 북한에서 온 사람들만 포함되지는 않는다. 우리 사회는 이미 경제력에 따라 보이지 않는, 때로는 보이는 계급이 갖추어져 있으며, 북한에서 온 사람들은 거기 아래부분 어딘가에 들어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계급은 자꾸만 그 계급의 단계수를 증식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힌트를 영화의 한 부분에서 찾을 수도 있다. 숙영은 탈북자 승철과 어떻게든 자신을 구별하려 한다. 그것의 이유는 숙영과 승철이 명확하게 구분되기 때문이 아니다. 왜냐하면 숙영이, 승철이 처해있는 곳으로 조금씩 떨어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승철과 경철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경철은 같은 탈북자이지만, 승철과 자신은 다르다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다. 그 가장 밑바닥에 어떤 불길한 자화상으로 승철이 있다. 그리고 그 불길한 자화상은 경철과 숙영의 몫만은 아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관객의 몫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어쩌면 가장 미스테리한 점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영화는 리얼리즘을 표방하고 있다. 그것은 어떤 '극단의' 리얼리즘이 아니다. 리얼리즘이 가장 망가지는 순간은 아마도 그 자신이 '내가 리얼리즘이다'라고 나설 때일 것이다. 어떤 것이 리얼이라는 자의식을 드러내는 순간, 그것은 그 순간 가장 리얼이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 (아마도 <황해>의 리얼리즘이 이런 것이 아닐까.) 이 영화는 그런 것을 가장 경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극적인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마지막에도 어떤 극적인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영화는 막을 내린다. 그러나 그 순간 마음이 움직인다. 이 영화에서 가장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은 어쩌면 이 영화에서 가장 '리얼'과 거리가 멀, 어쩌면 승철의 꿈인것처럼도 생각되는 승철이 교회에 가서 마음을 조금 연 숙영과 같이 성가를 부르는 장면과 이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마지막이다. 희망을 보여줄 듯 하다가, 다시 그 어떤 희망도 내비치지 않는 이 마지막에서 마음이 움직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아무 것도 아닐 이 마지막에서 우리는 어떤 희망을(또는 절망을) 애써 찾게 되는 것일까.

.........................................

여전히 복잡한 6월이다. 잃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여전히 알 수 없는 6월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무엇을 얻게 된다고 말할 때에 그로 인해 무엇을 잃게 되는지는 여전히 생각해보아야 한다(꼭 스마트폰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본 수많은 영화에서 얻은 교훈 두 가지가 있다면, 하나는 완벽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얻는 것이 있다면, 그로 인해 잃게 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잃어가고 있는 것들, 자꾸 말로 되뇌어지는 속에서 잃게 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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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 이전의 침묵, 페레 포르타베야

Interlude | 2010. 10. 25. 19:56 | Posted by 맥거핀.


1.

글로서 적을 수 없는 영화들이 있다. 글쎄. 이 영화의 몇몇 장면들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아니, 몇몇 이미지나 짧은 이야기들은 내뱉을 수 있어도, 영화 내내 흐르던 바흐의 음악들은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영화는 왠지 '영화'라는 것의 처음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영화란 보고, 듣는 것이라는 것. 즉 이야기를 이해하거나, 줄거리를 따라잡거나 해서 없는 무언가를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영화는 보고, 들어야 하는 영화이다. 그것을 애써 이해하려고 아등바등 노력해서는 안되는 영화이다. (그러므로 긴 말은 하지 않겠다.)

2.
<바흐 이전의 침묵>. 어쩌면 그 이전을 완벽한 침묵의 세계라고 부르는 것은 오만한 말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나면 바흐 이전의 소위 '음악 이전의 세계'가 어떤 형태였는지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어진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형태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 이전의 세계의 존재 여부를 믿을 수가 없어진다. 왜냐하면 바흐의 음악들은, 그리고 그로 인해 영향을 받은 후기의 음악들은 이 세계의 어느 곳에나 완벽하게 스며들어가 세계와 조응하고 있음을 영화는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첼로 연주자의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팔의 움직임에도 있으며,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에도 있으며, 아이들의 합창 속에 나란히 움직이는 입에도 있으며, 조율사의 떨리는 세심한 손길에도 있으며, 고속도로 위의 달리는 트레일러에도 있다. 그것은 기쁨 속에도 있으며, 그리고 영화 속 2차대전 중 유대인들의 사례에서 보듯이 지극한 고통 속에도 있다. (개인적인 궁금증. 바흐와 헨델 중 왜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이고 헨델은 음악의 '어머니'인지? 찾아보니 몇몇 흥미로운 대답들이 있기는 한데, 딱 이거다 싶은 거는 없던데.)

3.
우리가 이전에 체험해 본 적이 없는 음악 영화이다. 이 영화는 음악 외부를 도는 기존의 방식을 거의 따르지 않는다. 즉 기존의 클래식 음악 영화들은 작곡가를 둘러싼 어떤 드라마틱한 내용을 재현하거나, 음악 그 자체가 가진 어떤 이야기를 형상화해내는 것으로 음악을 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어떤 위험이란, 우리가 받는 감동이 그 음악 자체의 감동인지, 아니면 그것의 외부가 우리의 상상과 결합하여 만들어낸 어떤 유사한 감동인지 구분해지기 모호해진다는 점이다. 이 영화에도 '마태 수난곡'의 발견을 둘러싼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일부 나오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거의 비디오 아트나 설치 미술에 가깝다. 그저 그것을 듣고 받아들여라! 영화는 말한다. (일부의 지적대로 이러한 것들이 지루함만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있어보이려는 시도'에 불과한가 라는 항변은 그저 카피와 예고편이 불러일으키는 오해라고만 해두자.)

4.
한 가지는 흥미롭다. 그것은 바흐의 음악은 음악 그 자체로만이 아니라 그 음악을 다른 것으로 치환하여도 여전히 일종의 예술품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바흐의 음악을 나타낸 악보들. 그 악보들만 바라보아도 어떤 일정한 규칙이 엿보이며, 그 악보를 전혀 읽을 줄 모르는 나같은 사람에게도 그것에는 일종의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그것은 일종의 대칭의 미학이며, 신이 숨겨놓은 균형미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질문들. 왜 어떤 멜로디의 조합은 음악이 되며, 어떤 멜로디의 조합은 불협화음이 되는가. 왜 어떤 특정한 화음만이 우리 귀에 듣기 좋은가. 왜 어떤 균형만이 우리에게 듣기 좋고, 보기가 좋은가. 아마도 영화에 난데없이 누드가 등장하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바흐 음악의 예술성은 심지어, 그 음악을 연주하는 자동 피아노에 사용되는 일종의 전자 악보에도 여전히 드러난다. 그 천공(穿孔)들의 오묘한 흐름이라니.
 
5.
아무튼 이 영화를 보고 나온 당신에게 평균율 클라비어니, 대위법이니 하는 것들은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아마도 바흐의 음악을 듣고 싶어질 것이다. 영화에 아무런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없어서 그 감동이 전혀 없었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그 감동을 다시 어떤 방식으로든 찾아내고 싶어서. 그리고 그 반대의 사람들은 반대의 이유 때문에. 바흐 이후의 음악의 세계는 그렇게 당신 곁에 있다.




- 2010년 10월, CGV 대학로.



 Bach- 6 Suites for Solo Cello- Suite No. 1 in G, BWV 1007- Prelude- Mischa Mai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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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DI에서 본 두 편의 독립영화

Interlude | 2010. 8. 25. 01:56 | Posted by 맥거핀.
더운 여름날, 지나치게 서늘한 극장에서 두 편의 더 서늘해지는 영화를 보았다. 제4회 시네마디지털서울 영화제(CINDI FILM FESTIVAL)에서 본 두 편의 한국 독립영화. 박수민 감독의 <간증>과 전규환 감독의 <애니멀 타운>. 이 두 편의 영화는 몇 개의 우연이 겹쳐서 선택되었지만, 왠지 이 두 개의 영화는 조금은 연관이 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먼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영화들이 반영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일단락들이다. 2009년에 만들어진 <애니멀 타운>과 2010년에 만들어진 <간증>. 글쎄. 아마도 이 영화들에 대해 쉽게 이야기하는 방법은 이 영화들이 최근의 우리 사회의 어떤 모습들을 반영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일 것이다. 일군의 무리들이 만들어낸 실용적이고 날카로운, 그래서 잔혹한 세계, 그 이면의 바탕에 있는 우리 사회의 어떤 또다른 단면들을 펼쳐보인 것으로 말하는 방법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닌 것 같다. 그 다른 한가지는 이 영화들은 우리 인간 사회의 어떤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왠지 그 인간 사회를 자꾸 벗어나려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박수민 감독의 영화 <간증>은 인간들 사이의 이야기를 조금씩 그 이상(以上)의 영역으로 끌어올리고자 한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인간으로서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들에 어떻게든 답을 찾으려 하거나, 인간 이상의 어떠한 존재가 되려고 한다. 전규환 감독의 영화 <애니멀 타운>은 그 제목이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다. 전규환 감독이 보는 우리 사회는 인간 이하의 '애니멀 타운'이다. 즉, 이 두편의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인간들을 평행한 시선으로서 보지 않고, 위에서 내려다보거나, 혹은 아래에서 올려다보고 있다. 그렇게 보는 방법은 인간을 보는 방법에서는 유효할까.


먼저 박수민 감독의 <간증>. 이 영화는 몇 개의 것들이 내용상으로 계속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먼저 첫 번째 충돌. 참회하며 계속 고문하는 자와 참회하지 않으면서도 고문을 멈춘 자의 충돌. 과거의 고문 경찰 박덕준은 예전의 기억에 괴로워하지만, 여전히 청부 고문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그러나 그의 상관 임광한은 교회의 장로가 되어 간증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가져다 주는 어떤 기이한 역설. 그리고 두 번째 충돌. 믿음이 부족한 자와 너무 지나친 믿음을 가진 자의 충돌. 너무 지나친 믿음을 가진 자는 그것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고, 믿음이 부족한 자는 그 살인자를 고문하며, 그가 왜 살인을 저질렀는지 밝히려 한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충돌. 그것은 이 영화가 가진 어떤 두 개의 상이한 시각 끼리의 충돌이다. 즉 '믿어야만 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봐야만 믿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 사이의 충돌. 우리는 그 두 개의 질문 중 어느 것에 손을 들고 답할 것인가. (물론 손을 들지 않고, 답도 하지 않는 방법이 있다.)  

마지막 질문에 대해서는 이 문제를 먼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 질문은 우리에게 있어서 가능한 것인가. 이 영화의 영어제목은 'A Confession'이다. confession? '고백' 또는 '자백'. 종교적인 의미에서는 '고해성사'. 이 영어 단어가 '간증'이라는 의미로도 쓰이는지 궁금해서 집에 와서 사전을 찾아보니, 간증은 'testimony'이다. 감독의 이 혼용은 아마도 의도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에서의 confession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으니까 말이다. 하나는 신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 그리고 고문하는 자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 그러나 이 고백들은 진실할 수도 혹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자신의 종교적 체험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증언하는 '간증' 역시 진실할 수도 혹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고해'와 '간증'의 진실함을 어떻게 가려낼 것인가. 그것을 가려낼 자격은 '누구'에게 있는가. 그러나 그것을 가려내려고 애쓰는 자들은 그 질문에 답하기도 전에 여전히 일단 가려내는 그 자체에만 관심이 있다. 고문이건, 혹은 종교적인 형태이건, 어떤 다른 방법을 통해서건 말이다. 그들에게는 그 고백이, 혹은 간증이 그것을 행한 그 인간 자신에게 어떠한 의미인지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저 간증 그 자체, 고백을 행하였다는 그 자체만이 고백을 끌어내려는 자에게는 의미가 있을 뿐이다.

영화 그 자체만을 놓고 보았을 때에는 이 영화 <간증>은 몇 가지 단점도 엿보인다. 박덕준의 상관 임광한은 조금 더 풍성한 내용을 담을 수 있는 캐릭터였지만, 지나친 도식화로 캐릭터는 조금 빛을 잃어버렸다. 그는 그저 국가라는 절대자를 신이라는 절대자로 대체한 것에 불과한 것일까. 거기에는 조금 더 다른 함의가 끼어들 여지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덕분에 임광한과 박덕준의 이야기와 뒤의 이야기는 분리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두 개의 이야기를 억지로 이어붙인듯한 느낌도 준다. 그리고 전체적으로는 눈에 보이는 도식화와 상징은 이 이야기의 전체적인 힘을 떨어뜨리고 있다. 감독은 도리어 명확한 설명이 필요한 순간에는 모호한 상징으로 대치하고 만다. 이 영화는 묵직한 주제를 어떤 식으로 풀어나가야 하는지, 어떤 식으로 형상화를 해내야 하는지 명확한 중심이 서지 않은 듯한 느낌이다.


다음은 전규환 감독의 <애니멀 타운>. 마지막에 이 영화가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촬영되었다는 엔딩 크레딧의 내용을 보며, 살짝 웃음이 나왔다(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이 영화에는 서울의 몇몇 랜드마크들이 약간은 의도적으로 등장한다). 글쎄. 내가 철저하게 공무원 정신에 입각한 공무원의 입장이라면 이 영화에 지원을 하지 않았을 것 같다. 이 곳 서울이 그저 하나의 '애니멀 타운'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영화이니까 말이다. 우리 사는 이 세상이 결국 그저 '동물들의 세계'에 불과하다는 그 자조감.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쩌면 이는 동물에 대한 모독일지도 모르겠다. 그 한가지 단적인 예로, 동물 중에 소아성애적인 성향을 가진 동물이 있던가.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거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이 영화에는 유독 인물들의 육체가 자주 전시된다. 아니 육체라고 말하기 보다는 거대한 고기덩어리에 가깝다. 그 고기덩어리는 땀을 흘리고, 밥을 먹고, 다른 고기 덩어리를 때리고, 교미한다. 그 육체를 불편할 정도로 스크린에 들이대는 것, 그것은 분명히 감독의 의도된 연출일 것이며, 그 중에서도 특히 소아성애자의 육체가 유독 자주 전시되는 것은 어쩌면 감독의 영화적인 복수인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범죄자를 보는 어떤 독특한 시선을 가지고 있다. 이 범죄자는 영화 내내 상당히 측은한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너무나도 불쌍해 보여, 그가 옆에 있다면, 어떤 형태로든 도와주고 싶을 정도이다. 그는 그저 우리 사회에서 가깝게 볼 수 있는 불쌍한 보통 사람이며, 이 절박한 세계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는 가련한 인간처럼 느껴진다. 그와 보통 사람을 가르는 구분은 오로지 그의 발에 감겨진 전자 발찌밖에 없다. 그 전자 발찌를 제외하고는 그저 그는 우리의 측은한 보통 이웃처럼 보인다. 이것은 최근 우리나라의 어떤 상업영화들과 뚜렷이 구분되는 지점이다. 최근 <악마를 보았다>를 필두로 몇몇 영화들은 범죄자들을 거의 악마 혹은 괴물과 같이 그리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진짜 그저 악마 그 자체로만 보인다. 즉 인간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아니, 나는 이 영화 <애니멀 타운>이 다른 영화와 달리 범죄자를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 반대에 가깝다. 나는 그 가련해보이는 인간이 더 무섭다. 괴물은 그 다름이 뚜렷이 드러나기 때문에 잡아내면 되지만, 그 '인간'들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실 그가 소녀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그 곳에 갔는지, 진짜 오줌이 마려워 그 곳에 갔는지 알 수 없다. 뛰어 다니는 멧돼지는 피하면 되지만, 안 뛰어 다니는 인간들은 진짜 피할 수 없다. 가장 절망적인 사실은 우리 자신도 때로는 다른 사람들 눈에 비슷하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여전히 우리는 서로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며, 몇몇 아이들은 그 틈바구니 속에서 여전히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이곳은 '애니멀 타운'일까. 하지만, 적어도 '애니멀'들은 무리를 보호하는 데에는 필사적이다.

이 영화에는 뚜렷한 리듬감이 존재한다. 감독은 영화의 중반까지 관객들을 몰아붙인다. 영화 속에서는 어떤 특별한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데도, 자리에 앉아있기가 심하게 불편할 정도다. 그러다가 일순간 휘몰아치며, 관객들을 어리벙벙하게 만든다. 글쎄. 이를 좋은 리듬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상업 영화라는 관점에서는 이를 조금 조절하는 것이 필요한 것처럼 느껴진다. 관객들도 숨을 쉴 곳은 필요하니까 말이다. 그 스트레이트함을 거스르지 않을 정도의 리듬, 그것이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또다른 생각들이 필요할 것 같다.



덧. <간증>에서는 김기영 감독의 페르소나라고 불리는 돌아온 여배우 '이화시'씨가 등장한다. 



- 2010년 8월, CGV 압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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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의 PiFan.

Interlude | 2010. 7. 27. 01:32 | Posted by 맥거핀.




지난 주 14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PiFan)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본 2편의 영화에 대한 간단한 감상. 늘상 그렇듯이, 기대하고 본 영화는 기대감에 못 미치는 것 같고, 별 기대감 없이 본 영화는 꽤나 의외의 만족을 주는 것 같다. 어쩌면 이 '기대감'이라는 것이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먼저 본 영화는 요시다 다이하치의 <퍼머넌트 노바라>. 묘한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남자가 존재하고 있지 않은 이상한 마을.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몇 명 있기는 한데, 모두들 그다지 멀쩡해 보이지는 않는다. 술 퍼마시고, 여자를 때리거나, 도박에 미쳐 살거나, 그도 아니라면, 전신주에 도끼질을 해댄다. 사실 여자들도 조금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바람만 피우는 남편을 응징하는 마사코도 그렇고, 계속 얻어맞으면서도 여러 남자들을 계속 만나오는 토모도 어딘가 모르게 나사가 빠져 보인다. 유일하게 정상으로 보이는 것은 오로지 주인공 나오코뿐. 일본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따지고 보면) 제일 이상했던 것은 여왕도, 토끼도, 쌍둥이도 아닌, 앨리스라는 점에서.

이 영화의 장점은 도대체가 종잡을 수 없는 이 영화의 독특한 분위기이다. 영화의 내용으로만 보면, 거의 막장드라마에 가까운 이야기들이 연이어 일어나지만, 영화는 시종일관 코믹한 분위기에서 진행된다. 그리고 그것으로 모자라, 감독은 다시 숨겨진 이야기를 슬며시 드러내보이며, 영화에 또다른 색채를 덧씌운다. 묘한 분위기와 재치있는 대사들, 그리고 영화의 이야기를 예측할 수 없게 만드는 감독의 능숙한 연출력이 돋보이는 영화. 단점이라면, 그래서 과연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인지 조금은 모호하다는 것. (부천시청)


두 번째 본 영화는 도미닉 제임스 감독의 <다이>. 글쎄. 이 영화에 대해서는 그다지 좋은 소리를 해주기는 힘들다. 정신과 병동에서 깨어난 6명의 사람들이, 제정신이 아닌 범인에 맞서서 생사를 건 게임을 해야한다는 설정인데, 생각만큼 훌륭하지 못하다. 이런 류의 영화는 아마도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참신하거나, 혹은 (이야기의 만듦새가) 매끄럽거나. 그러나 아무 것도 모른채 낯선 곳에 갇히는 사람들이 어떤 범인 또는 보이지 않는 적과 목숨을 건 대결을 벌인다는 설정은 이미 <쏘우>, <큐브> 등의 영화에서 익히 보아왔던 내용인 데다가, 그것에 참신함을 부여해야 할 범인 캐릭터마저도 어딘지 모르게 뜨뜻미지근하다. 거기다가 이야기의 내용과 연결, 그리고 이야기를 끌어가는 방식에는 왜 그렇게 구멍이 많은지. 예를 들어, 주인공이 각 사람들에게 죽이는 방법을 차분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대목에서는 계속 헛웃음이 난다. 왜냐하면, 그것을 관객에게 이해시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인데, 그것을 저런 방식의 지겨운 설명으로 밖에 처리할 수 없는지 의문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이런 류의 영화에서는,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보다는, 게임 규칙의 치밀함이나 죽음의 스릴 강도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는 해도(그래서 어쩌면 <쏘우>가 단지 그 죽음의 스케일만을 키우는 속편밖에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은 필연적이라 해야할 것이다), 이 영화에서 내세우는 메시지는 쉬이 이해하기 힘들다. 예를 들어, 이 영화의 중심 이야기인 '죽음을 어떤 우연에 맡긴다'는 것. 글쎄. 완벽한 우연이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 한가지로, 왜 주사위는 꼭 1부터 6까지의 숫자가 쓰인 것만을 사용해야 하지? 2부터 7이 쓰이면 안되는 건가? 아니, 차라리 12면체 주사위를 써보는 것은 어떨까?
 
즉 그 주사위를 '선택'했다는 그 아주 작은 한 가지의 사실도 '우연'이라는 것의 존재를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우연'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물론, 죽음의 이유보다는 죽음의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 감독으로서야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아예 <쏘우>처럼 '그런 것쯤은 아무래도 좋아'라고 처음부터 선언하던가, 끝까지 그 '우연'에 대해 항변하는 건 뭥미? (프리머스 시네마 소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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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일본 뉴웨이브 특별전에서 본 영화들

Interlude | 2009. 10. 6. 01:38 | Posted by 맥거핀.


꿈꾸는 것처럼 잠들고 싶다 (夢みるように眠りたい / To Sleep so as to Dream)
1986 / 하야시 가이조


독특한 느낌의 영화이다.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제목처럼, 영화도 묘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1986년도에 제작되었지만, 일종의 무성영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일부의 대사들은 음성으로 전달되지만, 그 예전의 무성영화들처럼 이 영화는 거의 모든 내용을 화면과 자막과 음악으로만 전달하고 있다. 하야시 가이조 감독의 무성영화에 대한 오마주라고 하는데, 이 영화의 독특한 내용에 이러한 형식이 잘 어울리는 듯 하다.

전체적으로 이야기는 3개의 층으로 전달된다. 먼저 첫번째 층은 주인공 우오츠카 탐정이 조수와 함께 납치된 소녀를 찾는 이야기. 이 이야기는 하나하나 문제를 해결해나가며, 조금씩 답에 근접하는 일반적인 추리물의 형식을 가지고 있는데, 중간에 슬랩스틱적인 코미디와 액션들이 적절하게 조화되어 흥미로운 전개로 이어진다. 또한 중간에 등장하는 의문의 3인조(오래된 필름에서 튀어나온 듯한) 역시 여기에 독특한 느낌을 더해준다. 그리고 다른 한 층은 영화 속 영화로 진행되는, 주인공 탐정과 조수가 나중에 보게되는 이야기이다. 여자를 구하기 위해 적들과 맞서는 주인공 흑두건이 등장하는 영화 속의 또 하나의 (무성)영화.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이 흑두건의 이야기를 종이 그림극으로 구성하여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이 세 가지의 다층적인 이야기가 영화의 마지막에는 하나로 통합되는 것에 있다. 이는 마치 영화 속의 영화가 그대로 스크린을 부수고 나와 우리가 보고 있는 영화와 통합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는 한편으로 보았을 때 영화 속 영화가 본 영화 그 자체와 이어지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 본 영화 자체가 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우리들)을 다른 공간으로 이끄는 듯한 기묘한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단순히 이야기의 중첩적인 연결로만 가능했다라고 보기에는 모자란 측면이 있다. 여기에 한편으로 영화 속 회전목마나 회전하는 물체와 같은 독특한 씬들, 그리고 이 영화의 형식이 한 몫을 한다. 즉 영화 속 분리된 상태에서 연결되는 것처럼 보이는 물체들(회전하는 물체들)과 그 물체들에 접근하는 카메라는 중첩되고 있는 이야기를 별 무리가 없이 받아들이게 하는 어떤 몽롱한 경험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즉 '꿈꾸는 것처럼 잠들고 싶다'라는 말은 꿈꾸는 것처럼(즉, 그 꿈이 완성된 상태에서) 영원한 잠에 들었던 마지막 영화 속 여주인공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꿈꾸는 것처럼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게 되는 관객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친구여, 조용히 잠들라 (友よ,靜かに瞑れ / Tomo yo shizukani nemure)
1985 / 최양일


이 영화는 왠지 다른 어떤 영화들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이는 이 영화의 어떤 부분부분이 다른 영화들에게서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다는 말은 아니다. 내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몇몇 장면들은 모두 이 영화보다 훨씬 후에 만들어진 영화들 속 장면이므로, 도리어 다른 영화들이 이 영화에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영화에 대한 설명에 있었던 말처럼 '이후 만들어진 하드보일드 영화들에 일종의 모델이 될 만큼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80년대 하드보일드 영화의 최고 걸작'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무튼 몇몇 장면들은 어쩐지 비슷한 느낌에 피식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마지막 장면들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 토리노>를 떠올리게 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분명히 이 영화를 보고 이 장면을 흉내냈을거야 하는 의심마저 든다.

아무튼 이 마지막 장면은 앞의 장면들을 모두 잊게 만들 정도로 인상적이다. 이상한 삼각형 구도. 나쁜 놈들(경찰)과 조금 더 나쁜 놈들(건설회사 측)과 주인공 신도와 그의 곁에 있는 친구의 아들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길거리에서의 기묘한 삼각형. 여기에 경찰이 그간 붙잡고 있던 주인공의 친구 사카구치를 풀어주면서 이 삼각구도의 균형에 균열이 생긴다. 그리고 이어지는 총격씬과 떨어지는 레몬과 고개를 들어 그 장면을 보도록 하는 주인공 신도와 다시 급커브를 그리며 그 곳을 떠나는 신도와 레몬을 깨물어먹는 아이를 교차하여 보여주는 장면은 짧은 순간에 많은 것을 응축하여 보여준다. 이 싸움에는 승자도 패자도 있을 수 없다는 것, 즉 시스템의 붕괴는 가능하지 않으며, 오로지 일시적인 균열만이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언젠가는 저 아이도 세상에 맞서서 싸워야 한다는 것(그러나 한편으로 그 승리가 가능한가(혹은 의미가 있는가)라는 물음에는 쉽게 답하기가 어려워진다).

이 장면 외에도 주인공 캐릭터를 만드는 데 일조하는 주변의 풍경들이 인상적이다. 외딴 마을에 들어온 주인공을 모두 외면하는 이상하게 적막해 보이는 마을 풍경과 그에 대비되는 주인공의 모습은 폭력과 권력의 균형으로 이루어진 이 작은 공간을 균열시키는 하나의 점으로 주인공을 관객들에게 각인시킨다. 그리고 말없는 이 캐릭터는 그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영화 속 다른 인물들은 물론이고, 이를 보고 있는 관객들마저도 알 수 없게 함으로써 어떤 특유의 아우라를 만들어낸다("가장 무서운 사람은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지요."). 그리고 적막한 마을의 풍경과 대비되는 주인공이 머무는 호텔의 자유롭고 시끌벅적한(그리고 한편으로 따뜻해 보이는) 공동체의 모습은 이러한 주인공의 캐릭터를 더욱 도드라지게 보이도록 한다. 즉 어떤 의미에서 이 영화는 하드보일드한 캐릭터를 창조시키는 하나의 전형을 보여준다.

영화 속 적들의 모습이나 추격씬, 그리고 나중에 적의 중간 보스와 벌이는 결투 등, 수많은 클리셰들이 도사리고 있고, 한편으로 그 클리셰들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장르적 굳건함이 유지되는 흥미로운 영화.



- 2009년 9월, 서울아트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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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시스터즈 키퍼, 닉 카사베츠

Interlude | 2009. 9. 28. 01:32 | Posted by 맥거핀.


백혈병에 걸린 환자와 그녀를 둘러싼 가족들의 이야기. 이런 이야기는 조금이라도 안이하게 생각하면, 너무 신파가 되어버리기 십상이다. 아니, 차라리 신파가 되어 눈물이라도 쏟게 만들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보다 더 최악의 케이스는 눈물도 못 뽑아내고, 관객들을 졸게 만드는 것이다. 다행히, 이 영화는 어느 정도 눈물은 뽑아낸다. 그러나 그 눈물을 뽑아내는 방식이 이 영화는 다른 영화들과 사뭇 다르다. 그것이 이 영화의 최대 강점이다.


대부분 이런 류의 이야기들은, 점점 쇠약해지고, 기력을 잃어가는 환자의 모습에도, 조금의 희망에 모든 것을 걸고 어떻게든 끝까지 그(녀)를 지켜내려는 가족들의 안타까운 사투가 극적인 대비를 이루며 눈물을 이끌어내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이 이야기는 왠지 죽어가는 케이트(소피아 바실리바)에게는 크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처음에는 언니 케이트를 살리기 위해 태어난 동생 안나(아비게일 브레슬린)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는 듯 하다가, 그 초점이 엄마(카메론 디아즈)에게로, 다시 아빠에게로, 그리고 케이트의 오빠에게로 차례로 넘어간다. 그리고 케이트를 둘러싸고 가족들이 벌이고 있는 조금은 다른 의미의 사투가 조금씩 드러난다. 백혈병으로 고통받으며, 10대 시절을 거의 병상에 누워 보냈던 케이트의 고통은 물론이려니와, 케이트에게 여러 생체조직들을 주어야 하는 안나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고통, 케이트를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했던(둘째 딸마저도 말이다) 엄마의 고통, 그리고 난독증이 있는 자신의 문제를 크게 드러내지 못하고 감추어야 했던 오빠의 고통. 그리고 여기에 가족을 잃은 경험이 있는 여판사의 이야기나, 기꺼이 변호를 맡아주었으나 어딘지모르게 비밀을 숨기고 있는 듯한 변호사의 이야기까지 겹치며,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다채로운 이야기가 변주된다. 그래서 이러한 다양한 이야기가 조금씩 엮어들어가는 도중에 관객들은 서서히 이들의 입장들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아마도, 눈물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들 중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은 없다는 것, 모두다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고통과 아픔을 감내해야 했다는 것, 그들 중의 누가 더 고통받고 있다고, 혹은 어떠한 것이 옳다고 쉽게 단정지을 수 없다는 것...등등 말이다. 즉 이 눈물은 어떠한 것에 쉽게 손을 들어줄 수 없는 딜레마의 눈물로부터 출발한다.

물론 이 영화에도 조금은 아쉬운 부분을 이야기할 수 있다. 안타까운 이야기들이 씨줄과 날줄로 엮이며 멋드러지게 출발했던 이 영화는, 중반을 넘어가며 여러 문제들을 너무 쉽게 봉합하는 듯이 보인다. 그것은 이 모든 것들이 가족에 대한 사랑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만이 유일한 해답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았을 때 그럼으로써 이야기의 힘이 떨어지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즉 이 영화는 초반부에 여러 많은 문제들- 즉 한 아이가 어떤 치명적인 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아이를 낳아 유전적인 도움을 받으려는 데에서 벌어지는 윤리적인 문제, 회복될 수 없는 병임에도 고통스러운 치료 과정을 계속하는 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문제(그리고 여기에 뒤따를 수 있는 안락사와 존엄사 같은 문제들), 자신의 몸의 권리를 찾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법률적인 문제, 환자를 둘러싼 가족 내부의 미묘한 갈등의 문제 등등- 을 제시하고는 그것을 하나의 해답으로서 모두 설명하려 한다. 물론 닉 카사베츠 감독이 얘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마도 그런 문제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가족들간의 사랑의 힘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위한 헌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점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의 문제들이 꽤나 멋드러졌기(혹은 흥미로웠기, 혹은 이런 이야기들에서 크게 부각된 적이 없었던, 그러나 언젠가는 이야기해야만 하는 문제였기) 때문에, 이 당연해 보이는 대답에도 아쉬운 마음이 든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시한부 삶을 다루는 또 하나의 새로운 방식을 제시했다. 그것은 아마도 영화의 새로움이라기 보다는 원작의 새로움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서점에서 잠깐 넘겨다본 이 영화의 원작인 조디 피콜트의 <마이 시스터즈 키퍼: 쌍둥이 별>은 각 등장인물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번갈아가며 서술하는 형식을 띠고 있어서 꽤나 흥미로웠다. 뭐 어쨌든 간에, 마지막 마무리의 상투성 혹은 불성실해보이는 해답이 아쉽기는 하지만, 이 정도라면 그래도 기꺼이 눈물을 쏟아내 줄만하다.




- 2009년 9월, CGV 명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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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국제영화제에서 본 3편의 영화

Interlude | 2009. 9. 3. 01:45 | Posted by 맥거핀.
어떤 영화제이건 간에, 영화제에 참여하는 것은 즐겁다.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먼저 하나는, 영화제에 가면 영화제 특유의 웅성웅성하고 기대감에 찬, 관객들의 어떤 공유하는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을 열고, 어떤 영화라도 편견을 가지지 않고, 즐겁게 느끼고 가겠다는 그런 분위기.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영화제에서는 영화만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화 외부의 풍경들, 자원봉사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 근처의 색다른 먹을거리 등등. 물론, 이번 충무로국제영화제 같은 경우에는 그런 재미는 조금 반감된다. 가끔 한 두 번 씩은 가던 극장들이기 때문에, 극장 내 외부의 풍경들이란 빤하다. 그래도 빨간 옷의 자원봉사자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관객들을 대하는 것을 보는 것은 여전히 마음이 좋아진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내 경우에만 해당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영화제에서 보는 영화들은 거의 대부분 영화의 내용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제목만 보고, 한 두가지 사소한 이유로(예를 들어, 시간이 맞아서..) 선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영화를 색다르게 즐길 수가 있다. 나는 대부분의 경우, 영화 내용을 좀 자세히 살펴보고 영화관에 가는 편이다. 영화의 내용이 어떠한 내용인지, 평은 어떠한지, 주목할 수 있는 부분은 어느 부분인지 읽어보고 영화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이런 과정에서 필요 이상의 너무 많은 정보를 알게 되어, 영화의 재미가 약간 반감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뭔가를 많이 알고 영화관에 가는 것은 그 나름대로의 재미가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많이 알고 가면 갈수록 영화를 여러 겹의 형태로 볼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아무튼 그런저런 이유로, 이번에 충무로국제영화제에서 본 영화들도 거의 우연적으로 선택되었다. 시간이 맞고, 약간은 나에게 흥미를 주는 요소가 있으며, 표가 남아 있던 영화들 위주로. 그리고 영화제에서 본 3편의 영화에 대한 약간의 코멘트.



레인 폴, 맥스 매닉스 감독

'씨네 아시아 액션' 섹션에 있던 영화다. 이번 영화제는 아시아 액션물에 대한 라인업이 괜찮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이 섹션에 있던 영화를 많이 보고 싶었다. 결과적으로는 2편 밖에 보지 못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 영화는 그리 강렬한 인상을 주지 못했다. 일본에서 비밀 공작 활동을 벌이는 CIA가 추적하는, 국제적 킬러 존 레인(시이나 깃페이)의 활약을 그린 영화인데, 주인공 존 레인 캐릭터의 구축이 모호하여, 영화의 전체적인 매력도 반감되는 듯한 느낌이다. 그리고 명색이 액션 영화인데, 사실 그럴듯한 액션 장면도 별로 없다. 아무래도 액션 영화의 매력이란 주인공이 악당들과 맞서서, 혹은 냉혹한 운명에 맞서서 정면충돌을 벌이며, 장렬하게 산화하는 것이 매력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우리의 주인공 존 레인은 맨날 도망만 다닌다. 그리고는 같이 도망치는 여주인공에게 '경찰을 만났을 때 들키지 않는 법' 이런 강의나 하고 앉아있다. 그나마 건진 것이라곤, CIA 도쿄 지부장(?)으로 나오는 게리 올드먼의 많이 녹슬었으나 아직은 봐줄만한 연기다. 수십개의 CCTV 화면 속에서 도망치는 존 레인을 참 어지간히도 못 잡는 CIA 요원들의 활약을 보면서 분통을 터뜨리는 연기는 꽤나 즐길만 하다. (메가박스 동대문)




야수형경, 진가상 & 임초현 감독

예전부터 매니아 층의 이 영화에 대한 찬사를 여러 들었던 터라, 이번 영화제의 나름 기대작이었다. 위의 <레인폴>과 같이 '씨네 아시아 액션'에 있던 영화로, 기대한 만큼의 만족감을 준 영화다. 홍콩의 한 구역을 담당하는 형사들에게 새로운 리더가 오면서 벌어지는 여러 일들을 다룬 영화로, 전체적으로 유머가 아주 잘 살아있는 영화이면서, 동시에 여러 눈여겨 볼 만한 부분들을 던져주는 영화다. 하나는, 이 영화의 독특하고, 특이하게 느껴지는 이야기다. 처음에는 그저 코믹스럽기만 한 그저그런 유머물인듯한 인상을 주는 이 영화는, 시간이 지나갈 수록 점점 다른 면모를 드러내 보인다. 영화 시작부에는 조금 산만하게 여러 에피소드들이 툭툭 던져지는 듯 한데, 이것이 영화의 마지막에는 하나로 수렴되어 강렬한 액션으로 마무리 된다. 확실히 이렇게 이야기를 아우르는 능력은 그리 가볍게 볼 수 있는 경지는 아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이 영화에 내리깔린 특유의 정서다. 처음에 주인공 동 형사(황추생)을 중심으로 한 이 경찰조직은 '뭐 이런 경찰조직이 다 있나' 싶을 정도로 무질서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는 그런 동 형사에게 어느덧 동화되어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며, 그를 지지하게 된다. 그리고 어떤 것의 질서가 유지된다는 것, 과연 어떤 것이 이곳에 더 필요한 것인가를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황추생의 인상적인 연기가 대단한 영향을 미친다. 그것이 세 번째 눈여겨 볼 만한 부분이다. (롯데시네마 명동)




험프데이, 린 쉘튼 감독

영화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단지'2009 선댄스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이라는 문구에 끌려 보았던, 사실은 시간이 맞아서 본 영화다. 보고 나니, 충분히 상을 받을만한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는 벤과 앤드류라는 두 친구가 우연히 파티에서 아마추어 포르노 경연대회에 나가기로 결심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이들의 결심이란, 이성애자인 이들 두 남성이 섹스를 시도하는 과정을 포르노로 찍어보는 것. 장난처럼 시작했지만, 이들의 이 일들은 점점 커진다. 이 영화는 시종일관 유쾌한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어떤 아이러니한 질문을 자꾸 관객들에게 하도록 만든다. 그 하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의 이런 시도에 어떤 마초적인 경쟁 심리라는 것이 자꾸 개입된다는 것. 그리고 종국에는 관객들에게 어떤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을 제공한다. 그것은 나도 혹시 동성애자가 아닐까(혹은 동성을 좋아하는 성향이 있지 않을까)라는 작은 질문들에서부터, 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이 사회는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인가. 이성애라는 것만이 우리사회에서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 거기에는 어떤 것들이 개입하는 것일까 라는 질문까지.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어떤 동성애만을 무조건 옹호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 영화는 중립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한 가지 잣대로만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상황에서 웃음을 이끌어내는 능력은 발군이다. <덤 앤 더머>의 업그레이드 판. 이번 영화제의 개인적 발견작. (메가박스 동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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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의 영화들

Interlude | 2009. 1. 1. 16:28 | Posted by 맥거핀.
2009년의 첫글로써 어울리지 않는 글이란 건 안다. 어쨌든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존재이니까. 앞이 보이건 보이지 않건 말이다. 그러나 왠지 이런 정리를 안하고 넘어가자니 섭섭한 부분이 있다. 2008년은 나에게는 전체적으로 보이지 않는 부분들이 더 많은 시간들이었지만, 가끔 좋은 영화들이 나타나서 불빛을 깜박거려 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2008년에 보았던 좋은 영화들에 대한 나름의 정리. 이름하여 BEST 10. 그리고 그 영화들의 기억나는 장면 하나씩.

이 리스트는 2008년에 영화관에서 보았던 영화들만을 대상으로 하였다. 따라서 좋은 영화이긴 하지만 다른 경로로 보았던 영화들은 배제하였고, 개봉년도도 약간 뒤죽박죽인 면이 있다(재개봉하거나 영화제에서 미리 개봉하는 영화들도 있으므로).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영화관에서 보는 영화만이 무엇인가의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략의 시기와 보았던 영화관을 밝혀둔다. 아..그리고 BEST 10이기는 하나 순서는 없다. 이 10개의 영화의 순위를 매기는 것은 너무 어렵다.





밤과 낮, 홍상수.
명동 CQN, 2008년 3월.

사진작가(김영호)는 길을 걷다가 하늘에서 떨어진 어린 새를 발견하게 된다. 그 새는 땅으로 바로 떨어지지 않고 그에게 부딪혀 살아남게 되며, 그는 이 사실을 알고 우쭐해한다. 유머와 기이함과 캐릭터에 대한 조롱이 스며들어가 있는 전형적인 홍상수스러운 장면이지만, 이 장면은 또한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희망적이다. 물론 그것이 한편으로 또 이상해 보이기는 하지만.




렛미인 (Let the Right One In), 토마스 알프레드손.
명동 중앙극장, 2008년 11월.

소년은 물 속에서 죽을 각오를 한 것처럼 눈을 꼭 감고 있다. 곧 숨이 넘어가려는 찰나 저 멀리서 목이 잘린 머리가 뚝 떨어지고 소년의 머리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풀리며, 잘려나간 팔이 물 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리고 어디선가 팔이 하나 나타나 소년을 끌어올린다. 상당한 고어 장면이지만, 잔인하거나 무섭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도리어 아름답다고 말하면 지나친 것일까.




멋진 하루. 이윤기.
종로 단성사, 2008년 9월.

병운(하정우)은 희수(전도연)와 함께 길거리를 걷다 화장품 샘플(맞나?)을 나눠주는 곳을 지나게 된다. 병운은 유들유들하게 그곳으로 다가가 그것을 받아온 후, 느물거리면서 그것을 희수에게 건네준다. 희수는 뭐 이런 걸 받냐며 화내지만, 주머니에 그것을 챙겨 넣는다. 두 캐릭터의 성격이 한 순간에 드러나는 디테일한 명장면.




약속(La Promesse), 다르덴 형제.
명동 중앙극장, 2008년 9월.

영화의 마지막 소년과 여자는 지하철 통로를 걷고 있다.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은 소년과 남편을 잃은 여자. 이들은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이들이 가야할 길은 보이지 않는데, 이들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에도 지하철 소리는 여전히 들린다. 항상 주인공들을 딜레마에 몰아 넣고 그들의 선택을 기다리는 다르덴 형제지만, 이 장면은 너무 먹먹하다. 다르덴 형제의 최고작이 아닐까.





이스턴 프라미스 (Eastern Promises), 데이빗 크로넨버그.
압구정 CGV, 2008년 12월.

오토바이가 고장나 곤란에 빠진 안나(나오미 왓츠). 그녀에게 니콜라이(비고 모르텐슨)가 나타나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제의하고, 망설이던 안나는 그의 차에 올라탄다. 사례를 하겠다는 안나에게 니콜라이는 씩 웃어 보인 후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말한다. 오오..이것이 바로 카리스마!





추격자, 나홍진.
종로 단성사 or 서울극장(정확히 기억이..), 2008년 2월.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범죄심리학자와 지영민(하정우)과의 대결장면이다. "너 성불구지?"하고 다그치는 범죄심리학자와 살짝 빙글거리며 아니라고 답하는 지영민. 그리고 숨막힐 듯한 긴장감 속에서 지영민의 폭발. 짧은 장면이지만 심리적으로 아주 잘 설계된 장면. 추격자의 매력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뛰고 달리고 하는 그런 장면들보다 도리어 이런 장면들에 있지 아니할지. 폐쇄된 공간에서 흐르는 참을 수 없는 긴장감.






새드 배케이션, 아오야마 신지.
중앙 스폰지하우스, 2008년 3월.

아들의 장례식장에서 남편에게 따귀를 맞고도 웃으며, "남자들이란, 하고 싶은 대로 하라지."라며 웃을 수 있는 여자. 어떻게 해서 이 여자는 이렇게 된 걸까. 아니 어머니들이란 원래 그런 것일까.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가까이에 있는 존재. 가까이 있기에 언제나 의지할 수 있지만, 그만큼 무섭고도 커다란 존재, 그래서 언제나 도망치고 싶은 존재. 어머니들이란 그런 것일까.





걸어도 걸어도, 고레에다 히로카즈.
부산 대영시네마, 2008년 10월.

자신의 아들 대신에 목숨을 가지게 된 사람을 보는 어머니의 심정이란 어떨까. 더구나 그 사람이 자신의 아들보다 훨씬 더 변변치 않은 삶을 살고 있다면. 이제 아들의 기일에 그 사람을 오게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또다른 아들의 말에 어머니는 잔혹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한다. 일부러 오게 하는 것이라고. 아..어머니들이란 역시 무섭고도 알 수 없는 존재. 그리고 앞으로도 알 수 없을 존재.





흑사회, 두기봉.
신촌 필름포럼, 2008년 8월.

원숭이 섬에서 낚시를 하는 록(임달화)과 Big D(양가휘). 조직의 1인자 자리를 둘러싸고 이들에게 묘한 긴장감이 흐르지만, 록의 표정에서는 그러한 것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던 록이 갑자기 커다란 바위(록?)를 들어 Big D의 머리를 내리치고 그를 죽이려 한다. 원숭이 섬의 원숭이들은 이 장면을 보고 새끼원숭이들이 보지 못하도록 황급히 손을 끌어 도망간다. 원숭이보다 못한 인간들. 그 인간들의 속성이 극명하게 드러난 장면.






중경, 장률.
광화문 스폰지하우스, 2008년 11월.

쑤이에게 총을 도난당한 후 나체로 거리를 허위허위 걷는 경찰. 꿈인지 환상인지 실제인지 알 수 없는 장면이지만, 이 장면은 이상하게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근육이 있는 우람한 육체가 아니라, 뼈의 모습이 겉으로 드러난 남루한 육체의 전시는 마치 우리 인간들의 피폐한 정신들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듯 하다. 어쩌면 우리 인간들은 몇 가지의 천 조각들로 그렇게 우리의 황폐한 모습들을 숨겨가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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