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여인의 고백, 아틱 라히미

Ending Credit | 2013. 10. 10. 18:09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전체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지속된 전쟁으로 페허가 된 아프가니스탄. 그곳에서 한 때 전쟁영웅이라고 불렸던, 이제는 총상을 입고 식물인간이 된 남편을 돌보는 한 여인의 삶. 포성은 계속 울려퍼지고, 먹을 것을 달라고 딸들은 보채고, 끊임없는 기도에도 남편은 도무지 깨어날 기미가 없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런 이야기는 왠지 익숙하다는 선입견을 준다. 이 여인은 끊임없는 내부와 외부의 압박에 시달릴 것이고, 그것을 보는 우리들 역시 고통스럽지만, 스크린 밖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리라는 무력감과 또한 우리는 그런 것에 멀어져 있다는 안도감을 동시에 줄 것이라는 선입견 말이다. 그런데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영화는 슬슬 이상한 방향으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고통 속에서 기도와 인내 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어 보였던 여자는 빨간 옷을 입고,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남편 옆에 요염하게 앉아 있다. 이 여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영화 <어떤 여인의 고백>에서 영화가 달라지는 것은 (영화의 제목이 말해주듯이) 그녀가 고백을 하는 시점부터다. 무엇이 그녀를 달라지게 만드는가. 중요한 것은 고백의 내용이 가지는 어떤 파괴력이 아니라, 단지 그녀가 고백을 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즉 그녀가 발화자가 된다는 사실 말이다. 지금까지 그녀가 발화자가 된 적은 없었다. 그녀는 항상 듣는 쪽이었고, 받아들이는 쪽이었다. 메추라기들을 싸움 붙이는 도박에 미쳐있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언니를 도박빚 대신 나이든 남자에게 넘겼고, 그녀 역시 단지 전쟁영웅이라는 이유만으로 사진으로밖에 본 적이 없는 남자와 결혼을 하고 인내하는 삶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남편은 밖에서는 전쟁영웅일지 모르지만, 집에서는 가부장적인 남편이었고, (영화에 명확히 제시되지는 않았지만) 항상 말을 하는 쪽은 그녀의 남편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이제 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물론 그녀의 남편이 이제 말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아니 말을 넘어서 이제 둘 사이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쪽은 아내이다. 식물인간이 된 남편은 그녀의 보호 없이는 죽고 말 것이다.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이 부부의 관계, 즉 역전되어 버린 말을 하는 자와 듣는 자의 관계를 이 인습과 굴레의 총체라고 부르는 것조차 표현하기에 부족해보이는 이 이슬람 사회 전체에 확대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의 시작은 그녀를 몸을 파는 여자라고 오인한 한 젋은 군인과 그녀와의 관계로부터 시작된다. 이 관계는 역전되어 있다. 어린 그녀가 남자와의 성관계를 처음 배운 것은 거칠고 나이든 그녀의 남편으로부터였고, 그 관계에서 그녀는 단지 남편이 이끄는 대로 무조건 따라야만 했다. 그러나 이 관계는 다르다. 이 젊은 군인은 여자와의 관계가 처음이고, (처음의 시작은 남자의 오인과 일방적인 공격으로 이루어졌지만) 결국 관계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은 그녀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성적인 관계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물론 가장 큰 메타포는 그 남자가 극도로 말을 더듬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대화를 이끄는 것은 그녀고, 이 남자에게 어린 나이에 원치 않는 군대에 끌려간 소년병 출신이라는 고백을 끌어내는 것도 그녀다. 즉 이 관계에서 다시 우위를 점하는 것은 그녀이고, 그 남자의 마음을 이끌어내는 것도 그녀이다.

즉 이 영화에서 조금씩 희망 비슷한 것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남자들이 입을 닥치고 난 이후이다. 영화의 전반부를 지배하는 것은 이어지는 폭력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포격과 총소리, 종교지도자들의 지나친 간섭, 식물인간으로 큰 짐덩어리처럼 보이는 남편, 총을 들고 위협하는 군인들과 잔혹한 살해, (그녀의 고백으로 알게 되는) 어린 시절에 그녀를 지배했던 아버지의 폭력. 이것은 남자들의 세계이고, 남자들의 폭력이다. 그런데 그녀의 고백과 맞물려 이야기의 중심이 조금씩 여성들에게로 옮겨오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나아져 간다. 짐덩어리에서 이제 그녀의 말을 들어야만 하는 존재가 된 남편, 그녀가 피신하는 그녀 이모집의 기이해 보이는 여성공동체(물론 이것이 기이해보이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또 한편으로 그녀의 조력자가 되는 사람이 '고모'가 아니고 '이모'임을 주목해 볼 수도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그녀에게 아들이 아니라 두 명의 딸이 있다는 사실과도 연관될 것이다), 그녀와 젊은 군인과의 관계에서 그녀가 점하는 우위와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이것을 그녀의 이모는 약간의 유머 섞인 말로 표현하는데, 그것은 "사랑을 잘 하는 남자가, 전쟁도 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국가적인 폭력, 외부의 만연한 폭력은 사회 내부의 폭력, 작게는 한 집안 내부의 폭력과도 연결되어 있다. 남자들이 집 안에서 벌이는 메추라기들을 데리고 하는 투기(鬪技)는 외부의 지독한 전쟁의 현실을 반영한다. 그러나 여성이 지배하는 작은 사회에서는 폭력은 없다. 여인은 식물인간인 남편에게 고백을 하며 돌보고, 이모는 비참한 상황에 놓인 여인을 감싸 안으며, 또 여인은 소년병으로 학대받아야 했던 젊은 남자를 품어준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결국 폭력과 전쟁이 지배하는 부계사회가 아니라 사랑과 포용이 지배하는 모계사회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데에까지 나아간다. 그것은 영화의 마지막 그녀의 결정적인 고백과 그녀가 보여준 행위로 연결되는데, 이는 이 영화를 뻔하지 않게 만들면서, 동시에 이러한 사회에 던지는 질문이자, 새로운 시각으로서의 진전이기도 하다. 그것의 시작은 단지 몇 마디의 말, 고백이었다. 말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선다는 것의 힘, 그것이 가지는 작은 파괴력이 어쩌면 사회를 바꾸는 거대한 동력으로도 변할 수 있음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덧. 
이 영화의 이야기는 거의 대부분 좁은 실내에서 이루어지는데, 빛을 효율적으로 잘 활용하여 답답함을 많이 벗어나고 있다. 또한 클로즈업, 때로는 익스트림한 클로즈업까지 여러 번 등장하는 것이 인상적인데, 이는 인물의 감정을 잘 잡아낸다는 주된 효과 외에도 좁은 실내에서 이루어지는 유려한 카메라의 움직임과 잘 어울려 영화 전체를 지루하지 않게 만든다. 여주인공을 맡은 골쉬프테 파라하니의 연기도 인상적인데, 영화 초반부와 영화 마지막에 이른 그녀의 모습은 얼마나 달라 보이는지.



- 2013년 10월, 롯데시네마 신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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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투리들 - 박쥐와 스토커

Ending Credit | 2013. 10. 5. 14:02 | Posted by 맥거핀.

(<박쥐>, <스토커>의 일부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몇 가지는 남겨두는 것이 마음이 편할 것 같다. 박찬욱의 영화 <박쥐>와 <스토커>에 대한 리뷰는 이미 쓴 적이 있지만, 연작의 선상에서 몇 가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자투리들 몇 가지를 간단하게 남겨본다.


1.
<박쥐>에서 인물들은, 그리고 사건들은 계속 반복되는 구조, 혹은 일종의 순환(악순환)의 구조에 놓여져 있다. 먼저 이 이야기들의 전제로서 혹은 하나의 비유로서 영화에 등장하는 바이러스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부 상현(송강호)의 몸 속에서 바이러스들은 돌고돈다. 상현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나, 그만큼 치명적인 위험 또한 가지고 있는 이브 바이러스를 연구하는 실험에 자원한다. 그러나 그 댓가로 죽음을 맞을 위험에 처한다. 그 순간에 그를 살려내는 것은 수혈 과정에서 그의 몸 속에 주입된 뱀파이어 바이러스다. 즉 상현의 몸 안에는 두 가지의 바이러스가 공존한다. 이브 바이러스와 뱀파이어 바이러스. 이브가 그의 몸을 더 지배한다면 그는 고통스러운 죽음에 가까이 갈 것이고, 뱀파이어가 그의 몸을 더 지배한다면 그는 죽지는 않겠으나 인간의 피를 갈구하게 될 것이다. 즉 상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여져 있다. 신부로서 다른 사람의 피를 마시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나, 그렇지 않는다면 그는 고통스러운 죽음에 다다른다. 그래서 그는 영화 속에서 두 가지의 극단 안에서 왔다갔다 하며 내내 괴로워한다. 그는 죽기를 바라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뱀파이어라는 괴물이 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 사이에서 그는 이상한 딜레마에 처해있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하나의 비유인 것처럼도 보인다. 상현이 이브 바이러스를 스스로 몸 속에 주입한 것은 전적으로 선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결과 그가 얻은 것은 다른 사람의 피를 마시게 된다는 악이다. 즉 상현은, 아니 인간은 선과 악을 동시에 몸에 지니고 있으며, 그 사이에서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는 존재이다. 악이, 즉 뱀파이어 바이러스가 그를 더 지배한다면 그는 악해질 것이며, 선이, 즉 이브 바이러스가 그를 더 지배한다면 그는 더 선해질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영화 속에서 일종의 비유로서 보여지듯이 그렇게 그것이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선이 더 몸을 지배하도록 한다면, 즉 다시 말해서 이브 바이러스가 몸을 더 지배하도록 한다면, 그것은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며, 죽음에 가깝게 다가서는 것이다. (이 바이러스의 이름이 '이브'이고 이것이 젊은 남성들에게만 효과를 나타내는 것으로 설정된 것은 박찬욱의 유머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성경에서 '이브'는 남성에게 즐거움을 주었으나, 그것이 곧 위해가 되기도 했으니 말이다. 영화 속 태주(김옥빈)처럼 말이다.) 즉 선해지기 위해서는 댓가가 따른다. 악의 길은 늘 더 쉬우며, 늘 더 가까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악행에 댓가가 따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그 중에 하나는 죄책감과 같은 댓가다.

그래서 대체로 (상당히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우리 인간들은 선행과 악행 속에서 적당히 왔다갔다 한다. 마치 '박쥐'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박쥐는 이중의 비유라고 말할 수 있다. 이솝 우화의 박쥐일 수도 있고, 뱀파이어의 비유로서의 박쥐일 수도 있다.) 우리는 완전한 선의 무리에도 그리고 동시에 완전한 악의 무리에도 낄 수가 없다. 그 중간 어디에서 끊임없이 양쪽에 왔다갔다 하여야 하는 일종의 순환 지옥에 우리는 놓여져 있다. 그것을 영화의 영어제목에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thirst, 즉 목마름이라는 것은 결국 결핍의 상태이며, 그것은 뱀파이어의 혹은 인간의 천형과도 같은 것이다. 뱀파이어 상현은 목이 말라서 끊임없이 피(욕망)를 갈구하지만, 그는 피라는 욕망, 혹은 태주라는 욕망을 충족하고 나면 다시 일시적으로 죄책감에 빠져 그것을 멀리한다. 그러나 그것을 멀리하는 것을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고, 그를 목마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영화 속에서 계속 반복(악순환)되며, 그것은 보통의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영화 속에서 이는 직관적인 장면으로 보여지기도 하는데, 상현은 태주를 죽이려 하고, 죽어가는 태주에게 순간적으로 욕망을 느낀 상현은 그녀의 피를 마신다. 그러나 일시적인 목마름이 충족된 상현은 다시 죄책감이 들어 태주를 (뱀파이어를 만드는 것으로) 살리려 하고 뱀파이어가 된 태주는 다시 상현의 피를 마신다. 즉 상현과 태주의 피는 돌고돈다.) 그리고 이 '목마름-악행-죄책감-악행을 멀리함-고통-목마름'이라는 순환은 계속 반복된다. 마치 그의 이름 '현상현'처럼 말이다.

2.
이 돌고 도는 것은 박찬욱의 전작들에서 계속 이야기되는 것이기도 했다. 바로 복수의 등가교환이라는 환상으로서 말이다. 계속 이야기했지만, 박찬욱의 주인공들은 어떻게든 등가교환을 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박찬욱의 전작들이 보여주듯이 완전한 등가교환은 존재하지 않고 늘 추가적인 무엇인가를 남긴다. 그러므로 복수라는 것이 등가교환의 형식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라면, 복수는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다. 등가교환으로서의 복수는 계속 무엇인가를 남기고, 그 남긴 무엇인가는 실물이 되어 다시 다음의 복수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즉 등가교환은 환상이나 정신병에 가깝고, 등가교환의 시도는 늘 잔여물들을 남기고, 대체로 그 잔여물들은 조금씩 조금씩 (대체로 오인과 오해를 담아) 확대되어 거대한 실물로서 박찬욱의 주인공들에게 되돌아왔다. 그 주인공들은 진짜 실물을 보기도 했고, 때로는 실물이라고 믿어지는 환상을 보기도 했다. 그것은 이 영화 <박쥐>에서도 마찬가지인데, 태주에 대한 일종의 복수로서 강우(신하균)의 살해를 감행한 상현과 태주는 이제 당연하게도 실물로서의 강우를 만난다. 기괴한 표정을 짓고 몸의 모든 구멍에서 물을 흘리는 강우를 말이다. 그렇다면 박찬욱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이제 그 잔여물들이 남긴 것, 즉 다음의 복수는 이어질까. 다시 말해서 그렇다면 이 영화를 결국 라여사(김해숙)에 의해 이루어지는 태주와 상현에 대한 복수로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 영화에서의 마지막 복수는 전작의 연작들과 상당히 양상이 다르다. 지금까지의 복수와는 달리 이 복수에서 라여사는 지켜볼 뿐, 결국 복수(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를 감행하는 것은 상현 자신이기 때문이다. 상현은 영화 속에서 두 번째 자살을 감행한다. 두 번째 자살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 그가 이브 바이러스를 이용한 실험에 참여하는 것은 순교를 가장한 자살이기 때문이다(이 연구를 담당하는 박사는 심리적으로 자살과 순교의 차이를 가려내는 것은 어려우며, 그가 자살의 방편으로 이 연구에의 참여를 자원한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두 번째의 자살은 다르다. 처음이 순교를 가장한 자살이라면, 이 두 번째는 자살을 가장한 순교다. 그는 결국 돌고도는 복수, 혹은 고통스러운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이 방법 밖에 없음을 안다. 그것은 멈추는 것이다. 일종의 소멸이라는 형태로의 자살. 그는 자신이 절대적인 선도, 절대적인 악도 될 수 없음을 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순교를 실행하기 전, 자신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신도들을 일종의 거짓 퍼포먼스로 밀어낸다(선에서의 탈출). 그는 자신이 그저 선과 악에서 왔다갔다 하는 복수와 정념에 휘둘리는 인간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3.
이것은 물론 상징으로서, 혹은 하나의 비유로서의 죽음이며,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어떻게든 애쓰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영화 속 상현이 처한 딜레마라는 것은 그가 결국 애쓰고 있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보다 쉬운 길은 태주처럼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사용하여 마음껏 욕망을 채우는 것이며, 이러한 인물들은 딜레마 따위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는 애를 쓴다. 어떻게든 사람을 죽이지 않기 위해서, 혹은 어떻게든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기 위해서. 그리고 결국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다음, 그는 소멸의 길을 택한다. 즉 복수 연작의 인물들과 상현은 다르다. 복수 연작의 인물들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고, 그 결과 그들은 죽거나, 혹은 겨우 죽음을 면했지만 미치거나, 혹은 죽지도 않고 미치지도 않았으나 영혼의 구원에는 결코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아마도 상현은 그 육체를 기꺼이 소멸함으로써, 혹은 그 애씀의 댓가로서 영혼의 구원은 얻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반면 태주는 이렇게 말하는 인물이다. 죽으면 끝, 그동안 즐거웠어요, 신부님. 나는 이렇게 말하는 영화 속 인물을 그 이후에 한 번 더 보았다. 홍상수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서의 해원. 그래서 나는 해원이 조금 무서워졌다.)

이 마지막은 박찬욱 감독의 복수 연작들의 대단원이며, 결국 우리가 지켜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 마지막이 라여사의 강한 응시로 끝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또한 이 장면은 우리가 영화라는 사각의 스크린을 보듯이, 라여사가 차창이라는 사각의 프레임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이 때 박찬욱은 우리가 라여사의 위치에서 이들의 소멸을 지켜보기를 바란다.) 이 때 우리가 마지막으로 보게 되는 것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어떻게든 애쓰는 그의 모습과 그들의 발에서 툭 떨어지는 두 켤레의 구두이다. (그 구두는 영화의 중반부 그들의 욕망을 매개하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4.
그리고 그 다음 박찬욱은 할리우드로 건너가 구두 이후의 이야기, 구두를 신었던 인디아(미아 와시코브스카)가 결국 구두를 벗고 하이힐로 갈아신는 이야기인 <스토커>를 찍었다. 구두를 벗고 하이힐을 신는다는 것은 결국 이것이 성장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구두에서 시작하여 결국 구두로 끝났던 <박쥐>의 루프가 아니라, 이 영화는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영화라는 것을 보여준다. 신형철은 <씨네21>에서 이 영화가 은유로서의 성장담임을 훌륭한 글로 잘 보여줬는데, 나도 그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신형철이 말했듯이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은유의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논리가 없다. 은유는 논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은유는 마지막에 하나의 장면으로서 보여지는데 마지막에 이르러 인디아는 아버지의 벨트를 매고, 어머니의 블라우스를 입고, 삼촌이 준 하이힐을 신고 있다. 이를 다른 말로 하자면 그녀는 영화 속에서 (하나의 은유로서) 아버지가 되어 보았다가, 삼촌이 되어 보았다가, 어머니가 되어 보았다가, 결국 그 모든 것의 혼합으로서 자신이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성장하는 이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성장하는 이들은 타인이 되어 보면서 조금씩 자신을 만들어 나간다.

그러나 예전 박찬욱의 복수 연작의 인물들은 타인이 되어 본 적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자신만이 존재하였고, 타인과의 공감에 이를 수 없었다. 그들은 성장하지 못했고, 여전히 과거의 어느 순간에 발목이 붙잡힌 올드보이들이었다. 그것은 다른 부분에서 살펴볼 수도 있는데, 인디아가 성장이 가능한 인물이라는 것은 타인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다시 반복하자면 박찬욱의 복수 연작들에서 인물들은 타인의 말을 듣지 못했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류(신하균)는 청각장애인이었으며, <올드보이>에서 오대수(최민식)는 타인의 말을 듣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말만 하기를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그 결과 <올드보이>에서는 혀를 잘리는 징벌을 받고, <친절한 금자씨>에서 백선생(최민식)은 입이 꽁꽁 틀어막힌 채로, 자신에 대한 죽음을 놓고 벌이는 격정적인 토론을 들어야 하는 형벌을 받는다. 그러나 인디아는 다르다. 인디아는 들을 뿐더러, 심지어는 '남들이 듣지 못하는 것까지' 듣는다(그리고 그것은 <박쥐>의 상현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녀는 아주 잘 들을 수 있기 때문에 그만큼 강렬하게 타인이 되어 볼 수 있고, 성장할 수 있다. (또한 여기에서 교차편집의 효과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 영화의 교차편집이 인디아와 다른 인물을 동일하게 놓고 진행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즉 이 때 인디아는 '영화적으로도' 그 순간 그 인물이 되어보는 중이다.)

지금까지 놓고 보면 박찬욱의 <스토커>는 할리우드라는 '새로움'과 동시에 이야기로도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박찬욱의 길고 긴 복수의 이야기는 상현의 소멸과 함께 막을 내렸고, 이제 박찬욱은 그것을 뒤로 하고, 새롭게 성장하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5.
여담으로서 하나 붙여두자면 오우삼의 비둘기와 같은 것이 박찬욱에게는 계단인 것 같다. 박찬욱의 영화들에서 이야기에 계단을 활용하는 것과 그것을 촬영하는 방식이 전체적으로 꽤 흥미롭다. 몇 가지 장면을 예로 들자면, <복수는 나의 것>에서 처음 류가 장기밀매업자들을 만나는 공사장 건물의 비계(飛階)처럼 보이는 빈 계단과 그것을 역광으로 잡는 숏과 같은 부분, <올드보이>에서 독특하게 생긴 회상 장면에서의 학교 계단과 카메라의 움직임(동선),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이영애)가 오르는 나선형의 아파트 계단을 위에서 내려다 보는 것, <박쥐>에서 상현과 태주가 하늘을 날기 위해 오르는 계단을 건물 외부에서 창을 통해 보여주는 것, 그리고 <스토커>에서 인디아의 집에 있는 나선형 계단. 특히 <스토커>는 계단의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계단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그 계단들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인디아와 다른 인물들의 모습이 그녀와 여러 인물들간의 관계를 시각적으로 잘 드러나게 해준다. 박찬욱의 영화들은 계단의 영화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덧.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지만, 뭔가 마무리를 짓지 못한 것 같아서 블로그에 올 때마다 내심 찜찜했는데, 이제 왠지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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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3.10.05 18: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혹시 지난달 문학동네 팟캐스트 들으셨어요? 초대손님이 박찬욱감독이었는데 신형철씨가 <스토커> 이야기중에 은유로서의 성장담이라는 말을 꺼냈고 그러자 박찬욱감독도 동의하면서 자기가 표출하고자 했던 의도를 가장 잘 읽어내고 표현한 글이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그 글을 찾아봐야지 했는데.. 오늘(마침내!)맥거핀님 리뷰를 통해 읽게되네요.(감사__)

    박쥐와 스토커가 이렇게 구두라는 매개물로 연결될 수 있다니! (휴우~ 놀라와라 )

    스토커에서 계단이 정확하게 기억나는 장면은요 인디아가 아빠거실에서 삼촌이 보내준 엽서와 편지들을 읽으며 한껏 감동하다가 그 편지뭉치를 들고 계단을 올라가죠. 편지가 떨어지고 그걸 집으면서 그 모든 우편물의 발신이 정신병원이라는 걸 발견하고 안고있던 편지들을 다 내던지는 장면입니다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3.10.07 14: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팟캐스트 신형철씨 방송에 나왔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아직 듣지는 못했지만..(사실 방송이 너무 긴 것 같아요.) 말하는 건 잘 모르겠지만, 최근에 박찬욱 감독이 예전에 쓴 책들을 중고서점에서 샀는데, 예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참 글 잘 쓴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습니다. 부럽지요. 그렇게 다방면에 재주가 있는 건 참 부러운 일입니다. (물론 글보다는 영화가 훨씬 더 좋기는 하지만요.)

      네..그 장면 기억납니다. 인디아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듯이 인디아의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직관적으로 드러난 장면이었죠. 박찬욱의 영화들을 다시보기 하면서 느낀 것은 박찬욱이 공간의 활용에 아주 능한, 그러니까 공간을 왜곡시켜 보이게 하는 것(마치 공간 자체가 감정을 담고 말하고 있는 듯이)에 아주 능한 감독이라는 거죠. <스토커>도 <박쥐>도 공간활용이 아주 멋졌습니다. (정성일씨는 박쥐의 라여사의 집이 마치 2층의 방들이 자동증식하는 것 같다,고 했었죠. 귀신들린 집이라 하면서요.)

잉여의 자기기만

The Book | 2013. 9. 30. 00:44 | Posted by 맥거핀.
우리는왜자신을속이도록진화했을까진화생물학의눈으로본속임수와자?
카테고리 과학 > 교양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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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저자 로버트 트리버스 박사에 따르면 인간에게 있어서 기만(속이는 것)과 자기기만(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은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일어난다. 가정에서, 남녀관계에서, 사회적인 관계들 하에서, 일상생활의 사소한 부분에서, 보다 큰 국가적인 영역에서, 종교에서, 혹은 사회과학 분야와 같은 학문 영역에서 그러하다. 특히 비행기 사고나 챌린저호 폭발과 같은 거대한 항공 우주 재난이나 전쟁과 같은 부분에서 이러한 기만과 자기기만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저자는 챌린저호 폭발에서 나타난 NASA의 경우, 미국의 이라크 전쟁,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공과 같은 여러 예를 통해 그 양상들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자기기만은 기만에서 출발하고 있고, 기만이 하나의 개체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그러한 기만은 우리 인간들만이 아니라 인간 외의 거의 모든 종이 행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뻐꾸기가 자신의 알을 다른 새의 둥지에 낳아, 그 새가 기르도록 하는 탁란과 같은 것이나, 암컷을 흉내내 수컷 옆에 자리잡고 있다가 진짜 암컷이 오면 재빨리 그 암컷과 먼저 교미를 해버리는 의사(疑似) 암컷(그러니까 사실은 수컷), 혹은 자신의 몸짓을 더 커보이게 하거나 색깔을 바꿈으로서 위장하는 것, 포식자가 나타났을 때 죽은 척하는 행동을 보이는 것 등등도 모두 기만이며, 이러한 기만의 형태는 한 인간이라는 각각의 개체 내부에서 자기기만의 형태로 나타난다. 

즉 인간은 다른 인간을 속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마저도 속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아마도 다른 동물들도 자기기만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물론 "저는 그것이 제 알이 아니라고 제 자신마저도 속였답니다."라고 울먹이며 고백하는 뻐꾸기가 보이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것은 의식적으로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그것의 양상은 예를 들어 자기(의 능력 혹은 외모 등등)를 부풀리거나 과신하는 것, 남을 폄하하는 것, 내집단 구성에게 호의적으로 대하는 것이나 내집단 사람들이 더 뛰어나다고 믿는 것(한글의 우수성!), 자신이 도덕적으로 더 우월하다고 느끼거나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일을 통제할 수 있다 혹은 통제하고 있다고 믿는 것(저번 주에는 로또 번호 1이 나왔으니 이번 주에는 나올/안나올 거야), 편향된 사회이론을 구축하거나 거짓된 개인 서사 혹은 집단 서사를 만들어내는 것(자신의 긍정적인 행동만을 기억하는 것) 등등의 여러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기만은 대체로 일시적으로는 어떤 위안이나 이득을 그 자기기만을 행하는 개체에게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전쟁이나 국가적 자기기만 서사의 위험성을 일일이 설파하지 않더라도, 사소한 예만으로도 알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로또 번호를 면밀히 분석하여 이번 주에는 반드시 로또가 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적어도 한 주 동안은 행복할 수 있겠지만, 아마도 다음 주에 다시 새로운 분석기법을 개발해야 할 것이고, 다음 주에는 분노에 휩싸여 더욱 많은 로또를 구매할 것이고, 더욱 많은 소주를 소비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아마도 자신에게 해가 될 가능성이 더욱 높은 자기기만을 왜 행하는 것일까? 저자는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결국 그것이 자신에게 진화적 이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라고 종합해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자기기만을 하는 것은 내 어떤 의식이 시켜서 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내 무의식이 혹은 내 유전자가 행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의 극단적인 예가 남녀관계, 섹스에 얽힌 문제라고 얘기할 수 있는데, 남녀관계, 부부문제에서의 수많은 자기기만이 이것에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 남성은 섹스를 하기 위해서 낭만적인 사랑이라는 거짓 감정(자기기만)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번식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 두말할 여지도 없다. (아..얼마나 많은 수많은 여자들이 "너를 사랑해."라는 말에 속아 침대로 기꺼이 따라 들어갔던가. 물론 이것은 여자만 속이는 것은 아니며, 남성들 자신들도 실제로 이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또한 여성은 배란기에 전반적으로 성적으로 활기를 띠며, 배란기에는 노출이 더 잦아진다. 또한 배란기에는 상대적으로 우수한 유전적 자질을 지닌 남성에 끌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진화적으로' 개체에 이익을 준다.) 물론 이것은 수많은 자기기만들 중에 일부에 불과하며, 의식적이라기 보다는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 (음..배란일이니까 조금 더 파진 옷을 입어야지..라고 생각하는 여자는 거의 없다는 말이다.) 즉 이것은 유전자가 시켜서(이기적 유전자) 하는 것이며, 그것의 상당 부분은 그 개체의 유지, 진화와 관련이 있다. (나는 이상하게 이러한 대목들에서 스즈키 코지의 <링> 시리즈가 생각났는데, 결국 비디오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 자체의 번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비디오는 이후 다른 형태로 진화해나갔다. <링> 시리즈는 공포물이 아니라 아마도 진화생물학적 과학 영화였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즉 그것이 우리 인간이라는 종의 진화적 이익과 관련된 것이라고 해도 저자 로버트 트리버스는 결국 우리는 그 자기기만들에 맞서서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의 마지막 14장의 제목은 '우리 삶에서 자기기만과 싸우기'이다.) 그것의 이유를 저자가 마지막에 이야기한 간단하고 개인적인 이유, 즉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 없다던가,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evolutionarily stable strategy), 즉 자기기만을 줄이려 애쓰는 것이 멸종으로 내몰릴 일이 없는 전략이기 때문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고, 아니면 이 책 전체를 놓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이 책의 나머지 전체에서 그러한 자기기만들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는 계속 되풀이하여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승리를 과신하고, 상대방의 전력을 한껏 폄하한 상태에서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이나(이것은 또한 전쟁이 결국 개체수를 줄이고 강한 개체만 남김으로써 진화에 이익을 주는 것이라는 이상한 합리화와도 연관된다. 물론 이 말들이 추운 나라의 열차를 만들었던 누군가의 이야기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자신들이 마땅히 살아야할 곳으로 돌아간 것이라는 자기기만적인 논리에서 시작된 이스라엘의 가자 대학살, 혹은 명확한 불안신호들을 애써 무시함으로써 죄없는 7명의 우주비행사의 생명을 앗아간 챌린저호의 비극을 굳이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이 책의 수많은 예들은 자기기만의 논리를 보여줌과 동시에 그 자기기만이 빚어낸 크고 작은 댓가(비용)들을 반복하여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다시 한 번 한탄, 아..얼마나 수많은 여자들이 "오빠 믿지?"라는 말에 속아 모텔에 따라 들어갔던가. 그러나 비(희)극적인 건 그렇게 말하는 그 자신도 그 믿을 수 없는 '오빠'를 믿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저자가 마지막에 애써 제시하는 자기기만과 싸우기 위한 전략들 - 정신이 혼란스러울 때는 생각 중인 행동을 피하라던가, 어떤 변수를 추정할 때는 처음 추정한 값에서 30%를 줄이라던가, 불편한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을 미리 생각해 두라던가, 기도와 명상을 활용하라던가 등등의 - 이 영 미덥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맞서서 싸우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어 보이기는 한다. 물론 그 싸움은 매우 힘들고 어려운 싸움일 것이 거의 분명하지만 말이다. (당신은 당신의 무의식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덧. 
그러므로 이 책을 읽고나서 보다 긍정적인 반응은 이런 '이 정도 썼으면 그래도 욕은 안 먹겠지'싶은 자기기만이 가득한 리뷰보다는 보다 곰곰이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자기기만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일 터이다. 물론 저자가 "기만과 자기기만 연구의 한 가지 좋은 점은 사례가 부족할 일이 결코 없으리라는 것이다."(p.524)라고 말한 것처럼 내가 한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자기기만은 15년 동안 사설감옥에 갇혀서 자신의 악행을 기록했던 <올드보이>의 오대수처럼 노트 한 두 권으로 끝날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보다 한정하여 지금 리뷰를 쓰고 있는 것과 관련하여서만 생각해보면 사실 글을, 특히 이런 리뷰를 쓴다는 것 자체가 사실 일종의 지속적인 자기기만에 가깝다. 나는 이 책의 내용 중에서 내가 필요로 하는 것, 혹은 내가 기억하고자 하는 것, 혹은 내가 조금 더 잘 떠들 수 있는 것을 자유롭게 취사선택하며, 사실은 내가 좋은 리뷰를 쓰고 있다고 자기기만을 하는 중이기 때문이다(물론 자기기만은 분명히 '글'을 쓰는 아주 큰 동력을 제공해주기는 한다.) 이 책의 리뷰가 아니더라도 예를 들어 영화 리뷰 같은 어떤가. 영화 리뷰란 결국 자신이 보고자 하는 대로 영화를 보는 것이고, 쓰면 쓸수록 계속 그 자기기만을 강화하여 나름의 논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물론 영화라는 것 자체가 어차피 편향된 창작물이며, 어차피 자기기만을 하는 것이 자신만족 뿐인데 무엇이 상관인가,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타인에게 실질적인 피해를 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의 9000원을 날리게 하거나, 2시간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 수도 있다. 또 그것이 아니더라도 다른 많은 것과 연관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수많은 차가운 혹은 뜨거운 반응은 감독의 창작 욕구를 저해시키거나 증진시킬 수도 있고, 혹은 영화에 대한 논쟁은 다른 방향으로의 논쟁으로 번질 수도 있다.)

아니면 서평단의 경우라면 어떨까. 예를 들어 자기기만과 관련된 것이라면 다음과 같은 것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서평단들은 각자 나름 몇 권의 책을 추천하고, 그 추천한 책들 중에서 한두 권이 선정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대체로 본인이 추천한 책에는 리뷰 시에 더 좋은 별점(점수)을 주는 경향이 있다. 시험 삼아 지난 서평단에서 선정된 책 중 6권을 뽑아 그 책을 추천한 사람과 추천하지 않은 사람의 별점을 비교해 보는 잉여짓을 해봤다(이런 잉여짓은 LG 야구를 보면서 해야한다. 요즘 LG 야구는 열심히 보면 빡치고, 대충 보면 이기는 것 같다. 오늘도 이겼다. - 그리고 물론 이렇게 얘기하는 것도 자기기만이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한다고 믿는 것). 예상대로 6권 중에 5권의 경우에 추천한 사람들의 별점평균이 추천하지 않은 사람의 별점평균보다 최소 0.3 이상 높았다(다른 한 권은 거의 같았다). 이것을 서평단의 자기기만이라고 부른다면, 이 자기기만은 내집단/외집단 문제와 관련된 것일 터이다. 즉 내가 추천한 책이니 이 책은 '내집단'이 되는 것이고, 더 좋아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악영향을 미칠까. 여러가지를 말할 수 있다. 자신의 책을 보는 안목을 더 떨어뜨릴 수 있고(사실상 안좋은 책인데, 본인이 좋은 책이라고 믿어버림으로써) 실제보다 더 좋은 점수를 받게 함으로써 별 관심없던 타인에게 그 책을 구매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타인에게 그 책을 구매하게 한다는 것은 온라인 서점이나 출판사의 이익이며, 그것은 이 서평단을 계속 유지시킬 하나의 필요성으로 작용한다. 다시 말해서 이 자기기만은 이 서평단이라는 '종'의 유지와 진화에 기여를 하고 있다. 이 책의 다른 모든 자기기만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러나 자기기만이기 때문에 우리는 맞서 싸워야 할까. 잘 모르겠다. 적어도 이 책은 내가 추천한 책이 아니니 나는 상관이 없다. 그러니 나는 내 마음대로 점수를 주겠다. (그러므로 내 별점은 신뢰할 만하다고 나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서 (자기)기만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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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3.10.05 18: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웹상에서 글을 올리는 건 고작 140자 트윗뿐인데 어느땐 그것조차 자기기만 이거나 자랑질 인것 같다는 생각이 살짝 들긴 들어요. 난 정말 이러이러한 책을 좋아하나? 그 책을 구입해서 사진까지 찍어 올리는 건 뭔가 난 이런 책들에 관심이있고 읽고 있어 라는 의미가 포함된건데 사실 사놓은 책들 손도 못대고 있는거 많거든요. 근데 또 어느날 갑자기 뭐에 꽂혀서 폭독하기도 하니..

    하긴 누가 그러던데 가장 대표적인 잉여짓이 트윗질이라구요 ㅜ.ㅜ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3.10.07 14: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요즘에 트윗이나 카톡들을 생각해보면 조금 놀랍기도 해요. 예전에 그런 거 없을 때에는 그 수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견뎠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원래 트윗이든 블로그에 글 쓰는 것이든, 혹은 사진을 올리는 것이든 약간의 자랑질과 큰 자기기만이 들어가 있죠. 근데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따지면 인류가 지금까지 해온 많은 것들 중에 그런 게 전혀 포함안된 것도 찾기가 힘들겁니다. 단지 자신만족으로 해온 어떤 일들이 큰 의미가 된 경우가 대다수죠. 우리는 유전자가 지시하는 대로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인 모양입니다.

감시자들을 어떻게 감시할 것인가

The Book | 2013. 9. 23. 20:03 | Posted by 맥거핀.
폭력의자유해직기자김종철의젊은이를위한한국현대언론사
카테고리 정치/사회 > 언론/신문/방송
지은이 김종철 (시사IN북,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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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책 <폭력의 자유>는 '해직기자 김종철의 젊은이를 위한 한국 현대언론사'라는 부제에 걸맞게 일제시대부터 이명박 정권 시기에 이르기까지 한국 언론의 모습을 시기별로 나누어 추적하고 있다. 저자 김종철 씨는 그 자신의 삶이 곧 한국현대사의 일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는 1967년도에 처음 동아일보사의 기자로 들어가서 1975년 강제해직 당했으며, 그 이후 몇 차례의 옥고와 더불어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대변인과 사무처장을 지내다가 한겨레신문 창간에 동참하여 1998년까지 논설간사 및 편집부위원장으로 일했다. 그리고 현재에는 동아일보사 해직언론인 모임인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의 위원장을 맡고 있다. 즉 그의 경력 자체가 권력의 개입과 굴종, 또한 그에 맞선 언론인의 양심적인 투쟁으로 점철된 우리의 파란만장한 언론 현대사의 모습을 드러내보인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런만큼 그는 때로 이 책에서 시대별로 일어난 사건들을 그대로 나열하는 것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1960년 4월 혁명에서는 고등학생 신분으로 겪었던 혁명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1975년에 있었던 동아일보사 기자 및 직원들의 강제해직 사건, 80년대 전두환 정권에 맞선 해직언론인들의 투쟁, 1988년 국민 모금에 의한 한겨레신문의 창간 등에서는 자신의 목소리로 생생한 경험을 들려주기도 한다. 

책의 구성 및 내용에 있어서 두 가지 점이 눈에 띄는데, 먼저 하나는 책의 이야기가 ('네오'님도 지적하셨듯이) 1910년도 일본의 강제 조선 병합과 제국주의 일본의 소위 '문화정책'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은 강제병합 후 강력한 경찰력을 바탕으로 무단통치를 자행하다가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정책의 방향을 바꾸었는데, 그것은 이른바 '문화통치'로 사실상 그 이름의 의미와는 다르게 훨씬 더 교묘한 방식으로 조선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그 한 부분이 '합법적 언론'의 허용이었는데, 그것을 계기로 탄생한 것이 김성수의 '동아일보', 예종석(후일 방응모)의 '조선일보', 민원식의 '시사신문' 등이었다. 즉 근대 언론의 시작에서 흔히 언급되는 서재필, 윤치호 등의 '독립신문'을 건너뛰고, 일제의 사실상의 간섭과 통제 하에서 창간된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흥미로운데, 이는 아마도 특히 권력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언론의 역사를 보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저자의 관점으로 본다면, 현재까지 위세를 떨치고 있는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를 포함한 한국의 근대 언론의 시작은 자유로운 의지의 탄생이 아닌, 사실상 관과 합작하여 탄생된 반쪽짜리 언론이었다.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는 현재까지도 자신들이 일제의 탄압을 받은 민족지였음을 자랑스레 내세우지만, 그것은 '일장기 말소사건' 등 일부의 경우 뿐이고(책에 따르면 이 역시도 젊은 기자들이 주도한 거사일 뿐, 사주와 고위간부들은 전전긍긍할 뿐이었다), 탄생부터 일제 말기까지 친일의 모습을 보인 '反 민족지'에 가까웠다. 저자는 책의 첫머리에서 밝히듯 한국언론의 역사를 '민중의 벗인가 공공의 적인가'라는 관점으로 살펴보려 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러한 구분에 따르면 한국언론의 역사가 결국 어디에 더 가까웠는지를 밝히는 것은 뒤를 굳이 읽지 않아도 자명한 일이다. 썩은 씨앗에서 올곧은 줄기가 나오기는 힘든 법이다.

다른 하나는 일제시대부터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각 정권 별로 챕터가 나뉘어 구성되어 있으며, 각 챕터가 다른 비중 및 분량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책에서 가장 큰 비중 및 분량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박정희 정권과 이명박 정권의 시기인데, 책의 성격 및 내용으로 비추어 볼 때 이것은 이 시기가 언론이 가장 큰 통제 및 고난을 겪었던 때였으며, 또 그에 따른 언론의 투쟁 역시도 가장 격심했던 때로 볼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박정희 정권 시기에는 기관원이 신문사 편집부에 상주하여 신문의 편집과 발간에 일일이 간섭을 하고, 동아일보사 및 여러 언론사에서의 대량 해직 및 그에 맞서는 기자들의 노조 창립과 복직 투쟁이 잇따르던 때였다. 또한 이명박 정권 시기에는 전례 없었던 방송사들에 대한 낙하산 사장들의 투입 및 마음에 안드는 언론인 솎아내기, 그리고 그에 대한 언론사 총파업 및 대 정권 투쟁이 불같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른 정권 시기에 정부가 언론에 개입하거나 언론이 정부에 맞서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른 정권 시기에도 여전히 언론과 정부는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것은 폭압적 독재정권 시기에는 정부의 회유 및 간섭, 그에 따른 굴종이나 투쟁의 양상으로 또한 소위 진보정권 시기에는 보수언론과 정부의 대결이라는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즉 한국현대사에서 언론은 사주 및 구성원들의 성향에 따라 다른 얼굴을 보여줬으며, 또한 동시에 각 시기별로도 재빨리 가면을 바꿔쓰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단지 대형 보수매체들의 문제만이 아니었으며, 소위 진보언론도 때로는 여론을 호도하기도 했다. 저자의 관점대로라면 지금까지 한국현대사에서 언론은 민중의 벗이라기 보다는 공공의 적에 가까웠으며, '압제를 극복하는 자유언론'도 아직은 멀다.

물론 그것은 언론인이나 이 책이 타겟으로 하고 있는 '언론인이 되려는 젊은이'들이 조금 더 고민해야 할 문제고 다시 책으로 돌아오자면 몇몇 아쉬운 점이 눈에 띈다. 먼저 한 가지는 책이 너무 정치와 권력과의 상호작용적인 관점에서만 언론을 보고 있다는 점이다. 언론이 정부와의 관계에 대한 부분만 있는 것도 아니고, 언론이 다루는 모든 내용이 정치에 대한 것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한국현대 언론사'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거의 모든 내용이 언론에 대한 정부의 통제, 그에 따른 투쟁, 또는 각 정치 사안에 대한 여러 언론사의 반응들로만 채워지다 보니 너무 한 쪽으로 치우친 느낌이다. 전체적인 사회의 감시자로서 여러 다양한 시각에서 각 언론들의 모습을 다루는 것이 보다 더 '한국 현대언론사'를 조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각 시기별 주요 사건들이 너무 수박겉핥기 식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현대언론사의 격랑 한 가운데에서 여러 사건을 넘나든 저자의 이력으로 비추어 볼 때 아쉬운 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저자가 너무 전체 사건을 편년체 형식으로 기술하려다 보니 특정 사건들에 대한 자세한 분석이 결여되는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한겨레신문의 창간 과정에 있어서도, 당시 시작부터 깊숙이 개입했던 저자로서, 당시 내부의 이야기나 어려운 점들, 혹은 창간 과정의 문제점 같은 것을 자세히 들려줄 수도 있을 텐데, 저자는 너무 알려진 사실들로만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다.

그것은 여러 사건들에 대한 각 언론의 보도 양상을 다루는 부분들 같은 데에도 마찬가지인데, 정작 중요한 것은 어떤 사건에서 어떤 언론사가 어떤 보도를 하였는가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고, 보다 중요한 것은 그렇다면 '왜' 그런 보도를 하였는가의 문제일 것이고, 그것에는 언론사 내부의 경제,권력구조 및 여러 역학관계, 정부와의 관계, 사주의 성향, 기자들의 취재방식, 언론사 간의 관계 문제 등등 우리가 실상 잘 모르는 여러 문제들이 개입되어 있을 것이다. 언론사 내부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저자라면 이 '우리가 실상 잘 모르는 여러 문제'에 대한 이야기들을 (내부자의 목소리로) 자세히 들려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각 현안들에 대한 여러 언론의 상반된 리포트는 이미 수없이 알려진 내용이다. 이를 반복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읽다보면 이것이 한국현대'언론사'인지, 아니면 강준만의 '한국현대사 산책'인지 잘 모르겠다.) 즉 이 책은 사실 조금 어중간하다. 한국현대언론사라고 부르기에는 언론의 모든 내용을 세밀하게 다루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책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내용, 즉 한국현대사에서의 권력과 언론의 관계를 그리 깊숙이 추적하고 있지도 못하다. (부록에서 보여주는 미국의 머독과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 총리와 같은 권력과 결탁한 언론을 다루는 부분은 본문 내용의 반복에 가깝고, 위키리크스를 다루는 부분은 '압제를 극복하는 자유언론'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는 알겠지만 좀 쌩뚱맞다.)

결국 중요한 것은 <왓치맨>에서 나온 것처럼 '감시자들을 어떻게 감시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언론이 사회의 감시자라고 했을 때 그 감시자들을 감시하지 않는다면, 감시자들은 곧 또다른 권력자가 되어버린다는 점을 지난 역사는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소위 진보언론들은 물론이거니와 책에서 하나의 예처럼 제시된 위키리크스도 마찬가지이다(어쩌면 그들의 힘이 꽤나 강력하다는 점에서 보다 위험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감시자들을 어떻게 감시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결국 각각의 개인들이 감시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보수언론들의 잘못된 보도 행태를 꾸준히 지켜보고 스스로 걸러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지난 이명박 정권이나 현 박근혜 정부 하에서 정부에 대한 언론인들의 투쟁에 지지를 보내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지를 보낸다는 것은 그들을 격려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지켜본다는 것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언제까지나 민중의 벗인 언론은 없다. 그것은 그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들의 생리이다. 꾸준히 그들을 감시하지 않으면 언제 감시자들이 우리를 억압할지 모를 일이다.


덧.
책 제목은 참 아리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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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과 게임을 벌이는 영화들

Ending Credit | 2013. 9. 2. 21:38 | Posted by 맥거핀.

(<나우 유 씨 미 : 마술사기단>, <짚의 방패>의 일부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관객과 게임을 벌이는 영화들이 있다. 물론 사실 이 말은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다. 어떻게 보면 모든 영화는 관객과 게임을 벌인다고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임이란 결국 참여하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그리고 사실 (거의 모든) 영화는 결국 관객을 참여시키기 위해 애쓰는 무엇인가이다. 관객에게 이야기의 내용을 추론하게 만들거나, 이야기되지 않은 무엇인가를 상상하게 만들거나, 혹은 이야기된 무엇인가라도 일부러 오해를 하게 만들거나 하는 등등의 직접적인 참여가 아니더라도, 일반적으로 영화는 기본적으로 숏과 숏의 연결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렇다. 숏과 숏의 연결, 그 아주 찰나적 순간에 관객은 영화에 끊임없이 참여를 한다. 즉 어떤 숏의 이후에 다음의 다른 숏이 붙을 때 우리는 그 사이의 무엇인가를 아주 짧게라도 상상을 한다(그리고 그것이 영화가 이어지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이후의 숏들을 보는 것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이 때 우리는 감독이 제안하는 게임에 이미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영화의 내용에 대한 이해를 둘러싼 게임일 수도 있고, 어떤 철학적인 고찰에 대한 게임일 수도 있으며, 누군가를 사랑하게 만들거나, 혹은 누군가를 증오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결국 관객의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게임일 수도 있다. 그리고 물론 어떤 게임은 성공하기도 하고, 또 어떤 게임은 실패하기도 한다. 그것은 관객의 입장에서, 혹은 감독의 입장에서 다르게 작동하는 나름의 성공 혹은 나름의 실패이다(즉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은 감독이 이긴다고 관객이 지는, 혹은 관객이 이긴다고 감독이 지는 그런 게임은 아니라는 점이다).

최근에 본 아래의 두 편의 영화는 일반적인 영화들보다 훨씬 더 게임의 위치에 가깝게 다가가 있다. 물론 나는 감독의 입장이 되어 본 적이 없으니 관객의 입장에서 제멋대로 성공하거나 실패할 뿐이다. 그 성공 혹은 실패의 기록들.  


나우 유 씨 미 : 마술사기단, 루이스 리터리어, 2013

사실 이야기 자체로는 별로 흥미로울 것은 없다. 이 영화는 결국 4번의 마술공연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영화이다. 4번의 마술공연이란 영화의 주인공들인 4명의 호스맨이 보여주는 3번의 마술 공연과 감독이 관객에게 행하는 1번의 마지막 공연이다. 이 마지막 공연은 지금까지 영화의 모든 트릭을  만들어낸 최종의 마술사(범인)가 누구인지를 맞추는 마술이며, 지금 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과 벌이는 일종의 마술 혹은 게임이다. 즉 이 영화는 마술과 영화를 일종의 동일 선상에 놓고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으며, 영화를 통해서 마술을 보여줌은 물론, 마술을 통해서 영화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영화를 보다보니 이야기와 별개로 영화와 마술이라는 것이 꽤 공통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영화와 마술 모두 기본적으로 수많은 관객을 앞에 놓고 벌이는 일종의 눈속임이다. 마술이 마술사의 현란한 손놀림이나 어떤 도구적인 트릭으로 관객을 속인다면, 영화는 배우의 연기, 카메라 트릭, 편집의 활용, 사운드나 기타 도구의 활용 등등 무궁무진한 방법으로 관객을 속인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속이기 위해서는 일부분을 관객에게 숨김없이 보여주어야 한다(혹은 숨김없이 보여준다고 믿게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마술사는 카드를 섞는 모습을 일부러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카드가 어떤 트릭없이 섞였음을 관객에게 믿게 만들기 위해서다. 마찬가지로 영화도 추리물이라면 추리를 하기 위해 필요한 일정 정도의 정보를 관객에게 제공할  필요가 있다. 또한 모두 비슷한 수법을 활용하는데 예를 들어, 이 영화 속에서도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만, 마술은 기본적으로 관객의 시선을 다른 것으로 이끌면서 이루어지는 트릭이다. 예를 들어 마술사가 기를 불어넣는다며 특이한 동작을 하거나, 기합을 넣는 것, 혹은 늘씬한 미녀 조력자를 등장시키는 것 등등은 시선을 그쪽으로 유도시키고, 다른 곳에서 무엇인가를 벌이기 위함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영화들은 관객의 정신을 끌만한 장치(맥거핀)를 영화 속에 일부러 삽입한다. 또한 영화나 마술이나 철저한 사전준비가 필요하며, 그것에 이 공연의 성패가 달려있다. 영화든 마술이든 그 표면만 볼 때에는 말 그대로 일종의 마법이나 초능력처럼 보이지만, 그 숨겨진 내부에는 미리 철저하게 준비된 무엇 혹은 때로는 아주 복잡하거나 더럽고 이상한 무엇인가가 자리잡고 있으며, 그것을 얼마나 세심하게 준비하는가에 따라서 이 공연의 성패가 달려있기도 하다.

물론 이것은 표면적인 공통점이고, 보다 깊숙히 들어가 공통점을 찾아본다면 마술이든 영화든 결국 관객과의 일종의 규약으로 성립이 된다는 점이다. 즉 두 가지 모두 관객은 속을 준비가 되어 있으며, 속기 위해서 이 자리에 온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의 규약이란 이미 마술사와 사전에 약속을 한 특정의 관객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마술을 보고 있는 모든 관객들은 '저것이 마술이다' 즉 일종의 속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잘 인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영화의 앞 부분에서 보여주듯이 정해진 시간 내에 물이 가득한 수조를 탈출해야 하는 마술을 마술사가 벌일 때 모든 관객들은 마술사가 결국 빠져나오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혹은 빠져나오게 된다고 믿는다. 그것을 믿지 못한다면 관객은 마술을 즐길 수가 없을 뿐더러, 그 마술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과거의 어떤 마술사의 이야기처럼 금고에 갇힌 채로 강물에 뛰어드는 마술을 보여준다고 했을 때, 그 결말이 결국 마술사가 금고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이미 마술이 아니라 비극이다.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영화 속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즐길 수 있는 것은 그 누군가가 실제로 죽지 않았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화와 관객이 맺는 일종의 규약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규약을 지키지 않고 즐기려는 자들이 생겨난다는 데 있다. 즉 실제로 어떤 이들은 마술사가 결국 수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에 더 쾌감을 느낀다. 또 어떤 이들은 누군가가 실제로 죽었다는 데에서 그 죽음을 보는 쾌감을 느낀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는 이미 마술도 아니고 영화도 아니다. 그저 (내 관점으로 보면) 참혹한 것일 뿐이다. 즉 이것을 즐기는 것은 마술이나 영화를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마술을 하나의 영화로서 보는 입장에서 결국 이 영화 안에서 결국 가장 곤란을 겪을 자가 누구인지는 자명한 일이다. 다만 한 가지 첨언하고 싶은 것은 그런 관점에서 보면 마지막 비밀을 밝혀내는 과정의 아쉬움이다. 왜냐하면 관객의 입장에서 이 마지막은 상당히 치밀하지 못한 트릭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어차피 관객은 영화관에 속기 위해서 가며, 또한 감독과 관객의 게임 역시 기본적으로 상당히 불공정한 게임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카드 마술로 말하자면 카드를 섞을 때 관객의 눈앞에서 섞는 것이 아니라 모자 속에 숨겨놓고 섞는 식이다. 그런 상황에서라면 마술사가 내가 골라낸 카드를 아무리 맞춰도 아무런 감흥이 없다. 이 영화는 시작부에 관객이 가까이에서 볼수록 속이기 더 쉽다, 고 관객에게 조언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조언은 맞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마술은 대신 면적 1 제곱미터의 방에서 이루어지는 마술이라는 점이다. 멀리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다. 

 

 

짚의 방패, 미이케 다카시, 2013

일곱 살 짜리 여자아이를 단지 쾌감을 위해 때려 죽인 연쇄 살인마가 있다. 그런데 그 죽은 여자아이는 재계 거물의 손녀였고, 그 재계 거물은 그를 죽이는 자에게 10억엔을 준다는 신문광고를 낸다. 실제적인 위협 앞에서 그 살인마는 도리어 경찰에 자수하는 방법을 택하고, 그를 심문하고 재판에 넘기기 위해 그가 자수한 후쿠오카에서 도쿄까지 이송하는데 경호팀이 동원된다. 이송 도중에 경찰 및 정예 경호요원이 포함된 이들 경호팀에게 끊임없는 공격(가장 위협이 되는 것은 일반인의 공격보다 주위 경찰들의 공격이다)이 이어지고, 이들의 위치가 인터넷에 노출되고, 미수자에게도 1억엔을 주고, 그 재계 거물의 관련 회사에 취업시켜 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건은 겉잡을 수 없이 혼돈에 빠져든다. 특히 그들의 위치가 계속 알려진다는 점은 그들 경호팀 내부에 내통자가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데...

이런 것이 내용이고 보면, 여기서의 게임이란 과연 이들 중에서 내통자가 누구인지 맞추는 것처럼 보인다. 즉 이들 중에서 이 연쇄 살인마를 결국 죽이게 될 사람이 누구인지를 묻는 것이다. 영화 속 정예 경호요원인 메가리(오사와 타카오)의 말을 빌어서 보면, 정작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무런 훈련도 받지 않고 변변한 무기도 없는 일반인들이 아니라, 훈련받고 무기도 갖춘 경찰들, 즉 이 호송 차량의 경호를 위해 나선 주위의 경찰들이다. 그런데 그것을 확장하면 결국 가장 위험한 것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들 경호팀이다. 이들은 그들이 이송해야 하는 연쇄 살인마에게 가장 가깝게 접근할 수 있을 뿐더러, 모두 무기의 사용이 용이하다. 또한 이들 조직은 여러 다른 배경을 가진 오늘 처음 구성된 조직으로 누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전혀 알 수도 없다. 그런데 여기에서 조금 걸리는 것은 감독의 이름이다. 감독은 (요즘 들어서 많이 약해졌다고는 해도) <비지터 Q>, <카타쿠리가의 행복>, <이치 더 킬러>의 소소한 변태 미이케 다카시니까. 그러므로 어쩌면 문제는 <씨네21>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나 어울릴 듯한 이 이야기에 이 미이케 다카시가 끌렸는가라는 점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포인트는 호송 과정의 스릴이나 스펙터클, 혹은 누가 내통자인가를 찾는 추리가 아니라 다른 것에 있을 것이다.

그 다른 것이란, 예를 들어 과연 악은 어디에 있는가,와 같은 물음이다. 즉 이 연쇄 살인마를 어떻게든 죽이고 돈을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이 사람들을 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들. 여기 이 남자가 연쇄 살인마라면 그를 죽이는 것이 도리어 선의 실천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들을 경호하는 경호팀이 아무리 상부의 지시라고 해도 도리어 악행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와 같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질문들. 즉 명확해 보였던 선과 악의 경계는 점점 옅어지고 관객은 점점 명확히 판단을 할 수 없는 세계로 이끌려 들어간다. 이상한 변태 행위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줄줄이 이어나감으로써 그것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던, 즉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흩뜨려놓고 관객을 점점 알 수 없는 세계로 이끌었던 그의 전작들처럼 말이다. 더 수상한 것은 연쇄 살인마 기요마루를 묘사하는 방식이다. 이 기요마루라는 남자는 마치 악 그 자체, 악의 극단의 끝까지 다다른 것처럼 보인다. 단지 쾌감을 위해 일곱 살 짜리 여자아이를 때려 죽였다는 사실로도 그러하지만, 자신을 보호하려던 주위의 사람들이 죽어나가도 그는 그 죽음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며, 자신의 어머니가 자살한 소식을 탈출의 기회로 이용하는 등 그는 보호할 가치가 없을 뿐더러, 도리어 죽이는 것이 당연히 마땅한 인물로 보인다(이 기요마루 역할은 <데스노트>의 키라로 등장해 잘 알려진 후지와라 타츠야가 맡고 있는데, 그 이미지와 겹쳐서 더 사악해 보인다).

미이케 다카시가 수상한 것은 영화 내내 이 연쇄 살인마 기요마루의 사악한 반응숏과 그의 행동들을 세밀하게 묘사하여 관객들에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즉 이 때 미이케 다카시는 영화의 인물들에게만이 아니라, 관객들마저 이 게임에 동참시키고 있다. 이 기요마루라는 남자를 죽이는 게임, 혹은 이래도 이 남자를 죽이지 않을 거냐고 묻는 게임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영화 내내 이 기요마루를 죽이고 싶어서 혼났다, 혹은 왜 이런 살인마를 보호해야 하지? 영화의 설정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와 같은 이 영화에 대한 짧은 100자평들은 영화평이면서 동시에 이 게임에 참가한 참가자들의 소감이기도 하다. 또한 이는 동시에 사형제에 대한 물음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 영화 전체가 거대한 사형에 대한 비유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즉 영화 내내 충돌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충돌이 아니라, 이 살인마를 보호하려는 사람들 각자의 내부에 싹트는 가치관의 충돌이다. 이 당연히 죽여야 할 자를 죽이지 않고 살려두는 것, 혹은 국가기관이 보호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라는 질문은 사형제에 내재된 질문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형제에 반대한다는 것은 어떠한 사람이라도, 그가 설혹 악마 그 자체라도 살려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메가리를 비롯한 경호팀들이 그를 살려서 데려가도 결국 사형을 받는 것이 당연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그를 여기서 죽게 내버려두는 것, 혹은 죽이는 것은 다른 범주의 이야기라는 말이다. 그것은 마치 이렇게도 보인다. 모든 인간은 결국 죽으니까 말이다. 아무리 사악한 살인마라도 말이다. 그가 '결국에 죽는다는 것'과 '그를 여기서 죽이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후회한다. 어차피 사형을 당할거라면 이왕이면 더 많이 죽일 걸 그랬다."라고 이 남자는 당신과 눈을 마주치며 말하고 있다. 당신은 그를 죽이고 싶어할까, 아닐까. 미이케 다카시는 당신에게 사악한 게임을 제안한다. 아무래도 그는 변태인가 보다.      

(근데 '짚의 방패'라는 제목은 '짚으로 만든 방패' 등으로 바꾸는 것이 맞지 않을까. '~의'라는 사용이 아무리 보편화되었다해도 이것은 아무래도 어색해 보인다. 아무리 일본 영화라고 해도.)
  



 

- 2013년 8월, 롯데시네마 피카디리, 부천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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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 봉준호

Ending Credit | 2013. 8. 23. 17:21 | Posted by 맥거핀.




(<설국열차>, <괴물>, <마더>, <살인의 추억>의 내용과 결말이 일부분 들어 있습니다.)



1.
봉준호의 영화는 늘 다른 층위, 혹은 다른 범주의 이야기를 동시에 해왔다. 예를 들어 이 영화 <설국열차>는 설국열차의 엔진을 차지하려는 열차 스펙터클 서사이면서, 동시에 세계의 비유이자, 인류역사의 축소판이며, 다시 거대한 시스템과의 대결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다만,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것은 각각의 다른 카테고리이지, 일종의 수준이나 단계의 문제는 아니라는 점이다(그러니 '층위'라는 말보다는 '범주'라는 말이 나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이것을 자꾸 어떤 정치로 읽는 사람들은 그 속도나 질주를 즐기지 못하고, 자꾸만 뒤로 돌아가 결국은 꼬리와 머리를 만나게 할 것이니, 그것 또한 한편으로는 딱한 일이다. 아무튼 그래서 봉준호의 영화들은 각각의 범주 안에서 각각 즐길만한 거리들이 있었고, 그래서 한편으로는 보다 넓은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봉준호의 영화들은 늘 시스템과 시스템에서 부서져 나온 개인들의 투쟁을 다룬다. 그 영화들은 항상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를 추적한다. <살인의 추억>에서는 여자들을 살해하는 연쇄살인마를 추적하고, <괴물>에서는 한강에서 태어난 거대한 괴물을 추적하며, <마더>에서는 아정이를 죽인 진짜 범인을 찾아다닌다. 그러나 우리가 이 영화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결국 핀트가 어긋난 결과물들이다. 연쇄살인마로 믿었던 남자는 연쇄살인마가 아니었고, 괴물의 퇴치에는 환호나 즐거움보다는 쓸쓸함이나 이상한 허무가 감돌며, 죄는 몇 바퀴를 돌아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 때 영화는 우리에게 다른 곳으로 통하는 길을 열어준다. 예를 들어 <살인의 추억>에서 여자들을 죽인 범인은 과연 누구인가? 으슥한 산길과 추수가 끝난 논바닥, 혹은 학교 뒤편의 야산, 하수구 속의 터널...여자들은 영화 속에서 결코 보이지 않는 범인의 손길에 의해 어디론가로 끌려들어가며, 다시는 그곳에서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어두운 심연은 여자들을 집어삼켰고, 이때 여자들은 특정의 누군가가 아니라, 마치 영화 속 어딘가에 도사리는 무엇인가에 의해 잡아먹힌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한국의) 80년대라는 폭압적인 괴물에 의해. 그러니까 <괴물>에서도 그 괴물은 80년대라는 괴물이 진화한(몸집을 키운) 2000년대의 괴물이며, 시스템의 마스코트이다. 그러니 당연히 영화 속에서 시스템이 내내 쫓는 것은 괴물이 아니라 강두(송강호)와 그의 가족이다. 같은 편을 무엇하여 쫓겠는가. 그리고 다시 <마더>에서 여자아이는 희생당하고, 시체는 마을이 온통 내려다보이는 옥상에 화려하게 전시된다. 왜 이 때 도진(원빈)이는 시체를 옥상까지 끌어올렸을까. 아니 굳이 왜 마을의 가장 높은 곳까지 끌고 올라가 마을을 굽어보게 했을까.


2.
그러므로 <설국열차>는 사실 어떻게 보면 너무 쉬운 떡밥이고, 너무 물린 양갱이다. 우리는 그 양갱을 하도 씹어먹어서 그 말랑말랑한 갈색의 직육면체만 들여다보아도 그 맛과 먹고난 후의 느낌마저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설국열차라는 폐쇄된 시스템 하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 꼬리칸에서 머리칸까지 갈 테지만, 그 마지막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그리 쉽게 내주지는 않을 터였다. 봉준호의 다른 영화들이 늘 그랬듯이 말이다. 그러나 달린 떡밥을 물고기가 외면할 수는 없는 법(아니 바퀴벌레로 만들어진 단백질블록이라도 안 먹을 수 없는 것). 어차피 떡밥을 먹고 죽을 운명이라면, 이왕이면 다양한 떡밥을 다양한 방식으로 먹고 죽는 것이 그나마 나을지도 모른다.

먼저 첫번째 판본, 반복되는 아우슈비츠의 악몽. 영화의 문을 여는 것은 수용소의 풍경들이다. 좁은 공간안에 짐짝처럼 포개진 사람들과 제복을 입고 총을 맨 관리자들의 대비, 앉아번호로 하는 인원체크 점호와 식량배급과 바이올리니스트의 차출은 익숙한 광경들을 연상시킨다. 예를 들어 유대인 수용소에서 유대인 예술가들의 바이올린곡을 들으며,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제복을 입은 독일 장교들의 모습들이나 메이슨 총리(틸다 스윈튼)의 모습 위로 겹쳐지는 괴벨스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중요해지는 것은 생존의 문제이다. 절멸의 위협에 맞서서 어떻게든 생존하는 것 말이다. 커티스의 고백도 여기에 연결된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극한의 생존의 위협에서 작동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두 번째는 윌포드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것을 세계의 축소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정된 자원과 그 한정된 자원마저 독점하는 소수의 집단에 대한 비유로서 말이다. 즉 지구라는 하나의 생태계에 대한 은유로서 이 영화를 받아들이는 것인데, 영화 초반부의 설정도 역시 그러한 것에서 시작된다. 인류는 온난화를 해결하기 위해 CW-7이라는 물질을 살포하였지만, 그것이 도리어 지구의 빙하기를 초래했다. 즉 재미있는 것은 이 재난의 시작이 자연재해가 아니라, 결국 자연도 조절할 수 있다는 인간의 탐욕 혹은 오만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세 번째 판본을 생각해 볼 수도 있는데, 조절할 수 없는 것을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여기에서 윌포드의 인구조절 같은 것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은 다른 것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핵(혹은 비슷한 것으로서 원자력발전소)과 같은 것은 어떨까. CW-7의 살포로 빙하기가 도래했다는 것에서, 핵무기의 사용과 그로 인한 핵겨울을 떠올릴 수도 있지 않을까. 즉 CW란 'Clear Weapon'의 약자이고, 핵무기, 즉 Nu(New)Clear Weapon 이전의 보다 강력한 무기이다. 혹시 설국열차의 차창 밖으로 보이는 건물 위에 가득 쌓인 눈더미가 핵전쟁이후의 가득 쌓인 핵먼지로 보이지 않았는지?

네 번째 판본은 많이 이야기된 것처럼 이를 인류역사의 하나의 축소모델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기차칸들의 배열에 관한 문제인데, 처음 꼬리칸을 벗어난 인류가 먹을 수 있는 것이란, 고작 곤충들 정도이다. 곤충을 먹으며 한숨 돌린 인류는 암흑 속에서 자연과의 대결(복면을 쓴 자들은 물론 인간이 아닌 다른 것을 의미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을 통해 (오만한 표현으로) 정복에 성공한다. 바로 불의 발견 및 사용을 통해서 말이다. 그 댓가로 인류는 바다와 산과 들에서 물고기, 야생동물, 식물과 같은 것들을 먹을 수 있게 되는데, 인류가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더 많이 잡는 법을 가르치는 교육과 더 많이 잡을 것을 기원하는 종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2차 전쟁, 그리고 지금까지도 지속되는 전쟁이 이어진다. 그것은 한정된 자원을 놓고 싸우는 대결이다. 그리고 그것은 종교와 교육(문명)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전쟁이었고(총을 쏘는 여교사와 달걀을 나눠주는 수도승 분위기의 남자), 보다 발달된 무기(총)를 가지고 이루어지는 많은 희생을 낳는 전쟁이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각종 다양한 문화 - 수영장, 사우나, 미용실, 카페 - 를 습득하며 오늘날까지 생존해왔다.

 


3.
그런데 많이 이야기되는 이 마지막 판본으로 영화를 본다면 몇 가지 잔여물이 생긴다. 그 하나는 이 싸움은 이제 마지막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즉 2차 전쟁 이후에 살아남은 자들이 보게 되는 것은 점점 타락해가는 인류이다.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 환각(크로놀)에 취한 사람들. 엔진칸 앞에서 그들이 만나게 되는 것은 이 환각에 빠진 이들과의 마지막 전쟁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마지막에서 그들과 대결하는 사람은 커티스(크리스 에반스)가 아니라 역시 마찬가지로 크로놀에 취한 남궁민수(송강호)이라는 점이다. 즉 이 마지막의 싸움은 환각에 취한 자들의 대결이고, 이 설국열차를 끝장낼지도 모르는 싸움, 혹은 지구를 끝장낼지도 모르는 싸움은 이미 환각에 취한 자들의 손에 넘어가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미 광기를 가진 자들의 손에 지구의 운명을 내맡겨야 하는 낭떠러지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봉준호가 이를 혁명의 과정과 동일 선상에 놓고 있다는 점이다. 즉 우리가 인류 역사의 과정이라고 본 이것은 영화의 표면적으로는 커티스의 엔진칸 확보를 위한 혁명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혁명의 완수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엔진칸으로 '직선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인류의 역사가 곧 혁명의 역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혹은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맑스가 말한 자본주의 발전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나아감을 말하는 것일까.

물론 봉준호가 영리한 것은 그는 결국 이것을 혁명이 아니라, 반(反)혁명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즉 커티스가 엔진칸에서 만나게 되는 윌포드의 이야기들이 바로 그것이다. 커티스의 혁명은 다른 여타의 혁명들과 마찬가지로 이미 예정되어 있었고, 거대한 조절의 다른 이름이라는 바로 그 얘기. 즉 커티스 일행이 마지막으로 만나게 되는 환각들, 그리고 환각들이 벌이는 싸움에는 혁명의 결과물이 아니라 반혁명의 결과물들만이 남아있다. 그리고 그것은 커티스의 혁명이 '그것 자체로는' 결국 반혁명에 머물 수 밖에 없음을 윌포드의 입을 통해서 재확인 시켜준다.


4.
즉 이 이야기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이 지독한 처음으로의 반복. <설국열차>에서 커티스는 엔진칸 앞에서 느닷없이 과거의 기억, 그러니까 꼬리칸의 탄생에 대한 기억에 사로잡히고(이 커티스의 고백은 왜 영화의 이 시점에서, 그리고 바로 이 공간에서 흘러나오는가), 엔진칸을 열고 들어가 만나는 것은 윌포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윌포드의 이름을 가진 길리엄이기도 하다. 끝에서 끝으로 들어간 유일한 자, 커티스 앞에 놓여진 것은 꼬리칸이라는 끝이 아니라, 엔진칸이라는 또 하나의 끝이며, 그는 여기에서 다시 물리적으로도, 그리고 이야기적으로도 영화의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보인다(그리고 그 설국열차 안에 그대로 남아있기로 한다면 그가 갈 곳은 결국 되돌가는 것밖에는 없다. 엔진칸 다음은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 처음의 반복은 봉준호의 영화에서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살인의 추억>에서 처음의 논 한가운데에 있는 어둡고 질척한 하수구, 온갖 더러운 것들이 가득 들어찬 그곳을 나이가 든 박두만 형사(송강호)가 다시 찾아간다. 그리고 여전히 그곳에는 풀리지 않는 범인의 윤곽, 어떤 미스테리가 도사리고 있고, 형사는 조용히 스크린 밖을 응시하며 영화가 끝난다. <괴물>의 마지막은 언뜻 강두가 처음의 그곳에서 현서(고아성)가 대체된 다른 아이를 키우는 약간의 온기가 남아있는 곳으로 보이지만, 여전히 그 컨테이너 박스는 어둡고 눈내리는 밤 한강 둔치에 홀로 남아 있다. 언제 그 검은 강에서 괴물이 튀어나올지 모른다. 이야기는 하수구에서 시작하여 하수구로 끝나거나, 컨테이너 박스로 시작하여 컨테이너 박스로 끝난다. 즉 이야기들은 돌고 돈다. 돌고돌아 다시 처음의 위치에 와 있다.

그리고 그것은 <마더>에서도 비슷한 양상이다. <마더>에서 가장 이상한 장면은, 그리고 사실 봉준호의 영화를 통틀어서도 가장 이상한 장면 중의 하나는 처음 마더(김혜자)가 유치장에 있는 도진이를 찾아갔을 때 도진이가 넋이 나간 상태에서 중얼거리는 이상한 대사이다. 죄가 몇 바퀴를 돌아 자신에게로 온다는 그 말. 죄가 몇 바퀴를 돌아서 온다...그것은 사실 <마더>라는 영화, 혹은 봉준호의 이야기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한 말이다. 죄는 몇 바퀴를 돌아서 도진이에게 왔고, 마더는 필사적으로 그 고리를 다시 돌려 다른 누군가에게 죄를 돌리려 했다. 그리고 춤을 춘다. 영화의 시작부에 있던 춤과 이제 고리를 필사적으로 돌린 후 돌린 자신을 잊으려 고속버스에서 마지막에 추는 춤. 그렇게 영화의 시작과 끝은 다시 만난다. 


5.
봉준호의 영화에서 '죄'라는 놈은 그렇게 가장 약한 고리를 찾아 헤맨다. <살인의 추억>에서는 동네의 지체장애인, 가난하고 힘없는 사내, 손이 부드럽고 이질적인 타자를 맴돌다가 어두운 터널 안에서 미스테리로 남겨졌고, <괴물>에서는 강두의 가족이 표적이 되었으며, <마더>에서는 돌고 돌아, 엄마가 없는 아이에게로 갔다. 그리고 희생당하는 사람들 역시도 어떻게 보면 가장 약한 고리들이었다. <살인의 추억>의 가난한 동네의 여자들(살인의 위기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여자를 묘사하는 장면을 보라), <괴물>의 현서, <마더>의 아정이. 즉 시스템은 가장 약한 고리가 부서졌을 때 그 약한 고리를 또 하나의 약한 고리를 부서뜨려 메운다. 그리고 그것은 이 열차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달려야만 하는 기차의 부품(아마도 가장 약한 부품)이 부서졌을 때 그것을 메우는 것은 기차의 다른 의미에서의 가장 약한 고리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스템을 부숴야 하는 이유가 된다.............라고 쉽게 쓰고 싶지만 과연 그럴까?

어쩌면 가장 무서운 점은 마지막 윌포드의 이야기들이 어쩌면 맞는 이야기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이 아닐까? 열차 안에서의 자원은 한정되었고, 한정된 자원으로 남은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인구 밀도를 줄이는 방법 밖에는 없다. 열차는 달려야만 하고, 그런 열차를 달리게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 밖에는 없다. 그것으로서 남은 모든 사람들이 살 수 있다...그러한 것들은 논리적으로 맞는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적어도 '논리적으로' 말이다. 그래서 커티스는 거기에서 주춤거렸을 것이다. 그것은 커티스도 논리적인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는 감이나 요행으로 움직이는 인간이 아니다. 정확한 정보(단백질 블록안의 정보)와 치밀한 계획(문이 열리는 4초의 시간 계산)으로 움직이는 인간이다. 그런 커티스에게 윌포드의 그런 이야기들은 어느 정도 맞는 이야기로 들렸을 것이고, 그것은 길리엄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사실 나는 미안하지만 윌포드의 이야기에 좀 혹했다.)

그러나 논리가 있다면, 논리의 바깥에서 움직이는 것, 혹은 논리로서 결코 이야기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괴물>에서 강두 가족에게 괴물이라는 결코 맞서기 어려운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시스템(정부마저 싸움을 거의 포기한)과 싸울 수 있게 해주는 동력은 가족이라는 '불가해함'이다. <마더>에서 마더의 마지막 선택을 영화를 보는 우리가 결코 비난할 수 없는 것은 그녀가 누군가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논리로서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끝까지 명철한 정신으로 고민한다고 해도 나올 수 있는 답이 아니다. 그리고 <설국열차>에서 거기에서 아이를 구해야 한다는 것 역시, 논리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다. 커티스가 그나마 그 지점에서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논리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혁명에서 결국 필요한 것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논리의 바깥에 있는 휴머니즘, 혹은 사랑이다. 사랑 없이는 혁명이 완수될 수 없다. (다시 자본주의의 끝으로 돌아간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공산주의가 이상한 결말을 내비친 것은 그것이 폭력으로 점철된 비논리적인 것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도리어 너무 도식적이고 논리적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공산주의가 '발전'이라는 말을 쓰게 된 순간, 그것은 이상한 결말의 단초를 내비치고 있었다.) 


6.
그러므로 위에서 이야기한 우리가 내몰린 처지, 즉 환각을 가진 자들의 대결이란 그렇게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어쩌면 도리어 필연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논리를 벗어났을 때, 우리에게는 시스템을 벗어날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환각을 가진 남궁민수는 시스템을 기어코 열어제친다. 그러나 물론 환각만으로 시스템을 벗어날 수는 없다. 바로 가장 강력한 환각(크로놀의 집합체)에 인류 문명의 결정체(불)을 결합하여야만 시스템을 벗어날 길이 열린다.

그리고 물론 이것은 봉준호의 영화답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그러니까 열차 안에서 커티스와 그의 혁명군 일행이 인류역사의 시작부터 끝을 보여줬다면, 두 아이는 다시 인류 역사의 시발점 앞에 섰다. 이것은 희망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모두 다 죽고나면 도대체 혁명인가, 아니면 반혁명인가는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는 그 질문에 답하는 대신 너무나도 당연해 보여서 아무도 제기하지 않는, 그러나 사실은 생각해보면 볼수록 조금 이상한 질문을 하나 하고 싶다. 그리고 거기에서 답을 찾고 싶다. 설국열차는 왜 달려야하는가. 그리고 달린다고 해도 왜 예카테리나 다리를 1년마다 만나야 하는가. 즉 왜 설국열차는 1년을 주기로 같은 궤도를 '반복'하며 달려야만 할까. 

용케 운이 좋다고 해도 아마도 인류는 다시 무엇인가를 반복할 것이다.



덧.
쓸데없이 써보는 봉준호와 박찬욱의 차이. 박찬욱의 영화는 특히 최근작으로 가면 갈수록 어둡고 파멸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 안에 이상한 긍정의 기운을 내비치는 것처럼 느껴지는 반면에, 봉준호의 영화들은 가면 갈수록 희망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헤어나올 수 없는 음울한 쳇바퀴를 돌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반복의 구렁텅이에서 어떻게 기어나올 수 있을까. 

며칠 전에 우연히 임순례의 <남쪽으로 튀어>를 봤는데, 이거야말로 <설국열차>의 이야기구나, 간단한 이야기를 이렇게 복잡하게 했구나 싶어서 살짝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나는 임순례의 입김이 조금 덜한 것 같아 아쉬웠지만, 그래도 이 영화가 마음에 들었다. 사실은 <설국열차>보다 더.




- 2013년 8월, CGV 광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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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3.08.25 14: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얼마전 회사동료랑 이야기 도중(둘 다 <설국열차>를 봤고 저는 살인의 추억을 그 친구는 괴물을 최근에 다시 봤다는 공통점이 있죠) 봉준호영화의 엔딩스타일 이라는 말이 나왔거든요. 뭔가를 찾으려고 끝까지 갔으나 결국 처음으로 다시 돌아간 느낌 그래서 이게 뭔가? 그런 벙찐기분이 드는 스타일이라고 결론을 낼 수 밖에 없었어요. ^^;

    <설국열차>는 그 반복과 순환의 시스템(혹은 논리)이 매우 적나라하게 시각적으로 표출이 된 영화인것 같아요. 영화관람 후 그 다양하고 가열찬 논쟁과 해석을 읽는게 또다른 재미가 있었는데 이번 리뷰를 통해 저도 한꼭지 정리가 되는 것 같습니다.

    날씨가 아직은 많이 더워도 슬쩍쓸쩍 가을기운이 다가오기도하네요 늘 건강하시길요~

  2.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3.08.25 17: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문득 생각났는데 남궁민수가 문을 폭파해서 열게된건 환각때문만은 아니었어요. 열차가 에카테리나 다리위를 통과할때마다 새해를 맞이하곤하잖아요 남궁민수는 17년동안 다리주변의 얼음이 조금씩 서서히 녹아가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유일한 관찰자죠. 그는 빙하기가 끝나가고 있다는 걸 예측했던것같고 그것이 문을 여는 동기가 될 수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3.08.26 22: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 그 말씀도 맞습니다만, 문제는 말씀하신대로 그가 '유일한' 관찰자라는 데 있죠. 즉 그가 본 것을 어떻게 증명할 도리가 없다는 점, 혹은 그것 또한 환각이 아닐까,하고 물을 수도 있다는 점에 있기도 하죠. 아무튼 영화는 그것을 증명할 다른 시선을 주지를 않으니까요. (마찬가지로 마지막 북극곰도 역시 물을 수도 있죠. 그것은 요나의 환각이 아닐까?하고 말이죠. 요나 역시 크로놀에 취해있었으니까.)

      아무튼 그래도 그 불확실한 환각에 걸 수 밖에 없습니다. 이를 다른 방식으로 증명하려는 시도가 있을 수도 있겠죠. 예를 들어 영화의 초반부 7분만에 완전히 얼어버린 그 팔을 증거자료로 내세울 수도 있습니다. 녹고 있기는 커녕 밖은 아직도 무서운 곳이라고 말이죠. 그런데 그 합리적인 설명, 혹은 증명이야말로 이 영화에서 거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위에서도 썼지만, 그런 식의 증명은 윌포드의 합리적인 최후의 설명과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결국 논리를 벗어나는 방식으로 밖에 그것에 대응(대항)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결국 마지막을 처음의 반복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어떤 희망이라고 볼 것인가는 여전히 미궁에 빠져있기는 합니다만..저는 이것을 희망이라고 보기에는 이 결말이 아직도 조금은 미심쩍습니다.

      그렇군요. 곧 가을이 올 것도 같습니다. 건강 잘 챙기시고..가을에는 좋은 영화도 많이 보시고..^^

그래도 된다

The Book | 2013. 8. 17. 16:33 | Posted by 맥거핀.


색채가없는다자키쓰쿠루와그가순례를떠난해
카테고리 소설 > 일본소설
지은이 무라카미 하루키 (민음사,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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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잘 외우기 힘든 소설, 들어도 금방 잊어버리고 마는 제목을 가진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었다. 제목이 외우기 힘든 것은 단순히 길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이 제목이 뭔가 일반적이지 않은 것을 담고 있기 때문에도 그렇다. 다자키 쓰쿠루는 그냥 다자키 쓰쿠루가 아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란 무슨 의미일까? 이 말이 굳이 제목에 들어간다는 것은 '색채가 없다'는 것이 다자키 쓰쿠루라는 사람을 나타내기에 상당히 중요한 키워드라고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우리는 꽤 드물기는 하지만, 색채가 없다, 혹은 색깔이 없다는 말을 사람에게 쓰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을 '개성이 없다'와 비슷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전부일까. 아마도 그것만으로 이 이상한 말이 제목에 붙어야 할 모든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라니? 일반적으로 보면 이것은 조금 이상한 문장이다. 이 문장과 동일한 의미의 무엇인가를 전달하고자 할 때는 '다자키 쓰쿠루가 순례를 떠난 해'라고 쓰면 된다. 즉 여기서의 '그'가 다자키 쓰쿠루라면 이 문장은 이상하게 중첩되고 낭비된 문장이다. 다자키 쓰쿠루와 다자키 쓰쿠루가 순례를 떠난 해라니.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의 가능성이 남아 있기는 하다. 과연 여기에서 '그'는 다자키 쓰쿠루일까. 이 제목만 봐서는 '그'가 그 앞에 있는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라고 확실하게 주장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그'는 다자키 쓰쿠루가 아닌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그리고 그래야만 이 문장이 도리어 말이 조금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아무튼 간에 하드 커버를 넘겨 소설을 들여다봐야만 할 것만 같다.

하루키의 많은 소설들이 그러했듯, 이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한 가지 미스테리한 것, 혹은 무엇인가 기묘한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은 다자키 쓰쿠루가 대학교 2학년 때 겪은 일인데, 고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들 그룹으로부터 아무 이유도 없이(다자키 쓰쿠루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추방당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그룹의 나머지 친구들은 모두 이름에 색채를 표현하는 한자가 포함되어 있고, 다자키 쓰쿠루만 이름에 색채를 표현하는 한자가 없었던 것이다. 아오(靑)와 아카(赤)라는 두 사람의 남자아이, 그리고 구로(黑)와 시로(白)라는 두 명의 여자아이, 그리고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 그런데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렇게 느낄 테지만) 이 네 사람의 이름의 조합은 그 자체가 너무나도 기묘하게 여겨진다. 푸른색과 붉은색의 남자아이들과 하얀색과 검은색의 여자아이라니, 이 완벽한 대비의 구조라니, 이게 과연 가능한 조합일까. 과연 이들은 존재하는 무엇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일까. 아, 물론 나는 모든 소설이 허구라는 지극히 자명한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비유의 구조가 너무 도식적이라 도리어 조금은 의아해하고 있는 중이다. 이들이 완벽한 구조인 것은 단지 색상표의 색채대비의 측면에서 뿐만이 아니다. 하루키의 묘사를 빌리자면 아카는 성적은 탁월하지만, 그것을 내세우지 않고 배려한다. 아오는 체격이 좋고 성격이 활달하며 운동을 좋아한다. 시로는 외모가 뛰어나고 피아노를 잘 치지만, 말수가 적고 차분하다. 구로는 외모는 그렇게 뛰어나지는 않지만, 애교가 있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잘한다. 그러니까 이 조합은 두뇌와 건강과 외모와 재치의 조합이다. 그러니 이것이야말로 완벽한 조합이라고 감히 이야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해서 색상대비표에서 각각의 색들이 어떤 완벽의 극단에서 무엇인가를 표상하는 것처럼, 이들 역시 각각 무엇인가를 표상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간에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가 있다. 다자키 쓰쿠루는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딱히 뛰어난 재능도 없고, 공부를 아주 잘하거나 특별한 면도 없고, 외모마저도 돌아서면 잊기 쉬운 외모이다.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는 다자키 쓰쿠루가 이 친구 그룹을 그야말로 완벽한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이 그룹에서 추방당하자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게 되는 것도 어떤 측면에서 보면 그렇게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당시 쓰쿠루의 관점에서 보면, 이들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들이었고, 이 완전한 존재들과 일체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쓰쿠루에게는 일종의 자신의 존재가치를 느끼는 것이었다. 즉 쓰쿠루는 이들에게서 자신이 가지지 못한 어떤 완전함을 보았고, 그것들의 조화를 보는 것만으로 즐거움을 느꼈다. 그것은 쓰쿠루가 철도와 역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놓고 생각해 볼 수도 있는데, 철도와 역은 쓰쿠루에게 완전함이 어우러지는 조화의 공간이다. 정확한 시간에 도착하고 다시 정확한 시간에 떠나는 기차역의 열차들, 각자 도착하여야 하는 목표지점을 가지고 조화롭게 움직이는 역의 사람들, 이들이 어우러지는 철도와 역은 조화로운 물결, 이미 정해져있는 어떤 흐름이 반복되는 조응의 공간이다. 그리고 쓰쿠루는 머리가 어지럽고, 생각이 많아질때면 역에 가서 그 사람들과 열차들의 흐름을 바라본다. 그 정시 등장과 정시 퇴장의 정확한 흐름들을 말이다. 

그러나 조화로운 공간에서 조화롭게 존재하는 것이란 그 자체만으로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모든 이야기는 도식적인 구조가 깨지는 데에서 긴장이 생겨나고,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색채가 없는 쓰쿠루가 완전한 자들을 위한 이 그룹에서 추방되는 것은 이야기의 내용에서 뿐만아니라 구조로 볼 때 어쩌면 필연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터이다. 그리고 죽음만을 생각했던 쓰쿠루를 죽지 않게 하려면 두 가지의 길이 있다(물론 "대학교 2학년 7월부터 다음 해 1월에 걸쳐 다자키 쓰쿠루는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았다."라고 작가가 첫 문장을 쓰는 것은 그를 죽일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하나는 그에게 색채를 부여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색채가 없는 자신을 긍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다자키 쓰쿠루는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답게 후자의 길을 간다. 색채가 없는 자신을 긍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주위의 색채를 빼야한다. 다시 말해서 다자키 쓰쿠루만이 색채가 없는 것이 아님을, 주위의 모든 것들이 사실 색채가 없었음을, 혹은 모든 것이 나름의 색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라고 했을 때, 이 말 앞에는 '완전한' 혹은 '눈에 띄는'이라는 말이 빠진 것이다. 누구나 색채는 있다. 노르스름하다던가, 희뿌옇다던가 하는 정확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색채말이다. 완전한 파랑이나 완전한 빨강이나, 완전한 검정이나 완벽한 흰색은 아니어도 말이다(그것은 실제보다는 이렇게 소설 속에 등장한다). 다만 대다수 사람들은 그것이 명확하지 않아서 눈에 잘 띄지 않는 상태 즉, 청과 적과 흑과 백이 나름의 비율로 섞여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하루키도 처음의 그룹을 보여준 후 이제 색채를 섞기 시작한다. 하이다(회색)와 미도리카와(녹색)의 등장이 그것이다(그것도 하필이면 흑과 백 사이에 있는 회색과 청과 적 사이에 있는 녹색이라니, 하루키 씨 정말 귀엽지 않은가). 그리고 그들을 만나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름에 아무 색채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라를 만나고, 그리고 다시 네 명의 옛친구들을 만나며 쓰쿠루는 자신을 긍정하게 된다. 그것은 후반부의 네 친구를 보면 잘 드러난다. 이제 그 친구들은 예전의 강렬한 그 색채가 아니다. 붉그스레한 무엇인가, 혹은 파르스름한 무엇인가라고 부를 수는 있겠지만, 고등학교 시절의 강렬한 색채를 가졌던 그들은 더 이상 원색의 그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그들이 그렇다고 자신의 색채가 없는 것이 아니니까. 색상대비표의 가장 가장자리의 색들은 오히려 위험하니까. 예를 들어 흰색은 어쨌든 검어지는 길밖에는 남아있는 것이 없으니까. 흰색이 검어지지 않으려 발버둥친다면 오히려 그 반대편 낭떠러지에 있는 악령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 친구들의 말대로 오히려 쓰쿠루에게 그들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 그리고 그 그룹을 유지시키기 위해 쓰쿠루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쓰쿠루는 만들다(作)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즉 쓰쿠루는 이 소설에서 역을 만드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을 만들어가는 존재이고, 그리고 동시에 색을 섞어 새로운 색을 만들어가는 존재이다(그러므로 쓰쿠루가 빠지면 그룹은 유지될 수 없다). 쓰쿠루는 그렇게 색채가 없는 존재가 아니라, 색채가 없는 자신을 긍정하는, 그럼으로써 도리어 동시에 자신만의 독특한 색을 만들어가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제목에서 '그'는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가 아니다. 왜냐하면 순례를 떠난 다자키 쓰쿠루는 예전의 색채가 없는(스스로 '완전한(원색의)' 색채가 없는 것이라 생각했던) 다자키 쓰쿠루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이 제목이 이해가 되며 외울 수 있게 되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그는 이제 예전의 다자키 쓰쿠루가 아니다.


덧.
그래서 어쩌면 이 소설이 그렇게 많은 이들에게 읽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들 대다수는 다자키 쓰쿠루처럼 색채가 없다고, 혹은 자신이 뭔가 불완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기독교 식으로 말하면 완전한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하면서 예정된 인간의 운명이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이야기 역시도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한 인간이 자신만의 에덴동산을 찾으려 발버둥치는 이야기이다). 물론 소설은 불완전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아무런 답도 주지 않지만, 너무 실망할 필요만은 없다. 그것은 현실에서는 주인공이 아닌(혹은 아니라고 믿고 있는) 당신이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주니까. 불완전한 시대의 불완전한 인간들은 그렇게 현대 소설에서, 특히 하루키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여 왔다. 물론 하루키의 이런 인물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아직까지는 이 소설의 다자키 쓰쿠루가 아닌, <노르웨이의 숲>의 와타나베이다. 

사실 구조상으로 보면 이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노르웨이의 숲>과 상당히 동일한 부분들이 있으며, 따라서 그 소설의 다른 버전, 혹은 2000년대 버전으로 보인다(나는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읽었다). <색채가 없는...>은 현재의 쓰쿠루, 즉 30대 중반에 접어든 쓰쿠루가 과거로 돌아가 과거의 사건에 맞닥뜨리는 이야기이며, <노르웨이의 숲> 역시 서른일곱 살의 '나'가 비행기 안에서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비틀즈의 음악을 들으면서 과거를 회상하는 데에서 이야기가 출발한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다자키 쓰쿠루에서 출발하는 이야기가 결국은 사라에게 전화를 하는 것에서 끝나는 <색채가 없는...>과 마찬가지로, <노르웨이의 숲>의 시작은 '죽음과 마주했던 열일곱살의 봄날'(2장의 제목)이며, 마지막은 미도리에게 전화를 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리고 마지막 전화에 담겨진 의미는 두 소설 모두 비슷한 것처럼 보인다. 즉 인물로 보면 <노르웨이의 숲>의 나오코에게 이 소설의 시로를 매칭하고, 미도리에게 사라를 매칭할 수 있다. 즉 열일곱살 혹은 스무살(<색채가 없는...>의 대학교 2학년)의 나는 죽음에서 시작하지만 각자 나름의 순례를 마친 후에 미도리와 사라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그것은 하루키가 그들에게, 아니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무엇인가를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자신을 긍정하는 것, 혹은 '그래도 된다'와 같은 것들이다.

하루키는 오랫동안 소설들에서 여러가지를 이야기해왔지만, 어쩌면 그것은 비슷한 것들이 아니었을까. 그래도 된다는 것. 그렇게 해도 괜찮다는 것. 지금 그러고 있어도 괜찮다는 것. 하루키가 대학교  때의 나에게 말해준 것도 그런 것이었다. 대학 어느날의 나는 도서관에서 네 마리 째의 '태엽감는 새'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푸른 검색 화면은 그것이 그 안에 있다고 말해줬지만, 그것은 어딘가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아마도 누군가가 자신만이 아는 장소에 그것을 숨겨놓았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도서관을 헤매고 다녔다. 도서관은 빠져나올 수 없는 미로와 같았고, 안쪽 깊숙한 곳에는 양사나이나 일각수가 있을 것 같은 어두침침한 방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도서관 앞 광장에서는 연일 목적을 알 수 없거나, 애써 목적을 모른채 했던 집회가 이어졌고, 나는 소리가 점점 들리지 않는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하루키의 소설들을 읽었다. 들리지 않으면, 한 때 같은 목소리를 냈던 그들의 목소리들을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러나 아무리 깊숙한 곳에 가서도 웅웅, 웅웅 이상한 진동이 느껴졌고, 나는 그럴 때마다 창이 없는 것을 잘 알면서도 빈 벽을 살금살금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게 진짜 울리는 것일까, 아니면 내 머리 속의 무엇인가가, 혹은 하루키의 소설이 만들어낸 무엇인가가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하루키는 그런 이들에게 오랫동안 '그래도 된다'고 말해왔다. 아카가 했던 이야기에서처럼 하고 싶어서 하는 선택들이 아니라, 어떤 것을 피하기 위해 할 수 없이 하는 선택들이 하루키는 정작 중요한 것이라고 말해왔다. 그런 것 중의 하나는 악령을 피하는 것이다. 완벽해지려는 악령, 일체감을 느끼려는 악령, 정확해지려는 악령, 누구보다도 뛰어나려는 악령들을 우리는 피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시작은 일단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색채가 없어도 괜찮다고, 남들보다 뛰어나지 않아도, 무엇인가가 완전하게 조화되지 않아도 괜찮아고 생각하는 것. 불완전한 당신은 불완전한 선택을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는 것. 마음은 어딘가로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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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3.08.19 13: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이 책의 제목을 자꾸 잊어버려서 하루키의 신간제목이 뭐였더라? 그러면 색채와 순례를 떠난 해와 스크루가 제각기 떠오르곤했어요. 그러면 또 이걸 가지고 조합을하는데 단 한 번도 정확한 문장이 만들어지지가 않는거예요.. (-_-) 아무래도 책을 읽어봐야 머릿속에 자리를 잡으려나 봅니다

    맥거핀님은 오래전에 하루키를 만나셨군요. 전 하루키를 잘 몰라요. 귀동냥과 풍문으로 들어서 직접 읽지는 않았는데도 왠지 친근하고 그의 작품 몇몇은 줄줄이 입에서 나오는 그런정도. 몇 년전에 딱 한 작품 읽었군요 <밤의거미원숭이> 라는 단편집 ^^;

  2.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3.08.19 13: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루키의 소설들을 연대기순이 아닌 거꾸로 읽거나 이것저것 마음이 가는대로 읽어도 되는거겠죠, 꼭 20대 청춘시절이 아닌 나이가 많이 들어서 읽어도 되는거겠죠..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3.08.20 20: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하루키의 모든 작품을 읽은 것은 아니고요. 사실 워낙 하루키의 소설집들이 많기도 하죠. 예전에 나온 단편, 에세이들도 계속 새롭게 묶어서 내기도 하구요.(알라딘에서 하루키로 검색을 해보았더니 500권 이상이 나오더군요.)

      하루키의 소설보다 에세이가 더 좋다하는 얘기들도 많은데, 저는 소설, 특히 초기에 낸 단편들이 좋더라구요. 하루키 씨에게는 옴진리교의 사린테러 사건이 상당히 크게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이 소설에도 짧은 언급이 나오죠.) 그 이후로 소설들이 좀 변했어요. 소설로 따지자면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 이후부터 변하기는 한 것 같습니다.

      뭐 그래도 유명한 것부터 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 싶기는 합니다. <노르웨이의 숲>이나 <1Q84> 같은 것 부터..<색채가 없는...>부터 보시는 건 약간 비추천.

깨진 손톱 위에 붙인 인조 손톱

The Book | 2013. 8. 6. 17:16 | Posted by 맥거핀.
파과구병모장편소설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구병모 (자음과모음, 2013년)
상세보기



(소설의 전체 줄거리와 결말이 들어있습니다.)



'파과'라는 제목이 가장 먼저 연상시키는 것은 破果, 그러니까 으깨지거나 뭉그러진 과일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소설을 처음 펼쳤을 때 만나게 되는 서효인의 <저글링>에 나오는 짧은 글귀 "떨어뜨림에 익숙해지면 으깨진 과일에 더 이상 미련은 없다."고 할 때의 그런 미련을 더 이상 두지 않는 과일 말이다. 그래서 소설의 주인공인 노년의 여성 킬러는 냉장고 안에 언젠가 넣어두었던 '거기 뭉크러져 죽이 되기 직전의 갈색의, 원래는 복숭아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물건'을 버리기 위해 조각을 모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신음을 내뱉는다. 으깨진 과일 같은 것은, 떨어뜨리는 데 익숙해지는 사람은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 않으므로. 자신은 떨어뜨리는 데 익숙해지는 사람이며, 동시에 다른 의미에서는 으깨진 과일일 것이며, 자신도 언젠가는 그런 뭉크러진, 한 때 복숭아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무언가처럼 쓰레기 봉지 안으로 들어가야 할지도 모르므로.

그리고 그런 그녀의 이름은 조각이다. 아니, 이름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별명같은 것이라고 해두자. 조각, 복숭아 조각, 냉장고 안에 핀 성에꽃에 달라붙어 잘 떼어내지 않는 복숭아 조각. 그러나 그녀의 이름은 사실 다른 의미였다. 손톱 조(爪)에 뿔 각(角)인 조각, 다시 말해서 각이 진 손톱, 혹은 날카로운 손톱. 그녀는 여자이기 이전에 유능한 킬러였으며, 맡은 바 임무를 무리 없고, 깔끔하게 처리해내는 솜씨좋은 재주를 가진 방역업자였다. 그녀에게 손톱은 치장을 위해 존재하는 무엇인가의 이전에, 누군가를 공격하거나, 혹은 상대방의 공격 속에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기능이 우선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손톱 조'라는 한자의 생김새는 조금 재미있는 데가 있다. 손톱 조(爪)자 밑에 삐침을 하나 붙이면, 오이 과(瓜)자가 된다. 그러니까 다르게 생각해 보면 '손톱 조(爪)'란 '오이 과(瓜)'가 깨어진, 혹은 파괴된 것이다. 즉 작가의 대출혈 자폭 서비스를 통해서 연상해보면 이것이야말로 '파과(破瓜)'다. 이 파과(破瓜)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연관된 여러가지 의미가 나오는데, 일단 파과라는 말은 말 그대로 '오이 과'자를 파자(破字)한다는 것으로 오이 과(瓜)를 파자하면 '여덟 팔(八)'자 2개가 되어 그 두 개를 합한 여자나이 16세를 의미하는 말이 된다. 동시에 파과라는 말은 여자의 처녀막의 상실, 즉 여자가 처음으로 남자와 성관계를 가지게 됨, 혹은 월경을 처음 시작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 모든 것이 16세, 혹은 사춘기, 청년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 같다. 다시 말해서 파과란 무엇인가가 처음으로 깨지며 다른 무엇으로 변모하는 시기다. 그 파괴되는 무엇인가를 단순히 처녀막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혹은 순수함이나 그간 자신의 주위에서 애써 유지되던 세계, 헤르만 헤세의 알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조각 역시 그런 나이에  그녀 주위의 세계가 부서져 나갔다. 당숙의 집에서 나름의 세계를 더 유지할 수도 있었지만, 작은 균열점들은 알을 조각냈고, 그녀는 모든 것이 깨지려는 순간에 알 수 없는 본능을 발휘하여 방역업자로서 거듭났다. 즉 그녀는 이중의 파과(破瓜)를 맞았다. 의미로서도 새로운 세계로 들어선 파과를 맞이하였고, 글자로서도 오이 과(瓜)가 깨어진 손톱 조(爪), 조각(爪角)이 되었으며, 그녀의 삶은 이상한 방식으로 조각이 났다. 조각난 삶을 겨우 지탱하도록 유지시키는 것은 류의 존재였다. 류는 세상과 그녀를 연결하는 접착제, 끈과 같은 것이었다. 세상에 갈 곳 없이 내버려진 그녀를 지탱시키는 심리적인 끈이라는 점에서도 그러하였고, 그녀가 류의 지시를 받아 방역업을 해나간다는 업무적인 면에서도 그러하였다. 그리고 운이 좋았다면 어쩌면 류와 뭔가 불안한 무엇일지라도, 행복비슷한 무엇인가를 이어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 깨진 세계는 또다시 쉽게 깨질 수 있는 법. 그녀에게 이제 남은 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 되새겨지는 류의 말들과, '무용'이라는 늙은 개 뿐이다.

결국 이 이야기는 깨진 조각이 다시 무엇인가를 붙여나가는 이야기이다. 무엇으로 무엇을 붙여나가는 것인가. 뭐 강박사라고 해도 좋고, 해니라고 해도 좋고, 투우라고 해도 좋고, 손톱이라고 해도 좋다. 혹은 종장에 등장한 어느 네일샵의 이름모를 어린 막내 여직원이라고 해도 좋다. 그래 어쩌면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마지막에 이 노년의 여성 방역업자는 자신의 손톱 위에 무엇인가를 덧씌운다. 어두운 감색이 밤하늘처럼 칠해져있고, 그것을 배경으로 저마다의 다른 색과 무정형 도안이 불꽃놀이처럼, 혹은 과일 열매처럼 퍼져 나가는 인조 손톱. 그리고 네일샵의 원장은 생각 없고 가벼워 보이는 막내 여직원의 유일한 장점이 타인의 불행에 대해 공감하는 능력이라면 데리고 있으면서 쓸 만하게 키워보아도 되겠다고 애써 미소지으면서 말한다. "잘했다." 그렇게 조각은 무엇인가를 붙여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인조 손톱이라고 해도 좋고, 막내 여직원과의 이상해보이는 공감이라고 말해도 좋다. 그녀가 무엇인가를 붙여나갔다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전에 그녀가 네일샵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돌아서 나왔거나, '서장'에서 벌어진 현실적이고도 비현실적인 풍경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하철에서의 어떤 소동들, 그러니까 나이든 남자와 젋은 여인이 자리를 두고 시비를 붙고, 50대 여인은 중재에 실패하며, 젊은 임부의 낭패한 얼굴과 눈물을 덤덤히 견뎌낸 조각이 방역업에 결국 성공하는 풍경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무 것도 붙지 않을 것만 조각이 점점 무엇인가를 붙여나간다. 그녀는 여성이면서도 여성과의 관계가 껄끄러운 인물이었다. 당숙 집에 얹혀 살던 소녀에게 결국 문제가 된 것은 친척언니를 대체하려는 욕망이었으며, 류에게 다가가고 싶으면서도 끝내 그와 거리를 유지하게 만든 것 역시 류의 아내 조를 대체하려는 욕망이었다. 그러던 그녀에게 사람들이 붙는다. 강박사가 붙고, 강박사의 부모와 해니가 붙고, 길에서 폐지를 줍던 노인이 붙고, 결국에는 투우도 붙는다(이를 가족을 잃은 자들의 이상스런 연대라고 볼 수도 있을 터이다. 가족(류)을 잃은 조각과 아내 혹은 엄마를 잃은 강박사와 해니, 그리고 아버지를 잃은 투우). 그러니 그녀가 네일샵의 막내 여직원과 이상한 연대의 감정을 가지게 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녀는 더 이상 (관계에 있어서) 무용하지 않으니까. 그녀는 방역업에 있어서는 '유용'하지만 관계에 있어서는 '무용'하다. 그녀가 키우던 늙은 개의 이름처럼 말이다. '무용'이라는 개는 그녀의 어떤 단면이다. 예를 들어 개 '무용'은 '현관에 정좌하여 돌아온 주인을 향해 꼬리를 예의 바르게 흔들기는 하지만 뛰어올라 몸에 달라붙으려고 하거나 코를 비벼대지 않'으며, '무념무상의 도를 실천하며 달관의 몸짓으로 주인에게서 돌아선다.' 그러므로 어쩌면 마지막 임무를 떠나기 전 '무용'이 조용히 숨을 거둔 것은 도리어 긍정적인 신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용(無用)'이 죽었다는 것은 더 이상 그녀가 '쓸모없음'이 아니라는 의미가 되므로.
 
그러므로 이 소설의 제목은 중의적이다. 그녀는 파과(破瓜)함으로써 조각(爪角)이 되었고, 그 조각들은 결국 파과(破果)가 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스스로 조금씩 무엇인가를 붙여나감으로써 다시 그녀는 새로운 세계, 어쩌면 새로운 파과(破瓜), 또는 합과(合瓜)를 맞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두 번째 파과는 그녀를 다시 조각으로 만들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이제 손톱 위에 인조 손톱을 붙였으니까. 그것은 한편으로 '진짜가 아니며 짧은 시간 빛나다 사라질 것'을 알기에 그렇다. 그러므로 그녀의 말대로 아마도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일 것이다.


덧.
그러므로 이 소설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종장'이다. 아마도 이 종장이 없었더라면 이 리뷰를 쓸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마지막은 이상하게도 영화 <고령화가족>의 마지막을 연상시키는데, 어떻게 수습이나 될 수 있을까 싶던 이야기(사실 '개연성'이라는 잣대를 들이댄다면 이 마지막들이 말이 된다고 할 수 있을까. 영화 <고령화가족>이나 소설 <파과>나.)에 붙는 너무 희망적이라 도리어 믿고 싶어지는 에필로그라는 점에서 그렇다. 

나는 그 <고령화가족>의 마지막이 너무 말들이 안된다고 머리에서 말해주는데, 마음에서는 이상하게도 뭐라고 할 수가 없더라고. 참 요즘에는 이상하게도 이런 게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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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테러 라이브, 김병우

Ending Credit | 2013. 7. 29. 18:00 | Posted by 맥거핀.




(스포일러)


1.
영화 <더 테러 라이브>에서 방점을 찍고 있는 것은 '더 테러'가 아니라, 아무래도 '라이브'인 것 같다. 영화에서 거대한 규모의 '테러'를 보여주는 것은 이제 거의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 되었다. 문제는 그러므로 그것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의 문제인데, 이 영화에서 선택한 방법론은 '라이브'이다. 이 '라이브'라는 것은 이 영화에서 볼 때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영화의 내용상, 이것이 테러를 방송국에서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내용이라는 것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이 테러를, 이 이야기를 관객이 거의 실시간으로 보게 만든다는 것이 그 하나이다. 이 두 번째 부분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들이 조금 있는데, 이것이 조금 특이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나 드라마에서 라이브를 보여주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는 그다지 놀라울 것이 없다. 예를 들어 미드 <24>는 드라마 전체를 'Real Time'으로 보여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였는데, 이 때 한정된 시간을 보충해주는 것은 동시 화면, 혹은 화면 분할이다. 즉 이 드라마에서 시간을 보충하기 위해 전매특허처럼 사용하는 것은 여러 장소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동시에 보여주는 분할 화면이다. 그런데 이 영화 <더 테러 라이브>는 조금 다르다. 이 영화는 한정된 시간을 다루면서도, 동시에 공간마저도 한정시켜 버린다. 즉 카메라는 윤영화 앵커(하정우)가 진행하는 라디오 부스만을 비추고, 모든 사건들은 그 공간을 거쳐서 보여진다. 다시 말해서, 관객들은 모든 사건을 윤영화의 눈을 통해서 본다. 다리가 무너지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라디오 부스의 창을 통해서, 혹은 거기에 설치된 TV화면을 통해서 보게 된다. 이는 영화의 끝까지 이어지는데, 카메라는 다른 장면들을 보여줄 법도 하지만, 끝끝내 그 라디오 부스 안에서 머문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한편으로 연극과 같아지는 부분이 있다.)

이를 일종의 발상의 전환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사실 영화라는 것은 그럴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화에서 과거의 사건을 보거나, 혹은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을 볼 때, 그것은 일종의 관객을 향한 속임수이다. 실제의 사건이라면 절대 볼 수 없는 것을 그 순간 영화는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관객도 그 속임수에 대해서 화를 낼 이유란 없다. 우리는 영화관에 속으러 가며, 기꺼이 그 속임수를 즐기기 위해서 가기 때문이다. 도리어 어떤 속임수도 없다면, 우리는 의아해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일종의 영화가 가지는 장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 '영화의 장점'이라는 것을 시원하게 내던져 버린다. 물론 이는 이 영화가 선택한 것이다. 아마도 그럼으로써 감독은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 많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도박은 대체로 성공을 거두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것을 포기함으로써 얻는 것은 예를 들어 이러한 것들이다. 관객은 이 영화에서 계속 윤영화와 같이 이 라디오 부스에 갇혀있다. 즉 관객은 그가 알게 되는 것만을 알며, 그가 모르는 것은 영원히 계속 모른다. 그런데 관객에게 장소와 시간을 한정시킨다는 것은, 그들에게 정보를 제한시킨다는 의미도 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거대한 사건이 터졌을 때 TV속 앵커가 계속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도 눈을 떼지 못하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왜냐하면 사건의 초기 정보는 제한적이고, 우리는 계속 다음 정보를 갈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의 심리가 이 영화에도 작용을 한다. 우리는 계속 무엇인가를 알고 싶어하며 이 끝나지 않는 뉴스('NEW'S)를 계속 들여다본다. 이것은 또한 부차적인 효과를 낳는데, 관객을 윤영화에게 쉽게 동화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화의 시작부터 윤영화 앵커가 되어 매순간 판단을 해야하는 위치에 놓인다. 테러범도 잡고, 사람들도 구하고, 자신의 위치도 높이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물론 한정된 공간과 시간이라는 도박이 성공을 거두게 하는 것은 이어지는 사건의 치밀한 구성이다. 아무리 예능이나 여러 프로그램들에서 라이브와 핸드헬드를 관객들에게 연습시켰다고 해도, 단지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것 뿐이라면, 이는 사실 관객을 쉽게 피로하게 만들고 흥미를 잃게 만들 뿐이다. 예를 들어 내가 야구 중계를 보는 것을 실시간으로 찍어 영화로 보여준다면 일부 시간 많고 호기심 많은 심리학자들의 흥미를 끌 수는 있겠으나, 그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될 수 없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어지는 사건들을 밀도 있게 구성하여 관객을 기어코 계속 영화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즉 관객은 각각 나름의 윤영화 앵커가 되어 이 테러에, 혹은 테러의 중계에 몰입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이 영화가 얻은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지 간에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앞에서 이 영화가 스릴, 혹은 다른 무엇을 얻기 위해 '영화라는 것의 장점'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 영화가 쉽게 내던져 버린 것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2.
영화 <더 테러 라이브>에서 인물은 별안간 등장하고, 별안간 사라진다. 즉 이 인물들에게는 그 앞의 이야기(전사)도 없고, 그 이후의 이야기(후사)도 없다. 주인공 윤영화 앵커부터 방송국 국장(이경영), 테러 대책반장(전혜진) 등등의 주요 인물들 및 모든 인물들은 어떠한 설명도 없이 거기에 이미 존재하거나, 나타나고, 사건의 진행과정에서 할 일들을 마치고는 또 아무런 설명이나 뒷 이야기 없이 어디론가로 사라져버린다. 그것은 이 영화가 실시간과 한정된 장소를 표방하고 있다면 당연한 부분이고, 아마도 한편으로 이 영화는 그것을 장점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스릴 있게 테러를 보면 되었지, 인물들의 시시콜콜한 이야기, 그런 것은 알아서 무엇하게?, 라며 영화는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그것은 어떻게 보면 맞는 이야기인 것처럼도 보인다. 우리가 순간 어떤 인물을 만났을 때 가지는 인상만으로도 스릴을 구축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실제로도 인물들의 전사나 후사 혹은 다른 디테일 없이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것이 영화에 속도감을 부여해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것은 이 영화에서만큼은 조금 이상해 보인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누군가를 알아달라고 말하고 있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테러범이 테러를 벌인 이유는 영화의 시작부에 이미 관객들에게 반복하여 주입된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단지 하나, 죽어간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들에게 애도를 보내달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계 부품처럼 처리되어 버려진 인간들, 그들을 단지 버려진 부품이 아니라, 한 사람의 고귀한 생명으로서, 인생사를 가진 고유한 인간으로서 기억해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영화는 자신의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단지 하나의 기계 톱니바퀴처럼 다룬다. 인물들은 어떠한 디테일도 없이 적당한 순간에 나타나, 적당한 임무를 수행하고, 또 적당하게 떠나버리고, 영화는 잘짜여진 톱니를 가지고 스무스하게 굴러간다. 도대체 이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비판하고 있는 것, 혹은 또 하나의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은 자극적인 언론에 대한 부분이다. 사건을 혹은 자살을, 혹은 누군가의 죽음을 실시간으로 중계하고 있는 이 (실제의) 일부 언론들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 거의 도덕적인 붕괴에 가깝게 다가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예를 들어 자극적인 제목을 달고, 사건의 어떤 자극적인 부분만을 부각시켜 부풀리며, 정작 사건의 중요한 부분들이나, 생각해보아야 할 부분들을 생각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것은 이유가 있다. 그것이 보는 이들에게 먹히기 때문이며, 일단 닥치고 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지 자신의 뉴스를, 혹은 자신들의 보도 프로그램을 감각적인 자극에 빠져있든,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에 빠져있든 끝까지 보게 하는 것이며, 단지 높은 시청률 혹은 구독률 수치인 것이다. 그런데 어쩌면 이 영화의 전략도 그와 비슷한 것은 아닐까. 위에서도 썼지만 이 영화를 관객이 몰입하게 만드는 힘은 관객을 주인공에 이입시키는 것도 있지만, 한편으로 관객의 예상을 뒤엎고 이어지는 사건들에 있다. 사건은 점점 확대되고, 강도는 점점 강해지며, 테러의 규모는 확대되고, 자극적인 죽음은 점점 눈앞에서 전시된다. 이것이 결국 영화를 끝까지 보도록 만든다. 그런데 이것이 영화에서 비판하고자 하는 언론의 모습과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이 때 우리의 머리 속에는 자극적인 뉴스를 볼 때와 동일한 무엇인가가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 속에서 방송국 국장은 78%의 시청률을 찍은 후 웃음을 지으며 퇴장한다. 그때 그 웃음이 껄끄럽게 느껴지는 것은 그 78%를 만들어낸 사람들은 방송국 국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방송을 본 시청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혹여 이 영화가 780만을 찍게 된다면 감독은 웃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이미 이 영화를 본 나는 왠지 그 웃음이 좀 껄끄러울 것 같다.


3. 
물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그건 뉴스를 보는 것이고, 이것은 영화를 보는 것이잖아요. 누군가의 진짜 죽음을 실시간 뉴스로 보는 것과 누군가의 가짜 죽음을 영화로 보는 것은 다르지 않겠어요? 물론 그것은 맞는 얘기다. 그건 분명히 다르다.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을 즐기러 때로 영화관에 가기도 한다. 그것이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 죽음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맞는 얘기다. 단 그것은 영화가 명백히 판타지를 표방하고, 그것으로 나아가려 발버둥칠 때만이 그렇다. 정해진 틀 안에서 이미 약속한 규약을 가지고 게임을 해 나가는 것이 영화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마술을 즐길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속임수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신체분리마술에 속임수가 없다고 생각해보라). 그러나 어떤 영화들은 기어코 현실이 되려고 애쓴다. 현실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속임수를 지우는 것이다. 주인공이 볼 수 있는 것만을 보게 할 것, 그가 알 수 있는 것만을 알 수 있게 할 것, 그가 흐릿한 화면으로 무엇인가를 본다면 관객들도 흐릿한 화면으로 보게 할 것, 그가 죽는다면 영화도 끝날 것, 어떠한 위안이나 위무도 없이. 그러니까 여기에서 질문을 다시 해보자. 왜 라이브로 봐야 하나요? 이 영화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답은 이렇다. 그것이 극도의 스릴을 주니까. 너는 그 순간 관'객'이 아니라 주인공이 되니까. 그러나 영화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현실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이다. 사실 관객에게 스릴을 주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법을 쓰면 된다. 그것은 그에게 칼을 쥐어주고 실제의 누군가를 죽이게 하거나, 혹은 그의 반대로 관객의 등 뒤에서 칼을 손에 쥔 누군가가 쫓아오게 만들면 된다. 그도 아니라면 관객의 앞에 누군가를 불러 놓고 그를 '라이브'로 죽이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이미 영화가 아니고, 나는 기분나쁜 농담을 하기 위해 이 말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영화가 된 형태는 있다(그것을 영화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그것은 스너프 필름이다(이것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아닌가는 내가 알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극도의 스릴이라는 끝에는 스너프 필름이라는 지옥에서 온 망령이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다.

그리고 과연 스너프 필름이 확실히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 시대에는 합법적인 스너프 필름이 도처에 널려 있다. 미국의 경우 범죄 현장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것은 더 이상 놀랄만한 사건이 아니며, 우리나라의 경우 얼마전 한 종편 방송이 자살 소동을 생중계함으로써 위대한 첫발을 내디뎠다. 이런 것들이 과연 스너프 필름과 크게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 스너프 필름을 굳이 이야기하는 것은 이 영화가 스너프 필름에 가깝다는 의미가 아니다. 내용상으로 볼 때 이 영화는 그런 합법적인 스너프 필름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분명하다. 테러를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언론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고 말해도 무방하리라.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 내용을 그 비판하고자 하는 형식으로 다룰 필요가 있었을까. 다시 말해서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언론을 비판하기 위해 우리에게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것이 필요했을까. 나의 감정을 솔직히 말하자면 비판이라기보다는 당황에 가깝다. 사회에 만연한 모순의 화법들, 예를 들어 남의 신상을 까발리는 해커 그룹이 본인들은 '어나니머스(anonymous)'라는 이름을 쓰거나, 독설을 비판하면서 독설을 퍼붓거나, 정신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걸러 내면서 정신병적인 차별 논리를 사용할 때 나는 사실은 조금 당황스럽다.

4. (영화의 결말에 대한 부분이 집중되어 있으니 보지 않으신 분은 패스하시길.)
물론 그런 모순의 화법은 이것만이 아니고, 앞에서 말한 부분 즉 인물을 단지 하나의 닳아지면 버리면 되는 톱니바퀴로 보지 말자고 하면서, 기계부품처럼 다루는 것도 해당되며, 그것은 영화의 마지막에도 그다지 다를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내내 명확한 선으로 구분되는 것처럼 보였던 윤영화 앵커와 테러범은 마지막에 이르러 감정적인 연대에 성공한다. 그러나 이 연대는 조금은 수상쩍다. 그 연대는 구조는 그대로 둔 채 윤영화를 테러범의 위치에까지 끌어내려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이르러 윤영화는 사회적인 지위도 잃고, 가족마저 잃는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는 사회의 밑바닥에서 가족을 잃은 테러범과 동일한 위치가 되어 감정적 연대에 성공한다. (이것이 아니었다면 성공할 수 있었을까?)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끊어진 마포대교에서 겨우 걸쳐져 있는 차 안에서 아이들을 필사적으로 주위 시민들의 도움을 받아 끌어내고 물에 빠진 가장의 모습과 같다. 전쟁터와 같은 사회 속에서 결국 최종적으로 지켜야하는 것은 자신의 가족 뿐이며. 그것 마저도 약자들의 연대 없이는 최소한의 성공도 이루어내기가 어렵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연대에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그것마저도 결국 실패한다는 것. 테러범은 기어이 추락했고 그들은 여전히 깨진 TV속에서 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기에서 윤영화가 홀로 남아 빈 건물을 무너뜨리는 것을 어떻게 봐야할까?

이것을 테러의 완수라고 보아야 할까. 그렇다면 이것은 다시 처음으로의 되돌이표이다. 사실 처음에 우리는 이미 이 영화의 결말을 어느 정도 예상한다. 테러는 어쨌든 끝날 것이고, 테러범은 잡히거나 죽을 것이다(그리고 잡혀서도 결국에는 사형당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에 이르러 그가 왜 이런 뻔한 무모한 시도를 감행했는지 어느정도 이해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해한다고 해도 그다지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리고 그것은 마찬가지로 가족을 잃은 윤영화에 의해 마저 수행된다. 그러나 이 역시도 우리는 비슷한 결론을 예상할 수 있다. 윤영화는 죽을 것이고, 혹여 운좋게 살아남아도 그는 사회적으로 죽은 상태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테러범이라는 삐끄덕거리는 톱니바퀴를 또하나의 윤영화라는 삐끄덕거리는 톱니바퀴로 대체한 것이다. 작업은 조금 지연되겠지만, 공정에는 그다지 큰 문제는 없다. 나는 이것이 그러므로 일종의 체념이자 자살로 보인다. (이는 또 한편으로 그 남은 마포대교가 결국 무너지고 그렇게 애써 구해낸 아이들도 결국 물에 빠지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아마도 여기에서 다른 질문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왜 그는 하필이면 마포대교에 폭탄을 설치한다는 것일까? 그가 대통령의 사과를 받으려하면서 마포대교의 시민들과 윤영화를 인질로 잡는 것에 담겨진 것들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도 문제가 남는다. 물론 우리는 이 체념이자 자살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사회에 대한 분노가 거기에 담겼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의 분노라고 의미를 부여하기 이전에 선행되어야 하는 문제가 있다. 이런 것을 상상할 수 있다. 누군가가 말한다. 내가 여기서 죽을테니, 당신은 나의 죽음을 널리 알려달라고 말한다. 우리가 여기에서 가늠해야 하는 것은 그의 죽음이 가질 파급력의 강도가 아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가늠해야 하는 것은 그를 구하기까지 남은 시간이다. 실제의 사건이라면 달려가서 우리는 그를 구해야만 하고, 이것이 영화라면 그를 영화적으로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의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대신 일종의 명령에 가깝다. 

5.
그런 영화적인 구원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영화가 줄 수 있는 속임수를 쓰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마술과 비슷하다. 마술의 어떤 속임수를 낱낱이 알게 되면 처음에는 즐겁겠지만, 결국에는 모든 마술이 시시해진다. 그저 적당히 속아넘어가 주는 것이 필요하다. 단 그렇다고 해서 너무 몰라서도 안된다. 예를 들어 사람의 신체를 칼로 자르는 것이 속임수임을 아예 모른다면 그는 공포에 질려 이 마술을 아예 즐길 수 없을 것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현실을 다루지만, 그 현실은 영화적인 현실이다. 이것을 적절히 조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영화가 너무 현실과 동떨어지면 개연성이 없다고 하거나, 아무리 영화지만 지나치게 말도 안된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반대로 어떤 영화는 현실에 가깝게 가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런데 나는 가끔 어떤 영화들이 너무 현실에 비척비척 가까이 갈 때 무서워진다. 보지 않아야 되는 것, 예를 들어 실제로 몸이 잘린 마술사를 보게 될 것 같아서다. 몸이 잘린 마술사를 보는 것이 당신에게 무엇인가를 일깨웁니까, 그렇습니까? 줄곧 나쁘다고 말하는 바로 그 방식으로 우리에게 영화를 즐기게 만들다가 끝내 그 주인공을 체념시키는 이 영화는 이상하게도 열어서 안되는 것을 점점 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 2013년 7월, CGV 신촌 아트레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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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우리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The Book | 2013. 7. 22. 16:49 | Posted by 맥거핀.
적군파내부폭력의사회심리학
카테고리 정치/사회 > 사회학
지은이 퍼트리샤 스테인호프 (교양인, 2013년)
상세보기


1972년 2월 28일, 각종 테러와 범죄, 파괴활동방지법 위반으로 경찰의 추적을 받던 연합적군의 최후의 생존자 5명 전원은 일본 나가노 현의 아사마 산장에서 10일 동안 산장의 여주인을 인질로 잡고 농성을 벌이다가 경찰에게 결국 체포되었다. 사건은 끝난 것처럼 보였고, 모든 진상은 드러난 듯이 보였으며, 이들에게는 긴 수형생활만이 남은 듯했다. 그런데 이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사건의 숨겨진 나머지 부분이 드러났고, 그것은 경찰은 물론 전 일본인을 깜짝 놀라게 했다. 아사마 산장에서 사건이 벌어지기 전,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평균나이 23.3세의 일단의 젊은이들은 산속의 비밀 기지로 들어갔고, 그 숨겨진 공간에서 두 달 동안 총 31명의 연합적군 멤버 중 12명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도대체 산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연쇄살인마라도 돌아다녔던 것일까, 아니면 어떤 죽음의 바이러스라도 퍼졌던 것일까? 마쓰모토 세이초의 팩션이나, 김전일 소년의 사건기록부에나 등장할 법한 이 사건은 언론 및 전 사회의 관심을 끌었고(아사마 산장에서의 진압 과정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었고, 이는 최고 89.7퍼센트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들을 둘러싼 이야기는 사건의 양상이 밝혀진 직후에는 물론 아직까지도 일본 사회에서 널리 회자되고 있다. 그리고 퍼트리샤 스태인호프의 책 <적군파>는 이 사건을 당시 관련자들의 인터뷰 및 증언, 그들이 남긴 기록, 그리고 그간 쏟아져나온 각종 문서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세밀하게 재구성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사건의 미스테리 및 어떤 기이한 부분으로 인해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내가 보기에 이 책이 가진 미덕은 크게 세 가지다. 먼저 하나는 이것이 단지 그 사건을 세밀하게 추적하는 데에만 머물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책의 저자는 저널리스트나 르포 작가가 아니고, 사회학과 교수이다. 그러므로 저자의 관심은 이 사건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떤 양상으로 펼쳐졌으며, 이것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에 있지 않다. 즉 저자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의 배경이 되는 요소, 그 사건의 어떤 구조적인 형태, 그 사건과 사회와의 관련성, 그리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사회에 미친 영향들이다. 사건 그 자체 못지 않게 그러한 부분들에도 관심을 두는 것은 중요한데, 이 사건은 단순한 일회성의 범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연합적군이 벌인 이 아사마 산장에서의 농성과 내부 '숙청'은 좁게는 당대의 일본의 진보적 학생운동 및 폭력적 사회변혁 운동, 그리고 해외에서 벌인 요도호 그룹의 비행기 납치 사건이나 일본적군의 이스라엘 텔아비브 공항 습격 사건 등의 거대한 테러들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넓게는 일본의 현대사 전체와 일본인들의 어떤 정신적 세계와도 연관되어 있다. (참고로 말해두자면 요도호 그룹 및 일본적군, 그리고 연합적군, 적군파는 모두 일본공산주의자동맹(분트)의 분파들이며- 이를 통칭하여 '적군파'라고도 한다 -, 그들은 각각 엄밀히 구분되는 조직이다. 예를 들어 아사마 산장 사건을 벌인 연합적군은 적군파와 혁명좌파가 통합된 조직이며, 한편으로 저자는 이 통합의 과정이 상당부분 이 '숙청'에 영향을 미쳤음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을 본격적인 사건의 계기가 된 연합적군의 탄생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도리어 책의 시작은 이 아사마 산장 사건이 벌어진 3개월 후에 일어난 오카모토 고조를 위시한 일본적군의 텔아비브 공항 총기 난사 사건과 오카모토 고조의 인터뷰이며, 다시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 연합적군의 근원에 있는 적군파의 최초 탄생에서부터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다. 그래서 책의 초반에는 사건 중심이 아니라, 이들의 어떤 이데올로기, 내부의 논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약간은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저자의 입장에서는 이는 꼭 필요한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내부논리를 어느 정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이 연합적군의 '숙청'이라는 사건에 다다르면, 우리는 그 사건을 피상적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미덕은 책의 저자 퍼트리샤 스태인호프가 외부인이라는 점이다. 사건은 1972년에 세상에 드러났고, 그로부터 약 40여년 간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일본의 각계에서 이 사건을 다루는 수많은 글들이 쏟아져나왔으며, 이 사건에 영향을 받은 수많은 소설 및 영화, 만화 등이 나왔다(와카마쓰 고지의 영화 <실록 연합적군>이나 야마모토 나오키의 만화 <레드> 같은 것이 그 예이다). 또한 사건의 주범격인 사카구치 히로시 등 수많은 관련자들이 아직도 옥중에서 혹은 외부에서 살아 있으며, 이들은 사건 후 '자기 비판'을 포함한 여러 이야기들을 꾸준히 쏟아내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에 공통점이 있다면 이는 모두 일본 내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들인 바, 이는 그 사건이 전후 일본사회에 끼친 영향력을 생각해 볼 때, 어쩌면 넓게 보면 모두 당사자들의 이야기들일 수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 스태인호프 교수는 다르다. 그는 미국인이며 이 사건들과 전혀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 그것은 단순히 국가적인 구분을 넘어서, 그녀가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이 책에서 공공연하게 드러내보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녀는 책의 곳곳에서 미국인으로서 특별히 다르게 느껴지는 점이나, 미국인으로서 사건을 바라보는 방식이나, 사건을 처리하는 방식에서 느껴지는 점들을 솔직히 밝히고 있으며, 또한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끝내 이해할 수 없는 점이나, 혹은 다르게 이해할 수 있는 점들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진압과정에서 미국의 경찰과 일본의 경찰의 차이에 대해 밝히고 있는데, 그것이 한편으로 이 사건의 진행에 미친 영향도 있음을 생각케 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 사건의 진행에서 일본 특유의 어떤 부분들이 미친 영향이나 혹은 우리가 쉽게 오해할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해 생각하도록 한다. 어찌되었건 이 책을 읽는 (거의) 모든 독자는 한국인이며, 이 사건에 있어서는 외부인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미덕은 사건을 벌인 그들을 '위험한 타자'로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건이 일어난 후 이 '숙청'을 둘러싸고 여러 각도에서 다양한 분석들이 나왔다. 그것은 예를 들어 조직 내의 권력다툼으로 희생자들이 나왔다, 혹은 배신자(스파이, 프락치)를 처단한 것이다 등등의 분석이 그것이다. 혹은 그들의 어떤 개인적인 특성에서 사건의 해답을 찾는 이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조직의 여성지도자였던 나가타 히로코의 어떤 히스테리컬한 면, 개인적인 마음의 상처에서 해답을 찾는 이들도 있었으며, 그것은 사건을 맡았던 판사가 그녀를 '마귀 할멈'이나, '마녀'라고 부르면서 재판을 통해 그녀를 공격한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그런 단순한 분석에서 벗어나 이들의 어떤 심리적인 기제를 추적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사회학자인 저자의 이력으로 볼 때 이채롭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저자는 오랜 시간 각종 기록 및 관련자들을 만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이들이 벌인 사건이 어떤 특수한 개인적 성향이나 권력다툼이나 배신자의 문제와 같은 특수한 사례가 아닌 어떤 조직 내에서든 일어날 수 있었던 일임을 밝힌다. 다만, 이것이 다른 사건들과는 달리 12명이나 숨지는 이렇게 거대한 사건으로 발전한 이유는 그 사건에 내재한 언뜻 사소해보이는 분기점들, 혹은 어떤 조건들 때문인데, 예를 들어 중간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사람이나 내부조직이 없었다는 점, 이들이 명분으로 내세운 '공산주의화 총괄'에 어떤 내부적인 기준이 없었다는 점, 그리고 이들이 막다른 출구에 내몰려 있었다는 점 등에서 그 이유의 일부분을 찾을 수 있다.

즉 저자는 책의 중간중간에서 계속 독자에게 말을 건다. 그것은 사건의 진행양상과 그것에 내재한 어떤 조건들을 보여주고, 그들이 그 과정에서 선택한 부분들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것인데, 그것은 독자들에게 이렇게 묻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이라면 여기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 것인가? 폭력에 의한 세계혁명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평균나이 23.3세의 젊은이들은 괴물이 아니었고, 거의 대부분이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의 선택은 누구나 갈 수 있는 길 중의 하나였다. 그들은 흔히 이야기하는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사소해보였던 순간의 선택들은 결국 그들을 구렁텅이로 내몰았고, 동료들을 죽인 살인자로 만들었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가 중요해지는 것은 우리들 중의 대다수 역시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이코패스 혹은 정신에 문제가 있는 자라고 규정하면 해답은 간단해진다. 그들을 우리와 '분리'하면 된다. 그것이 오늘날 그러한 해답들이 선호되는 이유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볼 수 있듯이 사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대부분의 경우에 사태는 엉뚱한 곳에서 촉발되며, 한 번 조건이 만들어지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진전되어 전혀 원치 않은 결말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것은 대부분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우리는 크든 작든 모든 조직들에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도 그렇다. 작게 보면 가족과 교우관계에서 넓게 보면 국가까지 우리는 어떻게보면 폐쇄적인 조직에 들어가 있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이야기한 어떤 '희생양'을 찾는 것은 아주 작은 조직에서부터 크게 보아 전 국가적인 사건에까지 이어진다. 이 '희생양'이 돌고도는 것, 이것은 크기를 막론하고 어떤 조직에서든 반복되며, 이것에는 연합적군에게 내부논리가 있었던 것처럼 나름의 내부의 논리가 있다. (이 부분을 놓고 이들의 사건을 일종의 '이지메'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까봐 하는 얘긴데, 사실 '이지메'와 크게 연관은 없다.)

물론 저자는(그리고 나는) 이들이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살아남은 이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으며, 그 책임은 무엇으로도 면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과거의 사건에서 어떻게든 교훈을 얻어야만 한다. 쉬운 결론으로 끝내는 것은 쉬운 반복을 초래할 뿐이다. 이들의 논리의 뿌리, 그리고 사건 당시의 이들의 심리적인 상황을 헤집는 것을 통해 앞으로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저자는 한편으로 그래서 이들의 사건 이후의 '자기 비판' 혹은 '전향'을 주의깊게 볼 것을 조언한다. 우리는 그것을 일종의 '반성'으로 받아들이지만, 그 '자기비판' 역시 이들의 내부논리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문제이며 외부에서 보는 '반성'과 다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먼저 인간에 대한 애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저자의 논의가 힘을 얻는 것은 무엇보다도 저자의 어떤 태도에 있다.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이들이 마지막 투쟁을 벌였던 길을 뒤늦게 돌아보며 안타까움과 동정과 경이로움과 희생자에 대한 슬픔과 같은 어떤 복잡한 심상에 젖는다. 이들의 시작은 더 좋은 세상으로의 변화를 향한 순수한 갈망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변화를 꿈꾸며 하루하루를 산다. 우리도 아마 그다지 다르지 않다.

이론 때문에 죽인 건지, 죽이고 나서 이론으로 정당화한 건지 그들도 구분이 안 가는 것 같다. (···) 이제 신좌파는 좌절할 수밖에 없다. 운동은 결국 그들이 이끌어 가고자 했던 방향과 반대쪽으로 나아갈 것이다.
- 마쓰모토 세이초

객관적 사실은 동지를 죽였다는 것이며. 동지의 눈에 비쳤을 '괴물'의 모습이야 말로 우리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혁명적이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그 모습이 진정한 자신의 모습임을 인정하고, 그 모습을 부정하고, 부정을 끝까지 완수했을 때 비로소 총괄의 첫걸음이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 반도 구니오(연합적군의 지도부), 감옥에서 나가타 히로코에게 쓴 편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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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3.07.23 21: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글을 읽다가 오래전 우연히 티비에서 본 어떤 장면과 나래이션이 떠올랐는데요 제가 본 건 산장여주인을 인질로 삼고 테러리스트들과 경찰이 대치한 상황들이었어요.지금도 분명히 기억하는건 일본에서 실제로 일어났고 당시 일본인 대다수가 티비를 통해 그방송을 시청했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는 말이었어요. 방송을 제대로 본 게 아니어서 그들이 연합적군파라는것도 몰랐고 그뒤론 관심을 두지도 않아서 까맣게 잊고 있었거든요. 오늘에서야 그 사건의 정확한 진상을 알게된거죠.

    맥거핀님의 리뷰를 읽고 적군파에 대해 좀 찾아서 읽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런일이 있었던거군요..

    적군파 여성리더중에 시게노부 후사코라는 사람이 있었나본데 그사람이 쓴 책중에 '사과나무아래서 너를 낳으려했다' 라는 책이 있더군요.

    인터넷서점들어가 발췌된 부분들을 읽어봤는데 왜 그들이 폭력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는지(폭력을 싫어하고 누군가를 죽인다는 걸 끔찍해하면서도) 그런 이유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더라구요.

    그 내부논리라는게 뭘까 싶어요.. 누구든지 한 끝 잘못 들어가면 괴물과 만나게되는 바로 그런 심연일까 싶기도합니다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3.07.25 00: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책에도 어느정도 그런 내용이 나오지만, 당시의 일본인들은 누구나 알고 있고,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지존파' 사건처럼요.) 동 시대의 일본인들에게 어떤 정신적인 트라우마를 주었달까요. 아마도 이 사건을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현대의 일본사를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라 봅니다.

      아무튼 폭력을 사용한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당시의 학생들에게 일종의 매력적인 조건으로 여겨지기도 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기도 합니다. 세계혁명을 앞장서서 이끄는 군사가 된다는 것이 일종의 매력적인 이미지로서 받아들여졌다는 거죠. 단지 일본 내에서의 투쟁에 머물지 않고, 전세계적인 혁명을 선도한다..뭔가 매력적으로 느껴졌을 것 같기도 합니다.

      아무튼 안타까운 일임은 분명합니다. 위에도 썼지만, 고작 평균나이 23.3세의 젊은이들이었으니까요. 아사마 산장에서 최후에 투쟁을 벌인 멤버에는 16세 소년이 포함되어 있기도 했구요. 나는 그 나이 때 무엇을 했을까, 혹은 현재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을 생각해보면 그들이 가졌던 어떤 확신들이 놀랍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 나이니까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요.

      시게노부 후사코의 책이 우리나라에 나와있을 줄은 몰랐군요. 아마 거의 죽을 때까지 감옥에 있어야 하는 걸로 아는데..(이 책에 보면 감옥에 있다가 '교환'되어 외국으로 탈출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외국 어디인가에 살아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나오는데, 그것을 보면서 마음이 복잡해지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