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

Recent Comment»

« 2024/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오늘의 뉴스

The Book | 2015. 1. 28. 00:46 | Posted by 맥거핀.

 


눈먼 자들의 국가

저자
김애란, 김행숙, 김연수, 박민규, 진은영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4-10-06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진실에 대해서는 응답을 해야 하고 타인의 슬픔에는 예의를 갖추어...
가격비교

 

 

1.

이미 그분에게는 망각된 일인지도 모른다. 최근에 있었던 박근혜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는 '경제'였고, 그것은 총 42번 언급되었다. 그 뒤로 많이 나온 단어는 '국민'으로 총 29번 언급되었으며, '경제'와 맥락을 같이 하는 '성장'이라는 단어는 16번, '개혁'이나 '혁신'은 통틀어 24번 사용되며 그 뒤를 따랐다. 반면 작년에 그분이 또르르 눈물을 흘렸던 어떤 담화에서 계속 반복되어 언급되었지만, 이번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은 단어도 있다. '세월호', '희생', '위로'와 같은 낱말들. 박근혜 대통령의 원고 위에서만 무엇인가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제는 적어도 방송과 신문은 세월호를 '효과적으로' 제거한 것 같다. 굳이 시간을 들여 찾아보지 않는 한 언론에서 세월호와 관련된 언급을 보기는 힘들다. 있더라도 특별조사를 하는지 안하는지 모를, 인양을 하는지 안하지는 모를 알 수 없는 뉴스 뿐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정부와 언론은 사람들에게 이에 대한 어떤 피로감을 심는 데 성공한 것 같다. 그것은 제거되었거나 다른 어떤 것으로 효과적으로 대체된 것처럼 보인다. 그 사라져버리거나 대체된 단어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반면 그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목소리들이 있다. 책 <눈먼 자들의 국가>.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 사회학자, 언론학자, 정신분석학자, 정치철학자 등등이 쓴 12개의 글. 정확히 세보지는 않았지만, 이들의 글들에서 수차례 반복되는 단어들이 있다. 세월호, 구조, 고통, 변화, 희망, 진상규명, 진실, 거짓말, 신자유주의, 국가, 정부, 시민, 그리고 우리, 우리, 우리, 그러니까 살아남은 자들. 모두들 동일한 시각에 같은 사건을 보았지만, 목소리는 약간씩 다르다. 누군가는 죽은 자들을 애도하고, 누군가는 분노하며, 누군가는 부조리를 말하고, 누군가는 살아남은 자의 윤리를 묻는다. 혹은 누군가는 과거로 돌아가 우리를 지배하는 공포나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에 대해 말하며, 다른 누군가는 미래를 보며, 사건 이후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상상력과 새로운 행동의 결단을 촉구한다. 아무튼 어쨌든 간에 이들은 어떻게든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이야기하려 애쓴다.

 

여기에는 어떤 간극이 있다. 그것은 정확히 계량하고자 한다면 물론 내가 가늠할 수 없는 간극이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나에게 그것은 단지 물리적인 간극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나는 이 책을 주로 TV뉴스들을 틀어놓고 보았으니까. 그러니까 여기에는 어떤 물리적인 간극이 있었다. 문자와 소리의 간극. 아주 간단하게 말해서 세월호를 이야기하는 책과 세월호를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 TV. 두 개의 다른 나라에서 들려 오는 두 개의 다른 이야기. 처음에는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것들은 점점 연결되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그것은 어쩌면 세월호 이후의 '살아남은 자들의 세계'라고 불러도 될만한 것이었다.

 

2.

문제는 소설이 비현실적이라고 느끼게 만드는 새로운 상식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돌이킬 수 없는 변화는 그런 것이 아닐까. 적어도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변화는 그런 것들이다. "더이상은 공동체가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이제 각자 살아 남는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다." - 배명훈 '누가 답해야 할까?' p.110

 

사실 신자유주의국가는 그 내부에 죽음의 그림자를 내포하고 있는 불길한 체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 의한, 만인의 죽음을 방지하기 위해 폭력을 독점한 국가가 애당초 그러했다. 국가의 배후에는 늘 죽음의 그림자가 어슬렁거린다. (중략) 그런데 신자유/신보수주의시대 국가권력/폭력의 불길함은 세월호에서 전혀 다른 양상으로 확인된다. 권력을 독점한 국가가 그 권력을 공익을 위해 제대로 행사하지 않는 공백상태가 초래하는 치명적 폭력이다. - 전규찬 '영원한 재난상태: 세월호 이후의 시간은 없다' p.160 

 

각자 살아 남는 것. 다른 말로 하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이 투쟁은 세월호 이후에 새로운 방식으로 새롭게 생겨난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그것은 신자유주의라는 국가를 선택한 이후부터 우리에게 예견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세월호와 전혀 관계없어 보이지만, 이런 풍경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1월 21일자 JTBC 뉴스. 포상금을 노리는 전문 파파라치들과 이들을 양성하는 학원의 실태. 만인의 만인에 대한 감시의 한 형태. 실제로 포상금을 받으며 활동하는 것은 파파라치들과 파파라치 학원이지만, 이들의 뒤에는 이들을 실질적으로 양성하고 있는 정부와 지자체가 있다. 각종 포상항목(실제로 1100가지가 넘는 항목이 있다)과 포상액이 지난 몇년간 대폭 늘었기 때문이다. 정부와 지자체가 행해야하는 정당한 감시는 공백상태이며, 이 임무는 개인에게 '효과적으로' 이양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감시와 고발은 파파라치가 아닌 우리에게도 더이상 낯선 것이 아니다. 요즘의 뉴스들은 거의 '괴물판독기'라 불러도 될 만하다. 하루가 멀다하고 괴물들이 걸러져 나온다. 누군가는 땅콩을 집어 던졌고, 누군가는 어린아이에게 폭력을 휘둘렀으며, 누군가는 다른 사람을 무릎 꿇렸으며, 누군가는 자신의 딸을 성추행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수많은 각종 다양한 형태의 괴물들이 하루가 다르게 보도되고, 신상이 공개되고, 여론의 날서린 비판을 받는다. 괴물의 주변에는 그들을 늘 감시할 눈이 있고, 그 감시는 꽤나 효과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다. 매일매일 이렇게 수많은 괴물을 걸러내는데, 왜 괴물들은 도무지 줄지 않는걸까. 아니 도리어 왜 그 숫자를 더 늘려가는 것처럼 보일까. 괴물을 걸러내는 우리의 방법론이 틀린 것일까. 아니면 줄어드는 만큼 새로운 괴물들이 늘 양산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괴물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물론 괴물들은 아무데서도 나오지 않는다. 감시를 행하고 괴물을 걸러내던 누군가가, 어느날 괴물이 될 뿐이다. 표창원의 말대로 우리 사회는 '공범들의 도시'가 되어가고 있다. 자신의 죄를 감형받기 위해 공범의 더 큰 죄를 폭로하는 범인처럼 우리는 타인의 죄를 밝혀내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래야만 살아남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빠르게 학습한다. 자신을 정상처럼 보이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타인을 더 괴물처럼 보이게 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안다. 세월호는 단지 그것을 더 강화시켰거나, 어떤 압축된 이미지로 보여줬을 뿐이다. 타인을 살리려 애쓴 이들은 죽게 하고, 타인보다 어떻게든 빨리 나오려고 애쓴 이들을 살리는 이미지로 말이다. 그리고 침몰하는 배에서 국가는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있으라고 한 후 어떻게든 살아 나오려고 애쓴 이들을 유일하게 구조했다. 

 

 

3.

'세월호'다. 대구 지하철 참사와 용산 참사를 잇는 것은 물론이고, 쌍용자동차와 삼성반도체, 밀양, 강정 등으로 표출된 구조적 재난과도 연속되는 현실이다.  - 전규찬 '영원한 재난상태: 세월호 이후의 시간은 없다' p.162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다른 곳에서 성공했다. 대안 부재가 합쳐진 결과 사유화가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진행된 곳은 바로 사회였다. 오히려 사유화가 가장 성공적이었던 동시에 아직 이 사유화를 돌려놓을 대안이 분명치 않은 영역은 바로 주체성과 사회적 관계다. 신자유주의는 우리의 거의 모든 것을 사유화했다. (중략) 사적으로 극히 유능하도록 요구받지만 공적인 능력은 완전히 결여된 주체성을 생산하고 그에 고유한 사회적 관계를 산출한다는 의미에서 신자유주의란 '정치'가 '경제'에 의해 대체되는 기획일 뿐만 아니라 보다 본질적으로는 '경제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통치의 패러다임"이기도 하다. - 홍철기 '세월호 참사로부터 무엇을 보고 들을 것인가?' p.206~207

 

지난 1월 20일은 용산참사가 일어난지 6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6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 일로 쫓겨난 23명의 철거민 중 10명은 단순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고, 6명은 작은 가게를 다시 열었지만, 수입이 훨씬 줄어들었으며, 7명은 아예 직장조차 없음을 뉴스는 말해준다. 어쩌면 이러한 사실보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철거된 남일당 건물 자리가 여전히 공터로 남아 단지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부분이다. 무엇을 위해서 그들은 그 건물에서 죽음에 이르러야만 했는가. 아무 것도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용산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고, 사람들은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성공했다. 철거민들에게 공포감을 주며 그 건물을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심어 주었고, 사람들의 공적 능력을 제거하였으며, 그들 삶의 많은 것을 경제라는 화두로 대체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우리의 거의 모든 것을 경제가 지배한다. 오늘날의 뉴스에서 사람들을 진정으로 화나게 하는 것은 괴물들의 소식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은 단지 유흥거리에 불과하고, 보다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것은 연말정산, 세금의 확대, 담배값 인상과 같은 것들이다. 세월호라고 하면 보상을 떠올리고, 세월호 유족이라고 하면 보상을 받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사람들을 연상한다. IS에 잡혀있는 일본인 인질의 굳은 얼굴 뒤에 숨겨진 공포를 보기보다는 그를 돌려받기 위해 IS가 제시한 보상금이 얼마인지를 궁금해하며, 설마 우리나라도 저런 일은 없겠지, 있더라도 (내 돈이 들어간) 세금은 못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다른 건 다 필요없고, 경제를 살리는 데에만 힘을 쏟겠다는 경제 대통령을 뽑고, 그 댓가로 기꺼이 대통령은 '경제'라는 낱말을 42번, '성장'이라는 단어를 '16번', '개혁'이나 '혁신'이라는 단어를 24번 말해준다. 우리는 그 말을 듣는 것을 선택했다. '세월호'나 '희생'이나 '위로'라는 낱말을 듣는 대신 말이다. 우리는 분명히 그것을 선택했다.

 

4.

아무도 이것에서 달아날 수 없다. 자책과 죄책의 차원이 거슬린다면 이렇게라도 말할 수 있다. 우리 중에 누구는 아닐까. 우리 중 누가, 문득 일상이 부러진 채로 거리에서 새까만 투사가 되어 살 일을 예측하고 살까. (중략) 아무도 이것에서 달아날 수 없다. - 황정은 '가까스로, 인간' p.95~96

 

안티고네는, 국가의 반역자로 낙인찍혀 장례가 불허된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신 위에 흙과 제주(祭酒)를 뿌리고, 그에 대한 형벌로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녀는 폴리네이케스의 죽음에 대한 애도와 장례가 금지된 상황에서, 이 마땅한 일들을 수행하는 것이 자신의 윤리적 임무라고 생각한다. - 김서영 '정신분석적 행위, 그 윤리적 필연을 살아내야 할 시간' p.181

 

우리는 아니 나는, 분명히 그것을 선택했던 것 같다. 다른 말을 듣기를 말이다. 망각을 말이다. 사건 초기 열심히 뉴스를 보던 나는 어느틈엔가 뉴스를 점점 뜸하게 보게 되었다. 아니 도리어 그로부터 며칠 후 예정된 외국 여행 일정이 다가왔을 때는 조금 안도했었던 것도 같다. 한 십여 일 외국에서 있다 보면 그래도 조금은 조용해지겠지. 모두들 금방 잊으니까. 아니, 나야말로 금방 잊고 싶으니까. 그 때의 나는 무엇 때문에 뉴스를 점점 멀리하게 되었던가. 돌이켜보면 사건 당시에 TV를 지켜보고 있던 나를 지배하고 있던 정서는 '공포'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공포는 사고 그 자체에 대한 공포였다기보다는 믿기지 않는 부조리한 현장을 보고 있는 사람이 가지는 공포였다.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배가 침몰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었다. 바다에 떠 있는 배는 당연히 언젠가 바다에 가라앉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온갖 부조리의 현장이었다. 배에 그대로 남아있던 누구도 구조되지 않았는데, 스스로 탈출한 배의 운전을 담당한 사람들은 구조되었고, 국가는 민간업체에 구조를 맡겼지만, 민간업체는 구조는 국가의 일이라 말하였다. 배의 운항을 맡은 사람들은 전문가가 아니었고, 낡은 배는 무리한 증축과 구조변경으로 망가질대로 망가진 상태였고, 재난신호는 엉뚱한 곳에 접수되었으며, 대통령은 사고 당시 몇 시간 동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밝히지 않은 채, 책임을 물어 해경을 해체하였다. 책 속의 박민규의 말대로, 혹은 박민규의 소설 속 풍경대로 그것은 온갖 부조리의 현장이었다. 아니 모든 것이 부조리했기 때문에 오히려 부조리한 모든 것이 당연해보이는 이상한 현장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게 무서웠다. 그런 나라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무서웠고, 저런 부조리의 한복판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 어쩔 수 없이 앞으로도 살아가야 하며, 어쩌면 저들과 같은 처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끝내 눈을 감지 못할 아이들을 생각하며 눈을 뜨는 것(박민규)이거나, 권력에 기대지 않고 망각과 무지와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신의 힘으로 나아지는 길임을 자각하는 것(김연수)기도 하며, 국가라는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사회를 상상하는 것(황종연)이기도 하고, 윤리적 임무를 가지고 오빠를 애도했던 안티고네가 되는 것(김서영)이거나 재난의 시대에 맞서 글을 쓰는 것(전규찬)이기도 하다. 이것들은 약간씩 다른 맥락을 가지지만, 적어도 한 가지의 공통점은 가진다. 그것은, 이러한 것들이 공포에 매몰되어 얼어붙거나, 주입된 공포를 잊기 위해서 달콤한 망각과 은폐의 유혹에 빠져 '경제'와 '성장'과 '혁신'만이 있는 공범들의 사회로 기꺼이 돌아가려 했던 자신을 돌아보라는 메시지라는 점이며, 동시에 생각만큼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공포의 이면에 있는 것을 직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니까. 

 

물론 누군가는 이것에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조금 더 실제적인 무엇, 실체가 보이는 어떤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는 있다. 이 글들은 긴급한 필요에 의해 쓰여졌다는 것. 문제에 대한 답을 주기 위해 쓰여졌다기 보다는, 어떤 질문을 해야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필요한 질문을 생각해보기 위해서 쓰여졌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질문이 정리되면 이제 그 질문에 따라서 답을 그러모으는 과정이 진행될 것이니 말이다. 시인은 시를 쓸 것이고, 소설가는 이야기를 시작할 것이며, 언론학자는 언론의 책임을 생각할 것이고, 정치철학자는 새로운 정치체계를 구상할 것이며, 또 우리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나름의 답을 찾을 것이다. 그러나 굳이 그 사실을 되새겨보지 않더라도 우리는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은 안다. 모든 구체성은 상상에서 시작된다는 것, 아무것도 상상해보지 않는 자에게 어떤 답을 찾을 가능성도 주어질 수 없다는 점을 말이다. 눈먼 자들은 눈뜬 세계를 상상하지 않고서는 눈을 뜰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깨닫지 못한다. 상상하지 않는 것은 공포에 사로잡히는 것이며, 너무도 쉽게 스스로 공범으로서의 삶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책은 그것을 너무나도 아프게 말해준다.   

 

 

* 세월호의 빠른 인양과 정확한 진상규명을 촉구합니다.

 

 

 

 

 

 

 

 

 

'The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찜찜해  (2) 2015.02.16
기억의 재건  (0) 2015.02.09
끝나지 않는 실험  (2) 2015.01.14
나는 원래 눈물이 없었다  (4) 2014.12.02
문학이 할 수 있는 것, 혹은 해야만 하는 것  (2) 2014.11.20
:

<국제시장> 잡담

Ending Credit | 2015. 1. 20. 18:05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1.

윤제균의 <국제시장>을 보았다. 이미 여러모로 말이 많은 영화이고, 영화 내외부를 둘러싸고 상당히 구체적이고 풍부한 논의들이 많이 되었기 때문에 더 붙일 말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만 영화를 보며 스쳐 지나갔던 몇몇 감상들을 짤막하게 이야기하고 싶다.

 

2.

영화가 천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여기저기에 윤제균 감독의 인터뷰가 많이 실리고 있다. 윤제균 감독은 여러 매체에 거의 비슷한 내용의 소감을 밝히고 있는데, 그 하나는 이 영화를 둘러싼 정치적 이념 논쟁이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다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이 영화를 만들게 된 동기와 관련된 것이다. 그 인터뷰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윤제균 감독이 이야기하는 이 영화를 만든 동기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아버지 세대에 보내는 헌사, 다른 하나는 세대 간의 소통과 화합을 위한 것이다.

 

3.

나는 한 가지에는 약간은 동의하지만, 다른 하나에는 조금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먼저 이 영화가 아버지 세대에 보내는 헌사라는 점. 솔직히 나는 영화를 보면서 왜 이런 이야기가 이제서야 나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간 우리 근현대사의 어떤 지점들을 되돌아보는 이야기는 종종 있었다. 그러나 그 상당수의 영화들이 어떤 정치적 태도를 표면적으로 유지하거나, 특정의 사건을 통해 내부 전체를 깊숙이 들어가 조망하려고 노력하는 모양새였다면, 이 영화처럼 적어도 표면적으로 정치적 태도를 탈각한 것처럼 보이고, 특정의 사건이 아닌 어떤 세대 전체를 아우르는 보편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영화는 많지 않았다.

 

4.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편할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이 영화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입에 달고 사시는, 수십 년 동안 반새누리(반한나라)라는 기조를 지켜오신 우리 아버지를 영화의 거의 시작부터 끝까지 울게 만들었나. 그러니까 적어도 이 영화에는 반새누리이든, 혹은 반새정치이든, 혹은 다른 무엇이든 상관없이 눈물을 짓게 만드는 어떤 지점들이 있다. 그리고 그 지점들은 적어도 영화 안에서는 어떤 정치적인 구호나 이념과 조금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며, 나름의 충실한 재현과 적절한 위로로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독일에서 광부로 고생하는 덕수(황정민)의 모습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제다에서 건설노동자로 일했던 우리 아버지가 자신의 모습을 겹쳐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런 부분을 칭찬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5.

그러나 그것이 흔히 논의된 대로 정치성을 완전히 탈색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그것이 '표면적으로'라는 표현을 쓸 수 밖에 없는 이유이자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일텐데, 이 영화의 중간중간 비어있는 수많은 지점들을 채우고 있는, 혹은 채우려는 욕망을 보이는 다른 무엇인가가 조심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정치적'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무엇인가들이기 때문이다.

 

6.

이 영화는 크게 네 가지의 사건을 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한국전쟁 중의 흥남철수, 광부들의 파독, 베트남 전쟁, 이산가족찾기가 그것이다. 일각에서는 이 사건들의 선택이 부적절했다고 말한다. 그 이면에 있는 독재정권이나, 그에 맞선 반독재투쟁과 같은 것을 그리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물론 반론도 있다. 덕수의 삶에 충실하고자 하였으므로 이 사건들이 중심이 되었다는 반론이 그것이다. 나는 이 반론도 충분히 가능한 답변이라고 생각하며, 또한 이 사건들이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국면이었음을 부정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7.

다만 의아한 것은 이 사건을 그리는 방식인데, 이 사건은 덕수를 축으로 하여 통과하는 듯이 보이지만, 문득문득 그 축을 벗어나는 지점이 있으며, 그 벗어나는 지점들이 어떤 정치적인 함의를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초반의 흥남철수 장면에서 덕수가 도저히 알 수 없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미군 사령관(아마도 맥아더인듯한)에게 피란민들을 배에 실어달라고 호소하는 한국인 통역관의 모습과 결국 미군 사령관이 무기를 버리고 배에 피란민들을 싣기로 결정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이 장면은 덕수의 눈으로 절대 볼 수 없는 장면이지만, 필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후에 어떤 장면을 보여주기 위함이고, 그 장면은 베트남전에서 자신들을 태워달라고 간청하는 베트남 주민들의 요청을 결국 거부하다가 태우고 마는 덕수의 모습과 정확히 대구를 이룬다.

 

그러니까 이 장면은 오로지 어떤 모습을 연상시키기 위해 존재한다(스토리 상으로는 도무지 필요가 없다). 그 모습이란 성장한 한국이라는 국가로 표상된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겨우 살아남고자 애썼던 처지에서 이제는 누군가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위치. 아니 조금 덜 삐딱하게 말하자면 이제는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는 위치. 이러한 것은 기브 미 쪼꼬렛을 외쳤던 어린 덕수의 모습과 이제 베트남 소년에게 초컬릿을 건네주는 덕수의 모습과 같은 장면(그리고 이 장면에서 마치 필요하다는 듯이 소년은 덕수에게 한국인이냐고 묻는다), 혹은 독일 광산에서 관리자 앞에 무릎을 꿇었던 영자(김윤진)와 외국노동자를 조롱하는 어린 학생을 훈계하는 덕수의 모습으로 다시 비슷하게 변주된다.

 

8.

그러니까 이 영화의 비어있는 어떤 장면들에서 그것을 채우기 위해 가끔 고개를 들이미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있다. 그것은 국가라는 이상한 녀석이다. 휴전 소식을 들으며, 국가가 힘이 약하니 자기들 맘대로 하는 것이라는 멘트, 혹은 정주영의 꿈을 비웃는 소년들과 결국 정주영의 꿈이 이루어졌다는 신문기사, 혹은 노년의 덕수와 영자가 대화를 하는 풍경에서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부산의 (예전과 비교되는) 발전된 풍경과 같은 것 말이다(그들은 왜 굳이 옥상에 올라가서 이 대화를 하는 것일까, 혹은 감독은 왜 굳이 나비를 통하여 이 풍광을 돌려서 보여주는 것일까).

 

9.

물론 가장 의미심장하고도, 웃긴 장면은 대통령도 감명 깊게 보았다는 그 장면일 것이다. 덕수에게 베트남전에 가지 말라고 호소하는 영자와 이것이 내 팔자니 어쩔 수 없다는 (약간은 이상한) 항변을 하는 덕수의 언쟁을 봉합하는 국기게양식. 이 장면을 일종의 풍자라고 보는 의견도 있지만, 나에게는 앞에서 이야기한 장면들과 맞물려 이 장면은 조금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일단 이 영화는 장면들이 기능적으로 분할되어 있다. 즉 웃기고자 하는 장면들이 있고, 울리고자 하는 장면들이 있으며, 그것은 철저하게 구분된다. 즉 음악이나 분위기로 이제부터 울리겠습니다, 혹은 이제부터 웃기겠습니다,라고 이 영화는 장면마다 선언하고 시작한다. 그런 구분으로 보면 이 장면은 명백히 웃기고자하는 장면이 아니며, 도리어 구조상으로 볼 때 갈등이 최고조되는 시점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그보다 중요한 점은 이 장면이 이 영화를 통틀어 유일하게 덕수에게 그의 삶에 대해서 묻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 덕수의 머리 속에는 오로지 남은 가족을 지켜내라는 아버지의 말씀 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거기에 자신의 삶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어 보인다(그의 어떤 '욕망'이 드러나는 장면은 고시학원에서 도강을 하다가 쫓겨나는 장면밖에 없다). 그런데 아무도 하지 않고 제기될 틈도 없어 보였던 그 질문을 영자가 한다. 여기에 당신의 삶은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이때 울려퍼지는 애국가라니. 왜 그는 그 질문에 답변하지 못한채, 여전히 비어있는 무엇인가로 남겨져 있는가. 이 영화에서 덕수에게 부여한 위치는 무엇인가. 사건들을 관통하여 보여주기 위한 투시경일뿐인가(예를 들어 이 영화와 비교되는 저메키스의 <포레스트 검프>에서 검프가 지능지수가 낮은, 그러므로 사건들을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였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말이다. 물론 그런 의미에서 비슷하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10.

그러니까 나는 이 영화가 헌사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아버지 세대들이 악조건 속에서 엄청난 고생을 했으며, 적어도 그것이 자식 세대들, 혹은 가족을 위한 것이라고 말해진다면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 자꾸 슬며시 고개를 들이미는 녀석이 있다. 그것은 국가라는 녀석이며, 국가 발전이라는 환상이다. 나는 이것이 아버지 세대가 이뤄낸 무엇을 자꾸 국가가 가로채는 것처럼 느껴진다. 가족이 가족 이상의 가족주의가 될 때, 혹은 그 가족주의가 하나의 국가라고 말해질 때, 실제의 가족들이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든다. 그 고리를 어떻게 단절시킬 수 있을까. (그 가능성의 어떤 단초를 <인터스텔라>나 <설국열차>에서 보았다.)

 

11.

그러니까 마지막의 실제 가족은 이상한 위치에 서 있다. 나는 이 영화를 통틀어 가장 이상한 장면은 이 장면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아버지(의 유령)를 만나고 있는 덕수와 분리된 가족들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윤제균의 컷이다. 자식들은 아무도 덕수에게 아버지가 우리를 위해 고생한 것을 안다, 그러니 고맙고 자랑스럽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에게 그렇게 말해주는 것은 그가 오래전 헤어진 아버지의 환영이다. 그런데 도대체 이 '아버지의 형상으로 나타난 환영'은 누구인가(무엇인가). 질문을 이렇게 바꿔볼 수도 있겠다. 지금 우리 아버지 세대들에게 그런 위로를 건네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그것이 사실은 환영(환상)에 불과한 위로라고 해도 말이다.

 

12.

그 환영이 국가라는 아버지이다,라고 도식적으로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 장면은 여러모로 아쉽고 미심쩍어 보인다. 왜냐하면 앞에서 윤제균 감독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이 영화가 세대 간의 화합과 소통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화합과 소통의 가장 첫걸음은 상대방에 대한 이해이며, 이것을 영화로 말한다면 적어도 상대방을 이해할 여지가 있는 무엇인가로 그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의 덕수는 이해할 여지가 있지만, 자식들에게는 아무런 이해의 여지도 없다. 이 영화에서의 젊은 세대는 내가 보기에는 (흔히 말하는) 그저 기능적인 나쁜 캐릭터이다. 그들은 괜히 외국인노동자에게 시비를 걸고, 늙고 게다가 아픈 부모에게 자식을 맡기고 놀러가고, 부모의 이야기는 전혀 귀담아 듣지 않는다. 이런 캐릭터들에게 어디 이해할 여지가 있다는 말인가.

 

(덧붙이자면, 물론 이는 영화가 어떤 것을 선택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이산가족상봉을 그린 후 현재로 건너뛰는 선택 말이다. 덕수와 자식들이 단절된 것은 이 시기의 어떤 것들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 시기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하지 않고 오로지 소통이 단절된 현재를 보여줄 뿐이다. 이도 물론 하나의 정치적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3이라기보다는 덧.

나는 그래서 윤제균 감독의 인터뷰가 솔직하지 못했다라기 보다는 사실 조금 비겁하다고 생각한다. 영화가 그래야 더 재미있고, 더 관객이 많이 들잖아요,라고 말하면 안될 이유가 있는가. 우리 이제 그런 정도는 '익스큐즈'할 수 있는 쿨한 관객이잖아요. 이미 그렇게 말하는 게 당연한 세상이잖아요. (허지웅의 '정신승리하는 사회'라는 코멘트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말이다. 그의 그런 말은 적어도 영리한 멘트는 아니다. 그가 적어도 논란을 일으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고 항변한다면 말이다.)

 

 

 

- 2015년 1월, CGV 역곡

 

 

 

 

'Ending Credit'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폭스캐처, 베넷 밀러  (2) 2015.03.04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 매튜 본  (3) 2015.02.25
내일을 위한 시간, 다르덴 형제  (0) 2015.01.05
노골적인 영화들  (2) 2014.09.17
늦은 영화 감상기  (2) 2014.08.12
:

끝나지 않는 실험

The Book | 2015. 1. 14. 17:16 | Posted by 맥거핀.

 


정확한 사랑의 실험

저자
신형철 지음
출판사
마음산책 | 2014-10-01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마음산책에서 펴낸,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세 번째 책 27편 영화...
가격비교

 

 

신형철의 책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자주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단어가 있다. "그러나 정신적인 고통은 어떻게 정확히 되돌려줄 수 있을까."(p.70)"내가 정확히 동일한 고백을 동일한 사람에게 했다고 해도 나는 더 이상 스무 살 청춘이 아니고 이 카페는 예전과는 그 분위기가 달라져 있다."(p.86)"실로 지금 이 시대가 체념도 낙관도 모두 허용하지 않는 시대라면, 이 열차가 이상한 곳에 도착했기 때문에 우리는 정확한 현실 인식에 도착한 것일지도 모른다."(p.168) 그리고 그의 고백. "문학(글쓰기)의 근원적인 욕망 중 하나는 정확해지고 싶다는 욕망이다."(p.27) 이 '정확하다'는 것이 말하고자 하는 것.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글들에서 '정확'을 이야기하는 것은 조금 어긋난 것처럼도 보인다. 왜냐하면 이 글들은 영화라는 형식을 가진 어떤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고, 모든 이야기는 일단 창작자의 손을 떠나면 어떠한 수용자, 혹은 어떠한 해석자에게도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받아들여진다고 흔히 생각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영화를 자신의 느낌대로, 혹은 자신의 방식대로, 혹은 자신의 세계관대로 받아들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 그 이해가 적어도 공격적인 방식으로 재생산되지 않는다면, 누구도 그 나름의 이해나 해석에 대해서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것은 신형철도 잘 알고 있다("정답과 오답이 있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더 좋은 해석과 덜 좋은 해석은 있다."('책머리에') 이 '더 좋다'와 '덜 좋다'는 것.) 그럼에도 그가 이 '정확하다'라는 말을 책의 제목에까지 가져온 것은 두 가지와 관련된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이 '정확하다'는 말이 수식하는 것에 대해. 단적으로 말해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정확함'이란 정확한 해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포괄한 정확한 사랑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즉 작품에 대한 해석이란 작품에 대한 사랑의 하나의 형태임을 생각해 볼 때, 그가 말하는 것은 작품에 대한 해석 이상의 그에 대한 정확한 사랑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한 영화, 한 이야기를 보며 순간순간 그에 대해 반응한다. 주인공이 누군가에게 호의를 품을 때, 우리도 호의를 가지기도 하고,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을 때, 우리도 상처를 받고, 다른 누군가를 증오할 때, 우리도 누군가를 증오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반드시 일치하는 것만은 아니다. 주인공이 누군가를 증오하지만, 우리는 도리어 그 순간 주인공에게 연민을 느끼기도 하고, 주인공이 누군가에게 호의를 가질 때, 우리는 도리어 그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볼 때도 있다. 즉 이 증오나 호의나 상처는 주인공에게서 우리에게 그대로 투영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한 번은 우리 마음 속 어딘가에서 굴절되어 다르거나 비슷한 '무엇인가' 혹은 그 '무엇인가'들이 합쳐진 '거대한 무엇인가'를 만든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이 거대한 무엇인가'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것은 어디에서와서 어떻게 만들어져,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이 순간, 나를 그 자리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고 멍하게 만드는가. 이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모를 때 때로 고통스럽다. 신형철의 작업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야기를 보고 내 마음 속 어딘가에서 만들어진 이 거대한 무엇인가가 어떤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고, 어떻게 결합되어 있으며, 어떻게 분해될 수 있는지(혹은 분해가 불가능한 것인지)를 밝히는 일. 그것을 위해서 신형철이 가지고 있는 도구는 단 하나다. 그것은 섬세하고자 하는 것, 혹은 섬세해지기 위한 최대한의 노력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복잡하고 알 수 없는 것, 즉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고, 수고로움을 필요로 하는 것이며, 또한 시간과 반복을 필요로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는 말한다. "한 편의 영화를 영화관에서 대여섯 번 보고 나서 열 줄로 이루어진 단락 열네 개를 쓰고 나면 한 달이 갔다."('책머리에')) 많은 감상들이 '감동적이었다'라는 말로 뭉뚱그린 표현밖에 쓰지 못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그 '감동'이라는 녀석을 분해하여 들여다보는 것이 노력을 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적어도 그 노력을 시도해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것은 그가 해석자이고자 하기 때문에, 즉 그가 말한대로 해석이라는 '기술'을 가진 '비평가'이고자 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아마도 '정확하다'는 말을 책의 제목에 가장 처음 넣은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즉 그는 이것이 거의 비평가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비평은 함부로 말하지 않는 연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어쩌면 비평은 함부로 말하지 않기 위해 늘 작품을 앞에 세워두는 글쓰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책머리에') 즉 그에게 있어서 비평은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다르게 말하면 최대한 정확하게 말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며,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바 그대로 최대한 정확하게 언어로 풀어내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를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포인트는 '정확함'에 있지만, 또 한편으로 그것은 동시에 '노력'에도 있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의 말대로 "삶의 진실은 수학적 진리와는 달라서 100퍼센트 정확한 문장은 존재할 수 없을 것"(p.27)이고 문학은 '근사치'로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실험은 무엇을 알고자하는 노력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들은 일종의 실험이 된다. 정확해지고자 하는 실험 말이다.

 

이것이 그런 실험이라면 마지막으로 두 가지 정도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정확함'과 '실험' 사이에 있는 하나, 즉 무엇을 위한 실험인가라는 점. 그것은 물론 제목에 있는대로 '사랑'이다. 신형철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 책에서 견지하고 있는 자세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각 텍스트에 대한 애정이다. 그는 말한다. "조금도 애정을 느낄 수 없는 텍스트였다면, 대체로 그래왔듯이, 아무 것도 쓰지 않는 편을 택했을 것이다."(p.153) 실험이란 기본적으로 잔혹한 속성을 지니고 있지만, 이 실험이 잔혹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가 이 실험의 대상자들에게 계속 애정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며, 그 텍스트가 결국 그의 생각에는 의도한 바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 텍스트였어도, 그것을 섬세하게 바라보고자 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영화를 정확하게 바라보고자 하는 다른 어떤 노력들은 왜 거부감을 불러오는가. 예를 들어 영화를 일종의 커다란 시험지로 보고, 최선을 다해 정답을 찾아보고자 하는 노력같은 것. 시험의 모든 정답을 찾은 학생에게 시험지는 더 이상 아무 의미도 없으며, 그것은 곧 구겨져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운명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이 실험은 결국 끝나지 않는 실험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다시 아까의 문장을 그래도 가져온다면 "삶의 진실은 수학적 진리와는 달라서 100퍼센트 정확한 문장은 존재할 수 없을 것"(p.27)이기 때문이며, 문학은 '근사치'로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완벽한 정확함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의 말대로 어떠한 문학도, 혹은 비평도 완벽한 정확함으로 존재할 수 없다. (완벽한 정확함이 존재하는 순간, 그의 원본은 존재의 가치가 없기 때문에도 그렇다. 삶의 모사물인 문학, 작품의 모사물인 비평이 완전하다면 삶과 작품이 존재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나 정확하게 표현되지 못한 진실은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지만,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p.27) 이 책은 우리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노력한다. 내가 이 이야기를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는 우리들이 받는 고통 말이다. 이 책은 그런 책이다.

 

 

덧.

정확하게 말해서 책을 모두 읽지는 않았다. 중간에 보지 않은 영화에 대한 글은 건너 뛰었으므로 굳이 분량으로 말하자면 3분의 2정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보지 않은 영화에 대한 내용을 미리 아는 것을 피하고자 하는 의도였다기 보다는 그 반대에 가깝다. 영화를 보지 않으면 그의 글을 더 잘 이해할 수 없을까봐서였다. 단지 세심한 그의 글을 조금이라도 더 세심하게 보고 싶었다.

 

 

 

'The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억의 재건  (0) 2015.02.09
오늘의 뉴스  (0) 2015.01.28
나는 원래 눈물이 없었다  (4) 2014.12.02
문학이 할 수 있는 것, 혹은 해야만 하는 것  (2) 2014.11.20
겸손하지만 부러워하지 않는다  (0) 2014.11.03
:

내일을 위한 시간, 다르덴 형제

Ending Credit | 2015. 1. 5. 12:27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할 수 없는, 그렇지만 해야만 하는 선택을 보여주는 영화는 대체로 늘 어렵고 힘들다. 그렇지만 다르덴 형제의 신작 <내일을 위한 시간>은 이 힘든 선택을 직관적으로, 상당히 쉬운 문법으로 보여준다. 그러니까 이야기는 생각이 필요없을 정도로 간단하다. 산드라(마리옹 꼬티아르)는 병에서 회복한 후 복직을 희망하지만, 1000유로의 보너스와 자신의 복직 중에서 선택하여 투표하자는 회사의 결정에서, 자신을 선택하도록 회사 동료들을 설득해야만 한다. 월요일 투표를 앞둔 주말의 이틀 동안 말이다. 이 영화는 그런 산드라의 이틀을 그대로 따라가며 16명의 동료들을 차례로 만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게 다다(영화의 원제를 직역한 영어제목은 <Two Days One Night>이다). 별다른 부수적인 플롯도 없고, 별 그럴듯한 사건도 없다. 카메라는 토요일 오전부터, 투표가 이루어지는 월요일 오전까지 산드라를 집요하게 쫓아다닐 뿐이다.

 

언뜻 보면 이 선택은 당연한 선택처럼 보인다. 1000유로의 보너스와 회사동료의 복직 사이에서의 선택 말이다. 왜냐하면 현재 이러한 선택은 어디에서나,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처럼 프랑스의 작은 회사에서나, 혹은 글로벌한 대기업에서나 하다못해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의 복직 문제 같은 것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논리, 마치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선전되고, 받아들여지는 논리이기 때문이다(이 영화의 회사 동료들의 면면을 보면 유럽의 저소득층 노동자들이 당면한 현실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우리의 노동시장도 만만치 않다). 우리가 나쁜 놈들이거나, 악마라서 너희들을 자르는 것이 아니야. 누군가가 나가야만 나머지 모두에게 돌아가는 이익이 줄어들지 않거나, 회사가 지속될 수 있는데 어떡하겠니. 누군가는 나갈 수밖에 없어, 그러니까 원망하지마, 니가 다른 사람들보다 능력이 떨어지는데 어쩌니, 바로 그 논리. 즉 이 영화에서의 각 개인당 1000유로의 보너스는 앞으로 나갈 산드라의 월급을 미리 나누어 주는 것에 불과하다. 자본가의 이익은 어떠한 선택을 한다해도 그대로 유지된다. 다른 대다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딱한 것은 계속 안정제를 입 안에 털어넣으며, 어쩔 수 없이 동료들을 만나야만 하는 산드라만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선택을 강요당하는 동료들 모두가 그에 못지않게 딱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영화 속에 나온 말대로 이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며, 그들이 산드라에게 미안해할 이유, 혹은 그 반대로 산드라가 그들에게 미안해할 이유가 없다. 이것으로 인해 그 노동자들 누구도 아무도 실질적인 이득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그들의 노동의 양은 산드라가 빠진 만큼 늘어날 것이다. 그 보너스의 양만큼 말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아무도 이득을 보지 않는 이 선택은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계속 되풀이된다. 왜? 그것이 노동시장을 제어하는 데에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일종의 제로섬 게임이며, 제로섬 게임에서 참가자들은 결코 연합(연대)할 수 없다. 그리고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늘 분열하기를 바라며, 그들이 연대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들을 분열시키려고 애쓴다(영화 <카트>에서 마트 노동자들이 해고된 직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노동조합을 만드는 것, 그러니까 합치는 것이었으며, 자본가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그 주동자들을 회유하는 것, 그러니까 분열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이 노동자들의 연대에 대응하는 자본가들의 첫 번째 무기이자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그리고 그 무기는 언제나 힘을 발휘한다.

 

 

그러니까, 사실 이 영화는 일종의 작은 실험실이자, 거대한 사회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실험은 (사실 모든 실험들이 그렇듯) 잔혹하며, 실험 설계자는 여전히 실험실에서 가장 안락한 위치에 있다. 늘 딱한 것은 미로를 열심히 헤매야만 하는 흰색쥐들, 그러니까 실험 참가자일 뿐이다. 그러나 한탄만 하고 있다고 해서 나아질 것은 없다. 이 영화에는 (거의 실질적으로 보이는) 미로를 탈출할 몇 가지의 힌트가 있다. 마치 어떤 전략처럼 보이는 것들 말이다. 그 하나의 전략은 일대일로 얼굴을 마주 대하고 말하라는 것. 인간은 집단의 의견이라는 편한 울타리에 쉽게 숨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쉽게 잊어버리고 마는 존재이다. 예를 들어 몇 백만의 굶어죽는 아이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굶어죽어 가는 단 한 명의 아이의 사진을 보여주는 것이 늘 더 효과적이다. 아니 그보다는 굶어죽어 가는 아이를 눈 앞에 데려다 놓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이것은 인정에 호소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정이 아니라, 단지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돈 대신에 선택하여야 하는 것이 한 인간의 죽고사는 문제라는 것, 좋은 말이지만, 그 인간을 실제로 보기 전까지 우리는 그것을 쉽게 잊는다. 그것은 인간이 악해서가 아니라, 약해서 그렇다. 그러므로 그들은 묻는다. 산드라가 동료들을 만나게 되면 그들이 항상 산드라에게 묻는 질문. (나 외에) 너를 지지하는 사람은 누가 있지. 대체로 인간은 어디에서든 소수자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 누구나가 많은 쪽의 편에 서기를 원한다. 그것 또한 이들(그리고 우리)이 단지 약한 존재임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의 남편의 존재도 어쩌면 그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사실 이 영화에서 남편의 캐릭터는 보기에 따라서 다르게 보일 수 있다. 끊임없이 산드라에게 동료들을 만나도록 독려하는 산드라의 남편이라는 캐릭터는 좋게 볼 수도 있지만, 보는 이들을 짜증나게 만들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산드라가 영화의 내내 동료들을 만나는 것을 너무나 고통스러워하기 때문이다. 왜 남편이라는 작자는 그녀가 그런 고통을 감내하도록 하는 것일까. 나는 다르덴 형제가 분명히 이 문제를 생각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실 이 영화에서 남편이라는 캐릭터가 없어진다해도 영화의 전체 진행에는 큰 문제는 없기 때문이다. 다른 동료들을 남편이 같이 만나주는 것도 아니며, 항상 그녀 혼자 동료들을 찾아간다. 그저 산드라를 이혼한 싱글맘으로 설정해도 된다. 별 문제도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캐릭터가 필요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캐릭터가 없을 때를 실제로 상상해보는 것이다. 그럴 경우에 생기는 문제는 산드라가 훨씬 강인한 캐릭터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영화에서의 산드라를 결코 약한 캐릭터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자발적으로 그 고통을 감내할 만큼 강인해져서는 안된다고 다르덴 형제는 생각한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거의 대부분의 인간이 그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약하기 때문이다. 

 

다르덴 형제는 늘 그런 약한 인간을 이야기해 왔다. 겉으로는 무심한 듯 보이지만, 늘 시계추처럼 흔들리는 인간들을. 아니 인간이 아니라 카메라가 흔들린다고 말해야하나. 처음의 몇 장면들은 이것이 다르덴 형제의 영화임을 선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물의 곁에 바싹 달라붙어서 흔들리는 카메라, 아무런 배경 설명도 없이 갑자기 시작되어 관객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이야기. 다르덴 형제의 영화 속에서 마치 주인공의 실질적인 유일한 친구는 늘 그의 곁에 바싹 달라붙어 떨어질지 모르는 카메라처럼 보였다. 주인공이 흔들리면 카메라도 같이 흔들렸고, 주인공이 숨을 고를 때면 카메라도 같이 숨을 골라주었다. 이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도 카메라는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산드라의 곁에 붙어 있다. 산드라가 동료들을 만날 때, 동료들의 반응숏이 이 영화에서는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반응숏보다는 여전히 카메라는 묵묵히 동료들보다는 산드라를 더 오래 비추었고, 산드라가 실망감과 고통을 애써 감추며 차로 돌아올 때 카메라도 같이 차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런 카메라가 이제 마지막 장면에 이르렀을 때 약간 달라진다. 투표를 마친 후 회사를 걸어나가는 산드라를 카메라는 따라가지 않고 멈춰선 후 묵묵히 계속 걸어가는 산드라의 뒷모습을 지켜본다. 길게 말이다. 그리고 다르덴 형제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음악 없는 엔딩 크레딧이 이어진다.

 

그녀의 발걸음이 어땠을지, 그것은 영화를 본 이들의 몫으로 남겨둔다.   

 

 

 

- 2015년 1월, CGV 구로

 

 

 

 

'Ending Credit' 카테고리의 다른 글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 매튜 본  (3) 2015.02.25
<국제시장> 잡담  (2) 2015.01.20
노골적인 영화들  (2) 2014.09.17
늦은 영화 감상기  (2) 2014.08.12
기적과 시간 2  (2) 2014.06.27
:

나는 원래 눈물이 없었다

The Book | 2014. 12. 2. 19:00 | Posted by 맥거핀.

112263.1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지은이 스티븐 킹 (황금가지, 2012년)
상세보기



1.
이 소설의 프롤로그는 인상적이다. 그것은 "나는 원래 눈물이 없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여, "그 뒤로 이어진 모든 일들이, 끔찍했던 그 모든 일들이 그 눈물에서 시작됐으니 말이다."로 끝난다. 일단 이 프롤로그는 예고편의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무릇 모든 예고편의 목적이란, 본편을 보게 만드는 것. 우리는 그 눈물이 없는 인간이, 눈물로 시작하여 보게 되는 끔찍했던 모든 일들이 무엇인지, 꽤나 궁금해지게 된다. 그리고 동시에 이 프롤로그는 한 일화를 통해 주인공이 어떤 인간인지 독자에게 각인시킨다. 부모님 장례 때도 울지 않은 고등학교에서 성인 영어반을 가르치는 교사 제이크 에핑. 그가 어느날 수강생들에게 낸 작문 리포트 주제는 '내 인생이 바뀐 날'이었다. 어쩌면 아마도 그런 주제는 내는 사람에게도, 그리고 쓰는 사람에게도 그렇게 좋은 주제는 아닐지도 모른다. 인생이 동전처럼 뒤집히려는 기로에 서 있을 때, 인간이 아무리 어떤 애를 써도, 지금이 그런 순간이라고 알 수 있을까. 그것을 돌아보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누구는 임신한 십 대 조카를 거두어 먹인 이모 이야기를 썼고, 또 누구는 용기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었던 전우에 얽힌 감동적인 이야기를 썼다. 그리고 그 중의 한 리포트는 그런 리포트를 읽는 일이 가슴뭉클한 일이기는 하지만, 끔찍하고 사람 진을 빼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이 제이크 에핑을 울게 만들고 글 위로 눈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눈가를 훔쳐가며 한 군데도 수정하는 일이 없이 결국 A+를 주게 만들었다. 그 리포트는 그가 '정규 교육이 가능한 정신지체인'보다 손톱만큼 낫다고 생각했던, 아이들에게 두꺼비 해리라고 불리는, 그러면서도 아이들을 혼내는 일 한 번 없는 고등학교 수위 해리 더닝이 쓴 것이었다. 그 리포트는 이렇게 시작했다. "어떤 날이 아니라 어떤 밤이었다. 내 인생이 바뀐 것은 아버지가 우리 어머니와 두 형제를 주기고 나를 심하게 다치게 만든 밤이었다. 여동생도 심하게 다쳐서 혼수상태가 됐다. 여동생은 깨어나지 못하고 3년 만에 주겄다. 이름은 엘렌이었고, 내가 정말로 사랑했는데. 꼿을 따서 꼿병에 담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는데." 

스티븐 킹의 소설 <11/22/63> 얘기다.

2. 
그러니까 이 소설은 인생이 뒤집히려는 기로에 서 있는 사람의 이야기이고, 동시에 이미 뒤집힌 사람의 기록 - 다시 말해서 해리 더닝의 기록과 같은 의미를 담은, 제이크 에핑의 기록("그 뒤로 이어진 모든 일들이...")이기도 하며, 또 한편으로는 착한 사람이 옳다고 믿는 일을 하기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상당수의 독자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이런 이야기에 약하다. 착한 사람이 옳은 일을 하기 위해 분투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 분투가 어떤 결과를 가져온 후에 뒤늦게 그 일들을 돌아보는 것 말이다. 그것은 적어도 형식적인 면에서는 몇 가지 장치를 가능하게 해준다. 즉 이는 모든 일들이 지나간 후의 기록이므로, 각각의 작은 사건에서 주인공의 후일의 감정을 붙이는 것이 가능하며, 그것은 동시에 어떤 복선으로서의 기능을 한다. 그리고 물론 그런 복선들은 읽는 이의 감정을 증폭시키기도 하면서 동시에 어떻게든 책을 끝까지 읽게 만드는 데에 효과적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스티븐 킹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음을 알려주면서도 이야기를 조금씩 지연시켜 독자의 궁금증을 끌어낼 줄 안다(크리스토퍼 놀란의 <인터스텔라>에서 이와 비슷한 것을 느꼈다. 적절한 지연말이다. 물론 이야기로 지연하는 것과 숏으로 지연하는 것은 다르지만). 그리고 그것은 전반적으로 이야기를 지배할 줄 아는 작가만이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때로 어떤 작가들은 자신의 이야기에 휘둘리기도 하지만, 스티븐 킹은 자신의 이야기들이 위치해야 할 곳을 알고 있다.

물론 이것은 어떤 기법적인 측면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결국 독자를 해리 더닝의 리포트를 읽는 제이크 에핑의 자리에 가져다 놓기 때문이다. 해리 더닝의 인생이 바뀐 날을 읽는 제이크 에핑, 그리고 제이크 에핑의 인생이 바뀐 날(로부터 시작된 이야기)을 읽는 우리들. 당신은 눈물이 많은 편인가, 아니면 눈물이 없는 편인가. 아니, 그것은 별로 상관이 없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부모님 장례 때도 울지 않은 사람도 눈물을 흘리게 만든 일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당신은 부모님 장례 때는 울었겠지.

3.
많이 알려졌듯이, 그리고 제목이 말해주듯이 이 이야기는 존 F. 케네디를 살리기 위해,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이야기이다. 그것의 성공 여부를 밝히는 것은 이 리뷰의 몫이 아니고, 다만 내가 흥미롭게 보았던 것은 스티븐 킹이 보는 미국의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까지의 모습이다. 당시는 전후의 혼란에서 벗어나 번영이 시작되는 시기였고, 지금보다 모든 것이 덜 발달된 시기였을지 몰라도, 한편으로는 더 풍요로운 시기였다. 그것은 예를 들어 주인공이 처음 1950년대로 건너와 마시는 루트비어 맥주와도 같은 것이다. 즉 그의 표현을 빌자면, "이 50년 전 세상은 내 예상을 훌쩍 뛰어넘을 만큼 냄새가 지독했지만, 맛은 훨씬 더 훌륭했다.(p.63)" 사람들은 순박했고, 지금처럼 계산적이거나, 이기적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스티븐 킹이 그 시기를 찬양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인가 무서운 것이 그 시기에는 도사리고 있었다. 예를 들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인종차별. 퍼거슨 시의 사건에서 보듯 인종 문제는 여전히 미국 사회의 뇌관이기는 하지만, 당시에는 차별이 뉴스거리도 안되는 그야말로 당연시되는 시기였고, 그것은 작가가 소설에 묘사한 실개울 위에 가로로 걸쳐진 널빤지, 즉 '흑인용 화장실'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작가는 잊지 않고 경고를 한다. "만약 당신이 내 글을 읽고 1958년이 마냥 평화로운 세상인 듯한 느낌을 받았다면 그 비탈길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덩굴 옻나무가 즐비했던 그 길을. 그리고 실개울 위에 얹혀 있던 널빤지도.(p.415)"

그러니까 그것은 한편으로 작가가 소설에 건 한 가지의 장치, '과거는 고집이 세다'와 같은 것이다. 즉 이는 과거가 바뀌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도 되지만, 동시에 과거에서 미래로의 흐름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느리고 때로는 돌아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시간은 조심스럽게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며, 우리를 조금씩 앞으로 밀어낸다. 그것은 한편으로 그가 만들어낸 다른 장치, '과거는 화음을 만들어 낸다'와도 통한다. 과거와 현재 혹은 미래는 시간 속에서 화음을 만들어낸다. 소설에서의 맥락은 약간 다르지만, 그것은 어떤 비유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것은 때로 과거의 어떤 일은 현재에서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완전한 반복이라기 보다는 화음에 가깝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동일한 것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무엇인가가 살짝 바뀌어 반복된다는 것. 즉 과거라는 음악은 이미 연주되었고, 우리가 (그 음악을 조금이라도 바꾸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그 연주를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어울리는 적절한 화음을 넣는 것 뿐이라는 점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에 이루어지는 춤처럼 말이다.
 
4.
이 소설은 크게 두 가지의 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하나는 과거로 돌아가 존 F. 케네디를 살리기 위해 제이크 에핑이 벌이는 일들이며, 다른 하나는 그가 돌아가 만나게 되는 해리 더닝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과의 이야기이다. 그것은 물론 독자가 너무 큰 이야기나, 혹은 반대로 너무 작은 이야기만 읽다가 흥미를 잃지 않게 하려는 작가의 장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른 당연한 진리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는 각자의 작은 사건들 속에서 살아가기도 하지만, 동시에 시대의 큰 사건들을 같이 겪고 있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예를 들어 존 F. 케네디의 동생이자 민주당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이기도 했던 로버트 F. 케네디의 암살을 다룬 영화 <바비> 같은 것을 연상시키는데, 이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는 로버트 F. 케네디, 즉 '바비'의 죽음이 있었던 하루를 다루기는 하지만, 그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와 언뜻 연관이 없어 보이는 여러 사람들의 그 하루를 모자이크 식으로 엮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가 잡아내고자 하는 것은 그의 죽음이 끼친 직접적인 영향이 아니라, 그가 상징하는 시대성이며, 어떤 시간의 공기이다. 즉 이들 각자의 삶은 개별의 삶으로 분리된 것이기는 하지만,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그것을 묶는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보여준다.

다시 소설로 돌아온다면, 결국 스티븐 킹이 말하고자 하는 것도 비슷한 것이다. 하나의 삶은 과거의 어떤 것을 바꾼다 할지라도 완전히 바뀌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의 삶은 분리된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으로 과거의 어떤 큰 사건(예를 들어 존 F. 케네디의 죽음)을 바꾼다 할지라도 개개인의 삶은 또 그렇게 쉽게 바뀌지는 않는다. 우리는 아무리 발버둥친다 해도 그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완전히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 당연한 진리를, 그러나 우리 종종 잊고마는 사실을 좋은 소설은 다시 일깨운다. 
 


:

문학이 할 수 있는 것, 혹은 해야만 하는 것

The Book | 2014. 11. 20. 15:09 | Posted by 맥거핀.

공중전과문학
카테고리 인문 > 세계문학론
지은이 W. G. 제발트 (문학동네, 2013년)
상세보기



총 200킬로미터 길이로 늘어선 거주지는 남김없이 파괴되었다. 도처에 끔찍하게 뒤틀린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여전히 푸르스름한 인광이 깜빡이는 시체도 있었고 거무스름하게 타버려 원래 크기의 3분의 1로 쪼그라든 시체들도 있었다. 일부는 이미 식어 굳은 자기 몸의 지방 웅덩이에 엉겨붙어 있었다. 폭격이 끝난 며칠 뒤 바로 봉쇄 구역으로 선포된 죽음의 지대 안쪽에서는, 페허지의 열기가 어느 정도 가신 8월에 접어들어 징역대와 수감자들이 식은 잔해들을 치우는 소개작업을 시작했을 때, 일산화탄소에 중독되어 여전히 책상이나 벽에 기대앉아 있는 사람들이 발견되었고, 다른 쪽에서는 난방용 보일러 폭발로 터져나온 끓는 물에 삶아져 덩이진 살과 뼈, 혹은 산처럼 쌓인 시체들이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또다른 이들은 섭씨 1,000도 이상 올라간 열기 속에서 숯이 되고 재가 되어버려서, 생존자들이 가족의 유해를 빨래바구니 하나에 다 담아갈 수 있을 정도였다. (p.44~46)


1943년 7월 말, 영국 공군은 미국 제8공군의 지원을 받아 함부르크와 그 일대를 연속적으로 폭격했다. '고모라 작전'이라 불린 이 프로젝트는 특정의 시설물 타격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 도시를 가능한한 완전히 파괴하고 잿더미로 만드는 것이었다. 폭격은 며칠 간 계속되었고, 이 폭격으로 하루 밤 사이에, 4000파운드 이상의 폭탄이 투하되었고, 하루에만 4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외에도 이차대전 막바지에 영국 공군은 독자적인 40만 번의 출격으로 100만 톤의 폭탄을 적국 영토에 투하했으며, 한 차례 또는 수 차례 이상 공격받았던 총 131개의 독일 도시 가운데 몇몇 도시가 거의 철두철미하게 붕괴되었고, 독일 민간인 60만 명 이상이 이 공중전으로 희생되었다. 100만 톤의 폭탄, 40만 번의 출격, 60만 명의 희생자. 때로 숫자는 무서울 정도로 잔혹하다. 그러나 그 무서울 정도로 잔혹한 숫자는 여전히 많은 것들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 숫자들은 그 이후에 대해서 아무 것도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거대한 폭격 이후 모든 것이 파괴되어 버린 공간에서 이제 인간들은 무엇을 해야할지 이 숫자는 말해주지 않는다. 대신에 이제 다른 것들이 나선다. 잔해를 치우고, 죽은 자들을 묻고, 살아남은 사람들을 치료하고 보호하고 새로운 도시를 재건해야 할, 수많은 사람들, 예를 들어 의사나 간호사, 경찰관과 소방관과 군인, 정치가와 행정가, 심리학자와 상담가, 건축가와 기술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언뜻 그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도 할 일이 있다. 철학자들은 이 파괴의 의미를 물을 것이고, 사회학자들은 이 재난이 사회에 미칠 영향을 생각할 것이며, 교육학자들은 이 재난 속에서 다음의 세대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지를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혹은 문학은? 이 거대한 공습, 폭격, 재난 혹은 범죄나 인간성 말살 속에서 문학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제발트의 <공중전과 문학>은 이것을 묻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문학이 할 수 있는 것, 혹은 문학이 해야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가장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두 단어 공중전(luftkrieg)과 문학(literatur) 사이에 놓인 이 'und'의 간극을 무엇으로 연결할 것인가? 물론 이 질문은 하나의 즉각적인 다른 문제 혹은 비판을 불러올 수 있다. 그것은 혹시 이 질문이 그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연합군의 독일 공습을 무조건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닌가, 전쟁의 가해자인 독일 입장에서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라는 물음이다. 책을 읽으면 이 질문은 오해에 가까운 것처럼 느껴지는데, 제발트의 문제 제기는 전쟁의 전략적인 부분이나, 어떤 역사적인 맥락 혹은 특정 국가를 비난하려는 의도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즉 제발트는 영국을 포함한 연합국이 전쟁을 빨리 끝내려는 전략적인 목적으로, 혹은 독일이 자행한 폭격에 대한 보복전의 성격으로 이 폭격을 실행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들이 일어났다'는 관점으로 이 사태를 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폭격은 어떤 특정의 목표로 실행된 것이 아니라, 단지 폭탄이 그렇게 대량으로 생산될 때부터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만들어진 폭탄은 어딘가에 쏟아부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며, 이것은 독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제발트는 글의 말미에서 이를 더욱 강조하여 말하고 있기도 한데, 독일도 게르니카, 바르샤바, 베오그라드, 로테르담, 스탈린그라드 등에서 수많은 거대한 폭격을 실행했으며, 나치스의 공군 원수 괴링도 기술적 수단만 가능했으면, 런던을 초토화시켰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제발트가 이러한 오해를 불러올 가능성을 무릅쓰고 50년도 더 지난 1990년대 말에 이 질문들을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전쟁이 불러오는 비인간성, 참화, 그 무상함에 다시 경고를 하는 목적 외에도 이것에는 크게 두 가지가 관련되어 있다. 하나는 전후 독일 사회에서 시작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집단적 망각이다. 제발트가 여러 기록과 사례를 들어 논증하고 있는 바대로, 전후 독일 사회는 이 폭격이 불러온 거대한 파괴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꺼렸으며,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으려 했다. 그것은 다시 두 가지 문제와 연괸되는데, 하나는 앞서도 이야기한 바대로 가해자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피해를 이야기하는 것이 불러올 불필요한 문제를 회피하고자 함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보다 큰 문제로 이를 일종의 부끄러운 과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나치스와 관련된 부분은 수많은 독일 국민들의 기억 속에서 잊고 싶은, 터부시되는 기억이며, 따라서 그와 관련된 이들 폭격의 참상마저도 피하고 싶고, 잊고 싶은 기억의 일부분이 되었다. 따라서 전후 독일인들은 이 죽음을 애도하고 기억하기보다는 그 시체를 '빨리 몰래 묻어버리고' 그 위에 새로운 국가와 도시를 건설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다른 하나의 문제는 보다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부분으로 그 상황에서 독일문학이 보인 전반적인 태도이다. 즉 일반 국민이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빨리 잊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할지라도 '문학'마저도 그래야 하는가, 라는 물음이다. 제발트는 전후에서 현재에 이르는 독일문학이 이 부분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으로 답했으며, 일부 이 폭격이나 공습을 다루었다고 하더라도 부적절한 방식으로 다루었다고 말한다. 즉 이 연합국에 의해 이루어진 폭격을 다룬 문학의 수 자체가 많지 않으며, 일부 이 소재를 다룬 헤르만 카자크, 한스 에리히 노사크, 아르노 슈미트, 페터 드 멘델스존 등의 작품이 부적절하게 이것을 묘사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있어서 부적절한 방식과 적절한 방식이란 무엇인가. 제발트가 말하는 부적절한 방식이란 허구화, 문학적인 수사, 통속적인 묘사, 비유의 남용 등이다. 그리고 이의 반대편에 사실에 입각한, 냉정하고 철저한 묘사와 같은 적절한 방식이 있다(예를 들어 가장 위에 인용한 묘사 같은 것이 그에 해당할 것이다). 적어도 이러한 것을 다룰 때에는 그런 방식이 필요하다고 제발트는 본 것이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면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와 역사가가 다른 것은 무엇인가. 그런 것은 역사가들의 영역이 아닌가. 제발트는 (적어도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작가와 역사가의 구별이 무의미하다고 보는 것 같다. 그가 글에서 말하는 전체적인 맥락이나 어조도 그렇고, 그가 글에 인용한 벤야민의 문구를 미뤄보아도 그렇다. 발터 벤야민이 말하는 역사의 천사. "파편에 파편을 쉼없이 쌓아올리며 그 파편을 자기 발 앞에 내던지는 단 하나의 파국을 (본다). 천사는 머물러 있고 싶어하고, 죽은 자들을 깨우고 산산이 부서진 것을 한데 모아 맞추고 싶어한다. 그러나 천국으로부터 폭풍이 닥치더니 그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로 강하게 불어대서, 천사는 날개를 접을 수도 없다. 이 폭풍은 그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그를 떠밀고 있으며, 그러는 사이 그의 앞에는 잔해더미가 하늘까지 치솟는다.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러한 폭풍이다.(p.95)"

아무리 역사가나 작가가 애써 뒤돌아서 이들을 묘사하려 온 힘을 다한다 해도 그들(과 우리)은 끊임없이 미래로 떠밀려 나간다. 진보라는 폭풍에 의해서 말이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고 해도 누군가는 뒤돌아 서서 무엇인가를 사실 그대로 기록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모두가 앞을 보며 나아가는 사이에 잔해는 점점 하늘까지 치솟으며, 그 잔해를 그대로 둔다면 언젠가는 그 앞 길도 잔해로 뒤덮이는 날이 올 것이기 때문이며, 예를 들어 역사가들이 그런 것을 한다고 해도 수많은 역사가들이 숫자만을 기록하느라 또 많은 것을 놓친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그 짐을 나눠져야 하며, 그것이 가장 처음의 질문, 즉 공중전 속에서 문학이 할 수 있는 것, 혹은 문학이 해야만 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제발트의 답이다. 그리고 이는 한편으로 제발트의 문학에 대한, 혹은 작가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담겨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공중전의 이후에, 아니 그보다 더한 것의 이후에도 문학과 작가는 여전히 필요하다는 자부심 말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작가는 망각에 대항하는 자이며 그의 글은 망각에 대항하는 무기이다.


덧1.
이 책 <공중전과 문학>에는 이 글 '공중전과 문학' 외에도 독일문학의 원로로 추앙받는 작가 알프레트 안더쉬를 비판한 '알프레트 안더쉬'도 실려 있다. 여기에도 문학에 대한 제발트의 어떤 태도가 드러나는데, 그것은 문학은 어떤 작가의 생애를 교정하거나 미화하는 도구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위에서 말한 어떤 문학에 대한 자부심과도 연관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덧2.
전체적으로 번역된 문장들이 어딘가모르게 삐걱거린다. 상대적으로 뒤에 '옮긴이의 말'은 드물게 볼 정도로 훌륭하게 잘 쓰여져 있는데, 문장이 이런 걸로 봐서는 글을 못 쓰는 분이라기보다는 번역 능력이 떨어지는 분이 아닌가 싶다.

덧3.
맥락은 많이 다르지만, 2014년의 한국에서 이 책을 읽는 것은 자꾸 어떤 사건을 떠올리게 만든다. 예를 들어 '집단적 망각' 혹은 더 나아가 '망각의 강요'가 불러오는 어떤 심상 말이다. 어쩌면 예전 제주나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들만 보아도 이런 기억과 애도가 없는 '집단적 망각'과 망각의 강요, 더 나아가 왜곡과 희화화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닌, 계속 반복되어 온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망각에 대항하는 우리의 작가들은 누구이며, 그들의 글은 어떠해야 하는가. 생각해보게 된다.



:

겸손하지만 부러워하지 않는다

The Book | 2014. 11. 3. 15:32 | Posted by 맥거핀.
나의문화유산답사기일본편.4:교토의명소그들에겐내력이있고,우리
카테고리 역사/문화 > 역사기행
지은이 유홍준 (창비, 2014년)
상세보기


* 가제본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마지막권 '교토의 명소'편을 읽었다. 처음에는 앞서 다른 편들보다도 ('교토의 명소'라는 제목에 걸맞게) 많이 알려지고 내가 가보기도 했던 곳들 - 예를 들어 금각사(긴카쿠지), 천룡사(덴류지), 용안사(료안지) 같은 곳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조금 더 읽기가 수월하겠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왜냐하면 이번 편에서는 이전의 답사기 일본편들과는 약간 핀트가 달라진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기도 했지만, 이번 편의 포인트는 일본미(美)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정원이다. 일본인들의 정원에 대한 개념은 우리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데, 일본의 정원은 빈 마당을 꾸미는 조경(造景)이 아니라, 정원을 만드는 작정(作庭)이며, 이 정원에는 당대의 어떤 역사적 배경, 지배세력 간의 관계, 정신적인 세계, 미의식 등이 총망라되어 들어간다. 즉 일본의 정원은 시대 배경을 따라 침전조 양식, 마른 산수 정원, 서원조 정원, 지천회유식 정원 등 그 형태를 달리하여 왔으며, 이 각각의 다른 양식은 당대의 여러 요소들의 집약체라고 볼 수 있으며, 동시에 그 하나하나 자체가 당대를 말해주는 역사적 상징물이다. 따라서 교토의 명원을 순례하는 이번 답사기는 그 자체가 일본 역사를 되짚는 것이며, 더 나아가 그 모두를 아우르는 '일본미의 해답'을 찾는 과정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번 편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어떤 '배경지식'들이 꽤 필요하다. 왜냐하면 각각의 정원들이 특정의 양식과 형태로 만들어진 것에는 반드시 어떤 역사적인 배경이 있기 때문이며, 역사적인 배경을 전혀 모르고 정원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단지 경치의 일부분으로만 받아들이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이번 편은 이전의 편들에 비해 조금 딱딱한 감이 있다. 이전 편에 대한 리뷰에서 유홍준 글쓰기의 장점은 과거와 현재를 적절하게 조화시키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번 편에서는 그 조화는 사실 조금 부족한 감도 없잖아 있다. 저자 본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실제 답사를 가서 "이제 공부 끝, 답사 시작!"하면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했는데, 그 '공부 끝'이 꽤 기다려지는 느낌이랄까. 물론 유홍준 교수 특유의 핵심을 짚는 설명으로 그 공부가 그렇게 지루하지만은 않지만 말이다. 물론 그 자신도 그것을 잘 알고 있으며, 글의 중간중간에 이렇게 설명이 길어지는 것에 대한 어떤 미안함을 살짝 내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 정원이 어떻게 아름다운가라는 문제보다도 왜 아름다운가, 이 아름다움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가를 보는 것이 결국 '답사'라는 것의 핵심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이 배경인 일본의 역사에 대해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답사기 자체로 돌아와 이야기한다면, 그 일본의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은 이 정원과 건물들의 내력을 살피는 것이다. 책의 부제인 '그들에겐 내력이 있고, 우리에겐 사연이 있다'라는 말처럼, 유홍준은 사찰과 정원에 들어서기 전에 그것이 왜 그 자리에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졌는지 독자에게 '썰'을 푼다. 예를 들어 에도시대에 건립된 왕가의 별궁이자, 유명한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가 극찬을 한 '가쓰라 이궁'이 왜 그렇게 공을 들여 건립되었는지 그 배경의 일단을 보기 위해서는 에도 막부와 공가(천황가)와의 관계를 알아야만 한다. 막부는 천황과 공가를 견제하고자 공가가 지켜야 할 법도를 정해 공표했고, 그것의 제1조는 "공가 사람들은 밤낮으로 학문에 전념할 것"이었다. 이는 천황과 공가는 정치에 관여하지 말고 학문과 예능에만 몰두하라는 견제를 담은 뜻이었으며, 그것이 또한 한편으로 천황과 공가가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즉 공가의 별궁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은 그렇게 해서 학문과 예능에서 높은 경지에 오른 천황의 정신세계가 담겨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왕가의 재력이나 불세출의 건축가 고보리 엔슈를 모셔올 수 있는 능력에도 그 이유는 있을 것이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것 밖에 뜻을 둘 수 밖에 없었던 공가의 어떤 심정도 그것에 들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우리는 이 가쓰라 이궁이나 수학원 이궁을 따라 살피면서 자연스럽게 일본 역사의 큰 단면 중의 하나인 쇼군과 천황의 관계를 어림하여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내력을 통해 자연스럽게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답사의 기본이기도 하다. 

또한 더 나아가 이 책은 답사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데, 이는 각각의 사찰, 정원, 건물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양식을 아울러 살피는 것이며, 전체적인 흐름을 살피는 것이다. 책은 전체적으로 가마쿠라 시대의 명찰, 무로마치 시대의 명찰, 전국시대 다도의 본가, 에도 시대의 별궁 등을 차례로 살피는 구조로 되어 있으며, 이는 역사의 흐름을 그대로 따른 것이면서 동시에 정원 발달의 흐름과 그에 내재한 어떤 역사적인 흐름을 살피는 것이기도 하다. 책의 말미에 유홍준은 이를 친절하게 정리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정원으로 보면 가마쿠라 시대에는 용안사의 석정(石庭)과 같은 마른 산수가, 그리고 무로마치 시대에는 금각사와 같은 서원조 양식이, 그리고 그 사이에는 모모야마 시대의 다도(茶道) 문화가 그리고 에도 시대에는 가쓰라 이궁과 같은 지천회유식 양식이 발전하였다. 그런데 이 양식들이 등장한 것에는 이유가 있는데, 예를 들어 가마쿠라 시대에 선종이 새로운 사상으로 등장하면서 선을 추구하는 마른 산수가 발달하고 안정된 무가사회에서는 서원조가 탄생하였으며, 모모야마 시대와 같은 혼란기에는 조촐함을 추구하는 다도 정신을 구현한 초암 다실과 노지와 같은 양식이 발전하였고, 또 다시 에도시대라는 안정기에는 왕가의 별궁과 다이묘 정원의 비교적 화려한 지천회유식 양식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이 각각의 정원 양식에는 당대의 정치 분위기와 사회상이 반영되어 있으며, 그것은 단지 한 정원의 내력만을 살펴서는 알 수 없는 것이기도 하며, 전체적인 역사의 흐름을 차례로 살펴본 이후에만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일본의 역사는 사실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낯설다. 그것은 역사적인 배경으로 인해 약간은 의도적으로 일본사의 상당부분을 소홀히 배운 측면에도 있기도 하지만, 이 일본의 역사에는 우리 역사와는 상당히 다른 이질적인 요소들, 예를 들어 우리의 왕과 상당히 개념 차이가 있는 천황, 혹은 무사라는 집단과 그들이 이야기하는 무사도(사무라이 정신), 쇼군과 다이묘, 공가(公家)와 무가(武家), 그리고 불가(佛家) 같은 것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한편으로 중요한 것은 단지 역사적인 사실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까지 어떤 일본인의 정신세계나 정치적인 부분(예를 들어 군국주의 같은 것)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입장에서는 일본인의 사고란 한국인의 사고방식으로 절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예를 들어 이 책에서 말하는 다도의 핵심이라고 하는 '와비사비 - 꽉 짜인 완벽함이 아니라 부족한 듯 여백이 있고, 아름다움을 아직 다하지 않은 감추어진 그 무엇이 있는 것'와 같은 것)이 있다랄까.

그런데 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을 이 답사기는 최대한 설명하려 애쓴다. 그리고 그것은 건물의 내력을 살피기위한 불가피한 것이지만 동시에 다른 효과를 가지기도 한다. 그것은 이 답사기 일본편들의 시작과 연관되는 것으로, 우리를 일본이라는 세계 곁으로 조금 더 가깝게 이끄는 것이다. 답사기 일본편의 첫권에서 유홍준은 우리나라와 일본의 불편한 관계를 이야기하며 어떤 균형을 잡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것은 우리의 역사, 일본의 역사를 따로 분리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한일관계사로서 양국의 역사를 보는 것이며, 그것은 싫어도 옆나라인 일본과의 향후 관계 개선과 유지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답사기 일본편 1권과 2권에서의 상당부분은 우리역사와 일본역사의 관계, 예를 들어 도래인의 흔적, 일본에 끌려간 우리도공들의 발자취 같은 것에 상당부분 지면을 할애한다. 그러던 것이 3권과 특히 이번 4권에 이르러서는 우리보다는 그들에게 조금씩 무게중심이 옮아간다. 즉 그들이 가진 특수한 어떤 것, 그들이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발전시킨 독특한 문화가 무엇인지를 보는 것이다. 그러나 무게중심이 달라졌다고 해서 말하고자 하는 본연의 것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상대방에게 전해준 것이나 우리와 비슷한 상대방의 문화를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가 가진 나름의 독특한 것이 무엇인가 보고자 하는 노력도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상대방이 가진 독특한 무엇인가를 바라볼 때에 필요한 자세를 이 책은 잃지 않고 있다. 그것은 상대방이 가진 것을 인정하고 존중하되, 우리가 가진 것에 대한 자신감과 애정도 잃지 않는 것이다. 유홍준 교수는 우리 것, 특히 백제 문화의 미덕을 이야기하며 다음과 같은 (유명해진) 표현을 썼다. 儉而不陋 華而不侈(검이불루 화이불치) -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조금 변형하여 이 책의 미덕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謙而不羨 讚而不卑 (겸이불선 찬이불비)- 겸손하지만 부러워하지 않고, 칭찬하지만 우리 것을 비하하지 않는다. 그것이 상대의 것을 대하는 기본적인 자세가 아닐까.




 
:

존재한 적 없는 여자를 생각하는 남자들

The Book | 2014. 9. 23. 18:08 | Posted by 맥거핀.
여자없는남자들무라카미하루키소설
카테고리 소설 > 일본소설
지은이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동네, 2014년)
상세보기




1.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은 조금 특이한 소설집이다. 특이하다는 것은 (국내 출간본에서 나중에 추가한 '사랑하는 잠자'라는 소설을 제외하면) 각각의 소설들이 모두 같은 소재(그리고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인데, 그것은 일단 간단하게 말하면 소설의 주인공들이 모두 말 그대로 '여자 없는 남자'라는 점이다. 즉 소설의 인물들에게는 모두 현재 관계를 가지는 여자가 없다. 이 '관계'라는 것은 육체 관계라고도 혹은 정신적 관계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예스터데이'에 나오는 기타루에게는 어떤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는 여자친구 구리야 에리카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육체 관계가 없고, 반면 '셰에라자드'에 나오는 하바라와 셰에라자드는 육체적인 관계를 나누지만, 그들에게는 어떤 정신적인 연관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즉 그들에게는 모두 현재 관계를 가지는 여자가 없다. 한편으로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관계'라는 말이기도 하지만, '현재'라는 말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과거의 어느 순간에는 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스터데이'에서 기타루와 구리야 에리카의 관계는 이 소설의 시점에서는 이미 과거의 일이며, '셰에라자드'에서 셰에라자드와 하바라의 관계는 현재이지만, 그것이 이제 끝에 이르렀음을 소설은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다른 소설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는 '현재' 여자가 없으나, 그들에게는 과거 어느 순간 여자가 있었고, 그들은 그 여자와 육체적이고도 정신적인 관계를 나누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또 이 소설들의 기묘한 공통점이 드러나는데, 그러한 생각은 어쩌면 그들의 '착각'이거나 '혼자만의 생각'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소설들의 주인공 상대역들인 여자들은 과거 그 주인공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남자들과 육체적인 혹은 정신적인 관계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다시 정리해서 말하자면 이 소설의 인물들은 과거에는 여자가 있었으나 현재에는 여자가 없는 남자들이며, 그 여자들은 과거에 자신을 만나면서 동시에 다른 남자들도 만났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이것은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는데, '여자 없는 남자들'에서 '없다'라는 말은 '현재'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시점(時點)의 의미를 담은 그 물리성을 의미하는 말로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정신적인 없음, 혹은 아예 존재한적이 없음을 동시에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과거의 어느 순간 그들 곁에 여자가 있던 순간에도 사실상 여자는 그들의 곁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여자들은 주인공과 육체 관계를 나누는 순간에도 (육체라는 물리적인 실체는 비록 그곳에 있었을지 몰라도) 정신의 어느 부분은 자신과 관계를 나누는 남자들에게 분산되어 있었거나 어쩌면 그곳에 아예 존재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을 예를 들어 소설 '세예라자드'는 극명하게 보여주는데, 하바라와 육체적인 관계를 나누는 순간에도 세예라자드의 어떤 부분들은 과거 자신이 짝사랑하던 남자에게 가있고, 급기야는 하바라의 육체를 과거의 남자로 대체하여 관계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이 때 여자와 남자, 하바라와 세예라자드는 한 공간에 있지만,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바라가 과거의 남자로 대체되어 있거나 세예라자드의 육체는 껍데기만 남고 그녀의 어딘가는 다른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질문들이 다른 소설들에서 비슷하게 반복된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가후쿠에게나 '기노'에서 기노에게나 '독립기관'에서 도카이 의사에게. 왜 그녀는 나와 자면서 다른 남자들과 잤을까. 혹은 그녀는 그 때 그곳에 정말 존재하고 있던 것일까.


2.
다시 말해서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은 어떤 소재를 공유했다,라고 하기보다는 같은 테마를 반복하는 여섯 개의 변주곡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하루키는 능숙한 솜씨를 내보이며 같은 테마를 지루하지 않게 반복한다. 때로는 건조하게, 때로는 단조풍으로, 때로는 미스테리하고 음산한 기운을 담아서 말이다. 나는 이것이 하루키의 일종의 자신감이라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하루키는 이것을 하나의 소설집으로 묶어서 냈기 때문이다. 즉 하나의 책에서 같은 테마를 반복한다는 것은 작가에게는 일종의 자기복제가 될 위험성이 있기도 하지만, 독자에게도 그것이 자칫 지루한 반복처럼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루키는 분위기와 시점(視點)에 미묘한 변화를 주며 책을 끝까지 읽도록 만든다. 이것은 어쩌면 그가 말 그대로 소설가로서 구사하는 테크닉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올랐으며, 그에 스스로 자신감을 가졌기 때문은 아닐까. 아니, 나는 그의 소설가로서의 테크닉을 의심하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평가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 소설집은 그가 지금까지 자신의 소설들에서 보여줬던 여러 부분들이 고르게 들어있으며, 그것을 적재적소에서 능숙하게 구사한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간의 하루키 소설에 대한 오마주로서) 이것을 섹스로 비유하자면, 그의 단편소설은 어떤 체위를 실험해보는 듯한 느낌이 있었고, 그의 장편은 그 중 그가 특히 잘하는 체위로 집중 공략해서 쾌감을 증폭시킨다는 느낌이 있었다면, 이 단편들은 짧은 단편들에서도 다양한 체위를 다양한 테크닉으로 능수능란하게 구사한달까. 그저 당신은 오르가즘에 도달할 수 있도록 감각을 모으면 되는 것이다.

즉 이 하루키의 소설들에는 그간 그가 다른 소설들에서 보여줬던 요소들이 다양하게 들어 있다. 예를 들어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기묘한 분위기를 띄는 소설의 분위기('기노'나 '독립기관'에서 나타나는 어떤 기묘한 사건들, 혹은 하바라와 셰에라자드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기묘한 배경), 어떤 현실적인 문제에서 벗어나 있는 주인공들(예를 들어 하루키의 소설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는 주인공을 본 기억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등등의 내용적인 부분에서도 그렇지만, 소설의 어떤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그렇다. 단적으로 말해서 소설의 시점(視點)이나 화자 같은 부분도 그러한데, 하루키의 초창기 소설들에서 화자는 항상 '나'였으며 거의 1인칭 시점에서 소설이 전개되었다. 그랬던 것이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라는 소설집에서부터 본격적으로 3인칭 시점이 등장하여, 그의 대표작인 '1Q84'같은 소설도 3인칭 시점으로 전개가 되는데, 이 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들>은 이런 시점이 혼재되어 있다. 예를 들어 '드라이브 마이 카' '세예라자드' '기노' 등은 3인칭 시점으로 그리고 '예스터데이'나 '독립기관'은 '나'가 등장하는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리고 각각의 시점 내부에서도 미묘한 차이가 있는데, '드라이브 마이 카'나 '세예라자드'가 가후쿠나 하바라에 기반한 관찰자적인 시점이라면 '기노'는 보다 전지적인 시점이며, 같은 1인칭 시점이라도 '예스터데이'는 '나'가 이야기에 보다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반면에 '독립기관'에서는 이야기의 중심에서 보다 물러나 있다(그러니 예를 들어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이 소설들에서 '나'의 존재는 왜 필요한 것일까(특히 '독립기관'과 같은 내용이라면), 흥미롭게도 이 두 명의 '나'는 글을 쓰는 일을 하는 사람인데, 이 둘은 같은 나인가, 다른 나인가, 혹은 무라카미 하루키 그 자신인가).

이것을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 여섯 개의 이야기들, 혹은 여섯 개의 변주들은 묘하게 연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주제가 비슷하다는 측면에서가 아니라 소설의 형식이 낳는 어떤 기묘함들인데, 예를 들어 (위에서도 썼지만) '예스터데이'의 나와 '독립기관'의 나는 둘 다 글을 쓰는 남자이면서 동시에 '다니무라'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마지막 '여자 없는 남자들'의 '나'에는 이 소설의 어떤 인물을 끼워넣어도 그렇게 크게 무리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3인칭으로 전개되는 소설들이라 할지라도 이 소설의 어떤 인물을 다른 소설의 어떤 배경에 던져넣는다 할지라도, 예를 들어서 '드라이브 마이 카'의 가후쿠가 '기노'라는 술집에 등장한다고 할지라도, 혹은 '세예라자드'가 사실은 '독립기관'에서 도카이 의사가 사랑한 여자였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즉 다시 말해서 이 단편들은 각각의 온전한 단편이면서도 연결되어 하나의 장편처럼 보이며, 혹은 (하루키의 여러 단편들이 그랬듯) 각각의 개별적인 장편의 하나의 단초들인 것처럼 보인다. (많은 분들이 그렇게 느꼈을테지만 '셰에라자드'나 '기노' 등은 이것으로 부족한, 더 많은 이야기의 일부인 것처럼 보인다.)


3.
즉 <여자 없는 남자들>에 실린 여러 소설들은 과거 하루키 소설의 어떤 부분들을 더 풍성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분명히 비슷한 무엇인가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예스터데이'나 '독립기관'에 등장하는 나, 그러니까 소설가 다니무라. 그 소설의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그 화자. 그는 그렇게 특출나게 잘생겼다고도, 혹은 능력이 뛰어나다고도, 혹은 매력이 있다고도, 혹은 성격적으로 특별히 좋은 면이 있다고도 말할 수 없지만, 살아가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지도 않고, 특정의 취미가 있고 어느 정도 삶을 즐길 줄 알며, 자신의 일의 분야에서는 어느 정도의 루틴에 들어간 것처럼 보이며, 합리적인 사고를 하고, 합리적으로 행동한다. 그러나 그들 주위에는 기타루나 도카이 의사처럼 어딘지 모르게 특이한 남자들이 있었으며, 그 인물들은 그(나)의 기억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그 남자들은 죽거나, 사라진다(즉 지금은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가 없다). 즉 이 나의 주변에는 죽음이 어른거린다(그러나 이들 '나'는 죽음 근처에 있지만, 이들은 대체로 죽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그가 소설 속 화자인 '나'이기 때문에도 그렇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여자들이 있다. 그 여자들은 대체로 외모가 뛰어나거나 아름다운 편이며, 하루키가 늘 주목하는 대로 대체로 가슴크기도 적당하다. '예스터데이'의 구리야 에리카, '사진에서 본 대로 멋진 여자였지만 실물을 마주하니 얼굴보다도 온 몸에 넘치는 순수한 생명력 같은 것이 주의를 끄는' 여자. 혹은 '독립기관'의 도카이의 그녀, 그러니까 '종합적인 존재, 강력한 자석처럼 나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여자. 그러나 문제는 그들의 내부는 여전히 미궁에 놓여져 있다. '예스터데이'에서 기타루는 구리야 에리카를 안는 것을 거의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며, '독립기관'에서 도카이는 그녀의 무엇이 사실 그를 그렇게 끌어당기는 것인지 모른다. 여자들의 내부는 거의 항상 알 수 없는 무엇인가로 가득차 있으며, 남자들은 늘 그것을 독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가후쿠의 죽은 부인이나, 하바라의 셰에라자드나 기노의 전부인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더 거슬러 오르면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의 '시로'나 <1Q84>의 '후카에리'도 마찬가지다. 여자들은 겉으로 완벽해지면 완벽해질수록 내부는 알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된다. 그리고 그녀들은 그렇게 되면 될수록 더 죽음 가까이로 간다.

그리고 다시 그의 반대편에 위에서 말한 평범한 '나'들을 포함한 남자들이 있다. 다시 반복하지만, 이들은 죽음의 가까이에 있지만 죽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는한, 적어도 생활고 때문에 죽음 근처에 가까이 갈 이유는 없다. 그들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고, 그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만, 그 고민은 이상하게도 그들을 극단으로 몰아가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죽기에는 너무 쿨할 뿐이다. 그런데 여기까지가 이 <여자 없는 남자들>의 전작의 남자들이라면 이 <여자 없는 남자들>에는 새로운 유형의 남자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독립기관'의 도카이 의사나 '기노'의 기노같은 남자들. 기노에게 보내는 메시지들은 거의 그간 하루키 소설 속의 남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처럼 보인다. 그것이 하루키의 새 소설을 통해서 느끼는 미묘한 변화다.

나는 상처받아야 할 때 충분히 상처받지 않았다,고 기노는 인정했다. 진짜 아픔을 느껴야 할 때 나는 결정적인 감각을 억눌러버렸다. 통절함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진실과 정면으로 맞서기를 회피하고, 그 결과 이렇게 알맹이 없이 텅 빈 마음을 떠안게 되었다. 뱀들은 그 장소를 손에 넣고 차갑게 박동하는 그들의 심장을 거기에 감춰두려 하고 있다. (p.266)


4.
마지막으로 두 가지 이야기만 덧붙이고 싶다. 하나는 '사랑하는 잠자'는 넣지 않은 편이 훨씬 좋았으리라는 점이다. 테마의 미묘한 변주를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전혀 이질적인 음악이 들어가 있으면 되겠는가. 편집 과정에서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정 넣고 싶다면 차라리 맨 뒤로 돌리는 편이 나았다. (아니면 원서에는 없지만 나중에 추가한 것이라고 최소한도의 설명을 붙이기라도 하든가 말이다. 다만 '사랑하는 잠자'가 그 뒤의 이야기가 많이 궁금하긴 했다.)

그리고 더 한 가지. 예전에 하루키의 소설들에서 늘 어떤 강조점, 방점들이 거슬린다고 했는데, 방점이라는 그 자체가 거슬리는 것인지, 그 '형식'이 거슬리는 것인지 모르겠다.




:

노골적인 영화들

Ending Credit | 2014. 9. 17. 15:55 | Posted by 맥거핀.



(<명량>, <타짜 - 신의 손>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명량, 김한민, 2014

모르면 호로자식이제. 1700만이 넘게 든, 지금도 어딘가에서 흥행신기록을 이어가고 있는 김한민의 <명량>에서 (의도치 않게) 많이 회자되고 있는 대사이다. 왜병들에 맞서 나라를 수호하는 이들의 노력을 모르는 후세인은 호로자식이라는 영화 속의 이 말이 그 이후에 여러 글에서 많이 인용된 것은 물론 이유가 있다. 일차적으로는 그것이 다른 글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영화 속에서 영화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대화 혹은 훈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상한 인터랙티브. 그것은 영화 안의 인물이 스크린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이상한 순간이면서도, 동시에 그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을 이상한 동질감으로 묶어 주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래, 이 영화를 보러 온 우리는 적어도 호로자식은 아닌거야. 그 기이함이 내포하는 어떤 함의들은 다른 글들에서도 많이 언급되었기 때문에 길게 할 말은 없지만, 다만 나는 왜 여러 수많은 단어 중에서도 하필이면 '호로자식'이 쓰였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어쩌면 이것이 이 영화가 가지는 어떤 정체성을 설명해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졌다.

호로자식(혹은 후레자식)이라는 말의 어원을 살펴보면 여러 설명이 나오는데, 예를 들어 '호로'를 오랑캐를 뜻하는 호노(胡奴) 혹은 호로(胡虜)로 보는 것, 혹은 '홀의'에서 변형된 것으로 보는 것이 그것이다. 즉 호로자식이라는 말은 오랑캐 노비(포로)의 자식이거나, 혹은 '홀의 자식' 즉 아버지 없이 어머니 홀로 키운 자식이라는 해석이다(사실 이 어원설은 정확하다고는 볼 수 없을 것 같고, 다만 여러 견해들 중의 하나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다만 한 가지를 추가하여 말하자면 전자의 견해로 본다면 사실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는데, 이 어원설과 연관된 부분에 병자호란 이후 청에 포로로 잡혀있다가 돌아온 여자들('환향녀(화냥년)')이 낳은 자식이 '호로자식'이라는 해석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해석이라면 사실 이 영화 <명량>에서 이 단어가 사용되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볼 수도 있는데, 병자호란은 임진왜란 이후에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오랑캐이든 혹은 홀의 자식이든 간에 이 두 가지의 설명이 공유하고 있는 부분은 있다. 즉 이 '호로자식'이라는 말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자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결국 이 영화가 지향하는 것이 여기에 은밀하게 드러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가 결국 원했던 것은 어떤 '교육용 비디오'가 아닐까 하는 물음이다. 

교육공학적으로 볼 때 교육용 비디오가 가져야 할 지향점은 명백하다(여기에 전공을 써먹게 될 줄은 몰랐다). 예를 들어 몇 가지 언급되는 지침들이 있다. 초기의 흥미유발과 긴장감 유발이 되어야 하며, 극적 효과를 가져야 한다. 적절한 장면에서 무엇을 다룰 것인지를 미리 알려야 하며, 매 장면의 도입에서 특정의 사인이 필요하다. 반복, 재예시, 비교/대조 등의 기법을 적절히 활용한다. 스타일의 일관성이 필요하다. 명료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재정리, 요약, 일반화 등을 통하여 무엇을 다루었는가를 알려주도록 한다 등등. 이런 지침들은 일반 영화와도 연관되는 부분이 없다고 말하기 어렵지만, 상충하는 부분이 많다. 즉 다시 말해서 사실 많은 영화들에서 이런 지침들은 필요가 없다. 초기의 흥미나 긴장감 유발이 필요하지 않은 영화도 많고, 스타일의 일관성이나 명료함은 도리어 일반 영화들에서는 독이 되는 면도 있다. 재정리나 요약 등도 일반적인 영화에서는 불필요하거나 영화의 완성도를 망가뜨린다. 즉 '교육용 비디오'의 가장 중요한 지점은 그것이 좋은 비디오(영화)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그것이 교육적인 효과를 가질 수 있는가, 혹은 없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김한민 감독의 <명량>은 이 교육용 비디오의 지침들을 충실하게 따른다. 불가능한 싸움을 시도하는 이순신 장군(최민식)의 모습에서 긴장감이 유발되며, 분열 양상을 보여주는 왜의 진영과 우리의 진영은 이상한 대구를 이룬다(즉 분열된 인물들 속에서 이순신 장군만이 중심을 잡고 있다). 인물들은 전형적이며 대체로 그들의 성격은 고정되어 있다. 샷의 구성은 거의 관습적이며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며, 친절한 반복 설명을 피하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는 마지막 친절한 요약정리와 부연설명을 빼놓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명량>은 상업영화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속살은 거의 교육용 비디오와 동일하다. 물론 어떤 영화들(사실 거의 모든 영화들)은 특정의 메시지를 담는다. 때로는 우리는 그것을 '교훈'이라고 약간은 비꼬는 의미를 담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로 많은 영화들에서 우리가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이 메시지가 적절하게 감추어져 있거나 교묘한 메타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한민 감독의 <명량>은 이보다 더 노골적이다. 아니 그 노골적인 메시지를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이 영화가 가지는 전략이다.

그것이 노골적이지만 거부감을 중화시키면서 1700만이라는 숫자를 끌어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즉 이순신 장군은 어떤 이념과 사상에도 벗어나 있는 말 그대로 국민적인 영웅이고,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감독은 보다 노골적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도 괜찮다, 아니 오히려 그것이 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야기의 참신함이나 구성의 독특함이 아니고 모두 아는 이야기를 최대한 멋지게 그려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이겼다는 사실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다. 우리는 누가 이겼나를 궁금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승리가 얼마나 멋진 것이었나, 그것을 눈 앞에서 보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다. 즉 여기에는 관습적인 구도와 관습적인 샷이 필요했다. 새로운 구성과 새로운 샷은 관객을 어지럽게 만들 뿐이고, 기존의 것들을 보다 크게, 보다 세게, 보다 웅장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고, 감독은 판단했을 것이다. 보다 노골적으로 말이다.

<명량>의 전반부는 지루하고 조금은 따분해보였지만, 후반부 해전 씬으로 넘어가면서 점차 영화는 활력을 되찾는다. 나는 그것이 처음에는 영화의 클라이막스가 결국 해전이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점차 이상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처음의 해전의 준비나 우리 진영의 대립 같은 부분은 보다 사실에 가까운 부분, 혹은 사실에 기반한 고증들이 필요한 부분이고, 나중의 해전은 보다 허구에 가까운 부분, 혹은 상상의 나래가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즉 해전에 대해서는 우리는 불가능한 승리를 알고, 약간의 전술에 대해 들어서 알지만, 사실 세부적인 전황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런데 이 영화 <명량>은 그 해전의 시시각각의 흐름을 마치 우리가 옆에서 보는 것처럼 묘사해준다. 다시 말해서 영화 <명량>은 고증할 수 있는 부분은 부실한 묘사를 하거나 어물쩡하게 넘어가거나, 왜곡된 묘사를 하고, 고증할 수 없는 부분은 공들여서 마치 사실을 보여주는 것처럼 묘사한다(나는 단순히 어떤 그 해전의 불가능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결과만을 놓고 봐서도 불가능한 승리였음이 사실이므로, 그 해전에는 분명히 불가능해보이는 무엇인가가 들어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정씨 여인(이정현)이 치마를 벗어서 흔드는 장면도 불가능한 것이라고 비웃음을 당하지만, 그런 것이 실제로 있었지 말란 법은 없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알 수 있는 것에는 지루해하고, 나는 결국 알 수 없는 것만을 즐겁게 보았다. 혹은 이 교육용 비디오는 교육해야 하는 것은 어물쩡 넘어가고, 교육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공을 들여 정밀하게 교육했다. 나는 무엇을 보았던가.


 

타짜 - 신의 손, 강형철, 2014

영화를 같이 보고 나온 분은 이런 말을 했다. 아니 뭐 도박을 벗어난다고 하더니, 결국 도박으로 복수하고, 도박으로 행복해지는구만. 나는 사실 그것이 '타짜'라는 영화, 그리고 그 영화가 가지는 어떤 딜레마를 뭉뚱그려서 이야기해준다고 생각한다. 타짜에서 계속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메시지가 있다. 도박을 끊어라, 도박을 끊어야 행복해진다. 그러나 영화 속 어떤 인물들도 이 메시지를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영화 속 인물들이 이 메시지에 따른다면 영화(혹은 만화)가 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박 끊고 성실하게 벌어서 성실하게 사는 게 도대체 무슨 영화가,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겠는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예 그 메시지를 없앨 수는 없다. 그러므로 영화 속에서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메시지는 결코 전면에 나서지 않고 은밀하게 암시될 뿐이며, 그것은 결말에서도 마찬가지다. 고니(조승우)가 나온 1편의 결말도 어딘지 모르게 어물쩡 넘어가는 느낌이 있으며, 대길(최승현)이 나온 2편의 결말도 그런 면에서는 비슷하다.

다만 내가 느낀 차이가 있다면 2편은 보다 노골적이라는 것이다. 1편은 흐릿하고 모호하게 처리했지만, 2편은 이것을 마치 해피엔딩처럼(혹은 눈밭의 광땡처럼) 찍었다. 글쎄, 영화를 본 분이 있다면 질문을 던지고 싶다. 이것은 해피엔딩인가, 아닌가. 아니면 질문을 이렇게 바꿀 수도 있다. 그들에게 남겨진 돈 때문에 그들은 해피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 이것은 마치 감독의 전작 <써니>를 연상케 만드는 부분이 있는데, <써니>도 이 마지막 장면을 해피엔딩처럼 보이게 찍었기 때문이다. 아니, 나는 해피엔딩이 아닌데 해피엔딩처럼 '보이게' 찍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보기에 따라 해피엔딩일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감독 강형철은 두 번 모두 그것을 행복한 무엇으로 보이게 했으며, 그 무엇에는 어쩌면 구린내 나는 무엇인가가 담겨 있을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그 구린내 나는 무엇 중의 하나는 단적으로 '돈'과 같은 것, 혹은 돈으로 이루어지는 행복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돈이 스승이고, 돈이 무엇이라도 규정한다는 영화 속 타짜들의 말은 단지 타짜들의 말일 뿐인가, 아니면 결국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함의인가.

이 영화의 샷들은 <명량>과 거의 대척점에 서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특히 영화의 초반부부터 중반까지 영화는 계속 화려한 잔재주들을 구사한다. 이야기의 속도감도 있지만, 샷의 어떤 속도감과 재기발랄함이 눈을 즐겁게 한다. 그런데 그것이 계속 지치지 않고 이어지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재기발랄한 잔재주들은 결국 무엇을 위함인가. 이것은 영화의 내용과도 연관되는데, 영화의 내용으로 비추어 볼 때 화투판에서 어떤 잔재주들, 예를 들어 패를 돌린다거나, 패를 화려하게 섞는다거나 하는 등의 손기술들은 다른 무엇을 숨기거나 무엇을 바꾸기 위함이다. 즉 (영화 속 이야기로 돌아가면) 여자가 팬티를 슬쩍 보여줄 때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며, 시선이 그 쪽으로 돌아간 자들은 반드시 어떤 큰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 영화는 계속 잔재주들을 끊임없이 구사한다. 그리고 그 잔재주들은 우리의 시선을 다른 무엇으로 돌리고자 함인 것 같다. 그 우리의 시선 이면에 있는 것들, 그래서 우리가 대가를 치른 것은 무엇일까.
  
즉 잔재주들을 보는 것은 즐겁지만, 그 잔재주들이 과해지면 다른 부작용을 낳는다. 그것은 그 잔재주 이면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이것은 영화의 패착일까. 혹은 도리어 영화의 노림수일까(이것은 어쩌면 대길의 전략과 비슷한 것일까. 마지막 대길의 전략은 잔재주를 일부러 내보이는 것이다. 즉 그 잔재주를 일부러 잡아내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전략이 성공하려면 전제가 있는데, 그 이면에는 다른 잔재주가 없어야 한다. 즉 그 이면은 깨끗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이 깨끗했던가. 그것을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영화의 노림수라고 해도 여전히 뭔가 꺼림칙함이 남는 것은 이 영화는 한끗이 장땡을 이길 수 있다고 말하고자 하는(혹은 그것을 말한다고 내세우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끗이 장땡을 이길 수 있는 데에는 결국 아무런 기술이 없다, 그것에는 예를 들어 대길의 진심 같은 것이 들어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사실 이 영화는 그 속에 다른 기술을 슬그머니 감추고 있다. 이 점철된 잔재주 같은 것들 말이다.

그래서 감독의 전작 <써니>와 마찬가지로 영화는 즐겁게 보았지만, 이 즐거움 속에 어딘지 모르게 개운하지 않은 뒷맛이 남는다. 무엇인가가 빠져나간 것 같은 느낌. 어쩌면 영화 속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지금까지 수술당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그 화려한 손기술들, 혹은 화려한 샷들에 취해 있는 사이에 말이다. 당신의 셔츠를 슬그머니 올려보라. 어쩌면 무엇인가 수술 자국이 남아 있지 않은지.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

아무튼 두 영화는 흥행했거나, 흥행하고 있다. 스크린 독점에 대해서, 혹은 영웅을 갈망하는 사회에 대해서, 심지어는 박근혜 지지자들에 대해서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잘 모르는 것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나는 박근혜 지지자가 아닌데도 그 영화 <명량>을 보았다는 사실이다). 다만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두 영화 모두 노골적이라는 사실이며 그 노골적인 전략이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골적인 교육용 영화, 그렇기 때문에 또한 노골적으로 상업적인 영화. 아니면 그 반대. 노골적인 상업적 영화, 그렇기 때문에 또한 노골적으로 교육적인 영화(이 시대에 돈을 벌기 위해서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최근에 한국영화들을 보면서 우려되는 것 중의 하나는 위의 영화들 외에도 점점 노골적인 영화들이 늘어간다는 것이다. 점점 노골적으로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은 그 노골성이 성공을 거둘수록 더욱 심화될 것이다. 영화는 점점 프로파간다와 경계가 흐려지고, 그것은 단지 영화만이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그럴수록 점점 그들을 구별해 내지 못하며, 그 어딘가에서 "나를 가르치려 들지마라!"고 외치며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 같다. 


- 2014년 8-9월, CGV 역곡

'Ending Credit'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제시장> 잡담  (2) 2015.01.20
내일을 위한 시간, 다르덴 형제  (0) 2015.01.05
늦은 영화 감상기  (2) 2014.08.12
기적과 시간 2  (2) 2014.06.27
그녀her, 스파이크 존즈  (2) 2014.06.18
:

늦은 영화 감상기

Ending Credit | 2014. 8. 12. 02:11 | Posted by 맥거핀.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 <군도: 민란의 시대>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최근에 극장에서 본 2편의 영화에 대한 감상이랄 것도 없는 간소한 감상.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 맷 리브스, 2014

이 영화에서 아마도 가장 주목할 만한 순간은 시저가 유인원이 인간보다 낫지 않다, 그러니까 결국 유인원과 인간은 다를 바가 없다고 깨닫는 장면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장면이야말로 유인원이 일종의 '여명'의 시기에 들어설 수 있었던 이유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이 영화의 한국어 제목은 '반격의 서막'이지만, 사실 영화의 원제에는 '반격'같은 것은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인간과 유인원의 대립구도를 만들고 싶은 수입사의 멋대로 제목일 뿐이고, 원래 제목은 간략하게 'Dawn of the Planet of the Apes'이다). 즉 이 영화에 이르러서야 유인원들은 예전과는 다른 하나의 새로운 단계로 나아갔고, 그것은 결코 현재의 인간들조차도 이룩하지 못한 단계였다. 그것은 우리(유인원 혹은 인간)가 다른 개체들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을 벗어나는 것이고, 그것이 가능했기 때문에 결국 이 영화 속 세계에서 유인원은 이 행성을 지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집단은 결국 상대방을 이길 수 없는 법이니까(역사적으로 볼 때 자신들이 타 종족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종족들은 거의 대체로 파멸의 길로 스스로 들어섰다).

그것은 이 유인원이라는 집단의 내적인 부분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그 이전까지는 유인원은 그저 유인원이면 되었다. 즉 리더 시저는 서로가 서로를 죽이지 않는 것이 일종의 유인원의 본성과 같은 것이라고 믿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악한 본성을 가진 인간보다 유인원이 낫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므로 시저가 그저 무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격은 유인원이라는 사실, 그 자체면 되었고, 그 받아들여지는 유인원은 오로지 한 가지의 대원칙, 즉 '유인원은 유인원을 죽여서는 안된다'의 테두리 안에만 들어있으면 되었다. 그러나 시저가 많은 희생을 얻고 얻을 수 있었던 값진 인식은 사실 유인원의 본성도 그런 것만은 아니며, 유인원도 결국 탐욕스러운 인간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이제 유인원이라는 무리는 그저 '유인원이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유인원을 유인원이도록 하는 다른 무엇인가(단순히 서로를 죽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넘어서는)를 갖추어야 하는 단계로 들어선 것이다. 즉 시저가 코바에게 내린 '너는 유인원이 아니다!'라는 정언명제 이후에는 유인원은 유인원이기 위해서 다른 무엇인가가 필요해지게 되었고, 그것은 이제 일종의 법과 질서의 단계(유인원이 유인원이기 위해서는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라는 물음)로 이 무리가 진화하는 순간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시저가 코바에게 선언하는 이 장면은 이상하게도 <다크 나이트>에서 배트맨이 조커를 붙잡는 장면을 연상시켰는데, 나는 이 장면에서 시저가 이 딜레마를 어떻게 헤쳐나갈지 궁금했다. 그런데 이 예상을 뒤엎는 선언이라니. 이 장면에서 리더의 조건이라든가, 결단력 같은 이야기를 끄집어 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배트맨이라면 "너는 인간이 아니다!"라고 선언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물론 배트맨은 그렇게 선언하지 못해 끝끝내 조커에게 조롱당했지만..) 

그러므로 시저라는 위대한 영웅은 사라져가지만,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결코 인간들보다 나을 것이 없으며, 법과 질서라는 새로운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배운, 그야말로 '새벽의 단계'로 들어서고 있으니 크게 걱정은 안된다. 도리어 걱정되는 것은 영화 속의, 혹은 영화 밖의 인간들인데, 인간들은 여전히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위대한(사실은 위대하다고 착각하는) 리더의 영도에 따라 파멸의 길로 스스로를 자꾸 몰아넣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로가 자신들이 우월하다고 믿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경우는 어떤가. 시작하면 우리도 결국은 많은 희생을 당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믿으며 끝끝내 전면전을 피하려 애썼던 시저의 고뇌가 요즘에는 현실에서도 잘 보이지 않는다. 큰 전쟁에서든 작은 전쟁에서든.


군도: 민란의 시대, 윤종빈, 2014

그리고 여기 또 하나의 다른 영웅을 보여주는 것처럼 밑밥을 깔았다가,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욕을 먹고 있는 영화가 있다. 많은 평자들이 지적했듯 영화 <군도>는 초반에는 웨스턴의 형식을 빌려 일종의 영웅설화를 보여주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처음 돌무치(하정우)의 캐릭터를 만드는 과정은 웨스턴과 영웅설화의 이상한 조합이다. 돌무치는 설화 속의 영웅들처럼 비범하게 태어났고(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웨스턴의 영웅들처럼 일반적인 마을 집단에서 유리되어 있다(마을 외부 허허벌판 속에 있는 돌무치의 집). 설화 속의 영웅들처럼 어려서 고난을 받고(그는 18살에 어머니와 누이를 잃는다), 웨스턴의 영웅들처럼 혈혈단신으로 적진으로 침입해 들어간다. 물론 이는 영웅설화나 웨스턴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주인공을 강화시키기 위한 장치. 돌무치는 이를 계기로 '추설'이라는 군도(群盜)의 간택을 받고, 이제 그 무리 속에서 성장하며, 그 영웅성을 극대화시켜 복수를 성공시킬 일만 남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영화가 이상하게 비트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은 이제부터다. 돌무치의 영웅적인 성장과 그의 호쾌한 복수를 보여주어도 시간이 모자랄 판인데, 영화는 돌연 악역 조윤(강동원)의 캐릭터를 돌무치만큼 공들여 묘사하더니 그에게 절대힘, 그러니까 아무도, 심지어는 돌무치도 이길 수 없는 어마어마한 힘을 부여한다. 이는 사실 영웅설화나 웨스턴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영웅설화나 웨스턴에서는 악역은 주인공의 영웅성을 부각시킬 정도로 강력해야 하기는 하지만, 결국 주인공에게 패배하고 주인공의 영웅성을 극대화시키는 데에 머물러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당연히 모를 리 없는 미친 영화감독 윤종빈은 조윤에게 그런 어마어마한 힘을 부여함과 동시에 이질적인 나레이션을 붙임으로써 그의 존재를 시작부터 관객들에게 강하게 각인시킨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론 그가 미쳤다고 보는 관점은 이 영화를 영웅담으로 보는 관점에서만 타당한 것이다. 어쩌면 그에게 이 영화를 영웅담으로 만드려는 의지는 애초부터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것을 영웅담으로 보며, 왜 영웅이 그것밖에 안되냐는 비난은 오로지 애타게 영웅을 바라는 우리들의 의지가 빚어낸 오해는 아닐까. 왜냐하면 이 이상한 영웅담에는 가장 중요한 부분, 즉 영웅의 각성과 그의 성장이 전적으로 빠져있기 때문이다. 돌무치는 추설의 무리가 된 이후에도 그다지 성장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의 마음 속에는 사실 백성을 살린다,라는 대의보다는 개인적인 복수가 여전히 더 크게 위치해 있으며, 그는 여전히 어리석고 별로 생각이 없어 보이며, 결국 조윤을 이기지 못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조윤을 이기는 몫은 감독 윤종빈이 그에게 줄 마음이 없다. 왜냐하면 그를 궁극적으로 이기는 것은 그가 아니라 이름모를 한 무리의 백성들이며, 영화의 제목은 '군도: 영웅의 시대'가 아니라 '군도: 민란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윤종빈은 몇 가지 설정들(예를 들어 타이틀롤)이나 음악들로 분명 어떤 착각을 준 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가 애초부터 찍고자 하는 것은 영웅설화나 웨스턴이 아니었다. 보통의 영웅설화나 웨스턴에서 일반 민중들은 그저 고통과 압제에서 신음하다가 영웅의 등장으로 구원받는 시혜의 대상이거나 혹은 영웅의 활약을 지켜보며 박수를 보내는 구경꾼들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그렇게 되면 문제가 있는 게 그렇게 되면 영화는 '군도: 영웅의 시대'가 되기 때문이다. 윤종빈은 선택을 해야했고, 그 선택은 결국 돌무치를 영웅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고, 결국 민란을 선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민란은 결국 시혜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도 조윤에 대한 1차 습격이 결국 참담한 실패로 끝나는 것은 그들의 이제까지의 습격이 일종의 시혜와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추설이라는 조직은 그 이전까지 백성들과 거의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다. 그들의 아지트는 아무도 모르는 산속 깊은 곳에 있고, 그들의 조직은 아무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의 조직은 일종의 엘리트 집단이고, 그들은 영웅으로서 백성 앞에 짠 하고 나타나 일종의 혜택을 줄 뿐이다(이런 이들의 일종의 시혜 의식은 그들의 회의 시간에도 잘 드러난다). 그런 그들이 조윤에 대한 재습격에서 결국 승리하는 것은 백성들의 자연스런 참여의 결과, 즉 진정한 민란에 의해서만 가능했다(물론 이는 그들이 대폭 수가 줄어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결국 이는 일종의 개방적인 조직으로 추설이 변모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즉 진정한 의미에서의 군도인 것이다).

이는 백성들의 입장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데, 이는 결국 구경꾼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짓는 자로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조윤이 백성들과 대치한 장면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누구든 자신의 운명을 바꾸려는 자는 나오라는 조윤의 외침은 백성들을 향한 외침이면서 결국 자신을 향한 외침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조윤이야말로 결국 자신의 운명에 순응한 자이기 때문이며, 아마도 이것이 조윤이라는 캐릭터가 구체적으로 설명되어야 할 이유일 것이기 때문이다. 조윤은 실제의 조선시대의 많은 실제 인물들이 그러했듯이 벼슬길에 나아갈 길이 막혔기 때문에 명예보다는 재물로 방향을 돌린 '땅귀신' 중의 하나였으며, 그것으로 자신의 능력을 아버지에게 인정받기를 바랐다(그가 땅문서를 모아 가장 처음 한 일은 아버지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를 어떤 의미에서는 왜곡된 인정투쟁으로 보아도 될 것인데, 이의 기저에는 결국 자신의 운명에 대한 일종의 체념이 들어가 있다. 즉 그는 그 자신의 물음처럼 연꽃의 의지가 아닌 신의 뜻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돌무치와 함께 창을 들고 따라 나선 민중들은 다르다. 그들은 그 스스로 신분제라는 신의 뜻을 벗어나려 하였으며, 이는 탐관오리의 손자로 태어났으나 추설의 무리에서 자라난 아이에게도 역으로 마찬가지일 것이다. 즉 이 역시도 연꽃의 의지인 것이다.


덧.
그래서 어떻게든 엮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싶은 의지는 잘 알겠지만, 이 영화 <군도>를 <명량>과 엮어서 <명량>에는 리더가 있지만, <군도>에는 리더가 없고, <명량>의 영웅담은 잘 짜여져 있지만, <군도>의 영웅담은 약하다느니 하는 비교는 조금은 부당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군도>는 사실 영웅담을 만들 의지 자체가 별로 없기 때문이며,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서 일종의 영웅적 배경을 초반에 깔아야 했지만, 사실 하고자 하는 얘기는 그게 아니었기 때문이다(반면 <명량>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고, 그저 그의 며칠을 보여주기만 해도 되었다. 적어도 이순신이 영웅인 것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테니. 아무튼 이 영화를 보지 않았으니 이 이상 할 말은 없다). 즉 어떤 사람들은 영웅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영웅을 결국 이야기하지 않는 영화에 그러니까 영웅이 없기 때문에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물론 영화의 흥행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얘기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군도>보다 <명량>이 흥행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며, 그것은 어떤 징후적인 문제와도 조금은 연관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흥행영화들이 늘 그랬듯이 영화의 완성도와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한 마디 덧붙이자면 <명량>을 보지 않았으므로 이는 <군도>가 <명량>보다 낫다는 코멘트가 아니다).

얘기한 김에 한 마디 더하자면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은 위의 두 영화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이나 <군도: 민란의 시대>나 거의 모든 캐릭터들이 살아 있으며, 그 캐릭터들을 모두 잡고 가려는 노력이 인상적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특히 <군도>는 윤종빈 감독의 거의 모든 영화들이 그랬듯이 캐릭터들의 열전이며, 그것은 특히 악역 조윤에서 빛을 발한다. 도리어 욕을 먹기는 했지만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왜 악역이 (주인공보다도 더) 빛을 발하는 것이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예를 들어 <다크 나이트>가 배트맨의 영화가 아니라 조커의 영화라고 해서 아무도 그것에 대해서 뭐라하지 않는데 말이다. 아무튼 요즘의 누군가들은 악이 그저 맥락없는 악이기를 바라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어떤 징후적인 문제와 연관되는 것 같다(다만 선한 우리가 그 '맥락없는 악'보다 나을 수 있는 점을 한 가지라도 찾는다면 적어도 우리는 어떤 맥락을 찾으려고 노력한다는 점을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 2014년 7~8월, 대한극장, CGV 영등포

'Ending Credit'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일을 위한 시간, 다르덴 형제  (0) 2015.01.05
노골적인 영화들  (2) 2014.09.17
기적과 시간 2  (2) 2014.06.27
그녀her, 스파이크 존즈  (2) 2014.06.18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웨스 앤더슨  (2) 2014.04.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