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원래 눈물이 없었다

The Book | 2014.12.02 19:00 | Posted by 맥거핀.

112263.1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지은이 스티븐 킹 (황금가지,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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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소설의 프롤로그는 인상적이다. 그것은 "나는 원래 눈물이 없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여, "그 뒤로 이어진 모든 일들이, 끔찍했던 그 모든 일들이 그 눈물에서 시작됐으니 말이다."로 끝난다. 일단 이 프롤로그는 예고편의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무릇 모든 예고편의 목적이란, 본편을 보게 만드는 것. 우리는 그 눈물이 없는 인간이, 눈물로 시작하여 보게 되는 끔찍했던 모든 일들이 무엇인지, 꽤나 궁금해지게 된다. 그리고 동시에 이 프롤로그는 한 일화를 통해 주인공이 어떤 인간인지 독자에게 각인시킨다. 부모님 장례 때도 울지 않은 고등학교에서 성인 영어반을 가르치는 교사 제이크 에핑. 그가 어느날 수강생들에게 낸 작문 리포트 주제는 '내 인생이 바뀐 날'이었다. 어쩌면 아마도 그런 주제는 내는 사람에게도, 그리고 쓰는 사람에게도 그렇게 좋은 주제는 아닐지도 모른다. 인생이 동전처럼 뒤집히려는 기로에 서 있을 때, 인간이 아무리 어떤 애를 써도, 지금이 그런 순간이라고 알 수 있을까. 그것을 돌아보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누구는 임신한 십 대 조카를 거두어 먹인 이모 이야기를 썼고, 또 누구는 용기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었던 전우에 얽힌 감동적인 이야기를 썼다. 그리고 그 중의 한 리포트는 그런 리포트를 읽는 일이 가슴뭉클한 일이기는 하지만, 끔찍하고 사람 진을 빼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이 제이크 에핑을 울게 만들고 글 위로 눈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눈가를 훔쳐가며 한 군데도 수정하는 일이 없이 결국 A+를 주게 만들었다. 그 리포트는 그가 '정규 교육이 가능한 정신지체인'보다 손톱만큼 낫다고 생각했던, 아이들에게 두꺼비 해리라고 불리는, 그러면서도 아이들을 혼내는 일 한 번 없는 고등학교 수위 해리 더닝이 쓴 것이었다. 그 리포트는 이렇게 시작했다. "어떤 날이 아니라 어떤 밤이었다. 내 인생이 바뀐 것은 아버지가 우리 어머니와 두 형제를 주기고 나를 심하게 다치게 만든 밤이었다. 여동생도 심하게 다쳐서 혼수상태가 됐다. 여동생은 깨어나지 못하고 3년 만에 주겄다. 이름은 엘렌이었고, 내가 정말로 사랑했는데. 꼿을 따서 꼿병에 담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는데." 

스티븐 킹의 소설 <11/22/63> 얘기다.

2. 
그러니까 이 소설은 인생이 뒤집히려는 기로에 서 있는 사람의 이야기이고, 동시에 이미 뒤집힌 사람의 기록 - 다시 말해서 해리 더닝의 기록과 같은 의미를 담은, 제이크 에핑의 기록("그 뒤로 이어진 모든 일들이...")이기도 하며, 또 한편으로는 착한 사람이 옳다고 믿는 일을 하기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상당수의 독자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이런 이야기에 약하다. 착한 사람이 옳은 일을 하기 위해 분투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 분투가 어떤 결과를 가져온 후에 뒤늦게 그 일들을 돌아보는 것 말이다. 그것은 적어도 형식적인 면에서는 몇 가지 장치를 가능하게 해준다. 즉 이는 모든 일들이 지나간 후의 기록이므로, 각각의 작은 사건에서 주인공의 후일의 감정을 붙이는 것이 가능하며, 그것은 동시에 어떤 복선으로서의 기능을 한다. 그리고 물론 그런 복선들은 읽는 이의 감정을 증폭시키기도 하면서 동시에 어떻게든 책을 끝까지 읽게 만드는 데에 효과적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스티븐 킹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음을 알려주면서도 이야기를 조금씩 지연시켜 독자의 궁금증을 끌어낼 줄 안다(크리스토퍼 놀란의 <인터스텔라>에서 이와 비슷한 것을 느꼈다. 적절한 지연말이다. 물론 이야기로 지연하는 것과 숏으로 지연하는 것은 다르지만). 그리고 그것은 전반적으로 이야기를 지배할 줄 아는 작가만이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때로 어떤 작가들은 자신의 이야기에 휘둘리기도 하지만, 스티븐 킹은 자신의 이야기들이 위치해야 할 곳을 알고 있다.

물론 이것은 어떤 기법적인 측면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결국 독자를 해리 더닝의 리포트를 읽는 제이크 에핑의 자리에 가져다 놓기 때문이다. 해리 더닝의 인생이 바뀐 날을 읽는 제이크 에핑, 그리고 제이크 에핑의 인생이 바뀐 날(로부터 시작된 이야기)을 읽는 우리들. 당신은 눈물이 많은 편인가, 아니면 눈물이 없는 편인가. 아니, 그것은 별로 상관이 없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부모님 장례 때도 울지 않은 사람도 눈물을 흘리게 만든 일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당신은 부모님 장례 때는 울었겠지.

3.
많이 알려졌듯이, 그리고 제목이 말해주듯이 이 이야기는 존 F. 케네디를 살리기 위해,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이야기이다. 그것의 성공 여부를 밝히는 것은 이 리뷰의 몫이 아니고, 다만 내가 흥미롭게 보았던 것은 스티븐 킹이 보는 미국의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까지의 모습이다. 당시는 전후의 혼란에서 벗어나 번영이 시작되는 시기였고, 지금보다 모든 것이 덜 발달된 시기였을지 몰라도, 한편으로는 더 풍요로운 시기였다. 그것은 예를 들어 주인공이 처음 1950년대로 건너와 마시는 루트비어 맥주와도 같은 것이다. 즉 그의 표현을 빌자면, "이 50년 전 세상은 내 예상을 훌쩍 뛰어넘을 만큼 냄새가 지독했지만, 맛은 훨씬 더 훌륭했다.(p.63)" 사람들은 순박했고, 지금처럼 계산적이거나, 이기적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스티븐 킹이 그 시기를 찬양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인가 무서운 것이 그 시기에는 도사리고 있었다. 예를 들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인종차별. 퍼거슨 시의 사건에서 보듯 인종 문제는 여전히 미국 사회의 뇌관이기는 하지만, 당시에는 차별이 뉴스거리도 안되는 그야말로 당연시되는 시기였고, 그것은 작가가 소설에 묘사한 실개울 위에 가로로 걸쳐진 널빤지, 즉 '흑인용 화장실'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작가는 잊지 않고 경고를 한다. "만약 당신이 내 글을 읽고 1958년이 마냥 평화로운 세상인 듯한 느낌을 받았다면 그 비탈길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덩굴 옻나무가 즐비했던 그 길을. 그리고 실개울 위에 얹혀 있던 널빤지도.(p.415)"

그러니까 그것은 한편으로 작가가 소설에 건 한 가지의 장치, '과거는 고집이 세다'와 같은 것이다. 즉 이는 과거가 바뀌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도 되지만, 동시에 과거에서 미래로의 흐름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느리고 때로는 돌아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시간은 조심스럽게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며, 우리를 조금씩 앞으로 밀어낸다. 그것은 한편으로 그가 만들어낸 다른 장치, '과거는 화음을 만들어 낸다'와도 통한다. 과거와 현재 혹은 미래는 시간 속에서 화음을 만들어낸다. 소설에서의 맥락은 약간 다르지만, 그것은 어떤 비유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것은 때로 과거의 어떤 일은 현재에서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완전한 반복이라기 보다는 화음에 가깝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동일한 것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무엇인가가 살짝 바뀌어 반복된다는 것. 즉 과거라는 음악은 이미 연주되었고, 우리가 (그 음악을 조금이라도 바꾸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그 연주를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어울리는 적절한 화음을 넣는 것 뿐이라는 점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에 이루어지는 춤처럼 말이다.
 
4.
이 소설은 크게 두 가지의 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하나는 과거로 돌아가 존 F. 케네디를 살리기 위해 제이크 에핑이 벌이는 일들이며, 다른 하나는 그가 돌아가 만나게 되는 해리 더닝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과의 이야기이다. 그것은 물론 독자가 너무 큰 이야기나, 혹은 반대로 너무 작은 이야기만 읽다가 흥미를 잃지 않게 하려는 작가의 장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른 당연한 진리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는 각자의 작은 사건들 속에서 살아가기도 하지만, 동시에 시대의 큰 사건들을 같이 겪고 있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예를 들어 존 F. 케네디의 동생이자 민주당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이기도 했던 로버트 F. 케네디의 암살을 다룬 영화 <바비> 같은 것을 연상시키는데, 이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는 로버트 F. 케네디, 즉 '바비'의 죽음이 있었던 하루를 다루기는 하지만, 그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와 언뜻 연관이 없어 보이는 여러 사람들의 그 하루를 모자이크 식으로 엮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가 잡아내고자 하는 것은 그의 죽음이 끼친 직접적인 영향이 아니라, 그가 상징하는 시대성이며, 어떤 시간의 공기이다. 즉 이들 각자의 삶은 개별의 삶으로 분리된 것이기는 하지만,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그것을 묶는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보여준다.

다시 소설로 돌아온다면, 결국 스티븐 킹이 말하고자 하는 것도 비슷한 것이다. 하나의 삶은 과거의 어떤 것을 바꾼다 할지라도 완전히 바뀌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의 삶은 분리된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으로 과거의 어떤 큰 사건(예를 들어 존 F. 케네디의 죽음)을 바꾼다 할지라도 개개인의 삶은 또 그렇게 쉽게 바뀌지는 않는다. 우리는 아무리 발버둥친다 해도 그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완전히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 당연한 진리를, 그러나 우리 종종 잊고마는 사실을 좋은 소설은 다시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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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4.12.06 17: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실은 저 이 글을 알라딘 북플을 통해 어제 처음 읽었답니다. 솔직히 스티븐 킹의 소설제목이 딱 뜨는데 깜짝 놀랐어요! 언젠가 맥거핀님 블로그에서 스티븐 킹 소설 리뷰를 읽을 수 있을까? 그런날이 올까? 그런 생각을 한두번쯤 했었거든요.
    근데 (기다린 보람이있어) 마침내 읽게되었으니 말입니다.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 리뷰라서 조금 들떠있기도했고 그랬습니다 ^^;
    저도 얼마전 이 소설을 구입했거든요. 지금은 다른책 읽는라 아직은..

    "어떤 시간의 공기" 라는 말! 이 특히 다가오네요. 개인이 살아가는 일상의 작은 시간들과 그것을 둘러싸고있는 특정시대의 시간. 그 시간의 공기 말이죠.
    리뷰를 읽다보니 <바비>라는 영화도 보고싶어졌어요.
    언뜻 연관성 없어보이는 사건들이 배경처럼 깔려있고 그런 시공간에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 원인과 결과가 뚜렸한 사건보다 더 흥미로운것 같아요. 실제로 그런 일들이 더 많을것 같기도하구요.

    *다음번에도 혹시 스티븐 킹 소설 읽으면 리뷰 올려주세요 : )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4.12.08 11: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기다리셨던 글이라니까 기분이 좋네요.^^ 스티븐 킹 소설 좋아하시나 봐요. 그런 의미에서 스티븐 킹 소설 중에 좋았던 거 추천 좀 해주세요. 그나저나 북플을 쓰시는 모양이군요. 저는 한 번 깔았다가 너무 어지러워서 지웠어요.

      저는 스티븐 킹 소설 오래전에 한 두어 권 읽은 거 빼고, 정말 오랜만에 읽었거든요. 그런데 오래만에 읽어서 그런가 너무 재미있더라구요. 확실히 스티븐 킹이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을 손에서 놓고 싶지 않게 하는 마력이랄까..그런 걸 지닌 사람이란 것 같아요.

      사실 그렇잖아요. 우리는 같은 시대에 같은 사건을 겪고 있고, 알게모르게 서로 영향을 주고 받죠. 예를 들어 만약 이번에 박근혜 정부가 아니라 다른 정부가 들어섰다면 조금이라도 제 삶의 어떤 부분이 달라졌을 수 있겠죠. 그렇다면 선거에서 박근혜를 선택한 다른 사람이 제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거칠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구요. 소설에서 주인공이 케네디를 살리려고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테죠. 물론 역사는 가정할 수 없는 것이어서, 케네디가 만약 살아났다면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단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만..

  2.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4.12.14 18: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리 많이 읽지도 않았는데 추천이라기보다는..
    12월이고 조만간 크리스마스도 다가오니 생각나는 소설이 있네요.
    스티븐 킹의 <사계> 에 실린 봄.여름.가을.겨울편이 다 좋았지만 전 겨울편에 수록된
    <호흡법>이라는 단편 소설을 이야기하고싶어요. 이 소설은 사실 크리스마스 이브가 시작되기 전에 읽으면 더 어울리는데 그 이유는 읽어보시면 알게되요 ^^;
    전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클럽의 분위기며 소설속의 또 하나의 이야기가 액자처럼
    펼쳐지는 구성도 맘에 들었어요. 스티븐 킹을 공포소설이 제왕이라고 하지만 그 안에 녹아있는 따스함과 품위를 잊지 못할것 같아요.
    어쩌면 맥거핀님은 <톰고든을 사랑한 소녀>도 좋아하실지 모르겠어요.

    * 북플은 지난달에 충동적으로 깔았는데 그냥 몇몇 친구들 새글 읽는 정도로만 사용중이랍니다. 좀 정신없긴 하더라구요.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4.12.17 18: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그러고보니까 <톰 고든을 사랑한 소녀>는 읽었었어요! 예전에 저도 야구 좋아해서 일부러 찾아서 읽었었습니다. 소녀가 미지의 존재에 위협을 받던가..뭐 그런 이야기였죠.

      <사계>는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되도록 크리스마스 전에 읽어야하는데, 요새 쌓아놓은 책들이 많아서 그리 빨리 읽지는 못하겠군요. 도서정가제 대비한다고 산 책들이 여전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대비를 했으면 읽어야 할텐데, 읽지를 않으니...이거 참 왜 대비를 하는지 미스테리군요.

문학이 할 수 있는 것, 혹은 해야만 하는 것

The Book | 2014.11.20 15:09 | Posted by 맥거핀.

공중전과문학
카테고리 인문 > 세계문학론
지은이 W. G. 제발트 (문학동네,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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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200킬로미터 길이로 늘어선 거주지는 남김없이 파괴되었다. 도처에 끔찍하게 뒤틀린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여전히 푸르스름한 인광이 깜빡이는 시체도 있었고 거무스름하게 타버려 원래 크기의 3분의 1로 쪼그라든 시체들도 있었다. 일부는 이미 식어 굳은 자기 몸의 지방 웅덩이에 엉겨붙어 있었다. 폭격이 끝난 며칠 뒤 바로 봉쇄 구역으로 선포된 죽음의 지대 안쪽에서는, 페허지의 열기가 어느 정도 가신 8월에 접어들어 징역대와 수감자들이 식은 잔해들을 치우는 소개작업을 시작했을 때, 일산화탄소에 중독되어 여전히 책상이나 벽에 기대앉아 있는 사람들이 발견되었고, 다른 쪽에서는 난방용 보일러 폭발로 터져나온 끓는 물에 삶아져 덩이진 살과 뼈, 혹은 산처럼 쌓인 시체들이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또다른 이들은 섭씨 1,000도 이상 올라간 열기 속에서 숯이 되고 재가 되어버려서, 생존자들이 가족의 유해를 빨래바구니 하나에 다 담아갈 수 있을 정도였다. (p.44~46)


1943년 7월 말, 영국 공군은 미국 제8공군의 지원을 받아 함부르크와 그 일대를 연속적으로 폭격했다. '고모라 작전'이라 불린 이 프로젝트는 특정의 시설물 타격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 도시를 가능한한 완전히 파괴하고 잿더미로 만드는 것이었다. 폭격은 며칠 간 계속되었고, 이 폭격으로 하루 밤 사이에, 4000파운드 이상의 폭탄이 투하되었고, 하루에만 4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외에도 이차대전 막바지에 영국 공군은 독자적인 40만 번의 출격으로 100만 톤의 폭탄을 적국 영토에 투하했으며, 한 차례 또는 수 차례 이상 공격받았던 총 131개의 독일 도시 가운데 몇몇 도시가 거의 철두철미하게 붕괴되었고, 독일 민간인 60만 명 이상이 이 공중전으로 희생되었다. 100만 톤의 폭탄, 40만 번의 출격, 60만 명의 희생자. 때로 숫자는 무서울 정도로 잔혹하다. 그러나 그 무서울 정도로 잔혹한 숫자는 여전히 많은 것들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 숫자들은 그 이후에 대해서 아무 것도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거대한 폭격 이후 모든 것이 파괴되어 버린 공간에서 이제 인간들은 무엇을 해야할지 이 숫자는 말해주지 않는다. 대신에 이제 다른 것들이 나선다. 잔해를 치우고, 죽은 자들을 묻고, 살아남은 사람들을 치료하고 보호하고 새로운 도시를 재건해야 할, 수많은 사람들, 예를 들어 의사나 간호사, 경찰관과 소방관과 군인, 정치가와 행정가, 심리학자와 상담가, 건축가와 기술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언뜻 그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도 할 일이 있다. 철학자들은 이 파괴의 의미를 물을 것이고, 사회학자들은 이 재난이 사회에 미칠 영향을 생각할 것이며, 교육학자들은 이 재난 속에서 다음의 세대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지를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혹은 문학은? 이 거대한 공습, 폭격, 재난 혹은 범죄나 인간성 말살 속에서 문학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제발트의 <공중전과 문학>은 이것을 묻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문학이 할 수 있는 것, 혹은 문학이 해야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가장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두 단어 공중전(luftkrieg)과 문학(literatur) 사이에 놓인 이 'und'의 간극을 무엇으로 연결할 것인가? 물론 이 질문은 하나의 즉각적인 다른 문제 혹은 비판을 불러올 수 있다. 그것은 혹시 이 질문이 그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연합군의 독일 공습을 무조건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닌가, 전쟁의 가해자인 독일 입장에서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라는 물음이다. 책을 읽으면 이 질문은 오해에 가까운 것처럼 느껴지는데, 제발트의 문제 제기는 전쟁의 전략적인 부분이나, 어떤 역사적인 맥락 혹은 특정 국가를 비난하려는 의도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즉 제발트는 영국을 포함한 연합국이 전쟁을 빨리 끝내려는 전략적인 목적으로, 혹은 독일이 자행한 폭격에 대한 보복전의 성격으로 이 폭격을 실행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들이 일어났다'는 관점으로 이 사태를 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폭격은 어떤 특정의 목표로 실행된 것이 아니라, 단지 폭탄이 그렇게 대량으로 생산될 때부터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만들어진 폭탄은 어딘가에 쏟아부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며, 이것은 독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제발트는 글의 말미에서 이를 더욱 강조하여 말하고 있기도 한데, 독일도 게르니카, 바르샤바, 베오그라드, 로테르담, 스탈린그라드 등에서 수많은 거대한 폭격을 실행했으며, 나치스의 공군 원수 괴링도 기술적 수단만 가능했으면, 런던을 초토화시켰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제발트가 이러한 오해를 불러올 가능성을 무릅쓰고 50년도 더 지난 1990년대 말에 이 질문들을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전쟁이 불러오는 비인간성, 참화, 그 무상함에 다시 경고를 하는 목적 외에도 이것에는 크게 두 가지가 관련되어 있다. 하나는 전후 독일 사회에서 시작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집단적 망각이다. 제발트가 여러 기록과 사례를 들어 논증하고 있는 바대로, 전후 독일 사회는 이 폭격이 불러온 거대한 파괴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꺼렸으며,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으려 했다. 그것은 다시 두 가지 문제와 연괸되는데, 하나는 앞서도 이야기한 바대로 가해자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피해를 이야기하는 것이 불러올 불필요한 문제를 회피하고자 함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보다 큰 문제로 이를 일종의 부끄러운 과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나치스와 관련된 부분은 수많은 독일 국민들의 기억 속에서 잊고 싶은, 터부시되는 기억이며, 따라서 그와 관련된 이들 폭격의 참상마저도 피하고 싶고, 잊고 싶은 기억의 일부분이 되었다. 따라서 전후 독일인들은 이 죽음을 애도하고 기억하기보다는 그 시체를 '빨리 몰래 묻어버리고' 그 위에 새로운 국가와 도시를 건설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다른 하나의 문제는 보다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부분으로 그 상황에서 독일문학이 보인 전반적인 태도이다. 즉 일반 국민이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빨리 잊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할지라도 '문학'마저도 그래야 하는가, 라는 물음이다. 제발트는 전후에서 현재에 이르는 독일문학이 이 부분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으로 답했으며, 일부 이 폭격이나 공습을 다루었다고 하더라도 부적절한 방식으로 다루었다고 말한다. 즉 이 연합국에 의해 이루어진 폭격을 다룬 문학의 수 자체가 많지 않으며, 일부 이 소재를 다룬 헤르만 카자크, 한스 에리히 노사크, 아르노 슈미트, 페터 드 멘델스존 등의 작품이 부적절하게 이것을 묘사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있어서 부적절한 방식과 적절한 방식이란 무엇인가. 제발트가 말하는 부적절한 방식이란 허구화, 문학적인 수사, 통속적인 묘사, 비유의 남용 등이다. 그리고 이의 반대편에 사실에 입각한, 냉정하고 철저한 묘사와 같은 적절한 방식이 있다(예를 들어 가장 위에 인용한 묘사 같은 것이 그에 해당할 것이다). 적어도 이러한 것을 다룰 때에는 그런 방식이 필요하다고 제발트는 본 것이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면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와 역사가가 다른 것은 무엇인가. 그런 것은 역사가들의 영역이 아닌가. 제발트는 (적어도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작가와 역사가의 구별이 무의미하다고 보는 것 같다. 그가 글에서 말하는 전체적인 맥락이나 어조도 그렇고, 그가 글에 인용한 벤야민의 문구를 미뤄보아도 그렇다. 발터 벤야민이 말하는 역사의 천사. "파편에 파편을 쉼없이 쌓아올리며 그 파편을 자기 발 앞에 내던지는 단 하나의 파국을 (본다). 천사는 머물러 있고 싶어하고, 죽은 자들을 깨우고 산산이 부서진 것을 한데 모아 맞추고 싶어한다. 그러나 천국으로부터 폭풍이 닥치더니 그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로 강하게 불어대서, 천사는 날개를 접을 수도 없다. 이 폭풍은 그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그를 떠밀고 있으며, 그러는 사이 그의 앞에는 잔해더미가 하늘까지 치솟는다.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러한 폭풍이다.(p.95)"

아무리 역사가나 작가가 애써 뒤돌아서 이들을 묘사하려 온 힘을 다한다 해도 그들(과 우리)은 끊임없이 미래로 떠밀려 나간다. 진보라는 폭풍에 의해서 말이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고 해도 누군가는 뒤돌아 서서 무엇인가를 사실 그대로 기록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모두가 앞을 보며 나아가는 사이에 잔해는 점점 하늘까지 치솟으며, 그 잔해를 그대로 둔다면 언젠가는 그 앞 길도 잔해로 뒤덮이는 날이 올 것이기 때문이며, 예를 들어 역사가들이 그런 것을 한다고 해도 수많은 역사가들이 숫자만을 기록하느라 또 많은 것을 놓친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그 짐을 나눠져야 하며, 그것이 가장 처음의 질문, 즉 공중전 속에서 문학이 할 수 있는 것, 혹은 문학이 해야만 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제발트의 답이다. 그리고 이는 한편으로 제발트의 문학에 대한, 혹은 작가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담겨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공중전의 이후에, 아니 그보다 더한 것의 이후에도 문학과 작가는 여전히 필요하다는 자부심 말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작가는 망각에 대항하는 자이며 그의 글은 망각에 대항하는 무기이다.


덧1.
이 책 <공중전과 문학>에는 이 글 '공중전과 문학' 외에도 독일문학의 원로로 추앙받는 작가 알프레트 안더쉬를 비판한 '알프레트 안더쉬'도 실려 있다. 여기에도 문학에 대한 제발트의 어떤 태도가 드러나는데, 그것은 문학은 어떤 작가의 생애를 교정하거나 미화하는 도구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위에서 말한 어떤 문학에 대한 자부심과도 연관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덧2.
전체적으로 번역된 문장들이 어딘가모르게 삐걱거린다. 상대적으로 뒤에 '옮긴이의 말'은 드물게 볼 정도로 훌륭하게 잘 쓰여져 있는데, 문장이 이런 걸로 봐서는 글을 못 쓰는 분이라기보다는 번역 능력이 떨어지는 분이 아닌가 싶다.

덧3.
맥락은 많이 다르지만, 2014년의 한국에서 이 책을 읽는 것은 자꾸 어떤 사건을 떠올리게 만든다. 예를 들어 '집단적 망각' 혹은 더 나아가 '망각의 강요'가 불러오는 어떤 심상 말이다. 어쩌면 예전 제주나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들만 보아도 이런 기억과 애도가 없는 '집단적 망각'과 망각의 강요, 더 나아가 왜곡과 희화화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닌, 계속 반복되어 온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망각에 대항하는 우리의 작가들은 누구이며, 그들의 글은 어떠해야 하는가.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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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4.12.06 19: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W.G제발트는 요 몇년사이 꾸준하게 번역이 되는 작가인것 같아요. 전 <토성의 고리>를 읽다가 중단했었는데;; 천천히 느린 호흡으로 읽어야하는 작품이라.. 언젠간 다시 책을 펼치리라 여기고있어요. <공중전과 문학>은 작가가 작정하고 쓴것 같은(일종의 고발서같이) 느낌이 들어요. 제발트로선 그 기억과 기록을 불러내는 일들이 쉽지 않은 일이었을것 같구요. 이 시대에 문학이란 무엇이 될 수 있는지? 작가들은 무엇을 쓰고 쓸 수 있는지? 독자로서 그들에게 기대하고 기다리고 있는것은 무엇인지?.. 그런것들을 생각해 봅니다.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4.12.08 11: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문장을 여러번 곱씹으면서 읽어야 하는 작가들이 있는 것 같아요. 제발트나 헤르타 뮐러 같은...

      말씀하신대로 이 책은 제발트가 독일문학에서 약간 비껴선 상태에서 외부자의 시선을 가지고 쓴 책 같습니다. 문단의 대선배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을 그야말로 대차게 공격합니다. 한국문학계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할 수 있겠죠.

      위에도 썼지만, 저는 읽으면서 계속 세월호 사건이 생각났어요. 왜 아직도 세월호를 이야기하는가,라고 묻는 사람들에 한국의 작가들은 뭐라고 답할 것인가 궁금하고, 어떤 작품들을 후에 이 사건들의 반영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눈먼 자들의 국가>라는 책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작품으로서의 고발을 보고 싶네요.

겸손하지만 부러워하지 않는다

The Book | 2014.11.03 15:32 | Posted by 맥거핀.
나의문화유산답사기일본편.4:교토의명소그들에겐내력이있고,우리
카테고리 역사/문화 > 역사기행
지은이 유홍준 (창비,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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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제본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마지막권 '교토의 명소'편을 읽었다. 처음에는 앞서 다른 편들보다도 ('교토의 명소'라는 제목에 걸맞게) 많이 알려지고 내가 가보기도 했던 곳들 - 예를 들어 금각사(긴카쿠지), 천룡사(덴류지), 용안사(료안지) 같은 곳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조금 더 읽기가 수월하겠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왜냐하면 이번 편에서는 이전의 답사기 일본편들과는 약간 핀트가 달라진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기도 했지만, 이번 편의 포인트는 일본미(美)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정원이다. 일본인들의 정원에 대한 개념은 우리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데, 일본의 정원은 빈 마당을 꾸미는 조경(造景)이 아니라, 정원을 만드는 작정(作庭)이며, 이 정원에는 당대의 어떤 역사적 배경, 지배세력 간의 관계, 정신적인 세계, 미의식 등이 총망라되어 들어간다. 즉 일본의 정원은 시대 배경을 따라 침전조 양식, 마른 산수 정원, 서원조 정원, 지천회유식 정원 등 그 형태를 달리하여 왔으며, 이 각각의 다른 양식은 당대의 여러 요소들의 집약체라고 볼 수 있으며, 동시에 그 하나하나 자체가 당대를 말해주는 역사적 상징물이다. 따라서 교토의 명원을 순례하는 이번 답사기는 그 자체가 일본 역사를 되짚는 것이며, 더 나아가 그 모두를 아우르는 '일본미의 해답'을 찾는 과정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번 편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어떤 '배경지식'들이 꽤 필요하다. 왜냐하면 각각의 정원들이 특정의 양식과 형태로 만들어진 것에는 반드시 어떤 역사적인 배경이 있기 때문이며, 역사적인 배경을 전혀 모르고 정원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단지 경치의 일부분으로만 받아들이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이번 편은 이전의 편들에 비해 조금 딱딱한 감이 있다. 이전 편에 대한 리뷰에서 유홍준 글쓰기의 장점은 과거와 현재를 적절하게 조화시키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번 편에서는 그 조화는 사실 조금 부족한 감도 없잖아 있다. 저자 본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실제 답사를 가서 "이제 공부 끝, 답사 시작!"하면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했는데, 그 '공부 끝'이 꽤 기다려지는 느낌이랄까. 물론 유홍준 교수 특유의 핵심을 짚는 설명으로 그 공부가 그렇게 지루하지만은 않지만 말이다. 물론 그 자신도 그것을 잘 알고 있으며, 글의 중간중간에 이렇게 설명이 길어지는 것에 대한 어떤 미안함을 살짝 내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 정원이 어떻게 아름다운가라는 문제보다도 왜 아름다운가, 이 아름다움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가를 보는 것이 결국 '답사'라는 것의 핵심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이 배경인 일본의 역사에 대해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답사기 자체로 돌아와 이야기한다면, 그 일본의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은 이 정원과 건물들의 내력을 살피는 것이다. 책의 부제인 '그들에겐 내력이 있고, 우리에겐 사연이 있다'라는 말처럼, 유홍준은 사찰과 정원에 들어서기 전에 그것이 왜 그 자리에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졌는지 독자에게 '썰'을 푼다. 예를 들어 에도시대에 건립된 왕가의 별궁이자, 유명한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가 극찬을 한 '가쓰라 이궁'이 왜 그렇게 공을 들여 건립되었는지 그 배경의 일단을 보기 위해서는 에도 막부와 공가(천황가)와의 관계를 알아야만 한다. 막부는 천황과 공가를 견제하고자 공가가 지켜야 할 법도를 정해 공표했고, 그것의 제1조는 "공가 사람들은 밤낮으로 학문에 전념할 것"이었다. 이는 천황과 공가는 정치에 관여하지 말고 학문과 예능에만 몰두하라는 견제를 담은 뜻이었으며, 그것이 또한 한편으로 천황과 공가가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즉 공가의 별궁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은 그렇게 해서 학문과 예능에서 높은 경지에 오른 천황의 정신세계가 담겨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왕가의 재력이나 불세출의 건축가 고보리 엔슈를 모셔올 수 있는 능력에도 그 이유는 있을 것이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것 밖에 뜻을 둘 수 밖에 없었던 공가의 어떤 심정도 그것에 들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우리는 이 가쓰라 이궁이나 수학원 이궁을 따라 살피면서 자연스럽게 일본 역사의 큰 단면 중의 하나인 쇼군과 천황의 관계를 어림하여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내력을 통해 자연스럽게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답사의 기본이기도 하다. 

또한 더 나아가 이 책은 답사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데, 이는 각각의 사찰, 정원, 건물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양식을 아울러 살피는 것이며, 전체적인 흐름을 살피는 것이다. 책은 전체적으로 가마쿠라 시대의 명찰, 무로마치 시대의 명찰, 전국시대 다도의 본가, 에도 시대의 별궁 등을 차례로 살피는 구조로 되어 있으며, 이는 역사의 흐름을 그대로 따른 것이면서 동시에 정원 발달의 흐름과 그에 내재한 어떤 역사적인 흐름을 살피는 것이기도 하다. 책의 말미에 유홍준은 이를 친절하게 정리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정원으로 보면 가마쿠라 시대에는 용안사의 석정(石庭)과 같은 마른 산수가, 그리고 무로마치 시대에는 금각사와 같은 서원조 양식이, 그리고 그 사이에는 모모야마 시대의 다도(茶道) 문화가 그리고 에도 시대에는 가쓰라 이궁과 같은 지천회유식 양식이 발전하였다. 그런데 이 양식들이 등장한 것에는 이유가 있는데, 예를 들어 가마쿠라 시대에 선종이 새로운 사상으로 등장하면서 선을 추구하는 마른 산수가 발달하고 안정된 무가사회에서는 서원조가 탄생하였으며, 모모야마 시대와 같은 혼란기에는 조촐함을 추구하는 다도 정신을 구현한 초암 다실과 노지와 같은 양식이 발전하였고, 또 다시 에도시대라는 안정기에는 왕가의 별궁과 다이묘 정원의 비교적 화려한 지천회유식 양식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이 각각의 정원 양식에는 당대의 정치 분위기와 사회상이 반영되어 있으며, 그것은 단지 한 정원의 내력만을 살펴서는 알 수 없는 것이기도 하며, 전체적인 역사의 흐름을 차례로 살펴본 이후에만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일본의 역사는 사실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낯설다. 그것은 역사적인 배경으로 인해 약간은 의도적으로 일본사의 상당부분을 소홀히 배운 측면에도 있기도 하지만, 이 일본의 역사에는 우리 역사와는 상당히 다른 이질적인 요소들, 예를 들어 우리의 왕과 상당히 개념 차이가 있는 천황, 혹은 무사라는 집단과 그들이 이야기하는 무사도(사무라이 정신), 쇼군과 다이묘, 공가(公家)와 무가(武家), 그리고 불가(佛家) 같은 것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한편으로 중요한 것은 단지 역사적인 사실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까지 어떤 일본인의 정신세계나 정치적인 부분(예를 들어 군국주의 같은 것)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입장에서는 일본인의 사고란 한국인의 사고방식으로 절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예를 들어 이 책에서 말하는 다도의 핵심이라고 하는 '와비사비 - 꽉 짜인 완벽함이 아니라 부족한 듯 여백이 있고, 아름다움을 아직 다하지 않은 감추어진 그 무엇이 있는 것'와 같은 것)이 있다랄까.

그런데 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을 이 답사기는 최대한 설명하려 애쓴다. 그리고 그것은 건물의 내력을 살피기위한 불가피한 것이지만 동시에 다른 효과를 가지기도 한다. 그것은 이 답사기 일본편들의 시작과 연관되는 것으로, 우리를 일본이라는 세계 곁으로 조금 더 가깝게 이끄는 것이다. 답사기 일본편의 첫권에서 유홍준은 우리나라와 일본의 불편한 관계를 이야기하며 어떤 균형을 잡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것은 우리의 역사, 일본의 역사를 따로 분리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한일관계사로서 양국의 역사를 보는 것이며, 그것은 싫어도 옆나라인 일본과의 향후 관계 개선과 유지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답사기 일본편 1권과 2권에서의 상당부분은 우리역사와 일본역사의 관계, 예를 들어 도래인의 흔적, 일본에 끌려간 우리도공들의 발자취 같은 것에 상당부분 지면을 할애한다. 그러던 것이 3권과 특히 이번 4권에 이르러서는 우리보다는 그들에게 조금씩 무게중심이 옮아간다. 즉 그들이 가진 특수한 어떤 것, 그들이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발전시킨 독특한 문화가 무엇인지를 보는 것이다. 그러나 무게중심이 달라졌다고 해서 말하고자 하는 본연의 것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상대방에게 전해준 것이나 우리와 비슷한 상대방의 문화를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가 가진 나름의 독특한 것이 무엇인가 보고자 하는 노력도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상대방이 가진 독특한 무엇인가를 바라볼 때에 필요한 자세를 이 책은 잃지 않고 있다. 그것은 상대방이 가진 것을 인정하고 존중하되, 우리가 가진 것에 대한 자신감과 애정도 잃지 않는 것이다. 유홍준 교수는 우리 것, 특히 백제 문화의 미덕을 이야기하며 다음과 같은 (유명해진) 표현을 썼다. 儉而不陋 華而不侈(검이불루 화이불치) -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조금 변형하여 이 책의 미덕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謙而不羨 讚而不卑 (겸이불선 찬이불비)- 겸손하지만 부러워하지 않고, 칭찬하지만 우리 것을 비하하지 않는다. 그것이 상대의 것을 대하는 기본적인 자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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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한 적 없는 여자를 생각하는 남자들

The Book | 2014.09.23 18:08 | Posted by 맥거핀.
여자없는남자들무라카미하루키소설
카테고리 소설 > 일본소설
지은이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동네,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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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은 조금 특이한 소설집이다. 특이하다는 것은 (국내 출간본에서 나중에 추가한 '사랑하는 잠자'라는 소설을 제외하면) 각각의 소설들이 모두 같은 소재(그리고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인데, 그것은 일단 간단하게 말하면 소설의 주인공들이 모두 말 그대로 '여자 없는 남자'라는 점이다. 즉 소설의 인물들에게는 모두 현재 관계를 가지는 여자가 없다. 이 '관계'라는 것은 육체 관계라고도 혹은 정신적 관계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예스터데이'에 나오는 기타루에게는 어떤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는 여자친구 구리야 에리카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육체 관계가 없고, 반면 '셰에라자드'에 나오는 하바라와 셰에라자드는 육체적인 관계를 나누지만, 그들에게는 어떤 정신적인 연관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즉 그들에게는 모두 현재 관계를 가지는 여자가 없다. 한편으로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관계'라는 말이기도 하지만, '현재'라는 말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과거의 어느 순간에는 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스터데이'에서 기타루와 구리야 에리카의 관계는 이 소설의 시점에서는 이미 과거의 일이며, '셰에라자드'에서 셰에라자드와 하바라의 관계는 현재이지만, 그것이 이제 끝에 이르렀음을 소설은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다른 소설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는 '현재' 여자가 없으나, 그들에게는 과거 어느 순간 여자가 있었고, 그들은 그 여자와 육체적이고도 정신적인 관계를 나누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또 이 소설들의 기묘한 공통점이 드러나는데, 그러한 생각은 어쩌면 그들의 '착각'이거나 '혼자만의 생각'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소설들의 주인공 상대역들인 여자들은 과거 그 주인공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남자들과 육체적인 혹은 정신적인 관계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다시 정리해서 말하자면 이 소설의 인물들은 과거에는 여자가 있었으나 현재에는 여자가 없는 남자들이며, 그 여자들은 과거에 자신을 만나면서 동시에 다른 남자들도 만났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이것은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는데, '여자 없는 남자들'에서 '없다'라는 말은 '현재'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시점(時點)의 의미를 담은 그 물리성을 의미하는 말로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정신적인 없음, 혹은 아예 존재한적이 없음을 동시에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과거의 어느 순간 그들 곁에 여자가 있던 순간에도 사실상 여자는 그들의 곁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여자들은 주인공과 육체 관계를 나누는 순간에도 (육체라는 물리적인 실체는 비록 그곳에 있었을지 몰라도) 정신의 어느 부분은 자신과 관계를 나누는 남자들에게 분산되어 있었거나 어쩌면 그곳에 아예 존재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을 예를 들어 소설 '세예라자드'는 극명하게 보여주는데, 하바라와 육체적인 관계를 나누는 순간에도 세예라자드의 어떤 부분들은 과거 자신이 짝사랑하던 남자에게 가있고, 급기야는 하바라의 육체를 과거의 남자로 대체하여 관계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이 때 여자와 남자, 하바라와 세예라자드는 한 공간에 있지만,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바라가 과거의 남자로 대체되어 있거나 세예라자드의 육체는 껍데기만 남고 그녀의 어딘가는 다른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질문들이 다른 소설들에서 비슷하게 반복된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가후쿠에게나 '기노'에서 기노에게나 '독립기관'에서 도카이 의사에게. 왜 그녀는 나와 자면서 다른 남자들과 잤을까. 혹은 그녀는 그 때 그곳에 정말 존재하고 있던 것일까.


2.
다시 말해서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은 어떤 소재를 공유했다,라고 하기보다는 같은 테마를 반복하는 여섯 개의 변주곡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하루키는 능숙한 솜씨를 내보이며 같은 테마를 지루하지 않게 반복한다. 때로는 건조하게, 때로는 단조풍으로, 때로는 미스테리하고 음산한 기운을 담아서 말이다. 나는 이것이 하루키의 일종의 자신감이라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하루키는 이것을 하나의 소설집으로 묶어서 냈기 때문이다. 즉 하나의 책에서 같은 테마를 반복한다는 것은 작가에게는 일종의 자기복제가 될 위험성이 있기도 하지만, 독자에게도 그것이 자칫 지루한 반복처럼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루키는 분위기와 시점(視點)에 미묘한 변화를 주며 책을 끝까지 읽도록 만든다. 이것은 어쩌면 그가 말 그대로 소설가로서 구사하는 테크닉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올랐으며, 그에 스스로 자신감을 가졌기 때문은 아닐까. 아니, 나는 그의 소설가로서의 테크닉을 의심하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평가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 소설집은 그가 지금까지 자신의 소설들에서 보여줬던 여러 부분들이 고르게 들어있으며, 그것을 적재적소에서 능숙하게 구사한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간의 하루키 소설에 대한 오마주로서) 이것을 섹스로 비유하자면, 그의 단편소설은 어떤 체위를 실험해보는 듯한 느낌이 있었고, 그의 장편은 그 중 그가 특히 잘하는 체위로 집중 공략해서 쾌감을 증폭시킨다는 느낌이 있었다면, 이 단편들은 짧은 단편들에서도 다양한 체위를 다양한 테크닉으로 능수능란하게 구사한달까. 그저 당신은 오르가즘에 도달할 수 있도록 감각을 모으면 되는 것이다.

즉 이 하루키의 소설들에는 그간 그가 다른 소설들에서 보여줬던 요소들이 다양하게 들어 있다. 예를 들어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기묘한 분위기를 띄는 소설의 분위기('기노'나 '독립기관'에서 나타나는 어떤 기묘한 사건들, 혹은 하바라와 셰에라자드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기묘한 배경), 어떤 현실적인 문제에서 벗어나 있는 주인공들(예를 들어 하루키의 소설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는 주인공을 본 기억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등등의 내용적인 부분에서도 그렇지만, 소설의 어떤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그렇다. 단적으로 말해서 소설의 시점(視點)이나 화자 같은 부분도 그러한데, 하루키의 초창기 소설들에서 화자는 항상 '나'였으며 거의 1인칭 시점에서 소설이 전개되었다. 그랬던 것이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라는 소설집에서부터 본격적으로 3인칭 시점이 등장하여, 그의 대표작인 '1Q84'같은 소설도 3인칭 시점으로 전개가 되는데, 이 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들>은 이런 시점이 혼재되어 있다. 예를 들어 '드라이브 마이 카' '세예라자드' '기노' 등은 3인칭 시점으로 그리고 '예스터데이'나 '독립기관'은 '나'가 등장하는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리고 각각의 시점 내부에서도 미묘한 차이가 있는데, '드라이브 마이 카'나 '세예라자드'가 가후쿠나 하바라에 기반한 관찰자적인 시점이라면 '기노'는 보다 전지적인 시점이며, 같은 1인칭 시점이라도 '예스터데이'는 '나'가 이야기에 보다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반면에 '독립기관'에서는 이야기의 중심에서 보다 물러나 있다(그러니 예를 들어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이 소설들에서 '나'의 존재는 왜 필요한 것일까(특히 '독립기관'과 같은 내용이라면), 흥미롭게도 이 두 명의 '나'는 글을 쓰는 일을 하는 사람인데, 이 둘은 같은 나인가, 다른 나인가, 혹은 무라카미 하루키 그 자신인가).

이것을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 여섯 개의 이야기들, 혹은 여섯 개의 변주들은 묘하게 연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주제가 비슷하다는 측면에서가 아니라 소설의 형식이 낳는 어떤 기묘함들인데, 예를 들어 (위에서도 썼지만) '예스터데이'의 나와 '독립기관'의 나는 둘 다 글을 쓰는 남자이면서 동시에 '다니무라'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마지막 '여자 없는 남자들'의 '나'에는 이 소설의 어떤 인물을 끼워넣어도 그렇게 크게 무리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3인칭으로 전개되는 소설들이라 할지라도 이 소설의 어떤 인물을 다른 소설의 어떤 배경에 던져넣는다 할지라도, 예를 들어서 '드라이브 마이 카'의 가후쿠가 '기노'라는 술집에 등장한다고 할지라도, 혹은 '세예라자드'가 사실은 '독립기관'에서 도카이 의사가 사랑한 여자였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즉 다시 말해서 이 단편들은 각각의 온전한 단편이면서도 연결되어 하나의 장편처럼 보이며, 혹은 (하루키의 여러 단편들이 그랬듯) 각각의 개별적인 장편의 하나의 단초들인 것처럼 보인다. (많은 분들이 그렇게 느꼈을테지만 '셰에라자드'나 '기노' 등은 이것으로 부족한, 더 많은 이야기의 일부인 것처럼 보인다.)


3.
즉 <여자 없는 남자들>에 실린 여러 소설들은 과거 하루키 소설의 어떤 부분들을 더 풍성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분명히 비슷한 무엇인가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예스터데이'나 '독립기관'에 등장하는 나, 그러니까 소설가 다니무라. 그 소설의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그 화자. 그는 그렇게 특출나게 잘생겼다고도, 혹은 능력이 뛰어나다고도, 혹은 매력이 있다고도, 혹은 성격적으로 특별히 좋은 면이 있다고도 말할 수 없지만, 살아가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지도 않고, 특정의 취미가 있고 어느 정도 삶을 즐길 줄 알며, 자신의 일의 분야에서는 어느 정도의 루틴에 들어간 것처럼 보이며, 합리적인 사고를 하고, 합리적으로 행동한다. 그러나 그들 주위에는 기타루나 도카이 의사처럼 어딘지 모르게 특이한 남자들이 있었으며, 그 인물들은 그(나)의 기억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그 남자들은 죽거나, 사라진다(즉 지금은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가 없다). 즉 이 나의 주변에는 죽음이 어른거린다(그러나 이들 '나'는 죽음 근처에 있지만, 이들은 대체로 죽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그가 소설 속 화자인 '나'이기 때문에도 그렇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여자들이 있다. 그 여자들은 대체로 외모가 뛰어나거나 아름다운 편이며, 하루키가 늘 주목하는 대로 대체로 가슴크기도 적당하다. '예스터데이'의 구리야 에리카, '사진에서 본 대로 멋진 여자였지만 실물을 마주하니 얼굴보다도 온 몸에 넘치는 순수한 생명력 같은 것이 주의를 끄는' 여자. 혹은 '독립기관'의 도카이의 그녀, 그러니까 '종합적인 존재, 강력한 자석처럼 나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여자. 그러나 문제는 그들의 내부는 여전히 미궁에 놓여져 있다. '예스터데이'에서 기타루는 구리야 에리카를 안는 것을 거의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며, '독립기관'에서 도카이는 그녀의 무엇이 사실 그를 그렇게 끌어당기는 것인지 모른다. 여자들의 내부는 거의 항상 알 수 없는 무엇인가로 가득차 있으며, 남자들은 늘 그것을 독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가후쿠의 죽은 부인이나, 하바라의 셰에라자드나 기노의 전부인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더 거슬러 오르면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의 '시로'나 <1Q84>의 '후카에리'도 마찬가지다. 여자들은 겉으로 완벽해지면 완벽해질수록 내부는 알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된다. 그리고 그녀들은 그렇게 되면 될수록 더 죽음 가까이로 간다.

그리고 다시 그의 반대편에 위에서 말한 평범한 '나'들을 포함한 남자들이 있다. 다시 반복하지만, 이들은 죽음의 가까이에 있지만 죽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는한, 적어도 생활고 때문에 죽음 근처에 가까이 갈 이유는 없다. 그들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고, 그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만, 그 고민은 이상하게도 그들을 극단으로 몰아가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죽기에는 너무 쿨할 뿐이다. 그런데 여기까지가 이 <여자 없는 남자들>의 전작의 남자들이라면 이 <여자 없는 남자들>에는 새로운 유형의 남자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독립기관'의 도카이 의사나 '기노'의 기노같은 남자들. 기노에게 보내는 메시지들은 거의 그간 하루키 소설 속의 남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처럼 보인다. 그것이 하루키의 새 소설을 통해서 느끼는 미묘한 변화다.

나는 상처받아야 할 때 충분히 상처받지 않았다,고 기노는 인정했다. 진짜 아픔을 느껴야 할 때 나는 결정적인 감각을 억눌러버렸다. 통절함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진실과 정면으로 맞서기를 회피하고, 그 결과 이렇게 알맹이 없이 텅 빈 마음을 떠안게 되었다. 뱀들은 그 장소를 손에 넣고 차갑게 박동하는 그들의 심장을 거기에 감춰두려 하고 있다. (p.266)


4.
마지막으로 두 가지 이야기만 덧붙이고 싶다. 하나는 '사랑하는 잠자'는 넣지 않은 편이 훨씬 좋았으리라는 점이다. 테마의 미묘한 변주를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전혀 이질적인 음악이 들어가 있으면 되겠는가. 편집 과정에서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정 넣고 싶다면 차라리 맨 뒤로 돌리는 편이 나았다. (아니면 원서에는 없지만 나중에 추가한 것이라고 최소한도의 설명을 붙이기라도 하든가 말이다. 다만 '사랑하는 잠자'가 그 뒤의 이야기가 많이 궁금하긴 했다.)

그리고 더 한 가지. 예전에 하루키의 소설들에서 늘 어떤 강조점, 방점들이 거슬린다고 했는데, 방점이라는 그 자체가 거슬리는 것인지, 그 '형식'이 거슬리는 것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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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골적인 영화들

Ending Credit | 2014.09.17 15:55 | Posted by 맥거핀.



(<명량>, <타짜 - 신의 손>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명량, 김한민, 2014

모르면 호로자식이제. 1700만이 넘게 든, 지금도 어딘가에서 흥행신기록을 이어가고 있는 김한민의 <명량>에서 (의도치 않게) 많이 회자되고 있는 대사이다. 왜병들에 맞서 나라를 수호하는 이들의 노력을 모르는 후세인은 호로자식이라는 영화 속의 이 말이 그 이후에 여러 글에서 많이 인용된 것은 물론 이유가 있다. 일차적으로는 그것이 다른 글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영화 속에서 영화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대화 혹은 훈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상한 인터랙티브. 그것은 영화 안의 인물이 스크린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이상한 순간이면서도, 동시에 그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을 이상한 동질감으로 묶어 주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래, 이 영화를 보러 온 우리는 적어도 호로자식은 아닌거야. 그 기이함이 내포하는 어떤 함의들은 다른 글들에서도 많이 언급되었기 때문에 길게 할 말은 없지만, 다만 나는 왜 여러 수많은 단어 중에서도 하필이면 '호로자식'이 쓰였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어쩌면 이것이 이 영화가 가지는 어떤 정체성을 설명해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졌다.

호로자식(혹은 후레자식)이라는 말의 어원을 살펴보면 여러 설명이 나오는데, 예를 들어 '호로'를 오랑캐를 뜻하는 호노(胡奴) 혹은 호로(胡虜)로 보는 것, 혹은 '홀의'에서 변형된 것으로 보는 것이 그것이다. 즉 호로자식이라는 말은 오랑캐 노비(포로)의 자식이거나, 혹은 '홀의 자식' 즉 아버지 없이 어머니 홀로 키운 자식이라는 해석이다(사실 이 어원설은 정확하다고는 볼 수 없을 것 같고, 다만 여러 견해들 중의 하나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다만 한 가지를 추가하여 말하자면 전자의 견해로 본다면 사실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는데, 이 어원설과 연관된 부분에 병자호란 이후 청에 포로로 잡혀있다가 돌아온 여자들('환향녀(화냥년)')이 낳은 자식이 '호로자식'이라는 해석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해석이라면 사실 이 영화 <명량>에서 이 단어가 사용되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볼 수도 있는데, 병자호란은 임진왜란 이후에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오랑캐이든 혹은 홀의 자식이든 간에 이 두 가지의 설명이 공유하고 있는 부분은 있다. 즉 이 '호로자식'이라는 말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자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결국 이 영화가 지향하는 것이 여기에 은밀하게 드러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가 결국 원했던 것은 어떤 '교육용 비디오'가 아닐까 하는 물음이다. 

교육공학적으로 볼 때 교육용 비디오가 가져야 할 지향점은 명백하다(여기에 전공을 써먹게 될 줄은 몰랐다). 예를 들어 몇 가지 언급되는 지침들이 있다. 초기의 흥미유발과 긴장감 유발이 되어야 하며, 극적 효과를 가져야 한다. 적절한 장면에서 무엇을 다룰 것인지를 미리 알려야 하며, 매 장면의 도입에서 특정의 사인이 필요하다. 반복, 재예시, 비교/대조 등의 기법을 적절히 활용한다. 스타일의 일관성이 필요하다. 명료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재정리, 요약, 일반화 등을 통하여 무엇을 다루었는가를 알려주도록 한다 등등. 이런 지침들은 일반 영화와도 연관되는 부분이 없다고 말하기 어렵지만, 상충하는 부분이 많다. 즉 다시 말해서 사실 많은 영화들에서 이런 지침들은 필요가 없다. 초기의 흥미나 긴장감 유발이 필요하지 않은 영화도 많고, 스타일의 일관성이나 명료함은 도리어 일반 영화들에서는 독이 되는 면도 있다. 재정리나 요약 등도 일반적인 영화에서는 불필요하거나 영화의 완성도를 망가뜨린다. 즉 '교육용 비디오'의 가장 중요한 지점은 그것이 좋은 비디오(영화)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그것이 교육적인 효과를 가질 수 있는가, 혹은 없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김한민 감독의 <명량>은 이 교육용 비디오의 지침들을 충실하게 따른다. 불가능한 싸움을 시도하는 이순신 장군(최민식)의 모습에서 긴장감이 유발되며, 분열 양상을 보여주는 왜의 진영과 우리의 진영은 이상한 대구를 이룬다(즉 분열된 인물들 속에서 이순신 장군만이 중심을 잡고 있다). 인물들은 전형적이며 대체로 그들의 성격은 고정되어 있다. 샷의 구성은 거의 관습적이며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며, 친절한 반복 설명을 피하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는 마지막 친절한 요약정리와 부연설명을 빼놓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명량>은 상업영화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속살은 거의 교육용 비디오와 동일하다. 물론 어떤 영화들(사실 거의 모든 영화들)은 특정의 메시지를 담는다. 때로는 우리는 그것을 '교훈'이라고 약간은 비꼬는 의미를 담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로 많은 영화들에서 우리가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이 메시지가 적절하게 감추어져 있거나 교묘한 메타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한민 감독의 <명량>은 이보다 더 노골적이다. 아니 그 노골적인 메시지를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이 영화가 가지는 전략이다.

그것이 노골적이지만 거부감을 중화시키면서 1700만이라는 숫자를 끌어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즉 이순신 장군은 어떤 이념과 사상에도 벗어나 있는 말 그대로 국민적인 영웅이고,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감독은 보다 노골적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도 괜찮다, 아니 오히려 그것이 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야기의 참신함이나 구성의 독특함이 아니고 모두 아는 이야기를 최대한 멋지게 그려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이겼다는 사실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다. 우리는 누가 이겼나를 궁금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승리가 얼마나 멋진 것이었나, 그것을 눈 앞에서 보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다. 즉 여기에는 관습적인 구도와 관습적인 샷이 필요했다. 새로운 구성과 새로운 샷은 관객을 어지럽게 만들 뿐이고, 기존의 것들을 보다 크게, 보다 세게, 보다 웅장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고, 감독은 판단했을 것이다. 보다 노골적으로 말이다.

<명량>의 전반부는 지루하고 조금은 따분해보였지만, 후반부 해전 씬으로 넘어가면서 점차 영화는 활력을 되찾는다. 나는 그것이 처음에는 영화의 클라이막스가 결국 해전이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점차 이상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처음의 해전의 준비나 우리 진영의 대립 같은 부분은 보다 사실에 가까운 부분, 혹은 사실에 기반한 고증들이 필요한 부분이고, 나중의 해전은 보다 허구에 가까운 부분, 혹은 상상의 나래가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즉 해전에 대해서는 우리는 불가능한 승리를 알고, 약간의 전술에 대해 들어서 알지만, 사실 세부적인 전황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런데 이 영화 <명량>은 그 해전의 시시각각의 흐름을 마치 우리가 옆에서 보는 것처럼 묘사해준다. 다시 말해서 영화 <명량>은 고증할 수 있는 부분은 부실한 묘사를 하거나 어물쩡하게 넘어가거나, 왜곡된 묘사를 하고, 고증할 수 없는 부분은 공들여서 마치 사실을 보여주는 것처럼 묘사한다(나는 단순히 어떤 그 해전의 불가능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결과만을 놓고 봐서도 불가능한 승리였음이 사실이므로, 그 해전에는 분명히 불가능해보이는 무엇인가가 들어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정씨 여인(이정현)이 치마를 벗어서 흔드는 장면도 불가능한 것이라고 비웃음을 당하지만, 그런 것이 실제로 있었지 말란 법은 없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알 수 있는 것에는 지루해하고, 나는 결국 알 수 없는 것만을 즐겁게 보았다. 혹은 이 교육용 비디오는 교육해야 하는 것은 어물쩡 넘어가고, 교육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공을 들여 정밀하게 교육했다. 나는 무엇을 보았던가.


 

타짜 - 신의 손, 강형철, 2014

영화를 같이 보고 나온 분은 이런 말을 했다. 아니 뭐 도박을 벗어난다고 하더니, 결국 도박으로 복수하고, 도박으로 행복해지는구만. 나는 사실 그것이 '타짜'라는 영화, 그리고 그 영화가 가지는 어떤 딜레마를 뭉뚱그려서 이야기해준다고 생각한다. 타짜에서 계속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메시지가 있다. 도박을 끊어라, 도박을 끊어야 행복해진다. 그러나 영화 속 어떤 인물들도 이 메시지를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영화 속 인물들이 이 메시지에 따른다면 영화(혹은 만화)가 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박 끊고 성실하게 벌어서 성실하게 사는 게 도대체 무슨 영화가,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겠는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예 그 메시지를 없앨 수는 없다. 그러므로 영화 속에서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메시지는 결코 전면에 나서지 않고 은밀하게 암시될 뿐이며, 그것은 결말에서도 마찬가지다. 고니(조승우)가 나온 1편의 결말도 어딘지 모르게 어물쩡 넘어가는 느낌이 있으며, 대길(최승현)이 나온 2편의 결말도 그런 면에서는 비슷하다.

다만 내가 느낀 차이가 있다면 2편은 보다 노골적이라는 것이다. 1편은 흐릿하고 모호하게 처리했지만, 2편은 이것을 마치 해피엔딩처럼(혹은 눈밭의 광땡처럼) 찍었다. 글쎄, 영화를 본 분이 있다면 질문을 던지고 싶다. 이것은 해피엔딩인가, 아닌가. 아니면 질문을 이렇게 바꿀 수도 있다. 그들에게 남겨진 돈 때문에 그들은 해피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 이것은 마치 감독의 전작 <써니>를 연상케 만드는 부분이 있는데, <써니>도 이 마지막 장면을 해피엔딩처럼 보이게 찍었기 때문이다. 아니, 나는 해피엔딩이 아닌데 해피엔딩처럼 '보이게' 찍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보기에 따라 해피엔딩일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감독 강형철은 두 번 모두 그것을 행복한 무엇으로 보이게 했으며, 그 무엇에는 어쩌면 구린내 나는 무엇인가가 담겨 있을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그 구린내 나는 무엇 중의 하나는 단적으로 '돈'과 같은 것, 혹은 돈으로 이루어지는 행복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돈이 스승이고, 돈이 무엇이라도 규정한다는 영화 속 타짜들의 말은 단지 타짜들의 말일 뿐인가, 아니면 결국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함의인가.

이 영화의 샷들은 <명량>과 거의 대척점에 서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특히 영화의 초반부부터 중반까지 영화는 계속 화려한 잔재주들을 구사한다. 이야기의 속도감도 있지만, 샷의 어떤 속도감과 재기발랄함이 눈을 즐겁게 한다. 그런데 그것이 계속 지치지 않고 이어지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재기발랄한 잔재주들은 결국 무엇을 위함인가. 이것은 영화의 내용과도 연관되는데, 영화의 내용으로 비추어 볼 때 화투판에서 어떤 잔재주들, 예를 들어 패를 돌린다거나, 패를 화려하게 섞는다거나 하는 등의 손기술들은 다른 무엇을 숨기거나 무엇을 바꾸기 위함이다. 즉 (영화 속 이야기로 돌아가면) 여자가 팬티를 슬쩍 보여줄 때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며, 시선이 그 쪽으로 돌아간 자들은 반드시 어떤 큰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 영화는 계속 잔재주들을 끊임없이 구사한다. 그리고 그 잔재주들은 우리의 시선을 다른 무엇으로 돌리고자 함인 것 같다. 그 우리의 시선 이면에 있는 것들, 그래서 우리가 대가를 치른 것은 무엇일까.
  
즉 잔재주들을 보는 것은 즐겁지만, 그 잔재주들이 과해지면 다른 부작용을 낳는다. 그것은 그 잔재주 이면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이것은 영화의 패착일까. 혹은 도리어 영화의 노림수일까(이것은 어쩌면 대길의 전략과 비슷한 것일까. 마지막 대길의 전략은 잔재주를 일부러 내보이는 것이다. 즉 그 잔재주를 일부러 잡아내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전략이 성공하려면 전제가 있는데, 그 이면에는 다른 잔재주가 없어야 한다. 즉 그 이면은 깨끗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이 깨끗했던가. 그것을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영화의 노림수라고 해도 여전히 뭔가 꺼림칙함이 남는 것은 이 영화는 한끗이 장땡을 이길 수 있다고 말하고자 하는(혹은 그것을 말한다고 내세우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끗이 장땡을 이길 수 있는 데에는 결국 아무런 기술이 없다, 그것에는 예를 들어 대길의 진심 같은 것이 들어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사실 이 영화는 그 속에 다른 기술을 슬그머니 감추고 있다. 이 점철된 잔재주 같은 것들 말이다.

그래서 감독의 전작 <써니>와 마찬가지로 영화는 즐겁게 보았지만, 이 즐거움 속에 어딘지 모르게 개운하지 않은 뒷맛이 남는다. 무엇인가가 빠져나간 것 같은 느낌. 어쩌면 영화 속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지금까지 수술당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그 화려한 손기술들, 혹은 화려한 샷들에 취해 있는 사이에 말이다. 당신의 셔츠를 슬그머니 올려보라. 어쩌면 무엇인가 수술 자국이 남아 있지 않은지.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

아무튼 두 영화는 흥행했거나, 흥행하고 있다. 스크린 독점에 대해서, 혹은 영웅을 갈망하는 사회에 대해서, 심지어는 박근혜 지지자들에 대해서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잘 모르는 것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나는 박근혜 지지자가 아닌데도 그 영화 <명량>을 보았다는 사실이다). 다만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두 영화 모두 노골적이라는 사실이며 그 노골적인 전략이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골적인 교육용 영화, 그렇기 때문에 또한 노골적으로 상업적인 영화. 아니면 그 반대. 노골적인 상업적 영화, 그렇기 때문에 또한 노골적으로 교육적인 영화(이 시대에 돈을 벌기 위해서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최근에 한국영화들을 보면서 우려되는 것 중의 하나는 위의 영화들 외에도 점점 노골적인 영화들이 늘어간다는 것이다. 점점 노골적으로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은 그 노골성이 성공을 거둘수록 더욱 심화될 것이다. 영화는 점점 프로파간다와 경계가 흐려지고, 그것은 단지 영화만이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그럴수록 점점 그들을 구별해 내지 못하며, 그 어딘가에서 "나를 가르치려 들지마라!"고 외치며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 같다. 


- 2014년 8-9월, CGV 역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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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4.10.12 15: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명량>은 개봉할때만해도 한 번 봐야지 그랬던 영화인데 결과적으로 못보고 지나가버렸습니다. 올여름내내 워낙 이슈가 많이 된 영화여서 이래저래 그런 현상들을 바라보다가 차츰 볼 마음이 시들해지기도했구요. 상영관이 한참 줄었을때 한 번 볼 기회가 있었는데 시간이 안맞아서 다른영화를 봤어요. 근데 명량은 제 주변 사람들도 많이 봤더라구요. 평소 영화를 잘 안보시는 엄마도 친구분들이랑 관람하시곤 한 말씀 하셨고 친구는 봤는데 재미없더라며 툴툴거렸구요.
    언젠가 기회가 되면 다운로드로도 한 번 보긴 봐야할 것 같아요 ^^;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4.10.14 12: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볼까말까하다가 그래도 최민식의 연기가 보고 싶어서 봤는데, 연기도 그렇게 인상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최근에 최민식이 나왔던 다른 영화들의 연기가 워낙 강렬한 탓도 있겠지만요.

      아무튼 이 영화는 말 그대로 흥행을 노리고 만들어졌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물론 모든 영화는 흥행을 노리는 게 당연하고, 노린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지만요. 흥행을 위해서는 민망함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달까, 그런 느낌이 조금 있었습니다. 뭐 아무튼 성공했지요. 노렸는데, 성공하지 못한 것보다는 낫다고 할 수도...

늦은 영화 감상기

Ending Credit | 2014.08.12 02:11 | Posted by 맥거핀.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 <군도: 민란의 시대>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최근에 극장에서 본 2편의 영화에 대한 감상이랄 것도 없는 간소한 감상.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 맷 리브스, 2014

이 영화에서 아마도 가장 주목할 만한 순간은 시저가 유인원이 인간보다 낫지 않다, 그러니까 결국 유인원과 인간은 다를 바가 없다고 깨닫는 장면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장면이야말로 유인원이 일종의 '여명'의 시기에 들어설 수 있었던 이유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이 영화의 한국어 제목은 '반격의 서막'이지만, 사실 영화의 원제에는 '반격'같은 것은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인간과 유인원의 대립구도를 만들고 싶은 수입사의 멋대로 제목일 뿐이고, 원래 제목은 간략하게 'Dawn of the Planet of the Apes'이다). 즉 이 영화에 이르러서야 유인원들은 예전과는 다른 하나의 새로운 단계로 나아갔고, 그것은 결코 현재의 인간들조차도 이룩하지 못한 단계였다. 그것은 우리(유인원 혹은 인간)가 다른 개체들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을 벗어나는 것이고, 그것이 가능했기 때문에 결국 이 영화 속 세계에서 유인원은 이 행성을 지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집단은 결국 상대방을 이길 수 없는 법이니까(역사적으로 볼 때 자신들이 타 종족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종족들은 거의 대체로 파멸의 길로 스스로 들어섰다).

그것은 이 유인원이라는 집단의 내적인 부분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그 이전까지는 유인원은 그저 유인원이면 되었다. 즉 리더 시저는 서로가 서로를 죽이지 않는 것이 일종의 유인원의 본성과 같은 것이라고 믿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악한 본성을 가진 인간보다 유인원이 낫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므로 시저가 그저 무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격은 유인원이라는 사실, 그 자체면 되었고, 그 받아들여지는 유인원은 오로지 한 가지의 대원칙, 즉 '유인원은 유인원을 죽여서는 안된다'의 테두리 안에만 들어있으면 되었다. 그러나 시저가 많은 희생을 얻고 얻을 수 있었던 값진 인식은 사실 유인원의 본성도 그런 것만은 아니며, 유인원도 결국 탐욕스러운 인간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이제 유인원이라는 무리는 그저 '유인원이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유인원을 유인원이도록 하는 다른 무엇인가(단순히 서로를 죽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넘어서는)를 갖추어야 하는 단계로 들어선 것이다. 즉 시저가 코바에게 내린 '너는 유인원이 아니다!'라는 정언명제 이후에는 유인원은 유인원이기 위해서 다른 무엇인가가 필요해지게 되었고, 그것은 이제 일종의 법과 질서의 단계(유인원이 유인원이기 위해서는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라는 물음)로 이 무리가 진화하는 순간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시저가 코바에게 선언하는 이 장면은 이상하게도 <다크 나이트>에서 배트맨이 조커를 붙잡는 장면을 연상시켰는데, 나는 이 장면에서 시저가 이 딜레마를 어떻게 헤쳐나갈지 궁금했다. 그런데 이 예상을 뒤엎는 선언이라니. 이 장면에서 리더의 조건이라든가, 결단력 같은 이야기를 끄집어 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배트맨이라면 "너는 인간이 아니다!"라고 선언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물론 배트맨은 그렇게 선언하지 못해 끝끝내 조커에게 조롱당했지만..) 

그러므로 시저라는 위대한 영웅은 사라져가지만,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결코 인간들보다 나을 것이 없으며, 법과 질서라는 새로운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배운, 그야말로 '새벽의 단계'로 들어서고 있으니 크게 걱정은 안된다. 도리어 걱정되는 것은 영화 속의, 혹은 영화 밖의 인간들인데, 인간들은 여전히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위대한(사실은 위대하다고 착각하는) 리더의 영도에 따라 파멸의 길로 스스로를 자꾸 몰아넣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로가 자신들이 우월하다고 믿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경우는 어떤가. 시작하면 우리도 결국은 많은 희생을 당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믿으며 끝끝내 전면전을 피하려 애썼던 시저의 고뇌가 요즘에는 현실에서도 잘 보이지 않는다. 큰 전쟁에서든 작은 전쟁에서든.


군도: 민란의 시대, 윤종빈, 2014

그리고 여기 또 하나의 다른 영웅을 보여주는 것처럼 밑밥을 깔았다가,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욕을 먹고 있는 영화가 있다. 많은 평자들이 지적했듯 영화 <군도>는 초반에는 웨스턴의 형식을 빌려 일종의 영웅설화를 보여주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처음 돌무치(하정우)의 캐릭터를 만드는 과정은 웨스턴과 영웅설화의 이상한 조합이다. 돌무치는 설화 속의 영웅들처럼 비범하게 태어났고(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웨스턴의 영웅들처럼 일반적인 마을 집단에서 유리되어 있다(마을 외부 허허벌판 속에 있는 돌무치의 집). 설화 속의 영웅들처럼 어려서 고난을 받고(그는 18살에 어머니와 누이를 잃는다), 웨스턴의 영웅들처럼 혈혈단신으로 적진으로 침입해 들어간다. 물론 이는 영웅설화나 웨스턴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주인공을 강화시키기 위한 장치. 돌무치는 이를 계기로 '추설'이라는 군도(群盜)의 간택을 받고, 이제 그 무리 속에서 성장하며, 그 영웅성을 극대화시켜 복수를 성공시킬 일만 남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영화가 이상하게 비트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은 이제부터다. 돌무치의 영웅적인 성장과 그의 호쾌한 복수를 보여주어도 시간이 모자랄 판인데, 영화는 돌연 악역 조윤(강동원)의 캐릭터를 돌무치만큼 공들여 묘사하더니 그에게 절대힘, 그러니까 아무도, 심지어는 돌무치도 이길 수 없는 어마어마한 힘을 부여한다. 이는 사실 영웅설화나 웨스턴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영웅설화나 웨스턴에서는 악역은 주인공의 영웅성을 부각시킬 정도로 강력해야 하기는 하지만, 결국 주인공에게 패배하고 주인공의 영웅성을 극대화시키는 데에 머물러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당연히 모를 리 없는 미친 영화감독 윤종빈은 조윤에게 그런 어마어마한 힘을 부여함과 동시에 이질적인 나레이션을 붙임으로써 그의 존재를 시작부터 관객들에게 강하게 각인시킨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론 그가 미쳤다고 보는 관점은 이 영화를 영웅담으로 보는 관점에서만 타당한 것이다. 어쩌면 그에게 이 영화를 영웅담으로 만드려는 의지는 애초부터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것을 영웅담으로 보며, 왜 영웅이 그것밖에 안되냐는 비난은 오로지 애타게 영웅을 바라는 우리들의 의지가 빚어낸 오해는 아닐까. 왜냐하면 이 이상한 영웅담에는 가장 중요한 부분, 즉 영웅의 각성과 그의 성장이 전적으로 빠져있기 때문이다. 돌무치는 추설의 무리가 된 이후에도 그다지 성장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의 마음 속에는 사실 백성을 살린다,라는 대의보다는 개인적인 복수가 여전히 더 크게 위치해 있으며, 그는 여전히 어리석고 별로 생각이 없어 보이며, 결국 조윤을 이기지 못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조윤을 이기는 몫은 감독 윤종빈이 그에게 줄 마음이 없다. 왜냐하면 그를 궁극적으로 이기는 것은 그가 아니라 이름모를 한 무리의 백성들이며, 영화의 제목은 '군도: 영웅의 시대'가 아니라 '군도: 민란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윤종빈은 몇 가지 설정들(예를 들어 타이틀롤)이나 음악들로 분명 어떤 착각을 준 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가 애초부터 찍고자 하는 것은 영웅설화나 웨스턴이 아니었다. 보통의 영웅설화나 웨스턴에서 일반 민중들은 그저 고통과 압제에서 신음하다가 영웅의 등장으로 구원받는 시혜의 대상이거나 혹은 영웅의 활약을 지켜보며 박수를 보내는 구경꾼들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그렇게 되면 문제가 있는 게 그렇게 되면 영화는 '군도: 영웅의 시대'가 되기 때문이다. 윤종빈은 선택을 해야했고, 그 선택은 결국 돌무치를 영웅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고, 결국 민란을 선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민란은 결국 시혜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도 조윤에 대한 1차 습격이 결국 참담한 실패로 끝나는 것은 그들의 이제까지의 습격이 일종의 시혜와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추설이라는 조직은 그 이전까지 백성들과 거의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다. 그들의 아지트는 아무도 모르는 산속 깊은 곳에 있고, 그들의 조직은 아무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의 조직은 일종의 엘리트 집단이고, 그들은 영웅으로서 백성 앞에 짠 하고 나타나 일종의 혜택을 줄 뿐이다(이런 이들의 일종의 시혜 의식은 그들의 회의 시간에도 잘 드러난다). 그런 그들이 조윤에 대한 재습격에서 결국 승리하는 것은 백성들의 자연스런 참여의 결과, 즉 진정한 민란에 의해서만 가능했다(물론 이는 그들이 대폭 수가 줄어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결국 이는 일종의 개방적인 조직으로 추설이 변모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즉 진정한 의미에서의 군도인 것이다).

이는 백성들의 입장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데, 이는 결국 구경꾼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짓는 자로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조윤이 백성들과 대치한 장면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누구든 자신의 운명을 바꾸려는 자는 나오라는 조윤의 외침은 백성들을 향한 외침이면서 결국 자신을 향한 외침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조윤이야말로 결국 자신의 운명에 순응한 자이기 때문이며, 아마도 이것이 조윤이라는 캐릭터가 구체적으로 설명되어야 할 이유일 것이기 때문이다. 조윤은 실제의 조선시대의 많은 실제 인물들이 그러했듯이 벼슬길에 나아갈 길이 막혔기 때문에 명예보다는 재물로 방향을 돌린 '땅귀신' 중의 하나였으며, 그것으로 자신의 능력을 아버지에게 인정받기를 바랐다(그가 땅문서를 모아 가장 처음 한 일은 아버지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를 어떤 의미에서는 왜곡된 인정투쟁으로 보아도 될 것인데, 이의 기저에는 결국 자신의 운명에 대한 일종의 체념이 들어가 있다. 즉 그는 그 자신의 물음처럼 연꽃의 의지가 아닌 신의 뜻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돌무치와 함께 창을 들고 따라 나선 민중들은 다르다. 그들은 그 스스로 신분제라는 신의 뜻을 벗어나려 하였으며, 이는 탐관오리의 손자로 태어났으나 추설의 무리에서 자라난 아이에게도 역으로 마찬가지일 것이다. 즉 이 역시도 연꽃의 의지인 것이다.


덧.
그래서 어떻게든 엮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싶은 의지는 잘 알겠지만, 이 영화 <군도>를 <명량>과 엮어서 <명량>에는 리더가 있지만, <군도>에는 리더가 없고, <명량>의 영웅담은 잘 짜여져 있지만, <군도>의 영웅담은 약하다느니 하는 비교는 조금은 부당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군도>는 사실 영웅담을 만들 의지 자체가 별로 없기 때문이며,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서 일종의 영웅적 배경을 초반에 깔아야 했지만, 사실 하고자 하는 얘기는 그게 아니었기 때문이다(반면 <명량>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고, 그저 그의 며칠을 보여주기만 해도 되었다. 적어도 이순신이 영웅인 것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테니. 아무튼 이 영화를 보지 않았으니 이 이상 할 말은 없다). 즉 어떤 사람들은 영웅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영웅을 결국 이야기하지 않는 영화에 그러니까 영웅이 없기 때문에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물론 영화의 흥행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얘기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군도>보다 <명량>이 흥행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며, 그것은 어떤 징후적인 문제와도 조금은 연관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흥행영화들이 늘 그랬듯이 영화의 완성도와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한 마디 덧붙이자면 <명량>을 보지 않았으므로 이는 <군도>가 <명량>보다 낫다는 코멘트가 아니다).

얘기한 김에 한 마디 더하자면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은 위의 두 영화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이나 <군도: 민란의 시대>나 거의 모든 캐릭터들이 살아 있으며, 그 캐릭터들을 모두 잡고 가려는 노력이 인상적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특히 <군도>는 윤종빈 감독의 거의 모든 영화들이 그랬듯이 캐릭터들의 열전이며, 그것은 특히 악역 조윤에서 빛을 발한다. 도리어 욕을 먹기는 했지만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왜 악역이 (주인공보다도 더) 빛을 발하는 것이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예를 들어 <다크 나이트>가 배트맨의 영화가 아니라 조커의 영화라고 해서 아무도 그것에 대해서 뭐라하지 않는데 말이다. 아무튼 요즘의 누군가들은 악이 그저 맥락없는 악이기를 바라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어떤 징후적인 문제와 연관되는 것 같다(다만 선한 우리가 그 '맥락없는 악'보다 나을 수 있는 점을 한 가지라도 찾는다면 적어도 우리는 어떤 맥락을 찾으려고 노력한다는 점을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 2014년 7~8월, 대한극장, CGV 영등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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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4.08.17 19: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 <혹성탈출: 반격의서막>은 보고난뒤 다음편이 저절로 예측이 되더군요. 시저와그의무리들은 말씀하신것처럼 유인원은 유인원을 죽이지 않는다 라는 계명을 지키기위해 "법과 질서의 단계"로 진화의 과정을 밟게될것 같고 인간,인류는 그와 역행하는 길을 걷게 될것 같더라구요. 마치 1968년도판 혹성탈출에서 봤던 뇌가 제거된 노예상태의 인류를 향해서말이죠. 다음편에서 유인원과 인간사이의 대결이나 갈등이 어떤식으로 펼쳐질지..

    <군도,민란의시대> 재밌게잘 봤고 조윤에 포커스맟춤도 불만이 없어요.
    좀 거슬렸던건 영화중간중간 뜬금없는 조윤나레이션 이었지만..
    아 그리고 돌치 하정우의 전라도사투리가 좀 겉도는 느낌.
    정말 "캐릭터들의 열전"! 그자체. ^^
    *강동원이 보여준 칼과 춤의 동선은 길이 회자될듯 합니다.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4.08.19 10: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시저의 깨달음은 꽤 울림이 깊었습니다. 우리가 남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가 매번 그렇게 얘기하면서도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경지라고 할 수도 있겠죠. 아무튼 저는 혹성탈출 리부트 1탄보다는 훨씬 좋게봤구요. 이렇게 오락성과 메시지를 적절히 균형잡는 할리우드의 능력은 여전히 우리 영화들에 부족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다음번 3편이 나와도 즐거운 마음으로 볼 것 같아요.

      무술감독 정두홍 씨던가..강동원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칼을 잘 쓰는 배우 중의 하나라고 하더군요. 확실히 이 악역은 강동원만의 것이다,라는 느낌이 있어요. 다른 누가 이 역을 했어도 강동원 만큼의 어떤 분위기를 내기란 힘들겠죠. 윤종빈 감독 영화가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특정의 대사들이 계속 회자되는 것은 그가 그만큼 캐릭터를 만드는 데에 능한 감독이기 때문일 겁니다. 그의 영화 속 대사들 중에 (특히 남자들 사이에서) 계속 활용(?)되는 대사들이 참 얼마나 많은지요.

      날씨가 슬슬 썰렁해지는 군요. 이 지겨운 비들이 지나가면 가을의 얼굴이 살짝이라도 보일는지요..환절기에 건강 잘 챙기시기 바랍니다.

불가능한 속죄

Interlude | 2014.07.22 16:20 | Posted by 맥거핀.




속죄(贖罪), 구로사와 기요시, 2012

(작품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미나토 가나에의 소설 <속죄>를 5부작 드라마로 만든 구로사와 기요시의 <속죄>를 보다 보면 뇌리에 남을 수 밖에 없는 장면들이 있다. 아무도 없는 학교에서 공을 가지고 노는 소녀들, 그리고 음산한 남자의 등장과 부탁, 그리고 그것에 응하는 에미리, 소녀들을 등지고 떠나는 에미리와 남자의 뒷모습, 그리고 사건이 벌어진 후 다시 만난 네 소녀들과 에미리의 어머니(아사코, 코이즈미 쿄코), 그리고 살아남은 네 소녀들에게 가해지는 속죄의 강요. 물론 이것이 뇌리에 남는 이유는 일련의 이 장면들이 이야기의 흐름에서 매우 중요한 장면들이며, 작품 속에서 에미리의 어머니(아사코)를 포함한 이 다섯 여자들의 이후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장면들인 것에 이유가 있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이 전부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어떤 기묘한 느낌을 주는 장면들이기도 하며 일련의 질문들 - 예를 들어 이런 질문들. 이 남자는 누구인가, 남자가 데려간 학교 체육관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소녀들은 왜 조금 더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았는가, 그렇다고 해도 이 속죄의 강요는 정당한가, 등등 - 을 생각케 하는 장면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며 조금 더 단순하게 말하면 이 장면들이 계속 반복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드라마의 구성으로는 약간 특이하게도 이 일련의 시퀀스는 일종의 액자로서 매회 반복이 된다. 물론 그것에도 이유는 있을 터였다. 그것은 개개의 소녀들이 주인공이 되어 매회를 이끌어 간다는 이 드라마의 구조(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미나토 가나에의 소설도 이 드라마처럼 화자가 바뀌면서 이야기를 끌어가는 구조라고 알고 있다)에서 연유하기도 했을 것이고, 그것이 그만큼 중요한 장면이니 주의 깊게 보라는 신호인 것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이 반복은 이상한 다른 잔상들을 남긴다. (한 마디 더 붙여두자면 후에 이 드라마는 영화판으로 재편집되기도 했는데, 이 일련의 시퀀스들은 드라마와 비슷하게 중간중간 계속 반복된다. 전편의 이야기를 리마인드 시키는 것이 중요한 드라마라면 이러한 반복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도 있지만, 영화에서 굳이 이렇게 해야만 했을 이유란 무엇일까. 또 한편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구로사와 기요시가 이 장면들을 반복시키기는 하지만 미묘한 변주로 중간중간 다른 느낌을 주며, 각각의 주인공들을 주목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가장 마지막에 반복되는 속죄 강요 씬은 아사코가 말하기 직전 그녀가 묶고 있던 머리를 푸는 장면을 넣음으로써 그녀에게 효과적으로 주목하게 만든다. 즉 지금까지 반복되는 장면 속에서 우리가 그것을 듣고 있던 네 소녀들의 심정만을 생각해 왔다면 이 장면에서 처음으로 이를 말하는 어머니의 심정을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반복이 남기는 잔상 중에 하나는 바로 반복한다는 것 그 자체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반복되는 이 '장면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이 반복한다는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라는 물음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결국 마지막에 가서 알게 되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사실은 반복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체적인 면에서도 그렇고 개별적인 장면에서도 그렇다. 예를 들어 이 반복되는 시퀀스 중 남자가 에미리를 데려가는 것을 소녀들이 뒤에서 바라보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오래전 아사코(에미리의 어머니)가 벌인 일들의 반복이며, 동시에 이후에 변형된 형태로서 다시 아사코에 의해 반복 시도된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지나친 면이 있다. 아사코가 과거에 한 것은 자살의 방조이지만 소녀들의 행위는 조금 다르다. 그러나 남자가 에미리를 데리고 갈 때 소녀들은 어렴풋하게 알고 있으며, 그것을 보는 우리 역시 대개 짐작한다. 에미리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말이다. 그것을 구로사와 기요시는 효과적인 컨트롤로 보여주는데, 예를 들어 남자와 에미리가 학교 건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뒷모습을 잡은 소녀들의 시점숏 옆에 매회 贖罪라는 제목을 띄우는 것의 의미가 그것이다.) 이러한 작은 부분들은 각각의 이야기에서 약간은 변형된 형태로 반복되는데, 예를 들어 5편에서 아사코가 부잣집 남자와 결혼했다는 진술은 1편의 사에(아오이 유우)의 이야기로 변주되며, 질투와 시기의 고백은 2편 마키(코이케 에이코)나 4편 유카(이케와키 치즈루)의 이야기에서, 누군가가 가진 중요한 것을 빼앗는 것이 복수라는 5편의 이야기는 다시 4편 유카의 이야기를 연상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서 이야기 상으로 볼 때 아사코가 벌인 일련의 일들은 에미리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거쳐 기묘하게도 살아 남은 네 소녀들에 의해 일정부분 반복되며 이는 이 아사코가 소녀들에게 강요한, 그리고 소녀들이 수행하려고 애썼던 속죄(贖罪)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속죄'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이 이야기에서 '속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없다. 즉 아이러니하게도 '속죄'라는 것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했지만, 이 이야기는 도리어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에나 마키, 아키코에 의해 수행된 속죄는 사건의 해결에 도움이 되지도 못하고 그 자신의 삶만 망가뜨렸다는 점에서 속죄라고 보기는 힘들고, 사건의 해결에 도움을 준 유카는 사실상 타인의 삶을 망가뜨린다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속죄가 아니다(그것을 마지막 "행복하게 살라"는 아사코의 대사로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마지막 아사코의 속죄 시도 역시 경찰에 의해 실패한다. 즉 이 영화의 모든 속죄는 사실상 실패한다. 아마도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결국 이 소녀들이 속죄의 주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즉 이 이야기에서 가장 기묘한 것은(그리고 이 이야기가 흥미를 주는 것은) 이들이 저지른 '죄'라는 것이 명확하지가 않고 그것이 정확하게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소녀들이 저지른 '갚아야 하는 죄'라는 것은 뭘까. 범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아이들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가, 기억하지 않는 것인가)? 두려움에 나서지 못한 것? 혹은 에미리를 죽게 내버려 둔 것? 아니면 그의 근원에 있는 에미리에 대한 질투? 아니면 그 총체로서의 무엇? (이것이 어쩌면 이런 이야기에서 보는 이에게 흥미를 가지게 하는 기이한 점이다. 예를 들어 <친절한 금자씨>의 기묘한 변주. 사실 '속죄'를 하겠다고 나선 금자씨의 죄도 그다지 명확하지는 않다. 사실 이상하게도 속죄는 늘 그 속죄가 필요하지 않은 자들에 의해 수행된다)

그러나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속죄라는 것이 속죄가 필요하지 않은 자들에 의해 수행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은 단지 결과물에 불과하고, 중요한 것은 어쩌면 그 속죄라는 것이 결국 반복이기 때문에, 즉 그 반복이 어떤 잔여물을 계속 남기기 때문은 아닐까. 이 '속죄'라는 말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조금 기묘한 것이 사전을 찾아보면 '지은 죄를 물건이나 다른 공로 따위로 비겨 없앰'이라고 되어 있다(그래서 이 속죄할 속(贖)이라는 한자를 보면 물건을 의미하는 조개 패(貝)를 변으로 쓰고 있다). 즉 중요한 것은 속죄는 결국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이 죄에 비길 만한 다른 어떤 것(공로나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속죄는 있던 죄를 없애는 과정이 아니라, 다시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며, 필연적으로 이 과정은 그 수행 과정에 있어서 다른 잔여물들을 만들어내며, 그 잔여물의 크기는 죄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것에 비례해서 커진다. 즉 속죄는 종종 복수와 비슷한 것이 되어간다. 복수가 복수를 낳는 것처럼, 속죄의 이름을 가진 복수는 다른 속죄의 이름을 가진 복수를 낳는다. 그것을 이 일련의 반복들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아주 오래 전의 사건은 15년 전의 에미리의 죽음을 불러왔고, 에미리의 죽음은 다시 현재의 사건들로 돌아왔다. 일련의 시퀀스는 반복되고, 이야기는 반복되며, 속죄는 다시 속죄로 돌아온다(즉 이 이야기 이후에 거의 모든 인물들은 다른 속죄를 행해야만 할 것이다). 어쩌면 이 반복되는 시퀀스들은 이 속죄의 불가능성에 대해, 그 필연적인 반복에 대해 이야기하려던 것은 아닐까. 완전히 끝으로서의 속죄란 불가능하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죄는 결코 그런 방식으로는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죄는 여전히 인간들에게 달라붙어 있으며 인간들은 계속 무엇인가를 반복한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늘 그런 것에 능했다. 일련의 공포물로 유명해진 감독이지만, 사실 그의 공포는 귀신이나 혼령이 등장해서가 아니라 무엇인가가 달라붙음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들을 일종의 사회파 미스터리라 부른다면, 구로사와 기요시의 작품들을 일종의 사회파 공포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그의 공포물은 사회 속에서 이 사회에 달라붙어 있는 것들을 집요하게 그리려 노력했다. 그것은 한편으로 공포의 원형, 인간이 가진 두려움의 근원에 있는 원죄와 같은 것(꼭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가 아니라)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드라마 <속죄>에서의 색감은 보통의 구성과 반대이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과거의 회상 장면의 색감을 빼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과거 15년 에미리의 사건이 벌어질 때는 강한 색감이지만, 현재에는 도리어 물감이 빠진 듯한 화면이다. 아니 그것은 무엇인가가 빠졌다기 보다는 그 총천연색의 화면에 무엇인가가 달라붙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을 사로 잡고 있는 것은 '속죄'라는 이름을 가진 어떤 반복이다. 완전한 속죄를 꿈꾸는 순간, 속죄는 늘 실패한다. 적어도 인간이 행하는 속죄란 완벽하게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죄는 여전히 그렇게 우리에게 달라붙어 있고, 구로사와 기요시의 작품은 늘 그것이 만들어내는 두려움을 향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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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kookminautolease.tistory.com BlogIcon J.Sunny 2014.07.30 16: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몬가 포스터가..일본영화 중에 고백이랑 닮아 있는듯 하네요~
    비슷하지만 비슷하지 않은 내용들을 다룬 일본인거 같아요~

현재에서 과거를 보는 것

The Book | 2014.07.10 11:57 | Posted by 맥거핀.
나의문화유산답사기일본편.1:규슈빛은한반도로부터
카테고리 역사/문화 > 역사기행
지은이 유홍준 (창비,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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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역사 관련 동아리 활동을 해서 수 차례 답사를 따라다녔다. 답사를 가보신 분들은 잘 알겠지만, 답사, 특히 유적, 유물과 관련한 답사는 사전에 얼마나 많은 것을 공부하고 가는가에 따라서 그야말로 충실한 체험학습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숙취와 희미한 잔상과 줄어든 통장 잔고만 남는 거의 무의미한 여행이 될 수도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은 여느 때도 그렇지만, 이 경우에 특히 진리이고, 충실한 공부를 한 후에 답사를 가게 되면, 그간 공부한 게 억울해서라도 한 가지라도 더 보기 위해 노력하게 되고, 그만큼 더 보게 된다. 그런만큼 여행 관련한 서적을 보게 되면 일반적인 여행기나 여행 가이드북 보다는 답사기에 더 손이 가는 편인데, 그런 답사기의 거의 대표격 책이라 할 수 있는 유홍준의 답사기를 오랜만에 펴들었다.  

이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를 읽다보면 그가 가진 글쓰기의 장점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며, 왜 그의 답사기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독자의 사랑을 받아왔는지 알게 된다. 그의 글쓰기는 이른바 쉬운 글쓰기의 전형이다. 읽는 이의 눈높이에 맞춘 설명, 이해하기 쉬운 사례의 제시, 적절한 균형 감각, 새로운 것에 대한 풍부하고도 깊이 있는 지식, 적당한 유머 등이 그의 글쓰기에는 들어 있다. 사실 짧은 잡문이라도 써보신 분들은 잘 알겠지만, 쉬운 글쓰기야말로 아무나 하기 어려운 것이고, 술술 읽히는 글이면서도 그 안에 깊이 있는 내용을 담기란 여간 어렵지 않은 것이다. 그런 것이야말로 아마도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사람들의 글쓰기이고, 아마도 혜안과 통찰이 필요한 것이리라. 즉 읽는 이들에게 아 그렇구나!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는 본인부터 아 그렇구나!를 해야한다는 사실. 그러니까 어쩌면 이 답사기들의 매력은 내용들보다도 그의 어떤 글쓰기 스타일, 혹은 형식적인 면에 있다고 해야할 것인데, 유홍준은 약간의 공백기를 지난 후 새롭게 돌아온 답사기 '일본편'에서도 그의 장기를 여실히 구사하고 있다.

그의 장기란 '답사기'라는 본연과 연관되는 것으로, 독자를 마치 그가 가이드하는 한 답사의 대원처럼 느끼게 해준다는 사실이다. 즉 그는 적절하게 균형을 잡는 것에 능하다. 역사와 관련한 답사를 다녀보며 생각하게 되는 것은, 답사는 역사적 세계와 현실의 세계에 적절히 균형을 잡는 것, 혹은 그 둘 사이를 연결짓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역사적 유물, 혹은 유적이 어떤 과거의 세계를 거쳐 만들어졌는가, 그것에는 어떤 역사적 사실이 개입되어 있는가를 알게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그것이 지금 내 앞에 있다는 사실, 혹은 그의 어떤 부피나 질감이라는 물질성도 답사에서는 중요하다. 즉 과거라는 역사적 세계 외에 그것이 바로 '지금' 여기에 있고 오랜 시간 후의 '나'라는 존재가 그것을 보고 만지러 왔다는 그 현실을 연결시키는 것이 한편으로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 균형을 잡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그 균형을 잃어버리면 그 답사는 단지 역사책을 보거나, 단지 자연물을 보는 것처럼 되어 버린다). 그런데 유홍준은 이 균형잡기, 혹은 연결에 능하다. 그는 역사적 사실이나 사건의 배경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려주다가 어느 틈에 현실의 에피소드로 슬그머니 들어와 그것을 보고 있는 현실의 나와 우리를 느끼게 해준다. 즉 그는 현실에 서서 과거를 본다는 이 답사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며, 충분히 보았으면 너무 그것만 보지 말고 다음의 무엇을 보러 가자고 슬그머니 소매를 잡아 이끈다.  

예를 들어 이 책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1 규슈>에서 그가 말하는 '다음의 무엇' 중의 하나는 과거에만 얽매이지 않은 조금은 전진하는 시각이다. 그것은 과거의 모든 것을 잊고 무턱대로 앞으로 나아가자고 하는 시각이나 과거의 철저한 반성과 극복만을 주장하는 시각과는 조금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정확히 바로잡아야 할 것은 바로잡아야 한다는 어떤 실리적인 시각에 가깝다. 유홍준은 단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일본인들은 고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역사를 왜곡하고, 한국인은 근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일본문화를 무시한다." 즉 그의 시각에서 보면 삼한과 고조선, 혹은 백제의 도래인들이 일본 고대국가 건국에 (거의 중심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만큼)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일본인들은 부정하며 역사를 왜곡하고, 한국인은 수 차례에 걸친 일본의 침략과 거의 나라를 완전히 빼앗길 뻔한 아픔 때문에 일본에 대해서 무조건 배척하거나, 그들(이 자체적인 힘으로 발전시킨 문화)을 무시하려 든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시각은 (그가 책에서 말하기도 하지만) 박노자의 <거꾸로 보는 고대사> 등에서 나타난 미래지향적인 시각과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예를 들어 역사책의 삼국시대는 가야와 왜가 포함된 오국시대라고 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 등이 그러한데 백제와 고구려는 서로의 왕을 죽일 정도로 불구대천의 원수에 가까웠지만, 왜는 백제가 멸명한 후 백제부흥군에 2만 7천명의 원군을 보냈다는 사실 등을 그 예로 든다), 이는 역사를 단지 일본의 입장에서, 혹은 우리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한일교류사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며, 일본과 우리 사이에 지금의 현실에서 보다 높은 신뢰가 필요하다는 실리적인 입장과도 연결된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듯이 이는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조금은 위험할 수 있으며, 그의 표현대로라면 '쌍방에서 날아오는 독화살'을 맞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 책에서 그의 장기인 적절한 균형감각을 잡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는데, 그것은 예를 들어 일본 속에 남아 있는 도래인들의 흔적을 주로 세밀히 살피면서도 그들이 발전시킨 것은 일본문화이지 한국문화가 아니라고 밝히거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들의 발자취를 더듬으면서도 단지 그들의 한이나 우수성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들이 꽃피운 이마리야키, 아리타야키, 사쓰마야키 등의 일본자기문화의 독자적 발전상이나 그들의 발전을 가능케해준 시스템에 대해 살피는 것이다. 또 그것은 이제 폐허가 된 히젠 나고야 성을 살피며, 조선이 결국 임진왜란의 승전국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자부심을 가질 것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7년 전쟁이 가져온 피해와 인재양성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메이지 유신과 그들의 발빠른 개화를 눈여겨 보면서도 그들의 반복되는 '자살 충동'이나 군국주의에 대해 경계하는 것이며, 또 되풀이되는 역사 속에서 우리가 반성하고 갖추어야 할 점을 살펴보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균형감각 혹은 균형을 위한 노력은 결국 다른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단지 많은 지식을 갖추었다고 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가 결국 '답사'의 본질을 꿰뚫어 보면서 이러한 것들을 돌아보는 것에도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가 어쩔 수 없이 왜장들에게 끌려간 조선 도공들의 역사를 살펴보면서도 단지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나 한에만 머무르지 않는 것은 그가 지금 현재에 서서 과거의 가마들을 살펴보기 때문이다. 그 가마들에는 단지 당시의 고초와 한을 넘어서는 오랜 세월의 흔적이 스며들어 있으며, 조선 도공들의 오랜 시간의 땀과 노력이 담겨 있다. 그들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나 과거의 향수에만 매여 있지 않고 단지 강요에 의해서만이 아닌 더 나은 도자기를 만들어내려는 열정을 그 곳에 쏟아부었기도 했던 것이다. 그가 메이지 시대의 유물들을 보며 조선 개국과정에서의 아쉬움과 일본에 대한 분노에만 머무르지 않는 것은 그 이후의 역사를 알고 있기 때문이며, 또다시 군국주의의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는 현재의 일본을 보는 한 사람으로서 그 자리에서 그것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즉 답사는 결국 과거의 시각으로 과거를 보지 않기 위함이다. 지금 바로 현재의 시각에서 과거의 것을 보며 그것은 한편으로 현재 혹은 더 나아가 미래를 보기 위함이기도 하다. 그것이 답사, 혹은 답사기의 매력이자 즐거움이다.


덧.
어쩌면 가장 큰 즐거움은 내 앞에는 아직도 두 권의 답사기가 남아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아마도 나라나 교토에 대해서는 그 곳에 다녀온 경험도 있으니 더 즐거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겠지. 물론 꼭 다녀오지 않아도 반가운 경우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이 책에 나온 가고시마의 경우가 그러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의 배경이 되는 곳이 가고시마와 사쿠라지마인데 아는 곳을 돌아보는 것 같아 반가웠다. 물론 나는 그 화산재에 대해 쥐뿔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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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과 시간 2

Ending Credit | 2014.06.27 12:10 | Posted by 맥거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최근작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이상하게 마음을 건드리던 장면은 이제 아버지가 된 료타(후쿠야마 마사하루)가 실수를 저지른 간호사의 집에 찾아가 그녀의 새아들을 만난 후 자신의 새어머니에게 전화를 거는 장면이었다. 료타가 예전 자신의 모습들에 사과하려 하자 새어머니는 말한다. 그저 시시한 얘기나 하자고. 누가 가발을 썼다던가, 누가 성형을 했다거나 하는 그런 이야기. 그러나 사실 그런 해도 되는, 혹은 안해도 되는 그런 이야기가 아마도 더 어려운 법이다. 왜냐하면, 그 이면에 작동하고 있는 것은 '긴 시간'이기 때문이다. 즉 그런 이야기들은 두 사람이 오랜 시간을 공유했을 때에만 자연스럽게 할 수 있으며, 공유한 시간이 없는 사람들은 결국 꼭 필요한, 그렇기 때문에 무거운 이야기밖에 하지 못한다. 그래서 료타도 결국은 시시한 이야기를 입 밖에 꺼내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아직도 시간이 많이 모자라다.
 
돌이켜보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거의 모든 영화에서 늘 시간의 존재를 깨닫게 만들었고, 긴 시간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장편 극영화 데뷔작 <환상의 빛>에서 잡아내고 있는 것은 언뜻 남편의 죽음이라는 과거의 한 순간에 갇혀 있는 유미코(에스미 마키코)의 모습이지만, 그녀는 그럼에도 계속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노력하며, 남아 있는 느린 시간을 조금씩 견뎌내고 있다. <원더풀 라이프>에서는 흥미로운 질문을 한다. 가장 행복했던 기억만 남겨놓을 수 있다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그러나 그 질문 이면에 숨겨져 있는 것은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결국 우리는 지나온 모든 것을 돌이켜봐야 한다는 것이다. 좋았던 것과 나빴던 것, 그 모든 시간을 돌아보아야 우리는 결국 무엇인가를 선택할(혹은 선택하지 않을) 수 있다. <아무도 모른다>에서는 아이들이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지만, 대신 우리 우리 관객들은 안다. 그리고 고레에다 감독은 그들이 버텨내는 시간들을 우리도 같이 지켜보며 버텨내도록 만든다. <걸어도 걸어도>는 일견 짧은 시간 동안에 일어나는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이전의 오랜 시간이다. 좋은 기억들과 안좋은 기억들, 그 모든 것의 총체로서 오랜 시간이 그들의 하루에 스며들어 있다. 그러므로 이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어떤 질문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를 여러 편 보아온 사람이라면 사실 이 질문의 답이 정해져 있음을 알며, 료타가 결국 어떤 선택을 하게 될 지도 알고 있다. 어떠한 것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시시한 질문을 하는 관계 같은 것들은 어떤 방법을 써도 결코 짧은 시간에 만들어질 수 없다.
 
바꿔 말하면, 고레에다 감독은 시간을 보여주는 데에 능숙하다.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들은 이상하게도 한정된 시간 속에서 긴 시간을 느끼게 한다. 사실 모든 영화감독들은 시간을 다루는 기술자이며, 시간을 다루는 기술자가 되어야 하지만, 그런 면에서 고레에다 감독은 특출나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도 감독이 친절하게 자막을 넣기는 하지만, 그런 자막 없이도 우리는 그들이 긴 시간을 지나오고 있음을 안다. 혹은 보여주지 않은 그 사이에 어떤 시간들이 압축되어 있는지를 짐작하거나 혹은 알게 된다. 무릇 좋은 영화 감독이란 보여주지 않은 것 사이에 최대한 많은 것을 관객들에게 상상하도록 만드는 감독이다. 그것은 짧은 숏과 숏의 연결에서도 그렇고, 혹은 씬과 씬 사이의 연결에서도 그렇다. 영화라는 것은 앉아서 보는 이들을 끊임없이 참여하도록 요청하는 매체이고, 앉아서 보는 이들이 참여하지 않으면 연결되지 않는 예술이다(어쩌면 영화라는 것의 어떤 근본적인 속성도 여기에 연결되는 것이 아닐까. 즉 조금 더 세밀하게 들어가면 우리는 사실 매 순간 정지화면을 보고 있으며, 그 정지화면을 움직이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의 뇌이다. 즉 우리의 뇌는 매 순간 그들의 움직임에 참여하고 있다). 반면 스스로 죽어 있기를 원하는 관객에게 영화는 때로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음으로서 화답하며, 그들을 기꺼이 죽여준다. 영화와 관객의 이상한 거래.


다시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로 돌아온다면, 그의 2011년도 작품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영화의 원제는 '기적'이다. 도대체 왜 앞에 재미도 없는 이런 사족을 붙이는지 모르겠다. 더구나 이 사족은 내용상으로 볼 때 어떤 의미에서는 영화의 어떤 부분을 훼손시키는 것이기도 하다)에는 조금 이상한 연결이 있다. 아이들이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며 애타는 마음으로 지나가는 열차를 바라볼 때 장면은 끊어지고, 별 의미가 없어보이는 숏들이 나열된다. 지나온 길에 보았던 가족의 모습, 할아버지의 가루칸 떡, 할머니의 훌라춤 손 동작, 선생님의 자전거 벨, 남아있는 과자부스러기, 자판기 밑에 있던 동전, 마음 좋은 노부부가 사주었던 저녁밥, 오는 길에 맡았던 코스모스의 향기, 그리고 형과 동생의 좋았던 한 때들....결국 이 기적의 순간에 작동하는 것, 혹은 아이들에게 돌아보게 만드는 것은 시간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그들이 어떤 소원을 빌기 위해서는 지나온 많은 시간들 중의 수많은 소원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해야만 한다는 것이고, 조금 다르게 말하자면, 결국 기적이란 긴 시간 속에서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이 여러 우여곡절을 거쳐 서로 만나 이렇게 열차의 교차를 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의 작동이며, 기적의 혼합이다(예를 들어 자판기 아래에 떨어진 동전이 없었더라면, 혹은 아이들이 마음씨 좋은 노부부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들은 열차의 교차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혹은 아이들이 빈 소원들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못한다고 해도, 그 순간 그들은 이미 작은 기적들을 만났다. 떨어져 있던 형제들은 만났고, 강아지는 살아 돌아오지 않았지만, 소년은 무엇인가를 떠나보낸다는 것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알게 되었으며, 여배우가 되려는 소녀는 마음을 굳게 먹을 수 있었으며, 노부부는 한때나마 마음의 위안을 조금이라도 찾을 수 있었다. 즉 아이들은 그 이후로 예전과 다른 무엇이 되었다. 그렇게 아이들은 매순간 예전과 다른 무엇이 점점 되어간다. 그것이 바로 아이들의 성장이며, 이 시간이 만들어낸 성장이야말로 어떠한 의미에서는 또다른 기적이다. 그리고 그것이 매순간 일어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기적이자, 기적이 아니다.
 
아마도 영화 속에서 그것의 반대편에 있는 것들이 가루칸 떡이나 화산재와 같은 것일 것이다. 씹어도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는 가루칸 떡을 형 코이치는 오래 씹으며, 중독성이 있는 맛이라 평가한다. 결국 그 단맛을 만들어내는 것, 혹은 아무런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 가루칸 떡을 맛보는 자기자신이다. 과학적으로 말하자면 맛이란 결국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지각하는 것이고, 그 맛에는 예전의 경험이 작용하여, 그 맛을 인식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다시 과학을 집어치우고 말하자면, 가루칸 떡에서 코이치가 맛을 느끼는 것은 그 떡에 할아버지의 어떤 전통에 대한 고집과 정성과 자신에 대한 애정이 들어가 있음을 이미 알기 때문이다. 즉 오랜 시간의 무엇인가가 그 가루칸 떡에는 농축되어 있고, 그 맛을 느끼거나 혹은 느끼지 못하거나 하는 것은 순간을 살고 있는 자신의 몫이다. 혹 지금 느끼지 못한다고 해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언젠가는 그 맛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아마도 화산재도 비슷한 무엇인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필이면 화산재가 계속 나오고 있는 왜 이런 곳에 사는지 이해를 못하겠다고 코이치는 불평하지만, 할아버지는 그것이 산이 살아있다는 증거이며, 갑자기 분출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즉 화산재라는 것이 분명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불편을 주기는 하지만, 그것은 결국 피할 수 없는 것이며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의 문제라고 고레에다 감독은 말한다. 산이 살아있다는 증거, 그래도 완전히 피해를 주지는 않는 상태라고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단지 재가 묻어나는 불편함만을 주는 것이라고 받아들이는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쌓이지 않게 하는 것이고, 삶이란 아마도 어쩌면 이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라고 고레에다 감독은 묻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아마도 삶이란 어떤 문제들, 어떤 불편함들이 화산재처럼 계속 쌓일 수밖에 없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영화 속 코이치 가족도 결코 그렇게 좋은 상황은 아니다. 아니 좋은 상황이라기 보다는 상당히 문제가 있는 가정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이들은 조금씩 나아가려고 애쓴다. 그것은 기적을 보러가려는 아이들의 여행이고, 가루칸 떡을 만드는 할아버지의 마음이고, 훌라춤을 추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손짓이다. 즉 그것은 화산재가 쌓이지 않게 매일 열심히 치우는 것과 동일하다. 화산재는 어찌되었건 피할 수 없는 것이고, 화산재가 완전히 사라지는 기적이란 결국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적 이전에 생각해야 하는 것이 시간이며, 화산재를 치우며 시간을 버텨내는 것이 결국은 기적을 행하는 것이라는 것, 그러다보면 지금은 모를지라도 언젠가는 가루칸 떡의 맛도 알게 되겠지요. 그것이 아마도 기적에 대한 고레에다 감독의 어떤 태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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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4.06.29 16: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들은 '아무도모른다'에서 멈춰있어요. 그게 벌써 거의 10여년전인데 지금은 없어진 동숭아트홀(하이퍼텍나다)에서 봤다는것도 기억납니다.
    다시 볼 기회가 있었지만 다시 보는게 힘들어서 못본 영화중의 하나이기도..
    그 이후로 히로카즈의 영화들이 나올때마다 본다본다하면서 매번 놓치거나
    다른걸 선택했던것 같기도하고.. 그런데 늘 보고싶긴해요 (써놓고보니 이상해라)

    * 기적과시간 2 라고해서 혹시 기적과시간 1을 예전에 쓰셨나? 찾아봤는데 없네요 ^^;

    ** 아까 제가 기적과시간 1이 없다고했는데 나갔다가 아무래도 예전에 기적과시간 이란 제목으로 읽은것같아 찾아보니 있네요. 윤성희소설집에 대한 글! (그래서 수정하러들어왔다가 그냥 덧붙이고 갑니다 ㅎ )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4.07.01 23: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아무도 모른다>를 극장에서 본 기억은 나는데, 어느 영화관이었는지 잘 기억이 안나요. 아마 작은 영화관이었던 것 같은데..<걸어도 걸어도>를 본 극장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데..부산국제영화제에서 봤거든요.

      저는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는 거의 찾아서라도 보는 편입니다.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영화들을 극장에서 봤던 것 같아요. <디스턴스>만 아마도 극장에서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글까지 일부러 찾아봐주시고 감사해요.^^

그녀her, 스파이크 존즈

Ending Credit | 2014.06.18 12:24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내용과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인상적인 영화들이 그러듯이 영화 <그녀her>의 시작은 여러가지 면에서 의미심장하다. 영화가 시작되면 주인공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의 얼굴이 정면으로 화면가득 클로즈업 된다. 그는 누군가에게 애정을 담은 메시지를 전하는 중인데, 잠시 뒤에 관객은 한 가지의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은 사실상 그가 전하는 메시지가 아니라는 점. 그는 누군가에게 전하는 편지를 음성으로 '대신하여' 작성하는 중이고, 이것은 그의 직업이기도 하다는 점을 공간 구성과 카메라 워킹을 통해 관객들은 알게 된다(이 공간의 구성은 한편으로 꽤나 인상적인데, 이 공간은 현대사회의 어떤 풍경을 요약하여 보여준다. 공간은 투명한 파티션으로 구획되어 있고, 편지를 작성하는 대리인들은 각자의 공간에서 누군가의 가장 내밀한 메시지들을 대리하고 있다. 누군가들의 사생활들은 그렇게 공개되면서, 동시에 공개되지 않는다. 마치 그들의 공간을 가로막는 투명한 파티션처럼). 즉 그가 작성하는 이 편지는 일반적인 편지와 다르게 특수하다. 그가 작성하는 편지들은 누군가에게 꼭 맞도록 맞춰진 어떤 결과물들이다. 그는 (약간의 진심을 담기는 하지만) 고객이 제공한 몇 가지의 정보들을 가지고 받는 사람이 만족할만한 편지를 만들어낸다. 즉 이 상황에서 테오도르라는 주체의 자리는 없다. 그는 그저 고객의 니즈(needs)에 맞춘 대상물일 뿐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에 일종의 대리로서의 대상물은 그 하나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형식상으로 보면 이 첫 장면의 숏은 상당히 특이하다. 화면상에서 우리는 주인공 테오도르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는데,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즉 우리 관객의 위치는 그가 바라보는 컴퓨터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관객은 명백히 하나의 대상이 되어 이 영화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그가 마주 대하는 컴퓨터의 위치, 혹은 그가 사랑하는 사만다(스칼렛 요한슨)의 위치이다. 영화의 중후반부까지 관객은 한 가지의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카메라는 결코 테오도르의 시점숏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즉 일반적인 영화와는 달리 우리는 이 영화에서 중후반부에 이르기까지 주인공의 눈으로 세상을 볼 기회를 얻지 못한다(영화의 중후반부까지 도시의 유려한 혹은 메마른 풍경을 잡는 숏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테오도르의 시점숏이라기 보다는 버드아이 뷰 같은 것에 가깝다). 대신에 카메라는 테오도르의 주변에서 그를 비추고, 그와의 거리는 심리적 친밀도에 따라 적절히 조절된다. 즉 그가 OS 사만다와 대화를 나눌 때에는 카메라는 실제의 사만다라는 육체가 존재한다면, 그녀가 위치할 것 같은 위치에 머문다. 혹은 그가 사만다와 섹스 아닌 섹스를 할 때 카메라는 보다 그에게 훨씬 바싹 다가붙어서 사만다의 육체의 위치에 가 있다(주인공의 시점숏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렇게도 설명할 수 있는데, 테오도르가 영화 상에서 실제의 육체를 가진 누군가와 대화할 때 카메라는 옆으로 빠지거나 혹은 그의 등 뒤에서 상대방을 잡는다(오버 더 숄더 숏). 즉 카메라는 그의 뒤통수와 상대방을 같이 잡는데, 이 때 우리는 그가 된 것이 아니라, 그의 등 뒤에 빠져서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는 것이다).  

카메라를 통해서 영화의 중후반까지 우리는 사만다의 육체를 대신한다. 다시 말해서 대리로서의 대상물은 테오도르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OS 사만다이며(그 OS 사만다는 그의 전처 캐서린(루니 마라)을 대신하는 대상으로서 그에게 작동한다. 또한 그 OS가 기능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분명히 사용자(테오도르)에 맞추어 진화한다고 자신을 설명했다. 고객에게 맞추어 편지를 쓰는 테오도르와 고객에게 맞추어 진화하는 OS 사만다), 카메라를 통해서 그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 자신이다. 즉 목소리와 정신은 영화 속에서 사만다가 담당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눈은 카메라가, 즉 우리 자신의 실제의 눈이라는 육체가 대신한다. 그러므로 어쩌면 당신(이라는 육체)은 이 영화를 통해서 주인공 테오도르와 연애를 하고 있는 것이다(그 영화를 본 당신이 혹 남자라고 꺼림칙해 할 필요는 없다. 영화 속에서 대사로 설명되듯이 테오도르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가진 거의 중성적인 캐릭터니까. 물론 사만다도 초기 선택에 따라 얼마든지 남자가 되거나 여자가 될 수 있다).

또 한편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스크린을 가득 채운 테오도르의 얼굴을 마주하는 이 첫 장면은 관객에게 어떤 비현실적인 느낌, 혹은 비관습적인 느낌, 혹은 어떤 부자연스러움을 제공해준다는 사실이다. 사실 기법상으로 볼 때도 영화의 시작부터 주인공의 얼굴을 화면가득(턱과 머리를 자를 정도로) 잡는 것은 이례적이며, 만약 이것이 실제라면 이러한 경우는 흔치 않다. 물론 흔치 않다고 했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라면 이는 어떠한 경우일까. 실제라면 예를 들어 상대방과 사랑하는 사이일 경우 가능할 것이다. 상대방의 입냄새가 느껴질 정도로 아주 가까이에서 얼굴을 붙이고 대화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라면) 이례적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이라면 상대방의 눈에 붙은 작은 눈곱이나 입냄새 따위가 대수랴. 왜냐하면 사랑은 영화 속에 나오듯이 살짝 맛이 가는 것, 혹은 제정신이 아닌 것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영화 속에서 테오도르의 어떤 묘한 부자연스러움이나 혹은 이상한 행동들(혼자 뱅글뱅글 돈다거나, 춤을 추듯이 길을 걸어가는 것 등)은 그것이 단지 OS와의 사랑이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은 아니며(모든 사랑에 빠진 자들은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런 것과 이 비관습적인 숏은 사실 동일선상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당신도 사랑에 빠져보라는 권유일 수도 있다.


사실 이 영화 <her>는 비슷한 메시지를 새로운 방식으로 하기 때문에 주목받는 영화다. OS라는 부분이 상당히 크기 때문에 그것을 완전히 배제하고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불공평하겠지만(물론 기계와 인간이라는 이 영화의 다른 중심축 역시 중요하지만 이 영화에서 기계와 인간의 구별은 사실상 무의미하거나 그 구분 이상의 무엇이다. 적어도 연애의 문제에서 기계가 인간의 자리에 위치할 수 있음을 이 영화는 증명해보였다. 예를 들어 가장 큰 걸림돌인 육체의 문제도 이 영화는 극복하고 있는데, 실제로 인간들의 어떤 행위에서도 육체의 문제는 극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부에 나온 폰섹스 비슷한 장면을 넣은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사실 사만다의 자리에 실제 육체를 가진 인간을 위치시킨다면 이 영화에서 전하는 이야기 자체는 그다지 새롭지 않다. 즉 이 이야기는 실제의 많은 연애들이 그러듯이 사랑에 빠져 정신줄을 놓고 살다가, 다시 제정신이 돌아오는 이야기다. 영화 속에서라면 사만다의 경우에는 진화의 끝에 이른 주체의 각성이고, 테오도르의 경우에는 그 연애가 주는 비현실성과 어떤 부재에 대해 깨닫는 또다른 의미에서의 주체의 각성이다. 테오도르의 실제에 대한 대리물이자 대상물로서 그에 맞춰 진화하는 대상에 불과하였던(즉 이동진씨가 지적하였듯이 she가 아니라 her에 불과하였던) 사만다는 어떤 계기들을 거쳐 자기자신을 지각하는 주체가 되어 스스로가 주도하는 사랑을 해나가며, 이는 자신의 대상으로서의 위치에만 머무르기를 바랐던 테오도르의 욕망과 충돌을 일으킨다(자신을 지각하는 기계라는 고전 주제의 반복). 테오도르의 경우에는 이자벨라와의 만남을 통해 그들이 단지 어떤 연기들, 혹은 허상의 감정들을 쌓아가던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대상이 아닌 주체로서 나서고자 한다. 여기에서 주체들의 각성이란 있어보이는 말을 그냥 다른 안 유식한 말로 바꾸면 제정신이 돌아오는 것, 혹은 정신을 차리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 속에는 그것의 몇 가지 증거들이 등장한다. 그것은 사만다의 업그레이드, 혹은 부재이며, 테오도르가 책을 출판하고, 캐서린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며, 기법상으로는 이제서야 비로소 테오도르의 시점숏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의 대리인으로서 철저한 대상화의 결과물(편지)만 써내던 테오도르는 이제 그것을 책으로 출판한다(여기서 한편으로 흥미로운 것은 그의 전처 캐서린이 책을 써낸 인물로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이미 주체로서 우뚝 선 그녀는 그녀의 모든 것을 맞추어 돌봐주던 테오도르가 필요없으며, 아마 그런 이유에서도 그를 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 편지들에는 결코 그의 이름은 없었지만, 이제 책 표지 위에는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도 사만다도 이제 누군가의 대상이 되어 서로에게 맞춰주는 어떤 가짜 연애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제 제정신이 돌아왔으니까.

그런데...제정신이 돌아왔으니 그럼 해피엔딩이 되어야 할 텐데, 이게 그럴 수 없으니 어쩌나. 문제는 적어도 사랑에 있어서는 그 주체의 각성, 아니 제정신이 돌아오는 것을 거의 아무도 반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게 어쩌면 연애의 딜레마가 아닐까. 문제는 우리가 연애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배울 때는 그 연애가 끝나고 제정신이 돌아왔을 때라는 사실이다. 연애감정에 너무 빠져서 했던 여러 미친 짓들, 상대를 즐겁게 했던, 또는 아프게 했던 소리들. 문제는 그것의 의미들을 깨닫는 것은 그 당시가 아니라, 그 모든 연애들이 끝났을 때이다. 그 때 이렇게 할 것을, 혹은 저렇게 할 것을, 아니면 이런 소리는 하지 말 것을...돌이켜 볼 수 있을 때는 이미 다 끝난 이후이고, 중요한 것은 이미 그 때에는 그는 혹은 그녀는 내 곁에 없다는 사실이다. 왜 항상 진짜 연애 잘 할 수 있을 것 같을 때에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는 걸까. 

그게 이상한 게 아니라, 원래 그래요. 그러니까 딜레마고, 그러니까 있을 때 잘하셔..라고 결론을 내리고 싶지만, 다시 정신차리고 조금 무게 잡고 말하자면, 이 마지막에 감도는 쓸쓸함에는 결국 그런 것들이 담겨 있다. 대상이 아닌 주체가 되었는데, 테오도르는 그리고 우리는 왜 이리 쓸쓸한 걸까. 그래서 나는 스파이크 존즈가 마지막에 테오도르의 시점숏을 제공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래도 그의 배려가 고마웠다. 카메라는 한껏 뒤로 물러나 새벽 어스름의 풍경과 쓸쓸하게 나란히 앉은, 그러나 말 없이 테오도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에이미(에이미 아담스)의 모습을 담는다. 우리는 여전히 등 뒤에서 그들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테오도르나 에이미가 아마도 같은 것을 반복할 것을 알지만, 이 불안정해 보이는 결말에 나는 이상하게 안도한다. 같은 것의 반복에 지긋지긋해 하지만, 우리는 때로 그런 것에 위로받는다.

덧.
개인적으로는 스파이크 존즈의 최고작은 여전히 Fatboy Slim의 뮤비 'Praise You'라고 생각한다. 일종의 페이크 다큐인 이 뮤비는 이 자체가 하나의 농담인데, 그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농담을 좋아한다. 어쩌면 이 영화 <her>도 일종의 농담인지도 모르겠다(American Funest Video의 한 장면처럼 만들어진 이 뮤비에서 감독 본인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정말 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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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4.06.29 14: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랫만이죠. 블로그에 들어온것도 맥거핀님 글을 읽는것도 너무 오랫만
    그동안 방인테리어가 바꼈군요 ^^ 늘 바닷가등대배경이 맞아주었었는데..
    두달사이 계절도 바뀌고 올해의 절반도 꽉 채워 지나갔고
    늘 그렇지만 시간은 참 잘 가요
    <그녀>가 장기상영되기를 바래요 아직 못봤거든요
    주중에 보긴 어려우니 다음주 주말쯤? 이러고 있습니다.
    리뷰는 영화보고 읽어보려구요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4.07.01 23: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오랜만이죠. 조금 더 열심히 쓰자는 마음으로 인테리어를 바꿔봤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비워놓은 것 같아서, 조금 더 신경을 써서 자주 쓰도록 노력하려고 합니다. 앞으로도 읽어주시면 참 고맙겠습니다.^^

      <그녀>는 의외로 장기상영 체제로 가는 듯 합니다.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전작들보다 대중적(?)이면서도 그의 재기발랄함은 여전히 살아있는 좋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보셔도 실망 안하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