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인, 양우석

Ending Credit | 2013. 12. 19. 17:17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일부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영화 <변호인>을 보았다. 긴 글을 쓰기는 생각이 짧아 어려울 것 같고, 짧은 글로 대신하고 싶다. 영화 <변호인>은 굳이 따지자면 사건 중심보다는 캐릭터 중심의 영화로 보아야 할 것 같고, 그 중심에는 변호인 송우석(송강호)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보면 사실 이 영화 <변호인>은 조금 이상하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이 영화는 그 캐릭터를 양분하여 전후반부로 나누어 배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영화의 전반부 내내 이 송우석이 정겨운, 밉지 않은 속물임을 보여주려 애쓴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애를 써서 영화의 전반부에 캐릭터를 구축한 다음, 영화는 후반부에 그 애써 구축된 캐릭터를 이제 지우려고 노력한다. 물론 이것은 대중영화의 공식에 그렇게 크게 어긋난다고는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영화의 내내 유지되는 캐릭터들도 있지만, 이렇게 캐릭터 중심의 영화일 경우 중간에 캐릭터가 탈바꿈하는 것은 흔한 경우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이것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캐릭터를 쌓으려는 노력에 비하여 탈바꿈의 고리가 너무 헐겁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의 캐릭터 송우석이 변하는 순간은 너무나도 짧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이는 일차적으로는 어떤 태도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스탠스의 문제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다. 영화의 전반부에 보여지는 송우석이라는 캐릭터는 전형적인 자수성가 스타일이다. 모든 것은 노력으로 가능하고, 누군가의 실패는 그들의 포기에 따른 것일 뿐이라는 식의 접근. 그래서 그는 고교동창 기자(이성민)와 싸울 때에도 데모하는 학생들에게 냉소적인 언사를 퍼붓는다. 단지 공부하기 싫어서 저러는 것 아닌가, 노력하기 싫으니 다른 방식으로 무엇인가를 얻으려는 나약한 태도일 뿐이지,같은 식의 말들. 이렇게 어떤 태도와 정치적인 스탠스가 뒤섞여 있는 이러한 모습에서 그 태도는 여전히 후반부에도 남아있다. 포기하지 않겠다는 그 자세는 어떻게든 국밥집 아들 진우(임시완)에 대한 진실을 밝히고 무죄방면 시키고야 말겠다는 고집으로 이어진다. 다만 이 과정에서 그의 어떤 정치적인 스탠스가 바뀌었는데(혹은 정치적인 스탠스가 생겼는데), 이는 어쩌면 앞의 질문과도 연관된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즉 태도는 바뀔 수 없어도, 어떤 정치적인 스탠스가 바뀔, 혹은 생겨날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라는 믿음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사실 정치적인 스탠스의 문제라기 보다는 태도, 혹은 상식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예를 들어 인간을 고문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정치와 하등 상관이 없다. 그것에는 진보도 보수도 없다. 그것은 도리어 어떤 태도에 가까운 것이고, 송우석이 눈을 뜨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도 정치와 전혀 관계가 없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이러면 안되는 거잖아요?"). 그러므로 송우석은 사실 변화라기보다는 각성에 가깝고, 그런 각성은 통상 느린 것이라기보다는 즉각적이다. 그러므로 이는 각성이다, 그리고 그런 각성은 (기본 상식을 갖춘자라면) 누구에게나 가능할 수 있다,라는 것이 이 영화의 어떤 태도인 것 같다.  


그래도 누군가는 끈덕지게 물을 것이다. 정말 그것이 가능합니까, 이것은 영화니까 사람이 그렇게도 변하는(각성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실제는 어렵지 않겠어요? 물론 이것에는 당연히 준비된 대답이 있다. 아니, 이건 단지 영화가 아니예요, 그렇게 변한 사람이 실제로 있거든요. 그런데 이 준비된 대답은 쉬워 보이지만, 그렇게 쉬운 것만은 아니다. 어쩌면 여기에 이 영화가 의도한(혹은 의도하지 않은) 이차적인 질문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인데, 우리가 송우석이라는 캐릭터로 인간 노무현을 환기하려면 반드시 한 가지 질문에 답할 각오를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화가 끝난 이후의 이야기, 즉 영화의 2부를 볼 준비가 되었습니까,라는 질문이다. 이 영화의 끝, 그러니까 99명의 변호인이 변호해 준 송우석이라는 인물에 대한 감동을 배가시키기 위해서만 인간 노무현을 떠올리는 것은 (정말 미안한 얘기지만) 일종의 자기기만이나 자기위안에 가깝다. 우리가 노무현을 떠올리는 순간 우리는 그 나머지에 대한 씁쓸함을 견딜 각오를 어떻게든 해야만 한다. 아니, 나는 그의 인간으로서의 마지막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어떤 것들은 그것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송우석이 박종철 군의 죽음 앞에서 시위대를 이끌며, 추모는 원래 조용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때(그의 말과는 달리 박종철의 죽음은 결코 조용한 것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의 죽음도 마찬가지였다), 혹은 99명의 변호사들이 그를 지키기 위해 한명한명 일어설 때, 글을 쓸 수도, 책을 읽을 수도 없다고 이야기하던, 아무도 가까이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그의 마지막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마지막만은 아니다.

나는 그것을 송우석이라는 캐릭터보다는 조금은 우회해서 찾고 싶은데, 예를 들어 굳이 이야기하자면 이 영화에서 악역이라고 불릴 수 있는 캐릭터들이다. 예를 들어 악질적인 고문 경찰 차동영(곽도원)이나 건설사 대표의 아들(류수영)과 같은 도리어 어떤 신념을 가졌기 때문에 무서워보이는 캐릭터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송우석의 앞과 뒤만을 보고 있다. 과거에 공산주의자들, 그러니까 빨갱이들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생각하는 차동영은 과거만을 보고 있고, 민주주의를 하고 싶지만, 현재는 아직 그 역량이 모자라다고 말하는 건설사 대표 아들은 미래만을 보고 있다. 즉 그들은 과거에 얽혀 있거나, 미래의 무엇인가를 보기 위해서 현재의 인간을 기꺼이 희생시키고자 한다. 그것을 국가의 논리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거의 무엇 때문에, 혹은 미래의 무엇 때문에 현재의 국민은 희생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그것이 (왜곡된) 국가이다. 그리고 거기에 송우석은 일갈한다. 국가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국가는 국민입니다! 현재 눈 앞에 있는 이 푸른 수의를 입은 국민을 보라는 말이다. 그러나 어떤 만족을 위해, 노무현이라는 실제의 기표를 환기하는 순간, 우리는 이 일갈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덧씌워야만 한다. 누군가의 살려달라는 외침에 내가 포함된, 그가 수장이었던 우리의 정부는 무엇이라고 답했나. 비디오 앞에서 눈이 가려진 채로 살려달라고 말하던 그를 보았나, 보지 않았나. 그리고 우리는 그에 대한 대답을 생각하면서 한없이 쓸씁해진다. 국가가 국민이라고 답하던 그는 어디로 갔을까. 아니, 이것은 단지 영화적인 기만에 불과한 것일까.

<씨네 21>에 실렸던 이 영화 <변호인>에 대한 정한석의 글은 노무현의 마지막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처음 영화를 보기 전에 이 글을 읽었을 때는 왜 그것으로부터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일까, 의아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정한석은 말한다. "<26년>과 <그때 그사람들>은 저들이 반드시 전두환과 박정희라는 인물 자체로 영화 안에서 존재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변호인>은 영화 안에는 송우석이 있고 그 바깥이나 위에 노무현이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중요한 건 바깥이나 위에 노무현이 있다는 것이다." 영화 안의 인물과 바깥의 인물. 이 영화는 그 간극을 줄이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그것을 그대로 둔 채, 그것을 보는 이가 알아서 조절하도록 떠넘긴다(예를 들어 이 영화는 "이 영화는 실제의 인물과 사건을 배경으로 했지만, 허구입니다."라는 식의 상당히 모호한 자막으로 시작한다). 그러므로 누군가는 그 간극을 극도로 줄여 현실에 대한 분노의 에너지로 응축시킬 것이고, 누군가는 그 씁쓸함에 괴로워하며 소주 한 잔을 들이킬 것이고, 누군가는 비웃으면서 평점 1점의 테러를 시도할 것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이 간극으로부터 빚어진 결과이고, 정한석의 말대로 이 영화의 운명이다.

나는 그 결과에 대해 관심이 없지만, 다만 그 간극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그것이 이 씁쓸함에 맞서는 작은 내 방식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이 간극에 대한 어떤 실마리가 혹시 각성이라는 구조에 의해 빚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했지만 언뜻 보면 변화하는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영화는 결국 각성에 대해 말하고 있고, 그 이면에는 여전히 변화하지 않는 것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포기하지 않겠다, 끝까지 노력하겠다라는 송우석의, 혹은 노무현의 태도이다. 그런데 어쩌면 포기하지 않겠다던 그 태도가 그의 비극에도 관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가 어쩌면 자기자신에 대해 얼마간 포기했다면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을지도 모르지 않을까. 답은 어렵고, 짧은 글을 쓰겠다고 했으니 이제 글을 끝내야 할 것 같다. 다만 그저 마지막에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우리는, 아니 나는 변해버린 자기자신을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는가. 우리는 여전히 환멸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타인에 대한 환멸이든, 자신에 대한 환멸이든(그러므로 도리어 나는 영화의 처음을 생각한다. 선배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기 위해 방 앞에서 머뭇거리며 박카스를 하나 꺼내 꿀꺽 마시던 그의 모습을 말이다. 나중에 그에게도 다른 의미에서의 박카스가 필요했다).


덧.
짧은 글로 대신하겠다,고 처음에 시작했는데, 필요이상으로 긴 글이 되어버렸다. 뒷 부분은 그저 씁쓸함에 대한 한탄일 뿐이다.

아..그리고 한 마디 더 덧붙여두자면 이 영화가 올해 조금만 더 빨리 개봉했더라면 상당수 영화제의 남우주연상도 어쩔 수 없이 또 송강호에게 줘야만 했을 것 같다.


- 2013년 12월, 메가박스 센트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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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3.12.31 22: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 오늘에서야 <변호인>을 예매했고 이번주말에 영화를 봅니다. 새해 첫 영화가 되겠네요.

    올해 마지막날 정말 오랫만에 이곳에 들어와 밀린 글들을 읽고있습니다.
    이런 시간들이 점점 귀하고 소중하게 느껴지네요. 12월은 너무 정신없이 지나갔는데 집이랑 회사를 왔다갔다했다는 무미건조한 느낌밖엔 없어서 좀 슬퍼지려해요 기운을 차리고 좀 활기차게 생활해야하는데 말이죠 ㅎㅎ

    참 지난 토요신문 책서평난에 올해의 책들이 소개되었는데 맥거핀님 리뷰에서 읽었던 책들이 있어서 속으로 (어 나 이 책 아는데..사실 읽은것도 아니면서)반갑고 특별한 느낌이었어요.

    뭐, 그래서 내년에도 이따금씩 들려 좋은 글 읽고 마음의 양식을 얻으려하니 계속 건필하시고 건강하시라는 말씀이죠~
    ^^*

    저도 블로그에 글도 올려봐야한다 한다면서 맨날 140자만 뚝딱거리고 있네요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4.01.01 16: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고맙습니다. 늘 들러서 글 읽어주시고 여러 얘기 해주시는 님 덕분에 힘이 납니다. 140자든, 그 이상이든 형식만 다를 뿐 다 소통의 형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본다고, 혹은 들어준다고 생각하니까 글도 남기고, 트윗도 하고, 그러는 거겠죠. 그렇게 모두들 인터넷에서는 약간씩은 외롭지만, 그래도 위안을 얻고, 꾸준히 무엇인가를 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나 봅니다.

      뭐든지 새로운 것에 적응한다는 것은 어렵죠. 그리고 적응할 때쯤 되면 또 관성과 지루함이 고개를 드니 또 어렵구요. 영화나 책이나 어떨 때보면 지겹지만, 그래도 결국 손에서 놓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의 위안도 주는 것이 삶에서 잘 없기 때문에 아닐까 생각합니다.

      뭐 마음의 양식..^^까지는 바라지도 않구요. 그저 글을 읽으면서 아주 작은 공감이나 위안을 얻었으면, 또 그로서도 저 스스로도 작은 위안을 얻을 수 있으면 즐겁습니다.

      아무튼 쓸데없는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구요. 올해에는 새롭게 시작하시는 일에서 좋은 결과와 작은 기쁨이라도 얻는 한해가 되시기를 바라구요. 정말 가끔 시간나시면 와서 글 읽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저도 여전히 짧은 글이든, 긴 글이든 시간나는 대로 읽고 가겠습니다.

      아무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Happy New Year~!!

축제의 일상화가 아닌 일상의 축제화

The Book | 2013. 12. 17. 17:09 | Posted by 맥거핀.
일베의사상새로운젊은우파의탄생
카테고리 정치/사회 > 사회학
지은이 박가분 (오월의봄, 2013년)
상세보기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박가분의 책 <일베의 사상>은 일베, 혹은 일베라는 어떤 현상에 대해 다루고 있다. 따라서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쓰기가 조금은 조심스러운 면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일간베스트저장소(이하 일베)'라는 사이트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모른다'라고 하는 것은 '그것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는 의미와는 조금 다른 것으로 굳이 따지자면 '하지 않는다'와 비슷한 의미가 될 것인데, 과연 어느정도까지를 '안다'라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제쳐 두고라도, 아무래도 들어가서 글 몇 개 본 정도로 일베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란 곤란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비유를 하자면 지금 상황은 영화를 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어떤 영화를 본 평론에 대해 어쩔 수 없이 댓글을 남겨야 하는 상황인데, 아무래도 이런 댓글은 무엇인가 방어적이 될 수 밖에 없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적대적 호수성의 희생양이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이 책은 '일베의 사상'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아마 상당수의 사람들은 이 제목만으로도 무엇인가 의아할 것 같은데, 도대체 일베에 '사상'이라고 불릴만한 것이 있는가, 혹은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는가,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저자는 이 책의 제목을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의 사상>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임을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적어도 내가 아는 상당수의 인터넷 커뮤니티, 혹은 현실의 집단에서는 일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거의 금기시되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물론 여기서의 금기란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에 대해 조롱하거나 비난을 퍼붓는 것은 거의 일상화된 수준에 가깝다). 예를 들어 방송에서 (실수이든 다른 무엇이든) 일베의 용어를 쓴 아이돌 가수가 사과문을 올리고, '일밍아웃' 같은 용어가 있는 것은 그런 풍경을 어느정도 보여준다고 보아야 할 것인데, 그것의 이면에는 일베를 어떤 '쓰레기'와 비슷하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그런 입장에서라면 일베는 매우 더러운 무엇인가가 모여 있는 어떤 곳이며, 굳이 들출 필요가 없으며, 곧 폐쇄시키는 것이 마땅한 무엇인가이다. 예를 들어 저자도 이 책에서 조지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를 이야기하며, 코끼리, 그러니까 보수주의의 프레임과 마찬가지로 일베도 생각할 필요가 없는, 혹은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 관점에서라면 문제는 보다 간단할 수 있다. 쓰레기는 버리거나, 어딘가에 묻어두면 된다. 예를 들어 인터넷 사이트라면 그 사이트를 폐쇄하거나, 법적인 제재를 가하거나, 접속을 차단하거나 하는 등의 방안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는 것이, 이것이 쓰레기라고 했을 때, 그것은 썩지 않는 쓰레기라는 점이다. 즉 썩는 쓰레기라면 그것을 어딘가에 버리면 언젠가는 한낱 유기물로 돌아가겠지만, 이 괴이한 쓰레기는 썩지 않고 계속 엄청난 악취를 풍기는 데다가, 때로는 사람에게 달려들기도 한다. 다시 인터넷의 문제로 돌아가자면 아마도 이 일베를 없애거나, 제재를 가하거나 한다면 분명히 비슷한 다른 무엇인가의 형태로 분명히 나타날 것이라는 이야기이다(오백원 건다). 그러니 적어도 이것이 현재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고, 궁극적으로 사라져야 할 것이라는 점에 동의한다면, 그것을 없앨 수 있는 다른 방안을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의 시작 방법 중에 한 가지는 이 책처럼 그것에 내재되어 있는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이 될 것이다. 즉 이것이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길래 안 썩지,하고 보는 것이다. 혹은 조지 레이코프처럼 굳이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책을 쓰는 것이다(물론 '코끼리'를 정말로 쳐다보기도 싫다면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굳이 말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박가분은 인터넷 논객답게 마지막에 자신의 이야기를 '세줄 요약'의 형태로 제시한다. 그것은 첫째, 일베는 2002년부터 시작된 촛불의 사상을 계승하며(이 말이 정 불편하다면 일종의 거울상이라고 할 수도 있다), 둘째, 일베는 현실의 국가, 현실의 요구를 단념하고 인터넷에서의 인정투쟁 방식을 현실로 '끌고 오는(이 말이 특히 중요하다)' 새로운 유형의 젊은 우파이며, 셋째, 이러한 일베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광장, 즉 인터넷에 모인 사람들이 각자의 일상적인 공간에서 자신의 이상을 작게나마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은 저자의 일종의 제언이기 때문에 제쳐두고라도 첫째와 둘째, 특히 첫째에서 고개를 갸웃거릴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일베가 이 촛불을 든 내 손에서 시작되었다고, 나한테서? (물론 모든 쓰레기는 쓰레기가 아닌 것에서 시작된다. 처음부터 쓰레기였던 것은 없다. 쓰레기는 결국 버리는 자, 그 자신이 애초에 만들어낸 것이다.)

직관적으로 보이듯이, 이 첫째와 둘째, 셋째는 각각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야기한다. 이 미래, 즉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공간을 만들어내기 위해 인터넷의 인정투쟁을 현실로 끌고들어오는 현재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며, 이 현재는 과거, 그러니까 2002년부터 시작된 촛불에 의해서 배태되었다. 즉 박가분의 방식은 일종의 거슬러오르는 방식이다.  마루야마 마사오가 일본의 사상을 살펴보기 위해 그 기원을 거슬러 올랐던 것처럼, 아니 썩지 않는 쓰레기가 왜 썩지 않는지 보기 위해서는 그것이 만들어진 공장을 살펴봐야 하는 것처럼, 박가분은 그 기원을 거슬러오르는 작업을 시작한다. 물론 가장 가까이에, 즉 시작지점에 있는 것은 디시인사이드의 인기자료를 저장해 놓는 데이터베이스에서 출발했던 일간베스트저장소, 그러니까 일베지만, 그 이전에는 디시, 혹은 디시와 비슷한 다른 인터넷 커뮤니티들이 공유했던 어떤 것들이 있고, 그것은 예를 들어 부정과 긍정의 양식이 공존했던 증여와 답례의 호수성(짤방이나 콘텐츠를 공유하는 것이 한 예이다), 인정투쟁과 계급투쟁, 혹은 정상국가에 대한 열망과 같은 것들이 그와 같은 것들이다.  

즉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일베의 어떤 행동양식은 하루아침에 나타난 것이 아니다. 자생적으로 자라난 수많은 인터넷 커뮤니티의 어떤 행동양식이나 공유하는 무의식이 일베의 행동양식의 초석이 되었고, 일베는 그것을 더 위악적으로 변형시켰을 뿐이다. 아니 어쩌면 변형이라기 보다는 집적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일베라는 것은 집적된 데이터베이스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집적은 여기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촛불도 결국은 집적의 한 형태이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우파의 집적이 일베라는 것으로 나타났다면, 좌파의 집적은 촛불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2002년에 시작된 촛불은 현실의 정치인 노무현을 탄생시켰으나 노무현 정권은 궁극적으로 촛불의 의미를 담아내는 데 실패했다(극단적으로 말하자면 2002년의 반미정서는 이라크 파병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실패한 무엇인가는 두 가지의 형태로 나타났다. 하나는 다시 한번 반복하는 것, 즉 2008년의 촛불이다. 그러나 이것마저 미완이었고, 이것은 곧 일종의 그 거울의 형태, 혹은 전향자를 만들었다. 그것이 곧 일베이다. 

물론 이것은 거친 도식화이고, 일베의 모든 것이 일종의 '전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며, 이는 촛불에 책임을 묻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전향의 형태가 그렇듯, 전향자와 전향하지 않은 자들은 공유하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일베가 감성적인 이상주의를 비웃으며 '몰이상의 이상'을 추구했다면, 촛불은 중심에 구속받지 않으며 즐기면서 외치고 싶은 것을 외친다는 '몰이상'을 공유했으며, 일베가 인터넷의 인정투쟁을 현실에 끌어왔다면, 촛불 역시 자신들의 목소리를 국가가 들어달라는 인정투쟁의 한 형태였다(물론 이 부분은 촛불의 형태를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서 논란의 여지가 많은 부분이라 생각한다). 또한 그 정상국가의 양태는 다를지언정 그들은 여전히 각자 다른 의미에서 정상국가가 도래하기를 꿈꿨다. 즉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결국 국가를 넘어서지 못하고 국가의 언저리에 머물고 있었다. 그래서 일베는 이러한 것들, 즉 과거의 인터넷 무의식과 촛불에 대한 반동이 뒤죽박죽 얽혀 있다. 그들의 최종의 정언 명령, 즉 '인터넷의 방식으로 다같이 동물이 되자'는 것은 집밖으로 촛불을 들고나온 촛불집회에 대한 반동과 과거인터넷의 행동양식이 결합되어 있으며, 다른 일베의 행동양식들, 그러니까 팩트의 (나름의) 논리적 정합성을 찾는 행위(누군가의 글을 반박하기 위해 그의 과거 글을 논박의 재료로 삼는 태도와 같은 것이 일례이다. 이른바 '팩트'를 찾는 일베 유저의 태도는 일베충을 몰아내기 위해 그의 과거글을 찾는 다른 커뮤니티의 자세와 통하는 점이 있다), 혹은 타인혐오(와 자기혐오)에 깃들여 있는 것들도 이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즉 이는 무의식의 계승과 촛불(로 대변되는 무엇인가)에 대한 반동이 결합되어 있는 일종의 정념덩어리인 것이다.

물론 다시 강조하자면 결국 이 모든 것, 즉 과거로 거슬러오르는 것은 미래를 끌어내기 위해서 하는 몸부림이다. 그리고 그 미래란, 일베라는 것을 없애지는 못해도, 적어도 현재의 어떤 형태에서 바꾸기 위함이다. 다시 비유로 돌아가면 썩지 않는 쓰레기에서 썩는 쓰레기로 바꾸는 과정이다. 그리고 저자의 분석대로라면 그 기원에서 보게 되는 것은 쓰레기를 만들고 있는 나의 손, 촛불을 든 나의 손, 혹은 촛불의 대의에 일정부분 공감한 나의 모습이다. 이것은 위험한 끝맺음일까.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쓰레기를 버린 사람을 잡아 족치려고 애타게 찾아 헤맸지만, 그것이 결국 나라면, 문제는 더 간단할 수 있다. 내가 안버리면 되니까. 물론 저자가 제시한 해결책(위에 셋째)은 미완의 해결책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인정투쟁이 불필요한 공간, 최소한의 인정이 가능한 각자의 공간을 만들자는 것, 그것은 환멸을 견딜 수 있는 공간을 만들자는 것이니까. 환멸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것을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과거의 촛불에서 참가자들은 축제가 지속되기를 바랬다. 환멸을 견뎌내야 하니까. 축제가 영원히 지속된다면 환멸을 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축제는 끝났고, 환멸을 견뎌내지 못하는 누군가는 일베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러니 필요한 것은 축제의 일상화가 아니라, 일상의 축제화다. 나의 일상이 작은 나만의 축제들로 이어진다면 외부의 축제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것에는 '국가'가 하등 필요하지 않다. 저자가 인용한 조윤호의 글(나는 '국가'를 넘어서지 못한 '국민'이 촛불집회 실패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조윤호 <개념찬 청춘>, 248p, 박가분 <일베의 사상> 257p에서 재인용)도 그것을 말해준다. 나의 축제에 국가가 초대받을 이유란 없다.


덧.
가연님도 지적하셨지만, 과연 이 책에 수많은 사상가들의 이름이 필요했나 하는 것은 의문이 든다. 이것은 그 옳고그름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문제다(물론 솔직히 말해서 지적할 능력이 안된다). 개인적으로는 닭을 잡는데 소잡는 칼을 쓰는 듯한 느낌이다. 예를 들어 한 영화에 대한 분석에서 약간 포커싱이 나간 장면을 두고, 이것은 우울하고 몽환적인 당대의 배경을 담아내며, 키예슬롭스키에서 소쿠로프로 이어지는 유미주의적 전통을 계승하려는 시도라고 말하는 격이다(그냥 손에서 나오는대로 쓴 문장이다). 사실은 단지 촬영감독이 어제 마신 술이 덜 깼거나, 카메라 포커싱을 맞추는 능력이 떨어져서 그런 것일수도 있다. 뭐 아무튼 그렇다고 해도 나름 재미있게 읽었다. 다시 영화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개인적으로 어떤 영화에 대한 글에 동의하기 위해서 는 일단 그 글이 무엇인가 생각해 볼 수 있는 지점이 있으면 되지 않을까라고 (나를 방어하는 차원에서) 생각한다. 그가 설혹 잘못된 인용이나, 얼토당토 않은 이론을 끌어온다고 해도, 일단 그 글의 구조, 혹은 분석이 나름 여러가지를 생각케 한다면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뭔가 들어맞는 듯 보이면서도 미심쩍게 만드는 이 수많은 사상가들의 인용목록이 다시 한 번 아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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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슬러, 리들리 스콧

Ending Credit | 2013. 12. 5. 18:59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전체 줄거리와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미리 말해두지만, 내가 본 코맥 맥카시의 작품은 겨우 3편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봤다는 말을 하기가 조금은 애매한 것이 소설로 읽은 것은 <로드> 한 편이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카운슬러>는 영화로 봤다. 그럼에도 감히 코맥 맥카시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내가 파악한 그의 세계는 어긋나 버린 공간에 놓인 자들의 세계이다.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공간에 불려나와 서있는 사람들. 그들은 보지 말아야 할 세계, 혹은 보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 세계를 본다. 예를 들어 그들은 <로드>에서는 모든 것이 끝장나버린 이후의 세계 어느틈에 놓여져 있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는 안보는 것이 더 좋았을 단발머리 사신 안톤 쉬거를 본다. 그것은 영화 <카운슬러>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카운슬러(마이클 패스벤더)가 보게 되는 세계는 그가 꿈에서라도 생각해보지 않은 세계, 끔찍한 평행우주다(이 영화 카운슬러는 이 두 가지를 평행하게 놓고 초반의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전혀 섞일 수 없는 두 세계가 교차되며 영화가 전개된다. 이 무시무시한 대비. 예를 들어 영화의 중반부 총에 맞은 마약운반원이 트럭을 몰고 겨우 도착한 낡은 주유소. 마치 F1의 피트 스톱처럼 이루어지는 일사불란한 움직임. 어린아이가 포함된 그들은 도대체 이 일에 얼마나 익숙해져 있는 것인가). 그들은 그들의 실수이든, 혹은 다른 누구의 잘못이든, 혹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든 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시간과 공간, 놓이지 말아야 할 곳에 놓인다. 아마도 그것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죽는 것이 더 나았을 시간과 공간.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즉각적인 의문을 불러 일으킨다. 죽는 것이 더 나은 시간과 공간이 있을까. 그러나 코맥 맥카시는 능히 그런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작자이다. 그것을 <카운슬러>는 냉혹하게 그려서 보여주기도 하고, 동시에 대사로서 가르쳐 주기도 한다. 아니, 죽는 것은 너무 쉽지. 그리고 우리는 그 말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나에게 누군가가 <카운슬러>가 어떤 영화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나는 <카운슬러>는 '카운슬링'을 시도하는 영화입니다,라고 답할 것 같다. 아니, <카운슬러>가 '카운슬링'을 하는 영화라니, 이거 무슨 허무개그인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어찌되었건 이 영화는 끊임없이 카운슬링을 이어붙이는 영화다(돌고도는 마약이나 누가 범인인가라는 문제는 그저 맥거핀이다). 한 인물은 어떤 상황에 대해 모르거나, 난처한 상황에 빠져 있거나, 선택의 순간에 놓여져 있고, 다른 한 인물은 그에 대해 카운슬링을 한다. 그래서 심지어는 영화는 중간중간 약간의 흐름 단절을 감수하면서도, 그런 카운슬링의 시도들을 멈추게 하지 않는다. 영화의 주요 인물들인 카운슬러의 사업파트너 라이너(하비에르 바르뎀), 또다른 중개인 웨스트레이(브래드 피트) 같은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다이아몬드를 파는 나이든 보석판매상, 혹은 성당의 신부, 혹은 위험한 골목에서 음식을 파는 사내 등등 영화의 거의 모든 인물들은 카운슬링을 하거나 카운슬링을 받는다. (그런데 한 가지 아이러니하고도 재미있어 보이는 사실은 가장 카운슬링을 할 것처럼 보이는 명칭도 카운슬러인 주인공(물론 카운슬러counselor는 변호사라는 뜻도 있다)은 사실상 한번도 카운슬링을 하지 않고, 받기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의 카운슬링이 명백히 필요해 보이는 시점, 예를 들어 감옥에서 여죄수를 만났을 때나, 라이너가 말키나(카메론 디아즈)의 이상한 성적 취향을 이야기했을 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거나 시시한 농담으로 일관하는데, 이 카운슬링의 부재는 결국 그에게 부메랑이 되어 날아온다. 첫번째 카운슬링의 부재는 그를 결정적으로 놓이지 말아야 할 세계로 내몰았으며, 또한 그는 두번째에서는 라이너의 이야기에서 어떤 힌트를 얻었어야만 했다.) 


어떤 것이 계속 이어질 때, 그것의 의미를 파악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조금 쉬운 방법을 제안하고 싶다. 그것은 그것의 끝과 마지막을 보는 것이다. 가장 처음의 카운슬링과 마지막 카운슬링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어떤 것, 그것은 무엇일까. 가장 처음의 카운슬링은 다이아몬드를 파는 나이든 판매상의 카운슬링이다. 그가 얘기해준 좋은 다이아몬드를 고르는 법, 그것은 반짝거리는 부분보다도 흠집을 보는 방법이며, 그것은 명백히 경고이고, 동시에 영화의 나머지를 미리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불길한 신탁으로 시작하는 오이디푸스의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 우리는 대략 짐작한다(동시에 그 다이아몬드 판매상은 이런 얘기도 했다. 다이아몬드는 죽음에 대한, 혹은 죽음을 향한 경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다이아몬드는 영원하지만, 그것을 가진 자는 죽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전재산을 다이아몬드로 바꾸고 중국으로 떠난 말키나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러한 경고의 카운슬링은 영화의 전반부의 카운슬링에서 계속 이어지는데, 새로 위험한 사업에 뛰어드려는 카운슬러에게 라이너도 경고하고, 웨스트레이는 보다 강도높게 경고한다. 그러나 도대체 무슨 자신감인지 카운슬러는 그것을 거의 귓등으로 흘려듣고, 이것은 영화의 뒷부분을 익히 예상하게 만든다. 그 경고는 카운슬러에게만 닥치지 않았는데, 예를 들어 말키나는 카운슬러의 약혼녀 로라(페넬로페 크루즈)에게 그 다이아몬드가 얼마짜리인지,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가치를 지닌 것인지 말해준다. 그것은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경고의 의미처럼 보인다. 그것을 네가 가지고 있는 의미 혹은, 그것을 감수하기 위해서 그의 약혼남이 뛰어든, 혹은 버린 무엇인가에 대해 알고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그러나 불쌍한 로라는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결국 그의 대가를 치른다. 물론 그녀가 치러야 하는 대가보다 엄청나게 큰 대가였지만. 

즉 우리는 흔히 카운슬링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여러 경우가 있겠지만) 주로 선택에 놓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선택할까, 혹은 저것을 선택할까 하는 갈림길. 그러나 영화가 이야기해주는 것은 사실 이 카운슬링을 받는 순간은 선택의 순간이 아니라는 점이다. 선택의 갈림길은 이미 오래전에 지나쳐왔고, 듣게 되는 것은 그것을 선택했을 때 얻게 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무서운 경고이기도 하다는 점을 말이다. 선택은 어떤 행위(바로 이 카운슬링)가 이루어지기 이전에 이미 (빌어먹을 카운슬러가 아니라 바로 나에 의해) 이루어졌고, 그것은 다른 세계라는 점, 다시 말해서 영화 속 말대로 실수를 한 세계와 실수를 되돌리려고 하는 세계는 이미 다른 세계라는 점 말이다(그리고 물론 그 실수가 거의 회복된다고 해도 그것은 또다른 '다른 세계'일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실 모든 카운슬링은 실패한다. 결정이 이미 내려진 상태에서 제시되는 경고가 무슨 의미가 있으랴. 나는 위에서 <카운슬러>가 카운슬링을 '시도'하는 영화라고 썼다. 그런데 여기에 한마디를 덧붙이고 싶다. 즉 영화 <카운슬러>는 카운슬링을 계속 시도하지만, 계속 실패하는 영화다. 카운슬러는 다이아몬드 판매상에게 경고를 들었지만 흠집 따위는 별로 신경쓰지 않으며, 라이너와 웨스트레이에게 경고를 받았지만 사업에 뛰어들고, 라이너는 카운슬러에게 말키나의 이상한 성적취향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그것을 안들은 걸로 해달라고 하며, 로라는 말키나의 경고를 귀담아 듣지 않고, 신부는 말키나의 고해성사, 즉 그녀에 대한 카운슬링을 포기하고 도망간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는 카운슬링을 하는 영화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카운슬링의 실패를 보고자 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의 마지막 카운슬링에서까지 이어진다. 그런데 여기서의 양상은 조금 다르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모든 것을 다 잃고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술집에 앉아있는 카운슬러에게 술집의 주인은 카운슬링한다. 여기는 밤이 되면 나가면 총을 맞는 위험한 곳이니 조금 있다가 가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 마지막 카운슬링은 역시 실패하고, 카운슬러는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기어이 문을 열고 나간다. 그러나 어쩌면 총을 맞기를 애타게 바랬던 그의 바람과는 달리 그가 거리에서 만나게 되는 풍경은 총알이 쏟아지는 무서운 공간이 아니라, 총기에 희생당한 소녀들을 추모하는 집회의 현장이다. 이것은 그가 보고 싶지 않았던, 혹은 보지 말았어야 할 어떤 세계일까, 아니면 어떤 연대의 공간, 혹은 그를 앞으로 다른 길로 이끌 수도 있는 희망의 신호일까. 어떤 절망이나 어떤 희망이나 이야기하기에는 조금은 섣부르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은 또다른 '다른 세계'이며, 그가 다른 세계에서는 아마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지 못했을 세계임은 분명하다는 점이다. 즉 실패한 카운슬링이 인도하는 것은 그가 애타게 바랬던 죽음이 아니라, 그가 전혀 모르는, 그래도 여전히 어떤 가능성이 남아있는 살아있는 세계이다.

그것을 코맥 맥카시의 어떤 아이러니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처음에 말한 어쩌면 죽는 것이 더 나았을 시간과 공간. 코맥 맥카시는 그것을 냉혹하게 그리며 어떤 희망도 보여주지 않지만, 나는 그 냉혹함에서 어떤 아이러니와 미세한 의지를 조심스레 느낀다. 살고자 할 때는 죽음으로 가까이 보내지만, 그가 다시 기꺼이 죽고자 할 때 끝끝내 코맥 맥카시는 그를 살려둔다. 그리고 그는 다른 세계를 본다. 그것은 분명 그가 보고자 한 세계도 아니었고, 그가 모르는 것이 더 나았을 세계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는 적어도 살아남았기 때문에 그 세계를 본다. 그리고 어쩌면 그 살아남아서 본 그 세계란 또다른 세계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세계가 어떨지는 그 누구도 확실히 단정할 수는 없다. 혹시 어쩌면 그것은 더 잔혹한 것일까. 영화의 후반부에 카운슬러가 들은 여자친구가 죽고 시인이 된 남자의 이야기처럼, 살아남아 시인이 되라고 하는 것이 더 잔혹한 것일까. 그런 것일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지만, 코맥 맥카시는 그것에 관심이 없다(그래도 시가 있는 편이 없는 편보다 낫지 않을까). 다만 이 때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것은 이미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그렇게 선택된 세계이다. 그는 그가 벌인 일에 대해서 살아남아서 어쨌든 마저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 세계에서는 어찌되었건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 끝에 절망이 있든, 혹은 한줌도 안되는 희망이 있든.  카운슬링은 필요가 없다. 어차피 선택은 카운슬러가 아니라 내가 이미 한 것이므로.



- 2013년 11월, CGV 신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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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든 비판이든 정교해야 한다

The Book | 2013. 11. 23. 16:01 | Posted by 맥거핀.
우상의추락프로이트비판적평전
카테고리 인문 > 심리학
지은이 미셸 옹프레 (글항아리, 2013년)
상세보기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지금도 꽤 잔재가 남아 있지만) 한 때 영화 비평에서 '프로이트'가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이른바 정신분석적 비평이라는 것으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이론들을 차용하여 영화에 대해 비평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런 것에 기대자면 <설국열차>는 커티스라는 죄책감에 사로잡힌 사내가 아버지가 되는 데 성공하여 미련없이 죽는 이야기이며, <그래비티>는 우주선이라는 남근이 대기권이라는 처녀막을 관통하면서 무성의 존재 라이언이 성적 존재로 귀환하는 과정이다(내가 지어낸 것이 아니다. 신형철과 허문영의 이야기이다). 물론 더 나아가면 이렇게 말할, 혹은 이렇게 조롱할 수도 있다. <설국열차>는 기차라는 남근이 터널이라는 질을 통과하는 것이며, 마지막 기차의 폭발은 사정과도 같다, 혹은 <그래비티>는 어떻게든 자궁으로 회귀하려는 아이의 욕망(몸을 태아처럼 감싸는 라이언)이며, 어머니인 가이아 대지와 섹스하고 싶은, 그리고 결국 그것에 성공하는 오이디푸스적 욕망이다. 아마도 여기까지 읽은 분들은 상당수 이렇게 생각할 것 같다. 이게 말이야, 막걸리야. 참 아무데나 잘도 갖다 붙이는구만. 아마도 프로이트가 들은 비판의 핵심도 그것에 어느 정도는 맞닿아 있는 것 같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참 잘도 갖다붙인다는 것. 그런데 그것은 또 한편으로 프로이트가 영화 비평, 혹은 기타의 예술 비평 분야에서 각광받은 이유이기도 했다. 이론의 범용성이 뛰어나다는 것. 왜? 모든 예술은 인간의 손으로 탄생하는 것이고, 모든 인간에게는 성기가 있으니까. 즉 어떤 인간도 성의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으니까. 

즉 프로이트는 과학자가 되고 싶어했지만, 과학은 오히려 비웃는 쪽에 가까웠고, 그의 이론에 열렬한 관심을 보이고, 찬사를 보낸 쪽은 과학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상의 추락>의 저자 미셸 옹프레의 비판도 어느 정도는 그런 것과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의 말은 결국 이건 과학이 아니다, 프로이트가 만들어낸 (거의 아무런 근거가 없는) 이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상당히 중언부언하는 경향이 있고, 글이 난삽한 부분이 있지만, 옹프레의 비판은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기원이 감추어져 있다. 프로이트가 마치 창시자처럼 되어 있는 정신분석학은 니체, 쇼펜하우어, 하르트만 등의 철학에 상당부분 빚진 것인데, 그것이 마치 프로이트가 만들어낸 것처럼 알려진 까닭은 자신의 연구에 관련된 기록을 소각하는 등 그가 벌인 행위들 때문이다. 둘째, 프로이트의 이론들은 인류 전체의 이론이 아니라, 프로이트 그 자신을 위한 이론이며, 그의 어린시절의 삶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일 뿐이다. 즉 다시 말해서 모든 아들들이 어머니와의 동침을 애타게 원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이트 그 자신만이 그랬을 뿐이다. 셋째, 코카인에 대한 연구, 미심쩍은 치료법들, 개인적으로 치부가 될 수 있는 사실들이 은폐되거나, 왜곡되었다. 넷째, 과학적이라고 그가 주장한 정신분석학은 사실 아무런 근거가 없으며, 사실상 그가 지어낸 것과 다름이 없다. 또한 그것은 반박의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 일종의 '수행적 발화'라는 점에서도 비과학적이다. 또한 그의 삶에는 숫자, 미신, 신비주의에 대한 관심 등등 비과학적인 요소가 점철되어 있다. 다섯째, 그는 돈이 많은 환자를 선호했으며, 남성우월주의자였고, 파시즘에 호의적이었으며, 성을 해방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성을 억압하는 쪽에 가까웠다. 즉 프로이트는 개인적으로 문제가 많은 인간이었다. 여섯째,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으로 환자를 치유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사실상 그가 치유한 환자는 거의 없으며, 도리어 그는 환자가 어느 정도는 완쾌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째, 프로이트가 전 일생을 통해서 관심을 둔 것은 환자를 치유하는 일이 아니라, 정신분석학을 유명한 이론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오로지 그가 유명해지고, 명성을 얻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비판을 놓고 보면 프로이트는 거의 (사이비) 교주처럼 보인다. 옹프레의 비판대로라면 그가 만들어낸(혹은 만들어냈다고 주장하는) 정신분석학이라는 종교는 (대다수의 사이비 종교와 마찬가지로) 기원도 없고, 그나마 있는 이론도 사실은 그가 자신의 삶에 근거하여 제멋대로 만들어낸 것이며, 단지 여러 신비주의적 요소들이 가득한 것에 불과하다. 또한 교주 프로이트는 개인적으로 상당히 문제가 많은 인간이었고, 결국은 어떠한 신도도 천국으로 인도한 적이, 아니 제대로 치료한 적이 없다. 실제로 옹프레는 글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체계가 (프로이트가 비판한) 일종의 종교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프로이트학과 종교 둘 다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환상을 이야기한다. (...) 정신분석학은 종교와 동일한 법칙을 따른다.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 '또 다른 저 세상'이 있다고 가정한다.(p.687)" 또한 저자에 따르면 프로이트의 이론 뿐만이 아니라 그가 이끈 모임, 단체 등도 이상하게도 종교적인 결사체 같은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면 이런 사이비 종교, 혹은 신비주의적인 이론을 부수는 방법은 무엇일까. 여러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사실 가장 근본적이고, 확실한 무기는 팩트와 증거이다. 즉 눈 앞에 확인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내놓으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진화론과 창조론의 싸움에서 과학의 입장에 서 있는 진화론이 내놓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무기는 진화의 증거들, 즉 화석이나 해부학적, 혹은 계통발생학적 증거들이다. 예를 들어 '맥거핀'을 믿는 우스꽝스러운 맥거핀교가 있다고 했을 때, 그 종교에 대항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무기는 "그럼 저에게 맥거핀님이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세요."가 될 것이다(물론 그 반대편 측에서는 "나는 보이는데, 너는 안보여? 그럼 너의 믿음이 부족해서 그래."라고 답할테지만).
 
즉 과학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정신분석학은 과학이 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하다. 정신분석은 환자용 침대 위에서, 환자와 분석가 간의 일대일 관계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며, 모든 것은 오로지 분석가와 환자의 대화로만 이루어진다. 눈앞에 보이는 증거는 아무 것도 없고, 모든 것은 분석가의 말에 의해서 결정된다. 환자가 정신병이 생긴 원인이 분석가의 진단과 일치한다는 증거도 없고, 분석가가 제시한 치료법이 효과가 있다는 증거도 없으며, 병이 나아가고 있다거나, 혹은 완치했다는 증거도 없다. 또한 환자가 실제로 아무것도 나아진 것이 없을 때에도 프로이트는 빠져나갈 구멍이 있었다. 그것은 환자가 분석을 무의식적으로 거부했거나, 혹은 그의 무의식 깊은 곳에 있는 억압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즉 프로이트의 말대로라면 "동전의 앞면이 나오면 내가 이기는 것이고, 뒷면이 나오면 당신이 지는 것이다." 모든 것은 환자의 머리 속에서 일어나고 우리는 그 환자의 머리 속을 볼 수가 없다. 그의 머리 속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아주 작은 오이디푸스를 핀셋으로 끄집어낼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즉 정신분석학은 과학도 아니고, 그렇다고 철학도 아니다. 과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비실증적이고, 철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비논리적이다. 버트런드 러셀은 "과학은 우리가 아는 것이고, 철학은 우리가 모르는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정신분석학은 아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안다는 증거가 없고, 모르는 것 같은데, 아는 척한다.

그런데 그런 부분에서 보면 미셸 옹프레의 무기는 그렇게 확실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 역시 확실한 팩트라기보다는 상당부분 불확실한 증거, 혹은 정황증거에 의거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저자는 프로이트가 친구 빌헬름 플리스에게 보낸 편지의 많은 부분이 감춰졌다는 이야기를 하며, 그 이유는 프로이트가(혹은 프로이트의 추종자들이) 자신의 이론이 유명한 철학자들의 이론에 근거한 것이라는 부분을 숨기고, 자신이 이 이론의 창시자인양 행세하기 위해서, 또는 자신의 여러 치부들을 숨기기 위해서 한 짓이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러나 저자의 분석대로라면 프로이트와 친구 빌헬름 플리스 간에는 일종의 동성애적인 요소가 있었으며, 그런 관점에서라면 편지를 숨기고 싶은 결정적인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즉 여기서 중요한 것은 편지가 숨겨졌다는 사실보다도, 그것을 왜 숨겼는가의 부분이며, 그것은 여전히 팩트보다는 해석의 영역이다. 다른 부분들도 거의 대부분 그런 식인데, 예를 들어 프로이트가 처제 민나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것을 저자는 거의 기정사실로 간주하며, 그 증거로 그가 처제와 단 둘이 여행을 갔다는 점, 처제가 그들 부부와 같이 살았으며, 그녀의 방은 부부의 침실을 거쳐야만 갈 수 있었다는 점 등을 그 근거로 든다. 그러나 그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정황증거이다. 그런데 그것에 의거해서 저자는 다음의 논지를 이어나간다. 그가 비정상적인 가족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이론들이 비정상적인 가족관계를 다룬다는 것이다. 이것은 온당하다고 할 수 있는가?

저자는 프로이트의 이론이 정확한 팩트와 명확한 근거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그의 개인사에 근거한 추론이나 그가 만들어낸 신비스러운 이야기들에 불과하다는 점을 밝히기 위해, 그 역시 여러 정황증거에 따른 추론만을 무기로 사용하고 있다. 즉 프로이트가 환자의 여러 개인사들과 그에 따른 정황증거들을 조합하여 적절히 추론의 방식으로 '분석'을 하였다면, 마찬가지로 저자도 프로이트의 여러 개인사와 정황증거들을 놓고 적절히 추론하여 프로이트라는 인간을 재구성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프로이트의 방법론이 이러한 이유 때문에 비판을 받는다면, 저자의 방법론 역시도 비판의 영역에 들어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저자는 어니스트 존스나 피터 게이와 같이 프로이트에 호의적인 전기를 쓴 작가들을 공정하지 못했다고 비판하지만, 그들은 같은 팩트를 놓고 다른 해석을 하고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미셸 옹프레는 프로이트가 무솔리니에 보내는 책에 헌사를 쓰고,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1933년부터 6년 뒤 프로이트가 사망하기까지 그가 한 번도 자신의 글에서 히틀러라는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다고 파시즘에 호의적이었다고 비판하지만, 한 번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옹호의 증거가 되는가, 아니면 무관심이나 무지의 증거가 되는가(나는 이것이 옹호가 아니고 단지 무지한 것일 뿐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당시 상황에서 어쩌면 무지도 옹호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단지 이것이 팩트라기보다는 해석의 영역에 가깝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굳이 견해를 밝히라면 옹호라기보다는 무지에 가깝다고 보는데, 미셸 옹프레의 책에 있는 프로이트가 친구 어니스트 존스에게 보냈다는 편지의 (독재자를 옹호한다는) 증거도 그러하다. "정치적 상황이 전보다 더 암울해졌어. 나치 정권의 공습을 저지할 방법이 도저히 없는 것 같아. 불길한 나치 정권의 행진을 막을 길이 없어. 정신분석으로도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는걸. 오, 안타깝도다! 무솔리니가 독일에게 자유로운 길을 내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지금까지의 상황을 지켜봤을 때 우리를 보호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무솔리니야. 무솔리니라고.(p.653)" 나치를 저지하기 위해 무솔리니에 희망을 걸다니.)

아무튼 저자의 말에 따른다면 프로이트는 사기꾼이다. 그것도 전 인류를 속인 희대의 거대한 사기꾼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프로이트가 전 인류를 속일 수 있었던 이유로, 기독교 문화에 처음으로 성을 화두로 꺼낸 점, 그를 옹호하는 학자 및 무리의 종교에 비유될 정도의 견고함, 종교의 테마를 자신의 이론에 차용한 점, 허무주의적이고 염세적인 당시의 시대에 잘 들어맞았다는 점,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를 통해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을 어느정도 확보한 점 등을 들고 있다. 그런데 뒤집어 생각해 보면 이것은 프로이트의 사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가 멍청했기 때문일까. 다시 말해서 그가 만들어낸 여러 사기의 구조가 정교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사기가 멍청한 우리에게 무엇인가 도움이 되었기 때문일까. 즉 저자는 프로이트의 이론이 널리 전파된 이유, 그의 정신분석학이 하나의 학문으로 (한때나마) 지위를 차지한 이유로 그의 내용보다는 위에 말한 다른 부차적인 부분, 즉 참신성, 조직화, 마술화(판타지), 시대성, 이데올로기에 부합 등을 이야기하지만, 어쩌면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이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서 프로이트의 이 사기성 짙은 이론이 널리 퍼진 이유를 가장 쉽게 말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그게 우리가 생각하기에 우리의 문제를 잘 설명해준다고 느껴졌으니까.
 
그러니까 현재의 상황은 이렇다. 무속을 비판하는 일군의 무리가 용하다는 점쟁이를 사기라는 이유로 공격한다. 그런데 그 점쟁이에게 점을 본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렇게 옹호하고 나서는 것이다. "어..우리 보살님 진짜 용한데. 제 인생 다 맞췄어요! 보살님이 저를 다 낫게 해줬어요. 저는 보살님 때문에 행복해졌어요. 그러니까 공격하지 마세요."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기는 사기인가 아닌가. 내가 보기에 남은 길은 두 가지인 것 같다. 비판을 더 정교하게 하거나(그러니까 보살님이 무슨 몰카라도 설치해 놓은 것을 발견하거나), 사기를 더 정교하게 하거나(모든 사람들의 인생을 100% 맞추거나).


덧 1.
일단 사기를 더 정교하게 하려는 노력은 하고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뇌과학과 정신분석이 결합한 신경정신분석학(neuropsychoanalysis)과 같은 것들이 그것인데, 예를 들어 이 새로운 분야에 천착하는 학자들은 이차사고 과정이 전두엽의 실행능력을 반영하고, 정신분석의 욕동(drive)은 pontine region (특히 periaquiductal gray)에서 피질로 이어지는 트랙과 연관되어있다고 밝히고 있다고 한다(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다. 하지현의 '21세기의 정신분석, 과학인가 철학인가?'라는 글에서 따왔을 뿐이다). 어쩌면 언젠가는 머리 속에 있는 세포에서 나노분자만한 크기의 오이디푸스라도, 아니면 하다못해 오이라도 꺼낼지도 모른다(미안합니다..내용도 없는데 글이 길어지니 짜증나서 그만..).

덧 2.
개인적으로는 글이 조금 난삽한 경향이 있고, 중언부언하는 부분들이 많다고 느껴져서 읽기에 힘들었다. 글을 그렇게 썩 잘 쓰시는 분은 아닌 듯 하다. 또한 (가연님도 지적하셨지만) 번역도 군데군데 이상한 부분들이 있는데, 명백히 오류라고 여겨지는 부분도 있다. 예를 들어 "그 탄생 배경은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의 오류를 발견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 그는 자신이 쓴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통해 천체에 대한 진실을 밝혀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동안 믿어왔던 '지동설'을 부인하고 '천동설'을 주장했다. (p.91)"와 같은 부분을 보면 천동설과 지동설을 바꾸어 쓰고 있으며, 215페이지에서는 프로이트의 딸인 소피의 이름이 그가 고등학교 때 히브리어를 배운 교사 사무엘 해머슈라크의 여자 조카의 이름에서 따온 것일지 모른다고 하다가, 285페이지에서는 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프로이트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히브리어를 가르치던 교사 사무엘 해머슈라크의 조카 이름이 안나였다. 프로이트는 이 소녀의 후견인이기도 했다. 우리는 안나 프로이트의 이름이 바로 여기서 온 것으로 추측한다." 바로 그 전에 거의 한 챕터를 할애해 프로이트의 딸 안나(소피의 여동생이 안나이다. 그러니까 프로이트에게는 소피와 안나라는 두 명의 딸이 있다)의 이름이 프로이트의 환자 안나 O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프로이트의 여동생 안나의 이름에서 따온 것인지 온갖 추측을 했으면서 말이다. 사무엘 해머슈라크의 조카도 안나와 소피 두 명인 것인가? 이런 것을 놓고 보면 어쩌면 번역가의 문제가 아니라 작가의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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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비티, 알폰소 쿠아론

Ending Credit | 2013. 11. 15. 23:32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전체적인 줄거리와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1.
<그래비티>는 중력이 없는 공간에서 중력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상한 영화다. 아니 분명 이 말은 오해의 소지를 담고 있다. 영화로 인해 많이 나온 이야기이긴 하지만 중력이 '없는' 것은 아니니까. 영화의 배경이 되는 지구와 근접한 우주 공간에는 여전히 지구의 중력이 작용하고 있다(물론 지구와 멀어진다고 해서 중력이 '아예'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아주 미미하기는 하나 중력은 여전히 작용한다. 또한 많은 이야기들이 지적했듯 <그래비티>는 실제와 맞지 않는 영화 나름의 과학법칙이 존재한다. 아무튼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러니 여기서 말하는 과학법칙들이란 '영화에서 말한' 과학이다). 그런데 마치 중력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런 중력과 (위성이) 지구를 도는 원심력이 상쇄되기 때문이다. 즉 그곳에는 여전히 힘의 법칙들이 작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당기는 힘과 회전하는 힘. 영화의 주인공인 스톤 박사(산드라 블록)는 회전하는 힘, 즉 지구 주위를 도는 위성잔해들에 의해 죽음 가까이까지 이르렀다가 당기는 힘, 즉 지구의 중력에 의해 살아 돌아온다. 전혀 멋대가리 없이 이야기하자면 이 영화는 그런 영화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애초에 무(無)와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영화가 "소리도 산소도 없다. 외계인도 우주전쟁도 없다."와 같은 '없다' 시리즈를 메인카피로 내세웠을 때, 그것은 그 대신 보여줄 다른 '꺼리'가 있다는 자신감이다. 그 '꺼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잊고 있는 것들이다. 즉 소리도 산소도, 그리고 중력도 없는(사실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 공간에서 빛을 발하는 것은 관성의 법칙, 작용-반작용의 법칙과 같은 뉴턴의 구닥다리 법칙들이다. 예를 들어 줄이 끊어진 스톤 박사는 한 번 돌기 시작하더니 계속 돌며 떠밀려나간다. 관성의 법칙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혹은 다른 무엇인가가 그녀를 붙잡지 않는다면 그녀는 영원히 돌며 떠밀려가면서 죽음의 길로 갈 것이다. (지구에서도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우주에서 뉴턴의 관성은 그녀를 죽음으로 내모는 무서운 역학이다. 그러나 그런 죽음의 길에서 그녀를 구원하는 것 역시 뉴턴의 역학이다.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 말이다. 우주에서 우주선이 움직일 수 있는 이유는 뒤 꽁무니로 무엇인가를 맹렬히 쏟아내기 때문이다. 그 힘의 반작용으로 우주선은 앞으로 나아간다. 마찬가지로 영화에서도 이를 간단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있는데 (말이 안된다는 지적을 받기는 했지만) 스톤 박사가 소화기를 추진체로 이용하여 위험으로부터 이동하는 장면이다.  

2.
이 작용과 반작용이라는 것은 영화에서 눈에 보이는 힘으로 주로 나타났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있다. 예를 들어 대화라는 것도 일종의 작용과 반작용이다. 극의 초반부를 이루고 있는 쓸데없어 보이는 대화들, 예를 들어 우주인들과 지구의 본부(휴스턴)가 교환하는 대화들, 그리고 우주인들이 교환하는 이야기들은 반드시 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내용들도 있지만, 외부인인 우리가 보기에는 쓸데없어 보이는 농담들이 더 많다. 그러나 그것은 아마도 그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것들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누군가가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거나, 혹은 누군가가 나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그들이 그 사이에서 확인받고 싶은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주선과 우주선 외부의 우주인을 연결한 물리적인 끈과 동일한 기능을 가진다. 그러니 그들은 우주선과 연결한 물리적인 끈이 끊어졌을 때보다 우주선과의 교신, 즉 정신적인 끈이 끊어졌을 때 더 큰 멘붕에 빠진다. 끈을 잡아당기면 다시 우주선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신이 끊어지지 않는다면 그들은 다시 우주선으로, 혹은 지구로 돌아갈 수 있다. 이것은 여전히 작용-반작용의 세계이다. 

그리고 그 반대의 세계는 관성의 세계, 죽음과 가까운 세계이다. 영원한 회전, 혹은 줄을 손에서 놓고 영원히 멀어지는 것. 그것은 영화 속에서 실제로 보여지거나 이야기로 확인되는데, 예를 들어 아이를 잃어버린 스톤 박사가 라디오를 들으며 몇 시간동안 끝없이 운전만 했다고 말한 경험은 그것은 관성에 대한 투항일 것이었다. 관성에 내맡겨서 자신을 죽음으로 가까이 내모는 것이다. 아마도 스톤 박사가 기꺼이 먼 우주로 떠나온 것도 분명히 그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처음과 끝을 제외하자면 이 곳은 관성의 세계니까. 영원히 지구 주위를 도는 세계. 위성은 한 번 지구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서 엄청난 힘(작용과 반작용의 힘)이 필요하지만, 그 후에 그 위성을 지배하는 것은 위성의 원심력과 지구 중력의 평형인 관성이다. 그 궤도에 한 번 오르게 되면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는다.

3.
그러나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이는 아무런 힘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따름이다. 즉 힘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힘이 상쇄되는 것이다. 다시 스톤 박사의 경우로 돌아간다면, 죽은 아이는 스톤 박사의 마음에 그대로 있지만, 죽은 아이가 스톤 박사를 당기는 힘을 운전이나 우주에서의 위성 회전과 같은 원심력으로 상쇄시키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놓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영원히 그것이 가능하다면 말이다. 영원히 라디오를 들으면서 운전하거나 영원히 지구의 주위를 뱅글뱅글 돌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으로서 죽은 아이를 영원히 잊을 수 있다면 왜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거나 혹은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죽음과 맞닿아 있는 길이기 때문이며, 인간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거나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렇게 이야기해 보자. 스톤 박사는 그래비티, 즉 중력이라는 힘을 피하여 우주 공간에 왔다. 지구의 중력, 아이의 기억은 그녀를 잡아당기고, 그녀는 그것을 피하기 위해 지구를 돌다가, 이제 우주를 도는 것을 택했다. 그러나 이곳은 언뜻 무중력의 공간, 다시 말해서 힘이 없는 공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매순간 힘이 작용하고 있다. 지구의 중력과 물체의 원심력의 균형으로 힘이 없는 것처럼 보였을 뿐, 사실은 힘이 존재했다. 그녀는 균형이 무너지고 나서야 그 존재하는 힘들을 깨닫는다. 물체의 원심력이 없어져 관성으로 영원히 우주 어딘가로 떠밀려갈 위기에 처하고 나서야 여전히 그녀를 지배하고 있던 중력의 따스함, 혹은 아이에 대한 기억을 깨닫는다. 즉 아이를 잊기 위해 계속 무엇인가를 도는 그녀를 돌 수 있도록, 죽음으로 떠밀려가지 않도록 지탱하고 있는 것은 사실은 여전히 그 가운데에 들어가 있는 아이였다. 즉 우리에게는 완전한 무중력, 혹은 완전히 힘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란 없다. 우리는 가능한 힘들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것이고, 사실상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그 가능한 힘들 중에 죽음은 가장 최후의 불가피한 고려대상이다.

결국 스톤 박사는 그것을 마지막에 가서야 알게 된다. 그녀가 죽음을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죽음을 선택한다기 보다는 어쩔 수 없이 그것에 내몰리는 것이다. 최후까지 교신을 하려 애쓰지만 그 교신이 불가능한 것임을 깨달은 다음, 그녀가 돌연 살기로 결심하는 것은 그 죽고자 하는 액션이 살고자 하는 의지의 동일한 힘임을, 즉 결국 그것에서 최후까지 살고자 하는 자신을 보기 때문이다. 그것을 그녀가 만들어낸 코왈스키(조지 클루니)는 이렇게 표현해준다. 착륙은 이륙과 같다고. 다시 말해서 그 얘기는 우주선이 남은 최후의 에너지가 있다는 것이며, 그녀 안에 살기 위한 에너지가 남아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살기 위한 에너지란 죽기로 결심하고 산소를 끄는 힘이다. 아니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지구의 중력을 뚫고 이륙한 힘이다. 즉 착륙하는 힘과 이륙하는 힘은 같다. 무엇인가를 떠나오기 위해 이륙을 결심한 자라면, 무엇인가로 돌아가기 위해 착륙을 결심할 수 있다.

이 마지막은 말하고 있다. 떠나오기 위해 혹은 잊기 위해 노력이 필요했던 것처럼 돌아오기 위해 혹은 기억하기 위해서는 마찬가지의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돌아오는 것에는 댓가가 따른다. 어쩌면 돌아오면 되살아나는 기억들이 더 괴롭히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댓가가 따른다고 할지라도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돌아올 수밖에 없다. 영원한 균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죽음과 거의 마찬가지인, 우주공간을 영원히 떠도는 삶이다. 돌아오는 것, 혹은 그래비티. 그것은 어쩌면 인간의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 2013년 11월, 롯데시네마 홍대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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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3.11.17 18: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화를 늦게 본 탓도 있고 조조라서 그랬겠지만 그날 관객은 저 포함해서 10명이었어요. 속으론 자 지금부터 열명의 조종사들과 우주선 타고 지구를 떠나는거야 뭐 그런 좀 유치한 생각도 들었던것 같아요 ^^;;
    관찰보다는 체험으로서 접하고 싶었던 영화였던 것 같구요.확실히 우주에서 비춰진 지구는 감탄할만큼 아름다웠고 스톤박사와 코왈스키가 부유하는 우주의 무중력상태도 손에 잡힐듯 다가오긴했어요. 어마어마한 속도로 습격하는 위성잔해들이 다가올때마다 눈이 질끈 감겨지기도 했던것 같고.

    맥거핀 님 리뷰를 읽으면서 스톤박사의 독백, "난 이 우주가 지겹고 싫다"라는 대사가 떠올랐는데 분명 라이언은 저 무심하고 규칙적인 우주의 관성이 끔찍했던거겠죠. 그리고 그녀의 내면속에서도 뭔가 변화가 있었을테고요. 환상속의 코왈스키가 "이륙과 착륙은 같은거라고 알려준 건 작용과 반작용의 다른 표현인것같아요.

    영화보고나서 일반적인 감상에 머물러있다가 맥거핀 님글을 읽고나면 뭔가 한 두 단계 업그레이드된 것 같은 이 느낌적 느낌

    * 그래비티가 좋은 영화라는데는 저도 백번 동감입니다 ^^*

  2.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3.11.17 18: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은 왠일로 이렇게 쉽게 댓글이 올라가는지.. ?? 허허허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3.11.18 23: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는 사실 살짝 실망하기는 했어요. 아마도 기대를 너무 많이 해서였겠죠. 3D로 보셨겠죠? 확실히 이 영화는 3D와 아닌 것과 매우 차이가 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D가 역대 어느 영화보다 뛰어나다고 말하기는 어럽겠지만, 여러가지 만끽할 수 있는 장치들을 효과적으로 잘 활용하고 있어요. 3D는 통상 어둡다는 단점이 있지만, 이 영화는 어두운 공간이 배경이니 그렇게 문제가 되지도 않구요.

      아무튼 그 부분이 흥미로워서, 여러가지로 생각을 해봤어요. 스톤 박사가 죽기로 결심을 하고서는 스스로 살기 위한 환상을 만들어내는 심리적 메카니즘 말이죠. 그래서 죽기로 결심한 바로 그 액션이, 살기 위한 것과 동일한 작용-반작용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스톤 박사는 죽기로 결심하고나서야 비로소 살 수 있게 된 거겠죠.

      저는 또 코왈스키 캐릭터의 활용이 조금 아쉽기는 했습니다. 그에게서 어떤 인간적인 면모(?)가 잘 드러나지 않아서요. 메인캐릭터를 살리기 위해 서브캐릭터를 희생시키는 것이 할리우드의 법칙이라고 해도 그것이 너무 강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무튼 영화에서 체험의 문제를 생각해봐야한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습니다. 우리는 영화의 체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그것이 사실은 왜곡된 체험임을 만드는 사람도 알고, 보는 사람도 아는데, 그것이 어떻게 작동할 수 있는가, 혹시 그것이 영화를 점점 나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등등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나 봅니다.

      ...저는 아주 많은 조종사들과 함께 했습니다. <그래비티>의 해외 수익 1위가 우리나라라고 하던데 왜 그런지 흥미롭군요.

그저 어떻게든 애쓰는 수밖에

The Book | 2013. 11. 10. 23:01 | Posted by 맥거핀.
공범들의도시한국적범죄의탄생에서집단진실은폐까지가려진공모자들
카테고리 정치/사회 > 사회복지
지은이 표창원 (김영사,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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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표창원은 현재의 우리 사회를 '공범들의 도시'라 부른다. 표창원 교수는 지난 대선에서 불거졌던 몇몇 이슈들에 대한 지속적인 문제제기를 통해 보다 많은 대중들에게 알려졌지만, 그의 본래 주종목은 범죄심리학이나 프로파일링, 경찰행정 등 범죄학, 경찰학 전반에 대한 부분이다(사실 그가 국정원 사건 등에 깊숙이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도, 그 사건에 경찰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즉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날 국정원 여직원의 오피스텔에서 (윗선 누군가의 지시에) 쩔쩔매며 우왕좌왕하던 경찰들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유명한 인터뷰어 지승호와의 인터뷰 전반을 담은 이 책은 최근에 불거진 정치적인 이슈에 대한 부분보다는 그의 주종목으로 돌아가 범죄, 경찰, 과학수사, 사법시스템 등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경찰과 사법에 대한 그의 평소 견해를 드러내는데, 그가 보는 우리의 경찰 시스템과 사법 시스템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사회는 결국 '공범들의 도시'라는 것이다.
 
먼저 눈에 보이는 공범층이 있다. 정치적인 경찰과 검찰, 정치인들과 재벌 총수와 가진 자들이 벌이는 그들만의 리그. 예를 들어 재벌 총수들이 벌이는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하는 횡령, 배임, 탈세, 사기와 같은 경제적 범죄들은 언젠가 그 회사에 고문변호사로 들어갈지도 모르는 정치적인 검사와 판사들에 의해, 그리고 그 기업과 관계를 가진 여러 경찰과 검찰의 고위직 인사들, 정치인들에 의해 무혐의 처리되거나 솜방망이 처벌로 끝난다. 큰 정치적인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최근의 국정원 사건과 같은) 사건들은 '그분'에게 피해가 갈까, 미리 알아서 기는 경찰과 검찰의 고위직들에 의해 작게 축소되거나 아예 없던 일이 되며, 그 고위직들은 언젠가 '그분'의 은덕에 의해 더 좋은 자리로 영전한다. 그러나 이들은 사회적 약자들이 벌인 범죄에는 때로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주거나 범죄라고 볼 수 없는 일들도 때로는 범죄라고 단죄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눈에 보이는 공범층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눈에 보이는 공범들이 전부라고 한다면, 그들을 솎아내면 된다. 그런데 만약 우리 사회 전체가 공범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공범들이 점차 우리사회 전체를 공범들로 만들고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즉 이 만연한 공범들이 무서운 것은 이들이 점차 우리사회 성원 모두를 공범들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점차 기꺼이 공범이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청소년 대상 조사에서 44%가 '10억 원을 준다면 징역 1년 정도 살 짓을 저지를 수 있다'고 답했다는 통계 조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사회에서 점차 정의와 원칙에 따라 사는 것, 정의롭다면 자기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라는 견해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수없이 그에 합당한 예들을 보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권선징악을 가르치지만, 실제 사회에서는 도리어 선인이 불행한 삶을 살고, 오로지 자기 이익만을 좇았던 악인이 행복한 삶을 산다. 이는 표창원 교수가 이야기하듯 한편으로는 경찰과 검찰 등의 사법기관이 만들어낸 것이기도 하다. 정상적인 사회에서 사법시스템은 사회의 약자가 걸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다. 부당하게 대우받았거나 가혹한 폭력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사법시스템이 온전하다면 언젠가 저들에게 법의 심판을 받게 하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사법 시스템은 무엇이라고 답했는가? 예를 들어 그들은 그렇게 말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그러니 우리는 학교폭력을 저지르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가서 사죄하고, 잘못을 빌라고 이야기하기보다는, 맞은 애한테도 책임이 없다고 볼 수 없고, 빌미를 제공한 면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되어간다. 이것이 사회가 어지러웠기 때문에 쿠데타가 어쩔 수 없었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러니 그들의 논리라면 "성공한 학교폭력 역시 처벌할 수 없다."

즉 잘못된 사법시스템은 단지 한 사건에 대한 잘못된 판단으로 끝나지 않고, 추가적인 문제를 일으킨다. 그것은 그 사회를 점차 잘못된 사회로 만들어 나간다는 점이다. 그것은 영화 <화이>에서 석태(김윤석)가 화이(여진구)에게 제시한 괴물이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론을 떠올리게 만든다. 괴물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어서 빨리 괴물이 되는 것이라는 그의 진심어린(그렇기 때문에 더 무서운) 충고 말이다. 그렇게 우리들은 괴물을 보지 않기 위해 괴물이 되는 방법을 택한다. 그들이 윗사람들에게는 설설 기며 죄를 죄가 아닌 것으로 만들거나 솜방망이 처벌을 하고 일반인들의 잘못에는 필요이상의 가혹한 처벌을 할 때, 우리들은 가진 자들의 탈세나 학력위조 같은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대신 연예인들의 군대문제, 학력문제에는 기꺼이 'X진요'를 결성한다. 그들이 옛날에 친일 안 사람이 어디있어, 그 시절에는 어쩔 수 없었지,라며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할 때, 우리는 군대가 다 그렇지 뭐,하며 후임을 괴롭히거나 선후배가 관계가 다 그렇지 뭐,하며 아랫사람을 괴롭힌다. 그렇다면 모두가 괴물이 되면 될까. 그렇게 된다면 모두가 괴물이니 상관이 없을까.

모두가 괴물이라는 것은 '사회'가 아니라는 말이며, 이제 끝났다는 말이다. (고등학교를 나온 사람이면 누구나 알듯이) 그것은 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고, 사회 계약이 아직 탄생하기 이전이다. 즉 이는 사회를 해체시키는 것과 다름이 아니며, 시스템의 유지를 점점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표창원의 '안타까움'의 본질은 아마도 그것인 것 같다. 책을 읽다보면 느끼는 것은 표창원의 감정은 분노보다는 안타까움에 가깝다는 점이고, 그것은 이들의 이러한 공범만들기가 결국은 사회시스템을 붕괴시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그가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는 (이렇게 나누는 것이 별 의미가 없을지 모르지만), 그를 진정한 의미의 보수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보수는 결국 시스템을 쓸만하게 만들어서 유지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며, 사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진보와도 맞닿아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보수라고 혹은 진보라고 스스로 규정하는, 사실은 극단에 있는 자들끼리도 역시 서로 통한다. 모두를 괴물로 만들자고 하는 어떤 이들이나 혹은 폭력으로 사회를 탈취하여야 한다고 말하는 어떤 이들은 극과 극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동일하게 사회를 무너뜨리자고 말하고 있다.) 진보이든 보수이든 최종의 지향점에 있는 것은 결국 같다. 그것은 힘없고 약한 자들도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유지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적어도 '사회'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은 결국 '애쓰는 것'일지도 모른다. 괴물이 되지 않으려 최대한 애쓰는 것. 괴물을 하나하나 쓰러뜨려 나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으나, 그러기에는 괴물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아니, 설혹 나머지 모두를 쓰러뜨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하고 있는 우리는 괴물이 아니라 말할 수 있는가. 다른 모두를 쓰러뜨린다고 해도 내 안에서 퍼지고 있는 괴물 바이러스는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나이브하다고 해도 우리에게 남은 것은 결국 애쓰는 것 뿐이다. 그저 어떻게든 애쓰는 수밖에 없다. 상대방 죄수의 선택을 모르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애쓰는 것 뿐이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를 쓰러뜨리고 돌아서는 화이보다는 다른 것을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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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 장준환

Ending Credit | 2013. 11. 6. 18:12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내용과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장준환의 신작 <화이>는 아직까지 회자되는 <지구를 지켜라!>와 마찬가지로 가히 캐릭터들의 열전이라 부를만 하다. 장준환의 영화는 사실상 스토리 중심의 영화라기보다는 캐릭터 중심의 영화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전작에서도 일단 주목을 끄는 것은 특이하지만 매력적인 캐릭터들이었고, 이번 영화 <화이>에서도 (개인적으로) 흥미를 끌었던 것은 스토리보다는 그 캐릭터들이었다. 전작에서도 그렇지만, 이 영화의 수많은 캐릭터들도 사실 보통의 범주를 벗어나 있다. 영화의 중심축인 낮도깨비 강도단의 다섯 명의 캐릭터들은 물론이거니와, 이들과 한통속인 형사(박용우) 혹은 이들을 뒤쫓는 형사(김영민)도 그러하며, 또다른 갈등의 중심축인 진사장(문성근)이나 그의 수하인 실장(유연석)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보면 이들은 모두 일종의 괴물이라고 볼 수 있는데, 다시 말해서 영화 <화이>는 부러 영화의 모든 캐릭터들을 괴물들로 채우고 질문을 하는 영화다. 괴물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두 가지 중의 길, 그 중의 어떤 길로 나아갈 것인가? 하나는 그 괴물들 중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낮도깨비의 리더이자 화이(여진구)의 심리적인 아버지 석태(김윤석)이 제시하는 길. 그가 말하는 괴물이 되어야, 괴물을 보지 않게 된다는 말 자체는 그다지 잘못되었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그것도 분명히 가능한 방법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다른 하나는 괴물과 맞서서 모든 괴물을 가능한한 제거하는 것이다. 주인공 화이가 결국 선택하는 길. 아직도 수많은 괴물들은 여전히 세상에 남아있지만, 화이에 의해 적어도 위에 제시된 괴물들은 모두 제거된다(화이가 직접적으로 제거하지 않았더라도 결국 이들 모두는 화이가 제거했다고 말할 수 있다. 창고에서의 대규모 총격씬이 이를 잘 말해준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무엇인가 찜찜한 부분이 남는다. 과연 이 둘은 다른 길이라 할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캐릭터들이 괴물인 것은 그들에게 맥락이 없기 때문이다. 맥락이 없다는 것은 그들의 행동 패턴이나 사고의 연원을 잡아낼 수가 없다는 말이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이러한 행동을 보여줬을 때 이렇게 나올 것이다, 혹은 이 행동 뒤에는 이렇게 움직일 것이다라는 어느 정도의 패턴과 맥락이 있다. 그런데 예를 들어 낮도깨비 강도단이 범죄 행각을 벌일 때를 보면, 이들은 거의 무정형적인 패턴과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움직인다. 그래서 조직의 브레인이자 설계자인 진성(장현성)은 이렇게 멋대로 할거라면 계획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화를 낸다. 즉 괴물이 무서운 것은 그들이 우리들과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여기에서 감독의 전작 <지구를 지켜라!>를 떠올릴 수도 있다. 외계인, 혹은 외계생물체의 가장 두려운 점은 그들이 본질적으로 우리와 다르다는 점이다. 아마도 외계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무엇인가가 미래에 온다면, 분명히 우리가 예상한 형태와 방식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우리의 예상은 결국 '인간의' 예상을 넘지 못한다). 그런데 맥락을 알 수 없는 것은 사실 이들 뿐만이 아니다. 사실 영화 <화이>는 언뜻 보면 매끄러운 플롯처럼 보이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석연치않거나,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한 부분들이 많다. 예를 들어 이들 낮도깨비 강도단이 이렇게 모이게 된 연원에도 여전히 조금 미심쩍은 부분들이 남아있고, 이들 각자의 과거들, 그리고 이들과 형사들과의 관계, 혹은 임형택(이경영)과의 관계에도 약간은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남아 있다(물론 풀리지 않는 가장 큰 의문 중의 하나는 왜 이들이 화이를 키우고자 했는가,라는 점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연장선상에서 생각해 보면 맥락을 알 수 없는 것은 절대악, 괴물의 반대편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임형택도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영화 속 인상적이고도 기이해 보였던 장면 중의 하나는 임형택 부인의 병상 앞에서 펼쳐지는 석태의 과거 회상이다. 이 과거 회상에서 임형택은 그야말로 선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해한 인물마저도 감싸안으려 애쓰는 그런 인물이다. 즉 사실 여기서의 그의 행동 패턴은 보통사람들에서 벗어나 있다. 편의상 석태를 '맥락이 없는 악'이라 지칭한다면, 임형택을 '맥락이 없는 선'이라 부를 수도 있다. 즉 절대적이고 맥락이 없다는 점에서 석태와 임형택은 거울상이다. 어쩌면 석태의 임형택을 향한 증오도 그런 것에서 연원한 것이 아닐까. 당신과 나는 매우 다르지만, 어떠한 면에서는 같다. 다시 말해서 임형택은 맥락이 없다는 면에서 역시 다른 이름의 괴물이고, 석태는 그에게서 자신의 옆에서 계속 따라다니는 괴물을 본다. 하얀 괴물을. (그러므로 맥락이 없는 연결처럼 보였지만, 어떻게 보면 바로 그 시점에서의 석태의 회상은 적어도 그에게는 필요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거기에서 그렇게 묻고 있다. 사실은 당신들도 괴물이 아닐까?)      

  

그리고 그들의 중간에 있는 화이가 있다. 그의 선한 심성, 혹은 그림을 그리는 재능 등은 그의 생물학적인 부모로부터 물려받았지만, 그의 운전실력이나 냉철한 판단력, 민첩함, 혹은 어떤 잔인함 같은 것들은 그의 아버지들로부터 물려받았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마도 가장 이상해 보이는 설정은 그가 석태와 마찬가지로 괴물을 본다는 설정일 것이다. 그런데 그가 보는 괴물의 형상은 특이하다. 그가 보는 괴물의 형상은 언뜻 나무 뿌리가 붙잡고 있는 괴물처럼 보인다. 나무 뿌리가 붙잡고 있는 괴물이라면 괴물이 되어가고 있는 그를 어떻게든 나무뿌리, 그러니까 선한 핏줄이 붙잡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혹은 어떻게든 괴물이 되기를 강요하는 석태에 맞서서 그의 근원에 있는 선이 붙잡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어찌되었던 간에 그를 지금까지 지탱해 온 것은 그의 근원에 있는, 그의 부모로부터 온 선함이다. 그런데 혹 이를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것은 나무 뿌리가 붙잡고 있는 괴물이 아니라 나무 뿌리로 만들어진 괴물이다. 나무 뿌리가 어지럽게 얽혀서 만들어진 괴물이다(영화의 오프닝 크레딧을 보면 그렇게 말하는 것이 더 온당해 보인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 온 선함도 결국 맥락이 없는 무엇이며, 나무 뿌리가 붙잡고 있는 괴물이건, 혹은 나무 뿌리로 이루어진 괴물이건 본질적으로는 다를 것이 없다. 이렇든 저렇든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괴물만 존재하는 세계에서 사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자신도 괴물이 되는 것, 다른 하나는 괴물에 맞서서 최대한 괴물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런데 찜찜한 질문이 남아있다. 괴물에 맞서서 괴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제거하는 누군가는 괴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도 결국 괴물이라고 답한다면 두 가지의 구분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렇든 저렇든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닐까...라는 질문. 영화 <화이>의 메인 카피는 '괴물을 삼킨 아이'이고, 그런 관점에서라면 이 카피는 중의적인 의미로 읽힌다. 괴물을 삼킨 아이는 괴물을 제거한 아이라는 뜻도 되지만, 괴물이 된 아이라는 뜻도 된다. 이것은 어느 쪽일까, 혹은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다는 디스토피아의 전망일까. 괴물이 가득한 세상에서 결국 괴물이든 아니든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는 얘기일까. 장준환은 쉽게 답을 주지 않는다. 그가 마지막 보여준 것은 바이올린 케이스 안에 총을 담아 떠나는 화이의 뒷모습 뿐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왜 키웠는지 그리고 결국 무엇을 길러냈는지 결코 알지 못한다.  

덧.
비유나 상징을 위해 너무 많은 것이 희생당하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는 비유나 상징을 시각화해서 보여주려 애쓴다. 나무 밑에 들어가는 아이, 괴물의 형상, 다섯 개로 나뉘어진 아버지...이 다섯 개의 나뉘어진 아버지는 사실 원래는 하나다. 다만 그것을 눈에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두기봉이 <매드 디텍티브>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들을 다섯 개로 나누었을 뿐이다(화이는 이 아버지를 쓰러뜨리기 위해 그러니 인간을 쓰러뜨리듯이 먼저 머리를 겨누고, 팔다리를 제거한 후, 최종적으로 심장을 찌른다). 좋은 영화들은 탄탄한 서사 속에서 상징이나 비유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도록 하지만, 이 영화는 상징이나 비유를 풍성하게 하기 위해 스토리를 희생시키는 면이 있는데, 그 결과 <씨네21>에서 송효정이 지적했듯이 영화가 꽤나 산만해지고, 밀도는 점점 뒤죽박죽이 되어간다(사실 <지구를 지켜라!>도 스토리가 탄탄한 편은 아니었다). 아마도 이 이야기를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또 한편의 영화가 더 필요할 것 같기도 하다. 그 '또 한편의 영화'이든 다른 무엇이든 장준환의 다음 영화도 빨리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 2013년 11월, CGV 명동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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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DF 영화 단상들 1 - 교차하는 순간들

Ending Credit | 2013. 10. 29. 17:53 | Posted by 맥거핀.

EIDF(EBS 국제다큐영화제)에서 본 영화 단상들 첫번째.


부즈카시(Buzkashi!), 나지브 미르자, 2012

낯선 땅에서 벌어지는 낯선 스포츠에 대한 그러나 그렇게 낯설지만은 않은 이야기. '부즈카시'란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이 벌이던 놀이에서 유래한 전통 스포츠로 타지키스탄에 널리 퍼져있다. 이는 죽은 염소를 땅에 놓고, 달리는 말을 타고 재빨리 그것을 '잡아채서' 정해진 곳까지 이동시키면 득점을 획득하는 게임으로, 많게는 백명이 넘는 인원(과 말)이 동시에 참여하기 때문에 매우 격렬할뿐더러, 늘 사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도 또 그렇다고 해서 또 그렇게 무모한 위험만이 있는 것만은 아니며, 박진감과 스릴이 넘치는 게임이기도 하다. 영화 <부즈카시>는 이 '부즈카시'에 선수로 참여하는 세 사람의 이야기를 축으로 하여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개인 대 개인으로서 게임에 참가하는 전통의 방식을 고수하는 베테랑 챔피언 아잠과 현대식 훈련으로 팀을 짜서 게임에 참가하는 크루세드, 그리고 새롭게 게임에 참여하는 젊은 유망주 아스카가 그들이다.

여기에는 익히 보아왔던 충돌 지점이 있다. 전통적인 훈련 방식과 전통적인 게임 방식을 존중하고 그에 최선을 다하는 아잠과 현대적인 훈련 방식으로 새로운 전환을 꾀하는 크루세드의 충돌이 그것이다. 아잠은 팀을 짜서 훈련하고, 팀을 짜서 게임에 참여하는 크루세드 측을 '마피아'라고 부르면서 비난하고(일종의 팀으로서 게임을 하게 되면, 당연히 유리할 수밖에 없다. 화투판에 팀을 짜서 들어오는 것과 마찬가지다), 반면 크루세드는 한꺼번에 백명이 넘는 인원이 뛰어드는 현재와 같은 방식은 스포츠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의 꿈은 이 '부즈카시'가 올림픽 정식종목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젊은 유망주로서 그 한 가운데에 놓여 있는 아스카가 있다. 그는 아잠의 방식
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크루세드의 방식을 택할 것인가. 그러니까 이 <부즈카시>라는 영화의 미덕은 일종의 '이야기'가 살아있는 것에 있다. 특색을 가진 인물들과 그들의 충돌과 그 사이에서의 어쩔 수 없는 선택. 많은 영화들이 꿈꾸지만 사실 잘 만들어내고 있지 못한 것을 이 영화는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다.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이야기 상에서의 충돌 외에도 다른 충돌들도 잡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여기에는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유목의 공간과 빠르고 격렬한 부즈카시가 보이는 충돌 같은 것이 있다. 격렬한 부즈카시를 보여주는 사이사이에 느린 호흡의 장면들 - 예를 들어 아잠이 산등성이를 뛰면서 훈련하는 장면을 먼 전경에서 정지된 카메라로 잡아낸다거나 하는 장면들 - 을 삽입하고, 아주 가까이에 붙어서 말과 사람들의 충돌을 보여주다가도 카메라는 언뜻언뜻 아주 뒤로 물러나 먼 발치에서 그 스포츠를 지켜보는 관객들의 표정을 느리게 살핀다. 이러한 정과 동의 충돌은 어쩌면 이곳 타지키스탄의 현재를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산과 양과 염소와 유목민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곳에도 변화는 일어나고 있고, 느린 이곳에도 빠른 다른 것들이 점점 들어오고 있다. 크루세드의 훈련장에 울려퍼지던 빠른 비트의 음악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영화의 마지막에 무엇인가 쓸쓸한 기운이 감도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빠른 변화 속에 이들이 언젠가 사라질 운명의 것임을 우리가 예감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나 그렇게 슬퍼할 것만은 아니다. 영화는 또 마지막에 새로운 탄생을 보여주기도 하니까. 아잠의 아들은 언젠가 의사가 될 것이고, 새로 태어나는 새끼 염소도 있으니까. 사라짐과 탄생이 교차하며 삶은 이어진다.


100m 위의 고독(The Solitary Life of Crane), 에바 웨버, 2008

에바 웨버의 이 27분짜리 짧은 다큐는 고공의 크레인에서 외롭게 일하는 기사의 하루를 다룬다. 영화가 취한 방법은 조금 색다른데, 영화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크레인 위에서의 그들이 아니다. 사람 한 명 앉으면 꽉 들어차는 그 공간의 답답함이나 폐쇄성이 아니라,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보는 세계이다. 100m 위의 좁은 공간에서 그들은 세상을 관찰한다. 지상에서는 누군가가 집을 나서고, 집안을 청소하고, 옥상 위에서 파티를 즐기고, 혼자 앉아서 식사하고, 놀이터에서 아이들과 놀아주고, 비오는 퇴근길에 우산을 쓰고 귀가를 재촉하고, 전화로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아무도 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며 방에서 옷을 갈아 입는다. 영화는 우리가 크레인 기사의 입장에서 그 세계를 같이 보기를 바란다. 혼자 들어가서 24시간이 넘게 앉아있어야 하는 좁은 크레인 위에서, 사람들을 100m 위의 고공에서 멀리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좁은 크레인 위에서 그들은 누구보다도 고독하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그들이 일 외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밖에 없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도리어 가깝게 느낀다는 점이다.

때로는 100m 위의 고독한 크레인 기사들은 어떤 이의 생활에 대해 누구보다도 많이 알게 된다. 그들이 매일 집안을 언제 청소하는지 알고, 그들이 밥을 주로 누구와 먹는지 알고, 누가 누구와 친한지 알고, 언제 일어나고 언제 잠자리에 드는지 안다. 그리고 그들이 때로 보이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하게 된다. 즉 역설적인 것은 그들은 고독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타인들을 바라보고 생각하게 됨으로서 고독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이다. 반면 대부분의 우리는 시끌복잡한 지상의 세계에서 고독하지 않지만, 나 이외의 타인의 삶을 거의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점에서 고독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어쩌면 진정으로 고독했던 것은 다른 많은 삶을 바꾸기 위해 그런 곳에 올라갔던 김진숙 위원과 같은 이들보다 한번도 그런 고공의 크레인을, 그리고 크레인 위의 사람을 생각해보지 않은 우리들일 것이다.) 마지막, 영화는 런던 시내에 올라가 있는 수많은 크레인의 모습을 보여주며 비춘다. 지상의 삶을 관찰하는 수많은 관찰자들이 그곳에 있다. 매일매일 어떻게 하면 새로운 것을 쌓아올릴까 고민하는 이곳 서울에는 아마도 그보다 훨씬 많은 크레인이 있을 것이다. 고공의 관찰자들이 거기에 있다. 그들은 우리를 보지만, 우리는 그들을 보지 못한다.


블랙 아웃(Black Out), 에바 웨버, 2012

늦은 밤, 불이 켜진 공터에 청소년들이 삼삼오오 모여있다. 뭐 그다지 놀랄 건 없다. 어느 곳에서나 어두워질수록 나이든 사람들은 어떻게든 집으로 가고, 반면 청소년들은 집을 나와 집에서 할 수 없는 것들을 하고 싶어서 안달하는 법이니까. 그런데 가까이에서 본 아이들의 모습은 조금 색다르다.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은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 것 같은 일탈 행위들이 아니고, 책을 읽고 공부를 하는 것이니까. 이곳은 서아프리카의 기니. 인구의 80%는 전기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고, 그나마 가동되는 전기도 발전소 시설의 낙후로 번번이 끊기기 일쑤이며, 아이들은 '전기를 지원해주는 집'이 부럽다고 말하는 곳이다. 시험 기간이 되면 아이들은 공항 근처로 모여든다. 시험 기간이 되면 우리네 도서관이 붐비듯이 그곳에는 공항의 공터가 붐빈다. 늦은 밤까지 불빛이 공급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비행기 소음과 날벌레들 옆에서 그들은 수학 공식을 외우고, 인체의 기관을 살피고, 주요한 세계사의 사건들이 일어난 년도를 외운다. 그러므로 제기되는 것은 왜 이렇게 환경이 열악한가라는 물음보다도, 이러한 환경 속에서 그들이 왜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려고 하는가라는 물음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그 두 가지의 물음은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을 영화는 두 가지의 교차하는 축을 이용해서 보여준다. 하나는 기니의 열악한 현실이다. 정치는 군부 쿠데타 등으로 불안정하고, 발전소를 비롯한 제반 시설들은 낙후되어 있으며, 풍부한 자원들은 거의 모두 외국으로 반출되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한 축은 그러한 현실을 보고 공부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들이다. 그러므로 아이들의 꿈은 대부분 공무원이나 정치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정치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안정되기를 바라며 그런 세상이 오게 하기 위해 나름대로 애쓰고 있다. 공항의 불빛 속에서 공부를 하면서 말이다. 그것을 영화의 마지막은 보여주는데, 학교의 최종 시험일에 아이들은 시험을 치르고 성적은 학교의 벽에 나붙는다. 그러나 바로 그 날 라디오에서는 대통령궁이 괴한의 공격을 받아 파괴되고, 대통령은 피신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다. 불안정한 정치에 조그마한 희망을 가져오리라 여겨졌던 대통령이 말이다. 그렇게 희망과 절망이 교차한다.

희망은 늘 무엇인가에 공격을 받는다. 아이들의 공부를 하겠다는 희망은 때로는 블랙 아웃(정전)에, 그리고 때로는 공부를 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부모들의 뜻이나 가족을 돌보고, 돈을 벌어야 하는 경제적인 부분 같은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힌다. 그러나 그러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의 늙은 선생님은 힘주어 말한다. 삶의 본질은 희망이며, 희망 없는 삶은 죽음이라고 말이다. 희망의 친구는 늘 신념이다. 그 희망이 이루어지리라는 신념에 희망은 살아남고 삶은 이어진다. 

.................

무엇인가가 교차한다. 느림과 빠름, 정과 동, 전통과 현대, 이전 세대와 미래의 세대. 혹은 고독하지만 타인을 보는 사람들과 고독하지 않지만 타인을 보지 않는 사람들. 혹은 희망 없는 현실과 희망을 만들어내려는 노력. 좋은 다큐멘터리는 그렇게 교차하는 것들을 잡아내 그 교차점들과 가까워지는 것 혹은 멀어지는 것을 지그시 살펴보도록 함으로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숙고하게 한다. 물론 그 무엇인가 중의 하나는 그 다큐멘터리를 보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 교차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 2013년 10월, 인디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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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condolences.tistory.com BlogIcon 애도가 2013.11.10 15: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 블랙아웃 만 봤는데 인간본연의 욕망과 아프리카에대해서 다시 생각해볼수있는기회가되더군요...다른 다큐도참좋더라구요 비틀즈다큐.특히저는 구글북스다큐 추천해드려요...보고나면..구글싫어진다는ㅋㅋㅋ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3.11.10 23: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구글 북스 라이브러리..그때 보려고 했는데 매진이라서 못봤어요. 구글은 저도 썩..구글에 돌아다니는 저의 예전 여러 흔적들을 다 없애고 싶다는 :)

낡아보이는 가치들

The Book | 2013. 10. 22. 01:32 | Posted by 맥거핀.
인기없는에세이지적쓰레기들의간략한계보
카테고리 인문 > 철학
지은이 버트런드 러셀 (함께읽는책, 2013년)
상세보기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버트런드 러셀의 책 <인기 없는 에세이>는 그의 후기에 쓰여진 여러 편의 비교적 대중적인 에세이들을 묶은 책이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철학이었지만, 단지 그것에만 머물지 않았는데, 그는 철학, 수학, 과학, 교육, 정치, 예술, 종교 등 인간의 거의 모든 부문에 관심을 두고, 다양한 부분에 걸쳐 자신의 의견을 활발하게 피력하였다. 그것은 이 한 권의 책에도 잘 드러나있는데, 이 책에 실린 12편의 에세이들은 철학의 효용, 인류의 정신사, 인류가 가진 관념들, 인류의 미래상 등등의 그렇게 간단하게 이야기할 수만은 없는 주제들을 다루면서도, (여러 부문에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현실과 유리된 철학적인 논의에만 머무르지 않고, 당대의 현실을 깊숙이 반영하여 날카로운 풍자와 해학으로 이야기를 여러 방면으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그러므로 이야기의 내용보다도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에세이들이 쓰인 현실, 그러니까 그 시기인 것으로 보이는데, 몇 개의 에세이들을 제외하고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글들은 1946년에서 1950년 사이, 즉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하고, 세계가 급속히 두 개의 커다란 세력으로 분화하던 시기, 냉전이 서서히 그 고개를 쳐들고 있던 시기에 쓰여졌다.

버트런드 러셀이 이 때 가장 크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반전과 반핵, 평화운동이었다. 물론 당시 대다수의 지성인들을 포함한 상당수의 서구인들 역시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는 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결국 이긴 쪽에나 패배한 쪽에나 커다란 상처를 남겼고, 이대로 더이상 큰 전쟁이 지속되면 인류 전체가 공멸하고 말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불러 일으켰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등장한 핵무기와 그것의 증가는 만약 다음번의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반드시 그것은 인류의 완전한 파멸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를 낳기도 했다. 버트런드 러셀의 입장에서는 이것은 조금 더 특별했는데, 그는 이러한 전쟁이 인류의 어리석은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인류에 해를 끼친 관념들'이라는 에세이에서 이러한 전쟁이라는 솥을 부글부글 끓게 한 재료들이 어떠한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데, 예를 들어 현대의 전쟁은 거슬러 올라가면 마녀를 처형하던 중세의 재판에서 단지 그것의 목적이 군중들의 분노를 마녀와 마술이라는 허상에 돌리고, 군중을 즐겁게 함으로서 그들의 악한 열정을 만족시켰던 것과 동일한 메커니즘을 가진다. (즉 여기에서 도리어 가장 위험하게 여겨졌던 것은 '마술을 부리는 마녀'가 아니라, '마술을 믿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중세에서 마술을 부린다고 여겨졌던 상당수의 것들은 마술과 가장 대척점에 있는 과학과 관련된 것이기도 했다. 이것을 다시 전쟁에 적용한다면 전쟁이 일어났을 때 가장 공격받는 주장은 '우리가 적에게 질 것이다'가 아니라, '전쟁이 (다른 목적을 위한 것이니)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질투, 국가적 자만심, 자신의 집단이 우월하다는(특별하다는) 믿음 등등의 여러 '인류에 해를 끼치는 관념들'이 결합되어 전쟁이 수행된다. 그리고 이것은 러셀의 입장으로 보면, 결국 전쟁이라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물질을 파괴하는 것을 넘어서, 인간의 정신세계 자체를 파괴하는 것, 인류의 정신 자체를 복구할 수 없는 파멸로 이끄는 것이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 수행되던 영국에서 반전운동을 주장하였고, 그로 인해 교수직에서 해임되고, 1918년에는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다.

그렇게 확고하게 전쟁을 반대하고, 혹시 발발할지도 모르는 나중의 전쟁을 우려하는 시각은 이 책의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데, 그것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이 주된 에세이들의 쓰여진 때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개의 거대한 세력이 서서히 발톱을 드러내던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러셀은 이 책에서 지금으로보면 조금 의아하다고 느껴질만한 주장, 혹은 러셀 자신의 주장들과도 무엇인가 맞지 않는다고 느껴질 법한 주장을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정부의 탄생이다. "이러한 까닭에 오늘날과 같은 국제적 무정부 상태가 지속되느니 미국이든 소련이든 어느 한 쪽이 세계 제국을 건설하는 편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미국이 승리하는 편이 더 낫다고 여길만한 중요한 이유가 있다. (중략) 내가 미국을 편드는 이유는, 문명적인 생활 방식에서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소련보다 미국이 더 존중하기 때문이다. (p.97)" 이것이 러셀 자신의 주장들과도 맞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것은 그가 이 책에서 플라톤의 <국가론>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며, '정적인 완전성'에 따른 철인이 지배하는 그의 이상국가론이 허구이고, 기만술이라고 맹비난하고 있기 때문이다. 덕이 전체에 위치한다는 관념에 기반한 플라톤의 <국가론>은 비판하면서 하나의 전체로서의 세계제국의 건설을 꿈꾼다는 이 껄쩍지근함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

그러나 당시의 러셀에게는 대안이 없었다. 아니 몇 가지의 가능한 정치적인 대안들을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그것의 한 형태를 히틀러식의 국가사회주의(나치), 혹은 스탈린과 레닌의 소비에트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러셀이 보기에는 그 두 가지는 전쟁 못지 않게 위험한 것이었고, 또한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진 것이었다. 그 한 가지는 바로 교조주의인데, 그 두 가지의 사회 모두 교조주의로 이루어진, 교조주의가 만연한 사회였다. 그러므로 교조주의의 총체라고 볼 수도 있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또다른 교조주의로 달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그가 발견한 대안은 경험주의와 합리성이 지배하는 사회, (비교적) 자유로운 사회라고 여겨지는 미국 혹은 영국과 같은 사회였다. 즉 그가 책에서 내내 신랄한 비판과 풍자를 가하는 것은 스콜라주의, 마르크스주의, 파시즘 등의 교조주의, 혹은 교조주의로 이루어진 불분명하고 두루뭉술한 것들이고, 그가 옹호하는 것은 경험론과 합리주의, 민주주의와 같은 가치들, 그리고 수학과 과학의 명징한 세계이다. 그리고 그는 그 교조주의의 근원에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로 거슬러 올라가 멀게는 플라톤에서 가깝게는 헤겔까지 도마에 올려놓고 비판하고 있으며, 넓게는 형이상학 전체에 교조주의의 혐의를 덧씌우고 있다.

즉 러셀은 묻는다. 이 모든 게, 즉 철학이니, 인류의 관념들이니, 과학이니, 수학이니, 도덕이니 하는 것들이 정치와 무슨 상관인가,라고 말이다(이 책에 실린 첫 번째 에세이의 제목은 '이 모든 게 정치와 무슨 상관인가?'이다). 그가 여기에서 말하는 정치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류의 미래를 밝게 하는 것이며, '인류에 도움이 된 관념들'을 보존하고, '인류에 해를 끼친 관념들'을 뿌리뽑는 것이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전쟁을 막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 자문에 대한 자답은 이 정치의 기본바탕에는 철학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철학은 이론적 목표와 실천적 목표를 같이 지닌다고 말이다. 즉 철학은 이론의 측면에서 과학이 아직 실험할 준비가 안된 방대한 범위의 가설을 세우는 것이며, 실천적으로는 특정의 삶의 방식을 부단히 옹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특정의 삶의 방식이란 중요한 실천적 의미를 지닌 여러 가지 문제를 엄밀하고 사려 깊게 사고하는 습관, 삶의 목적이라는 개념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도록 바라보는 것, 사고의 대상을 보다 폭넓은 관계 속으로 넓히는 것, 그럼으로서 현재의 불안과 고뇌에 평정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러셀이 강조하는 절대 빼놓지 말아야 하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관용과 자비와 박애이다. 러셀이 보기에 당시의 세계는 하나의 갈림길 앞에 서 있다. 러셀은 말한다. "지금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다. 인류가 유례없는 재앙에 빠질 것인지, 아니면 행복과 안전과 안녕과 지성의 새로운 지평을 열 것인지가 향후 20년 사이에 우리의 총체적 지혜에 따라 좌우될 것이기 때문이다. (p.293)" 그리고 그것은 인류가 자신의 적들에 대해서, 혹은 자신과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 자신과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더 이상 서로 공격하지 않고, 관용과 자비를 갖추고 서로 얼마나 최선을 다해서 손을 맞잡는가에 달려 있다. 글쎄. 러셀이 그렇게 말한 시기로부터 60여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놓여 있을까. 유례없는 재앙이라고 부르기는 힘들지만, 그렇다고 행복과 안전과 안녕과 지성의 새로운 지평이라고 말하기는 더욱 어려운 것 같다. 인류가 이런 위치에 놓인 것은 우리의 지금까지의 철학이 잘못되었기 때문일까. 즉 우리가 인류에 해를 끼친 관념들만을 더욱 더 널리 받아들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단지 러셀이 현상 파악에 실패하였기 때문이거나, 그가 헛된 것에 희망을 걸었기 때문일까(하기는 러셀이 현재의 미국이 벌이는 패악들을 보았다면 무엇이라고 말했을지 궁금하기는 하다). 그러나 그의 현상파악이 틀렸고, 경험론과 민주주의에 근거하는 그의 관념이 낡아빠진 것이라고 해도, 그가 말하는 가치들, 특히 그 중에서도 관용과 자비와 박애가 중요한 것임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도리어 인류가 재앙으로 가까이 갈수록 서로를 관용하는 것, 그리고 서로를 긍휼하게 여기는 것은 더욱 중요해지는 것 같다. 60여년 전의 러셀의 이야기가 지금으로서는 고루해보이지만, 지금 우리가 희망을 걸 수 있는 것은 그런 닳디닳은, 낡아보이는 가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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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끝났다

The Book | 2013. 10. 16. 16:57 | Posted by 맥거핀.
왜우리는불평등을감수하는가가진것마저빼앗기는나에게던지는질문
카테고리 정치/사회 > 사회학
지은이 지그문트 바우만 (동녘, 2013년)
상세보기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유동하는 근대' 시리즈로 잘 알려진 지그문트 바우만의 새 책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는 123페이지라는 짧은 쪽수와 사륙판이라는 작은 사이즈, 그리고 비교적 작지 않은 폰트를 가진 간단하게 읽을 수 있는 팜플렛이나 선언문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내용만큼은 결코 간단하지가 않다. 질문은 명확하다.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왜 우리는 가지고 있는 작은 것마저 빼앗기면서 가만히 있는가(혹은 그 '빼앗김'을 도리어 옹호하고 있는가)? 그러나 원래 질문이 간단하고 명확할수록 대답은 조금 더 긴 사색을 요하는 법이다. 바우만의 방법은 이렇다. 먼저 우리가 얼마나 경제적 불평등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객관적인 수치로 보여줌으로서 우리의 사실적인 판단력이 작동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 불평등의 옹호에 내재한 4가지의 '부정의의 교의'를 살펴보고, 그 '부정의의 교의'를 깨부숨으로써 우리가 논리적 정당성을 갖추고, 이것이 행동의 의지를 일으키도록 한다. 그리고 마지막은 사실에 의거한 판단과 논리가 결합된 행동을 촉구하는 것이다.

바우만이 먼저 제시하는 것은 여러 자료들에서 찾아낸 불평등의 양상들이다. 경제적으로 '20대80의 사회'라는 이야기는 이제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가 되었다. 자료들이 보여주는 것은 현재는 거의 1대99의 사회이거나 0.1대99.9의 사회, 혹은 그 이상의 사회라는 사실이다. 대략적으로 '전 세계 최고 부자 1000명의 부를 모두 합하면 가장 가난한 25억 명의 부를 모두 합한 것의 거의 두 배가 된다.'(p.18) 혹은 전 세계 인구 중 상위 20퍼센트가 생산된 재화의 90퍼센트를 소비하고 있는 반면, 가장 가난한 20퍼센트는 불과 1퍼센트만을 소비하고 있다(p. 19). 문제는 이것이 계속 악화되고 있으며, 급격하게 가속도를 붙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1960년에 미국 최고 대기업들 최고경영자의 세후 평균 보수는 공장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의 12배였다. 1974년에는 이것이 35배가 되었고, 1990년대 중반에는 135배, 1999년에는 400배, 2000년에는 531배가 되었다(이와 비슷한 수치들은 다른 부분에서도 수없이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세 가지 사실을 말해준다. 하나는 중산층이 붕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비단 우리나라의 경우만이 아니고, 전세계에서 중산 계급들은 점점 '프리카리아트(불안정한 고용이나 노동 상황에 놓인 비정규직, 파견직, 실업자, 노숙자들을 총칭하는 말)'로 전락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이런 경제적 불평등은 비단 경제 부분만이 아니고, 사회의 전부분에 걸쳐서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점증하는 경제적 불평등은 점증하는 사회병리와 큰 상관관계가 있음을 관련한 연구들은 보여준다. 마지막 하나는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일텐데, 그것은 이 마지막에는 파국이 기다리고 있으며, 이 파국은 매우 가까이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불평등은 왜 감소하지 않는가? 아니 감소하기는 커녕 왜 도리어 가속도를 붙여가고 있는가? 그것은 단적으로 말해 '소수의 부가 우리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기이한 믿음이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 용어로는 '낙수효과'라고 부를 수도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라면 비슷한 다른 표현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이러한 것들이다. 부자들의 감세가 경제를 발전시킨다. 삼성이 잘 되어야, 우리나라가 잘 된다.) 바우만이 이러한 기이한 믿음을 부수기 위해 채택한 전략은 이 표면에 자리잡은 '교의'를 직접 공략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 '교의'에 내재한 '부정의의 교의'의 기만들을 살펴보도록 하는 것이다. '부정의의 교의'는 큰 소리로 선언되는 확신들을 뒷받침하고 '타당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암묵적인 전제들로서, 지금까지 숙고되거나 검토된 적이 거의 없다. 그것들은 언제나 암시만 될 뿐 분명하게 표현되는 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믿음들을 가지고 생각한다(p. 35~36). 다시 말해서 우리가 믿고 있는 이 '기이한 믿음'에는 몇 가지의 암묵적인 믿음들이 내재되어 있으며, 이 믿음들을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바우만의 말이다.

바우만이 보여주는 네 가지의 내재된 믿음, 즉 부정의의 교의는 다음과 같다(p.49).

1. 경제성장은 공생에서 생기게 마련인 과제들을 처리하고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2. 영구적으로 늘어나는 소비 혹은 더 정확히 말해 새로운 소비 대상들의 가속적인 교체는,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길이거나 혹은 적어도 중요하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길일 것이다.
3.  인간들만의 불평등은 자연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삶의 가능성들을 삶의 불가피성에 맞춰 조절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반면, 삶의 원칙들을 함부로 변경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손해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4. 경쟁(가치 있는 사람들은 올라가고 가치 없는 사람들은 배제되거나 추락하는 양면을 지닌)은 사회 질서의 재생산과 사회 정의의 필요충분조건이다.

정리하자면 불평등과 경쟁은 사회에 어쩔 수 없이 존재할 수밖에 없거나 필요한 것이고, 그러한 것을 감수하고라도 우리 모두의 행복을 위해 경제성장과 그에 따른 소비가 필요하다는 교의, 혹은 믿음이다. 그러나 바우만은 이 교의들이 거짓말이거나, 혹은 더 큰 거짓말을 불러올 수 있는 믿음임을 다음의 이야기로서 보여준다.

1. 경제성장은 사회의 모든 이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하지 않는다. 낙수 효과는 없고, 경제성장은 이미 많이 가진 사람들의 부만 더 늘려주고 있음을 수치들은 보여준다. (예를 들어 2007년의 신용 붕괴 이후 미국의 GNP 증가분의 90퍼센트 이상이 가장 부유한 1퍼센트의 미국인들에게 돌아갔다.) '경제성장'은 소수에게는 부의 증가를 의미하지만, 수많은 대중에게는 사회적 지위와 자존감의 급격한 추락을 의미한다(p.59).
2. 행복에 이르는 것이 소비라는 말은 현재의 부정의를 잊게 하는 당의정에 불과하다. (9.11 다음날 당시 대통령 부시가 제시한 최선의 행동 수칙은 '쇼핑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현재 공공연하게 제시되는 소비 권장 메시지는 소비를 놓고 대중들이 서로 경쟁하게 만듦으로써 대중들의 협력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소비사회에서 (슬로푸드 운동과 같은) 공공의 협력으로 나아가야 한다.
3. 불평등이 당연한 것이라는 오랜 믿음은 사회적 불평등을 무리없이 수용하게 하면서, 오히려 그 불평등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불평등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사회의 질서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옆에 사람이 조금 더 가지거나, 자신의 생활수준이 조금 더 나빠지는 것을 부정의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즉 우리는 작은 불평등에 분노하지만, 커다란 불평등은 정상적인 것, 혹은 자연의 섭리라고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는 오랜 교육과 훈련으로 만들어진다.
4. 소비사회에서 소비자와 물건이라는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우리는 인간사회에마저 적용하고 있다. 상대방을 주체로 대하는 정당한 인간관계는 상대방을 객체로 대하면 되는 경쟁관계보다 더 피곤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항상 협력과 공생보다는 경쟁이 우선 순위가 된다. 이는 소비사회의 특징이며, 그것을 쇼핑몰들은 보여준다. 우리는 안전을 위해 인간의 선의와 친절보다는 입구에 있는 CCTV나 무장경호원에 더 의존한다.

...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맥이 풀렸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이렇게 얘기하고 싶을지 모른다. 아니 겨우 그런 얘기하려고...그거 별로 안 좋은 거는 우리 모두 잘 알잖아요. (혹은) 별로 좋은 건 아니지만, 그거 어쩔 수 없는 것이잖아요. 그런 말 많이 해왔지만, 여전히 사회는 이 모냥, 이 꼴이잖아요. 모두들 다 불평등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경쟁하고 소비하면서 사는데, 나 혼자 협력하고 선의와 친절을 보여주고 소비를 줄이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후....맞는 말이다. 그것은 바우만도 인정한다. "우리가 소망하거나 없애버리기에는 너무 강력하고 벅찬 것들을 지칭하기 위해 '현실'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p.111) 그러나 여전히 포기해서는 안되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두 가지의 이유라기보다는 하나의 모순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첫째, 이제는 끝났다. 이제는 다가오는 파국을 멈출 기회도 희망도 없다. 둘째,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말하고 생활방식을 바꿈으로써 말과 행위의 간극을 줄이려, 파국을 막으려 노력해야 한다.

바우만은 말한다. "세계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비합리적인 행위이다. 하지만 결정에 대한 책임과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모두 감수하면서까지 세계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는 것이야말로 세계의 논리가 초래하는 맹목으로부터, 타자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결과로부터 세계의 논리를 구원할 마지막 기회다."(p.114) 어느 작가는 1939년 8월 23일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끝났다. 내가 진짜 작가라면, 나는 전쟁을 막을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끝났다'는 진술이 아니라, 그가 이 진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이 진술을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 한,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작가를 '진짜'작가로 만드는 것은 현실에 대한 말의 영향력이고, (진술을 한다는) 행위를 한다는 것은 말이 현실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후...당신이 이것으로도 마음이 조금이라도 동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다. 혹은 차라리 파국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또 어쩔 수 없다. 그러나 1925년생으로 나치와 소비에트 공산주의를 겪은 노학자는 파국을 막기 위해 글을 쓰면서 애쓰고 있다. 나도 파국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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