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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된다

The Book | 2013. 8. 17. 16:33 | Posted by 맥거핀.


색채가없는다자키쓰쿠루와그가순례를떠난해
카테고리 소설 > 일본소설
지은이 무라카미 하루키 (민음사,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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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잘 외우기 힘든 소설, 들어도 금방 잊어버리고 마는 제목을 가진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었다. 제목이 외우기 힘든 것은 단순히 길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이 제목이 뭔가 일반적이지 않은 것을 담고 있기 때문에도 그렇다. 다자키 쓰쿠루는 그냥 다자키 쓰쿠루가 아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란 무슨 의미일까? 이 말이 굳이 제목에 들어간다는 것은 '색채가 없다'는 것이 다자키 쓰쿠루라는 사람을 나타내기에 상당히 중요한 키워드라고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우리는 꽤 드물기는 하지만, 색채가 없다, 혹은 색깔이 없다는 말을 사람에게 쓰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을 '개성이 없다'와 비슷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전부일까. 아마도 그것만으로 이 이상한 말이 제목에 붙어야 할 모든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라니? 일반적으로 보면 이것은 조금 이상한 문장이다. 이 문장과 동일한 의미의 무엇인가를 전달하고자 할 때는 '다자키 쓰쿠루가 순례를 떠난 해'라고 쓰면 된다. 즉 여기서의 '그'가 다자키 쓰쿠루라면 이 문장은 이상하게 중첩되고 낭비된 문장이다. 다자키 쓰쿠루와 다자키 쓰쿠루가 순례를 떠난 해라니.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의 가능성이 남아 있기는 하다. 과연 여기에서 '그'는 다자키 쓰쿠루일까. 이 제목만 봐서는 '그'가 그 앞에 있는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라고 확실하게 주장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그'는 다자키 쓰쿠루가 아닌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그리고 그래야만 이 문장이 도리어 말이 조금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아무튼 간에 하드 커버를 넘겨 소설을 들여다봐야만 할 것만 같다.

하루키의 많은 소설들이 그러했듯, 이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한 가지 미스테리한 것, 혹은 무엇인가 기묘한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은 다자키 쓰쿠루가 대학교 2학년 때 겪은 일인데, 고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들 그룹으로부터 아무 이유도 없이(다자키 쓰쿠루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추방당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그룹의 나머지 친구들은 모두 이름에 색채를 표현하는 한자가 포함되어 있고, 다자키 쓰쿠루만 이름에 색채를 표현하는 한자가 없었던 것이다. 아오(靑)와 아카(赤)라는 두 사람의 남자아이, 그리고 구로(黑)와 시로(白)라는 두 명의 여자아이, 그리고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 그런데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렇게 느낄 테지만) 이 네 사람의 이름의 조합은 그 자체가 너무나도 기묘하게 여겨진다. 푸른색과 붉은색의 남자아이들과 하얀색과 검은색의 여자아이라니, 이 완벽한 대비의 구조라니, 이게 과연 가능한 조합일까. 과연 이들은 존재하는 무엇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일까. 아, 물론 나는 모든 소설이 허구라는 지극히 자명한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비유의 구조가 너무 도식적이라 도리어 조금은 의아해하고 있는 중이다. 이들이 완벽한 구조인 것은 단지 색상표의 색채대비의 측면에서 뿐만이 아니다. 하루키의 묘사를 빌리자면 아카는 성적은 탁월하지만, 그것을 내세우지 않고 배려한다. 아오는 체격이 좋고 성격이 활달하며 운동을 좋아한다. 시로는 외모가 뛰어나고 피아노를 잘 치지만, 말수가 적고 차분하다. 구로는 외모는 그렇게 뛰어나지는 않지만, 애교가 있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잘한다. 그러니까 이 조합은 두뇌와 건강과 외모와 재치의 조합이다. 그러니 이것이야말로 완벽한 조합이라고 감히 이야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해서 색상대비표에서 각각의 색들이 어떤 완벽의 극단에서 무엇인가를 표상하는 것처럼, 이들 역시 각각 무엇인가를 표상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간에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가 있다. 다자키 쓰쿠루는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딱히 뛰어난 재능도 없고, 공부를 아주 잘하거나 특별한 면도 없고, 외모마저도 돌아서면 잊기 쉬운 외모이다.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는 다자키 쓰쿠루가 이 친구 그룹을 그야말로 완벽한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이 그룹에서 추방당하자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게 되는 것도 어떤 측면에서 보면 그렇게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당시 쓰쿠루의 관점에서 보면, 이들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들이었고, 이 완전한 존재들과 일체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쓰쿠루에게는 일종의 자신의 존재가치를 느끼는 것이었다. 즉 쓰쿠루는 이들에게서 자신이 가지지 못한 어떤 완전함을 보았고, 그것들의 조화를 보는 것만으로 즐거움을 느꼈다. 그것은 쓰쿠루가 철도와 역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놓고 생각해 볼 수도 있는데, 철도와 역은 쓰쿠루에게 완전함이 어우러지는 조화의 공간이다. 정확한 시간에 도착하고 다시 정확한 시간에 떠나는 기차역의 열차들, 각자 도착하여야 하는 목표지점을 가지고 조화롭게 움직이는 역의 사람들, 이들이 어우러지는 철도와 역은 조화로운 물결, 이미 정해져있는 어떤 흐름이 반복되는 조응의 공간이다. 그리고 쓰쿠루는 머리가 어지럽고, 생각이 많아질때면 역에 가서 그 사람들과 열차들의 흐름을 바라본다. 그 정시 등장과 정시 퇴장의 정확한 흐름들을 말이다. 

그러나 조화로운 공간에서 조화롭게 존재하는 것이란 그 자체만으로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모든 이야기는 도식적인 구조가 깨지는 데에서 긴장이 생겨나고,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색채가 없는 쓰쿠루가 완전한 자들을 위한 이 그룹에서 추방되는 것은 이야기의 내용에서 뿐만아니라 구조로 볼 때 어쩌면 필연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터이다. 그리고 죽음만을 생각했던 쓰쿠루를 죽지 않게 하려면 두 가지의 길이 있다(물론 "대학교 2학년 7월부터 다음 해 1월에 걸쳐 다자키 쓰쿠루는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았다."라고 작가가 첫 문장을 쓰는 것은 그를 죽일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하나는 그에게 색채를 부여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색채가 없는 자신을 긍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다자키 쓰쿠루는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답게 후자의 길을 간다. 색채가 없는 자신을 긍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주위의 색채를 빼야한다. 다시 말해서 다자키 쓰쿠루만이 색채가 없는 것이 아님을, 주위의 모든 것들이 사실 색채가 없었음을, 혹은 모든 것이 나름의 색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라고 했을 때, 이 말 앞에는 '완전한' 혹은 '눈에 띄는'이라는 말이 빠진 것이다. 누구나 색채는 있다. 노르스름하다던가, 희뿌옇다던가 하는 정확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색채말이다. 완전한 파랑이나 완전한 빨강이나, 완전한 검정이나 완벽한 흰색은 아니어도 말이다(그것은 실제보다는 이렇게 소설 속에 등장한다). 다만 대다수 사람들은 그것이 명확하지 않아서 눈에 잘 띄지 않는 상태 즉, 청과 적과 흑과 백이 나름의 비율로 섞여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하루키도 처음의 그룹을 보여준 후 이제 색채를 섞기 시작한다. 하이다(회색)와 미도리카와(녹색)의 등장이 그것이다(그것도 하필이면 흑과 백 사이에 있는 회색과 청과 적 사이에 있는 녹색이라니, 하루키 씨 정말 귀엽지 않은가). 그리고 그들을 만나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름에 아무 색채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라를 만나고, 그리고 다시 네 명의 옛친구들을 만나며 쓰쿠루는 자신을 긍정하게 된다. 그것은 후반부의 네 친구를 보면 잘 드러난다. 이제 그 친구들은 예전의 강렬한 그 색채가 아니다. 붉그스레한 무엇인가, 혹은 파르스름한 무엇인가라고 부를 수는 있겠지만, 고등학교 시절의 강렬한 색채를 가졌던 그들은 더 이상 원색의 그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그들이 그렇다고 자신의 색채가 없는 것이 아니니까. 색상대비표의 가장 가장자리의 색들은 오히려 위험하니까. 예를 들어 흰색은 어쨌든 검어지는 길밖에는 남아있는 것이 없으니까. 흰색이 검어지지 않으려 발버둥친다면 오히려 그 반대편 낭떠러지에 있는 악령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 친구들의 말대로 오히려 쓰쿠루에게 그들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 그리고 그 그룹을 유지시키기 위해 쓰쿠루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쓰쿠루는 만들다(作)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즉 쓰쿠루는 이 소설에서 역을 만드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을 만들어가는 존재이고, 그리고 동시에 색을 섞어 새로운 색을 만들어가는 존재이다(그러므로 쓰쿠루가 빠지면 그룹은 유지될 수 없다). 쓰쿠루는 그렇게 색채가 없는 존재가 아니라, 색채가 없는 자신을 긍정하는, 그럼으로써 도리어 동시에 자신만의 독특한 색을 만들어가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제목에서 '그'는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가 아니다. 왜냐하면 순례를 떠난 다자키 쓰쿠루는 예전의 색채가 없는(스스로 '완전한(원색의)' 색채가 없는 것이라 생각했던) 다자키 쓰쿠루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이 제목이 이해가 되며 외울 수 있게 되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그는 이제 예전의 다자키 쓰쿠루가 아니다.


덧.
그래서 어쩌면 이 소설이 그렇게 많은 이들에게 읽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들 대다수는 다자키 쓰쿠루처럼 색채가 없다고, 혹은 자신이 뭔가 불완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기독교 식으로 말하면 완전한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하면서 예정된 인간의 운명이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이야기 역시도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한 인간이 자신만의 에덴동산을 찾으려 발버둥치는 이야기이다). 물론 소설은 불완전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아무런 답도 주지 않지만, 너무 실망할 필요만은 없다. 그것은 현실에서는 주인공이 아닌(혹은 아니라고 믿고 있는) 당신이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주니까. 불완전한 시대의 불완전한 인간들은 그렇게 현대 소설에서, 특히 하루키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여 왔다. 물론 하루키의 이런 인물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아직까지는 이 소설의 다자키 쓰쿠루가 아닌, <노르웨이의 숲>의 와타나베이다. 

사실 구조상으로 보면 이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노르웨이의 숲>과 상당히 동일한 부분들이 있으며, 따라서 그 소설의 다른 버전, 혹은 2000년대 버전으로 보인다(나는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읽었다). <색채가 없는...>은 현재의 쓰쿠루, 즉 30대 중반에 접어든 쓰쿠루가 과거로 돌아가 과거의 사건에 맞닥뜨리는 이야기이며, <노르웨이의 숲> 역시 서른일곱 살의 '나'가 비행기 안에서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비틀즈의 음악을 들으면서 과거를 회상하는 데에서 이야기가 출발한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다자키 쓰쿠루에서 출발하는 이야기가 결국은 사라에게 전화를 하는 것에서 끝나는 <색채가 없는...>과 마찬가지로, <노르웨이의 숲>의 시작은 '죽음과 마주했던 열일곱살의 봄날'(2장의 제목)이며, 마지막은 미도리에게 전화를 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리고 마지막 전화에 담겨진 의미는 두 소설 모두 비슷한 것처럼 보인다. 즉 인물로 보면 <노르웨이의 숲>의 나오코에게 이 소설의 시로를 매칭하고, 미도리에게 사라를 매칭할 수 있다. 즉 열일곱살 혹은 스무살(<색채가 없는...>의 대학교 2학년)의 나는 죽음에서 시작하지만 각자 나름의 순례를 마친 후에 미도리와 사라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그것은 하루키가 그들에게, 아니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무엇인가를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자신을 긍정하는 것, 혹은 '그래도 된다'와 같은 것들이다.

하루키는 오랫동안 소설들에서 여러가지를 이야기해왔지만, 어쩌면 그것은 비슷한 것들이 아니었을까. 그래도 된다는 것. 그렇게 해도 괜찮다는 것. 지금 그러고 있어도 괜찮다는 것. 하루키가 대학교  때의 나에게 말해준 것도 그런 것이었다. 대학 어느날의 나는 도서관에서 네 마리 째의 '태엽감는 새'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푸른 검색 화면은 그것이 그 안에 있다고 말해줬지만, 그것은 어딘가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아마도 누군가가 자신만이 아는 장소에 그것을 숨겨놓았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도서관을 헤매고 다녔다. 도서관은 빠져나올 수 없는 미로와 같았고, 안쪽 깊숙한 곳에는 양사나이나 일각수가 있을 것 같은 어두침침한 방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도서관 앞 광장에서는 연일 목적을 알 수 없거나, 애써 목적을 모른채 했던 집회가 이어졌고, 나는 소리가 점점 들리지 않는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하루키의 소설들을 읽었다. 들리지 않으면, 한 때 같은 목소리를 냈던 그들의 목소리들을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러나 아무리 깊숙한 곳에 가서도 웅웅, 웅웅 이상한 진동이 느껴졌고, 나는 그럴 때마다 창이 없는 것을 잘 알면서도 빈 벽을 살금살금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게 진짜 울리는 것일까, 아니면 내 머리 속의 무엇인가가, 혹은 하루키의 소설이 만들어낸 무엇인가가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하루키는 그런 이들에게 오랫동안 '그래도 된다'고 말해왔다. 아카가 했던 이야기에서처럼 하고 싶어서 하는 선택들이 아니라, 어떤 것을 피하기 위해 할 수 없이 하는 선택들이 하루키는 정작 중요한 것이라고 말해왔다. 그런 것 중의 하나는 악령을 피하는 것이다. 완벽해지려는 악령, 일체감을 느끼려는 악령, 정확해지려는 악령, 누구보다도 뛰어나려는 악령들을 우리는 피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시작은 일단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색채가 없어도 괜찮다고, 남들보다 뛰어나지 않아도, 무엇인가가 완전하게 조화되지 않아도 괜찮아고 생각하는 것. 불완전한 당신은 불완전한 선택을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는 것. 마음은 어딘가로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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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진 손톱 위에 붙인 인조 손톱

The Book | 2013. 8. 6. 17:16 | Posted by 맥거핀.
파과구병모장편소설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구병모 (자음과모음,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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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전체 줄거리와 결말이 들어있습니다.)



'파과'라는 제목이 가장 먼저 연상시키는 것은 破果, 그러니까 으깨지거나 뭉그러진 과일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소설을 처음 펼쳤을 때 만나게 되는 서효인의 <저글링>에 나오는 짧은 글귀 "떨어뜨림에 익숙해지면 으깨진 과일에 더 이상 미련은 없다."고 할 때의 그런 미련을 더 이상 두지 않는 과일 말이다. 그래서 소설의 주인공인 노년의 여성 킬러는 냉장고 안에 언젠가 넣어두었던 '거기 뭉크러져 죽이 되기 직전의 갈색의, 원래는 복숭아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물건'을 버리기 위해 조각을 모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신음을 내뱉는다. 으깨진 과일 같은 것은, 떨어뜨리는 데 익숙해지는 사람은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 않으므로. 자신은 떨어뜨리는 데 익숙해지는 사람이며, 동시에 다른 의미에서는 으깨진 과일일 것이며, 자신도 언젠가는 그런 뭉크러진, 한 때 복숭아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무언가처럼 쓰레기 봉지 안으로 들어가야 할지도 모르므로.

그리고 그런 그녀의 이름은 조각이다. 아니, 이름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별명같은 것이라고 해두자. 조각, 복숭아 조각, 냉장고 안에 핀 성에꽃에 달라붙어 잘 떼어내지 않는 복숭아 조각. 그러나 그녀의 이름은 사실 다른 의미였다. 손톱 조(爪)에 뿔 각(角)인 조각, 다시 말해서 각이 진 손톱, 혹은 날카로운 손톱. 그녀는 여자이기 이전에 유능한 킬러였으며, 맡은 바 임무를 무리 없고, 깔끔하게 처리해내는 솜씨좋은 재주를 가진 방역업자였다. 그녀에게 손톱은 치장을 위해 존재하는 무엇인가의 이전에, 누군가를 공격하거나, 혹은 상대방의 공격 속에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기능이 우선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손톱 조'라는 한자의 생김새는 조금 재미있는 데가 있다. 손톱 조(爪)자 밑에 삐침을 하나 붙이면, 오이 과(瓜)자가 된다. 그러니까 다르게 생각해 보면 '손톱 조(爪)'란 '오이 과(瓜)'가 깨어진, 혹은 파괴된 것이다. 즉 작가의 대출혈 자폭 서비스를 통해서 연상해보면 이것이야말로 '파과(破瓜)'다. 이 파과(破瓜)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연관된 여러가지 의미가 나오는데, 일단 파과라는 말은 말 그대로 '오이 과'자를 파자(破字)한다는 것으로 오이 과(瓜)를 파자하면 '여덟 팔(八)'자 2개가 되어 그 두 개를 합한 여자나이 16세를 의미하는 말이 된다. 동시에 파과라는 말은 여자의 처녀막의 상실, 즉 여자가 처음으로 남자와 성관계를 가지게 됨, 혹은 월경을 처음 시작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 모든 것이 16세, 혹은 사춘기, 청년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 같다. 다시 말해서 파과란 무엇인가가 처음으로 깨지며 다른 무엇으로 변모하는 시기다. 그 파괴되는 무엇인가를 단순히 처녀막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혹은 순수함이나 그간 자신의 주위에서 애써 유지되던 세계, 헤르만 헤세의 알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조각 역시 그런 나이에  그녀 주위의 세계가 부서져 나갔다. 당숙의 집에서 나름의 세계를 더 유지할 수도 있었지만, 작은 균열점들은 알을 조각냈고, 그녀는 모든 것이 깨지려는 순간에 알 수 없는 본능을 발휘하여 방역업자로서 거듭났다. 즉 그녀는 이중의 파과(破瓜)를 맞았다. 의미로서도 새로운 세계로 들어선 파과를 맞이하였고, 글자로서도 오이 과(瓜)가 깨어진 손톱 조(爪), 조각(爪角)이 되었으며, 그녀의 삶은 이상한 방식으로 조각이 났다. 조각난 삶을 겨우 지탱하도록 유지시키는 것은 류의 존재였다. 류는 세상과 그녀를 연결하는 접착제, 끈과 같은 것이었다. 세상에 갈 곳 없이 내버려진 그녀를 지탱시키는 심리적인 끈이라는 점에서도 그러하였고, 그녀가 류의 지시를 받아 방역업을 해나간다는 업무적인 면에서도 그러하였다. 그리고 운이 좋았다면 어쩌면 류와 뭔가 불안한 무엇일지라도, 행복비슷한 무엇인가를 이어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 깨진 세계는 또다시 쉽게 깨질 수 있는 법. 그녀에게 이제 남은 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 되새겨지는 류의 말들과, '무용'이라는 늙은 개 뿐이다.

결국 이 이야기는 깨진 조각이 다시 무엇인가를 붙여나가는 이야기이다. 무엇으로 무엇을 붙여나가는 것인가. 뭐 강박사라고 해도 좋고, 해니라고 해도 좋고, 투우라고 해도 좋고, 손톱이라고 해도 좋다. 혹은 종장에 등장한 어느 네일샵의 이름모를 어린 막내 여직원이라고 해도 좋다. 그래 어쩌면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마지막에 이 노년의 여성 방역업자는 자신의 손톱 위에 무엇인가를 덧씌운다. 어두운 감색이 밤하늘처럼 칠해져있고, 그것을 배경으로 저마다의 다른 색과 무정형 도안이 불꽃놀이처럼, 혹은 과일 열매처럼 퍼져 나가는 인조 손톱. 그리고 네일샵의 원장은 생각 없고 가벼워 보이는 막내 여직원의 유일한 장점이 타인의 불행에 대해 공감하는 능력이라면 데리고 있으면서 쓸 만하게 키워보아도 되겠다고 애써 미소지으면서 말한다. "잘했다." 그렇게 조각은 무엇인가를 붙여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인조 손톱이라고 해도 좋고, 막내 여직원과의 이상해보이는 공감이라고 말해도 좋다. 그녀가 무엇인가를 붙여나갔다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전에 그녀가 네일샵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돌아서 나왔거나, '서장'에서 벌어진 현실적이고도 비현실적인 풍경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하철에서의 어떤 소동들, 그러니까 나이든 남자와 젋은 여인이 자리를 두고 시비를 붙고, 50대 여인은 중재에 실패하며, 젊은 임부의 낭패한 얼굴과 눈물을 덤덤히 견뎌낸 조각이 방역업에 결국 성공하는 풍경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무 것도 붙지 않을 것만 조각이 점점 무엇인가를 붙여나간다. 그녀는 여성이면서도 여성과의 관계가 껄끄러운 인물이었다. 당숙 집에 얹혀 살던 소녀에게 결국 문제가 된 것은 친척언니를 대체하려는 욕망이었으며, 류에게 다가가고 싶으면서도 끝내 그와 거리를 유지하게 만든 것 역시 류의 아내 조를 대체하려는 욕망이었다. 그러던 그녀에게 사람들이 붙는다. 강박사가 붙고, 강박사의 부모와 해니가 붙고, 길에서 폐지를 줍던 노인이 붙고, 결국에는 투우도 붙는다(이를 가족을 잃은 자들의 이상스런 연대라고 볼 수도 있을 터이다. 가족(류)을 잃은 조각과 아내 혹은 엄마를 잃은 강박사와 해니, 그리고 아버지를 잃은 투우). 그러니 그녀가 네일샵의 막내 여직원과 이상한 연대의 감정을 가지게 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녀는 더 이상 (관계에 있어서) 무용하지 않으니까. 그녀는 방역업에 있어서는 '유용'하지만 관계에 있어서는 '무용'하다. 그녀가 키우던 늙은 개의 이름처럼 말이다. '무용'이라는 개는 그녀의 어떤 단면이다. 예를 들어 개 '무용'은 '현관에 정좌하여 돌아온 주인을 향해 꼬리를 예의 바르게 흔들기는 하지만 뛰어올라 몸에 달라붙으려고 하거나 코를 비벼대지 않'으며, '무념무상의 도를 실천하며 달관의 몸짓으로 주인에게서 돌아선다.' 그러므로 어쩌면 마지막 임무를 떠나기 전 '무용'이 조용히 숨을 거둔 것은 도리어 긍정적인 신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용(無用)'이 죽었다는 것은 더 이상 그녀가 '쓸모없음'이 아니라는 의미가 되므로.
 
그러므로 이 소설의 제목은 중의적이다. 그녀는 파과(破瓜)함으로써 조각(爪角)이 되었고, 그 조각들은 결국 파과(破果)가 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스스로 조금씩 무엇인가를 붙여나감으로써 다시 그녀는 새로운 세계, 어쩌면 새로운 파과(破瓜), 또는 합과(合瓜)를 맞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두 번째 파과는 그녀를 다시 조각으로 만들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이제 손톱 위에 인조 손톱을 붙였으니까. 그것은 한편으로 '진짜가 아니며 짧은 시간 빛나다 사라질 것'을 알기에 그렇다. 그러므로 그녀의 말대로 아마도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일 것이다.


덧.
그러므로 이 소설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종장'이다. 아마도 이 종장이 없었더라면 이 리뷰를 쓸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마지막은 이상하게도 영화 <고령화가족>의 마지막을 연상시키는데, 어떻게 수습이나 될 수 있을까 싶던 이야기(사실 '개연성'이라는 잣대를 들이댄다면 이 마지막들이 말이 된다고 할 수 있을까. 영화 <고령화가족>이나 소설 <파과>나.)에 붙는 너무 희망적이라 도리어 믿고 싶어지는 에필로그라는 점에서 그렇다. 

나는 그 <고령화가족>의 마지막이 너무 말들이 안된다고 머리에서 말해주는데, 마음에서는 이상하게도 뭐라고 할 수가 없더라고. 참 요즘에는 이상하게도 이런 게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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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테러 라이브, 김병우

Ending Credit | 2013. 7. 29. 18:00 | Posted by 맥거핀.




(스포일러)


1.
영화 <더 테러 라이브>에서 방점을 찍고 있는 것은 '더 테러'가 아니라, 아무래도 '라이브'인 것 같다. 영화에서 거대한 규모의 '테러'를 보여주는 것은 이제 거의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 되었다. 문제는 그러므로 그것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의 문제인데, 이 영화에서 선택한 방법론은 '라이브'이다. 이 '라이브'라는 것은 이 영화에서 볼 때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영화의 내용상, 이것이 테러를 방송국에서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내용이라는 것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이 테러를, 이 이야기를 관객이 거의 실시간으로 보게 만든다는 것이 그 하나이다. 이 두 번째 부분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들이 조금 있는데, 이것이 조금 특이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나 드라마에서 라이브를 보여주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는 그다지 놀라울 것이 없다. 예를 들어 미드 <24>는 드라마 전체를 'Real Time'으로 보여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였는데, 이 때 한정된 시간을 보충해주는 것은 동시 화면, 혹은 화면 분할이다. 즉 이 드라마에서 시간을 보충하기 위해 전매특허처럼 사용하는 것은 여러 장소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동시에 보여주는 분할 화면이다. 그런데 이 영화 <더 테러 라이브>는 조금 다르다. 이 영화는 한정된 시간을 다루면서도, 동시에 공간마저도 한정시켜 버린다. 즉 카메라는 윤영화 앵커(하정우)가 진행하는 라디오 부스만을 비추고, 모든 사건들은 그 공간을 거쳐서 보여진다. 다시 말해서, 관객들은 모든 사건을 윤영화의 눈을 통해서 본다. 다리가 무너지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라디오 부스의 창을 통해서, 혹은 거기에 설치된 TV화면을 통해서 보게 된다. 이는 영화의 끝까지 이어지는데, 카메라는 다른 장면들을 보여줄 법도 하지만, 끝끝내 그 라디오 부스 안에서 머문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한편으로 연극과 같아지는 부분이 있다.)

이를 일종의 발상의 전환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사실 영화라는 것은 그럴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화에서 과거의 사건을 보거나, 혹은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을 볼 때, 그것은 일종의 관객을 향한 속임수이다. 실제의 사건이라면 절대 볼 수 없는 것을 그 순간 영화는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관객도 그 속임수에 대해서 화를 낼 이유란 없다. 우리는 영화관에 속으러 가며, 기꺼이 그 속임수를 즐기기 위해서 가기 때문이다. 도리어 어떤 속임수도 없다면, 우리는 의아해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일종의 영화가 가지는 장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 '영화의 장점'이라는 것을 시원하게 내던져 버린다. 물론 이는 이 영화가 선택한 것이다. 아마도 그럼으로써 감독은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 많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도박은 대체로 성공을 거두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것을 포기함으로써 얻는 것은 예를 들어 이러한 것들이다. 관객은 이 영화에서 계속 윤영화와 같이 이 라디오 부스에 갇혀있다. 즉 관객은 그가 알게 되는 것만을 알며, 그가 모르는 것은 영원히 계속 모른다. 그런데 관객에게 장소와 시간을 한정시킨다는 것은, 그들에게 정보를 제한시킨다는 의미도 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거대한 사건이 터졌을 때 TV속 앵커가 계속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도 눈을 떼지 못하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왜냐하면 사건의 초기 정보는 제한적이고, 우리는 계속 다음 정보를 갈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의 심리가 이 영화에도 작용을 한다. 우리는 계속 무엇인가를 알고 싶어하며 이 끝나지 않는 뉴스('NEW'S)를 계속 들여다본다. 이것은 또한 부차적인 효과를 낳는데, 관객을 윤영화에게 쉽게 동화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화의 시작부터 윤영화 앵커가 되어 매순간 판단을 해야하는 위치에 놓인다. 테러범도 잡고, 사람들도 구하고, 자신의 위치도 높이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물론 한정된 공간과 시간이라는 도박이 성공을 거두게 하는 것은 이어지는 사건의 치밀한 구성이다. 아무리 예능이나 여러 프로그램들에서 라이브와 핸드헬드를 관객들에게 연습시켰다고 해도, 단지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것 뿐이라면, 이는 사실 관객을 쉽게 피로하게 만들고 흥미를 잃게 만들 뿐이다. 예를 들어 내가 야구 중계를 보는 것을 실시간으로 찍어 영화로 보여준다면 일부 시간 많고 호기심 많은 심리학자들의 흥미를 끌 수는 있겠으나, 그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될 수 없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어지는 사건들을 밀도 있게 구성하여 관객을 기어코 계속 영화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즉 관객은 각각 나름의 윤영화 앵커가 되어 이 테러에, 혹은 테러의 중계에 몰입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이 영화가 얻은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지 간에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앞에서 이 영화가 스릴, 혹은 다른 무엇을 얻기 위해 '영화라는 것의 장점'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 영화가 쉽게 내던져 버린 것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2.
영화 <더 테러 라이브>에서 인물은 별안간 등장하고, 별안간 사라진다. 즉 이 인물들에게는 그 앞의 이야기(전사)도 없고, 그 이후의 이야기(후사)도 없다. 주인공 윤영화 앵커부터 방송국 국장(이경영), 테러 대책반장(전혜진) 등등의 주요 인물들 및 모든 인물들은 어떠한 설명도 없이 거기에 이미 존재하거나, 나타나고, 사건의 진행과정에서 할 일들을 마치고는 또 아무런 설명이나 뒷 이야기 없이 어디론가로 사라져버린다. 그것은 이 영화가 실시간과 한정된 장소를 표방하고 있다면 당연한 부분이고, 아마도 한편으로 이 영화는 그것을 장점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스릴 있게 테러를 보면 되었지, 인물들의 시시콜콜한 이야기, 그런 것은 알아서 무엇하게?, 라며 영화는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그것은 어떻게 보면 맞는 이야기인 것처럼도 보인다. 우리가 순간 어떤 인물을 만났을 때 가지는 인상만으로도 스릴을 구축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실제로도 인물들의 전사나 후사 혹은 다른 디테일 없이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것이 영화에 속도감을 부여해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것은 이 영화에서만큼은 조금 이상해 보인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누군가를 알아달라고 말하고 있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테러범이 테러를 벌인 이유는 영화의 시작부에 이미 관객들에게 반복하여 주입된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단지 하나, 죽어간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들에게 애도를 보내달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계 부품처럼 처리되어 버려진 인간들, 그들을 단지 버려진 부품이 아니라, 한 사람의 고귀한 생명으로서, 인생사를 가진 고유한 인간으로서 기억해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영화는 자신의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단지 하나의 기계 톱니바퀴처럼 다룬다. 인물들은 어떠한 디테일도 없이 적당한 순간에 나타나, 적당한 임무를 수행하고, 또 적당하게 떠나버리고, 영화는 잘짜여진 톱니를 가지고 스무스하게 굴러간다. 도대체 이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비판하고 있는 것, 혹은 또 하나의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은 자극적인 언론에 대한 부분이다. 사건을 혹은 자살을, 혹은 누군가의 죽음을 실시간으로 중계하고 있는 이 (실제의) 일부 언론들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 거의 도덕적인 붕괴에 가깝게 다가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예를 들어 자극적인 제목을 달고, 사건의 어떤 자극적인 부분만을 부각시켜 부풀리며, 정작 사건의 중요한 부분들이나, 생각해보아야 할 부분들을 생각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것은 이유가 있다. 그것이 보는 이들에게 먹히기 때문이며, 일단 닥치고 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지 자신의 뉴스를, 혹은 자신들의 보도 프로그램을 감각적인 자극에 빠져있든,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에 빠져있든 끝까지 보게 하는 것이며, 단지 높은 시청률 혹은 구독률 수치인 것이다. 그런데 어쩌면 이 영화의 전략도 그와 비슷한 것은 아닐까. 위에서도 썼지만 이 영화를 관객이 몰입하게 만드는 힘은 관객을 주인공에 이입시키는 것도 있지만, 한편으로 관객의 예상을 뒤엎고 이어지는 사건들에 있다. 사건은 점점 확대되고, 강도는 점점 강해지며, 테러의 규모는 확대되고, 자극적인 죽음은 점점 눈앞에서 전시된다. 이것이 결국 영화를 끝까지 보도록 만든다. 그런데 이것이 영화에서 비판하고자 하는 언론의 모습과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이 때 우리의 머리 속에는 자극적인 뉴스를 볼 때와 동일한 무엇인가가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 속에서 방송국 국장은 78%의 시청률을 찍은 후 웃음을 지으며 퇴장한다. 그때 그 웃음이 껄끄럽게 느껴지는 것은 그 78%를 만들어낸 사람들은 방송국 국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방송을 본 시청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혹여 이 영화가 780만을 찍게 된다면 감독은 웃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이미 이 영화를 본 나는 왠지 그 웃음이 좀 껄끄러울 것 같다.


3. 
물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그건 뉴스를 보는 것이고, 이것은 영화를 보는 것이잖아요. 누군가의 진짜 죽음을 실시간 뉴스로 보는 것과 누군가의 가짜 죽음을 영화로 보는 것은 다르지 않겠어요? 물론 그것은 맞는 얘기다. 그건 분명히 다르다.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을 즐기러 때로 영화관에 가기도 한다. 그것이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 죽음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맞는 얘기다. 단 그것은 영화가 명백히 판타지를 표방하고, 그것으로 나아가려 발버둥칠 때만이 그렇다. 정해진 틀 안에서 이미 약속한 규약을 가지고 게임을 해 나가는 것이 영화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마술을 즐길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속임수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신체분리마술에 속임수가 없다고 생각해보라). 그러나 어떤 영화들은 기어코 현실이 되려고 애쓴다. 현실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속임수를 지우는 것이다. 주인공이 볼 수 있는 것만을 보게 할 것, 그가 알 수 있는 것만을 알 수 있게 할 것, 그가 흐릿한 화면으로 무엇인가를 본다면 관객들도 흐릿한 화면으로 보게 할 것, 그가 죽는다면 영화도 끝날 것, 어떠한 위안이나 위무도 없이. 그러니까 여기에서 질문을 다시 해보자. 왜 라이브로 봐야 하나요? 이 영화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답은 이렇다. 그것이 극도의 스릴을 주니까. 너는 그 순간 관'객'이 아니라 주인공이 되니까. 그러나 영화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현실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이다. 사실 관객에게 스릴을 주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법을 쓰면 된다. 그것은 그에게 칼을 쥐어주고 실제의 누군가를 죽이게 하거나, 혹은 그의 반대로 관객의 등 뒤에서 칼을 손에 쥔 누군가가 쫓아오게 만들면 된다. 그도 아니라면 관객의 앞에 누군가를 불러 놓고 그를 '라이브'로 죽이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이미 영화가 아니고, 나는 기분나쁜 농담을 하기 위해 이 말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영화가 된 형태는 있다(그것을 영화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그것은 스너프 필름이다(이것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아닌가는 내가 알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극도의 스릴이라는 끝에는 스너프 필름이라는 지옥에서 온 망령이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다.

그리고 과연 스너프 필름이 확실히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 시대에는 합법적인 스너프 필름이 도처에 널려 있다. 미국의 경우 범죄 현장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것은 더 이상 놀랄만한 사건이 아니며, 우리나라의 경우 얼마전 한 종편 방송이 자살 소동을 생중계함으로써 위대한 첫발을 내디뎠다. 이런 것들이 과연 스너프 필름과 크게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 스너프 필름을 굳이 이야기하는 것은 이 영화가 스너프 필름에 가깝다는 의미가 아니다. 내용상으로 볼 때 이 영화는 그런 합법적인 스너프 필름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분명하다. 테러를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언론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고 말해도 무방하리라.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 내용을 그 비판하고자 하는 형식으로 다룰 필요가 있었을까. 다시 말해서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언론을 비판하기 위해 우리에게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것이 필요했을까. 나의 감정을 솔직히 말하자면 비판이라기보다는 당황에 가깝다. 사회에 만연한 모순의 화법들, 예를 들어 남의 신상을 까발리는 해커 그룹이 본인들은 '어나니머스(anonymous)'라는 이름을 쓰거나, 독설을 비판하면서 독설을 퍼붓거나, 정신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걸러 내면서 정신병적인 차별 논리를 사용할 때 나는 사실은 조금 당황스럽다.

4. (영화의 결말에 대한 부분이 집중되어 있으니 보지 않으신 분은 패스하시길.)
물론 그런 모순의 화법은 이것만이 아니고, 앞에서 말한 부분 즉 인물을 단지 하나의 닳아지면 버리면 되는 톱니바퀴로 보지 말자고 하면서, 기계부품처럼 다루는 것도 해당되며, 그것은 영화의 마지막에도 그다지 다를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내내 명확한 선으로 구분되는 것처럼 보였던 윤영화 앵커와 테러범은 마지막에 이르러 감정적인 연대에 성공한다. 그러나 이 연대는 조금은 수상쩍다. 그 연대는 구조는 그대로 둔 채 윤영화를 테러범의 위치에까지 끌어내려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이르러 윤영화는 사회적인 지위도 잃고, 가족마저 잃는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는 사회의 밑바닥에서 가족을 잃은 테러범과 동일한 위치가 되어 감정적 연대에 성공한다. (이것이 아니었다면 성공할 수 있었을까?)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끊어진 마포대교에서 겨우 걸쳐져 있는 차 안에서 아이들을 필사적으로 주위 시민들의 도움을 받아 끌어내고 물에 빠진 가장의 모습과 같다. 전쟁터와 같은 사회 속에서 결국 최종적으로 지켜야하는 것은 자신의 가족 뿐이며. 그것 마저도 약자들의 연대 없이는 최소한의 성공도 이루어내기가 어렵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연대에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그것마저도 결국 실패한다는 것. 테러범은 기어이 추락했고 그들은 여전히 깨진 TV속에서 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기에서 윤영화가 홀로 남아 빈 건물을 무너뜨리는 것을 어떻게 봐야할까?

이것을 테러의 완수라고 보아야 할까. 그렇다면 이것은 다시 처음으로의 되돌이표이다. 사실 처음에 우리는 이미 이 영화의 결말을 어느 정도 예상한다. 테러는 어쨌든 끝날 것이고, 테러범은 잡히거나 죽을 것이다(그리고 잡혀서도 결국에는 사형당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에 이르러 그가 왜 이런 뻔한 무모한 시도를 감행했는지 어느정도 이해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해한다고 해도 그다지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리고 그것은 마찬가지로 가족을 잃은 윤영화에 의해 마저 수행된다. 그러나 이 역시도 우리는 비슷한 결론을 예상할 수 있다. 윤영화는 죽을 것이고, 혹여 운좋게 살아남아도 그는 사회적으로 죽은 상태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테러범이라는 삐끄덕거리는 톱니바퀴를 또하나의 윤영화라는 삐끄덕거리는 톱니바퀴로 대체한 것이다. 작업은 조금 지연되겠지만, 공정에는 그다지 큰 문제는 없다. 나는 이것이 그러므로 일종의 체념이자 자살로 보인다. (이는 또 한편으로 그 남은 마포대교가 결국 무너지고 그렇게 애써 구해낸 아이들도 결국 물에 빠지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아마도 여기에서 다른 질문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왜 그는 하필이면 마포대교에 폭탄을 설치한다는 것일까? 그가 대통령의 사과를 받으려하면서 마포대교의 시민들과 윤영화를 인질로 잡는 것에 담겨진 것들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도 문제가 남는다. 물론 우리는 이 체념이자 자살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사회에 대한 분노가 거기에 담겼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의 분노라고 의미를 부여하기 이전에 선행되어야 하는 문제가 있다. 이런 것을 상상할 수 있다. 누군가가 말한다. 내가 여기서 죽을테니, 당신은 나의 죽음을 널리 알려달라고 말한다. 우리가 여기에서 가늠해야 하는 것은 그의 죽음이 가질 파급력의 강도가 아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가늠해야 하는 것은 그를 구하기까지 남은 시간이다. 실제의 사건이라면 달려가서 우리는 그를 구해야만 하고, 이것이 영화라면 그를 영화적으로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의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대신 일종의 명령에 가깝다. 

5.
그런 영화적인 구원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영화가 줄 수 있는 속임수를 쓰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마술과 비슷하다. 마술의 어떤 속임수를 낱낱이 알게 되면 처음에는 즐겁겠지만, 결국에는 모든 마술이 시시해진다. 그저 적당히 속아넘어가 주는 것이 필요하다. 단 그렇다고 해서 너무 몰라서도 안된다. 예를 들어 사람의 신체를 칼로 자르는 것이 속임수임을 아예 모른다면 그는 공포에 질려 이 마술을 아예 즐길 수 없을 것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현실을 다루지만, 그 현실은 영화적인 현실이다. 이것을 적절히 조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영화가 너무 현실과 동떨어지면 개연성이 없다고 하거나, 아무리 영화지만 지나치게 말도 안된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반대로 어떤 영화는 현실에 가깝게 가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런데 나는 가끔 어떤 영화들이 너무 현실에 비척비척 가까이 갈 때 무서워진다. 보지 않아야 되는 것, 예를 들어 실제로 몸이 잘린 마술사를 보게 될 것 같아서다. 몸이 잘린 마술사를 보는 것이 당신에게 무엇인가를 일깨웁니까, 그렇습니까? 줄곧 나쁘다고 말하는 바로 그 방식으로 우리에게 영화를 즐기게 만들다가 끝내 그 주인공을 체념시키는 이 영화는 이상하게도 열어서 안되는 것을 점점 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 2013년 7월, CGV 신촌 아트레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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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우리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The Book | 2013. 7. 22. 16:49 | Posted by 맥거핀.
적군파내부폭력의사회심리학
카테고리 정치/사회 > 사회학
지은이 퍼트리샤 스테인호프 (교양인,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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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2월 28일, 각종 테러와 범죄, 파괴활동방지법 위반으로 경찰의 추적을 받던 연합적군의 최후의 생존자 5명 전원은 일본 나가노 현의 아사마 산장에서 10일 동안 산장의 여주인을 인질로 잡고 농성을 벌이다가 경찰에게 결국 체포되었다. 사건은 끝난 것처럼 보였고, 모든 진상은 드러난 듯이 보였으며, 이들에게는 긴 수형생활만이 남은 듯했다. 그런데 이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사건의 숨겨진 나머지 부분이 드러났고, 그것은 경찰은 물론 전 일본인을 깜짝 놀라게 했다. 아사마 산장에서 사건이 벌어지기 전,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평균나이 23.3세의 일단의 젊은이들은 산속의 비밀 기지로 들어갔고, 그 숨겨진 공간에서 두 달 동안 총 31명의 연합적군 멤버 중 12명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도대체 산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연쇄살인마라도 돌아다녔던 것일까, 아니면 어떤 죽음의 바이러스라도 퍼졌던 것일까? 마쓰모토 세이초의 팩션이나, 김전일 소년의 사건기록부에나 등장할 법한 이 사건은 언론 및 전 사회의 관심을 끌었고(아사마 산장에서의 진압 과정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었고, 이는 최고 89.7퍼센트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들을 둘러싼 이야기는 사건의 양상이 밝혀진 직후에는 물론 아직까지도 일본 사회에서 널리 회자되고 있다. 그리고 퍼트리샤 스태인호프의 책 <적군파>는 이 사건을 당시 관련자들의 인터뷰 및 증언, 그들이 남긴 기록, 그리고 그간 쏟아져나온 각종 문서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세밀하게 재구성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사건의 미스테리 및 어떤 기이한 부분으로 인해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내가 보기에 이 책이 가진 미덕은 크게 세 가지다. 먼저 하나는 이것이 단지 그 사건을 세밀하게 추적하는 데에만 머물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책의 저자는 저널리스트나 르포 작가가 아니고, 사회학과 교수이다. 그러므로 저자의 관심은 이 사건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떤 양상으로 펼쳐졌으며, 이것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에 있지 않다. 즉 저자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의 배경이 되는 요소, 그 사건의 어떤 구조적인 형태, 그 사건과 사회와의 관련성, 그리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사회에 미친 영향들이다. 사건 그 자체 못지 않게 그러한 부분들에도 관심을 두는 것은 중요한데, 이 사건은 단순한 일회성의 범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연합적군이 벌인 이 아사마 산장에서의 농성과 내부 '숙청'은 좁게는 당대의 일본의 진보적 학생운동 및 폭력적 사회변혁 운동, 그리고 해외에서 벌인 요도호 그룹의 비행기 납치 사건이나 일본적군의 이스라엘 텔아비브 공항 습격 사건 등의 거대한 테러들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넓게는 일본의 현대사 전체와 일본인들의 어떤 정신적 세계와도 연관되어 있다. (참고로 말해두자면 요도호 그룹 및 일본적군, 그리고 연합적군, 적군파는 모두 일본공산주의자동맹(분트)의 분파들이며- 이를 통칭하여 '적군파'라고도 한다 -, 그들은 각각 엄밀히 구분되는 조직이다. 예를 들어 아사마 산장 사건을 벌인 연합적군은 적군파와 혁명좌파가 통합된 조직이며, 한편으로 저자는 이 통합의 과정이 상당부분 이 '숙청'에 영향을 미쳤음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을 본격적인 사건의 계기가 된 연합적군의 탄생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도리어 책의 시작은 이 아사마 산장 사건이 벌어진 3개월 후에 일어난 오카모토 고조를 위시한 일본적군의 텔아비브 공항 총기 난사 사건과 오카모토 고조의 인터뷰이며, 다시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 연합적군의 근원에 있는 적군파의 최초 탄생에서부터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다. 그래서 책의 초반에는 사건 중심이 아니라, 이들의 어떤 이데올로기, 내부의 논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약간은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저자의 입장에서는 이는 꼭 필요한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내부논리를 어느 정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이 연합적군의 '숙청'이라는 사건에 다다르면, 우리는 그 사건을 피상적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미덕은 책의 저자 퍼트리샤 스태인호프가 외부인이라는 점이다. 사건은 1972년에 세상에 드러났고, 그로부터 약 40여년 간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일본의 각계에서 이 사건을 다루는 수많은 글들이 쏟아져나왔으며, 이 사건에 영향을 받은 수많은 소설 및 영화, 만화 등이 나왔다(와카마쓰 고지의 영화 <실록 연합적군>이나 야마모토 나오키의 만화 <레드> 같은 것이 그 예이다). 또한 사건의 주범격인 사카구치 히로시 등 수많은 관련자들이 아직도 옥중에서 혹은 외부에서 살아 있으며, 이들은 사건 후 '자기 비판'을 포함한 여러 이야기들을 꾸준히 쏟아내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에 공통점이 있다면 이는 모두 일본 내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들인 바, 이는 그 사건이 전후 일본사회에 끼친 영향력을 생각해 볼 때, 어쩌면 넓게 보면 모두 당사자들의 이야기들일 수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 스태인호프 교수는 다르다. 그는 미국인이며 이 사건들과 전혀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 그것은 단순히 국가적인 구분을 넘어서, 그녀가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이 책에서 공공연하게 드러내보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녀는 책의 곳곳에서 미국인으로서 특별히 다르게 느껴지는 점이나, 미국인으로서 사건을 바라보는 방식이나, 사건을 처리하는 방식에서 느껴지는 점들을 솔직히 밝히고 있으며, 또한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끝내 이해할 수 없는 점이나, 혹은 다르게 이해할 수 있는 점들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진압과정에서 미국의 경찰과 일본의 경찰의 차이에 대해 밝히고 있는데, 그것이 한편으로 이 사건의 진행에 미친 영향도 있음을 생각케 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 사건의 진행에서 일본 특유의 어떤 부분들이 미친 영향이나 혹은 우리가 쉽게 오해할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해 생각하도록 한다. 어찌되었건 이 책을 읽는 (거의) 모든 독자는 한국인이며, 이 사건에 있어서는 외부인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미덕은 사건을 벌인 그들을 '위험한 타자'로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건이 일어난 후 이 '숙청'을 둘러싸고 여러 각도에서 다양한 분석들이 나왔다. 그것은 예를 들어 조직 내의 권력다툼으로 희생자들이 나왔다, 혹은 배신자(스파이, 프락치)를 처단한 것이다 등등의 분석이 그것이다. 혹은 그들의 어떤 개인적인 특성에서 사건의 해답을 찾는 이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조직의 여성지도자였던 나가타 히로코의 어떤 히스테리컬한 면, 개인적인 마음의 상처에서 해답을 찾는 이들도 있었으며, 그것은 사건을 맡았던 판사가 그녀를 '마귀 할멈'이나, '마녀'라고 부르면서 재판을 통해 그녀를 공격한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그런 단순한 분석에서 벗어나 이들의 어떤 심리적인 기제를 추적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사회학자인 저자의 이력으로 볼 때 이채롭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저자는 오랜 시간 각종 기록 및 관련자들을 만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이들이 벌인 사건이 어떤 특수한 개인적 성향이나 권력다툼이나 배신자의 문제와 같은 특수한 사례가 아닌 어떤 조직 내에서든 일어날 수 있었던 일임을 밝힌다. 다만, 이것이 다른 사건들과는 달리 12명이나 숨지는 이렇게 거대한 사건으로 발전한 이유는 그 사건에 내재한 언뜻 사소해보이는 분기점들, 혹은 어떤 조건들 때문인데, 예를 들어 중간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사람이나 내부조직이 없었다는 점, 이들이 명분으로 내세운 '공산주의화 총괄'에 어떤 내부적인 기준이 없었다는 점, 그리고 이들이 막다른 출구에 내몰려 있었다는 점 등에서 그 이유의 일부분을 찾을 수 있다.

즉 저자는 책의 중간중간에서 계속 독자에게 말을 건다. 그것은 사건의 진행양상과 그것에 내재한 어떤 조건들을 보여주고, 그들이 그 과정에서 선택한 부분들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것인데, 그것은 독자들에게 이렇게 묻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이라면 여기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 것인가? 폭력에 의한 세계혁명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평균나이 23.3세의 젊은이들은 괴물이 아니었고, 거의 대부분이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의 선택은 누구나 갈 수 있는 길 중의 하나였다. 그들은 흔히 이야기하는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사소해보였던 순간의 선택들은 결국 그들을 구렁텅이로 내몰았고, 동료들을 죽인 살인자로 만들었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가 중요해지는 것은 우리들 중의 대다수 역시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이코패스 혹은 정신에 문제가 있는 자라고 규정하면 해답은 간단해진다. 그들을 우리와 '분리'하면 된다. 그것이 오늘날 그러한 해답들이 선호되는 이유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볼 수 있듯이 사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대부분의 경우에 사태는 엉뚱한 곳에서 촉발되며, 한 번 조건이 만들어지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진전되어 전혀 원치 않은 결말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것은 대부분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우리는 크든 작든 모든 조직들에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도 그렇다. 작게 보면 가족과 교우관계에서 넓게 보면 국가까지 우리는 어떻게보면 폐쇄적인 조직에 들어가 있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이야기한 어떤 '희생양'을 찾는 것은 아주 작은 조직에서부터 크게 보아 전 국가적인 사건에까지 이어진다. 이 '희생양'이 돌고도는 것, 이것은 크기를 막론하고 어떤 조직에서든 반복되며, 이것에는 연합적군에게 내부논리가 있었던 것처럼 나름의 내부의 논리가 있다. (이 부분을 놓고 이들의 사건을 일종의 '이지메'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까봐 하는 얘긴데, 사실 '이지메'와 크게 연관은 없다.)

물론 저자는(그리고 나는) 이들이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살아남은 이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으며, 그 책임은 무엇으로도 면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과거의 사건에서 어떻게든 교훈을 얻어야만 한다. 쉬운 결론으로 끝내는 것은 쉬운 반복을 초래할 뿐이다. 이들의 논리의 뿌리, 그리고 사건 당시의 이들의 심리적인 상황을 헤집는 것을 통해 앞으로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저자는 한편으로 그래서 이들의 사건 이후의 '자기 비판' 혹은 '전향'을 주의깊게 볼 것을 조언한다. 우리는 그것을 일종의 '반성'으로 받아들이지만, 그 '자기비판' 역시 이들의 내부논리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문제이며 외부에서 보는 '반성'과 다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먼저 인간에 대한 애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저자의 논의가 힘을 얻는 것은 무엇보다도 저자의 어떤 태도에 있다.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이들이 마지막 투쟁을 벌였던 길을 뒤늦게 돌아보며 안타까움과 동정과 경이로움과 희생자에 대한 슬픔과 같은 어떤 복잡한 심상에 젖는다. 이들의 시작은 더 좋은 세상으로의 변화를 향한 순수한 갈망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변화를 꿈꾸며 하루하루를 산다. 우리도 아마 그다지 다르지 않다.

이론 때문에 죽인 건지, 죽이고 나서 이론으로 정당화한 건지 그들도 구분이 안 가는 것 같다. (···) 이제 신좌파는 좌절할 수밖에 없다. 운동은 결국 그들이 이끌어 가고자 했던 방향과 반대쪽으로 나아갈 것이다.
- 마쓰모토 세이초

객관적 사실은 동지를 죽였다는 것이며. 동지의 눈에 비쳤을 '괴물'의 모습이야 말로 우리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혁명적이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그 모습이 진정한 자신의 모습임을 인정하고, 그 모습을 부정하고, 부정을 끝까지 완수했을 때 비로소 총괄의 첫걸음이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 반도 구니오(연합적군의 지도부), 감옥에서 나가타 히로코에게 쓴 편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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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 폴 토마스 앤더슨

Ending Credit | 2013. 7. 19. 16:55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전체 줄거리와 결말이 들어있습니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5년만의 신작 <마스터>는 대체로 '어렵다'는 것이 중평인 것 같다. 그 어려움의 이유를 여러가지 많은 것들, 예를 들어 <마스터>라는 이름을 가졌음에도 유달리 마스터 씬이 없는 것 등에서 찾을 수도 있겠지만, 내용상으로 볼 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다. 한 가지는 이 영화가 현혹되지 않아야 하는 대상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의 두 주인공 중의 하나 랭케스터(필립 세이무어 호프만)는 인간의 심리를 연구한다는 '코즈' 연합회의 창시자이자, 그 자신의 소개로는 작가이자 의사이며 핵물리학자이자 이론 철학자이며, 우리가 보기에는 사이비 교주이다. 사실 영화 속에서 쏟아지는 그의 말들을 곰곰이 뜯어보면 그다지 틀린 말은 없다. 우리의 현재의 어떤 두려움, 혹은 심리상태가 과거의 무엇으로부터 연원한 것이며, 그 과거로 돌아가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하여야만 현재를 치유할 수 있으며, 인간은 동물과 다르기 때문에 인간이며, 웃음이 많은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것 등등의 말들 말이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뭐 사이비가 틀린 말들을 해서 사이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이비들일수록 말들은 더 번지르르하고 그럴듯한 법이다. 사이비가 사이비인 것은 그들이 하는 말들과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다르다, 혹은 전혀 반대의 방향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다른 사람에게 과거를 돌아보라고, 혹은 과거로 일순간 돌아갈 것을 주장하는 랭케스터 그 자신의 과거는 이 영화의 다른 누구보다도 미스테리하다. 몇 명의 전부인들이 있었던 것 같고, 어떠한 계기로 일정 정도의 부, 혹은 후원자들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의 사상의 근원에 있는 뿌리를 잡아내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또한 그는 인간을 동물과 애써 구분지으려 애쓰면서도 동물적인 욕망, 예를 들어서 프레디(호아킨 피닉스)가 만들어내는 정체 불명의 술이라든가 성적인 욕망을 버리지 못한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랭케스터가 무엇인가 말들을 쏟아내게 한 다음에 그의 반대되는 씬을 붙임으로써, 예를 들어 그의 프로세싱 이후에 그와 프레디가 프레디가 주조한 술을 같이 나누어 먹는 장면을 연결하거나, 웃음과 듣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연설 이후에 그가 자신의 이론에 대한 의구심 섞인 질문을 받자 화를 벌컥 내는 씬을 붙임으로써 그의 어떤 면모를 우리가 간파할 수 있는 힌트를 준다.

다른 한 가지는 이 영화가 결국 실패의 서사(실패를 보기 위한 서사)라는 점이다. 우리는 사실 대체로 이런 영화에서 어떤 성공의 구조에 익숙해져 있다. 고뇌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주인공이 어떤 '마스터'를 만나고 그의 영향으로 새로운 단계로 성숙하여 나아가는 것, 사실 우리는 그러한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보았던가. 그런데 나는 그런 면에서 이 영화의 이 마지막이 조금은 의심스럽다. 그가 마지막에 무엇인가를 성공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영화의 내내 프레디는 성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 욕망의 끄트머리에 다다르는 것, 그러니까 여자와 섹스를 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시작부에서 프레디는 모래로 만든 여자와 섹스를 하고, 흥분을 못이겨 바다에서 자위를 하고, 모든 이미지에서 성적인 요소만을 찾는 등 거의 섹스중독자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는 정작 그런 성적 욕망을 해소할 기회가 주어짐에도 스스로 거부하는 것 같다. 사진관에서 여자와 성적인 접촉의 기회가 생겼을 때에도, 그리고 랭케스터의 딸이 유혹했을 때에도 그는 그 기회를 스스로 날려버린다. 그리고 그 욕망은 이상한 방식으로 처리된다. 처음의 실패 직후에는 그는 사진관에서 이상한 폭력성을 보여줬고, 두 번째 실패 직후에는 성적인 환상을 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러던 그가 마스터를 떠나온 후 마지막에 여자와의 섹스에 성공하는 것, 예를 들어 이것을 그의 어떤 변화라고 볼 수 있을까?   

그 질문을 생각해 보기 위해서는 시계바늘을 조금 앞으로 돌려야만 한다. 우리가 그의 변화 혹은 성숙을 믿는다면, 그의 성숙의 기점은 그가 바이크를 타고 평원에서 사라진 때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에 그가 과거로 돌아가 보게 되는 것은 비어있는 과거, 혹은 돌아가야 할 대상(도리스)의 부재이며, 그는 그 이후에 다시 랭케스터가 원했던 담배를 손에 들고, 그러니까 그가 원했던 술을 주조해주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페기(에이미 애덤스)가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해줄 수 있느냐라고 묻자 그가 대답하는 것은 고작 사진을 찍어드릴 수 있다는 대답이다. 그러나 물론 알고 있듯이 사진찍기는 일찍이 그가 실패한 것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그는 랭케스터에게 과거의 그 둘의 인연을 들은 후 그곳을 돌아나온다(물론 과거의 이 둘의 인연, 즉 랭케스터가 얘기해 주는 두 사람의 전생은 의미심장하다. 파리 코뮌 중 외부와의 연락도구였던 비둘기, 그 중에서도 랭케스터가 얘기하는 것은 실패한 두 마리의 비둘기이다. 즉 랭케스터는 이들의 실패한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아마도) 여전히 술을 끊지 못한 상태에서 술집에서 여자를 만나고 그녀와 잠자리를 가진다. 물론 여기에서 가장 미심쩍은 것은 그 마지막이다. 프레디가 여자와 섹스를 하면서 벌이는 모습 말이다. 프레디는 바이크를 타고 평원을 달리며 랭케스터를 위시한 이 수상한 단체를 스스로 버린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마지막 그 여자에게 '프로세싱'을 하고 있다. 즉 그는 랭케스터를 흉내내고 있다. 그가 여자에게 말한 '가장 용감한 여자'라는 말은 처음 프로세싱이 끝난 후 랭케스터가 그에게 해준 말이었다. 그는 여전히 마스터를 버리지 못했다. (이는 그러므로 이 두 사람을 일종의 유사 부자관계로 보는 입장에서도 어느정도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다. 모든 아들들은 아버지와 다른 모습이 되고자 하나 결국에는 아버지의 어떤 모습들을 자신도 모르게 흉내내게 된다. 물론 그 중에는 흉내내야만 하는 것들도 있고, 결코 흉내내지 말아야 할 것들도 있다. 조금은 다른 얘기겠지만, 이러한 관점이라면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워지는 것은 어린 새엄마 페기의 위치다.)


물론 프레디만이 랭케스터를 버리지 못한 것은 아니다. 랭케스터 역시 프레디를 버리지 못했다. 일견 프레디와 랭케스터는 매우 다른 것처럼 보인다. 욕망에 따라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본인이 원하는 대로 술을 만들어 먹는 프레디가 동물에 가까운 캐릭터라면, 동물 위에 영혼을 가진 인간이 있다고 설파하는 랭케스터는 그를 길들이는 사육사처럼 보인다. 그들의 어떤 물리적인 운동 양식도 다른데, 창과 벽을 반복하여 오가게 하는 랭케스터의 치료 과정이나 어떠한 지점을 설정해놓고 그곳으로로 달려간 후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바이크를 타는 장면을 보면 랭케스터의 지배적인 물리 운동은 시계추와 같은 반복이다. 그러나 프레디는 다르다. 프레디는 폐소공포증을 가지고 있고, 되돌아가지 않는다. 노래를 불러준 도리스에게 되돌아가지 않았고(뒤늦게서야 돌아갔지만 그녀는 없었고), 역시 마찬가지로 노래를 불러준 랭케스터를 뒤로 하고 그는 떠났다. 물론 가장 상징적인 장면은 그가 바이크를 타고 점이 되어 사라지는 장면이다. 그는 영원히 어딘가를 떠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다름들에도 그들은 또 한편으로 비슷해보이고 서로에게 서로가 매우 필요했던 것처럼 느껴진다. 현실적으로 볼 때 정신적인 두려움과 상처 속에서 정신적인 버팀목으로서 랭케스터가 필요했던 프레디나 열렬한 추종자 및 영적 치유의 증거로서 다른 신도들에게 본보기로 내세울 프레디가 필요했던 랭케스터, 각각의 입장에서도 그렇지만 한편으로 다른 면에서도 그렇다. 예를 들어 그들은 프로세싱을 하면서는 마스터와 추종자의 관계처럼 보이지만, 프로세싱이 끝나면 주조한 술을 나누어 먹는다(그러므로 마치 이것을 즐기기 위해 프로세싱을 했던 것처럼 보인다). 둘이서 나란히 감옥에 갇혔을 때에는 처음 프레디를 분석하려 드는 랭케스터의 모습에서 시작하여 종국에는 두 사람이 거의 비슷하게 설전을 벌인다. 과연 그 두 사람은 달랐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위에서 얘기한 랭케스터를 흉내내는 프레디의 모습도 그 한 단면일 것이고 이는 동시에 그의 실패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폴 토마스 앤더슨은 왜 이 영화를 실패의 서사로 마무리 지으려는 것일까? 그것은 물론 현재의 미국인들이 실패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대로는 앞으로도 실패할 것 같기 때문이다. 다시 시계추처럼 반복하여 보자. 과거로 돌아가 과거의 어떤 부분을 되짚어야만 현재의 어떤 두려움, 상처, 잘못된 행동 등을 치유할 수 있다는 랭케스터의 '프로세싱'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 자체로는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그렇다면 모든 정신분석이 잘못된 것이라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50년대가 막 시작되는 미국으로 돌아가는 이 <마스터>의 이야기도 결국에는 같은 방식의 것이니까. 우리를 과거로 돌려보내놓고, 한 마스터, 혹은 한 사이비 마스터와 그를 추종하는 상처받은 어린 양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현재의 미국인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목소리일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미국,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당시의 미국인들은 상당수 정신적인 공황과 두려움, 근심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것은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아주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어떤 것으로 표출되어, 폐쇄적인 대외정책과 내부의 매카시즘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의 근원에 있는 것이 과연 공산주의와 소비에트 연방이었을까, 혹시 그것은 다른 어떤 더욱 거대한 근심, 마음 깊은 곳에 그 근원이 있는 거대한 무엇인가를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로 쉽게 치환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므로 그것을 쉬운 적으로 치환하지 않고 근원으로 돌아가 치유하는 하나의 방법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다(예를 들어 술에 쩔어 있는 프레디에게 술을 끊으라고만 말하는 것은 술이라는 쉬운 적으로 전선을 몰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프레디가 술을 마시는 것은 물론 술이 너무 좋아서가 아니고, 그 과거에 있는 무엇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과거로 돌아간 프레디가 결국 보게 되는 것은 과거의 부재이고, 과거로 돌아간 미국인들이 보게 된 것은 인디언의 학살이나 흑인에 대한 뿌리깊은 차별과 같은 부재하는 것만도 못한 과거, 혹은 어떤 의미에서는 부재한 과거이다(과거로 돌아간 프레디가 만나게 되는 것은 도리스의 부재이자 동시에 배우의 이름과 같은 '도리스 데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즉 여기에서 한편으로 부재하는 과거는 배우, 그러니까 매끄러운 하나의 이미지로 치환된다. 이미지...예를 들어 과거의 서부극들은 인디언 학살이라는 실제를 어떤 고정된 이미지로 치환하는 데에 얼마나 기여했던가).

예민한 예술가는 과거를 보여줌으로써 예리하게 현재를 생각하게 함은 물론 오지 않은 미래마저 예측하도록 만든다. 2013년 두 편의 근심어린 주인공이 나오는 영화가 있다. 한 편은 이미 지나간 폭풍이자 과거의 근심 <마스터>이고 다른 한 편은 아직 오지 않은 폭풍이자 미래의 근심 <테이크 쉘터>이다. 과거로 돌아가 현재를 치유하려는 방법은 (영화 속에서) 실패했고, 이 실패들은 영화의 모델이 된 싸이언톨로지 같은 형태로 여전히 현재 미국인들의 정신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반면 미래를 봄으로써 현재를 치유하려는 방법은 성공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전혀 올 것 같지 않은 폭풍이 두려워 방공호를 짓는 남자의 이야기, <테이크 쉘터>를 봐야만 할 것 같다.



- 2013년 7월, 스폰지하우스 광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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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박찬욱

Ending Credit | 2013. 7. 10. 00:20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전체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2006년 12월 박찬욱은 복수 연작의 어떤 변주, 혹은 색다른 복수를 보기를 원했던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상당히 이상해 보이는 소품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내놓고 돌아왔다. 기괴한 행동과 말들을 거듭하는 캐릭터와 반질반질하고 아기자기하고 키치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도리어 괴이하게 보였던 정신병원이라는 공간도 그렇지만, 사실 가장 이상해보였던, 그러므로 불친절하게 보였던 것은 그 이야기의 방식이었다. 박찬욱 영화에 으레 있으리라고 기대되었던 충격적인 사건도 없었고, 충격적인 반전도 없을뿐더러, 사실 변변한 '사건'이라고 부를만한 것조차 거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영화에 있는 것은 오로지 이상한 틀니를 끼우고 멍한 눈으로 손끝에서 총알을 발사하는 여자주인공과 이상한 토끼가면을 뒤집어 쓰고 살금살금 걸어다니는 남자주인공과 그들 못지 않게 이상해보이는 행동을 거듭하는 주위의 다른 정신병을 가진 인물들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들 캐릭터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마도 영화의 거의 전부를 이야기하는 것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시작은 그들의 정신병이 왜 촉발되었는지, 특히 여자주인공 영군(임수정)이 왜 스스로를 싸이보그라고 생각하는지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영화는 그녀가 왜 싸이보그라고 생각하는지를 그리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영화의 오프닝에서 이미 스스로를 싸이보그라고 생각하고 있는 영군을 본다(박찬욱 영화의 오프닝이 대체로 멋진 것이 사실이지만, 특히 이 영화의 오프닝은 그 어떤 다른 영화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녀의 정신병(우리가 그것을 '정신병'이라고 부른다면 말이다)의 원인을 대강 추론하여 짐작하는 수밖에 없다. 먼저 한 가지 전제해 두어야 할 것은 많은 정신병자들이 그러하듯이 이 영군도 나름의 확고한 논리의 체계가 있으며 그 체계에 따라 사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군은 영화 내내 밥을 먹기를 거부한다. 그것은 영군이 스스로를 싸이보그라고 생각한다면 당연한 귀결이다. 기계장치를 몸 안에 가진 싸이보그가 밥을 먹을 이유는 없다(그래서 영군은 남들이 밥을 먹을 때 건전지를 입에 대고 충전을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밥을 먹지 않는 것에는 무의식적인 다른 것이 작용했던 것 같다. 그녀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대상이었던 할머니의 존재 말이다. 영군은 자신을 쥐라고 생각하며, 무만 갉아먹었던 할머니가 정신병원에 끌려가며 틀니를 놓고가서 더이상 아무것도 먹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쩌면 영군의 단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닐까. 즉 자신이 틀니를 전달해주지 못해 할머니는 굶고 있는데, 자신만 밥을 먹을 수 없다는 죄책감이 여기에는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표면상으로 이 죄책감을 드러내는 것은 그녀를 더 괴롭게 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자신을 지탱하게 해줄 편리한 하나의 논리체계를 만들어냈다(그것은 자신을 싸이보그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극단적인 경우에 이 죄책감은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갈 수 있다. 그리고 박찬욱은 이미 <올드보이>에서 죽는 것보다는 정신병을 가지고라도 살아남는 것이 더 낫다고 말했다. 즉 그녀에게 '싸이보그라는 망상'은 그녀를 지탱하게 해주는 것이다). 싸이보그는 밥을 먹을 필요가, 아니 밥을 먹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하고 많은 것 중 싸이보그일까. 싸이보그의 특징 중의 하나는 그것의 겉모습과 안이 다르다는 것, 즉 원래의 인간의 내장이 다른 것, 즉 싸이보그의 경우라면 기계장치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몇 가지를 연상시키는데, 예를 들어 그녀가 가장 소중하게 가지고 다니는 할머니의 틀니 같은 것이다. 틀니는 원래 있던 이의 대체품이다. 즉 틀니는 원래 있던 것이 사라지고 기계장치적인 어떤 것이 인간의 신체 일부를 대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망상이 실재를 대체하는 것과 어떤 의미에서는 비슷하다. 그것은 망상이 어떤 의미에서는 (죽지 않고) 그 망상을 가진 존재를 유지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는 면에서도 그렇지만, 그것이 오랜기간 실재를 대체할 경우, 그 실재를 망가뜨린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할머니는 영군에게 충고한다. 틀니를 끼우지 말라고, 왜냐하면 자꾸 끼우면 진짜 이가 망가지니까). 그러나 아무튼 영군은 안을 기계장치라도 좋으니 무엇인가로 채워넣어야만 했다. 그것은 할머니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안이 비어버린 영군의 입장에서도 그렇지만, 일단 무엇인가 안을 채우면 된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어머니의 입장에서도 그렇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아니 이상한 농담은 그녀의 어머니가 순대를 만드는 일을 한다는 점이다. 순대란 돼지의 창자에서 원래 있던 것을 비워내고 당면을 채워넣은 음식이다. 한 마디로 싸이보그와 같은 음식.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는 그저 그녀의 빈 것을 아무 것이라도 좋으니 채워넣기를 바란다. 자신이 싸이보그라고 고백하는 진지한 영군에게 그녀의 어머니는 입에 순대를 밀어넣으며, 그녀가 받아먹자, 그럼 되었다고, 싸이버..인지 뭐인지는 상관이 없으니 먹으니까 되었다고 답한다. 이는 정신병원의 하얀맨(의사)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에게는 사실 영군의 망상이 무엇이든, 즉 그녀가 싸이보그인지 뭐인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녀에게 무엇인가를 강제로 주입하여 그들이 믿는 치료를 행하는 것이다. 그 강제로 주입되는 것들, 예를 들어 그것은 대통령이 누구야, 와 같은 질문들이고, 답을 하지 못하는 영군은 원래 그것을 몰랐다고 답한다. 물론 사실 그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결국 밥을 먹게 만드는 것은 하얀맨들이 아니라 일순(정지훈)이다. 일순의 접근법은 하얀맨들과 다르다. 하얀맨들은 그녀 고유의 망상의 체계를 인정하지 않고 일방적인 주입의 방식을 택했지만(그녀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그의 방식은 그녀의 망상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다. 즉 이 고유의 망상에 음식을 기계적인 에너지로 바꾸는 장치를 몸 속에 집어넣었다는 망상을 추가하는 것, 그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 방식은 멋지게 성공을 거둔다(이 일순의 수술(?) 장면은 평론가 김혜리 씨가 박찬욱 영화들의 가장 로맨틱한 장면으로 꼽기도 했다. 사실 나는 이 두 배우를 모두 좋아하지 않지만, 그녀의 말에는 적극 동의한다. 일순은 이 수술로 영군을 치료한 것만이 아니었다. 그 역시 어머니가 남기고 간 물건을 그녀 안에 심음으로서 그것에 대한 고착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럼 일순에게는 이러한 발상의 전환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 그것의 단초는 일순이라는 캐릭터의 어떤 특성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의 정신병적인 부분이란 무엇인가를 다른 사람에게서 훔치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그가 훔치는 것이 어떤 '물질적인 물건'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한 환자에게는 탁구를 치는 능력을 훔치기도 하고, 다른 환자에게는 타인에게 매우 미안해하는 마음을 훔치기도 하며, 영군에게는 그녀의 부탁으로 동정심을 훔치기도 한다. 즉 조금 더 명확하게 표현한다면, 그의 정신병이란 무엇을 훔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어떤 특성을 그대로 복사하는 것이라고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해서 그의 정신병이란 '타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우리는 한 가지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타인이 되어 보는 것, 그것은 그의 전작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주인공들이 갖추지 못한 것이었다. 동진(송강호)은 영화 속에서 결코 타인이 되어 본 적이 없었고, 그러므로 어떠한 동정심도 갖추지 못했으며, 그 댓가로 배에 칼이 꽂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이 동진을 살릴 수도 있었던 동정심, 이것은 일순에게는 이미 갖춰져 있다. 그것은 그가 타인의 입장이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영화 속에서 영군이 밥을 먹지 못할 때, 그녀가 독방에 홀로 갇혀있을 때 누구보다도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하고, 그녀를 돕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나선다. 그런 캐릭터는 일찍이 박찬욱의 영화에서 존재하지 않은 캐릭터였다. 그것은 한편으로 영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영화 속에서 영군은 반복되는 메시지를 듣는다(물론 이것은 그녀가 그전에 듣던 라디오에서 혹은 공장의 기계적인 지시음에서 유래한 망상이다). 동정하지 않기, 망설이지 않기, 쓸데없는 것을 생각하지 않기, 슬퍼하지 않기 등등의 메시지를 말이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이 중의 으뜸은 동정하지 않기라고 이야기해준다. 즉 이것은 일종의 그녀가 만들어낸 스스로의 금기이다. 그런데 역으로 생각해보면 어떤 것이 지금부터 금기된다는 것은, 그것이 이미 이전에 충분히 이루어졌다는 의미이다. 즉 그녀가 스스로에게 그것을 금하는 것은, 그녀가 망설이고, 쓸데없는 것을 생각하고, 슬퍼하고, 무엇보다도 동정하는 캐릭터임을 말해준다. 즉 영군 역시 일순 못지 않게 동정심을 갖추고 있다. 다른 모든 가족은 할머니를 어딘가로 치워버려야 하는 존재로만 생각했지만, 그 할머니를 진심으로 동정하고 할머니의 입장에서 생각하려 노력한 것은 영군 뿐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생각해보면 복수 연작들과 동떨어져 보였던, 그래서 상당히 기괴한 소품으로만 보였던 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사실 이 복수 연작의 거울 선상에 위치한 것을 알 수 있다. 복수 연작에서 수많은 인물들은 미치지 않은 상태에서 점점 미쳐갔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미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 중의 상당수는 이미 미쳐 있었고,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와 반대로 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영군과 일순은 미쳐 있었지만, 다시 미치지 않은 상태로 돌아오는 것처럼 보이거나, 사실은 처음부터 미치지 않았던 것처럼도 보인다. 그것은 그들이 복수 연작의 어떤 인물도 갖추지 못한(금자씨는 미약하게나마 갖추게 되었지만), 동정을 가진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한편으로 보면 그것은 영군과 일순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의 다른 주변 인물들 역시 동정심을 갖추게 된 것처럼도 보인다. 영화의 끄트머리에 다다라, 영군이 억지로 밥을 먹는 장면을 보면 식당의 모든 환자들은 영군의 동작을 그대로 따라하며, 그녀가 밥을 먹기를 응원한다. 어떠한 하얀맨도 없이 이루어지는 이 장면에서 모든 정신병자들은 이미 타인이 되어가는 첫걸음을 내딛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을 '정신병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좁은 의미로 보면 '싸이보그지만 (먹어도) 괜찮아'라는 것이지만, 사실은 '싸이코지만 괜찮아'이다. 비록 그들은 싸이코지만 괜찮다. 그것은 '그들의 그 미쳐 있는 상태'가 그들에게 크게 안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약간은 좁은 의미에서도 그러하지만(즉 그들은 '미치는' 상태가 아니라, '미친' 상태이며 이는 망상을 가지고서도 그것이 그들의 삶의 유지에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점을 의미한다), 보다 넓은 의미로 보면 그들이 도리어 '정상'이라고 말해지는 사람들보다 낫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싸이코지만 (싸이코가 아닌 자들보다) 괜찮아'이다. 그러므로 영군의 할머니는 영군의 환상 속에서 나타나, 그녀가 10만 볼트의 충전을 하여 핵폭탄이 되기를 원한다. 물론 그 핵폭탄은 동정의 파편들을 세상 천지에 넓게 퍼뜨리는 핵폭탄일 것이다. 박찬욱은 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라는 이상한 우화를 통해 우리가 걸러낸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지켜보기를 원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이것은 미완의 해결이다. 남들보다 유난히 뛰어난 동정심을 가진 이들이 이미 이야기를 정신병원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즉 이 사회는 '남들보다 뛰어난 동정심'을 원치 않는다. 사회는 여전히 등가교환과 그에 따른 대체로 이루어져 있다. 영군이 처음 싸이보그라는 망상을 가지게 된 것에는 위에서 이야기한 것 외에도 그녀를 단지 하나의 싸이보그로밖에 여기지 않는, 그녀가 처음 일했던 공장의 시스템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줄지어 늘어선 여공들이 같이 동작을 되풀이하는 이 처음의 장면에서 영군은 그 공장의 거대한 부속물이고, 영군이 빠지게 된 자리는 아마 다른 부속물, 다른 여공이 대체했을 것이다. 물론 그녀가 자신의 몸이 기계로 대체되었다고 믿는 것에는 이러한 공장에서 얻게 된 것들도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 지나친 동정심은 등가교환을 무너뜨린다. 일순이 말한 평생보장 AS는 이 사회에 없다. 즉 어떠한 관점에서는 동정심은 등가교환하는 자본주의적인 원칙을 어지럽히는 일종의 바이러스이며, 그런 측면에서 바이러스는 하얀맨들에 의해 치유되어야 하는 것이며, 이 바이러스의 보균자들은 정신병원에 들어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 또다른 바이러스가 있다. 아니 어쩌면 두 가지의 바이러스'들'이 있다. 박찬욱의 복수 연작들에서 복수는 돌고 돈다. 즉 복수는 교환되고, 그 교환의 고리를 끊지 않는 한, 그들에게 영혼의 구원이란 없다. 그 고리를 어떻게 끊어낼 수 있을까. 우화로 숨고르기를 한 박찬욱은 그 등가교환과 대체의 지독한 고리를 끊기 위한 하나의 가능성을 이 바이러스들의 탐구를 통해 보여주려고 시도한다. 영화 <박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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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야구

Ending Credit | 2013. 7. 2. 18:12 | Posted by 맥거핀.


(<마리 크뢰이어>와 <월드워 Z>의 스포가 될만한 내용이 있습니다.)


최근에 평론가 정성일씨는 트위터에 프랑스 평론가 도미니크 파이니의 글을 인용하여 "이상하게도 영화를 보는 감각이란 한번 잃어버리면 되찾기가 몹시 힘들다."라고 남겼다. 뭐 사실 이를 흔한 영화평론가의 흔한 '영화부심'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영화를 조금 더 진지한 마음으로 보고 싶다면 일종의 훈련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훈련이라고 해서 거창한 것을 연상할 필요는 없다. 그저 내가 말하고 싶은 훈련이란, 좋은 영화들을 꾸준히 보는 것이다. 어떤 영화들이 나쁜 이유는 어떤 나쁜 생각이나 사상을 담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생각을 정지시키기 때문이다. 두 시간 동안 눈을 스쳐 지나갔다가 머리 속에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 어떤 영화들은 보는 사람들을 거의 두 시간 동안 죽이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주 오랫동안 어떤 이들에게는 '아무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영화의 미덕이라고 칭송되기도 했다. 그러니까 두 시간 동안 기꺼이 죽어있겠노라 선언하는 셈이다.) 또한 동시에 영화는 두 시간 남짓되는 제한된 시간동안 이루어지는, 시간의 제약을 가지고 있는 예술이다. 그 짧은 시간을 집중하는 것은 단지 집중력의 문제가 아니라, 일종의 루틴의 결과물이다. 꾸준히 좋은 영화를 보게 되면 집중의 산물이 아닌 일종의 루틴이 자신 속에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아마도 일종의 '(자신만의) 영화를 보는 감각'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내 자신의) '영화를 보는 감각'이란 것을 점점 잃어버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그것은 분명히 좋은 영화를 보지 못한 탓이다. 올해의 상반기에 좋은 영화로 꼽히는 영화들, 예를 들어서 <코스모폴리스>, <홀리모터스>, <장고>, <테이크쉘터>, <스타트렉다크니스>, <우리에게 교황이 있다>, <문라이즈킹덤>, <링컨> 등등의 어느 영화도 보지 못했다. 아니 여기 언급되지 않은 어떤 영화들도 좋았던 것 같기는 한데, 도대체 그것이 좋은 영화였는지 확신을 할 수가 없다. (그러니 타인의 리스트만 늘어놓는 볼썽사나운 꼴을 보이게 된다.) 그러므로 내가 좋은 영화들을 보았는지 알 수가 없다. 다 감각이 무뎌진 탓이다. 그저 지나간 몇 편의 영화들에 대한 잡설을 늘어놓는 것이 그 감각을 끌어올리는 데 도움이 될까? (이 두 가지의 영화가 짧은 리뷰의 대상인 것은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저 가장 최근에 본 두 편일 뿐이다.) 



<마리 크뢰이어>, 빌 어거스트, 2012

야구에는 '우완정통파에 대한 로망' 같은 것이 있다. 150km를 넘나드는 강속구를 자유자재로 제구하는 오른손 투수에 대한 선망. 그러나 물론 이들이 로망의 대상인 것은, 이런 친구들이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빠른 볼을 던지기는 하나 제구가 안되는 투수들은 비일비재하고, 결국 투수코치는 최후의 카드를 꺼내든다. "구속을 좀 떨어뜨려서 제구를 잡자!" 그러나 여기에는 실패의 가능성이 늘 도사리고 있다. 다이조부 박사는 현실에 없다. 구속은 현저하게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제구는 들쑥날쑥하고 빠른 볼을 던지던 미완의 대기는 그저그런 패전처리 투수가 된다. 물론 다른 방법도 있다. 타자를 현혹시키는 키킹 동작을 추가한다, 볼을 끝까지 숨겨나오도록 투구폼을 교정한다, 특정의 변화구를 장착한다, 구속을 조절하는 방법을 습득한다, 타자의 리듬을 빼앗는 불규칙한 인터벌 조절법을 습득한다 등등의 다양한 방법들 말이다. 아니면 아예 극단적으로 쓰리쿼터나 언더스로로 폼을 바꿔버릴 수도 있다(심지어 어린투수의 경우에는 우완에서 좌완으로 전환시킬 수도 있다). 즉 이들은 어느 틈에 기교파 투수가 된다. 우완정통파와 좌완기교파. 즉 어릴 때부터 기교파가 목적인 투수는 (거의) 없다. 누구나 160km를 던지는 정통파가 되고 싶지만, 그것의 길은 멀고, 대신에 살아남기 위해 여러 다른 기교를 배운다. 즉 수많은 기술들은 살아남기 위한 산물이다.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렇다고 우완정통파는 기술 없이 던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적당한 키킹으로 머리 위에서 손을 내리꽂아 빠른 속도로 공을 던지는 우완정통파의 투구폼 역시 야구의 역사에서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단 1km의 속도를 더 내기 위해서 그간 연구된 수많은 방법들이 이 우완정통파 투수의 강속구에 녹아들어가 있다. 즉 이는 기본기지만, 이 기본기 역시도 수많은 기술들의 집약체이다.

별 쓰잘데기 없는 야구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은 것은 <정복자 펠레> 등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이 감독 빌 어거스트가 우완정통파 투수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유명한 <정복자 펠레> 등의 영화에서도 그러하지만, 그의 영화에는 별다른 기교가 없다. 영화는 시작하면서 한 장례식장에서 아기를 안고 서 있는 한 미망인의 모습을 비춘다. 아기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버린걸까? 영화는 별다른 설명없이 시계바늘을 돌려 그녀의 아주 오랜 옛날로 돌아간다. 그리고 우직하게, 별다른 카메라워킹도 없이 이야기를 천천히 이끌어 나간다. 그리고 이 순탄하지 않은 마리 크뢰이어의 삶을 조용히 따라가며 수많은 분기점들에서 그녀의 선택들을 지켜본다. 그러므로 사실 이 영화의 가장 위험한 부분은 마지막에 있다. 관객이 "나는 이 여인의 삶을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이 여인의 선택들, 혹은 그녀가 처하게 된 마지막을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다."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영화로서 끝난 것이다. 단지 그저 두 시간 동안 '화성인 바이러스'를 본 것이다. (당신이 그것을 보는 동안 그들의 삶의 방식을 이해해서 보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단지 당신은 동물원 우리 속의 동물로서 그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그녀의 삶이 이해되는 부분이 있다면, 그녀의 어떠한 선택들이 가능한 선택의 범위 속에 들어있음을 이해한다면, 우리가 비록 그런 삶이 아닐지라도 우리에게는 조금이나마 얻게 되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즉 구속을 1km라도 끌어올리기 위해서 빌 어거스트는 몇 가지 전통적인 장치를 효과적으로 구성한다. 예를 들어 복선의 장면들이 그것이다. (복선은 물론 가장 효과적인 서사전략 중에 하나다. 그러나 요즘의 어떤 영화들은 관객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복선을 의도적으로 생략한 후에 어떤 장면을 던져버리고, 어리둥절해진 관객들은 인터넷에 "그런데 그 장면의 의미가 뭐죠?"라고 질문을 올린다.)  예를 들어 마지막 딸 빕스의 선택이 이해가 되는 것은 우리가 이미 그 전에 어머니가 대체된 풍경을 보았기 때문이다. 마리 크뢰이어가 다시 집으로 돌아갔을 때 카메라는 마리 크뢰이어의 등 뒤에서 집의 모습을 비춘다. 집은 평안하고, 어머니는 집안을 완벽히 통제하고 있으며, 한때 어머니였던 마리 크뢰이어는 손님의 위치가 되어 집안을 조심스레 살핀다. 아니면 다음의 장면. 영화의 시작부, 아버지의 어떤 행동들을 두려워하는 딸 빕스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들을 예감하게 됨은 물론, 지금까지 반복된 수많은 일들, 그리고 그것에서 딸과 마리가 감내야하여야만 했던 일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나중에 마리 크뢰이어의 선택을 지지할 수 있는, 혹은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복선의 구실을 한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 휴고의 처음 등장과 <안나 카레니나>에서 브론스키의 처음 등장을 비교해보면 어떨까.) 즉 차곡차곡 쌓여진 장면들은 구속을 조금씩 끌어올려 기어코 당신이 삼진을 당하게 만든다. 그래서 당신은 덕아웃으로, 아니 집으로 돌아가며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무게중심은 마리 크뢰이어에서 어느새 빕스 크뢰이어로 옮아간다. 그러므로 영화를 다시 다르게 보는 하나의 방법은 마리 크뢰이어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빕스 크뢰이어의 관점에서 영화를 다시 보는 것이다. 마지막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 빕스의 모습을 보며 마리의 남은 삶보다는 빕스의 남은 삶이 궁금해지는 것은 아마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정복자 펠레>의 마지막이 오버랩되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감독의 삶을 혹은 사회를 바라보는 자세이기도 할 것이니까. 삶은 그렇게 세대에서 세대로 조금씩 나아간다.



<월드워 Z>, 마크 포스터, 2013

마크 포스터는 적어도 액션 장면들에서 긴박함을 끌어낼 줄 안다. 이 영화는 액션들의 백과사전과 같다. 좁은 공간에서의 폐쇄적 액션, 거대한 군중들의 동시다발적 액션, 도로의 카체이싱, 비행기 안에서의 액션, 무소음 액션, 밀폐된 공간에서의 일대일 대결 등등 여러 다양한 곳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거의 모든 액션들이 이 영화에는 총망라되어 있으며, 마크 포스터는 각각의 장면들에서 적당한 컷과 편집과 리듬으로 각 장면들의 긴박함을 살려낸다. 그리고 액션들 사이에 중간중간 적절한 휴식처를 관객들에게 제공하고, 관객들에게 숨을 돌릴 틈을 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즉 다시 야구로 말하면 그는 매우 다양한 기교를 갖추고 있다. 인터벌 조절도 능하고, 이중키킹을 구사하며, 공을 끝까지 손에서 숨기면서 릴리스한다. 그런데 참 이상한 건, 그가 끝끝내 나를 삼진으로 돌려세우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여전히 용큐놀이를 하고 있다. 물론 안타를 쳐내지 못하는 용큐놀이란 투수만 피곤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놀이를 하는 당사자도 피곤하게 한다. 그래서 결국에는 에라 모르겠다,하고 나는 배트를 휘둘러 버린다. 영화로 돌아와서 말하자면, 나는 결국 이 제리(브래드 피트)가 죽든지 말든지 별로 상관이 없어진다. 다시 말해서, 나는 그의 남은 삶이 전혀 궁금해지지 않게 되었다.

이 영화에서 보고자 하는 것은 좀비의 어떤 바이러스적, 혹은 박테리아적 속성이다. 즉 이 영화에서 말하는 좀비는 어떤 주술이나 신비한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이고 과학적인 방식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만약 좀비에 물렸더라도, 그 부분을 도려내는 등의 빠른 처치가 이루어진다면, 좀비가 되는 것을 면할 수 있다.) 그러니까 좀비 바이러스는 아주 파괴적이고, 전염속도가 엄청나게 빠른 감기 바이러스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이 영화를 스티븐 소더버그의 감기 재난 영화 <컨테이젼>과도 비교할 수 있다. 두 영화 모두 어떻게 보면 비슷한 시작을 보여준다. 끊임없이 중첩되는 뉴스 리포트들로 시작했던 <월드워 Z>와 비슷하게 <컨테이젼>은 바이러스가 처음 전파되는 과정을 다큐멘터리를 찍듯이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영화들은 점점 분기되어 나아가기 시작한다. 끝까지 다큐멘터리 혹은 뉴스 프로그램의 기조를 유지하는 <컨테이젼>과 다르게 이상하게도 <월드워 Z>는 농담을 하기로 마음먹고, 그 농담을 점점 강화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중간에 끼어있는 예루살렘과 북한에 대한 농담, 혹은 마지막에 들어있는 그 WHO에서의 액션 같은 것 말이다. 좀비 바이러스가 온 몸에 퍼진 상태에서 연구동을 유령처럼 떠도는, 한때 전세계의 건강과 보건을 위해서 분투했을 그들의 기괴한 액션(어떤 블로거 분은 이를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라고 탁월한 설명을 해주셨다)을 선사하는 것이 농담이 아니라 할 수 있는가? (그러니까 아마도 이 제목 <월드워 Z>의 Z는 좀비의 Z이면서 동시에 가장 가능성 없는 것으로서의 Z일지도 모른다. 즉 현실성의 정도를 A에서 Z까지 나눈다면, '월드워 A'는 소더버그 식의 이야기, 그리고 '월드워 Z'는 이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문제는 영화의 안쪽이 아니라, 영화의 바깥쪽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즉 단지 농담을 하기 위해서  이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본다는 것에 담겨진 의미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예매 전쟁을 뚫고 표를 힘들게 구한다음 주말저녁 힘들게 차를 타고 나가서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용케 자리를 찾아서 앉아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두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견뎌낸 대가가 고작 농담이라고 말해질 때의 그 어떤 허탈감 말이다. 농담에 진지하게 반응하는 것이 가장 바보같은 것이라는 점은 고금불변의 진리지만, 그 농담이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보는 댓가라면 우리는 그 농담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을 왜 보는지 자문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물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아이고, 왠 오바질이야, 진짜 죽은 거 아니잖아요, 그거 다 아주 잘 만들어진 가짜 죽음이잖아요.

사실 문제는 그 '가짜 죽음'이다. 영화 기술이 발달하면서 특히 발달한 부분 중에 하나는 죽음의 묘사이다. 요즘의 눈으로 옛날 영화를 본다면 가장 눈에 띄는 어색함은 누군가가 죽을 때이고, 그것은 그 죽음을 묘사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미비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올수록 죽음의 묘사는 점점 정밀해지고, 그것은 마치 실제의 죽음처럼 보인다. 과거의 영화가 카메라 눈속임으로 배에 칼이 꽂히는 장면을 묘사했다면, 컴퓨터 그래픽의 발전으로 배에 칼이 쑥 들어가는 장면을 클로즈업하여 자연스럽게 슬로우로 보여줄 수도 있다. 즉 죽음은 거의 진짜와 같아졌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관객의 인식이다. 그것이 너무 정밀해지다 보니 그 죽음들은 거의 농담처럼 관객들에게 받아들여진다. 우리는 거의 실물과 같은 죽음을 보고도 그것이 진짜 죽음이 아님을 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을, 혹은 거대한 대규모의 죽음을 영화관에서 보면서도 웃고 있다. 그것이 가짜임을, 혹은 거대한 농담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론 예전의 영화들에서 이상하게 진화한 것이기도 하다. 과거의 어떤 죽음들은 기술적으로 어설펐지만, 우리는 그것이 죽음이라고 암묵적으로 동의했다(동의하지 않으면, 그 죽음들이 너무 어설프게 묘사되었기 때문에 '영화보기'라는 행위 자체가 이어질 수 없었다). 즉 우리는 그것을 눈에서 가짜라고 받아들였지만, 머리 속에서는 진짜라고 인식했다. 이제는 그 반대가 되었다. 눈에서는 진짜라고 인식하지만, 우리는 머리 속에서 그것을 가짜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나는 이게 도통 좋은건지 모르겠다. 



- 2013년 6월 CGV 압구정, 메가박스 코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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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금자씨, 박찬욱

Ending Credit | 2013. 5. 27. 16:35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전체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여섯 번째 장편이자, 복수 연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친절한 금자씨>는 중간에 한 번 영화가 탈바꿈을 한다. 엄밀한 용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나는 그것을 톤(tone)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 중간의 기점은 금자(이영애)가 백선생(최민식)이 가지고 있던 다른 아이들의 상징물들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이 때부터 상당히 비현실적이고, 뭔가 초현실주의적인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던 이 영화는 급속하게 지상으로 내려와 관객들에게 달라붙는다. 그것은 한편으로 이 영화의 중간까지의 분위기의 형성에 큰 몫을 담당하던 나레이션(내용상으로 볼 때 이 나레이션은 금자의 딸 제니가 후일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이다. 목소리는 라디오 '밤의 플랫폼' 등으로 익히 알려진 성우 김세원 씨가 맡고 있다)이 이 중간을 기점으로 거의 등장하지 않는 것에도 이유가 있다(이 중간 이후로 등장하지 않던 나레이션은 마지막에 단 한 번 등장한다). 물론 내용상으로 볼 때도 이 중간부터 이야기는 다른 양상을 띤다. 전반부까지는 금자가 복수를 위해서 세력을 규합하는 과정이다. 무엇인가 상당히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공간(물론 이는 여성교도소라는 우리가 전혀 모르는 공간이 주무대인 점에도 이유가 있다)에서 비현실적인 사건들이 비현실적인 톤으로(예를 들어 기도하는 금자의 등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장면 같은 것) 이루어진다. 그런데 금자가 거의 복수에 성공하고 그것을 완결지으려 할 즈음에 금자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죽은 아이가 원모 한 명이 아니었던 것. 그리고 이 때부터 이른바 '집단의 복수'가 등장하고, 문제의 학교에서의 씬이 이어진다. 그리고 박찬욱이 여러 인터뷰에서 밝혔듯, 그가 진정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이 후반부의 학교에서의 일들이었던 것 같다.

다른 이야기에 앞서서 먼저 몇 가지의 자잘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영화는 박찬욱의 미장센 구성 능력과 형식적인 시도들을 많이 볼 수 있는 영화이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는 박찬욱이 특히 <스토커>에서 쉴새없이 보여줬던 평행편집의 원형과 같은 것들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대화를 섞어서 새로운 제3의 대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나, 대비되는 두 사건을 교묘하게 엮어서 독자의 이해의 쾌락을 증폭시키는 것 등이 그런 것이다. 이는 예를 들어 금자와 백선생이 다른 인물(목사(김병옥)와 박이정(이승신))들을 이용하여 서로를 추적하는 장면이나 영화의 중간 금자 사건의 담당 형사가 빵집에서 금자를 대면하는 장면 등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이 빵집에서의 씬에서 금자와 같이 일하는 근식과 금자의 대화, 그리고 형사와 형사 아내의 대화를 동일 선상에 놓음으로써 간단하게 금자와 형사를 동일 선상에 위치시킨다. 즉 금자의 사건에서 금자가 가지게 되는 죄의식의 어떤 부분을 형사도 공유하고 있음을(왜냐하면 그도 결국 당시에는 진범을 잡아내지 못했고 금자를 범인으로 만들었으니까, 그래서 그는 나중에 학교에서 금자를 돕게 되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이 장면에서 도리어 주목하여야 할 것은 대화보다도 어둡고 축축해보이는 긴 지하도를 통과하는 형사와 그의 아내의 모습이다) 관객에게 보여주면서 동시에 다른 미묘한 것들도 살짝 암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형사의 아내는 금자가 만든 케이크를 내던지며 "이걸 어떻게 먹어!"라고 형사에게 소리치는데, 이 대사가 (근식에게) 예전에 아이를 살해했다고 말하면서, "걱정 마. 먹지는 않았으니까."라고 덧붙이는 금자의 대사 뒤에 붙음으로서 '먹는다'라는 표현이 말하는 미묘한 뉘앙스가 관객에게 전달되도록 하고 있다(그리고 이 장면 뒤에 금자와 근식이 관계를 맺는 장면이 붙는데, 이는 '먹는다'라는 대사와 맞물려 여러 가지 것들을 생각해보도록 한다. 예를 들어 금자와 근식의 관계, 혹은 형사와 금자의 관계, 백선생과 금자의 관계 같은 것들을 말이다. 이것은 또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이후 금자의 딸 제니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이 장면에서 처음으로 '금자의 죄'라고 할만한 것이 나온다. 그런데 사실 영화를 보다보면 이 금자의 죄라는 것이 명확하지가 않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금자는 아마 아이를 꾀어냈을 뿐, 범죄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여기에서 복수의 구조는 성립한다. 금자는 죄를 짓지 않았지만, 백선생의 죄를 대신 뒤집어썼고, 그 결과 감옥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이는 세상의 죄일 뿐, 사실 어떤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속죄'와 같은 것으로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녀가 결코 죄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그녀도 어떤 의미에서 보면 피해자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전반부까지 금자가 준비하는 복수는 철저히 그녀만의 것이고, 형식상으로는 원모의 원한을 갚는다는 식의 형태를 띠었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복수(그렇지만 어딘지 모르게 미심쩍은)에 가깝다. 즉 원모의 부모에게 속죄하고, 죽은 아이를 대신하여 백선생을 처단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녀의 일종의 퍼포먼스이고, 이는 한편으로 이 복수를 어떤 가벼운 놀이극처럼 보이게 한다. 다시 말해서 그녀는 '친절하다'. 그녀가 친절한 것은 자신들의 복수를 대신해주기 때문이다. 그녀가 교도소에서 '친절한 금자씨'라는 별명을 가지게 된 것은 말 그대로 친절하기도 했지만, 공공의 적 마녀를 쓰러뜨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녀는 그럼으로써 타인의 신뢰를 얻지만, 동시에 마녀의 지위를 물려받기도 했다. 즉 그녀는 친절하지만, 이 친절함은 왠지 가면과 같은 인상을 준다. 그리고 그녀는 감옥에서 나와 그 가면을 벗어던지고,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변했다'는 말을 듣는다.

이 '변했다'는 것은 일종의 복선이다. 왜냐하면 금자는 실제로 변했으니까 말이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다른 사람의 복수를 대신해서 처리했던 금자가, 그래서 심지어는 자신의 복수마저도 일종의 놀이극처럼 보이게 만들었던(영화의 전반부까지) 금자가, 정작 그 자신의 복수는 다른 사람들의 손에 넘겨버린다는 사실이다. 즉 이 마지막의 학교에서 금자는 이 복수에서 살짝 '비껴서' 있다(그녀는 결국 죽은 백선생의 시체에 총알을 날렸을 뿐이다). 이를 이렇게 이야기해보자. <복수는 나의 것>에서 이야기한 것은 하나의 복수가 아니라 돌고도는 복수의 연쇄이다. 복수는 또다른 복수를 낳고, 복수를 행한 당사자는 다음 번의 다른 복수에 의해 쓰러진다. <올드보이>에서 이야기한 것은 복수보다 중요한 것은 결국 살고자 하는 노력, 혹은 스스로를 구원해야 한다는 믿음이다. 즉 복수는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해하는 것이며, 복수의 촘촘한 그물망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오로지 스스로의 노력 뿐임을 말한다. 이것은 <친절한 금자씨>에 이르러 하나로 합쳐진다. 복수, 즉 처벌은 결국 자신을 해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무조건적으로 처벌을 그만둘 수도 없다. 왜냐하면 백선생과 같은 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백선생은 일종의 맥락을 알 수 없는 악이다. 이것에는 어떤 윤리적인 의미나 개인적인 원한 같은 것이 없다. 백선생은 안이 텅 비어있는 입출력기계, 어떤 신호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기계와 같다(예를 들어 그가 밥을 먹다가 박이정과 거의 강간에 가까운 성행위를 하는 장면을 보면, 그의 입력(먹는 것)과 배출(로서의 성행위)은 거의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최민식은 흥미롭게도 <악마를 보았다>에서 이런 캐릭터를 한 번 더 연기하기는 했다). 그것이 자본주의적인 욕망과 연관되어 있으며(그는 요트를 사기 위해 아이들을 죽였다고 했다), 또한 예전에 말한 '좋은 유괴와 나쁜 유괴의 논리'와 연결되어 있음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백선생과 같이 (현대 자본주의의 병리적인 현상으로서의) 맥락을 알 수 없는 악에 맞서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이 영화에서와 같은 대리 처벌이다. 스스로를 구원하면서도 필요한 복수를 행하는 것, 그것이 대리 처벌이며, 그것은 한편으로 이 사회가 구현하는 방식이다. 결국 생각해 보면, 이 영화에서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집단적인 처벌은 사회적인, 우리 사회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처벌이다. 물론 그것은 완전히 같지는 않다. 그것의 실행과 집행은 공권력이라는 이름 하에 우리의 손을 떠나 다른 사람의 손을 빌어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맥락과 실행으로 볼 때 <친절한 금자씨>에서 '돌아가면서 칼로 찌르기'나 우리 사회에서 '재판을 통해서 사람을 목을 매다는 것'이 거의 동일한 것처럼 보이며, 실제로도 그렇게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복도의 긴 의자에 우비를 입고, 비닐장갑을 끼고, 손에 단도를 들고 어떻게 하면 손이 다치지 않고 잘 찌를 수 있는지에 대해 강의를 듣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내가 떠올린 낱말은 '신산스러움'이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에 내재된 그 '신산스러움' 말이다. 우리 사회의 재판과 형의 집행은 그것을 조금 더 간편하게 만들어놓은 것이다. 즉 복도의 긴 의자에 앉아있는 이들에게는 이 '신산스러움'과 '다가올 복수의 쾌감'이 공존한다. 우리 사회의 대리 처벌은 이 중 '신산스러움'을 상당부분 제거했고, 그 결과 복수의 쾌감이 더 크게 남았다(물론 이 과정에서 복수의 쾌감도 줄어들기는 한다). 그러나 우리가 간단하게 남겨져 현재 비교적 간단하게 실행되는 이 과정에서 은연중에 잊게 되는 중요한 것이 있다. (즉 우리는 현대사회에서 죄를 처벌하는 것이 우리의 손을 떠나버렸기 때문에 사실 그에 대한 많은 함의를 잊어버렸다.) 그 밑바탕에 있는 것이 무엇일까.


<친절한 금자씨>는 위에서 이야기했듯 백선생의 죄가 원모의 죽음 뿐만이 아니었다는 점을 금자가 알게 되는 것이 기점이다. 즉 이야기는 이를 기점으로 그 전까지의 금자의 개인적인 복수에서 후반부의 사회적인 복수로 넘어간다. 사회적인 복수로 넘어가는 까닭은 금자가 이 아이들의 부모의 심정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아이들이 죽어가는 비디오를 보고 나서야, 혹은 그 비디오를 보고 부모들이 보이는 엄청난 강도의 '애끓음'을 보고 나서야 금자는 백선생이 자기가 간단히 처리해야 할 장난감이 아님을 깨닫는다. 간단히 말해서 백선생은 자기 혼자 간단히 먹을 작은 케익이 아니라 커다란 케익의 한 조각인 것이다. 물론 그녀가 공감을 할 수 있었던 것에는 그녀의 딸 제니의 존재가 큰 역할을 담당한다. 왜 <친절한 금자씨>에 딸 제니가 중간에 등장하고, 그녀를 딸처럼 사랑하는 양부모가 등장하는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그것을 보아야만 금자가 공감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그래서 그녀는 이 복수에서 '비껴선다'. 그러므로 사회적 복수, 혹은 사회적 처벌의 근원에 있는 것은 공감하는 마음, 혹은 동정하는 마음이다(물론 이는 단순히 '피해자'의 입장에서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즉 복수의 선행 이전에 존재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사회적인 처벌, 일종의 대리 처벌이 이루어질 때 악과 동일한 방식으로 그것을 이루어내서는 안된다.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이 악은 맥락이 없는 악이다. 그것을 우리가 나쁜 놈이니까, 혹은 죽어야 할 놈이니까 죽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그 맥락없음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다. 그 근원에 놓인 맥락을 찾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악과 우리가 다른 점이다.

박찬욱의 복수 연작은 이렇게 조금씩 진화한다. 뭐 간단하게 말하자.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마지막 모든 인물들이 죽었고, <올드보이>에서는 가까스로 죽음은 면했으나 정신분열을 피하지 못하였다. <친절한 금자씨>에서는 죽지도 않고 미치지도 않았으나, 그렇다고 영혼의 구원에 이르지는 못하였다(마지막 나레이션이 이를 이야기해 준다). 그것은 <복수는 나의 것>의 인물들은 공감이나 동정에 이르지 못하였고, <올드보이>의 인물은 여전히 남의 말은 듣지 않고 자신의 말만 하였으나(오대수, 아니 최민식은 전편에서 혀를 자르는 징벌을 받았지만 그것으로 충분치 않았다. 그는 이 <친절한 금자씨>에서는 자신을 어떻게 죽일 것인가를 입에 재갈이 물려진 채로 큰 스피커로 들어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 이 말에 대한 불신은 계속 이어지는데, 금자씨가 백선생을 잡아 가장 먼저 한 일 중에 하나는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이었으며, 어른인 채로 금자씨 앞에 나타난 원모(유지태)는 금자가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려하자 재빨리 재갈을 물려버린다), 금자씨는 어렵게나마 약한 공감, 혹은 동정의 길에 들어섰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얘기가 조금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이 영화의 배우들은 참으로 의미심장하게 쓰이고 있다. 위에 든 최민식이나 유지태도 그러하려니와 금자와 제니에게 나타난 두 명의 킬러, 송강호와 신하균은 어떤가. 그렇다. 사실 이들은 동일한 한패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튼간에 금자씨 역시도 영혼의 구원에는 이르지 못하였으니 그 영혼의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인가. (박찬욱에게 구원은 그렇게 쉽게 오는 문제가 아니다. 정성일도 지적했지만 마지막 빵집에서 샹들리에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예를 들어 이를 나홍진의 <추격자>와 비교할 수 있는데, <추격자>에서 가장 의아하게 만든 것은 마지막 교회를 둘러싼 설정들이다.) 예를 들어 미친 자이거나 남의 피를 빨아야만 살 수 있는 자들에게는 영혼의 구원이란 없을 것인가. 그것의 양상들을 우리는 박찬욱의 다음 영화들에서 보게 될 것이다.  



- 2013년 4월, DV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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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보이, 박찬욱

Ending Credit | 2013. 5. 10. 18:30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자세한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박찬욱의 복수 연작의 두 번째 작품 <올드보이>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전작 <복수는 나의 것>에 대한 리뷰를 등가교환으로 끝냈으니 그것으로부터 이어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신장과 신장의 교환, 익사와 익사의 교환과 같은 등가교환에 대한 집착은 이 영화 <올드보이>에서도 이어진다. 예를 들어 오대수(최민식)는 사설감옥의 사장 철웅(오달수)의 이빨을 장도리로 뽑아내고, 그에 대한 대가로 철웅은 오대수의 이빨을 뽑아내려 한다. 철웅은 미도(강혜정)의 가슴을 손으로 만지고, 그 대가로 손이 잘린다(이것에는 또한 오대수의 어떤 오해가 작용하고 있다). 물론 가장 크고도 근본적인 등가교환은 이 영화 그 자체이다. 즉 우리는 영화의 전체에 걸쳐서 오대수의 복수를 본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결국 만나게 되는 것은 이우진(유지태)의 복수이다. 그리고 그 복수란 자신(이우진)과 이수아(윤진서)의 관계와 동일하게 오대수와 미도의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는 커다란 등가교환의 영화이고, 무엇인가가 무엇인가로 대치되는 영화이다. 오대수의 복수에서 이우진의 복수로 영화는 어느틈에 옮겨가고, 이우진과 이수아는 오대수와 미도로 슬그머니 대체된다. 어떻게 보면 <올드보이>는 모든 비밀이 담긴 보라색 상자를 보여주기 위해 달려오는 영화이다. 사실 굳이 따지자면 전작 <복수는 나의 것>과 마찬가지로, 이야기는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점점 개연성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그저 이 보라색 상자를 보여주기 위해 영화가 지금까지 왔던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리고 묻는다. 이 상자를 열겠습니까, 아니면 다른 것을 택하겠습니까. 이것을 열면 무엇인가를 보게 되지만, 그것을 본 대가는 당신이 치러야합니다.

이러한 등가교환에 대한 집착, 어떠한 것의 부재를 거의 그것과 동일한 실물로 보상받으려 하는 것은 거의 정신병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하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정신병의 많은 징후 중 하나가 등가교환이지, 등가교환을 하기 때문에 그들이 정신병을 가진 이들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점이다. 즉 간단하게 말해서 그들은 이미 광기를 가지고 있었고(오대수의 말이나 행동은 물론이고, 이우진의 모습에서도 광기를 지우기란 힘들다), 이 영화 <올드보이>는 두 광기를 가진 사내들의 대결이다. 15년간이나 사설감옥에 물리적으로 갇혀있음으로서 생긴 광기가 오대수의 광기라면, 이우진의 정신적인 문제는 과거의 어느 시점부터의 정신적인 갇혀있음(고착)이다. 즉 그는 이수아의 죽음이라는 과거의 사건에 갇혀있고, 그것에서부터 전혀 성장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둘다 무엇인가에 갇혀있고, 말 그대로의 '올드보이(즉 아주 오래된 소년들, 육체는 자랐지만 여전히 정신은 과거에 남아있는 소년)'들이다. 정신병이란 일종의 고착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정신병에 걸린 주체는 어떤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과거의 어떤 순간, 그의 정신병이 촉발된 어떤 순간에 머물러 있다. 라캉의 이야기를 빌어서 말한다면, 정신병에 걸린 이들은 언어와 법의 세계인 상징계를 통과하지 못하고, 몸 이미지의 세계인 상상계, 혹은 몸의 리비도인 실재계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사건을 상징으로 대체하지 못하고, 때로는 실재 그 자체를 망상으로, 거의 완전한 실재에 가까운 망상으로만 만난다. 그것은 예를 들어 동생의 아이를 뱄다는 소문 속에 휩싸인 이수아가 실제로 배가 불러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이것을 이우진은 "이우진의 성기가 아니라, 오대수의 혀가 임신을 시켰다"고 표현한다). 그 망상과 상상의 세계를 깨뜨리기 위해 마법의 진실, 혹은 고통스러운 진실이 들어있는 보라색 상자가 온다. 그리고 질문이 반복된다(그러나 조금 바꿔보자). 이 상자를 연 당신은 이제 어떻게 하겠습니까.


두 가지 정도의 이야기를 여기에서 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하나는 주체가 상징계로 나아갈 길은 애초에 완전히 막혀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들이 정신병에 걸린 모습을 보여준다는 징후적인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박찬욱은 이 영화에서 법과 언어의 세계를 건설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전작 <복수는 나의 것>에서 법이 스스로 그 역할을 포기한 듯한 모습을 보여줬다면 이 영화에서는 거의 법의 흔적 자체가 없다. 서울 한복판에 사설감옥이 존재하고, 이우진이나 오대수가 수많은 살인을 저질러도 그것은 거의 문제거리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보다 더욱 막혀있는 것은 언어의 세계이다. 이우진은 말한다. "오대수는요. 너무 말이 많아요." 그리고 그 대가로 오대수는 자신의 혀를 스스로 자른다(물론 이 자체도 일종의 등가교환이다). 사건은 언어로부터 시작되었고, 그것은 오대수가 스스로 자신의 언어를 제거함으로서 징벌된다. 그것은 이렇게도 볼 수 있는데, 이 영화 <올드보이>는 조금 색다른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한다. 아파트의 옥상에서 오대수는 자살하려는 남자(오광록)의 넥타이를 잡고 있고, 남자는 울먹이면서 말하다. "말투도 X같고, 당신 도대체 누구야, 씨발..." 그리고 오대수는 느리게 말한다. "내 이름은..." 그리고 이 때 플래시백되어, 경찰서에서 술이 떡이 된채로 '오.대.수.'라고 답하는(그리고 '오늘만 대충 수습'한다는 그 유명한 설명과 함께) 장면으로 넘어간다. 자살하려는 남자의 이 첫 장면이 말하고자 하는 것, 혹은 이 장면으로부터 영화가 시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대수의 사설감옥에서의 고행이 끝난 후 이 자살하려는 남자의 이야기는 다시 등장하는데, 이 부분을 보면 조금 이상한 장면이 있다. 오대수는 엘리베이터를 내려와 아파트를 나서고 있고, 그 뒤로 남자의 시체가 차 위로 떨어진다. 이 남자는 오대수가 살려주려 했음에도 왜 자살을 결국 감행한 것일까. 물론 오대수는 이 죽음에 물리적인 책임이 없다. 오대수가 어떤 위해를 가했다고 보기에는 시간이 맞지 않으니까. 그런데 대신 다른 책임을 물을 수도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오대수는 그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이 옥상에서의 장면은 조금 특이하게 구성되어 있는데, 짧게 구성되어 있는 시간과 달리, 오대수와 남자는 꽤 길게 이야기를 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오대수의 대사가 있고, 커팅 된 후, 아 그렇군요, 그럼 내 얘기를 할께요,라는 남자의 대사가 이어진다. 즉 우리가 보지못한 커팅된 이 사이에는 오대수의 긴 자신의 이야기(우리가 지금까지 보았으므로 생략된)가 들어있다. 다시 말해서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15년간이나 감옥에 있었으면서도 오대수는 그 말하기 좋아하는 자신의 특성을 버리지 못했다는 사실이다(이것만 보아도 그의 실패는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의미심장해 보이는 것은 그 다음이다. 막 자신의 이야기를 남자는 하려고 하는데, 오대수는 벌떡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간다. 즉 오대수는 자신의 이야기를 할 뿐 다른 이의 이야기는 듣지 않는다. 다른 말로 하면 그에게는 공감, 혹은 동정의 능력의 결여되어 있다. 공감이나 동정의 하나는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물론 중요한 것은 이는 공감이나 동정의 수많은 형태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오대수는 자신의 이야기를 할 뿐 들으려는 생각은 없다. 그러므로 어쩌면 그가 마지막 혀를 자르는 것은 이우진의 사건에 대한 징벌이면서, 동시에 이 남자에 대한 죽음에 대한 징벌은 아닐까. 그가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어쩌면 이 남자는 뛰어내리기를 포기했을지도 모르니까. 아무튼 그렇게 그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혀를 자름으로써 말하지 않고 들어야만 하는 존재가 되며 언어의 세계는 근본에서부터 거부된다(오대수, 아니 최민식은 <친절한 금자씨>에서 이에 대해 또 한번 징벌을 받기는 한다. 그 얘기는 다음번에 하자).

두 가지 중의 다른 나머지 하나는 그 이후 주체의 선택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것에는 바로 앞의 이야기, 즉 오대수가 말하는 기능을 상실하고, 오로지 듣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점이 관련되어 있다. 전체 영화에서도 그렇지만 <올드보이>의 마지막에서 이우진은 참 잔혹해보인다. 그는 오대수에게 자신의 심장이 리모컨으로도 끌 수 있다며, 버튼을 누르라고 부추긴다. 그리고 극도의 분노에 휩싸인 오대수는 버튼을 누른다. 그런데 이 때 쓰러지는 것은 이우진이 아니라 오대수다. 왜냐하면 그 버튼은 이우진의 심장을 폭파시키는 버튼이 아니라, 오디오를 재생시키는 버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펜트하우스는 곧 오대수와 미도의 절정의 신음소리로 가득찬다(그리고 이때 이우진은 당신들도 서로 사랑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즉 이 마지막에서 입을 잃고 귀만 남은 오대수가 가장 처음으로 듣게 되는 것은 자신의 가득한 리비도이다. 상상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오대수에게 이우진이 내던진 것은 리비도로 가득찬 실재계, 혹은 리비도 그 자체였다. 즉 이우진은 아니 박찬욱은 상상계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주체에게 상징계를 주는 대신에 실재계를 선물할 정도로 잔혹하다. 그렇다면 이 주체에게는 그 육체를 파괴시키는 일만이 남은 것일까. 즉 죽음으로 리비도만 남은 육체를 끝내는 것만이 남은 것일까. 박찬욱은 그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놈이어도 살 권리는 있는 것 아닌가요?"라는 반복되는 대사이기 때문이다.


이 질문은 영화 속에서 두 번 나온다. 한 번은 자살하려는 남자가 하고, 다른 한 번은 오대수 자신이 한다. 그리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 자살하려는 남자는 처음 영화가 시작하면서 등장하고, 중간에 다시 한 번 등장한다. 나는 그냥 간단하게 이야기하고 싶다. 어떤 영화에서 어떤 장면이 다시 등장한다면, 혹은 어떤 대사가 다시 반복된다면, 그건 그 장면이 중요하다는 뜻이고, 그 말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즉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놈이어도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박찬욱의 말이고, 여기서 방점은 아무래도 '짐승만도 못한'보다 '살 권리'에 찍혀있다. 이는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 영화에서 또 하나 중요하게 제시되는 말이 있다면 다음의 이 말이다.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 이 말은 영화 속에서 성경 구약 '잠언' 6장 4절이라고 소개되며, 그것은 오대수가 이우진의 펜트하우스 엘리베이터 비밀번호를 찾는 주요단서가 된다. 그런데 사실 이 구절은 '잠언' 6장 4절이 아니라, 6장 5절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본래의 6장 4절의 내용이다(나는 물론 박찬욱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 완전한 실수라고 보지만, 실수에서도 의미를 찾는 것이 호사가들의 몫이 아니겠는가. 또 공교롭게도 그다음 6장 6절부터는 개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은 이 영화의 개미에 대한 비유와 맞물린다는 점이 또 재미있다. 그 이야기는 있다가 하자). '잠언'의 6장 4절은 "네 눈으로 잠들게 하지 말며 눈꺼풀로 감기게 하지 말고"이다. 네 눈으로 잠들게 하지 말고, 눈꺼풀로 감기게 하지 말라는 것, 이는 '죽어서는 안된다'는 말이기도 하며, 동시에 '살 권리'의 다른 말이다. 즉 스스로 구원하라는 이 이야기는 어떤 의미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음을 벗어나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마지막 오대수가 택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결국 정신분열이다. 비밀을 아는 몬스터와 비밀을 모르는 오대수로 나뉜다는 이 마지막은 정신분열의 일종의 비유이며, 그렇게 해서라도 목숨을 유지시키는 것이 낫다는 것이 박찬욱의 복수연작의 두 번째 단계이다(그러므로 사실 마지막 오대수가 몬스터인지 오대수인지를 묻는 것은 주체를 두 번 죽이는 외설적인 질문이다). 복수연작의 첫 단계(<복수는 나의 것>)에서 인물들은 모두 죽었으나, 그 두 번째 단계에서는 비록 정신분열을 스스로 선택했을지언정, 오대수는 살아남았다(즉 박찬욱의 복수 연작에서 가장 양상이 다른 것은 마지막에 결국 주인공들이 처하게 되는 위치이다. 물론 그것을 일종의 발전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해서라도 살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박찬욱의 대답이며,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망상을 부서뜨리지 않고 유지시키는 것이 때로는 삶을 유지시키는 기제가 되고 환자에게 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정신의학의 관점과도 통하는 것이다(그것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박찬욱의 후일의 영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조금 더 자세히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실 정신병이 그렇게 나쁜 것이라고 볼 수만도 없다. 지젝에 따르면 "속임수에 빠지지 않는 유일한 길은 상징적 질서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는 것, 즉 정신병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정신병자란 바로 상징적 질서에 의해 속지않는 주체이다." - <삐딱하게 보기> p.162. 그리고 이는 법과 언어라는 상징적 질서의 길을 애초에 막아놓은 박찬욱의 선택이 그렇게 기만적이거나 가혹하지만은 않다는 이야기도 된다. 상징적 질서들이 벌이는 속임수들은 그에게도 경계의 대상이었고. 그에게는 상징적인 질서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으니까. 그것은 전에 이야기한 동정이나 공감과 같은 것들이고 그것은 사실 상징적 질서와 별다른 관계가 없다. 금자씨는 이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덧.
약간 반농담삼아 이야기하자면, 이 영화 <올드보이>는 동시에 개미형 인간과 거미형 인간의 대결이라고 볼 수도 있다. 사설감옥에서 개미에 대한 환상을 보는 오대수, 그리고 지하철에서 커다란 개미의 환상을 보는 미도가 개미형이라면, 오랫동안 덫을 놓고(15년간이나 이우진은 기다렸다) 먹이가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이우진은 거미형이다. 이는 또한 <복수는 나의 것>과 교묘하게 연결되는데, <복수는 나의 것>에서의 개미형이 류(신하균)라면 거미형은 동진(송강호)이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는 영미(배두나)가 류에게 "개미같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으며, 동진이 딸의 환영, 혹은 실재를 만나게 되는 장면 직전에는 동진 집의 텔레비전에서 거미에 대한 다큐가 방영되고 있다. 물론 그가 전기충격기를 문의 손잡이에 연결시켜 놓고 류의 집에서 자면서 류를 기다리는 장면은 거미의 사냥방식이다. 그렇다면 개미형 인간들이 거미형 인간들과의 대결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의 개미가 아니라 '개미'라는 집단이 되는 것이다. 떼지어 다니는 개미가 얼마나 무서운지는 사실 잘 알고 있지 않은가(개미는 소도 무너뜨린다). 물론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개인은 아니 개미는 사실 자신이 하나의 몸뚱이에서 자라난 두 머리임을 알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가끔 타인이 되어보아야 한다.
 
여담을 하나 붙여두자면, 아주 예전에 어쩌다 이 영화이야기가 나왔고, 누군가가 올드보이에 나온 개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하길래, 농담으로 오대수는 개미형 인간이고, 그것은 주식시장의 개미투자자들을 의미한다고 말해줬다. 영화에 보면 이우진이 아주 돈많은 사람으로 뭘 팔고 어쩌고 하는데, 이 영화는 한 마디로 거대한 기업투자자가 개미투자자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흘리면서 잡아먹는 이야기라고 말이다(실제로 오대수가 영화내내 농락당하지 않는가). 그는 놀랍게도 내 말에 수긍하는 듯한 눈치였는데, 이 자리를 빌어 개드립에 죄송한 마음을 전할 뿐이다(하지만 술자리에서는 누구나 개드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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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저는 죽어야 한다, 타비아니 형제

Ending Credit | 2013. 5. 6. 16:33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타비아니 형제의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세익스피어의 연극 '줄리어스 시저'를 상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타비아니 형제는 조금은 특이한 형태의 구성을 하고 있는데, 영화가 시작하고 관객이 처음 만나는 장면은 연극의 절정을 지나고 마무리 단계에 이른 장면이다. 시저를 암살한 모의에 동참한 브루투스가 안토니우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는 장면 말이다. 그리고 결국 브루투스는 죽고 연극은 관객의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끝나고 배우들은 성공에 기뻐하며, 퇴장한 후 자신의 위치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 때 화면은 흑백으로 전환되고 시간은 6개월 전으로 플래시백 된다. 이 배우들이 '줄리어스 시저'를 처음 시작하던 그 때로 말이다. 그리고 영화는 이 연극의 제작발표에서부터 배우들의 오디션, 그들의 연습과정을 차례대로 짚어가기 시작한다. 영화가 재미있어지는 것은 이 때부터다. 영화가 선택하는 것은 이들의 연습과정을 극의 순서에 맞추어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관객들은 이들의 연습을 보면서, 동시에 이 '줄리어스 시저'라는 연극을 본다. 이들의 연습은 브루투스 일파의 시저 암살모의에서부터, 점쟁이의 시저 운명에 대한 암시, 시저의 암살, 브루투스와 안토니우스의 연설과 같은 순서로 우리들에게 보여지며, 이로써 우리는 이들의 연습을 볼 뿐만이 아니라, 이 '줄리어스 시저'라는 한편의 연극을 이 영화를 통해서 오롯하게 감상한다. 동시에 그것은 그들의 연습과정만을 보여줌으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영화의 중간, 이들이 침대에서 (자신들이 '천장관찰자'라며) 잠을 못 이루며 뒤척이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이 영화를 한편의 '줄리어스 시저'라는 연극으로 생각해본다면 시저의 암살 장면 전에 들어가 있는 장면이다. 즉 이들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실제상황(물론 이는 짜여진 '실제'이다)'을 마치 거사의 실행 직전 불안함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브루투스 일파의 모습처럼 비춰지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공연날 철문이 열리며 관객들이 우루루 들어오는 모습이 브루투스 세력과 안토니우스 세력의 전투 장면의 전초전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나, 무대를 새로 제작하는 동시에 새로운 배우가 이 연극에 투입된다고 하면서 그가 옥타비아누스 역을 맡게 된다고 했을 때 생겨나는 효과들도 마찬가지이다(왜냐하면 '줄리어스 시저'라는 극의 내용에서 옥타비아누스의 등장은 그 자체가 새로운 인물의 등장이면서 동시에 사태의 새로운 국면으로의 전환이기 때문이다).
 
타비아니 형제의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세익스피어의 연극 '줄리어스 시저'를 상연하는 교도소 재소자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이 연극은 동시에 재소자들의 교정교화의 일환으로 상영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들 배우들은 모두 조직폭력, 살인, 마약밀매 등으로 최소 15년에서 40년 이상을 선고받은 중범죄자들이며, 이들이 연습을 벌이고 있는 이 공간은 교도관의 엄중한 감시가 이루어지는 교도소이다. 그러므로 이 연습은 단지 연습으로만 끝나지 않고 그들의 어떤 개인사들과 겹쳐지는데, 예를 들어 한 재소자는 연습을 하다말고 연극의 어떤 소도구로 기억하게 된 자신의 옛일을 생각하느라 연기를 이어가지 못한다. 즉 이들에게 이 연극을 하는 실질적인 중요한 문제는 관객에게 좋은 연극을 보여준다는 것보다도 이 연극에 참여함으로써 자신 내부의 무엇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는가의 여부인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됨으로써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이들이 상연하는 연극이 바로 세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라는 사실일 것이다. 브루투스 일파가 시저를 암살하려고 모의한 이유는 시저가 왕이 되려한다, 즉 자신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세력이 되리라는 이유였기 때문이다. 즉 자유를 찾으려는 이들의 거사가 바로 자유가 없는 교도소 재소자들에 재연된다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이들이 벌이는 연극 '줄리어스 시저'는 단지 역사극이 아니라, 마치 이곳 현재의 이야기처럼 보이며, 이들은 단지 연기로서가 아니라, 마치 실제로 이들 역사적인 인물이 빙의된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브루투스와 안토니우스가 죽은 시저의 시체를 광장에 데려다 놓고 로마 시민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며 선택을 할 것을 요구하는 장면을 보면, 창살에 갇힌 다른 재소자들을 마치 로마시민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자유인가, 아니면 다른 것인가를 묻는 이들의 모습이 마치 현재의 한 장면처럼 보이도록 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들이 중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이들이 오디션을 하는 장면으로 볼 수 있는데, 이들의 오디션은 오랫동안 떨어져야만 하는 가족에게 자신의 신상을 전달해야 하는 상황과 수사기관에서 강요에 의해 자신의 신상을 말해야 하는 상황, 두 가지의 연기를 펼치는 것이다. 즉 이들은 나름의 슬픈 사연을 가진 개별의 인간일 수 있지만, 동시에 범죄를 저지른 인간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 장면은 보여준다.)

타비아니 형제의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세익스피어의 연극 '줄리어스 시저'를 상연하는 교도소 재소자들의 역할을 실제의 재소자들이 맡은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픽션이라기보다는 다큐멘터리에 가깝고(그렇다고 해서 온전한 다큐로만 보기는 힘들다. 이들 중범죄를 저지른 재소자들이 교도소에서 연극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이야기는 영화적으로 재구성된 것이다), 우리의 현실에 보다 가까이 들어온 이야기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영화는 시작부에서, 연극의 마무리와 연극이 끝난 후 이들이 다시 하나하나 수감되는 장면을 보여준 후, 다시 6개월 전으로 돌아가서 이들의 6개월을 한편의 연극으로 보여지도록 한 다음에 연극이 끝나고 이들이 무대에서 내려와 각자의 방에 수감되는 장면이 되풀이되며 끝난다는 점이다. 즉 이 영화에서 두 번 보여지는 것은 이들의 연극이 아니라 이들의 수감이라는 점. 다른 하나는 연극이 끝나고 마지막에 수감된 한 재소자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하는 대사이다. "예술을 알고 났더니 이 작은 방이 이제서야 감옥이 되었구나."


이 두 가지를 보면 타비아니 형제가 결국 우리에게 보여주려던 것은 이들의 연극이 아니라, 이들의 수감이다. 즉 두 번이나 반복하여 보여지는 것이 이 영화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이 영화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시저를 사랑했지만, 시저보다 자유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브루투스의 자결, 즉 자유의 종말이고, 다른 하나는 연극이 끝난 후 각자의 방에 갇히는 이들 재소자들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마지막 재소자의 말로 반복이 된다. 다시 말해서 예술을 알고 났더니 이 작은 방이 드디어 감옥으로 느껴진다는 그 말은 예술이라는 것에 담긴 자유의 본질을 보여준다. 이들은 연극이 마침내 끝났기 때문에 다시 감옥에 갇히는 것일 뿐이지만, 연극을 통해서 브루투스가 되어 자유라는 것을 간절히 외쳤기 때문이기도 하고, 예술 그 자체에서 자유를 맛봤기 때문에 비로소 자신들이 이곳에 갇혀 있음을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즉 타비아니 형제는 이 교도소에서 이루어지는 연습 자체를 하나의 '줄리어스 시저'라는 연극으로 만들어 이 교도소라는 갑갑하고 막힌 공간을 로마의 거리, 로마의 광장으로 확장했지만, 이 마지막에 이르러 연극을 종결시켰고, 로마의 거리와 광장을 다시 교도소로 되돌려 놓았다. 그것에 담긴 의미를 깨달아야만 한다는 것이 브루투스의 자결과 재소자들의 수감을 두 번 반복하는 것에 들어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마지막 메시지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는 연극적인 효과의 일부라고 할 수도 있지만(연극은 관객을 정면으로 향하고 발화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다. 영화에서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는 것은 꽤 특수한 경우이다), 이미 연극은 끝났고, 그들 앞에 남아있는 것은 우리 영화를 보는 관객들 뿐이다. 그러므로 이는 연극의 연습, 실제의 연극, 재소자들의 현실이라는 이 3중의 이야기가 우리 관객들에게 던지는 또 한겹의 메시지가 아닐까. 왜냐하면 우리는 이 '줄리어스 시저'의 결말 이후의 이야기를 알기 때문이다. 브루투스 일파가 시저를 죽였고, 그들은 그들의 희생으로 자유가 다시 돌아오리라 믿었지만, 결국 이루어진 것은 옥타비아누스의 제정이었다. 즉 '줄리어스 시저'에는 공화정을 회복시키기 위해 선택한 것이 결국 황제의 즉위를 불러왔다는 아이러니가 존재하며, 그것은 로마의 시민들이 결국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교도소의 현실이 아니라, 우리 관객들의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시대에도 우리는 여전히 각자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기꺼이 위정자를, 아니 왕을 모시고 있으니까. 또한 우리는 여전히 예술을 모르고 그런 우리들에게도 각자의 작은 방은 각자의 감옥일 뿐이니까.

타비아니 형제의 이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77분의 미니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최소한의 장치로만 이루어진 영화이다(물론 이 영화가 미니멀한 장치로만 전개되는 것은 이 영화의 배경이 교도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교도소라는 곳은 '꼭 필요한 것 외에는 다른 것은 필요없는 곳'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 미니멀한 장치를 가진 이 곳이 거대한 로마의 거리, 광장처럼 보이는 것은 타비아니 형제의 마법이 통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렇게 공간을 확장시켰던 타비아니 형제는 다시 기어이 그것을 좁은 방으로 되돌려놓음으로써 우리 관객들에게 각자의 좁은 방을 생각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다시 이 이야기를 교도소의 담장을 넘어 우리 각자의 현실로까지 재확장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각자의 좁은 방이 각자의 감옥임을 깨닫기 위해서 우리는 예술을 알아야만 하고, 그제서야 우리는 그 제목의 의미를 제대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그 의미를 말이다. 우리의 '시저'는 누구입니까.


덧.   
지난 금요일, 만료를 앞둔 롯데시네마 포인트를 사용하려했지만, 영화를 선택하기가 참 어려웠다. 예를 들어 롯데시네마 건대입구는 특별관 샤롯데와 아르떼관을 포함해 총 12개관이 있지만, 9개관에서는 <아이언맨>이 2개관에서는 <전국노래자랑>이 상영중이었고, 다른 모든 영화는 그 작은 아르떼관에 몰빵되어 있었다. 그렇게 온 국민이 그 철갑덩어리를 보고 싶어하는 것일까? 이런 짓을 저지르면서 무슨 흥행신기록이니 뭐니 하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참 난감하다. 

나는 대신에 일산에서 이 영화 <시저는 죽어야 한다>를 보았는데, 덕분에 좋은 영화도 보고, 일산의 밤거리도 구경하고, 갔다왔다하면서 장시간 독서도 했으니 롯데시네마에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할지... 


- 2013년 5월, 롯데시네마 주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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