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터, 폴 토마스 앤더슨

Ending Credit | 2013. 7. 19. 16:55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전체 줄거리와 결말이 들어있습니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5년만의 신작 <마스터>는 대체로 '어렵다'는 것이 중평인 것 같다. 그 어려움의 이유를 여러가지 많은 것들, 예를 들어 <마스터>라는 이름을 가졌음에도 유달리 마스터 씬이 없는 것 등에서 찾을 수도 있겠지만, 내용상으로 볼 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다. 한 가지는 이 영화가 현혹되지 않아야 하는 대상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의 두 주인공 중의 하나 랭케스터(필립 세이무어 호프만)는 인간의 심리를 연구한다는 '코즈' 연합회의 창시자이자, 그 자신의 소개로는 작가이자 의사이며 핵물리학자이자 이론 철학자이며, 우리가 보기에는 사이비 교주이다. 사실 영화 속에서 쏟아지는 그의 말들을 곰곰이 뜯어보면 그다지 틀린 말은 없다. 우리의 현재의 어떤 두려움, 혹은 심리상태가 과거의 무엇으로부터 연원한 것이며, 그 과거로 돌아가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하여야만 현재를 치유할 수 있으며, 인간은 동물과 다르기 때문에 인간이며, 웃음이 많은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것 등등의 말들 말이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뭐 사이비가 틀린 말들을 해서 사이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이비들일수록 말들은 더 번지르르하고 그럴듯한 법이다. 사이비가 사이비인 것은 그들이 하는 말들과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다르다, 혹은 전혀 반대의 방향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다른 사람에게 과거를 돌아보라고, 혹은 과거로 일순간 돌아갈 것을 주장하는 랭케스터 그 자신의 과거는 이 영화의 다른 누구보다도 미스테리하다. 몇 명의 전부인들이 있었던 것 같고, 어떠한 계기로 일정 정도의 부, 혹은 후원자들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의 사상의 근원에 있는 뿌리를 잡아내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또한 그는 인간을 동물과 애써 구분지으려 애쓰면서도 동물적인 욕망, 예를 들어서 프레디(호아킨 피닉스)가 만들어내는 정체 불명의 술이라든가 성적인 욕망을 버리지 못한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랭케스터가 무엇인가 말들을 쏟아내게 한 다음에 그의 반대되는 씬을 붙임으로써, 예를 들어 그의 프로세싱 이후에 그와 프레디가 프레디가 주조한 술을 같이 나누어 먹는 장면을 연결하거나, 웃음과 듣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연설 이후에 그가 자신의 이론에 대한 의구심 섞인 질문을 받자 화를 벌컥 내는 씬을 붙임으로써 그의 어떤 면모를 우리가 간파할 수 있는 힌트를 준다.

다른 한 가지는 이 영화가 결국 실패의 서사(실패를 보기 위한 서사)라는 점이다. 우리는 사실 대체로 이런 영화에서 어떤 성공의 구조에 익숙해져 있다. 고뇌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주인공이 어떤 '마스터'를 만나고 그의 영향으로 새로운 단계로 성숙하여 나아가는 것, 사실 우리는 그러한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보았던가. 그런데 나는 그런 면에서 이 영화의 이 마지막이 조금은 의심스럽다. 그가 마지막에 무엇인가를 성공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영화의 내내 프레디는 성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 욕망의 끄트머리에 다다르는 것, 그러니까 여자와 섹스를 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시작부에서 프레디는 모래로 만든 여자와 섹스를 하고, 흥분을 못이겨 바다에서 자위를 하고, 모든 이미지에서 성적인 요소만을 찾는 등 거의 섹스중독자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는 정작 그런 성적 욕망을 해소할 기회가 주어짐에도 스스로 거부하는 것 같다. 사진관에서 여자와 성적인 접촉의 기회가 생겼을 때에도, 그리고 랭케스터의 딸이 유혹했을 때에도 그는 그 기회를 스스로 날려버린다. 그리고 그 욕망은 이상한 방식으로 처리된다. 처음의 실패 직후에는 그는 사진관에서 이상한 폭력성을 보여줬고, 두 번째 실패 직후에는 성적인 환상을 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러던 그가 마스터를 떠나온 후 마지막에 여자와의 섹스에 성공하는 것, 예를 들어 이것을 그의 어떤 변화라고 볼 수 있을까?   

그 질문을 생각해 보기 위해서는 시계바늘을 조금 앞으로 돌려야만 한다. 우리가 그의 변화 혹은 성숙을 믿는다면, 그의 성숙의 기점은 그가 바이크를 타고 평원에서 사라진 때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에 그가 과거로 돌아가 보게 되는 것은 비어있는 과거, 혹은 돌아가야 할 대상(도리스)의 부재이며, 그는 그 이후에 다시 랭케스터가 원했던 담배를 손에 들고, 그러니까 그가 원했던 술을 주조해주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페기(에이미 애덤스)가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해줄 수 있느냐라고 묻자 그가 대답하는 것은 고작 사진을 찍어드릴 수 있다는 대답이다. 그러나 물론 알고 있듯이 사진찍기는 일찍이 그가 실패한 것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그는 랭케스터에게 과거의 그 둘의 인연을 들은 후 그곳을 돌아나온다(물론 과거의 이 둘의 인연, 즉 랭케스터가 얘기해 주는 두 사람의 전생은 의미심장하다. 파리 코뮌 중 외부와의 연락도구였던 비둘기, 그 중에서도 랭케스터가 얘기하는 것은 실패한 두 마리의 비둘기이다. 즉 랭케스터는 이들의 실패한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아마도) 여전히 술을 끊지 못한 상태에서 술집에서 여자를 만나고 그녀와 잠자리를 가진다. 물론 여기에서 가장 미심쩍은 것은 그 마지막이다. 프레디가 여자와 섹스를 하면서 벌이는 모습 말이다. 프레디는 바이크를 타고 평원을 달리며 랭케스터를 위시한 이 수상한 단체를 스스로 버린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마지막 그 여자에게 '프로세싱'을 하고 있다. 즉 그는 랭케스터를 흉내내고 있다. 그가 여자에게 말한 '가장 용감한 여자'라는 말은 처음 프로세싱이 끝난 후 랭케스터가 그에게 해준 말이었다. 그는 여전히 마스터를 버리지 못했다. (이는 그러므로 이 두 사람을 일종의 유사 부자관계로 보는 입장에서도 어느정도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다. 모든 아들들은 아버지와 다른 모습이 되고자 하나 결국에는 아버지의 어떤 모습들을 자신도 모르게 흉내내게 된다. 물론 그 중에는 흉내내야만 하는 것들도 있고, 결코 흉내내지 말아야 할 것들도 있다. 조금은 다른 얘기겠지만, 이러한 관점이라면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워지는 것은 어린 새엄마 페기의 위치다.)


물론 프레디만이 랭케스터를 버리지 못한 것은 아니다. 랭케스터 역시 프레디를 버리지 못했다. 일견 프레디와 랭케스터는 매우 다른 것처럼 보인다. 욕망에 따라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본인이 원하는 대로 술을 만들어 먹는 프레디가 동물에 가까운 캐릭터라면, 동물 위에 영혼을 가진 인간이 있다고 설파하는 랭케스터는 그를 길들이는 사육사처럼 보인다. 그들의 어떤 물리적인 운동 양식도 다른데, 창과 벽을 반복하여 오가게 하는 랭케스터의 치료 과정이나 어떠한 지점을 설정해놓고 그곳으로로 달려간 후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바이크를 타는 장면을 보면 랭케스터의 지배적인 물리 운동은 시계추와 같은 반복이다. 그러나 프레디는 다르다. 프레디는 폐소공포증을 가지고 있고, 되돌아가지 않는다. 노래를 불러준 도리스에게 되돌아가지 않았고(뒤늦게서야 돌아갔지만 그녀는 없었고), 역시 마찬가지로 노래를 불러준 랭케스터를 뒤로 하고 그는 떠났다. 물론 가장 상징적인 장면은 그가 바이크를 타고 점이 되어 사라지는 장면이다. 그는 영원히 어딘가를 떠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다름들에도 그들은 또 한편으로 비슷해보이고 서로에게 서로가 매우 필요했던 것처럼 느껴진다. 현실적으로 볼 때 정신적인 두려움과 상처 속에서 정신적인 버팀목으로서 랭케스터가 필요했던 프레디나 열렬한 추종자 및 영적 치유의 증거로서 다른 신도들에게 본보기로 내세울 프레디가 필요했던 랭케스터, 각각의 입장에서도 그렇지만 한편으로 다른 면에서도 그렇다. 예를 들어 그들은 프로세싱을 하면서는 마스터와 추종자의 관계처럼 보이지만, 프로세싱이 끝나면 주조한 술을 나누어 먹는다(그러므로 마치 이것을 즐기기 위해 프로세싱을 했던 것처럼 보인다). 둘이서 나란히 감옥에 갇혔을 때에는 처음 프레디를 분석하려 드는 랭케스터의 모습에서 시작하여 종국에는 두 사람이 거의 비슷하게 설전을 벌인다. 과연 그 두 사람은 달랐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위에서 얘기한 랭케스터를 흉내내는 프레디의 모습도 그 한 단면일 것이고 이는 동시에 그의 실패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폴 토마스 앤더슨은 왜 이 영화를 실패의 서사로 마무리 지으려는 것일까? 그것은 물론 현재의 미국인들이 실패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대로는 앞으로도 실패할 것 같기 때문이다. 다시 시계추처럼 반복하여 보자. 과거로 돌아가 과거의 어떤 부분을 되짚어야만 현재의 어떤 두려움, 상처, 잘못된 행동 등을 치유할 수 있다는 랭케스터의 '프로세싱'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 자체로는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그렇다면 모든 정신분석이 잘못된 것이라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50년대가 막 시작되는 미국으로 돌아가는 이 <마스터>의 이야기도 결국에는 같은 방식의 것이니까. 우리를 과거로 돌려보내놓고, 한 마스터, 혹은 한 사이비 마스터와 그를 추종하는 상처받은 어린 양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현재의 미국인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목소리일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미국,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당시의 미국인들은 상당수 정신적인 공황과 두려움, 근심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것은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아주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어떤 것으로 표출되어, 폐쇄적인 대외정책과 내부의 매카시즘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의 근원에 있는 것이 과연 공산주의와 소비에트 연방이었을까, 혹시 그것은 다른 어떤 더욱 거대한 근심, 마음 깊은 곳에 그 근원이 있는 거대한 무엇인가를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로 쉽게 치환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므로 그것을 쉬운 적으로 치환하지 않고 근원으로 돌아가 치유하는 하나의 방법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다(예를 들어 술에 쩔어 있는 프레디에게 술을 끊으라고만 말하는 것은 술이라는 쉬운 적으로 전선을 몰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프레디가 술을 마시는 것은 물론 술이 너무 좋아서가 아니고, 그 과거에 있는 무엇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과거로 돌아간 프레디가 결국 보게 되는 것은 과거의 부재이고, 과거로 돌아간 미국인들이 보게 된 것은 인디언의 학살이나 흑인에 대한 뿌리깊은 차별과 같은 부재하는 것만도 못한 과거, 혹은 어떤 의미에서는 부재한 과거이다(과거로 돌아간 프레디가 만나게 되는 것은 도리스의 부재이자 동시에 배우의 이름과 같은 '도리스 데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즉 여기에서 한편으로 부재하는 과거는 배우, 그러니까 매끄러운 하나의 이미지로 치환된다. 이미지...예를 들어 과거의 서부극들은 인디언 학살이라는 실제를 어떤 고정된 이미지로 치환하는 데에 얼마나 기여했던가).

예민한 예술가는 과거를 보여줌으로써 예리하게 현재를 생각하게 함은 물론 오지 않은 미래마저 예측하도록 만든다. 2013년 두 편의 근심어린 주인공이 나오는 영화가 있다. 한 편은 이미 지나간 폭풍이자 과거의 근심 <마스터>이고 다른 한 편은 아직 오지 않은 폭풍이자 미래의 근심 <테이크 쉘터>이다. 과거로 돌아가 현재를 치유하려는 방법은 (영화 속에서) 실패했고, 이 실패들은 영화의 모델이 된 싸이언톨로지 같은 형태로 여전히 현재 미국인들의 정신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반면 미래를 봄으로써 현재를 치유하려는 방법은 성공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전혀 올 것 같지 않은 폭풍이 두려워 방공호를 짓는 남자의 이야기, <테이크 쉘터>를 봐야만 할 것 같다.



- 2013년 7월, 스폰지하우스 광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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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박찬욱

Ending Credit | 2013. 7. 10. 00:20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전체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2006년 12월 박찬욱은 복수 연작의 어떤 변주, 혹은 색다른 복수를 보기를 원했던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상당히 이상해 보이는 소품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내놓고 돌아왔다. 기괴한 행동과 말들을 거듭하는 캐릭터와 반질반질하고 아기자기하고 키치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도리어 괴이하게 보였던 정신병원이라는 공간도 그렇지만, 사실 가장 이상해보였던, 그러므로 불친절하게 보였던 것은 그 이야기의 방식이었다. 박찬욱 영화에 으레 있으리라고 기대되었던 충격적인 사건도 없었고, 충격적인 반전도 없을뿐더러, 사실 변변한 '사건'이라고 부를만한 것조차 거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영화에 있는 것은 오로지 이상한 틀니를 끼우고 멍한 눈으로 손끝에서 총알을 발사하는 여자주인공과 이상한 토끼가면을 뒤집어 쓰고 살금살금 걸어다니는 남자주인공과 그들 못지 않게 이상해보이는 행동을 거듭하는 주위의 다른 정신병을 가진 인물들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들 캐릭터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마도 영화의 거의 전부를 이야기하는 것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시작은 그들의 정신병이 왜 촉발되었는지, 특히 여자주인공 영군(임수정)이 왜 스스로를 싸이보그라고 생각하는지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영화는 그녀가 왜 싸이보그라고 생각하는지를 그리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영화의 오프닝에서 이미 스스로를 싸이보그라고 생각하고 있는 영군을 본다(박찬욱 영화의 오프닝이 대체로 멋진 것이 사실이지만, 특히 이 영화의 오프닝은 그 어떤 다른 영화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녀의 정신병(우리가 그것을 '정신병'이라고 부른다면 말이다)의 원인을 대강 추론하여 짐작하는 수밖에 없다. 먼저 한 가지 전제해 두어야 할 것은 많은 정신병자들이 그러하듯이 이 영군도 나름의 확고한 논리의 체계가 있으며 그 체계에 따라 사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군은 영화 내내 밥을 먹기를 거부한다. 그것은 영군이 스스로를 싸이보그라고 생각한다면 당연한 귀결이다. 기계장치를 몸 안에 가진 싸이보그가 밥을 먹을 이유는 없다(그래서 영군은 남들이 밥을 먹을 때 건전지를 입에 대고 충전을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밥을 먹지 않는 것에는 무의식적인 다른 것이 작용했던 것 같다. 그녀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대상이었던 할머니의 존재 말이다. 영군은 자신을 쥐라고 생각하며, 무만 갉아먹었던 할머니가 정신병원에 끌려가며 틀니를 놓고가서 더이상 아무것도 먹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쩌면 영군의 단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닐까. 즉 자신이 틀니를 전달해주지 못해 할머니는 굶고 있는데, 자신만 밥을 먹을 수 없다는 죄책감이 여기에는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표면상으로 이 죄책감을 드러내는 것은 그녀를 더 괴롭게 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자신을 지탱하게 해줄 편리한 하나의 논리체계를 만들어냈다(그것은 자신을 싸이보그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극단적인 경우에 이 죄책감은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갈 수 있다. 그리고 박찬욱은 이미 <올드보이>에서 죽는 것보다는 정신병을 가지고라도 살아남는 것이 더 낫다고 말했다. 즉 그녀에게 '싸이보그라는 망상'은 그녀를 지탱하게 해주는 것이다). 싸이보그는 밥을 먹을 필요가, 아니 밥을 먹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하고 많은 것 중 싸이보그일까. 싸이보그의 특징 중의 하나는 그것의 겉모습과 안이 다르다는 것, 즉 원래의 인간의 내장이 다른 것, 즉 싸이보그의 경우라면 기계장치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몇 가지를 연상시키는데, 예를 들어 그녀가 가장 소중하게 가지고 다니는 할머니의 틀니 같은 것이다. 틀니는 원래 있던 이의 대체품이다. 즉 틀니는 원래 있던 것이 사라지고 기계장치적인 어떤 것이 인간의 신체 일부를 대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망상이 실재를 대체하는 것과 어떤 의미에서는 비슷하다. 그것은 망상이 어떤 의미에서는 (죽지 않고) 그 망상을 가진 존재를 유지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는 면에서도 그렇지만, 그것이 오랜기간 실재를 대체할 경우, 그 실재를 망가뜨린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할머니는 영군에게 충고한다. 틀니를 끼우지 말라고, 왜냐하면 자꾸 끼우면 진짜 이가 망가지니까). 그러나 아무튼 영군은 안을 기계장치라도 좋으니 무엇인가로 채워넣어야만 했다. 그것은 할머니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안이 비어버린 영군의 입장에서도 그렇지만, 일단 무엇인가 안을 채우면 된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어머니의 입장에서도 그렇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아니 이상한 농담은 그녀의 어머니가 순대를 만드는 일을 한다는 점이다. 순대란 돼지의 창자에서 원래 있던 것을 비워내고 당면을 채워넣은 음식이다. 한 마디로 싸이보그와 같은 음식.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는 그저 그녀의 빈 것을 아무 것이라도 좋으니 채워넣기를 바란다. 자신이 싸이보그라고 고백하는 진지한 영군에게 그녀의 어머니는 입에 순대를 밀어넣으며, 그녀가 받아먹자, 그럼 되었다고, 싸이버..인지 뭐인지는 상관이 없으니 먹으니까 되었다고 답한다. 이는 정신병원의 하얀맨(의사)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에게는 사실 영군의 망상이 무엇이든, 즉 그녀가 싸이보그인지 뭐인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녀에게 무엇인가를 강제로 주입하여 그들이 믿는 치료를 행하는 것이다. 그 강제로 주입되는 것들, 예를 들어 그것은 대통령이 누구야, 와 같은 질문들이고, 답을 하지 못하는 영군은 원래 그것을 몰랐다고 답한다. 물론 사실 그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결국 밥을 먹게 만드는 것은 하얀맨들이 아니라 일순(정지훈)이다. 일순의 접근법은 하얀맨들과 다르다. 하얀맨들은 그녀 고유의 망상의 체계를 인정하지 않고 일방적인 주입의 방식을 택했지만(그녀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그의 방식은 그녀의 망상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다. 즉 이 고유의 망상에 음식을 기계적인 에너지로 바꾸는 장치를 몸 속에 집어넣었다는 망상을 추가하는 것, 그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 방식은 멋지게 성공을 거둔다(이 일순의 수술(?) 장면은 평론가 김혜리 씨가 박찬욱 영화들의 가장 로맨틱한 장면으로 꼽기도 했다. 사실 나는 이 두 배우를 모두 좋아하지 않지만, 그녀의 말에는 적극 동의한다. 일순은 이 수술로 영군을 치료한 것만이 아니었다. 그 역시 어머니가 남기고 간 물건을 그녀 안에 심음으로서 그것에 대한 고착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럼 일순에게는 이러한 발상의 전환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 그것의 단초는 일순이라는 캐릭터의 어떤 특성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의 정신병적인 부분이란 무엇인가를 다른 사람에게서 훔치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그가 훔치는 것이 어떤 '물질적인 물건'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한 환자에게는 탁구를 치는 능력을 훔치기도 하고, 다른 환자에게는 타인에게 매우 미안해하는 마음을 훔치기도 하며, 영군에게는 그녀의 부탁으로 동정심을 훔치기도 한다. 즉 조금 더 명확하게 표현한다면, 그의 정신병이란 무엇을 훔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어떤 특성을 그대로 복사하는 것이라고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해서 그의 정신병이란 '타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우리는 한 가지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타인이 되어 보는 것, 그것은 그의 전작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주인공들이 갖추지 못한 것이었다. 동진(송강호)은 영화 속에서 결코 타인이 되어 본 적이 없었고, 그러므로 어떠한 동정심도 갖추지 못했으며, 그 댓가로 배에 칼이 꽂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이 동진을 살릴 수도 있었던 동정심, 이것은 일순에게는 이미 갖춰져 있다. 그것은 그가 타인의 입장이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영화 속에서 영군이 밥을 먹지 못할 때, 그녀가 독방에 홀로 갇혀있을 때 누구보다도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하고, 그녀를 돕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나선다. 그런 캐릭터는 일찍이 박찬욱의 영화에서 존재하지 않은 캐릭터였다. 그것은 한편으로 영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영화 속에서 영군은 반복되는 메시지를 듣는다(물론 이것은 그녀가 그전에 듣던 라디오에서 혹은 공장의 기계적인 지시음에서 유래한 망상이다). 동정하지 않기, 망설이지 않기, 쓸데없는 것을 생각하지 않기, 슬퍼하지 않기 등등의 메시지를 말이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이 중의 으뜸은 동정하지 않기라고 이야기해준다. 즉 이것은 일종의 그녀가 만들어낸 스스로의 금기이다. 그런데 역으로 생각해보면 어떤 것이 지금부터 금기된다는 것은, 그것이 이미 이전에 충분히 이루어졌다는 의미이다. 즉 그녀가 스스로에게 그것을 금하는 것은, 그녀가 망설이고, 쓸데없는 것을 생각하고, 슬퍼하고, 무엇보다도 동정하는 캐릭터임을 말해준다. 즉 영군 역시 일순 못지 않게 동정심을 갖추고 있다. 다른 모든 가족은 할머니를 어딘가로 치워버려야 하는 존재로만 생각했지만, 그 할머니를 진심으로 동정하고 할머니의 입장에서 생각하려 노력한 것은 영군 뿐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생각해보면 복수 연작들과 동떨어져 보였던, 그래서 상당히 기괴한 소품으로만 보였던 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사실 이 복수 연작의 거울 선상에 위치한 것을 알 수 있다. 복수 연작에서 수많은 인물들은 미치지 않은 상태에서 점점 미쳐갔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미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 중의 상당수는 이미 미쳐 있었고,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와 반대로 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영군과 일순은 미쳐 있었지만, 다시 미치지 않은 상태로 돌아오는 것처럼 보이거나, 사실은 처음부터 미치지 않았던 것처럼도 보인다. 그것은 그들이 복수 연작의 어떤 인물도 갖추지 못한(금자씨는 미약하게나마 갖추게 되었지만), 동정을 가진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한편으로 보면 그것은 영군과 일순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의 다른 주변 인물들 역시 동정심을 갖추게 된 것처럼도 보인다. 영화의 끄트머리에 다다라, 영군이 억지로 밥을 먹는 장면을 보면 식당의 모든 환자들은 영군의 동작을 그대로 따라하며, 그녀가 밥을 먹기를 응원한다. 어떠한 하얀맨도 없이 이루어지는 이 장면에서 모든 정신병자들은 이미 타인이 되어가는 첫걸음을 내딛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을 '정신병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좁은 의미로 보면 '싸이보그지만 (먹어도) 괜찮아'라는 것이지만, 사실은 '싸이코지만 괜찮아'이다. 비록 그들은 싸이코지만 괜찮다. 그것은 '그들의 그 미쳐 있는 상태'가 그들에게 크게 안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약간은 좁은 의미에서도 그러하지만(즉 그들은 '미치는' 상태가 아니라, '미친' 상태이며 이는 망상을 가지고서도 그것이 그들의 삶의 유지에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점을 의미한다), 보다 넓은 의미로 보면 그들이 도리어 '정상'이라고 말해지는 사람들보다 낫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싸이코지만 (싸이코가 아닌 자들보다) 괜찮아'이다. 그러므로 영군의 할머니는 영군의 환상 속에서 나타나, 그녀가 10만 볼트의 충전을 하여 핵폭탄이 되기를 원한다. 물론 그 핵폭탄은 동정의 파편들을 세상 천지에 넓게 퍼뜨리는 핵폭탄일 것이다. 박찬욱은 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라는 이상한 우화를 통해 우리가 걸러낸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지켜보기를 원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이것은 미완의 해결이다. 남들보다 유난히 뛰어난 동정심을 가진 이들이 이미 이야기를 정신병원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즉 이 사회는 '남들보다 뛰어난 동정심'을 원치 않는다. 사회는 여전히 등가교환과 그에 따른 대체로 이루어져 있다. 영군이 처음 싸이보그라는 망상을 가지게 된 것에는 위에서 이야기한 것 외에도 그녀를 단지 하나의 싸이보그로밖에 여기지 않는, 그녀가 처음 일했던 공장의 시스템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줄지어 늘어선 여공들이 같이 동작을 되풀이하는 이 처음의 장면에서 영군은 그 공장의 거대한 부속물이고, 영군이 빠지게 된 자리는 아마 다른 부속물, 다른 여공이 대체했을 것이다. 물론 그녀가 자신의 몸이 기계로 대체되었다고 믿는 것에는 이러한 공장에서 얻게 된 것들도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 지나친 동정심은 등가교환을 무너뜨린다. 일순이 말한 평생보장 AS는 이 사회에 없다. 즉 어떠한 관점에서는 동정심은 등가교환하는 자본주의적인 원칙을 어지럽히는 일종의 바이러스이며, 그런 측면에서 바이러스는 하얀맨들에 의해 치유되어야 하는 것이며, 이 바이러스의 보균자들은 정신병원에 들어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 또다른 바이러스가 있다. 아니 어쩌면 두 가지의 바이러스'들'이 있다. 박찬욱의 복수 연작들에서 복수는 돌고 돈다. 즉 복수는 교환되고, 그 교환의 고리를 끊지 않는 한, 그들에게 영혼의 구원이란 없다. 그 고리를 어떻게 끊어낼 수 있을까. 우화로 숨고르기를 한 박찬욱은 그 등가교환과 대체의 지독한 고리를 끊기 위한 하나의 가능성을 이 바이러스들의 탐구를 통해 보여주려고 시도한다. 영화 <박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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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야구

Ending Credit | 2013. 7. 2. 18:12 | Posted by 맥거핀.


(<마리 크뢰이어>와 <월드워 Z>의 스포가 될만한 내용이 있습니다.)


최근에 평론가 정성일씨는 트위터에 프랑스 평론가 도미니크 파이니의 글을 인용하여 "이상하게도 영화를 보는 감각이란 한번 잃어버리면 되찾기가 몹시 힘들다."라고 남겼다. 뭐 사실 이를 흔한 영화평론가의 흔한 '영화부심'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영화를 조금 더 진지한 마음으로 보고 싶다면 일종의 훈련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훈련이라고 해서 거창한 것을 연상할 필요는 없다. 그저 내가 말하고 싶은 훈련이란, 좋은 영화들을 꾸준히 보는 것이다. 어떤 영화들이 나쁜 이유는 어떤 나쁜 생각이나 사상을 담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생각을 정지시키기 때문이다. 두 시간 동안 눈을 스쳐 지나갔다가 머리 속에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 어떤 영화들은 보는 사람들을 거의 두 시간 동안 죽이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주 오랫동안 어떤 이들에게는 '아무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영화의 미덕이라고 칭송되기도 했다. 그러니까 두 시간 동안 기꺼이 죽어있겠노라 선언하는 셈이다.) 또한 동시에 영화는 두 시간 남짓되는 제한된 시간동안 이루어지는, 시간의 제약을 가지고 있는 예술이다. 그 짧은 시간을 집중하는 것은 단지 집중력의 문제가 아니라, 일종의 루틴의 결과물이다. 꾸준히 좋은 영화를 보게 되면 집중의 산물이 아닌 일종의 루틴이 자신 속에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아마도 일종의 '(자신만의) 영화를 보는 감각'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내 자신의) '영화를 보는 감각'이란 것을 점점 잃어버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그것은 분명히 좋은 영화를 보지 못한 탓이다. 올해의 상반기에 좋은 영화로 꼽히는 영화들, 예를 들어서 <코스모폴리스>, <홀리모터스>, <장고>, <테이크쉘터>, <스타트렉다크니스>, <우리에게 교황이 있다>, <문라이즈킹덤>, <링컨> 등등의 어느 영화도 보지 못했다. 아니 여기 언급되지 않은 어떤 영화들도 좋았던 것 같기는 한데, 도대체 그것이 좋은 영화였는지 확신을 할 수가 없다. (그러니 타인의 리스트만 늘어놓는 볼썽사나운 꼴을 보이게 된다.) 그러므로 내가 좋은 영화들을 보았는지 알 수가 없다. 다 감각이 무뎌진 탓이다. 그저 지나간 몇 편의 영화들에 대한 잡설을 늘어놓는 것이 그 감각을 끌어올리는 데 도움이 될까? (이 두 가지의 영화가 짧은 리뷰의 대상인 것은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저 가장 최근에 본 두 편일 뿐이다.) 



<마리 크뢰이어>, 빌 어거스트, 2012

야구에는 '우완정통파에 대한 로망' 같은 것이 있다. 150km를 넘나드는 강속구를 자유자재로 제구하는 오른손 투수에 대한 선망. 그러나 물론 이들이 로망의 대상인 것은, 이런 친구들이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빠른 볼을 던지기는 하나 제구가 안되는 투수들은 비일비재하고, 결국 투수코치는 최후의 카드를 꺼내든다. "구속을 좀 떨어뜨려서 제구를 잡자!" 그러나 여기에는 실패의 가능성이 늘 도사리고 있다. 다이조부 박사는 현실에 없다. 구속은 현저하게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제구는 들쑥날쑥하고 빠른 볼을 던지던 미완의 대기는 그저그런 패전처리 투수가 된다. 물론 다른 방법도 있다. 타자를 현혹시키는 키킹 동작을 추가한다, 볼을 끝까지 숨겨나오도록 투구폼을 교정한다, 특정의 변화구를 장착한다, 구속을 조절하는 방법을 습득한다, 타자의 리듬을 빼앗는 불규칙한 인터벌 조절법을 습득한다 등등의 다양한 방법들 말이다. 아니면 아예 극단적으로 쓰리쿼터나 언더스로로 폼을 바꿔버릴 수도 있다(심지어 어린투수의 경우에는 우완에서 좌완으로 전환시킬 수도 있다). 즉 이들은 어느 틈에 기교파 투수가 된다. 우완정통파와 좌완기교파. 즉 어릴 때부터 기교파가 목적인 투수는 (거의) 없다. 누구나 160km를 던지는 정통파가 되고 싶지만, 그것의 길은 멀고, 대신에 살아남기 위해 여러 다른 기교를 배운다. 즉 수많은 기술들은 살아남기 위한 산물이다.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렇다고 우완정통파는 기술 없이 던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적당한 키킹으로 머리 위에서 손을 내리꽂아 빠른 속도로 공을 던지는 우완정통파의 투구폼 역시 야구의 역사에서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단 1km의 속도를 더 내기 위해서 그간 연구된 수많은 방법들이 이 우완정통파 투수의 강속구에 녹아들어가 있다. 즉 이는 기본기지만, 이 기본기 역시도 수많은 기술들의 집약체이다.

별 쓰잘데기 없는 야구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은 것은 <정복자 펠레> 등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이 감독 빌 어거스트가 우완정통파 투수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유명한 <정복자 펠레> 등의 영화에서도 그러하지만, 그의 영화에는 별다른 기교가 없다. 영화는 시작하면서 한 장례식장에서 아기를 안고 서 있는 한 미망인의 모습을 비춘다. 아기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버린걸까? 영화는 별다른 설명없이 시계바늘을 돌려 그녀의 아주 오랜 옛날로 돌아간다. 그리고 우직하게, 별다른 카메라워킹도 없이 이야기를 천천히 이끌어 나간다. 그리고 이 순탄하지 않은 마리 크뢰이어의 삶을 조용히 따라가며 수많은 분기점들에서 그녀의 선택들을 지켜본다. 그러므로 사실 이 영화의 가장 위험한 부분은 마지막에 있다. 관객이 "나는 이 여인의 삶을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이 여인의 선택들, 혹은 그녀가 처하게 된 마지막을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다."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영화로서 끝난 것이다. 단지 그저 두 시간 동안 '화성인 바이러스'를 본 것이다. (당신이 그것을 보는 동안 그들의 삶의 방식을 이해해서 보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단지 당신은 동물원 우리 속의 동물로서 그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그녀의 삶이 이해되는 부분이 있다면, 그녀의 어떠한 선택들이 가능한 선택의 범위 속에 들어있음을 이해한다면, 우리가 비록 그런 삶이 아닐지라도 우리에게는 조금이나마 얻게 되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즉 구속을 1km라도 끌어올리기 위해서 빌 어거스트는 몇 가지 전통적인 장치를 효과적으로 구성한다. 예를 들어 복선의 장면들이 그것이다. (복선은 물론 가장 효과적인 서사전략 중에 하나다. 그러나 요즘의 어떤 영화들은 관객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복선을 의도적으로 생략한 후에 어떤 장면을 던져버리고, 어리둥절해진 관객들은 인터넷에 "그런데 그 장면의 의미가 뭐죠?"라고 질문을 올린다.)  예를 들어 마지막 딸 빕스의 선택이 이해가 되는 것은 우리가 이미 그 전에 어머니가 대체된 풍경을 보았기 때문이다. 마리 크뢰이어가 다시 집으로 돌아갔을 때 카메라는 마리 크뢰이어의 등 뒤에서 집의 모습을 비춘다. 집은 평안하고, 어머니는 집안을 완벽히 통제하고 있으며, 한때 어머니였던 마리 크뢰이어는 손님의 위치가 되어 집안을 조심스레 살핀다. 아니면 다음의 장면. 영화의 시작부, 아버지의 어떤 행동들을 두려워하는 딸 빕스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들을 예감하게 됨은 물론, 지금까지 반복된 수많은 일들, 그리고 그것에서 딸과 마리가 감내야하여야만 했던 일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나중에 마리 크뢰이어의 선택을 지지할 수 있는, 혹은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복선의 구실을 한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 휴고의 처음 등장과 <안나 카레니나>에서 브론스키의 처음 등장을 비교해보면 어떨까.) 즉 차곡차곡 쌓여진 장면들은 구속을 조금씩 끌어올려 기어코 당신이 삼진을 당하게 만든다. 그래서 당신은 덕아웃으로, 아니 집으로 돌아가며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무게중심은 마리 크뢰이어에서 어느새 빕스 크뢰이어로 옮아간다. 그러므로 영화를 다시 다르게 보는 하나의 방법은 마리 크뢰이어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빕스 크뢰이어의 관점에서 영화를 다시 보는 것이다. 마지막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 빕스의 모습을 보며 마리의 남은 삶보다는 빕스의 남은 삶이 궁금해지는 것은 아마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정복자 펠레>의 마지막이 오버랩되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감독의 삶을 혹은 사회를 바라보는 자세이기도 할 것이니까. 삶은 그렇게 세대에서 세대로 조금씩 나아간다.



<월드워 Z>, 마크 포스터, 2013

마크 포스터는 적어도 액션 장면들에서 긴박함을 끌어낼 줄 안다. 이 영화는 액션들의 백과사전과 같다. 좁은 공간에서의 폐쇄적 액션, 거대한 군중들의 동시다발적 액션, 도로의 카체이싱, 비행기 안에서의 액션, 무소음 액션, 밀폐된 공간에서의 일대일 대결 등등 여러 다양한 곳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거의 모든 액션들이 이 영화에는 총망라되어 있으며, 마크 포스터는 각각의 장면들에서 적당한 컷과 편집과 리듬으로 각 장면들의 긴박함을 살려낸다. 그리고 액션들 사이에 중간중간 적절한 휴식처를 관객들에게 제공하고, 관객들에게 숨을 돌릴 틈을 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즉 다시 야구로 말하면 그는 매우 다양한 기교를 갖추고 있다. 인터벌 조절도 능하고, 이중키킹을 구사하며, 공을 끝까지 손에서 숨기면서 릴리스한다. 그런데 참 이상한 건, 그가 끝끝내 나를 삼진으로 돌려세우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여전히 용큐놀이를 하고 있다. 물론 안타를 쳐내지 못하는 용큐놀이란 투수만 피곤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놀이를 하는 당사자도 피곤하게 한다. 그래서 결국에는 에라 모르겠다,하고 나는 배트를 휘둘러 버린다. 영화로 돌아와서 말하자면, 나는 결국 이 제리(브래드 피트)가 죽든지 말든지 별로 상관이 없어진다. 다시 말해서, 나는 그의 남은 삶이 전혀 궁금해지지 않게 되었다.

이 영화에서 보고자 하는 것은 좀비의 어떤 바이러스적, 혹은 박테리아적 속성이다. 즉 이 영화에서 말하는 좀비는 어떤 주술이나 신비한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이고 과학적인 방식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만약 좀비에 물렸더라도, 그 부분을 도려내는 등의 빠른 처치가 이루어진다면, 좀비가 되는 것을 면할 수 있다.) 그러니까 좀비 바이러스는 아주 파괴적이고, 전염속도가 엄청나게 빠른 감기 바이러스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이 영화를 스티븐 소더버그의 감기 재난 영화 <컨테이젼>과도 비교할 수 있다. 두 영화 모두 어떻게 보면 비슷한 시작을 보여준다. 끊임없이 중첩되는 뉴스 리포트들로 시작했던 <월드워 Z>와 비슷하게 <컨테이젼>은 바이러스가 처음 전파되는 과정을 다큐멘터리를 찍듯이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영화들은 점점 분기되어 나아가기 시작한다. 끝까지 다큐멘터리 혹은 뉴스 프로그램의 기조를 유지하는 <컨테이젼>과 다르게 이상하게도 <월드워 Z>는 농담을 하기로 마음먹고, 그 농담을 점점 강화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중간에 끼어있는 예루살렘과 북한에 대한 농담, 혹은 마지막에 들어있는 그 WHO에서의 액션 같은 것 말이다. 좀비 바이러스가 온 몸에 퍼진 상태에서 연구동을 유령처럼 떠도는, 한때 전세계의 건강과 보건을 위해서 분투했을 그들의 기괴한 액션(어떤 블로거 분은 이를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라고 탁월한 설명을 해주셨다)을 선사하는 것이 농담이 아니라 할 수 있는가? (그러니까 아마도 이 제목 <월드워 Z>의 Z는 좀비의 Z이면서 동시에 가장 가능성 없는 것으로서의 Z일지도 모른다. 즉 현실성의 정도를 A에서 Z까지 나눈다면, '월드워 A'는 소더버그 식의 이야기, 그리고 '월드워 Z'는 이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문제는 영화의 안쪽이 아니라, 영화의 바깥쪽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즉 단지 농담을 하기 위해서  이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본다는 것에 담겨진 의미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예매 전쟁을 뚫고 표를 힘들게 구한다음 주말저녁 힘들게 차를 타고 나가서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용케 자리를 찾아서 앉아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두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견뎌낸 대가가 고작 농담이라고 말해질 때의 그 어떤 허탈감 말이다. 농담에 진지하게 반응하는 것이 가장 바보같은 것이라는 점은 고금불변의 진리지만, 그 농담이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보는 댓가라면 우리는 그 농담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을 왜 보는지 자문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물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아이고, 왠 오바질이야, 진짜 죽은 거 아니잖아요, 그거 다 아주 잘 만들어진 가짜 죽음이잖아요.

사실 문제는 그 '가짜 죽음'이다. 영화 기술이 발달하면서 특히 발달한 부분 중에 하나는 죽음의 묘사이다. 요즘의 눈으로 옛날 영화를 본다면 가장 눈에 띄는 어색함은 누군가가 죽을 때이고, 그것은 그 죽음을 묘사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미비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올수록 죽음의 묘사는 점점 정밀해지고, 그것은 마치 실제의 죽음처럼 보인다. 과거의 영화가 카메라 눈속임으로 배에 칼이 꽂히는 장면을 묘사했다면, 컴퓨터 그래픽의 발전으로 배에 칼이 쑥 들어가는 장면을 클로즈업하여 자연스럽게 슬로우로 보여줄 수도 있다. 즉 죽음은 거의 진짜와 같아졌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관객의 인식이다. 그것이 너무 정밀해지다 보니 그 죽음들은 거의 농담처럼 관객들에게 받아들여진다. 우리는 거의 실물과 같은 죽음을 보고도 그것이 진짜 죽음이 아님을 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을, 혹은 거대한 대규모의 죽음을 영화관에서 보면서도 웃고 있다. 그것이 가짜임을, 혹은 거대한 농담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론 예전의 영화들에서 이상하게 진화한 것이기도 하다. 과거의 어떤 죽음들은 기술적으로 어설펐지만, 우리는 그것이 죽음이라고 암묵적으로 동의했다(동의하지 않으면, 그 죽음들이 너무 어설프게 묘사되었기 때문에 '영화보기'라는 행위 자체가 이어질 수 없었다). 즉 우리는 그것을 눈에서 가짜라고 받아들였지만, 머리 속에서는 진짜라고 인식했다. 이제는 그 반대가 되었다. 눈에서는 진짜라고 인식하지만, 우리는 머리 속에서 그것을 가짜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나는 이게 도통 좋은건지 모르겠다. 



- 2013년 6월 CGV 압구정, 메가박스 코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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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3.07.03 21: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영화를 꾸준히 보다보면 어떤 "루틴의 결과물"들이 우리안에 쌓이게 된다는 말이 다가오는데요. 다만 그런 영화들을 일일히 찾아 볼 여력이 점점 없어지는것 같아서요.. 올 상반기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를 꼽는다면 라이프오브파이,안나카레니나 그리고 비포 미드나잇이 될거예요. 최근에 본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배우들이 선전했지만 결과적으로 지루한 영화였어요. 사실 베를린도 전 좀 그랬습니다.

    * <마리 크뢰이어> 보고싶어요. 몰랐었는데 검색해보니 빌 어거스트 영화를 절반 이상봤더라구요 ㅎㅎ

  2.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3.07.03 21: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야구 이야기가 나와서 한마디. 지난번 트윗에 엘지팬이라고 하셨던것 같은데 올해 야구 볼 맛 나시죠? ㅋㅋ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3.07.04 17: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좋은 책을 보면 볼수록 좋은 책을 고르는 요령도, 내용에 대한 이해도 풍성해지듯이 영화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책은 반드시, 읽으려면 책을 펼쳐들고 자신의 의지를 들여야 하지만, 영화는 한 번 보기 시작하면 그냥 원치 않아도 자신의 눈앞에서 계속 이어지잖아요. 그러니, 어떤 루틴을 만들어놓지 않으면 좋은 영화라도 그저 놓쳐버리기 십상이지요.

      저도 안나카레니나, 레미제라블 같은 것들이 좋았어요. 라이프오브파이는 반신반의, 비포미드나잇은 좀 별로...이 정도? ㅋ 은밀하게 위대하게 같은 컨셉으로 여자배우들로 만들면 볼지도...;; <마리 크뢰이어> 좋아요. 내려가기 전에 한 번 보세요.

      엘지팬들은 겉에는 좋을지 몰라도 속에는 다들 약간은 불안할껄요. 그래도 즐길 수 있을 때 즐겨둬야지요. 야구든 뭐든.

친절한 금자씨, 박찬욱

Ending Credit | 2013. 5. 27. 16:35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전체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여섯 번째 장편이자, 복수 연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친절한 금자씨>는 중간에 한 번 영화가 탈바꿈을 한다. 엄밀한 용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나는 그것을 톤(tone)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 중간의 기점은 금자(이영애)가 백선생(최민식)이 가지고 있던 다른 아이들의 상징물들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이 때부터 상당히 비현실적이고, 뭔가 초현실주의적인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던 이 영화는 급속하게 지상으로 내려와 관객들에게 달라붙는다. 그것은 한편으로 이 영화의 중간까지의 분위기의 형성에 큰 몫을 담당하던 나레이션(내용상으로 볼 때 이 나레이션은 금자의 딸 제니가 후일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이다. 목소리는 라디오 '밤의 플랫폼' 등으로 익히 알려진 성우 김세원 씨가 맡고 있다)이 이 중간을 기점으로 거의 등장하지 않는 것에도 이유가 있다(이 중간 이후로 등장하지 않던 나레이션은 마지막에 단 한 번 등장한다). 물론 내용상으로 볼 때도 이 중간부터 이야기는 다른 양상을 띤다. 전반부까지는 금자가 복수를 위해서 세력을 규합하는 과정이다. 무엇인가 상당히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공간(물론 이는 여성교도소라는 우리가 전혀 모르는 공간이 주무대인 점에도 이유가 있다)에서 비현실적인 사건들이 비현실적인 톤으로(예를 들어 기도하는 금자의 등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장면 같은 것) 이루어진다. 그런데 금자가 거의 복수에 성공하고 그것을 완결지으려 할 즈음에 금자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죽은 아이가 원모 한 명이 아니었던 것. 그리고 이 때부터 이른바 '집단의 복수'가 등장하고, 문제의 학교에서의 씬이 이어진다. 그리고 박찬욱이 여러 인터뷰에서 밝혔듯, 그가 진정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이 후반부의 학교에서의 일들이었던 것 같다.

다른 이야기에 앞서서 먼저 몇 가지의 자잘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영화는 박찬욱의 미장센 구성 능력과 형식적인 시도들을 많이 볼 수 있는 영화이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는 박찬욱이 특히 <스토커>에서 쉴새없이 보여줬던 평행편집의 원형과 같은 것들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대화를 섞어서 새로운 제3의 대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나, 대비되는 두 사건을 교묘하게 엮어서 독자의 이해의 쾌락을 증폭시키는 것 등이 그런 것이다. 이는 예를 들어 금자와 백선생이 다른 인물(목사(김병옥)와 박이정(이승신))들을 이용하여 서로를 추적하는 장면이나 영화의 중간 금자 사건의 담당 형사가 빵집에서 금자를 대면하는 장면 등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이 빵집에서의 씬에서 금자와 같이 일하는 근식과 금자의 대화, 그리고 형사와 형사 아내의 대화를 동일 선상에 놓음으로써 간단하게 금자와 형사를 동일 선상에 위치시킨다. 즉 금자의 사건에서 금자가 가지게 되는 죄의식의 어떤 부분을 형사도 공유하고 있음을(왜냐하면 그도 결국 당시에는 진범을 잡아내지 못했고 금자를 범인으로 만들었으니까, 그래서 그는 나중에 학교에서 금자를 돕게 되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이 장면에서 도리어 주목하여야 할 것은 대화보다도 어둡고 축축해보이는 긴 지하도를 통과하는 형사와 그의 아내의 모습이다) 관객에게 보여주면서 동시에 다른 미묘한 것들도 살짝 암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형사의 아내는 금자가 만든 케이크를 내던지며 "이걸 어떻게 먹어!"라고 형사에게 소리치는데, 이 대사가 (근식에게) 예전에 아이를 살해했다고 말하면서, "걱정 마. 먹지는 않았으니까."라고 덧붙이는 금자의 대사 뒤에 붙음으로서 '먹는다'라는 표현이 말하는 미묘한 뉘앙스가 관객에게 전달되도록 하고 있다(그리고 이 장면 뒤에 금자와 근식이 관계를 맺는 장면이 붙는데, 이는 '먹는다'라는 대사와 맞물려 여러 가지 것들을 생각해보도록 한다. 예를 들어 금자와 근식의 관계, 혹은 형사와 금자의 관계, 백선생과 금자의 관계 같은 것들을 말이다. 이것은 또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이후 금자의 딸 제니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이 장면에서 처음으로 '금자의 죄'라고 할만한 것이 나온다. 그런데 사실 영화를 보다보면 이 금자의 죄라는 것이 명확하지가 않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금자는 아마 아이를 꾀어냈을 뿐, 범죄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여기에서 복수의 구조는 성립한다. 금자는 죄를 짓지 않았지만, 백선생의 죄를 대신 뒤집어썼고, 그 결과 감옥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이는 세상의 죄일 뿐, 사실 어떤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속죄'와 같은 것으로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녀가 결코 죄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그녀도 어떤 의미에서 보면 피해자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전반부까지 금자가 준비하는 복수는 철저히 그녀만의 것이고, 형식상으로는 원모의 원한을 갚는다는 식의 형태를 띠었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복수(그렇지만 어딘지 모르게 미심쩍은)에 가깝다. 즉 원모의 부모에게 속죄하고, 죽은 아이를 대신하여 백선생을 처단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녀의 일종의 퍼포먼스이고, 이는 한편으로 이 복수를 어떤 가벼운 놀이극처럼 보이게 한다. 다시 말해서 그녀는 '친절하다'. 그녀가 친절한 것은 자신들의 복수를 대신해주기 때문이다. 그녀가 교도소에서 '친절한 금자씨'라는 별명을 가지게 된 것은 말 그대로 친절하기도 했지만, 공공의 적 마녀를 쓰러뜨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녀는 그럼으로써 타인의 신뢰를 얻지만, 동시에 마녀의 지위를 물려받기도 했다. 즉 그녀는 친절하지만, 이 친절함은 왠지 가면과 같은 인상을 준다. 그리고 그녀는 감옥에서 나와 그 가면을 벗어던지고,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변했다'는 말을 듣는다.

이 '변했다'는 것은 일종의 복선이다. 왜냐하면 금자는 실제로 변했으니까 말이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다른 사람의 복수를 대신해서 처리했던 금자가, 그래서 심지어는 자신의 복수마저도 일종의 놀이극처럼 보이게 만들었던(영화의 전반부까지) 금자가, 정작 그 자신의 복수는 다른 사람들의 손에 넘겨버린다는 사실이다. 즉 이 마지막의 학교에서 금자는 이 복수에서 살짝 '비껴서' 있다(그녀는 결국 죽은 백선생의 시체에 총알을 날렸을 뿐이다). 이를 이렇게 이야기해보자. <복수는 나의 것>에서 이야기한 것은 하나의 복수가 아니라 돌고도는 복수의 연쇄이다. 복수는 또다른 복수를 낳고, 복수를 행한 당사자는 다음 번의 다른 복수에 의해 쓰러진다. <올드보이>에서 이야기한 것은 복수보다 중요한 것은 결국 살고자 하는 노력, 혹은 스스로를 구원해야 한다는 믿음이다. 즉 복수는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해하는 것이며, 복수의 촘촘한 그물망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오로지 스스로의 노력 뿐임을 말한다. 이것은 <친절한 금자씨>에 이르러 하나로 합쳐진다. 복수, 즉 처벌은 결국 자신을 해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무조건적으로 처벌을 그만둘 수도 없다. 왜냐하면 백선생과 같은 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백선생은 일종의 맥락을 알 수 없는 악이다. 이것에는 어떤 윤리적인 의미나 개인적인 원한 같은 것이 없다. 백선생은 안이 텅 비어있는 입출력기계, 어떤 신호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기계와 같다(예를 들어 그가 밥을 먹다가 박이정과 거의 강간에 가까운 성행위를 하는 장면을 보면, 그의 입력(먹는 것)과 배출(로서의 성행위)은 거의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최민식은 흥미롭게도 <악마를 보았다>에서 이런 캐릭터를 한 번 더 연기하기는 했다). 그것이 자본주의적인 욕망과 연관되어 있으며(그는 요트를 사기 위해 아이들을 죽였다고 했다), 또한 예전에 말한 '좋은 유괴와 나쁜 유괴의 논리'와 연결되어 있음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백선생과 같이 (현대 자본주의의 병리적인 현상으로서의) 맥락을 알 수 없는 악에 맞서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이 영화에서와 같은 대리 처벌이다. 스스로를 구원하면서도 필요한 복수를 행하는 것, 그것이 대리 처벌이며, 그것은 한편으로 이 사회가 구현하는 방식이다. 결국 생각해 보면, 이 영화에서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집단적인 처벌은 사회적인, 우리 사회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처벌이다. 물론 그것은 완전히 같지는 않다. 그것의 실행과 집행은 공권력이라는 이름 하에 우리의 손을 떠나 다른 사람의 손을 빌어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맥락과 실행으로 볼 때 <친절한 금자씨>에서 '돌아가면서 칼로 찌르기'나 우리 사회에서 '재판을 통해서 사람을 목을 매다는 것'이 거의 동일한 것처럼 보이며, 실제로도 그렇게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복도의 긴 의자에 우비를 입고, 비닐장갑을 끼고, 손에 단도를 들고 어떻게 하면 손이 다치지 않고 잘 찌를 수 있는지에 대해 강의를 듣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내가 떠올린 낱말은 '신산스러움'이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에 내재된 그 '신산스러움' 말이다. 우리 사회의 재판과 형의 집행은 그것을 조금 더 간편하게 만들어놓은 것이다. 즉 복도의 긴 의자에 앉아있는 이들에게는 이 '신산스러움'과 '다가올 복수의 쾌감'이 공존한다. 우리 사회의 대리 처벌은 이 중 '신산스러움'을 상당부분 제거했고, 그 결과 복수의 쾌감이 더 크게 남았다(물론 이 과정에서 복수의 쾌감도 줄어들기는 한다). 그러나 우리가 간단하게 남겨져 현재 비교적 간단하게 실행되는 이 과정에서 은연중에 잊게 되는 중요한 것이 있다. (즉 우리는 현대사회에서 죄를 처벌하는 것이 우리의 손을 떠나버렸기 때문에 사실 그에 대한 많은 함의를 잊어버렸다.) 그 밑바탕에 있는 것이 무엇일까.


<친절한 금자씨>는 위에서 이야기했듯 백선생의 죄가 원모의 죽음 뿐만이 아니었다는 점을 금자가 알게 되는 것이 기점이다. 즉 이야기는 이를 기점으로 그 전까지의 금자의 개인적인 복수에서 후반부의 사회적인 복수로 넘어간다. 사회적인 복수로 넘어가는 까닭은 금자가 이 아이들의 부모의 심정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아이들이 죽어가는 비디오를 보고 나서야, 혹은 그 비디오를 보고 부모들이 보이는 엄청난 강도의 '애끓음'을 보고 나서야 금자는 백선생이 자기가 간단히 처리해야 할 장난감이 아님을 깨닫는다. 간단히 말해서 백선생은 자기 혼자 간단히 먹을 작은 케익이 아니라 커다란 케익의 한 조각인 것이다. 물론 그녀가 공감을 할 수 있었던 것에는 그녀의 딸 제니의 존재가 큰 역할을 담당한다. 왜 <친절한 금자씨>에 딸 제니가 중간에 등장하고, 그녀를 딸처럼 사랑하는 양부모가 등장하는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그것을 보아야만 금자가 공감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그래서 그녀는 이 복수에서 '비껴선다'. 그러므로 사회적 복수, 혹은 사회적 처벌의 근원에 있는 것은 공감하는 마음, 혹은 동정하는 마음이다(물론 이는 단순히 '피해자'의 입장에서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즉 복수의 선행 이전에 존재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사회적인 처벌, 일종의 대리 처벌이 이루어질 때 악과 동일한 방식으로 그것을 이루어내서는 안된다.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이 악은 맥락이 없는 악이다. 그것을 우리가 나쁜 놈이니까, 혹은 죽어야 할 놈이니까 죽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그 맥락없음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다. 그 근원에 놓인 맥락을 찾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악과 우리가 다른 점이다.

박찬욱의 복수 연작은 이렇게 조금씩 진화한다. 뭐 간단하게 말하자.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마지막 모든 인물들이 죽었고, <올드보이>에서는 가까스로 죽음은 면했으나 정신분열을 피하지 못하였다. <친절한 금자씨>에서는 죽지도 않고 미치지도 않았으나, 그렇다고 영혼의 구원에 이르지는 못하였다(마지막 나레이션이 이를 이야기해 준다). 그것은 <복수는 나의 것>의 인물들은 공감이나 동정에 이르지 못하였고, <올드보이>의 인물은 여전히 남의 말은 듣지 않고 자신의 말만 하였으나(오대수, 아니 최민식은 전편에서 혀를 자르는 징벌을 받았지만 그것으로 충분치 않았다. 그는 이 <친절한 금자씨>에서는 자신을 어떻게 죽일 것인가를 입에 재갈이 물려진 채로 큰 스피커로 들어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 이 말에 대한 불신은 계속 이어지는데, 금자씨가 백선생을 잡아 가장 먼저 한 일 중에 하나는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이었으며, 어른인 채로 금자씨 앞에 나타난 원모(유지태)는 금자가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려하자 재빨리 재갈을 물려버린다), 금자씨는 어렵게나마 약한 공감, 혹은 동정의 길에 들어섰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얘기가 조금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이 영화의 배우들은 참으로 의미심장하게 쓰이고 있다. 위에 든 최민식이나 유지태도 그러하려니와 금자와 제니에게 나타난 두 명의 킬러, 송강호와 신하균은 어떤가. 그렇다. 사실 이들은 동일한 한패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튼간에 금자씨 역시도 영혼의 구원에는 이르지 못하였으니 그 영혼의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인가. (박찬욱에게 구원은 그렇게 쉽게 오는 문제가 아니다. 정성일도 지적했지만 마지막 빵집에서 샹들리에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예를 들어 이를 나홍진의 <추격자>와 비교할 수 있는데, <추격자>에서 가장 의아하게 만든 것은 마지막 교회를 둘러싼 설정들이다.) 예를 들어 미친 자이거나 남의 피를 빨아야만 살 수 있는 자들에게는 영혼의 구원이란 없을 것인가. 그것의 양상들을 우리는 박찬욱의 다음 영화들에서 보게 될 것이다.  



- 2013년 4월, DV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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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contrll.tistory.com BlogIcon 四字 2013.06.03 15: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직 본적은 없는데 꼭 봐야겠네요!!^^

올드보이, 박찬욱

Ending Credit | 2013. 5. 10. 18:30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자세한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박찬욱의 복수 연작의 두 번째 작품 <올드보이>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전작 <복수는 나의 것>에 대한 리뷰를 등가교환으로 끝냈으니 그것으로부터 이어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신장과 신장의 교환, 익사와 익사의 교환과 같은 등가교환에 대한 집착은 이 영화 <올드보이>에서도 이어진다. 예를 들어 오대수(최민식)는 사설감옥의 사장 철웅(오달수)의 이빨을 장도리로 뽑아내고, 그에 대한 대가로 철웅은 오대수의 이빨을 뽑아내려 한다. 철웅은 미도(강혜정)의 가슴을 손으로 만지고, 그 대가로 손이 잘린다(이것에는 또한 오대수의 어떤 오해가 작용하고 있다). 물론 가장 크고도 근본적인 등가교환은 이 영화 그 자체이다. 즉 우리는 영화의 전체에 걸쳐서 오대수의 복수를 본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결국 만나게 되는 것은 이우진(유지태)의 복수이다. 그리고 그 복수란 자신(이우진)과 이수아(윤진서)의 관계와 동일하게 오대수와 미도의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는 커다란 등가교환의 영화이고, 무엇인가가 무엇인가로 대치되는 영화이다. 오대수의 복수에서 이우진의 복수로 영화는 어느틈에 옮겨가고, 이우진과 이수아는 오대수와 미도로 슬그머니 대체된다. 어떻게 보면 <올드보이>는 모든 비밀이 담긴 보라색 상자를 보여주기 위해 달려오는 영화이다. 사실 굳이 따지자면 전작 <복수는 나의 것>과 마찬가지로, 이야기는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점점 개연성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그저 이 보라색 상자를 보여주기 위해 영화가 지금까지 왔던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리고 묻는다. 이 상자를 열겠습니까, 아니면 다른 것을 택하겠습니까. 이것을 열면 무엇인가를 보게 되지만, 그것을 본 대가는 당신이 치러야합니다.

이러한 등가교환에 대한 집착, 어떠한 것의 부재를 거의 그것과 동일한 실물로 보상받으려 하는 것은 거의 정신병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하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정신병의 많은 징후 중 하나가 등가교환이지, 등가교환을 하기 때문에 그들이 정신병을 가진 이들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점이다. 즉 간단하게 말해서 그들은 이미 광기를 가지고 있었고(오대수의 말이나 행동은 물론이고, 이우진의 모습에서도 광기를 지우기란 힘들다), 이 영화 <올드보이>는 두 광기를 가진 사내들의 대결이다. 15년간이나 사설감옥에 물리적으로 갇혀있음으로서 생긴 광기가 오대수의 광기라면, 이우진의 정신적인 문제는 과거의 어느 시점부터의 정신적인 갇혀있음(고착)이다. 즉 그는 이수아의 죽음이라는 과거의 사건에 갇혀있고, 그것에서부터 전혀 성장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둘다 무엇인가에 갇혀있고, 말 그대로의 '올드보이(즉 아주 오래된 소년들, 육체는 자랐지만 여전히 정신은 과거에 남아있는 소년)'들이다. 정신병이란 일종의 고착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정신병에 걸린 주체는 어떤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과거의 어떤 순간, 그의 정신병이 촉발된 어떤 순간에 머물러 있다. 라캉의 이야기를 빌어서 말한다면, 정신병에 걸린 이들은 언어와 법의 세계인 상징계를 통과하지 못하고, 몸 이미지의 세계인 상상계, 혹은 몸의 리비도인 실재계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사건을 상징으로 대체하지 못하고, 때로는 실재 그 자체를 망상으로, 거의 완전한 실재에 가까운 망상으로만 만난다. 그것은 예를 들어 동생의 아이를 뱄다는 소문 속에 휩싸인 이수아가 실제로 배가 불러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이것을 이우진은 "이우진의 성기가 아니라, 오대수의 혀가 임신을 시켰다"고 표현한다). 그 망상과 상상의 세계를 깨뜨리기 위해 마법의 진실, 혹은 고통스러운 진실이 들어있는 보라색 상자가 온다. 그리고 질문이 반복된다(그러나 조금 바꿔보자). 이 상자를 연 당신은 이제 어떻게 하겠습니까.


두 가지 정도의 이야기를 여기에서 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하나는 주체가 상징계로 나아갈 길은 애초에 완전히 막혀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들이 정신병에 걸린 모습을 보여준다는 징후적인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박찬욱은 이 영화에서 법과 언어의 세계를 건설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전작 <복수는 나의 것>에서 법이 스스로 그 역할을 포기한 듯한 모습을 보여줬다면 이 영화에서는 거의 법의 흔적 자체가 없다. 서울 한복판에 사설감옥이 존재하고, 이우진이나 오대수가 수많은 살인을 저질러도 그것은 거의 문제거리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보다 더욱 막혀있는 것은 언어의 세계이다. 이우진은 말한다. "오대수는요. 너무 말이 많아요." 그리고 그 대가로 오대수는 자신의 혀를 스스로 자른다(물론 이 자체도 일종의 등가교환이다). 사건은 언어로부터 시작되었고, 그것은 오대수가 스스로 자신의 언어를 제거함으로서 징벌된다. 그것은 이렇게도 볼 수 있는데, 이 영화 <올드보이>는 조금 색다른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한다. 아파트의 옥상에서 오대수는 자살하려는 남자(오광록)의 넥타이를 잡고 있고, 남자는 울먹이면서 말하다. "말투도 X같고, 당신 도대체 누구야, 씨발..." 그리고 오대수는 느리게 말한다. "내 이름은..." 그리고 이 때 플래시백되어, 경찰서에서 술이 떡이 된채로 '오.대.수.'라고 답하는(그리고 '오늘만 대충 수습'한다는 그 유명한 설명과 함께) 장면으로 넘어간다. 자살하려는 남자의 이 첫 장면이 말하고자 하는 것, 혹은 이 장면으로부터 영화가 시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대수의 사설감옥에서의 고행이 끝난 후 이 자살하려는 남자의 이야기는 다시 등장하는데, 이 부분을 보면 조금 이상한 장면이 있다. 오대수는 엘리베이터를 내려와 아파트를 나서고 있고, 그 뒤로 남자의 시체가 차 위로 떨어진다. 이 남자는 오대수가 살려주려 했음에도 왜 자살을 결국 감행한 것일까. 물론 오대수는 이 죽음에 물리적인 책임이 없다. 오대수가 어떤 위해를 가했다고 보기에는 시간이 맞지 않으니까. 그런데 대신 다른 책임을 물을 수도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오대수는 그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이 옥상에서의 장면은 조금 특이하게 구성되어 있는데, 짧게 구성되어 있는 시간과 달리, 오대수와 남자는 꽤 길게 이야기를 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오대수의 대사가 있고, 커팅 된 후, 아 그렇군요, 그럼 내 얘기를 할께요,라는 남자의 대사가 이어진다. 즉 우리가 보지못한 커팅된 이 사이에는 오대수의 긴 자신의 이야기(우리가 지금까지 보았으므로 생략된)가 들어있다. 다시 말해서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15년간이나 감옥에 있었으면서도 오대수는 그 말하기 좋아하는 자신의 특성을 버리지 못했다는 사실이다(이것만 보아도 그의 실패는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의미심장해 보이는 것은 그 다음이다. 막 자신의 이야기를 남자는 하려고 하는데, 오대수는 벌떡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간다. 즉 오대수는 자신의 이야기를 할 뿐 다른 이의 이야기는 듣지 않는다. 다른 말로 하면 그에게는 공감, 혹은 동정의 능력의 결여되어 있다. 공감이나 동정의 하나는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물론 중요한 것은 이는 공감이나 동정의 수많은 형태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오대수는 자신의 이야기를 할 뿐 들으려는 생각은 없다. 그러므로 어쩌면 그가 마지막 혀를 자르는 것은 이우진의 사건에 대한 징벌이면서, 동시에 이 남자에 대한 죽음에 대한 징벌은 아닐까. 그가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어쩌면 이 남자는 뛰어내리기를 포기했을지도 모르니까. 아무튼 그렇게 그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혀를 자름으로써 말하지 않고 들어야만 하는 존재가 되며 언어의 세계는 근본에서부터 거부된다(오대수, 아니 최민식은 <친절한 금자씨>에서 이에 대해 또 한번 징벌을 받기는 한다. 그 얘기는 다음번에 하자).

두 가지 중의 다른 나머지 하나는 그 이후 주체의 선택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것에는 바로 앞의 이야기, 즉 오대수가 말하는 기능을 상실하고, 오로지 듣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점이 관련되어 있다. 전체 영화에서도 그렇지만 <올드보이>의 마지막에서 이우진은 참 잔혹해보인다. 그는 오대수에게 자신의 심장이 리모컨으로도 끌 수 있다며, 버튼을 누르라고 부추긴다. 그리고 극도의 분노에 휩싸인 오대수는 버튼을 누른다. 그런데 이 때 쓰러지는 것은 이우진이 아니라 오대수다. 왜냐하면 그 버튼은 이우진의 심장을 폭파시키는 버튼이 아니라, 오디오를 재생시키는 버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펜트하우스는 곧 오대수와 미도의 절정의 신음소리로 가득찬다(그리고 이때 이우진은 당신들도 서로 사랑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즉 이 마지막에서 입을 잃고 귀만 남은 오대수가 가장 처음으로 듣게 되는 것은 자신의 가득한 리비도이다. 상상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오대수에게 이우진이 내던진 것은 리비도로 가득찬 실재계, 혹은 리비도 그 자체였다. 즉 이우진은 아니 박찬욱은 상상계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주체에게 상징계를 주는 대신에 실재계를 선물할 정도로 잔혹하다. 그렇다면 이 주체에게는 그 육체를 파괴시키는 일만이 남은 것일까. 즉 죽음으로 리비도만 남은 육체를 끝내는 것만이 남은 것일까. 박찬욱은 그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놈이어도 살 권리는 있는 것 아닌가요?"라는 반복되는 대사이기 때문이다.


이 질문은 영화 속에서 두 번 나온다. 한 번은 자살하려는 남자가 하고, 다른 한 번은 오대수 자신이 한다. 그리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 자살하려는 남자는 처음 영화가 시작하면서 등장하고, 중간에 다시 한 번 등장한다. 나는 그냥 간단하게 이야기하고 싶다. 어떤 영화에서 어떤 장면이 다시 등장한다면, 혹은 어떤 대사가 다시 반복된다면, 그건 그 장면이 중요하다는 뜻이고, 그 말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즉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놈이어도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박찬욱의 말이고, 여기서 방점은 아무래도 '짐승만도 못한'보다 '살 권리'에 찍혀있다. 이는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 영화에서 또 하나 중요하게 제시되는 말이 있다면 다음의 이 말이다.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 이 말은 영화 속에서 성경 구약 '잠언' 6장 4절이라고 소개되며, 그것은 오대수가 이우진의 펜트하우스 엘리베이터 비밀번호를 찾는 주요단서가 된다. 그런데 사실 이 구절은 '잠언' 6장 4절이 아니라, 6장 5절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본래의 6장 4절의 내용이다(나는 물론 박찬욱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 완전한 실수라고 보지만, 실수에서도 의미를 찾는 것이 호사가들의 몫이 아니겠는가. 또 공교롭게도 그다음 6장 6절부터는 개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은 이 영화의 개미에 대한 비유와 맞물린다는 점이 또 재미있다. 그 이야기는 있다가 하자). '잠언'의 6장 4절은 "네 눈으로 잠들게 하지 말며 눈꺼풀로 감기게 하지 말고"이다. 네 눈으로 잠들게 하지 말고, 눈꺼풀로 감기게 하지 말라는 것, 이는 '죽어서는 안된다'는 말이기도 하며, 동시에 '살 권리'의 다른 말이다. 즉 스스로 구원하라는 이 이야기는 어떤 의미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음을 벗어나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마지막 오대수가 택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결국 정신분열이다. 비밀을 아는 몬스터와 비밀을 모르는 오대수로 나뉜다는 이 마지막은 정신분열의 일종의 비유이며, 그렇게 해서라도 목숨을 유지시키는 것이 낫다는 것이 박찬욱의 복수연작의 두 번째 단계이다(그러므로 사실 마지막 오대수가 몬스터인지 오대수인지를 묻는 것은 주체를 두 번 죽이는 외설적인 질문이다). 복수연작의 첫 단계(<복수는 나의 것>)에서 인물들은 모두 죽었으나, 그 두 번째 단계에서는 비록 정신분열을 스스로 선택했을지언정, 오대수는 살아남았다(즉 박찬욱의 복수 연작에서 가장 양상이 다른 것은 마지막에 결국 주인공들이 처하게 되는 위치이다. 물론 그것을 일종의 발전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해서라도 살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박찬욱의 대답이며,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망상을 부서뜨리지 않고 유지시키는 것이 때로는 삶을 유지시키는 기제가 되고 환자에게 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정신의학의 관점과도 통하는 것이다(그것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박찬욱의 후일의 영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조금 더 자세히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실 정신병이 그렇게 나쁜 것이라고 볼 수만도 없다. 지젝에 따르면 "속임수에 빠지지 않는 유일한 길은 상징적 질서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는 것, 즉 정신병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정신병자란 바로 상징적 질서에 의해 속지않는 주체이다." - <삐딱하게 보기> p.162. 그리고 이는 법과 언어라는 상징적 질서의 길을 애초에 막아놓은 박찬욱의 선택이 그렇게 기만적이거나 가혹하지만은 않다는 이야기도 된다. 상징적 질서들이 벌이는 속임수들은 그에게도 경계의 대상이었고. 그에게는 상징적인 질서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으니까. 그것은 전에 이야기한 동정이나 공감과 같은 것들이고 그것은 사실 상징적 질서와 별다른 관계가 없다. 금자씨는 이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덧.
약간 반농담삼아 이야기하자면, 이 영화 <올드보이>는 동시에 개미형 인간과 거미형 인간의 대결이라고 볼 수도 있다. 사설감옥에서 개미에 대한 환상을 보는 오대수, 그리고 지하철에서 커다란 개미의 환상을 보는 미도가 개미형이라면, 오랫동안 덫을 놓고(15년간이나 이우진은 기다렸다) 먹이가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이우진은 거미형이다. 이는 또한 <복수는 나의 것>과 교묘하게 연결되는데, <복수는 나의 것>에서의 개미형이 류(신하균)라면 거미형은 동진(송강호)이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는 영미(배두나)가 류에게 "개미같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으며, 동진이 딸의 환영, 혹은 실재를 만나게 되는 장면 직전에는 동진 집의 텔레비전에서 거미에 대한 다큐가 방영되고 있다. 물론 그가 전기충격기를 문의 손잡이에 연결시켜 놓고 류의 집에서 자면서 류를 기다리는 장면은 거미의 사냥방식이다. 그렇다면 개미형 인간들이 거미형 인간들과의 대결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의 개미가 아니라 '개미'라는 집단이 되는 것이다. 떼지어 다니는 개미가 얼마나 무서운지는 사실 잘 알고 있지 않은가(개미는 소도 무너뜨린다). 물론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개인은 아니 개미는 사실 자신이 하나의 몸뚱이에서 자라난 두 머리임을 알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가끔 타인이 되어보아야 한다.
 
여담을 하나 붙여두자면, 아주 예전에 어쩌다 이 영화이야기가 나왔고, 누군가가 올드보이에 나온 개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하길래, 농담으로 오대수는 개미형 인간이고, 그것은 주식시장의 개미투자자들을 의미한다고 말해줬다. 영화에 보면 이우진이 아주 돈많은 사람으로 뭘 팔고 어쩌고 하는데, 이 영화는 한 마디로 거대한 기업투자자가 개미투자자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흘리면서 잡아먹는 이야기라고 말이다(실제로 오대수가 영화내내 농락당하지 않는가). 그는 놀랍게도 내 말에 수긍하는 듯한 눈치였는데, 이 자리를 빌어 개드립에 죄송한 마음을 전할 뿐이다(하지만 술자리에서는 누구나 개드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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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3.05.19 20: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올드보이는 영화도 영화였지만 음악이 참 좋았어요. ost중에서 단 한곡도 버릴게 없더라구요. 한동안 이 음악들을 반복해서 듣곤했거든요.심현정, 조영욱이라는 이름을 알게된것도 올드보이때문이예요. 혹시 생각나세요? 오대수가 기억을 되살리며 20여년전 수아를 처음 만났던 학교운동장을 찾아가잖아요.그때 나오던 음악이 '수아의 자전거'였는데 그 장면이랑 어찌나 잘 어울리던지요..

    * 다음번 리뷰는 예상되로라면 <친절한 금자씨>가 되겠네요.^^거기선 어떤식의 등가교환의 법칙이 펼쳐질지 기대가 됩니다. 글 잘 읽고 갑니다.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3.05.20 01: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사실은 올드보이는 영화보다 음악을 더 좋아합니다. 제가 여기 OST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음악은 The Searchers라는 곡이예요. 말씀하신 그 곡 자전거 벨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곡 아닌가요? 음악들이 참 좋죠.

      요새 좀 바쁜 일이 있어서 별로 글을 쓰지 못하고 있네요. 아마도 다음번 글이 <친절한 금자씨>에 대한 글이 될 것 같기는 한데, 어쩔는지 모르겠어요. 금자씨에 대한 기억도 엷어지기 전에 뭐라도 써야하는데..아무튼 요즘 영화를 못보고 있어서 슬프네요.

시저는 죽어야 한다, 타비아니 형제

Ending Credit | 2013. 5. 6. 16:33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타비아니 형제의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세익스피어의 연극 '줄리어스 시저'를 상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타비아니 형제는 조금은 특이한 형태의 구성을 하고 있는데, 영화가 시작하고 관객이 처음 만나는 장면은 연극의 절정을 지나고 마무리 단계에 이른 장면이다. 시저를 암살한 모의에 동참한 브루투스가 안토니우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는 장면 말이다. 그리고 결국 브루투스는 죽고 연극은 관객의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끝나고 배우들은 성공에 기뻐하며, 퇴장한 후 자신의 위치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 때 화면은 흑백으로 전환되고 시간은 6개월 전으로 플래시백 된다. 이 배우들이 '줄리어스 시저'를 처음 시작하던 그 때로 말이다. 그리고 영화는 이 연극의 제작발표에서부터 배우들의 오디션, 그들의 연습과정을 차례대로 짚어가기 시작한다. 영화가 재미있어지는 것은 이 때부터다. 영화가 선택하는 것은 이들의 연습과정을 극의 순서에 맞추어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관객들은 이들의 연습을 보면서, 동시에 이 '줄리어스 시저'라는 연극을 본다. 이들의 연습은 브루투스 일파의 시저 암살모의에서부터, 점쟁이의 시저 운명에 대한 암시, 시저의 암살, 브루투스와 안토니우스의 연설과 같은 순서로 우리들에게 보여지며, 이로써 우리는 이들의 연습을 볼 뿐만이 아니라, 이 '줄리어스 시저'라는 한편의 연극을 이 영화를 통해서 오롯하게 감상한다. 동시에 그것은 그들의 연습과정만을 보여줌으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영화의 중간, 이들이 침대에서 (자신들이 '천장관찰자'라며) 잠을 못 이루며 뒤척이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이 영화를 한편의 '줄리어스 시저'라는 연극으로 생각해본다면 시저의 암살 장면 전에 들어가 있는 장면이다. 즉 이들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실제상황(물론 이는 짜여진 '실제'이다)'을 마치 거사의 실행 직전 불안함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브루투스 일파의 모습처럼 비춰지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공연날 철문이 열리며 관객들이 우루루 들어오는 모습이 브루투스 세력과 안토니우스 세력의 전투 장면의 전초전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나, 무대를 새로 제작하는 동시에 새로운 배우가 이 연극에 투입된다고 하면서 그가 옥타비아누스 역을 맡게 된다고 했을 때 생겨나는 효과들도 마찬가지이다(왜냐하면 '줄리어스 시저'라는 극의 내용에서 옥타비아누스의 등장은 그 자체가 새로운 인물의 등장이면서 동시에 사태의 새로운 국면으로의 전환이기 때문이다).
 
타비아니 형제의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세익스피어의 연극 '줄리어스 시저'를 상연하는 교도소 재소자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이 연극은 동시에 재소자들의 교정교화의 일환으로 상영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들 배우들은 모두 조직폭력, 살인, 마약밀매 등으로 최소 15년에서 40년 이상을 선고받은 중범죄자들이며, 이들이 연습을 벌이고 있는 이 공간은 교도관의 엄중한 감시가 이루어지는 교도소이다. 그러므로 이 연습은 단지 연습으로만 끝나지 않고 그들의 어떤 개인사들과 겹쳐지는데, 예를 들어 한 재소자는 연습을 하다말고 연극의 어떤 소도구로 기억하게 된 자신의 옛일을 생각하느라 연기를 이어가지 못한다. 즉 이들에게 이 연극을 하는 실질적인 중요한 문제는 관객에게 좋은 연극을 보여준다는 것보다도 이 연극에 참여함으로써 자신 내부의 무엇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는가의 여부인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됨으로써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이들이 상연하는 연극이 바로 세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라는 사실일 것이다. 브루투스 일파가 시저를 암살하려고 모의한 이유는 시저가 왕이 되려한다, 즉 자신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세력이 되리라는 이유였기 때문이다. 즉 자유를 찾으려는 이들의 거사가 바로 자유가 없는 교도소 재소자들에 재연된다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이들이 벌이는 연극 '줄리어스 시저'는 단지 역사극이 아니라, 마치 이곳 현재의 이야기처럼 보이며, 이들은 단지 연기로서가 아니라, 마치 실제로 이들 역사적인 인물이 빙의된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브루투스와 안토니우스가 죽은 시저의 시체를 광장에 데려다 놓고 로마 시민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며 선택을 할 것을 요구하는 장면을 보면, 창살에 갇힌 다른 재소자들을 마치 로마시민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자유인가, 아니면 다른 것인가를 묻는 이들의 모습이 마치 현재의 한 장면처럼 보이도록 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들이 중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이들이 오디션을 하는 장면으로 볼 수 있는데, 이들의 오디션은 오랫동안 떨어져야만 하는 가족에게 자신의 신상을 전달해야 하는 상황과 수사기관에서 강요에 의해 자신의 신상을 말해야 하는 상황, 두 가지의 연기를 펼치는 것이다. 즉 이들은 나름의 슬픈 사연을 가진 개별의 인간일 수 있지만, 동시에 범죄를 저지른 인간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 장면은 보여준다.)

타비아니 형제의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세익스피어의 연극 '줄리어스 시저'를 상연하는 교도소 재소자들의 역할을 실제의 재소자들이 맡은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픽션이라기보다는 다큐멘터리에 가깝고(그렇다고 해서 온전한 다큐로만 보기는 힘들다. 이들 중범죄를 저지른 재소자들이 교도소에서 연극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이야기는 영화적으로 재구성된 것이다), 우리의 현실에 보다 가까이 들어온 이야기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영화는 시작부에서, 연극의 마무리와 연극이 끝난 후 이들이 다시 하나하나 수감되는 장면을 보여준 후, 다시 6개월 전으로 돌아가서 이들의 6개월을 한편의 연극으로 보여지도록 한 다음에 연극이 끝나고 이들이 무대에서 내려와 각자의 방에 수감되는 장면이 되풀이되며 끝난다는 점이다. 즉 이 영화에서 두 번 보여지는 것은 이들의 연극이 아니라 이들의 수감이라는 점. 다른 하나는 연극이 끝나고 마지막에 수감된 한 재소자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하는 대사이다. "예술을 알고 났더니 이 작은 방이 이제서야 감옥이 되었구나."


이 두 가지를 보면 타비아니 형제가 결국 우리에게 보여주려던 것은 이들의 연극이 아니라, 이들의 수감이다. 즉 두 번이나 반복하여 보여지는 것이 이 영화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이 영화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시저를 사랑했지만, 시저보다 자유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브루투스의 자결, 즉 자유의 종말이고, 다른 하나는 연극이 끝난 후 각자의 방에 갇히는 이들 재소자들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마지막 재소자의 말로 반복이 된다. 다시 말해서 예술을 알고 났더니 이 작은 방이 드디어 감옥으로 느껴진다는 그 말은 예술이라는 것에 담긴 자유의 본질을 보여준다. 이들은 연극이 마침내 끝났기 때문에 다시 감옥에 갇히는 것일 뿐이지만, 연극을 통해서 브루투스가 되어 자유라는 것을 간절히 외쳤기 때문이기도 하고, 예술 그 자체에서 자유를 맛봤기 때문에 비로소 자신들이 이곳에 갇혀 있음을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즉 타비아니 형제는 이 교도소에서 이루어지는 연습 자체를 하나의 '줄리어스 시저'라는 연극으로 만들어 이 교도소라는 갑갑하고 막힌 공간을 로마의 거리, 로마의 광장으로 확장했지만, 이 마지막에 이르러 연극을 종결시켰고, 로마의 거리와 광장을 다시 교도소로 되돌려 놓았다. 그것에 담긴 의미를 깨달아야만 한다는 것이 브루투스의 자결과 재소자들의 수감을 두 번 반복하는 것에 들어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마지막 메시지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는 연극적인 효과의 일부라고 할 수도 있지만(연극은 관객을 정면으로 향하고 발화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다. 영화에서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는 것은 꽤 특수한 경우이다), 이미 연극은 끝났고, 그들 앞에 남아있는 것은 우리 영화를 보는 관객들 뿐이다. 그러므로 이는 연극의 연습, 실제의 연극, 재소자들의 현실이라는 이 3중의 이야기가 우리 관객들에게 던지는 또 한겹의 메시지가 아닐까. 왜냐하면 우리는 이 '줄리어스 시저'의 결말 이후의 이야기를 알기 때문이다. 브루투스 일파가 시저를 죽였고, 그들은 그들의 희생으로 자유가 다시 돌아오리라 믿었지만, 결국 이루어진 것은 옥타비아누스의 제정이었다. 즉 '줄리어스 시저'에는 공화정을 회복시키기 위해 선택한 것이 결국 황제의 즉위를 불러왔다는 아이러니가 존재하며, 그것은 로마의 시민들이 결국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교도소의 현실이 아니라, 우리 관객들의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시대에도 우리는 여전히 각자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기꺼이 위정자를, 아니 왕을 모시고 있으니까. 또한 우리는 여전히 예술을 모르고 그런 우리들에게도 각자의 작은 방은 각자의 감옥일 뿐이니까.

타비아니 형제의 이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77분의 미니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최소한의 장치로만 이루어진 영화이다(물론 이 영화가 미니멀한 장치로만 전개되는 것은 이 영화의 배경이 교도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교도소라는 곳은 '꼭 필요한 것 외에는 다른 것은 필요없는 곳'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 미니멀한 장치를 가진 이 곳이 거대한 로마의 거리, 광장처럼 보이는 것은 타비아니 형제의 마법이 통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렇게 공간을 확장시켰던 타비아니 형제는 다시 기어이 그것을 좁은 방으로 되돌려놓음으로써 우리 관객들에게 각자의 좁은 방을 생각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다시 이 이야기를 교도소의 담장을 넘어 우리 각자의 현실로까지 재확장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각자의 좁은 방이 각자의 감옥임을 깨닫기 위해서 우리는 예술을 알아야만 하고, 그제서야 우리는 그 제목의 의미를 제대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그 의미를 말이다. 우리의 '시저'는 누구입니까.


덧.   
지난 금요일, 만료를 앞둔 롯데시네마 포인트를 사용하려했지만, 영화를 선택하기가 참 어려웠다. 예를 들어 롯데시네마 건대입구는 특별관 샤롯데와 아르떼관을 포함해 총 12개관이 있지만, 9개관에서는 <아이언맨>이 2개관에서는 <전국노래자랑>이 상영중이었고, 다른 모든 영화는 그 작은 아르떼관에 몰빵되어 있었다. 그렇게 온 국민이 그 철갑덩어리를 보고 싶어하는 것일까? 이런 짓을 저지르면서 무슨 흥행신기록이니 뭐니 하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참 난감하다. 

나는 대신에 일산에서 이 영화 <시저는 죽어야 한다>를 보았는데, 덕분에 좋은 영화도 보고, 일산의 밤거리도 구경하고, 갔다왔다하면서 장시간 독서도 했으니 롯데시네마에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할지... 


- 2013년 5월, 롯데시네마 주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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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는 나의 것, 박찬욱

Ending Credit | 2013. 4. 29. 19:39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내용이 자세히 들어 있습니다.)



2002년 3월 개봉한 박찬욱의 네 번째 장편 <복수는 나의 것>은 이른바 '복수 연작'의 서두이며, 박찬욱 특유의 세계를 시작하는 첫걸음이다. 영화 그 자체로 보면, 이 <복수는 나의 것>은 영화의 중반 어떤 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둘로 나뉘어지는 듯한 구성을 하고 있는데, 전반부는 아이러니한 사건의 중첩이다. 일은 계속 예상치못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한 가지 사건은 다른 한 가지의 사건을 불러오며, 사태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양상을 띤다. 그리고 그 결과 영화 중간의 한 가지 사건, 즉 아이의 죽음이 발생한다. 그리고 후반부는 아이의 죽음이 불러오는 죽음의 연쇄들이다. 그리고 그 결과 전반부에 등장했던 거의 모든 인물이 죽음을 맞이한다. 이것이 이 <복수는 나의 것>의 플롯이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아 보인다.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자.

먼저 전반부의 사건을 짚어보자. 사실 돌이켜보면 아이의 죽음, 그러니까 중소기업체 사장 동진(송강호)의 어린 딸이 유괴되어 죽음을 맞게 되는 이 사건은 매우 발생할 확률이 낮았다. 아니 어떻게보면 낮다고 말하기보다는 어떻게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싶을 정도다. 아이의 죽음은 다음의 사건들이 중첩되어 발생했다. 1. 신장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아픈 누나를 둔 류(신하균)가 장기밀매업자들에게 사기당해 가지고 있던 돈 전부와 자신의 신장을 털린다. 2. 그런데 그 때 누나가 이식을 받을 수 있는 기증자가 나타난다. 3. 류는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영미(배두나)와 함께 유괴를 계획한다. 4. 원래 유괴하려던 아이는 다른 아이였지만, 자신들이 노출될까 두려웠던 류와 영미는 유괴의 대상을 그 아이의 친구, 즉 동진의 딸로 바꾼다. 5. 이때 자신 때문에 유괴를 저질렀음을 누나가 우연히 알게 된다. 6. 누나가 죄책감에 자살한다. 7. 누나를 어릴 때 같이 놀던 곳에 묻으려한다. 8. 그 누나를 묻으러가면서 아이를 혼자 둘 수 없어 데리고 간다. 9. 아이는 류가 누나를 묻을 동안 차에서 자고 있었지만 목에 건 목걸이를 뺏으려던 동네 지체장애인에 의해 깨어난다. 10. 류를 찾으러 차 밖으러 나온 아이는 실수로 강물에 빠진다. 11. 구해달라고 소리치지만 류는 청각장애인이라 듣지 못한다. 12. 뒤늦게 아이를 발견한 류는 아이를 구하려했지만, 물이 자신의 키를 넘는다는 사실을 알고 뛰어들 엄두를 못낸다. 그러나 이는 류의 착각이었다(어릴 때 이후 그곳에 가보지 못한 류는 물의 깊이보다 훨씬 자신의 키가 자랐음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니 1. 류가 사기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2. 기증자가 그 때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3. 유괴 대신 다른 방법을 선택했더라면 4. 원래의 아이가 유괴되었더라면 5. 누나가 그 사실을 몰랐더라면 6. 누나가 자살하지 않았더라면 7. 누나를 다른 곳에 묻으려했다면 8. 아이를 데려가지 않았더라면 9. 아이가 차에서 깨어나지 않았더라면 10. 아이가 강물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11. 류가 청각장애인이 아니었더라면 12. 그리고 류가 자신의 착각을 빨리 알았차렸더라면, 적어도 동진의 딸이 유괴되어 죽음을 당하는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즉 이 '아이의 죽음'이라는 무서운 사건은 무려 12개의 우연이, 혹은 12개의 운명이, 아니면 12개의 오해, 오인, 혹은 잘못된 선택이 중첩하지 않았더라면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으로, 아니 박찬욱의 잔인한 장난으로 사건은 발생했고, 동진은 결코 보고 싶지 않았던 어떤 것, 즉 물에 흠뻑 젖은 채로 뚝뚝 물을 흘리는 죽은 아이의 환영 혹은 실재(아이가 나타난 뒷날 동진을 찾아온 형사는 바닥에 흥건한 물을 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환영이 실재였다는 보장은 없다)나 아이의 배를 가르는 장면을 보게 된다. 물론 그로 인해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을 만나는 것은 이들 뿐만이 아니다. 류와 영미는 자신을 추적하여 찾아온 전기고문기를 손에 든 동진을 보고, 장기밀매업자는 자신을 찾아온 가위를 든 류를 보고, 다시 동진은 칼과 성명서를 손에 쥔 4명의 사내들, 즉 영미의 복수를 하러 온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을 본다. 

즉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에서 보게 되는 것은 하나의 복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영화에서 하나의 복수가 아니라 돌고도는 복수의 양상, 혹은 복수의 연쇄를 본다. 동진은 류에게 복수하고, 류는 장기밀매업자들에게 복수하고, 영미는 다시 동진에게 복수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복수는 이것이 전부인 것일까? 어쩌면 동진이 류에게가 아니라, 류가 동진에게 복수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나는 동진의 딸의 죽음을 류의 복수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류가 동진의 딸을 죽게 만든 것에 큰 책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복수의 실행 같은 것이 아니라 실수였다.  영미의 논리대로라면 유괴에는 좋은 유괴와 나쁜 유괴가 있으며(이 논리는 나중에 <친절한 금자씨>에 그대로 반복된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하자.) 류와 영미는 돈을 받으면 아이를 얌전히 돌려줄 생각이었다(혹은 받지 못했어도 돌려주었을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 그 12개의 오해 또는 실수를 재론할 이유는 없으리라. 문제는 그 이후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이 나타났을 때이다. 이들은 스토리 상으로는 영미의 복수를 위해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이 불현듯 나타난 시점은 참으로 수상쩍다. 이들은 동진이 류에 대한 복수를 완결한 후, 아이의 보호자임을 부인한 후에 나타난다. 여기서의 아이란 동진의 딸이 아니라, 동진이 병원에 데리고 간, 자신이 해고하여 죽은 노동자의 아이다. 류를 죽이고 노동자의 아이를 내팽개친 후에야 어디에선가 유예되었던 그들이 나타난다. 즉 스토리로 보았을 때 이들이 여기에 동진을 죽이러 나타나는 것은 뜬금없지만, 플롯으로 보았을 때, 즉 아이의 보호자를 거부한 후에 나타나는 이들은 유예되었다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영화적으로 보았을 때 그들은 뒤로 물러나 있다가, 동진이 노동자 류를 죽이고, 노동자의 아이를 부인했을 때 비로소 어디에선가 불려나와 이 자리에 섰다. 아이의 보호자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동진에게 걸려왔던 전화는 동진에게 주어진 마지막 살 수 있는 기회였고, 그가 노동자의 아이를 거부했을 때, 비로소 그들에게 의해 사형이 언도되었다. 물론 그 기회는 처음이 아니었다. 무려 그 전에 3번의 기회가 있었다. 동진은 영화에서 3번의 배를 칼로 가르는 장면을 본다. 첫 번째에는 자신의 회사에서 해고된 노동자(바로 그 아이의 아버지)가 배를 칼로 자해하는 장면을 보고, 두 번째에는 자신 딸의 시체의 배를 가르는 장면을 보고, 세 번째에는 류 누나의 시체의 배를 가르는 장면을 본다. 그리고 그는 첫 번째에는 놀라지만 자신의 결정을 바꾸지 않았고, 두 번째에는 차마 쳐다보지 못했으며, 세 번째에는 마치 물건을 보듯 무심하게 보았다. 마지막 그의 배에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의 성명서가 꽂히는 것은 어쩌면 이 때문이 아닐까. 그의 무심한 시선, 타인의 배를 가르는 장면을 보는 이 무심한 시선, 자신의 딸의 배를 가르는 이 장면을 차마 보지 못했던 그 시선과 너무나도 달랐던 그의 무심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영미가 중간에 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한 몸에서 자라난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사람의 이야기. 머리를 두 개 가졌으니까 그만큼 머리가 아팠고, 그래서 하나의 머리를 잘라버렸다는 그 이야기 말이다. 왼쪽과 오른쪽 중에 어느 쪽을 잘랐느냐고 물었던 류의 멍청한 질문으로 이 장면은 끝났지만, 우리는 영화 속에서 제시되지 않은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안다. 아마 그 사람은 죽었을 것이고, 이제 그는 다시는 머리가 아플 일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 속 동진과 류를 연상시킨다. 동진과 류는 한 몸에서 자라난 두 개의 머리다. 물론 정치적으로 이야기해서 하나의 사회에 공존하는 자본가와 노동자, 그리고 그들이 공존하는 것이 아닌 하나를 자르는 것을 선택했을 때 어떠한 일이 벌어질 것인가, 같은 것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다르게 볼 수도 있다. 류와 동진은 처음에 매우 다른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방음이 되지 않아 온갖 소음이 들려오는 류의 집과 전자동으로 커튼이 쳐지는 동진의 집의 대비 같은 것 말이다(류의 집에 온 아이는 묻는다. "아빠 후배(류는 자신을 아이에게 그렇게 이야기했다)가 왜 이렇게 못 살아요?"). 그런 그들이 어느 틈에 점점 비슷해지다가, 중후반부 류가 장기밀매업자들을 추적하고, 동진이 류를 뒤쫓을 때 보면 거의 같아진다(이 때 박찬욱은 <스토커>에서도 여실히 보여준 그의 장기인 교차편집을 적절하게 구사하고 있다).
 
그것은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들 둘은 모두 동일하게 '착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동진은 자신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이 없는지에 대해 묻는 형사에게 나름 착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했고, 류에게는 그의 목숨을 거둬가기 전에 네(류)가 착한지 알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들은 이 사회의 나름 착한 사람들이고, 착한 두 머리이다. 그러나 착한 그들은 왜 모두 죽음을 맞아야만 했을까. 착한 그들이 갖추지 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이 <복수는 나의 것>의 영어 제목은 한글제목과 조금 뉘앙스가 다른데, 'Sympathy for Mr.Vengeance'이다. 어쩌면 이것에 힌트가 있는 것은 아닐까. 바로 이 sympathy(동정)라는 것. sympathy의 어원은 'syn(같이 혹은 함께)+pathy(고통, 치료법)'이다. 즉 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이다. '동정(同情)'이라는 한자어도 마찬가지인데, 그것은 마음 혹은 뜻, 생각 같은 것을 함께 나누는 것, 함께 느끼는 것이다. 고통을 함께 느낀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타인이 되어 본다는 것이다. 즉 타인의 위치에 진정으로 섰을 때만이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있고, 그것은 그 타인이 나와 그렇게 다른 사람이 아님을, 혹은 한 몸뚱아리에서 자라난 두 개의 머리 중 하나임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장난을 시작한 김에 조금 이어가보면) '복수는 나의 것'의 '복수'란 어쩌면 復讐가 아니라 複數, 즉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가 아닌 두 개란 것을 아는 것이 아닐까. 즉 '복수는 나의 것'이란 두 개의 머리가 나의 것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혹은 腹水이거나 말이다. 타인의 배에 들어찬 물을 보는 것. 그 물을 보면서 그의 고통을 짐작하는 것, 동진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단지 사물로만 보았고, 그래서 자신의 배에 꽂힌 성명서를 내려다보려고 낑낑대는 신세를 피할 수 없었다.

물론 이 sympathy 혹은 동정은 동진에게만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류나 영미에게도 그렇게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푸른 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블루워커 류(이 영화에서의 류의 노동의 장면에 대한 묘사는 인상적이고, 전반부의 분위기를 크게 좌우한다. 거의 지옥과 같은 소음이 울려퍼지는 공장의 풍경과 밤샘근무를 하고 녹초가 되어 공장문이 열리고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남자들의 눈을 부시게 하는 햇살, 그리고 거의 얼이 빠져나간 상태에서 거리를 걷는 류의 모습)와 붉은색의 전단지를 나눠주는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영미(그러나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이라는 이 단체의 이름과는 달리 이들의 구호는 조금 수상쩍은 면이 있다. 예를 들어 영미가 주로 외치는 두 개의 구호인 '미군축출'과 '재벌해체'는 학생운동의 두 가지 세력의 각각 가장 대표적인 구호이다. NL의 미군축출과 PD의 재벌해체)가 결국 선택한 것이 단지 유괴라서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유괴라는 행위가 아니라, 그것에 내재한 어떤 속성과 같은 것이다. 아까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영미의 논리대로라면 유괴에는 나쁜 유괴와 착한 유괴가 있으며, 나쁜 유괴는 아이를 죽이는 것이며, 좋은 유괴는 아이와 돈을 얌전히 교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아이와 돈을 얌전히 교환하는 것이 가능할까. 예를 들어 아이와 돈은 동일하게 교환될 가치가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는 교환을 기본으로 하여 만들어진 세계이고, 그 교환의 표면적인 원칙은 '등가'라고 이야기된다. 예를 들어 노동자의 밤샘근무는 보수(돈)와 교환되고, 이것은 동일한 가치를 가지기 때문에 교환이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 그 논리이다. 그러나 그 가치의 비중이 같은가의 여부는 둘째치고, 그 가치를 동일하게 맞추는 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즉 애초에 그것들이 교환할 수 있는 것들일까. 앞으로 이야기할 기회가 또 있겠지만, 박찬욱의 복수 연작과 후속작들은 등가교환을 매번 시도한다. <올드보이>나 <박쥐> 등에서 나오는 등가교환은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이 <복수는 나의 것>에서만 예를 찾아보자면 장기밀매업자들에게 복수하려 찾아간 류는 자신의 신장을 탈취해간 장기밀매업자들에게 똑같이 신장을 탈취하고, 자신의 딸이 익사했음을 아는 동진은 류를 동일하게 익사시키려 한다. 즉 이것은 일종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세계이고(이 <복수는 나의 것>이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공권력을 해체한 후에 후반부의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점인데, 이는 <올드보이>에서 사설감옥이 등장하고, <친절한 금자씨>에서 사설재판이 등장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동진을 찾아온 형사는 사건의 해결을 동진에게 맡겨버리는데, 따라서 스토리로 보면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거의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되어간다. 즉 서사적으로 구멍이 생긴다), 거의 정신병적일 정도의 등가교환의 시도이다(예를 들어 일부 정신병을 가진 환자들의 경우 동일한 물건, 혹은 신체의 훼손은 반드시 동일하게 보상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실제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경우 실제 등가교환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교환되는 것의 가치가 달라서가 아니라, 교환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교환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교환은 동시에 잉여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그 잉여들이 어떠한 것을 낳는지는 이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가. 동진이나 류는 복수나 유괴로 동일한 교환을 시도했지만, 복수는 잉여를 낳았고, 잉여물들은 이상한 방식으로 돌고돌아 다시 자신에게 돌아와서 자신을 해했다.) 밤샘근무라는 노동과 보수는 혹 교환이 가능할 수가 있더라도(물론 이도 논의의 여지가 있다), 아이의 생명, 혹은 아이의 존재와 돈은 교환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영미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고(그리고 <친절한 금자씨>에서 백선생(최민식)도 그게 가능하다고 금자(이영애)를 속였다. 백선생은 아이들을 죽인 이유가 요트를 사기 위해서였다고 답했다), 그것은 그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 혹은 당대의 학생운동에 대한 허상 같은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샌델의 일부 논의처럼 현재의 자본주의는 점점 무엇이든 교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교환, 등가교환에 대한 환상. 그 환상은 점점 커지고 거의 정신병적이 된다. 그 등가교환에 대한 환상은 박찬욱의 다음다음다음다음 영화 <박쥐>에서 부서질 것이고, 그것을 보기 위해서는 우리는 <올드보이>와 <친절한 금자씨>에서 먼저 몇 개의 죽음들, 혹은 죽음을 피하려는 시도들을 만나야만 한다. 

  

덧.
그리고 박찬욱의 계단이나, 거미와 개미 같은 것도 이 영화에서 처음 등장한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이 영화가 개봉한 10년 전 그 때, 나는 군복무 중이었고, 누나와 마지막으로 극장에서 본 영화로 기억한다. 그 때 누나는 "너는 이런 영화가 좋니?"하고 물었다.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데, 이상하게 그 질문만 또렷하게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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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3.05.02 21: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그런 장면도 있었구나,스토리가 이랬었지.. 하면서 리뷰를 읽었어요. 한편으론 동진이 사진속의 벽지를 보고 딸이 유괴된 곳을 찾았다는게 불쑥 생각났구요 (근데 맞나요?^^;) "너 착한거 안다"라는 대사는 영화 볼때도 가슴에 확 꽃혔던것 같아요. 그 착한사람들이 죽음에 이르는,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시스템들, 그 착한 표정뒤에 놓인 무관심과 결핍된 것들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이 오락가락하네요.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3.05.06 16: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맞아요. 사진의 벽지와 실제의 벽지가 동일하다는 것이 결정적인 단서가 되죠. (그런데 사실 그것을 염두에 두더라도, 이 영화에서 동진이 류를 결국 찾아내는 과정이 좀 아귀가 안 맞아요. 영화가 나중에는 거의 서사가 말이 안 될 지경이 되기는 하죠. 일부러 그런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요.)

      저도 다시 봤을 때 이게 이런 내용이었나..싶었어요. 어떻게 보면 거의 말도 안되게 이야기가 짜여져 있잖아요. 아마 실제로 시나리오 공모전 같은 데에서 시나리오를 이렇게 쓰면 바로 읽자마자 쓰레기통에 던져질 것 같아요.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를 희생시키면서 박찬욱 감독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생각이 되었어요. 아마도 또 보면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2, 오멸

Ending Credit | 2013. 4. 18. 01:22 | Posted by 맥거핀.





최근 어떤 글에서 허문영은 세르쥬 다네의 말을 빌려 세상의 영화를 역사적 영화와 지리적 영화로 구분지었다. 허문영의 설명에 따르면 역사적 영화는 사건의 영화이고, 지리적 영화는 장소의 영화이며, 예를 들어 서부극이 미국의 건국신화라는 설명이 공허하게 들리는 것은 서부극이 역사적 영화라기보다 지리적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 비슷한 구분법을 영화 <지슬>에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 <지슬>은 역사적 영화인가, 지리적 영화인가. 

일단 영화 <지슬>은 역사적인 요소와 지리적인 요소를 둘다 가지고 있다. <지슬>은 흔히 4.3사건이라 불리는 1948년부터 시작된 미군정과 우리군에 의해 저질러진 제주도민 학살사건, 혹은 그에 맞선 민중들의 항쟁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동시에 이는 제주도라는 좁고 한정된 고유의 지역성을 크게 드러내는 영화이기도 하다. 물론 <지슬>이 역사적 영화이자 지리적 영화라고 답한다면 굳이 이 구분법을 끌고 들어온 의미가 없을 것이다. 내 생각에는 <지슬>은 지리적 영화다. 이는 역사적인 이 사건이 이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또한 동시에 이 영화가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감독 이하 제주도 사람들이 만든 제주도 말로 진행되는 영화라고 하는 말도 아니다. 그저 아주 간단하게 말하고 싶다. 이 영화에서 역사적인 배경을 지울 수는 있지만, 그래서 4.3사건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전혀 알지 못하고도 이 영화를 관람하는 데에는 크게 문제가 없지만, 이 영화에서 지리적인 배경을 지울 수는 없다. 이 영화는 시종일관 제주도 방언으로 진행되고, 표준어 자막이 계속 밑에 따라붙는 특이한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제주도를 지운다면, 즉 예를 들어 이 배우들에게 표준어로 연기하도록 했다면, 이 영화는 어떤 형태를 띄었을까, 아니 이 영화가 존재할 수가 있었을까. 아마도 전혀 다른 영화가 되었거나, 영화로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N사이트 같은데서의 20자 평에는 지리는 없고 역사만 있다. 아니 역사는 없고, 이념만 있다. 그것도 이상한 이념만 있다. 지독한 인간들.)

앞에서 허문영의 구분을 따르자면, 그러므로 이는 사건의 영화가 아니라 장소의 영화이고, 그러므로 보아야 할 것은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이 아니라, 이어지는 일련의 장소들이고, 장소를 보여주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군인들이 있는 집과 이들이 있는 동굴의 대비 같은 것 말이다. 바닥에 나뒹구는 제기(祭器)들을 보여주는 첫 장면이 보여주듯이 군인들이 머물고 있는 이 집은 제사가 이루어지지 못한 집이다. 그리고 군인들은 태연하게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시체 혹은 원혼의 옆에서 태연하게 과일을(아마도 제사상에 올라가 있었을 과일을) 깎아서 먹는다. 시체와 원혼과 군인들이 함께 머무는 집. 그래서 이 집은 한없이 으스스하고, 그들이 설혹 귀신들린 행동을 해도(예를 들어 이 부대의 지휘관인 김상사는 마약에 취해 흙바닥에서 헤엄를 치지만, 그것은 동시에 귀신 들린 사람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다지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리고 카메라는 때로 의도적으로 인물의 포커스를 지워버리고, 그들을 종종 흐릿하게 보이도록 한다. 즉 이들을 일종의 영화적인 유령으로 만든다.

반면 이들이 숨어 있는 동굴은 제사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영화는 형식적으로 신위-신묘-음복-소지라는 전통 제사의 구조를 따르고 있으며, 그들은 그곳에서 음복을 하고(무동 할머니가 죽으면서 남긴 감자를 나누어 먹고), 소지를 한다(군인들이 동굴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날려보내는 매운 연기는 소지의 연기이고, 동시에 울기 위한 것이다. 어쩌면 실제의 제사에서 소지를 하는 것, 그러니까 죽은 이를 적은 신위를 불사르는 것은 동시에 울기 위함이 아닐까). 물론 이는 앞서의 으스스한 집과 다르게 공동체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들은 그곳에서 감자를 나누어 먹고, 서로를 걱정하고, 서로를 격려하고, 서로에게 힘을 북돋운다. 그것은 감독이 이 좁은 동굴을 그려내는 방식으로 살펴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이 동굴에서 인물들은 길게 늘어 앉아있고, 카메라는 그들을 각각으로 잡는 것이 아니라, 화면의 왼쪽에서 오른쪽까지 모두 꽉 들어차도록 잡으며, 그들 모두에게 포커스를 배분한다(딥포커스). 그것을 그들이 감자를 나누어 먹으며, 대화하는 씬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데, 이 때는 대화를 이루어내는 몇 개의 무리를 잡되, 그 대화의 상대자가 매번 바뀌며, 앉는 위치도 미묘하게 달라져 있고, 카메라는 마치 끝없이 계속 패닝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이 때의 카메라는 이 좁은 동굴을 무한의 공간으로 확장하는 마법을 부리고 있으며, 그것은 이 좁은 공간에 가득 담겨진 그들의 공동체성, 그 무한의 힘을 긍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두 가지의 비교를 변성찬은 영화와 연극으로 나누어 보았는데, 그것 역시 생각해 볼만한 부분이 있다. 변성찬의 구분에 따르면 군인들의 장면은 영화적인 장면들이고, 주민들의 동굴에서의 장면은 연극적인 장면들이다. 기법상으로 보면 이는 영화적인 기법을 주로 활용한 군인들의 장면과 연극적인 기법을 많이 활용한 주민들의 장면이라는 대비로 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이것은 영화라는 매체의 어떤 죽음과 관련한 은유들(유령들이 뛰노는 스크린과 죽어 있는 관객들)과 연극이라는 매체의 어떤 살아있음의 대비로 볼 수도 있다. 즉 <지슬>은 하나의 제의이자 연극이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이 제의이자 연극은 죽은 영화 속 이들을 위로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남아 있는 사람들(우리 관객들)이 살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제의라는 게 바로 그런 것이듯이 말이다. 다시 말해서 제의는 온전히 죽은 이를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살아 있는 나머지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죽은 혼령을 달램으로써 살아 있는 후손에게 나쁜 기운이 아니라 좋은 기운을 보낸다는 관점에서도 그렇고, 동시에 제의는 죽은 이들이 우리와 그다지 먼 곳에 있지 않다는 점을 일깨우고(죽은 이의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우리도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그러므로 남은 하루하루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즉 제의는 죽은 이와 우리를 연결지으면서도 동시에 선을 그음으로써, 우리에게 삶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케 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로 이루어지는 제의는 죽음이 아니라 삶이고, 동시에 그것은 지슬(감자의 제주도 방언)이기도 하다. 그것이 아마도 이 영화의 제목이 '지슬'인 이유일 것이다. 지슬은 누구에게나, 즉 주민에게나 군인에게나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동시에 <지슬>이 역사적인 영화가 아니라 제주도라는 땅에서 나는 지리적 영화, 아니 감자적 영화이고, 동시에 역사로서의 과거를 다룬 영화가 아니라 현재를 다루는 영화이기도 한 이유다. 삶은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있으니까. 그러므로 제의(祭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덧.
이 말은 덧붙이고 싶다. 이 영화의 이미지는 때로 아름답다. 예를 들어 이 영화는 살인, 학살의 장면 후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까 자연의 모습을 마치 한편의 수묵화처럼 비춘다(물론 살인 장면도 그다지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아마도 그것이 이 영화, 혹은 오멸 감독의 '어떤 태도'라는 것일 터이다. 동시에 그것은 한편으로 아무도 이 죽음을 보고 있지는 않지만, 이 자연, 자연의 정령만큼은 이것을 보고 있다는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것이 이렇게 아름다워도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이들의 처참함 이후에 이런 아름다움을 보아도 좋은 것일까. 아니 처참한 것을 아름답게 찍어도 되는 것일까. 처참한 것은 처참하게 보이도록 찍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이 남았다.

그것은 예를 들어 이 영화 전체적으로도 그렇다. 사실 우리는 영화의 시작에서부터 처음에 보인 거의 모든 주민이 죽을 것을 안다. 그것은 이 영화의 배경이 4.3 사건이라서가 아니라, 앞에서 말한대로 이 영화가 전체적으로 제의의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즉 이 영화가 이들에게 바치는 제의가 되려면 그전에 이들이 죽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어떤 우스꽝스럽고 순박한 모습을 보면서도 미소를 지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한편으로 마치 이들이 진짜 죽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실제의 제주도 사투리를 쓰고, 자막을 넣는 것이나, 거의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배우를 쓰는 것은 이 영화를 마치 한편의 다큐멘터리처럼 받아들이게 했으며, 더욱 웃음을 짓지 못하게 했다. 곧 죽을 사람들을 보는 것, 혹은 그들의 죽음을 실제처럼 받아들이는 어떤 불편함이 나를 지배했으며, 그것은 어떤 실제의 죽음 혹은 학살을 보는 것, 혹은 그것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 - 예를 들어 홀로코스트(쇼아)를 다룬 클로드 란츠만의 <쇼아>에서 실제의 자료화면(죽음의 장면)을 쓰는 것을 '외설스런 짓'이라며 피하고, 오로지 인터뷰만으로만 영화를 구성하는 것, 혹은 그 반대로 전쟁 다큐 <아르마딜로>에서처럼 의도적으로 실제의 죽은 시체, 혹은 죽어가는 인간을 보여주는 것 - 등에 담겨진 질문들과 나오지 않는 답을 생각해보게 했다.

앞에서는 제의가 죽음이 아니라 삶을 위한 것이라 말하고, 그것을 보라고 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거기에서 죽음이 먼저 보이나 보다. 이렇게 이성과 감정의 거리가 머니 제대로 영화보기는 아직도 멀고도 멀다.





- 2013년 4월,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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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아직 안나 카레니나를 보지 못했다

Ending Credit | 2013. 4. 2. 18:18 | Posted by 맥거핀.

(<안나 카레니나>,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의 스포가 들어 있습니다.)





1.
아마도 <안나 카레니나>의 그 유명한 첫 문장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번역에 따라서 약간 뉘앙스가 다르기는 하지만)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문학동네 버전) 그리고 이 영화 <안나 카레니나>는 이 이야기의 또다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레빈의 고뇌에 찬 질문에 대한 일꾼의 뭐 그런 것을 묻느냐는 식의 간단한 답과 함께 끝난다. "사랑에는 이유가 없지요." 어떻게 생각해 보면 이것은 이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을 조금 바꿔서 이야기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사실은 불행한 가정에 나름나름의 이유가 있다면, 행복한 가정에도 나름나름의 이유가 있다(혹은 사실은 둘다 없다). 그러나 그것이 나름나름이 아니라, 고만고만으로 느껴지는 까닭은 행복에는 아무도 그 이유를 캐묻지 않기 때문이다. 즉 행복이나 불행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이유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어떤 자세가 그 행복을 행복한 것으로 만들거나, 그 불행을 불행한 것으로 만든다. 불행한 사람이 더욱 불행해지는 것은 그 불행에 무엇인가 이유를 계속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불행한 자는 그 불행의 근원을 찾아, 어떻게든 그것을 해결하려 하고, 대부분의 불행은 사실 해결할 수 없거나, 사실은 이유가 없기 때문에(즉 본인이 이유라 생각한 것은 대부분 이유가 아니므로) 그런 생각은 그를 더욱 불행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런 악순환에서 겨우 벗어나게 된 실마리를 찾게 된 레빈과 달리 안나 카레니나(키이라 나이틀리)는 그 불행의 이유를 찾는 것이 더욱 불행이 되는 그런 악순환에서 벗어날 길을 끝끝내 찾지 못했고, 결국 뱅글뱅글 도는 기차바퀴에 몸을 던졌다. 그가 왜 나를 사랑하는지, 혹은 왜 나를 사랑하지 않는지에서 계속 '왜'에 방점을 찍고, 그 '왜'가 또다른 '왜'를 낳는 순환지옥, 끊임없이 뱅글뱅글 도는 악순환의 기차바퀴. (이 영화에서 계속 이 돌고도는 이미지가 반복됨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것이 내가 이해한 이 <안나 카레니나>의 이야기이다.

2.
물론 이 영화 <안나 카레니나>에는 이 이야기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이야기 외에 다른 이야기들도 들어있으며, 그 이야기 자체 외에도 주목할 만한 형식적인 부분이 있다. 많이 이야기되었듯이 이 영화는 연극 기법의 많은 부분을 차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한편으로 이 영화를 통해 영화의 어떤 것을 생각해 보게 하며, 따라서 이 영화를 도리어 일종의 영화적인 텍스트처럼 보이도록 만들고 있다. 즉 이 영화는 많은 부분에서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을 부재시키거나, 다른 방식으로 부각시킴으로써 우리가 영화라는 것의 작동방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이야기가 전환될 때 카메라와 배우는 그대로 둔채 무대 배경을 바꾸거나, 문이 열리면서 새로운 배경이 펼쳐지고, 새로운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을 씀으로써, 영화에서의 씬의 전환, 즉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있는 씬과 씬의 연결의 기이함(즉 예를 들어 우리는 영화에서 누군가 집 안에서 잠자리에 들고, 바로 다음 장면에 그가 거리에서 돌아다니는 장면을 보더라도 그것에 대해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즉 그가 잠자리에 든 다음에 일어나는 장면이 없더라도, 그가 당연히 일어나서 집밖으로 나왔겠거니 하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혹은 충돌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그것은 이 영화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는 씬과 씬의 연극적인 연결 외에도 다른 방식으로도 펼쳐지는데, 예를 들어 무도회 장면에서 안나와 브론스키(애런 존슨) 커플을 부각시키거나, 극장에서 안나가 여러 사람들의 경멸어린 눈초리를 받는 장면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영화에서라면 한 커플을 부각시키는 방법은 카메라를 활용한다면 그렇게 문제될 것은 없다. 원경에서 줌으로 잡거나, 혹은 클로즈업을 활용하면 된다. 그러나 연극을 보는 관객의 눈에는 줌 기능이란 없고, 그러므로 연극에서라면 다른 방식을 써야할 것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그 커플에만 조명을 주거나, 이 영화에서처럼 다른 커플을 정지시키고 안나 커플만이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은 안나가 극장에서 여러 사람들의 경멸어린 주목을 받게 되는 장면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사람들의 경멸적인 수군거림과 안나의 미세한 떨림을 클로즈업으로 잡아내는 것이 일반적인 영화의 방법이라면, 이 영화에서는 대신 다른 사람을 정지시키고, 안나의 히스테리컬한 반응만이 움직이도록 하는 방법을 쓴다. 이는 물론 '실제'가 아니지만, 훨씬 더 극적이고, 적어도 보는 이를 자극시킨다는 목적을 충분히 달성한다.

3.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종종 바깥으로 멀찍이 물러나 이 영화가 연극 무대라는 하나의 공간 위에서, 계속 사실은 하나의 연극으로서 펼쳐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명이 둘러져 있는 단 위의 무대, 그 안에서 안나 카레니나와 브론스키와 카레닌(주드 로)은 위태로운 치정극을 펼친다. 그리고 카메라는 종종 뒤로 물러나 그것이 하나의 무대임을 다시 관객에게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치정극 속의 주인공들만은 아니다. 그 무대 바깥에 위치한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안나와 브론스키가 처음 만나는 기차 객실 안이라는 무대 안의 공간과 그 바깥에서 안나가 마주치게 되는 검댕을 잔뜩 뒤집어쓴 기차 화부의 대비. 즉 그 무대 안에 안나와 브론스키와 카레닌이 있다면, 그 무대 밖에는 그 치정극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 있다. 영화 <안나 카레니나>가 흥미로운 것은 무대 안의 이들을 보여주면서도 그 무대 밖에서 존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인데, 레빈과 같이 일하는 레빈 집의 일꾼들이나 레빈에게 낮은 신분의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낫다고 충고하는 아마도 사회주의자이거나 혹은 공산주의자일 듯한 레빈의 형과 같은 인물이 그들이다.
 
다시 말해서 영화 <안나 카레니나>는 안나와 브론스키와 카레닌의 이야기를 무대 위로 올림으로써 그 무대 밖에서 존재하고 있는 이들을 상기시킨다. (<씨네21>에서 보니 제작비 및 기타 문제로 러시아 현지 로케이션이 무산되자 감독 조 라이트가 주요 배경을 (스튜디오에서 찍을 수 있는) 극장으로 바꿨다고 하는데, 이는 도리어 영화에 상당한 플러스로 작용하고 있다.) 즉 무대 위에 이들 구체제의 귀족들이 있다면, 그 무대 바깥에는 그 무대에 오르지 못한 러시아 하층민이 있다. 즉 이들 러시아 하층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의 처절한 치정극은 있는 자들의 한판 연극이며, 환한 불이 켜진 무대 위에서 펼치는 한편의 꼭두각시놀음이다. 영화에서도 잠깐 스치듯 지나갔지만, 낭만적 사랑, 혹은 한껏 격식을 갖춘 사랑놀음은 구체제의 유물이다. 사교계의 어지러운 밀당은 하층민의 입장에서 보면 있는 자들의 감정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브론스키가 죽은 화부에게 건넨 한움큼의 돈은 한순간의 시혜이고 가난한 자들이 아주 잠깐 보는 화려한 연극에 지나지 않는다. 연극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고, 언젠간 끝난다. (안나의 오빠는 카레닌에게 이혼은 하더라도 식사는 하고 가라고 한다. 그렇다. 이혼은 해도 식사는 해야한다, 누구나.) 영화를 보다보니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나 카레니나>는 치정극이자, 혁명극이기도 하다.


4. 
물론 그 무대의 바깥에는 러시아 하층민들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연극을 혹은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들이 있다. 무대 위에 귀족들의 사랑싸움이 있고, 무대 밖에 그것과 따로 분리되어 존재하고 있는 하층민들이 있다면, 그 더 바깥에는 스크린 밖의 우리들이 있다. 즉 우리는 사실 무대와 혹은 영화와 거의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아까 씬과 씬의 연결, 혹은 숏과 숏의 연결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그러므로 숏과 숏의 연결은 한편으로 무대 밖의 우리를 어떻게든 참여시키려고 하는 영화의 전략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누군가의 대화를 본다고 했을 때 우리가 아주 최선을 다해 좋은 위치를 잡아도 두 사람의 옆모습을 볼 수 밖에 없고, 우리는 그 대화의 바깥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영화는 대신 당신에게 숏과 반응숏(리버스 숏)을 제공한다. 어떤 반응숏을 보여준다는 것은 여러가지 효과가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는 그것을 보고 있는 당신이 그 반응에 반응하라는 것이다. 이런 노골적인 반응숏 외에도 아까의 예를 다시 가져와본다면 누군가가 잠을 자고, 그 다음에 그가 거리를 돌아다니는 씬을 붙인다면 영화는 이 때 당신에게 그 중간에 당신이 참여하기를 요청하는 것이다. 즉 그가 일어나서 신발을 신고, 집밖으로 나가는 장면에 대한 당신의 상상의 개입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눈속임이고 미봉책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신이 그 영화에서 분리되는 것을 막을 길은 없다. 당신이 개입하지 않아도 영화는 계속 씬을 이어나갈 것이고, 언젠가는 끝날 것이고, 영화관은 당신에게 나갈 것을 요청할 것이다. 이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까. 


5.
그것의 하나의 대답은 알랭 레네의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와 같은 것이 아닐까. 저명한 극작가 앙트완이 죽고 생전에 그의 연극 '에우리디스'에 참여했던 여러 배우들은 그의 장례식에 참석할 것을 요청받는다. 그들을 모아놓고 대형화면에 등장한 앙트완은 그들을 이자리에 모이게 한 이유가 있다며, 그들이 그의 유작인 젋은 배우들로 새롭게 구성된 연극 '에우리디스'의 리허설을 보고 이것을 무대에 올려도 괜찮을지 판단해 달라고 한다. 그런데 이 촬영된 연극 '에우리디스'가 스크린에 상영을 시작하자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는데, 이 참석한 배우들이 상영하는 화면에 맞춰 연기를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점점 이 화면과 참석한 배우들의 연기가 혼합되고, 배우들이 앉아있던 장례식장은 연극 '에우리디스'의 무대로 확장되고, 없던 공간들이 생겨난다. (이와 비슷한 것을 <안나 카레니나>에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문이 열리고, 없던 눈밭이 나타난다거나 하는 것은 이와 거의 유사하다.) 즉 이 앙트완의 장례식장에서 상영되는 연극의 관객이 될 것을 이 배우들은 요청받았지만, 이들은 단지 관객에 머무르지 않고 그들 스스로가 이 연극의 배우가 됨으로서 관객의 지위를 벗어난다.

다시 말해서 일반적으로 영화는 관객들에게 하나의 모순된 지위를 부여한다. 위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영화는 관객이 영화의 무엇인가에 개입하기를 바라지만, 동시에 그 개입은 제한적이어야 한다. 즉 그 개입은 영화가 허락한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즉 일반적으로 어떠한 영화감독도(동시에 어떠한 옆자리 관객도) 주인공의 대사에 맞춰서 당신이 연기를 해주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관객은 영화에 들어올 것을 끊임없이 유혹받지만 동시에 그 영화에서 물러날 것을 끊임없이 요청받는다. 그러므로 스크린 위에서 존재하는 것은 유령들이다. 우리는 환영들, 유령들을 보며, 두 시간 동안 그 유령들의 움직임에 빠져있고, 사실은 그 두 시간 동안 그 유령들의 움직임에 홀려 거의 죽어있다.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영화를 관람하는 것은 일종의 임사체험이다. 영화가 끝난 후 밖으로 나왔을 때 뭔가 세상이 이상하게 보인다면, 당신이 그 사이에 잠깐 죽어있었기 때문이다. 당신 안에 있던 무엇인가가 당신이 그 유령들의 움직임에 홀려 있던 사이에 스멀스멀 기어나왔다가 겨우 다시 기어들어갔기 때문이다.    
 
6.
그러므로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의 시작은 거의 임사체험의 시작이다. 알 수 없는 상대방에서 흘러나오는 기계적인 목소리를 듣게 되는 이 반복의 시작은 임사체험을 알리는 포고다. (그 화면은 참으로 으스스하다.) 그리고 그들은 앙트완의 장례식, 현계와 선계의 사이에 있는 듯한 오묘한 공간에 들어와 죽은 자의 환영을 받는다. 자 나는 유령일세, 자네들도 나처럼 유령이 되어보지 않겠는가. 유령이 되어보라는 것은 이 영화의 관객이 되라는 말이다. 관객이 되어 이 유령들이 펼치는 향연을 맛보는 유령이 되어달라는 말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참석한 배우들은 앙트완의 청을 곧이곧대로 따르지 않는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연기를 하기 시작하고, 곧 그들은 이 영화의 관객이 아니라, 이 영화의 배우가 된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지금 죽음에 대해 사투를 벌이고 있다. 한 번 죽어보라는 요청에 어떻게든 죽지 않으려 발버둥을 치고 있다. 필사적으로 연기를 함으로써 말이다.

여기에 한 가지 사실을 붙이면 더 재미있다. 바로 이들이 벌이는 연극이 '에우리디스'라는 것. 흔히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로 알려져 있는 그 이야기. 저승의 신 하데스가 데려간 에우리디케를 찾아 저승으로 내려간 오르페우스가 하데스를 감복시켜 에우리디케를 데리고 나오는데 성공하지만, 거의 지상에 다다랐을 무렵 절대로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된다는 약속을 어겨 다시 저승으로 에우리디케가 영영 사라져버린다는 슬픈 이야기. 어쩌면 우리가 여기에서 방점을 찍어야 되는 것은 그들의 슬픈 사랑이나 그 얼마를 참지 못한 오르페우스의 인내심 부족이 아니라 혹시 '돌아본다'는 사실은 아닐까. 그 본다는 것. 우리가 돌아보았을 때 다시 환영이 되고 마는 무엇인가에 대해. 아무튼 그랬다. 오르페우스에게 필요한 것은 빠른 발놀림이었지, 결코 보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면 조금 이상한 질문. 혹시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가 갑자기 무서워진 것은 아닐까. 자기 손을 잡고 따라오고 있는 이것이 혹시 괴물은 아닐까 무서웠던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에우리디케인지 뭔지 모를 그것을 저승으로 돌려보내기 위해서 일부러 뒤를 돌아본 것은 아닐까. 아무튼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에서 앙트완은 저승에서 귀환했지만, 그는 결국 다시 저승으로 끌려들어갔고, 어쩌면 앙트완이 주최한 임사체험에서 달콤한 죽음의 유혹에 맞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을 친 이들은 앙트완의 장례식장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지도 모른다. 혼자 저렇게 가서 얼마나 다행이야. 그러나 안심은 이르다. 스크린 속의 유령은 그들의 옆에서 몰래 몸을 숨기고 있으니까.)

7.
알랭 레네는 말한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이것은 아마도 두 가지 중의 하나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으니 곧 놀라운 것을 보게 된다는 것이 하나, 아니면 영화를 다 본 당신에게 건네는 조소. 당신은 무엇인가를 보기는 했으나, 사실은 아직 아무 것도 보지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당신이 바보처럼 그 곳에서 넋놓고 앉아있는 동안 사실은 당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 당신은 그저 잠깐 죽어있던 것 뿐인걸.

영화는 2-3시간이라는 한정된 시간 속에서 깜깜한 극장에서 좁은 의자에 앉아서 봐야한다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가진다. 그러므로 영화는 보는 이에게 시간과 공간을 극복하기 위한 몇 가지의 마법을 쓴다. 예를 들어 플래쉬백을 사용하는 것은 시간을 극복하기 위한 장치이고, 분할화면으로 여러 공간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은 공간을 극복하기 위한 장치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일종의 마술, 눈속임일 뿐, 그렇다고 해서 시간과 공간은 극복되지 않는다. 알랭 레네는 시간과 공간을 다른 방식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그것은 기억과 상상이다. 기억은 과거의 시간을 당신에게 돌려놓으며, 상상은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공간을 당신에게 제공해준다. 그리고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이 기억과 상상을 당신에게 요청하는 영화, 죽음으로 유혹하지만, 그 죽음에 발버둥치라고 이야기하는 영화다. 아직도 기억하고, 상상할 것은 많으니까. 우리는 그럼으로써 무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 2012년 3월 서울아트시네마, 롯데시네마 에비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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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3.04.06 14: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에 영화보면서 연극적 장치나 안나-카레닌-브론스키,키티와 레빈커플에 너무 집중했는지 그외 등장인물들, 무대밖의 사람들이나 배경에 대해선 놓친 부분이 많아요. 맥거핀 님 리뷰읽으며 그런 부분들을 확인하게 되는군요. 두번째 사진은 경마장에서 안나가 알렉세이!라고 외치면서 일어나는 장면이네요.공교롭게도 카레닌과 브론스키 모두 알렉세이라는 이름을 가졌는데 안나가 불렀던건 물론 후자였죠. 연극무대로 연출된 장면이라서 그 충격과 여파가 무대를 흔들정도로 느껴졌었어요.무대 위 카레닌의 독백장면도 그랬구요.

    이제 영화가 끝났고 영화관을 나왔으니 홀려있던 유령들과 작별을 하고 상상의 밭을 가꿔보고싶은데 그러러면 아무래도 원작 소설을 읽어보는게 좋겠죠. 실은 영화보고 소설 읽고싶어서 얼마전 책을 구입했어요. 금방 읽을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쨋든 읽기 시작은 했으니까요.. ^^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3.04.09 14: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요즘에 고전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이 꽤 나오더군요. 그것도 단순히 고전을 시각적으로 묘사한 영화가 아니라, 영화적으로 재해석한 영화들이어서 흥미로워요. 이 <안나 카레니나>도 그렇고, 얼마 후에 나온다는 <위대한 개츠비>도 그렇고요. 감독이 바즈 루어만이라니 보통의 개츠비는 아니겠지요.

      아무튼 저는 뭔가를 새롭게 해보려는 영화는 좋아요. 그게 과잉된 시도이고, 때로는 무엇인가 많이 안맞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새로운 시도들 끝에 좋은 무엇인가가 탄생하는거니까. 이 영화도 이런 시도가 조금 호불호가 갈리는 것 같은데, 저는 지지하고 싶은 입장입니다.

      아..저는 1권이라면 모를까, <안나 카레니나>와 같은 대작은 쉽게 시작할 엄두가 안나네요. 요즘엔 단편도 잘 못 읽어요. 집중력이 영 떨어졌음..^^

거짓으로 밝혀내는 거짓의 메커니즘

The Book | 2013. 3. 18. 17:01 | Posted by 맥거핀.
프라하의묘지.1움베르토에코장편소설
카테고리 소설 > 기타나라소설
지은이 움베르토 에코 (열린책들,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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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트 에코의 소설들은 늘 여러 겹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실, 사실적인 허구, 허구적인 사실, 완전한 허구, 사실들의 주석, 사실들의 허구적인 주석, 허구들의 사실적인 주석, 각종 기호들, 특정의 양식, 원본과 위본, 출처를 알 수 없는 이야기들, 생몰연대가 불확실한 인물들, 사물들의 연대기, 떠도는 풍문들 등등. 우리는 그의 소설들에서 늘 이것들을 구별해낼 수 없었고, 사실들과 허구들과 기호들과 이야기들과 풍문들과 진짜와 가짜, 그 사이 어디엔가에서 늘 길을 잃다가 에코가 선심쓰듯 마련해준 출구로 겨우 기어나오곤 했다. 사실 그곳이 제대로된 출구인지 전혀 확신하지 못한 채로 말이다. (아마도 대부분은 분명 잘못된 출구이거나 혹은 사실은 입구였을 것이다.) 즉 에코의 소설에는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이야기를 둘러싼 다른 어떤 것들이 존재했고, 그 존재를 파악하기가 힘든 것은 한편으로는 그 이야기를 하는 방식의 문제에서 연유한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소설을 '기호학적 실천'이라고 생각하는 그의 태도에서 상당수 비롯된다. 기호학은 상징이나 도상, 지표와 같은 것들의 의미 체계를 연구하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그것이 지시하는 어떤 것보다, 그 기호 자체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기호학은 그것이 의미하는 어떤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 그 기호체계 자체의 규약을 찾아내려고 하지만, 때로는 그 기호가 의미하는 어떤 것보다 기호 자체의 작동이 더 큰 다른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에코의 소설에서 그 이야기 자체는 짐짓 어디에선가 발견된 원본의 일부라던가, 혹은 필사본이라던가, 숨겨진 내부의 문건들이라는 식의 형태를 띠었고, 그것은 이 소설 <프라하의 묘지>도 마찬가지이다.  

<프라하의 묘지>는 크게 세 가지의 문건이 뒤섞여 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거짓과 위조를 일삼으며 거짓된 문서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살아가는 공증인 시모니니가 기억을 잃은 채로 자신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적어내려가는 일기가 그 하나이고, 그의 가까이에서 살면서 그 시모니니의 일기를 읽으며 거기에 자신의 생각을 첨부하는 역시 기억을 잃어버린 달라 피콜라 신부의 기록이 그 하나이며, 다른 하나는 이 두 개의 문건을 후대에 입수한 어느 이름모를 화자(물론 에코 자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가 재구성한 기록이 그 하나이다. 그런데 에코는 이 세 개의 문건을 분리된 플롯으로 구성하지 않고, 이 세 명의 화자가 번갈아 등장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뒤섞는 형태로 플롯을 구성하고 있는데, 이는 또 각각의 분절적인 사건이 계속 이어지는 형태를 취함으로써, 19세기 신문 연재소설의 형태를 연상시킨다. 또한 여기에 에코는 자신의 장기를 발휘하여 19세기 대중소설의 문체를 모방함으로써 독자에게 읽는 재미를 더해 주도록 노력하고 있기도 하다. 플롯이 아닌 스토리로 보면 이 <프라하의 묘지>는 공증인 시모니니의 거짓와 사기, 조작으로 점철된 일대기이며, 동시에 반(反)유대주의 문서인 '프로토콜'의 탄생 과정인데, 여기에서 에코는 이 스토리와 이 고유의 형식을 결합시킴으로써 이 소설을 단지 형식의 과시 이상의 것으로 이끌고 있다.

즉 에코는 이 소설에서 '프로토콜'이라는 실제로 존재하는 문서, 이 반유대주의로 점철된 문서가 단지 조작과 거짓과 사기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혀내기 위해, 그 기원을 추적하는 것처럼 만들어진 이 소설 <프라하의 묘지> 자체를 일종의 거짓 문서, 위작처럼 보이도록 만들고 있다. 이를 일종의 내용과 형식의 결합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이는 하나의 문서가 얼마나 말도 안되는 허구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지를 밝히기 위해, 그 문서를 둘러싼 모든 것, 그러니까 그 문서를 만들어낸 시모니니라는 저자의 모든 것을 허구로 받아들이도록 독자를 이끄는 것이다. 즉 에코는 이 내용이 거짓임을 보여주기 위해 '이것이 거짓이다'라고 독자에게 간단하게 이야기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형식을 거짓되게 만들어냄으로써 독자가 읽는 과정에서 스스로 '이것이 거짓임'을 깨닫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조금 다른 얘기일지도 모르지만 예를 들어 이러한 것을 말할 수 있다. 알렉산더 페인의 영화 <디센던트>에서 초반부에 '하와이를 단지 휴양지로만 여기지 말라, 여기에도 다 나름의 삶이 있다'는 주인공의 말이 나온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가장 의아한 것은 그럼에도 이 영화는 하와이를 휴양지처럼 '보이게' 찍었다는 것이다. 그 내용과 그 보여주는 것이 다를 때, 우리는 그 영화에서 최종적으로 무엇을 받아들이게 되는가. 이것이 소설의 경우라면 어떨까.)

물론 여기에서 주의할 점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이 자체가 거짓으로 보이기는 하되, 이것은 완전한 허구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 문서 '프로토콜'은 허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아우슈비츠로 되돌아왔기 때문이다. 즉 이 책 26장의 제목이기도 한 히틀러의 '마지막 해결책'이라는 실제로 되돌아왔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I, 11)에서 이렇게 썼다. "그 민족의 삶이 끊임없는 거짓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저 유명한 <시온 장로들의 프로토콜>에 분명하게 나와 있다. <프랑크푸르터 차이퉁>은 매주 징징거리며 주장하기를, 그 문서가 허위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그 문서가 진짜라는 가장 훌륭한 증거이다. (......) 그 책이 온 국민의 공동 자산이 될 때에는 유대 민족의 위험이 제거된 것으로 여겨도 되리라." - p.766) 그리고 어떤 것이 완전한 허구라고 여겨지는 순간, 그 실제로 일어났던 어떤 것(예를 들어 제노사이드)마저도 마치 허구인 것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코는 시모니니를 제외한 거의 모든 인물을 실제의 인물들로 배치하고, 실제 일어났던 사건들, 즉 예로 들어 가리발디의 원정이라던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파리 코뮌, 드레퓌스 사건 등에 이 시모니니를 깊숙하게 개입시킨다. 즉 실제의 사건 속에 단 하나의 거짓 인물을 투입함으로써 그의 거짓이 더욱 도드라지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적절하게 효과를 거두며, 그것은 물론 이런 사실적인 허구, 혹은 허구적인 사실이 에코의 장기이기 때문이다.

그 허구처럼 보이는 사실, 혹은 사실처럼 보이는 허구, 즉 사실과 허구를 뒤섞는 것은 에코의 장기일 뿐더러 동시에 이 주인공 시모니니의 장기이다. 시모니니는 위조된 문서를 만들어 내는 몇 가지의 원칙을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그것은 예를 들어 어떤 자에게 무엇인가를 믿게 하려면,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라 그가 이미 믿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한다는 것, 적당한 적을 설정하여, 읽는 이의 분노를 그것에 집중시켜야 한다는 것, 혹은 한번에 한가지에 대해서만 혐오감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 그러나 그러면서도 동시에 어떤 읽는 이의 흥미 혹은 재미를 돋우어야 한다는 것 등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런 것이야말로 이 소설 <프라하의 묘지>가 가지는 전략이다. 이것은 소설의 초반부부터 전개되는데, 주인공 시모니니는 프랑스인, 유대인, 독일인, 러시아인, 공화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 사제들, 여자들 등 자신 외의 거의 모든 집단들에게 혐오감을 내비치며, 그들 모두를 번갈아 적당한 적으로 등장시키면서 어떤 분노가 단계적으로 옮아가도록 한다. 동시에 그가 적으로 설정하는 음모나 꺼림칙한 것들로 가득한 집단은 그가 만들어낸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사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미 믿고 있는 프리메이슨회나 예수회, 유대인들 등에 대한 어떤 것에서 기초한다. 즉 에코는 이 소설 <프라하의 묘지>에서 시모니니가 구사하는 위조의 전략을 이미 충분히 이용하고 있다.

이것을 이렇게 말할 수 있는데, 다시 말해서 에코가 원하는 것은 이 소설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왜냐하면 이 자체가 한 권의 위조된 문서이며, 거짓된 기록이기 때문이다. 보통의 소설은 읽는이가 주인공에 동화되어 그의 행동을 이해하고, 그와 함께 사건의 전모를 상세하게 이해하는 데 그 목적이 있지만, 이 소설은 반대로 주인공을 혐오하게 하거나, 그가 벌인 거짓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는 것, 즉 이치에 닿을 수 없도록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그것을 위해서 에코는 몇 가지의 전략을 쓰고 있는데, 앞에서 말한 플롯을 복잡하게 구성하거나, 사건을 분절시키거나 하는 것들도 그러하거니와 죽었던 인물, 혹은 죽었다고 믿어졌던 인물을 다시 등장시키거나, 매번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키는 것 등도 그러하다. 즉 이 소설의 줄거리가 아무리 읽어도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작가 에코가 (의도한 바대로) 그것을 읽는 이에게 이해시킬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주인공 시모니니의 미식의, 아니 식탐의 기록을 나열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가 먹는 음식의 아주 상세한 레시피를 정밀하게 기록하는 것은 독자의 식욕을 돋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식욕을 멈추게 하여 안 그래도 정나미 떨어지는 모두까기인형 시모니니에 대한 독자의 혐오감을 북돋우는 데에 그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는 타락한 영혼의 소유자인 시모니니의 탐욕한 모습을 극대화시키고, 동시에 이러한 음식문화에 담긴 어떤 근대적인 탐욕을 밝히는데에도 그 목적이 있다.)

<프라하의 묘지> 마지막 장을 덮고 우리는 묻는다. 지금까지 내가 읽은 것은 무엇이지? 이 이야기를 어디까지 믿어야 하지?  왜냐하면 알 수 없는 기원을 파헤친다고 들려준 이 이야기 자체가 도리어 알 수 없는 기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이 수많은 이야기들이 어떤 다른 것에서 기원된 것임을 알게 되지만, 그 기원에 근처한 이야기들 거의 대부분 역시 다른 소설들, 그러니까 다른 이야기들에서 기원한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이렇게 물을 수 밖에. 그렇다면 그 기원에 근처한 이야기들은 또 무엇에서 기원한 것인가? 그리고 이 질문은 아마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늘 그 반대에 위치한 질문들,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어디까지 믿어야 하지,가 아니라, 어디까지 이 이야기를 믿지 말아야 하는가,라는 회의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거짓의 메커니즘이 실제와 같이 굴러간다고 해도, 다시 말해서 그 메커니즘이 진실이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만들어져 있다고 해도, 그 메커니즘의 재료가 거짓인 한 그 끝에는 결국 거짓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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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3.03.18 21: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꽤 오래전에 <장미의 이름>을 읽었었는데요, 그땐 소설속의 허구적 이야기들이 12-13세기에 정말로 일어남직했던 사건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아드소나 윌리엄 같은 수도사는 실제로 존재했었고 구체적으로 묘사된 당시의 수도원의 실상들도 사실처럼 여겼졌었죠. 허구와 실제의 경계가 구분이 안될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글을 읽다보니 <프라하의 묘지> 는 작가가 오히려 독자로 하여금 믿음보다는 의심하고 회의하도록 의도한 소설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하지만 꽤 흥미진진할 것 같아요 ^^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3.03.19 23: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예전에 <장미의 이름>을 읽으며, 그 이야기에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읽으면서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이기에 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물론 그 이후에 에코의 명성은 널리 알려졌지만요.

      <프라하의 묘지>도 마치 우리가 그 당시에 그 장면을 보고 있는 듯한 사실에 기초한 정밀한 허구들이 사로잡는 부분이 있어요. 그런데 제 느낌에는 에코가 일부러 곳곳에 과잉을 보여주는 듯한 느낌이 있더군요. 이래도 안 질려? 이런 느낌으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