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레카(eureka), 아오야마 신지

Ending Credit | 2008.04.17 01:56 | Posted by 맥거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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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막바지, 사와이 아저씨(야쿠쇼 코지)는 코즈에(미야자키 아오이)에게 외친다. “돌아가자!” 그리고 코즈에의 밝은 웃음이 비치고, 지금까지 잿빛으로 진행되던 화면은 칼라로 바뀐다. 그리고 그 둘은 버스에 올라타고, 화면에는 이 영화의 제목이자, 의미심장한 말이 떠오른다. ‘EUREKA' (참 기억에 남는 아름다운 엔딩이다).............. eureka. 아르키메데스가 부력의 원리를 발견하고 외쳤다고 전해지는 그 말. 깨달음의 언어. 왜 이들은 이렇게 말하는가. 누가 잿빛으로 세상을 보던 코즈에에게 총천연색 세상을 선물했는가.

이 엔딩이 의미심장한 이유는 아오야마 신지의 아이가 처음으로 집에 돌아가기 때문이다. ‘헬프리스’의 마지막에서 돌아갈 곳을 잃은 야스오는 스스로에게 총알을 선물하고, 켄지는 야스오의 동생 유리를 데리고, 돌아올 기약이 없는 먼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새드 배케이션’의 켄지 역시 집에 돌아가지만, 다시 길을 떠나게 되고, 고의와 실수가 뒤엉켜 수형 생활이라는 또 긴 여행을 다시 떠나게 된다. 이런 아이들이 그 중간 ‘유레카’에서는 집에 돌아간다. 그래서 사와이 아저씨의 입으로 말해지는, 이 영화 전체의 마지막 대사는 반갑다. “돌아가자!” 무엇이 이들을 집에 돌아가게 만드는가. ‘헬프리스’와 ‘새드 배케이션’의 외전(外傳) 격이나, 어떻게 보면 ‘헬프리스’의 켄지와 지극히 비슷한 상태에 빠진 이 소녀는 왜 집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는가.

 

아오야마 신지의 아이들은 공통적으로 부모를 잃는다. ‘헬프리스’의 켄지는 어머니가 집을 나가버리고, 아버지는 병실에서 목을 매며, 코즈에와 코즈에의 오빠 나오키의 부모 역시 버스 납치 사건의 후유증으로 사라져 버리며, ‘새드 배케이션’의 중국인 소년 ‘아춘’은 컨테이너 박스 속에서 아버지가 죽어 버린다. 그러나 ‘헬프리스’의 켄지와 ‘유레카’의 코즈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켄지는 아버지를 잃고 주위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태에서 먼 길을 떠나게 되지만, 코즈에는 곧 사와이 아저씨라는 유사 아버지를 가지게 된다. 이는 ‘새드 배케이션’에서는 조금 복잡한 양상으로 나타나는데 아춘은 친아버지를 잃고, 곧 켄지라는 유사 아버지를 만나지만, 타의에 의해서 그 유사 아버지와 헤어지게 된다. 친아버지를 잃어버린 켄지는 ‘마미야’라는 유사 아버지를 만나지만, 그 유사 아버지의 친아들을 죽임으로써 유사 아버지를 다시 잃는다. 아무튼 여기에서는 ‘새드 배케이션’은 ‘유레카’ 그 이후의 이야기이므로 논외로 하자면, ‘헬프리스’의 켄지가 먼 길을 떠나고, ‘유레카’의 코즈에가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사와이 아저씨’라는 유사 아버지가 있고, 없음에서 그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결국 한 인간이 어떤 고비를 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른, 그것도 제대로 된 어른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것. 그것을 이 영화는 말해주지만, 동시에 작은 불안감도 던져준다. 이 사회에는 과연 그런 어른이란 존재하고 있는가. 그런 어른이 존재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 좁게 보자면 일본이라는 사회이고, 넓게 보자면 현대라는 사회가 아닌가. 그것은 영화 중반부터 시작되는 사와이 아저씨의 기침이 계속 반복되면서부터 시작된다. 다름 아닌 그 기침이란 사와이 아저씨가 살인자라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면서부터 얻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코즈에라는 한 생명을 살린 이 사와이 아저씨라는 인물은 과연 이 현대의 일본 사회에서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인물인가, 아닌가. (이런 사와이 아저씨를 ‘심정적으로’ 지지하는 인물은 아키히코나 시게오 정도. 그러나 아키히코는 이 사회에서 밀려난 인물이고, 사와이를 체포한 형사는 사와이에게 당신이 싫다고, 이유없이 싫다고 말한다. 아마도 이 형사, 혹은 사와이의 형의 시선이 현대의 일본 사회, 혹은 넓게 보자면 현대 사회의 시선일 것이다.)

이러한 불안감은 ‘새드 배케이션’에서는 더욱 증폭된다. 극 중 아춘을 납치해 간 중국인은 켄지에게 말한다. “일본 사람은 아이를 잘 키울 수 없습니다.”이 말은 암시하는 바가 있다. ‘새드 배케이션’에서 사와이와 비슷한 캐릭터라고 볼 수 있는 마미야도 자신의 친아들은 결코 제대로 키워내지 못했다. 그리고 켄지도 자신의 아들인 아춘을 잃는다. 즉 아오야마 신지가 ‘헬프리스’에서는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내고, ‘유레카’에서 그 해답을 제시했다면, 다시 ‘새드 배케이션’에서는 ‘그렇다면 그 유사 아버지들은 이 현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던지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아오야마 신지는 ‘유레카’에서 막연한 불안감을 던지며, 다음을 예고했듯이, ‘새드 배케이션’에서 역시 막연한 실마리를 던진다. ‘치요코’라는 강한 어머니의 등장. 이 뺨을 맞으면서도 웃을 수 있는, 그리고 모두들 기다리고 있으니 돌아오게 될 것이다 라고 켄지에게 당당하게 말하는 이 여자는 무엇을 암시하고 있는가. 그리고 사와이라는 유사 아버지를 잃었음에도 당당하게 살아가는 코즈에라는 이 여자는 또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유레카’에서 남자아이인 ‘나오키’는 아버지를 잃고 야스오와 같은 길을 걷지만, 코즈에는 끝내 살아남아, 집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헬프리스’의 해답편인 ‘유레카’를 보고, ‘새드 배케이션’의 해답편인 그 다음의 어떤 영화를 기다리게 된다. 그 해답이 제시되면, 아마도 이를 허문영 평론가가 이 3부작 영화를 보고 말한 ‘전후 일본 세대의 정신사’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그 해답은 영원히 제시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