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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꿈

The Book | 2016. 3. 9. 03:04 | Posted by 맥거핀.
그들 - 10점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김승욱 옮김/은행나무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가끔 그런 이야기들이 있다. 이야기의 의미나 교훈을 찾아내는 것을 포기하고, 그저 인물들의 삶을 따라 읽게 되는 이야기. 더 읽어내려가는 것이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그들의 삶을 누군가가 지켜봐주어야 할 것 같은 이야기. 사실과 환상, 실재와 가상, 나의 생각과 주인공의 생각이 얽혀들어가,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점점 분간하기 어려운, 종내에 이르러서는 그것을 굳이 구분하는 것이 별 의미가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이야기. 거짓이길 바라는 이야기가 실제이고, 실제이기를 바라는 이야기가 거짓인 이야기. 고통스러우면서도 읽어내려갈 수밖에 없는 독서. 나에게는 조이스 캐롤 오츠의 <그들>이 그랬던 것 같다. 

 

<그들>에게는 두 가지의 장치가 있다. 하나는 이 소설이 로레타라는 소녀의 어린 시절부터 그녀가 낳은 줄스, 모린, 베티 등이 성인이 되던 시기까지를 종(縱)으로 훑고 있는 소설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이 소설은 결코 한 가지의 사건이 중심이라고 말할 수 없다. 어떤 특정한 하나의 사건을 횡으로 펼쳐내, 그 사건이 중심이 되어서 이야기가 펼쳐지는 구조가 아니라, 이들의 삶을, 이들이 그려내는 삶의 궤적을 계속 지치지 않고 꾸준히 따라가는, 어떻게보면 사회학에서 다루는 종적 연구의 한 형태라고 볼 수도 있다(책 날개의 작가 소개에 이런 대목이 있다. "오츠는 생생한 심리 묘사와 사회 분석을 융합한 일련의 소설들을 통해 미국 사람들과 미국의 제도를 계속 탐구했다."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다큐로도 제작되었던, 사당동의 한 빈민가족을 25년간 추적해 한국 사회 빈곤의 종적 영속성을 살펴보게 했던 사회학자 조은의 연구 <사당동 더하기 25>를 떠올렸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 소설에서 로레타나 줄스, 모린 등등의 인물에 대한 특정적인 묘사 못지 않게 중요해지는 것은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배경과 시기이다. 이 경우 어떤 의미에서는 로레타, 줄스, 모린 등의 인물은 특정의 '누구'라기 보다는 그 시대의 영향을 받은 인물상들의 어떤 특징들이 혼합된 '누구'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 소설 뒤 작가 발문의 한 대목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그들>의 등장인물들이 내 소설에 나오는 대부분의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나와 다른 사람을 합친 '혼합물'이라고 간단히 대답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그렇다." p.716)

 

그렇다면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시기는 어떤 시대인가. 소설은 사랑에 빠졌던 소녀, 로레타가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일에 휘말려 얼떨결에 원치도 않은 상대와 결혼을 하던 1937년 8월의 어느날에서 베트남전과 반전운동, 인종차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폭동이 벌어지던 1967년의 디트로이트까지를 다루고 있다. (디트로이트 흑인 폭동은 1967년 7월 23일에 발생하였으며, 당시 사상 최대 규모의 흑인 폭동이었다. 검색하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이 사건이 <허트 로커>를 만들었던 캐서린 비글로우에 의해 영화화되어 2017년에 개봉될 예정이라니, 이 책을 읽으신 분은 나중에 한 번쯤 챙겨보셔도...) 1937년에는 1929년의 대공황에서 벗어나 성장하던 경제가 다시 침체에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일시적이었고, 이후 제2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미국 경제는 다시 급격하게 성장의 길에 들어서며, 이후 1960년대까지 미국 경제는 급격하게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성장이 낳은 부작용들은 많았다. 빈부격차는 엄청난 속도로 가속화되었으며, 전후 매카시즘, 인종문제 등으로 사회의식 면에서는 성장의 속도가 더뎠다. 도시빈민은 급증하였으며, 도시의 슬럼화된 곳은 점점 늘어났으며, 낮은 의식수준 및 환경과 교육의 영향으로 빈곤의 대물림은 이어졌다.

 

로레타와 그녀의 아들 줄스, 딸 모린이 살던 1950년대의 디트로이트가 그런 곳이었다. 자동차 산업 등으로 도시의 일부는 발달했지만, 빈부격차가 심했고, 로레타 가족이 살던 곳과 같은 슬럼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로레타 가족은 이른바 중간계층이었다. 도시빈민, 백인 하층민 계급. 그들 위에는 안정된 직장과 직업을 가진 백인 상층민들이 있었고, 그들의 아래에는(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아래라고 생각하는') 그들이 상대하기를 꺼리고, 무시하는 흑인들이 있었다. 소설에서 그들 도시빈민 백인들과 흑인들의 관계는 정확히 묘사되지는 않지만(주로 '그들', 그러니까 로레타나 모린이나 줄스는 흑인들을 피한다. 아니 피한다기 보다는 그들에게는 이들 흑인들은 고려할 필요가 없는 대상이나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그 '위'를 쳐다보기도 바빴으니까.), 반면 백인 상층민들과의 관계는 여러 관계를 통해 흥미롭게 보여진다. 예를 들어 줄스가 네이든, 혹은 페이와 버나드(이들은 발전하는, 사실 미쳐 돌아가는 미국 경제를 상징해서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와 같은 인물들을 만나서 벌이는 일들, 혹은 모린과 유부남 짐의 관계를 통해서 보면 꽤 재미있는 점들이 있다.

 

(사실 조이스 캐롤 오츠의 심리묘사는 너무나도 집요하고 다층적이기 때문에 이렇게 한 가지로 뭉뚱그려도 되나 싶지만) 나는 그것을 어떤 '양가(兩價)적 감정'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줄스나 모린이 상층민 백인들에게 의도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접근할 때 보면 그들의 감정은 극도로 양가적이다. 그들은 상층민들을, 상층민들의 삶을 너무나도 동경하고 바라지만, 동시에 그들에게 가까이 가는 것을 너무나도 두려워한다. 그들은 상층민들의 삶을 너무나도 열망하지만, 그것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파멸에 가까워진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한다(반면 이들의 반대편에서 안주의 양상을 보이는 것은 로레타이다). 어쩌면 그것은 그들 사이의 경계가 너무 뚜렷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인데(조이스 캐롤 오츠가 이들을 대비하여 묘사하는 방식은 특징적인데, 줄스나 모린이 특히 이들이 사는 집을 겉에서 바라보는 장면들이 대표적이다.), 예를 들어 유리 상자안의 너무나도 가지고 싶은 보석을 바라보며 그것을 열망하지만, 그것을 억지로 열려고 하면 유리가 깨지고 말 것이라는 점을, 그리고 그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감당할 자신이 없는 자신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고 할까. 흥미로운 것은 이것이 반대편에서도, 그러니까 상층민 백인들에게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네이든이 줄스에게 대하는 태도, 혹은 짐이 모린에게 대하는 태도를 보면 비슷한 것을 찾아볼 수 있는데(특히 짐이 모린에게 접근하는 장면에 대한 묘사가 압권인데, 흥미롭게도 이 장면은 로레타, 줄스, 모린 이외의 인물로 시점이 이동하는 거의 유일한 장면이기도 하다.), 이들은 어떤 허위로 가득한 자신의 삶을 인식하고, 어떤 모험과 매력이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그들의 접근을 열망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접근, 그리고 그들과 삶이 연결되어 추락하는 것을 너무나도 두려워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동시에 로레타, 줄스, 모린 등의 서로서로에게서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것 또한 양가적 양상을 띤다. 그들은 가족으로서 기꺼이 서로를 사랑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기꺼이 서로를 증오한다. 어쩌면 그들은 서로에게서 결코 보고 싶지 않은 자신의 망가진 모습을 보지만, 동시에 그것이 어쩔 수 없이 버릴 수가 없는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기에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그녀(모린)는 앉는다. 그리고 거칠게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바라본다. 자신의 다른 자아가 인도에 서 있는 곳을. 사람들이 지나간다. 사람들, 낯선 사람들이 그녀의 주위에서 갈라져 그녀를 건드리지 않고 지나가는 것 같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지만 그녀 자신은, 그러니까 그 다른 자아는 점점 생생하고 눈부시게 변해서 인도에 서 있다. 그녀가 고개를 고통스러운 각도로 돌려서 버스에 타고 있는 모린을 바라본다. 죄책감과 야성이 뒤섞인 얼굴이다. (p.300)

 

이 죄책감과 야성. 그렇게 그들은 그 사이에 끼어있다. 죄책감과 야성, 혹은 열망과 두려움, 상승의 열망과 추락에 대한 공포, 혹은 백인 상층민들과 흑인들 사이에서. 이와 관련하여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줄스와 모린이 이 추락의 공포를 안은 불안한 상승, 혹은 불안한 상승 비슷한 것을 조금이라도 만들어내는 것은 마지막 디트로이트의 대규모 흑인 폭동(소설에서도 묘사되었지만 그것은 단지 '흑인' 폭동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었다.)과 맞물려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상층부의 백인들과 흑인들 사이에 '끼어'있었지만, 폭동으로 상징되는 흑인들과의 경계선이 더 뚜렷해지면서 상층부의 백인 사회로 진입할 실마리가 가느다랗게 생겨났다. 절도와 폭행, 포주, 심지어 살인까지 행한 줄스는 모트, 그러니까 빈곤 퇴치 행동 연합 회장이자 사회학과 조교수 피어시 박사와의 관계가 어느 틈에 만들어졌고, 모린은 야간대학에서 오츠의 수업(결국 <그들>이라는 이 소설은 모린이 '조이스 캐롤 오츠'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서 구성되었다. 여기에는 트릭이 있지만...)을 듣다가 짐까지 만났다. 로레타가 상층부의 삶을 비슷하게나마 짧게 '체험'하는 것도 이 때였다.   

 

사회학과 조교수 피어시 박사, 혹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작가의 분신 '조이스 캐롤 오츠'.(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소설은 어떤 사회학의 종적 연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줄스와 모린을 상층부로 연결시켜 준 가느다란 끈. 여기에 이 소설의 흥미로운 두 번째 장치가 있다. (처음 장치에 대해 너무 길게 이야기했으니 길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물론 길게 얘기할 능력도 못되니 짧게 마무리짓겠다. 헤르메스님이 이 부분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다루신다고 예고하셨으니 그 글을 읽으시는 게...) 다시 말해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 작가 본인의 직접적인 개입, 혹은 모린의 독백. 조이스 캐롤 오츠는 소설 앞에 붙은 '작가의 말'을 통해 이야기한다. 이 이야기는 소설처럼 구성한 역사 기록이며, 거의 대부분을 실제 '모린'의 기억을 바탕으로 삼았다고. 실제 소설 중간에는 모린이 작가, 그러니까 자신에게 야간대학에서 글쓰기를 가르쳤던 '조이스 캐롤 오츠'에게 보내는 편지도 두 편 삽입되어 있다. 이것을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까.

 

모린은 편지에서 말한다. "저는 선생님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저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시 외곽의 집에서 사는 저. 농장 주택 또는 식민지 양식의 주택인 이 집의 뒤편에는 울타리가 있고, 부엌에서 일하는 여자는 아마 바지를 입고 있을 겁니다. 아기는 아기 방의 요람에 있고, 창문에는 하얗고 얇은 커튼이 걸려 있습니다. 남편과 제가 함께 쓰는 침실, 거실 창문으로는 잔디밭과 길과 길 건너편의 집이 보입니다. 제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이런 삶을 아프도록 갈망합니다! 제 눈이 아프도록 갈망합니다.(p.462)" 모린은 아니라고 애써 부인하지만, 어쩌면 '이런 삶'은 '조이스 캐롤 오츠'의 삶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모린은 동시에 말한다. "하지만 그렇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미워합니다. 오로지 선생님만을. 심지어 그 남자들도, 펄롱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미워하고, 그것만이 제게 유일한 확신입니다. 결혼하고 싶은 남자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선생님에 대한 미움이. 선생님에 대한 미움, 책이 있고 말을 잘하고 결코 일어나지 않았던 일들을 완벽한 형태로 아주 많이 알고 있고, 남편이 차로 학교까지 데려다주고, 심지어 요즘은 가끔 신문에 사진까지 실리는 선생님, 지식을 지닌 선생님. 저는 이미 한평생을 살고 저 자신을 탈탈 뒤집었는데도 아무것도, 그 무엇도 얻지 못했는데 말입니다.(p.469)"

 

이에는 앞에서 말한 양가적 감정이 물론 들어있다. 그것을 다시 확인시켜주는 것이라면 별로 특이할 것은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질문. 왜 이것이 편지의 형태로, 그러니까 모린의 기억을 바꾼 소설의 형태가 아니라, 작가에게 보내는 직접적인 편지의 형태로 여기에 위치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이 편지를 받는 작가의 위치에 이것을 읽는 독자를 바꿔서 위치시키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편안한 방에서, "책이 있고 말을 잘하고 결코 일어나지 않었던 일들을 완벽한 형태로 아주 많이 알고 있"는 이 책 <그들>을 읽고 있는 당신이 이 그들의 삶을 읽는 것. 이것의 의미를 여기에서 묻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혹은 존슨 대통령이나 롬니 주지사(오바마랑 붙었던 그 '롬니'의 아버지다)나, 로버트 케네디나, 마틴 루터 킹이나 모두 다 죽여야 한다고 외치는, 그러나 안전한 곳에 위치한, 그랬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 사회학과 조교수 피어시, 혹은 모트, 아니 당신의 위치를 여기에 겹쳐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또 여기서 다시 질문. 그런데 이것이 작가가 모두 만들어낸 트릭이라면 어떨까. 사실 '모린'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결국 이 모린의 편지도 작가가 쓴 소설의 일부라면 어떨까. 그래서 나는 이 편지에 고개를 끄덕거리면서도 여기에 희미한 의심을 보낸다. 이것 또한 어떠한 의미에서는 작가의 견고한 방어막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 편안한 방에서 이 책을 읽고 있는 자신을 돌이켜 생각해보는 자신을 보고 있는 흐뭇한 이 또다른 자신. 그 '자신'이라는 존재가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있는 견고한 방어막 말이다. 이 편지들은 어쩌면 그 견고한 방어막의 일부로서 다시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어느 책 속 어느 곳에도 사실 진정한 '리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아닐까(물론 영화에 대해서도). 작가가 만들어낸 방어막 뒤에 안전하게 숨어서 <그들>이라는 책을, 이 긴 꿈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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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마리오네뜨

The Book | 2016. 2. 24. 20:56 | Posted by 맥거핀.
카인 - 6점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해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카인>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연결시켜 보면 재미있다. "하나님이라고도 알려진 여호와는 아담과 하와가 겉모습은 모든 면에서 완벽하지만 말을 한 마디도 못하고 심지어 아주 원시적인 소리도 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자신에게 짜증이 났을 것이다.(p.9)" "우리가 한 가지 확실히 아는 것은 그들(하나님과 카인)이 계속 논쟁을 했고, 여전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이제 끝이 났고, 더 할 말은 없을 것이다.(p.207)"

 

그러니까 이 이야기대로라면(다시 한 번 강조해두건대 '소설 <카인>의 이야기대로라면'), 하나님은 본인이 행한 이전의 일로 인해 마지막에 카인과 논쟁을 벌여야만 하는 셈이다. '하나님이라고 알려진 여호와'는 아담과 하와가 말을 못한다는 사실에 짜증이 났고, "다른 임시변통을 찾지도 않고, 다짜고짜 자신의 혀를 아담의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고, 그 결과 아담과 하와는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그로 인해 아담의 아들 카인은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었고, 그 결과 마지막에 이르러 하나님에게 따박따박 말대꾸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떤 말을? 하나님의 혀가 할 수 있는 말을, 그러니까 하나님과 같은 말들을. 다시 말해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것은 명백한 본인의 실수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겉모습이 완벽하게 보이도록 창조한 이후에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로 만족했어야 했다. 굳이 그 겉모습에 말까지 부여해 화를 자초할 이유가 있었을까.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죄악의 90% 이상이 입에서 나온다는 자명한 사실을, 모든 것을 다 아는 하나님이 몰랐을 리는 없지 않은가? 그랬다면 카인에게 되지도 않은 대꾸를 따박따박 들어야 했을 이유도, 바벨탑을 쌓은 이들의 말들을 모두 뒤바꾸어야 할 이유도, 죄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을 내려야 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어떤 잘못된 일이라도 한 가지 소득 정도는 얻을 수 있는 법이니, 그로 인해 하나님이 얻게 된 소득은 있다. 그것은 그의 분신과도 같은 자, 그러니까 창조주 아비를 꼭 닮은 자식 카인을 얻게 되었다는 점인데(모든 아버지들의 소망이야말로, 자신과 꼭 닮은 자식을 얻는 게 아니겠는가), 책을 읽다보니 어떤 의미에서는 카인이 곧 하나님이요, 하나님이 곧 카인이 아닌가 하는 되먹지 않은 의심마저 품게 되었다. 몇 가지 증거들이 있다. 첫째, 하나님과 카인이 벌이는 논쟁의 양상을 보면, 이 논쟁은 너무나도 합이 잘 맞는다. 무릇 어떤 논쟁이든, 논쟁이 이어지려면 논쟁을 벌이는 이들 사이에 수준이 맞아야 하는 법, 하나님과 카인 사이의 논쟁은 잘짜인 연극 대본처럼 손발이 딱딱 들어맞는다. 그래서 위에 인용한 바와 같이 "그들이 계속 논쟁을 했고, 여전히 하고 있"는 것일 테다. 어쩌면 하나님은 그 위에서 혼자서 너무나도 심심한 나머지 논쟁을 벌일 말 상대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혀를 밀어넣어, 자신의 말을 할 수 있는 대상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아담은 과묵한 편이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잘못만은 아닐 것이다. 어떤 것이든 처음 만들어진 작품은 어딘지모르게 허술한 법이고, 종자는 개량되는 법이니. 둘째, 소설 속에서 하나 신기한 점은 카인이 하나님이 벌이는 중요한 일들을 모두 빼놓지 않고 관람한다는 점인데, 카인은 모세와 여호수아, 아브라함과 이삭, 욥, 노아 등등의 구약성서의 주요 인물들을 뒤죽박죽으로 만난다. 소설 속에서 카인이 이들을 만나게 되는 이유는 상당히 모호하게, 또는 의도적으로 허술하게 서술되어 있는데(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카인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나귀가 자신을 데리고 과거의 많은 길들 가운데 한 곳을 따라가는지, 아니면 미래의 어떤 좁은 길을 따라가는지, 아니면 그저, 아주 단순하게, 아직 드러나지 않은 어떤 새로운 현재를 통과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p.146)"), 이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물론 가장 간단한 해답은 하나님이 그를 그곳에 데려다놓았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곧 카인 자신으로서 이 모든 일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다고 말하지 않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셋째, 이와 관련해서 책을 읽다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구약성서의 이야기들이 뒤죽박죽 얽혀 있는 이 이야기에서 서사적으로 기능하는 듯이 보이는, 그래서 조금 따로 외따로 떨어져있는 듯한 대목이 있는데, 그것은 카인이 릴리스에게 되돌아오는 부분이다. 창세기의 세계를 신나게 돌아다니던 카인은 나귀에게 이끌려 릴리스에게 돌아오게 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대목에서 카인은 릴리스에게 어떤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된 이야기를 몇 가지 하는데, 그것에는 카인의 흥미로운 고백이 들어있다

 

나는 카인이에요, 기억하죠, 동생을 죽이고 그 죄 때문에 벌을 받은 사람입니다. (중략) 하지만 하나님, 우리가 여호와라고 부르는 하나님이 먼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중략) 아우를 죽이고 이 침대에서 당신과 잔 것은 모두 같은 원인에서 나온 결과들이에요. 어떤 원인.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 운명의 손안에 있다는 것, 하나님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자면 말입니다. (중략) 글쎄요, 내가 다시 나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면, 이렇게 내 의지와 전혀 관계없이 한 과거에서 다른 과거로 뛰어다니는 일이 멈춘다면, 나는 흔히들 정상 생활이라고 부르는 삶을 살 겁니다, (p.155~156)

 

즉 카인은 안다. 자신이 하나님의 운명의 손안에 있다는 것, 혹은 자신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마리오네뜨라는 것. 또한 카인은 여기서 다른 고백도 한다. "아니요, 내가 거기에 가 있었어요. 아무도 미래에 가 있을 수는 없어. 그럼 그걸 미래라고 부르지 않기로 하죠, 다른 현재, 아니면 여러 다른 현재라고 부르죠 뭐. (중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미래는 이미 적혀 있어요, 우리가 그것이 적힌 페이지를 읽는 법을 모를 뿐입니다, (p.153~154)" 미래를 미리 보는 이, 혹은 다른 현재, 여러 다른 현재에 동시에 가 있을 수 있는 이, 그가 하나님이 아니면 도대체 누구겠는가? 물론 가장 흥미롭고도, 기이하고도, 명백한 사실은 하나님이 카인에게 표식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이 대목을 읽고 나면 누구나가 의아해지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은 카인이 아벨을 죽인 것을 알고 있고, 그에게 얼마든지 벌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왜 그에게 표식을 주고, 그를 죽음에서 면하게 해주는 것일까. 카인이 그 자신이 아니라면, 혹은 조금 덜 불경하게 말해서, 그가 그 자신의 분신이 아니라면 그럴 이유가 있을까.

 

다시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해 제 정신으로 조금 돌아오자. 이야기의 주인공은 카인이고, 이야기의 주된 얼개는 카인이 하나님의 이중성, 또는 악행, 모순들을 드러내는 구조이지만, 사실 엄밀하게 말해서 카인이 그렇다고 해서 의롭거나 선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가 아우 아벨을 죽인 것은 사실이며, 아벨이 죽을 죄를 저질렀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그 뿐인가. 그는 이후에 노아의 가족을 몰살시키기도 한다. 그의 영혼은 비었다.("네, 당신은 내 영혼을 삼킨 적이 있지요.(p.207)") 그는 하나님의 이중성과 악행과 모순을 고발하지만, 그 역시 악행으로 점철된 자라고 말할 수도 있다. 소설 속에서, 그들은 묘한 데칼코마니이다. 악행과 모순으로 얼룩진 이들. 카인은 하나님을 죽이기 위해 이 모든 일들을 저질렀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의 논리대로라면, 가장 먼저 죽어야 하는 것은 그 하나님을 꼭 닮은 자, 바로 자신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표식을 받았기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죽임을 당할 수 없다. 심지어는 표식을 내린 하나님 자신에게마저도. 여기에 이 소설의 어떤 아이러니가 있다.

 

<카인>의 이야기대로라면(참 무지하게 강조한다), 결국 모든 인간은 살인자, 아니 연쇄살인마, 혹은 실은 자신을 가장 죽이고 싶어했던, 자신을 죽였어야했던 자, 그러나 죽일 수 없는 자, 카인의 후손이다. 어쩌면 주제 사라마구가 보는 인간이란 그런 존재가 아닐지 모르겠다. 자신과 꼭 닯은 하나님을 죽이고 싶어하면서도, 결코 죽일 수 없는 자들, 심각한 모순 속에 빠진 자들, 그래서 그에게 어쩔 수 없이 영혼을 내어맡긴 나약한 자들.

 

 

덧.

그렇게 유쾌한 독서는 아니었다. 사실 <카인>의 이야기는 어떤 종교적인 것과 분리하여, 이야기 그 자체로 읽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개인적으로는 이야기 자체로만 보아도, 조금 이야기들의 얼개가 많이 헐거운 것이 아닌가, 그 비판이나 풍자도 익히 예상할 수 있는 지점에 머무르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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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 서 있는 사람

The Book | 2016. 1. 20. 15:24 | Posted by 맥거핀.
불안한 낙원 - 8점
헨닝 망켈 지음, 김재성 옮김/뮤진트리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그녀는 오랫동안 침대에 누워 세뇨르 바즈의 눈빛에서 발견한 두려움에 관해 생각했다. 어머니, 아버지에게서는 그런 두려움을 보지 못했었다. 스웨덴에도 물론 상류층이 있었지만 그들과 함께한다는 것은 두려워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는 달랐다. 여기는 모두가 두려워했다. 다만 백인들은 침착과 자기절제, 또는 사전 계획된 분노의 폭발 같은 가면 뒤에 두려움을 감출 뿐이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왜 두렵지가 않지? 두려워할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일까? 완전히 혼자여서?

 - p.160~161

 

"세상에는 세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죽은 사람들, 살아 있는 사람들,

그리고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들이다." (플라톤)

- 책 머리에서

 

헤닝 만켈의 <불안한 낙원>은 여러 결로 읽을 수 있는 이야기같다. 한 여성 자아의 성장, 혹은 진정한 사랑찾기에 대한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고, 제국주의 식민지 시대의 아프리카의 현실을 드러내주는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며, 보다 더 여성적인 관점을 포함한, 다시 말해서 주인공 한나와 그의 어머니 엘린, 그리고 베르타, 백인 남성과 결혼한 흑인 여성 이사벨, 펠리시아를 비롯한 매음굴 여성들, 테레사 등등의 수많은 여성들의 목소리에서 나타나는 '여성'이라는 존재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혹시 더 나아가면 이 '불안한 낙원'이라는 명칭이 말해주는 어떤 비유와 은유에 대해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읽으면서 계속 느낀 것은 이 이야기들이 어떤 실체를 가진 무엇이라기보다는 단지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한 어떤 신화처럼 느껴지기도 했는데, 그것은 소설 속의 이야기들이 비현실적이어서가 아니라 - 해닝 만켈은 책 뒤의 후기에서 이 이야기가 실제의 기록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 어쩌면 내가 전혀 알 수 없는 세계, 즉 20세기 초반의 스웨덴과 아프리카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즉 그만큼 나의 지식과 상상력이 협소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것을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로 읽고 싶은데, 위의 인용문에 나오듯, 한나가 어쩌다 머물게 된 아프리카의 포르투갈령 로우렌소 마르케스(현재의 모잠비크)에서는 흑인과 백인 모두가 서로를 두려워한다. 흑인들은 백인이 가진 공권력과 폭력을 두려워하며, 백인들은 흑인들 내부에 오랜 억압으로 응축되어 있는 분노를 두려워한다. (그것을 한나의 표현대로 '그들의 숫자'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숫자가 많을수록 그 안에 응축된 분노의 수도 많아지는 법이니까) 다만 (위의 인용문에도 있듯이) 백인들은 그것을 가면과 위선 속에 숨기고 있을 따름이다. (예를 들어 백인들이 '흑인들이 모두 거짓말쟁이'라고 치부하는 것이나, 그들 나름의 전통적인 사고방식, 의술, 주술 등을 미개한 것이라고 꺼려하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일 것이다. 우리의 어떤 것에 대한 꺼림 속에는 사실 은밀한 두려움이 늘 내재해 있는 법이니 말이다.) 백인들은 백인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소위 문명화된 공간이 있으며, 흑인들은 또 백인이 더럽고 위험하다며 가까이 오려하지 않는 자신들만의 나름의 공간이 있다. 심지어 같은 공간에 있어도 백인들과 흑인들은 같은 벤치에 앉지 못한다. 백인들이 앉아있을 때는 흑인들은 서 있어야 한다. (한나가 아프리카에서 가장 먼저 이상하게 생각했던 점도 이것이었다.) 그것이 그곳의 법칙이다.

 

그런 법칙이 예외가 되는 공간이 있다. 한나가 머물고 있는, 그리고 어느 틈에 한나의 것이 된 세뇨르 바즈의 매음굴. 그곳에서는 흑인과 백인이 같이 한 공간에 머물며, 같이 잠자리에 든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백인 남성이 흑인 여성에게 돈을 주고 그 댓가로 성적 서비스를 제공받는다. 물론 사실 이것은 '법칙의 예외'라고 보기 힘들며, 일종의 역설이다. 아프리카에서 흑인과 백인이 (물리적으로) 가장 가까이 있을 수 있는 공간이 매음굴이라는 어떤 아이러니. 그래서 어쩌면 한나는 그곳이 매음굴임을 알면서도 그 곳에서 떠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나가 처음 이곳에 투숙하게 된 것은 그곳이 단순한 호텔이라고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한나는 그 사실을 알게 된 이후에도 이 곳을 쉽게 떠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 곳이 흑인 여성들과 가장 가까이에서, 혹은 위선적인 백인사회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한나는 서로가 서로를 두려워하는 외부의 공간을 불편하게 생각하며, 매음굴에 가득한 흑인 여성들 사이에서 묘한 동질감과 안도감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한나는 그곳을 그렇게 명명했는지도 모른다. 불안한 낙원. 여자들이 자카란다 나무 아래 앉아있고, 제가 피아노로 돌아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조율을 계속하며, 침팬지 카를루스가 붉은 소파에 앉아 입술을 요란하게 두드려가며 오렌지를 먹는 곳.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그곳은 낙원은 낙원이되, '불안한' 낙원이라는 점. 그 곳이 '불안한 낙원'이라는 것은 그 뒤에 붙여진 이야기들이 말해준다. 매음굴 가운데에 있는 자카란다 나무 밑이 사실은 수많은 아기들의 공동묘지였다는 사실. 매음굴에서 태어난 불행한 아이들, 그리고 당연하게도 모두 흑백혼혈일 수밖에 없는 그 수많은 아이들이 그곳에 아무도 모르게 묻혔다. 아이들은 추악하지 않지만, 그 아이들을 그렇게 잉태시킨 수많은 백인들은 추악하다. 그들이 만들어낸 수많은 위선과 기만과 폭력의 산물들이 그렇게 감히 '낙원'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 매음굴 아래에 묻혔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이 매음굴로 한정되지 않는다. 제국주의 시절 백인들은 수많은 식민지에 온갖 거짓과 폭력과 위선을 행했으며, 그 결과물로 만들어진, 그들이 잉태한 추악한 부분들을 기꺼이 그 땅 속에 깊숙이 묻었다. 열대야자수가 늘어서 있는, 그들이 처음에 '낙원'이라고 불렀던 그 땅에 말이다.           

 

그러니까 이 매음굴은 일종의 식민지 아프리카라는 공간의 상징이며, 동시에 어떤 경계선이다. 많은 것들이 그 내부에 깊숙이 들어가 있을 때는 보이지 않는다. 어떤 것들은 경계에 섰을 때만이 볼 수 있다. 한나가 처음 아프리카에 도착했을 때 백인 사회로 깊숙이 들어가 버렸다면 그녀는 아마도 다른 것을 보고,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녀는 대신에 불안한 낙원, 흑백 혼혈아기들이 묻힌 이곳에 있는 유일한 백인 여성으로서 다른 어떤 것들을 보았고, 그 결과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것을 단지 우연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아버지와 어머니가 물려주신 이름, 한나 렌스트룀에서 선상요리사 한나 룬드마르크로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매음굴을 운영하는 세뇨라 바즈에서 이제 다시 스스로 선택한 이름, 아나 브랑카로. 이 이름들의 변화는 누군가의 보호 속에서 존재하는 여성에서 이제 스스로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주체로서의 여성이라는 주인공의 변화를 말해주면서, 동시에 이 여성이 계속 서 있던 위치에 대해서, 그리고 그 위치의 공통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한다.

 

타인에 의해서든,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서든, 혹은 어떤 우연의 결과물이든 간에 그녀는 항상 경계에 서 있었다. 강력한 추위가 지배하던 땅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 있던 그녀는 이제 죽은 사람도 아니고, 살아 있는 사람들도 아닌,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들(위의 플라톤의 말)이라는 또다른 의미에서의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 있는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흑과 백의 경계선에 서 있는 매음굴의 여주인에서 다시 더 나아가 흑인 사회와 백인 사회의 경계선에 스스로를 위치시킨다. 그녀는 기만과 위선이 존재하는 백인 사회에서 매음굴의 백인 여주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떨어져 나와있지만, 본인 스스로, 남편을 죽인 흑인여자를 구명하려 함으로써 그 사회와 더욱 확실하게 경계선을 긋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흑인 여성들 사이로 완전히 들어갈 수는 없다. 그녀와 매음굴의 흑인 여성들 사이에는 여전히 (침묵이라는) 경계가 남아있으며, 그녀는 그 경계선 위에 위태롭게, 혹은 불안하게 서 있다. 침팬지 원숭이 카를루스처럼. 어쩌면 그녀가 침팬지 카를루스에게 애착을 느끼는 것은 그것도 어떤 경계선 위에 서 있다고 생각해서 일지도 모른다. 동물과 인간의 경계에 있는 침팬지. 숲에서 태어났지만 인간사회에 너무 깊숙이 동화되어 숲으로 돌아갈 수 없는 침팬지. 그리고 하늘에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땅에 있을 수도 없는, 땅 위의 나무에 있거나 천장에 매달려 있는 침팬지.

 

하지만 땅에 닿는 순간 카를루스는 마치 발을 데기나 한 것처럼 움찔했다. 그리고 코를 킁킁대더니 잽싸게 문밖으로 나갔다.

한나는 놀라 카를루스를 바라보았다. 왜 나무 아래 땅바닥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전혀 짐작되지 않았다. 카를루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 옆에 앉아 차창 밖의 해풍이 얼굴을 어루만질 때마다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 p.216

 

그러므로 이 책의 결말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경계 근처에 온 사람, 혹은 경계에 서 있는 사람만이 경계 너머를 들여다보고  그 경계를 넘어 탈주할 것을 소망할 수 있으니. 사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녀는 추운 겨울 나무벽 사이로 꿈틀거리던 냉기가 느껴졌던 그 때부터 그 경계 너머의 삶을 꿈꾸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그녀가 행복했기를 빈다. 경계 너머의 삶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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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에 맞서는 혐오

The Book | 2016. 1. 10. 17:03 | Posted by 맥거핀.

 

댓글부대 - 4점
장강명 지음/은행나무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장강명 작가의 책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읽은 책들(<한국이 싫어서>,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댓글부대>)에서는 뭔가 통하는 지점이 있다. 그것을 작가가 구사하는 일종의 전략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인데, 그것은 형식적인 면에서는 대화체나 구어체를 적극 활용하는 것, 그리고 그에 더 나아가 소설 전체를 누군가가 말하는 구어체의 진술로 구성하는 것(<한국이 싫어서>는 한국을 떠난 계나라는 인물의 편지형식이며,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에서도 여자의 구어체 진술이 소설의 뼈대를 이루며, <댓글부대>의 한 축은 찻탓캇과 기자의 인터뷰 녹취록을 그대로 수록하는 형식을 취한다.), 혹은 되도록 내용을 짤막히 분절시키면서 동시에 전체 내용을 줄이는 것(<한국이 싫어서> 204쪽,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188쪽, <댓글부대> 247쪽) 등이다. 다시 말해서, 결국 이 전략들은 한 가지 목표에 부합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목표란 (작가 본인도 인터뷰 등에서 밝히고 있듯이) 어떻게든 읽게 만든다,는 것이고 그 전략은 실제로 어느 정도 먹혀들어가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아니, 나는 ('전략'이라는 냉소적인 표현을 쓰기는 했지만) 단지 비판을 하기 위해서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바꿔 말하면 (사실 다른 작가들이 번번이 실패하고 있는) '일종의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한 단지 이런 형식적인 면 때문에 장강명의 소설이 많이 읽히고 있다고 말하는 것 또한 부당한 말이 될 것이다. 

 

<댓글부대>는 (적어도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재미있었다. 그 재미는 소설의 한 축, 그러니까 팀-알렙의 멤버들이 '합포회'라는 어떤 비밀조직의 지시를 받고 벌이는 온라인 교란 작전들(이렇게 뭉뚱그려서 표현하기에는 그보다 더 복잡하지만, 편의상)의 생생함에서 나온다. 그들이 벌이는 교란 작전들은 실제 우리가 온라인에서 보고 있는 여러 행태들과 시종일관 교차하기 때문에 실제로 우리가 보고 있는 것 이면에는 이런 것들이 있으리라는, 그 배후에는 권력과 결탁된(혹은 권력 그 자체인) 어떤 거대한 조직이 꾸미는 음모가 있으리라는 상상을 익히 하게 만든다. 그것이 실제이건 아니건, 소설의 핵심 중에 하나는 우리 상상력의 지표를 확장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온라인 교란 작전이 벌이는 상상력의 교란이 즐겁지 않을 이유는 없다. 다만 나는 그것이 소설의 나머지 한축과 결합되었을 때 그 결과물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그 결합이 작가의 미숙이건, 혹은 고의이건, 나는 그 결과물에 대해서는 어떤 이상함을 느꼈고, 그것을 여기에 짧게 이야기해보려 한다.  

 

앞에서 이야기한 팀-알렙의 멤버인 찻탓캇과 기자가 벌이는 인터뷰 녹취록이 보여주는, 온라인 교란 작전들의 전말이 소설의 한 축이라면, 나머지 한 축은 그런 팀-알렙과 '합포회'라는 비밀 조직과의 오프라인 커넥션이다. 그리고 이 내용의 상당수는 그들이 각종 유흥업소에서 벌이는 향락에 대한 세밀한 묘사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예를 들어 움베르트 에코의 <프라하의 묘지>와 비슷한 전략을 취한다. 에코의 <프라하의 묘지>가 19세기 유럽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위조 문서를 만들며 살아가는 시모니니(어쩌면 이것을 그 당시의 '온라인 교란 작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의 행위를 묘사하는 것과 동시에 그의 탐욕스러운 행동이나 그의 식탐에 대한 묘사를 병행하며 그에 대한 독자의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면, 이 소설 <댓글부대>는 온라인 교란 작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동시에 그 교란 작전을 벌이는 주체들이 벌이는 향락을 묘사하며 그들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식이다. (물론 이 묘사가 적절한가, 즉 그 목적에 적절히 부합하고 있는지는 조금 더 생각해 볼 여지는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소설들은 시모니니나 팀-알렙이 구사하는 바로 그 전략을 역이용한다. 시모니니는 소설의 서두에서 위조문서를 만들 때 가장 좋은 전략 중의 하나는 그 문서를 읽게 되는 사람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혐오감을 적절히 이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에코는 교묘하게 바로 그렇게 말하는 시모니니에 대한 혐오감을 읽는 이들이 가지도록 유도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댓글부대>에서 팀-알렙이 구사하는 주요한 전략 중의 하나는 온라인에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혐오와 분노들을 적절히 활용하는 것이다. (이 책 3장의 제목은 (작가가 괴벨스의 어록이라고 떠돌아 다니는 문서에서 따왔다는)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이다.)  

 

나는 사실 이것이 조금 미심쩍다. 바로 소설에서 비판하고 있는 그 전략을 다시 자신의 소설에서 비슷하게 구사하는 것 말이다. 에코의 소설과 이 소설이 다른 것은, 에코의 소설은 그것이 단지 독자의 혐오감을 북돋우는 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소설 전체를 일종의 위조 문서처럼 보이게 한다는 목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에코는 시모니니가 만들어내는 역사를 기술하며, 동시에 그것을 거짓으로 보이게 하여, 독자들 스스로 그럼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동시에 (에코의 많은 소설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것을 에코가 소설로 구사하는 일종의 게임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강명 작가의 이 소설은 다르다. 그들이 벌이는 향락이라는 나머지 한 축에는 그런 장치가 없으며, 이 축에는 결국 읽는 이의 어떤 혐오,(혹은 그것이 잘못 작동했다면 어떤 동경)만이 남는다. 이런 모순화법은 사실 조금 이상하다. (거칠게 말한다면) 혐오가 잘못된 것이라 말하면서, 은연중에 누군가를 혐오하게 만드는 것 말이다. (비슷한 것으로 누군가의 독설을 비판하면서 독설적으로 말하는 것, 또는 누군가의 거짓을 비판하면서 그에 대한 거짓정보를 흘리는 것 등등이 있을 수 있다.)

 

(영화 <내부자들>을 보지 않으신 분들은 여기에서 건너 뛰시는 것이 좋겠다. 큰 스포가 들어있으니.) 다른 경우를 여기에서 같이 이야기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쩌다보니 영화 <내부자들>을 일반판과 감독판 모두 극장에서 보게 되었는데, 일반판이든 극장판이든 동일하게 구성된 이 영화의 구조가 있다. 그것은 영화에서 안상구(이병헌)의 기자회견 장면을 영화의 시작부분에 배치하고, 다시 플래시백되어 이야기가 시작한다는 점인데, 사실 이것은 조금 이상하다. 왜냐하면 굳이 이 장면이 앞에 나온 후 다시 과거로 돌아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굳이 이렇게 한 이유가 있을까? 여러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간단하게 말해서 나는 그것이 결국 이 장면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하는데, 다시 말해서 그것을 뒤의 우장훈 검사(조승우)의 기자회견과 대비시켜 그 장면의 함의를 생각해 보게 하는 것이다.

 

이 장면의 대비는 결국 말하는 이의 차이에 있다. 기자회견이 벌어지는 풍경도 같고, 말하는 이가 주장하는 내용도 같지만, 여론은 전혀 다르게 형성된다. 다시 말해서 대중은 어떤 것은 믿고, 어떤 것은 믿지 않는다. 그것은 영화 속에서 나온 거대신문사 이강희 주간의 말대로 "누가 깡패새끼 말을 믿겠나"는 것과 일맥상통하며, 동시에 "대중은 개돼지입니다."라고 말하는 그의 대사, 혹은 그가 우장훈 검사 앞에서 벌이는 이상한 논리의 언변과도 통한다. 즉 같은 사건이고, 같은 팩트라도 어떻게 말하는가에 따라서 "어떠어떠하다고 보기 힘들다"라고 말할 수도 있고, "어떠어떠하다고 보여진다" 혹은 "매우 보여진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그의 말은 대중이라는 존재가 매우 휘두르기 쉬운 존재라고, 혹은 개돼지라고 믿고 있는 그의 생각과 통한다. (감독판에서는 이것으로 모자랐는지 뒤에 이강희의 이런 논리를 다시 에필로그 식으로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영화 <내부자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보는 대중, 그러니까 바로 우리들에게 계속 반복하여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들은 바보라고. 그러니 저런 인물들이 거대신문사 논설주간이 되어 여론을 조작하고, 바로 저런 인물이 대통령후보가 되거나 대통령이 되는 거라고 말이다. 안상구의 기자회견을 앞으로 빼서 우장훈 검사의 기자회견과 대비시키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물론 누군가는 여기에서 반박을 할지도 모른다. 우장훈 검사의 기자회견은 별장 성접대 동영상이라는 확실한 물증이 있지 않는가,하고 말이다. 그런데 사실 나는 그것이 조금 이상해보인다. 그렇게 성접대 동영상을 무차별적으로 대중들에게 뿌려 이 상황을 타개하는 것 말이다. 그것은 사실 대중을 바보로 보는 것과 그렇게 멀리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동영상 하나만으로 지금까지의 거짓이 사실처럼 받아들여지는 것, 그것은 거대언론의 어떤 여론몰이와 그렇게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나는 그 내용의 진실여부와 별개로 그 즉각적인 반응과 태세전환이 한편으로는 여전히 의심스럽다. (여기에 더 나간다면 그 영상에서 접대여성들의 얼굴도 모자이크하지 않는 무신경함과 조상무를 처리하는 방식, 그리고 이 영화가 가진 결말의 어떤 미심쩍음 같은 것도 말할 수 있겠지만, 뭐 이 글은 <내부자들> 리뷰가 아니니까.)

 

지금까지의 어떤 의심들을 이런 질문으로 바꿔보자. <내부자들>은 바로 당신들, 그러니까 영화를 보는 대중들이 바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른 방식이 아닌, 바로 그 바보를 다시 역이용하는 방식으로 상황을 타개한다. 과연 이 때 영화를 보는 우리들의 사고는 이렇게, 그러니까 나는 바보니까 앞으로는 여론에 휘둘리지 말아야겠다,는 식으로 작동하게 될까. 그보다는 어쩌면 조금 다른 식으로, 그러니까 똑똑한 나는 그렇지 않지만, 바보 대중들 때문에 이 나라가 이 모양이 되어가고 있다는 어떤 분노에 가닿아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어쩌면 이 영화는 당신들이 바로 그 대중이라고 말하고 싶었을지 모르지만, 영화를 보는 똑똑한 대중들은 그들과 자신을 선을 긋는다. 아니, 나는 아냐, 그런 바보가 아니야. 그리고 어쩌면 영화를 만드는 그들도 사실은 우리들이 선을 긋기를 바랐던 것은 아닐까. (네가 바보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너는 아니지만 바보는 어딘가에 있다고 말하는 편이 당연히 더 쉽게 먹힌다.)

 

나는 장강명 작가의 <댓글부대>에서도 비슷한 것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온라인 상에 존재하는 혐오를 증폭시키는 이들에게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장강명의 이 책은 책 말미의 '제주4.3평화문학상 심사평'대로 "폭력을 드러냄으로써 궁극적으로 평화를 소망하게"할 수 있을까. 아니면 혹시 어쩌면 다른 방식의 다른 혐오들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 않을까.

 

 

덧.

정의를 말하는 영화들, 혹은 정의를 말하는 문학들이 득세하는 것은 그리 반갑지만은 않다. 그것은 현실이 그만큼 정의롭지 않다는 것의 반증일테니 말이다. 예를 들어 작년에 나온 영화만 해도, 정의를 이야기하는 영화들은 수없이 많았다. 영화에 나온 수없이 많은 괴물들. 그 괴물들은 차례로 영화 속에서 최후를 맞이했지만, 여전히 현실의 괴물들은 점점 늘어간다.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괴물이 쓰러지는 것을 통쾌하게 바라보는 우리들은 어쩌면 괴물에 맞서기 위해서 점점 괴물에 가까이 가고 있지는 않을까. 괴물이 되기를 은연 중에 소망하면서.  

 

혐오와 동경은 늘 가까이에 있으며, 그 대상은 종종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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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번뇌를 안고 죽어갈 것인가

Ending Credit | 2015. 12. 29. 23:16 | Posted by 맥거핀.

 

 

가끔 이야기가 만나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다. 김영하의 <읽다>에 인용된 신형철의 이 글(<정확한 사랑의 실험>에 나온 글이다.)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를 이야기하는 글이지만, 그것은 최근에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약속된 장소에서>를 떠올리게 했다.

 

<롤리타>라는 소설을 읽지 않아도 된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롤리타 콤플렉스'라는 말이 있지만, 그 말은 한 인간을 이해하는 말이 아니라 오해하는 말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사내를 이해하는 길은 오로지 그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방법밖에 없다. 제대로 읽기만 한다면 우리는 '롤리타 콤플렉스'라는 말을 집어던질 수 있게 될 것이고, 무죄추정의 원칙을 새삼 되새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깨닫게 될 것이다.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읽다> p.153~154)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를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전에 먼저 전채요리 격으로 하루키의 이 책 <약속된 장소에서>를 읽었다. 세기말의 일본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는 옴진리교의 지하철 사린 사건을 하루키가 접하고, 그들이 어떤 집단인지를 탐구하기 위해 옴진리교 신자(옛 신자)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묶은 하루키의 이 책은 (이렇게 표현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예상보다 재미있었다. 하루키가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지하철 사린 사건의 피해자들을 인터뷰한 <언더그라운드>와 대칭을 이루는 책이지만, 그 구성은 약간 다르다. 피해자들의 진술을 묵묵히 그대로 들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던 <언더그라운드>와 달리 <약속된 장소에서>의 하루키는 조금 더 적극적이다. 그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에 있어서는 적극적으로 질문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반박도 서슴치 않는다. 그리고 책의 말미에서 심리학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들의 세계를 읽을 수 있는 하나의 독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이들의 이야기를 거름망 없이 그대로 읽었을 때의 어떤 '위험'을 하루키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느낀 어떤 '재미'라는 것도 그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나중에 또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들에게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 흔히 종교집단에 빠지는 사람들을 비논리적이거나, 감정적, 혹은 단순하다고 보는 경향이 있는데, 이들은 적어도 어떤 면에서는 매우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다. 이들은 사회의 일반적인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것이 논리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의 빈틈을 옴진리교가 파고 들었다. 즉 이들은 현세가 가지는 어떤 가치들 혹은 현세 그 자체에 대해 '의문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 의문들이 주는 '번뇌'를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그 '번뇌'를 해소시켜 더 높은 차원의 인간(혹은 다른 무엇)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옴진리교에 빠져들었다. 옴진리교는 그들의 의문에 대해 해답을 주었고, 존사(아사하라 쇼코)는 그 의문을 알기 쉽게 그들에게 풀어주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우리 누구나가 느끼는) 사회가 가지는 수많은 모순들과 의문들, 그 의문들에 답을 얻고 그것으로 번뇌를 벗어날 수 있다면 적어도 그것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심리학자는 그것을 반대로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말이죠, 번뇌와 소모가 없다면 종교가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번뇌를 버리면 그 사람은 이미 부처니까요. (번뇌를 버리는 건 수행이 아니로군요.) 네. 그건 이미 부처지 인간의 수양이 아니에요. 그러나 우리는 신이나 부처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제 번뇌가 사라졌나 싶으면 여전히 남아 있는 거죠......(중략) 그래서 그런 수준의 (옴진리교) 사람들은 번뇌와 더불어 살아갈 힘이 조금 부족합니다. 안타깝긴 하지만요. 하긴 다른 방향에서 보면, 우리 범인(凡人)보다는 순수하거나 매사를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식으로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래도 그건 역시 엄청나게 위험한 일입니다. 그 사람들이 모두 부처의 나라로 간다면 상관없겠지만, 이 세상에 머물러 있는 한은 상당히 큰일이죠. 그래서 저는 인간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번뇌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역시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약속된 장소에서> p.289~299)

 

번뇌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불가능한 인간들, 혹은 번뇌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즐겨 다루는 인물들도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아들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맞닥뜨린 부모들, <환상의 빛>의 남편이 왜 죽었는지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여자, <걸어도 걸어도>의 죽은 아들(또는 형)의 빈자리를 안고 살아가는 가족, 혹은 <아무도 모른다>의 자신들을 버리고 떠난 엄마의 부재를 안고 살아가는 아이들. (그리고 <디스턴스>에서는 옴진리교 사건을 둘러싼 피해자들과 가해자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그것을 '남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어떤 과거의 사건들이 남긴 잔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즐겨 그리기 좋아했던 인물들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무엇인가 답을 알고 싶어했지만, 이미 떠난 사람들은 아무런 답도 그들에게 주지 않거나, 혹은 이미 줄 수 없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신작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인물들은 어떨까. 이야기는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시작한다. 다시 말해서 이야기는 남아있는 사람들 속에서 시작한다. 15년 전 집을 떠난 아버지의 부고. 그 부고를 듣고 두 여동생과 같이 살고 있는 큰딸 사치(아야세 하루카)는 자신은 가지 않겠다며, 동생들을 대신 보내지만, 마음을 돌려 뒤늦게 장례식장에 나타나고 거기에서 아버지의 두번째 부인이 낳은 딸, 그러니까 이복동생 스즈(히로세 스즈)를 만난다. 그리고 사치는 이제 갈 곳이 없어진 스즈에게 같이 살 것을 권한다. 다시 말해서 사치는 고레에다 인물들의 자장 속에 있다. 아무 답을 주지 않는 인물이 떠나며 남긴 잔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 번뇌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다시 그리려고 하는 것일까.

 

그런데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고레에다 감독이 그려냈던 것이 단지 번뇌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 자체만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가 즐겨 그렸던 것은 바로 그들의 '시간'이었다.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 속에서 그들은 항상 긴 시간을 지나왔다.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에서 그 흔한 플래시백은 찾아보기 힘들다. 과거로 돌아가 그들에게(정확히 말하면 영화를 보는 우리들에게) 어떤 해답을 주는 것을 그는 반칙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대신에 그 긴 시간들을 묵묵히 견뎌내는 쪽을 늘 택했고, 그래서 감독의 영화에서 자주 나타났던 것은 플래시백이 아니라, 긴 시간의 서술이었고, 그에 따른 시간의 점핑이었다. (이 영화에서도 수많은 예를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영화의 초반부 출발하려 하는 기차에서 사치가 스즈에게 같이 살자고 제안한 후, 그것에 뒤이어 바로 스즈가 세 자매를 찾아오는 씬이 붙는 것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간의 점핑은 어떤 급작스럽다는 느낌을 관객에게 주지 않는다. 그보다는 도리어 그들의 긴 시간을 관객이 같이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같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 그것을 이렇게 바꿔서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번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보다보면 문득 이상한 씬의 연결이라고 느껴질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영화의 초반부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나고 아버지가 살던 마을을 돌아보던 세 자매에게 스즈가 아버지가 남긴 유품이라며 오래된 사진을 들고 오고, 세 자매가 추억에 빠져 사진을 들여보던 장면이 있다. 통상적인 영화 문법이라면 여기에서 세자매의 시점 숏, 그러니까 사진을 보여주는 컷을  끼워넣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감독은 끝끝내 사진은 보여주지 않고, 그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매들의 옆모습만 비춘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 세 자매는 스즈에게 마을에서 네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어디냐고 묻고 스즈는 산에서 마을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조망이 좋은 곳으로 그녀들을 데려간다. 그리고 자매들은 스즈에게 마을의 풍경이 지금 우리가 사는 곳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그러면 이때쯤이라면 한번쯤 마을의 조망컷을 끼워넣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지만, 감독은 여전히 그것을 관객들에게 제공해 줄 맘이 없다. 뒤늦게서야 그 조망을 바라보는 (스즈를 포함한) 네 자매의 뒷모습을 비추며 조망컷을 멀리에서 살짝 제공할 뿐이다. (비슷한 예는 후반부에서 찾을 수도 있다. 배 안에서 불꽃놀이를 보는 아이들, 그것을 보여주며 화려한 불꽃놀이를 보여줄 법도 하지만, 고레에다 감독은 검은 밤바다에 비친 흐릿한 색으로만 그것을 보여주거나 불꽃놀이에 넋이 빠져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만 비춘다. 그리고 뒤늦게 회사 옥상에서 동료들과 불꽃놀이를 보는 둘째 요시노(나가사와 마사미)의 컷을 여기에 연결시키며 그들의 뒷모습과 함께 이 불꽃놀이를 살짝 보여준다. 마치 "이렇게라도 살짝 봤으니까, 됐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러니까 여기에서 고레에다 감독은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진이나 조망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그것을 추억에 빠져서, 혹은 자신들의 마을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보고 있는 자매들의 리액션을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 때 이런 질문이 혹시 가능하지 않을까. 자매들의 (다른 무엇인가를 보는) 옆얼굴, 혹은 뒷모습을 보는 이 시선은 누구의 시선일까. 아니, 나는 그것이 죽은 아버지의 시선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대신에 단지 감독은 우리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이들을 같이 지켜봐 주기를 바라는 게 아닐까,라고 묻고 싶다. 그들의 긴 시간을 같이 지켜보자, 감독은 우리 관객들에게 이렇게 권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어쩔 수 없이 혼자 찍혀야하는 컷을 제외하고는 카메라는 좀처럼 인물을 혼자 잡는 법이 없다. 자매들은 늘 둘이나 셋이 함께 카메라에 잡혀 있고, 카메라는 집안의 어딘가, 혹은 바깥의 어딘가에서 묵묵히 이들을 지켜보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유령의 시선이지만, 그러나 절대 으스스하지 않다. 그것은 어쩌면 이들의 죽은 아버지나, 혹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떠나가고 이들을 대신 키워준 외할머니의 시선일 수 있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묵묵히 물러나 이들의 대화를 무심히 지켜보거나 이들의 무엇인가에 열중한 뒷모습을 잡는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카메라에 대고 우리가 사이가 좋거나, 혹은 좋아졌어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에 영화는 그저 둘이나 셋, 혹은 네 명 전체가 같이 있는 모습을 카메라를 통해 긴 시간 묵묵히 보게 만든다. 이 이상의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그러니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말을 놓아도 될까,라며 쭈뼛거리던 자매들이 왜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 쓰잘데 없는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는지. 매실주를 한잔만 마시고도 기절해버리던 소녀가 어떻게 독하게 담궈진 매실과 그렇지 않은 매실을 구별해 언니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있는지 말이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혹시 있었을지 모를 번뇌가 어떻게 되었는지 말이다.

 

아니 나는 그들에게 있어서 번뇌가 사라졌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약속된 장소에서>의 심리학자의 말대로 사람이 번뇌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할 테니 말이다. 그러나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를 통해 한가지를 아주 어렴풋하게 생각해 볼 수는 있을지도 모르겠다.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할지 몰라도, 그 번뇌와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은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번뇌에 이길 수는 없지만, 지지않을 수는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그것은 긴 시간 동안 견뎌내며 그것들을 오래동안 지켜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물론 쉬운 것이 아니다. 긴 시간을 견뎌내는 것은 힘들고, 어딘가에서 옴진리교와 같은 쉬운 답이 호시탐탐 빈틈을 노리며 기다리고 있으니까 말이다. 어떻게 번뇌를 품고 살아갈 것인가. 이것을 이렇게 바꿔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떻게 번뇌를 안고 죽어갈 것인가. 고레에다 감독의 이 영화는 장례식으로 시작해서 장례식으로 끝나는 영화다. 그런 영화다.

 

 

 

- 2015년 12월, 메가박스 코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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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드니 빌뇌브

Ending Credit | 2015. 12. 15. 22:09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가끔 과녁을 벗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화살이 있다. 아니면 이런 표현도 가능하겠다. 가끔 궤도를 벗어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열차가 있다. 빗나간 화살, 혹은 탈주하는 기관차, 그것들은 현실에서라면 무엇인가 어긋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영화에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때로 어떤 화살은 과녁을 벗어나 다른 더 좋은 목표물에 명중하며, 어떤 열차는 궤도를 벗어나 낯설지만 강렬한 곳에 관객을 데려다 놓는다.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이하 <시카리오>)의 과녁은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대한 마약조직(카르텔)이 저지른 극악무도한 범죄가 영화의 시작부에 드러나고, 이들을 잡기 위해 특별한 팀이 결성된다. 목표물은 명확하고, 영화는 정해진 목표물을 잡기 위해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접근하고 있는 것 같다. 이들을 잡기 위해 특별수사팀은 조직의 본거지인 멕시코 후아레즈로 향하고, 계획은 거칠어 보이지만 나름 치밀하게 수행된다. 작전은 성과를 올리고, 이 특별수사팀은 점점 적의 심장부에 가까이 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 어떤 미심쩍은 컷들이 끼어든다. 예를 들어 후아레즈를 둘러싼 주위의 황량한 사막과 같은 풍경을 드론으로 훑어내려가면서 찍는 익스트림 롱샷은 왜 필요한 것일까. 중심이야기의 흐름을 단절시키면서 등장하는 민머리 남자와 그에게 축구를 하러 가자면서 보채는 아들의 이야기는 왜 여기에 끼어들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야기는 점점 방향을 살짝 틀어나가기 시작한다. 마약조직을 소탕한다는 이 명확한 목표, 혹은 이 작전에는 어딘지 모르게 찜찜함이 있다. 그것은 관객이 이 작전에 거의 아무 것도 모른채로, 혹은 마약조직을 소탕한다는 목표만을 가지고 참여하는 케이트(에밀리 블런트)와 거의 동일한 위치에 놓여 있기 때문에도 그렇다. 케이트는 마약조직이 벌인 끔찍한 참상을 보고 이 작전에 자원하여 참여하지만, 이 작전에는 (관객과 마찬가지로) 그녀가 모르는 어떤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일단 이 작전을 이끌어가는 CIA의 책임자 맷(조쉬 브롤린)이나 소속을 정확히 알 수 없는 남자 알레한드로(베니치오 델 토로)의 존재부터가 그렇다. 그들은 도대체 무슨 권한을 가졌기에 도로 한복판에서 총격전도 거리낌없이 실행하는 것일까. 그래서 작전 도중에 케이트는 여러 차례 맷과 설전을 벌인다.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는 것인지 정확하게 알려달라. 당신들이 도대체 여기에서 벌이고 있는 (불법을 넘어서 무법에 가까운) 이 일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이다. 그러나 맷은 여기에 답한다. 당신이 지금은 우리를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우리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장면들을 잡는 영화의 어떤 태도다. 예를 들어 1차로 마약조직 보스의 형을 체포하여 데려오는 작전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된 후, 맷과 케이트는 건물 밖에서 설전을 벌인다. 이 때 재미있는 것은 카메라의 위치다. 통상 이런 장면에서라면 둘의 설전을 보다 타이트하게 숏과 반응숏으로(때로는 클로즈업을 섞어가며) 잡거나, 혹은 오버 더 숄더샷으로 처리할 것이다. 그런데 이 때 카메라는 한껏 물러나 그들을 원경으로 잡는다. 그들의 대화는 들리지만(그래서 자막으로 처리되지만), 어쩌면 이런 거리라면 실제로는 대화가 들리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마치 이것은 영화가 그들 중 누구의 편도 들지 않겠다는 태도인 것처럼 보인다. 즉 이 때까지 대부분의 관객은 케이트의 위치에 서기 때문에(설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들을 보다 가까이에서 잡는 것은 케이트의 어떤 답답함, 울분에 관객이 너무 쉽게 동화되는 효과를 불러올지도 모른다. 관객들을 보다 물러나게 함으로써 관객은 보다 깊숙하게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이들의 설전을 본다. 이것은 누구의 편도 들지 않겠다는 태도이거나, 혹은 이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인 것처럼도 보인다. 이보게 케이트, 그거 중요한 거 아니라구, 사실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네, 친구. 

 

 

그렇다면 무엇이 의미가 있는가. 영화의 마지막에 도착하는 것은 이상한 출구이다. 케이트와 함께 터널을 빠져나온 관객이 도착하게 되는 곳은 사실상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변한 것은 있다. 보스는 죽었고, 조직은 그 힘을 어느정도 잃었다. 그러나 그 힘의 공백을 무엇이 채우는가. 다른 거대한 힘, 아마도 그보다 훨씬 강력할지 모를 어떤 힘이 채운다. 그러니까 영화는 이상한 출구를 관객들에게 제시한다. (케이트와 동일시 된) 관객이 기대하고 본 것은 힘의 공백이었지만, 실제로 영화가 제시한 출구는 힘의 균형, 그리고 그 힘의 균형이 실제로 의미하는 '거의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음'이다. 다시 말해서 관객은 마약조직의 소탕을 보게 될 것을 기대했지만, 그 기대는 무참히 배반당한다. 그것은 감독이 굳이 마지막에 끼워넣은 영화의 컷이 상징한다. 특별히 놀랄 것도 없는 일들, 그들에게 있어서 당연한 삶이 그렇게 지속된다. 그것은 영화의 초반부 특별수사팀이 후아레즈에 들어갈 때 무심히 그들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시선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을 수 있겠다. 거의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면 이 영화가 이렇게 끝냄으로써 남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김영하는 <읽다>에서 플로베르의 소설 <마담 보바리>를 다루며, 그것을 오르한 파묵이 이야기한 '감춰진 중심부', 그러니까 "소설과 다른 문학 서사의 차이는 감춰진 중심부가 있다는 것이다"라는 이론과 연결짓는다. 즉 소설에는 '감춰진 중심부'가 있으며, 독자는 이 감춰진 중심부를 찾길 희망하며 소설을 읽기 때문에, 소설이라는 것이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중심부를 찾는가, 못찾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 중심부에 다다르는 과정이다.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는 '감춰진 중심부'에 도달하고자 애쓰는 독자들이 그곳에 쉽게 도달하지 못하도록 독자들과 게임을 벌인다. 플로베르는 '거의 아무런 주제도 없는 아니 적어도 주제가 거의 눈에 뜨이지 않는' 책을 쓰고자 했다. 플로베르의 태도는, 중심부가 아니라 독자가 중심부에 다다르는 과정, 다다르려고 애쓰며 어떻게든 독자 자신의 고유한 내면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것과 같은 선상에 있다. 다시 말해서 플로베르는 주제와 교훈, 그러니까 중심부를 강조하는 소설을 낡은 것으로 보이게 했으며, 따라서 플로베르에게서 현대소설이 시작되었다면 그것은 이 때문이라고 김영하는 말하고 있다.

 

드니 빌뇌브의 <시카리오>에서도 마찬가지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이 영화에서도 어떤 '감춰진 중심부'를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그것을 '마약 조직의 소탕(케이트)'이라고 불러도 좋고, '힘의 균형을 찾음으로서 통제권을 확보하는 것(맷)'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보게 되는 것은 어떤 중심부가 아니라 산재해 있는 것들, 중심을 알 수 없는 어떤 무심하고 황량한 풍경이다. 영화의 초중반에 걸쳐서 점점이 걸쳐져 있는 어떤 낯선 컷들이 있다. 마약조직(카르텔)이 장악하고 있는 도시 후아레즈를 원경에서 잡는 컷들,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한 가족. 이들의 삶은 이 영화의 일련의 과정이 불러온 연쇄를 통해 파괴에 이르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파괴된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 파괴가 너무나도 무심히 당연하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며, 그것이 점점이 후아레즈라는 거대한 죽음의 도시를 이룬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영화의 주인공은 케이트나 맷, 혹은 알레한드로나 마약 조직의 보스가 아니다. 어쩌면 이 영화의 주인공은 후아레즈라는 거대한 사막의 도시가 아닐까. 그 사막의 도시에서는 여전히 어딘가에서 총격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은 언제나 당연하게 들리는 총격 소리에 무심하며, 수많은 마약은 그곳에서 생산되어 여전히 미국과 전세계의 도시로 흘러들어간다. 사막이 확장되는 것처럼 마약이 불러오는 파괴는 그렇게 확장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호쾌한 액션이나 스릴을 보게 되리라 기대했지만, 우리가 결국 만나게 되는 것은 어떤 출구없는 미로의 풍경이다. 예를 들어 그것을 케이트가 알레한드로를 향해 겨눈 총의 방아쇠에 놓인 손가락이라 말할 수도 있다. 그를 향해 총구를 겨누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이지만, 이 때 우리는 케이트와 마찬가지로 질문을 하게 된다. 그 손가락에 힘을 줄 것인가, 말 것인가. 그를 쏜다고 해도, 그가 쓰러진다고 해도 무엇이 달라지는가. 좋은 영화는 질문에 대해 답을 주는 영화가 아니라, 답을 알고 있었다고 믿었던 것을 뒤집어 질문을 하게 만드는 영화다. 

 

 

덧.

그래도 마지막으로 이 이야기는 덧붙이고 싶다. 드니 빌뇌브의 이 영화 <시카리오>는 예상했던 궤도를 벗어나 그보다 더 강렬한 곳으로 관객을 데려다놓는 영화지만, 한편으로 흥미로운 것은 그러면서도 그 원래 궤도에서 줄 수 있는 재미를 거의 놓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야간 투시경 화면이나 CCTV 화면의 활용 같은 것은 익숙한 설정이지만 적절한 편집으로 실제감을 가중시키며, 기존 스릴러 영화나 액션 영화에서 보기 어려운 컷의 활용은 색다른 재미를 안겨준다(예를 들어 줄지어 달려가는 자동차를 위에서 잡는 컷과 그에 어울리는 강렬한 음악의 조화 같은 것). <그을린 사랑>이 상대적으로 소재의 강력함에 기댄 것 같은 인상을 줬다면 이 영화에서는 감독의 역량이 그보다 잘 드러난 것 같다.

 

소위 상업영화를 주로 즐기는 관객이나 예술영화를 주로 즐기는 관객이나 모두 만족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영화가 아닐까. 다만 '암살자의 도시'라는 부제는 붙이지 않는 것이 더 나았을 것 같지만.

 

 

 

 

- 2015년 12월, CGV 신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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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이면에는 늘 공포가 자리한다

The Book | 2015. 11. 17. 19:55 | Posted by 맥거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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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라 워터스 지음, 엄일녀 옮김/문학동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소설의 시작은 인상적이다. 소설의 화자 그러니까 '나', 닥터 패러데이가 에어즈 가문이 살고 있는 헌드레즈홀을 처음 보았을 때의 회상. 엠파이어 데이 기념일에 헌드레즈홀에 가서 에어즈 부인과 그녀의 남편인 대령에게 기념 메달을 받고, 예전 유모로 일하던 어머니가 몰래 챙겨준 케이크의 설탕과자 장식과 젤리를 에어즈가 전용 식기장에서 꺼낸 은스푼으로 먹던 기억, 그리고 벽에 붙은 회반죽으로 만든 도토리 모양 장식을 주머니칼로 몰래 떼내가지고 온 일들. 그리고 이야기는 현재로 점프한다. 의사가 된 패러데이는 에어즈가에 단 한명 남은 하녀 베티가 아파서 왕진을 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다시 헌드레즈홀에 방문하게 된다. 화자, 혹은 작가의 관심은 이 사건 자체보다는 다른 것에 있는 것 같다. 균열되고 푹 꺼진 저택의 테라스, 관리하지 못해 엉망이 되어버린 정원, 막힌 배수관에서 나는 악취, 제멋대로 자란 꽃에 뒤덮인 난간, 덧창이 내려진 창문들, 휑뎅그렁하고 낡아버린 집안 곳곳의 풍경. 작가는 닥터 패러데이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박제된 화려한 헌드레즈홀과 이제는 낡아서 거의 형체만 유지하는 것조차도 힘겨워 보이는 쇠락해가는 헌드레즈홀을 집요하고 치밀한 묘사로 효과적으로 대조시킨다. 집에 대한 묘사는 이것이 끝이 아니다. 이제 작가는 솜씨 좋게 무대를 부드럽게 다른 장소로 이동시킨다. 닥터 패러데이의 병원을 겸한 살림집, 일층에 상담실과 진료실, 대기실이 있고, 침실은 다락에 있는, 예전 그의 스승에게 물려받은 낡은 집. 누리끼리한 벽과 '빗살무늬' 페인트칠이 전부인 우중충한 인테리어가 전부인 혼자 사는 의사의 집. 열기가 빠져나가지도 못하는 좁은 다락방에 누워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닥터 패러데이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다락방의 열기는 숨이 막힐 정도였다. 나는 전등을 끄고 담뱃불을 붙인 다음 침대 위에 흩어진 사진과 잡동사니 틈바구니에 털썩 누웠다. 창문은 커튼이 걷힌 채 열려 있었다. 달 없는 밤에 여름의 껄끄러운 어둠이 내려앉았고, 미묘한 움직임과 소리가 웅성거렸다. 나는 어둠 속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날의 기이한 잔상이었는지 헌드레즈홀이 보였다. 그 서늘하고 향기로운 공간이, 잔에 든 와인 같던 빛이 보였다. 나는 그 공간에 있을 사람들을 그려보았다. 베티는 자기 방에 있을 테고, 에어즈 부인과 캐럴라인은 그들 방에, 로더릭은 그의 방에......

나는 그렇게 눈을 멀거니 뜨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한참 동안 누워 있었고, 담배는 서서히 타들어가며 손가락 사이에서 재가 되었다.

- p.65~66, 1장의 마지막 문단.   

 

이 공간에 대한 집요한 묘사는 물론 일차적으로는 공간 그 자체의 차이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각 인물들이 처한 위치를 상징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것은 2차대전 직후의 영국이다. 전쟁이 가져온 여러 영향들로 모든 물자들은 모자랐고, 지주와 귀족들은 몰락해가고 있었으며, 전쟁 직후에 집권한 애틀리가 이끄는 노동당 정부로 그 몰락은 가속화되고 있었다. 헌드레즈홀이 몰락한 것처럼 이제 에어즈 가문도 거의 몰락했다. 패러데이가 처음 방문하던 날, 에어즈가 사람들의 모습은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안의 장남 로더릭은 쇠락해가는 집안을 어떻게든 건사하려 애쓰지만, 전쟁 중에 입은 부상으로 그마저도 쉽지 않아 보이고, 그의 누나 캐럴라인은 동생과 어머니를 돌보는 동시에 하녀처럼 집안일을 하며, 에어즈 부인은 애써 그런 모습을 감추려 하지만, 이제 그녀의 모습은 '마님'과는 거리가 멀다. 반면 패러데이는 노동자 계급의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자수성가하여 이제 어엿한 의사가 되어 에어즈가에 거의 주치의처럼 드나드는 위치에까지 오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닥터 패러데이가 에어즈 가문의 사람들과 동등한 위치에까지 오른 것은 아니다. 에어즈 가문 사람들과 패러데이의 첫만남, 그리고 그가 에어즈가에서 주최한 파티에 다른 초대받은 사람들과 함께 참석했을 때의 묘사를 보면 그가 처한 위치가 잘 드러난다. 그는 에어즈 가문과 동등한 위치는 커녕, 젠트리(귀족은 아니지만 가문 휘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자유민)와도 그 위치가 다르다. 파티에 참석한 베이커하이드 부부나, 데즈먼드 부부, 로시터 부부 등의 인둘들은 그를 대놓고 무시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동등한 위치에서 그를 대하지도 않는다. 그는 어디까지나 노동자 계급에서 자라난 단지 '의사 선생'이었고, 파티가 끝나면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좁은 집에서 그보다 좁은 다락방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해야만 할 형편이었다. 다시 말해서 이 화려한 저택과 이제 쇠락해가는 저택, 그리고 닥터 패러데이의 초라한 병원 겸용 살림집에 대한 대비적인 묘사는 그들이 처한 위치를 상징적으로 대비하며 말해준다. 헌드레즈홀이 예전에 비해 엄청나게 쇠락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초라한 패러데이의 집과 같아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이 비록 이제는 같은 티테이블에 마주 앉아서 한담을 나눌 수 있는 위치라고는 해도, 그것은 겉보기의 모습일 뿐 그 차이는 여전히 크게 남아있다.

 

그래서 어쩌면 패러데이는 그 집을 욕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책의 서두에서 인상적인 것은 묘사의 대비이기도 하지만, 패러데이의 헌드레즈홀을 향한 욕망이다. 그의 헌드레즈홀에 대한 욕망은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되어 왔다. 그 집에서 회반죽으로 된 도토리장식을 처음 떼어내 오던 날부터. 그리고 그의 욕망은 헌드레즈홀이 완전히 쇠락했음을 확인한 지금에도 멈추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욕망하는 것은 헌드레즈홀의 화려함이 아니라, 헌드레즈홀 그 자체, 그 자체가 가지는 어떤 계급성이니까 말이다. 그런 계급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욕망, '의사 선생'이 아니라, 그 이상이 되고 싶은 욕망 말이다. 그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을까. 여러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어쩌면 공포가 아닐까. 늘 욕망의 반대편에 있는 녀석, 그러니까 우리를 사로잡는 그 익숙한 공포 말이다. (공포 영화의 주인공들은 늘 다른 것을 욕망하다가 죽는다.)

 

서두 외에 두 가지의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하나는 몰락하여 생활고에 시달리는 에어즈가가 돈을 마련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판 헌드레즈홀 주변의 땅에 들어서는 대규모의 주택 단지를 바라보는 패러데이의 시선이다. 그의 시선에는 쇠락한 헌드레즈홀을 돌아볼 때의 연민과 달리 어떤 경멸들이 숨김없이 드러나 있다. 그리고 그는 마침 여기에서 그의 외가 쪽으로 먼 친척이자 학창시절의 동무, 그러나 이제는 공사장 인부와 '의사 선생'으로 차이가 벌어진 이를 만난다. 그는 어색하게 '의사 선생님'이라고 칭하며 목례를 하는 그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다른 하나는 그 마지막 밤에 사건들이 벌어지기 전, 그에게 닥친 또하나의 다른 사건이다. 그가 찾아간 맹장이 터진 '무단거주자' 가난한 남자의 이야기. "순간 나는 들어갈까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거절하고 작별 인사를 했다. 문이 닫히기 전에 힐끔 안을 들여다봤는데, 바닥이 매트리스와 잠자는 몸뚱이로 난장판이었다. 어른, 아이, 개, 그리고 아직 눈도 안 뜬 강아지까지 꼼지락댔다.(p.669)" 그는 여기에서 무엇을 봤을까, 아니 왜 이 이야기는 하필이면 여기 이 시점, 그러니까 그가 저택 근처로 가기 직전에 들어가 있을까. 그는 여기에서 어떤 공포를 봤을까. 그 자신이 '무단거주자'가 되어 그 한복판에서 몸을 뉘이고 있는 환상을 보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환상이 가져다 준 공포가 그에게 무엇을 하게 만들었을까.

 

아니, '무엇을 하게 만들었'다기 보다는 어쩌면 그는 쇠락해져가는 헌드레즈홀 그 자체가 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세라 워터스의 이 소설 <리틀 스트레인저>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패러데이의 헌드레즈홀에 대한 반복적인 묘사가 보여주는 이상한 방식의 동일시이다. 화자인 패러데이는 소설의 여러 부분에서 마치 우리가 실제로 헌드레즈홀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을 정도로 집안 곳곳에 대해 정밀하게 묘사하는데, 재미있는 점은 이 묘사가 그의 심리 상태에 따라 묘하게 달라진다는 점이다. 그는 특별한 사건이 없거나, 기분이 좋을 때에는 이 헌드레즈홀 그 자체가 마치 그를 반기는 듯했다,는 식으로 묘사를 하고, 반대로 어떤 사건이 일어난 후에는 같은 공간이라도 그 공간을 의혹과 공포가 가득한 곳으로 느껴지도록 묘사한다. "아무리 조그만 소리나 움직임이라도 있었으면 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뭔가가 정원 안에 우리와 함께 있는 듯한, 뭔가가 뽀득뽀득 새하얀 눈을 밟고 서서히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보다 더 고약한 것은 그것이, 그게 무엇이든 어쩐지 낯익은 듯한 기괴한 느낌을 받았다는 점이다.(p.560)" 그는 단지 그의 감정을 헌드레즈홀이라는 저택에 투사한 것에 불과했을까. 어쩌면 그는 그 집 자체가 되고 싶은 것, 혹은 이미 그 집 자체는 아니었을까. 그 집은 물론 귀신들린 집이니까.

 

(이 부분부터는 소설을 읽지 않은 분들은 읽지 마시길.)

 

귀신들린 집의 이야기. 사실 귀신들린 집의 이야기는 수많은 소설, 영화, 드라마 등에서 닳고 닳은 소재이다. 당장 기억나는 영화들만 해도 <샤이닝>, <컨저링>, <디 아더스>, <헌티드 힐>, <아미티빌 호러>, <폴터가이스트>, <파라노말 액티비티> 등등 한 두 편이 아니다. 그리고 이 '귀신들린 집'을 다루는 이야기들은 대체로 어떤 반전을 담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이 '믿기지 않는 현상'들은 처음에는 충격을 주지만, 그것이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나른한 익숙함을 안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 이야기에는 그 익숙함을 뒤집는 한 방이 필요한 경우가 많은데, 때로는 그 한 방이 얼마나 묵직한가에 따라서 이 이야기는 걸작이 되거나, 범작이 되기도 한다.(예를 들어 <디 아더스>가 줬던 그 묵직한 충격을 기억해보라.)

 

그런데 이 소설 <리틀 스트레인저>를 그런 방면에서 보자면 반복되는 '귀신들린 집'의 이야기와 그것에 가미된 한방은 사실 꽤 밋밋하다. 한방은 커녕 시드시들한 잽도 못된다. (옮긴이는 이 소설을 아가사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에 비유했던데, 사실 이 소설은 애크로이드 씨의 이야기와는 꽤 다른 것 같다. 적어도 크리스티의 '닥터 세퍼드'가 그 안에서 거짓말을 한 적은 없었다. 그 사이에 밑줄을 그어보라며 충고한 적은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패러데이의 말들이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이 반전(아닌 반전)은 의미가 없어지며, 그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이 소설 속의 모든 것 중에 사실 믿을 만한 것은 없어진다. - 그래서 그의 이름이 패러독스, 아니 패러데이인가? 사실 빈곤한 상상력으로는 '패러데이의 법칙'에 나오는 패러데이를 연상할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 그런데 말이다. 혹시 모든 것이 거짓일 뿐이라고 단정짓는다면 도대체 소설이라는 것을 읽는 의미가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나는 그 시들시들한 잽으로 실망하는 대신에 다른 것에 조금 더 주목하고 싶었다. 패러데이, 그가 가질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공포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의 공포는 어쩔 수 없이 계속 지속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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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본 것, 보고 있는 것

Ending Credit | 2015. 11. 12. 21:17 | Posted by 맥거핀.

  

(<사도>의 내용, <종이 달>의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사도, 이준익, 2015

 

영화 <사도>에는 몇 가지의 죽음이 떠돌아다니고 있는 것 같다. 영화의 시작부에서 우리는 광기의 눈빛을 하고 사납게 야수처럼 으르렁거리는 사도세자(유아인)를 만난다. 그는 이제 칼을 빼들고 아버지 영조(송강호)를 죽이러 가려는 참이다.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이 죽음은 시도되었을 뿐 실행되지 않았지만, 다른 죽음도 있다. 영화 상에서 좋지 않았던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가 급격히 파탄의 국면으로 들어서는 것은 대왕대비 인원왕후(김해숙)의 죽음을 둘러싼 언쟁에서 촉발되었다. 물론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죽음이 있다. 표면상으로 볼 때 이 영화 <사도>는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죽어가는 8일을 다룬다. 중간중간에 거대한 플래시백들이 자리잡고 있기는 하지만, 이 영화는 칼을 빼들고 영조를 찾아간 사도세자와 그런 그를 뒤주에 가두는 영조로부터 시작하여, 결국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니까 <사도>에서는 하나의 느린 죽음이 진행되는 셈이다.

 

느린 죽음? 느리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뒤주 속에서 서서히 말라가며 죽어가는 사도세자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적어도 영화상으로 볼 때('영화상으로'라는 표현을 자꾸 쓰는 것은, 나는 이 영화의 해석이 실제 사료와 얼마나 일치하고 있는가, 혹은 이 영화의 해석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타당한가의 문제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사도세자는 이미 그 전부터 죽어가고 있거나, 거의 죽어 있었던 것처럼 보이니까. 영화 속에는 수많은 이미지들이 있지만, 영화를 보면서 가장 흥미를 끌었던 것은, 혹은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기억에 남아 떠도는 것은 '나무아미타불'이 반복되는 옥추경이 울려퍼지는 무덤 속에서 관에 들어가 누워있는 사도세자가 벌이는 기행이었다. 그는 왜 하필이면 상복을 입고 무덤 속 관에 누워있는 것일까. 이것을 단지 죽은 할머니에게 바치는 독경이라고 보기에는 그 형상이 너무도 기괴하다. 혹시 어쩌면 그는 스스로를 이미 죽은 존재이거나, 혹은 죽어가는 존재로 생각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뒤주 속에서 사도세자는 말라 죽어가고 있었지만, 영화의 플래시백들 속에서 영조는 사도세자를 (대리청정과 반복되는 선위 파동으로) 그 이전부터 거의 말라 죽도록 괴롭히는 것처럼도 보였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사도세자는 영조를 죽이려 했던 것일까? 영화 <사도>는 올해 몇 차례 등장했던 살부 서사의 계보에 위치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가깝기로는 <암살>의 살부. <암살>의 자식, 그러니까 안옥윤(전지현)은 아버지를 죽이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죽지 않는다. (그가 친일파 아버지를 죽이는 데 실패했더라면, 그는 그의 쌍둥이 자매와 마찬가지로 가차없이 아버지에 의해 제거되었을 것이다. 하와이 피스톨(하정우)은 친일파 아버지를 죽이지 못했지만 그 대신에 그것으로부터의 도피(와 그로인한 죽음)를 택한다.) 반면 (아주 거칠게 말한다면), <사도>의 사도세자는 아버지를 죽이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그로부터 죽음을 맞는다. 아니면 조금 다른 살부 서사들도 있다. 영화 <협녀, 칼의 기억>의 홍이(김고은)나 <차이나타운>의 일영(김고은)이나 그들의 아버지를 향해(<차이나타운>에서 일영이 맞서게 되는 것은 엄마(김혜수)이지만, 사실 여기서 김혜수의 외양에서 감지할 수 있듯, 그녀는 엄마라기보다는 아빠에 가까운 것 같다.) 거의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걸고 죽음을 겨눈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아버지를 죽이지 못한다면 그들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는 데 실패할 것이다. 이 기이한 살부 스토리들은 왜 올해 극장가를 떠돌고 있는 것일까? 혹시 현실에서 어떻게든 아버지를 숭앙하려 애쓰는 이들에 대한 반감이 여기에 스며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역사를 고쳐쓰면서까지 그들 정신적 아버지들이 벌인 추악한 일들을 가리려 애쓰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작은 가운데 손가락은 물론 아니겠지.  

 

아무튼 보지 않은 영화나 잘모르는 정치에 대한 얘기는 이쯤 하고 다시 <사도>로 돌아오면, 아버지를 죽이러 가며 기세등등하게 시작했던 영화는 마지막에 이르러 묘한 방식으로 봉합된다. 처음 영조와 사도세자라는 부자관계에서 출발했던 영화는 점차 다른 부자관계로 중심점이 이동하는데, 그것은 사도세자와 정조라는 부자관계이다. 영화의 중반부까지 뒤주에 들어가서도 어떻게든 죽지않으려 날뛰는 사도세자는 어느 순간부터 점차 죽음을 납득한 것처럼 보이는데, 그 순간은 뒤주를 깨고 나온 사도세자가 다시 뒤주에 갇히며, 그의 장인 홍봉한이 밀어넣어준 부채를 보는 시점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 부채는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태어나던 날 사도세자가 기쁨에 겨워 그린 그림이 들어있는 부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도세자는 이 시점부터 그가 왕인 아버지를 죽이려 했던 세자가 아니라(즉 역모를 일으킨 세자가 아니라), 그저 미쳐 날뛰다가 죽은 세자가 되어야 자신의 아들이 살 수 있다는 논리(그의 장인이 이 부채를 밀어넣어 주는 것도 아마도 그것을 납득하라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에 따르기로 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것을 영화는 막바지에 이르러 뒤주 속에서 죽은 세자에게 전하는 영조의 대사로 재확인한다.

 

이것은 사실 조금 이상하다. 영화는 초반부에는 영조를 이상한 성격을 가진 인물로 묘사하며 사도세자에게 중심을 맞춰 놓는다. 즉 <사도>의 초반부는 자식을 괴롭히는(혹은 친일을 하는) 이상한 아버지와 그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자식들의 전형적인 스토리이다. 그런데 중반부에 이르러 그 고통받는 자식은 이제 아버지가 되어 자신의 자식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려 하고, 그 논리를 그 괴롭히던 아버지를 통해 재확인한다. 다시 말해서 영화의 중심점은 영화 초반부에는 아들 사도세자에게 놓여져있었지만, 두 개의 부자관계가 교차되면서 아버지들에게 중심점이 옮아간다. 자식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아버지(사도세자)에 다른 아버지(영조)를 겹쳐내면서, 마치 영조도 자식을 위해 무엇인가를 희생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것은 명백한 착시일까, 아닐까. 만약 착시라면, 이 착시는 의도치 않게 빚어낸 착시일까, 아니면 고도의 계산이 가미된 착시일까. 단지 무의도라고 보기에는 이 논리가 지금의 현실의 논리들과 비슷하게 닮아있어 어떤 찜찜함이 계속 남는다.

 

 

 

종이 달, 요시다 다이하치, 2015

      

첫 영화를 애초 생각보다 너무 길게 썼으니, 두 번째부터는 짧게짧게 써야겠다. 마지막에 이르러 뭔가 묘하게 방향을 트는 것처럼 보이던 영화는 이준익의 <사도>만이 아니다. 요시다 다이하치의 <종이 달>의 여주인공 리카(미야자와 리에)에게는 거의 정해진 결말만이 남은 것처럼 보인다. 점점 부풀어만 가던 횡령은 전모가 드러났고, 남자와의 관계는 끝났으며, 이제 그녀에게는 정해진 대가를 치르는 것만이 남았다. 동료 여직원 스미의 말대로 이제 그녀가 할 일은 '가야할 곳에 가는 것 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야기상으로도 형식적으로도 다른 어떠한 것이 여기에 끼어든다. 일단 형식적으로는 플래시백의 등장이다. 이 영화 <종이 달>은 리카의 과거, 그러니까 리카가 수녀들이 운영하는 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을 비추면서 시작하지만, 이 과거는 아주 짧게 등장한 후 곧 이야기가 1994년, 즉 리카가 계약직 은행원이 되어 횡령을 처음 시작하던 때로 점핑한다. 그리고 이야기는 계속 선형적으로 진행된다. 영화는 정해진 시간의 선을 따라 굴러가고, 그 굴러감에 따라 리카의 횡령 규모도 점차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그런데 리카의 횡령이 밝혀지는 이 때 다시 영화는 리카가 교복을 입고 있던 과거의 시점으로 회귀한다. 그리고 마치 이 과거가 현재의 어떤 의문들에 대해 답을 주려는 듯한 방식으로 등장한다. 이 과거씬은 왜 지금 이 시점에서야 여기에 등장하는 것일까. 단지 현재의 어떤 의문들, 즉 리카가 왜 횡령을 저질렀는가에 해답을 주기 위해 여기에 등장했을까. 기부를 하기 위해 아버지의 돈을 훔치던 소녀의 도벽이 더 큰 것으로 발전되었을 뿐이라는 식의 해답을 주기 위해 여기에 그 플래시백이 등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이 영화의 핵심, 즉 '종이 달'이 상징하는 어떤 가짜의 세계에 대한 어렴풋한 실체라도 설명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플래시백은 그녀의 가짜 세계에 대한 인식, 손가락으로 달을 지워낼 수 있는 그런 세계가 어떻게 안에서 만들어졌는지 설명해주지 못한다.

   

(어떤 것의 연원을 밝히고자 하는 것은 그것을 멈추기 위한 시도의 하나가 아닐까. 이 플래시백이 현재의 가짜 세계를 멈추게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그 플래시백은 해답과는 거리가 멀다. 리카의 '종이 달', 즉 가짜세계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이 플래시백이 등장한 후, 영화는 기어이 가장 가짜같은 장면을 등장시킨다. 창문을 깨고 도망가는 리카. 이것이 가능한가, 아닌가는 차치하더라도, 이것은 이 가짜 세계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녀의 도피는 언제까지라도 가능할까.)

 

다만 그 플래시백들은 다른 것을 말한다. 아버지의 돈을 훔쳐서 기부하는 것, 그것이 나쁜가요. 리카는 되묻는다. 어쩌면 리카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그 돈 몇 푼 없어졌다고, 재해를 맞은 외국의 소년보다 더 나쁜 상황에 이르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아버지는 결과적으로 기부를 하게 된 셈이니 좋은 것이고, 외국의 소년은 도움을 받아 살아갈 수 있으니 좋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영화는 그런 생각에 화답하듯이 이상한 장면들을 붙인다. (횡령의 피해자이지만) 카메라를 들고 관심을 보이는 노인, 여자친구와 즐겁게 걷고 있는 남자(리카의 불륜상대), 여전히 활달하게 잘 지내는 남편, 꿈꾸는 듯한 눈빛의 스미, 그리고 영화 속 어느 때보다 힘차게 달리고 있는 리카. 모두들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홍상수, 2015

 

언뜻 보면, 홍상수가 그려왔던 세계의 반복인 것처럼 보인다. 상황을 비슷하게 반복시키고, 같은 대사를 다시 하거나, 같은 공간에 비슷한 인물을 넣어놓음으로서 반복이 만들어내는 어떤 화음을 보고자 하는 것 말이다. 그런데 과거의 영화들과 이 영화는 몇몇 차이가 있는데,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이것이 어떤 영화적인 내부장치로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엇인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보였던 홍상수의 과거 영화들을 짚어보자. <극장전>은 영화 속에서 영화가 상영되는 형식이었다. <하하하>는 두 인물이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을 취했다. <옥희의 영화>는 한 영화를 여러 개의 장으로 분절했다. <북촌방향>은 시간을 흩뜨려 버렸다. <다른 나라에서>는 하나의 시나리오를 축으로 해서 이야기를 고쳐쓰는 작업이었다. 즉 여기에는 어떤 장치들이 숨어 있다. 영화 속 영화, 대화, 이야기, 시간의 뒤섞음, 시나리오의 퇴고 등등. 그 외에도 홍상수는 꿈과 같은 영화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장치를 쓰며 이야기를 반복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이 영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이런 외부적인 장치가 없다. 그저 한 영화가 거의 동일하게 다시 상영될 뿐이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는 두 개의 별개의 영화가 나란히 상영되는 것 뿐이다.(<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라는 한 영화가 끝난 후 다시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라는 제목이 등장하면서 다시 영화가 시작된다.) 즉 관객이 보는 것은 그저 두 편의 나란한 영화이다. 제목은 같고, 등장인물도 같고, 내용도 거의 같으나 미세한 몇몇 가지가 달라졌을 뿐인 영화. 이것은 어떤 영화적 내부 장치, 혹은 형식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저 한 영화를 두 번 트는 것 뿐이다.   

 

그렇다면 그 전의 영화들과 달리 이것이 가지는 효과는 무엇인가. 여러 가지 다른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것은 조금 더 '차이' 그 자체에 주목하게 만드는 것 같다. 즉 홍상수의 예전 영화들에서는 어떠한 것이 반복된다는 징후가 없기 때문에 관객들은 갑자기 반복이 일어날 때 반복 그 자체의 양상에 주목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여기에서 관객이 대체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반복되고 있다'는 그 사실, 그 자체이다. 그러나 한 영화가 다시 반복되는 것은 다르다. 한 영화를 두 번째 볼 때, 이야기 그 자체에 주목하는가? 대부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미 다 알고 어떠한 인물이 어떻게 행동할지 이미 다 알기 때문에 그보다는 주목하지 않았던 배경이나 미세한 뉘앙스, 어떤 숨겨진 의미에 그만큼 더 주목하게 된다. 홍상수의 이 영화도 비슷한 것을 노린 것은 아닐까. 즉 두 번째 반복되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를 볼 때 우리는 함춘수(정재영)가 이미 어떠한 행동을 하고 누구를 만나게 될 것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즉 큰 줄거리의 사건은 반복되기 때문에) 반복의 양상보다는 그 반복이 야기하는 차이에 훨씬 더 주목하게 된다.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반복 그 자체에 현혹되지 않고 반복이 야기하는 차이에 주목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것은 어쩌면 영화 속 인물이 말하는, 표면에 숨겨진 것들을 들여다보는, 그럼으로써 두려움을 이겨내는 길은 아닐까. 어떠한 것이든 표면은 대체로 너무도 심상하기 때문에, 우리는 표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을 늘 놓친다. 표면은 늘 같으니까, 같은 일들이 반복되니까. 홍상수는 억지로 같은 표면을 두 번 보게 만든다. 그래서 그 표면이 만들어내는 미세한 차이를 어떻게든 찾아내게 만든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그럴까? 어쩌면 지금은틀리고그때는맞을지도 모른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송곳, 김석윤, 2015

 

<어셈블리> 이후로 드라마를 보지 않았는데, 1회를 물끄러미 보다가 나도 모르게 빠져버린 드라마가 있다. 많은 분들이 반농담삼아 이야기한대로 이 드라마에는 송곳 같은 대사가 많이 나오지만, 나에게 이 드라마에서 가장 송곳같이 파고들었던 대사는 노동상담소 소장 구고신(안내상)이 했던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 말은 한편으로 구고신이 늘 사람들에게 반복해서 하는 이 대사와도 통한다. "당신들은 다를 것 같아?" 드라마 속 뒷부분을 봐야 더 확실해지겠지만, 구고신이 그 '시시함'을 깨닫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어쩌면 그것을 몸으로 체득했던 것이 아닐까. 드라마 속에서 잠깐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는 과거 고문을 받았고, 아마도 누군가의 이름을 실토한 다음 겨우 풀려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살기 위해 누군가의 이름을 털어 놓는 시시한 인간. 이 '시시함'을 깨닫기 위해 그가 바쳐야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 시시함은 결코 가벼운 것이라 할 수 없다. 아니, 꼭 고문이 아니더라도, 그가 수많은 노동운동을 이끌면서 얼마나 시시한 꼴을 많이 봤을 것인가, 살기 위해 배신하는, 혹은 겁내면서 주저하는 시시한 인간들을 얼마나 많이 만났으며, 시시한 일들을 얼마나 많이 벌였을 것인가.

 

그리고 그가 말한대로 거대한 악처럼 보이는 그들도, 사실 거의 대부분 시시한 인간들의 집합이다. 거의 1회에는 절대악처럼 등장했던 정부장(김희원)도 2, 3회에 이르면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중간관리자에 불과할 뿐임을 드라마는 보여준다. 그는 또 얼마나 조인트가 까였으며, 누군가에게 굽실댔을까. 그렇다면 그 위에 군림하는 것처럼 보이는 인사상무(정원중)가 절대악일까, 아니면 그도 시시한 강자일까. 적어도 구고신의 눈에는 그들 모두는 시시한 강자이다. 살기 위해 패악질하는 시시한 녀석들. 그래서 어쩌면 구고신은 노동현장에서 사람들을 밀어내는 용역들에게도 노동상담소 명함을 던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용역질하다가 돈 못받고 떼이면 찾아오라고 말이다.

 

<송곳>은 한편으로 그러한 것을 다양한 인간군상들을 세밀하게 그려냄으로써 끄덕거리게 만든다. 예를 들어 과거 이수인(지현우)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 부장. 그녀는 이수인이 곤경을 받고 있을 때 과거 서사와 함께 뜬금없이 등장해서 그를 도와줄지 모른다는 기대를 시청자에게 갖게 하지만, 그녀는 아무 도움도 없이 다만 실없는 응원을 던지고 가버릴 뿐이다. 그들 대다수는 그런 인간들이니까. 그저 악한것이 아니라 다만 시시할 뿐이니까.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들도 노동하는 대상이고, 또 서는 위치가 바뀌면 시시한 강자들과 싸워야 하는 시시한 약자가 되는 것이니까.

 

그렇다. 그것은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시시한 약자들과 시시한 강자들의 문제이다. 악은 선이 될 수 없지만, 시시한 강자는 시시한 약자가 될 수 있다. 그들 모두는 시시하니까. 그것은 절망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동시에 아주 희망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악을 선하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어려운 일이지만, 적어도 시시한 이들이 시시하지 않게 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으니까. 물론 그 전에 선행되어야할 것은 자신이 시시한 인간임을 깨닫는 것이다. 늘 그것이 가장 어렵다. 그래서 구고신의 일침이 늘 필요하다. "당신들은 다를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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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세대에게 남겨줄 것

The Book | 2015. 11. 9. 17:31 | Posted by 맥거핀.

파묻힌 거인 - 8점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시공사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거인은 거기 파묻혀 있었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는 언덕 위, 쐐기풀과 잡목림을 헤치고 올라야 하는 곳. 멀리 떨어진 높은 지대에 난데없이 나타난 어른 키보다 높게 쌓아올린 돌 무덤.

 

그렇기 때문에 거인의 무덤은 죄 없는 어린 사람들이 전쟁에서 살육당했던 오래전 어떤 비극의 장소를 표시하기 위해 세워두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 무덤이 왜 여기 서 있는지 이유가 쉽게 생각나지 않는다. 낮은 지대에 있었다면 우리의 조상이 전쟁의 승리나 왕을 기념하고 싶어 했을 거라고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멀리 떨어진 높은 지대에 무거운 돌을 어른 키보다 높게 쌓아놓은 것은 왜일까? (p.397)

 

그곳은 용이 즐겨 먹이를 먹고 쉬는 곳이다. 그 용은 무엇이며, 왜 하필 그 자리에 있는가? 소설 <파묻힌 거인>의 주인공(이자 실질적으로 작가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화자라고 볼 수 있는) 늙은 액슬과 그의 아내 비어트리스는 과거의 기억을 잃어가는 중이다. 아니, 그것은 단지 그들이 늙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기억을 잃고 있는 것은 그들만이 아니니까. 그들이 살고 있는 거대한 습지 주변, 삐죽삐죽한 언덕 그림자가 드리워진 산비탈 굴에 있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책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들은 금새 지나간 일들을 잊어버린다. 그것이 며칠 지나지 않은 일일지라도 말이다.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더 기억을 잃기 전에 먼 마을에 살고 있는 아들을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선다. 그런데 길을 떠나 다른 마을에 들러 여러 사람들을 만나는 도중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그들이 기억을 잃고 있는 이유가 높은 산에 있는 암용 케리그 때문임을 알게 된다. 마법에 걸린 용 케리그가 내뿜는 입김으로 인해 사람들은 점점 기억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늙은 기사 가웨인의 도움을 받아, 기억을 잃어 자신들을 버린 부모가 돌아오기를 소망하는 아이들이 키운, 독초를 먹은 염소를 힘겹게 끌고 거인의 돌무덤이 있는 언덕에 오른다. 그곳에서 쉬고 있는 용이, 독을 품은 염소를 먹고 쓰러지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두 가지의 질문. 먼저 하나는 다시 처음 질문의 반복이다. 그 용은 무엇이며, 왜 하필 그 자리에 있는가? 망각의 입김을 내뿜도록 용에게 마법을 건 이는 위대한 아서 왕의 대마법사 멀린이었다. 전쟁을 끝낸 아서 왕이 우려한 것은 전쟁 기간 중에 일어난 학살과 살육, 무자비한 폭력이 불러오는 연쇄적인 복수의 칼날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이 망각하기를 원했다. 그 모든 것을 말이다. 아무 죄없는 어린 아이들과 여자들에게까지 이루어진 살육과 약탈, 강간에 대한 기억과 그것이 필시 불러올 피의 복수 말이다. 다시 말해서 암용 케리그는 망각을 수호하는 괴물이자, 망각 그 자체였고, 그 용이 편히 쉬고 있는 바닥에는 거대한 거인이 파묻혀 있었다. 거대한 거인,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거대한 기억 말이다.

 

이것은 두 번째 질문과도 연관된다고 말할 수 있는데, 두 번째 질문은 늙은 노부부, 액슬과 비어트리스에 대한 것이다. 왜 그들은 처음 마을을 떠날 때의 생각과는 달리 먼 곳에 사는 아들을 바로 만나러 가지 않고, 위험해 보이는 용을 처치하는 일에 끼어드는가? 가는 도중 이러저러한 일에 연루되기는 하지만, 그들이 용을 없애기로 마음 먹는 것은 누군가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자발적인 의지에 따른 선택, 혹은 단호한 결단처럼 보인다. 그것은 결국 작품에 가로질러 놓여 있는 이 질문과도 연관된다고 말할 수 있는데, 기억을 찾는 것이 그들에게 어떠한 의미인가, 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망각의 늪에 빠져 살면서도 그들이 망각하고 있다는 사실마저도 망각하는 마을의 다른 사람들과 달리 어떻게든 기억의 줄을 놓지 않으려 애쓴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두 가지의 문제와 연관된 것처럼 보이는데, 먼저 하나는 망각이 불러오는 어떤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이 무엇인지는 작품 안에 비유처럼 제시된 이야기가 극명하게 보여준다. 여행 도중 우연히 만나게 된 뱃사공에게서 노부부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는다. 그 뱃사공은 바다를 건너 섬으로 가려는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데, 이때 (그들이 부부나 연인일지라도) 함께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으며, 그들이 함께 섬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뱃사공의 확인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 확인이란, 그들의 소중한 기억이 무엇인지 각자 따로따로 확인하는 것이다. 그 기억에서 그들의 참된 관계가 드러나야만 그들은 함께 섬으로 건너갈 수 있으며, 그 곳에서 함께 지낼 수 있다. 물론 이 신비로운 이야기를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그것은 여러 상징물들(<신곡>에서 죽음의 강 스틱스를 건너는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그리고 카론이라는 늙은 뱃사공)이 의미하는 대로 죽음에 대한 비유처럼 보이는데,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과거의 기억 때문이 아닐까. 사람들은 죽음 뒤에 있을 무(無)를 두려워한다. 어떤 이들은 여러 종교에서 제시하는 내세를 믿으며, 또 어떤 이들은 죽은 뒤에 생에서 사랑했던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그들에게 기억이 사라진다면, 그들은 사랑하는 이들을 어떻게 알아보고 다시 만날 것이며, 죽음의 두려움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속으로 생각했지요. 하지만 그 여자는 이 땅에 망각의 안개가 덮여 저주가 내렸다는 이야기를 계속했고, 그건 우리 두 사람도 종종 말하던 거잖아요. 그때 그 여자가 내게 물었어요. '함께 나눈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당신과 당신 남편은 서로를 향한 사랑을 어떻게 증명해 보일 거예요?' 그 후로 나는 줄곧 그 생각을 했어요. 그 생각을 할 때면 너무 겁이 날 때가 있어요." (p.71)

 

다른 하나는 이 죽음 이후에도 이곳에 남겨질 이후의 세대와 관련된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이 소설 <파묻힌 거인>에는 다양한 세대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주인공 액슬과 비어트리스, 또는 기사 가웨인과 같이 나이 들어 이제 죽음을 앞두고 있는 세대, 혹은 전사 위스턴, 수도원의 수도사들과 같은 중간 세대, 아니면 노부부와 윈스턴이 구해내는 에드윈과 같은 어린 세대 말이다. 에드윈을 제외하고, 이들 나이든 세대와 중간 세대는 크게 보아 두 가지의 편으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망각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망각을 걷어내고 기억을 되찾으려는 사람들. 이 두 갈래의 길은 다르다. 망각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기억을 잃고 죽음이라는 거대한 무 속에 빨려 들어갈지도 모를 두려움을 내포하지만, 동시에 살육과 폭력, 학살과 그것이 불러오는 복수를 잊게 만든다. 기억은 사랑하는 사람, 따스함을 안겨준 소녀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게 만들지만, 동시에 다른 종족의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기억, 그들에게 어머니를 빼앗긴 기억을 떠올게 해 강력한 복수심에 불타게 만든다. 기사 가웨인과 전사 위스턴은 그 양 극단을 상징한다. 그 어느 쪽을 지지할 것인가. 아니, 그 질문을 이렇게 바꿔도 좋을 것이다. 이후의 세대, 그러니까 에드윈이나 혹은 (소설 속에 실체로서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액슬과 비어트리스가 그토록 애타게 만나고 싶어하는 아들에게, 혹은 아들과 같은 세대의 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전해줄 것인가.

 

물론 소설이 제시하는 길은 액슬과 비어트리스의 결단대로 용 케리그를 죽이고 파묻힌 거인을 깨우는 것이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이 그렇다고 해서 그 이후 불러올지도 모를 복수의 거대한 피바람을 긍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소년에게 전사로서의 증오심을 불어넣으려 애쓰는 위스턴과 달리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처음 그들이 그랬던 대로) 마지막까지 그에게 사랑을 전해주려 애쓴다. "에드윈! 우리 둘 다 네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앞으로 살아가면서 우리를 기억해줘. 네가 아직 소년이었을 때 느꼈던 이 우정과 우리를 기억해줘." (p.450) 

 

그렇게 그들은 이제 그들이 가야할 곳으로 간다. 소설의 마지막은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 그것이 아름다운 것은 단지 마지막을 앞두고 있는 어떤 아름다운 기억이나, 그들의 사랑을 다시 보여주고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이 아름다운 것은 어쩌면 그것에 미래 세대를 위한 결단이 들어있기 때문은 아닐까. 결국 가즈오 이시구로는 이 마지막에서 이것을 묻고 있는 것 같다. 과거의 세대가 퇴장하면서 미래 세대를 위해 무엇을 남겨줄 것인가. 과거에 대한 달콤함으로 포장된 망각이라는 흐리멍텅함인가, 복수나 증오의 대물림인가, 아니면 미래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나갈 때 필요한 또다른 무엇을 담은 것인. 겹쳐서 보지 않으려 해도 현재 우리를 둘러싼 여러 상황들과 이 소설의 묵직한 질문이 자꾸 어쩔 수 없이 겹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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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먹고 싶은 요리

The Book | 2015. 9. 23. 15:45 | Posted by 맥거핀.
별도 없는 한밤에 - 8점
스티븐 킹 지음, 장성주 옮김/황금가지

 

 

*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은 후 쓰는 리뷰입니다.

 

 

'스티븐 킹의 창작론'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그의 책 <유혹하는 글쓰기>는 창작론 따위는 재미없고 지루할 것이라는 편견을 깨뜨리는 책이다. 그 책은 스티븐 킹의 문학적 자서전에서부터 창작의 기본적인 원리들과 작가로서 갖춰야 할 자세들(그러니까 일종의 총론), 창작의 기술들(각론), 글을 쓸 때 실제적으로 써먹을 팁들 모두를 담고 있으며, 동시에 풍부한 입담을 통해 그의 소설처럼 술술 읽혀내려가는 책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개인적으로 특히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은 책의 말미에서 그가 실제로 원고를 수정하며 보여주는 자잘한 팁들인데, 그것은 한편으로는 그의 소설을 읽는 재미의 핵심이 무엇에서 나오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바로 소설의 '속도감'인데, 그는 원고를 수정하는 기본은 결국 '삭제'이며, 그것은 불필요한 단어를 생략하는 등의 문장쓰기에서부터 하다못해 쓸데없이 거창한 주인공의 이름을 줄이는 것에까지 해당한다고 말한다. 즉 그의 원칙이란 명료하게 서술하여 속도를 유지시키며, 독자를 끝까지 읽게 만드는 것이다. "묘사와 대화와 등장 인물을 창조하는 모든 기술도 궁극적으로는 명료하게 보거나 들은 내용을 역시 명료하게 옮겨적는 (그리고 그 불필요하고 지긋지긋한 부사들을 안 쓰는) 일로 귀결된다. (p.240)"

 

킹의 이 책 <별도 없는 한밤에>는 그의 이런 원칙 실천의 장이다. 그것은 주인공의 이름같은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 헨리, 테스, 다아시, 밥 등의 짧고 평범한 이름들, '1922'의 주인공 윌프리드의 이름은 살짝 긴 것도 같지만, 어차피 그는 이 글에서 계속 '나'로 서술되고 있으니 이름따위야 알게 뭐람 - 다른 조금 더 큰 부분까지 해당되는데, 몇 가지를 예로 들어 보자. 중편 및 단편 4편을 묶은 이 책에 가장 처음 등장하는 소설 '1922'는 다음의 문장으로 시작한다. "나 윌프리드 릴런드 제임스는 지금부터 나의 죄를 고백하고자 한다. 1922년 6월, 나는 내 아내 알렛 크리스티나 윈터스 제임스를 살해하고 시체를 오래된 우물에 유기했다. 내 아들 헨리 프리먼 제임스도 이 범죄를 거들었지만, 헨리는 그때 열네 살이었으니 법적 책임은 물을 수 없다. 헨리는 내 꼬드김에 넘어가 살해에 가담했다. (p.11)" 이 문장을 읽은 다음 소설의 나머지 부분들을 미뤄둔 채 천천히 을 수 있을까? 불확실하거나 모호한 것은 없다. 윌프리드, 그러니까 나는 아내를 죽였으며, 아들도 그 사건에 가담시켰다. 이 사건은 도대체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이 아내를 죽이는 지난한 과정이 200페이지가 넘는 이 소설의 끝까지 이어지는 것일까. 그러나 킹은 질질 끌 생각 따위는 없다. 불쌍한 알렛은 50페이지가 채 넘기도 전에 이미 누비이불에 둘둘 말려진 채로 썩은 냄새가 나는 우물 밑바닥에 던져진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다. 즉 킹은 재료를 차분히 준비하는 것에 요리의 모든 시간을 보낼 마음 따위는 없다. 재료는 이미 후라이팬 안에 던져졌고, 더 이것저것 고민할 이유도 여유도 없다. '빅 드라이버'의 테스는 역시 200페이지에 가까운 이 소설에서 채 30페이지가 지나기 전에 '빅 드라이버'를 만나며, '행복한 결혼 생활'의 '다아시'가 남편의 비밀을 알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킹이 일단 재료부터 냄비 속에 던져놓고 보는 초보 요리사는 당연히 아니다. 킹은 요리의 맛을 내기 위해 두 가지를 첨부하는데, 하나는 재료에 대한 밑간이다. 깔리는 암시들, 다음과 같은 문장들. "나는 아내를 죽인 것보다 아들에게 그런 짓을 한 것이 훨씬 후회스럽다. 왜 그런지는 이 글을 읽다 보면 알 것이다. (p.12)"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지금, 나는 비로소 깨닫게 됐다. '쪼까오다'와 '쫓기다'가 얼마나 비슷하게 들리는지를. (p.47)" "테스의 운명은 그렇게 간단히 결정됐다. 원래부터 지름길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이었으니까.(p.236)" "다아시는 길을 걸을 때 중력이 자신을 땅에 붙들어 줄 거라 믿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행복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그날 밤 차고에 들어갈 때까지는. (p.473)" 순간의 결정으로 갈리는 운명, 이미 결정나버린 운명. 그것은 어떻게 그들에게 절망을 선사했을까.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끝일까. 그릇에 가득 담긴 음식을 한입씩 베어물 때마다 뿌려놓은 밑간이, 아니 뿌려놓은 문장들이 맛을 곱씹게 만든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맛있는 요리가 그렇듯이, 그것은 한 번의 행위로 만들어지는 결과물은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재료는 갈아야하고, 어떤 재료는 볶아야하고, 또 어떤 재료는 삶아야한다. 그리고 그것이 모두 합쳐졌을 때 맛있는 요리가 나온다. 마찬가지로 킹의 이 소설들은 1막으로 이루어진 연극이 아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1922'에서 월프리드가 고백한 아내에 대한 살인, '빅 드라이버'에서 테스와 빅 드라이버의 만남, '행복한 결혼생활'에서 남편 밥의 비밀 모두, 이야기의 초반에 이미 밝혀진다. 그렇다면 나머지 페이지들을 도대체 무슨 수로 채울 것인가. 이 이야기들은 모두 끝났다고 생각한 시점에서 다시 시작한다. 가장 무서웠던 이야기들은 끝나는 것 같았지만, 그것은 단지 1막의 끝일 뿐이며, 이야기는 더 무섭고 잔혹한 2막과 3막을 준비하고 있다. '빅 드라이버'에서 테스는 '빅 드라이버'를 만나고 소설의 시작에서 60페이지 정도가 지난 후 집으로 돌아온다. 벌써? 그렇다면 소설의 나머지 100페이지는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실망하지 마시라. 2막과 3막이 준비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에 킹은 잊지 않고 적절한 양념들을 추가한다. 테스의 아주 잘못된 것처럼 보이는 선택들, 물씬물씬 솟아나오는 조바심들. 그렇게, 그렇게 하지 말란 말이야, 제발. 촉발된 독자의 조바심은 식욕을, 아니 독욕을 돋군다.

 

그러나 킹의 요리들은 아마도 집나간 입맛들을 돌아오게 만드는 것에만 머물러있지는 않은 것 같다. 좋은 요리사들이 만드는 좋은 요리가 그렇듯이 그것은 맛있기도 하지만, 몸을 건강하게 해준다. 그리고 좋은 소설들은 물론 몸이 아니라 정신을 건강하게 해준다. 이 소설들을 이렇게 바꿔서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지극히 미국적인 공간에서 그려내는 미국이라는 가족 사회의 망가진 초상. 이 소설들이 공유하는 지점이 있다. 하나는 공간이 서사를 끌고가는 힘이다. '1922'에서 세밀히 묘사된 외따로 떨어져 있는 작은 농장들(나, 윌프리드가 아내를 죽이기로 결심한 것도 결국 땅 때문이었다), '빅 드라이버'의 "정을 주세요 정을 드릴게요"라는 간판이 걸려있는 버려진 가게, 아니면 '행복한 결혼 생활'에서 완벽히 정리되어 있는 것 보이지만, 아주 더러운 것을 몰래 숨겨놓고 있는 밥의 차고. 할리우드의 (공포) 영화들에서 자주 등장하는 그 자체로 불길하고 무섭고 막막한 공간들. 다른 하나는 결국 이것이 가족이라는 것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미국 사회의 알 수 없는 단면들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지극히 사적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그래서 그 안에서 어떤 공포 서사가 진행되고 있어도 알 수 없는 가족들의 내밀한 서사가 있다. '1922'나 '행복한 결혼 생활'은 말할 것도 없고, '빅 드라이버'의 어머니와 아들, 그리고 '공정한 거래'도 결국 가족의 이야기이다. 이 부서져가고 있는 가족의 초상들, 그것이 토대가 되어 떠받치고 있는 미국 사회라는 불안한 무엇에 대해. (예를 들어 요즘 도널드 트럼프에 대한 지지율을 보면 저쪽도 참 답이 없구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결국 이 소설집 <별도 없는 한밤에>는 그가 그려내는 세계의 연장 선장에 있다. 그의 세계란 미치광이 아버지들이 중심이 되어 벌이는 가족 공포의 세계이다. 외따로 떨어져 있는 폐쇄된 공간에서,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그 공간에서 벌이는 아버지들(남자들)의 피의 서사. 그는 그것을 지금껏 여러 작품에서 그려왔고, 그것은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1922'의 아버지와 아들이, <샤이닝>의 아버지와 아들과 겹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하다. 이 대물림되는 미치광이들. 그들은 미쳐가는 것일까, 아니면 그 오래전 죽은 아버지들의 영향으로 이미 미쳐있었던 것일까. 그러나 그들은 성실하게 납세하고 주말에 교회를 가고,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책을 읽는 농부이자, 훌륭한 회계사이자 17년 간이나 무료로 봉사하는 보이 스카우트 지도자들이기도 하며, 동시에 "우리 군인들을 응원합니다! 아프간디스탄(철자는 킹이 일부러 틀리게 쓴 것이다)에서 승전 기원!!"이라는 문구가 붙은 곳에서 성실히 트럭을 몰며 일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물론 이것은 킹의 농담이지만, 여기에서 한 남자가 생각나기도 했다. <11/22/63>에 등장하는 케네디를 살리기 위해 애쓰는, 킹의 세계에서 보기 드문 선한 남자 제이크 에핑 말이다). 성실하고 좋은 가장인 그들에게는 다른 세계가 있다. '1922'에 등장하는 '음흉한 남자'의 세계, 혹은 '행복한 결혼 생활'에 등장하는 다아시의 거울 속 다른 세계. 그리고 물론 스티븐 킹이 그려내는 미국도 우리 눈에 보이는 미국이 아닌, 우리가 보지 못하는 그러나 엄연히 존재하는 다른 세계의 미국이다. 

 

아무튼 그런 것을 다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스티븐 킹의 600페이지가 넘는 이 소설은 200페이지의 체감속도로 넘어가는 그런 소설이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이 리뷰에서 가장 언급을 적게 한 '공정한 거래'라는 짤막한 단편이 가장 마음에 들었는데, 그것은 이 소설이 가장 잘 쓰여진 것처럼 느껴져서라기보다는 이 소설이 어린 시절의 추억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부분이 있어서였다. 소설을 읽다보니 어린 시절 <환상특급>을 두근거리면서 보던 기억이 떠올랐다. 보고난 후 잠을 잘 이룰 수 없게끔 만드는 공포, 혹은 서스펜스가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끝까지 보게 만들었던 재미, 그리고 거기에 담긴 적당한, 그러나 서늘한 교훈까지 말이다. 그래, 내 어릴 적 <환상특급>의 이야기들도 항상 이런 식으로 끝나곤 했지.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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