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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웅 (GQ 1월호)   / 블러그 'ozzyz review  허지웅의 블러그'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한 사람들이 진보정당에 투표하는 일은 언뜻 상식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 같은 상식은 상식이 아니다. 왜 그럴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난하다. 하지만 그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한다. 얼핏 분열증 같아 보이는 이 현상은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수수께끼처럼 진보진영의 논객들을 괴롭혀왔다. 논객과 진보 정치인들은 사람들이 계급적 정체성에 밝지 못하고, 눈을 뜨지 못하고, 상식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데 분노한다. 그리고 계몽하려 애쓴다. 하지만 이 계몽은 쉽게 작동하지 않는다.

경제학자들은 인간이 결국에 사사로운 이익관계를 좇아 움직일 수 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실제 대부분의 인간은 사익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한다. 이는 매우 상식적인 이야기로 들린다. 하지만 이 상식은 머릿속의 상식이다. 현실에서 우리는 자신의 주머니 사정에 따라 투표하는 사람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많은 수의 진보 운동가와 논객, 정치인들은 선택받은 가정에서 온갖 혜택을 받고 자랐다. 그러고도 분배를 논한다. 많은 수의 가난한 사람들은 그와 같은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자랐다. 그러고도 집중을 논한다. 앞서 말한 상식이 통했다면 소수의 집중되고 편향된 자본을 위해 종사하는 보수 정당은 절대 집권할 수 없다.  

그 같은 상식이 현실의 상식이라면 다음과 같은 권유는 정당하다. - 당신의 주머니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정당과 후보에게 투표하라. 당신의 주머니를 지지하라는 말은 요구라기보다 질문이며, 이는 곧 당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묻는 것이다. - 하지만 사실 이런 식의 주문은 헛되다. 왜 당신의 계급에 따라 투표하지 않느냐고 지적하고 계몽하는 일은 끔찍할 정도로 소모적이다. 궁극적으로, 이런 식의 주문은 실제 가난한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귀에다 대고 소리 질러도, 동의를 구할 수 없다. 실제 들리지 않는다! 가난한 당신이 이명박을 선택했을 때 당하게 될 온갖 종류의 불이익을 도표로 만들어 오른손에 들고, 권영길을 선택했을 때 얻게 될 온갖 종류의 혜택을 도표로 만들어 왼손에 들고 그들에게 외쳐봐라. 당장은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가난한 사람들의 대다수가 결국 이명박을 선택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도대체 왜? 

이 나라에서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70퍼센트에 달한다. 하지만 실제 한국의 중산층은 40퍼센트가 채 되지 않는다. 이 놀라운 통계의 마술은 한 가지 명징한 진실을 환기시킨다.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가상의 필터를 ‘가치관’이라고 부른다. 수많은 장르영화들이 이 같은 소재를 다뤄왔다. 사람들은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에 따라 투표하지 않는다. 바로 이 가치관에 따라 투표한다.

요컨대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를 위한 정책 정당을 지지하는 이유는, 그들이 부자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부유함이나 풍요로움 같은 부자의 가치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와 함께 수반돼 연상되는 보수적 언어를 ‘옳은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누가 혹은 어떤 정당이 서민을 대변하고 말고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사람들은 부자를 보며 박탈감을 느끼지 않는다. 성공신화에 매료될 뿐이다. 부와 이익이라는 (그들이 생각하기에) 긍정적 에너지에 박수를 보낼 뿐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적지 않은 부자들이 적당한 부패와 조작과 위장을 즐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지는 않는다. 그저 부자라면 그 정도는 저지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훌륭하게 입신에 성공한 저 부자들은 그만한 권리와 폭력을 응당 행사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다.  

이것은 단순한 존경이나 예우와 다르다. 겨우 존경심 때문에 사익과 반대되는 선택을 할 정도로 인간의 두뇌가 간단하지는 않다. 그건 우리가 여태 태어나서 자라고 배우고 번식하고 경쟁하고 버티고 버텨 살아온 이 사회가 근본적으로 보수적인 언어의 토대 위에 건설된 탓이다. 사람들은 부자 - 성공 - 상위 3퍼센트 - 대기업 - 수출 - 재벌 - 시장주의 같은 단어들에서 긍정적 에너지를 느낀다. 반대로 복지 - 중소기업 - 88만원 세대 - 분양원가공개 등에선 무언가를 박탈당하는 듯한 상실감 따위의 부정적 에너지를 느낀다. 시장주의에 반대되는 입장을 표현하는데 사용되는 단어가 고작 '반시장주의'다. 세상에, 얼마나 부정적인가. 그 내밀한 사정에 대해선 무관심하다. 사람들은 보수적인 단어와 인식의 틀 위에서 살아왔다. 보수성을 ‘궁극적으로 안전하고 탄탄한‘ 것으로 인식한다. 

간단한 예로 TV와 영화 속 가부장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짚어보자. 철옹성 같은 권위를 가진 아버지는 온갖 폭력과 부정을 저지르면서도, 결국에 가서 아들과의 화해에 이른다. 설명되지 않는 뜨거운 눈빛을 주고받으며 관계의 정상화를 이룬다. 가부장으로 대표되는 보수 이데올로기가 뜨거움과 결합하면서 ‘설명되지 않는 끈끈함’ 따위의 수사로 포장된다. 놀라운 건 대중이 이 같은 광경을 보며 감동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천하장사 마돈나>같은 예외도 있다. 그건 그 영화를 만든 자들의 진보성과 현실인식의 탁월함을 증명한다. <천하장사 마돈나>는 흥행에 실패했다. 간단하다. 사람들은 소위 진보적인 상식이나 언어들을 ‘머리로’ 인식한다. 반대로 보수적인 상식이나 언어들은 ‘가슴으로’ 인식한다. 따로 학습이나 교육이 필요하지 않다. 

그럼으로써 ‘택시기사 농담’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은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택시기사들 가운데 상당수가 보수정권을 옹호하는 현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대다수 노동직 근로자들이 그들의 가정에서 가부장적인 권위에 목말라 있으며, 경제가 어려워질수록 실추되는 가정 내 권력에 대해 큰 피해의식을 갖고 있음을 상기해보자. 간단한 이야기다. 택시기사는 바보가 아니다. 그들은 노동자라는 계급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을 결정하는 가치관과 정체성은 보수주의에 닿아있는 거다. 미국의 고속도로 트러커들 대다수가 공화당을 지지하는 것과 마찬가지 맥락이다.

그렇다면 지난 10년간 자칭 진보 정권이라고 불린 두 정부의 집권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는 보수와 진보 사이의 경쟁이었다기보다, 개혁세력의 안티 담론이 성공적으로 작동한 것에 더 가까웠다. 실제 이 두 정권의 정책은 조금도 진보적이지 않았다. 그저 과거와의 단절과 안티 담론의 연장선상 위에서 지루한 말싸움을 해온 것에 불과하다. 가끔씩 진보진영의 수사만 빌려왔는데, 이건 그저 한나라당과 자리싸움하는데 필요했기 때문이다. 특히 노무현 정권의 집권은 눈여겨볼만 하다. 그는 보수의 언어를 들고 나와 진보의 탈을 쓰고, 이를 뜨거운 개혁의 이미지로 치환하는데 성공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인식했고, 결국 대선 승리의 드라마로 이어졌다. 욕할 게 아니라 공부해야 할 일이다. 그는 진정 언어의 마술사였던 것이다.

많은 수의 진보주의자들이 노무현 정권에 속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덤을 판 건 진보진영 스스로다. 정권 내내 진보진영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사람들의 행동에 옳고 그름의 틀을 가져가 비판했다. 어떻게 부정부패 우익 세력을 지지할 수 있냐고 꾸짖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보수적 가치관 안에서 살아왔을 뿐이다. 그 위로 당위성을 겹쳐 놓으면 격렬한 반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보이지 않아서 보지 못하는 건데, 그에 대해 욕을 하고 보수반동꼴통 소리를 서슴치 않았다. 보수진영이 가지고 있는 언어는 안정적으로 보였지만, 진보진영이 가지고 있는 언어란 고작해야 ‘쟤들은 안 돼’ 정도였다. 조롱이 팔할이었다.

현실 정치에서 진보진영이 얼마나 그릇된 전략에 따라 움직이고 있느냐가 바로 여기서 드러난다. 안티 담론에 의해 움직이다간 결코 긍정적인 이미지의 틀 안으로 진입할 수 없다. 기껏해야 상대하기 피곤한 사람 취급 밖에 받을 수 없다. 그런데도 진보진영은 도덕의 황폐화를 부르짖고 세상이 당장 망할 것처럼 시일야방성대곡을 목 놓아 불렀다. 유동적인 중간층은 서슬 퍼런 진보진영의 손을 들어주기 힘들어진다. 도무지 안정적인 비전을 제시할 그룹으로 비춰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보수진영에선 진보진영의 언어를 가져다가 잘 활용했다. 이회창 후보가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 천민자본주의, 이거 안 됩니다”라고 말했을 때, 많은 진보주의자들은 이를 두고 술자리 안주삼아 실컷 비웃었다. 하지만 언어의 힘이란 무섭다. 불안정한 진보주의자보다는 안정적인 보수주의자의 개혁적 언동에 솔깃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명박 후보도 ‘청년 실업’이나 ‘비정규직 문제’ 같은 진보진영의 화두를 고스란히 가져가 자기 언어로 흡수해버렸다. 진보진영은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 속수무책이었다.

진보진영의 선동가와 계몽주의자들은 스스로 판 무덤 속에 기어들어갔다. 여기서 탈출하고 싶다면 보다 전략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대중에게 꾸준히 진실을 알리고 보수진영의 부조리를 밝힘으로써 마침내 상식이 통하게 될 것이라 낙관하는 자세는 금물이다. 그 진실은 진보진영에게만 들리는 진실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틀에 의해 판단한다. 이 틀은 그들의 세계관이고 가치관이다. 이 가치관은 주머니 사정과 별개로 작동한다. 상식을 운운하면 반감만 산다. 보수진영의 움직임에 일일이 대응하는 방식으로 무게중심을 가져가다간 결코 집권할 수 없다. 대중이 어떻게 진보의 언어에 관심을 기울일 것인지 연구해야 한다. 그런 관심 안에서 진보의 가치관과 인식의 틀이 보수의 그것 못지않은 안정적 이미지를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진보진영이 입에 문 언어들이 닮고 싶고 갖고 싶고 추구하고 싶은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는 다소간의 패션화 전략도 필요하다. 진보의 언어를 개발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 한, 한국의 진보진영에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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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코(Sicko), 마이클 무어

Ending Credit | 2008. 4. 9. 15:15 | Posted by 맥거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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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이 영화는 계몽영화다. 그것도 상당히 편파적이고 선동적인 계몽영화다. 물론 ‘계몽’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편파와 선동을 담지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상당하다. 잘 알려진 대로 미국 의료보험 민영화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이 영화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정보를 상당히 중요한 정보처럼 부각시키기도 하고, 동시에 말해주어야 할 것들에서 조용히 입을 다물기도 한다. 일례로 영국과 프랑스의 무상 의료 시스템이 가능할 수 있는 막대한 세금 부과에 대해서는 교묘하게 넘어가기도 하며, 미국의 사례는 지나치게 나쁜 쪽으로 집중되어 있고, 영국과 프랑스의 사례는 지나치게 좋은 쪽으로 집중되어 있다. 급기야 마이클 무어는 ‘그라운드 제로’의 영웅들을 이끌고 쿠바를 방문하는데, 이는 의도적으로 너무 좋은 쪽으로 포장되어 있다. 즉 마이클 무어는 관타나모 기지에서 받아들여주지 않으니 쿠바로 갈 수 밖에 없었다 라는 식으로 말하지만, 아마 쿠바로의 방문은 사전에 계획되어 있었을 것이며, 쿠바는 체제의 우수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좋은 쪽으로만 그들을 이끌었을 것이다. 어떤 체제나 외부의 방문자들에게는 체제의 밝은 면만 보여주려 하기 때문이다. (북한이 그러듯이 말이다. 물론 북한만 그러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것 또한 마이클 무어에 의해 철저히 계획되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불균형한 선동 영화를 기꺼이 관람해줄 수 있는 것은 이 모든 것의 기본은 너무나도 당연하기 때문에 받아들여져야만 하는 것,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우리가 길을 가다가 어느 낯선 사람에게 심하게 맞아서 생명의 위기에 빠져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때 다행히도 경찰이 지나간다. 우리는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자 경찰이 이렇게 말한다. “폭력에서 당신을 구해주는 것은 100만원을 내시면 가능합니다.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당연히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이 당연한 일이 미국에서는 의료의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다. 돈이 없어서 제 때 치료를 받지 못해, 암이 온 몸으로 퍼지고, 잘려나간 손가락을 접합하지 못하고, 3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는다. 누구나 길거리에서 폭력을 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누구나 아프면 치료받을 권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는 생과 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죽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누구라도 최소한 (적어도) 살 권리는 있다. 이는 누구라도 아는 일이며, 교과서에도 명시되어 있는 일이다. (하워드 진(Howard Zinn)은 이런 말을 했다. “그렇다고 완전한 평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평등은 결코 이뤄낼 수 없습니다. 당신의 스웨터가 내 스웨터보다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둘 모두가 스웨터를 입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를 이 영화에 빗대어 보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당신이 아프면 1인 특등실에 입원하고, 내가 아프면 6인 공동실에 입원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 둘 다 입원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마이클 무어는 묻는다. 우리가 도서관도 공짜로 이용하고, 소방서나 경찰서도 공짜로 이용하는데, 왜 의료서비스는 안되냐고. 경찰서나 소방서가 없으면 우리 삶이 위험에 빠지는 것처럼 병원이 없어지면 우리 삶이 위험에 빠지는 것도 마찬가지인데(‘어떤 의미에서는’ 도서관도), 왜 의료서비스만 공공복지의 영역이 아닌, 경쟁의 영역에 들어가 있어야 하느냐고.

 

하기는 몇 년 전에 이 영화가 개봉했더라면 어쩌면 이 영화를 그저 아주 재미있게 즐겼을지도 모르겠다. 저저 미국넘들이란 말이지 ...하고 조소를 보내면서 말이다. (모든 메시지를 제외하고 그저 영화 그 자체로만 본다면 말이다. 마이클 무어는 그의 다른 영화들에서도 그랬듯이 상당히 귀여운 구석이 많다. 그는 적어도 농담을 할 줄 안다. 그것도 아주 재미있는 농담들을 말이다. 이번 영화에서는 음악을 가지고 상당히 장난을 많이 치는데, - 난데없이 스타워즈 음악이 나온다거나 하는 식으로 - 내용은 아주 심각하지만, 그러한 몇몇 귀여운 구석 때문에 슬며시 웃음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그 교묘한 편집 능력도 여전하고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에 이런 마이클 무어 같은 감독이 하나 있어서 MB를 다뤄주면 상당히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난 대선 때 MB의 BBK 의혹 같은 거 말이다. 그가 자신의 안티 사이트 운영자에게 수표를 보냈다는 장면에서는 헛웃음이 나왔지만.) 그러나 아래와 같은 기사를 보고 이 영화를 보면 마냥 웃기만은 힘들어진다. 정말이다. (그리고 급기야는 이런 생각이 든다. 병원에서 10시간을 기다려도 치료를 받게 된다면 행복한 거라고. 앞으로 병원에서 마냥 기다리라고 해도 뭐라고 하지 않겠다고.)

(솔직히 조선이나 중앙이나 동아일보 쪽 기사를 가져오고 싶었는데, 네이버에서 이들 3개 신문의 뉴스 내용을 ‘의료산업화 이명박’ 혹은 ‘의료보험 민영화 이명박’으로 검색하면 단 1개의 뉴스도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편향된 한겨레 기사를.)

 

그래서 계몽이란 건 엿이나 먹으라고 생각하지만, 아주 편파적인 계몽 영화를 보고 이런 계몽적인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실 언제나 그렇듯이 정작 계몽을 당해야 할 사람들은 이런 계몽적인 것을 안보는 경향이 있다. (성에 대해서는 지 아버지보다도 더 많이 아는 친구들이 성교육 시간에 눈을 더 많이 반짝이는 것처럼 말이다.) 오늘 단성사 7관에도 딱 10명이 앉아 있었다.

그래서 하는 얘긴데, 이런 편파적인 계몽 영화는 돈 주고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나, 어차피 그거 봐봤자 마이클 무어의 배나 불러주는 것밖에 안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나(하긴 이미 배가 많이 부르긴 했다), 댓글 올리다가 지쳐 잠시 쉬고 싶은 나라당 알바들이나..그 외 누구라도 원한다면, 쪽지나 댓글을 남겨주면 방금 다운 받은 따끈따끈한 ‘식코’ 무비를 기꺼이 보내드리겠다. 물론 자막의 질은 보장하지 못하지만.


*저도 파일은 더이상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5/4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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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프리스(helpless), 아오야마 신지

Ending Credit | 2008. 4. 5. 00:34 | Posted by 맥거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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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새드 배케이션>을 보고, 아오야마 신지의 세계관에 흥미를 가지고, 감독이 직접 집필한 동명의 소설 <새드 베케이션>을 읽고(이 소설은 영화 내용과 거의 같기 때문에 특별히 이야기할만한 것은 없지만, 아무래도 소설이다 보니 등장인물 캐릭터가 영화보다는 훨씬 디테일하게 보여지고 있다는 것이 좋았다. 다만 영화를 보고 난 이후에 소설을 읽으니 장면장면마다 영화 장면이 떠올라 소설을 읽을 때의 특유의 상상력이 제한을 받는 느낌이다), 이 영화의 10년 전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아오야마 신지의 1996년도 작 <헬프리스(helpless)>를 다운받아 보았다(그러나 아무래도 모든 영화는 영화관의 스크린으로 보아야 제격이다. 다운 받아 작은 컴퓨터 화면으로 나홀로 보는 것은 느낌이 다르다. 분명히 이 영화도 스크린으로 보았더라면 느낌이 달랐을 것이다. 다운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번은 방법이 없었다-라고 변명 중).

 

이 영화에서는 여전히(사실 이와 반대로 말해야겠지만) 아사노 타다노부가 주인공 켄지 역을 맡고 있고, 야스오의 동생인 유리 역도 여전히 츠지 카오리가 맡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들은 자연스럽게 연속성을 가지는 동시에 <새드 배케이션>의 켄지와 <헬프리스>의 켄지를 나란히 놓고 볼 수 있는 흥미로운 비교 지점을 제공한다. 그러나 켄지는 여전하다. 선과 악이 혼합된 중첩적인 존재, 그래서 전혀 그 속을 알 수 없는 남자(물론 모든 ‘인간’이라는 존재가 선과 악이 혼합된 중첩적인 존재다. 그러나 대다수의 인간들은 그러한 선과 악을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 놓고,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만 그 일부분을 슬그머니 꺼내 보인다. 그러나 이 켄지라는 인물은 정제되지 않은 선과 정제되지 않은 악이랄까. 때를 타기 이전의 선과 악이랄까). 아사노 타다노부의 속을 알 수 없게 하는 연기는 여전하다.

 

이 영화는 서늘하고 무섭다. 이 영화는 결코 폭력과 살인을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 시선은 말할 수 없이 차가우며, 날카롭다. 이 영화에서 결말은 사실 이미 예정되어 있다. 감독은 이 차가운 결말을 이미 예정지어 놓고, 그 결말을 피해보려 미친 듯이 애쓰는 주인공들을 지극히 차가운 시선으로 관조한다. 아니나다를까, 주인공들은 예정된 비극적인 결말 속으로 조용히 달려간다(이 영화는 많은 폭력 장면을 담고 있지만, 이상스럽게도 조용하다. 그것이 더욱 무섭게 만든다). 그리고 켄지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 응시하는 눈빛은 마치 이렇게 묻고 있는 듯 보인다. 왜 우리를 구해주지 않으시나요? 당신은 이렇게 될 것을 모두 다 알고 있었잖아요?

 

야스오(마츠이시 켄)가 보스가 죽어버린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 미친 듯이 보스를 찾는 것이나, 켄지가 아버지가 있는 병원으로 자주 전화를 걸어 확인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같다. 켄지가 그나마 지금까지라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켄지가 아버지를 잃어버린 순간, 그는 보스를 잃어버린 야스오와 똑같은 인물이 된다. 켄지의 아버지, 그리고 야스오의 유사 아버지, 그리고 이제 그 모두의 부재(不在). 야스오는 이 부재 속에서 자신을 버리는 길을 택하지만, 켄지는 다시 유리라는 새로운 가족을 만나, 멀고 먼 길을 떠난다. <새드 배케이션>에 이르는 긴 길을. (아마도 <새드 배케이션>의 시작부분에도 Johnny Thunders의 노래와 함께, 거리의 풍경을 위에서 부감으로 찍은 화면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영화(헬프리스)의 시작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 영화의 마지막에도 길이 나온다.)

 

이 <헬프리스>의 아버지의 부재와 <새드 배케이션>의 치요코-사에코-코즈에라는 강한 여성들의 등장(한편으로는 모계사회를 연상시키는)과 ‘마미야 월드’의 기묘한 유사가족이 묘하게 접점을 이루지만, 아직 아오야마 신지의 세계관은 모호하다. 아마도 이는 그의 3부작 중의 하나인 <유레카>를 보아야 뭔가 잡을 수 있을 듯. (이건 여담이지만 이 영화 <헬프리스>는 약 1시간 20분 남짓, 그리고 <새드 배케이션>은 2시간 20분 정도, 그리고 <유레카>는 3시간이 넘어간다. 영화를 개봉하고자 하는 영화사의 입장에서는 절대 반기지 않을 감독이다. 하긴 궁금해서 찾아본 아오야마 신지 감독의 얼굴이 왠지 강단있어 보여서 픽 웃음이 나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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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과 낮, 홍상수

Ending Credit | 2008. 4. 1. 01:49 | Posted by 맥거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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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흔히들 하는 이야기지만, 홍상수의 영화는 보는 사람을 부끄럽게, 또는 민망하게 만든다.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의식의 한 켠에 숨겨 놓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는 구석을 홍상수는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관객들이 부끄러워하는, 혹은 민망해하는 그 순간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딴청을 피우며, 짐짓 부러 괴이한 이미지를 살짝 끼워 넣고는 다시 우리를 의식의 이편으로 이끌고 나온다.

그것이 흔히들 말해지는 위선이라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보여진다는 것에서 위선이 아닐 수도 있고, 어쩌면 다른 것보다 더욱 지독한 위선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인물들의 행동들을 스크린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관객들은 한편으로는 부끄러움을 느끼지만, 또 한편으로는 일종의 안도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관객들은 홍상수의 영화에서 부러 웃음을 터뜨리는지도 모를 일이다.

 

2.

그러나 이번의 홍상수의 이 영화 <밤과 낮>은 그리 부러 웃음이 나오지는 않는 편이다. 그보다는 도리어 말 그대로 상당히 재미있어서, 상당히 웃겨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웃음들이 많은 편이다. 그것은 상당부분 남자주인공 이성남(김영호)의 애 같은 행동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는데, 예전 홍상수 영화의 남자주인공들을 맡았던 유지태나 문성근, 혹은 김태우 등의 배우들이 어떤 지적인 이미지에 상당 부분 기대고 있다면, 이 영화의 김영호는 몸만 자랐지, 표정이나 행동은 그야말로 애 다운 행동을 해보이고 있기 때문에, 귀엽다고 할까, 혹은 백치미가 풀풀 풍긴다고 해야 하나. 예전 <극장전>의 김상경보다 조금 더 퇴화한 버전이라고 해야 할까. (영화 막바지 아내 성인(황수정)과 함께 있는 모습에서는 사실 남편과 아내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어머니와 아들같은 느낌이 상당히 풍겨난다.)

또한 이 영화에서 홍상수는 의도적으로 상당히 유머를 친다. 이성남의 꿈 부분에서 목욕탕 창문에 코를 들이박는 돼지라든가(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영화관에서 가장 폭소가 터진 순간이다), 도빌 해변이 연상시키는 전작 <해변의 여인>이라든가, 꿈에서 유정(박은혜)의 발가락을 빠는 성남이라든가...상당히 여러 군데, 홍상수의 전작들을 연상시키는, 그러면서 묘하게 뒤틀린 재미있는 이미지들과 대사들이 많다.

 

3.

이 영화를 보기 전, 그리고 보고 난 후에 <씨네21>등의 매체라던가, 인터넷을 통해서 이 영화 <밤과 낮>을 소개한, 그리고 분석한 여러 많은 글들을 보았다. 그러한 많은 글들에서 홍상수의 이 영화는 장면 장면 조각되고, 낱낱이 해체되어 새롭게 구조화된다. 그리고 조각된 장면들과 해체된 구조물은 다시 일일이 새로운 의미의 이름표를 달아, 새로운 위치로 자리매김한다. 대구와 반복(이 영화에서 주인공 김성남의 중요한 화법이다. 이름하여 반복화법. 상대방의 말을 받아 그대로 되뇌기)을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그의 반대편에서 이 영화의 일기체 형식을 논하는 것(밤과 낮의 구분이 되지 않는 그리고 이성남의 마음 속에서 흐르지 않는 시간들(그에게 파리에 있는 시간은 도피의 시간들이기 때문에)이 실제로는 흐르고 있다. 하루하루 지나가는 날짜와 이성남의 독백을 통해), 쿠르베의 <돌깨는 사람들>과 <세상의 근원>을 이야기하는 것은 나보다도 훨씬 자세하고 풍부하게 잘 할 사람들이 많으니 그만 두기로 하자. 단지 나는 재미있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홍상수의 영화가 나의 예상보다는 훨씬 재미있었다는 것, 그의 전작들보다도 훨씬 더 말이다(물론 이 재미있는 영화의 관객들은 나를 포함해서 4명뿐이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말이다).

여러 많은 평들이 지적한대로, 이 영화의 결말은 절망적일 수 있다. 죽어있는 구름 그림이 상징하는 대로, 처음부터 아기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남자는 아기를 살릴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아마도 그가 유정과 함께 파리에 남아서 유정이 낳은 아기를 같이 키워나가는 것이 훨씬 희망적인 결말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홍상수의 농담들은 다른 한편에서 조금은 희망적이게 만든다. 농담이라는 것은 어찌되었던 간에 모든 희망이 사라진 공간에서도 존재함으로써 희망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홍상수의 다음 영화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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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드 배케이션, 아오야마 신지

Ending Credit | 2008. 3. 21. 14:10 | Posted by 맥거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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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 낮의 명동 거리는 시끄럽고 복잡했다. 너무 시끄러워 머리가 아플 정도였다. 그와 반면 시끄러움을 피해 들어간 한 낮의 중앙시네마는 지나칠 정도로 조용했다. 이 지나친 시끄러움과 지나친 조용함은 나를 조금은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시간이 안 맞으면 안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시간은 3시 20분. 영화는 136분짜리. 약속 시간은 저녁 6시. 이 보다 더 시간이 잘 맞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5000원짜리 티켓을 사고(스폰지데이라고 하더군, 이런 고마울 데가), 1000원짜리 콜라를 사고(메가박스나 롯데시네마의 1500원짜리 콜라에 익숙해져 있던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다) 무작정 영화관에 들어가 앉았다.

자리는 약간 비좁고, 앞 사람이 키가 큰지 작은지 앞사람이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바로바로 확인이 가능하다. 어디선가에서 “누가 중앙 아니랠까봐.”라는 투정섞인 목소리도 들린다. 관객층은 막 대학생이 된 듯한 소년에 가까운 청년에서부터, 나란히 앉은 젊은 여성관객 몇 그룹, 머리가 백발이 된 어느 노신사, 중년의 아주머니와 딸로 보이는 듯한 젊은 여성, 그리고 띄엄띄엄, 그러나 균형을 이루고 앉아 있는 남자 몇 명, 그리고 나. 생각보다 관객은 많다. 한 30명 정도 될라나? 이상한 음색의, 마치 학교종을 연상시키는 차임벨과 함께 갑자기 광고도 하나 없이 마이클 무어의 <식코> 예고편이 흘러나온다(암튼 마이클 무어의 교묘한 편집능력은 이 짧은 예고편에서부터 드러난다. “미국의 복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라는 부시의 연설에 곧 이어, “내 남편은 의료혜택도 못 받고 죽어갔어요.”라는 한 아주머니의 울음섞인 목소리가 나오는 식이다.) 그리고 곧 이 영화가 시작한다. <새드 배케이션>.

2.

이 남자, 켄지(아사노 타다노부). 전혀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다. 그에게는 돈을 위해 사람을 팔아넘기는 극단의 악과 그러면서도 어린아이는 구해서 도망치는 극단의 선이 혼재되어 있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줄곧 무언가 불안한 기운이 떠돈다. 그것은 영화 속 고토(오다기리 조)의 대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당신, 무서운 사람이군요.” (아마도 고토는 무서운 것들을 판별하는 능력을 누구보다도 길러야 했을 것이다. 그는 도망쳐야 하니까.)

영화가 중반을 넘어가면서 그의 이런 불안한 기운이 예전의 어떤 사건들에서 비롯된 것임이, 그리고 이런 불안하고 기묘한 동거가 사실은 어린 시절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 대한 복수의 하나로서 이어지고 있음이 거의 모든 영화관의 관객들에게도 받아들여질 무렵에도 나는 여전히 불안했다. 그가 원하는 것이 단지 복수인가, 그는 정말 ‘당신을 불행하게 만들 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영화 포스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이는 내가 아사노 타다노부의 연기에 너무 빠져버린 탓이 아닐는지 모르겠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그러나 결코 평온하지 않은 그의 얼굴,)

사실 그가 원한 것은 복수가 아니었다. 그저 조용하고 평온하게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일을 하고, 잠을 자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단지 그는 어머니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만 들으면 되었던 것이다(영화의 시작 부분에 나오는 노래의 가사에 계속 ‘미안해, 미안해’가 반복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진정 무서운 사람은 어머니였다. 실상 켄지는 약한 사람이었고, 부서질 것 같으면서도 부서지지 않는 존재, 그는 그의 어머니였다. 부딪히면 부딪힐수록 더욱 아득히 멀어지는 어머니라는 존재. <헬프리스>, <유레카>에 이어지는 이 3부작 <새드 베케이션>에서도 그래서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켄지의 복수 아닌 복수는 도리어 그를 다치게 만들었을 뿐이며, 그는 아직 많은 것들 사이에 놓여 있다.

3.

이 영화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영화의 주 무대가 되는 이른바 ‘마미야 월드’에 대한 것이다. 일견 따뜻하고 이상적인 공동체로도 보이나, 어딘지 모르게 아슬아슬하고 기묘한 공동체이면서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동시에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는 존재들의 집합. 서로가 일정한 선을 그어 놓고, 그러한 일정한 범위를 넘지 않는 선에서 서로가 서로를 돕는 그런 집합. (비누 방울이 아무리 크고 아름다워도 언젠가는 ‘퐁’하고 터지는 것처럼, 아주 불안한 그런 공동체 말이다.)

그런 공동체가 사실 이상할 것도 없는 것은 사실 우리가 사는 회사나 학교의 많은 부분들이 그런 사람들의 조합이며, 그런 식의 관계로 맺어진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면 내가 지나친 것일까. 어쩌면, 우리 학교나 우리가 속해 있는 어떤 공동체도 카메라를 그렇게 아오야마 신지 식대로 가져다댄다면 그렇게 보이지 않을는지. 그래도, 그래도 말이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함에도 어떻게든 그 공동체를 유지하려 하는 것은 한 발짝만 밖으로 나가면 중국인 소년 아춘을 납치해가고, 사람을 칼로 찔러대는 그런 무서운 세계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외부에도 그보다도 몇 배는 훨씬 더 무서운 세계가 도사리고 있음을 우리 모두가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는지.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영화를 본 지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불안한 기운을 증폭시키던, 뭔가 불안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흘러나오던 기묘하게 삐걱거리는 듯한 음악이 생각난다. 삐그덕 삐그덕, 삐그덕 삐그덕.

4.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한참 올라가는데도 누구하나 일어서지 않는다. 다른 때 같으면, 주연배우들의 이름이 지나가고, 스탭들의 이름이 올라갈 참이면 나도 일어설 텐데, 도저히 일어나지 못하겠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눈을 감고 음악을 들으며, 아 이런 것도 별로 나쁘지는 않네, 하고 생각했다. (솔직히 영화가 끝나고 앞으로 이런 짓을 가끔 해봐야 되겠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긴 엔딩크레딧 송을 들으며, 이 감독의 다른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불안하고도 기묘하고도 복잡한 세계를 매끄러운 솜씨로, 그러나 가볍지 않게 그려낼 줄 아는 감독이라면, 분명히 다른 영화들도 녹록하지는 않을 테지만. 아무튼 그래서 지금은 <헬프리스>와 <유레카>를 구해야 할 때.








                                

Johnny Thunders- Sad Va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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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The Book | 2008. 3. 19. 22:20 | Posted by 맥거핀.

1.

‘소설’이라는 말에 대하여 여러 그 기원에 대해 논의들이 있었겠지만, 단순히 그저 축자적으로 해석하여 ‘작은 이야기’라고 보자면, 소설은 누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 혹은 자신이 머리속에서 만들어낸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던 것에서 시작하였으며, 또 다른 누군가가 그 이야기에 살을 붙이고, 자신의 맘에 들지 않은 부분은 골라내어 다른 이야기로 대체하여 점점 살을 붙여 나가 하나의 틀에 잡힌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 허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여기라 함은 그 소설의 효용에 대한 것이다. 그 이야기가 사실에 기초한 것이든, 혹은 정교하게 축조된 허구이든 간에, 그 소설은 듣는 사람에게 어떤 즐거움을, 혹은 어떤 깨달음을, 혹은 어떤 정신적 고양을 주는 데에 그 일차원적 효용이 있다.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 역시도, 이야기가 다른 사람에게 받아들여주는 데에서 느끼는 정신적인 쾌감, 이야기를 내려놓음에서 느끼는 안도감,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것을 주었다는 만족감 등이 복합된 또 다른 효용을 가지게 될 것이다. 혹은 어쩌면 그리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누군가와 누군가가 연결되었다는 것, 그 자체가 어쩌면 이야기의 가장 큰 효용일지도 모른다.

2.

김연수의 장편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은 1990년대 초 불안한 시국에서 살던 운동권 대학생인 ‘나’의 이야기를 전반부에는 여자친구인 ‘정민’과의 연애담을 중심으로 후반부에는 그가 대학생 예비대표로서 북한에 입국하라는 지령을 받고 독일에 건너가 만나게 되는 사람들 및 그가 겪게 되는 이야기, 특히 그 중에서도 그가 비디오로서 그리고 나중에는 실물로서 만나게 되는 ‘이길용(강시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큰 흐름 속에서 ‘나’의 할아버지 이야기, ‘정민’의 삼촌 이야기, 독일에서 만나게 되는 ‘이길용’, ‘레이’, ‘헬무트 베르크’ 그리고 그 외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 있다.

여기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각각 저마다의 특징과 저마다의 다른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다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정민’과 ‘나’는 ‘더이상 이야기가 하고 싶지 않게 된다면, 우리 둘의 관계는 그 순간 끊어질 것 같’아서 어떻게든 자신의 이야기를, 혹은 자신 주위의 누군가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애쓰며, 이 소설의 또다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이길용’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종내에는 서로 뒤엉켜 서로의 존재를 입증하는 도구가 된다. 즉 나의 이야기가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이야기부터 먼저 받아들여야 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즉 누군가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그 나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이야기 속에서 ‘나’의 할아버지와 '이길용'의 할아버지가 연결되고, 또 ‘정민’의 삼촌이 연결되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현재의 ‘나’의 존재를, ‘정민’의 존재를, ‘이길용’의 존재를 증명하는 도구가 된다.

3.

소설이 앞에서 말한대로 ‘작은 이야기’라고 한다면, 소설은 줄곧 거대담론에 맞서서 사람들 각각의 작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애써왔다. 거대담론 속에서는 ‘1987년 5월에 몇 만의 군중이...’라는 식으로 숫자로만 모든 것을 기록하지만, 그 몇 만은 각각의 이야기를 가지고 그 거리로 나섰으며, 그 각각의 이야기들은 또한 무수한 씨줄과 날줄로 얽혀 있는 것이다. 여기 소설 속에 있는 ‘나’, ‘이길용’, ‘정민’도 그러한 역사의 거대담론 속에서 상처 입은 사람들이다. 몇 년이 지나고 나면 숫자로 밖에 기록되지 않을 그런 일들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서로에게, 그리고 소설을 읽는 우리들에게 말을 건다.

다른 누군가는 절대 알지 못할 - 김승옥의 소설 '서울, 1964년 겨울'에서 자신만이 알고 있는 사실들을 포장마차에서 이야기하던 사람들처럼 - 오로지 자신만이 알고 있는 그러한 이야기들로 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은 결코 그 자신으로서는 가치가 없다. 이 이야기들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한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들을 증명하며, 그렇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들은 그 이야기를 하는 그 존재를 증명해주며, 그것을 다른 말로 말하자면 거대담론 속에서 인간이 ‘살아남게’ 해주기 때문이다.

4.

어쩌면 이 모든 이야기들은 거짓일는지도 모른다, 아니, ‘이 소설이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허구이다’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소설의 모든 작중 화자들이 자신의 이야기가 거짓임을 알고 있었으며, 또한 그 이야기를 하는 상대방이 거짓을 이야기하는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그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며, 기꺼이 자신의 이야기를 ‘끼워맞춰’ 말이 되는 것으로 만들고 말았을지 모르겠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만 그들은 거대한 시대에 거대한 힘에 맞서서, 자신을 잃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작가 김연수가 의도한 바가 아닐는지 모르겠다. 거대한 어떤 것에 휩쓸리지 말고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 낼 것, 그 자신의 이야기를 동력 삼아, 살아나갈 것. 거대한 어떤 것을 보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로 돌아가는 순간, 그것이 자신의 거대한 세계가 될 것이라는 점 말이다.

5.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거대한 이야기, 거대한 힘이 몰락했다고 말해지는 지금 이 세기. 이 세기에서 개인은 이제 자신만의 이야기들을 가지게 되었고, 그 이야기들을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야기들은 분절되고, 개인은 자신의 존재들을 증명할 기회를 잃고 있다. 왜냐하면 서로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 할 뿐, 이야기라는 것은 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듣고자 하는 사람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만난 것이 반갑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네 얘기를 해봐. 들어줄테니. 이것이 바로 개인들이란 누구인가에 대한 작가의 답이다.


(전략)

할아버지가 가리키는 부분에는 ‘인간의 수명이 70살이라고 할 때, 우리는’이라는 제목의 짤막한 글이 있었어.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지.

인간의 수명이 70살이라고 할 때, 우리는

1. 38300리터의 소변을 본다.

2. 127500번의 꿈을 꾼다.

3. 2700000000번 심장이 뛴다.

4. 3000번 운다.

5. 400개의 난자를 생산한다.

6. 400000000000개의 정자를 생산한다.

7. 540000번 웃는다.

8. 50톤의 음식을 먹는다.

9. 333000000번 눈을 깜빡인다.

10. 49200리터의 물을 마신다.

11. 563킬로미터의 머리카락이 자란다.

12. 37미터의 손톱이 자란다.

13. 331000000리터의 피를 심장에서 뿜어낸다.

할아버지는 4번과 7번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손수 종이에다 계산을 했어. 이번에는 곱하기 문제가 아니라 나누기 문제였어.

540000÷3000=180

“하루에 사십이해일천이백만경 번 이산화탄소를 배출해내는 인간들로 가득 찬 이 지구에서도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까닭은 이 180이라는 숫자 때문이다. 인간만이 같은 종을 죽이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만이 웃을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180이라는 이 숫자는 이런 뜻이다. 앞으로 네게도 수많은 일들이 일어날 테고, 그중에는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일이 일어나기도 할 텐데, 그럼에도 너라는 종(種)은 백팔십 번 웃은 뒤에 한 번 울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 얘기다. 이 사실을 절대로 잊어버리면 안 된다.”

그렇게 말하고 잠시 말을 멈추더니 할아버지가 말했어.

“그러니 네가 유명한 작가가 된다면 우리 인간이란 백팔십 번 웃은 뒤에야 겨우 한 번 울 수 있게 만들어진 동물이라는 사실에 대해 써야만 하는 거야.”

(하략)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상세보기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펴냄
2005년 겨울부터 2007년 봄까지 계간 「문학동네」에 연재했던 장편소설을 한 권으로 모아 엮은 김연수 장편소설. 1990년대의 굵직한 사건들을 학생회의 간부로 있는 작중화자의 눈으로, 한 발짝 물러나서 바라보고 있다. 이를 통해 작가는 역사적 기록들의 틈새에 처박힌 개인의 진실을 파고들어, 역설적으로 '밝힐 수 없는 공동체'의 내면을 밝히고 있다. 소설에는 1990년대를 살았지만 그 주변부에 내팽겨져 있던 수많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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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惡人), 요시다 슈이치

The Book | 2008. 3. 19. 15:23 | Posted by 맥거핀.

   
   그런게 일종의 트렌드였다. 폼나게 지하철에서 일본 소설을 한 권 꺼내서 읽는 것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일각수의 꿈>이니, 시마다 마사히코의 <악마를 위하여> 같은 그런 일본 소설들 말이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이니, 스탕달의 <적과 흑>을 들고 있는 것도 꽤나 폼나 보이기는 하나 너무 고루해보이고,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들고 있자니 얼치기 운동권 같고, 그렇다고 무협소설이나 판타지소설은 너무 경박해보이고. 그래서 적당히 가볍고, 또한 적당히 무게 있어 보이는 그런 조건에 충족되는 소설들로는 일본 소설들만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걸까. 그 당시(1990년대 말) 도서관에는 일본 소설 코너에는 은근히 사람이 붐볐고, 마음먹고 도서관에 임무 수행을 떠났다가는 쓸쓸히 빈 손으로 돌아오는 패자들이 생겨나곤 했다. 아무튼 그 때부터 내 독서에는 하나의 패턴이 생겼다. 조금 무겁다 싶은 것을 하나 읽은 후에는 중간중간 일본 소설들을 하나씩 끼워 넣어 읽는 것이다. 그리고 적당히 자만심에 빠져서 ‘자기를 동정하는 것은 가장 비열한 사람이나 하는 짓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따위의 문구들을 나우누리 자기소개란에 올려놓고 슬며시 웃는 것이다.

   그런 적당히 가볍고, 적당히 무게 있음- 이것은 오늘 날의 한국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일본 소설 에도 해당하는 말이 아닐까. 재미있기는 하되, 너무 무겁지 말 것, 그러면서도 너무 경박하지는 말 것. 그것이 오늘날 한국에서 잘 팔리는 오쿠다 히데오니, 요시모토 바나나니, 히라노 게이치로니 하는 작가들의 하나의 공통된 흐름이 아니겠는가. (물론 여기에서 또 일군의 경향을 이루고 있는 추리물이나 에쿠니 가오리 류의 일종의 로맨스 소설은 제외하고 말이다.) 여기에 또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방금 다 읽은 <악인>의 작가 요시다 슈이치다.

   이 소설 <악인>은 한 여자에게 일어난 살인사건을 바탕으로 그 살인사건에 휘말린 그녀 주위의 친구들, 가족들, 그리고 그녀가 만났던 남자들, 그 남자들이 만났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과연 악(惡)이란 무엇인가’를 좇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범인이 누구인가를 밝히고자 하는 추리물이나, 범인을 밝히면서 긴박함을 강조하는 스릴러물은 아니다. 단지 이 소설은 사건의 전개를 조용히 따라가며, 우리 인간에게 악의란 어떤 것인가, 그리고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악의란 것을 가지게 되며, 그 악의에서는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를 등장인물을 따라가며 영화를 찍듯, 그리고 등장인물이 사건의 경위를 경찰에게 설명하 듯, 조용히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일단 먼저 느끼게 된 것은, 때로는 그 묘사가 지나쳐서, 우리에게 너무도 친절하게 답을 알려주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기억을 떠올려 보자면, 가끔 어쩌다가 낮에 집에 있게 되면, 청각장애인을 위한 화면해설로 드라마가 방영될 때가 있다. 그 때 난감한 것은 이러한 부분이다. 예를 들어 남녀주인공이 서로를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본다고 치자.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은 화면을 보고 그냥 ‘느끼면’ 된다. 그러나 화면해설 방송은 ‘남녀주인공이 서로를 바라봅니다’라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서로를 적의를 가지고 바라보는지, 애틋하게 바라보는지, 그냥 한 번 무심히 본 것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oo이 oo을 애틋하게 바라본다. oo도 oo을 사랑스럽게 바라본다.’ 이렇게 설명을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 소설을 읽는 느낌이 그런 것이라고나 할까. 그저 이 정도만 설명해주어도 좋을 텐데 하는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만다. 즉 묘사와 설명의 중간에서 무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데, 이 무리한 줄타기가 자꾸 엇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그래서 솔직히 ‘독자의 사유가 선과 악을 판별하도록 남겨두는 것이다’라는 옮긴이의 말은 별로 공감이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누가 선인이고, 누가 악인인지를 보여주는 것 자체도 비교적 명확할 뿐 아니라, 혹 그것이 명확하지 않다고 해도, 그것은 드라마에서나 보여주는 어떤 트렌드적인 경향에 길들여진(혹은 지나치게 패턴화된) 선과 악이기 때문이다. (즉 이는 이미 많은 독자들에게 너무 익숙한 이야기 구조이며, 일견 복잡한 듯하나 너무 평면적인 주인공들이라는 것이다. 이미 시작부터 그런 기미가 조금 보여지고 있기도 하다. 부잣집 도련님과 어머니가 항구에 자기를 버리고 간 청년. 뭐가 느껴지는가?)

   여기에서 다른 많은 일본 소설들과 같이 이 소설도 같은 한계점에 머무른다. 잘 짜여진 드라마 한편을 보긴 하였고, 잘 짜여진 좋은 이야기들과 좋은 대사들도 있으나, 일시적인 감정 그 이상의 무게를 주지는 않는 것. TV를 끄고 나면, 그 불우한 청년이 어쩌다 실수로 한 사람을 죽였으나 사실 그는 나쁜놈이 아니라는 것, 실제로 나쁜 놈은 다른 곳에 있을 것이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산’이 노론 척신들의 반발을 잘 무마하건 말건, 나와는 전혀 상관없을 것이라는 점과 동일하듯이 말이다. 좋은 소설이 가지는 공통점인 일시적인 감정의 고양 그 이상의 어떠한 것을 주지는 못할 것이라는 점, 나의 삶에의 어떤 것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점.

   그리고 이는 한편으로는 이는 우리 독자들이 져야 할 책임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그간 독자들이 요구해온 일본 소설의 경향이 그런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것이었으니, 출판사도 그런 작가들의 책을 중심으로, 또 ‘아쿠타가와상’이니, ‘나오키상’이니 그런 적당히 무게감 있는 수상작들을 중심으로 번역하고 출판해온 것일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분명히 나에게도 일정 부분은 책임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분명히 번역문학이라는 것의 태생적 한계가 존재할는지도 모르겠다. 이 번역문학이라는 것은 결국 번역가의 문장을 읽는 것이니까 말이다. 예를 들어 ‘레이먼드 카버’의 간결한 문장을 읽는 것이 아주 좋았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에 대한 것은 기회가 있으면 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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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슈이치 지음 | 은행나무 펴냄
그 사람, 악인인거죠? <랜드마크>, <첫사랑 온천>의 작가, 요시다 슈이치 신작소설. 일본 아사히신문에 연재된 작품으로, 인간 심연의 '악의'를 날카롭게 파헤친 감성 미스터리이다. 저자는 '선과 악', '강자와 약자'라고 하는 굵직한 테마를 선명한 묘사화 독특한 기법으로 그려내며, 하나의 살인사건으로 시작되는 인간 본성에 대한 물음표를 던지고 있다. 후쿠오카와 사가를 연결하는 263번 국도의 미쓰세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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