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의견, 김성제

Ending Credit | 2015.08.25 15:02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내용 및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영화 <소수의견>의 마지막 장면들은 상당히 흥미롭게 구성되어 있다. 재판부는 배심원단의 의견을 뒤집고 피고 박재호(이경영)에게 정당방위를 인정하지 않고, 특수공무집행방해치사죄를 적용한다. 그리고 퇴정하는 재판부와 결과에 분노하는 방청객의 모습을 교차하여 보여준 다음, 박재호의 얼굴을 비추고, 곧바로 이 사건의 키, 그러니까 지금까지 보여주지 않으려 애썼던 사건 당시의 바로 그 장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시 법정을 나서는 박재호로 돌아와 그가 (이유가 어찌되었건 결과적으로)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여준 다음, 교도소 안에서 복잡한 감정에 잠긴 박재호의 모습을 보여주고, 여기에 자식을 잃고 회한과 슬픔에 잠긴 (박재호에게 살해당한) 전경 김희택의 아버지(장광)의 모습을 비춰준다. 이 마지막 장면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 마지막 장면에서 두 아버지의 위치는 거의 비슷하다. 자식을 잃은 두 아버지, 서로가 가해자로 얽혀 있는 이상한 상황. 그러나 두 아버지는 (원망한다고 말하면서도) 서로를 원망하지 않는다. 김희택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박재호에게 말한다. 그것은 피치 못할 어떤 상황에서의 실수일 것이라고. 눈 앞에서 아들을 잃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이 마지막 장면들에서 이 두 아버지는 서로에 의해 아들을 잃었지만, 서로를 깊이 원망하는 대신에 묘한 연대(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의 지점에 와 있다. 그렇다면 그 연대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의 힌트는 아마도 그 장면들 사이에 이상하게 끼어든 것처럼 보이는 그 결정적 장면, 즉 사건 당시의 화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사건 당시의 장면이 서 있는 위치는 조금 이상하다. 이 장면 전후로 붙은 것은 박재호에 대한 클로즈업이다. 즉 보통의 영화문법에서라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 장면들이 박재호의 시점에서 본 회상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조금 이상해 보이는 것은 이 장면들이 박재호의 증언을 강화하거나 그의 입장을 강조해주려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미 사건의 상당 부분은 어떤 증언들이나 정황적인 증거, 혹은 검사 홍재덕(김의성)의 위증 강요가 밝혀짐으로서 드러난 상태이고, 배심원단에 의해 박재호의 정당방위가 인정된 상태이다. 물론 그 후에 재판부가 그 결정을 바로 뒤집기는 하지만, 그 장면 바로 후에 재판부의 굳은 얼굴로의 퇴장과 항의하고 분노하는 방청객들의 모습을 교차하여 보여주는 것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위치가 어디인지 대략 짐작하게 해준다. 그런데 이어져서 위치한 이 '사건 당시의 진실' 혹은 '박재호의 시점에서 본 사건의 진실'은 조금은 다른 인상을 심는 것처럼도 보인다. 사건의 어떤 팩트들, 그러니까 전경 김희택이 박재호의 아들 박신우를 죽이고, 다시 박재호가 전경 김희택을 죽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이것이 영화적으로 눈앞에서 재구성되었을 때 그것은 조금 달라 보인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어쩌면 이런 질문도 가능할지 모르겠다. 만약 이 장면을 재판부, 혹은 배심원단이 보고 판결을 내린다면, 그 때는 그에게 정당방위를 인정할 수 있을까. 어쩌면 뒤통수를 가격하는 장면을 느린 화면으로 보여주는 것은 그것이 정당방위라고 인정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실제라면 이것은 절대 볼 수 없는 장면이지만, 이 볼 수 없는 장면이 영화적으로 관객에게 심는 효과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는 있다. 이 장면만을 놓고 박재호의 무죄 여부를 판단한다면, 그에게 영화를 본 우리는 무죄를 선고할 수 있을까. 아마도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도리어 (팩트는 그대로이지만, 거기에 어떤 영화적인 효과를 심은) 이 장면은 박재호에 대한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다른 질문을 하기 위해 거기에 위치한 것처럼도 보인다. 예를 들어 이런 질문. 그들은 거기에서 왜 맞닥뜨리고 있는가. 이제 막 철거되려는 어둡고 침침한 성당 건물에서 그들은 왜 서로를 죽이기 위해 달려들었나. 그들을 거기에 몰아넣은 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을 거기에 몰아넣고, 이들 모두를 피해자로 만든 자, 다시 말해서 위에서 말한 묘한 연대의 반대편에 있는 자들, 즉 '국가'는 누구인가. 이들은 결국 피해자들만 남은 것처럼 보이는 이 재판에서 (보이지 않은) 승리한 자들이다. 영화 <소수의견>은 사실 두 가지의 재판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하나는 박재호가 정당방위인가 아닌가를 밝혀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에게 배상 책임을 묻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개의 재판에서 박재호와 김희택(의 부)은 모두 지면서 피해자의 위치에 머무르게 되었고, 오로지 국가만이 승리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하나의 다른 실제 사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흔히 용사 참사라고 불리는 그 사건. 경찰 1명과 철거민 5명이 죽음에 이르렀던 그 사건. 영화 <소수의견>은 "이 영화의 사건은 실화가 아니며 인물은 실존하지 않습니다"라는 단호한 자막으로 시작하지만(정치적인 논쟁에 휘말리는 것을 방지하고, 영화가 하나의 방향으로만 해석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필요한 조치였을 것이다. 그런데 웃긴 것은 그럼에도 이 영화는 만들어진 후 한참이 지나고서야 지각개봉했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는 분명 어떤 하나의 사건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그것은 철거민을 둘러싼 이야기를 다루었기 때문도 아니고, 영화를 둘러싼 어떤 이야기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청와대에서 이 사건 대신에 연쇄살인마를 다룬 사건을 더 강조하여 보도하라는 요청을 내려주는 장면 같은 것(실제 용산참사에서도 연쇄살인마 강호순 사건을 더 강조하여 보도해달라는 청와대의 요청이 있었다)들이 있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두 가지 면에서 그런 것처럼 보이는데, 먼저 하나는 실제 사건과 영화 속의 사건, 이 두 가지 사건 모두 위에서 말한 것처럼 결국 국가가 승리한 사건이라는 점이다. 김영진 평론가는 <씨네21> 지면을 통해 <소수의견>을 다루며, 이 영화가 박재호와 김희택의 아버지를 희생자의 자리에 위치시키면서, 그들이 희생자의 자리에서 자존을 회복하지 못하게 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러나 그랬을지 몰라도, 이 장면들은 분명히 어떤 분노를 보는 이에게 불러 오는데, 실제의 사건에서도 모두가 피해자였을 뿐, 승리자는 국가였고, 그들의 하수인이었다. 살기 위해서 용산 남일당 건물 옥상에 올라간 철거민들은 물론, 거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두 개의 문이 있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영화<두 개의 문>), 무리한 진압 작전에 투입된 전경 및 경찰들도 피해자다. 이들을 그 옥상에서 맞닥뜨리게 한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푸른집에서 나와 그분이 자서전을 쓰시는 동안, 또 당시 서울지방경찰청장으로 진압 작전을 지휘한 김석기 씨가 총선에 출마하고 한국공항공사 사장으로 가는 동안, 철거민들은 희생자의 위치에서 자존감이 억눌린 채 살아야만 했다. 영화를 보는 이들의 카타르시스는 이들이 희생자의 위치에서 벗어나 자존을 회복하는 것으로 충족될 지 몰라도, 실제의 어떤 것을 상기시키는 데 이는 때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도 한다.   

 

다른 하나는 이 영화가 장면을 소구하는 방식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영화는 사건의 진실을 둘러싼 결정적인 장면의 공개를 최대한 늦춘다. 마치 최대한 보여주지 않으려 애쓰는 것처럼도 보인다. 물론 사건의 진실이 영화의 키가 되는 법정영화에서 흔하지 않은 방식은 아니다. 그러나 사실 이 영화 <소수의견>은 어떤 사실관계를 법정에서 추리하면서 밝혀내, 그로인해 어떤 영화적 쾌감을 얻고자 하는 종류의 영화는 아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어떤 정황적 증거는 법정을 통해 거의 밝혀졌으므로 이 장면의 공개로 사실이 뒤집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보기에 이 장면은 어떤 희생자의 정서를 두 사람에게 덧붙이는 것 외에도 (본의 아니게) 어떤 다른 것을 연상시키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그것은 이 장면의 공개가 이렇게 최대한 지연된 후 드러남으로써 실제의 사건, 즉 용산참사에서의 그 공백을 다시 생각케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영화 <두 개의 문>에서도 잘 드러났듯이) 이 사건의 중요한 부분은 여전히 공백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3천 쪽에 달하는 초동수사 기록과 경찰이 촬영되지 않았다고 주장한, 존재하지 않는 'No Signal'의 채증 영상. 그 곳에서는 사람이 불타 죽었지만, 그들이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 아무런 증거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니 공개되지 않았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 공백을 앞에 두고, 오로지 철거민들에게만 책임을 물었다.

 

다시 영화로 돌아온다면 우리는 마찬가지를 영화에 물을 수 있다. 영화의 막바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영화 속 재판부나 혹은 윤진원 변호사(윤계상)의 위치에 비슷하게 서 있다. 우리는 정황적인 증거를 보고 있지만, 사실 중요한 지점은 여전히 공백에 놓여져 있다. 우리는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가. 박재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물을 수 있다면 그에게만 책임을 물을 것인가. 그러나 실제의 재판부는 영화 속 재판부와 같이 그에게만 책임을 물었고, 그들만 피해자이자 희생자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 결정적 장면을 결국 영화 속에서 공개하지 않고 끝내는 것도 가능한, 어쩌면 더 훌륭한 선택이 되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의 설정대로라면 이 장면은 결국 우리가 볼 수 없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볼 수 없는 것을 영화가 보여줄 때 생기는 쾌감, 혹은 정서와 그와 동시에 발생하는 어떤 미심쩍음. 그것은 늘 비슷한 무게이지만, 그 미심쩍음이 종종 더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것은 이 영화에서도 그렇다.)

 

이 바깥에, 그러니까 박재호나 김희택의 부 외곽에 존재하는 인물들이 있다. 아마 우리들 대다수도 그에 해당할 것이다. 영화는 두 가지의 인물상을 보여준다. 하나는 경직되어 마치 어떤 부품처럼 존재하는 사람들. 국가의 대리인으로 나온 자들, 그들은 마치 어떤 기계의 일부처럼 보인다. 그들이 보여주는 차갑고 기계적인 행동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의 미소(특히 여검사가 보여주는)도 마치 로봇이 보여주는 그것같아 섬뜩하다. 그것을 홍재덕 검사는 영화 끄트머리에서 요약하여 말해주는데, 그것은 자신이 국가라는 거대한 기계의 부품임을 재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즉 그 '넌 뭘했냐'는 그 물음은 네가 부품으로서 뭘했냐,는 질문인 것이다. 그 반대편에 있는 인물상들이 있다. 윤진원 변호사, 장대석 변호사(유해진), 공수경 기자(김옥빈) 같은 인물. 이들은 언뜻 '대의'라는 큰 틀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 모두는 동시에 각자의 입장과 각자의 지향점이 있다. 즉 어떤 대의도 물론 중요하지만, 동시에 윤변호사는 지방대를 나와 국선변호사나 하고 있는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려는 목적도 있을 것이고, 공기자는 특종을 터뜨리고자 하는 목적도 있을 것이다. 즉 그들은 어떤 대의라는 큰 기계의 부속품은 아닌 것이다. 각자 나름의 욕망으로 최선을 다해서 그 대의를 수행하고자 하는 어떤 각축도 여기에는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에는 대의가 단지 선의의 총합만으로는 이루어질 수도 없고, 완수될 수도 없음을 아는 어떤 현실 인식이 들어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을 윤진원 변호사는 하나의 일화로 잘 요약하여 들려주는데, 그가 떨어지는 실력에 지방 국립대에나마 갈 수 있도록 공부를 가르쳐 준 사람은 (학생운동으로 인한) 수배자로 방에 숨어있던 형의 친구였다. 영화 속 장대석의 한숨섞인 한탄대로, 이 386 따라지에 대한 (한숨섞인) 부채 의식. 이는 영화 속에서 이들이 처한 위치를 말해주면서, 동시에 그 부채만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을 같이 말해준다. 그것은 기계가 지시하는대로만 움직이는 부품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신의 욕망과 염치를 가지고 그것에 대응하며 움직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이에 대비되는 자신의 반대편에 있던 그 로펌으로 들어간 홍검사, 아니 홍변호사의 몰염치). 몰염치의 시대의 최소한도의 염치, 그것이 무엇인지를 이 영화의 인물들, 윤변호사와 장변호사, 공기자, 그리고 더 나아가 박재호와 김희택의 아버지 등은 보여주고 있다(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것, 혹은 원망하지만 그것이 피치 못할 사정임을 아는 것). 그 반대편에 서 있는 국가라는 기계가 벌이는 몰염치의 공습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저번에 양심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베테랑>의 쪽팔림을 묻는 그 질문도 여기에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대한 몰염치의 시대, 우리는 우리의 염치를 어떻게 보호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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