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의 윤리학

The Book | 2015.05.22 14:17 | Posted by 맥거핀.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10점
구병모 지음/문학과지성사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책의 표지가 인상적이다. 아무 무늬도 없는 노란 바탕을 세로로 가로지르고 있는 검은 틈. 그리고 그 검은 틈 사이에서 불길하게 삐져 나온 것처럼 다음의 열 글자가 그 틈새 옆에 자리잡고 있다.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오래 들여다보면 빨려들어갈 것 같은 검은 틈. 이 틈새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눈앞의 어둠은 아까보다 부피가 커져 있었다. 틈에서 벌레 떼처럼 기어 나온 어둠은 부분부분이 거의 동일한 명도였는데도 어딘가 주름이 잡힌 느낌을 주면서 원근감을 자아냈다. 어둠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 같았고 가장 깊은 암부에는 소실점이 있을 것만 같았다. 사라지는 지점이라니, 지금의 자신이 가장 원하는 자리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미온은 구멍에 손을 넣었다.

- p.94 <관통貫通> 중에서

 

이 틈새는 관통할 것을 유혹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어쩌면 소설이라는 것이야말로 그런 관통의 욕망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종종 소설을 통해 다른 세계를 엿본다. 소설의 지면에 있는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작은 틈은 점점 벌어져, 그 틈새로 들어오라고 우리를 유혹한다. 지금의 이 현실이 어떻든 그것은 상관이 없다. 아, 나는 좁은 지하철 속에서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얼마나 그 틈새를 은밀하게 들여다보았고 들어갈 것을 욕망했던가. 아마도 <관통>의 미온은 그 유혹을 이겨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처음에는 손을 밀어넣다가, 결국에는 그 틈새로 다리를 밀어넣고, 그 구멍을 통과했을 것이다. 그리고 구멍을 통과한 그녀는 날렵해지고 우아해진 몸매와 3분백 내지는 영희백이라고 불리는 자그마한 보스턴백과 태어나 처음보는 옥색 실크 블라우스와 천장이 높고 빛이 잘 드는 이층집 화실과 전도유망한 신인작가라를 타이틀을 얻었다. 그것은 '단순명료하며 속물적이고 몰개성적'이지만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는가, 그저 좋다. 그런데...구병모는 불안한 후기를 거기에 덧붙인다. 이편의 세계에 아직 놓여져 있는, 사업을 수차례 말아먹고 어딘가로 사라져 잘 연락도 되지 않는 남편과 난장판이 된 원룸, 악을 쓰고 있는 정신질환을 앓는 시누이, 미온이 유명한 화가가 되어 한몫 챙겨다주리라는 가망 없는 꿈을 믿었던 친정이라는 현실을 피해 미온이 끌고 나왔던 재활용쓰레기 장에서 주워온 낡은 유모차와 그 안의 울고 있는 아기, 그리고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이 내린 '무책임한 부모들이 술이나 인터넷 게임에 빠져 아이를 깜빡 잊어버린 부주의 소행 또는 정신 질환자에게서 나타나는 자아 망실 행위의 일환'이라는 진단. 이것들은 다 무엇인가. 이것을 무엇이라고 불러도 좋을까. 혹시 이것을 일종의 '재난'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가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우리를 들여다본다,라는 니체의 유명한 말을 이렇게 비틀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틈새를 들여다보면 틈새도 우리를 들여다본다. 틈이 생기면 어떻게든 들어가보려고 애쓰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이지만, 어찌 그 틈새에 좋은 것만, 그러니까 보스턴백이나 옥색 실크 블라우스와 이층집 화실같은 것만 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그래서 어린아이들은 틈만 나면 좁은 틈새로 기어들어가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그때마다 부모의 우악스러운 손에 잡혀 질질 끌려나오게 되는 것이다). 현실이 갈라진 틈새에서는 때로 이상한 재난이 몰아닥친다. 예를 들어 영화 <미스트>. 기분나쁜 짙은 안개가 순식간에 현실을 감쌌고, 그 안개 사이에서는 무시무시한 '그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기괴한 '그것들'은 다른 차원에서 왔다.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열어서는 안되는 틈을 열었고, 그 틈 사이로 '그것들'은 이쪽으로 건너왔다. 이상한 재난, 초현실적인 재난. 구병모의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의 단편들이 그리는 세계들도 이러한 초현실적인 재난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파르마코스>의 지독한 가뭄과 입에서 벌레를 내뿜는 여인이 불러오는 물, 혹은 <식우蝕雨>에서 모든 것을 부식시키는 강한 산성의 비, <이물異物>에서 다세대 주택 부엌에 나타난 이름모를 거대한 생물, 아니면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에서 보여지는 덩굴손 비슷한 무엇인가로 변하는 사람들. 그것들은 근원을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하고 불길한 거대한 재난의 형태이다. 아니, 어쩌면 이렇게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무엇인가만 재난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터였다. <이창裏窓>에서의 아이의 죽음이나, <어디까지를 묻다>에서의 카드사 콜센터에서의 일들, 혹은 위의 <관통>에서 미온이 겪는 일들도 일종의 재난이라고 부르면 안될 이유가 있을까. 그 일들은 보다 현실에 가깝게 발을 딛고는 있지만, 역시 근원을 알 수 없으며, 불가사의하기는 마찬가지다.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그들은 이유를 전혀 모른채로, 어느 틈에 그 재난의 한가운데에 놓여져 있다. 어찌할 줄을 모른채로.

 

그러나 영화 <미스트>가 단지 재난의 양상과 스펙타클을 그려내는 데에 그치지 않고 어떤 윤리적인 질문을 하려는 것처럼 보였던 것과 마찬가지로(그래서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의 '안개'를 홀로코스트의 '가스'와도 연결짓는 질문들이 있었다), 구병모의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은 그 재난 속에서 어떤 윤리를 묻는 것처럼 보인다. 그 윤리적 질문은 때로 노골적이기도 하고(<파르마코스>), 보다 은밀하기도 하며(<식우>), 때로는 관찰자의 시선에서(<덩굴손증후군의 내력>), 때로는 가해자의 시선(<이창>)이거나, 혹은 피해자의 시선(<어디까지를 묻다>)에서 이 재난 속에서 작동하는, 혹은 작동했었어야만 하는 윤리에 대해 묻는다. 그러나 그 질문은 불명확하며, 때로는 질문이 명확한 것처럼 보일 때에도 그 답을 내리기는 적어도 구병모의 소설들에서는 쉽지가 않다. 그래서 쉬운 길은 이야기 속에서 처음부터 배제되어 있고, 종종 인물들은 여러 중첩된 질문 속에서 갈 길도 없이 내버려진채 이야기는 갑자기 막을 내린다. 그러니 덩그러니 놓여진 우리들은 복잡한 마음들을 보다 쉬운 형태로 바꿔 하릴 없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이물>의 양선은 어떻게 되었을까, 같은 쉬운 형태로 바꾼, 질문만 있되, 답이 돌아오지 않는 질문들을.

 

방난이 데려온 게 아닌 이상 손대면 깨질 유리처럼 거리를 두어 대해야 할 까닭은 없으므로 긴장이 풀린 양선은 무심코 놈의 털을 쓸어 넘기고,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드러난 놈의 눈꺼풀이 꿈틀거리며 열리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그 눈동자는 평화로운 숙면을 방해하는 자를 확인하려는 듯 양선을 정확히 응시하더니

- p.210 <이물>의 마지막 문장

 

돌아오지 않는 답. 그것은 이 소설의 인물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구병모 특유의 만연체는 이 소설들과 묘하게 어울리는 면이 있는데, 이 소설 속의 인물들은 아무도 듣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무엇인가를 말하려 애쓰는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작품 전체가 긴 독백의 형태로 이루어진 <이창>이나 <파르마코스>, <어디까지를 묻다>와 같은 작품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소설 속의 인물들은 대체로 어떻게든 무엇인가를 최대한 말하려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이 이 재난 속에서 얼마나 윤리적인지를, 혹은 자신이 왜 이 재난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지를. 다시 말해서 그것은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이라는 단문으로 요약된다. 다시 영화 <미스트>로 돌아간다면 기도하는 말많은 자들이 결국 원했던 것은 '그것들'이 내가 아닌 다른 누구를 잡아가는 것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즉 이 재난들은 어떤 질문들을 하기 위해 마치 만들어진 공간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 <미스트>의 슈퍼마켓이라는 한정된 공간이 마치 다양한 인물군상을 몰아넣고 만든 인위적인 실험실처럼 보였던 것처럼, 구병모 소설의 재난들은 제한적인 기이한 형태로 몰아닥친다. <이물>의 생물은 거기 그 좁은 부엌에 그냥 웅크리고 있을 뿐이며, <식우>의 강산성비는 그 도시에서만 내리는 것처럼 보이고,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이나 <파르마코스>의 기이한 현상들도 한 도시 혹은 한 마을에서만 일어나는 제한적인 현상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이 좁은 도시 혹은 마을에 가해지는 일종의 징벌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모두가 자신의 입장만을 이야기하는 일방통행의 좁은 세상, 단지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원하는 세상에 내리는 (결국 반복될 수 밖에 없는) 징벌.

 

그러나 무엇인가 자신의 입장을 열심히 얘기하려 하는 이들을 비난만 할 수 있을까. 재난이 가장 먼저 집어삼키는 것은 늘 그랬듯이 가장 약한 자들이고(예를 들어 <식우>의 강한 산성 비가 먼저 부식시키는 것은 결국 약하고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약하고 궁지에 몰린 자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열심히 어필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그 반대로 강한 자들은 결코 무엇인가를 먼저 말하는 법이 없다. 늘 그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자들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말을 많이 한단 말인가). 소설이라는 것의 가능성도 어쩌면 그런 것은 아닐까. 소설은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자 애쓰는 이들의 것이고, 아무 이야기도 내뱉지 않는 것보다 적어도 무엇인가를 이야기해야만 어딘가에 가닿을 가능성이라도 생긴다. 그것은 예를 들어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의 U가 무심결에 덩굴손 줄기들에 손을 뻗어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자 애쓰는 것이며, <어디까지를 묻다>의 카드사 상담원이 예전 성우였던 택시기사를 알아보고 그에게 예전의 애니메이션에 나왔던 대사를 들려달라 청하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물>의 양선이 무심코 놈의 털을 쓸어 넘기고 그의 눈동자를 마주하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 이물은 결국 양선 자신이거나 혹은 방난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는 이 재난 속에서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을 말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는 약한 자들. 그것은 U와 덩굴손들, 그리고 카드사 상담원과 택시기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약한 자들은 약한 자들을 알아보는 수밖에 없으며, 닿지 않는다 생각해도 어떻게든 얘기를 하려고 애써 보는 수밖에 없다. 가득한 재난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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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소멸하지 않겠다는 것

The Book | 2015.04.25 15:22 | Posted by 맥거핀.

 

55세부터 헬로라이프 - 8점
무라카미 류 지음, 윤성원 옮김/북로드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이야기의 인물들은 무엇인가를 마신다. 혹은 마시려고 애쓴다. '결혼상담소'의 나카고메 시즈코는 홍차를,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 번'의 인도 시게오는 맛있는 물을, '캠핑카'의 토미히로 타로는 커피를, '펫로스'의 다카마키 요시코는 보이차를, '여행 도우미'의 시모후사 겐이치는 햇차를 마신다. 왜 이들은 이렇게 무엇인가를 마시는 것일까.

 

누구나 힘든 시기가 있다. 정신적으로 불안할 때 먼저 마실 것을 천천히 음미할 수 있다면 어떤 사람이라도 마음이 진정될 것이다. 그것은 의식 같은 것이며 그 누구에게도 의존할 필요가 없다. 텔레비전에서 자살 뉴스를 접할 때마다 얼마나 힘든 일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저 사람은 뭔가 좋아하는 음료를 천천히 마시면 마음이 진정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 '결혼상담소' p.58

 

"왜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 같은 데서 패닉이랄까, 너무 슬프거나 괴로워서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진 사람에게 심호흡을 하라고 하면서 물을 마시게 하잖아요.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는 차를 즐길 여유가 없지요. 저는 그래서 차라든지 음료는 단순히 수분을 공급하는 것을 넘어서서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슬픈 일이나 힘든 일이 있을 때 천천히 차를 마시면 도움이 많이 된다고 생각해요."

- '펫로스' p.247~248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마신다는 것은, 이들에게는 어렵고 힘든 시기를 버티게 해주는 것이다. 왜 어렵고 힘든가. 예를 들어 그것을 일본 경제와 맞물려서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50대 중반의 나이인 소설 속 인물들이 한창 활동하던 예전의 일본은 버블 경제의 시대였다. 호황이 이어졌고, 많은 이들에게 좋은 시절이었다. 그러나 버블은 꺼졌고, 이제 그 시절은 끝났다. '여행 도우미'의 시모후사 겐이치의 말을 빌리자면, "버블 붕괴 이후밖에 모르는 세대는 이처럼 혹독한 노동 환경을 당연하게 여길지도 모르지만, 고도성장과 버블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지옥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일본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제목에도 있는) 55세라는 나이는 그런 시기인지도 모른다. 직장과 사회에서는 이제 물러나야하지만, 자식들은 완전히 성장하지 않았고, 수입은 없지만 여기저기 돈 들어갈 일만 많이 남은 시기. 그것은 경제적인 문제 뿐만이 아니다. 가족 간의 대화는 점점 줄어들고, 배우자의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이 보이며, 자식들과의 대화는 점점 어려워지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이제 두렵기까지 하다. 한마디로 애매한 시기, 무엇인가를 이뤄냈다고 말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이제 무대 뒤편으로 물러날 것을 요청받는 시기. 그러나 무대 뒤 불꺼진 대기실에서의 삶은 아직도 너무나도 길게 남아있다.

 

이러한 경제적인 압박과 세대 일반으로서의 중압감은 이들에게 두 가지 이상(異常) 증세로 나타난다. 먼저 하나는 눈에 보이는 육체적인 혹은 정신적인 이상에 대한 묘사.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 번'의 인도 시게오에서 나타나는 만성적인 허리 통증, '캠핑카'의 토미히로에게서 나타나는 정신적인 불안증과 우울증, 혹은 '펫로스'의 다카마키 요시코의 급격한 현실감 상실. 이 이상 증세들은 현실의 문제들과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본인들도 정확한 이유를 모르며, 해결책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다른 하나의 이상 증세는 일종의 분노이다. 주인공들은 때로 화가 치밀어 오른다. '결혼상담소'의 나카고메 시즈코는 남편의 말투는 물론 숨소리까지 불쾌하게 여기고,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 번'의 인도 시게오는 자신도 모르게 길을 막고 있던 노숙자에게 호통을 치며, '캠핑카'의 토미히로는 인재 파견 회사의 콧수염을 기른 젊은 직원에게 알 수 없는 적의를 느낀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그러한 분노는 사실 그렇게 명확하게 표출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을, 감정을 쉽게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일본인의 특성과 연결지을 수도 있겠지만, 단순히 그것이 이유의 전부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것은 한편으로 그것이 특정 개인에 대한 분노가 아닌 이제 무대에서 퇴장할 것을 요청하는 사회 일반에 대한 분노에 더 가깝기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삶을 꾸려가는 데에만 열중하느라 분노를 포함한 모든 감정을 다루는 법을 인물들이 점점 잊어버리게 된 것에서 이유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분노는 격정적이고 뜨겁게 타오르는 분노가 아니다. 그보다는 일종의 마른 분노에 가깝다. 말라버린 감정의 끝자락에서 스멀스멀 피어나오는 알 수 없는 적의.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무엇인가를 마시는 것이 아닐까. 어떻게든 마르지 않게 하려는 몸부림의 하나로 말이다. 왜냐하면 모든 마른 것은 불타기 쉬우며, 불은 상대방을 태우기도 하지만, 그전에 결국 본인을 태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불안하다는 것은 한편으로 소멸에 대한 불안감이기도 하다. 아무 것도 이루어내지 못하고, 삶을 충분히 즐기지도 못했는데, 이대로 불타 소멸해버리고 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여기에는 배어있지 않을까. 이것을 이렇게 말할 수도 있는데, 결국 무엇인가를 마신다는 것은 모든 존재에게 있어서 어떻게든 삶을 연장시키겠다는 의지이다. 예를 들어 '펫로스'에서 다카마키 요시코가 기르는 늙은 개 보비가 심장 이상 증세로 죽어가면서도 어떻게든 먹이를 먹고, 물에 적신 스폰지에서 물을 빨아들이려고 애쓰는 것은 삶의 의지라는 것의 의미를 명료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다카마키 요시코와 그녀의 남편은 그것으로 예상치 못한 위안을 받는다. 어떻게든 살고자 애쓰는 그 존재로서의 고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말이다. 혹은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 번'의 인도 시게오가 죽어가면서도 인간으로서의 아주 최소한의 품위를 잃지 않으려 분투하는 후쿠다를 보고 결국 얻게되는 정신적인 도움 말이다. 55세는 그대로 소멸하기에는 너무도 이른 나이니 말이다. 그들 앞에는 아직도 긴 삶이 남아있다. 그것이 고통으로 남을지, 혹은 감사함으로 남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것이 어떤 가능성으로 남아 있음을 부인할 수도 없다.

 

오랜만에 무라카미 류의 소설을 읽었다. 내 기억에는 2000년에 처음 출간된 <공생충> 이후로 처음 읽는 것 같다. 다시 그의 책을 잡게 된 것은 오랜만이지만, 1990년대 말 책 좀 읽는다,하는 대학생들이라면 누구나 그랬던 것처럼 나도 류의 소설들은 나름 꽤 읽었다. 글쎄. 무엇이 그의 소설을 읽게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가 유려한 문장을 쓴다거나, 혹은 어떤 삶의 진실이나 통찰을 전달해준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 소설집 <55세부터 헬로라이프>의 이야기들은 그렇게 특별한 이야기라고 보기는 어렵다. 어떤 사람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누구나의 이야기이다. 책의 후기를 보면 아마도 그것이 류의 의도였던 것 같다. 보통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 체력도 약해지고, 경제적으로도 만전을 기하지 못하고, 그리고 이따금씩 노쇠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의 보통 이웃들, 혹은 현재와 미래의 나의 이야기. 다시 말해서 이 이야기들은 통속적이다. 사실 '통속적'이라는 말의 의미가 흔히 조금 다르게 받아들여진다는 느낌이 있는데, 예를 들어 소위 막장드라마들이 통속적이라고 말해질 때의 어떤 이질감말이다. 왜냐하면 그 막장드라마의 세계들은 사실 현실에서 거의 일어나지 않는, 우리가 가까이에서 거의 볼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세계는 통속적이라기보다는 판타지에 가깝다. 그러나 이 류의 이야기들은 현실에 아주 가깝게 발을 붙이고 있다는 의미에서 아주 통속적이다. 이것은 류의 어떤 변화라고 말할 수도 있겠는데, 예전의 그의 이야기들은 특정의 세계, 특정의 문화, 특정의 인물들을 다루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아주 통속적인 이야기로 돌아왔다. 그리고 진정한 통속적인 이야기가 그렇듯, 이 이야기 역시 마음을 예상치 못하게 건드릴 때가 많다. 그러니까, 통속적인 이야기를 볼 때의 민망함을 어떻게든 견뎌내야만 한다. 아이씨,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보면서 울고 있지.

 

아니 통속적인 이야기로 '돌아왔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는 내가 관심을 두지 않은 때에도 사실 무엇인가를 계속 쓰고 있었으니까. 책 날개의 지은이 약력을 보고 새삼스럽게 놀랐다. 무라카미 류. 1952년 일본 나가사키 현에서 태어났다. 그가 이렇게 나이들었었단 말인가. 그리고 책을 다 읽은 지금 다시 그 나이를 보면서 생각한다. 1952년생 작가가 쓴 55살 나이의 이야기를 내 나름대로 생각하고 지껄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나이의 어떤 것을 지금의 내가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니 이 리뷰의 끝은 이렇게 맺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모르겠다. 정말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겠다. (55세가 되었을 때 이 책을 다시 읽고 리뷰를 다시 쓸게요. 물론 당신이 다시 읽지는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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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할 순 있어도, 막을 수는 없다

The Book | 2014.03.03 17:28 | Posted by 맥거핀.
시인을체포하라14인사건을통해보는18세기파리의의사소통망
카테고리 역사/문화 > 서양사
지은이 로버트 단턴 (문학과지성사,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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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40년 전인, 1749년 봄의 파리. 의학을 공부하던 프랑수아 보니라는 학생이 경찰이 고용한 첩자의 밀고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의 혐의는 왕(루이 15세)을 비난하는 시를 써서 여러 사람에게 읽어주었다는 것이었으며, 그는 시를 읽어준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자신이 지은 것이 아니며, 그도 누군가에게 전달받았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 사건은 꼬리를 물고 이어져, 보니를 비롯한 총 14명이 왕을 비난하는 여러 편의 시를 짓고, 유포시킨 혐의로 연쇄적으로 체포되었고, 그들은 대부분 자신이 시를 가지고 있었고, 누군가에게 들려준 것은 사실이나 자신들이 시의 원저자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모두 법학생, 의학생, 철학과정 학생, 성직자, 법률서기 등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보기는 어려웠고, 프티 브르주아이지만 단지 약간의 학식을 가진 보통의 대중에 가까웠고, 경찰이 벌인 일련의 조사에서도 이들이 이 시의 원저자라고 밝혀낼 만한 핵심적인 근거를 찾아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대중들에게 본보기로서 일벌백계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 사건은 이후 이들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사건은 <시인을 체포하라>의 저자 로버트 단턴이 '14인 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단턴은 당시의 경찰 기록 및 여러 문헌을 토대로 이 사건의 의미를 세심하게 추적하며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파리 경찰 당국 및 베르사유의 내부자들은 왜 (어떻게 보면 하찮은) 시를 추적하는 일에 그토록 열을 올렸을까? 왜 이 14인은 대중 속에서 끌려나와 일벌백계의 대상이 되었을까? 이 시들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유통되었을까? 이 시들은 대중 속에 어느 정도로 퍼져나갔으며, 그것은 어떠한 기능을 했을까? 당대의 대중들은 이 시들을 노래하며 어떤 생각을 가졌고, 그것은 그들의 향후의 행동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아마도 이 질문들은 다음의 질문으로 좁힐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사건은 '여론'이라는 것의 탄생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 사건으로 당대의 '여론'이라는 것의 실체를 살펴볼 수 있을까?

'여론'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저자의 논의를 따른다면, 여론에 관한 역사연구에는 두 가지 구분되는 입장이 있다. 하나는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입장으로 여론을 인식론과 권력의 문제로 이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의 입장으로 여론을 이성이 작동하는 공공성을 통한 합리적 결정 도출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이를 저자의 나중의 논의에 비추어 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는데, 하나는 철학적 형태의 여론으로 진실의 확산에 관심을 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형태의 여론으로 의사소통 회로를 통해 유통되는 메시지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p.149). 단턴의 논의는 이 두 가지 모두와 약간은 거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데, 이는 이론적인 논의보다는 경험적인 연구이며, 하나의 실제사건을 놓고 실제의 메시지의 형태와 그 유통방식, 그리고 그것에 대중들에 보이는 반응에 더 관심을 두는 것이며, 그것에서 도출되는 대중의 면모를 조심스레 살피는 것이다. 즉 이 사건에서 단턴이 보는 대중의 면모는 어떤 진실의 담지자이거나 합리적 이성이 작동하는 공공성이 작동하는 무엇도 아니다. 그보다는 더욱 복잡한 무엇, 새롭게 등장하게 된 실체를 가진 수많은 목소리를 가진 힘에 가깝다.

어떤 "여론"인가? 그것은 이성의 목소리도 아니고, 모를레와 콩도르세가 채택한 철학의 개념과 멀게라도 닮은 어떤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회적 혼종물인 메르시에의 "대중이라는 분"의 독단적인 명령으로 이제 새로운 리바이어던(Leviathan)과 같다. (중략) 그러나 철학적 이상과 사회적 현실은 결코 일치한 적이 없다. 대중이라는 분은 철학자들이 여론에 관해 논문을 쓰기 훨씬 전부터 존재했으며,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 대중을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여론조사자들의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말이다. 대중이 언제나 변함없이 동일했다는 뜻은 아니다. 18세기 파리에서 구체제 특유의 대중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이런저런 일들에 대해 의견을 내며 끼어들기 시작했다. 대중은 계몽사상가들이 상상해낸 추상이 아니었다. 대중을 담론적으로 구축하려는 계몽사상가들의 시도에는 터럭만큼의 관심도 없이, 계몽사상가들을 포함해 앞에 놓인 모든 것을 쓸어버린 대중은 거리에서 길어 올린 어떤 힘이었으며, 이미 14인 사건의 시기에도 분명하게 보였고 40년 후에는 멈출 수 없게 된 힘이었다. (p. 155~156)

즉 단턴의 논의는 보다 조심스럽다. 역사학자로서 그가 결국 말하는 것은 여론이라는 것의 어떤 거대한 맹아라기보다는 이 사건에서 드러난 초기적 정보사회에서의 대중들의 의사소통체계이며, 불확실한 가설보다는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무엇인가이다. 예를 들어 그는 재빨리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으로 달려가지 않는다. 즉 그는 이 '14인 사건'에서 드러난 대중들의 의사소통체계와 프랑스 대혁명을 단선적으로 연결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가 결론을 내리는 것은 (혁명이라는 것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해도) 18세기 중반의 파리는 시와 노래라는 하나의 효율적인 의사소통체계를 갖추고 있었고, 그것을 통해 대중들에게 어떤 사건과 그에 대해 나돌던 세간의 논평을 전했다는 것이다(즉 이 시와 노래들은 현재의 호외와 비슷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또한, 이는 정보를 전파하고 받아들이는 행위를 통해 대중들에게 일종의 공적 사건에의 개입이라는 공통된 의식을 갖추게 함으로써 '대중'을 형성하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심스러움은 한편으로 이 연구의 방법론이 가지는 한계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 책 <시인을 체포하라>는 부록과 주석을 빼면 162페이지라는 그다지 길지 않은 분량이고, 그의 논의 방식과 서술 형태를 볼 때 대중서라기보다는 연구논문에 가깝다. 이 연구논문에서 단턴의 방법론은 방대하고도 다양한 사료에 대한 철저한 문헌연구라고 볼 수 있는데, 사실 이러한 주제에서 문헌연구의 한계는 명확하기 때문이다. 즉 예를 들어 문헌을 통해 당대에 실제로 유통되었던 시나, 그것으로 인해 벌어진 사건의 경과들을 추적하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할지 몰라도, 그것이 실제로 대중들에게 어느정도 퍼져있었는지(페이스북 '좋아요' 개수나 트위터 팔로워 수가 있는 것이 아니다), 혹은 대중들이 어느 정도 그것에 열광하였는지, 혹은 그들이 그것을 듣고 노래하며 어떠한 생각을 가졌는지 정확히 밝혀내기란 어렵다(그에 대한 기록이 있다고 해도 그 기록은 대체로 일반대중이 남긴 것이 아니었다). 하다못해 시와 노래라고 해도, 그것이 정확히 어떻게 불렸는지 알기란 어려운 것이다(악보로 곡조와 가사가 남아있다고 해도, 사실 그것을 어디에서 어떻게 - 음울하게, 혹은 활기차게, 혹은 비꼬듯이 - 불렀는지는 정확히 추론하기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역으로 이 책의 가치는 그 내용적인 부분보다도 그 방법론적인 시도라고 볼 수도 있는데, 단턴은 철저하게 문헌연구에 의존하면서도 그 문헌연구에 다양한 시도들을 가미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경찰기록, 일기, 샹송집, 재판기록, 벽보 등 다양한 문헌을 수집하는 소재적인 면에서, 또는 통계를 내거나, 노래의 변천과정을 추적하거나, 정치적이거나 문학적인 배경을 추론하거나 하는 등의 방법적인 면에서도 그러하지만, 당대의 노래를 실제로 녹음하여 그것을 독자들이 들어볼 수 있도록 배려한 것 등이 그러하다(그 외에도 옮긴이는 이 책 자체가 시집이나 노래책의 구조를 모방하고 있다고 하는데...글쎄?). 물론 이는 단턴의 논의대로, 아마도 당대에 실제로 불렸던 것과는 상당히 다를 수도 있겠지만, 이를 통해 단지 문자로서 시와 노래를 접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구어적 의사소통체계의 일부분을 맛볼 수 있게 해주며, 우리도 그로 인해 이 구어적 의사소통체계의 힘을 다른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게 한다.      

그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는 일부분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단턴의 논의를 따라 이 14인 사건에서 나타난 구어적 의사소통망과 40년 후의 프랑스 대혁명을 무리하게 연결짓지 않는다고 해도,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경찰과 베르사유의 내부자들이 이 '14인 사건' 등을 통해 관련자들에게 일벌백계를 가하는 등 이 시와 노래의 유통과 확산을 막기 위해 애썼지만, 결코 대중들의 입에서 이러한 노래가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의 원저자의 추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원본이나 사본을 없앤다고 해도, 그것의 여러 다양한 변형본들은 계속 대중들에게서 대중들에게로 전파되었다. 문자체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암기와 가창이라는 구어적 형태로서 말이다. 즉 아무리 애를 써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간 이야기와 노래들, 혹은 그 대중들의 비판적이고도 풍자적인 의식 자체를 막을 수는 없었다. 즉 당시 18세기의 파리는 시와 노래가 지배하는 정보사회였으며, 이는 21세기의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이다(비록 인터넷과 트위터와 페이스북이라는 다른 것이 지배한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3세기나 지났지만, 위정자들이 벌이는 행태는 비슷하다. 지난 정상회의 포스터를 둘러싼 사건, 혹은 국정원의 여론조작 사건에서 보듯, 위정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대중의 의사소통체계에 틈입하여, 그것을 조작하거나 부수려 한다. 그러나 대중의 머리와 의식이 남아있는 한, 그 입을 완전히 막아내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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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으로 저항하기

The Book | 2014.02.26 17:03 | Posted by 맥거핀.

서울아케이드프로젝트문학과예술로읽는서울의일상
카테고리 인문 > 인문학일반
지은이 류신 (민음사,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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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당신이 서울에 살고 있다면 한 가지의 실험을 제안하고 싶다. 아니, 아마도 이런 경험은 한번쯤 있을 확률이 높으므로 굳이 실제의 실험을 행하지 않고 사고실험으로 그쳐도 좋다. 그것은 최소한도의 교통비만을 가지고 집을 나가서 이 넓은 도시에서 홀로 하루라는 시간을 보내보는 것이다. 실제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가장 먼저 느끼게 되는 것은 이 넓은 도시에는 참으로 갈만한 곳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거리에는 수많은 건물과 상점과 공공기관과 종교시설과 영화관과 은행과 커피숍과 쇼핑몰들이 있지만, 우리를 반겨주는 곳은 그다지 많지가 않다. 기껏해야 도서관이나 대형서점이나 공원 정도일까. 그러나 도서관은 어서 이 도서관을 하루빨리 떠나고 싶은 수많은 무리 혹은 갈곳 없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로 인해 점령당한지 오래고, 대형서점은 점점 책을 읽을만한 공간들을 없애나가고 있으며, 공원마저도 긴 시간을 보내기에는 적당하지 않다(도심의 공원은 누구나를 위한 공간이라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공원은 누구나를 위한 공간이라고 이야기되지만, 그곳의 출입자격은 여러가지에 의해 암묵적으로 제한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당신이 양복을 차려입고 공원에 장시간 앉아있다면 딱딱한 나무로 된 벤치를 견뎌내는 것보다 누군가의 시선을 견뎌내는 일이 더욱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주머니에 현금을 가득 가지고 있다면 이야기가 꽤 다르다. 각종 다양한 상점에 들어가 이것저것 쇼핑을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영화관이나 문화시설에서 좋은 예술작품을 감상할 수도 있으며, 은행에 들어가 VIP고객 대접을 받으며 장시간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커피숍에 들어가 오랜시간 차를 마시며 책을 읽을 수도 있으며, 이도저도 귀찮다면 호텔이나 모텔같은 숙박시설에 들어가 잠을 청할 수도 있다. 즉 이 드넓은 도시 서울의 많은 곳은 출입자격을 명시적으로 혹은 암묵적으로 규정한다. 아예 돈이 없다면 출입자체가 가능하지 않은 공간도 있고, 어떤 공간들은 출입은 할 수 있되, 어떤 어색함, 빨리 나가줄 것을 요구하는 암묵적인 분위기, 자괴감, 비우호적인 눈초리, 물리적인 불편함등을 견뎌내야만 한다(예를 들어 요즘의 상당수의 은행들은 출입구에 안내원을 세워놓고 번호표도 뽑아주고, 어떤 업무인지도 물어보고 하는데, 그것이 어떤 '서비스'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감시'나 '걸러내기'를 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은행의 편의시설은 그 은행에 돈을 많이 예치한 고객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것이 이 사회에 어울리는 사고방식일 터이다). 다시 말해서 이 출입자격은 누가 결정하는가. 그것은 자본이 결정한다. 

아마도 그것이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저자 류신, 혹은 그의 분신인 직업과 아내를 갖지 않은 서른 일곱살 룸펜 구보가 서울 거리를 산책하기 위해 발터 벤야민과 소설가 구보씨를 끌고 들어온 이유일 것이다. 이 책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이 자본주의 사회의 잉여 구보가 하루동안 서울거리를 전전하는 이야기이다. 아니 이것을 이야기라도 불러도 좋을까. 작품에 대한 평론과 인문학적 단상과 창작된 소설과 저자의 실제경험이 혼재되어 있는 이 이야기 속에서 구보는 영등포에서 출발하여 경복궁, 서울광장, 롯데호텔, 세운상가, 홍대입구를 돌아 다시 서울의 강남으로 내려가 코엑스몰, 가로수길, 강남역을 거친다음 다시 자신의 본거지로 돌아간다. 즉 그가 돌아보는 곳은 소위 서울의 중심가들이다. 그리고 중심가라는 의미는 이 자본이 만들어내고 스스로 자라고 있는 도시 서울에서 가장 자본이 집약되고 있는 공간들이라는 의미도 된다. 아마도 그것이 발터 벤야민이 등장하는 이유이어야 할 것이며, 이 책이 그저 '서울 프로젝트'가 아니라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인 이유일 것이다.

아케이드(arcade)란 "원래 열주(列柱)로 지탱되는 아치형의 천장을 가진 구조물과 그것이 조성하는 개방된 통로"를 의미하는 말로서, 이 책에서는 "유리 지붕이 덮인 상점가를 위시해 유리 돔이 설치된 홀, 상점이 늘어선 지하도, 건물과 건물을 연결하는 지하 통로나 공중 가교, 투명한 차양이 설치된 노상 시설, 유리와 철골로 이루어진 건축물을 지칭하는 광의의 개념(p.11)"으로 사용됐다. 그리고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그의 생애 말년 13년 동안 19세기 초반 '세기의 수도'로 군림했던 프랑스 파리에 등장한 새로운 쇼핑 공간(아케이드)을 미시적으로 탐사함으로서 자본주의의 기원을 천착하려 했으며, 이를 '아케이드 프로젝트'라고 이름 붙였다(저자는 이 책에서 '파사주(passage)'라는 용어가 아케이드보다 더욱 적확하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니 이 책은 발터 벤야민의 사상과 개념을 빌어 이 드넓은 도시 서울을 지배하고 있는 다양한 유형 무형의 쇼핑 공간(아케이드)에 서려 있는 자본주의의 면면을 살피고자 하는 시도다. 아니 역으로 말해서 자본이 출입자격을 결정하는 이 서울의 공간들에 기어이 출입자격을 얻기 위해 발터 벤야민을 과거로부터 소환해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필요해지는 것은 발터 벤야민 외에 저자와 사상적으로 동행한 또하나의 인물,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등장하는 1930년대 경성 거리를 하릴없이 산책하는 소설가 구보씨다. 그리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소설가 구보씨라는 인물이라기보다는 그가 벌이는 행위, 즉 '산책'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공간에서의 미덕은 그저 단 두 가지, 즉 그저 빠르게 스쳐지나가거나, 아니면 자본을 소비하며 머무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현재의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공간들은 자본이 없는 자들은 어서빨리 스쳐지나가도록 하고, 자본이 있는 자들은 그들을 이 공간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산책은 이 두 가지에 모두 반하는 행위다. 산책은 조용히, 천천히, 혹은 유유히 공간안으로 들어가 공간 속에서 어떤 사유를 수행한 후 다시 그곳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유유히 빠져나가는 것이다. 그 사유는 개인적인 사유일수도, 공간이 연상시키는 어떤 작품에 대한 사유일수도, 혹은 다른 인문학적 사유일수도 있다. 즉 1930년대 식민지 현실 속에서 생활에 편입되지 않고 문학과 공간을 사유하던 소설가 구보씨와 2010년대 자본주의 현실 속에서 자본과 유리되어 공간에서 문학과 사유를 곱씹는 룸펜 구보는 그런 의미에서 상당히 닮아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이 식민지 현실에, 혹은 자본주의적 현실에 나름의 저항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 완전한 저항이나 급진적인 저항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보다는 양가적인 감정에 가깝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사실 그들은, 그리고 그와 거의 마찬가지인 우리들은 이 현실에 사로잡혀 있으며, 이 현실의 단물들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즉 예를 들어 아이러니하게도 스마트폰의 정보지상주의, 어떤 인간관계의 단절, 사유의 정지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이 스마트폰을 누구보다도 오래 손에 쥐고 있는 자들이며, 그것을 완전히 손에서 내려놓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각종 고가의 물건들을 파는 유리로 만들어진 진열대가 가득한 지하의 아케이드를 돌아보는 다음의 사유는 어떤가. 아...우리는 그 아케이드에 가면 결국 우울하게 나오게 될 자신을 잘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아케이드로 발걸음을 돌리고마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혹은 어쩌면 산책이 그런 것이 아닐까. 즉 우리가 그 현실을 완전히 거부한다면 굳이 그것을 '돌아보러' 나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케이드는 도취의 공간이자 우울의 공간이다. 아케이드는 지상의 빡빡하고 누추한 현실을 잠시나마 망각시켜 주는 판타스마고리, 즉 요술 환등의 성전이지만, 갖고 싶은 상품을 향한 리비도가 이 상품을 결코 소유할 수 없다는 각성과 꼼짝없이 독대하면서 우울이 생성되는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다. 소설 속 여인은 갈구한다. "저걸 가질 수 있다면, 황실의 여인들이 선택할 만한 저걸 가질 수 있다면, 나도 항성처럼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 것만 같다.(정미경 <호텔 유로, 1203>)" 환상과 현실, 매혹과 각성이 진자처럼 오가는 곳이 아케이드인 것이다. 아케이드의 쇼윈도는 '거리'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투명한 유리 뒤에서 명품의 특권적 지위와 행인 사이의 '거리(距離)'를 유지시킨다. (p.101)

그러나 소설가가 혹은 저자가 이 양가적 감정에 휘둘리는 누군가, 즉 어쩌면 당신을 등장시킨 것은 그를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스스로가 진자처럼 오가면서 이 물신이 지배하는 도시 서울을 기꺼이 걸어가고 있는데 누구를 비판하겠는가. 발터 벤야민이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통해 보고자 하는 것도 그것만은 아니었다. "벤야민은 대도시와 그 속에 매몰된 소비 대중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도 결코 유토피아적 희망을 끈을 놓지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신화된 인간의 욕망이 정치적, 혁명적 실천의 에너지로 전화될 수 있다는 꿈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p.268)" 그리고 저자 역시도 홀로 긴 시간 서울 거리를 산책하고 돌아온 구보와 그를 기다리는 지친 노모에게 작은 위안을 선사한 다음, 어떤 희망들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끝낸다. 그것은 공간에 매몰되지 않고 그곳을 꿋꿋이 산책하고 있는 산책자 자신, 혹은 수많은 '나'들을 긍정하는 것이며, 1930년대의 소설가 구보씨와도 이어지는 것이기도 하며("구보는 좀더 빠른 걸음걸이로 은근히 비 내리는 거리를 집으로 향한다. 어쩌면 어머니가 이제 혼인 얘기를 꺼내더라도, 구보는 쉽게 어머니의 욕망을 물리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작가가 인용한 다음의 문장과도 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희망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다. 사실은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었는데 걸어다니는 사람이 많아지니 길이 생긴 것이다. (루쉰, <고향>)"


덧 1.
사유의 기본은 세심한 관찰이다. 이 책은 적절한 인용도 인상적이지만, 세심하고도 집요한 관찰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구보는 맥도날드에서 고객에게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이 보이지 않는 매뉴얼에 충실히 따랐다. 시장이 반찬인지, 생각보다 맛있었다. 그러나 서둘러 먹을 수 없었다. '패스트푸드'라지만 먹는 과정은 매끄럽지 못하고 지지부진했다. 빵 두 조각이 힘겹게 덮고 있는 고기 패티와 야채 더미를 손에 쥐고 먹는 일이란 여간 힘들고 번거로운 작업이 아니었다. 포장지에 압사당한 야채들이 기필코 틈을 비집고 탈출에 성공하기 일쑤였고, 소스는 노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구보는 포장지 안으로 햄버거를 요리조리 돌려가며 가능하면 토핑을 떨어뜨리지 않고 남김없이 모두 씹어 심키려는 자신의 허기와 맹목적인 식탐에 비애를 느꼈다. 햄버거는 거인 같았고 그걸 감당하기에 자신은 난쟁이 같았다. 구보는 자기가 햄버거를 먹는 것이 아니라 햄버거가 자신을 집어삼킨 것 같은 이상한 기분마저 들었다. 햄버거 속 토마토가 먹잇감을 보고 날름거리는 표독한 독사의 혀 같았다. (p.125)

덧 2.
혹시 어쩌면 누군가 한명쯤은 이 묘사를 보고 한 영화를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정성일의 <카페 느와르>는 거의 이와 비슷한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한다. 그리고 이 영화 역시도 어쩌면 한 남자의 서울 유랑기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다.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것 중의 하나는 주인공 영수(신하균)를 계속 감시하는 것처럼 따라다니는 서울타워이다. 아마도 구보가 드넓은 서울을 돌아보는 와중에도 이 서울타워는 상당부분 그와 함께 했을 것이다. 마지막에 노모에게 돌아가는 것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차이가 있다면 마지막에 이르러 구보는 서울타워에 오르는 반면에, 이 영화에서는 노모에게 돌아온 영수를 여전히 서울타워가 굽어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이 영화 <카페 느와르>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비극 버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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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에스프리esprit다

The Book | 2014.02.04 15:44 | Posted by 맥거핀.
명작순례옛그림과글씨를보는눈
카테고리 역사/문화 > 문화일반
지은이 유홍준 (눌와,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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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유홍준의 책 <명작순례>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서화 49점을 중심으로 명작의 내력과 거기에 깃는 예술적 가치를 소개하는 책이다. 사실 이런 책은 읽을 때에는 좋으나, 리뷰를 쓰기에 가장 난감한 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떤 중심주제나 스토리가 없이 여러 미술작품을 나열하는 형식인 책의 구조도 그러하거니와 책에 있는 미술작품을 보는 나의 안목도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물론 안목 자체가 모자란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며, 이 책의 목적은 저자 유홍준 교수가 밝히고 있듯 나같이 안목이 부족한 독자에게 명작을 감상하는 아주 기초적인 안목을 길러주고자 함에 있기도 하다. 그러나 리뷰를 써야 하는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안타까울 수밖에 없는 것이, 어떠한 작품을 단지 글과 사진을 통해 2차적으로만 감상한 느낌인 데다가, 그마저도 안목이 떨어지는 자의 필터를 거친 거친 감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유홍준 교수는 나와 다르게 일생을 거쳐 한국미술을 감상하고 평가하며, 대중들에게 자신의 감상을 전달해 온 말 그대로 이 분야의 전문가이고, 그의 필터는 적어도 수없이 단련이 되었다는 점에서 범인의 필터와는 다르다. 그러나 아마 그의 고민도 결국에는 나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처럼 보인다. 즉 그 고민이란 이 좋은 작품들을 어떻게 전달할 것이며, 어떻게 읽는 이에게 이 감상을 조금이라도 덜 훼손시킨 상태에서 전달할 것인가라는 고민이다. 그런 그의 고민은 이 책의 서문에서도 절실히 드러나거니와 한편으로는 그가 여러 교양프로그램, 혹은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을텐데, 그것은 우리 역사 속의 여러 예술작품들을 다른 누구도 아닌 그 나라의 사람들이 알아보고 깊이 감상할 안목을 길러주기 위한 그 나름의 다양한 방책들일 것이었다.

예술작품의 감상을 전달하는 방법은 여러 방법이 있을 것이다. 어떤 작품의 작가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가 그 작품을 만든 배경은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고, 오로지 작품 자체에 천착하며 그 작품의 의미와 숨겨진 함의를 해석하고 찾아내어 전달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또 여러 작품들과 동시에 놓고 비교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며, 작품의 아쉬운 점이나 모자란 부분을 비판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어떠한 방법이든 간에 그것은 유홍준 그 자신이 많이 사용하기도 한 다음의 용어, 즉 추체험(追體驗)이란 용어로 집약할 수 있겠는데, 추체험이란 간략하게 말해서 타인의 체험을 자신의 체험처럼 느끼게 하는 것이고, 유홍준은 어떻게 하면 독자들이 추체험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유홍준의 체험의 정도와 독자들의 체험의 정도는 안목의 차이로 인해 결국 비슷한 수준에라도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홍준이 고민끝에 택한 실제적인 방법론은 약간은 우회적인데, 그것은 감상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상의 전단계를 전달하는 것이며, 그것은 유홍준 자신의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그의 감상도 결국 이런 지식의 집적에서 시작했을 것이므로 말이다).

그러나 내가 이 책에서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나의 작품 보는 안목이 아니다. 오히려 나의 작품 감상은 되도록 절제했다. 대신, 한 화가가 어떤 계기로 그림을 그렸고, 그 그림이 탄생하기까지 어떤 사회적·예술적 배경이 있었으며, 화가의 예술적 노력과 특징이 그림에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액면 그대로 친절하게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그림의 기본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독자 스스로 예술적 가치를 판단할 수 있도록 마음 쓴 것이다. (p. 4)

그래서 유홍준이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것은 작품의 기법상의 특징이나 역사적 의의, 혹은 예술적인 특질이나 인문적인 비평이 아니라 그 작품을 그린 작가가 누구이며,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그의 삶이 이 예술에 어떤 방식으로 반영되었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며, 이미 잘 알려진 화가의 경우에는 작품을 제작할 당시의 상황을 중심으로, 그리고 비교적 생소한 화가의 경우에는 간략한 전기를 에피소드 중심으로 소개하고 있다. 예를 들어 <달마도>로 유명한 연담 김명국의 경우 작가보다는 작품만이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그의 다양한 기행들을 소개하고(그는 조선시대 회화사의 3대 기인 중의 한명이다. 17세기 인조 때의 연담 김명국, 18세기 영조 때 호생관 최북, 19세기 고종 때 오언 장승업이 그들이다), 그가 조선통신사의 수행화원으로 일본에 갔을 때 널리 명성을 떨쳐 그림주문이 쇄도했던 일화 등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그의 명성을 듣고 왜인이 몰려들어 그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울려고까지 했다고 한다). 또한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단원 김홍도의 경우에는 그의 일생보다는 어떤 작품이 탄생한 배경에 더욱 주목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서원아집도>나 <기로세련계도>의 경우 각 작품의 탄생 배경과 작품 자체에 주목하여 비교적 세세하게 작품에 대해 논하며, 작품 자체를 조금 더 주목해서 볼 것을 주문하고 있다.

이러한 방법은 예술적인 감상법으로 말하자면 유홍준 그 자신의 글을 빌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는데, 이는 봉래 양사언의 글씨에 얽힌 '비자설(飛字說)'을 소개하는 대목에 나오는 이야기다(p.210~213). 그의 현판 글씨 중 가장 잘 써졌다고 자평하던 '날 비(飛)'자를 쓴 족자가 없어진 날이 그가 먼 곳에서 객사한 날과 일치한다는 기이한 이야기가 여기에 담겨져 있는데, 유홍준은 이것을 소개하며, 이는 양사언의 혼과 함께 그의 예술작품이 사라진 것이라고 해석하며, 예술론적인 화두를 던지고 있다. 즉 예술에 대한 고전적인 정의는 미적대상론(美的對象論)에 입각한 '자연의 모방'이다. 근대적인 정의로는 미적체험론(美的體驗論)이 말하는 '예술은 표현'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리고 현대미학에서는 미적상관론(美的相關論)에서 '예술은 이미지'라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양사언의 전설이 말하는 예술론은 무엇일까. 그것은 "예술은 혼(魂)이다."라는 말이며, 다른 용어로는 예술은 '에스프리(esprit)'라는 것이 유홍준의 주장이자 오늘의 예술가들에게 던지는 조언이다.

유홍준의 이 책에 담긴 글들은 그 자신의 주장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 그가 소개하고자 하는 것은 이 예술에 담긴 모방의 정밀도나 표현의 참신성이나 이미지의 감수성이 아닌, 그 예술가들의 혼이다. 그 예술가들의 어떠한 삶의 태도와 정신과 사상, 즉 혼이 이 그림을, 혹은 이 글씨를 낳게 했는가를 보라고 유홍준은 말한다. 그러므로 그는 양사언을 소개하는 글의 마지막을 "혼이 담기지 않은 작품은 예술이 아니다."라고 맺었는데, 나는 다음과 같은 문장도 추가하고 싶다. "예술가들의 혼을 보려하지 않는 것은 올바른 예술 감상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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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긍정

The Book | 2014.02.03 23:17 | Posted by 맥거핀.
지구의정복자우리는어디서왔는가우리는무엇인가우리는어디로가는가
카테고리 과학 > 교양과학
지은이 에드워드 윌슨 (사이언스북스,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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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인간이라는 종은 아주 오랫동안 자신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애써왔다. 언어학, 문학, 역사학, 법학, 철학, 비교종교학, 윤리학 등등의 소위 인문학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학문 분야는 물론이고, 사회학, 과학, 예술, 종교 등 여타의 다른 부분에서도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인간이라는 종이 가진 특질과 기원에 대해 이야기해 왔다. 그것은 인간을 수식하는 수많은 용어들의 범람에서 그 결과물의 일단을 살펴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호모 로퀜스(Homo loquens; 언어적 인간),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경제적 인간),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유희하는 인간), 호모 아르텍스(Homo artex; 예술하는 인간), 호모 파베르(Homo faber; 도구적 인간) 등등의 넘쳐나는 수식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넘쳐나는 설명들에도 인간이라는 이 특수한 종에 대해 설명하려는 시도들은 여전히 멈추지 않고 있는데, 그것은 한편으로 여전히 인간이라는 존재의 기원과 특성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것은 거의 영원한 난제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Edward Osborne Wilson)의 이 책 <지구의 정복자>는 이 영원한 난제에 도전한 또 하나의 시지푸스적 시도이자 사회생물학자가 내놓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기원과 특질에 대한 하나의 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윌슨의 화두는 한편의 그림이다. 고갱의 그림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이 질문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거의 모든 것을 뭉뚱그린 질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데, 보통 사람이라면 움츠러들고 말 이 거대한 질문 앞에서 오랫동안 사회생물학에 천착해 온 노학자는 조심스럽고도 거침없는 걸음을 내딛는다. 시작은 먼저 다음과 같은 질문이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이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 이 인간이라는 종을 이렇게 특수하게 만들었는가? 그리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인간이라는 종은 다른 여타의 종들과 다르다. 각종 기술과 도구를 사용하며, 서로 언어로서 소통하고, 상당한 지능을 소유하였으며, 사회를 이루고, 때로는 협력하고 경쟁한다. 보다 생물학적으로 말하면 인간, 즉 호모 사피엔스는 생물학자들이 진사회성 동물(eusociality animal)이라고 부르는 것에 속한다(p. 27). 집단의 구성원들이 여러 세대로 이루어져 있고 분업의 일부로서 이타적 행동을 하는 경향을 가진 동물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인간을 이런 존재로 만들었을까. 기독교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말하면 되겠지만, 사회생물학자인 윌슨이 내놓은 답은 다르다.

그의 답은 인간이 몇 가지의 선적응(preadaptation)을 거쳐 이러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첫번째 선적응은 육지에 살았다는 것이었고, 두번째 선적응은 지구 역사상 육상 동물 중 소수만이 갖춘 수준의 큰 몸집이었다. 이 두 가지 선적응은 불을 사용할 수 있다는 큰 이점을 가져다 주었는데, 기술의 발전에는 불의 사용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의 선적응만으로는 부족했는데, 그 다음의 선적응은 사물을 쥐고 조작할 수 있도록 진화한 부드럽고 납작한 손가락이 달린 움켜쥐는 손의 출현이었다. 이는 기술의 발달을 촉진할 뿐더러, 지능의 발달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 다음의 선적응은 혹은 그로써 일어난 결과는 상당한 양의 고기가 포함되는 쪽으로 식단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이는 한편으로 다른 여러가지 것과 연관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뇌를 발달시킬 정도의 충분한 에너지를 고기에서 얻을 수 있었다는 일차적인 사실 외에도 다른 중요한 변화를 불러왔다. 그것은 '무엇을' 사냥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사냥하는가의 문제였는데, 고기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안전한 보금자리와 사냥하는 동안 그 보금자리를 지켜줄 협력이 필요했고, 이는 고도로 조직화된 집단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이 '고도로 조직화된 집단'은 다른 말로 '진사회성 진화'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진사회성 진화는 다음과 같은 일련의 단계들을 포함한다. 윌슨 박사는 개미, 흰개미 등 진사회성을 갖추었다고 생각되는 다른 여러 (무척추) 동물들을 살펴봄으로서 이 조건들을 밝혀내고 있는데, 이는 집단의 형성, 집단을 치밀하게 만드는 선적응 형질 조합의 출현, 특히 그 중에서도 가치 있고 방어 가능한 보금자리(그리고 그에 대한 의존), 집단의 지속성을 빚어내는 돌연변이의 출현 등을 포함한다. 곤충들의 경우에는 로봇같은 일꾼과 같은 창발적 형질들이 '집단 수준의 선택'을 통해 군체의 생활사와 사회 구조에 변화를 일으키며, 때로는 기이한 초유기체까지 발전하기도 한다(즉 집단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행동한다. 예를 들어 개미 집단의 경우 어떤 개미는 계속 번식기능만 담당하고, 어떤 개미는 계속 먹이를 구해오는 데에만 집중한다). 인간의 경우에는 이와는 상당히 다른데, 인간에게 있어서 이러한 집단 수준에서의 선택은 유전적 과정과 문화적 과정의 결합이다. 

이는 우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의 전환이기도 하다. 즉 같은 진사회성을 갖추었으면서도 우리 인간과 곤충을 갈라놓는 지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윌슨이 유전자-문화 공진화(gene-culture coevolution)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이는 아주 조악하고 간단하게 말해서 유전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가 별개의 과정으로 이루어지거나 한쪽이 다른 한쪽을 억제하거나 뒤집는 것이 아니라, 그 두가지가 상호작용을 일으키며 서로를 발전시켜 나간다는 의미이다. 그 대표적인 예는 성인의 젖당 내성 발달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전의 모든 인류에게서는 우유를 소화할 수 있는 효소인 락타아제는 유아에게서만 생산되었다. 그러다가 9천에서 3천년 전에 북유럽과 동아프리카의 다양한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목축이 발달했을 때, 성인이 되어도 우유를 마실 수 있는 락타아제를 계속 생산하는 돌연변이가 문화적으로 퍼졌다. 또한 그것은 새로운 주요 식량 원천으로서 소의 가축화를 가능케했다. 즉 이 돌연변이가 널리 퍼질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조직의 유지와 발전에 이로웠기 때문이다(다른 집단보다 성인이 우유를 마시는 집단이 집단의 유지와 발전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전자-문화 공진화는 근친상간의 금지, 색깔의 인식, 언어의 발달 등 여러 분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즉 우리가 언어를 더 잘 배우고, 특정의 색을 더 잘 인식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어느 정도는 유전자가 문화적 발달에 따라 진화했기 때문에, 혹은 문화가 어떤 유전자를 선택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유전자-문화 공진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것의 전제이자, 이 책의 일종의 분기점, 혹은 논란지점이다. 즉 유전자-문화 공진화에는 그것이 집단의 유지와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유전자의 변이가 받아들여진다는 것이 어느 정도는 전제로 깔려있다. 즉 이것에는 집단 수준의 이타주의적 본능이 조금은 전제되어 있다. 그것은 윌슨이 다수준 선택(multilevel selection)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는 개별 구성원의 형질을 표적으로 삼는 선택압과 집단 전체의 형질을 표적으로 삼는 다른 선택압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구성된다(p. 72). 다시 말해서 인간은 각각의 개체 수준에서는 이기적인 방식으로 유전자를 진화시킬지 몰라도 전체 집단 수준에서는 이타적인 방식으로 유전자를 진화시킨다고 윌슨은 말한다. 바로 그것이 한편으로는 인간이 개미나 흰개미 등의 다른 진사회성 곤충과 다른 점일 것이다. 왜냐하면 개미나 흰개미의 경우에는 집단이 거의 하나의 초유기체로 보일 정도의 극단의 이타성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개체 수준과 집단 수준의 선택압이 다르며, 그것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거나 혹은 충돌한다. 그리고 이러한 다수준 선택에서의 상호작용과 충돌이 도덕, 종교, 창작예술 등등의 기원과 발전에 크게 연관되어 있다고 윌슨은 보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은, 혹은 인간의 유전자는 개체 수준에서는 약간은 이기적일 수 있으나 집단 수준에서는 결국 이타적이라고 윌슨 박사는 주장한다. 그리고 그러한 '공동체를 위한 이타적 집단 선택'이 결국 이 인간이라는 종이 지구를 지배한 원동력이라고 그는 본다. 이는 인간의 진화가 '혈연의 생존을 위한 이기적 본능의 결과'라는 그간 학계를 지배했던, 그리고 그 자신이 그동안 주장했던 혈연선택의 관점을 뒤집는 것이기도 하다(이 포괄 적합도 및 근친도 개념에 기반한 혈연선택에 대해서는 솔직히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절망하고 있었는데, 해설을 한 최재천 교수가 "논쟁의 핵심을 이루는 적합도와 근친도 개념은 수많은 학자들의 오랜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의조차 하기 어려운 개념으로 남아 있"다고 하셔서 힘을 얻기로 했다. 이 분야의 권위자인 최교수가 그렇다는데 내가 뭐라고 왈가왈부하겠는가. 다만 그의 설명을 듣고 있자니 윌슨의 이 다수준선택에 기반한 자연선택으로의 회귀는 급작스러운 반동이라기 보다는 예정된 회귀이며, 그것들이 그렇게 완전히 대립되는 것만으로는 볼 수 없다는 인상이 들었다).

그러므로 그가 보는 우리의 미래, 즉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에서 그는 누구보다도 긍정적이다. "그러니 이제 내가 지닌 맹목적인 믿음을 고백해야겠다. 우리가 몹시 원한다면, 22세기쯤이면 지구는 인류의 영원한 낙원이 되거나 적어도 그 초입에 도달할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p. 363)." 그는 우리를 이렇게 만든 원동력이 공동체를 위한 이타적 선택이며, 그 이타성이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혹 인간은 개미의 군체와 비슷하게 될까). 그러나 윌슨의 이 주장에 그대로 올라타기에는 아직 이르다. 이 책을 통해 제기된 물음들이 계속 새로운 논쟁을 촉발시키고 있으며, 명확한 결론은 아직 우리 손에 쥐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질문과 가능성을 검토해보는 것일 것이다. 이 노학자의 통섭의 결과물들도 결국 가능성 있는 하나의 추론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아마도 노학자가 우리에게 가지기를 권하는, 과학에 기반한 태도의 하나일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고자 할 때 우리에게 역시 필요한 것은 긍정적인 태도와 열린 마음이다. 나는 다만 이 노학자의 긍정성에 나의 소박한 긍정을 더하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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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커의 질문

The Book | 2013.12.26 23:32 | Posted by 맥거핀.
플루토크라트모든것을가진사람과그나머지
카테고리 경제/경영 > 경제일반
지은이 크리스티아 프릴랜드 (열린책들,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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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플루토크라트'라는 용어는 조금 생소하다. 플루토크라트(plutocrats)는 경제적 권력, 그리고 동시에 정치적 권력을 손아귀에 쥔 경제사회구조의 최상위층을 지칭하는 말로, 이들은 여러가지 비슷한(그러나 매우 다른 느낌을 주는) 이름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조금 부정적인 의미를 담아서 부자(rich) 혹은 '특권계층'이라고 할 수도 있고, 조금 더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아 강도 귀족(robber barons)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물론 부정적인 의미의 다른 이름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슈퍼엘리트, 혹은 '1퍼센트'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가. 사실 많은 것은 이름이 좌우하는 법이다. '적대적 인수합병'이라고 하면 무엇인가 음험한 기운을 풍기지만, 조금 돌려서 '사모펀드'라고 하면 왠지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좋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저자가 굳이 '플루토크라트'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그 어느 것에도 휘둘리지 않겠다는 의미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니까 일단 무엇인가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행위를 지칭하는 말로 '중립적인 서술'과 같은 용어를 쓸 수도 있다.

아무튼 간에, 이 책은 결국 '플루토크라트'들이 어떠한 사람들인가, 그들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점을 보여주는 책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플루토크라트들은 우리의 일반적인 예상을 조금은 벗어난다는 점이다. 이런 플루토크라트들을 묘사한 영화나 책들이 보여주는 어떤 일반적인 이미지들, 혹은 플루토크라트가 아닌, 99%, 혹은 99.9%의 나머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들에 대한 어떤 믿음들이 있다. 그것은 예를 들어 이들은 매우 부유하지만, 가정은 온갖 불화로 가득차 있으며, 성격은 괴팍하나 내 여자에게는 따듯하고, 돈이 많아 허구헌날 빈둥거리며(드라마의 재벌가 아들들은 도대체 일은 언제하는가), 정신적으로 어떤 상처를 가진 인물들이라는 어떤 이미지, 혹은 믿음들 말이다. 즉 이 책에서 말하는 '행복한 농부와 불행한 백만장자'의 패러독스 말이다. 그것은 이미지이며, 동시에 플루토크라트가 아닌 사람들이 세상을 견뎌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저들은 저렇게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지만, 사실은 불행할 거야, 라는 믿음. 그러나 그것은 결국 아무런 확신이 없는 믿음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을 이 책은 보여준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들 중 많은 이들은 플루토크라트가 아닌 이들에 비해 더 똑똑하고, 더 신념을 가졌으며, 더 일을 많이 하고, 어쩌면 더 정신적으로도 건강하고, 무엇보다도 더 행복하며, 심지어는 도덕적으로도 더 나은 인간이라고 판단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물론 도덕을 기부액으로만 판단한다면 말이다).

즉 이 시대의 플루토크라트들은 예전의 부자들처럼 부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부자인 자들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의 도금 시대(Gilded Age), 즉 산업혁명의 수혜를 받은 신흥 백만장자들이 급속도로 나타나던 시대만 하더라도 새로운 기술문명의 혜택을 받은 자들과 기존의 왕가, 귀족 세력이 뒤섞여 있었으나, 지금의 쌍둥이 도금 시대, 즉 세계화와 기술혁명과 워싱턴 컨센서스(로날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 등의 친기업 정책)의 혼합으로 탄생한 신흥 플루토크라트들은 일하는 부자이며, 그들은 이자, 배당금, 임대료 등 자본소득으로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급여 소득, 그러니까 일해서 받는 돈으로 플루토크라트가 된다. 즉 오늘날의 플루토크라트들은 아버지가 물려준 부동산 등에서 나온 임대소득과 정치적 권력을 적절히 조합하는 등의 방식, 혹은 단지 자본을 축적하여 '돈으로 돈을 먹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버드의 금융관련 학과를 졸업하여 일찌기 월스트리트에 들어선 다음, 자신의 아이디어와 당대의 기술혁신을 적절히 조합하여 결국 투자회사의 CEO에 오르거나, 자신만의 벤처회사를 여는 사람들이다. 즉 이들 중의 상당수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좋은 교육을 받았고, 당대의 기술혁신이 가져오는 새로운 분야를 가능성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남들보다 더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신흥 시장들을 적절히 공략하며, 세계화의 이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즉 이들이 플루토크라트들이 된 것은 어느 정도는 이들이 남들보다 뛰어났기 때문이다, 라는 것이 이 책의 하나의 관점인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에는 몇 가지 질문, 혹은 잔상이 따른다. 잔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렇게 이야기하면서도 한편으로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이 책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플루토크라트들은 일단 플루토크라트가 되면 비슷한 생활방식과 비슷한 문화를 공유하지만, 그들이 플루토크라트가 된 이유 자체는 훨씬 더 다양하기 때문이다. 위에 든 월스트리트의 루트나 벤처기업의 루트도 있지만, 새로운 기술을 발전시켜 시장전체에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방식이 아닌, 지대 추구(rent-seeking)와 같이 단지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장소에 있었기 때문에 플루토크라트가 된 사람들도 있고, 권력층에 깊숙이 밀착하고, 보다 착취적인 방식이나 혹은 거의 범죄에 가까운 방식으로 부를 축적한 플루토크라트들이 있다. 즉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모든 플루토크라트들의 공통점은 사실 이것 밖에는 말할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것이란, 이들은 모두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가능한한 놓치지 않으려 했으며, 그들에게는 동시에 (아주 큰) 운이 따랐다는 사실 말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본다면, 이들을 일괄적으로 재단하는 것은 상당히 어리석은 일이다. 이들은 어떤 이미지가 덧씌워진 것처럼 악마나 악인들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회에 큰 기여를 하고 있는 영웅들도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플루토크라트들이 큰 영향을 가지고 있는 이 시스템은 이들에게 쉽게 어떤 이미지를 씌우려한다. 예를 들어 카네기, 록펠러 같은 이들이 위인의 목록에 들어가 있는 것이 과거의 방식이라면, 백만장자가 지구를 구원하는 배트맨이나 아이언맨의 이야기는 보다 현대적인 방식이다. 물론 현실에서라면 이들의 착취보다 이들의 기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실제로 이들 플루토크라트들의 상당수는 기부와 자선에 큰 뜻을 가진 인물들이기도 하다. 단지 아이러니한 것은 이들은 기부를 하지만, 왜 그 기부가 필요한 이들이 탄생하였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거나, 그것을 애써 무시한다는 사실이다. 유명한 주교의 말대로 누군가에게 빵 한덩이를 주면 훌륭한 성직자가 되지만, 그들에게 왜 그것이 필요한지에 대해 알려고 하면 빨갱이가 될 뿐이다.) 이들은 단지 그 나머지 사람들 모두와 동일하게 돈을 벌려고 노력하는, 탐욕을 가진 자본주의의 인간들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 즉 그들이 사실은 우리와 동일하다,는 관점에서 보면 다음의 질문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그 플루토크라트들은 누가 제어하는가, 즉 CEO의 월급은 누가 어떻게 결정하는가, 혹은 배트맨, 당신은 도대체 누가 감시하지,라는 조커의 질문. 그러나 현재대로라면 이들을 제어할 어떠한 안전장치도 튼튼하지가 않다. 영화 속 배트맨은 너무나도 착해서, 혹은 너무나도 초인적이어서, 스스로의 욕망을 제어할 수가 있었지만(영화 <다크나이트>는 이 관계의 아이러니를 잘 보여준다), 현실의 배트맨들은 그렇지가 않다. 그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들이 보통의 우리와 동일하기 때문에, 즉 그들이 '슈퍼히어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보다 튼튼한 안전장치, 보다 튼튼한 자물쇠가 필요하고, 그것은 보다 '플루토크라트가 아닌 나머지 사람들'의 목소리가 반영된 정부의 정책, 혹은 행동에 의해서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은 보다 큰 차원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 다음의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최근 스위스에서는 회사의 최고경영자의 임금이 그 회사의 최저임금의 12배를 넘지 못하게 하는 '1대12법'이 국민투표에 부쳐졌다가 결국 부결되었다. 그 부결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그렇게 함으로써 스위스의 수많은 기업들이 해외로 나갈 것이고, 그로 인해 경제가 침체에 빠질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책에서도 이야기하고 있지만, 오늘날의 세계화는 자본과 기술을 자유롭게 이동시키고 있으며, 한 국가 내에서만 사업을 유지하는 것은 (플루토크라트의 관점에서 보면) 더할 데 없는 어리석은 일이 되었다. 즉 플루토크라트들이 세계 시민으로서 그 번영을 누린다면, 그것의 대척점에 있는 사람들은 반대로 세계 시민이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상태에 빠져있다. 다시 말해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쳤던, 마르크스의 호소는 공산주의가 하나의 실패를 보여준 지금에도, 다른 의미에서 여전히 유효하다는 말이다. (책에서도 말하지만, 이 극도의 불평등이 완화되었던 도금시대와 쌍둥이 도금시대의 사이에는 강력한 공산주의의 위협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마르크스라는 인물은 엘리트 계급이 그들의 재산을 기꺼이 나누도록 자극했던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즉,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두려움이 개혁을 향한 가장 강력한 동기로 작동했던 것이다. 볼셰비키 선봉대가 권력을 장악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 노동 계급에게 정치적 발언권과 사회적 안전망을 어느 정도 보장해 주는 편이 더 나은 선택이었다. (p.425)" 이 문장을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덧.
다시 책으로 돌아오자면, 예를 들어 이 책의 다음과 같은 칭송을 보면서 이 책의 어떤 '중립적인 서술'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좌파 진영의 몇몇 비평가들과 달리, 프릴랜드는 부자들을 헐뜯지 않는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중립적인 서술 방식은 이 책의 주장을 무시하기 어렵게 한다. - <USA 투데이>"  중립적인 서술이란 늘 위험하고, 동시에 과연 그것이 가능한지 늘 되묻게 만든다. 그것은 물론 책을 읽는 우리들이 대체로 중립적이지 않기 때문인데, 이 책을 읽는 내 관점에서는 이런 중립이 무너진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꽤 많았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자. "프린스의 해고는 타당했다. 그가 리더로 있는 동안 시티그룹은 서브프라임 시장에 대한 노출 수위를 높였고, 기존 스와프 상품들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신규 신용부도스와프를 더욱 확장해 나갔다. (중략) 물론 음악이 나올 때는 춤을 춰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음악이 멈췄을 때, 앉을 자리가 없는 사람이 바로 패배자이다. (p.263)" 이 대목은 혁명(여기서의 혁명이란 흔히 말하는 혁명이 아니라, 돈을 벌 기회로서의 '혁명'이다)에 대처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리더들의 실패를 조명하며 2007년 시티그룹의 CEO였던 척 프린스의 실패를 그 하나의 예로서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이 책에는 이처럼 돈을 벌 기회를 놓친 실패자, 혹은 패배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이것이 단지 실패와 패배의 이야기로 끝날 부분인가. 그 신용부도스와프는 얼마나 수많은 사람들을 거리로 나앉게 만들었고, 심지어는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만들었는가. 그러나 이 책의 많은 부분은 그저 이들을 실패나 패배로 규정지을 뿐이고, 이 패배자 이면의 고통받는 피해자들, 그러니까 이들 때문에 큰 고난에 빠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문제는 이들의 패배나 실패가 아니라, 영화 <월스트리트>에 나온 고든 게코의 말처럼 "누가 아주머니의 돈을 가져다 쓴다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것", 그것이 문제가 아닌가(이 책은 몇몇 부분에서 이 영화 <월스트리트>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도리어 그 뉘앙스를 보면 약간 조롱에 가까운 것 같다. 그것으로부터 돈을 더 벌 기회를 놓쳤느니 하면서 말이다). 이러한 '비즈니스 프렌들리'한 관점은 곳곳에서 나오는데, 예를 들어 253 페이지에서도 중국의 라이창싱이나 러시아의 호도르콥스키 같은 비리로 얼룩진 갑부들의 예를 들며, 이것을 단지 '최상류층의 불안정성'이라고 표현하지만, 이것이 단지 그런 언급으로 끝날 문제인가(물론 이 사건들이 일종의 본보기를 보이는 것에 불과하거나, 일종의 권력다툼이라고 해도 말이다).
 
어쩌면 저자의 경력이나 이력으로 볼 때 이 서술들에서 어떤 중립을 찾는 것은 난센스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어떤 글로벌 포럼에서 사회를 맡고, 누군가와 점심을 먹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레 내세우며, 각각의 등장하는 플루토크라트들의 이력을 빼놓지 않고 적절히 인간미를 담아 소개하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워싱턴 포스트>, <파이낸셜 타임스>에 기고하고, <파이낸셜 타임스>와 <글로브 앤 메일>의 부편집장을 지낸 저자의 이력이야말로, 아마도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마셜 효과(일종의 낙수효과. 즉 플루토크라트의 근처에 있으면 콩고물을 얻어먹게 된다는 말. 그러나 콩고물이 묻으려면 그만큼 가까이에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의 한 예에 불과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뉴욕의 한 논픽션 베스트셀러 작가는, 문학 쪽에서 활동하고 있는 가난한 친구들에게 자신의 성공비결은 기업인들이 대서양을 건너는 비행기 안에서 읽을 수 있는 책을 쓰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종종 들려준다고 한다. (p403.)" 그런데 '그 비행기 안에서 읽을 수 있는 책' 중에 이 책도 분명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아..그리고 <파이낸셜 타임스>는 이런 칼럼을 가끔 싣는 잡지이다. 이렇게 충실하게 재인용을 해주는 '조선'의 친절함을 보라. 그리고 또 하나, <파이낸셜 타임스>의 부편집장 출신의 저자의 책이 2012년 <파이낸셜 타임스>지 선정 '올해 최고의 책'에 선정되었다고 광고하는 것은 개그인가? 

중간에 2장부터 5장까지가 거의 지루한 나열(플루토크라트 영웅전)로 채워지고 있다는 단점(개인적으로는 책의 시작과 끝, 즉 1장과 6장만 읽어도 이 책을 이해하는데 거의 큰 문제가 없다고 본다)은 넘어가더라도 이 얘기는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다. '열린책들'에서 출간된 이 책은 그 출판사의 다른 책들이 그러하듯이 자체적인 문장부호 표기법을 쓰고 있는데, 예를 들어 따온 말은 홑낫표(「」)를, 그 안에서 다시 따온 말은 꺾은 괄호(<>)를 쓰는 등의 표기법이 그러하다(또 그 안에서 강조하는 말은 두 겹 꺾은 괄호(《》)를 쓰고 있다). 이러한 표기법은 영화 제목을 꺾은 괄호로 쓰고, 출판물이나 잡지를 홑낫표로 쓰는 등의 기존표기법과 맞물려 글을 상당히 어지럽게 만든다. 왜 '열린책들'만 이런 표기를 고집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혹여 그렇게 쓴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표기법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를 위해 '일러두기' 등을 통해 간단한 설명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덧 2.
이번 서평단의 두 책 <일베의 사상>과 <플루토크라트>는 내가 관심이 없던 세계, 혹은 나와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던 세계를 다루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어서 흥미로웠다. 솔직히 <일베의 사상>을 이 책보다 더 열심히 읽은 것은 사실인데, 그것은 책의 흥미도의 문제라기보다는, 단지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플루토크라트가 될 수 없지만, 대신 당장 오늘밤에라도 일베충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상을 본다고 해서, 그것을 피할 수 있다는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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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의 일상화가 아닌 일상의 축제화

The Book | 2013.12.17 17:09 | Posted by 맥거핀.
일베의사상새로운젊은우파의탄생
카테고리 정치/사회 > 사회학
지은이 박가분 (오월의봄, 2013년)
상세보기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박가분의 책 <일베의 사상>은 일베, 혹은 일베라는 어떤 현상에 대해 다루고 있다. 따라서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쓰기가 조금은 조심스러운 면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일간베스트저장소(이하 일베)'라는 사이트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모른다'라고 하는 것은 '그것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는 의미와는 조금 다른 것으로 굳이 따지자면 '하지 않는다'와 비슷한 의미가 될 것인데, 과연 어느정도까지를 '안다'라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제쳐 두고라도, 아무래도 들어가서 글 몇 개 본 정도로 일베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란 곤란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비유를 하자면 지금 상황은 영화를 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어떤 영화를 본 평론에 대해 어쩔 수 없이 댓글을 남겨야 하는 상황인데, 아무래도 이런 댓글은 무엇인가 방어적이 될 수 밖에 없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적대적 호수성의 희생양이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이 책은 '일베의 사상'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아마 상당수의 사람들은 이 제목만으로도 무엇인가 의아할 것 같은데, 도대체 일베에 '사상'이라고 불릴만한 것이 있는가, 혹은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는가,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저자는 이 책의 제목을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의 사상>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임을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적어도 내가 아는 상당수의 인터넷 커뮤니티, 혹은 현실의 집단에서는 일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거의 금기시되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물론 여기서의 금기란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에 대해 조롱하거나 비난을 퍼붓는 것은 거의 일상화된 수준에 가깝다). 예를 들어 방송에서 (실수이든 다른 무엇이든) 일베의 용어를 쓴 아이돌 가수가 사과문을 올리고, '일밍아웃' 같은 용어가 있는 것은 그런 풍경을 어느정도 보여준다고 보아야 할 것인데, 그것의 이면에는 일베를 어떤 '쓰레기'와 비슷하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그런 입장에서라면 일베는 매우 더러운 무엇인가가 모여 있는 어떤 곳이며, 굳이 들출 필요가 없으며, 곧 폐쇄시키는 것이 마땅한 무엇인가이다. 예를 들어 저자도 이 책에서 조지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를 이야기하며, 코끼리, 그러니까 보수주의의 프레임과 마찬가지로 일베도 생각할 필요가 없는, 혹은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 관점에서라면 문제는 보다 간단할 수 있다. 쓰레기는 버리거나, 어딘가에 묻어두면 된다. 예를 들어 인터넷 사이트라면 그 사이트를 폐쇄하거나, 법적인 제재를 가하거나, 접속을 차단하거나 하는 등의 방안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는 것이, 이것이 쓰레기라고 했을 때, 그것은 썩지 않는 쓰레기라는 점이다. 즉 썩는 쓰레기라면 그것을 어딘가에 버리면 언젠가는 한낱 유기물로 돌아가겠지만, 이 괴이한 쓰레기는 썩지 않고 계속 엄청난 악취를 풍기는 데다가, 때로는 사람에게 달려들기도 한다. 다시 인터넷의 문제로 돌아가자면 아마도 이 일베를 없애거나, 제재를 가하거나 한다면 분명히 비슷한 다른 무엇인가의 형태로 분명히 나타날 것이라는 이야기이다(오백원 건다). 그러니 적어도 이것이 현재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고, 궁극적으로 사라져야 할 것이라는 점에 동의한다면, 그것을 없앨 수 있는 다른 방안을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의 시작 방법 중에 한 가지는 이 책처럼 그것에 내재되어 있는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이 될 것이다. 즉 이것이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길래 안 썩지,하고 보는 것이다. 혹은 조지 레이코프처럼 굳이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책을 쓰는 것이다(물론 '코끼리'를 정말로 쳐다보기도 싫다면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굳이 말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박가분은 인터넷 논객답게 마지막에 자신의 이야기를 '세줄 요약'의 형태로 제시한다. 그것은 첫째, 일베는 2002년부터 시작된 촛불의 사상을 계승하며(이 말이 정 불편하다면 일종의 거울상이라고 할 수도 있다), 둘째, 일베는 현실의 국가, 현실의 요구를 단념하고 인터넷에서의 인정투쟁 방식을 현실로 '끌고 오는(이 말이 특히 중요하다)' 새로운 유형의 젊은 우파이며, 셋째, 이러한 일베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광장, 즉 인터넷에 모인 사람들이 각자의 일상적인 공간에서 자신의 이상을 작게나마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은 저자의 일종의 제언이기 때문에 제쳐두고라도 첫째와 둘째, 특히 첫째에서 고개를 갸웃거릴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일베가 이 촛불을 든 내 손에서 시작되었다고, 나한테서? (물론 모든 쓰레기는 쓰레기가 아닌 것에서 시작된다. 처음부터 쓰레기였던 것은 없다. 쓰레기는 결국 버리는 자, 그 자신이 애초에 만들어낸 것이다.)

직관적으로 보이듯이, 이 첫째와 둘째, 셋째는 각각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야기한다. 이 미래, 즉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공간을 만들어내기 위해 인터넷의 인정투쟁을 현실로 끌고들어오는 현재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며, 이 현재는 과거, 그러니까 2002년부터 시작된 촛불에 의해서 배태되었다. 즉 박가분의 방식은 일종의 거슬러오르는 방식이다.  마루야마 마사오가 일본의 사상을 살펴보기 위해 그 기원을 거슬러 올랐던 것처럼, 아니 썩지 않는 쓰레기가 왜 썩지 않는지 보기 위해서는 그것이 만들어진 공장을 살펴봐야 하는 것처럼, 박가분은 그 기원을 거슬러오르는 작업을 시작한다. 물론 가장 가까이에, 즉 시작지점에 있는 것은 디시인사이드의 인기자료를 저장해 놓는 데이터베이스에서 출발했던 일간베스트저장소, 그러니까 일베지만, 그 이전에는 디시, 혹은 디시와 비슷한 다른 인터넷 커뮤니티들이 공유했던 어떤 것들이 있고, 그것은 예를 들어 부정과 긍정의 양식이 공존했던 증여와 답례의 호수성(짤방이나 콘텐츠를 공유하는 것이 한 예이다), 인정투쟁과 계급투쟁, 혹은 정상국가에 대한 열망과 같은 것들이 그와 같은 것들이다.  

즉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일베의 어떤 행동양식은 하루아침에 나타난 것이 아니다. 자생적으로 자라난 수많은 인터넷 커뮤니티의 어떤 행동양식이나 공유하는 무의식이 일베의 행동양식의 초석이 되었고, 일베는 그것을 더 위악적으로 변형시켰을 뿐이다. 아니 어쩌면 변형이라기 보다는 집적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일베라는 것은 집적된 데이터베이스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집적은 여기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촛불도 결국은 집적의 한 형태이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우파의 집적이 일베라는 것으로 나타났다면, 좌파의 집적은 촛불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2002년에 시작된 촛불은 현실의 정치인 노무현을 탄생시켰으나 노무현 정권은 궁극적으로 촛불의 의미를 담아내는 데 실패했다(극단적으로 말하자면 2002년의 반미정서는 이라크 파병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실패한 무엇인가는 두 가지의 형태로 나타났다. 하나는 다시 한번 반복하는 것, 즉 2008년의 촛불이다. 그러나 이것마저 미완이었고, 이것은 곧 일종의 그 거울의 형태, 혹은 전향자를 만들었다. 그것이 곧 일베이다. 

물론 이것은 거친 도식화이고, 일베의 모든 것이 일종의 '전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며, 이는 촛불에 책임을 묻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전향의 형태가 그렇듯, 전향자와 전향하지 않은 자들은 공유하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일베가 감성적인 이상주의를 비웃으며 '몰이상의 이상'을 추구했다면, 촛불은 중심에 구속받지 않으며 즐기면서 외치고 싶은 것을 외친다는 '몰이상'을 공유했으며, 일베가 인터넷의 인정투쟁을 현실에 끌어왔다면, 촛불 역시 자신들의 목소리를 국가가 들어달라는 인정투쟁의 한 형태였다(물론 이 부분은 촛불의 형태를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서 논란의 여지가 많은 부분이라 생각한다). 또한 그 정상국가의 양태는 다를지언정 그들은 여전히 각자 다른 의미에서 정상국가가 도래하기를 꿈꿨다. 즉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결국 국가를 넘어서지 못하고 국가의 언저리에 머물고 있었다. 그래서 일베는 이러한 것들, 즉 과거의 인터넷 무의식과 촛불에 대한 반동이 뒤죽박죽 얽혀 있다. 그들의 최종의 정언 명령, 즉 '인터넷의 방식으로 다같이 동물이 되자'는 것은 집밖으로 촛불을 들고나온 촛불집회에 대한 반동과 과거인터넷의 행동양식이 결합되어 있으며, 다른 일베의 행동양식들, 그러니까 팩트의 (나름의) 논리적 정합성을 찾는 행위(누군가의 글을 반박하기 위해 그의 과거 글을 논박의 재료로 삼는 태도와 같은 것이 일례이다. 이른바 '팩트'를 찾는 일베 유저의 태도는 일베충을 몰아내기 위해 그의 과거글을 찾는 다른 커뮤니티의 자세와 통하는 점이 있다), 혹은 타인혐오(와 자기혐오)에 깃들여 있는 것들도 이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즉 이는 무의식의 계승과 촛불(로 대변되는 무엇인가)에 대한 반동이 결합되어 있는 일종의 정념덩어리인 것이다.

물론 다시 강조하자면 결국 이 모든 것, 즉 과거로 거슬러오르는 것은 미래를 끌어내기 위해서 하는 몸부림이다. 그리고 그 미래란, 일베라는 것을 없애지는 못해도, 적어도 현재의 어떤 형태에서 바꾸기 위함이다. 다시 비유로 돌아가면 썩지 않는 쓰레기에서 썩는 쓰레기로 바꾸는 과정이다. 그리고 저자의 분석대로라면 그 기원에서 보게 되는 것은 쓰레기를 만들고 있는 나의 손, 촛불을 든 나의 손, 혹은 촛불의 대의에 일정부분 공감한 나의 모습이다. 이것은 위험한 끝맺음일까.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쓰레기를 버린 사람을 잡아 족치려고 애타게 찾아 헤맸지만, 그것이 결국 나라면, 문제는 더 간단할 수 있다. 내가 안버리면 되니까. 물론 저자가 제시한 해결책(위에 셋째)은 미완의 해결책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인정투쟁이 불필요한 공간, 최소한의 인정이 가능한 각자의 공간을 만들자는 것, 그것은 환멸을 견딜 수 있는 공간을 만들자는 것이니까. 환멸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것을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과거의 촛불에서 참가자들은 축제가 지속되기를 바랬다. 환멸을 견뎌내야 하니까. 축제가 영원히 지속된다면 환멸을 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축제는 끝났고, 환멸을 견뎌내지 못하는 누군가는 일베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러니 필요한 것은 축제의 일상화가 아니라, 일상의 축제화다. 나의 일상이 작은 나만의 축제들로 이어진다면 외부의 축제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것에는 '국가'가 하등 필요하지 않다. 저자가 인용한 조윤호의 글(나는 '국가'를 넘어서지 못한 '국민'이 촛불집회 실패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조윤호 <개념찬 청춘>, 248p, 박가분 <일베의 사상> 257p에서 재인용)도 그것을 말해준다. 나의 축제에 국가가 초대받을 이유란 없다.


덧.
가연님도 지적하셨지만, 과연 이 책에 수많은 사상가들의 이름이 필요했나 하는 것은 의문이 든다. 이것은 그 옳고그름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문제다(물론 솔직히 말해서 지적할 능력이 안된다). 개인적으로는 닭을 잡는데 소잡는 칼을 쓰는 듯한 느낌이다. 예를 들어 한 영화에 대한 분석에서 약간 포커싱이 나간 장면을 두고, 이것은 우울하고 몽환적인 당대의 배경을 담아내며, 키예슬롭스키에서 소쿠로프로 이어지는 유미주의적 전통을 계승하려는 시도라고 말하는 격이다(그냥 손에서 나오는대로 쓴 문장이다). 사실은 단지 촬영감독이 어제 마신 술이 덜 깼거나, 카메라 포커싱을 맞추는 능력이 떨어져서 그런 것일수도 있다. 뭐 아무튼 그렇다고 해도 나름 재미있게 읽었다. 다시 영화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개인적으로 어떤 영화에 대한 글에 동의하기 위해서 는 일단 그 글이 무엇인가 생각해 볼 수 있는 지점이 있으면 되지 않을까라고 (나를 방어하는 차원에서) 생각한다. 그가 설혹 잘못된 인용이나, 얼토당토 않은 이론을 끌어온다고 해도, 일단 그 글의 구조, 혹은 분석이 나름 여러가지를 생각케 한다면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뭔가 들어맞는 듯 보이면서도 미심쩍게 만드는 이 수많은 사상가들의 인용목록이 다시 한 번 아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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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든 비판이든 정교해야 한다

The Book | 2013.11.23 16:01 | Posted by 맥거핀.
우상의추락프로이트비판적평전
카테고리 인문 > 심리학
지은이 미셸 옹프레 (글항아리,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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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지금도 꽤 잔재가 남아 있지만) 한 때 영화 비평에서 '프로이트'가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이른바 정신분석적 비평이라는 것으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이론들을 차용하여 영화에 대해 비평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런 것에 기대자면 <설국열차>는 커티스라는 죄책감에 사로잡힌 사내가 아버지가 되는 데 성공하여 미련없이 죽는 이야기이며, <그래비티>는 우주선이라는 남근이 대기권이라는 처녀막을 관통하면서 무성의 존재 라이언이 성적 존재로 귀환하는 과정이다(내가 지어낸 것이 아니다. 신형철과 허문영의 이야기이다). 물론 더 나아가면 이렇게 말할, 혹은 이렇게 조롱할 수도 있다. <설국열차>는 기차라는 남근이 터널이라는 질을 통과하는 것이며, 마지막 기차의 폭발은 사정과도 같다, 혹은 <그래비티>는 어떻게든 자궁으로 회귀하려는 아이의 욕망(몸을 태아처럼 감싸는 라이언)이며, 어머니인 가이아 대지와 섹스하고 싶은, 그리고 결국 그것에 성공하는 오이디푸스적 욕망이다. 아마도 여기까지 읽은 분들은 상당수 이렇게 생각할 것 같다. 이게 말이야, 막걸리야. 참 아무데나 잘도 갖다 붙이는구만. 아마도 프로이트가 들은 비판의 핵심도 그것에 어느 정도는 맞닿아 있는 것 같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참 잘도 갖다붙인다는 것. 그런데 그것은 또 한편으로 프로이트가 영화 비평, 혹은 기타의 예술 비평 분야에서 각광받은 이유이기도 했다. 이론의 범용성이 뛰어나다는 것. 왜? 모든 예술은 인간의 손으로 탄생하는 것이고, 모든 인간에게는 성기가 있으니까. 즉 어떤 인간도 성의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으니까. 

즉 프로이트는 과학자가 되고 싶어했지만, 과학은 오히려 비웃는 쪽에 가까웠고, 그의 이론에 열렬한 관심을 보이고, 찬사를 보낸 쪽은 과학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상의 추락>의 저자 미셸 옹프레의 비판도 어느 정도는 그런 것과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의 말은 결국 이건 과학이 아니다, 프로이트가 만들어낸 (거의 아무런 근거가 없는) 이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상당히 중언부언하는 경향이 있고, 글이 난삽한 부분이 있지만, 옹프레의 비판은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기원이 감추어져 있다. 프로이트가 마치 창시자처럼 되어 있는 정신분석학은 니체, 쇼펜하우어, 하르트만 등의 철학에 상당부분 빚진 것인데, 그것이 마치 프로이트가 만들어낸 것처럼 알려진 까닭은 자신의 연구에 관련된 기록을 소각하는 등 그가 벌인 행위들 때문이다. 둘째, 프로이트의 이론들은 인류 전체의 이론이 아니라, 프로이트 그 자신을 위한 이론이며, 그의 어린시절의 삶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일 뿐이다. 즉 다시 말해서 모든 아들들이 어머니와의 동침을 애타게 원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이트 그 자신만이 그랬을 뿐이다. 셋째, 코카인에 대한 연구, 미심쩍은 치료법들, 개인적으로 치부가 될 수 있는 사실들이 은폐되거나, 왜곡되었다. 넷째, 과학적이라고 그가 주장한 정신분석학은 사실 아무런 근거가 없으며, 사실상 그가 지어낸 것과 다름이 없다. 또한 그것은 반박의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 일종의 '수행적 발화'라는 점에서도 비과학적이다. 또한 그의 삶에는 숫자, 미신, 신비주의에 대한 관심 등등 비과학적인 요소가 점철되어 있다. 다섯째, 그는 돈이 많은 환자를 선호했으며, 남성우월주의자였고, 파시즘에 호의적이었으며, 성을 해방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성을 억압하는 쪽에 가까웠다. 즉 프로이트는 개인적으로 문제가 많은 인간이었다. 여섯째,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으로 환자를 치유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사실상 그가 치유한 환자는 거의 없으며, 도리어 그는 환자가 어느 정도는 완쾌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째, 프로이트가 전 일생을 통해서 관심을 둔 것은 환자를 치유하는 일이 아니라, 정신분석학을 유명한 이론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오로지 그가 유명해지고, 명성을 얻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비판을 놓고 보면 프로이트는 거의 (사이비) 교주처럼 보인다. 옹프레의 비판대로라면 그가 만들어낸(혹은 만들어냈다고 주장하는) 정신분석학이라는 종교는 (대다수의 사이비 종교와 마찬가지로) 기원도 없고, 그나마 있는 이론도 사실은 그가 자신의 삶에 근거하여 제멋대로 만들어낸 것이며, 단지 여러 신비주의적 요소들이 가득한 것에 불과하다. 또한 교주 프로이트는 개인적으로 상당히 문제가 많은 인간이었고, 결국은 어떠한 신도도 천국으로 인도한 적이, 아니 제대로 치료한 적이 없다. 실제로 옹프레는 글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체계가 (프로이트가 비판한) 일종의 종교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프로이트학과 종교 둘 다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환상을 이야기한다. (...) 정신분석학은 종교와 동일한 법칙을 따른다.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 '또 다른 저 세상'이 있다고 가정한다.(p.687)" 또한 저자에 따르면 프로이트의 이론 뿐만이 아니라 그가 이끈 모임, 단체 등도 이상하게도 종교적인 결사체 같은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면 이런 사이비 종교, 혹은 신비주의적인 이론을 부수는 방법은 무엇일까. 여러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사실 가장 근본적이고, 확실한 무기는 팩트와 증거이다. 즉 눈 앞에 확인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내놓으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진화론과 창조론의 싸움에서 과학의 입장에 서 있는 진화론이 내놓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무기는 진화의 증거들, 즉 화석이나 해부학적, 혹은 계통발생학적 증거들이다. 예를 들어 '맥거핀'을 믿는 우스꽝스러운 맥거핀교가 있다고 했을 때, 그 종교에 대항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무기는 "그럼 저에게 맥거핀님이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세요."가 될 것이다(물론 그 반대편 측에서는 "나는 보이는데, 너는 안보여? 그럼 너의 믿음이 부족해서 그래."라고 답할테지만).
 
즉 과학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정신분석학은 과학이 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하다. 정신분석은 환자용 침대 위에서, 환자와 분석가 간의 일대일 관계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며, 모든 것은 오로지 분석가와 환자의 대화로만 이루어진다. 눈앞에 보이는 증거는 아무 것도 없고, 모든 것은 분석가의 말에 의해서 결정된다. 환자가 정신병이 생긴 원인이 분석가의 진단과 일치한다는 증거도 없고, 분석가가 제시한 치료법이 효과가 있다는 증거도 없으며, 병이 나아가고 있다거나, 혹은 완치했다는 증거도 없다. 또한 환자가 실제로 아무것도 나아진 것이 없을 때에도 프로이트는 빠져나갈 구멍이 있었다. 그것은 환자가 분석을 무의식적으로 거부했거나, 혹은 그의 무의식 깊은 곳에 있는 억압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즉 프로이트의 말대로라면 "동전의 앞면이 나오면 내가 이기는 것이고, 뒷면이 나오면 당신이 지는 것이다." 모든 것은 환자의 머리 속에서 일어나고 우리는 그 환자의 머리 속을 볼 수가 없다. 그의 머리 속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아주 작은 오이디푸스를 핀셋으로 끄집어낼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즉 정신분석학은 과학도 아니고, 그렇다고 철학도 아니다. 과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비실증적이고, 철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비논리적이다. 버트런드 러셀은 "과학은 우리가 아는 것이고, 철학은 우리가 모르는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정신분석학은 아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안다는 증거가 없고, 모르는 것 같은데, 아는 척한다.

그런데 그런 부분에서 보면 미셸 옹프레의 무기는 그렇게 확실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 역시 확실한 팩트라기보다는 상당부분 불확실한 증거, 혹은 정황증거에 의거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저자는 프로이트가 친구 빌헬름 플리스에게 보낸 편지의 많은 부분이 감춰졌다는 이야기를 하며, 그 이유는 프로이트가(혹은 프로이트의 추종자들이) 자신의 이론이 유명한 철학자들의 이론에 근거한 것이라는 부분을 숨기고, 자신이 이 이론의 창시자인양 행세하기 위해서, 또는 자신의 여러 치부들을 숨기기 위해서 한 짓이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러나 저자의 분석대로라면 프로이트와 친구 빌헬름 플리스 간에는 일종의 동성애적인 요소가 있었으며, 그런 관점에서라면 편지를 숨기고 싶은 결정적인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즉 여기서 중요한 것은 편지가 숨겨졌다는 사실보다도, 그것을 왜 숨겼는가의 부분이며, 그것은 여전히 팩트보다는 해석의 영역이다. 다른 부분들도 거의 대부분 그런 식인데, 예를 들어 프로이트가 처제 민나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것을 저자는 거의 기정사실로 간주하며, 그 증거로 그가 처제와 단 둘이 여행을 갔다는 점, 처제가 그들 부부와 같이 살았으며, 그녀의 방은 부부의 침실을 거쳐야만 갈 수 있었다는 점 등을 그 근거로 든다. 그러나 그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정황증거이다. 그런데 그것에 의거해서 저자는 다음의 논지를 이어나간다. 그가 비정상적인 가족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이론들이 비정상적인 가족관계를 다룬다는 것이다. 이것은 온당하다고 할 수 있는가?

저자는 프로이트의 이론이 정확한 팩트와 명확한 근거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그의 개인사에 근거한 추론이나 그가 만들어낸 신비스러운 이야기들에 불과하다는 점을 밝히기 위해, 그 역시 여러 정황증거에 따른 추론만을 무기로 사용하고 있다. 즉 프로이트가 환자의 여러 개인사들과 그에 따른 정황증거들을 조합하여 적절히 추론의 방식으로 '분석'을 하였다면, 마찬가지로 저자도 프로이트의 여러 개인사와 정황증거들을 놓고 적절히 추론하여 프로이트라는 인간을 재구성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프로이트의 방법론이 이러한 이유 때문에 비판을 받는다면, 저자의 방법론 역시도 비판의 영역에 들어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저자는 어니스트 존스나 피터 게이와 같이 프로이트에 호의적인 전기를 쓴 작가들을 공정하지 못했다고 비판하지만, 그들은 같은 팩트를 놓고 다른 해석을 하고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미셸 옹프레는 프로이트가 무솔리니에 보내는 책에 헌사를 쓰고,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1933년부터 6년 뒤 프로이트가 사망하기까지 그가 한 번도 자신의 글에서 히틀러라는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다고 파시즘에 호의적이었다고 비판하지만, 한 번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옹호의 증거가 되는가, 아니면 무관심이나 무지의 증거가 되는가(나는 이것이 옹호가 아니고 단지 무지한 것일 뿐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당시 상황에서 어쩌면 무지도 옹호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단지 이것이 팩트라기보다는 해석의 영역에 가깝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굳이 견해를 밝히라면 옹호라기보다는 무지에 가깝다고 보는데, 미셸 옹프레의 책에 있는 프로이트가 친구 어니스트 존스에게 보냈다는 편지의 (독재자를 옹호한다는) 증거도 그러하다. "정치적 상황이 전보다 더 암울해졌어. 나치 정권의 공습을 저지할 방법이 도저히 없는 것 같아. 불길한 나치 정권의 행진을 막을 길이 없어. 정신분석으로도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는걸. 오, 안타깝도다! 무솔리니가 독일에게 자유로운 길을 내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지금까지의 상황을 지켜봤을 때 우리를 보호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무솔리니야. 무솔리니라고.(p.653)" 나치를 저지하기 위해 무솔리니에 희망을 걸다니.)

아무튼 저자의 말에 따른다면 프로이트는 사기꾼이다. 그것도 전 인류를 속인 희대의 거대한 사기꾼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프로이트가 전 인류를 속일 수 있었던 이유로, 기독교 문화에 처음으로 성을 화두로 꺼낸 점, 그를 옹호하는 학자 및 무리의 종교에 비유될 정도의 견고함, 종교의 테마를 자신의 이론에 차용한 점, 허무주의적이고 염세적인 당시의 시대에 잘 들어맞았다는 점,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를 통해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을 어느정도 확보한 점 등을 들고 있다. 그런데 뒤집어 생각해 보면 이것은 프로이트의 사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가 멍청했기 때문일까. 다시 말해서 그가 만들어낸 여러 사기의 구조가 정교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사기가 멍청한 우리에게 무엇인가 도움이 되었기 때문일까. 즉 저자는 프로이트의 이론이 널리 전파된 이유, 그의 정신분석학이 하나의 학문으로 (한때나마) 지위를 차지한 이유로 그의 내용보다는 위에 말한 다른 부차적인 부분, 즉 참신성, 조직화, 마술화(판타지), 시대성, 이데올로기에 부합 등을 이야기하지만, 어쩌면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이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서 프로이트의 이 사기성 짙은 이론이 널리 퍼진 이유를 가장 쉽게 말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그게 우리가 생각하기에 우리의 문제를 잘 설명해준다고 느껴졌으니까.
 
그러니까 현재의 상황은 이렇다. 무속을 비판하는 일군의 무리가 용하다는 점쟁이를 사기라는 이유로 공격한다. 그런데 그 점쟁이에게 점을 본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렇게 옹호하고 나서는 것이다. "어..우리 보살님 진짜 용한데. 제 인생 다 맞췄어요! 보살님이 저를 다 낫게 해줬어요. 저는 보살님 때문에 행복해졌어요. 그러니까 공격하지 마세요."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기는 사기인가 아닌가. 내가 보기에 남은 길은 두 가지인 것 같다. 비판을 더 정교하게 하거나(그러니까 보살님이 무슨 몰카라도 설치해 놓은 것을 발견하거나), 사기를 더 정교하게 하거나(모든 사람들의 인생을 100% 맞추거나).


덧 1.
일단 사기를 더 정교하게 하려는 노력은 하고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뇌과학과 정신분석이 결합한 신경정신분석학(neuropsychoanalysis)과 같은 것들이 그것인데, 예를 들어 이 새로운 분야에 천착하는 학자들은 이차사고 과정이 전두엽의 실행능력을 반영하고, 정신분석의 욕동(drive)은 pontine region (특히 periaquiductal gray)에서 피질로 이어지는 트랙과 연관되어있다고 밝히고 있다고 한다(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다. 하지현의 '21세기의 정신분석, 과학인가 철학인가?'라는 글에서 따왔을 뿐이다). 어쩌면 언젠가는 머리 속에 있는 세포에서 나노분자만한 크기의 오이디푸스라도, 아니면 하다못해 오이라도 꺼낼지도 모른다(미안합니다..내용도 없는데 글이 길어지니 짜증나서 그만..).

덧 2.
개인적으로는 글이 조금 난삽한 경향이 있고, 중언부언하는 부분들이 많다고 느껴져서 읽기에 힘들었다. 글을 그렇게 썩 잘 쓰시는 분은 아닌 듯 하다. 또한 (가연님도 지적하셨지만) 번역도 군데군데 이상한 부분들이 있는데, 명백히 오류라고 여겨지는 부분도 있다. 예를 들어 "그 탄생 배경은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의 오류를 발견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 그는 자신이 쓴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통해 천체에 대한 진실을 밝혀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동안 믿어왔던 '지동설'을 부인하고 '천동설'을 주장했다. (p.91)"와 같은 부분을 보면 천동설과 지동설을 바꾸어 쓰고 있으며, 215페이지에서는 프로이트의 딸인 소피의 이름이 그가 고등학교 때 히브리어를 배운 교사 사무엘 해머슈라크의 여자 조카의 이름에서 따온 것일지 모른다고 하다가, 285페이지에서는 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프로이트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히브리어를 가르치던 교사 사무엘 해머슈라크의 조카 이름이 안나였다. 프로이트는 이 소녀의 후견인이기도 했다. 우리는 안나 프로이트의 이름이 바로 여기서 온 것으로 추측한다." 바로 그 전에 거의 한 챕터를 할애해 프로이트의 딸 안나(소피의 여동생이 안나이다. 그러니까 프로이트에게는 소피와 안나라는 두 명의 딸이 있다)의 이름이 프로이트의 환자 안나 O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프로이트의 여동생 안나의 이름에서 따온 것인지 온갖 추측을 했으면서 말이다. 사무엘 해머슈라크의 조카도 안나와 소피 두 명인 것인가? 이런 것을 놓고 보면 어쩌면 번역가의 문제가 아니라 작가의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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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아보이는 가치들

The Book | 2013.10.22 01:32 | Posted by 맥거핀.
인기없는에세이지적쓰레기들의간략한계보
카테고리 인문 > 철학
지은이 버트런드 러셀 (함께읽는책,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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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버트런드 러셀의 책 <인기 없는 에세이>는 그의 후기에 쓰여진 여러 편의 비교적 대중적인 에세이들을 묶은 책이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철학이었지만, 단지 그것에만 머물지 않았는데, 그는 철학, 수학, 과학, 교육, 정치, 예술, 종교 등 인간의 거의 모든 부문에 관심을 두고, 다양한 부분에 걸쳐 자신의 의견을 활발하게 피력하였다. 그것은 이 한 권의 책에도 잘 드러나있는데, 이 책에 실린 12편의 에세이들은 철학의 효용, 인류의 정신사, 인류가 가진 관념들, 인류의 미래상 등등의 그렇게 간단하게 이야기할 수만은 없는 주제들을 다루면서도, (여러 부문에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현실과 유리된 철학적인 논의에만 머무르지 않고, 당대의 현실을 깊숙이 반영하여 날카로운 풍자와 해학으로 이야기를 여러 방면으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그러므로 이야기의 내용보다도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에세이들이 쓰인 현실, 그러니까 그 시기인 것으로 보이는데, 몇 개의 에세이들을 제외하고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글들은 1946년에서 1950년 사이, 즉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하고, 세계가 급속히 두 개의 커다란 세력으로 분화하던 시기, 냉전이 서서히 그 고개를 쳐들고 있던 시기에 쓰여졌다.

버트런드 러셀이 이 때 가장 크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반전과 반핵, 평화운동이었다. 물론 당시 대다수의 지성인들을 포함한 상당수의 서구인들 역시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는 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결국 이긴 쪽에나 패배한 쪽에나 커다란 상처를 남겼고, 이대로 더이상 큰 전쟁이 지속되면 인류 전체가 공멸하고 말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불러 일으켰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등장한 핵무기와 그것의 증가는 만약 다음번의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반드시 그것은 인류의 완전한 파멸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를 낳기도 했다. 버트런드 러셀의 입장에서는 이것은 조금 더 특별했는데, 그는 이러한 전쟁이 인류의 어리석은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인류에 해를 끼친 관념들'이라는 에세이에서 이러한 전쟁이라는 솥을 부글부글 끓게 한 재료들이 어떠한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데, 예를 들어 현대의 전쟁은 거슬러 올라가면 마녀를 처형하던 중세의 재판에서 단지 그것의 목적이 군중들의 분노를 마녀와 마술이라는 허상에 돌리고, 군중을 즐겁게 함으로서 그들의 악한 열정을 만족시켰던 것과 동일한 메커니즘을 가진다. (즉 여기에서 도리어 가장 위험하게 여겨졌던 것은 '마술을 부리는 마녀'가 아니라, '마술을 믿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중세에서 마술을 부린다고 여겨졌던 상당수의 것들은 마술과 가장 대척점에 있는 과학과 관련된 것이기도 했다. 이것을 다시 전쟁에 적용한다면 전쟁이 일어났을 때 가장 공격받는 주장은 '우리가 적에게 질 것이다'가 아니라, '전쟁이 (다른 목적을 위한 것이니)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질투, 국가적 자만심, 자신의 집단이 우월하다는(특별하다는) 믿음 등등의 여러 '인류에 해를 끼치는 관념들'이 결합되어 전쟁이 수행된다. 그리고 이것은 러셀의 입장으로 보면, 결국 전쟁이라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물질을 파괴하는 것을 넘어서, 인간의 정신세계 자체를 파괴하는 것, 인류의 정신 자체를 복구할 수 없는 파멸로 이끄는 것이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 수행되던 영국에서 반전운동을 주장하였고, 그로 인해 교수직에서 해임되고, 1918년에는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다.

그렇게 확고하게 전쟁을 반대하고, 혹시 발발할지도 모르는 나중의 전쟁을 우려하는 시각은 이 책의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데, 그것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이 주된 에세이들의 쓰여진 때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개의 거대한 세력이 서서히 발톱을 드러내던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러셀은 이 책에서 지금으로보면 조금 의아하다고 느껴질만한 주장, 혹은 러셀 자신의 주장들과도 무엇인가 맞지 않는다고 느껴질 법한 주장을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정부의 탄생이다. "이러한 까닭에 오늘날과 같은 국제적 무정부 상태가 지속되느니 미국이든 소련이든 어느 한 쪽이 세계 제국을 건설하는 편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미국이 승리하는 편이 더 낫다고 여길만한 중요한 이유가 있다. (중략) 내가 미국을 편드는 이유는, 문명적인 생활 방식에서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소련보다 미국이 더 존중하기 때문이다. (p.97)" 이것이 러셀 자신의 주장들과도 맞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것은 그가 이 책에서 플라톤의 <국가론>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며, '정적인 완전성'에 따른 철인이 지배하는 그의 이상국가론이 허구이고, 기만술이라고 맹비난하고 있기 때문이다. 덕이 전체에 위치한다는 관념에 기반한 플라톤의 <국가론>은 비판하면서 하나의 전체로서의 세계제국의 건설을 꿈꾼다는 이 껄쩍지근함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

그러나 당시의 러셀에게는 대안이 없었다. 아니 몇 가지의 가능한 정치적인 대안들을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그것의 한 형태를 히틀러식의 국가사회주의(나치), 혹은 스탈린과 레닌의 소비에트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러셀이 보기에는 그 두 가지는 전쟁 못지 않게 위험한 것이었고, 또한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진 것이었다. 그 한 가지는 바로 교조주의인데, 그 두 가지의 사회 모두 교조주의로 이루어진, 교조주의가 만연한 사회였다. 그러므로 교조주의의 총체라고 볼 수도 있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또다른 교조주의로 달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그가 발견한 대안은 경험주의와 합리성이 지배하는 사회, (비교적) 자유로운 사회라고 여겨지는 미국 혹은 영국과 같은 사회였다. 즉 그가 책에서 내내 신랄한 비판과 풍자를 가하는 것은 스콜라주의, 마르크스주의, 파시즘 등의 교조주의, 혹은 교조주의로 이루어진 불분명하고 두루뭉술한 것들이고, 그가 옹호하는 것은 경험론과 합리주의, 민주주의와 같은 가치들, 그리고 수학과 과학의 명징한 세계이다. 그리고 그는 그 교조주의의 근원에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로 거슬러 올라가 멀게는 플라톤에서 가깝게는 헤겔까지 도마에 올려놓고 비판하고 있으며, 넓게는 형이상학 전체에 교조주의의 혐의를 덧씌우고 있다.

즉 러셀은 묻는다. 이 모든 게, 즉 철학이니, 인류의 관념들이니, 과학이니, 수학이니, 도덕이니 하는 것들이 정치와 무슨 상관인가,라고 말이다(이 책에 실린 첫 번째 에세이의 제목은 '이 모든 게 정치와 무슨 상관인가?'이다). 그가 여기에서 말하는 정치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류의 미래를 밝게 하는 것이며, '인류에 도움이 된 관념들'을 보존하고, '인류에 해를 끼친 관념들'을 뿌리뽑는 것이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전쟁을 막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 자문에 대한 자답은 이 정치의 기본바탕에는 철학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철학은 이론적 목표와 실천적 목표를 같이 지닌다고 말이다. 즉 철학은 이론의 측면에서 과학이 아직 실험할 준비가 안된 방대한 범위의 가설을 세우는 것이며, 실천적으로는 특정의 삶의 방식을 부단히 옹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특정의 삶의 방식이란 중요한 실천적 의미를 지닌 여러 가지 문제를 엄밀하고 사려 깊게 사고하는 습관, 삶의 목적이라는 개념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도록 바라보는 것, 사고의 대상을 보다 폭넓은 관계 속으로 넓히는 것, 그럼으로서 현재의 불안과 고뇌에 평정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러셀이 강조하는 절대 빼놓지 말아야 하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관용과 자비와 박애이다. 러셀이 보기에 당시의 세계는 하나의 갈림길 앞에 서 있다. 러셀은 말한다. "지금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다. 인류가 유례없는 재앙에 빠질 것인지, 아니면 행복과 안전과 안녕과 지성의 새로운 지평을 열 것인지가 향후 20년 사이에 우리의 총체적 지혜에 따라 좌우될 것이기 때문이다. (p.293)" 그리고 그것은 인류가 자신의 적들에 대해서, 혹은 자신과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 자신과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더 이상 서로 공격하지 않고, 관용과 자비를 갖추고 서로 얼마나 최선을 다해서 손을 맞잡는가에 달려 있다. 글쎄. 러셀이 그렇게 말한 시기로부터 60여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놓여 있을까. 유례없는 재앙이라고 부르기는 힘들지만, 그렇다고 행복과 안전과 안녕과 지성의 새로운 지평이라고 말하기는 더욱 어려운 것 같다. 인류가 이런 위치에 놓인 것은 우리의 지금까지의 철학이 잘못되었기 때문일까. 즉 우리가 인류에 해를 끼친 관념들만을 더욱 더 널리 받아들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단지 러셀이 현상 파악에 실패하였기 때문이거나, 그가 헛된 것에 희망을 걸었기 때문일까(하기는 러셀이 현재의 미국이 벌이는 패악들을 보았다면 무엇이라고 말했을지 궁금하기는 하다). 그러나 그의 현상파악이 틀렸고, 경험론과 민주주의에 근거하는 그의 관념이 낡아빠진 것이라고 해도, 그가 말하는 가치들, 특히 그 중에서도 관용과 자비와 박애가 중요한 것임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도리어 인류가 재앙으로 가까이 갈수록 서로를 관용하는 것, 그리고 서로를 긍휼하게 여기는 것은 더욱 중요해지는 것 같다. 60여년 전의 러셀의 이야기가 지금으로서는 고루해보이지만, 지금 우리가 희망을 걸 수 있는 것은 그런 닳디닳은, 낡아보이는 가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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