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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의 윤리학

The Book | 2015. 5. 22. 14:17 | Posted by 맥거핀.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10점
구병모 지음/문학과지성사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책의 표지가 인상적이다. 아무 무늬도 없는 노란 바탕을 세로로 가로지르고 있는 검은 틈. 그리고 그 검은 틈 사이에서 불길하게 삐져 나온 것처럼 다음의 열 글자가 그 틈새 옆에 자리잡고 있다.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오래 들여다보면 빨려들어갈 것 같은 검은 틈. 이 틈새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눈앞의 어둠은 아까보다 부피가 커져 있었다. 틈에서 벌레 떼처럼 기어 나온 어둠은 부분부분이 거의 동일한 명도였는데도 어딘가 주름이 잡힌 느낌을 주면서 원근감을 자아냈다. 어둠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 같았고 가장 깊은 암부에는 소실점이 있을 것만 같았다. 사라지는 지점이라니, 지금의 자신이 가장 원하는 자리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미온은 구멍에 손을 넣었다.

- p.94 <관통貫通> 중에서

 

이 틈새는 관통할 것을 유혹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어쩌면 소설이라는 것이야말로 그런 관통의 욕망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종종 소설을 통해 다른 세계를 엿본다. 소설의 지면에 있는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작은 틈은 점점 벌어져, 그 틈새로 들어오라고 우리를 유혹한다. 지금의 이 현실이 어떻든 그것은 상관이 없다. 아, 나는 좁은 지하철 속에서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얼마나 그 틈새를 은밀하게 들여다보았고 들어갈 것을 욕망했던가. 아마도 <관통>의 미온은 그 유혹을 이겨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처음에는 손을 밀어넣다가, 결국에는 그 틈새로 다리를 밀어넣고, 그 구멍을 통과했을 것이다. 그리고 구멍을 통과한 그녀는 날렵해지고 우아해진 몸매와 3분백 내지는 영희백이라고 불리는 자그마한 보스턴백과 태어나 처음보는 옥색 실크 블라우스와 천장이 높고 빛이 잘 드는 이층집 화실과 전도유망한 신인작가라를 타이틀을 얻었다. 그것은 '단순명료하며 속물적이고 몰개성적'이지만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는가, 그저 좋다. 그런데...구병모는 불안한 후기를 거기에 덧붙인다. 이편의 세계에 아직 놓여져 있는, 사업을 수차례 말아먹고 어딘가로 사라져 잘 연락도 되지 않는 남편과 난장판이 된 원룸, 악을 쓰고 있는 정신질환을 앓는 시누이, 미온이 유명한 화가가 되어 한몫 챙겨다주리라는 가망 없는 꿈을 믿었던 친정이라는 현실을 피해 미온이 끌고 나왔던 재활용쓰레기 장에서 주워온 낡은 유모차와 그 안의 울고 있는 아기, 그리고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이 내린 '무책임한 부모들이 술이나 인터넷 게임에 빠져 아이를 깜빡 잊어버린 부주의 소행 또는 정신 질환자에게서 나타나는 자아 망실 행위의 일환'이라는 진단. 이것들은 다 무엇인가. 이것을 무엇이라고 불러도 좋을까. 혹시 이것을 일종의 '재난'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가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우리를 들여다본다,라는 니체의 유명한 말을 이렇게 비틀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틈새를 들여다보면 틈새도 우리를 들여다본다. 틈이 생기면 어떻게든 들어가보려고 애쓰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이지만, 어찌 그 틈새에 좋은 것만, 그러니까 보스턴백이나 옥색 실크 블라우스와 이층집 화실같은 것만 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그래서 어린아이들은 틈만 나면 좁은 틈새로 기어들어가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그때마다 부모의 우악스러운 손에 잡혀 질질 끌려나오게 되는 것이다). 현실이 갈라진 틈새에서는 때로 이상한 재난이 몰아닥친다. 예를 들어 영화 <미스트>. 기분나쁜 짙은 안개가 순식간에 현실을 감쌌고, 그 안개 사이에서는 무시무시한 '그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기괴한 '그것들'은 다른 차원에서 왔다.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열어서는 안되는 틈을 열었고, 그 틈 사이로 '그것들'은 이쪽으로 건너왔다. 이상한 재난, 초현실적인 재난. 구병모의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의 단편들이 그리는 세계들도 이러한 초현실적인 재난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파르마코스>의 지독한 가뭄과 입에서 벌레를 내뿜는 여인이 불러오는 물, 혹은 <식우蝕雨>에서 모든 것을 부식시키는 강한 산성의 비, <이물異物>에서 다세대 주택 부엌에 나타난 이름모를 거대한 생물, 아니면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에서 보여지는 덩굴손 비슷한 무엇인가로 변하는 사람들. 그것들은 근원을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하고 불길한 거대한 재난의 형태이다. 아니, 어쩌면 이렇게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무엇인가만 재난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터였다. <이창裏窓>에서의 아이의 죽음이나, <어디까지를 묻다>에서의 카드사 콜센터에서의 일들, 혹은 위의 <관통>에서 미온이 겪는 일들도 일종의 재난이라고 부르면 안될 이유가 있을까. 그 일들은 보다 현실에 가깝게 발을 딛고는 있지만, 역시 근원을 알 수 없으며, 불가사의하기는 마찬가지다.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그들은 이유를 전혀 모른채로, 어느 틈에 그 재난의 한가운데에 놓여져 있다. 어찌할 줄을 모른채로.

 

그러나 영화 <미스트>가 단지 재난의 양상과 스펙타클을 그려내는 데에 그치지 않고 어떤 윤리적인 질문을 하려는 것처럼 보였던 것과 마찬가지로(그래서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의 '안개'를 홀로코스트의 '가스'와도 연결짓는 질문들이 있었다), 구병모의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은 그 재난 속에서 어떤 윤리를 묻는 것처럼 보인다. 그 윤리적 질문은 때로 노골적이기도 하고(<파르마코스>), 보다 은밀하기도 하며(<식우>), 때로는 관찰자의 시선에서(<덩굴손증후군의 내력>), 때로는 가해자의 시선(<이창>)이거나, 혹은 피해자의 시선(<어디까지를 묻다>)에서 이 재난 속에서 작동하는, 혹은 작동했었어야만 하는 윤리에 대해 묻는다. 그러나 그 질문은 불명확하며, 때로는 질문이 명확한 것처럼 보일 때에도 그 답을 내리기는 적어도 구병모의 소설들에서는 쉽지가 않다. 그래서 쉬운 길은 이야기 속에서 처음부터 배제되어 있고, 종종 인물들은 여러 중첩된 질문 속에서 갈 길도 없이 내버려진채 이야기는 갑자기 막을 내린다. 그러니 덩그러니 놓여진 우리들은 복잡한 마음들을 보다 쉬운 형태로 바꿔 하릴 없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이물>의 양선은 어떻게 되었을까, 같은 쉬운 형태로 바꾼, 질문만 있되, 답이 돌아오지 않는 질문들을.

 

방난이 데려온 게 아닌 이상 손대면 깨질 유리처럼 거리를 두어 대해야 할 까닭은 없으므로 긴장이 풀린 양선은 무심코 놈의 털을 쓸어 넘기고,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드러난 놈의 눈꺼풀이 꿈틀거리며 열리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그 눈동자는 평화로운 숙면을 방해하는 자를 확인하려는 듯 양선을 정확히 응시하더니

- p.210 <이물>의 마지막 문장

 

돌아오지 않는 답. 그것은 이 소설의 인물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구병모 특유의 만연체는 이 소설들과 묘하게 어울리는 면이 있는데, 이 소설 속의 인물들은 아무도 듣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무엇인가를 말하려 애쓰는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작품 전체가 긴 독백의 형태로 이루어진 <이창>이나 <파르마코스>, <어디까지를 묻다>와 같은 작품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소설 속의 인물들은 대체로 어떻게든 무엇인가를 최대한 말하려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이 이 재난 속에서 얼마나 윤리적인지를, 혹은 자신이 왜 이 재난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지를. 다시 말해서 그것은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이라는 단문으로 요약된다. 다시 영화 <미스트>로 돌아간다면 기도하는 말많은 자들이 결국 원했던 것은 '그것들'이 내가 아닌 다른 누구를 잡아가는 것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즉 이 재난들은 어떤 질문들을 하기 위해 마치 만들어진 공간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 <미스트>의 슈퍼마켓이라는 한정된 공간이 마치 다양한 인물군상을 몰아넣고 만든 인위적인 실험실처럼 보였던 것처럼, 구병모 소설의 재난들은 제한적인 기이한 형태로 몰아닥친다. <이물>의 생물은 거기 그 좁은 부엌에 그냥 웅크리고 있을 뿐이며, <식우>의 강산성비는 그 도시에서만 내리는 것처럼 보이고,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이나 <파르마코스>의 기이한 현상들도 한 도시 혹은 한 마을에서만 일어나는 제한적인 현상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이 좁은 도시 혹은 마을에 가해지는 일종의 징벌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모두가 자신의 입장만을 이야기하는 일방통행의 좁은 세상, 단지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원하는 세상에 내리는 (결국 반복될 수 밖에 없는) 징벌.

 

그러나 무엇인가 자신의 입장을 열심히 얘기하려 하는 이들을 비난만 할 수 있을까. 재난이 가장 먼저 집어삼키는 것은 늘 그랬듯이 가장 약한 자들이고(예를 들어 <식우>의 강한 산성 비가 먼저 부식시키는 것은 결국 약하고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약하고 궁지에 몰린 자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열심히 어필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그 반대로 강한 자들은 결코 무엇인가를 먼저 말하는 법이 없다. 늘 그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자들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말을 많이 한단 말인가). 소설이라는 것의 가능성도 어쩌면 그런 것은 아닐까. 소설은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자 애쓰는 이들의 것이고, 아무 이야기도 내뱉지 않는 것보다 적어도 무엇인가를 이야기해야만 어딘가에 가닿을 가능성이라도 생긴다. 그것은 예를 들어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의 U가 무심결에 덩굴손 줄기들에 손을 뻗어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자 애쓰는 것이며, <어디까지를 묻다>의 카드사 상담원이 예전 성우였던 택시기사를 알아보고 그에게 예전의 애니메이션에 나왔던 대사를 들려달라 청하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물>의 양선이 무심코 놈의 털을 쓸어 넘기고 그의 눈동자를 마주하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 이물은 결국 양선 자신이거나 혹은 방난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는 이 재난 속에서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을 말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는 약한 자들. 그것은 U와 덩굴손들, 그리고 카드사 상담원과 택시기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약한 자들은 약한 자들을 알아보는 수밖에 없으며, 닿지 않는다 생각해도 어떻게든 얘기를 하려고 애써 보는 수밖에 없다. 가득한 재난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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