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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과 시간

The Book | 2014. 2. 13. 15:54 | Posted by 맥거핀.
구경꾼들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윤성희 (문학동네,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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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윤성희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지만 그녀가 문장을 매우 잘 쓴다거나, 묘사력이 뛰어나다거나, 읽다보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한다거나, 늘 참신한 소재를 이야기한다거나, 혹은 놀라운 서사 전개 능력을 보여준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나는 그것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어느날 소설의 신이 나타나, 그간 소설이라는 무용한 것에 시간을 낭비한 벌로(혹은 상으로) 남은 삶을 내가 읽은 소설들 중에 어느 하나로 반드시 들어가 보내야 한다며, 대신 그 중 어느 소설을 고를지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어준다고 한다면, 나는 그다지 주저하지 않고 윤성희의 소설들 중에 하나를 고를 것이다. 나는 적어도 그녀가 그려내는 소설 속 세계만은 아낌 없는 지지를 보내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그려내는 세계는 어떠한 세계인가.

윤성희의 소설 <구경꾼들>에서 계속 이어지는 것은 이야기들의 연쇄이며, 이유와 결과의 퍼레이드이다. 주인공 '나'를 비롯한 나의 가족들, 그리고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주변인물에게는 나름의 이야기가 있으며, 어떠한 행동, 즉 결과에는 거의 반드시 그 행동을 하게 된 이유, 원인이 따라붙는다. 예를 들어 주인공의 할아버지가 성추행을 당할 뻔한 아이를 구해내는 장면의 한 대목을 보자. "아이의 소리를 들은 사람은 상가 이층에서 파마를 하던 여자였다. 여자는 파마를 말던 미용실 원장에게 무슨 소리 안 들려? 하고 물었다. 젊었을 적에 뚱뚱했던 여자는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랐다. 여자는 늘 귀를 쫑긋하며 걸었다. 저 여자 좀 봐라, 하는 소리가 들리면 여자는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침을 뱉곤 했다. 더 심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쫓아가 심한 욕을 퍼붓기도 했다. "무슨 소리요?" 미용실 원장이 되물었다. 여자는 그후로 삼십 킬로그램이나 감량을 했지만 청각만은 여전해서 멀리서도 사람들의 말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틀림없어. 비명소리네." 미용실 원장과 여자는 파마를 하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면 결석이 잦은 주인공에게 담임이 찾아오는 다음의 대목. "커피는 굳어 있었다. 할머니는 뜨거운 물을 커피 통에 부어 간신히 커피 물을 우려냈다. 하지만 프림이 없었다. 할머니는 대신 설탕을 네 스푼이나 넣었다. 할머니가 좋아하는 커피의 비율은 커피 두 스푼, 프림 두 스푼 반, 설탕 세 스푼이었다. 커피를 마신 담임이 얼굴을 찌푸렸다. 담임은 단 것을 싫어했다. 일곱 살 무렵에 집을 나간 엄마가 마지막으로 준 음식이 설탕물이었다. 담임은 두 동생들과 난방이 되지 않는 반지하방에서 설탕물을 마시며 아침이 되기를 기다렸다. 커피를 마시다가 담임은 이제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엄마를 떠올렸고, 그러고는 갑자기 무단결석을 한 나를 용서하기로 마음먹었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고, 결과가 있다. 두 여자가 달려와 쓰러져 있는 할아버지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젊었을 때 뚱뚱했던 여자의 청각이 발달한 덕분이었다. 담임이 무단결석이 잦은 주인공을 용서해주었던 것은 커피가 달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단 커피가 자신의 어머니를 연상하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거의 모든 주인공들은 이렇게 나름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으며, 이 이야기들은 원인과 결과로 연결되어 이 소설을 촘촘하게 구성한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의 세계가 단지 인과율이 지배하는 세계라고 말하기에는 주저하게 된다. 그것은 이 이야기에서 작동하는 것이 단지 인과율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뒤로 돌아가 보자. 두 여자가 할아버지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여자의 청각이 발달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청각이 발달한 여자가 그 시간에 상가 이층에 파마를 하러 갔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담임이 주인공을 용서하는 것은 단지 그것이 어머니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하필이면 커피가 굳었기 때문이며, 주인공의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주고 간 음식이 하필이면 설탕물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이 인과의 법칙들의 빈 구멍을 채우고 있는 것은 수많은 우연들이다. 어떤 우연들. 그 우연들은 때로 인과의 재료가 되기도 하고, 동시에 인과들은 또 우연의 충돌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 소설은 그렇게 우연과 인과가 끊임없이 교차한다.

그것은 한편으로 다른 방향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이 소설에 계속 등장하는 죽음들이다. 언뜻 인과율의 법칙에 따라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던 이 소설은 순간순간 독자를 멈칫거리게 한다. 그것은 예기치 못한 죽음들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차가 뒤집어지는 큰 교통사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주인공 가족에게 예기치 않은, 어떻게 보면 어이없는 죽음이 찾아온다. 주인공의 큰삼촌이 치료받던 병원 건물 앞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병원 옥상에서 자살하려고 뛰어내린 여자에게 깔려 죽은 것이다. 물론 인과와 이야기의 퍼레이드인 이 소설에서 이 두 사람이 거기에서 바로 그 시각에 부딪히게 된 것에는 나름의 이야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두 사람의 충돌을 단지 필연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온전히 필연적인 죽음이란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어떤 인과가 작동하였다고 해도, 그 일어나서는 안되는 사건이 일어난 것에 결국 작동하는 것은 인과보다는 우연이다. 큰 삼촌이 커피를 조금만 더 늦게 마셨더라도, 혹은 여자가 신호가 바뀔 때까지 길을 건너는 사람을 한 명이라도 발견했다면 이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인과는 사실상 우연이 빚어낸 인과, 혹은 인과로 가장한 우연이다.

그것은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기적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 말이다. 주인공의 아버지, 그러니까 죽은 큰삼촌의 형은 어느날 신문을 본다. 거기에는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한 사건이 실려있었고, 그 내용은 자신들이 겪은 사건과 동일했으나 결과는 달랐다. 한 여자가 건물에서 뛰어내렸는데, 하필이면 그 아래를 지나가던 한 남자를 덮쳤지만, 놀랍게도 둘 다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이 두 개의 사건이 한날한시에 벌어졌을 것이라는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혀 그 기적을 찾아가 확인해보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을 찾아간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나게 되는 것은 어떤 우연의 집합체인 기적이라기보다는 인과와 우연이 혼합된 나름의 긴 이야기이다(그래서 아버지는 결국 이 한날한시라는 기적에 대해 묻기를 포기한다). 그리고 그 만남을 계기로 주인공의 부모는 여러가지 기적과 같은 사연을 만나는 긴 여행을 하지만, 그것들도 역시 단지 기적이라기보다는 인과와 우연이 교차하는, 그것들이 빚어낸 수많은 각각의 삶들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삶에 작동하는 것은 기적이 아니라 시간이다.    

즉 기적의 반대편에서 작동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시간이다. 기적이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적이라고 불리는 것 중의 하나는 시간을 압축시키는 것이다. 두 시간 전에 서울에 있던 사람이 그 후에 부산에 나타난다면 아주 오래 전의 사람들은 그것을 기적이라 부를테지만, 그러나 (아주 긴 시간이 지난) 현재의 우리는 그것이 '시간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알며, 그것이 단지 기술적으로 시간을 압축시킨 것임을 안다. 마찬가지로 현재에는 30분만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이동하는 것은 기적으로 보일테지만, 미래의 어느 때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될지도 모른다. 즉 기적적으로 보이는 일도 아주 긴 시간이 주어진다면 가능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의 한 예는 바로 이 주인공의 성장이다.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이 소설 <구경꾼들>이 결국 이 주인공 '나'의 성장담이라는 사실이다. 소설은 주인공의 잉태로부터 시작하여,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누군가를 추억하는 주인공 나의 기억으로 끝난다. 생명이라고 부르기도 모자란 단지 아주 작은 것이었다가 어느덧 누군가를 추억하고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는 존재가 된 이 아이의 이러한 성장은 기적과 같은 무엇이 작동하였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긴 시간이 작동했을 뿐이다. 윤성희는 긴 시간 속에서 인과와 우연을 씨줄과 날줄처럼 교차시키면서 그저 차분히 이 아이의 성장을 지켜본다. 그것이 아마도 이 소설에 '구경꾼들'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유일 것이다.
 
그것은 어떤 스펙테이터(spectator)로서의 구경꾼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 긴 시간을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는 것이다. 이런 비유가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관찰과 비슷하다. 마치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지켜보는 자들이 그 지켜보는 대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그것은 지켜보되,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는 것이다. 냉소나 방관이 아니라, 오랜 시간 그것을 공을 들여서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는 것, 그 긴 시간을 어떻게든 같이 견뎌내며 지켜봐주는 것. 그것이 윤성희의 '어떤 태도'다. 우연과 인과, 혹은 인과가 만들어내는 우연이나 우연이 만들어내는 인과는 우리의 손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긴 시간을 견뎌내는 것이다.

작은삼촌은 퇴근을 하자마자 내 운동화부터 살펴보았다. "정말 달렸네." 나는 작은삼촌에게 사인받은 종이를 주었다. "두 시간 삼십 분 걸렸어." 나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작은삼촌이 종이를 보더니 맨 아래에 있는 사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니가 몰래 하려다 실패한 거지?"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작은삼촌에게 조카를 폭력청소년으로 만들어서 좋았냐고 되물었다. 사실대로 말하려다가 작은삼촌이 거짓말쟁이가 될까봐 꾹 참았다고 나는 덧붙였다. 내 뒤통수를 때릴 줄 알았지만 작은삼촌은 예상과 달리 내 두 손을 잡고는 미안해, 하고 말했다. "불쌍한 놈이 되는 것보다는 한심한 놈이 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어." 작은삼촌이 말했다. 나는 햇볕에 그을린 작은삼촌의 얼굴을 보았다. "작은삼촌!" 나는 조용히 불러보았다. 작은삼촌이 왜? 하고 대답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속으로 작은삼촌, 작은삼촌, 하고 두 번을 더 불러보았다. 영원히 작은삼촌이라고 불려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참고 있었을까. 또 고모가 막내오빠라고 부를 때마다 어떻게 견뎠을까? 내겐 이젠 삼촌이 한 명밖에 남지 않았고 고모에게도 오빠는 한 명밖에 남지 않았는데, 왜 우리는 삼촌, 오빠, 라고 부르지 않는 걸까. "사인한 종이, 선물로 줄께요." 나는 작은삼촌에게 학교에 가겠다고 약속을 했다. 학교도 가고 일요일마다 달리기도 하겠다고 나는 말했다.

할아버지의 말을 들은 어머니는 그제야 식구들에게 솔직히 말했다. 할 줄 아는 게 없다고. "제가 잘하는 건 요리가 아니라 청소예요." 어머니는 소파 아래에 쌓인 먼지나 화장실 변기의 찌든 때를 닦는 일을 좋아했다. 하지만 삼촌들은 어머니가 자신의 방을 청소하는 걸 싫어했다. 어머니의 말을 듣는 순간 할머니는 며느리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할머니도 속상한 일이 있을 때마다 발가벗은 채로 화장실을 청소하곤 했다. "나도 그렇단다." 누가 뭐라 해도 큰며느리는 내 편으로 만들어야지, 할머니는 생각했다. 그래서 할머니는 밥을 먹고 있는 식구들에게 말했다. "그렇게 먹고 싶은 게 많으면 직접 해먹어. 아님, 요리사를 고용할 만큼 돈을 많이 벌든지."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입안에 있던 밥을 씹지도 않고 삼켰다. 목이 메어왔고, 물을 두 컵이나 마신 후에도 계속 마음이 아려왔다. "얘야, 넌 장래희망이 뭐였니?" 괜찮니, 라고 물어보려고 했지만 생각과는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현모양처는 아니었어요." 어머니는 대답했다. 어머니는 할머니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 때마다 장래희망이 무엇이었는지 물어봐주었던 그날의 아침식사를 떠올렸다. 그러면 섭섭한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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