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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니엘 블레이크, 켄 로치

Ending Credit | 2017. 1. 19. 17:14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는 걷는다. 어깨는 약간 움츠러들었고, 나이가 들어 예전보다는 보폭이 줄고 약간은 조심스러워졌다고 할 수는 있지만, 목표지점을 향해서 정확히 나아가는, 어느 곳에 가서 무엇을 해야하는지 아는 사람의 걸음걸이다. 은퇴를 선언했던 켄 로치가 다시 돌아와 만든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영화가 끝난 후 이상하게도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데이브 존스)의 걸음이다. 어쩌면 단순하게 말해서 그것은 영화 속에서 그가 많이 걷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벗겨진 머리에 비니를 쓰고, 늘 입는 점퍼를 입고 그는 직장을 구하러 돌아다니고(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력서를 돌리기 위해 돌아다니고), 실업 급여를 받기 위해 관공서를 찾아간다. 그는 그렇게 움직여야하는 종류의 사람이다. 목수로 살아온 오랜세월, 움직여서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이 그렇게 그의 몸에 배어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생사여탈권을 쥐고있다고 말할 수도 있는) 관공서의 사람들이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다른 종류의 것들이다. 전화로 이루어지는 수급 자격심사, 인터넷으로 제출해야 하는 서류, 꼼짝없이 앉아서 들어야하는 의미없는 이력서 작성 강의.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도 할 수 있는, 다니엘이 관공서 건물 벽면에 스프레이로 항의문구를 쓰는 장면은 그래서 묘한 감동을 준다. 그것은 앉아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이루어지는 일종의 퍼포먼스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시작은 흥미롭다. 영화는 암전 속에서 이루어지는 한 전화 통화로 시작하는데, 이 통화는 꽤 길게 이어진다. 영화의 시작부에서 이루어지는 이 암전 속의 통화는 꼼짝없이 어둠속에서 그 내용에 귀기울여야하는 관객에게 그 통화의 내용을 주목하게 하면서, 동시에 어떤 답답하다는 느낌을 시각적으로도 제공하는데, 이는 그 통화의 당사자인 다니엘이 느꼈던 심정이 관객에게 전이되는 효과를 낳는다. 다니엘과 관공서 직원의 통화, 그러니까 심장병을 앓아서 일을 쉬고 있는 다니엘이 실업급여를 받을 대상이 되는지, 혹은 일을 나갈 수 있는 상태가 되는지를 평가하는 이 통화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이 모든 것이 상당히 부조리하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것이 고압적이고 권위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여러가지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이루어져야 하는 이 심사가 단순히 행정편의를 우선하여 전화로 이루어진다는 점은 물론이거니와 그 질문들 역시도 매우 부조리하다. (심장병을 앓았던 다니엘에게 팔을 들어올릴 수 있느냐고 묻는 식이다.) 그리고 그 부조리한 방식에 다니엘이 항의하자, 직원은 그런 식으로 항의하면 수급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며 부조리한 질문들을 반복할 뿐이다. 일을 한동안 하지 말라는 의사의 소견서를 받은 다니엘이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것 뿐인데도 말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희극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이 부조리한 코믹극은 영화의 내내 이어진다. (그러니까, 역설적인 의미에서 말이다. 사람은 너무 기가 차면 웃음이 나오는 법이니까. 그리고 한가지 덧붙이자면 물론 가장 희극적인 것은 가장 비극적인 것과도 맞닿아 있다.)

 

(예를 들어 그것은 산업의학전문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현장보건관리가 소재인 이강현의 다큐 <보라>에서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예전의 리뷰에서 나는 이 장면에 대해 이렇게 썼다. "영화 내용의 소개에서 미루어 보듯이, 이 영화에는 의사와 노동자들의 연이은 상담들이 빈번하게 출몰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 대화들은 일종의 부조리한 코믹극처럼 보인다. 의사들이 거의 형식적으로 하기 때문에, 혹은 노동자들이 이것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혹은 노동자들이 멍청하기 때문에? 그렇지는 않다. 영화에 나온 의사들은 나름 성의를 가지고 노동자들을 상담하는 것처럼 보이고, 노동자들은 최대한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려 애쓴다. 문제의 핵심은 이것이 거의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 노동자들도 알고 있고, 의사들도 알고 있다. 노동자들의 근골격계 질환, 혹은 특정 약품이나 공정에 의한 여러 증상 들은 그 노동을 그만두어야만 호전된다. 그러나 그 노동을 그만두면 누가 이들의 생존을 담보하는가. 거기에 있는 의사들이 이들을 먹여살려 줄건가. 그러므로 노동자도 웃고, 의사들도 그저 웃을 수밖에. 그만두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없으시죠? 하하, 허허." 이 장면에서 이 의사들이 권위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것이 단지 바보같은 형식에 불과할 뿐이며, 지극히 부조리하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영화는 이런 다니엘의 움직임을 그대로 묵묵히 따라가는데 여기에서 보여지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앞에서 말한 희극적인(그래서 비극적인) 부조리가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연대들이다. 그러나 연대라고 해서 어떤 거창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다. 켄 로치가 예전부터 이야기했듯이 그것은 아주 작은 것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누군가가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옆에서 한 마디 거들어주거나, 낡고 부서진 물건들을 고쳐주거나, 택배를 대신 받아주고, 인터넷으로 대신 간단한 서류를 작성해주는 것. 이러한 작은 연대를 보여주는 이 영화에서 켄 로치가 영화적인 트릭을 쓰는 것은 단 한 가지 뿐이다. 그것은 보편적으로 이루어지는 연대이어야 한다는 점. 영화 속 다니엘과 관계를 맺는 이들은 나이나 인종 면에서 의도적으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그와 가장 큰 도움을 주고 받는 케이티(헤일리 스콰이어)는 북아프리카 쪽에서 온 이민자 출신 정도로 설정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며(예를 들어 영화의 후반부 케이티의 딸이 이민자들의 음식인 쿠스쿠스를 들고 와서 다니엘에게 같이 먹자,고 하는 장면도 있다. 그 대사는 식사를 같이 하자,는 식으로만 자막번역이 되었는데, 맥락은 이해되지만 조금 아쉬운 번역이다.), 그와 관계를 주고 받는 옆집 흑인 청년도 마찬가지이다. 그밖에 작은 도움을 주는 관공서의 친절한 나이든 직원이나 도서관에서 그를 도와주는 흑인 청년, 혹은 다니엘이 관공서 바깥에서 스프레이로 글을 쓰는 퍼포먼스를 벌일 때 그를 찬양하는 노숙자도 마찬가지이다. (켄 로치의 이 보편적인 연대에는 적과 아군을 가르는 선 같은 것은 없다. 예를 들어 관공서의 말단 직원들도 여기에서 배제된다고 할 수 없는데, 그것을 보여주는 관공서의 친절한 나이든 여직원 같은 캐릭터도 영화 속에는 존재한다. 그리고 이런 캐릭터는 켄 로치의 영화에서 그렇게 낯설지 않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이것은 연대와 복지의 어떤 연관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복지도 결국 보편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게는 '선별적 복지'라는 말은 누군가가 말하는 '진보적 보수주의자'만큼이나 우스꽝스럽게 들린다. 영화 속에서도 케이티의 딸이 식료품 지원을 받는다고 놀림을 받았다며 케이티에게 말하는 장면이 있다.)

 

이 두 가지, 그러니까 관공서의 고압적인 부조리와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주위 사람들과의 작은 연대는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다니엘(로 상징되는 한 인간)은 이 일련의 부조리함을 통해 자존감을 조금씩 침범당하고 잃기도 하지만, 대신 작은 연대들을 통해 그 침해된 자존감을 조금씩 보충해(회복해)나가며 결국 하나의 인간으로 한명의 시민으로 남는다. 그것은 다니엘의 마지막 선언으로 극명하게 보여지는데, 그 선언은 아마도 켄 로치 자신의 선언이기도 할 것이다. 개도, 보험번호 숫자도, 하나의 화면 속 점도 아닌, 정당한 권리를 지닌 한명의 인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선언. 다시 말해서 이 선언은 영화의 제목에 있는, 다니엘이 스프레이로 관공서 벽면에 썼던 문구의 서두에 있는 그 말 'I, Daniel Blake'와도 맞닿아 있다. 

 

켄 로치가 영화 속에서 말해오던 것은 늘 그런 것이었다. 켄 로치의 영화는 심플하다. 켄 로치의 영화는 다니엘의 걸음걸이를 닮았다. 가야할 곳을 알고, 그곳에 에둘러 돌아가지 않고 묵묵히 나아가는 심플한 걸음걸이. 이 영화에서도 켄 로치는 그저 현실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장면들을 차곡차곡 쌓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예를 들어 도서관에서 컴퓨터 좌석이 다 찼다는 말을 다니엘이 듣는 씬이 있다. 보통의 영화에서라면 장면 전환하여 잠시 후 다니엘이 컴퓨터를 사용하는 장면만 보여줘도 될 듯 하지만, 켄 로치는 굳이 이 사이에 다니엘이 시간을 보내기 위해 거리 상점가를 배회하는 장면을 끼워넣는다.) 그러나 차곡차곡 쌓인 것들이 늘 그러듯이, 이 영화에서 그 쌓인 장면들은 마지막에 힘을 발휘한다. 그의 그 선언이 단지 말뿐인 공허한 선언이 아님을, 그가 차곡차곡 쌓은 영화 속의 여러 장면들이 증명하기 때문이다.

 

켄 로치는 예전부터 그랬듯 여전히 어떤 의미에서는 낙관주의자인 것 같다. 물론 누군가는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에 어떤 낙관적인 현실이 있는가? 영화 속 결말에 어떤 낙관이 있는가? 하지만, 낙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변화할 수 있다는 믿음,이 아닐까. 나는 그 마지막에서 어떤 낙관을 읽어내고 싶다. 다니엘의 글을 케이티가 읽고, 그곳에 참여한 여러 사람들의 면면을 차례대로 비추는 그 마지막. 다니엘과 작고 사소한 관계들을 주고 받았던 여러 사람들, 다니엘이 변화시킨 작은 세계. 켄 로치가 그리던 세계는 거대한 투쟁만이 있는 세계가 아니라 조금 더 세부적으로 들여다보면 그렇게 작고 사소한 관계들, 갈등들이 존재하던 세계였다. 그리고 그것을 관통하고 있는 단 한 가지가 있다면 변화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의 영화는 후기에 들어올수록 점점 도리어 낙관적이 되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대체로 영웅을 요구하거나 어렵고 힘든 투쟁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이 한 명의 권리를 가진 시민이라는 점을 자각하고 자신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말처럼 쉽지는 않다. 그것은 '나, 다니엘 블레이크'와 같은 어떤 결기를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니까. 어쩌면 이것을 영화 속 포스터에 있는 것과 연결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범위내에서의 점핑 말이다.

 

 

 

 

- 2017년 1월, CGV 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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