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번뇌를 안고 죽어갈 것인가

Ending Credit | 2015.12.29 23:16 | Posted by 맥거핀.

 

 

가끔 이야기가 만나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다. 김영하의 <읽다>에 인용된 신형철의 이 글(<정확한 사랑의 실험>에 나온 글이다.)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를 이야기하는 글이지만, 그것은 최근에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약속된 장소에서>를 떠올리게 했다.

 

<롤리타>라는 소설을 읽지 않아도 된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롤리타 콤플렉스'라는 말이 있지만, 그 말은 한 인간을 이해하는 말이 아니라 오해하는 말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사내를 이해하는 길은 오로지 그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방법밖에 없다. 제대로 읽기만 한다면 우리는 '롤리타 콤플렉스'라는 말을 집어던질 수 있게 될 것이고, 무죄추정의 원칙을 새삼 되새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깨닫게 될 것이다.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읽다> p.153~154)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를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전에 먼저 전채요리 격으로 하루키의 이 책 <약속된 장소에서>를 읽었다. 세기말의 일본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는 옴진리교의 지하철 사린 사건을 하루키가 접하고, 그들이 어떤 집단인지를 탐구하기 위해 옴진리교 신자(옛 신자)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묶은 하루키의 이 책은 (이렇게 표현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예상보다 재미있었다. 하루키가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지하철 사린 사건의 피해자들을 인터뷰한 <언더그라운드>와 대칭을 이루는 책이지만, 그 구성은 약간 다르다. 피해자들의 진술을 묵묵히 그대로 들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던 <언더그라운드>와 달리 <약속된 장소에서>의 하루키는 조금 더 적극적이다. 그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에 있어서는 적극적으로 질문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반박도 서슴치 않는다. 그리고 책의 말미에서 심리학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들의 세계를 읽을 수 있는 하나의 독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이들의 이야기를 거름망 없이 그대로 읽었을 때의 어떤 '위험'을 하루키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느낀 어떤 '재미'라는 것도 그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나중에 또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들에게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 흔히 종교집단에 빠지는 사람들을 비논리적이거나, 감정적, 혹은 단순하다고 보는 경향이 있는데, 이들은 적어도 어떤 면에서는 매우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다. 이들은 사회의 일반적인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것이 논리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의 빈틈을 옴진리교가 파고 들었다. 즉 이들은 현세가 가지는 어떤 가치들 혹은 현세 그 자체에 대해 '의문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 의문들이 주는 '번뇌'를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그 '번뇌'를 해소시켜 더 높은 차원의 인간(혹은 다른 무엇)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옴진리교에 빠져들었다. 옴진리교는 그들의 의문에 대해 해답을 주었고, 존사(아사하라 쇼코)는 그 의문을 알기 쉽게 그들에게 풀어주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우리 누구나가 느끼는) 사회가 가지는 수많은 모순들과 의문들, 그 의문들에 답을 얻고 그것으로 번뇌를 벗어날 수 있다면 적어도 그것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심리학자는 그것을 반대로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말이죠, 번뇌와 소모가 없다면 종교가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번뇌를 버리면 그 사람은 이미 부처니까요. (번뇌를 버리는 건 수행이 아니로군요.) 네. 그건 이미 부처지 인간의 수양이 아니에요. 그러나 우리는 신이나 부처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제 번뇌가 사라졌나 싶으면 여전히 남아 있는 거죠......(중략) 그래서 그런 수준의 (옴진리교) 사람들은 번뇌와 더불어 살아갈 힘이 조금 부족합니다. 안타깝긴 하지만요. 하긴 다른 방향에서 보면, 우리 범인(凡人)보다는 순수하거나 매사를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식으로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래도 그건 역시 엄청나게 위험한 일입니다. 그 사람들이 모두 부처의 나라로 간다면 상관없겠지만, 이 세상에 머물러 있는 한은 상당히 큰일이죠. 그래서 저는 인간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번뇌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역시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약속된 장소에서> p.289~299)

 

번뇌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불가능한 인간들, 혹은 번뇌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즐겨 다루는 인물들도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아들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맞닥뜨린 부모들, <환상의 빛>의 남편이 왜 죽었는지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여자, <걸어도 걸어도>의 죽은 아들(또는 형)의 빈자리를 안고 살아가는 가족, 혹은 <아무도 모른다>의 자신들을 버리고 떠난 엄마의 부재를 안고 살아가는 아이들. (그리고 <디스턴스>에서는 옴진리교 사건을 둘러싼 피해자들과 가해자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그것을 '남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어떤 과거의 사건들이 남긴 잔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즐겨 그리기 좋아했던 인물들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무엇인가 답을 알고 싶어했지만, 이미 떠난 사람들은 아무런 답도 그들에게 주지 않거나, 혹은 이미 줄 수 없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신작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인물들은 어떨까. 이야기는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시작한다. 다시 말해서 이야기는 남아있는 사람들 속에서 시작한다. 15년 전 집을 떠난 아버지의 부고. 그 부고를 듣고 두 여동생과 같이 살고 있는 큰딸 사치(아야세 하루카)는 자신은 가지 않겠다며, 동생들을 대신 보내지만, 마음을 돌려 뒤늦게 장례식장에 나타나고 거기에서 아버지의 두번째 부인이 낳은 딸, 그러니까 이복동생 스즈(히로세 스즈)를 만난다. 그리고 사치는 이제 갈 곳이 없어진 스즈에게 같이 살 것을 권한다. 다시 말해서 사치는 고레에다 인물들의 자장 속에 있다. 아무 답을 주지 않는 인물이 떠나며 남긴 잔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 번뇌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다시 그리려고 하는 것일까.

 

그런데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고레에다 감독이 그려냈던 것이 단지 번뇌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 자체만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가 즐겨 그렸던 것은 바로 그들의 '시간'이었다.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 속에서 그들은 항상 긴 시간을 지나왔다.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에서 그 흔한 플래시백은 찾아보기 힘들다. 과거로 돌아가 그들에게(정확히 말하면 영화를 보는 우리들에게) 어떤 해답을 주는 것을 그는 반칙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대신에 그 긴 시간들을 묵묵히 견뎌내는 쪽을 늘 택했고, 그래서 감독의 영화에서 자주 나타났던 것은 플래시백이 아니라, 긴 시간의 서술이었고, 그에 따른 시간의 점핑이었다. (이 영화에서도 수많은 예를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영화의 초반부 출발하려 하는 기차에서 사치가 스즈에게 같이 살자고 제안한 후, 그것에 뒤이어 바로 스즈가 세 자매를 찾아오는 씬이 붙는 것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간의 점핑은 어떤 급작스럽다는 느낌을 관객에게 주지 않는다. 그보다는 도리어 그들의 긴 시간을 관객이 같이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같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 그것을 이렇게 바꿔서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번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보다보면 문득 이상한 씬의 연결이라고 느껴질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영화의 초반부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나고 아버지가 살던 마을을 돌아보던 세 자매에게 스즈가 아버지가 남긴 유품이라며 오래된 사진을 들고 오고, 세 자매가 추억에 빠져 사진을 들여보던 장면이 있다. 통상적인 영화 문법이라면 여기에서 세자매의 시점 숏, 그러니까 사진을 보여주는 컷을  끼워넣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감독은 끝끝내 사진은 보여주지 않고, 그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매들의 옆모습만 비춘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 세 자매는 스즈에게 마을에서 네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어디냐고 묻고 스즈는 산에서 마을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조망이 좋은 곳으로 그녀들을 데려간다. 그리고 자매들은 스즈에게 마을의 풍경이 지금 우리가 사는 곳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그러면 이때쯤이라면 한번쯤 마을의 조망컷을 끼워넣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지만, 감독은 여전히 그것을 관객들에게 제공해 줄 맘이 없다. 뒤늦게서야 그 조망을 바라보는 (스즈를 포함한) 네 자매의 뒷모습을 비추며 조망컷을 멀리에서 살짝 제공할 뿐이다. (비슷한 예는 후반부에서 찾을 수도 있다. 배 안에서 불꽃놀이를 보는 아이들, 그것을 보여주며 화려한 불꽃놀이를 보여줄 법도 하지만, 고레에다 감독은 검은 밤바다에 비친 흐릿한 색으로만 그것을 보여주거나 불꽃놀이에 넋이 빠져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만 비춘다. 그리고 뒤늦게 회사 옥상에서 동료들과 불꽃놀이를 보는 둘째 요시노(나가사와 마사미)의 컷을 여기에 연결시키며 그들의 뒷모습과 함께 이 불꽃놀이를 살짝 보여준다. 마치 "이렇게라도 살짝 봤으니까, 됐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러니까 여기에서 고레에다 감독은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진이나 조망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그것을 추억에 빠져서, 혹은 자신들의 마을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보고 있는 자매들의 리액션을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 때 이런 질문이 혹시 가능하지 않을까. 자매들의 (다른 무엇인가를 보는) 옆얼굴, 혹은 뒷모습을 보는 이 시선은 누구의 시선일까. 아니, 나는 그것이 죽은 아버지의 시선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대신에 단지 감독은 우리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이들을 같이 지켜봐 주기를 바라는 게 아닐까,라고 묻고 싶다. 그들의 긴 시간을 같이 지켜보자, 감독은 우리 관객들에게 이렇게 권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어쩔 수 없이 혼자 찍혀야하는 컷을 제외하고는 카메라는 좀처럼 인물을 혼자 잡는 법이 없다. 자매들은 늘 둘이나 셋이 함께 카메라에 잡혀 있고, 카메라는 집안의 어딘가, 혹은 바깥의 어딘가에서 묵묵히 이들을 지켜보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유령의 시선이지만, 그러나 절대 으스스하지 않다. 그것은 어쩌면 이들의 죽은 아버지나, 혹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떠나가고 이들을 대신 키워준 외할머니의 시선일 수 있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묵묵히 물러나 이들의 대화를 무심히 지켜보거나 이들의 무엇인가에 열중한 뒷모습을 잡는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카메라에 대고 우리가 사이가 좋거나, 혹은 좋아졌어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에 영화는 그저 둘이나 셋, 혹은 네 명 전체가 같이 있는 모습을 카메라를 통해 긴 시간 묵묵히 보게 만든다. 이 이상의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그러니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말을 놓아도 될까,라며 쭈뼛거리던 자매들이 왜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 쓰잘데 없는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는지. 매실주를 한잔만 마시고도 기절해버리던 소녀가 어떻게 독하게 담궈진 매실과 그렇지 않은 매실을 구별해 언니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있는지 말이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혹시 있었을지 모를 번뇌가 어떻게 되었는지 말이다.

 

아니 나는 그들에게 있어서 번뇌가 사라졌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약속된 장소에서>의 심리학자의 말대로 사람이 번뇌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할 테니 말이다. 그러나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를 통해 한가지를 아주 어렴풋하게 생각해 볼 수는 있을지도 모르겠다.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할지 몰라도, 그 번뇌와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은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번뇌에 이길 수는 없지만, 지지않을 수는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그것은 긴 시간 동안 견뎌내며 그것들을 오래동안 지켜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물론 쉬운 것이 아니다. 긴 시간을 견뎌내는 것은 힘들고, 어딘가에서 옴진리교와 같은 쉬운 답이 호시탐탐 빈틈을 노리며 기다리고 있으니까 말이다. 어떻게 번뇌를 품고 살아갈 것인가. 이것을 이렇게 바꿔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떻게 번뇌를 안고 죽어갈 것인가. 고레에다 감독의 이 영화는 장례식으로 시작해서 장례식으로 끝나는 영화다. 그런 영화다.

 

 

 

- 2015년 12월, 메가박스 코엑스

 

 

 

  

'Ending Credi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교사, 김태용  (2) 2017.01.13
<곡성> 단상들  (6) 2016.05.24
어떻게 번뇌를 안고 죽어갈 것인가  (2) 2015.12.29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드니 빌뇌브  (0) 2015.12.15
최근에 본 것, 보고 있는 것  (2) 2015.11.12
소수의견, 김성제  (0) 2015.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