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스러운 제목에 촌스러운 포스터에 '<시티 오브 갓><눈먼 자들의 도시>제작진이 만든 최고의 영화'라는 없어 보이는 문구. 감독의 명성을 내세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유명한 배우의 이름을 걸 수도 없고, 없는 박스오피스 기록을 들먹이며 숫자 마케팅을 할 수도 없는 영화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그 홍보 문구를 보며 썩 끌리지는 않는 영화였다. 단지 그 영화를 보러 간 것은 <씨네 21>의 'Must See' 코너에 이 영화가 소개되어 있는 것을 본 후였다. must라..must. 글쎄. 그러고보면 난 누군가에게 '이 영화를 꼭..반드시 보라'라고 말해본 적은 없다. 글쎄, 뭐 봐도 괜찮은 영화에요,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입니다, 정도. 무엇보다 영화란 것을 '꼭 봐야할 어떤 것'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꼭 봐야할 어떤 것이란 대로 한복판에서 경찰들이 시민들을 때려잡는 영상, 혹은 어느날 새벽 어느 한 망루에 오른 사람들을 누군가가 공격하는 영상이 될지언정, 영화는 아닌 것이다. 그건 지금도 그렇다. 하여튼 간에, 아무튼 그래서, 나는 그 잡지를 줄곧 보면서도 그 must가 꽤나 놀랍고 신기했다. 이렇게 당당하게 'Must See'라는 제목을 붙일 수가 있다니. 이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나오는 것일까. 그만큼 이 영화가 좋은 영화라는 의미일까, 혹은 영화에 대해 어떤 애정이 있다는 의미일까.

다시 한 번 뭐 어쨌든 간에. 영화는 귀엽고도 둥글둥글하며, 동시에 슬프면서, 꽤나 웃기는 영화였다. 1988년 브라질과 맞닿은 우루과이의 국경마을 멜로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오기로 결정되면서 작은 마을은 들끓는다. 교황님을 돈벌이로 이용해도 될까..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을 사람들은 집을 팔고, 가진 것을 팔아, 장사를 해 떼돈을 벌 궁리를 한다. 그날 엄청난 사람이 이 작은 마을에 몰려들 것은 자명한 일이고, 그들은 먹고, 마시고, 무언가를 살 것이기 때문이다. 브라질에서의 밀수로 아내와 딸을 먹여 살리는 이 남자 비토(세자르 트론코소)는 기발한 생각을 한다. 난 머리가 참 좋아...하고 스스로를 칭찬하며, 그는 생각한다. 몰려든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그러고는...싸기도 하겠지. 그래, 유료 화장실을 차리는 거야. 그래서 아내와 딸에게는 가지고 싶은 것을 사주고, 집도 고치고, 나는 오토바이를 사는 거지..오토바이!

기발한 설정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이 이야기는 실화다. 물론 실제로 비토처럼 유료 화장실을 차리려고 한 사람이 있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 당시 그 작은 마을은 떼돈을 벌려는 사람들의 꿈으로 부풀었고, 언론에서는 이 사람들의 꿈을 부추기고, 부풀리고, 많은 사람들이 올 것이라고 말하며, 이들을 일확천금- 이라고 해봤자, 얼마 안되는 돈일 테지만 -의 세계로 이끌었다. 그래서? 그 끝은 어떻게 되었냐고? 글쎄. 조금만 생각해보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예상하기 어렵다면 다음의 영화의 홍보문구를 다시 한번 곱씹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빠의 화장실>은 가난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따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기적과 행복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워주는 영화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다. 이 영화가 빛나는 것은 이 모든 소동이 지나간 후일 것이다. 이 아버지 비토는 신성한 교황의 말씀과 그 교황의 말씀을 들은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고작 황금색의 똥으로 밖에 이해하지 못한 일종의 불경을 저질렀지만, 자신을 괴롭히던 양심과 화해하고, 하나의 작은 악을 뿌리침으로써 선의 세계에 한 발짝을 내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또다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딸 실비아는 자신이 꿈꾸던 저널리스트라는 것이 어떤 허위를 가지고 있는지 살짝 들여다봄으로써, 그것들과 작별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을 포함한 마을 사람들은 성자와 성부와 성령이 삼위일체임을 이해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교황과 대통령과 그들을 괴롭히던 기동순찰대나 국경수비대가 삼위일체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며, 뭐 그렇다 하더라도, 어쨌든 평화롭고 우습고, 궁상맞게 살아갈 것이다. 뭐 어쨌든, 살아가야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 이후에 또다른 교황이나 혹은 록스타나 혹은 미국 대통령이 온다해도, 눈도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관객들은...우리들은 그저 키득거리고, 낄낄거리다가, 마지막 자막들을 바라보며 안타깝고 안쓰럽게 웃어제끼면 될 것이다. 아..저기도 사람이 사는 곳이고, 우리랑 크게 다를 것도 없고,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더 안쓰러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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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영화를 보고 영화의 줄거리나 내용들을 생각하기 보다는 다른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저기 나오는 나쁜 넘들이 요즘 우리 주위에 얼쩡대는 나쁜 넘들보다 더 나은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여기 나오는 나쁜 넘들. 나쁘지만, 참 인간적이다. 이들이 인간적인 이유는 대놓고 나쁘기 때문이다. 고작 밀무역하는 것 좀 잡아냈다고(사실 말이 밀무역이지, 조금은 한심하고 소박한 수준이다), 딸을 바치라고 하지 않나...자기 일을 돕지 않겠다고 했다고 해서, 가족을 어떻게 하겠다고 협박하지 않나 말이다. 어쩌면 이는 이 영화 속 세상이 법보다는 폭력이 가까운 사회임을, 어떤 의미에서는 발전이 좀 덜된 사회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런 사회에서는 사회 구조 속에서, 일종의 구멍들이 많기 때문에 나쁜 놈들이 마음껏 활개칠 수 있는 동시에, 그 구멍 속에서 힘없는 서민들도 그 구멍을 역이용하여 살아남을 수 있다. 예를 들어 1달러의 뇌물, 혹은 위스키 한 병으로서도 뇌물의 기능을 할 수 있으며, 그 뇌물을 이용하여 힘없는 보통 사람들도 조금은 숨을 쉬고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회가 발전하면 할수록, 지배체제가 그 지배체제의 기능들을 폭력이나 힘보다는 그들 입맛에 맞춘 법으로 전환하고자 할 때 세상은 조금씩 더 무서워지기 시작한다. 몇 달러의 뇌물은 이제 당연히 통하지 않게 된 사회, 그러나 거대한 재벌의 거대한 돈이나 이상하게 구조화된 법을 내세운 권력에는 너무나도 순응하고, 누구도 그들을 어떠한 이름으로도 제지할 수 없게 되어가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 점점 법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지배될 때, 그 지배는 얼마나 무섭고 거대하며, 페쇄되어 있으며, 차가운 것인가.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나오는 뒷맛이 영 씁쓸하고 개운치 않다. 모든 소동이 지나간 뒤에도 여전히 교황과 정부와, 그들이 지배하는, 그들이 만들어낸, 그들이 믿어 주기를 원하는 모습만을 앵무새처럼 떠드는 언론의 모습을 보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보며 비토가 할 수 있는 일이란 TV에 병을 던지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말이다. 이들은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이들이 욕하는 정치인들, 이들은 1988년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그 이후에 어떤 정부와 정치인과 언론을 보았을까. 우리에게도 거대한 힘과 투명한 폭력은 가까이 있는 것일까. 극장에 깔린 '대한 늬우스'들이 그런 전조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혹은 자신들의 정책이 서민들을 위한 정책이라고 말하며, 뉴타운 공약을 내세우고, 그 뉴타운 공약들이 서민들에게 먹혀들어 그들이 정권을 잡는 것을 보았을 때에 그것들은 더욱 가까이 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이후에 무엇을 보게 될까.

사실 결국에는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다. 작은 힘들이 희망이다.




- 2009년 7월, 하이퍼텍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