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파리, 양익준

Ending Credit | 2009.04.28 02:52 | Posted by 맥거핀.



(미리니름 있음)





김영진 평론가는 이 영화를 보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똥파리>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싸가지 없는 캐릭터를 다루는 이 영화가 실은 너무 마음씨 고운 영화라는 것이다. 너무 대책없이 착해서 그 일면성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글쎄. 이 말에 동의할 수 있을까. 동의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럴 수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착하다'라는 말을 어떤 부분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서 생각은 조금 달라질 수도 있겠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영화는 착한 영화는 아닐지 몰라도, 잘 짜인 영리한 영화라는 것이다.

이 영화의 전체적인 이야기는 사실 여러 다른 영화들에서도 비슷하게 변주되곤 하는 것이다. 가정 내의 지난한 폭력이 또다른 폭력적인 사람들을 낳고, 그 폭력은 대를 이어 전해지며, 결국 자신을 망가뜨린다는 이야기. TV에서 하는 <긴급출동 SOS>같은  프로그램에서 1주일에 한 번씩 틀어대곤 하는 그런 이야기들 말이다. 폭력에 물들어가는 가정들과 망가지는 어머니와 자식들이 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그런 이야기들. 그런데 이 영화는 가정 내에서만 머무르지 않는다. 영화 전체에서 말해지는 폭력의 구조는 이중이다. 하나는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폭력적인 구조들이고 다른 하나는 이 사회의 폭력적인 구조들이다. 그러한 폭력의 구조들은 이중의 나선처럼 서로 꼬이고 얽혀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영화 속에는 있다. 가정 내에서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던 남편은 갑자기 들이닥친 상훈(양익준) 일행에게 구타당한다. 상훈 일행은 사채 빚을 받으러 남편을 찾아갔던 것이다. 여기에서 상훈의 대사가 참 인상적이다. "다른 사람 x나게 패는 xx는, 자기는 절대 안 맞을 거라고 생각하지."

이러한 폭력의 계층적인 구조와 점점 더 확대재생산 되는 폭력의 구조, 그리고 가정의 폭력과 사회의 폭력이 맞물려 돌아가는 순환의 구조는 영화 <구타유발자들>을 연상시킨다. 다만 <구타유발자들>이 한정된 공간을 제시하고 캐릭터들을 그 곳에 몰아넣음으로써 폭력의 구조를 인위적으로 만들었다는 인상을 준다면, 이 영화 <똥파리>는 그 보다는 훨씬 넓은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폭력의 구조를 드러나게 만든다. 즉 <구타유발자들>이 하나의 실험연구를 연상시킨다면, <똥파리>는 자연스러운 관찰카메라를 연상시킨다고 할까. 늘상 연구자들이 말하는대로, 실험연구보다는 관찰연구가 훨씬 힘들다. 이 영화가 이런 이중적인 폭력의 구조를 자연스럽게 보여준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 영화가 잘 짜여졌다는 것을, 한 마디로 영리한 영화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게다. 양익준 감독이 한 인터뷰들에서 보면 "그냥 생각나는 대로 찍었다."는 식의 말들이 많은데,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감각이 엄청나게 뛰어나다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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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이 영화가 영리한 부분은 이 영화가 일종의 캐릭터 영화라고 착각할 정도로 캐릭터의 힘으로 이끌어가는 장면이 많다는 것이다. 비참하고도 이중적인 폭력의 구조, 이 영화가 그런 구조들을 차례차례 나열하는 식대로만 보여줬다면 이 영화는 힘을 잃어버렸을 것이고, 폭력이 난무하지만, 지루하고 짜증나는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관객을 쉽게 지치게 했을 거라는 말이다. 이 때 빛을 발하는 것이 캐릭터의 힘이다. 이 캐릭터들은 중간중간 곳곳에서 튀어나와 영화에 에너지를 부여한다. 즉 이 영화가 '에너지가 가득한 영화'라고 말해질 때, 이 '에너지'라는 것은 영화의 구조나 이야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 캐릭터들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캐릭터들이 가지고 있는 힘은 그들의 비전형성에 있다. 이 영화의 대표적인 캐릭터인 상훈부터가 그렇다. 영화의 시작부분, 한 남자가 한 여자를 길거리에서 심하게 구타하고 있다. 이 때 상훈이 나타나 남자를 때린다. 그러나 폭력의 강도는 점점 심해지고, 처음에는 일시적인 쾌감을 느끼던 관객들도 점점 이 장면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캐릭터의 비전형성이 드러나는 것은 이 이후부터이다. 상훈은 남자를 실컷 때린 후, 뒤돌아서서 여자에게 폭력을 가하기 시작한다. "왜 맞고다녀, 이 xxx야." 같은 대사를 날리면서 말이다. 이런 캐릭터를 봤나. 뭐지. 이 똘끼는. <나쁜 남자>의 조재현 이후로 오랜만에 보는 똘끼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 캐릭터가 불안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불안함은 영화에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제공한다. 이러한 비전형성이 주는 에너지는 비단 상훈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상훈과 처음 만났을 때 쉽게 물러서지 않는 연희(김꽃비)나, 상훈의 동업자이자, 사장인 사채업자 만식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보통의 여고생 이미지나 보통의 사채업자 이미지를 뛰어넘어 비전형성을 창조해낸다.   

어떤 이야기들은 전형적인 캐릭터를 필요로 한다. 전형적인 캐릭터가 그들의 캐릭터의 전형성을 어떻게 극대화하여 보여주는가에 그 이야기의 성패가 달려 있는 이야기들도 있다. 예를 들어 막장드라마들이 그렇다. 그런 영화에서 나오는 악역들은 더욱 표독스러워야 하고, 착한 캐릭터들은 너무나도 선해야만 한다. 시청자들은 그걸 즐기기 때문이다. 막장 드라마에서 표독스럽지 않은 악역이나, 결단력 있는 남자 캐릭터는 얼마나 재미가 없는가. 사람들은 "저건 말도 안돼!"하며 분노하다가도, 금방 "왜 말이 안돼? 드라마잖아."라고 말해 줄 것이다. 그러나 <똥파리>와 같은 이야기에서 전형적인 캐릭터가 나오는 순간, 영화의 에너지는 사라져버릴 것이다. 이 영화는 그저 사회고발물이 되거나 눈물을 욕설로 대치한 신파극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으로 이 영화의 연기가 매우 자연스러워 보이는 이유가 이 때문이 아닐까. 세상에는 전형적인 캐릭터보다 이 영화에서처럼 비전형적인 캐릭터들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캐릭터를 전형적으로 연기하는 것만큼 부자연스러운 것이 있을까. 왠지 이 영화의 상훈이나 연희, 만식, 그리고 환규나 영재 같은 다른 캐릭터들도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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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얘기하고 싶은 것은 이 영화가 영리한 것인지, 그를 뛰어넘어 교묘한 것인지 모호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이 영화에는 지나치다 싶게 많이 보여주는 장면이 있는가 하면, 매우 짧게 스치고 지나가는 장면이 있고, 또 아예 보여주지 않는 단절의 부분이 있다. 이는 의도했던, 그렇지 않던 간에 상당히 계산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자살을 하기 전, 상훈의 누나와 조카와 함께 아버지가 플스 게임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그 이후에 아버지가 자살을 하는 장면으로 넘어간다. 즉 중간에 있어야만 마땅한 어떤 사건(상훈이 아버지를 구타하는, 또는 상훈과 아버지 간의 어떤 충격적인 사건)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또 상훈이 아버지를 구타할 때 조카가 그것을 보게 되는 장면도 있다. 그 장면 이후에 마땅히 뒤따라야 할 조카의 충격, 혹은 상훈과의 어떤 관계들은 잘 보여지지 않는다. 이러한 장면들은 꽤나 많다. 갑자기 고기집으로 넘어가는 마지막 장면도 그렇고, 상훈이 연희 어머니의 포장마차를 부수는 사건들도 보여지지 않거나 매우 짤막하게 처리된다. 또 남다은 평론가가 <씨네 21>에서 지적한 다음의 부분들도 있다. 길지만 잠깐 인용한다.

연희(김꽃비)는 상훈(양익준)이 건달이라는 사실은 알지만 그 건달이 엄마의 포장마차를 때려부순 그런 깡패라는 건 모르고, 상훈은 결국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영재가 연희의 동생인 걸 모른다. 상훈의 누나는 상훈이 어떤 일을 하는지 잘 모르고, 만식의 고깃집이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짓밟은 결과물이라는 것을 모른다. 무엇보다 연희와 상훈은 연애 비슷한 걸 하기 시작하면서도 각자의 가족사나 상처를 숨긴다. 
이 지점에서 나는 인물들의 이런 무지함이 영화적 비극을 배가시키기 위한 의도가 아니라, 영화가 인물들을 보호하기 위해 끝내 포기하지 못한 최소한의 장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 영화는 인물들이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 모르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건 아닐까.

영화가 인물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한 가지, 이렇게 인물들을 보호하고 특정의 장면을 생략하는 것이 관객에게 어떻게 다가오는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나 본다. 어쩌면 이런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특정의 장면들과 구조의 일부분을 의도적으로 숨김으로써 관객에게 영화의 구조보다는 캐릭터에게 집중하게 만드는 것, 그래서 자꾸 캐릭터에 동화되도록, 심정적으로 응원하도록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특정의 장면이나 구조를 숨겨 캐릭터에 집중하게 만든다고 해서, 캐릭터를 응원하게 되지는 않는다. 상훈이라는 캐릭터를 응원하게 만드는 것은 그 보다는 다른 이유가 더 클 것이다. 그 이유를 굳이 찾자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상훈은 <그랜 토리노>의 동림 선생님의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살아가면서 절대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딱 1명 꼽자면, 그게 상훈'일 정도로 무서운 캐릭터지만, 자꾸 그를 응원하게 만든다. 여기서의 응원이란 안타까움에 가깝다. 이 영화는 지속적으로 관객이 상훈에게 심정적으로 동의하고 그를 응원하게 만들다가도, 그것을 그 다음 장면을 통해 지속적으로 막는다. 상훈은 조카에게 플스를 사주고, 잘 놀아주는 좋은 삼촌의 모습을 보이다가도, 또 연희와 욕이 실린(?) 농담을 하며 잘 지내다가도 갑자기 돌변하여 아버지를 구타하고, 주위 사람을 이유없이 때린다. 관객 입장에서는 "그래, 그래, 지금처럼 살아"하고 생각하게 만들다가도, "쟤 갑자기 또 왜 저러니."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즉 관객들을 지속적으로 안타깝게 만든다. 그리고 이 안타까움은 마지막에 최고조에 이른다. 상훈이 사채업에 손을 씻고, 가장 착하게 행동했을 때 사건이 터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지막 이 대사는 상당히 안타깝게 들린다. "왜 우물쭈물해?" 여기서 우물쭈물한다는 것은 물론 착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이런 특정의 장면들과 구조를 숨기는 것이 가미될 때 이 착한 캐릭터에 동화하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해 의심이 들기도 한다. 이 동화와 응원은 무엇으로부터 나오는가. 그래서 여기에서 김영진 평론가가 처음에 했던 말에 동의하기가 조금은 의심스러워진다. 이 영화는 너무 대책없이 착한 캐릭터가 나오는 착한 영화인가. 그런가. 그리고 한편으로 보았을 때 이것이 이 영화의 가장 영리하고도 교묘하며, 놀라운 점이다. 착한 영화라고 느끼게 되는 이상한 마법.

하기사, 감독이 이 영화를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했던가.




- 2009년 4월. 프리머스 신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