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의 영화들

Interlude | 2009.01.01 16:28 | Posted by 맥거핀.
2009년의 첫글로써 어울리지 않는 글이란 건 안다. 어쨌든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존재이니까. 앞이 보이건 보이지 않건 말이다. 그러나 왠지 이런 정리를 안하고 넘어가자니 섭섭한 부분이 있다. 2008년은 나에게는 전체적으로 보이지 않는 부분들이 더 많은 시간들이었지만, 가끔 좋은 영화들이 나타나서 불빛을 깜박거려 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2008년에 보았던 좋은 영화들에 대한 나름의 정리. 이름하여 BEST 10. 그리고 그 영화들의 기억나는 장면 하나씩.

이 리스트는 2008년에 영화관에서 보았던 영화들만을 대상으로 하였다. 따라서 좋은 영화이긴 하지만 다른 경로로 보았던 영화들은 배제하였고, 개봉년도도 약간 뒤죽박죽인 면이 있다(재개봉하거나 영화제에서 미리 개봉하는 영화들도 있으므로).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영화관에서 보는 영화만이 무엇인가의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략의 시기와 보았던 영화관을 밝혀둔다. 아..그리고 BEST 10이기는 하나 순서는 없다. 이 10개의 영화의 순위를 매기는 것은 너무 어렵다.





밤과 낮, 홍상수.
명동 CQN, 2008년 3월.

사진작가(김영호)는 길을 걷다가 하늘에서 떨어진 어린 새를 발견하게 된다. 그 새는 땅으로 바로 떨어지지 않고 그에게 부딪혀 살아남게 되며, 그는 이 사실을 알고 우쭐해한다. 유머와 기이함과 캐릭터에 대한 조롱이 스며들어가 있는 전형적인 홍상수스러운 장면이지만, 이 장면은 또한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희망적이다. 물론 그것이 한편으로 또 이상해 보이기는 하지만.




렛미인 (Let the Right One In), 토마스 알프레드손.
명동 중앙극장, 2008년 11월.

소년은 물 속에서 죽을 각오를 한 것처럼 눈을 꼭 감고 있다. 곧 숨이 넘어가려는 찰나 저 멀리서 목이 잘린 머리가 뚝 떨어지고 소년의 머리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풀리며, 잘려나간 팔이 물 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리고 어디선가 팔이 하나 나타나 소년을 끌어올린다. 상당한 고어 장면이지만, 잔인하거나 무섭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도리어 아름답다고 말하면 지나친 것일까.




멋진 하루. 이윤기.
종로 단성사, 2008년 9월.

병운(하정우)은 희수(전도연)와 함께 길거리를 걷다 화장품 샘플(맞나?)을 나눠주는 곳을 지나게 된다. 병운은 유들유들하게 그곳으로 다가가 그것을 받아온 후, 느물거리면서 그것을 희수에게 건네준다. 희수는 뭐 이런 걸 받냐며 화내지만, 주머니에 그것을 챙겨 넣는다. 두 캐릭터의 성격이 한 순간에 드러나는 디테일한 명장면.




약속(La Promesse), 다르덴 형제.
명동 중앙극장, 2008년 9월.

영화의 마지막 소년과 여자는 지하철 통로를 걷고 있다.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은 소년과 남편을 잃은 여자. 이들은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이들이 가야할 길은 보이지 않는데, 이들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에도 지하철 소리는 여전히 들린다. 항상 주인공들을 딜레마에 몰아 넣고 그들의 선택을 기다리는 다르덴 형제지만, 이 장면은 너무 먹먹하다. 다르덴 형제의 최고작이 아닐까.





이스턴 프라미스 (Eastern Promises), 데이빗 크로넨버그.
압구정 CGV, 2008년 12월.

오토바이가 고장나 곤란에 빠진 안나(나오미 왓츠). 그녀에게 니콜라이(비고 모르텐슨)가 나타나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제의하고, 망설이던 안나는 그의 차에 올라탄다. 사례를 하겠다는 안나에게 니콜라이는 씩 웃어 보인 후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말한다. 오오..이것이 바로 카리스마!





추격자, 나홍진.
종로 단성사 or 서울극장(정확히 기억이..), 2008년 2월.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범죄심리학자와 지영민(하정우)과의 대결장면이다. "너 성불구지?"하고 다그치는 범죄심리학자와 살짝 빙글거리며 아니라고 답하는 지영민. 그리고 숨막힐 듯한 긴장감 속에서 지영민의 폭발. 짧은 장면이지만 심리적으로 아주 잘 설계된 장면. 추격자의 매력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뛰고 달리고 하는 그런 장면들보다 도리어 이런 장면들에 있지 아니할지. 폐쇄된 공간에서 흐르는 참을 수 없는 긴장감.






새드 배케이션, 아오야마 신지.
중앙 스폰지하우스, 2008년 3월.

아들의 장례식장에서 남편에게 따귀를 맞고도 웃으며, "남자들이란, 하고 싶은 대로 하라지."라며 웃을 수 있는 여자. 어떻게 해서 이 여자는 이렇게 된 걸까. 아니 어머니들이란 원래 그런 것일까.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가까이에 있는 존재. 가까이 있기에 언제나 의지할 수 있지만, 그만큼 무섭고도 커다란 존재, 그래서 언제나 도망치고 싶은 존재. 어머니들이란 그런 것일까.





걸어도 걸어도, 고레에다 히로카즈.
부산 대영시네마, 2008년 10월.

자신의 아들 대신에 목숨을 가지게 된 사람을 보는 어머니의 심정이란 어떨까. 더구나 그 사람이 자신의 아들보다 훨씬 더 변변치 않은 삶을 살고 있다면. 이제 아들의 기일에 그 사람을 오게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또다른 아들의 말에 어머니는 잔혹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한다. 일부러 오게 하는 것이라고. 아..어머니들이란 역시 무섭고도 알 수 없는 존재. 그리고 앞으로도 알 수 없을 존재.





흑사회, 두기봉.
신촌 필름포럼, 2008년 8월.

원숭이 섬에서 낚시를 하는 록(임달화)과 Big D(양가휘). 조직의 1인자 자리를 둘러싸고 이들에게 묘한 긴장감이 흐르지만, 록의 표정에서는 그러한 것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던 록이 갑자기 커다란 바위(록?)를 들어 Big D의 머리를 내리치고 그를 죽이려 한다. 원숭이 섬의 원숭이들은 이 장면을 보고 새끼원숭이들이 보지 못하도록 황급히 손을 끌어 도망간다. 원숭이보다 못한 인간들. 그 인간들의 속성이 극명하게 드러난 장면.






중경, 장률.
광화문 스폰지하우스, 2008년 11월.

쑤이에게 총을 도난당한 후 나체로 거리를 허위허위 걷는 경찰. 꿈인지 환상인지 실제인지 알 수 없는 장면이지만, 이 장면은 이상하게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근육이 있는 우람한 육체가 아니라, 뼈의 모습이 겉으로 드러난 남루한 육체의 전시는 마치 우리 인간들의 피폐한 정신들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듯 하다. 어쩌면 우리 인간들은 몇 가지의 천 조각들로 그렇게 우리의 황폐한 모습들을 숨겨가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