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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 모스타파 파루키

Ending Credit | 2013. 1. 15. 15:49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전체 내용과 결말이 들어있습니다.)


방글라데시의 한 시골마을. 촌장의 절대권력이 작용하는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상한 일은 급기야 매스컴의 주목까지 받게 된다. 그 이상한 일이란, 이곳은 모든 이미지가 금지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 이슬람 율법의 철저한 신봉자인 촌장은 영혼이 없는 것을 보고 그것을 우상화하여 따르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는 이슬람 율법에 따라 일체의 영혼없는 이미지를 금지시킨다. 물론 현대사회에서 영혼없는 이미지는 도처에 널려있다. 그곳에서는 반입되는 신문의 모든 사진은 하얀 종이로 가려지고, 텔레비전 시청은 금지되며, 사진찍기는 금기시되고, 컴퓨터, 노트북과 얼굴책('페이스북'을 촌장은 그렇게 부른다)은 생각조차 할 수 없으며, 휴대폰 역시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미지는 도처에 널려있고, 그것의 공습을 물리적으로 막는 것, 그리고 또한 정신적으로 막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므로 당연히 어떤 소동이 일어나기 마련이고, 영화는 그런 소동을 유쾌한 터치로 다룬다. 물론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가 이것을 이미지로 보고 있다는 것. 즉 영화라는 거대하고 압도적인 이미지로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영혼없는 이미지에 기꺼이 영혼을 내맡긴 가련한 상태에서 이 영혼의 수호를 위한 어떤 예정된 패배의 사투를 보고 있는 것.

물론 이것 중에 가장 핵심에 놓여진 것은 영화의 제목으로도 제시된 '텔레비전'이다. 이 영혼없는 이미지들의 총체인 텔레비전의 공습은 실로 무시무시한 것이어서, 이슬람교가 아닌 힌두교 신자라서 어쩔 수 없이 허용해준 바부 선생의 텔레비전에 곧 온마을 사람들이 그 영혼을 기꺼이 가져다 바친다. 바부 선생의 집에는 온마을 사람들이 몰려들며, 마을의 어린아이들은 수학 선생인 그의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 다른 수학선생님들이 실력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고 그의 집에 수학 과외를 받으러 간다. 촌장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이를 막기 위해 텔레비전을 강물에 내던지지만, 텔레비전의 위력은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급기야 일종의 혁명이 일어나는 등 소동은 끊이지 않는다. 모스타파 파루키의 영화 <텔레비전>은 이 소동극을 유쾌한 유머와 풍자를 섞어 결코 무겁지 않게 다루고 있는데, 이 영화가 흥미로운 점은 눈앞에 드러나는 사건들 이외에도 이 소동들이 어떤 이미지의 속성에 대한 이야기로서, 혹은 그런 이미지들의 마치 일종의 작동방식인 것처럼 다루어진다는 점이다.

텔레비전은 세상의 재현 혹은 어떤 시뮬라크르의 총체이다. 그것은 어떤 기술(技術)적인 측면에서도 그러하고, 동시에 기술(記述)적인 면에서도 그러하다. 즉 촌장의 말대로 현재 TV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미지는 당연히 그 인물 자신이 아니고, 그 인물의 어떤 기술(技術)적인 모사물이다. 동시에 TV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재현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영화 같은 것에서 이루어지는 재현에서 그 인물은 기술(記述)되는 그 인물이 아니다. 즉 <텔레비전>에서 '촌장'역을 연기한 그 배우는 그 촌장이라는 가상의 혹은 실제의 인물을 모사하고 있는 것이지, 그 인물 자신이 아니다. 영화 속에서도 촌장은 마을 사람들에게 텔레비전을 대체할 만한 오락거리로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낸 마을의 일종의 극장 - 이것의 무대는 실제의 텔레비전처럼 만들어져 있다 - 에서 이것을 지적해낸다. 즉 역사극에서 역사속 인물을 재현하는 것은 결국 결과적으로 영혼이 없는 이미지를 보는 것과 다를바가 없으며 엄격한 관점에서는 이것 역시 허용될 수가 없는 것이다. 즉 텔레비전은, 특히 마을 사람들이 환장하는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영화는, 이중의 기술적인 시뮬라크르라는 기술(奇術)이다.
 
이 영화가 독특해지는 지점은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촌장이 성지순례를 가기 위해 여권이 필요하므로 어쩔 수 없이 사진을 찍어야할 때 그 곤경을 극복하는 기발한 방식 같은 것 말이다. 촌장과 그의 수하는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촌장의 쌍둥이형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개발해낸다. 즉 촌장이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가상의 촌장의 쌍둥이형이 사진을 찍는다는 발상의 전환을 꾀하는 것. 이것은 이중의 가상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영화와 사실 그다지 차이가 없다. 아니면 촌장의 아들이 연애를 하는 방식을 살펴보자. 재미있는 것은 이 연애에도 이중의 기술이 만들어내는 실제와 실제의 모사물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기술(技術)적인 것이 두 사람이 몰래 숨겨둔 휴대폰으로 통화하며 그 목소리만으로 가상의 이미지를 상상하는 것이라면, 기술(記述)적인 것은 여기에도 두 명의 인물, 즉 촌장의 아들과 그 아들의 수하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즉 실제 연애를 하는 것은 촌장의 아들이지만, 이 연애를 작동시키는 것, 즉 두 사람을 노트북 화상채팅을 통해 몰래만나게 하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촌장아들의 매우 코믹하게 등장하는 수하의 몫이다. 이 연애에서 촌장아들의 수하는 촌장아들의 거의 모든 연애를 대신해주며, 심지어는 그가 실연했을 때 그 실연의 아픔까지도 대신해준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 흥미로워지는 것은 이 수하가 실제로 그 촌장아들의 연애 상대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촌장아들이라는 원본과 촌장아들의 수하라는 시뮬라크르는 동일한 대상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며, 적어도 여기에서는 원본과 복제물의 구별이 무의미해진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감독은 이를 조금 더 넓은 차원으로 확장한다. 이 소동극을 마치 어떤 극중의 극처럼 보이게 하는 것. 이 영화는 몇 가지 재미있는 장면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바부 선생의 학생이 불어나는 장면을 음성과 시각으로 연결하는 것이나, 휴대폰 음성만으로 이미지를 상상할 때 카메라를 360도 회전시키면서 실제의 이미지로 변하게 하는 등의 장면을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특정의 장면 외에도 영화는 유독 인물들을 어떤 창이나 틀 안에 배치시키는 것을 자주 활용함으로써 마치 이것이 어떤 극중의 극처럼 보이게 하고 있다. 즉 이 영화 <텔레비전>의 이 소동이 일어나는 폐쇄된 마을에서 이 마을사람들은 진심을 다하여 소동극을 '연기'하고 있으며, 그것은 이 이중의 기술이 만들어내는 시뮬라크르가 결국 피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준다. 즉 우리는 현대 사회에서 자신이 원본인지, 복제물인지 모른채, 때로는 진심을 다하여 일상을 '연기'하고 있으며, 그 시뮬라시옹은 때로는 너무나도 정교해 자기자신을 포함한 그 모든 사람들을 속인다. 다시 말해서 소동이 일어나는 이 마을은 현대사회의 작은 축소된 복제물이다. 이 공간에서 마을 사람들은 진심을 다하여 연기하며, 그것은 이미 진짜와 가짜를 구별해낼 수 없는 수준에 이르러 있다. 그것은 물론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진짜와 가짜를 구별해낼 수 있는가, 없는가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러한 세상에서 그것을 구별해내는 것, 즉 원본이 복제물이 되고, 복제물이 원본이 되는 시대에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해내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할까,라는 질문이 혹시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것을 어쩌면 이 마지막은 말해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사기를 당해 성지순례를 가지못한 촌장은 끙끙 앓아눕다가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방영되고 있는 성지순례 중계화면을 본다. 영화 속에서 내내 텔레비전을 배척하던 촌장은 그제서야 텔레비전을 바라보며, 울부짖는다. 나도 성지에 와 있나이다, 나도 성지에 와 있나이다,라고 반복하며 말이다. 이것은 영화 속에서 내내 독선적이고 독단적이었던 촌장을 조롱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나는 좀 다르게 읽혔다. 결국 얼마나 진심을 다하여 받아들이는가의 문제인 것. 결국 성지순례라는 것도 그와 별로 다르지 않지 않을까. 아무리 현재의 성지를 지금 순례해도 그곳은 옛날의 성인이 있던 그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과거의 성지의 일종의 모사물이다. 그러나 그곳을 정말 성지라고 생각하며, 정성을 다해서 참배하는 것, 그 모사물을 원본이라고 생각하며 받아들이는 것, 그 자체에 중요한 것이 들어있는 것이 아닐까. 그 마지막에 터져나오던 애타는 울부짖음처럼 말이다. 그것이 복제물인지 원본인지를 가려내는 눈은 결국 자신의 안에 있다. 시뮬라크르를 마음을 다하여 받아들이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시뮬라크르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이렇게 바꾸어 말할 수도 있다. 영화라는 환상을 더 이상 환상이 아니게 하는 것, 그것은 당신의 몫이다. Use your illusion.


덧.
'ACF 쇼케이스 2013' 영화제에서 관람. 좋은 영화를 볼 기회를 주신 <씨네21>에 감사드립니다. 작년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



- 2013년 1월, 인디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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