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

Recent Comment»

« 2024/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황해, 나홍진

Ending Credit | 2011. 1. 4. 16:49 | Posted by 맥거핀.





(<황해>, <추격자>, <부당거래>에 대한 스포가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영화를 본 이후에 질문이 넘쳐나는 경향들이 있는 것 같다. 물론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게 하는 영화보다 질문이 많아지는 영화는 좋은 영화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질문이 "누가 누구를 왜 죽였어요?"와 같은 류의 질문들이라면, 그것에 대해 조금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질문이 가지는 무시무시함은 차치해 두고라도, 그것은 한편으로는 관객을 충분히 이해시키고 있지 못하다는, 즉 어떤 의미에서는 이야기로서 어떤 허점을 담고 있다는 의미도 되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이 이상해보이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것은 사실 이런 류의 상당수 이야기들이 '꼭 그래야만 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이런 류의 이야기들은 한편으로는 상당히 단순한 이야기의 기본축을 가지고 있다. 그 단순한 이야기 축의 빈틈을 이 영화들은 이상한 방식으로 메운다. 즉 이야기의 중간에 특정한 정보를 의도적으로 누락시키거나, 앞 뒤의 이야기들을 필요 이상으로 혼재시키는 방법을 택함으로서, 짐짓 복잡한 척 한다. 인물들은 평면적이 되고, 그 반면에 인물들간의 관계는 감추어진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이 영화들은 전혀 필요하지 않지만, 빈 틈들을 감추기 위한 목적으로 관객과 두뇌 게임을 벌인다.

이것은 분명 최근의 경향들이다. 그런데 이 경향에는 한편으로는 관객과 이 영화들의 어떤 '결탁'이 엿보이는 것 같다. 요즘의 관객들은, 참으로 이상하게도, 본인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본인이 전체적으로 숨 고르며 잘 이해할 수 있는 영화는 '식상하다' 여기고, 짐짓 복잡한 체 하는 영화들을, 사실은 거의 잘 이해하지도 못했으면서, 좋은 스토리텔링이라고 말한다. 글쎄.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앞 뒤를 툭 잘라 버리고, 이야기의 결락들을 일부러 내비치는 영화들이 좋은 이야기들일까. 관객과 필요하지 않은 두뇌 게임을 벌이고, 결국에는 어리둥절해 하며 영화관을 나선 후 인터넷에 질문을 올리게 하는 영화들이 좋은 영화들일까. 맥락은 좀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정성일 씨도 트위터에 이러한 경향들에 대해서 짧은 멘션을 남겼다. "지난 일년 동안 본 한국영화의 특징은 장르 불문하고 <본> 시리즈의 아류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방법이 눈을 홀리기는 한다. 특징은 보고나면 뭐가 뭔지 알수가 없다는 점이다." 

<황해>를 본 후 그 리뷰들이 궁금해서, 인터넷에 '황해'라고 검색어를 넣으니, 친절하게도 '황해 결말', '황해 줄거리'를 찾아볼 것을 권한다. 그만큼 <황해>의 황량한 결말의 의미나, 줄거리의 의문점들을 찾아보려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뜻일게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어쩌면 요즘 시나리오 작가들은 그런 식으로 시나리오 쓰는 방법들을 열심히 배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관객의 머리 속을 최대한 복잡하게 만들어서 관객에게 그 영화의 정보를 열심히 찾아보게 하고, 다시 그것을 확대 재생산 하게 만드는 것이 영화의 홍보에는 결정적인 힘이 될 테니까. 그러나 <황해>에 대해서 그런 질문을 하게 하고, 정답을 알게 하는 것은, 다른 결에서 참 딱한 일이다. 왜냐하면 <황해>의 이야기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되면 될수록, 그 결말에 대해서 더욱 생각해보게 되면 될 수록 그 영화를 보고나온 관객은 더 황량해지기 때문이다. (당신이 영화를 보고 나온 후 바로 모든 것의 의미를 깨달았건, 혹은 영화를 보고 나온 후 인터넷에서 확인해보고 알았건 간에) 이제 우리는 알고 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어떤 치정극임을, 아주 작은 것들이 확대되어 결국 이 같은 결말을 낳았음을, 구남(하정우)의 사투는 아무 것도 다시 황해를 넘어 가져오지 못했음을 말이다. 2시간 30분이 넘는 사투 끝에 얻은 이 황량한 결말들.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이 빈 껍데기들. 흘러넘치는 피와 사라져버린 육체들.

특히 아내의 귀환이 이루어지는 이 결말은 조금은 이상해보인다. 구남의 환상일 수도 있지만, 그것을 실제라고 생각하지 않고서는 영화 속 몇몇 장면들의 잉여를 설명할 방도가 없다. 그러나 이것을 실제라고 생각한다면, 이 결말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씨네 21>의 안시환의 평(no. 786 전영객잔)에서는 이를 구남에 대한 감독 나홍진의 최대한의 배려라 했지만, 동의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이 마지막은 구남이 절대 알 수 없는, 즉 구남과 완전히 유리된 사건이며, 구남이 혹시 그것을 바랬다고 해도, 그것은 구남에게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연결은 조금 수상쩍은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그 아내의 귀환은 구남이 죽어 황해로 던져진 이후에 바로 연결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 아내의 유골함과 같이 말이다. 이 씁쓸한 결말은 무엇을 노린 것인가.

사실 이 장면은 명백하게도 관객에게만 보여지기 위한 장면이다. 죽을 때까지 구남은 몰랐지만, 관객은 한 가지 사실을 더 알게 된 채로 영화관을 나선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 결말은 이야기의 흐름으로 봐서는 거의 다른 장면들과 분리된 이질적인 장면이다. 즉 이야기의 흐름으로는 여기에 존재하고 있을 이유가 없다. 그것이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관객에게 보여지기 위함이다. 구남에게는 혹시 위로일 수도 있겠지만 관객에게는 그것은 가혹한 결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관객을 참으로 안타깝게 만들기 때문이다. 구남이 애당초 면가(김윤석)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아무 것도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이 죽음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죽음이란 말인가. 그 아이러니와 가혹함 속으로 이 결말은 관객을 몰아넣는다. 즉 이 결말이 필요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관객을 당혹함의 늪으로, 가혹함의 늪으로 빠뜨리는 것이다. (그래서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부당거래>에서 살인범 이동석이 진짜 살인범이라고 밝혀지던 장면과도 유사해 보인다. 왜냐하면 이 장면 역시도, 전체 이야기의 흐름에서는 상당히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당혹함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가혹함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를 일종의 관객에 대한 가학(苛虐)이라고 부르고 싶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마지막 장면들은 구남에게 이어져 있던 관객의 심리적 정서를 마지막으로 확실하게 끊어버리는 기능을 한다. 즉 관객은 결론적으로는 아무 것에도 동의하지 못한채로 황량한 마음을 안고 영화관을 나서게 된다. 영화가 중반을 넘어서며, 점점 구남의 처절한 사투를 보는 것은 관객들에게도 힘겨운 일이 된다. 그래도 버틸 수 있는 것은, 그것에는 구남의 사투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남이 목숨이나마 부지해 살아돌아가는 것이며, 아내의 유골이라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구남을 황해에 수장시키고, 아내를 살려 돌아오게 함으로써, 구남의 사투는 의미가 없어진다(즉 구남의 사투와 별개로 아내의 귀환은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 결말은 확실히 관객에게 가학적이다. 이 가학적인 결말은 몇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하나는 이 영화의 물리적인 의미에서의 가학성이다. 이 영화가 조금은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영화의 초중반에 쌓은 정서를 후반부에 가서는 스스로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정서가 무너진다기 보다는 아예 사라져 버린다. 초중반부에 쌓은 그 정서란 역동적이고, 이질적인 것이며, 동시에 한 남자의 비극적인 드라마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를 한 줄로 요약하라면 영화의 4개의 챕터 제목을 연결하면 된다. '조선족' '택시운전수'는 '황해'를 건너 '살인자'가 된다(그러나 사실 이 제목의 기능은 관객의 이질감을 높여주는 기능만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제목 밑의 그 중국어 간체자 말이다). 이것이 이 영화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그리고 이 핵심적인 이야기를 한 후부터 영화는 표정을 바꾸어 모든 것을 깡그리 없애고, 텅 비게 만든다. 그리고 동시에 모든 정서를 없애고, 피와 뼈의 세계로 달려간다. 이후부터 이야기는 오로지 살인 장면들을 어떻게 하면 많이 보여줄 수 있는가라는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이 장면들이 가학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이동진의 말대로 장르적 제스처가 제거되어 있는 데에 한 가지 이유가 있다. 그러나 다른 이유는, 한편으로는 그런 장면들이 너무 많기도 하거니와(예를 들어 구남이 김승현을 죽이는 시뮬레이션을 실제의 장면처럼 만들어 관객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을까), 동시에 거의 숨돌림 틈이 없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무래도 감독의 전작 <추격자>와 비교를 하게 만든다. <추격자>에도 몇몇 가학적인 장면들이 있지만, <황해>보다 심리적 타격이 적은 것은, 호흡을 위한 장면들이 있기 때문이다. <추격자>에서 그런 기능을 맡고 있는 것은 김윤석과 여자아이가 만들어내는 장면들인데, 이 <황해>에는 그런 기능을 맡고 있는 장면들이 거의 없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나홍진 감독이 가지는 특유의 어떤 세련함이다. <황해> 및 <추격자>의 액션 장면들은 에너지가 넘친다기 보다는, 잘 세공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며, 뜨겁다기 보다는 차가운 인상을 준다. 즉 이 장면들은 면밀하게 계산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며, 어딘가모르게 매끈하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이런 표현을 써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심지어 어떤 예술가의 활동처럼 보이게 하는 측면까지 있으며 그 자체로서 아주 잘 꾸며져 있다. 즉 역으로 말해서 이 장면들을 위해 나머지 이야기들이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것은 예를 들어 그 유명한 <추격자>의 '개미슈퍼' 씬을 떠올리게 한다. 그 씬은 사실 그렇게까지 표현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나홍진은 기꺼이 그 장면을 스토리의 결함이 생겨나는 데도 집어넣었고, 그런 방식으로(냉소하는 지영민의 얼굴에 예술적으로 느리게 뿌려지는 피들) 찍었다. 그 장면에 대한 허문영의 글을 조금 길긴 하지만 인용한다. 이 글에는 한 가지 힌트가 있다.

이 시퀀스는 그냥 지나치기 힘든 우연과 작위들이 갑자기 출몰해, 그 시점까지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던 서사의 물줄기가 갑자기 탁한 웅덩이에 갇혀버린듯한 느낌을 준다. 여기에 명백한 몇 가지 우연이 있다. 왜 하필이면 그때 지영민은 담배가 떨어졌을까, 또 왜 하필이면 그때 출동 명령을 받은 형사들은 차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을까. 물론 미진은 하필이면 그 직전에 밧줄을 풀어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이 가게에 도착해 있다. 게다가 그녀는 상처투성이의 몸인데도 왜 가게 여주인에게 경찰 신고만 부탁하고 119를 부르지 않았을까. (중략)

문제는 그다음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이상한 장면이 이어진다. 지영민은 가게 여주인과 미진을 죽인 뒤 집으로 간다. 그런데 그냥 가지 않았다. 몇 장면 뒤에 드러나지만 그는 미진의 시체를 들고 갔다. (중략)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이 대목을 납득하기 힘들다. 지영민은 미행 사실을 느끼고 있으며, 심지어 가게 여주인으로부터 "경찰에 연락한 지 한참 됐다."는 말을 들었다. 경찰이 언제 도착할지, 그리고 미행하던 형사가 어떻게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두 여인을 죽인 뒤에, 피범벅이 된 채로 피가 줄줄 흐르는 한 여인의 시체와 함께 창문을 넘었고, 그 시체를 들고 주택가 골목을 걸어갔다. 그가 개미슈퍼에서 미진의 머리와 손을 잘랐다면 그건 더 위험천만한 일이 될 것이다.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중략)

이 시퀀스의 결과는 미진의 불운한 죽음이다. 미진은 피투성이가 되어 천신만고 끝에 탈출하지만 여러 '하필이면'이 중첩된 그 시공간에 살인귀를 다시 만나, 다섯 번의 망치질 끝에 비참하게 죽었고 그녀의 잘려나간 시신은 '화려하게' 전시된다. 꼭 그래야 했을까? (중략)

실제로 <씨네 21>이 개최한 한 시사회에서 한 관객이 그렇게 물었다. 나홍진 감독의 대답은 놀랍게도 "그렇다"였다. 그는 "밝은 대낮에 평화로운 주택가에서 한 여자가 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 영화의 시작이었다"고 대답했다. 물론 그가 말하는 '시작'은 이야기상의 시작이 아니라 구상의 시작이며, 이야기 상으로는 결말부에 해당된다. 그러니까 결말은 정해져 있었고, 우리는 헛된 기대에 이끌려 중호와 함께 밤거리를 헐떡거리며 달려온 것이다. 하지만 혹시 우리의 기대와 달리 그녀가 죽은 게 아니라, 오히려 그녀의 죽음이 우리가 말하지 않은 마음속 기대를 충족시키는 건 아닐까? 

- 허문영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 p.34-36. 부분발췌.


가학에 대응하는 방법은 무감(無感)해지는 것이다. 즉 감각의 자극이 계속되면, 대부분의 인간은 그것에 대한 일종의 방어기제로 그 감각을 없애는 방법을 택한다. 예를 들어 그 하나의 전조. <황해>에서 구남이 어리숙한 조선족들에게 습격을 받는 장면이 있는데, 그 중 한 조선족 사내가 구남의 기에 눌려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다가 떨어져 죽는 씬이 있다. 그 남자가 떨어질 때의 관객의 짧은 웃음과 떨어진 그 남자를 보여줄 때 관객에게서 흘러나오는 '어'하는 소리. 그 '어'하는 소리는 왠지 TV예능 프로그램의 방청객들이 안좋은 장면이 나올 때 내는 즉각적이고도, 만들어진 놀람과 닮았다. 그 짧은 웃음과 짧고도 기계적인 놀람. 우리들은 그렇게 연이은 죽음들에 눈살을 찌푸리고, 탄성을 보내고, 웃기도 하고,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기도 하다가, 종내에는 무감해진다. 그 무감은 어쩌면, 우리의 기대가 이미 충분히 충족되었다는 신호의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2시간 30분 동안 감독의 가학에 시달리게 하고, 종내에는 가학에 무감하게 만드는 이 영화를 좋은 영화라 불러야 할까. 글의 처음에 말한, 영화관을 나온 관객들이 "누가 누구를 왜 죽였어요?"와 같은 질문을 하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그 질문 참, 무시무시하다.

......................................................

<황해>의 시작 부분에 구남의 나레이션이 있다.  그 대강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개병이 돌아 개들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물어 죽여, 결국 사람들이 개들을 땅에 묻었는데, 나중에 사람들이 그 시체를 땅에서 다시 꺼내 먹었다.' 그것은 <황해>의 내용을 줄여서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은 미친 개들의 먹이가 되고(이 영화 <황해>에도 개의 먹이가 되는 인간이 있다), 개는 다시 (개에 물려서, 혹은 굶주림에) 미쳐버린 인간들의 먹이가 된다. 미쳐버린 인간들이란, 곧 괴물이다. 그러니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인간은 개의 먹이가 되고, 개는 괴물의 먹이가 되고, 괴물은 무엇의 먹이가 되는가.

그러나 이 나레이션은 이 <황해>의 내용만을 설명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왠지 요즘의 한국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요즘의 한국영화들은 이야기의 다른 무엇보다도 '무엇으로 인간을 죽일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 같다. 그것은 칼(<아저씨>)이기도 하고, 총(<무적자>)이기도 하며, 초능력(<초능력자>)이기도 하고, 된장(<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이기도 하고, 그로테스크한 장치(<악마를 보았다>)이기도 하며, 소뼈다귀(<황해>)이기도 하다. 그리고 인간을 죽이는 장치가 기발하게 진화하는 것의 반대편에 인간은 점점 괴물이 되어간다. 그러니 이제 아까의 질문에 지금의 한국영화들이 내놓는 답을 보자. 아까의 질문. 인간은 개의 먹이가 되고, 개는 괴물의 먹이가 되고, 괴물은 무엇의 먹이가 되는가. 정답: '다른 괴물'의 먹이가 된다. 그러니 그 먹이사슬의 가장 꼭대기에 올라가려면 인간이 괴물이 되는 수밖에 없다. 오늘의 한국영화들이 내놓는 무시무시한 대답.

2010년의 많은 한국영화들이 그런 대답을 해왔다. 괴물에 맞서기 위해 기꺼이 괴물이 되는 자들. <악마를 보았다>, <아저씨>, <부당거래>, <파괴된 사나이>, <무적자>, <초능력자>,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황해>.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수동적으로)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능동적으로) 괴물이 된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반영하는 것일까. 지금의 어떤 징후들일까. 2010년 풍경들은 이미 괴물이 된 자들과,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괴물이 되려는 자들로 넘쳐난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메시지들이 들려온다. 괴물이 되어라. 괴물이 되어서 다른 괴물들을 짓밟아라. 그 밑의 인간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건 이미 영화가 아니다. 우리 곁의 현실이다. 이것은 2010년의 징후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님을 기억할 필요도 있다. 누군가는 괴물이 되지 않으려 좋은 생각만 하자고 하였으며(<하하하>), 괴물 같은 세상에 맞서기 위해 필사적으로 기꺼이 자신의 몸에 불을 질렀으며(<하녀>), 또 괴물을 만들지 않기 위해, 스스로 괴물로 추락하지 않기 위해 눈물을 흘려가며 시를 썼다(<시>). 당신은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덧.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밑의 이야기를 길게 써보고 싶다. 2010년을 덮은 어떤 한국영화의 징후들에 대해.



- 2011년 1월,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Ending Credit'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글러브, 강우석  (0) 2011.02.06
카페 느와르, 정성일  (0) 2011.01.11
소셜 네트워크, 데이비드 핀처  (0) 2010.12.10
<엉클분미>와 정성일  (8) 2010.12.09
초능력자, 김민석  (0) 2010.1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