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에 해당되는 글 2

  1. 2009.02.02 <작전명 발키리>, 브라이언 싱어
  2. 2008.04.12 미스트(The Mist), 프랭크 다라본트 (4)
 

<작전명 발키리>, 브라이언 싱어

Ending Credit | 2009.02.02 16:18 | Posted by 맥거핀.



(스포일러 있음)


브라이언 싱어는 솔직한 감독이다. 이번주 <씨네 21>에 실린 인터뷰에서 브라이언 싱어는 말하고 있다. "중요한 건 이 영화가 전기영화가 아니라 서스펜스 스릴러라는 거다." 역사에 기록된 실패한 작전. 이 작전을 영화화하고자 했을 때 브라이언 싱어는 선택을 해야했을 것이다. 역사의 재현인가, 역사의 제거인가. 감독이 선택한 건 후자였고, 그 후자의 극대화였다.

글쎄. 이들을 어떻게 봐야할까. 히틀러를 죽이고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던, 슈타펜버그(독일식으로 '슈타우펜베르크'라고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대령과 그의 동지들. 영화에 묘사된 대로, 그들은 전쟁의 피해를 줄이고, 역사적 범죄자인 히틀러를 죽이고, 정의를 되살리려다 희생당한 영웅들인 걸까. 어쩌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이들이 거사를 실행했던 1944년 7월, 독일은 침몰하고 있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동부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1944년 6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으로 전세는 단숨에 역전되었다. 독일은 구멍이 뚫린 배였고, 침몰이 서서히 가까이 오고 있다고 배에 탄 사람들은 느끼고 있었다. 슈타펜버그와 그의 동지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전쟁이 이대로 끝난다면 전범(戰犯)이 되어 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되거나 그 전에 권총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겨냥해야 할 운명이었다. 어쩌면 그 전에 살아남겠다는 의지가 더욱 강했던 것은 아닐까. 영화에도 나오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히틀러를 죽이고 나치 정부를 전복한 후 연합군과 휴전을 맺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조급해한다. 연합군이 그들을 필요로 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연합군이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전쟁을 끝낸다면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없었으니까. (영화의 엔딩 자막에 그들 이후로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시도는 없었다고 말한다. 그들의 영웅성을 강조하는 말 같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들이 그들 스스로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기회는 그 이후에 거의 없었으니까.) 그들은 어쩌면 한편으로 침몰하는 배에서 빨리 탈출하려고 하는 쥐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브라이언 싱어는 이러한 해석을 단호히 거부한다. 아니 이러한 해석을 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영화의 시작, 슈타펜버그 대령(톰 크루즈)은 비망록을 적고 있다. 반(反) 히틀러의 결연한 의지.  이 의지에는 어떤 인간적인 고뇌나 의심은 묻어나지 않는다. 나치당의 일원으로서 전쟁에 참가하였던 슈타펜버그 대령은 왜 반 나치 전선에 서게 된 것일까. 영화는 이를 묻지 않는다. 대령은 이것이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그보다는 어떤 더 큰 대의를 위한 것임을 비망록에 적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브라이언 싱어는 이를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보여줄 뿐이다.

이는 왠지 슈타펜버그 대령이 비망록을 적으며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다지는 것처럼, 브라이언 싱어도 결연한 의지를 다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는 단순한 역사의 재현이 아니라고. 아마도 그가 이러한 선택을 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선택인 것 같다. 영리한 브라이언 싱어는 이 영화를 성공시키려면 역사를 제거하고, 그 작전을 마치 하나의 허구적 사실처럼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나는 브라이언 싱어가 이 작전을 왜곡시키고, 거짓말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아무런 고뇌없는 인물을 그리는 이 시작이 역사물의 외연을 두른 탈역사물이기에 의아해하고 있는 중이다.) 왜냐하면 이는 실패한 작전이니까. 여기서의 역사의 재현이란 결국은 실패한 작전임을 잘 알고 있는 많은 관객들에게 그의 실패의 체험을 고스란히 바라보게 하는 무기력의 경험이니까. 그보다는 서스펜스의 극대화라는 자신의 장기를 드러내보이는 것이 브라이언 싱어에게는 좋은 선택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리고 브라이언은 예의 그 장기를 드러내보였고, 관객들은 결말을 알면서도 혹시 성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마지막까지 바라보게 된다. (이 시작 부분에서 독일어로 진행되던 영화는 갑자기 영어로 바뀐다. 적국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대화하는 독일 장교들이라. 허구를 쓰겠다는 브라이언 싱어의 선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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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브라이언 싱어가 역사를 제거하기 위하여 쓴 전략은 어딘지 모르게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그의 전략은 슈타펜버그 대령을 신화화(化)하는 것이다. 발키리 작전의 다른 장교들과는 달리 슈타펜버그 대령은 시종일관 확신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확신이 사실을 그대로 그린 것이라면, 이 확신이야말로 이 작전의 결정적인 장애였다고 생각하고 싶다.) 이 확신은 그를 조금씩 인간이 아닌 신화의 영역으로 끌어올린다. 그리고 그의 신화는 마지막에 이르러 장엄하고 영웅적인 죽음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혹 그것으로 모자랄까봐 감독은 엔딩 자막으로 이 신화에 토핑을 올린다. 신화화함으로써 역사를 제거하기. 어쩌면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라면 이를 필연적이라고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두 가지가 의미심장하다.

하나는 브라이언 싱어의 <엑스맨>, <슈퍼맨 리턴즈>와 같은 전작들. 결함을 가지고 있으나 그를 극복하고 승리를 성취해내는 영웅들의 모습. 그것은 슈타펜버그 대령에게도 그대로 투영된다. 전쟁에서 한 쪽 눈과 한 쪽 팔과 세 개의 손가락을 잃은 전쟁영웅. 그러나 그가 이를 극복하고(그가 히틀러를 만날 때마다 가짜눈알을 집어넣는 것은 일종의 고귀한 의식(儀式)으로 보이기도 한다.) 작전을 실행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묘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또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야말로 기이하기도 하다. 굳이 불구인 그에게 이 위험한 작전을 맡기는 것이 말이다. 이 작전과 모종의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되는 객관적인 현실주의자'사막의 여우' 롬멜은 히틀러 암살 공모자들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필 이렇게 심한 상처를 입은 전쟁 부상병을 선택했다"는 것에 질책을 가했다고 한다. - 마우리체 필립 레미 <롬멜>) 더구나 이 슈타펜버그 대령을 연기하는 인물은 톰 크루즈이다. 확신에 찬 미소를 가지고 있는 제복이 잘 어울리는 남자. 신화화된 슈타펜버그 대령을 연기하기에 이보다 더 적당한 배우가 있을까.
 
그런 면에서 이 영화의 제목이자 작전명인 '발키리'는 의미심장하다. 북유럽 신화에서 용감한 전사자의 영혼을 천계로 인도하는 발키리(Valkyrie). 그것은 명백하게도 슈타펜버그 대령의 상징이다. 결국 슈타펜버그는 작전의 실패와 함께 그와 그의 동지들의 영혼을 고스란히 천계로 데려갔으니까. (영화에서 슈타펜버그는 먼저 총살되는 동지에게 "잠시 후에 만나자"고 한다.) 그러나 뭐가 어찌되었던 간에 '발키리'도 결국은 신화 속의 인물이다. 즉 브라이언 싱어는 슈타펜버그 대령을 신화의 하나로 봐주기를 계속적으로 항변하는 중이다. 

그런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신화화 전략은 어딘지 모르게 석연치 않다. 이 신화화야말로 나치즘의 중요한 거점 포인트였기 때문이다. 나치주의자 혹은 파시스트들은 신화가 가진 힘을 알고 있었다. 파시즘(나치즘)이 신화의 세계를 개척했던것은 부분적으로는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신화의 세계를 비합리적인 요소로 가득한 불가해한 영역으로 보아 단념했던 데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신화의 세계를 개척함으로써 나치즘 혹은 파시즘은 대중적 호소력을 지닌 이미지와 상징들을 활용할 수 있었다. (마크 네오클레우스 <파시즘>) 신화화된 세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앞장선 한 남자의 행동을 그리는 데에 신화화의 전략을 사용한다- 나의 석연치 않음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그러고보니 화면가득 줄지어 나부끼던 나치 깃발이 다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당연한 반응 아닌가! 나 역시 그 시절의 광경이 미학적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브라이언 싱어 <씨네 21 689호> 인터뷰) 브라이언 싱어의 다음 영화가 궁금해진다.


- 2009년 2월. 단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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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트(The Mist), 프랭크 다라본트

Ending Credit | 2008.04.12 21:25 | Posted by 맥거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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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 전에 본 영화인데, 정성일 평론가가 <씨네21>에 실은 무지무지하게 긴 이 영화의 리뷰를 읽고, 그 아우라에 압도되어 뭔가를 적어보려는 것을 포기했다. (정성일 평론가의 그 좋은 리뷰는 아래의 링크에) 그러다가 갑자기 오랜만에 이 영화 생각이 났다. 그리고 뭔가를 적어보고 싶은 생각이 났다. 하기는 뭐, 평론가야 그걸로 먹고 사는 분이고, 나야 재미로 적는 것 뿐 이니까.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4004&article_id=50184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4004&article_id=50185

이 영화 <미스트>는 위에 정성일 평론가가 지적한 대로. 여러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많은 드러난 이야기와 함께, 동시에 숨겨진 이야기와 맥락을 담고 있는 영화다. 괴물들이 나오는 B급 공포물의 외양을 두르고 있는 이 영화는 그 내부를 한 꺼풀 들어내 보면 평론가들이 한 번 쯤 글을 쓰고 싶어 죽겠어할 많은 숨은 이야기거리들을 담고 있다. (아마도 그래서 정성일 평론가는 이 영화를 해석하는 무려 7가지의 판본을 이 긴 글에 담으셨을 것이다.) 괴물들이 출몰하는 B급 공포물, 생태파괴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재난 영화, 좀비물, 가족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하나의 기묘한 드라마 등 여러 다양한 판본으로 읽힐 수 있는 이 영화를 또한 하나의 심리실험극으로도 볼 수 있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이 영화에는 두 가지의 재미있는(?) 심리실험이 있다. 내가 이것을 심리 ‘실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영화의 슈퍼마켓이라는 공간이 마치 하나의 거대한 실험실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실험이 일어날 수 있는 최적의 조건 - 주위와의 완전한 고립, 외부에서 제공되는 여러 독립변인들(괴물들의 출몰), 피실험집단 내부를 여러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이렇게 다양한 나이와 인종, 경제력, 사회적 계급을 갖춘 실험집단을 구성하기에 최적의 공간으로서 슈퍼마켓 이상 가는 것이 있겠는가?) - 을 갖춘 이 공간은 마치 이 공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듯한 착각을 준다. 과연 이 폐쇄된 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변해나갈 것이며, 어떤 방식으로 주위의 위협에 대응할 것인가?

첫 번째 실험은 ‘믿음’의 문제이다. 영화의 초반부, 주인공 데이빗은 괴물의 존재를 믿으며, 슈퍼마켓 뒷문을 열지 말라고 경고하지만, 주위의 사람들은 데이빗을 믿지 못하며, 심지어는 그를 겁쟁이라고 조롱한다. 그러나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죽고 나서야 그들은 데이빗을 믿게 되고, 문을 닫고 돌아온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나 또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불신을 당한다. 하나의 믿음이 어떤 식으로 전파되며, 어떤 식으로 불신되는가를 보여주는 이 장면은 현실의 하나의 작은 축소판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인상적이며, 어떠한 의미에서는 이를 하나의 종교와 관련지어 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신을 절대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어떤 하나의 일을 계기로,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깊이 종교적 신앙심을 가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로 처음의 데이빗을 믿지 못하던, 함께 슈퍼마켓 뒤로 갔던 사람들은 ‘그 일’이 일어난 후 다른 사람들보다 앞장서서 일의 해결에 나서게 된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반신반의하는 사람들보다는 절대 부정하는 사람들이 절대 긍정도 가능하다.’

두 번째 실험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인 카모디 부인과 관련지어서 발생한다. 정성일 평론가는 이 영화 <미스트>를 읽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안개를 가스로 보며, 이를 홀로코스트의 느슨한 비유로 보았지만, 나는 여기에서 하나의 파시즘 사회의 탄생을 본다. 파시즘은 익히 잘 알려진 대로 구성원들의 절망과 공포를 그 자양분으로 삼아 기능하는 체제이며, 권력에의 관심을 외부의 적으로, 또는 내부의 희생양으로 돌린다. 히틀러의 나치즘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바이마르 정권 하에서의 비참한 독일 민중의 막연한 절망과 공포를 이용하여 탄생이 되고, 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 등의 외부의 적과 체제 내외부의 유대인들에 대한 핍박을 그 동력원으로 삼아 유지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는 외부의 괴물들이 출몰하는 고립된 슈퍼마켓을 배경으로 카모디 부인을 정점으로 한 하나의 작은 파시즘 사회가 탄생한다. 카모디 부인은 외부의 괴물들의 공격을 예언하고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식으로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감을 점점 교묘하게 이용하여 증폭시키며, 그러한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를 체제 내부의 적, 즉 데이빗 일행들에게 돌림으로써 그 체제를 유지시켜 나간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카모디 부인의 광기는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광기를 느슨하게 연상시키며, 카모디 부인이 데이빗 일행과 맞설 때 두 남자가 각각 칼을 빼들고 나서는 것은 마치 SS친위대를 연상시킨다. (물론 두 남자의 직업이 요리사(아마도?)와 정비공임은 파시즘에 열광한 주력 세력이 소상인이나 숙련공 등의 당시 독일 민중의 중하층 계급이었음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동시에 이에 맞서는 리더인 데이빗의 직업이 예술가(화가)임은 또 은근히 상징하는 바가 있다.) 그래서 다시 여기에서 파시즘 시대의 광기와 이성의 마비를 보며, 사회 구성원들의 절망과 공포가 한 사회를 어떻게 파괴시키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정성일 평론가는 묻는다. 처음에 모두가 죽은 것으로 생각했던 그 아이 엄마가 살아남은 것을 보며, 과연 그녀의 생존이 무엇을 증언하느냐고. 이 생존의 윤리와 기억의 증언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고. 물론 이는 정성일 평론가의 말대로 슈퍼마켓을 하나의 거대한 포로수용소로 보고, 안개를 가스로 하는 홀로코스트의 느슨한 비유로 이를 읽을 때 가능하겠지만, 이 질문은 여전히 유효한 듯하다. 그녀의 생존은 무엇을 증언하는가. 모두가 절망과 공포에 빠져있을 때 자신의 아이를 살리러 그 슈퍼마켓 문을 열고 떠난 그 아이 엄마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우리 사회는 현재 점차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으며 사회의 보이지 않는 어두운 구석으로부터 절망과 공포는 점점 그 지형을 넓혀가고 있다. 과연 이런 사회가 파시즘의 무서운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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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dotol.tistory.com BlogIcon 도톨 2009.03.26 23: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이네요. 잘 보았습니다. 트랙백 남기고 갑니다.

  2. Favicon of http://chiffs.tistory.com BlogIcon 칩순이 2009.07.10 10: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혼자 보기 아까운 리뷰라..댓글 남겨봅니다. 제3회 충무로국제영화제 공식블로그(http://chiffs.tistory.com)에서 잊을 수 없는 내 인생의 영화에 대한 리뷰를 공모합니다. [도전! 나도 리뷰스타] 카테고리에 제시된 4 가지 테마 중 하나를 택해 자신의 블로그에 리뷰를 작성한 뒤, URL을 트랙백 혹은 댓글로 남겨주세요. 당선되신 분에 한해 공식블로그를 통한 해당 리뷰 노출과 소정의 기념품을 제공해드립니다. 1차 이벤트 기간은 8월 10일 까지 입니다.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09.07.10 22: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충무로 국제영화제.
      작년에 거기서 <매드 디텍티브> 등등 좋은 영화 많이 봤던 기억이 나네요.
      내 인생의 영화라..아직 뭐 생각나는 영화가 없는데.
      생각나는 영화가 있으면 글 남겨 볼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