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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기요시'에 해당되는 글 1

  1. 2009.04.10 도쿄 소나타, 구로사와 기요시 4
 

도쿄 소나타, 구로사와 기요시

Ending Credit | 2009. 4. 10. 00:48 | Posted by 맥거핀.



(스포일러)





<도플갱어>와 <강령>, <주온> 그리고 무엇보다도 <회로>의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신작 <도쿄 소나타>는 공포물이 아니라고 그랬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공포물들은 귀신과 악령들이 출몰할 것 같은 제목들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 영화에서는 그런 귀신이나 악령보다는 다른 어떤 것들이 더욱 큰 공포를 주곤 했다. 그 다른 어떤 것들이 무엇이냐고? 글쎄.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것들, 보이지 않으나 저 어둠 속에 있다고 믿어지는 것들, 그리고 미래에도 계속 내 주위에 머물 것들. 여러가지 이름을 가져다가 붙일 수는 있겠지만, 한마디로 자른다면, 그건 희망 없음의 공포였다. 현재보다는 미래가 더욱 무서운 것, 도저히 여기서 헤어나올 수 없다는 절망감으로 가득찬 것이라고 말하면 될까. 그런 구로사와 기요시가 그려내는 가족 드라마라고 그랬다. 공포물이 아니라고 그랬다. 나는 속기를 기대하며 갔다. 그리고 속았다.

이 영화 <도쿄 소나타>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다른 어떤 영화들보다 무서웠다. 물론 이 영화에는 귀신이 나오지도, 도플갱어가 나오지도, 검은 그림자로 이루어진 어떤 형체없는 무엇도 나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마지막 그들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절망들은 우리 현실과 가까이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영화들보다 공포감을 준다. 영화의 아버지(카가와 데루유키)나 어머니(코이즈미 교코)는 간절히 소망한다. 다시 시작하면 안될까.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러나 그들 앞에 미래는 보이지 않는다. 그들 앞에 있는 것은 차디찬 아스팔트 바닥이거나, 건널 수 없는 암흑의 망망대해이다. 이건 게임이 아니다. reset 버튼을 누를 수 없다. 그들은 구로사와 기요시의 다른 영화의 주인공들이 그랬던 것처럼, 미래에 대한 희망없는 현실 속에서 절망한다. 이 절망은 정말 무섭다[각주:1]

이 절망적인 마지막 장면 뒤에 마치 하나의 에필로그처럼 하나의 이야기가 더 추가된다. 몇년이 흘렀다는 자막이 스치고 지나간 후, 부모는 막내아들 켄지의 음악중학교 입학시험장에 앉아있다. 켄지는 드뷔시의 <달빛>을 아름답게 연주하고, 사람들을 모이게 하며, 부모는 켄지의 손을 잡고 나온다. 이것을 희망으로 볼 수 있을까. 이 마지막 장면은 상당히 모호하다. 실제 이들의 몇년 후로 볼 수도 있지만, 왠지 이는 아버지가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쓰러져서 보는 환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꿈속과 같은 희뿌연 화면 속에서 무표정한 사람들의 모습도 그렇거니와 이 아들이 연주하는 피아노곡의 제목부터가 미심쩍다. 드뷔시의 <달빛>이라. 달빛이 의미하는 환상성과 기이함. 어쩌면 이는 소나타 뒤에 이어지는 환상의 즉흥연주인지도 모른다. 

이 마지막이 그다지 희망으로 느껴지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 바로 전의 장면이, 다시 모인 가족들의 식사장면이기 때문이다. 차에 치여 쓰러졌던 아버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툭툭 털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오고, 납치범과 같이 바다로 떠났던 어머니는 홀연히 돌아와 막내아들 켄지와 식탁에 둘러앉는다. 이 식탁에는 참을 수 없이 고요한 정적만이 흐른다. 단지 식구들의 밥먹는 소리만 미세하게 들릴 뿐이다. 그들의 지금까지의 식탁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반복. 이 식탁 위에는 그간 항상 정적만이 흘렀다. 아버지가 젓가락을 드는 것으로 시작하여, 모두들 조용히 밥을 먹고, "잘 먹었습니다."를 말하고 일어나는 동일한 형식. 이 식탁에는 대화가 필요없었다. 아니 대화를 할 수 없었다.  두 아들은 모두 이를 잘 알고 있다. 두 아들은 모든 것을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결정한다. 부모들에게 이야기해보아야 그들의 생각이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변하는 것이 없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식탁에서의 식사로부터의 시작 - 중간의 여러 사건들 - 그리고 다시 식탁에서의 식사로 이어지는 마지막은 왠지 제시부 - 전개부 - (제시부의 비슷한 반복인) 재현부라는 소나타 형식을 연상시킨다.

그들의 이러한 식탁에서의 대화의 단절은 세대간의 단절을 떠올리게 한다. 미래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믿으며, 한편으로는 미래가 변하지 않기를 은연중에 갈망하는 기성세대와 미래를 자신의 힘으로 바꾸어놓을 수 있다고 믿는 자식세대와의 단절.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그 자식세대의 미래에 대한 자신감이란 또 얼마나 얄팍해지기 쉬운 것인가. 미군이 우리나라를 지켜주기 때문에 미군에 들어가는 것이 가족을 지키는 것이고, 세상의 평화를 지키는 것이라는 큰아들의 논리는 그 미군이 어느 중동 전쟁터에 파병되면서 여지없이 깨진다. 이러한 세대간의 단절을 한편으로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두루두루 큰 무리없이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기성세대와 특정의 어떤 것만 잘하면 된다고 믿는 자식세대간의 단절이라고 말이다. 영화 속에서, 새로운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 면접을 보러간 아버지는 면접관에게 시켜만 주면 어떤 일이든 열심히 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면접관은 어떤 특정의 일을 잘 해낼 수 있는가 중요하지, 무슨 일이든 하겠다는 것은 의미없다고 그를 조롱한다. 그래서 또 한편으로는 이 마지막이 더욱 의심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이 절망한 아버지가 음악영재인(즉 '음악'이라는 특정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아들에게서 희망을 찾는다라. 이것을 희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은 또다른 단절의 시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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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기 며칠전 2006년도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을 우연히 보았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 속 식탁 장면을 보면서 자주 <미스 리틀 선샤인>에서의 가족의 식탁, 이 실패자들의 집합이 벌이는 식탁에서의 대화가 떠올랐다. 음식 취향만큼이나 다른 그들 각자의 생각들이 벌이는 충돌의 하모니와 유쾌하고도 아이러니한 봉합. <도쿄 소나타>와 <미스 리틀 선샤인>의 식탁 장면은 이들 영화가 달려가는 마지막 결말만큼이나 매우 다르다. 그러고보면 세계 어느 곳에서나, 가족간의 많은 이야기들, 그리고 대화를 가장한 충돌은 식탁 위에서 이루어지는 듯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나와 가장 가까운 타인인 가족. 이 가족들은 다른 누구보다도 우리자신과 친밀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또다른 나인 동시에, 나의 숨기고 싶은 모든 치부를 알고 있는,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가장 큰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이 상처들은 종종 날카로운 말이 되어 식탁위를 가로질러와 우리의 심장에 박히지만, 때로는 침묵의 공기로 변해 조용히 식탁 위에 내리깔린다. 날카로운 말은 상처를 주고 지나갈 뿐이지만, 침묵의 공기는 중금속처럼 우리의 심장에 켜켜이 쌓인다. 그리고 우리는 그 내리깔린 공기 속에서 메인 심장 위로 밥을 밀어넣는다.

<미스 리틀 선샤인>에서 보았던 장면이 떠오른다. 기어(gear)가 고장난 차를 타고 달리는 이 가족. 차를 달리게 하기 위해서는 가족 중에 몇몇이 내려 차를 밀어 일정 속도에 이르게 한 후 차에 올라타야 한다. 매번 약간 위태위태하기는 하지만, 이 가족은 그래도 모든 구성원들을 멋지게 태워 출발한다. 특히 멋진 주제곡 'The Winner Is'가 울려퍼지며, 가족들이 뛰어 달려와 차를 타고가는 마지막 장면은 영화 속 가장 즐겁고도 사랑스러운 장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가족이라면, 우리가 가족이라면, 아무리 열없는 실패자들일지라도 모두 남김없이 태우고 출발해야만 하는 거겠지. 그러나 역으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우리가 아무리 떼놓고 가려고 해도, 어딘가에 버리고 가고 싶어도 어느 틈에 달려와 내 옆자리에 앉아있고야 마는 사람들. 그것이 가족이다.




- 2009년 4월, 중앙 스폰지하우스.




  1. 한편으로는 이 영화의 카메라의 움직임에서 비롯되는 공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의 많은 장면에서의 카메라 움직임은 그간 일본의 여러 공포영화들에서 보여줬던 카메라 움직임을 연상케 한다. 카메라를 고정시키고, 인물들을 따라 패닝하지 않는 움직임이라든가, 인물은 한쪽 구석에 몰아넣고, 사물을 중심으로 잡는 모습(마치 그 사물에 큰 의미가 있다는 듯, 혹은 무엇인가가 곧 튀어나올 것이라는 듯)이나 인물들의 등 뒤에서 움직이는 카메라의 모습이 그렇다. 그리고 아주 자주 카메라는 이들을 아주 멀리에서 비춘다. 마치 이들을 몰래 숨어 관찰하는 누군가가 있는듯이 말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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