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친구 그의 아내, 신동일

Ending Credit | 2009.02.14 02:57 | Posted by 맥거핀.




(스포일러 있음)


급하게 뛰어 들어간 극장은 텅 비어 있었다. 상영 10분전, 매표소 직원이 어색하게 웃으며 표를 끊어준다. 주위를 둘러보며 조심스럽게 묻는다. "관객이 저 혼잔가요?" 그녀의 어색한 웃음은 조금 짙어진다. "아직까지는 그렇네요." 그리고 그 '아직까지는'은 '결국'이 되었다. 아무도 없는 극장에서 혼자 영화를 보신 경험이 있나요? 나는 누군가에 묻고 싶어진다. 어쩌면, 이것이 마법의 시간, Magic Hour 일는지도 모른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시작되었다. 영화가 1시간이 지나갈무렵, 슬슬 깝깝해지고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주위를 둘러보고, 앞뒤를 살펴보아도 아무도 없다. 스크린 안의 인물들에게 구원이 필요한 것처럼, 나에게도 구원이 필요하다. 그냥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나타나서 그들을 구원하고, 나도 뒤척임을 그만두었으면 싶다. 어떤 영화들은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그럴 때마다 나의 감정은 복합적이다. 한편으로는 이 불편함이 빨리 끝났으면, 어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불이 켜졌으면 싶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복잡함으로 지적, 감정적 쾌락을 느끼며, 이 쾌감이 지속되기를 갈망한다. 이 불편함은 어디에서 오는걸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는 답을 얻지 못하는 불편함이다. 영화는 계속 나에게 질문을 하도록 만들며, 간단하고도 쾌락적인 답을 들려주지 않는다. 물론, 한편으로 보면 질문으로 만들어진 성은 그 자체가 하나의 쾌락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성문이 닫혀 있는 한 그 쾌락은 불편함을 동반한 쾌락이다[각주:1].

마법의 시간이 끝난 후, 옛 대학 동기들을 만나러 갔다. 친구들이 오지 않아 지하철 역에서 친구를 기다린다. 심심하다. 열심히 전단지를 돌리고 있는 학생들에게 다가가 일부러 전단지 2개를 받아 읽는다. "MB정권 퇴진, 촛불의 함성으로" 밑에는 용산 유가족이 보낸 편지의 한 내용이 적혀 있다. 한참을 읽어 내려가는데, 어느 틈에 나타난 친구가 툭 뺐어 든다. "아우, 배고프다. 뭐 보고 있냐? 으이그, 열심히 보기는. 여전하구나. 빨리 밥 먹으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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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영화의 줄거리를 다시 쓰는 것은 바이트(byte)의 낭비가 될 것이다. 이미 꽤 오래 전부터 상영하는 영화이고, 이에 대해 쓴 여러 좋은 글들도 여기저기에 많다. 다만, 잊지 않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던져둔다[각주:2]. 답을 찾기는 어렵다. 적어도 내 수준에는.

- 이 영화를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다른 여러 리뷰들에도 나와 있지만, 이 영화를 세 사람과 그들 사이에 벌어진 실수와 관계의 문제로만 읽는 것은 너무 피상적인 해석이 될 것이다. 이 세 사람이 발을 디디고 있는, 그리고 그 외부의 관객들이 발을 디디고 있는 이 자본주의의 땅에서 세 사람이 가진 계급의 상징. 그것은 무시하기에는 너무 드러내놓고 읽힌다. 전직 학생운동가이자 자본주의의 최전선에 있는 현직 외환딜러인 예준(장현성)이 실수로 노동자 재문(박희순)의 아들 민혁('민중혁명'의 이름을 딴)을 죽게 만드는 데에 이르러서는 그 정치적 함의가 너무 노골적이라 쓴 웃음이 날 정도다[각주:3]. 변절한 386(장현성)이 깨어 있는 건전한 노동자(박희순)와 민중(홍소희)이 낳은 '민중혁명'을 고사시켰다...그리고 급기야는 민중에게 거짓 선전을 유포해 그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 한다...?

- 그들은 왜 변절하였는가?

글쎄. 변절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는지 잘 모르겠다. 영화 속 예준은 분노에 차서 말한다. "나 원래 이런 놈이라구!" 그들이 원하는 것이 민중혁명이었을까. 글쎄, 이 질문은 너무 깊고, 포괄적인 질문이다. 그러나 이는 필요한 질문이고, 해야만 하는 질문임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MB정권 퇴진을 말한다. 그러나 그 이후는 무엇일까. 그들이 원하는 MB정권 이후는 무엇일까.

- 왜 그들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가?

영화 속 지숙(홍소희)의 표정은 전반기와 후반기가 아주 다르다. 전반기에는 웃다가, 갑자기 짜증을 내는 등 풍부한 표정 변화를 드러내보이던 지숙은 사건이 일어나고 미국에서 돌아온 후 감정변화를 거의 드러내보이지 않는다. 물론 사건 이후에 감정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갑자기 늘어난 그녀의 재산과 더불어, 이 감정의 숨김은 기이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후반부의 격렬한 전화씬을 제외하고는 시종일관 감정변화를 크게 드러내보이지 않던 예준과 차안에서 지숙이 나누는 대화는 매우 섬뜩해보인다.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들의 얼굴은 마치 기계적인 어떤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에 무표정하게 반복적으로 마당을 쓰는 재문과 가위질을 하는 지숙, 그리고 엔딩 크레딧 내내 이어지는 가위질 소리는 매우 섬뜩하다.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 왜 제목이 <나의 친구 그의 아내>인가?

이 영화의 중심점이 재문에게 있음을 고려해본다면, 이 제목은 다분히 이상하다. 이는 예준의 입장에서 본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는 예준에게 집중해서 보라는 감독의 주문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예준은 상당히 미스터리한 인물이기도 하다. 앞으로 태어나게 될 친구의 아들과 딸 이름을 민혁('민중혁명'에서 따서)과 예니('마르크스'의 부인 이름)라고 지으라고 말하는 전직 학생운동가이자 군대에서조차 자신의 후임에게 편안히 말을 놓자고 말하는 이 남자. 그는 어떻게 성공한 외환딜러가 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 성공한 외환딜러는 왜 아직까지 결혼은 커녕, 변변한 애인조차 없는 것일까. 조루증이라서[각주:4]? 여자 사귀는 데 서툴러서? 서투르다...는 말은 어쩌면 이렇게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어쩌면 이것이 예준으로 대표되는 386 세대의 허위의식인지도 모른다.

- 영화의 마지막에 배달된 편지, 누구에게서 온 것일까?

그들이 미용실을 하고 있는 이 곳은 어디일까[각주:5]. 시골의 외딴 구석에 자리잡은 이 곳까지 편지를 보내 올 사람은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그 편지를 쳐다보지도 않고 익숙하게 서랍에 밀어넣는 지숙의 태도로 보아서는 자주 편지를 보내온 사람, 아마도 예준일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음을 각오하며 그들을 놓아주는 듯이 보였던 예준은 왜 아직도 살아남아서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일까. 그 내용은 무엇일까. 이 마지막은 꽤나 단호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편지를 열어볼 마음이 없으니까. 어떤 달콤한 사탕발림이 있더라도 말이다. 그들은 무표정하게 마당을 쓸고, 가위질을 할 뿐이다. 그러나 이 마당쓸기와 가위질은 아무 감정이 없는 행위라는 것이 무섭다. 그녀의 뱃속에는 새로운 아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 아기의 이름이 무엇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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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동기들과의 술자리는 재밌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편했다. 그랬다. 영화보기와 비슷했다. 그들과 내가 나누는 직장 이야기와 학교 이야기는 어떤 동심원을 그리며 뱅뱅 돌고 있었다. 가운데에 있는 어떤 것들을 터뜨리기는 모두들 불안해했다. 다만 그 주위를 맴돌며, 떨어진 부스러기들만 이야기하고 있었다. 가끔 촛불집회나 용산참사나 정부의 정책과 같은 민감한 주제들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누구도 그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아했다. 우리 모두 그 이후에 이야기하게될 어떤 것, 그것에 대해 확신이 없었던 탓이다.

집에 오는 길에 다시 그 지하철 역에 들어섰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몇 개의 전단지들이 아직 눈에 띄었다. 무리지어 있는 학생들은 모두 어디론가 가버린 후였다. 이들 중 몇몇은 한 10여년 쯤 후에 자신이 오늘 나눠주었던 전단지의 내용을 기억하고 있을까. 그들은 10년 후 술자리에서 어떤 세상을 말하고, 어떤 이야기들을 하고 있을까. 그들이 10년 후에 할 이야기는 오늘 우리가 한 이야기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임을 안다. 그래서 나는 조금 슬프지만, 안도한다. 


- 2009년 2월, 필름포럼

  1. 이는 왠지 자위 행위를 연상시킨다. 자위는 쾌락과 함께 일종의 죄책감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영화 중간에 지숙의 자위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고는 아무도 없는 영화관에서 혼자 발그레해졌다. [본문으로]
  2. 이외에도 질문은 너무 많다. 예를 들어 이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미국의 의미는 무엇인가, 재문과 예준의 관계는 어떻게 볼 수 있는가(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라는 포스터 문구), 지숙은 예준을, 혹은 예준은 지숙을 처음부터 욕망하고 있었는가, 그랬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등등 [본문으로]
  3. 감독은 이 계급성 부여에 너무 강박감을 가진 게 아닐까. 이 인물들은 너무 전형적으로 행동하고 사고한다. 그리고 가끔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지숙이 그렇다. 아무 가진 것 없이 미국으로 건너간 지숙은 돌아온 후 어떻게 우아한 '원장님'이 될 수 있었을까. [본문으로]
  4. 그래서 이 질문도 가능하다. 왜 예준은 조루증인가? 혹은 감독은 왜 굳이 예준을 조루증으로 묘사했는가? 혹은 조금 더 재밌는 질문으로는, 왜 권위적인 사람들 중에는 의외로 조루증이 많은가? [본문으로]
  5. 이 마지막 장면은 나에게는 사족으로 읽힌다. 지숙이 하이힐을 벗어던지고 텅빈 거리를 허위허위 걷던 그 전 장면이 마지막이 되는 편이 훨씬 희망적이고 좋았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