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들이 지닌 효력에 대적하는 것

The Book | 2016.06.14 17:36 | Posted by 맥거핀.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 - 10점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문학동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영화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를 떠올렸다. 단지 이 소설이 영화와 마찬가지로 마약범죄에 대한 이야기가 주된 소재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 <시카리오>를 보면 언뜻 영화 본편과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한 가족의 모습이 본 줄거리 사이사이에 등장한다.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면 이 가족이 영화의 본편과 상관이 있음은 물론, 전혀 생각지 않았던 질문까지 하게 되는데, 그것은 "어쩌면 이 영화는 이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은 아니었을까?"라는 질문이다.

 

(아마도 예전의 리뷰에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영화의 마지막, 어디선가 들려오는 총격 소리에도 그다지 크게 놀라지 않고 아이들의 축구 시합을 계속 이어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이것이 (마약으로 인한) 만연한 범죄에 이제는 무감각해진, 어쩌면 그것을 당연한 일상의 하나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에서 멕시코의 마약 카르텔이 지배하고 있는 도시 후아레즈는 거의 악마의 도시처럼 묘사된다. 거리 곳곳에서는 끊임없이 총격 소리가 들리며, 길 한복판에서 총격전이 벌어져도 사람들은 별로 놀라지 않으며, 경찰들이 대규모로 거리를 휩쓸고 지나가도 사람들의 반응은 무덤덤하다. 이 사람들에게는 그 모든 것이 당연한 일상이며, 그 모든 것에 무감해진 것일까. 그런데 이 소설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을 읽고 나니, 어쩌면 내가 영화를 잘못 이해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아야하는 것은 그 무감각한 표정 이면에 깔린 공포, 그 공포에 담긴 살고싶다는 외침이 아닐까. 그들은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혹은 살아가기 위해 결코 잊을 수 없는 것들을 잊은 척 하는 법, 혹은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는 법을 배운 것이 아닐까. 예를 들어 이 소설에서 자주 언급되는 콜롬비아에서 마약 카르텔이 지배하고 있던 '고난의 10년'의 시간에서.

 

특별한 시대였어요. 그렇잖아요? 폭탄이 누구에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대. 와야 할 사람이 오지 않으면 다들 걱정을 하고. 자신이 잘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어디에 가장 가까운 공중전화가 있는지 알아야 하고. 공중전화가 없으면 전화를 빌려 쓸 수 있는 집을 알아내서 그 집 문을 두드려야만 하고. 우리는,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이 죽을 가능성에 매달리고,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이 우리가 죽은 자들 사이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그들을 안심시키는 일에 매달리면서 살아야 했죠. 우리는 각자 집안에서 지냈죠. 기억해요? 공공장소는 피했어요. 친구의 집, 친구의 친구의 집, 친분이 깊지 않은 사람의 집, 어떤 집이든 공공장소보다는 선호했죠.

- p.313~314

 

소설의 시작은 인상적이다. 이야기는 동물원에서 도망친 하마, 그러니까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만든, 이제는 쇠락한 오래된 동물원에서 도망쳤다가 죽은 하마의 이야기를 떠올리는 주인공의 회상에서 시작한다. 그가 그것에서 떠올린, 그에게 고통을 준 한 남자, 리카르도 라베르데와의 오래전 만남을 떠올리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하는데, 우리는 적어도 이 서두에서 한 가지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이 주인공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이 사건은 오래 전 일어난 사건이며, 주인공은 이제 그것을 되돌아보며 서술하고 있다는 것. 무엇인가를 되돌아보고 서술할 수 있다는 것은 적어도 이제 그 사건이 주는 고통에서 어느 정도는 벗어났다는 의미가 아닐까. 우리가 무엇인가에 대해 서술할 수 있을 때는 오로지 그것에서 벗어난 이후일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결국 기억이라는 행위를 통해 고통,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그러나 사실 이 소설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을 자신에게 (본의 아니게) 고통을 준 한 사람의 삶을 읽는 것을 통해 자신에게 드리운 고통을 극복해나가는 이야기로 읽으면 아름답고 좋으련만, 단지 그렇게 읽을 수만은 없다. 그것은 소설의 마지막이 명징하게 보여주는데, 주인공에게는 이제 아내가 떠난 텅 비어 있는 집만 남아있다. 그것에서 어떤 가능성도 남아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그래도 그것은 불안한 마무리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것은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친 리카르도 라베르데나 그의 부인 엘레나 프리츠에게도 마찬가지다. 그 부부에게는 무엇이 남았을까. 혹은 그들이 무엇을 극복했다, 이겨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무엇인가를 극복했다거나, 이겨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삶을 자신의 통제 범위 안에 두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이 소설에서는 이것을 이야기한다.

 

지금 이 순간에는 여러 상황들의 연계 고리, 또는 범죄적인 오류들의 연계 고리, 또는 다행스러운 결정들의 연계 고리 하나가 있는데, 그 연계 고리의 결과는 어느 길모퉁이를 돌아가는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비록 내가 그것을 인지한다 할지라도, 비록 그런 일들이 발생해서 내게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불편한 확신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그런 결과들을 정확히 예상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것들이 지닌 효력에 대적하는 것뿐이다. 다시 말해 손해를 벌충하고 최대한의 이익을 얻는 것이다. 우리는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연계 고리가 우리를 현재 상태의 우리로 변화시켜버렸다는 사실을 누군가 우리에게 알려줄 때면 왠지 모르게 공포감이 느껴진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그런 계시를 줄 때, 우리가 우리의 경험에 대해 행사하는 통제력이 적거나 전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항상 당황스러운 일이다.

- p.290

 

그것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 몇몇 장면이 이 소설에는 있다. 예를 들어 이 소설이 영화라고 가정한다면 내가 가장 좋아할 만한 장면인데, - 사실 이 소설은 영화적인 묘사가 들어가 있는 부분이 많다. 이 장면도 물론 영화로 만든다면 빛을 발할 장면이리라. - 엘레나 프리츠가 장마를 맞은 집에서 갑자기 찾아온 마이크 바비에리를 만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 가득한 불안감과 그것을 애써 억누르며 평화를 가장하는 엘레나와 마이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깨뜨리는 상징적인 의미에서의 총성. 이 장면은 뒤의 숨겨진 이야기를 정확히 이미지로 만들어 보여주고 있다. 리카르도와 엘레나의 삶은 그렇게 가득한 불안감 위에 띄워진 가장된 행복과 같은 것이었음을 말이다. 엘레나는 직감적으로 그 모든 것에서 불안감을 감지하지만, 그것에서 사실 엘레나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것은 리카르도나 마이크도 어느 정도는 마찬가지였다. 누가 그 연계 고리 안에서 결과들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그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 이 현재에서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그들에게 놓여진 그 녹음이 상징하는데, 그들이 아무리 그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을 듣는다 할지라도 이미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아니 모든 일이 벌어지는 순간에 그 비행기에 타고 있던 엘레나가 그 소음을 같이 듣는다고 해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모든 것들은 의미가 없을까. 아니 나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위의 인용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지닌 효력에 대적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할까. 그것의 한 예는 리카르도 라베르데가 했던 행위가 보여주지 않을까. 즉 그것은 어떻게든 그 녹음을 입수해 들으려고 하는 것이다. 리카르도는 자신이 (비록 전직조종사라도) 그 사건에 어떠한 영향도 미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나,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어떻게든 그 녹음을 입수해서 들으려 애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슬픔과 고통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어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작중 화자 '나'(얌마라)도 마찬가지이다. 얌마라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어했다. 자신과 전혀 관계없는 일에 휘말렸고, 그것을 단지 불운한 일로 치부하고 잊어버릴 수도 있었지만(그리고 아내도 그것을 원했지만), 그는 사건에 숨겨진 부분을 알기를 원했고 그것을 알기 위해 고통을 감수하며 그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것이 아마 이 소설의 태도일 것이다. 사실 삶의 많은 것은 우리에게 결코 통제권이 주어지지 않지만, 우리가 단지 그 통제력이 없는 상태로 머물러 있으면 안된다는 것. 소설의 이야기는 늘 그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얌마라가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리카르도 라베르데를 우연히 처음 만났을 때부터이며, 마야가 리카르도와 엘레나의 이야기를 해주는 것은, 그 기원에 있는 것, 즉 리카르도의 할아버지 훌리오에게 닥친 불행한 사건부터이다. 아무 연관이 없어보이는 그 처음으로 거슬러 오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어떤 '연계 고리'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거슬러 올라가 그 고리의 끝부터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연계 고리의 반대편 끝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고 해도 그 연계 고리의 다른 반대편 끝을 살펴보는 것은 결코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은 "그것들이 지닌 효력에 대적하는 것"이다. 이 소설은 정교하게 짜인 이야기들을 통해 그 연계 고리들을 흥미진진하게 끝까지 바라보며 인간의 삶에 대해, 그 삶에 깊숙히 박혀 있는 공포와 그 공포를 이겨내려는 미약한 몸짓이 지닌 숭고함을 생각하게 만든다. 참 좋은 소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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