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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해지든 말든

The Book | 2015. 8. 6. 13:27 | Posted by 맥거핀.
한국이 싫어서 - 2점
장강명 지음/민음사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책 뒤편에 있는 문학평론가 허희 씨의 해설을 읽고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의 끝은 주인공 계나가 난 이제부터 진짜 행복해질 거야, 라고 결심의 말을 덧붙이는 것으로 끝난다. 그런데 허희 평론가는 단호하게 말한다. "나는 그녀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고 확신한다.(p.200)" 그러니까, 이 해설은 소설의 결론을 뒤집는 것이며, 어떠한 의미에서는 결국 이 소설이 어떤 부분에서는 무엇인가를 의도적으로 숨기고 있거나, 혹은 그려내는 데에 실패했다(혹은 치밀하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어떤 부분에서 그런가.

 

난 이제부터 진짜 행복해질 거야, 라는 결심. 내가 보기에는 그것은 두 가지로 나누어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한 가지는, '난 행복해질 거야'라는 진술.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나는' 행복해진다,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국가나, 가족이나, 다른 거대한 무엇이 끼어들 틈은 없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제목 <한국이 싫어서>는 일종의 낚시, 혹은 자극적인 마케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계나가 한국을 떠나 호주로 이주하는 것은 '한국이 싫어서'가 아니다. 한국이 싫어서, 가 아니라, 한국에서 행복해질 수 없다고 혹은 한국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실 여기에는 국가라는 이데올로기가 가지는 무엇이 끼어들 틈은 없다. '한국'이라는 것은 단지 어떤 울타리의 다른 이름일 뿐이고, 허희 씨의 말을 빌리자면, 그저 여러 개 축사 중에 어느 한 귀퉁이에 붙여진 이름일 뿐이다. 그게 '한국'이면 어떻고, '서울'이면 어떠하며, '호주'든 혹은 '우간다'인들 뭐가 달라지는 게 있으리.

 

다시 말해서, '한국이 싫어서'라는 제목은 '한국'이라는 특정의 공간에 대한 비판을 담고자 한다는 오해를 불러오지만, 사실 이 소설에서 말하는 것은 그런 거창한 것은 아니다. 이 소설에서 말하는 한국에 대한 비판은, 우리가 익히 알고, 우리가 익히 상상하는 그 지점에서 머무르며, 단지 계나가 한국을 탈출하고자 하는 것은 '한국'이라는 공간이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공간에서 자신이 살아남을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즉 계나(그리고 철저하게 계나의 1인칭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에서 계나의 세계관과 소설의 세계관은 동일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이 소설)에게는 사실 그 나머지는 관심 밖, 아이 돈 케어이며, 어떠한 의미에서는 계나의 스탠스는 사실 그녀가 비판하고자 하는(그러나 사실 정확하게 얘기하면 비판하는 척 하는) 스탠스와 거의 일치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즉 이 소설에서 담고 있는 '한국'이라는 공간에 대한 비판은 그 공간을 지배하는 지배법칙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그 지배법칙의 (최소한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에 대한 비판에 가깝다. 지배법칙이 그 모양으로 생겨먹은 것에 대해서는 소설은 사실 관심조차 별로 없다. 오해는 마시라. 나는 이것이 마냥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소설에서 자꾸 '한국'이라는 것을 불러오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 뿐이다. 그저 계나가, 혹은 소설이 말하는 지점은 '내가'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것이 어디가 되었든 말이다. 그 이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사실 이 소설의 '관심 밖'이다. (그러니 '한국이 싫어서'라는 이 제목은 마케팅의 산물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한국이 별로 싫지는 않은데, 내가 거기서는 힘이 없고 앞으로도 힘이 생기지 않을 것 같아서'에 가까울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난 진짜 행복해질 거야, 라는 결심에서 '진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러니까 소설의 가장 마지막 문장에 붙은 이 '진짜'는 사실 그녀가 이 소설의 내내, 그러니까 호주에 와서도 결코 '진짜' 행복해진 적은 없었음을 간명하게 말해준다. 허희 평론가의 말대로 "2000년대 한국 소설에 등장한 이주노동자의 살림과 유사한 모습이다. 부푼 희망을 안고 호주에 온 그녀를 비롯한 한국인들은 고국에서보다 도리어 궁핍하게 산다. 영어가 능숙하지 않아 빌딩 청소 등 고된 육체노동을 하면서 영주권과 시민권을 취득하기 위해 아등바등한다. (p.200)" 그 뿐인가. 계나는 두 번이나 부당한 이유로 재판에 연루되고, 벌금을 내고 호주에서 추방될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그녀의 고백대로 사실 그녀가 호주에서 '진짜' 행복해하는 것처럼 보였던 때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호주 시민권을 취득했을 때는 행복해할 법도 하지만, 그녀는 말한다. "증서 수여식이 끝나고 다른 사람들이 다과회에서 친지들과 기념사진을 찍을 때 슬그머니 행사장을 빠져나왔어. 6년 동안 고생한 게 하나하나 생각나서 뭔가 뭉클한 기분인데, 그렇다고 나 이제 호주 사람이다! 이러고 만세를 부르기도 뻘쭘하고. (p.172)"

 

결국 그 순간에도 그녀가 떠올리는 것은 6년 동안 고생한 기억이다. 그것은 이런 것과 다를까. 예를 들어 그녀가 한국에서 6년 동안 고생하여 좋은 일자리의 취업을 거의 100% 보장해주는 어떤 자격증을 땄다면, 그녀는 그 순간 행복해할까, 아니면 6년 동안 고생한 기억을 떠올릴까. 나는 사실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런 것을 묻고 싶다. 만약 계나가 6년 동안 한국을 떠나지 않고 호주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한 만큼 한국에서 무엇인가를 했다면, 한국에서 살아남을 정도가 될까, 혹은 한국에서 행복해졌을까. 아니 또 오해는 마시라. 나는 당신이 이 모양으로 사는 것은, 단지 당신이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라는 엿같은 소리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무슨 차이가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하는 말이다. 한국에서 돈없는 노동자로 사는 것과 호주에서 이주노동자로 사는 것의 차이.

 

아주 간략하게 말해서 그것이 큰 차이가 있어요, 라는 것이 이 소설의 태도이고, 그것은 사실 큰 차이가 없다, 중요한 무엇인가는 바뀌지 않았다, 라고 말하는 것이 허희 평론가의 말이고, 내가 어느정도 수긍하는 말이다. 적어도 이 소설에서의 계나의 진술을 그대로 믿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는 계나가 행복해질 수 없다고 확신하지는 못하겠다. 어쩌면 행복해질 수도 있겠지.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렇게 얻는 행복이 소설을 읽는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지? 물론 당연하게도 소설 주인공의 행복과 우리의 실제 행복은 크게 상관이 없다. 나는 그것을 새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나는 소설의 행복이 우리의 행복과 일치할 수도 있다는 환상을 깨지 않기 위해 소설은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그 환상이 깨지는 것을 막기 위해 소설은 어떻게든 모든 가능한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 소설이 1인칭으로 말을 건네는 형식을 취하는 것도 그러한 강구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인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계나가 말을 건네는 이들은 누구일까. 호주에 이미 도착한 이들은 아닐테고, 아직 한국에 남아있는 은혜나 미연이나, 혹은 동생 예나와 같은 이들일 것이다. 그런데 이들에게 이 말은 전해지고 있을까. 이렇게 말하면서? "시드니에서 매일 크고 작은 모험을 겪고 있어서 그런가, 옛날 친구들이 좀 얄팍해 보이더라. 내가 걔들보다 더 나은 선택을 했다거나, 내 미래가 더 밝을 거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호주에 올 일 있으면 연락해, 나 무지 전망 좋고 겁나 큰 아파트에서 살아."라며 휴대폰 번호와 새로 만든 이메일 주소를 알려 주고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어. 머리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p.121)" 이 말들은, 그러니까 이 소설은 누구에게 전달될 수 있을까. 혹시 계나와 미연이와 은혜가 벌이는 작은 파티에서 주문한 배달음식을 30분 안에 배달해주는, 신용카드를 양손으로 받고 90도로 인사하는 배달원에게?)

 

허희 평론가는 (그래도 평론가의 예의를 담아) 계나가 (지금과 같은 태도라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고 진지하게 충고해주었지만 나는 조금 더 냉소적으로 말한다. 그녀가 행복하든지, 말든지 나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어졌다. 관심 밖, 아이 돈 케어. 그리고 (주인공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라는) 환상을 깨는 이 소설은 (적어도 나에게는) 실패한 소설이다.

 

 

덧.

어쩌면 이 소설의 의미는 다른 것에 있는 것 아닐까. 예를 들어 '한국이 싫어서'라는 마케팅적인 제목이나, 중편 소설 정도에 적당한 분량을 적당히 편집으로 늘려 '장편소설'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하드커버를 씌워 13,000원에 팔아먹는 자세 말이다. (빨리 술술 읽힌다,라는 평들이 많은데, 내가 생각하기에 여러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결국 '짧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결국 말을 건네고자 하는 젊은 청춘들에게,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어쩌면 이 소설의 내밀한 '태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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