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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인, 양우석

Ending Credit | 2013. 12. 19. 17:17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일부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영화 <변호인>을 보았다. 긴 글을 쓰기는 생각이 짧아 어려울 것 같고, 짧은 글로 대신하고 싶다. 영화 <변호인>은 굳이 따지자면 사건 중심보다는 캐릭터 중심의 영화로 보아야 할 것 같고, 그 중심에는 변호인 송우석(송강호)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보면 사실 이 영화 <변호인>은 조금 이상하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이 영화는 그 캐릭터를 양분하여 전후반부로 나누어 배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영화의 전반부 내내 이 송우석이 정겨운, 밉지 않은 속물임을 보여주려 애쓴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애를 써서 영화의 전반부에 캐릭터를 구축한 다음, 영화는 후반부에 그 애써 구축된 캐릭터를 이제 지우려고 노력한다. 물론 이것은 대중영화의 공식에 그렇게 크게 어긋난다고는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영화의 내내 유지되는 캐릭터들도 있지만, 이렇게 캐릭터 중심의 영화일 경우 중간에 캐릭터가 탈바꿈하는 것은 흔한 경우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이것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캐릭터를 쌓으려는 노력에 비하여 탈바꿈의 고리가 너무 헐겁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의 캐릭터 송우석이 변하는 순간은 너무나도 짧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이는 일차적으로는 어떤 태도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스탠스의 문제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다. 영화의 전반부에 보여지는 송우석이라는 캐릭터는 전형적인 자수성가 스타일이다. 모든 것은 노력으로 가능하고, 누군가의 실패는 그들의 포기에 따른 것일 뿐이라는 식의 접근. 그래서 그는 고교동창 기자(이성민)와 싸울 때에도 데모하는 학생들에게 냉소적인 언사를 퍼붓는다. 단지 공부하기 싫어서 저러는 것 아닌가, 노력하기 싫으니 다른 방식으로 무엇인가를 얻으려는 나약한 태도일 뿐이지,같은 식의 말들. 이렇게 어떤 태도와 정치적인 스탠스가 뒤섞여 있는 이러한 모습에서 그 태도는 여전히 후반부에도 남아있다. 포기하지 않겠다는 그 자세는 어떻게든 국밥집 아들 진우(임시완)에 대한 진실을 밝히고 무죄방면 시키고야 말겠다는 고집으로 이어진다. 다만 이 과정에서 그의 어떤 정치적인 스탠스가 바뀌었는데(혹은 정치적인 스탠스가 생겼는데), 이는 어쩌면 앞의 질문과도 연관된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즉 태도는 바뀔 수 없어도, 어떤 정치적인 스탠스가 바뀔, 혹은 생겨날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라는 믿음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사실 정치적인 스탠스의 문제라기 보다는 태도, 혹은 상식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예를 들어 인간을 고문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정치와 하등 상관이 없다. 그것에는 진보도 보수도 없다. 그것은 도리어 어떤 태도에 가까운 것이고, 송우석이 눈을 뜨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도 정치와 전혀 관계가 없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이러면 안되는 거잖아요?"). 그러므로 송우석은 사실 변화라기보다는 각성에 가깝고, 그런 각성은 통상 느린 것이라기보다는 즉각적이다. 그러므로 이는 각성이다, 그리고 그런 각성은 (기본 상식을 갖춘자라면) 누구에게나 가능할 수 있다,라는 것이 이 영화의 어떤 태도인 것 같다.  


그래도 누군가는 끈덕지게 물을 것이다. 정말 그것이 가능합니까, 이것은 영화니까 사람이 그렇게도 변하는(각성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실제는 어렵지 않겠어요? 물론 이것에는 당연히 준비된 대답이 있다. 아니, 이건 단지 영화가 아니예요, 그렇게 변한 사람이 실제로 있거든요. 그런데 이 준비된 대답은 쉬워 보이지만, 그렇게 쉬운 것만은 아니다. 어쩌면 여기에 이 영화가 의도한(혹은 의도하지 않은) 이차적인 질문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인데, 우리가 송우석이라는 캐릭터로 인간 노무현을 환기하려면 반드시 한 가지 질문에 답할 각오를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화가 끝난 이후의 이야기, 즉 영화의 2부를 볼 준비가 되었습니까,라는 질문이다. 이 영화의 끝, 그러니까 99명의 변호인이 변호해 준 송우석이라는 인물에 대한 감동을 배가시키기 위해서만 인간 노무현을 떠올리는 것은 (정말 미안한 얘기지만) 일종의 자기기만이나 자기위안에 가깝다. 우리가 노무현을 떠올리는 순간 우리는 그 나머지에 대한 씁쓸함을 견딜 각오를 어떻게든 해야만 한다. 아니, 나는 그의 인간으로서의 마지막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어떤 것들은 그것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송우석이 박종철 군의 죽음 앞에서 시위대를 이끌며, 추모는 원래 조용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때(그의 말과는 달리 박종철의 죽음은 결코 조용한 것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의 죽음도 마찬가지였다), 혹은 99명의 변호사들이 그를 지키기 위해 한명한명 일어설 때, 글을 쓸 수도, 책을 읽을 수도 없다고 이야기하던, 아무도 가까이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그의 마지막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마지막만은 아니다.

나는 그것을 송우석이라는 캐릭터보다는 조금은 우회해서 찾고 싶은데, 예를 들어 굳이 이야기하자면 이 영화에서 악역이라고 불릴 수 있는 캐릭터들이다. 예를 들어 악질적인 고문 경찰 차동영(곽도원)이나 건설사 대표의 아들(류수영)과 같은 도리어 어떤 신념을 가졌기 때문에 무서워보이는 캐릭터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송우석의 앞과 뒤만을 보고 있다. 과거에 공산주의자들, 그러니까 빨갱이들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생각하는 차동영은 과거만을 보고 있고, 민주주의를 하고 싶지만, 현재는 아직 그 역량이 모자라다고 말하는 건설사 대표 아들은 미래만을 보고 있다. 즉 그들은 과거에 얽혀 있거나, 미래의 무엇인가를 보기 위해서 현재의 인간을 기꺼이 희생시키고자 한다. 그것을 국가의 논리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거의 무엇 때문에, 혹은 미래의 무엇 때문에 현재의 국민은 희생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그것이 (왜곡된) 국가이다. 그리고 거기에 송우석은 일갈한다. 국가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국가는 국민입니다! 현재 눈 앞에 있는 이 푸른 수의를 입은 국민을 보라는 말이다. 그러나 어떤 만족을 위해, 노무현이라는 실제의 기표를 환기하는 순간, 우리는 이 일갈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덧씌워야만 한다. 누군가의 살려달라는 외침에 내가 포함된, 그가 수장이었던 우리의 정부는 무엇이라고 답했나. 비디오 앞에서 눈이 가려진 채로 살려달라고 말하던 그를 보았나, 보지 않았나. 그리고 우리는 그에 대한 대답을 생각하면서 한없이 쓸씁해진다. 국가가 국민이라고 답하던 그는 어디로 갔을까. 아니, 이것은 단지 영화적인 기만에 불과한 것일까.

<씨네 21>에 실렸던 이 영화 <변호인>에 대한 정한석의 글은 노무현의 마지막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처음 영화를 보기 전에 이 글을 읽었을 때는 왜 그것으로부터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일까, 의아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정한석은 말한다. "<26년>과 <그때 그사람들>은 저들이 반드시 전두환과 박정희라는 인물 자체로 영화 안에서 존재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변호인>은 영화 안에는 송우석이 있고 그 바깥이나 위에 노무현이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중요한 건 바깥이나 위에 노무현이 있다는 것이다." 영화 안의 인물과 바깥의 인물. 이 영화는 그 간극을 줄이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그것을 그대로 둔 채, 그것을 보는 이가 알아서 조절하도록 떠넘긴다(예를 들어 이 영화는 "이 영화는 실제의 인물과 사건을 배경으로 했지만, 허구입니다."라는 식의 상당히 모호한 자막으로 시작한다). 그러므로 누군가는 그 간극을 극도로 줄여 현실에 대한 분노의 에너지로 응축시킬 것이고, 누군가는 그 씁쓸함에 괴로워하며 소주 한 잔을 들이킬 것이고, 누군가는 비웃으면서 평점 1점의 테러를 시도할 것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이 간극으로부터 빚어진 결과이고, 정한석의 말대로 이 영화의 운명이다.

나는 그 결과에 대해 관심이 없지만, 다만 그 간극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그것이 이 씁쓸함에 맞서는 작은 내 방식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이 간극에 대한 어떤 실마리가 혹시 각성이라는 구조에 의해 빚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했지만 언뜻 보면 변화하는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영화는 결국 각성에 대해 말하고 있고, 그 이면에는 여전히 변화하지 않는 것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포기하지 않겠다, 끝까지 노력하겠다라는 송우석의, 혹은 노무현의 태도이다. 그런데 어쩌면 포기하지 않겠다던 그 태도가 그의 비극에도 관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가 어쩌면 자기자신에 대해 얼마간 포기했다면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을지도 모르지 않을까. 답은 어렵고, 짧은 글을 쓰겠다고 했으니 이제 글을 끝내야 할 것 같다. 다만 그저 마지막에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우리는, 아니 나는 변해버린 자기자신을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는가. 우리는 여전히 환멸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타인에 대한 환멸이든, 자신에 대한 환멸이든(그러므로 도리어 나는 영화의 처음을 생각한다. 선배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기 위해 방 앞에서 머뭇거리며 박카스를 하나 꺼내 꿀꺽 마시던 그의 모습을 말이다. 나중에 그에게도 다른 의미에서의 박카스가 필요했다).


덧.
짧은 글로 대신하겠다,고 처음에 시작했는데, 필요이상으로 긴 글이 되어버렸다. 뒷 부분은 그저 씁쓸함에 대한 한탄일 뿐이다.

아..그리고 한 마디 더 덧붙여두자면 이 영화가 올해 조금만 더 빨리 개봉했더라면 상당수 영화제의 남우주연상도 어쩔 수 없이 또 송강호에게 줘야만 했을 것 같다.


- 2013년 12월, 메가박스 센트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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