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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인력거, 이성규

Ending Credit | 2012. 1. 3. 16:55 | Posted by 맥거핀.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글을 쓴다. 기본적으로 좋은 글이란, 좋은 리뷰란 글쓴이의 관점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글일 것이다. 그리고 좋지 않은 리뷰들의 공통된 특징 중의 하나는, 글쓴이의 생각이 왔다갔다하거나 백과사전적인 정보만이 가득한 리뷰일 것이다. 물론 항상 자기 눈에 눈곱은 보지 못하는 법이어서, 말은 이렇게 해도, 내 지나간 리뷰들을 보면, 뭐 이런 소리만을 잔뜩 써놨지 하는 리뷰들이 부지기수다. "지금 다시 쓰라고 하면 더 잘 쓸 수 있을텐데"라고 하면 이야기가 복잡해질테니 더 이상의 생각은 관두기로 하자. 아무튼 글을 쓰기 전에는 대체로 한 두 가지의 생각은 정리하고 쓰는 편인데, 이번에는 정말 잘 모르겠다.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인지 생각이 복잡해진다.


이성규 감독의 <오래된 인력거>는 영화의 시작과 끝에 비슷한 장면을 붙여두고 있다. 이 영화는 인도 캘커타의 인력거꾼 샬림을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취재한 다큐멘터리이다. 그 샬림은 영화의 처음 더 이상 자신을 찍지말라고 화를 낸다. 당신은 나의 친구도 아니고, 나는 더 이상 찍히고 싶지 않다, 당신은 그저 외국인일 뿐이며, 언젠가 돌아갈 사람일 뿐이라고. 그러나 감독은 카메라를 뿌리치는 그를 껴안으며 말한다. 다 이해한다고, 우리는 친구이지 않냐고.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서 병든 아내의 병원비를 내기 위해, 그간 삼륜차를 사기 위해 모아둔 돈을 쓰려고 결심하며 다시 한 번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 이 돈을 이렇게 써야 하다니, 어떻게 모은 이 돈을. 그리고 말한다. 눈물을 흘리고, 힘들어하는 나를 찍지 말라고. 제발 나를 좀 내버려두라고.

이 장면들을 보는 상당수의 관객들은 마음이 복잡했을 것이다. 그 장면들을 앞에 두고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 아마도 그러한 마음들을 감독에게 묻는 관객들이 꽤 있었던 모양이다. 그 마음의 한가지 질문. 왜 제작진은 샬림을 위해 삼륜차를 사주지 않았는가. 감독은 말한다('오래된 인력거 블로그' 제작노트 http://blog.naver.com/report25?Redirect=Log&logNo=150127999834). 제작진은 샬림을 위해 삼륜차를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모았다. 그러나 샬림은 그 돈으로 고향에 집을 지었으며, 우리는 그 결정을 존중한다고. 그리고 덧붙였다. 다큐멘터리는 감성적으로 풀 수 있지만, 온정주의로 풀어서는 안된다. 보다 중요한 것은 샬림 개인의 인생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신분제와 착취구조인 인도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더 나아가 그것이 인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와도 연관되는 문제라는 점을 인식하는 점이라는 것. 이와 관련하여 김영진은 <씨네 21>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835호). "<오래된 인력거>는 이 지점에서 솔직하다. 설령 그것조차 자신들의 윤리적 곤란을 드러냄으로써 정당화하려는 방편으로 삼는다고 비난한다면 할 수 없지만 나는 그렇게는 보지 않았다. (중략) 대체로 우리는 세상의 어두운 그늘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의 불행을 소비하지만 그것에 대해 별다른 도덕적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는 정면으로 그 불편함을 드러낸다."

글쎄. 이 영화가 그 균열을 지그시 응시하고 드러내보임으로써,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어떤 윤리적 불편함을 안겼다는 지적에는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그것(불편함)이 과연 충분했는가라는 질문에는 조금 의문이 간다. 김영진은 "이 당당함이 제3세계 사람들의 삶을 구경거리화하는 대다수 인습적인 텔레비전 카메라의 굴레를 벗어나게 해준다. (중략) 카메라로 그의 삶은 보편적 휴머니즘이라는 틀 안에, 공감과 연민과 위로의 틀로 가장한 수직적인 시선의 압제에 굴하지 않는다."라고 했지만, 그것을 소비하는 우리들은 과연 이 영화를 본 이후에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감독이 말한 '신분제와 착취구조에 대한 관심, 그것이 우리 문제임을 인식하는 것'이 어떤 식으로 가능할 것인가. 불행한 인도의 인력거꾼들을 위해 모금활동을 하는 것, 아니면 혹시라도 있을 인도여행에서 그저 낯선 관광객이 되어 인력거를 타지 않는 것(그러나 영화에 따르면 이 인력거도 보기 안좋다는 이유로 인도 정부에 의해 곧 금지될 예정이다), 인도 정부에 카스트제도의 폐지를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이는 것? 물론 이는 농담이면서, 농담이 아니다. 우리는 어쩌면 이런 영화를 도리어 그런 불편함을 사라지게 하는 진통제로서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도의 카스트제도, 그리고 그와 연관이 있는 가장 원시적인 노동이자 비인간화된 노동처럼 보이는 인력거(물론 아닐 수도 있다. 우리는 상상할 수 있는, 때로는 상상이상의 모든 것을 대상화하니까),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지독한 가난, 아무리 벗어나고 싶어도 대를 이어 대물림되는 지독한 가난. 우리는 사실 대부분 그런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즉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예상할 수 있는 어떤 장면들은 영화 속에서 빠짐없이 재생된다. 그것에는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떤 새로움의 차이는 없다. 그런 상황에서 그 영화를 소비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일종의 면죄부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 그래도 이런 영화 봤으니 되었어, 왠지 마음의 짐을 조금 덜한 것 같잖아, 이런 면죄부. (<워낭소리>가 결국 어떤 식으로 관객에게 소비되었는지를 이와 연관하여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즉 이 영화의 어떤 아이러니한 점은, 앞과 뒤에 샬림이 자신을 찍지 말라고 화를 내는 장면을 붙이면서도, 그 모든 장면들, 즉 샬림이 찍힌 모든 장면들을 결국 영화로 만들어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단순하게 말해서, 찍지 말라고 항변하는 샬림의 장면을 보고 있다는 이 사실 자체가, 도리어 역으로 그 화면을 보는 사람들의 윤리적 면죄부를 강화하는 효과를 낳고 있지 않을까. 이 영화는 거기에서 조금 더 나아갔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즉 관객을 조금 더 몰아붙였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김영진이 <하얀 정글>에 한 표현을 그대로 가져와 본다면, 이 영화는 어쩌면 "결국에는 관객을 정면으로 공격해서 항복을 받아내려는 의지와 결기는 없는 상태"가 아닐까.  그러므로 궁금해지는 것은 사실 영화의 마지막 이후이다. 자신을 찍지말라고 카메라를 뿌리치는 샬림을 어떻게 설득하여 이 영화는 탄생되었는가, 그리고 그 이후 샬림의 삶은 어떻게 되었는가. 영화는 그러나 어떤 설명 없이 약간은 급한 봉합을 한다는 인상이 짙다. 샬림은 그 이후로도 가족 때문에 길을 잃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나레이션을 끝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한편으로는 이 영화에 있어서 나레이션의 역효과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외수의 나레이션은 지나치게 설명적이고, 친절하다. 그래서 때로 관객의 감정을 미리 예단한다는 느낌을 준다. 즉 내가 판단하기 전에 나레이션이 판단을 내려준다. 이것은 TV 다큐멘터리를 오래해온 감독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의 미덕은 여러 군데에 있다. 김영진의 말대로 이 영화의 카메라는 단순히 구경거리로 그들을 비추려고 하지 않으며, 단순히 수직적이고 타자적인 관점의 카메라로 기능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을 보면서 예를 들어, 외국인을 속여서 물건을 파는 장면을 보면서 도리어 통쾌함을 느끼게 되고, 인력거가 단순히 운송 수단이나 가난의 문제에만 연관된 것이 아니라, 인도 사회의 계층 문제와 착취구조의 문제와도 연관된 것임을 이해하게 되며, 샬림의 영화 속 낙관적인 태도들이(감독은 샬림이 인도에서 만난 사람 중 가장 친절했다고 이야기한다), 자신의 어려운 상황을 넘어서려는 결기의 다른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게 된다. 그리고 가장 마법같은 순간이 있다. 영화 속 샬림의 동료이자, 샬림보다 더한 영화적 인물인, 영화의 또다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마노즈를 잡은 한 장면. (샬림이 밝음으로 결기를 보여준다면, 마노즈는 반대로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침묵으로서 결기를 보여준다. 제작노트에 보면 이 장면은 마노즈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찍었다고 한다.) 마노즈는 어렸을 때 고향에서 천민이었던 아버지가 카스트 전쟁 때 지주에게 맞아 죽은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그 지주들을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샬림의 질문에 대답한다. 도망칠 것이라고. 그리고 그러면서 카메라를 지그시 응시하는데, 카메라에 잡힌 그 눈은 공포에 질린, 그리고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힌 눈이다. 이어지는 컷은 10년 전 당시의 마노즈를 우연히 촬영한 컷. 감독은 10년 전 카스트 전쟁을 촬영하면서 어린 마노즈를 우연히 촬영했었고, 오랜 후에 마노즈의 이야기를 듣고 이 컷을 찾아낸 것. 마노즈의 그 눈은 온연히 바로 그 어린아이의 눈이다.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어도 그 속에 자리잡고 있는 공포와 분노를 오롯이 잡아낸 이 영화라는 마법. 오로지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 대상만을 오랫동안 응시하고 기다릴 수 있는 영화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그 마법.

그래서 2시간도 채 안되는 영화는 때로 그 천배, 만배의 시간을 우리에게 경험하도록 한다. 물론 그 시간을 만들어내는 것은 감독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우리 자신이다.



- 2011년 12월, 인디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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