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숏컷, 로버트 알트만

Ending Credit | 2011. 12. 5. 16:34 | Posted by 맥거핀.




상영시간이 짧아도 매우 지루한 영화가 있고, 상영시간이 길어도 꽤 흥미로운 영화가 있다. 영화 <숏 컷(Short Cuts)>이 바로 후자의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영화는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여러개를 오려붙인, 미국 LA의 아홉 커플(여덟 쌍의 부부와 한 쌍의 모녀)이 거의 동등한 비중을 가지고 등장하는 3시간 7분 짜리 영화이다. 이 영화는 그 제목이 의미하는 바대로 무수한 숏 컷들의 끊임없는 이어붙이기로 영화가 전개되는데,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이 영화는 고유의 리듬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며, 동시에 그 모든 등장인물들을 관객의 뇌리에 고스란히 남겨놓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별 특이한 방법들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는 어떠한 플래시백이나 과도한 점프를 사용하지 않으며(즉 영화는 이 아홉 커플의 현재의 시간을 무심히 쫓아간다. 다만, 회상씬은 없지만, 등장인물의 대화로서 이루어지는 회상은 있다. 뒤에 또 이야기하겠지만, 이 대화들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를 보는 것도 흥미롭다), 과도한 카메라워크를 허용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조금 뒤로 물러서서, 이들에 대한 차가운 관찰자적 시선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보다는 이 영화의 놀라운 리듬감은 그 숏 컷과 숏 컷들이 붙여지는 순간에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몇 가지 장면들을 예로 들 수 있다. 웨이트리스 도린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피니건 부부의 어린아들 케이시를 차로 친다. 아이는 별로 다친 것 같지 않지만, 병원에 데려다주겠다는 도린을 뒤로 하고 집에 돌아오는데, 집에 돌아와 갑자기 급격한 이상 증세를 보이며 피니건 부인이 따라준 우유를 마시지 않고 긴 잠에 빠진다. 컵에 가득 따라져 있는 우유를 클로즈업하며 컷의 마무리. 컷의 연결은 TV속 재난에 대한 위험을 이야기하는 공익(보험?)광고로 이어진다. 화면 속 우유컵이 탁자에서 쓰러지며 우유가 바닥에 쏟아진다. 이 화면은 도린의 집에서 도린의 남편 얼이 보고 있는 것인데, 얼은 아이에게 큰 사고를 입힐 뻔했다는 도린의 말을 시큰둥하게 들으며, 오로지 그것을 경찰이나 누군가가 보지 않았다는 것에만 안도한다. 또다른 장면. 첼리스트 여자가 농구를 한참 한 다음 옷을 모두 벗더니 갑자기 수영장에 뛰어든다. 그리고 마치 죽은 듯이 물에 떠 있다. 그것을 발코니에서 바라보는 딸(첼리스트)과 사이가 좋지 않은 재즈여가수 어머니는 그녀에게 뻔한 수법(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수법)을 쓰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을 몰래 숨어서 지켜보는 수영장 청소부 제리가 있다. 그리고 컷의 연결. 한 여자가 나체로 물 속에 죽어 있다. 그리고 이것을 계곡에 낚시를 하러간 스튜어트 일행이 발견한다. 이 장면들은 이 영화의 대표적인 연결 장면들이다. 

예를 든 첫번째 장면과 두번째 장면은 모두 시각적으로 장면이 연결된다. 피니건 부인이 따라준 우유컵과 광고 속 가득담긴 우유컵, 그리고 수영장에 죽은 듯이 떠있는 나신의 여자와 죽어서 계곡에 떠있는 나신의 여자 시체. 그러나 이 연결들이 단순한 시각적인 연결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의미적으로 볼 때 이 장면들은 이 등장인물들의 망가진 영혼들을 드러내주는 역할을 한다. 사고를 당한 케이시의 컷 이후에 곧바로 그에게 해를 입힌 도린과 얼의 컷을 붙임으로써, 이들, 특히 얼의 추악한 진짜 속내를 드러내보인다. 두번째 장면도 마찬가지다. 수영장에 들어간 여자와 그녀에게 전혀 관심이 없이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어머니, 그에 이어지는 컷은 계곡에서 나신의 시체를 발견한 낚시꾼들이다. 이들의 행동은 어떨까. 그것은 익히 예상이 가능하다. 이들은 이 시체를 물에서 꺼낸다거나, 경찰에 신고할 생각을 하지 않고, 태연하게 술을 마시고, 그 물에서 물고기를 잡는다(즉 관심이 없다). 그러나 이 영화의 놀라운 편집의 예술은 이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 장면들은 모두 의미망 아래 층위에서 작동하며 일종의 복선의 구실을 함으로써 표층의 의미망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첫번째 장면에서 우유는 광고 속에서 모두 바닥에 쏟아진다. 이것은 결국 이 영화에서 케이시가 처하게 될 운명을 암시한다. 두번째 장면에서 수영장에서 나신으로 시체처럼 떠 있는 여자 첼리스트, 그리고 이것을 몰래 훔쳐보고 있는 제리. 이것은 이 여자 첼리스트가 닥치게 될 앞으로의 일을 말해줌과 동시에, 제리의 미래까지도 보여준다. 동시에 그 계곡 속의 여자에게 닥쳤던 범죄(성폭행)가 무엇이었는지 관객이 짐작할 수 있도록 한다.

두 가지 장면을 예로 들었지만, 이 영화에서의 무수한 컷과 컷의 연결에는 이러한 장면들이 많다. 즉 이 컷의 연결은 세 가지 층위에서 작동을 하는데, 그것은 시각적인 컷과 컷의 연결이 하나고, 그것을 이야기하는 역(逆)의 의미망 발생이 하나고, 그 등장인물들의 내면에 잠재된 욕구와 미래의 운명을 암시하는 연결이 하나다. 이 영화 <숏 컷>의 지속적인 리듬과 의미의 발생에는 바로 이 컷과 컷의 연결, 즉 로버트 알트만의 놀라운 편집 감각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실로 정교한 기술이며, 놀라운 감각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이렇게 짧은 컷으로 이루어진, 그리고 많은 등장인물들이 등장하는 영화의 교과서같은 편집이며, 전범같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이후에 이 영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말해지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매그놀리아>도 결코 도달하지 못한 리듬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사실 개인적으로는 두 영화의 유사성은 마지막의 예기치못한 재난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든다.


영화 <매그놀리아>에서 마지막 예기치 않은 개구리비가 쏟아졌듯이 이 영화에서는 마지막 예기치 않은 지진이 발생한다. 어쩌면 예기된 재난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장률의 <중경>과 같이 폭발 직전의 욕망들이 끊임없이 누적된다는 인상이 있다. 아무튼 예기되었건, 예기치 않았건 간에 재난 그 자체보다는 재난 이후의 모습이 더 흥미롭다. 처음 이 지진이 발생할 때는, 시작부터 성적타락과 도덕적 해이가 가득한 추악하고 위선적인 모습만을 보여주었던 등장인물들에게 일종의 징벌로서 이 지진이 발생했다고 생각하게 되지만, 이 지진은 그들에게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들에게 지진은 진도 7인지, 진도 8인지에 대해 논쟁하게 하는 한낱 흥미거리일 뿐이며, 도리어 어떤 범죄를 덮어주는 좋은 기회일 뿐이다. 그것은 아마도 이 지진에 대한 리포팅을 영화 내내 가장 엉망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헬기조종사 스토미가 하는 것으로 상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어쩌면 이들의 존재가 재앙 그 자체는 아니었을까. 영화의 시작은 유럽 파리떼의 습격을 리포팅하는 TV뉴스와 그들을 박멸하기 위해 헬리콥터로 뿌려지는 살충제들이다.  이 TV뉴스는 과장되어 있으며, 이들(파리)의 박멸을 일종의 전쟁과 거의 같은 급에 놓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파리와의 전쟁을 영화 시작부분에 이야기하면서도, 영화 중간에 파리 코빼기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박멸하여야 될 파리는 무엇일까. 이 등장인물들의 집 지붕으로 쏟아지는 살충제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들 자체가 박멸되어야 할, 즉 유럽에서 온 재앙(미국인들)은 아니었을까. 영화 속 살충제를 뿌리고 차례로 내려앉은 헬리콥터들이 마치 파리처럼 보였던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영화 내내 수많은 대사를 지껄인다. 때로는 너무 많이 지껄여대 이제 그만 좀 닥치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그 수많은 대사들은 거의 대부분 아무 의미가 없거나 음담패설이거나, 누군가를 욕하는 말들일 뿐이다. 발화는 끊임없이 이루어지지만, 그것은 서로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화가 아니다. (이것은 그들이 자주 보는 TV를 연상시킨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에게는 유달리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TV를 보는 씬들이 자주 배당된다. 그들이 무엇인가 바보 같은 대사를 하거나 바보 같은 행동을 저지를 때면 어김없이 TV가 틀어져 있다. TV는 과장되어 있고(파리에 대한 리포팅처럼), 거의 대부분의 경우 진실을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도리어 아이들을 상대로 한 만화들이다. 앞에서도 말한 컷과 컷의 연결에서 등장인물들의 위선적인 행동을 보여준 이후 연결되는 컷들이 TV 속 만화(코믹스)인 경우들이 있는데, 그것은 이유가 있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입장만을 이야기하며 과거의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플래시백은 없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영화에는 등장인물들의 대화로만 이루어지는 회상이 있는데, 이 회상은 반드시 말하는 자의 숨김이나 듣는 자의 외면으로 끝난다. 즉 회상은 결코 과거에 대한 반성을 불러오지 않는다. 그 과거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그 불가해했던 과거를 애써 외면함으로서 현재의 추악한 자신으로만 남는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누군가의 죽음을 불러일으킨다.

사실 영화 속 가장 불가해한 일은 파리떼의 습격도 지진도 아닌, 케이시의 죽음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지만, 끝내 케이시는 조금은 어리둥절한 죽음에 이른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삶은 그렇게 불가해한 일로 가득차 있고 역설적인 일로 가득하다. 이 영화는 앞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역(逆)의 컷으로 계속 이어진다. 또 영화 전체적으로 보아도 그러한 면이 있는데, 영화 속 위선으로 가득한 병든 영혼들 속에서도 그나마 가장 긍정적으로 그려지는 사람을 찾자면, 웨이트리스 도린이다. 그러나 이 도린은 결국 영화 속에서 가장 중대한 잘못(케이시의 죽음)을 저지른 사람이기도 하다. 이것은 이 불가해한 역설로 가득한 세상을 보여준다. 그것은 전체적인 측면에서도 그렇고, 각 등장인물들 하나하나에서도 그렇다. 대부분의 인간은 겉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동시에 위선과 위악을 가득 담은 존재들이기도 하다. 그들은 결코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다. 현재만을 보고, 현재만을 생각할 뿐이다. 그것을 이 영화 <숏 컷>은 어떠한 회상도 없이 느리게 그들을 관찰하면서 붙여나간다.

우리는 단지 현재의 '숏 컷'만을 연기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어떻게 붙여질지는 우리 자신도 모른다.




- 2011년 11월, 서울아트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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